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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뺏겠습니다-3화 (3/92)

3화

첫 항해를 기억한다.

모든 것이 비바람에 휩쓸려 사라졌던 계절. 바다를 닮은 소년은 모든 것을 바다에 잃었다.

천만다행으로 갈 곳 없는 신세가 된 수진이를 강이네 집에서 돌봐주겠다니, 강에게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몰랐다. 다만 강은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대신 수진이한테 연락하지 마. 형하고 연락을 주고받다 보면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지 못할 거야. 나에게, 또 우리 부모님께 고마운 마음이 있다면…… 또 수진이의 새 삶을 진정으로 응원하고 싶다면 철저하게 선을 그어줘.’맞는 말이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조건이지.

이제 나만 살아남으면 된다. 지옥에서 탈출하는 데 얼마나 세월이 필요할까? 5년? 10년? 그 세월을 견디기 위해서라도…… 이별해야 한다. 지금까지 지상에서의 모든 인연과.

그래서 수진에게 말했다.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해. 새로운 삶을 살아.’싫다고 울부짖는 수진이에게 부탁했지. 기도를 해달라고. 그리고 반드시 살아남겠다고 약속해달라고 했지.

그녀는 약속했지만, 마지막 인사는 하지 않았다.

‘우리…… 서로를 위해 서로를 잊자.’잊자는 말은 오직 한해의 입에서만 나왔다.

눈물로 지새웠던 그날 밤이 둘의 마지막이었다. 며칠 뒤 그는 도망치듯 배를 탔다.

원양어선은 아버지의 고깃배하고는 크기에서부터 차원이 달랐다. 그래봤자 허드렛일이었지만, 그나마도 아버지의 옛 동료가 소개해줬기에 경력도 하나 없는 애송이가 배에 탈 수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선장님도 한해 아버지와 아는 사이였다. 어린 나이가 혼자가 된 한해 처지를 가여워하며 배에 자리를 내어주었다.

첫 항해를 떠나는 날. 한해가 선미부 갑판에 멍하니 서 있는데 선장이 다가왔다. 어릴 때부터 뱃사람이었던 그는 구릿빛 피부와 억센 손, 그리고 하얀 수염을 갖고 있었다.

“쉽진 않겠지만 여기도 다 사람 사는 곳이야. 잘 견뎌봐라.”

“네.”

대답을 하면서도 한해는 하염없이 육지를 바라보았다.

배가 항구에서 멀어지고 있다. 과거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갑판 난간을 붙잡은 그의 손에 얼마나 힘이 들어갔는지,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었다.

떨림의 크기가 미련의 크기였다. 그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에 대한 미련.

그는 눈물을 참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리울 거다. 육지의 사람들이.”

“저는 다 잊으러 왔습니다.”

“그렇다면 배만큼 좋은 곳이 없지.”

선장은 한해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홀로 남은 한해는 육지의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았다.

멀어져간다. 모든 것이. 가족도 추억도 꿈도…… 수진이도. 이제 나에겐 바다뿐이다.

선미에 서 있던 그는 천천히 걸어 선수로 향했다. 바다를 가르고 전진하는 뱃머리 양쪽으로 하얀 물거품이 일었다.

먼, 아주 먼 수평선으로 천천히 노을이 번지는 중이었다.

그는 하염없이 기다렸다. 어린 별이 밤하늘에 태어나고, 달이 훤히 빛나고, 결국 수많은 별들이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다행이다. 적어도 밤하늘만큼은 고향의 밤하늘과 똑같아.

그는 북극성을 보며 그녀를 떠올렸다.

오직 단 하나의 길잡이 별. 빼어난 별. 너를 잊을 수 있을까?

*

걸그룹을 꿈꾸던 소녀는 너무나도 많다. 그러나 그 소녀들 중에 뱃사람이 되는 경우는?

어쩌면 그녀 혼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성 항해사라는 존재가 워낙 드물기도 하지만.

소월은 항해가 좋았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6개월간 실습항해사로 배를 탔을 때부터 느꼈다.

‘걸그룹 멤버보다 항해사가 더 잘 맞는 것 같은데?’바닷가 마을에서 자랐고, 아버지도 배를 탔으니 결국 뱃사람이 된 건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항해사로서의 매일매일 업무는 결코 만만치 않았지만 학교생활보다는 훨씬 나았다.

한국해양대학의 생활은 규율과 통제로 얽매여 있었다. 이른 기상과 구보, 각종 과업과 훈련, 유니폼과 위생 점검 등등.

