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엎어진 둥지 아래에 어찌 멀쩡할 알이 있을까요. 당신 말은 아주 좋아요. 하지만 만약 정말 그 날이 오면 나는 반드시 내 고향을 뒤따라 갈 거예요. 그리고 나의 생활과 나라를 파괴한 당신을 영원히 증오할 거예요. 나는 당신과 가지 않을 거예요. 화려한 궁전이든, 존귀한 신분이든, 모두 내가 원하는 게 아니니까요.”
“그럼,”
탁칠이 돌연 차갑게 웃었다.
“네가 원하는 것은 부운석인가?”
이렇게 냉혹하고 무정한 여자에게 또 미련을 가져 무엇 할까? 그녀가 원하는 것, 바라는 것은 지금까지 자신이었던 적이 없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말했다.
“이 말만 해요. 나와 합작할 의향이 있어요, 없어요?”
그녀는 한 가닥 감동도 없는 표정이었고 오직 냉담하게 일에 대해서만 논했다. 탁칠이 돌연 웃었다.
“너와 합작이라면 당연히 할 의향이 있지.”
그가 말했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 마지막까지 부운석이 무사하다면 너는 나와 서융에 가야 해.”
“좋아요.”
한안이 호쾌하게 대답했다.
이제 탁칠이 놀랄 차례였다. 한안의 표정을 보고 탁칠은 그녀가 가차 없이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렇게 쉽게 대답하다니. 탁칠은 먼저 의심을 품었다. 그러나 한안은 자신의 말에 신용을 지키는 사람인 지라 자신이 말한 일은 꼭 행했다. 비록 의혹이 조금 들었지만 마음이 좀 풀렸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 지켜.”
한안은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고 탁칠은 그녀의 이전 성격에 비추어 그녀의 행동을 미루어 판단하느라 한안의 승낙이 그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는 것이란 걸 알지 못했다. 미래의 일을 누가 명확히 말할 수 있을까. 부운석이 화를 피할 수 있을지 없을지조차도 지금은 미지수였다. 하물며 그의 몸에 있는 한독……. 탁칠의 말에 대해 그저 임시변통의 계책을 쓴 것뿐이었다. 상황을 보아가며 그때그때 말하는 것이라 만약 탁칠이 진심이라고 한다 해도 한안은 그저 속으로 미안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한안이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하지?”
탁칠이 물었다. 그는 한안에게 이미 계획이 있음을 알았다. 자신은 그저 전력을 다해 그녀에게 보조를 맞추면 됐다.
한안이 말했다.
“현청왕부로 가요.”
일이 비록 대강 그런대로 갖추어졌지만 몇몇 문제는 확실한 증명을 얻을 필요가 있었다. 부운석은 자신에게 전혀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지만, 어쩌면 다 털어놓고 말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마음속에 은은하게 통증이 일었다. 만약 정말 방법이 없다면 그럼 또 어떻게 해야 하나?
탁칠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한안이 즉각 현청왕부에 갈 생각을 하니 그는 대단히 불쾌했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한안을 가로막으려 해 봐야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그녀에게 강요할 수가 없었다. 곧 마지못해 말했다.
“가자.”
한안이 탁칠의 기분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한 건지 어떤 건지 모르겠지만 조금도 의식하지 않고 대답했다.
“좋아요.”
현청왕부.
오늘 현청왕부는 유달리 죽음 같은 정적이 흘렀다. 이 정적 속에서 마치 불안이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일종의 영문 모를 초조한 공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서재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바깥의 두 시위는 단단히 문을 지키고 있었다. 한 미모의 여자가 문 앞에 서 있었는데 무슨 악담을 퍼붓는 것 같았다. 곧 여자는 손에 강편(鋼鞭: 쇠막대기 몇 개를 고리로 이어 만든 고대 병기)을 쥐고 두 시위의 몸을 힘껏 후려쳤다. 마치 문을 들어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시위는 여자가 강편으로 그들의 몸 위를 후려치는데도 꿈쩍하지 않고 문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것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았다.
“너희, 비켜. 나는 들어가서 그를 구하려는 거야!”
미모의 여자는 자신이 어떻게 해도 들어갈 수 없는 것을 보고 격분해서 미친 듯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공주. 이것은 왕야의 명령입니다.”
그중 한 시위가 말했다.
이 여자는 바로 이림나였다. 이 말을 듣고 그녀는 바로 대노하여 말했다.
“나는 너희의 왕비다, 왕비! 감히 너희가 내 말을 안 듣는 것이냐!”
두 시위 모두 꿈쩍도 하지 않았고 도리어 뜰 안에서 청소를 하던 몇 명의 하녀가 한옆에서 서로 알겠다는 눈빛을 교환했다. 이 서융 공주는 비록 현청왕부에 들어와 산다고 말하면서 현청왕비를 자처하고 있지만 왕야는 근본적으로 그녀와 만나는 일이 아주 적었다. 서융 공주가 노기등등해서 왕야가 어딜 갔느냐고 하인들에게 묻는 것이 자주 목격되었고 왕야는 서융공주에 대해서 듣지도 묻지도 않는 것이 거의 아무런 접점도 없는 것 같았다. 당초 장가 4소저를 대할 때와는 차이가 아주 심했다. 하녀들은 일 년 내내 대저택 안에서 생활하다 보니 이것이 왕야가 이림나에 대해 마음이 없다는 표현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인들은 형세 변화를 보아가며 태도를 바꾸는 능력이 있었다. 그들은 서융 공주가 총애받지 못하는 것을 본데다가 이림나 본인의 성격이 대단히 좋지 않아 걸핏하면 하인들을 몹시 때리고 욕하니 하인들은 점점 그녀에 대해 상당한 불만이 생겨났고 심지어 비밀리에 그녀를 애먹였다. 저택 안의 하인들은 절대 얕보지 말아야 하거늘. 하인들은 비록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수작 부리는 것을 논하자고 한다면 상대에게 엄청난 손해를 입혔다.
이림나는 이런 환경 속에서 갈수록 초조함을 느꼈다. 부운석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가 냉담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하인들마저 모두가 연합해서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이전 서융에 있을 때 사람마다 그녀의 고귀함과 미모를 찬미하고 아첨하던 것을 생각하면 어디 지금과 같을까. 하인들은 뒤에서 그녀가 패전국의 예물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분노했지만 헛소문을 떠들고 다니는 사람을 손 봐주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무슨 방법이 있을까? 유언비어는 여전히 계속해서 돌 테고 그렇다고 모든 하인을 전부 다 죽여 버릴 수는 없었다. 설령 그녀가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해도 현청왕부 안에서는 그렇게 할 권리가 없었다. 왜냐하면 부운석이 그녀를 지지해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림나는 자신이 장한안을 대신하여 현청왕부에 들어와 살 수 있었던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부운석의 한독 문제를 도와줄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비록 완전히 치료할 수는 없었지만 상태를 완화 시킬 수는 있었다. 그러나 부운석은 거절했다. 이림나는 부운석이 그저 자신의 고(蠱)만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거절하고 있었다. 그는 차라리 죽을지언정 자신과 함께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장한안을 떠올리자 그녀의 마음속에 질투와 불쾌감이 가득 찼다. 그녀는 분명 이미 현청왕부를 떠났고 분명 자신의 황형과 소문이 돌아 명성이 이미 망가졌는데도 왜 어째서 그녀의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는 걸까?
부운석의 병세는 지난번 거리에서 부상을 당한 후로 한층 더 심해졌다. 요 며칠 줄곧 병상에 머무르며 태의가 여러 차례 오더니 나중에는 현청왕부에 눌러앉을 정도였다. 부운석은 살날이 많지 않을 것이다. 만약 자신의 고충을 더 거절한다면 부운석은 아마 곧 죽을지도 몰랐다. 이림나는 그를 구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얼굴조차 보려 하지 않았다. 시위들에게 자신을 문밖에서부터 막게 할 정도로.
그녀는 그가 원망스러웠고, 달갑지 않았으며,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부운석, 당신 후회할 거예요!”
이 말을 마치고 이림나는 바로 노기충천하여 뜰을 달려나갔다. 주위의 하녀들은 서로 시선을 마주치고 마지못해 따라 나갔다.
서재 안.
성뢰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얼굴 위 표정은 기쁨인지 노여움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갔어.”
“음.”
침상 위의 사람이 담담하게 말했다.
“네가 이러는 건 모든 희망을 끊어버리는 거야.”
성뢰는 조금 흥분했다. 한옆의 오 태의는 약초를 헤집고 있었다. 서재 안은 진한 약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침상 위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사람은 긴 내의만 입고 있었다. 흰색의 내의가 그의 창백한 얼굴빛을 두드러지게 했고 바닥에 펼쳐진 넓은 옷자락은 그의 얼굴을 수척하게 보이게 했다.
부운석이 대답하지 않는 것을 보고 성뢰가 또 말했다.
“네가 이러는 게 뭔 소용이야? 지금 여기서 위급한 고비에 있어도 한안은 아무것도 모르는데. 구태여 서융 공주를 거절할 필요가 있어? 설령 네가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녀에게 병을 치료하게 하고 다시 다른 방법을 생각해서 응대해도 늦지 않아.”
지금의 급선무는 병을 치료하는 것이고 마침 서융 공주는 병을 치료할 수 있었다. 성뢰는 언제나 원칙을 지키고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나를 치료할 수 없어.”
부운석이 말했다. 그의 표정은 평온했고 아주 조금의 슬픔도 없는 듯했다.
“치료할 수 있는지 없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시도해 본 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단정해?”
성뢰는 저절로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는 이런 부운석을 좋아하지 않았다. 평온하게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부운석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당초 전쟁터의 그 위기 상황에서도 그의 이런 말은 들은 적이 없었다.
“너는 고충에게 의존하게 되는 것이 두려운 거지?”
줄곧 소리를 내지 않던 오 태의가 돌연 입을 열어 말했다. 부운석은 살짝 멈칫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성뢰가 호기심에 차서 물었다.
“무슨 의존이요?”
“서융 공주의 고충이 한독을 제거할 수 있는 건, 독으로 독을 공격하는 방법을 쓰는 거야. 고충은 줄곧 체내에 머물러 있어야 하니 사람의 몸에서 키워야 할 필요가 있어. 그건 사육자의 피와 살을 빨아먹으면서 갈수록 체내로 파고들게 되지. 하지만 이런 고충이 완전히 무해 한 것은 결코 아니지. 여러 차례 쓰면 사람은 그것에 의존성이 생길 수 있고 중독될 수 있지. 중독이 된 후에 한 번이라도 쓰지 않으면 전신에 참기 어려운 고통이 일 거야. 더 중요한 것은 이런 고충은 점차 사람의 의식을 손상시키지.”
여기까지 말하고 오 태의는 부운석을 한 번 보았다.
“너는 자기가 고충을 쓴 후에, 그것에 중독될까 두려워하는 거지. 더 두려운 것은 이후에 의식이 모호해져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 거고.”
부운석은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또 부인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바로 묵인이었다.
성뢰는 이 얘기를 처음 들었고 저도 모르게 경악했다. 생각한 후 즉각 낙담했다.
“그렇다면 그 고충은 쓸 수 없겠네. 만약 다 큰 남자가 날마다 그 작디작은 고충에 의존한다면 서융 공주에게 운석을 협박할 수단이 생기는 게 아니겠어. 이후 운석의 정신이 맑지 못하다면 공주의 통제를 받을 수도 있지.”
그는 조금 분노하며 말했다.
“서융인은 어떻게 이런 천리에 어긋나는 부당하고 사악한 수단을 쓸 수가 있지!”
부당하고 사악한 수단이니 설령 부운석을 구할 수 있다고 해도 지금 이 고충은 쓸 수 없다. 설마 부운석이 이렇게 앉아서 죽음을 기다려야 하나? 그의 상황은 이미 갈수록 나빠지고 있었다. 요 며칠 졸음이 많아졌고 한 번 잠들면 꼬박 하루를 잤다. 성뢰는 그가 어느 땐가 잠들었다가 다시는 깨어나지 않을까 봐 걱정했다. 그러나 부운석 자신은 이 일에 대해 매우 담담했다. 자신의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그는 물 한 방울 샐 틈 없이 일을 처리하여 성뢰가 해야 할 일을 잘 처리하도록 분부했다. 그를 죽이고자 한 사람이 미리 앞당겨서 덫을 놓아 그가 어느 날 정말 사라진다고 해도 엉망이 될 일은 없었다.
“너 후회해?”
성뢰가 그에게 물었다.
“장한안에 대해?”
자신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으로 그녀가 오해하도록 두었다. 설령 말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해도 이렇게 하는 것은 그에게 너무 고통스러웠다. 부운석 본인은 전혀 잘못이 없는데도 말이다.
“내가 그녀에게 빚진 거야.”
부운석이 말했다.
그 말에 방안은 순간 한바탕 정적이 내려앉았다. 바로 이때, 익숙한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나는 지금까지 당신이 내게 무엇을 빚진 건지 모르겠네요? 감정, 명성, 아니면…… 황위?”
