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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뺏겠습니다-7화 (7/92)

7화

신혼여행을 앞둔 신혼부부만큼 행복한 사람들이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과 막 결혼을 했다는 기쁨은 기본이고, 직장에서 당당하게 일주일 이상 장기 휴가를 떠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며 각자 사정에 따른 어느 정도의 사치가 허용되는 기회이기도 하다.

시내 호텔에서 하룻밤 자고 몰디브로 떠날 일정이라면, 신혼 첫날밤의 흥분은 최고조가 되어야 할 터.

그러나 막 호텔방에 올라와서 짐을 푸는 새색시 수진의 얼굴도 새신랑 이강의 얼굴에도 흥분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차분하고 조심스러웠다. 서로가 가진 애정을 확인하려는 분위기가 아니라 서로가 품은 칼날에 다치지 않으려는 분위기였다.

각자 짐을 정리하던 중, 수진의 손길이 멎었다.

“아까 못 물어본 게 있어요.”

강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하자고 잠정 합의했던 거 아니었나?

이런 표정이었으나 수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물었다.

“제가 봤던 뉴스는요? 그때 당신이 저한테 기사를 보여줬잖아요. 저는 그 기사에 한해 오빠의 이름과 나이를 분명히 봤단 말이에요.”

강은 옅은 한숨을 뱉어내고 수진을 마주보았다.

“그래. 맞아. 내가 기사를 보여줬지. 그 기사, 내가 만든 기사야.”

강은 더 이상 감추기를 포기하고 당당하게 털어놓았다.

“뭐라고요?”

“지방 인터넷 신문 기자에게 부탁해서 한해 형의 이름을 끼워 넣었어.”

“하아…… 어떻게 그런 짓을?”

“그만큼 널 원했어.”

강이 거짓말을 한 것도, 해서는 안 될 매수행위를 한 것도 사실이지만…….

“기억나, 수진아?”

지금 눈을 반짝이며 호소하는 그의 간절함도 진짜였다.

“오래전 그날. 나랑 바다 형이 수영 대결을 했을 때. 넌 내가 바다 형을 이기려고 무모하게 멀리 나갔다고 생각하지?”

“아니에요? 당신은 늘 한해 오빠를 이기고 싶어 했잖아요. 수영 말고도 다.”

“아니야. 난 죽고 싶어서 나갔어.”

수진의 가슴이 철렁했다. 죽고 싶었다고? 당신이?

“왜요?”

“괴로운 일들이 많았어. 아버지하고 문제가 특히 심했지. 어쨌든 내 깜냥보다 훨씬 더 멀리 나갔다가 정신을 잃고…… 죽은 줄만 알았지. 그런데 눈을 떠보니 네 얼굴이 내 앞에 있더라. 너의 입술이 느껴지고.”

수진도 그날 일은 정확히 기억했다. 누군가를 인공호흡으로 살려내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니까. 특히 그 사람이 남편이 되는 경우는 더욱더.

“새는 알에서 깨어나고 처음 본 존재를 평생 엄마로 알고 산다고 하잖아. 그때 내가 그런 심정이었어. 난 다시 태어났고…… 새로운 삶의 목적은 너라고 생각했어.”

어미 새의 사랑을 갈구하는 아기 새처럼 애처로운 그의 눈에는 반질반질 눈물이 고여 있었다.

“한해 형을 죽었다고 한 건…… 나는 어차피 형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고, 너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싶었어. 한해 형을 너의 마음에서 완전히 지우고 싶었어.”

“거짓말은 거짓말이고 나를 속…….”

“그래. 너를 속여서 미안해. 내 생명과도 같은 널 갖기 위해 나는 많이 무리했고 잘못했어. 아까 약속한 것처럼 이제 다신 그런 일 없을 거야.”

수진은 흉곽에 있는 공기를 남김없이 한숨에 실어 내보내고 새로운 공기를 마셨다.

“알겠어요.”

“피곤하지?”

강의 음성은 6월의 밤공기처럼 부드러웠다.

이제 더 이상 당신과 각을 세우기 싫다는, 이제 남은 허니문 기간은 달콤하게 보내자는 의미가 그 부드러움 속에 내포되어 있었다.

