지나칠 정도로 선명하게 도드라졌던 감각이 꿈의 경계를 넘어 흘러넘치는 순간, 한해는 눈을 떴다. 8화꿈이 아니다. 그리고 수진도 아니다.
한해는 현실에서 다른 여자, 소월을 안고 있었다.
“어…….”
놀란 그가 몸을 빼려고 하자,
“잠깐만요. 잠깐만 더.”
그의 목을 감고 있던 소월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깨자마자 그러면 내가 너무 민망하잖아.”
침대 안에서 듣는 그녀의 목소리는 씩씩한 삼항사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여린 새처럼 들뜨고 촉촉했다.
“죄송합니다. 너무 당황해서.”
일단 몸에 힘을 뺀 한해는 이불 속 자신의 몸이 휑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혹시 우리…….”
“쉿.”
소월의 손가락이 그의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그는 눈에 힘을 주고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내가 생각하는 그런 일이 있었냐고.
좁은 창으로 스며든, 별빛 달빛이 뒤섞인 푸름 속에서 소월의 눈이 반짝.
그녀는 천천히 미소 지었다.
저 미소는? 맙소사…… 한해는 한숨을 삼켰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없다. 아닌 것 같은데…….
“오빠. 왜 그렇게 미안한 표정이에요? 잘못한 것도 없는데?”
소월이 그의 가슴에 머리를 묻었다.
“나 사실 좋아하고 있었거든.”
한해는 아직 깨지 않은 술기운에 머리가 팽팽 도는 기분이었다.
이러려고 마신 술이 아닌데.
정말 육체적인 관계가 있었나?
속 시원히 대답해주지 않는 그녀를 추궁하기도 어색했다.
“너무 티낸다. 오빠 지금 엄청 당황스러운 거. 좋아한다는 말이 그렇게 싫은가?”
소월의 음성이 쓸쓸하게 주저앉았고, 한해는 당황했다.
“내가 미안해해야 하나?”
“아닙니다. 삼항사 님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바보 같은 소리.”
소월의 웃음소리가 어둠 속에 통통 울렸다.
“나 그렇게 질척거리는 스타일 아니에요. 이런 해프닝을 이유로 사귀자고 고집부리고 싶지도 않아.”
술도 덜 깬 상태에서 대체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막막했던 한해는 어색하지 않게 조곤조곤 속삭여주는 소월에게 고맙기도, 미안하기도 했다.
“다만 노력할 거야. 오빠 마음을 열기 위해서. 몸은 보다시피 충분히 가까워졌고…….”
그녀는 한해의 가슴에 도장을 찍듯 입을 맞추었다.
“나, 잘못한 거 아니죠? 오빠의 그 대단한 수진 씨도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었으니. 임자 있는 남자를 빼앗으려고 집에 데려온 것도 아니고. 작정하고 이런 상황을 만든 것도 아니고, 난 그저…….”
한해는 참고 또 참았던 한숨을, 하아아 슬그머니 풀어주었다.
“후회해요?”
“후회라기보다는…… 자책이랄까요.”
“왜?”
“자기 관리를 못 해서 이런 일이 생겼으니까요.”
육체적인 관계의 유무는 아직도 모르겠으나, 그저 이렇게 여자와 같이 누워 있는 상황 자체가 한해에겐 충격이었다.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함께 눕고 싶은 사람은 오직…….
“오빠. 사람이 말이에요.”
소월은 뱃일로 단단해진 한해의 근육을 탐험하듯 어루만졌다.
“실수도 하고 이렇게 인간적인 데도 있고 그래야 더 매력적인 법이에요. 자기 관리 완벽한 사람, 매력 없어.”
“저는 완벽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한해는 일어나려고 했고, 소월이 그의 팔을 부드럽게 잡았다.
“목말라요?”
“아니…… 네. 목도 마르지만 옷을 좀 입어야 할 것 같아서.”
당황한 한해의 모습을 보는 소월의 입가에 미소가 스몄다.
배에선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야. 허둥지둥, 귀여워.
“옷 입고 그다음엔? 집에 가려고?”
“아무래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침대도 좁고 삼항사님도 불편할 겁니다.”
“나 그냥 안고만 있을 테니깐 자고 가요.”
한해는 입술을 물었다. 그의 귓가에 또 작은 새가 지저귀었다.
“난 하나도 안 불편했어요.”
“저는…….”
.
.
.
“미안해요. 불편해요.”
신혼 첫날밤의 신부는 결국 새 신랑의 손길을 밀어냈다.
강의 미간이 찌그러졌다.
“불편? 몸이 안 좋은가?”
“마음이…… 불편해요.”
“그래. 오늘 결혼식치고는 이런 저런 일이 많이 있긴 했지. 하지만 이제 잘해보자고 하지 않았나?”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결심한 대로 바뀌지 않잖아요.”