‘콰당’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누군가에 의해 밖에서부터 완전히 열렸다. 붉은 등롱이 한안의 옷을 한 겹 핏빛으로 물들였다. 그녀는 대문 밖에 서서 조용히 부운석을 보고 있었다. 표정은 평온하고 잔잔했다. 그러나 그 맑고 서늘한 눈동자 속에 명확히 말할 수 없는 것이 조금 들어있었다. 마치 슬픔 같기도 하고 또 통찰 같기도 했다
방 안의 사람들 모두 다 멍해졌다. 한안이 올 거라 예상 못 했다. 부운석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문을 지키는 시위를 잠깐 보았다. 시위 몇이 일제히 몸을 굽히고 무릎을 꿇는 것이 보였다.
“속하, 기꺼이 벌을 받겠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부운석의 심복이었다. 비록 부운석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명확히 알지 못했지만 여러 해를 지내온 주종 사이의 묵계로 그들은 부운석이 지금 골칫거리를 만났다는 것을 알았다. 그 서융 공주는 왕야의 마음에 든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한안, 만약 한안의 출현이 왕야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럼 그들은 설령 실직하는 징벌을 받는다 해도 기꺼이 감수할 것이다.
부운석은 손을 흔들었다.
“물러가라.”
시위들은 바로 물러났다.
다행히 지금 이림나는 여기 없어 이 장면을 보지 못했다. 만약 보았다면 분명 또 노발대발했을 것이다. 시위들이 한안과 그녀를 대하는 태도는 철저히 달랐다. 한안이야말로 왕부의 여주인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조금 전 한안의 말은 방안의 다른 사람들 모두 들었다. 성뢰는 의혹에 차서 물었다.
“황위?”
만약 다른 것을 말했다면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부운석이 한안에게 황위를 빚졌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성뢰는 결코 이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 부운석을 보았다.
“이 말이 무슨 뜻이야?”
부운석은 그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오 태의에게 말했다.
“당신이 말한 건가?”
오 태의는 가벼운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말했다.
“왕야, 너도 어린 왕비가 지략이 풍부하다는 것을 알잖아. 노부가 어찌 그녀의 적수일까. 그녀가 혹독한 수단으로 자백을 강요해서 노부도 방법이 없어…….”
“당신, 내 말에 대답하지 않을 건가요?”
한안이 부운석을 보았다.
“그러면 내가 당신을 대신해서 대답하죠. 당신의 황형 폐하는 바로 내가 동후왕의 딸이기 때문에 나를 추살하라고 명을 내렸어요. 설령 황상이 태후가 동후왕 일가를 멸문시킨 것을 알았다 해도 자신의 황위를 지키기 위해 나를 죽여 후환을 끊어내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을 거예요.”
당초에 동후왕의 부중 모두가 멸문당한 것은 떠도는 말 속의 강호 보복이 아니라 사전 모의가 있었던 일이었다. 노 동후왕과 선황이 강산의 기초를 닦았을 때 두 사람의 공훈은 반반이었다. 당초에는 노 동후왕이 황제가 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최후에 선황이 먼저 경성에 들어왔고 추세에 따라 성상이 되었다. 선황은 줄곧 자기가 좋은 벗의 황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항상 마음에 두고 있었기에 노 동후왕 일가에 대해서는 대단히 너그럽고 후했다. 그래서 당년 동후왕이 비록 안하무인의 태도를 하고 남들이 황상의 면전에 나아가 아뢰고 질책하여도 최후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선황의 동후왕 일가에 대한 보상이었다.
선황이 만년이 되었을 때, 노 동후왕에 대한 양심의 가책은 한층 더 심해졌다. 그래서 유조(遺詔: 군주의 유언)를 앞당겨 썼는데 황위를 동후왕에게 넘기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황위를 원주인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 일이 태후에게 알려졌다.
태후는 동의했을 리 없었다. 만약 동후왕 일가가 황족이 된다면 자신이 보유한 모든 것이 장차 사라질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예 철저하게 끝장을 보기 위해 강호 사람을 매수하여 동후왕 일가를 멸문했다. 그녀가 부른 사람들은 무림의 부정하고 사악한 일당이라 수단이 지극히 흉악하고 잔인했다. 그래서 동후왕 일가 중 화를 면한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동후왕의 일이 벌어진 후, 선황은 태후가 손을 쓴 거라 추측했지만 증거가 없는 것에 괴로워했다. 이때 시정에서는 동후왕의 죽음을 황상이 동후황의 공로가 혁혁하여 군주의 위세를 압도하는 것에 불만을 품어 비밀리에 죽음을 내렸다는 말이 떠돌기 시작했다. 비록 소문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이었지만 허다한 사람들이 믿었다. 이것은 한 나라에 있어 좋은 일이 아니었고 심지어 국가의 동요를 조성할 수 있었다. 선황은 바로 대종 경내에서 동후왕의 일을 토론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며 이를 발견하면 때려죽여도 무방하다는 명을 내렸다. 이러한 잔혹한 정책은 금세 민심을 진정시켰다. 그러나 황상은 좋은 벗 일가의 참사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의 그늘을 지울 수가 없었고 오래지 않아 승하했다. 뒤이어 지금의 황상이 등극하여 황위를 이었다.
이 이야기는 오 태의와 성뢰도 처음 듣는 것이었다. 그들은 잠시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입을 딱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모두 황궁에서 나온 사람들인지라 어떻게 된 일인지 분명하게 알지는 못했지만 뭔가 추측할 수는 있었다. 한안의 말을 듣고나니 부운석은 황족이 아니었고 그녀야말로 진정한 황족이었다.
부운석은 한안을 보았다.
“네가 어찌 알았느냐?”
한안이 말했다.
“당신이 할 말은 맞느냐 아니냐 뿐이에요.”
그녀의 태도는 아주 강경해서 거의 추궁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강경한 태도와 상반되는 것으로 비할 데 없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마치 자신의 입에서 논의되는 것이 그저 ‘오늘 무엇을 먹어야 하나’ 라든지 혹은 ‘어디로 가야 하나’ 같은 사소한 일에 불과하여 근본적으로 마음에 담아둘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
부운석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맞다.”
한안은 걸어와 그의 곁에 앉았다. 침상은 부드러웠다. 부운석의 표정은 냉담했고 눈빛이 한안의 몸 위에 떨어졌을 때는 다시 무심하게 변한 듯했다. 그 순간 한안의 손이 그의 검은 머리카락 한 가닥을 치켜들고 진지하게 살펴보았다. 그는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한안은 그의 옷을 세게 잡아당겨 그를 더 좀 가까이 끌어당겼다. 호흡이 가까워지는 순간 한안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부운석의 새까맣던 머리카락은 이미 흰 빛을 옅게 띠고 있었다. 마치 미세한 서리가 한 층 맺힌 것 같았는데 검은 머리카락 위에 덮여서 보기에 비할 데 없이 눈에 거슬렸다. 한독이 이 지경까지 전개된 것이었다. 설령 가까이 있어도 부운석의 몸에서는 따스함을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일찍이 옅은 온기를 지니고 있던 그 품은 이미 없었다. 한안이 그의 곁에 앉으니 마치 눈과 얼음으로 조각된 조각상과 붙어 있는 것 같았다.
“형수.”
역시 성뢰가 입을 열었다.
“무슨 방법이라도 있는 겁니까?”
성뢰의 마음속에서 한안은 무소불능의 사람이었다. 경성 안에서 그녀와 관계된 이야기는 허다한 사람들이 다 알았다. 더구나 부운석의 좋은 벗으로서 성뢰는, 일찍이 현청왕부에서 한안에 대해 적지 않은 일을 들었다. 그는 한안이 재간둥이라고 알고 있었다. 일 처리에 허다한 방법이 있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은 바로 자신에게 불리한 국면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꾸는 것이었다. 부운석이 이림나를 현청왕부에 들어와 살게 한 후부터 성뢰는 오래 한안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한안이 돌연 출현했다. 게다가 뭔가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것은 한안이 무슨 다른 방법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한안은 고개를 저었고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말하지 않았다.
“총명하군.”
한옆에 있던 부운석이 돌연 입을 열었다. 한안이 그를 보니 입가에 한 가닥 옅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는 여전히 구름처럼 옅고 바람처럼 가벼워 보였다. 위급한 일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한안은 마음이 쓰라렸다. 그의 소매를 잡은 손을 꽉 움켜쥐고입을 열어 오직 한 마디 ‘당신’만 토해냈다.
부운석은 조용히 한안의 옆에 앉아 있었다. 한안이 이렇게 빨리 모든 일을 분명하게 알아낸 것은 실로 그의 상상을 넘어선 것이었다. 황형이 한안을 추살케 한 일 또한 그랬다. 비록 그가 처음부터 경계하고 있었다 해도 이렇게 빨리 손을 쓸 줄은 예상 못 했다. 황형은 그 자리에 앉은 지 너무도 오래되었다. 그의 지위를 위협하는 사람은 어느 하나도 살려두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오래. 한안이 동후왕의 딸이며 동후왕은 선황이 성지를 내려 지목한 황제인 것을 알자 즉각 살수를 보냈다. 비록 한안이 여자라 황상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한안의 신분이 흘러나가면 모두가 황상의 자리가 명분이 서지 않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며 그에게 반기를 들 것이다. 이것은 황형이 참고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설령 한안이 아주 가련하다는 것을 알고 한안이야말로 진정한 공주라는 것을 알더라도 황형은 그녀를 죽이려 한 것이다. 통치자의 신분으로서 이 일을 하는 것은 부적절함이 없었다.
그러나 부운석 자신은 알고서도 모른 척 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황상과 태후 사이에 한안의 일은 일종의 묵계가 성립되었다. 두 사람 모두 한안이 살아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애초 동후왕비 당소교의 여종이 한안을 안고 동후왕부를 달아나 한안을 왕씨에게 건넸을 때, 한안이 장한안의 신분을 이용하여 장부에서 살게 된 것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태후의 세력이 얼마나 큰가. 경성 안에 있는 한안에 대해 알아내기 충분했다. 한안이 그물을 빠져 나간 동후왕부의 물고기라는 것을 안 후, 태후는 그녀를 서둘러 죽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성지가 행방불명되었기 때문이었다.
선황이 동후왕을 황상으로 세우겠다고 한 유조는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태후는 선황이 유조를 누군가에게 주었다는 것을 알고 기다렸지만 그 사람은 늦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태후는 한안을 이용하여 그 사람을 끌어내려 했다. 한안이 있으면, 그 사람이 한안이 동후왕의 아이라는 것을 알기만 하면, 분명 성지를 한안에게 넘겨줄 것이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그 사람은 계속 나타나지 않았다.
태후는 한안을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한안을 죽이면 그 사람이 나오도록 유인할 미끼가 없어지니 그녀는 자신의 심복인 위여풍에게 한안을 아내로 맞도록 했다. 이 혼사가 이뤄진다면 한안의 전부를 감시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한안에게 바람에 풀이 살랑거리는 정도의 아주 경미한 변화가 있다고 해도 태후는 즉각 알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당초 대주씨가 장부에 들어간 것도 그 성지가 도대체 어느 곳에 있는지를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태후는 장사양을 믿지 않았다. 그가 성지를 얻어 사사로이 감추었을까 봐 도리어 그를 두려워했다. 그래서 장 태사에게 장부를 샅샅이 조사하도록 했고 장 태사는 주씨와 관련이 있는 대주씨를 장부에 들여보내 장사양에게 접근하도록 했다. 대주씨는 유산한 주씨를 문안한다는 구실로 장부에서 시일을 끌며 더 머물러 성지의 행방을 조사했다. 그러나 대주씨는 성지의 행방을 조사해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장사양과의 간통이 들통 나서 장 태사를 온 경성의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일이 그리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지금 이 지경에 이르게 한 원인은 여러 해 전에 있었던 사실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 사실은 황상의 황위는 동후왕의 것이고 한안이야말로 진정한 금지옥엽이란 것이었다. 태후는 사람을 죽여 이 사실을 입막음을 하려 했지만 오히려 그녀의 음모가 모두 드러나 버렸다. 그러나 지금 부운석은 한독에 중독되었고 치료될 수 있는 가능성도 희박했다.
그녀의 눈썹이 한 곳으로 모였다. 지금의 국면은 실로 너무나 버거워 무엇을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이 일을 말하자면 부운석은 잘못이 없었다. 자신도 잘못이 없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거리낌 없이 함께 살 수 있는가 하면 또 좀 미묘하게 이상했다.
“네가 알았으니.”
부운석이 말했다.
“너는 어떻게 했으면 하느냐?”
한안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지금 당장 황궁으로 달려 들어가 황위를 빼앗아 올 수는 없겠지? 그녀는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만약 할 수 있다면 현 상황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그녀에게 가장 좋은 것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여자이고, 그는 여전히 막강한 권력이 조정과 재야에 미치는 황가의 왕야인 것으로.
오 태의와 성뢰는 눈을 마주친 다음 소리 없이 물러났다. 방 안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한안과 부운석은 분명 해야 할 말이 아주 많으리라.
“부운석.”
한안이 물었다.
“당신의 몸은 도대체 어떤가요?”
