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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뺏겠습니다-2화 (2/92)

2화

독립.

강의 집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수진이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제일 먼저 결정한 일이었다. 더 이상 신세를 지기 너무 미안해서였다.

당연히 강은 만류했다. 그는 드넓은 집을 팔로 휘저었다.

“이 집 안 보여? 백 평짜리 집에 방 다섯 개 화장실이 네 개야. 아버지는 일 년에 절반은 해외 출장으로 나가 계시고. 겨우 너랑 나, 우리 어머니 세 명인데. 너 하나 같이 사는 게 뭐가 미안해?”

“마음만은 너무 고마워, 오빠. 지금까지 먹여주고 재워주고 학비 내주신 것만 해도 충분해. 내가 꼭 성공해서 은혜는 갚을게.”

“나가면 어디로 갈 건데?”

“내 깜냥에 맞춰서 가야지. 어디든. 아마 고시원이 되지 않을까?”

“고시원? 수진아. 너 미쳤어? 내가 그 꼴 못 봐.”

“오빠한테 난 이제 겨우 걸음마를 뗀 아이 같아 보이겠지. 하지만 느리고 서툴다고 계속 손을 잡아주면 혼자 걸을 수 없어.”

“고시원은 안 돼. 내가 도와줄 테니까 최소한 작은 아파트라도…….”

“나 좀 놔줘.”

수진이 강에게 그렇게 단호했던 적은 없었다.

사실 그녀는 강의 배려를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그가 마음의 흐름을 애써 막아왔다는 걸.

입은 거짓을 담기 쉽지만 눈은 그러기 힘든 법.

아무리 넓은 집이라 해도, 한집에 살고 같은 학교를 다니면서 마주칠 때마다 읽을 수 있었다. 애써 담담해 보이려고 해도 그의 시선에 깃든 남자의 욕망을.

너를 갖고 싶어.

그런 욕망마저 참고 배려해준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그래서 그녀도 늘 따뜻하게 그를 대해주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신세를 지며 살 순 없다.

어려서, 약해서, 무능력해서,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미성년자일 때는 몰라도. 이제는 어른이니까.

놔달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수진 앞에서 강은 허물어졌다.

강의 그 표정…… 전에도 본 적이 있다. 어린 시절 그녀의 고향 울진에서, 사랑 고백을 거절했을 때 봤던 그 표정.

실망과 당혹감, 그리고 분노가 뒤섞인…… 거대한 좌절.

미안해. 나는 늘 오빠를 거절하는 사람이네.

“수진아. 내가 널 가뒀니?”

“아니. 날 잡아줬지. 쓰러지지 않도록. 하지만 이젠 혼자 걷는 법을 배워야 할 때야.”

“그 의지는 존중할게. 그리고 존경할게. 하지만 걸음마를 자갈밭에서 시작할 필요는 없잖아.”

“내 주변이 자갈밭이라면, 자갈밭에서 시작해야지.”

“내가 있잖아!”

“알아. 오빠의 마음은 너무나도 고맙게 받을게.”

강은 잘근잘근 씹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도 내가 싫은 거니?”

“난 오빠가 싫었던 적이 한 번도 없는데?”

강은 차마 대답이 두려워 묻지 못하던 질문을 꺼냈다.

“아직도…… 바다 형 때문이니?”

수진은 아득해졌다.

그랬지. 예전에도 이렇게 물었던 적이 있었지.

‘아직도’라는 단서는 없었지만, 그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지. 그때도 답은 하지 않았어. 고작 사랑이라는 단어로 한정 지을 수 있을까 싶었거든. 바다 오빠에 대한 내 마음이 고작 사랑이 아닌 것 같았거든.

지금은 더 모르겠어. 오빠와 헤어진 지 5년. 그런데도…….

수진은 또 대답을 거부했다.

이번에도 강은 다그쳐 묻지 않았다. 아득한 슬픔을 담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

“그래. 놔줄게.”

.

.

.

그렇게 어렵사리 독립을 시작했지만…….

말이 씨가 된다고 했나? 서울에서 그녀의 알바비로 구할 수 있는 거처는 세 종류밖에 없었다. 반지하, 옥탑방, 고시원.

수진은 정말로 고시원에서 스무 살 생일을 맞아야 했다.

다만 강이 찾아와주긴 했다. 대학생이 타기에는 부담스러운 최고급 스포츠카에 생일 케이크를 싣고. 고시원에 사는 사람들이 놀라서 차 주변으로 모여들 정도였다.

