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를 뺏겠습니다-5화 (5/92)

5화

수진의 머릿속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며칠 전에 혼인신고를 했고 결혼식이라는 행사는 법적으로 아무 효력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한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아마 지금 신랑 자리에 서 있는 남자를 받아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법적으로 이 남자는 내 남편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한해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도 모른다.

그가 나를 여자로서 좋아하는지, 혹시 그에게 여자 친구가 있는지, 심지어 그가 유부남일 수도 있다.

어쩔 수 없어. 어쩔 수 없다고…….

“저는…… 저는…… 맹세합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작았다.

“다시 한 번 크게 말씀해주시겠어요?”

주례가 되묻고 나서야 그녀는 소리 높여 외쳤다.

“맹세합니다!”

잔뜩 긴장해 있던 강의 표정이 스르륵 풀어졌다.

이태화 회장을 비롯해 다른 하객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신부가 너무 긴장한 것 같군요. 하긴 결혼이란 워낙 큰 인륜지대사니까요. 흠흠.”

주례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성혼선언문을 꺼내 들었다.

“신랑 이강 군과 신부 진수진 양은 일가친척과 수많은 하객분을 모신 이 자리에서 평생토록 생사고락을 함께할 부부의 연을 굳게 맺었습니다. 이에 주례는 이 혼인이 원만하게 이루어졌음을 엄숙하게 선언합니다!”

끝이다.

강과 수진은 서로 다른 의미에서 ‘끝’이라는 표현을 떠올렸다. 모든 부부가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결혼식에서.

이 자리가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하객 중에도 있었다.

한해의 얼굴은 조각상처럼 굳어버렸다.

끝이다. 이제 끝이다…….

만약 내가 수진이와 연락을 끊지 않고 계속 유지했더라면, 그녀의 옆자리는 내가 될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수진이는 새로운 삶에 제대로 적응 못 했을지도 모르지. 나 역시 뱃사람으로 14년을 버티지 못했을 테고.

지금…… 변명하는 건가? 어쩔 수 없었다고?

그는 잔인한 운명의 물결에 마구 휩쓸려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현기증이 머리를 팽팽 돌게 만들었다.

이렇게 되리라는 걸 알고 결혼식에 왔지만, 정말로 축하해주려고 왔지만…….

14년 만에 다시 만난 수진을 보고 그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를 좋아했구나. 나라는 남자는 너라는 여자를 좋아했어. 한 번도 그러지 않은 적이 없었어.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

.

.

혼인서약 식순에서 신부의 대답이 늦게 나와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만 빼고, 결혼식은 무탈하게 끝이 났다.

감격스러운 연주와 함께 갓 부부가 된 둘이 행진을 했고, 하객들은 있는 힘껏 박수를 쳐 축하해주었다.

강은 환하게 웃어 보였지만 수진은 애매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었다.

“일부러라도 좀 웃지 그래?”

강이 복화술 하듯 말했고, 그제야 수진은 어색하게 웃는 얼굴 연기를 했다.

그는 끝까지 물어보지 않았다. 왜 아까 대답을 머뭇거렸는지.

최고급 필렛 미뇽과 로브스터가 투 메인으로 들어간 호화로운 코스가 서빙되는 동안 신랑 신부는 파티 드레스로 옷을 갈아입었다.

다시 식장 입구에서 만난 둘은 가볍게 손을 잡았다. 둘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은 여전했지만 식은 끝내야 했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

강의 말에 수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결혼식 말이야. 조금만 더 버티면 되잖아. 그러니 세상 다 잃은 슬픈 표정은 짓지 말라고.”

수진은 반박하지 않았다. 다만 궁금했다.

왜 거짓말했어? 한해 오빠가 죽었다고?

지금은 강에게 따져 물을 시간은 아니었다. 일단 그녀는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한해 오빠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나는 행복했을까? 노력하지 않아도 절로 환한 미소를 머금은 신부였을까?

이른바 2부 행사. 신랑과 신부가 함께 테이블마다 돌아다니며 감사 인사를 전하는 시간.