“나는 그래.”
“저는 안 그래요.”
“아직도, 한해 형 때문인가?”
수진은 망설임의 늪에 빠졌다.
솔직히 말하자니 강의 화를 북돋을 거 같고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진퇴양난이라는 말이 꼭 맞는 상황이었다.
침대 앞에 마주 선 채로, 신랑 신부는 다가서지도 멀어지지도 못하고 있었다.
“한해 형은 이미 다른 여자와 알콩달콩 지내고 있는데. 정작 오늘 결혼한 너는…….”
“잠깐만요. 한해 오빠를 못 잊어서 이러는 게 아니에요.”
“아직도 나한테 화가 났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시간이 필요한 거라고 해두죠.”
강의 미간이 더 망가지기 전에 수진은 자신의 마음을 설명했다.
“법적으로도 저는 이미 결혼했고 오늘 결혼식도 치렀어요. 저도 잘 알아요. 제 선택이었고 앞으로의 결혼생활에 책임감을 갖고 임할 거예요.”
“고맙군.”
“하지만 오늘은…… 오늘하루만큼은 정말 혼자 있고 싶어요.”
“오늘 하루…….”
“불편한 마음은 오늘 서울에 다 두고 갈게요. 내일 하와이로 가서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신부로 신혼여행을 즐길 거예요.”
강은 지그시 이를 물고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지.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는데.”
“오늘은요. 오늘만.”
“결혼 첫날밤부터 비ㅊ…….”
강은 말을 끊고 입을 닫았다. 그 말을 해버리면 정말 비참해질 것 같아서.
“여기까지는 내가 거짓말을 한 대가라고 생각할게. 기꺼이 치러주지.”
강은 수진을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누가 뭐래도 오늘은 제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날이에요. 그것만큼은 틀림없어요.”
“중요한 날…… 행복한 날이기도 하고?”
수진은 강의 가슴에 머리를 묻은 채로 끄덕였다.
그게 둘의 마지막 접촉이었다.
강은 하나 더 있는 침실에서 따로 잤다.
그의 밤은 괴롭고도 외로웠으나 막막하지는 않았다.
어찌되었건 수진이는 내 여자가 되었어.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렸단 말이지.
수진이가 내일부터 품을 열어주겠다고 말한 것처럼 결국 시간이 해결해줄 거고, 시간은 내 편이야.
머리로는 낙관적인 확신을 거듭하면서도…… 가슴 한 구석에는 멀리서 훅 날아온 화산재 같은 불안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아무도 그녀를 빼앗을 수 없어. 아무도. 설령 그놈이라 할지라도.
*
정말이지 오랜만에 타는 시외버스였다.
배를 탄 뒤에 엄마와 연락하는 경우는 일 년에 서너 번이 고작이었다. 명절이나 생일 정도.
이렇게 직접 몇 시간씩 버스를 타고 찾아간 건 몇 년만.
생각을 정리하기에는 긴 버스 여행만큼 좋은 기회가 없지.
한해는 창에 비스듬히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물리적 변화는 원래대로 돌이킬 수 없지만 화학적 변화는 돌이킬 수 없는 것처럼, 결혼해서 남의 여자가 된 수진을 다시 찾을 방법은 없다.
잊어야 한다. 놓아야 한다. 다신 만나지 말아야 한다.
머리로는 너무나도 잘 알겠는데 마음이라는 녀석, 참 말을 안 듣네.
소월의 얼굴도 불쑥불쑥 존재감을 드러냈다.
아무리 사랑이 새로운 사랑으로 잊힌다 하지만, 아직 수진이의 흔적을 지우지 못한 집에 그녀가 들어오려 한다.
그녀가 싫지는 않았다. 같이 여행만 해도 그 사람을 꽤나 많이 알게 된다는데, 몇 달 동안 먼바다를 떠도는 배에 함께 있었다면 말 다 했지.
항해사로서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도 윤소월이라는 여자는 더할 나위 없이 괜찮고 매력적이었다.
언젠가 그녀에게 이름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본 적 있었다.
“소월이라는 이름은 한자로 달 월이에요. 예쁘죠?”
그러나 한해가 본 그녀는 태양의 빛을 반사하는 게 고작인 달이 아니라 스스로 빛을 내는 별 같았다.
그저 밝기만 한 별이 아니라 웃음소리를 토성의 고리처럼 휘감은…….
“그리고 소는 작을 소가 아니라 웃음 소예요.”
그럼 그렇지. 그녀의 설명을 듣고 한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 이름은요?”
“강한해의 한은 크다 할 때 한. 해는 바다 해예요.”
“딱이네. 그리고 우리말로 하면 강한 해라는 뜻도 되고. 스트롱 썬!”