‘부운석’ 이 세 글자가 입에서 나오자 한안은 살짝 멈칫했다. 부운석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이전에 함께 살 때, 한안이 부운석에게 허물없이 굴 때마다 얼음처럼 차갑게 ‘왕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불렀다. 그럴 때면 두 사람 사이에 있던 거리와 소원함은 사라지고 약간의 미묘한 친밀함만이 남았다. 이렇게 오랜만에 다시 한안이 이렇게 그를 부르는 것을 듣자 부운석은 마치 딴 세상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잠시,”
그가 말했다.
“아직 죽을 정도는 아니다.”
한안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이 수려한 청년은 비록 병상에 누워 있지만 여전히 풍채가 뛰어났으며 암담하고 낙담한 느낌은 조금도 없었다. 마치 이 세상에서 그를 곤란하게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알고 보면 자신의 명운조차 가늠할 수 없는 상태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무슨 말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진상을 알고 난 후에는 해명조차 불필요했다. 그녀는 줄곧 고집스레 부운석의 소매를 움켜쥐고 있었다. 마치 그가 달아날 것을 두려워하기라도 하는 듯, 또 마치 자신의 불안함을 떨쳐내기라도 하는 듯. 부운석도 그녀의 행동이 가진 의미를 알아챈 듯 손을 뻗어 그녀의 작은 손을 덮었다. 비록 부운석의 손은 얼음처럼 싸늘했지만 한안은 미세한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이 온기는 어찌 할 바 모르는 그녀의 마음을 적지 않게 안정시켜 주었다.
“한독에 대한 것, 내게 이야기해 줄 수 있어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한안이 물었다.
부운석은 살짝 멈칫했다가 살짝 웃었다.
“그래.”
마음 깊은 곳에 오랫동안 먼지투성이로 버려두었던, 지금까지 다른 사람에게 말한 적이 없던 지난 일을 천천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부운석의 생모 정비는 대미인이었다. 황상과 부운석은 모두 모친의 훌륭한 용모를 물려받아 그들의 생김새로부터 정비가 얼마나 미인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정비는 천성이 인정 많고 후하며, 부드럽고 상냥하여, 한 떨기 연꽃 같은 존재였다. 이런 사람은 궁중에서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정비는 예외였다. 황상은 물론이고 그를 총애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황상이 후궁의 일을 관리할 수 없으니 오로지 황상의 총애만으로는 궁에서 살아남기 힘들다고 할 수 있었지만, 정비는 복이 넘치는 사람이라 태황태후의 총애도 받았다. 궁중에서 태황태후의 위엄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라 감히 정비를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정비는 온화하고 부드러웠으며 남과 총애를 다투지 않았다. 이러하니 황상은 날이 갈수록 그녀를 더욱더 사랑했다. 그러나 천자의 총애가 결코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후궁 안의 여인들은 늘 그녀를 질투했고, 그중에서 가장 심한 건 황후였다.
황후는 육궁의 주인으로서 어질고 현명하며 너그러운 모습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이 여느 여인이 황상을 독점하고 있는 것을 용납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더욱이 황후는 황상의 총애를 받는 정비에 늘 위기감을 느꼈고 자신의 자리가 위태롭다는 생각마저 했다. 그래서 정비가 황상의 두 아들을 낳고 머지않아 세 번째 아들도 낳을 때가 다가오자 황후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아들로 인해 귀해지거늘 황후 자신은 아들이 없었다. 거기에 반해 황상의 넘치는 편애를 받는 정비는 아들을 연달아 출산했다. 정비의 지위는 흔들림이 없을 뿐만 아니라 황후를 넘어서기에 이르렀다. 만약 황상이 정비의 아들을 태자로 삼을 마음이 있다면 자신의 지위는 매우 위험했다. 설마 자신이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 어질고 현명하며 너그러운 황후를 연기하려고 노력한 것이 타인을 위해 혼례복을 지은 꼴이 되는 것인가?
그래서 그녀는 정비가 출산할 때, 정비 신변의 측근 여종을 매수하여 정비의 방에 향을 피웠다. 향에는 사향 성분이 들어있어서 사람이 유산과 불임에 이르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평소에도 정비가 향을 피우는 걸 좋아하는 데다가 각종 향료가 한데 혼합되어 있으니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황후는 협박과 회유로 정비 신변의 여종을 매수 할 수 있었고 정비와 정비 신변의 사람들은 눈치가 없는 편이라 그녀는 수월하게 정비의 주변을 자신 마음대로 쥐락펴락할 수 있었다. 정비의 출산하기 두 달 전, 황후는 정비 뱃속 아이의 복을 기원한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오대산으로 갔다. 정비에게 일이 생기는 그 날 밤 황후는 자리를 비워 자신에게 올 의심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궁중에서 죽는 여인은 매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래서 황상은 가장 사랑하는 정비의 죽음에도 그저 크게 비통해 할 뿐 그 외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속으로는 이 일이 황후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해도 어찌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황후는 그냥 한 사람의 여인이 아니었다. 그녀 배후에 있는 세력은 황상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 황후는 바로 이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대담하게 일을 할 수 있었다.
정비와 곧 태어날 어린 황자는 죽었지만, 부운석과 대황자는 아직 남아 있었다. 그 당시 황후는 정비와 대단히 사이가 좋았고, 부운석과 대황자와도 가까웠다. 그래서 황후는 바로 그들을 자신의 양자로 들였다. 황후가 황후답게 대처하자, 외인들은 하나같이 어질고 현명하며 너그럽다는 평판으로 그녀를 치켜세웠다.
황상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부운석과 대황자를 황후의 양자로 들이면 이후 태자 자리를 잇게 해도 명분이 정당하고 사리에 맞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황상은 황후가 또 다른 속셈이 있을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음으로 양으로 이 두 형제를 황후에게서 빼내려고 했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심성이 단순하고 근본적으로 인간의 음험하고 잔인함을 알지 못했기에 미소라는 가면 아래 감추고 있는 것이 어떤 야심인지 알지 못했다. 선황 사후, 황후는 태후가 되었고 대황자는 황위를 이었다. 이내 태후는 완전히 이 두 형제의 신임과 존중을 얻었다.
태후는 매일 어선방에 이 형제 둘에게 줄 보양식을 준비하라 분부했다. 태후가 그들에게 내린 천산설련(天山䨮蓮)은 너무나 진귀한 것이었다. 평소 몸이 약하고 잔병치레가 많은 동생을 마음 아파한 황상은 자신의 보양식을 모두 다 동생 부운석에게 주었다. 그러나 이것이 자신의 혈육에게 두 배의 독약을 복용하게 하는 행동인 줄을 알지 못했고 부운석의 체내에는 한독이 깊게 뿌리내렸다.
부운석이 십여 세 쯤이던 어느 날 오후, 태후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려다가 무심코 태후와 신변 고고의 대화를 엿듣게 되면서 당년 정비의 사인을 알게 되었다. 당시 그는 분노하고 경악했다. 여러 해, 원수를 어머니로 섬기고 자신의 친어머니를 해친 사람을 자신의 가장 친밀한 사람이라 여겼다. 그는 당장 달려 들어가 그 위선적인 여인을 죽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황형은 등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력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고 조정 안의 많은 사람들은 태후 쪽 사람이었다. 태후의 가면을 뜯어내고 나면 황형에게 말썽만을 가져오는 결과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는 그저 모든 고통을 참을 수밖에 없었고 이 일을 황형에게 알릴 수도 없었다. 황형의 성격은 그에 비해 충동적이라 어쩌면 직접 태후를 추궁할 지도 몰랐다. 그는 복수를 원하면서도 황형을 도와 이 강산을 안정시켜야 했다. 태후의 세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녀가 범한 죄상을 세상에 널리 알리며 자기 모친의 원한을 갚을 그 날까지 자신의 세력을 키우며 오직 때를 기다려야 했다.
세력을 키우는 가장 빠른 방법은 바로 병권을 얻는 것이었다. 그러나 병권을 가진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군대 안에서 자신의 위엄과 명망을 세워야 했다. 아직 소년인 그는 황형의 반대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융전에 출전했다. 그 첫 번째 이유로는 얼마간 그 궁전에서 멀리 떨어져 대책을 깊이 생각해 보기 위해서였고 두 번째 이유로는 어느 날엔가 태후와 맞서기에 충분한 힘을 축적하기 위해서였다.
대황자가 이렇게 오랫동안 황위에 안정되게 앉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뜻밖이었다. 애초 태후는 한독을 이용하여 두 형제를 장악하고 그들이 죽기를 기다려 꼭두각시 하나를 다시 키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약은 부운석이 혼자 먹어버렸으니. 황상이 이리 무탈할 줄을 누가 알았으랴. 태후가 주판을 튕긴 일은 모두 허사가 되었고 황상의 정치적 업적은 갈수록 출중해져 조정 안에 황상의 사람이 점점 늘어나는 것을 뻔히 지켜보아야 했다. 태후는 대단히 초조했다. 그녀가 또 생각지 못한 것은 어리디어린 부운석이 1년 후 서융전에서 승리하여 돌아와 혁혁한 전공을 세움으로써 무관 중에서 위엄과 명망을 세우는 바람에 더 이상 얕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이미 그녀의 통제를 떠났고 그녀는 일이 처리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걸 느꼈다. 태후의 세력은 약해졌고 그들의 세력이 강해졌으니 그 자체로 부운석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이 결정적인 시기에 부운석의 한독이 발작했다.
이것을 두고 그는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원래의 두 배양을 먹었기에 한독이 이르게 발작하게 한 것은 운이 나빴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로 인해 오 태의가 부운석의 상태를 알게 되었고 오 태의의 고명한 의술로 독성을 억제시킬 수 있었던 것은 운이 좋았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는 마침내 조당에서 종횡무진하기에 충분한 능력을 얻었고 더는 감히 그를 얕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황형도 이미 일대 명군이 되었고 국가는 안정되고 풍족해졌다. 그러나 원수는 아직 벌을 받지 않았고 자신은 곧 목숨을 잃게 될 것이었다.
그의 말투는 아주 덤덤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마치 자신의 일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한안은 그의 덤덤한 목소리 속에서 아픈 울부짖음을 들을 수 있었다. 마음속에 한을 숨긴 소년은 걸음걸음 신중히 행동하고, 엄밀히 방어하여, 음험하고 악랄한 수단으로 해를 가하는 황궁 안에서 자신과 형제를 보호했고 냉담하고 영준한 청년으로 성장하였다.
“그 때……. 당신은 절망한 적이 있나요?”
한안이 물었다. 사실 부운석의 일생은 한안의 전생과 거의 똑같았다.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시고, 자신 홀로 주위의 속셈을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을 상대해야 했으며, 원수를 아버지로 모신 것과 같은 상황. 부운석은 태후의 진면목을 미리 발견했지만 한안은 자신이 죽던 그 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일생이 모두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 환경 아래에서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대단히 괴로운 일이었다. 그럼 부운석은 이전의 한안처럼 도움이 없다는 것에 절망한 적이 있을까?
“없다.”
부운석이 눈을 내리깔았다.
“절망이 원수를 갚아줄 수는 없지.”
절망은 아무 소용도 없는 짓이다. 부운석은 일을 하는 데 있어 목적성이 아주 강했다. 태후가 일이 이런 지경으로까지 전개될 거라고 예상도 못한 까닭 중 하나는 당시 그 소년의 인내력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 그는 어느 사람보다 인내심이 강했다. 게다가 자신에 대해서도 조금도 가차 없었다. 그는 후궁에서 살아남기에 적합한, 견고하고 영민한 심장을 타고났기에 그는 절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절망은 원한을 갚는 이 일에 있어서 그에게 어떠한 도움도 줄 리 없으니까. 그가 해야 할 일은 살아남겠다는 야심을 가지는 것이었다.
그는 해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권력과 지위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어떤 사람도 그를 뒤흔들 수는 없었다. 설령 몸이 병상에 있어도 여전히 여유 있게 모든 것을 안배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태후에게 반격하는 일이라든지.
한안이 말했다.
“그럼 당신은 지금도 절망하지 않는 거죠. 그런 거죠?”
사람이 스스로 절망하지 않기만 하면 모든 것에 희망은 있다. 부운석은 그런 상황 아래에서도 절망한 적이 없으니 지금도 희망을 버릴 리가 없다. 가장 두려운 것은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금을 그저 운명으로 여기는 것이었다. 그것이야말로 두려운 일이었다.
이 말을 듣고 부운석은 웃었다.
“그래.”
이 웃음은 그의 얼음처럼 차가운 눈을 또 얼마간 온기가 있게 바꾸어 놓았다. 한안은 두 팔을 내밀어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자신의 머리를 그의 품속에 깊이 깊이 파묻었다. 부운석의 몸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한안에게도 옮겨와 한기가 사람을 핍박하는 얼음 창고에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이 좀처럼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추웠다. 자신조차 이러한데 한독을 참고 있는 부운석은 이런 고초를 매일 밤낮으로 겪고 있다는 것인가?
그녀는 나지막하고 웅얼웅얼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부운석, 우리 함께 방법을 생각해요.”