수진은 무척 노력해서 미소를 머금었다. 묘하게도 강의 말이 위로가 되어주었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눈부시게 새파란 드레스를 입은 수진이 공손하게 인사할 때마다 하객들은 탄성을 질렀다.

“와, 이렇게 예쁜 신부는 정말 처음 본다.”

한해는 멀리서, 모르는 사람들 틈에 섞여 있었다. 그의 눈에는 오직 그녀만 보였다. 다른 모든 영상과 소리가 소거된 마냥.

하객들의 축하를 받으며 환하게 미소 짓는 그녀의 얼굴을…… 그녀의 아름다운 드레스를…… 그리고 그녀 곁에 있는 다른 남자를 차마 계속 볼 수 없었다.

음식이 한창 나오는 중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배가 고픈 줄도 몰랐고, 입맛도 전혀 없었다. 오직 지독한 현기증.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식장을 빠져나갔다.

화장실에 들러 찬물로 세수를 했지만 지독한 현기증은 가실 줄을 몰랐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이…… 밉다. 이렇게 미울 수가 없어.

.

.

.

결혼식의 마지막 순서, 폐백이 기다리고 있었다.

요즘은 생략하는 경우도 많지만 혼주인 이태화 회장의 성격상 생략될 리가 없었다.

웨딩드레스에서 파티드레스로, 이번에는 한복으로.

하루 종일 너무 신경을 써서 그런지 폐백실로 걸어가는 수진의 발걸음엔 힘이 하나도 없었다.

넓디넓은 폐백실에 들어가는 순간, 아차 싶었다.

시부모님을 비롯해 두 분의 고모 내외와 역시 두 분의 작은아버님 내외 등등 시댁 어른들이 10명도 넘게 늘어서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의 집에서 스치듯 봤던 분들이 꽤나 있었다. 그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집안에 얹혀 살던 식모 비슷한 고아 아이가 며느리가 된 셈이니…….

아니나 다를까. 시댁 어른들의 시선은 무섭도록 싸늘했다.

전통 혼례 의상을 입은 강과 수진이 어른들 앞에 절을 올리기도 전에,

“나는 이 결혼식 정말 와야 하나 싶더라.”

강남에서 회계 법인을 운영하는 첫째 고모였다.

“내가 우리 강이를 얼마나 예뻐했는지 넌 모를 거야.”

그녀는 증오가 서린 눈으로 수진을 노려보았다.

“우리 강이가 대체 얼마나 대단한 아내를 맞이할지 정말 기대가 컸어. 최고의 학벌과 집안은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집에 얹혀살던 고아 애라니. 난 몇 번 집에 놀러 갔을 때 보고 식모아이인 줄 알았는데. 하!”

결혼 첫날. 사람을 앞에 두고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지?

수진은 너무 놀라 모멸감조차 느낄 새가 없었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 시부모님을 비롯해 다른 친척들은 전혀 놀라지 않고 가만히 듣고 있기만 했다.

다들 동의한다는 뜻? 같은 생각이라는 뜻?

“이건 뭐 기울어져도 너무 기울어진 결혼이라…… 고모로서 나는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다.”

폐백 자리에서 신부가 시댁 어른과 맞서는 일이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수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얌전히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인정할 수 없는 결혼식에는 왜 오셨나요?”

그녀의 목소리는 최대한 분노를 누르고 있으면서도 단단하게 뭉쳐 있었다.

고모의 발언에는 가만히 듣고만 있던 시댁 어른들이 불편한 헛기침을 하며 일제히 수진을 노려보았다.

“어디서 배워먹은 버릇이야?”

고모는 눈을 부라리며 한 대 칠 기세. 수진은 더 대들지 않았지만 고개도 숙이지 않았다.

“어머 쟤 눈 좀 봐라. 우리 강이 잡아먹게 생겼네.”

끼어든 사람은 작은어머니였다.

“아주 그냥 온몸 바쳐 우리 강이를 꼬드겼나?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거야?”

이번에도 어른들 중에 발언을 저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수진은 시부모님에게 구원의 눈빛을 보냈다. 같이 살 때 살갑게 대해주시진 않았어도 이런 식으로 인간 이하 취급을 하진 않으셨으니까. 게다가 결혼하겠다는 결정에 반대도 안 하셨고.