차라리 배에서의 일상이 더 홀가분했다. 규칙적이긴 해도 일일이 간섭받진 않으니까.

배에는 체육관도 있고 노래방도 있다. 그녀가 처음 배를 탔을 때는 출항 후에는 인터넷을 사용할 수 없었지만 이젠 배에서도 인터넷 사용이 가능하다.

게다가 오직 바다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도 매혹적이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 오염이라고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해풍, 육지에서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절경들, 우주가 눈앞에 열린 감동을 주는 은하수, 현실인지 환상인지 헛갈리게 만드는 고래들, 사이좋은 돌고래 가족, 날아오르는 청새치, 전설의 새 같은 앨버트로스…….

길이 217미터, 무게 2만 6천 톤급 컨테이너선의 삼등 항해사. 그것이 소월의 일이었다.

딱 한 가지. 외로움이 문제였다.

배 안에서 마음에 드는 이성을 만나기도 어렵고, 배를 타는 상황을 이해해주고 기다려주는 남자친구를 육지에 만들어놓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몇 년 전에 아르헨티나의 어느 항구 도시에서 재미 삼아 본 점괘를 위로로 삼았다.

‘그대의 사랑은 바다 위에 있다.’

*

그날은 새로운 항해를 위해 배에 승선한 날이었다.

“잘 쉬었냐?”

학교 선배이기도 한 이등 항해사가 인사를 건넸다.

“넵! 선배님은요?”

“아오. 난 결혼 준비하느라 엄청 시달렸다.”

“뭐야! 복에 겨운 투정하시기는!”

“아 진짜 뭐가 그렇게 준비할 게 많냐? 아까워서라도 이혼 못 하겠더라.”

“큭큭큭큭큭. 그러게요. 저도 그러더라고요.”

“뭐가? 너 이혼해봤어? 결혼도 못 해본 놈이.”

“아니 연애할 때요. 저도 그동안 들인 노력이 아까워서 못 헤어질 때가 있더라고요.”

“윤소월 너도 연애란 걸 하니?”

“하! 이래 봬도 제가 걸그룹 준비생이었단 얘기 했나요, 안 했나요? 연애한 지 오래되긴 했지만 저는 여전히 매력적인 여자랍니다.”

소월은 간단한 댄스 동작을 보여주었지만 선배는 고개를 돌렸다. 장난치고 있는 둘 옆으로 누군가 다가오나 싶었다.

“안녕하십니까?”

굵직한 목소리에 돌아본 소월이 입을 떡 벌렸다. 아이돌 그룹 센터 같은 외모의 남자가 서 있었다.

“오늘 첫 승선을 하게 된 갑판원 강한해라고 합니다.”

아직 서른도 안 되어 보이는 나이. 그에 비해 묵직하고 차분한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눈빛은 형형하였으나, 평소에는 함부로 빛을 뿜고 싶지 않은 듯 빛을 죽이고 있었다.

“어…… 그래.”

이등 항해사가 어색하게 인사를 받았다.

“반가워요.”

소월은 간단하게 목례로 인사를 받았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새 갑판원은 큰 소리로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그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이등 항해사가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뭔 갑판원이 저리 훤칠해? 새 갑판원이 온다고 하더니 쟤였구나. 어릴 때부터 배를 타서 경력 10년이라고 하던데. 뱃사람 티가 전혀 안 나네?”

소월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디서 본 사람 같아. 혹시…… 설마? 아니겠지? 그런데 눈빛이…… 저런 눈빛은 세상에 한 명밖에 없잖아?

그러고 보니 새 갑판원의 침실은 바로 그녀 옆방이었다.

물어……볼까?

.

.

.

이번 항해는 믈라카 해협을 지나 싱가포르에 도착하는 일정이었다.

우려하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 항해 도중에 열대성 저기압이 태풍으로 순식간에 발달해버린 것이다.

피할 틈도 없었다. 바람의 세기는 풍속 50노트. 그러니까 초속으로는 25미터.

지상에서는 그리 큰 피해를 끼치지 않을 중형 태풍이지만 바다에서 만나는 태풍은 그 힘이 몇 배로 세어진다.

“각자 선실 개인물품 고정!”

선장의 지시에 따라 모든 크루가 선실을 점검했다.

원래 배에 있는 가구들은 기본적으로 고정되어 있다. 개인이 따로 갖다놓은 전자제품이나 필기도구, 컵, 액자 따위를 치워야 한다.

