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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뺏겠습니다-4화 (4/92)

14년 만의 재회였다. 4화

성대한 결혼식의 규모에 비해 찾아오는 하객이 너무 없어 민망하고 나른했던 신부대기실은 단숨에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너무나도 간절하게 서로를 안고 있던 둘이 슬며시 떨어졌다. 품은 떨어졌지만 눈은 떨어지지 않았다.

이 상황은 꿈일까. 꿈이라고 하기에 한해의 품은 너무나도 따뜻했다.

“오빠! 어떻게 된 거야? 난 오빠가 죽은 줄 알았는데?”

“응? 내가 왜? 너무 연락이 없어서?”

“그게 아니라…… 해상사고가 났었잖아.”

“해상사고?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벌써 몇 년 전인데…… 내가 기사를 봤는데…… 강이 오빠가 기사를 보여줬는데…….”

수진은 횡설수설 입술까지 떨렸다.

“나 오빠가 일한다는 해운회사까지 찾아내서 갔었는데. 그 사람들이 맞다고 했는데…….”

그녀는 몇 년 전, 난장판이었던 현장을 떠올렸다. 오열하고 항의하고 혼절하는 유족들 틈에서 그녀도 한해의 사고 사실을 확인해달라고 소리 질렀고, 직원은 죄송하다고만…….

당시에는 그걸 확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돌아보니 무조건적인 사과였을 수도 있겠다.

그럼 그 기사는? 분명히 프린트까지 된 기사로 봤는데?

“수진아. 난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중요한 건 오빠는 살아 있고, 이렇게 너의 결혼식을 축하해주러 왔다는 거지.”

한해는 한 번 더 그녀를 가볍게 안아주었다.

“너무나도 잘 컸다, 내 동생. 이렇게 예쁜 신부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거야.”

말의 내용은 마치 친오빠와도 같은 축하로 가득했으나 그의 표정 한구석은 고통으로 그늘져 있었다.

“오빠. 이건 말도 안 돼. 이건…… 난 오빠가 죽은 줄로만 알고…….”

“사실 뭐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지. 빈털터리로 원양어선에 타면 딱 그 기분이야. 나는 죽었구나.”

“왜 지금까지 연락 안 했어?”

한해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집안이 풍비박산 나고 졸지에 둘 다 고아가 된 상황에서 강이네 집에서 너를 돌봐주는 조건이 그거였다고. 너와 연락을 하지 않는다.

“말했잖아. 스스로 일어설 준비를 할 때까지는......”

“그럼 지금은 준비가 다 끝나서 찾아온 거야?”

“응.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해.”

한해는 뿌듯한 표정으로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나 다른 쪽 얼굴에는 여전히 형언하기 어려운 아쉬움이 가득했다.

수진은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금방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던 웨딩드레스가 갑갑하게 느껴졌다. 당장 벗어던지고 싶을 만큼.

강은 알고 있을까? 한해 오빠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사를 봤는데, 그 기사는 뭐였지?

한해는 잠시 입술을 물었다가 뗐다.

“난 둘이 결혼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왜 그렇게 생각했어?”

한해는 대답을 못 하고 그저 수진의 눈을 들여다볼 뿐이었다.

“연락도 안 하고 지냈으면서, 우리가 결혼하는 줄은 어떻게 알았어?”

“강이한테 연락을 받았어.”

수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언……제?”

“일주일 전에. 메시지가 왔더라고.”

수진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뭐지? 그렇다면 강이 오빠는 한해 오빠가 살아 있다는 걸 알았다는 얘기잖아?

게다가 결혼 이야기가 오간 건 벌써 몇 달 전인데, 왜 결혼식을 고작 일주일 앞두고 한해 오빠에게 알렸을까?

한해의 침몰 사고를 전해듣기 전에, 수진은 가끔 강에게 한해의 안부를 물었고 그럴 때마다 강은 말을 흐리거나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곤 했다.

“왜 자꾸 물어봐. 나도 연락이 잘 안 된다니까. 한번 항해 나가면 몇 달씩 바다에 있으니까.”

혹은,

“한해 형은 핸드폰 안 만들어서 개인 번호도 없어. 회사를 통해 연락해야 하는데 그게 쉽겠냐?”

혹은,

“자꾸 한해 형 연락되냐고 물어보지 마. 지난번에도 연락해보려고 했더니 한해 형이 싫어하더라고. 육지하고 연 끊고 바다에서 살고 싶어 하는 사람한테 자꾸 연락하고 그러면 좋겠어?”