수진 역시 그 의미를 못 느낄 만큼 둔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도 아닌 한해 오빠의 생사를 속였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괘씸해 화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마음 같아서는 시간을 돌려내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데, 그렇다고 신혼 첫날밤을 계속 화만 내다가 지새울 수도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녀는 겨우 화를 누르며 대답했다.

“그럭저럭 괜찮아요.”

“그래. 수고했어. 우리 친척들 때문에 더 신경 쓰였을 텐데.”

“뭐 다들 저하고는 살아온 환경이 다르시니까.”

시댁 친지들에 대한 솔직한 감정은 아까 내보였다. 정상인 사람들 같지는 않다고.

신혼 첫날밤에 시댁 친지들 흉을 계속 보기도 불편해서 적당히 끊었다.

강은 그녀의 마음을 헤아렸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색시, 착해.”

그의 두 손이 수진의 뺨을 감쌌다.

바로 어젯밤까지도 아무렇지 않았던 그의 손길이 겨울날 예고 없이 몸에 닿은 차가운 감촉처럼 그녀를 놀라게 했다.

이이가 이렇게 뺨을 감싸준 적이 몇 번이었을까? 수백 번? 천 번? 그런데 이제 와서 왜 느낌이 달라졌을까?

하마터면 신혼 첫날 밤 남편의 손을 밀쳐낼 뻔했다.

“하나만 부탁하자.”

“말해요.”

“다시 예전처럼 편하게 대해줄래? 부부 사이에 계속 존댓말을 쓴다는 거, 거리감 느껴지고 싫다.”

“말했잖아요. 아버님의 명령이라고. 당신도 같이 들었으면서.”

“그러지 말고, 우리 둘이 있을 때는 편하게 하자.”

“그러다 실수하고 또 꾸지람 듣고, 그러고 싶지 않아요.”

그건 진짜 이유가 아니었다. 수진은 소극적인 벌이라고 생각했다. 한해 오빠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한 벌로 거리감을 두고 싶었다. 거기서 한 수 더 떠서.

“정 싫으면 아버님한테 말씀드리세요. 요즘 세상에 몇 살 차이도 안 나는 부부끼리 누가 존댓말을 쓰냐고.”

아버님께 반기를 든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 해도, 당신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지.

그녀의 예상대로 그는 지그시 이를 무는 것으로 존칭에 대한 논쟁을 마무리 지었다.

그는 수진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 맞춰주었다. 늘 촉촉했던 그 감촉 역시 하루 사이에 선뜩해져버렸다.

“씻고 올게.”

겨우 네 글자의 말은 손길보다 입맞춤보다 더 선뜩했다.

새신랑이 씻고 나온다는 말은…….

수진은 옅은 한숨을 토해내고 책상에 앉았다. 복잡한 생각에 다시 빠지기 싫어 짐 정리를 마저 했다.

아까 폐백 자리에서 아버님께 받은 용돈 봉투가 열어보지도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5만 원 지폐로 백 장은 들어있을 것 같이 두툼한 봉투를 처음 확인해보았다.

“흡…….”

놀란 수진이 절로 탄성을 토해냈다.

용돈 봉투를 꽉 채운 돈의 단위는 5만 원 짜리가 아니었다. 푸른빛의 100만 원 권 수표가 100장 들어 있었다.

봉투를 건네주며 아버님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여행 가서 맛있는 거나 사 먹어라.”

맛있는 거나 사먹으라고요? 1억으로?

동시에, 그의 부당한 지시들이 귓가에 울렸다.

“너의 할 일은 두 가지다. 건강한 후손을 생산하고, 남편이 집안일 신경 쓰지 않게 해주는 거야. 알겠느냐? 그런 의미에서 이제부터 남편에게는 존칭을 쓰도록 해라.”

구시대적인 덕담이었지만, 수진은 폐백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냥 알았다고 대답하고 말았다.

하지만 지나치게 많은 신혼여행 용돈을 확인한 지금, 설명하기 어려운 수치심이 그녀를 휘감았다.