소월은 태풍이나 풍랑을 대비해 비치된 상자에 개인물품을 넣고 바닥에 고정했다.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물건은 기타였다.

그녀는 침대 이불 안에 기타를 넣고, 마치 정신병원에서 사람을 묶듯이 노끈으로 전체를 감아버렸다.

태풍은 제대로 세력을 키웠다. 엔간한 빌딩 높이에 학교 운동장 두 개를 이어붙인 크기의 컨테이너선이지만 태풍 속에서는 장난감 배처럼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다들 정해진 위치에서 자신의 안전을 지키며 태풍이 빠져나갈 때까지 버텨야 했다.

파도가 배를 할퀴고 바람이 으르릉거리는 소리. 매번 태풍을 만날 때마다 마치 거대한 괴물이 공격하는 착각이 들었다.

소리만이 아니다. 창밖으로 선실 밖을 보면 괴물의 이미지는 도리어 더 선명해진다.

캄캄한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번개! 거친 피부처럼 일렁이는 파도!

쏟아지는 빗줄기는 괴물의 아가리에서 흐르는 침 같았다.

무시무시한 시간이 흐르고 겨우 괴물의 공격에서 벗어나나 싶었다.

“조리장이 다쳤다!”

복도가 술렁이고 있었다.

오븐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주방으로 달려갔던 조리장이 식탁 모서리에 부딪쳐 갈비뼈가 부러진 것이었다. 부상이 꽤나 심했는지, 그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안의 장기가 다치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었다.

태풍은 지나갔지만 음식 댈 일이 걱정이었다. 배의 음식을 담당하는 사주부는 조리장과 조리수가 있는데, 하필 이번 항해의 조리수가 ‘싸롱’이었다. 지상에서의 용어로는 견습생.

나이도 어린 싸롱이 매일 20명 선원의 세 끼 식사를 감당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소월이 나설까 싶었다. 음식 솜씨가 영 별로였지만 그래도 긴 자취생활을 해온 그녀였다. 혼자 이것저것 많이 만들어 먹어본 경험이 있으니깐.

난감해하는 선원들 가운데로 그녀가 나가려고 하는데,

“제가 좀 도울까요?”

명료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겨우 어제 합류한 새 갑판원 한해였다.

“너 요리 잘하냐?”

일등 항해사는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사주부로도 2년 정도 일했습니다.”

“오, 그래? 그럼 한번 해봐.”

그렇게 그날 저녁은 한해의 손에서 나왔다.

“와우. 이거 완전 특식인데?”

다들 혀를 내두를 정도로 맛있었다.

삼겹살에 데리야키 소스로 맛을 내고, 채소는 따로 구워냈다. 거기에 한식과 동남아 음식 사이쯤에 있는 매콤한 볶음밥을 내주었다. 콩나물국은 또 얼마나 깔끔하고 시원한지.

“이야, 우리가 아주 보물을 태웠구나! 응?”

선장님도 흡족한 눈치였다.

“고맙습니다.”

한해는 애늙은이같이 덤덤한 표정으로 답할 뿐이었다.

소월은 배를 탄 이래 처음으로 과식을 한 것 같았다. 불룩해진 배를 쓸어내리며, 용기를 내보기로 결심했다.

.

.

.

그날 밤 당직이었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한해의 침실 문을 두드렸다.

“네.”

문이 열리기 전에 안에서 들리는 한해의 목소리. 언제나 차분하다.

문을 연 한해는 예상치 못한 방문에 눈을 치켜떴다.

“어, 삼항사님?”

“아, 밥 너무 맛있게 잘 먹었다고 인사하려고요.”

“별말씀을요. 다들 맛있게 드셔주셔서 제가 고맙습니다.”

“그리고…… 저기…… 뭐 좀 물어보려고요.”

“네. 말씀하십시오.”

말씀하십시오. 애늙은이 같은 말투는 뭐람. 하지만 가까이서 얼굴을 보니 알겠어. 맞구나…… 진짜 맞아…….

“왜 그렇게 보십니까?”

“한해 씨 혹시 고향이 울진이에요?”

그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맞구나! 저도 울진이에요!”

“배 타면서 사투리를 안 쓰는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사투리는 저도 안 쓰고요. 낯이 익어서요.”

“저를 안다고요?”

“오빠 엄청 인기 많았던 오빠 맞죠? 태풍 때 사고로…….”

소월은 신나서 말하다가 말꼬리를 흐렸다.

“아, 미안해요. 반가운 마음에 그만…….”