그런데 결혼 일주일 전에 메시지를 보내 알렸다는 건…… 무슨 뜻일까?

그보다 먼저, 왜 한해 오빠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한 걸까?

대체 그 사람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생각에 잠겨 있는 수진에게 한해는 애써 웃어 보였다.

“그래도 정말 다행이지. 마침 내가 항해 중이 아니어서. 정말 운 좋게도 며칠 전에 육지에 올라왔거든. 그래서 이렇게 왔잖아.”

그게…… 운이 좋은 거야?

수진은 자꾸 원망스러운 마음에 들어 되물어보려고 하다가 참았다.

왜? 왜 한해 오빠를 원망해? 살아 돌아와준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잖아. 내 결혼을 축하해주러 달려왔고.

수진은 머리로는 다 이해했다.

가정이 풍비박산 나고 빈털터리 고아가 되었을 때 한해의 절망감을. 그래서 그가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 했고, 그때까지 육지에 대한 미련을 참고 또 참았을 거라고…….

누구보다 그를 잘 아는 그녀는 이해했다.

그러나 머리와 마음은 종종 같은 길 앞에서 다른 방향을 가리키곤 했고, 지금도 그랬다.

연락하지 그랬어. 살아 있다고. 다시 나타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세상을 이길 힘을 기르는 중이라고.

그때까지 만나진 못하겠지만 언젠간 돌아올 거라고…… 연락하지 그랬어? 그랬다면…… 그랬다면…….

자꾸 생각하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한해의 가슴팍이라도 때릴 것 같아서 화제를 돌렸다.

“강이 오빠는 만났어?”

“아직. 너부터 보고 가려고. 신부대기실부터 급하게 찾았지.”

한해는 수진에게서 1초도 시선을 못 떼고 있었다. 넋을 잃었다는 표현이 딱 맞아 보였다.

“뭘 그렇게 봐?”

수진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어딘가 가시가 돋쳐 있었다.

“내가 알던 바닷가 왈가닥 소녀가 이렇게 눈부신 여자로 바뀌었다니.”

한해는 마지막에 한숨을 더했다.

“이게 14년이라는 세월의 힘이구나.”

눈부신 여자……. 수진은 가슴이 뛰었다.

오빠의 눈에 내가 눈부신 여자로 보인다고?

가슴이 뛰는 동시에 양 볼이 뜨거워졌다.

잠깐만. 지금 나 결혼식장에 와 있는 신부잖아. 내 남편이 될 사람이 행진을 기다리고 있고.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이건 다…… 뭐야?

수진은 미칠 것만 같았다.

.

.

.

길고긴 꽃길이 시작되는 예식장 앞.

신랑인 강과 혼주인 이태화 회장 부부는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많은 하객을 맞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제 예식을 시작해야 할 시간이 다 됐고, 하객들도 모두 식장 안에 착석했다.

그런데…… 신부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신부 왜 안 데리고 나와?”

웨딩업체 직원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신부대기실에 있는 직원에게 무전을 했다.

대기실에 있는 직원의 난처한 목소리가 무전으로 들렸다.

“아…… 지금 대기실에 손님이 오셨는데요…….”

“예식 시작이라고 내보내야지!”

“그게 지금 좀…….”

옆에서 직원을 보던 강이 끼어들었다.

“문제가 있습니까?”

그는 완벽한 메이크업에 최고급 턱시도 차림이었다. 건설사 후계자가 아니라 영화배우라고 해도 믿을 판이었다.

“아, 아닙니다. 대기실에 중요한 손님이 와서 좀 늦어지시나 봐요.”

“중요한 손님?”

강은 고개를 갸웃했다.

수진이한테 중요한 손님이 누가 있어? 기껏해야 회사 동료들일 텐데?

그녀에 관해서라면 조금이라도 이상한 점을 그냥 넘기지 못하는 그였다.

그는 직원에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제가 직접 가서 신부를 데려오죠.”

“아니요! 아닙니다. 저희 일인걸요. 신랑님은 그냥…….”

“아닙니다. 어차피 같이 행진해서 들어갈 거니까요.”

어릴 때부터 고아로 큰 수진을 배려해서 오늘 예식은 신랑신부 공동입장으로 시작될 예정이었다.

강은 신부대기실로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신부대기실 문을 열고 한해를 발견한 강은 소금기둥처럼 굳어버렸다.

14년 동안 매년 한두 번 생사확인만 했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한해의 모습은…… 압도적이었다.