재벌가의 위엄을 보려주려고 하셨나요? 돈이라면 얼마든 쓰게 해줄 테니, 대를 이을 아들만 낳아라…… 그게 우리 집안에서 너의 유일한 용도다. 이건가요?

강에게 호소한 것처럼, 집안 어른들이 좋아서 한 결혼은 아니었다.

모두가 떠나기만 하는 인생에서 유일하게 그녀의 곁을 지켜주었던 남자와 남은 평생을 함께하겠다는 결심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바다 오빠는 날 떠나지 않았어. 오빠는 나를 기다렸어. 14년 동안…….

“아아.”

그녀는 풍성한 머릿결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쏴아- 강이 샤워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가 멈추면…… 멈추면…….

안 되겠어. 도저히 내키지 않아.

*

“괜찮아요?”

택시에서 내린 소월은 한해의 팔짱을 끼고 걸음을 옮겼다.

그는 실없이 웃을 뿐 말이 없었다. 그래도 걸음은 비틀비틀이나마 옮겨줘서 다행이었다. 걸음도 못 옮길 정도로 취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다.

“오빠. 아직 정신 안 들죠? 오빠 집이 어딘지 몰라서 저희 집으로 데리고 왔어요.”

“미안해요, 삼항사님. 미안해요…….”

미안하다고 하면서도 한해는 피식피식 웃었다.

왜 이렇게 많이 취했냐고 책망도 할 수 없었다. 실컷 마시라고, 오늘만큼은 실컷 울어도 된다고 부추겼던 사람이 바로 그녀였으니까.

“에휴. 진짜 어떡하냐.”

소월은 한숨을 푹푹 쉬며 걸음을 옮겼다.

“오해하지 말아요. 내가 오빠를 어떻게 하려고 술 먹인 건 아니니까.”

“미안해요, 삼항사님. 미안해요…….”

뭘 물어봐도 같은 반응. 어차피 기억도 안 나겠지만 소월은 그래도 미리 얘기해두고 싶었다.

“오빠가 집만 알려줬어도 내가 진짜 집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줬을 거라고요.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요.”

“미안해요…….”

“좀 미안해하긴 해야지. 으휴 무거워.”

소월은 한해를 부축해서 원룸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지금이라도 정신이 들면 말해요. 택시 불러서 집에 데려다줄 테니까.”

소월은 성심성의껏 말했다.

“저도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막 술 취한 남자 데려오고 이런 스타일 아니거든요?”

“미안해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소월은 갑자기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집에 데려오긴 했는데…… 그렇다면 같이 자야 하나?

먼 바다로 나가는 사람들은 보통 몇 달씩 배를 타다가 한 달 정도 육지에서 생활하는 패턴이 반복되기에, 혼자 살면서 집을 비워두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선원들마다 육지에 머무는 방식이 달랐다. 소월의 경우에는 최소한의 짐만 유료 창고에 보관해놓고 서울에 머무르는 기간에 맞춰 한두 달만 지낼 월셋방을 얻곤 했다.

이곳도 그런 곳이었다. 싱글 침대 하나 외에는 따로 이부자리를 깔 공간도 없고 깔 이불도 없었다.

“휴우. 모르겠다. 차라리 모텔에 갈걸 그랬나? 어떻게든 되겠지.”

그녀 혼자 지내기도 좁은 방에 남자치고도 큰 체격의 한해를 데리고 들어오자 정말 방이 꽉 차는 기분이었다.

“여기가 제가 지내는 방이에요.”

“미안해요, 삼항사님…….”

방에 들어왔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겨우 걸음을 옮기던 한해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씻을래요? 칫솔이라도 갖다드릴게요. 잠깐만 기다려요.”

소월은 화장실에 들어가 일회용 칫솔에 치약을 짜서 다시 나왔다.

“여기…….”

이런. 겨우 10초 남짓한 사이에 한해는 침대에 쓰러져 있었다.

퓨우…… 뭐 어쩔 수 없지. 하루 정도 안 씻고 잔다고 큰일 나는 건 아니지만…… 이 침대에서 둘이 자는 건 큰일인데.

싱글사이즈 매트리스는 말 그대로 딱 한 명, 한해를 위한 면적밖엔 없었다.

모르겠다. 일단…….