“아닙니다. 항해사님이 알고 계신 사람이 제가 맞는 것 같습니다.”

“아, 진짜 반갑다! 배 타고 고향 사람 처음 만나 봐요!”

그녀는 함박웃음을 지었지만 한해는 입꼬리만 살짝 올릴 뿐이었다.

“저도 신기하네요. 얼굴만 보고 절 기억하신다니.”

그걸 수밖에. 이름은 잊었지만 한해는 고향 마을 최고의 셀럽이었으니까.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그를 한 번쯤 마음에 품지 않았던 여자애가 있을까?

소월 역시 그랬다. 겨우 중학생이 된 그녀의 첫사랑이었다.

자전거를 타는 모습, 수영하는 모습, 훌쩍 긴 다리로 성큼성큼 바닷가를 걷는 모습……

그녀가 훔쳐본 모습만 해도 수십 종류의 화보 사진을 만들고 남았다.

침몰사고 이후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는 얘기까지만 들었는데, 여기 있었구나!

한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삼항사님은 저보다 좀 어려 보이시는데.”

나이를 확인해보니 한해가 세 살 오빠였다.

그녀의 나이를 확인한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그럼 혹시 수진이라고 아십니까? 한 살 언니일 텐데. 어차피 학교가 하나밖에 없었으니.”

“수진 언니요? 수진…… 흠. 잘 기억 안 나네요. 동갑이라면 이름을 거의 알 텐데.”

“그렇군요.”

왠지 서운해하는 그의 표정을 보며 이유가 궁금했다.

“항해 없을 때 찾아보면 되잖아요? 연락처를 모르시나? 요즘은 SNS 뒤지면 엔간하면 다 찾는데. 제가 알아봐드릴까요? 고향 친구들 중에 가끔 연락하는 친구가 있는데.”

“아닙니다! 연락은 하면 안 되고요.”

“연락을 하면 안 된다고?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건…… 말씀드리기가 좀 곤란합니다.”

“자꾸 더 궁금하게 만드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진 없는데…… 하여튼 알겠어요.”

그녀는 손을 쓱 내밀었다.

“반가워요, 고향 오빠.”

“반갑습니다.”

악수. 맞닿은 시선. 그리고 초승달같이 가느다란 미소.

그와 주고받은 것들이었다.

*

선원 중에서도 가장 직급이 낮은 축인 갑판원을 위한 선실은 고시원만큼 좁았다.

남들보다 훨씬 더 체격이 큰 한해에게 선실은 유독 더 좁아 보였다. 특히 지금처럼 작은 책상에 웅숭그리고 앉아 편지를 쓸 때면 더더욱.

보고 싶은 동생 수진이에게

매일 편지를 쓰면서 늘 인사도 똑같고 내 일상도 비슷해서 괜히 민망하네.

언제나처럼 운동을 마치고 방에 들어와서 잠들기 전에 편지를 쓴다.

오늘은 나에게 특별한 날이야. 문득 생각해보니 원양어선만 계속 타다가 컨테이너선을 탄 지 2년째 되는 날이더라고.

남미까지 오징어를 잡으러 가고, 눈앞에서 동료가 로프에 쓸려 바다로 날아가고, 며칠 동안 잠도 못 자면서 꽁치를 쓸어 담던 시절에 비하면 요즘은 너무 안전하고 편해졌지.

그에 비해 요즘은 잠도 충분히 규칙적으로 자고 근무 환경도 정말 좋아. 그래서 그런지 편지 내용이 좀 밋밋해지긴 했지?

요즘도 매번 항해를 마치고 육지에 오를 때마다 내 마음과 싸워.

이제는 수진이에게 안부 연락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헤어진 지 10년이 넘었으니…… 남들처럼 살았다면 벌써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까지 했을 나이니까……. 이제 연락해도 수진이의 인생이 흔들릴 일은 없지 않을까?

널 보고 싶어서, 너의 안부가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아.

얼굴은 어떻게 변했는지? 남자친구는 있는지? 설마 벌써 결혼한 건 아니겠지? 건강한지…… 행복한지…….

그립다. 미치도록 그립다.

어쩌면 나는 지금까지 그런 그리움을 원동력 삼아 버텼는지도 몰라.

이제 나는 엄마가 말한 바다의 저주로부터 벗어난 것 같아. 두렵지 않아. 사회에 나가서 다른 일을 할 만큼 돈도 많이 모았고. 어쩌면 곧 너의 앞에 나타날 수 있을 거야. 부치지 못했던 수백 통의 편지를 손에 들고.