뱃사람 생활에 찌들어 망가졌을 줄 알았는데 패션모델과 피트니스 강사를 합쳐놓은 건강한 모습이라니. 톰 포드로 추정되는 슈트가 저토록 잘 어울릴 줄이야.

거짓말을 했다. 한해를 향한 수진의 미련을 완전히 없애지 않고선 그녀의 마음을 열 수 없다고 생각해 한해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지만, 언젠가는 탄로 날 거짓말이었다.

결혼식을 고작 일주일 남긴 시점에 일부러 한해에게 소식을 전한 이유도 그래서였다.

결혼 소식을 아예 전하지 않기에는 뭔가 떳떳하지 못하고, 일주일이라는 기한은 1년의 대부분을 먼 바다에 있는 한해가 무슨 수를 써도 찾아올 수 없을 만큼 급박한 기한이니까.

그런데 그가 여기 와 있다.

강의 맥박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한해 앞에 있는 수진의 표정을 보고는 더욱더.

“이강! 정말 오랜만이다.”

한해는 뚜벅뚜벅 걸어와 포옹했다. 그에게 안기는 그 짧은 순간조차 강은 싫었다.

“항해 중이 아니었나 봐?”

“어, 마침 육지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지.”

“온다고 답장이라도 하지 그랬어. 답장이 없길래 못 오는 줄 알았는데…… 놀랐네.”

“놀라게 해주려고.”

한해는 싱긋 웃었지만 강은 웃지 않았다.

“내가 불청객인가?”

한해가 물었고, 강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오랜만에 셋이 모이니까 좋네.”

둘 사이에 흐르는 기류를 보는 수진은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랐다. 그녀는 강에게 당장 확인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한해 오빠가 침몰 사고로 죽었다는 기사는 어떻게 된 건지, 왜 오빠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해놓고선 자기는 연락을 하고 지냈는지?

그러나 그녀는 꽃길 앞에 선 신부였다. 신랑 이강 군의 손을 잡고 행진하고 부부의 연을 맺어야 하는 운명이 코앞에 닥쳐와 있었다.

그녀의 복잡한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해는 강의 어깨를 툭 쳤다.

“축하한다, 이강.”

“고마워, 형.”

“결혼식 잘 볼게.”

“어.”

강은 수진에게 다가와 손목을 잡았다.

“가자. 다들 신부를 기다리고 있어.”

“오빠…….”

신부의 목소리가 휘청거렸다. 시선도.

“왜?”

돌아보는 강의 눈은 맹수의 눈처럼 날카로웠다. 늘 그녀를 위해 참고 양보하던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수진은 이를 지그시 물었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아, 잡힌 손목이 아팠다.

*

같은 시간. 합정동의 한 카페.

소월은 오랜만에 만난 후배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짧은 데님 스커트에 경쾌한 라이더 재킷을 입은 그녀는, 함께 배를 타는 동료들이 봐도 못 알아볼 정도로 이미지가 달랐다.

그러나 복장과 달리 그녀의 표정은 꽤나 우울해 보였다.

“왜 그리 다운되어 있어? 뭐가 문제야, 세이 섬띵.”

그녀 앞에 앉아 있던 레오가 장난스럽게 노래 가사를 인용했다.

“분위기가 겁나 싸해. 요즘엔 이런 게 유행인가?”

“하지 마.”

소월이 미간에 힘을 주자 귀여운 표정으로 입틀막을 하는 레오였다.

그는 오래전에 소월이 걸그룹 연습생으로 있을 때 같은 기획사에 있던 연습생 후배였다.

여자를 주눅 들게 하는 꽃 미모에 감각적인 춤 실력도 대단해서 금방 뜰 줄 알았는데, 아이돌 그룹을 조직할 때 최종에서 미끄러졌다.

소월은 일찌감치 소질 없음을 깨닫고 공부로 방향을 전환했지만 레오는 달랐다.

주변에서도 그만두기엔 아깝다고 했고 포기하기엔 나이도 너무 어렸다.

소월이 기획사를 떠나는 날, 레오는 안무 연습실에서 소월을 잠시 만났다.

스무 살 누나와 열여덟 소년. 성격도 취향도 잘 맞아서 꽤나 친한 사이였던 둘이었다.

소월이 레오의 머리를 쓱쓱 만져주었다.

“보고 싶을 거야.”

“너무 화가 나요.”

레오는 커다란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인 채 말했다.

“누나를 잡을 수 없다는 게.”

“풉. 진짜 귀여운 녀석.”

“저 성공해서 꼭 누나 찾을게요.”

“제발. 누구라도 성공 좀 해라. 내 주변엔 어째 잘된 애들이 없어.”