소월은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일상적인 행동이지만 방 안에 떡하니 남자가 누워 있는 상황에서 하자니 뭔가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한해는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지만.

자. 이 밤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첫째는 잠을 안 자고 바닥에 앉아 버티는 거다. 둘째는 한해 옆에 안기듯 붙어서 모로 누워 자는 거다.

소월은 버틸 수 있는 데까진 버텨보자는 생각으로 침대 매트리스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앉았다.

한해의 거친 숨소리가 파도 소리처럼 이어졌다.

정말 기묘한 인연이야. 어린 시절 동네에서 우상처럼 우러러보던 오빠를 바다에서 만나고 이렇게 한 방에서 밤을 보내게 되더니.

그녀는 한해와 나란히 서서 유성우를 보며 빌었던 발칙한 소원을 떠올렸다.

‘이 남자와 잘되게 해주세요.’오늘 밤이, 이 특별한 밤이 내 소원이 이뤄지는 계기가 될까?

그녀는 고개를 돌려 한해가 잠든 모습을 관찰했다.

아까 술을 마시면서 그가 털어놓았던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여전히 그녀의 귀에 쟁쟁거렸다.

끝나버린 그의 사랑 이야기는 가슴 아팠지만 그녀의 입장에서 보자면 기회인 셈이기도 했다.

그런 노래도 있지 않나? 사랑은 다른 사랑으로 잊혀진다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한해의 뺨에 손을 갖다 대었다.

내가 당신의 새로운 사랑이 될 수 있을까요?

아직은 눈물이 머물러 있는 당신의 눈에 웃음을 선물해주고 싶은데.

상처 입은 짐승처럼 떨고 있을 때 안아주고 싶은데.

아무리 그래도 남자 입장에서는 실연당한 첫날인데, 너무 혼자 김칫국을 마신다 싶어 미안해졌다.

“자요. 오늘은 아무 생각 없이. 이제 다 끝났으니까.”

그녀는 한해의 단단한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한번 그의 몸에 머무른 손길을 쉬이 거두기 어려웠다. 머리칼을 만지려던 순간,

“아,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윤소월, 너 미쳤냐?”

그녀는 손을 거두었다. 상대의 동의도 없이 막 만지고 이래선 안 되지.

그녀는 한해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폰을 꺼냈다. 아까 술을 마시며 찍은 사진들을 느긋하게 감상했다.

함께 먹은 고기, 함께 비운 술, 그리고 함께 찍은 셀카.

누가 봐도 연인처럼 얼굴을 맞대고, 둘 다 환하게 웃고 있다.

제법 잘 어울리는데?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녀는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업로드했다.

#우리배 #얼짱갑판원 #슬픈날 #좋은날 #끝 #시작 #함께

*

꼼꼼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가능성을 감지한다.

강은 한해가 바다로 나간 뒤부터 가끔 그의 SNS 활동을 체크했다. 만에 하나, SNS를 통해 수진과 연락이 닿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서였다.

다들 트위터니 페이스북이니 너도나도 SNS 계정을 만들었지만 한해는 10년 넘게 전혀 활동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만들었던 블로그조차 배를 탄 뒤로 끊겼다.

그러다가 갑자기 한해가 인스타그램을 만든 것이 1년 전이었다. 정말 열 손가락에 꼽힐 극소수의 사람들만 연결이 되어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소월이었다.

함께 배를 타는 동료인 것 같은데, 배에서 사진을 같이 찍기도 하고 휴가 때도 둘이 만난 사진이 올라오는 걸로 봐서 꽤나 친한 모양이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서 그녀의 인스타그램을 기억해두었는데…….

결혼식에 찾아온 한해가 오늘 인스타에 뭐라도 올렸나 싶어 들어가 봤다가 무심코 그녀의 인스타를 들러보았다.

올라온 지 얼마 안 되는 사진을 보며 강은 고개를 갸웃했다.

다정하네. 아주 찰싹 붙어서…… 사귀는 사이 같잖아?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샤워를 마친 수진이 가운을 입고 나왔을 때, 그는 일부러 대수롭지 않게 말을 흘렸다.

“아…… 이 여자가 한해 형 여친이구나.”