그녀의 냉담하고 소원했던 태도는 지금에 이르러 전부 없어졌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깊고 깊은 의존과 아픔이었다. 비록 부운석의 병을 치료할 수 없다해도 그가 태후에게 복수하는 것은 도와줄 수 있었다. 어떤 방면으로 보자면 태후는 그들 공동의 적이었다. 한안은 동후왕 부부를 본 적이 없지만 피는 물보다 진한 법. 이 뼛속까지 사무치는 원한은 어찌하든 간에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부운석은 고개를 숙여 자신을 단단히 끌어안고 있는 한안을 보았다. 그녀의 몸에서 전해져 오는 온기는 뚜렷하고 명확해서 며칠 동안의 얼음 같은 냉기를 완화시켰다. 한독은 체내에서 극성을 부려 얼음 바늘이 뼈 사이사이까지 빼곡하게 찔러 들어가는 것 같아 움직이기만 하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온기를 느낄 수도 없어 설령 이불에 둘러싸여 화로 앞에 앉아 있어도 얼음 같은 냉기가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그런데 이 작은 아이가 냉담한 표정으로 달려 들어오더니 조용하게 앉아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바로 자신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몸은 여전히 작았다. 그러나 곱고 아름다운 자태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는데 그녀는 이미 급계를 했다. 부운석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지난번 한안이 급계할 때, 그가 그 예식을 망쳤다. 사실 그날 갖은 고초 끝에 돌아와 한눈에 그녀를 담았을 때, 부운석의 심장은 요동쳤다. 어리디어린 작은 아이가 이미 청수한 소녀로 장성해 있었다. 그는 놀랍고 기뻤지만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이후, 한안은 고집스레 급계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자신은 급계를 하지 않은 셈이라 여겼고 급레 이후 바꿔야 할 머리 모양으로 빗으려 하지 않고 두 개의 둥근 만두 모양의 머리를 굳건히 유지했다.
그의 한 손이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마음속으로 나지막하게 탄식했다. 어쩔 수 없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자신은 그녀를 밀어낼 수 없고 이 아이 또한 이렇게 고집스러우니 자신이 구태여 그녀를 대신해 마음대로 결정할 필요가 있을까. 하물며 이렇게 보호하는 방식은 그녀를 자기 곁에 온당하게 두는 것만 못했다. 그녀는 자신 때문에 이미 적지 않은 억울함을 겪었고 앞으로 동후왕의 남겨진 핏줄이라는 신분이 폭로되고 나면 또 얼마나 큰 말썽에 휘말릴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아직은 숨이 붙어 있으니 그녀를 곁에 두고 잘 보호해야겠다.
그가 말했다.
“좋다.”
이 말이 나오자 그 순간 자신의 품속이 텅 빈 것을 느꼈다. 한안이 그의 품속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젖히고 그를 보았다. 부운석은 눈을 내리깔고 그녀를 보았다. 한안이 애교스럽게 토라진 모습을 하고 있으리라.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굳세고 냉정했으며 재빨리 말했다.
“태후도 알아차렸으니 곧 행동할 거예요. 먼저 그녀의 의심을 없애죠.”
부운석은 멍해졌다가 바로 실소했다. 자신이 잠시 잊고 있었다. 한안은 이런 때에 애교나 부리고 얌전한 척하느라 시간을 쓸데없이 보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가장 짧은 시간 내에 대책을 분석해냈을 뿐이다.
“무얼 할 생각이냐?”
부운석이 말했다.
한안은 바로 그의 옷깃을 잡아 자신의 곁으로 끌어당기고 그의 귓가에 낮은 소리로 몇 마디 말한 다음 다시 그를 놓아주며 물었다.
“어때요?”
부운석이 말했다.
“좋다.”
23장
이틀 후.
이날, 경성 안의 백성들 모두 입으로 한 가지 일을 얘기하느라 바빴다. 현청왕 부운석이 병이 중하여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어젯밤 바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부운석은 전도가 무한하고 걸출하며 풍치 있고 멋스러운 인물로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고 또 신선처럼 수려하며 문무 육도(六韜), 삼략(三略) 어느 것 하나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던 이였다. 일시에 백성들은 전부 주먹을 불끈 쥐고 탄식했다. 아직 출가하지 않은 그 규방 여자들은 이 소식을 알고 난 후 눈물로 얼굴을 씻을 정도였고 경성 안은 곳곳에 애도와 탄식의 소리가 가득했다. 부운석은 평소에 백성들 가운데서 위엄과 명망이 지극히 높았기에 그의 별세는 천하 사람들에게 있어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장부 안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줄곧 남몰래 쑥덕거리기를 좋아하던 하인들도 더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장부 4소저는 일찍이 부운석이 아내로 맞으려던 사람이었다. 나중에 비록 버려진 여인이 되기는 했으나 현청왕에 대해 원망을 드러내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에 모두가 한안이 내심 아직도 부운석을 연모하고 있는 것이라 추측했다. 현청왕이 병사했으니 장가 4소저는 울적해 하며 상심하고 있을까, 아니면 마음속으로 대단히 통쾌해하고 있을까? 한안의 마음은 그 누구도 추측할 수 없었다.
장한명은 한안이 걱정되어 그녀를 위로하러 갔으나 문밖에서 거절당했다. 이를 보고 모두가 한안이 상심이 과도해서 남에게 그녀의 지금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녀는 아예 문을 닫아걸었는데 이는 그동안 해왔던 그녀의 방식에 부합했다. 장한명은 몇 차례나 왔지만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한 채, 어찌 할 도리 없이 그저 떠날 수밖에 없었다. 떠날 때 한안을 잘 돌봐야 한다고 당부했을 뿐이었다.
장사양은 한안에게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그는 한안의 무언가를 꺼리고 있는 것 같았다. 한안이 장부로 돌아온 후부터, 장사양과는 얼굴 한 번 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눈으로 보지 않으면 번뇌도 없는 법이라, 한안 자신은 도리어 즐겁고 편안했다.
청추원에는 이 날 오후, 초대받지 않은 손님 한 무리가 왔다. 우두머리 여자는 강편을 휘둘러, ‘짝’ 하고 문 입구를 청소하던 하녀 몸 위를 후려쳤다. 그 하녀는 사람이 오는 것을 보고 마중 나가 물으려던 참에 불시에 채찍질을 당했다. 게다가 채찍질에는 힘이 실려 있어 하녀는 처참하게 비명을 지르며 땅에 쓰러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또 한 번의 채찍질을 당했고 채찍 뒤를 따라온 것은 노기등등한 추궁이었다.
“장한안은 어디에 있느냐!”
하녀는 아파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손에 강편을 쥔 여자는 인정사정 두지 않고 땅 위의 하녀를 향해 채찍을 후려쳤다. 얻어맞은 하녀는 고통으로 땅 위를 뒹굴었고 처참한 비명소리가 일시에 방 안의 사람을 놀라게 했다.
‘끼익’ 소리가 들리더니 청추원 규방의 문이 열렸다. 한안은 안에서 걸어나와 냉랭하게 말했다.
“누가 감히 여기서 함부로 날뛰는 것이냐?”
손에 강편을 쥔 여자가 한안을 보고는 즉각 손의 동작을 멈추고 외쳤다.
“장한안!”
“나는 누가 이처럼 교양이 없나 했는데,”
한안이 땅 위의 상처투성이 하녀를 흘끗 보고 냉랭하게 말했다.
“이제 보니 서융국의 공주 전하시네요.”
말 속의 조롱이 이림나의 귀에 들어갔다. 그러나 오늘 그녀는 한안과 말다툼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대단히 몹시 초조해 보였다.
“너, 왕야가 세상을 뜨신 거 알고 있어?”
“경성 안 모든 사람이 말하고 있으니 나도 당연히 알죠.”
한안이 말했다. 이림나의 눈시울이 새빨간 것이 호되게 운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난 못 믿어. 분명 거짓말이야. 너희가 한통속이 돼서 나를 속이는 거야. 장한안, 넌 분명 진상을 알지?”
한안은 냉랭하게 그녀를 봤다.
“공주는 엉뚱한 사람에게 묻고 있는 것 같네요. 왕야의 일은 나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알았거늘 하물며 내가 왕야와 한통속이 되어 당신을 속이는 거라니요. 그럼 공주에게 묻지요. 우리가 어째서 당신을 속여야 하죠? 당신을 속여서 무슨 이득을 얻을 수 있죠?”
“그, 그건…….”
이림나는 어쩔 줄 몰라 하며 한안을 바라보았다.
“난 모르겠어. 하지만 그가 어떻게 돌연 죽을 수가 있어……. 설령…….”
말이 여기에 이르자 그녀가 입을 홱 다물었다. 잠시 멈추었다가 한안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너 분명 그가 죽지 않은 걸 알고 있지? 맞지?”
그녀는 거의 확신했다. 뜰 안 멀리 서 있는 다른 여종을 보고 눈썹을 치켜 올리며 또 채찍을 휘둘렀다.
“왕야는 도대체 어디에 있어!”
“그만!”
한안이 준엄하게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대단히 매서웠다. 이림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동작을 무의식적으로 멈추었다. 한안이 말하는 것이 들렸다.
“현청왕이 죽었는지 아닌지 당신이 내게 와서 물어서는 안 되죠. 나는 이 며칠 문을 나간 적도 없어요. 공주가 할 일이 없어서 마음대로 구실을 찾아 심심풀이를 하고 싶은 거라면 그럴 듯한 걸로 하나 찾아봐요. 화는 입에서 나온다는 것에 주의하고요.”
이림나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모습으로 자신을 보는 것을 보고 한안이 또 말했다.
“알다시피 왕야가 세상을 떠난 것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죠. 공주는 아직 시집 안 간 현청왕비이니 당연히 왕야의 유해를 볼 권리가 있어요. 그러니 왕야를 직접 보세요. 자신이 한 번 살펴보고 눈으로 사실을 확인한다면 내게 와서 이럴 필요가 없겠지요.”
이 말은 이림나의 아픈 곳을 찔렀다. 그녀는 부운석이 이렇게 죽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비록 부운석의 병세가 갈수록 심해지긴 했지만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여전히 멀쩡했었다. 음식을 먹고 마시며 말을 할 수 있었는데 어찌 잠깐 사이에 사람이 죽는단 말인가. 그녀는 미친 듯이 울며 왕부의 모든 물건을 부수었고 왕부의 하인을 때렸다. 결국엔 성뢰가 이를 두고 볼 수 없어 그녀를 빈소로 데리고 갔다. 바로 거기에서 이림나는 관 속에 누워있는, 몸이 얼음처럼 차가운 부운석을 보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뻗어 그의 몸을 더듬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몸은 한 가닥 온기도 없었다. 그는 진정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세상에 더는 부운석이 없었다. 이림나가 어찌 달가우랴. 그녀가 그렇게 오래 노력한 것은 그의 아내가 되기 위해서, 이 남자를 차지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그러나 그 날이 오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그는 죽었다.
그녀는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한안을 찾아 왔다. 부운석 마음속의 그 사람이 한안인 것은 지금까지 변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한 가닥 요행을 바라는 마음이 남아 있었다. 그녀에게서 부운석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를 희망했다. 사실 그녀 자신도 이 가능성이 매우 적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이 가능성조차 없다면 그럼 이림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너는 그렇게나 그를 좋아했으면서 그가 죽었는데도 조금도 슬퍼하지 않잖아. 그러니까 너는 그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거야, 맞지?”
이림나는 한안의 태도에서 뭐라도 발견한 듯 기쁨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래, 한안의 이 태도는 실로 너무도 이상했다. 이것은 아직 희망이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한안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어째서 슬퍼해야 하죠? 공주, 당신은 그 일을 잊은 것 같네요. 왕야는 사람들 앞에서 나를 버렸어요. 당신은 내가 어째서 그를 아직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이림나는 멍해졌다. 그렇다. 부운석은 한안의 급계례에 한안에게 큰 수난을 주었다. 만약 자신이었다면 분명 부운석을 몹시 증오하며 보복하겠다고 맹세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안이라면……. 그녀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안이 부운석이 죽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모든 희망이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돌연 차갑게 웃었다.
“네가 어떻게 조금의 감정도 없을 수가 있어? 그가 그렇게나 너를 사랑했는데, 너를 위해 자기 목숨조차 버리려 했는데, 그가 죽었는데도 너는 눈물 한 방울조차 없어. 장한안, 너 정말 악독한 심보를 가졌구나!”
“공주의 말은 틀렸어요.”
한안은 그녀를 보았다.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싸늘했다.
“이 세상에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늘 상호적인 거예요. 나와 왕야의 엉킨 인연은 일찍이 내가 현청왕부에서 나온 그 날, 바로 끝난 거예요. 이렇게 되었으니 왕야는 내게 그저 낯선 사람일 뿐이죠. 이 세상에서 매일 죽어가는 낯선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어요. 만약 내가 이들을 위해 상심해서 운다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일이겠죠.”
그녀는 옅게 웃었다.
“나와 공주는 다른 사람이에요. 공주는 어쩌면 선량하고 천진한 건지도 모르죠.”