“꼭 스타가 되어서 누나 찾을게요.”

“난 바다에 있을 거야. 잘 찾아봐.”

레오는 결국 굵은 눈물 줄기를 주르륵 흘렸고,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놀랍게도 소월의 입술에 쪽 소리 나게 뽀뽀를 해버렸다.

너무 놀란 소월은 눈만 껌벅껌벅.

“누나 저 잊지 말아요.”

그리고 레오는 먼저 연습실을 뛰쳐나갔다.

소월은 남들보다 조금 늦게 시작해 조금 늦게 대학에 갔다.

그녀의 두 번째 꿈이었던 항해사의 꿈을 이루었고, 막내 항해사로 배를 타던 어느 날 레오에게 연락이 왔다.

‘누나, 저 기억하죠?’발칙한 키스로 이별한 뒤 6년 만이었다.

항해 사이에 서울에서 쉬고 있던 소월은 망설임 없이 레오를 만났다. 어찌나 반가운지. 20대 중반의 남자로 훌쩍 커버린 레오를 보니 친누나처럼 대견한 마음이 가득했다.

레오는 약속을 반만 지켰다. 그녀를 찾긴 했지만…… 성공하진 못했다. 아이돌 그룹 후보로 훈련을 받던 그는 20대 중반까지 팀을 이루지 못하자 자연스럽게 회사에서 방출되었다.

그쯤 되면 다른 일을 찾기 마련인데, 레오는 그래도 음악을 포기 못 하고 직접 곡도 쓰고 음원 발표를 하며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길 기다리는 쪽을 택했다.

다시 레오를 만난 뒤로 소월은 항해를 마칠 때마다 한 번 정도는 꼭 레오를 만나 안부를 주고받곤 했다. 그녀 눈에 여전히 레오는 귀여운 동생이었고, 워낙 밝고 명랑한 성격이 잘 맞아서 함께 시간을 보내기엔 최고였다.

하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소월은 통 웃지도 떠들지도 않았고 레오는 그런 그녀가 낯설었다.

“그 사람 땜에 그래요? 그 같은 고향 출신 오빠?”

레오는 몇 번이나 얘기를 들어 한해의 존재와 소월과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응. 아 진짜 그 남자…… 비밀이 너무 많아.”

“그건 죄가 아니잖아요.”

“내가 신경 쓰이잖아!”

“그 사람이 알아요? 누나가 자기 좋아하는 거?”

“눈치채지 않았을까? 그렇게 쫓아다니는데.”

“눈치 못 챘을 수도 있어요. 비밀이 많은 남자라며? 그 비밀들 다 관리하려면 얼마나 신경 쓸 게 많겠어요.”

“아니 진짜 웃긴 게 뭔지 아냐? 그 오빠 여친도 없고, 그렇다고 막 클럽 다니고 노는 스타일도 아니거든? 그런데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안 느껴져. 웃기지 않아?”

“여친 없는 게 확실하다면 좀 특이한 분이네. 그분은 지금처럼 항해 안 할 때는 뭐해요?”

“맨날 뭘 공부해. 주로 금융. 어학공부도 하고, 운동도 엄청 열심히 하고. 오늘은 일이 있다고 하길래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더니 결혼식에 간다는 거야. 누구 결혼식이냐고 물어봤더니 나중에 말해주겠다는 거야.”

소월의 음성이 높아졌다.

“아니 그게 뭐라고 나중에 말해? 그렇게 말할 때가 진짜 많아. 진짜. 그건 나랑 더 친해지기 싫다는 뜻 맞지?”

“아마도? 아니면 진짜로 성격이 진중해서 어느 정도 친해지기 전까지는 자기 이야기를 잘 안 하는 스타일일 수도 있고요.”

“후자였으면 좋겠다. 퓨우.”

“우리 누나 단단히 꽂혔네. 대체 어떤 남자길래 우리 소월 누나가 이러는지 궁금하네.”

레오의 목소리는 밝았지만 얼굴 한구석에 쓸쓸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아, 몰라. 쉽게 잘될 줄 알았는데 이상한 철벽이 있는 것 같아. 결혼식 끝나고는 뭐 할라나?”

소월은 핸드폰을 들어 한해에게 메시지를 썼다.

-오빠 저녁에는 뭐해요? 삼겹에 쏘맥 하면 딱 좋을 날씬데?! 오빠 나온다면 내가 쏜다. 레오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깊이 들이마시며 한마디 던지려던 말을 삼켰다.

‘오늘 저녁 나랑 같이 먹는 거 아니었어요?’