그는 일주일에도 몇 번씩, 거의 하루걸러 하루꼴로 수진을 찾아왔다.

“이렇게 좁은 데 살수록 바람도 자주 쐬고 영양보충도 잘해야 하는 거야.”

핑계도 좋지.

지극정성이 얼마나 갈까 싶었다. 그런데 사계절을 넘게 갔다.

게다가 그는 더 이상 수진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주겠다고, 그러니 받으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기다릴 뿐이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고시원 주민들뿐 아니라 수진의 학교 친구들도 강의 존재에 대해 다 알았다.

“아니 그렇게 너 좋다고 쫓아다니는 재벌 남친이 있는데 왜 고시원에 살아? 조금만 도와달라고 해. 니가 아주 복에 겨웠구나.”

다들 그렇게 말했고 수진은 대답을 속으로 삭였다.

아니. 육체의 불편은 참을 수 있지만 마음이 불편한 건 참기 힘들어.

수진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이 불편한 이유는…… 한해 때문이었다.

SNS를 통해 못 찾는 사람이 없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원양 어선을 탄 한해의 SNS 계정은 아예 없었다. 심지어 핸드폰도 없애는 바람에 연락할 길이 없었다.

강이 오빠에게 애타게 물어봤지만 그 역시 연락처가 없다고 했다. 먼바다를 떠돌기 때문에 연락할 방법도 없다고.

한해는 정말 작정하고, 그녀를 포함한 모든 과거와 등졌다. 확실했다.

그녀는 한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과거를 등지지 않고서는, 미련을 버리지 않고선, 지옥 같은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테니. 아득한 고통의 세월을 견딜 수 없을 테니. 그러니 나도 오빠의 결정을 존중하고 흔들지 말아야 해…….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가슴은 그러지 못했다.

‘우리…… 서로를 위해 서로를 잊자.’그 말만 남기고 한해가 떠난 지 벌써 5년이 넘었다.

그런데 어쩌지. 잊히지가 않는데. 당장 내일이라도 오빠가 찾아올 것 같아. 껑충한 몸으로 성큼성큼 다가오겠지.

“수진아!”

투박하고 큰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고. 오랜만에 만났으니 꼭 안아주고 들어줘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만 해도 기쁨의 눈물이 고이는, 바다 오빠는 그런 사람이었다.

좁디좁은 고시원에 누워서 매일같이 떠올렸다.

쏟아지는 별빛 속에 나란히 앉아 있던 절벽을. 눈부시게 밀려드는 파도 속으로 함께 몸을 던지던 날들을. 오빠의 자전거 뒤에 몸을 싣고 항구를 달리던 어느 오후를. 짭조름한 바다 냄새와 갈매기 울음소리를.

그녀는 모두 다 온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곰팡이 냄새 나는 고시원에서도 그와의 기억만큼은 상하지 않았다. 상하지 않도록 매일 꼭 품고 잤으니까.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그가 짠 하고 나타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리 기도해도.

.

.

.

바다 오빠의 소식이 들려온 날은 몹시 추운 겨울의 한복판이었다.

그가 탄 배가 뒤집혔다고 했다. 멀리 남아메리카 앞바다에서. 선원들은 모두 죽었다고 했다.

강이 전해준 소식이었다.

처음엔 믿지 않았다. 하지만 강이 보여준 신문 기사에 똑똑히 나와 있었다.

선원 명단에 들어가 있는 이름, 강한해.

그래도 수진은 믿을 수 없었고, 믿고 싶지 않았다. 바다 오빠가 탄 배가 소속되어 있는 해운회사를 직접 찾아가 확인했다.

다른 유족들이 오열하는 틈에서 수진은 관계자에게 뉴스 기사를 보여주며 소리쳤다.

“이 명단이 맞나요? 우리 오빠가 정말 죽었어요? 당신들이 확인했어요?”

그녀는 반쯤 정신 나간 상태에서 울부짖었고 관계자는 고개 숙인 채 그저 송구스럽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렇구나. 바다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한해 오빠까지 집어삼키고 말았구나.

수진은 떠나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바다 오빠가 있는 곳으로.

그래서 무작정 남미로 떠나 페루의 순례길을 걸었다.

찾지 못한 오빠의 육신이…… 어쩌면 고기밥이 되어 산산이 흩어졌을 그의 영혼이 떠다니는 바다를 보면서 걸었다. 감정의 끝까지 걸어가 보았다.