그녀의 말투는 조금 조롱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본래 냉정하고 무정한 마음을 가졌어요. 그러니 공주가 내게 어째서 눈물도 흘리지 않느냐고 추궁한다면 내가 함께 하지 못함을 양해해 달라고 말할 수밖에 없네요.”
말을 마치고 바로 몸을 돌리더니 갑자기 또 무언가 떠오른 듯 이림나에게 말했다.
“하지만 공주가 만약 왕야의 죽음이 진짜인지 아닌지 의심을 품는다면 황상의 반응을 볼 때까지 기다려 보세요. 만약 황상께서 조령(詔令: 천자의 명령)을 공포하신다면 분명 진짜일 테니까요. 군주는 허언을 하지 않는 법이죠.”
이 말을 마치고 비로소 방안으로 걸어 들어가 ‘탕’ 하고 문을 닫았다.
이림나는 잠깐 멍해졌다가 홱 반응을 보였다. 앞으로 걸어가 문을 두드리고 따지려고 하는데 신변의 한 하녀가 쭈뼛거리며 잡아당겼다. 그 하녀는 이림나의 심복 같았는데 작은 소리로 말했다.
“공주 전하, 그 장한안의 눈이 붉었습니다.”
눈이 붉어? 이림나는 멈칫했다. 한안의 기복 없이 담담한 말투가 떠올랐다. 그러나 또 평소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눈이 붉었다. 설마 그녀가 울었나? 장한안 이 사람은 본래 승부욕이 강하며 다른 사람을 상대할 때도 이러했다. 늘 남이 그녀가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꿰뚫어보지 못하게 하니 기분도 얼굴 위에 표현할 리 없다. 설마 그녀가 정말 이미 부운석의 부음을 듣고 마음속이 비통하지만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 겉으로 조금도 개의치 않는 모습을 가장한 건가? 그렇다면 그녀가 한 행동들이 모두 이해된다. 그러나…… 이 생각을 하자 이림나는 비로소 진정으로 절망하기 시작했다. 한안이 보여준 모습은 부운석이 이미 죽었다는 걸 뜻하는 것이었다. 한 점 희망도 없었다. 자신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이 모두 진실한 사망통지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부운석이 죽지 않았다고 여기려 했지만 이제 자신조차 속일 수 없었다.
천 리 머나먼 길을 부운석을 쫓아 대종에 와서 그의 따뜻함과 부드러움을 느껴본 적이 없는 것을 떠올렸다. 그는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더 이상 부운석은 없는 것이다. 그해 전쟁터의 위풍당당한 미소년이든, 지금의 냉담하고 무심한 청년이든 간에, 그는 서융의 초원에 속해 있지 않았다. 그녀는 일시에 땅 위에 허물어졌다. 마치 모든 힘이 뽑혀 나간 것 같았다. 돌연 그녀는 얼굴을 가리고 엉엉엉 통곡했다.
위왕부.
이날 위왕부는, 유달리 떠들썩했다. 노복들은 얼굴 위에 대부분 웃음과 기쁨을 머금고 있었다. 대종의 현청왕 부운석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위왕과 현청왕은 본래 불화가 있었고 이것은 늘 알고 있는 일이었다. 현청왕이 병사했으니 위왕의 입장에서는 하늘만큼 큰 경사였다. 물이 불어나면 배가 높아지듯이 주인이 기쁘면 하인도 기쁜 법. 위왕부의 하인들도 당연히 가슴에 기쁨이 가득했다. 이따금 몇몇 꽃다운 나이의 어린 여종은 얼굴 위에 경미한 우수를 띠었다. 그것은 마음속으로 부운석 같은 풍채와 재능이 당대 비길 리 없는 사람이 세상과 이별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이었다.
위왕부, 여자 권속이 사는 곳 안에는 후원이 하나 있었는데 가장 안쪽에는 어두컴컴한 집 한 채가 있었다. 집은 뜰의 지저분한 한옆에 무너질 듯 비스듬히 서 있었고 사방이 잡동사니와 오물이라 보는 사람의 마음을 어수선하게 만들었다.
바구니를 든 홀쭉하게 마른 여종이 평소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그곳으로 갔다. 방문의 자물쇠를 풀고 ‘끼익’ 소리를 내며 방문을 열자 순간 시큼하고 구린 냄새가 얼굴을 향해 덮쳐왔다. 여종은 냄새를 맡고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큰 걸음으로 걸어 들어가 수중의 바구니를 탁자 위에 묵직하게 내려놓다가, 탁자 위에 쌓인 먼지를 보고 기겁했다.
방 안은 어두컴컴했고 곧 바스락바스락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햇빛 한 점이 바깥에서 간신히 비쳐 들어왔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더러운 침상에서 한 사람이 기어 일어나, 탁자를 향해 걸어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여종은 그 사람 몸에서 나는 악취가 역겨운 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 사람은 탁자 근처로 걸어와, 비쩍 마른 손을 뻗어 바구니를 열었다. 밥과 반찬 냄새가 집 안에 가득히 퍼졌다.
“이건…….”
쉰 목소리에서 놀람과 기쁨을 드러났고 눈도 빛나기 시작했다.
“현청왕이 병사했어요. 세자께서 오늘 부중의 모든 사람에게 특식을 주라 분부하셨어요.”
그 여종은 성가시다는 듯 설명했다.
“마음에 들었으면 어서 먹어요.”
현청왕? 그 사람은 살짝 멍해지더니 맹렬히 기뻐하며 몇 번 기침을 하고는 그 여종을 움켜쥐었다.
“현청왕이 죽었어?”
여종은 갑자기 자신을 움켜쥔 손에 놀라서 펄쩍 뛰었다. 그리고 한 손을 그 사람의 얼굴 위에 휘둘러 필사적으로 벗어났다.
“그래요. 왜 그러는 거죠?”
그녀는 두려움을 느끼며 그 사람을 보았다. 그러나 그 사람은 냅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큰 소리로 웃으며 말하는 것이 보였다.
“장한안, 부운석, 너희도 오늘 같은 날이 있구나. 하하하하하!”
그녀는 미친 듯이 큰 소리로 웃어댔다. 희미한 햇빛 아래, 비쩍 마르고 수척하여 노파 같은 그 얼굴에서 어렴풋이 종전의 괜찮았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놀랍게도 장어산이었다.
여종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를 경계하며 문가로 피했다. 장어산이 돌연 실성할까 봐 몹시 두려웠다. 그러나 암흑 속에서 장어산이 점점 고개를 숙이는 것이 보였다. 마치 끝없는 추억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현청왕, 장한안 이 두 이름은 오래도록 장어산의 귓가에 들리지 않았다. 만약 오늘 저 여종이 언급한 한 마디가 아니었다면 장어산은 장한안이 처음부터 존재한 적이 없고, 장부의 모든 것은 자신이 꾼 꿈일 뿐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녀가 이 작고 어두운 방 안에 갇혀 세상과 단절된 생활을 한 지도 벌써 1년이었다.
1년이면 아주 많은 일이 일어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위왕부 안의 지위가 날로 올라가던 그녀의 자리를 위세자비 이가기가 대체 하게 된 것이라든지, 위여풍이 1년 동안 그녀를 한 번도 만나러 온 적이 없는 거라든지, 자신의 아들이 더는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든지. 또……. 그녀는 위왕부 안에서 하인보다 더 낮고 비천한 사람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은 것은 이가기, 단 한 사람이었다.
이가기는 시집온 후, 위여풍의 정처 자리를 차지하고 횡포하고 무도한 짓을 했다. 장어산이 아직 혼인하지 않은 규방 여자였을 때, 이가기와 교제하면서 금지옥엽의 아리따운 이 여자가 어울리기 쉬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때의 장어산은 이가기를 이용할 생각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이가기는 무도하고 골이 빈 사람이라 그녀와 결맹하여 한안을 처리하고자 하면 허다한 힘을 덜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과 대립하는 사람이 되어 자신을 짓밟자 장어산은 더 이상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가기의 질투심은 대단히 강했다. 막 시집왔을 때, 날마다 위여풍을 차지하여 장어산이 그에게 접근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장어산은 비록 위여풍을 사랑하지 않았지만 그는 그녀가 기어 올라가야 하는 의지처였다. 후원 안에 있는 여인이 남자의 총애를 잃으면 한 걸음을 옮기는 것도 어려웠다. 장어산은 갖은 방법을 다해 위여풍에게 접근했고 이것을 이가기는 이 모습을 보고 한층 더 불쾌해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전쟁은 커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가기는 회임을 했고 이때 장어산 또한 자신이 회임한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두렵고 당황스럽기 그지없었지만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못했다. 자신과 이가기가 동시에 아이를 가졌다 해도 모두 이가기의 아이만 아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더라도 자신의 아이는 서자에 불과했다. 적자와 서자의 차별은 그녀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장한안을 증오한 것도 한안이 적녀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어찌 자신의 아이에게 자신이 걸었던 길을 걷게 할 수 있을까? 장어산은 방법을 생각하여 이가기가 유산하도록 그녀를 해쳤다.
사실 그녀의 수법은 주씨 두 자매에게서 보고 들은 것들이라 비교적 치밀하고 교묘하다고 할 만했다. 장어산은 비록 한안의 손아래 번번이 패했지만 그것은 한안이 삶을 다시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장어산은 저택 안 싸움의 고수라 할 수 있었다. 이가기는 머리가 어리석어 보잘것없는 장어산이 자신의 머리 꼭대기에 있을 거라고 의심하지 못했다.
이가기는 총명하지 못했지만 장어산은 이가기 배후의 세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었다. 우상의 딸 신변에 있는 사람들이 어찌 호락호락할까. 오래지 않아 장어산이 이가기가 유산하도록 해친 일이 들통 났다. 우상은 대노했고 장어산을 죽여 자신의 외손주 목숨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려 했다. 그제야 장어산은 일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그녀는 장사양에게 구조를 청했다. 장사양은 자신을 가장 아끼고 사랑했으니 도와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장사양은 보잘 것 없는 5품 관원일 뿐이었고 장어산이 큰 잘못을 범하고 노하게 한 사람은 나라의 우상이었다. 장사양은 장어산에게 분노할 틈조차 없이 “이 여자와 나는 무관합니다. 우상 대인께서 마음대로 처리하십시오.” 라는 말을 던지고 바로 떠났다. 그 순간 장어산은 세상이 무너진 듯한 절망을 느꼈다.
종전에 장어산은 장사양이 한안을 무정하게 대하는 것을 보면서 그저 남의 불행이라며 즐겼다. 그러나 그녀는 깨달았다. 장사양이 당시 한안을 대했던 태도가 이후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눈 속에 오직 권력만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벼슬길을 가로막는 모든 사람은 설령 친혈육이라 해도 조금의 정도 남기지 않고 한 발로 걷어차 버렸다. 그녀는 너무 늦게야 이해했다.
장어산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주씨는 감옥 안에 있고 대주씨는 이미 죽었다. 그녀를 구조해줄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복중 태아 때문에 위여풍은 그녀의 목숨을 살려줄 것을 청했다. 아이가 태어난 후에는 이 작고 어두운 방에 갇혀 사람을 만나지도 못했다. 아이는 이가기에게 보내졌다. 자신의 아이는 다른 사람을 ‘어머니’라고 불렀다. 하지만 장어산에게 그것보다 더욱 두려운 것이 있다면 이가기가 자신의 아이를 진심으로 대해 줄 리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남은 반평생은 아무런 가망도 없었다. 갑작스레 닥쳐온 이 소식만이 있을 뿐. 그녀는 잠시나마 유쾌했다.
채봉전 안.
태후는 높은 자리에 비스듬히 기대 있었고 7황자는 아래쪽에 서 있었다.
“황조모, 부운석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의 눈빛은 흥분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조바심 낼 게 뭐 있어?”
태후가 옅게 웃었다.
“부운석은 여러 방면으로 교활하니, 네가 분명하게 알아보는 게 좋겠다. 만약 남에게 속기라도 한다면 바로 대패하게 된다.”
7황자는 확신에 차서 웃었다.
“황조모께서는 아무쪼록 마음 푹 놓으십시오. 본궁이 이미 사람을 보내어 조사했습니다. 현청왕부는 지금 온종일 어수선하고 그 장한안조차 방 안에 숨어서 문을 꼭 닫고 나오지 않습니다. 분명 홀로 몰래 눈물을 흘리고 있겠지요.”
“그녀가 뜻밖에도 정이 많은 종자였구나.”
태후는 마치 조금 업신여기듯 말했다.
“그렇다면 부운석은 정말 죽었겠구나.”
그녀는 깊이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나는 늘 이날을 기다린 셈이지. 기왕 이렇게 됐으니 우리 황상에게 가 보자. 운석이 죽었으니 그는 황형으로서 분명 비통해 죽고 싶을 게다.”
7황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림군, 그 쪽은…….”
“참견이 너무 많구나.”
태후의 표정이 달라졌고 목소리도 음침하게 변했다.
“잊지 마라. 너는 지금 아무것도 아니야.”
“네.”
7황자는 서둘러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러나 눈빛 속에 반질한 빛이 스쳤고 잠시 후 즉각 평소와 같은 모습을 보였다.