그때 둘은 갑판에 기대어 차를 마시던 중이었다. 늦은 밤, 망망대해와 반짝이는 별과 달이 벅차게 펼쳐져 있었고.
오직 배에서만 온전히 감상할 수 있는 밤바다의 절경을 묵묵히 보고 있던 소월이 후루룩 차 한 모금을 마시고 중얼거렸다.
“우리가 저기 다 있네.”
“무슨 뜻입니까?”
“저어기 봐요.”
그녀는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밤하늘을 가리켰다.
“커다란 바다, 한해 위에 작은 달 소월이 떠 있잖아요. 달이 웃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고.”
한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시선은 그 옆으로 향했다. 언제나 가장 높이 빛나는 빼어난 별, 수진. 북극성으로.
버스가 종착역에 멈추고 한해는 짐을 챙겨 내렸다.
정류장을 나와서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면서, 몇 번이나 자문했다.
수진이 아니었다면…… 소월을 받아들였을까?
역사에 가정이 없듯이 사랑에도 가정이 없다.
그 일이 아니었다면 그 사람과…… 이런 식의 생각은 모두 쓰잘머리 없는 넋두리일 뿐.
오롯이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사랑도 역사처럼 돌이킬 수 없으니까.
한해는 내딛는 걸음걸음에 일부러 더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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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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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가끔이라도 얼굴 보니 좋구나.”
어머니는 대추차를 내어주었다.
한해는 마치 스님을 친견하는 신도가 된 양 앉은뱅이 소반을 가운데 두고 어머니를 마주했다.
굿을 하지 않을 때 그녀는 평범한 중년 여성의 외모와 옷차림이었다. 표정 역시 온화했다.
“만신님, 잠시 뒤에 예약 손님이 있습니다.”
어머니 밑에서 수련을 하는 새끼 무당이 공손하게 스케줄을 알려주었다.
“조금 기다리라고 해.”
“네, 만신님.”
한해는 집 안을 둘러보았다.
어머니가 머무는 곳은 나날이 좋아졌다. 아버지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만 해도 허름한 상가건물에 있다가 몇 년 전에 넓은 아파트로 옮기더니 지금은 아예 별장 같은 곳을 멋지게 꾸며놓았다.
“사업이라고 해야 하나요? 잘되시나 봐요.”
“찾는 사람이 많아졌지. 서울에서도 많이들 내려온다.”
“좋네요.”
“적적한 것보다야 낫지. 나한테 배우겠다는 애들도 여럿이고.”
아까 스케줄을 전한 새끼무당 외에도 두 명의 젊은 여자들이 집안일을 하고 있었다.
“엄마가 보고 싶어서 온 거냐?”
“네.”
“고맙다.”
그녀는 손을 뻗어 한해의 뺨을 가볍게 감쌌다가 놓았다.
“그런데 우리 아들…….”
그녀는 한해의 눈을 깊이 들어다보았다.
“어찌 예쁜 눈알에 그리도 괴로운 불길이 어른거리누?”
거친 표현으로 툭 던지는 말이었는데 한해는 울컥하는 기분이 되어버렸다.
“좀 괴로운 일이 있었습니다.”
“아비 죽었을 때도 잘 견뎌낸 녀석이니. 어련히 잘 견디겠지만…….”
말은 거칠게 하면서도 안쓰럽게 아들을 보던 그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연애사로구나.”
한해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어머니가 물었다.
“수진이?”
한해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니 어떻게…….”
“어미가 만신이라는 사실을 잊었느냐.”
어머니는 수진이가 아주 어릴 때만 기억하고 있을 텐데. 그 뒤로 내가 수진이를 계속 마음에 두고 있다는 말을 한 적도 없는데.
“제 마음이 보이십니까?”
“나는 마음을 보는 만신이 아니야. 나는 내일을 보지. 네 아빠의 내일을 본 탓에 이렇게 무당이 된 거고.”
“저의 내일은 어떤가요?”
“너의 내일은…….”
그녀는 다시 두 팔을 올려 아들의 얼굴을 감쌌다. 한해는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꼼짝도 하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일종의 전류가 피부를 타고 흘러 다니는 기분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우리 아들은 아주 특별한 팔자를 타고나셨네.”
어머니가 얼굴을 놓아주었다.
“보통 사람들은 한 가지 미래밖에 안 보여. 기껏해야 한두 가지 더 보이지. 그런데 네 미래는 여러 개가 같이 보인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너의 의지에 따라 미래가 바뀐다는 뜻이지. 타고난 운명보다 의지가 더 강한 사람이 가끔 있는데, 너는 유독 더욱 그렇다. 네 아빠는 그렇지 못했지만.”
“어떤 미래들이 보입니까?”
“음…….”