그렇게 하지 않고선…… 도저히 약속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오빠와의 약속. 어떻게든 살아내겠다고 한 약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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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담하려던 의사는 완전히 수진의 이야기에 빠져든 모양이었다.

“순례길을 다 걷고 났더니 힘이 생기던가요?”

“모르겠어요. 저는 한국으로 돌아왔고…… 다시 복학도 하고 아르바이트 자리도 구했죠.”

“남편분하고는?”

“그이는 변함없이 제 곁을 지켜줬어요. 제가 허락하는 거리를 유지하면서.”

“와, 정말 대단하네요. 그때만 해도 연인으로 발전하지 않았다는 거죠?”

“제가 취직하기 전까지는요. 그때부터 그이와 연인 사이가 되었죠.”

“정말 대단한 러브스토리네요.”

“그렇게 몇 년을 만나고, 내일이 결혼식이네요.”

“축하드려요!”

“아…….”

수진은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가끔씩 찾아오는 두통이었다. 머리 한구석이 바늘에 찔리는 것 같은 고약한 아픔.

“괜찮으세요?”

“잠시만요. 금방 지나가니까요.”

수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1분쯤 지나자 두통은 사라졌다. 그녀는 희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마치 이 두통이 오늘의 상담 같네요.”

“무슨 뜻이죠?”

“아픈데, 지나가고 나면 아프기 전보다 머리가 맑아지거든요.”

“오늘 상담도 그랬나요?”

“네. 다 말씀드리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요.”

“수진 씨처럼 결혼 전에 정신과를 찾는 분들이 많습니다.”

“정말요?”

“그럼요. 사실 그런 경우 의사로서 제가 해드릴 수 있는 말씀은 많지 않아요. 저는 그저 주의 깊게 듣다가 정신과적인 징후들…… 이를테면 트라우마라든가, 피해의식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보일 때만 추가 상담을 권해드리죠.”

“저는 어떤가요?”

“놀라운 정신력의 소유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닌데…… 금방도 몇 번이나 울었잖아요.”

“그게 건강한 겁니다. 불굴의 의지와 건강한 감정을 함께 갖고 있잖아요.”

“갑자기 칭찬을 해주시니…….”

수진은 상담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남편분이 왜 그렇게 일편단심으로 수진 씨를 쫓아다녔는지 너무 잘 알겠네요.”

“저는 그걸 잘 모르겠던데요?”

“이렇게 겉과 속이 모두 아름다운 분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거겠죠. 정말 흔치 않습니다.”

“에이…….”

“저도 남자잖습니까. 수진 씨는 신에게 아주 많은 것을 선물받은 영혼입니다. 외모부터가…… 신비로운 느낌이랄까. 실례되는 말씀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렇게 빛나는 눈동자는 처음이네요. 다만 인생역정을 들어보니…… 남들보다 상실의 아픔이 유난히 많긴 했네요.”

너무 많았지. 소중한 사람들이 모두 나를 떠났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잘해오셨고, 앞으로도 잘하실 겁니다. 자기 자신을 의심하지 말고, 행복하게 사시면 됩니다.”

“의심…… 사실 그것 때문에 온 것 같기도 해요.”

“어떤 점에서죠?”

“제가 남편을 정말로 사랑하는지…… 확신이 서지 않아요.”

“하하하. 결혼을 앞두고 이곳을 찾는 분들 열에 아홉이 다 하는 이야기예요. 저만해도 결혼할 때 아내에게 확신이 없었는데요.

결혼이 인생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이긴 하지만, 대단한 운명 같은 걸로 여기면 나중에 실망하기 쉬워요.

결혼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삶의 형태 중 하나로 생각하시는 게 정신건강에 좋습니다. 이건 의사가 아니라 유경험자로서 드리는 말씀. 하하하.”

의사의 호쾌한 웃음소리에 수진도 미소 지었다.

운명의 잣대로 잰다고 해도, 강은 충분히 합격선에 들 테지.

돌이켜보니 그이를 만난 지 14년이 지났다. 아무리 밀어내고 선을 그어도, 선 바로 앞에서 그는 기다렸다.

다른 남자에게 마음이 가 있었던 길고 긴 시간. 그동안 변하지 않고 나를 기다려준 사람.

이런 사람이 운명이 아니라면…… 누가 운명이겠어?

수진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병원 문을 나섰다. 쏟아지는 햇살이 그녀의 내일을 축복하는 듯했다.

휴가를 냈으니 회사에 들어갈 필요는 없지. 집에 일찍 들어가서 일찍 자야겠다. 내일 아침부터 신부 화장이 있으니.