어서방.
“부황!”
태자가 급히 서두르며 밖에서 달려 들어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큰소리로 외쳤다.
“네가 법도를 이렇게 배웠느냐. 감히 짐의 서재에 억지로 난입하다니!”
황상은 노하여 고개를 홱 들고 호통을 쳤다. 그의 눈빛은 조금 불그레했다.
“부황!”
태자는 그의 엄한 얼굴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황상의 앞에 꼿꼿하게 섰다.
“저들이 왕숙이 돌아가셨다고 말해요! 저는 안 믿어요!”
“제멋대로 소란을 피우는구나!”
황상의 용안은 대노했다.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 게냐!”
“황상, 화를 거두소서!”
서둘러 따라 들어온 황후가 태자를 껴안았다.
“그는 그저 너무 상심한 것뿐입니다. 그래서 이성을 잃은…….”
“흥!”
황상은 노기가 채 가시지 않았다.
“짐이 보기에 태자의 간이 갈수록 커지는 것 같군. 감히 짐에게 큰소리로 고함을 치다니. 태자의 안중에 도대체 짐, 이 황상이 있기나 한 거요! 당신이 태자의 버릇을 이렇게 가르친 게요!”
이 질책은 확실히 좀 밑도 끝도 없는 것이라 황후는 억울했다. 그러나 태자가 여전히 고개를 쳐들고 말하는 것이 보였다.
“이전에 왕숙의 병이 중하다고 듣고 소자가 문안을 가려했으나 부황께서 저지하셨지요. 소자는 왕숙의 얼굴조차 못 뵈었는데 사람들은 왕숙이 돌아가셨다고 말합니다! 소자는 못 믿습니다!”
“네 왕숙은 죽었다!”
황상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일에 대해서 너는 의견을 말할 것도 없다!”
“저는 못 믿어요, 못 믿습니다!”
태자는 황상의 말을 듣고 눈물이 쏟아졌다.
“저는 못 믿습니다!”
한마디를 던지고 바로 몸을 돌려 빠르게 달려나갔다. 황후는 황상을 한 번 보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 옅은 눈물 흔적이 있는 것 같았다.
“황상, 어떤 때는 신첩은 정말이지 당신께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말을 마치고 황상이 어떤 얼굴빛인지 상관하지 않고 태자를 따라 떠났다.
그들이 간 후, 황상은 비로소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본래 기쁨과 노여움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던 얼굴 위, 제왕의 눈 속에 옅은 비애가 담겨 있었다. 그는 손을 들어 책상 위의 상소를 전부 다 쓸어 떨어뜨렸다. 신변의 태감은 숨도 감히 크게 내쉬지 못했다. 황상과 현청왕의 우애는 깊었다. 현청왕이 병사했으니 황상이 죽고 싶을 정도로 비통한 것도 정리에 비추어 당연한 일이었다.
태자는 어서방 밖으로 달려나가 정자 앞의 화원에서 멈추었다. 그는 1년 전에 비해 키가 적지 않게 커졌고, 얼굴 위에는 더 이상 천진한 치기의 빛을 띠고 있지 않았다. 제왕가의 아들은 본래 동년배의 아이들에 비해 더 빨리 성숙해야 했다. 그는 더욱 성숙하고 신중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현청왕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태자다운 모습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던 아이는 울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늘 차갑던 얼굴의 왕숙을 떠올렸다. 비록 말이 없고 웃음이 적었지만 적어도 자신이 그에게 함께 놀아달라고 부탁했을 때, 부황처럼 단호하게 거절한 적은 없었다. 비록 그는 보기에는 엄격해 보이지만, 사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자신에게 궁술과 기마술을 가르쳐주고, 어린 태자에게 부황보다 더 따뜻한 육친의 정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황가 가운데에 육친의 정이 없다고 누가 말했는가. 적어도 부운석은 태자가 인정한 육친이었다. 부운석은 이미 영원히 없어졌고 그는 왕숙의 마지막 얼굴 한 번 보러 가지 못했다. 어떻게 죽고 싶을 정도로 상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
“황동생, 너무 상심할 필요 없어.”
몸 뒤에서 갑작스럽게 목소리 하나가 울려 퍼졌다. 태자는 몸을 돌렸다. 7황자가 눈에 거슬리는 웃음기를 머금고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생로병사는 인지상정이지. 제아무리 슬퍼해도 왕숙이 다시 살아 돌아올 리는 없어.”
태자는 이를 악물고 그를 보았다. 7황자와 왕숙의 사이가 적대관계라는 것은 태자도 조금 알고 있었다. 비록 구체적으로 도대체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태자는 왕숙의 사망이 7황자에게 있어서는 좋은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태자가 말이 없는 것을 보고 7황자는 더욱 오만방자하게 웃었다.
“세상사는 누구도 확실히 단언하기가 어려워. 어쩌면 황동생, 네가 비록 지금은 상심하고 있더라도 얼마 못 가서 왕숙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지.”
태자는 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7황자를 응시했다. 7황자는 악랄하게 입을 벌려 한 번 웃고는 몸을 돌려서 가버렸다. 남겨진 태자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7황자의 그 말은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 강렬한 불안감을 주었다. 이 황궁 안에 마치 큰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한편 부운석 사후, 현청왕 손에 있던 병권은 자연히 황상의 손에 떨어졌다. 이렇게 큰 병권을 황상은 다른 사람에게 마음 놓고 맡길 수가 없어 군대는 잠시 방치되었다. 만약 이틀 후 서융인이 대종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지 않았더라면 이 일의 중요성을 인식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
금란전 안.
“황상! 서융인이 이미 경성에 다다랐습니다!”
수하의 정탐꾼이 보고했다. 비할 데 없이 허둥거리는 표정이었다. 비록 대종과 서융의 전황이 오랜 시간을 대치했지만 성문 아래까지 쳐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한순간에 인심이 흉흉해졌고 경성 안 백성들은 저마다 위기를 느꼈다. 게다가 서융인은 비할 데 없이 잔인하고 포악하여 가는 곳마다 방화, 살인, 강탈 등 온갖 흉악한 짓을 다 저질러 일시에 곳곳마다 유리걸식하는 피난민이 가득했고 백성이 도탄에 빠졌다.
문무백관은 모두 소리도 내지 못하고 묵묵히 서 있었고 황상은 대노했다.
“짐이 다시 한번 말하겠다. 누가 병사를 이끌고 싸우러 나가겠느냐?”
정말 기이했다. 광활한 궁중에 이처럼 많은 장군이 있는데 기꺼이 병사를 이끌고 싸우겠다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이었다. 성뢰는 영문 모르게 실종되어 누구도 그를 찾지 못했다. 새로운 장군들은 감히 싸움터에 나갈 수 없었고 늙은 장군들은 자신이 나이가 많고 쇠약해졌다는 핑계를 대며 이 같은 중임을 맡을 수 없다고 했다. 충성심에 불타서 전방에 병사를 끌고 나간 일부 장군들은 홍수처럼 밀려오는 서융 병사들을 한순간도 버티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후방에서 협조하는 사람도 없으니 실로 진퇴양난이었다.
문신과 무장들은 모두 소리를 내지 않았다. 서융인의 기세가 흉흉하니 분명 만전의 준비를 한 것이리라. 이 전쟁이 매우 처참하리라는 것을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웃기게도 서융인을 격퇴할 수 있었던 이는 오직 현청왕 하나뿐이었으니 다른 사람이 나선다면 이는 죽음을 자초하는 게 아닌가. 사람이 자신을 위하지 않으면 하늘과 땅이 그를 멸망시키는 법이니 모두가 이 앞장서는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않았다.
사방에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황상은 높은 자리 위에 높이 앉아 돌연 냉소를 터뜨렸다.
“좋다! 좋아! 좋아!”
제왕은 연달아 ‘좋다’는 말을 세 번 하고 홱 일어서서 아래의 뭇 신하들을 한 번 좌우로 쓸어 보았다.
“이것이 짐이 기른 국가의 동량(栋梁: 마룻대와 들보, 나라의 기둥, 국가의 중임을 맡고 있는 인물)이구나! 짐이 기른 좋은 신하야!”
그는 화가 나서 부르르 떨었다. 두 손이 모두 조금 불안정했다. 자신의 형제를 잃은 슬픔을 미처 수습하기도 전에 서융인이 바로 대대적으로 공격해 왔다. 지금은 또 주동적으로 출전하겠다는 사람도 하나 없었다. 높은 곳에서 군림하는 제왕은 평생 처음으로 외톨이에, 덕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뭇 신하들의 이런 태도는 너무도 기이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상, 조급해할 필요 없습니다.”
돌연 느릿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태후가 천천히 내전(内殿)에서 걸어 나왔다. 몸 뒤에 또 금포를 입은 7황자가 따르고 있었다.
7황자는 황상의 면전까지 걸어와 무릎을 꿇지도 않고 그저 살짝 허리를 굽혔다.
“소자가 병사를 이끌고 싸워 서융에서 온 병사들을 무찌르기를 원합니다.”
전 내는 쥐 죽은 듯 고요해졌고 황상은 조용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눈빛이 7황자의 옷자락 위, 날아오르려 하는 금룡 위에 떨어졌다.
“네가 병사를 데리고 싸우겠다고?”
그의 목소리는 노여움이 풀렸는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7황자가 말했다.
“네, 황상께서 병부를 내려주시기를 청합니다.”
황상이 병부를 내려주기를 청한다. 병부는 그저 동패 하나에 불과하지만 천군만마를 호령할 수 있었다. 역사상 적지 않은 사람들이 병권을 쟁취하기 위하여 머리가 깨지고 피를 흘렸다. 이것은 좋은 물건이면서도 말썽을 일으킬 수 있는 물건이었다.
대종에서 부운석 수중의 병부는 병부 하나의 의미뿐만 아니라 무한한 권력을 의미했다. 이 병부를 가졌다는 것은 대종의 모든 군대를 통제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모든 장군이 그것에 머리를 숙이고 굴복한다. 어느 방면에서 보자면 황상의 권력도 이 병부에 미치지 못했다.
“황상, 7황자가 출전을 원한다니 황상이 병부를 그에게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오.”
태후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녀의 높이 치켜 올라간 눈꼬리가 사람을 핍박하는 듯 보였다.
“짐은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황상이 말했다.
7황자는 표정을 변하지 않은 채 말했다.
“지금 서융인이 대종에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그런데도 출전하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소자가 갑옷을 입고 군대를 이끌기를 원한다는데, 황상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네요. 싸우지 않으면 나라가 망합니다. 소자는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일종의 완곡한 협박을 띠고 있었다.
“황상께 병부를 내려주시기를 청합니다!”
“네가 감히 짐을 협박하다니!”
황상이 벌컥 대노했지만 문무백관은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들의 눈빛이 보고 있는 것은 태후였다.
대종의 하늘이 바뀔 것이라 오래전 누군가 말했다. 그 일이 이루어지려 하는 지금, 지켜보는 이는 대전 위의 담담한 향기뿐이었다.
“병부는 짐에게 없다.”
황상이 냉소하며 말했다.
“너는 어찌할 것이냐?”
7황자가 슬프게 말했다.
“그럼 소자는 그저 불효했다는 오명을 짊어질 수밖에 없지요.”
말을 마치고 손을 흔들었다. 대전 내에 순식간에 칼을 쥔 갑옷의 시위가 뛰쳐나왔다. 어림군은 언제인지 모르게 뛰쳐나온 군대에 제압당했다. 황상은 돌연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을 짐작도 못 했다. 그러나 대전 위에는 꼼짝하는 사람이 없었다. 태후는 한결같이 평온했고 뭇 신하들은 소리 없이 응낙하고 있었다.
공기 중에 삼엄한 살기를 띤 분위기가 감돌았다. 황상은 냉랭하게 면전의 7황자를 응시했다. 밝은 노란색의 용포에 감싸인 몸이 뻣뻣했다. 부운석이 죽은 지 불과 이틀밖에 안 되었는데 이 사람들은 음모를 획책하여 난동을 부리려 하고 있었다. 어쩌면 모의한 지 이미 오래일지도 모른다. 마침내 지금에서야 손을 쓴 것이고. 7황자가 입가를 구부렸다.
“부황, 소자에게 알려주십시오. 병부는 어디 있습니까?”
설렁설렁하는 말 속에 살기가 드러났다.
공기가 굳어지는 것 같았다. 모든 사람이 다 숨을 죽였다. 제왕은 한 걸음 한 걸음 물러나고 황자는 바짝 핍박하니 어디 부자의 정분이 한 가닥이라도 있으랴. 이것이 바로 황가이며, 이것이 바로 아버지와 아들이었다. 온정 없고, 화목함도 없고,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권력과 칼끝뿐.
“만약 짐이 말하지 않는다면…….”
황상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은 미처 끝나기도 전에 7황자에게 잘렸다.
“부황, 그럼 소자는 스스로 가져가야지요.”
그가 손을 들자 바깥의 시위가 전부 쏟아져 들어왔다.