그가 예상한 대로 수진은 신경이 곤두섰다.

“뭐라고요?”

“아, 한해 형 여자친구. 우연히 인스타를 알게 되었는데 금방 같이 찍은 사진을 올렸네.”

수진이 멍한 얼굴로 다가왔고, 강은 핸드폰을 건네주며 말했다.

“귀엽게 생겼지?”

수진의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같이 배 타는 동료인가 봐. 둘이 잘 어울리는 거 같다. 그치? 형도 우리 결혼식에 와줬으니까, 우리도 둘이 결혼하면 꼭 축하해주러 가자.”

그녀는 말이 나오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샤워하는 내내 괴로웠다. 부부가 된 첫날부터 남편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게 되어버렸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내가 거짓말에 속은 줄도 모르고 한해 오빠는 나를 기다렸어. 무려 14년을.

그런데 모든 게 완벽한 착각이었다.

그녀의 두 눈으로 지금 보고 있다.

한해 오빠는 걸그룹 멤버 같은 발랄한 이미지의 여자친구와 착 붙어 있다. 옷을 보니 오늘 찍은 사진 같은데…….

내 결혼식에 들렀다가 데이트를 했구나. 둘은 너무 신나 보여. 잘 어울린다.

사진 아래 해시태그가 주르륵 붙어 있었지만 너무 놀란 수진의 눈에는 잘 보이지도 않았다.

아찔했다. 처음에는 배신감을 느꼈다가 금방 정신을 차렸다.

한해 오빠는 날 기다렸다고 말한 적 없어. 내가 그렇게 느꼈을 뿐이지. 모든 게 다 착각이었어.

오빠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고 확신했는데…… 멍청하고 창피한 착각이었다고!

그러니 오빠는 날 배신한 적도 없는 거지.

대체 내가 무슨 생각을 했던 거지? 하아…….

현실은 이러하다. 한해 오빠는 세상 깜찍한 여자친구와 행복하게 잘살고 있다. 그러니…….

오빠. 행복해 보여서 다행이다. 그래 그거면 됐어. 오빠가 행복하면 됐어.

수진은 말없이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런 수진을 보며 강이 다가와 가만히 안았다.

그 촉감이 다른 방식으로 수진을 자극했다. 그는 달콤한 손길을 뻗었지만 정작 그녀가 느낀 감정은 불쾌함이었다.

“우리의 허니문은 이제 시작이야. 한해 형도 새로운 삶을 시작했으니 우리도 함께 새로운 삶을 일구어보자. 내가 더 잘할게.”

사과했으니 이제 다 되었다는 건가?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첫날밤을 보내자는 건가?

“잠깐만요.”

수진이 그를 밀어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당신이 말하는 우리의 새 삶이라는 것이 당신 집안의 말도 안 되는 분위기를 제가 고스란히 감내해야 하는 삶이라면, 받아들일 수 없어요.

엄청난 거짓말로 내 인생을 왜곡시켜놓고선 사과했으니 다 되었다는 식의 이 빌어먹을 순간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처럼.

강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그녀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

배에서 항해 중일 때도 종종 수진이가 꿈에 나왔다.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야한 꿈도 몇 번 있었는데, 오늘도 그랬다.

꿈의 무대는 결혼식장이었다. 한해가 신랑, 그녀가 신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식을 마치고 나니 어느새 무대는 이국의 작은 호텔로 바뀌어 있었다.

벽과 지붕은 온통 하얀색이었고, 작은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눈이 멀어버리면 어쩌나 싶을 정도로 새파란 색이었다.

지중해에서 봤던 곳 같은데. 그리스 산토리니섬인가?

상관없어. 어디면 어때. 그녀와 함께 있는데.

창마다 드리운 커튼이 산들바람에 산들산들.

둘은 하얀 시트가 깔린 푹신한 침대에 누워 서로를 어루만졌다.

“사랑해.”

되풀이해서 고백해도 또 하고 싶은 말. 사랑해.

꿈에서조차 그녀를 안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촉감은 너무 생생해 현실 같았다.

꿈과 현실이 뒤섞이는 경험이랄까.

입을 맞추고 서로의 체온을 나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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