눈이 마주친 이태화 회장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기울였다.

“너 지금 나를 보는 거냐?”

“아버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제가 온몸을 바쳐 강이 오빠를 꼬드겼고, 도저히 이 결혼에 깜이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수진은 음성이 떨리지 않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 약해 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나는 솔직히 별생각이 없다.”

이태화 회장은 마치 남의 자식 결혼에 대해 이야기하듯 대수롭지 않은 태도였다.

“앞으로 우리 강이는 큰일을 해야 한다. 내가 이룩한 제국을 계승해야 해. 너는 그저 강이의 내조에만 힘쓰면 된다. 네가 어떤 출신인지, 네가 어떻게 강이를 유혹했는지, 난 그런 거 관심 없어. 다만 앞으로 강이가 집안일에 조금이라도 신경 쓰게 만든다면…… 그래서 바깥일에 소홀하게 된다면…… 그 후에 벌어질 일에 대해선 강이에게 물어보거라.”

“아버님…….”

그는 다른 식구들을 거만하게 둘러보았다. 마치 이 집안에서 대장은 자신임을 확인하듯이.

“다들 똑바로 들어. 우리 며느리에 대해 오늘 이후로 이러쿵저러쿵하는 것들은 집안 행사에 얼굴도 못 내밀 줄 알어.”

급반전. 수진은 얼떨떨했다.

“내가 다 알아봤어. 얘가 대학은 거지같은 데를 나왔지만 머리는 좋아. 아이큐가 140이더라.”

이 회장은 사업계획을 설명하듯 며느리의 가치를 평가했다.

“몸에 병도 없고, 얼굴도 이만하면 되었고, 체력도 좋고. 우리 가문의 대를 잇기에도 딱 좋아. 얘같이 생명력 질긴 애들이 애도 잘 낳는다고. 괜히 똑똑한 척 잘난 척하면서 애도 하나 못 낳고 말만 많은 것들보다 백배 낫지.”

그는 자식 없이 사는 동생 부부, 특히 강이의 작은어머니를 대놓고 조롱했다.

그야말로 경악을 금치 못할 패륜적 언사였으나 다들 잠자코 있었다.

이유는 두 가지.

다들 이태화 회장의 포악한 성격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다들 그럴듯한 사업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이태화 회장의 사업체에 기생하는 처지였다.

“아, 그랬구나. 나는 너무 몸매가 날씬하고 여리여리해서 건강이 안 좋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머리도 좋고 체력도 좋다니 아주 안심이다, 호호.”

작은어머니가 입장을 급선회했다.

“내가 신혼부터 군기 좀 잡아보려고 했는데, 우리 오빠가 인정하는 며느리라면 나도 인정! 힘든 일 있거나 맛있는 거 먹고 싶으면 언제든 연락해라. 알았지?”

첫째 고모도 얼굴표정까지 180도 바뀌었다.

수진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건…… 이건 너무 기괴하잖아? 이게 무슨 가족이야?

그녀 역시 같이 사는 동안 이태화 회장의 안하무인 태도는 여러 번 본 적 있었다. 집안 분위기가 무척 무겁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그러나 선을 넘어서는, 이를테면 아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한다든가 하는 일은 그녀가 안 보는 곳에서 저질러졌고, 이태화 회장이 집에 머무는 날도 1년 중에 반도 안 되었기 때문에 다른 친척들까지 이런 식인 줄은 몰랐다.

다들 일그러져 있어, 하나같이. 나도 이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는 건…….

수진은 소름이 돋은 채로 강을 돌아보았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바닥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를 얼마나 악물었는지 턱이 바들바들 떨렸다.

“자, 애들 피곤할 텐데 이제 그만하고 보내줘야지.”

이 회장이 말하자 하하호호 웃던 시댁 어른들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신랑 신부는 그제야 정식으로 부모님께 절을 올렸다.

“먼저 시아버지로서 한마디 하겠다.”

그는 아들 이강을 응시했다.

“이제 네가 할 일은 두 가지다. 경영권 승계를 위해 더욱 회사 일에 매진하고, 또 대를 이을 손자를 낳는 것.”