*
한편 성문 밖, 성을 지키던 장병들이 의연히 막아내지 못하여 한 무리 또 한 무리 서융의 병사들이 달려들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은 비할 데 없이 사납고 흉악하며 목숨은 돌보지 않았다. 전쟁터에서 우세를 차지했던 대종의 병사들은 처음으로 적의 강대함을 느꼈다. 그러나 위기는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갈수록 많은 서융 병사가 쏟아져 와 성문은 이미 막아내지 못하고 있었고 서융인은 싸울수록 용맹해지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대종 병사들의 진법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진을 격파했다. 대종의 원군은 늦도록 오지 않았고 지켜보는 가운데 쓰러지는 병사들은 갈수록 많아졌다. 성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나이가 60이 넘은 노장이었다. 이번 서융의 출병은 매우 갑작스러웠지만 그는 주동적으로 종군을 자청했다. 본래도 성을 지키는 대장으로 전쟁터에서 적지 않은 공훈을 세웠지만 나이도 많은 데다 고초까지 겪으니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수중의 긴 창을 땅 위에 한 번 힘껏 내리치며 큰소리로 고함을 쳤다.
“성이 있어야 내가 있다!”
고함을 친 후 장창을 잡고 적군 가운데로 달려들었다. 종군하는 전사들이 보고 눈이 붉어져 즉각 똑같은 말을 고함치며 적군을 향해 달려갔다. 이 군대는 일찍이 전쟁을 겪은 적이 있었고 또 이전에 서융인과 대치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눈앞의 이런 참상을 만난 적은 없었다. 만약 현청왕과 성 장군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들 두 사람은 전쟁터의 수라(修罗)였다. 설령 여기에 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즉각 병사들의 사기를 무한히 끌어올릴 수 있었다. 반대로 적들은 그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현청왕은 이미 병으로 죽었고 성 장군은 종적을 알 수 없었다. 조정 안에 남은 몇몇 소장군은 아직 아무 경험도 없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또 목숨을 아끼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무리였다. 사전에 모든 준비가 되어 있는 서융 병사들을 마주하여 실로 아무런 승산이 없으니 하늘이 대종을 망하게 하려는 것이로다!
짧은 돌격은 대종 병사들에게 그다지 많은 희망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삽시간에 도처가 칼로 번쩍이는 빛과 검이 만드는 그림자, 병사들의 구슬픈 울부짖음과 흩뿌려진 피, 그리고 비명과 호소로 가득 찼다. 절망과 삶의 희망, 선혈이 석양을 붉게 물들였다.
대종의 성문이 마침내 서융인의 또 한 차례 공격에 한 줄기 틈이 갈라졌다.
성! 격파됐다!
서융인의 눈에는 놀라움과 기쁜 빛이 뿜어져 나왔고 지금이 기회다 싶어 한꺼번에 떼 지어 몰려들어 성문을 향해 달려갔다. 일단 경성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들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었다. 경성 백성을 모조리 죽여 그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처와 딸을 겁탈하며, 이 땅을 점령할 수 있다!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고 대종 사람들을 자신의 노예로 삼을 것이다!
바로 이때, 멀리서 우렁찬 나팔 소리와 간간이 울리는 북소리가 들려오자 서융 병사들이 일제히 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보았다. 내달리는 말발굽 소리가 바람과 함께 몰려왔다. 거대한 말 위에 장검을 손에 든 은갑 차림의 장군이 선두에 있었는데 그는 바로 실종됐다 생각했던 성뢰였다.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오로지 성뢰를 본 것만으로도 선두에 선 일부 서융 병사들은 주눅이 들었다. 성뢰가 조금도 지체 없이 손에 든 장검으로 서융 인들을 가리키며 크게 고함치는 것이 들렸다.
“병사들이여, 이 강도들을 모조리 죽여라, 돌격!”
말발굽이 내달리며 끊임없이 일으키는 먼지가 정면으로 덮쳐왔다. 이 군대의 용맹스러움과 질서정연함은 한결 같았고 사기 또한 드높아 막 승기를 잡은 서융 병사들이 조금도 정신을 차릴 수 없게 했다. 군대는 기병에 의해 뒤죽박죽 흐트러졌다. 군대가 흐트러지자 공격하기는 훨씬 수월했다. 향 한 대가 탈 정도의 짧디짧은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조금 전 비할 데 없이 횡포하게 날뛰던 서융 병사들은 쟁반에 흩어진 모래가 되었고 그들은 참패하여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성벽 위에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병사들은 모두 기쁨이 절정에 달했다. 성뢰는 성문 위에 서서 기개와 권위가 넘치는 모습으로 하하 크게 웃었다. 장군으로서 승전보다 더 기쁜 것은 없었다. 이 전투는 실로 통쾌했고 성뢰 자신도 아주 즐거웠다. 오래 답답하게 참고 있다가 마침내 한바탕 크게 싸울 수 있었던 것이었다. 운석, 그쪽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구나.
한편 금란전.
칼을 가진 무수한 시위가 모두 칼끝을 황상에게 겨누고 있었다. 번쩍번쩍한 칼끝은 실로 몹시 눈이 부셨다. 황상의 얼굴빛은 검푸르렀다. 태후는 서두르지도 여유 부리지도 않고 황상의 등을 토닥였는데 마치 그의 숨을 고르게 해주는 듯했다.
“황상, 화내지 마시오. 애가가 보기에 황상이 병부를 7황자에게 주는 것이 좋을 듯하오. 이 강산은 대종의 강산이니 서융인이 강탈해 가게 할 수는 없지 않소. 만약 늦도록 병부를 7황자에게 주지 않아 서융인이 성을 공격해 들어온다면 끝이나 다름없지요.”
정권을 탈취하려는 것뿐이면서 구태여 이렇게 허울 좋은 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황상은 냉소했다.
“우리 대종 강산? 아마도 병부를 노칠(老七)에게 주면 이 강산은 정말로 서융인이 들어와 앉는 곳으로 바뀔 겁니다.”
이 말이 나오자 태후의 낯빛이 살짝 변했다. 그러나 이 변화는 지극히 미세했다. 이내 바로 평소와 같이 그녀는 살짝 웃었다.
“황상이 농담을 하는구려. 황상이 이처럼 병부를 잡고 있기만 한다면 도리어 명군이 아니라 할 것이오. 7전하는 어쨌든 황상의 친혈육인데 마음 놓지 못할 것이 뭐 있겠소.”
일이 여기까지 진행되어 태후가 이미 완전히 조정을 장악을 했으니 황상이 승낙하고 안 하고는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서융인은 이미 경성에 들어왔고 어림군도 제압되었으며 그녀들의 사람이 이미 금란전 밖을 지키고 있었다. 황위 이양이 목전에 가까워져 있었다. 이날을 위하여 그녀는 꼬박 십여 년을 기다렸다. 지금 부운석은 죽었으니 자신이 염려할 것은 없었다. 모든 것이 아주 순조로웠다. 일단 7황자를 황위에 올려 말을 잘 들으면 그를 꼭두각시 황제로 삼을 것이고 그가 말을 잘 듣지 않는다면 꼭두각시라 할지라도 그에게 맡기지 않을 것이다. 7황자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의 친손자도 아니었다. 설령 친손자라 해도 그녀와 맞선다면 그녀는 돌아볼 여지를 남기지 않고 뿌리 뽑을 것이다.
황상은 그저 7황자 옷자락의 비룡을 보고 있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친아들이었다. 비록 가장 무정한 것이 황가라지만 부자 상잔의 일이 바로 자신에게 일어나자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신하가 군왕에게서 마음이 떠나는 것이든 아니면 아들이 부친을 배반하는 것이든 상관없었다. 7황자의 행동은 이미 황상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가 어떻게 병권을 내놓을 수 있을까. 일단 내놓으면 자신은 정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7황자는 됨됨이가 사악하고 잔인하니 태자를 처리하는 데도 사정을 봐줄 리 없었다. 그리고 태후는 말끝마다 자신이 명군이 아니라 하며 자신의 친혈육조차 의심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완벽한 핑곗거리를 찾기 위함이 아닌가. 역사상 반역에 성공하고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바로 자신의 모든 오점을 지워 역사책에 자신의 큰 과실을 남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분명 황위 찬탈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여전히 임금에 충성하고 애국하는 모습을 지어내려 하다니 어찌 가소롭지 않으랴.
“꿈도 꾸지 마라!”
그가 말했다. 목소리가 비할 데 없이 위엄 있었다.
7황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되었으니 아들이 불효하겠습니다!”
그가 막 황패를 더듬어 꺼내며 군대에 명령을 내리려 하는데, 바깥에서 한 마디가 들려왔다.
“잠깐!”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그 목소리는 익숙한 오만함과 차가움을 띠고 있었고 추운 겨울에 살을 엘 듯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이 매서워 사람들의 심장을 타격했다. 대전 문밖을 보니 눈 같은 백의에 새까만 머리카락, 차가운 눈동자가 마치 족자에서 걸어 나온 것 같은 깨끗하고 아름다운 얼굴의 수라가 느린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와, 왕야!”
뭇 신하 중에 서 있던 대신 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눈빛이 모두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었다. 태후의 얼굴빛은 창백하고 눈동자는 불안정했다. 7황자는 이미 놀라 얼이 빠졌다. 그가 보낸 정탐꾼들은 하나같이 정말로 부운석이 죽었다고 했다. 그런 까닭에 그가 관 속에 들어가 머지않아 매장될 사람이라는 데에 의심을 품지 않았는데, 어떻게 여기에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비록 부운석이 어떻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다른 것은 명확히 알고 있었다. 자신과 태후가 손을 쓸 수 있었던 까닭은 부운석이 죽어서 그의 위협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러나 지금 부운석이 출현했으니 그는 자신이 머지않아 파멸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를 잡아라!”
7황자가 크게 외쳤다.
그러나 그를 아랑곳하는 사람은 없었다. 자신의 수하들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의 눈빛이 향해 있는 것은 부운석이었다. 7황자는 놀라고 두려웠다. 일이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그 하나만이 아니었다. 태후도 놀라 말했다.
“운석, 너 죽지 않았구나? 네가 어찌 이렇게 많은 시위를 끌고 올 수 있느냐? 나는 놀랐…….”
부운석은 냉랭하게 그녀를 한 번 보고 황상에게 말했다.
“서융인은 이미 패전했습니다. 성 장군이 지금 성문에 주둔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태후는 휘청하더니 거의 똑바로 서 있지 못했다.
“서융인이 패전했다고?”
황상은 손뼉을 치며 웃었다.
“짐은 성뢰가 유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운석, 이 며칠 네가 고생이 많았다.”
그들이 마치 곁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나눈 대화를 들어보면 바보라도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알 것이다. 태후는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그거 정말 잘 됐구나. 대종에 아무튼 위험이 없는 셈이니까.”
“태후와 7황자가 서융인과 공모하여 안팎으로 호응하고 협력하며 적과 내통하고 나라를 배반하였으니 끌고 가 감옥에 가두라. 날을 택하여 다시 심문하겠다!”
부운석이 이 말을 마치자 뒤에 있던 시위들이 한꺼번에 앞으로 몰려가 태후와 7황자를 잡았다. 태후는 발버둥을 치며 말했다.
“억울하다! 황상, 억울하오! 너희가 감히 나를 건드려! 나는 적과 내통하지 않았다. 현청왕, 네가 증거가 있느냐?”
7황자도 따라서 부르짖었다.
“맞아요, 왕숙. 우리가 적국과 내통하고 나라를 배반했다고 말하는데 증거가 있습니까?”
부운석은 차갑게 말했다.
“적국의 서신이면 증거라 할 만하지 않을까?”
그들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입을 딱 벌릴 차례였다. 부운석 수중에 어찌 그들의 서신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탁칠이 그 가운데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처럼 놀랐을 리가 없다.
태후는 불쾌하여 큰소리로 외쳤다.
“나를 놓아라. 나는 태후다! 너희가 미친 게 아니냐!”
그녀의 후반생은 모두 이 일을 꾸미는 데 쓰였다. 자신이 증오하는 여인의 아이 중 하나는 이 세상을 다스리는 황상이 되고 다른 하나는 조정과 재야에 권세가 막강한 왕야가 되었다. 이 눈엣가시를 곧 제거하려는 참이었는데 결정적인 시기에 성공을 목전에 두고 실패했으니 어찌 달가우랴!
“부황, 소자가 잘못했습니다. 부황! 소자의 목숨을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7황자도 따라서 외쳤다. 적과 내통하고 나라를 배반한 죄는 죽을죄였다. 더구나 자신은 또 주범이었다. 그는 죽고 싶지 않았다. 자기의 야심은 아직 실현도 못 했는데 어찌 죽을 수 있을까. 황상이 줄곧 그에게 지극히 잘해주었으니 인정에 호소하면 그들 부자의 정을 생각하여 응당 그의 목숨을 한 번 살려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7황자와 태후가 끌려나갈 때까지 황상은 한마디 말도 없었다.
“미신이 다행히도 황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습니다.”
부운석이 말했다.
“너는 잘해주었다.”
제왕은 새로이 높은 자리 위에 돌아가 아래의 벌벌 떨고 있는 뭇 신하들을 내려다보았다.