어머니는 기묘한 시선으로 아들의 눈 안쪽을 헤집어 보았다.
“말하지 않는 편이 낫겠어. 지극한 행복과 지독한 불행이 같이 보인다는 말만 해두마.”
행복. 불행. 그런 말은 전혀 한해를 겁주지 못했다. 이미 그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불행과 고통을 견뎌냈으니까. 다만.
“저의 미래에 수진이도 보이나요?”
짧은 질문 속에 숨은 뜻은 이러하다.
저와 수진이의 인연은 끝이 났나요?
“수진이…… 많이 예뻐졌구나.”
어머니가 빙긋이 웃었다.
한해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녀가 있단다. 나의 내일에 그녀의 얼굴이 보인단다.
14년을 기다렸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기다림은 그가 숨 쉬듯 할 수 있는 일.
그녀와의 인연이 끝나지 않았다면, 먼 별빛같이 희미한 가능성을 위해서…….
기다려야지.
“다음에 또 보자, 한해야. 손님이 기다리고 있어서.”
“어머니.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볼게요.”
“그래.”
“바다의 저주는 이제 다 풀린 겁니까?”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해도 고개를 끄덕였다.
.
.
.
서울로 돌아왔을 때는 푸른 어스름이 거리마다 흘러내리고 있었다.
수진의 결혼식 이후 며칠 동안 스며 있던 혼돈과 절망이 씻겨나가는 기분.
한해는 삼성동 고급 주택단지에 위치한 저택으로 들어섰다. 주인이 아니라 집사의 자격으로.
고즈넉한 정원과 연못, 그리고 전용 주차장까지 거느린 대저택. 그곳이 항해가 없을 때 한해가 머무르는 곳이었다.
그는 항해를 나가 있는 몇 달 동안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정원을 가꾸고 집 안을 반짝일 정도로 깨끗이 청소했다.
바다에서 만난 비밀스러운 친구 사토시 씨의 부탁이자 그에게 내건 미션이기도 했다.
그와 함께 떠났던 마지막 항해에서.
“서울 삼성동에 내 명의로 된 집이 있어. 꽤 큰 집이라서 돌보기가 쉽지 않을 거야. 자네가 그 집을 가꿔줬으면 해. 그 대가로 항해가 없을 때 그 집에서 무료로 지내도록 해주지.”
사토시 씨의 제안은 매력적이었지만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다.
“선생님은 어디서 지내시고요?”
“나는 지낼 곳이 여러 군데 있어서 괜찮아.”
“차라리 그 집을 세 주시지 그러세요?”
“그 정도 돈은 나에게 있으나 마나 하다네. 그 집의 의미에 걸맞은 사람이 일 년에 한두 달이라도 머무르면서 지켜줬으면 해.”
“그 집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사토시 씨는 그을리고 주름진 얼굴 전체로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자네가 나의 미션을 다 수행하는 날 알게 될걸세.”
한해는 이번에도 대저택의 집사로서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번에 육지에서 머무를 날은 열흘 남짓 남았다.
그는 고풍스러운 식기들이 가득한 부엌에서 혼자만의 저녁을 차리고 6인용 대리석 식탁에서 제육덮밥을 먹었다.
10분 만에 식사를 마친 그는 탄산수 한 캔을 들고 정원의 벤치에 앉아 밤을 맞이했다.
찌르르 찌르르, 풀벌레 우는 소리는 이곳이 강남 한복판이 아니라 한적한 시골마을 같다는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풀벌레 소리에 화답하듯 핸드폰이 드르륵 떨었다.
-뭐해요? 소월의 메시지였다.
‘그 일’이 벌어진 지 3일 동안 둘은 그 일에 대해서는 약속이라도 한 듯 언급하지 않고 간단히 안부만 주고받았다.
-저녁 먹고 잠시 쉬고 있습니다.-아항. 잠깐 통화할래요? 한해는 물끄러미 핸드폰 액정을 내려다보았다.
며칠 동안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지만 언제까지나 애매한 관계로 지낼 수는 없는 노릇.
안 그래도 전해야 할 말도 있으니 잘됐다 싶었다.
막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데, 다른 알람이 끼어들었다. 인스타그램 댓글 알람이었다.
인스타를 만든 지 1년도 안 되었고, 팔로우를 하는 사람이라 봤자 같이 배를 타는 대여섯 명이 고작. 게시물도 음식이나 풍경 사진을 1주일에 한두 개 올릴까 말까.
한해는 별생각 없이 댓글을 확인했다.
지난번 항해를 끝나고 항구에 들어올 때 찍은 사진에 달린 댓글이었다. 멀리 보이는 인천항의 풍경 아래, 꽤나 긴 댓글은 이렇게 시작했다.
-오빠. 저 수진이에요.
초여름 밤하늘처럼 고요하게 침잠했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