원래 폐백 자리에서 다산을 기원하는 덕담이 오가는 게 일반적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수진은 시아버지의 덕담이 그저 덕담이 아닌 명령처럼 들렸다.

마치 그녀를 후손 생산을 위한 도구적 존재로 전락시키는 것 같은…….

“그 외에 다른 일들에 대해선 넌 신경 쓸 필요 없다. 나 역시 다른 일들에 대해선 네가 뭘 하고 다니든 간섭하지 않을 테니.”

마치 공부만 잘하면 어떤 비행도 눈감아주겠다고 학생에게 말하는 부모 같았다.

“네, 아버님.”

강이 꾹 누른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며늘아기 듣거라.”

이 회장은 수진과 시선을 마주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너의 할 일도 두 가지다. 건강한 후손을 생산하고, 남편이 집안일 신경 쓰지 않게 해주는 거야. 알겠느냐?”

그녀의 가치관으로선 동의할 수 없는 구시대적인 덕담이었지만, 수진은 어서 이 기괴한 자리가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에 큰 소리로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아버님.”

“그런 의미에서 이제부터 남편에게는 존칭을 쓰도록 해라.”

수진은 이미 얼얼해져 있는 뒤통수를 또 맞는 기분이었다.

지금껏 반말로 편하게 서로를 불렀는데 결혼했다고 갑자기 존칭을?

그런데 오히려 그편이 더 낫겠다 싶었다.

존댓말을 거리를 의미하니까. 이 일그러진 집안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는 차원에서 말은 높이고 애정은 줄이자.

“알겠습니다, 아버님.”

고분고분해진 수진의 모습에 이 회장은 흡족한 표정이었다.

그는 수진에게 직접 봉투를 하나 건네주었다.

“여행 가서 맛있는 거나 사 먹어라.”

하얀 봉투가 돈으로 꽉 들어차 있었다. 100장은 되는 것 같았다.

만 원권 지폐는 아닐 거고, 5만 원 지폐라면…….

수진이 미리 찾아본 바로는 보통 폐백 자리에서 소위 절값으로 몇십만 원씩 준다고 했는데 역시 재벌이라 씀씀이가 크다 싶었다.

사실 봉투 안에 5만 원이 있나 500만 원이 있나 수진에게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봉투의 두께만큼 불쾌했다.

그녀는 빨리 남편과 둘만 있는 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첫날밤의 로맨틱한 시간을 기다리는 거냐고?

그 반대였다.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아마도 첫 질문은 이러하겠지.

‘난 당신 가족들이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분들과 가족의 연을 맺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뭘 거 같아?’절값을 건넨 이 회장 내외가 일어나 자리를 비켰다.

“자, 그럼 다들 한마디씩 덕담을 해줘야지.”

이어서 큰고모 내외가 절을 받기 위해 앉았다.

수진은 고모님의 얼굴을 보고 힘이 쭉 빠졌다.

불과 10분 전에 날 불가촉천민마냥 모욕하더니, 지금은 세상 인자한 미소라니.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가식적일 수 있어?

그녀는 온몸에 돋는 소름을 느끼며 절을 올렸다.

*

연남동 거리에 멈춰 선 소월은 액정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몇 시간 전에 그녀가 한해에게 보낸 메시지.

‘오빠 저녁에는 뭐해요? 삼겹에 쏘맥 하면 딱 좋을 날씬데?! 오빠 나온다면 내가 쏜다.’그리고 몇 시간 만에 도착한 답장.

‘그래요. 술 한잔하죠.’절로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예스!

그녀는 양손에 소프트아이스크림을 든 레오를 돌아보았다.

“나 좀 이따 가봐야겠다.”

“왜요?”

“한해 오빠가 저녁에 시간 괜찮대.”

“아…… 잘됐네요.”

한해의 연락에 고무된 소월은 레오의 표정에서 씁쓸함을 읽지 못했다. 한해에게 다시 답장을 남기느라 바빴다.

레오는 금방 어두운 그늘을 걷어내고 웃는 얼굴이 되어, 그녀가 폰을 보는 동안 들어주던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아이스크림, 마저 먹을 시간은 있죠?”