수진은 바쁜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당장 그녀의 발걸음은 지하철역을 향하고 있지만 내일 그녀가 도착할 곳이 어디인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

톨스토이의 고전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행복한 가정의 모습은 다들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의 모습은 집집마다 다르다.’

제아무리 뛰어난 관찰력의 대문호 톨스토이라고 해도, 만약 강의 집을 관찰한다면 판단할 수 없으리라. 행복한 가정인지 불행한 가정인지.

겉에서 보기에는 완벽했다.

청담동의 펜트하우스,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예술품 레벨의 가구들, 가사도우미가 모델하우스처럼 철저하게 관리하는 청소 상태.

이런 외형적인 것들도 좋아 보였지만, 집에서 말싸움이 벌어지는 일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가정이라고 말하기에는 선뜻 수긍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있었다.

언성이 높아지는 일도 없지만 다정하게 웃는 얼굴도 없다.

겨우 세 식구. 그마저도 아빠는 일 년의 반을 해외 출장 명목으로 집을 비운다. 그런데도 셋은 서로에게 거리를 두었다. 보통의 가족이 설정하는 거리보다 몇 배는 더 먼 거리로 서로를 견제했다.

그런 풍경은 아들의 결혼식 전날인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세 식구가 식사를 하는 대리석 테이블에는 한참 동안 대화가 없었다.

교회마냥 틀어놓은 찬송가 소리가 아니었다면 식기들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들렸을 터.

먼저 식사를 마친 강이 수저를 내려놓았다.

아버지가 식사를 마치기 전까지는 자리를 뜨지 못한다. 어린 시절, 무심코 그 룰을 잊었다가 값비싼 접시들이 박살나는 꼴을 몇 번 보았다.

“속이 시원하냐?”

식사가 시작된 후 처음 나온 말. 또 다른 룰이었다. 아버지가 입을 떼기 전에는 아무도 말을 하지 못한다.

“네?”

“수진이하고 결혼해서, 속이 시원하냐고.”

“죄송합니다.”

“궁금하지 않냐? 내가 심한 반대를 하지 않은 이유가?”

정말 그랬다.

아버지 앞에서 수진이하고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꺼냈던 그 순간. 그의 인생에서 가장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뭘로 때리시려나? 골프채? 그건 너무 식상하지. 손과 발? 성이 차지 않으실 거야. 칼로 협박을 하시려나? 경영학과를 안 가고 철학과를 가고 싶다는 말을 꺼냈을 때처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왼쪽 어깨가 욱신거렸다. 사춘기 때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대들었다가 정말로 칼에 찔린 자리였다.

지금은 기억조차 잘 나지 않는 사소한 일 때문에도, 아버지는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태도를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데 무려 결혼 이야기를 꺼냈는데도 아버지는 잠자코 있었다. 재벌 2세나 권력자의 딸도 아니고, 집에 얹혀살던 수진과 결혼하겠다는데.

고아에 무일푼에, 경력이라고는 회사에 몇 년 다닌 것밖에 없는 여자, 몇 년이나 집에서 얹혀살던 아이와 결혼하겠다는데 아버지는 인상을 쓰곤 그만이었다.

아들의 의사를 몇 번 확인한 뒤, 그럼 그렇게 하라고 승낙했다.

충격적인 반응이었다. 지켜보던 어머니가 놀라서 눈을 치켜뜰 정도로. 물론 감히 토를 달지는 못했지만.

아버지가 승낙한 뒤로 결혼 준비는 일사천리였다. 아버지는 회사 직원들을 시켜 모든 것을 최고급으로 준비시켰으니까.

“네…… 조금…… 놀랐습니다. 이렇게 쉽게 결혼까지 하게 될 줄 몰랐습니다.”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냐?”

정말 궁금했지만, 차마 묻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모르겠습니다.”

“뭔가가 아쉬운 게 있다면 그 아쉬운 부분을 채워줄 사람하고 결혼하는 게 좋지. 돈이 아쉬우면 돈 많은 사람과. 외모가 초라할 때는 후세를 위해 뛰어난 외모의 소유자에게 본능적으로 끌리기도 하고. 뭐 그런 식으로. 하지만 아쉬운 게 없을 때의 결혼은…….”

아버지는 어머니를 슬쩍 보곤 피식 웃었다.

“하찮은 존재와 사는 편이 홀가분하지.”

어머니는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였다.