그럼 넌 알게 되겠지. 내가 널 얼마가 그리워했는지. 왜 그동안 널 찾을 수 없었는지.

고마워. 그 애타는 그리움이 나를 매일 채찍질하고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주었으니.

오늘도 너를 향해 파도를 가르는…… 사랑하는 오빠가.

ps. 아참, 사토시 씨가 꿈에 나왔어. 우리 이야기를 다 아는, 5년쯤 전쯤 편지에 자주 썼던 오빠의 비밀 친구 말이야. 너에게 안부를 전해달래.

한해는 손으로 꾹꾹 눌러 쓴 편지를 봉투에 넣었다. 봉투 겉에 ‘사랑하는 동생 수진이에게’라고 쓰고 번호를 적었다. 이번 편지는 611번이었다.

*

1년 넘게 같이 배를 타면서 소월은 한해를 밀착 관찰했다.

아무리 허드렛일을 할 때도 그는 늘 최선을 다했고, 제일 말단인 갑판원이라는 처지인데도 태도만큼은 선장인 양 당당했다.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고 그 흔한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뭔가 대단한 미래를 믿고 준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씩 친해진 뒤에 그의 방에 놀러 갔다가 깜짝 놀란 적도 있었다. 주식은 물론이고 부동산이나 각종 경매 관련한 책들을 책장이 헤질 정도로 탐독 중이었다.

“이런 데 관심이 있었어요? 직접 투자도 하고요?”

“네. 어차피 배를 타면 돈 쓸 일이 없으니까요.”

“진짜 대단하시다.”

“얼마 안 돼요. 아직은.”

아직은…… 한해는 그 단어를 유난히 힘주어 발음했다.

그는 육체를 연마하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다들 지쳐 늘어져 있기 마련인 저녁 시간에 매일 한두 시간씩 구슬땀을 흘리며 운동을 했고, 늘 최상의 근육질 몸매를 유지했다.

그는 아무도 모르는 자신만의 먼 목적지를 향해 묵묵히 나아가는 배처럼 보였다.

직위는 삼항사인 소월이 갑판원이 한해보다 훨씬 더 상급자였지만 오히려 소월이 그를 졸졸 따라다니곤 했다. 날이 갈수록 둘은 친해졌고 호칭도 조금 편해지면 어떨까 싶기도 했다.

“한해 씨. 우리 둘이 있을 때는 말 편하게 하는 거 어때요? 고향 오빤데.”

“고향에 가면 편하게 하겠습니다. 여긴 배니까 지휘 체계에 맞는 말을 쓰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해요. 저는 둘만 있을 때는 오빠라고 부를 테니까.”

“그것까지 제가 막을 순 없겠네요. 삼항사 님.”

또박또박 ‘삼항사 님’이라고 부르는 모습이 왠지 얄밉기도 했다.

소월은 궁금했다. 이 뻣뻣한 남자와 같이 고향에 갈 일이 있을까?

*

신라호텔 다이너스티 홀.

국내 굴지의 건설사 ‘태화 건설’ 대표 이태화 회장의 아들 이강 군의 결혼식으로 하객들이 붐비는 가운데, 마치 태풍의 눈처럼 유일하게 고요한 곳이 신부 대기실이었다.

오늘의 신부 진수진 양은 웨딩드레스 입은 마네킹처럼 굳어버렸다.

죽은 줄만 알았던 오빠가 나타나 앞에 서 있다.

14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하게, 단번에 알겠어. 바다 오빠야, 머리에서 발끝까지.

최고급 슈트에 먼지 한 톨 없이 광이 나는 가죽구두를 신은 그는 신랑 대신 그녀의 손을 잡고 식장에 들어가도 될 정도로 완벽한 모습이었다.

신부를 응시하는 그의 눈에는 최고의 작가가 한 페이지 가득 묘사해도 모자랄 만큼 깊고 복잡한 감정들이 뒤엉켜 있었다.

그중 으뜸은 반가움이었다.

“오빠……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수진의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한해는 대답 대신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녀는 절로 눈이 감겼다.

오빠는 죽었잖아. 다들 오빠가 죽었다고 했는데. 정말 오빠 맞아?

“수진아.”

바다처럼 넓고 따스한 품, 수진의 이름을 부르는 낮은 저음의 목소리. 분명 바다 오빠였다.

오빠는 죽지 않았다. 수진의 눈에서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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