“그럼 그럼!”

얼른 아이스크림을 받아 날름 한입 삼키는 소월.

“음, 맛있다!”

가볍게 탄성을 지르는 그녀의 모습이 한 장의 사진 같다고 레오는 생각했다.

기분 좋게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그녀. 밝은 갈색 머리칼은 오후의 햇살을 가득 머금었다. 어딘가 들떠 있는 표정은 아이스크림보다 더 달콤해 보여.

겨우 사춘기를 막 지나던 꼬맹이 연습생 시절에 그는 종종 소월 누나를 훔쳐보았다.

음악에 맞춰 뻗어나가는 그녀의 손길마다 빛과 생명이 반짝였다.

땀에 젖은 채 활짝 웃는 그녀의 얼굴만큼 아름다운 건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했다.

걸그룹이 몇 팀이나 결성될 때 번번이 고배를 마시고 몰래 우는 그녀의 모습도 지켜보았지.

그 시절부터 그녀의 인상적인 모습들은 사진첩의 사진처럼 그의 가슴에 쌓였고, 오늘도 한 장을 건진 셈.

오늘 사진의 제목은 이 정도가 좋겠다.

누나. 안 가면 안 돼요?

*

길고긴 결혼식이 모두 끝났다. 폐백도 끝나고 옷을 갈아입고 식장을 떠났을 때는 이미 늦은 오후였다.

수진과 강은 호텔에 들어와 체크인을 했다. 내일 아침에 신혼여행을 떠나기 전 시내 호텔에서 첫날밤을 보내는 일정이었다.

100층 가까운 높이에서, 서울이라는 대도시가 저녁 어스름에 잠기는 모습을 내려다보며 저녁식사를 했다.

채끝 스테이크와 최고급 와인이라는 실패할 수 없는 조합에도 불구하고 수진은 맛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허기를 채우기 위해 먹고 마셨기에, 라면이나 샌드위치였다 해도 맛을 똑같았으리라.

그녀는 급했고, 강은 느리게 식사했다.

“다 끝났는데 왜 그리 초조해 보여?”

“배가 고파서요. 이제 조금 나아졌어요.”

“아까부터 왜 자꾸 존댓말이야.”

“당신 아버지의 명령이잖아요.”

“아버지 앞에서만 쓰면 돼. 우리끼리 그러지 말자.”

“아니요. 저도 이쪽이 더 편하네요.”

수진의 말투는 단호했다.

“수진아. 어색하게 왜 그래?”

“나 아까부터 물어보려던 질문이 있었어요.”

수진은 쨍 소리가 울릴 정도로 포그와 나이프를 세게 내려놓았다.

그만큼 강의 미간에도 힘이 들어갔다. 어쩌면 그는 질문이 뭔지 예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수진은 상관없었다.

“저는 당신 가족과 친척들이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제 생각이 틀렸나요?”

“뭐가 정상이고 뭐가 비정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집안 분위기가 독특하긴 하지. 인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분들과 가족의 연을 맺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뭘 거 같아요?”

“음. 왜일까?”

“믿음. 오직 당신을 믿어서예요. 엄마도 아빠도 한해 오빠도 떠나고……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은 다 나를 떠나는 무서운 운명 앞에서…… 끝까지 나를 떠나지 않고 지켜준 유일한 사람이 당신이었으니까.”

냉랭하던 수진의 목소리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너무 가여워서 강은 보기가 힘들었다.

그는 속으로 애원했다.

그만해 수진아. 이쯤에서 멈춰. 우리 그냥 행복한 신혼부부로 살면 돼. 우린 들춰선 안 될 것들이 많단 말이야. 너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전 오직 당신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었던 거예요. 당신만을 믿고 여기까지 왔다고요.”

“그 믿음 져버리지 않도록 할게.”

강은 테이블 건너 수진의 손을 잡으려고 했지만 그녀가 스르륵 손을 뒤로 뺐다.

“분명히 약속했죠? 그러니 솔직히 말해줘요.”

수진은 물러서지 않는 눈으로 강의 시선을 붙들었다.

“한해 오빠가 죽었다는 말. 제가 봤던 뉴스. 어떻게 된 거예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