폭언과 폭력과 협박에 수십 년 길들여진 모습.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부잣집 사모님이지만, 남편 앞에서만큼은 심리적으로 완전히 굴종당하는 이중적 모습.

강이 그동안 봐온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왜냐? 완벽하게 통제가 가능하거든.”

강은 수긍하는 척했지만 속으로 말했다.

아버지. 그런 논리라면 완전히 잘못 알고 계신 겁니다. 수진이는 하찮은 존재가 아닐뿐더러, 제가 통제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니에요.

그러나 또 한편으로 자신에게 물었다.

그런 그녀를 갖고 싶어서, 통제하고 싶어서, 굴복시키고 싶어서 결혼을 하려는 건가? 합법적으로 그녀를 얽어매고 싶어서?

아니다. 그런 마음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야. 정말…… 정말 그것만은 아니잖아. 그렇지?

나는 정말 그녀를 사랑한다. 간절히 원한다. 간절히…….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자신만만한 남자 이강을 주눅 들게 만드는 존재는 딱 두 명.

아이러니하게도 아내로 삼고 늘 곁에 두고 싶은 수진이 그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가장 오래전부터 갖고 싶었지만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존재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가 그를 밀어낼수록 더욱더 간절히 그녀를 욕망하게 되었다. 원하는 마음, 소유하고 싶은 마음 그 자체가 너무 커져서 그 안에 있는 사랑의 모습이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자신 있지? 집안일 따위에 신경 쓰지 않고 우리의 왕국을 이어받을 자신.”

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 따위 운운했다가 결혼 하루 전에 얼굴이 상처투성이로 변하면 안 되니까.

*

아침이 밝았다.

동쪽 하늘에서 일어난 태양이 뚜벅뚜벅 걸어 하늘 가운데쯤 이르렀을 무렵. 신라호텔 다이너스티 홀 앞은 수많은 하객으로 분주했다.

국내 굴지의 건설사 ‘태화 건설’ 대표 이태화 회장의 아들 이강 군의 결혼식 때문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억대의 돈이 들어간 화려한 결혼식이었는데 여느 결혼식하고 다른 점이 몇 가지 있었다.

보통은 신랑 신부 측 축의금을 나눠서 받는데, 이 결혼식에서는 한곳에서 같이 축의금을 받았다. 축의금의 99%가 신랑 측에서 왔기 때문이다.

연회장 안의 테이블도 신랑 신부 측 구분이 없었다. 어차피 하객의 99%는 신랑 측 하객이기 때문.

수진은 웨딩드레스를 입고 신부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명사들의 결혼을 주로 맡는 웨딩 전문 업체 직원들이 시녀처럼 그녀의 곁을 지켰다.

직원들은 뭔가 좀 의아하다는 눈짓을 주고받았다.

‘신부대기실을 찾는 사람이 너무 없지 않아?’친척은 아예 없고, 학교 친구도 별로, 회사 동료 열댓 명이 전부였다.

그 얼마 안 되는 인원이 이 성대한 결혼식에서 신부 측 하객의 전부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더 놀랐겠지만.

보통은 식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신부대기실이 붐벼서 하객을 내보내는 게 일이었는데, 오늘은 정반대. 아직 식이 20분이나 남았는데 텅 비어버린 신부대기실이라니.

하지만 홀로 앉아 있는 신부의 미모는 그 어떤 신부보다 빛이 났다. 꿋꿋이 왕국을 지키는 여왕처럼 고고하달까.

표정의 변화도 없이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신부를 보며 웨딩업체 직원들은 궁금해졌다.

대체 무슨 생각을 저렇게 골똘히 하는 걸까?

“10분 남았습니다.”

직원 한 명이 수진에게 귀띔해주었다.

이제 대기실에서 나갈 시간. 한 사람의 아내로, 한 집안의 며느리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시간이 왔다.

복잡한 상념들은 어제 다 정리했잖아. 그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도 약속은 지켜야지.

바다 오빠. 보고 있어? 나 이제 결혼해. 오빠하고 약속한 대로 어떻게든 살아내고 있어. 울지 않을게. 웃으면서 살아갈게. 어떻게든…….

스스로에게 다짐한 그녀가 일어서는 순간이었다.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웨딩드레스 치맛자락이 스르륵 바닥에 펼쳐지던 순간.

“수진아.”

낯익은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고개를 돌린 그녀의 호흡이 잠시 멈추었다.

강한해. 그 사람이 서 있다.

푸른 바다를 닮은 미소를 머금고 손을 흔들며, 마치 어제도 그제도 봤던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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