*

결혼식은 식순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수많은 하객으로 꽉 들어찬 신라호텔 다이너스티홀은 거대한 샹들리에와 하얀 꽃들로 장식되어 있었고, 그 가운데로 긴 꽃길이 가로질렀다.

신랑 이강 군과 신부 진수진 양은 팔짱을 끼고 나란히 걸었다. 절제된 음악과 박수 소리가 그들을 축복해주었다.

하객들 속에 한해도 있었다. 그는 신부의 등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스스로에게 아득한 질문을 던지면서.

이런 날이 오기를 기원했던 거 아냐? 수진이가 행복하기를, 멋진 남자와 결혼도 하고 잘살기를 바랐던 거 아냐? 남편으로서 이강이라면 훌륭하잖아.

우리나라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건설 회사를 물려받을 녀석이니 평생 수진이를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잖아.

그는 결혼식이 진행되는 내내 계속 자문하고 자답했다.

그게 신경 쓰이는 거지?

어릴 때부터 수진이가 강이에게 별로 마음이 없었던 것 같은데, 혹여 사랑 없는 결혼일까 봐……. 그래서 나중에 수진이가 불행해질까 봐.

그게 신경 쓰이는 거지?

아니면…… 혹시 수진이 옆에 네가 서 있고 싶은 거냐? 그녀가 너의 아내였으면 해?

겉으로는 피를 나눈 여동생인 양 대하면서도 내심…… 그랬던 거냐?

그녀의 결혼식장은 한해에게는 심판의 자리였다. 자신의 진짜 감정을 스스로 심판하는 어려운 자리. 그는 좀처럼 결론을 내리기 어려웠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다 소용없다. 이제 곧 그녀는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니까.

내 감정 따위…… 이제 아무 소용없게 되어버렸어.

잠깐만…… 그런데 왜 강이는 나를 죽었다고 했을까?

수진이가 말한 신문 기사는 뭐고?

거센 파도 앞에서도, 거대 괴물 같은 폭풍우 속에서도, 며칠 동안 잠도 못 자고 이어지는 노역 속에서도 빛이 꺼지지 않았던 그의 눈이 자꾸 흐려졌다.

멀리 단상에서는 주례를 맡은 대학 총장이 등장했다. 사회자로부터 소개를 받은 그는 식순에 따라 예식을 진행했다.

“자, 신랑 신부 서로 맞절합니다.”

턱시도를 입은 이강과 웨딩드레스를 입은 수진은 나란히 서 있다가 마주 보고 한 걸음씩 물러났다가 허리 굽혀 인사했다.

주례 선생님은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신랑 신부는 다시 나란히 주례 앞에 섰다.

세심한 관찰력을 가진 사람이 둘의 얼굴을 가까이서 봤다면 질겁했을 테다. 신랑의 얼굴은 결전을 앞두고 잔뜩 긴장한 권투선수와 비슷했고, 신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졸도하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일흔이 넘은 주례 선생님은 우리나라 최고의 석학일지는 몰라도 코앞에 있는 젊은 한 쌍의 표정을 제대로 살피지는 못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성스러운 혼인서약이 있겠습니다.”

주례의 말에 강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다 왔다. 몇 분, 어쩌면 몇십 초만 있으면 성혼이 되었음이 선포되고…….

그는 곁눈으로 수진을 엿봤다.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상관없어. 이제 곧 내 여자가 될 테니까.

“신랑 이강 군은 어떠한 경우라도 옆에 있는 신부를 사랑하고 아내로 존중하며 살 것을 맹세합니까?”

주례의 질문에 이강은 기다렸다는 듯이 외쳤다.

“네. 맹세합니다!”

주례는 주름진 눈을 수진에게 돌렸다.

“신부 진수진 양은 어떠한 경우라도 옆에 있는 신랑을 사랑하고 남편으로 존중하며 살 것을 맹세합니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입술은 손가락 하나 정도 틈으로 벌어진 채 바르르 떨고만 있었다.

1초, 2초, 3초…… 10초가 넘도록 대답이 나오지 않자 주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장내의 하객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혼주석에 아내와 앉은 이태화 회장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누구보다 철렁한 사람은 신랑이었다. 그는 고개 돌려 수진을 노려보았다.

“신부?”

주례가 수진을 불렀지만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 묵묵부답. 결국 강이 직접 수진을 불렀다.

“진수진. 뭐해? 대답해!”

그제야 수진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느새 그녀의 눈에 가득 고여 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입술의 떨림도 뚝.

“저는……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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