위기는 시금석이라 충신과 간신은 결정적인 순간에 가려졌다.
이렇게 오랜 시간 연극에 장단을 맞추어주고 일망타진했으니 이제는 총결산을 해야 할 때였다.
24장
시간은 흐르는 물처럼 모든 어두운 물줄기를 덮어 숨겨 버렸다. 경성은 평온을 회복했다. 만약 3일 후 있을 공개 참수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사람들은 서융인이 대종을 공격하고 7황자와 태후가 연합하여 반역을 일으키려 한 것을 그저 꿈이었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꿈이 아니라는 것을 사실이 증명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충신과 간신이 바로 가려지는 법이라 황상은 조정 안 대신들의 숙청을 진행했고 더불어 과감하고 패기 있게 개혁을 단행했다. 다른 마음을 품고 있던 자들, 태후, 7황자와 도당을 결성했던 자들, 전부 일고의 여지도 없이 말끔하게 뿌리 뽑혔다. 예를 들면 위왕 일가가 바로 구족이 처벌되었다던가 하는 것처럼.
장사양도 그 속에 연루되어 국경 지대로 유배되어 힘든 노역을 하게 되었다. 말이 노역이지 산 높고 길이 머니 많은 사람이 까마득히 먼 길을 가는 도중에 목숨을 잃었다. 더구나 장사양은 편안한 날을 보내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불과 하루도 안 되어 장사양은 도중에 중병을 앓아 낫지 못하고 죽었다는 말이 전해졌다. 비록 이렇게 전해지고는 있지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만했다. 이 소식을 들었을 때, 한안은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기뻐할 거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장사양은 그녀 전생의 원수로 그녀의 어머니를 해치고 부중의 첩들이 그녀를 괴롭히도록 방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슬퍼서 망연자실할 거라 생각하기도 했다. 장사양은 그녀가 장부 안에서 십여 년 평안하게 살도록 그녀에게 살 곳을 주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저 이 사실을 평온하게 받아들였다. 그녀는 문득 자신의 인생 가운데 긴요한 관련이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감정을 가지는 것조차 쓸데없는 짓임을 깨달았다.
태후가 저지른 그 악행들에 대해서는 궁중에서 정비를 몰래 해친 일을 포함해서 모든 것이 만천하에 명백히 알려졌다. 백성 중에 황상과 부운석을 위해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황상은 그녀가 결국 선황의 조강지처 신분임을 고려하여 그녀의 시체는 온전히 하라는 명을 내렸다. 가장 비참한 것은 7황자였다. 아들로서 부친을 향해 칼을 뽑아 들었고 신하로서 군왕을 배반하고 적국과 내통하였으니 실로 가장 큰 악행이었다. 그는 능지처참 당했고 사후에 황릉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 7황자가 능지처참 당한 그 날, 허다한 백성들이 연이어 구경하러 왔다. 그러나 7황자에 대해 동정을 느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황위를 찬탈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은 것은 그냥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증오스러운 것은 자신의 나라를 팔아넘겼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백성들을 가장 분노케 하는 것이었다.
그 날, 한안은 보러 가지 않았다.
급람이 말했다.
“소저, 우리도 가서 볼까요?”
7황자는 그녀들의 소저에게 암암리에 나쁜 짓을 많이 했고 마침내 징벌을 받게 되었다. 악인에게는 악한 보답이 있는 것이니 이를 분풀이를 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어찌 직접 가서 보지 않을 수 있을까.
“가고 싶으면 혼자 가 보렴.”
한안은 웃었다. 그렇지만 그 웃음은 눈 아래까지 도달하지 못해 전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주홍은 걱정스레 한안을 보았다. 한안은 당연히 즐거울 리 없었다. 태후와 7황자의 일이 비록 일단락나기는 했지만 부운석의 한독은 여전히 제거되지 않았던 것이다.
시간이 하루하루 가는 것을 뻔히 눈 뜨고 지켜보기만 하는 동안 부운석의 병세는 갈수록 심각해졌다. 한안이 어찌 마음이 편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녀들은 또 신의(神醫)가 아니었으니 이 일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왕야께서 여전히 이림나를 문밖에서 거절하십니다.”
잠깐 망설인 뒤, 주홍이 이어서 말했다.
“이림나에게 병을 치료하게 하지 않으시겠다고 결심을 굳게 하신 것 같습니다.”
한안이 고개를 돌렸다.
“나도 안다.”
부운석이 이림나가 현청왕부에 발도 들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생의 희망을 버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림나의 고충이 비록 잠시 한독의 증세를 완화 시킬 수는 있지만, 강한 중독성을 지니고 있어 때가 되면 한독이야 잠시 억제되겠지만 또 다른 중독에 걸리게 된다.
부운석은 당연히 자신을 다른 사람의 통제를 받는 바둑돌이 되게 할 리 없었다. 하물며 이림나의 방법은 그저 일시적인 치료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해 어느 날 갑자기 한독이 폭발할 수도 있었다.
한안과 달리 그는 태평스럽다 못해 한안을 위로하기까지 했다. 한안은 며칠 전 부운석이 궁중에서 돌아왔을 때를 떠올렸다. 뒤에 따라온 이는 황상이었다. 황상은 한안을 오랫동안 응시했고 마침내 그녀에게 한 가지 활로를 제시했다. 사실 제왕으로서 한안 같은 존재를 이 세상에 남겨두는 것은 위험한 것이었다. 새로운 왕들은 자신의 황위에 한 점이라도 위협이 되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을 없애기 위해 전 왕조의 잔당을 깨끗이 제거했다. 여지를 남겨두는 것은 곧 황위의 위협받는 것과 같으니 말이다.
그러나 부운석의 태도가 황상조차도 태도를 굽혀야 할 정도로 강경해서 만약 한안을 죽인다면 온 천하를 순장할 기세였다. 황상은 어쩔 수 없이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제왕의 마음에 달갑지 않고, 원하지도 않는 타협을 하게 할 수 있는 이가 부운석 외에 천하에 또 누가 있을까. 황상은 사실 거절할 여지가 없었다. 더구나 어느 날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이 친동생 앞에서는.
한안은 당시 부운석과 황상의 침착한 교섭을 지켜보았다. 그의 모습이 어디 생명이 위태로운 병인으로 보이랴. 그는 늘 모든 것을 잘 안배하였다. 자신의 병세조차도 덫을 짜는 데 이용하여 7황자와 태후가 뛰어들도록 유인했다.
그가 병상에 있을 때 자신의 부고, 서융인의 공격, 황위 찬탈의 어림군 등, 사마귀가 매미를 잡았으나 참새가 뒤에서 노리고 있는 상황까지도 잘 안배하였다. 부운석은 설령 자신의 상태가 나쁠 때마저도 상황을 잘 주무를 수 있었다. 한안은 이번 생이 두 번째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스승님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몰랐다.
“소저, 바깥에 한 노인이 소저를 뵙고자 합니다.”
여종이 바깥에서 바삐 걸어 들어와 조금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괴상한 사람인 것 같은데 쫓아도 가지 않습니다.”
한안은 멈칫했다가 손을 흔들었다.
“내가 나가서 보마.
장부에는 지금 오직 그녀만이 살고 있었다. 장한명은 성뢰 수하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황상은 그녀가 계속 장부 안에서 살 수 있게끔 도와줬다. 장사양이 죄를 범했지만 한안은 평안 무사했다. 황상이 이런 성지를 내린 것이 당연히 도리에는 어긋나는 것이지만 그 속에 부운석의 공로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장부의 문 입구에 잿빛 옷의 노인이 서 있었다. 그는 나이가 예순이 넘어 보였고 수염과 머리카락이 온통 새하얬지만 늙었음에도 유달리 강건하고 원기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등에는 검 하나를 짊어지고 있었고 보기에 강호 사람 같았다.
한안은 가볍게 한번 헛기침을 했다. 노인은 그녀를 향해 돌아서서는 한안의 모습을 보고 멍해졌다가 뒤이어 몸을 떨었다. 흥분하여 스스로의 감정을 제어할 수 없는 것 같았다. 떨리는 입술에서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어르신?”
한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눈앞의 사람은 너무 괴상했지만, 이상한 것은 자신이 비록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를 본 그 순간 대단히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친근감은 모든 것을 초월했다. 상대방의 괴상한 차림새와 행동조차 하나하나 따지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소교!”
그 사람이 마침내 소리 내어 외쳤다.
한안은 멍해졌다. 소교? 그녀의 머릿속에 재빨리 이름 하나가 스쳐갔다. 당소교?
자신이 동후왕의 딸이라는 사실은 영원한 비밀로 남겨두었다. 한안은 영원히 이 일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말한다고 해서 지금의 국면에 새로운 변화가 조성될 리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은 황상이 될 생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분은 꿍꿍이 있는 사람에게 새로운 약점이 될 수 있어 자신에게 말썽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장부의 4소저로 남고자 했다. 그러나 눈앞의 이 사람은 어째서 그녀를 보고 ‘소교’라고 부르는 걸까? 그는 당소교의 적일까? 아니면…… 친척?
“저는 소교가 아니에요. 저는 장한안입니다. 사람 잘못 찾아오셨어요.”
그 노인은 살짝 당황하더니 한안의 말에 정신이 돌아온 듯했다. 그는 흥분해서는 앞으로 두어 걸음 나왔다.
“너무 닮았구나. 너…… 너와 소교…….”
무엇을 떠올린 듯 그가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당생이다. 나는 너의……. 나는 당문의 현재 보주다.”
한안은 무슨 말인지 즉각 이해했다. 이 사람은 당소교와 인연이 있고 그가 여기를 찾았다는 건 분명 자신의 신분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는 아무래도 말하기에 좋은 곳이 아니었다.
“당 보주께서 먼 길을 오셨으니 들어가셔서 차 한잔 하시는 것이 어떨까요?”
당생은 그녀를 바짝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염치불구하고 따르도록 하지.”
두 사람은 장부의 대청에 도착했다. 한안은 모든 하인을 내보냈고 대청에는 오직 그녀와 당생 두 사람만 남았다. 한안이 말했다.
“당소교는 어르신과 어떤 관계죠?”
당생은 한안이 이렇게 물을 줄 짐작도 못 했다. 그의 얼굴 위로 놀라움이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지고 비통함만이 남았다.
“그녀는 내 딸이다.”
한안은 멍해졌다. 이 사람이 당소교의 부친이라면 그러면 자신의…… 외할아버지? 그녀는 돌연 자신의 코끝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세상에 아직 자신의 육친이 있었다. 자신은 홀로 외롭고 처량하게 세상에서 살아가는 게 아니었다. 한안은 마주한 사람의 이목구비를 자세히 살펴보고 그제야 자신과 노인이 매우 비슷하게 생겼다는 것을 발견했다.
“외할아버지!”
떳떳한 사람은 남몰래 말하지 않는 법이다. 당생은 분명 그녀의 신분을 알았고 사실을 확인하러 왔을 것이다. 방금 전 자신과 소교가 닮았다고 했던 그 말은 당생이 이미 의심을 불식시켰다는 걸 의미했다. 자신을 그의 외손녀로 인정했으니 그럼 한안도 더 숨길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외할아버지를 인정하고 싶었다.
이 말이 나오자 당생의 눈빛에 감정이 일었다. 강호에서 위세 당당한 노인이 이 순간 오랫동안 헤어졌던 자신의 손녀를 다시 만나 여느 보통 노인처럼 감격하고 어쩔 줄을 몰라 하는 표정을 드러냈다. 그의 눈시울이 조금 축축해졌다.
“좋다, 좋아. 너와 네 어미는 정말 닮았구나.”
그는 한안을 보니 마음이 시큰해져 나오는 말이 조리가 없이 뒤죽박죽이었다.
“외할아버지!”
그녀는 또 한 번 불렀다.
“정말 외할아버지세요?”
당생은 마침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한안의 손을 잡았다.
“내가 너의 외할아버지다, 손녀야.”
그는 반평생 외롭고 처량했다. 누군가 그에게 알려주지 않았다면 소교의 아이가 아직 살아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그가 이 세상에 소교의 딸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바람에 손녀가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고, 얼마나 많이 힘들어야 했을까. 모두 이 외할아버지가 그녀를 잘 돌볼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생은 한안을 보며 말했다.
“나와 당문으로 돌아가자.”
때론 강호에 살아가는 사람이 조정에 있는 사람보다 더 깨끗하니, 지친(至亲: 매우 가까운 친족 혹은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이 나으리라. 한안의 일은 당생도 들은 바가 있었다. 황상의 심사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니 그녀가 여기에 남아 있는 건 그녀에게 여전히 위험했다.
“외할아버지, 당문은 독을 잘 쓰죠?”
한안은 그에게 대답 대신 관계가 없는 질문을 했다.
당생은 한안을 보았다.
“왜 그러느냐?”
당생의 질문은 한안의 질문에 대한 긍정의 의미와 같았다.
“그럼 해독하는 것은 어때요?”
“안아,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
한안이 아무 이유 없이 이 질문을 했을 리 없었다. 당생은 조금 이상했다. 한안은 고개를 저었다.
“외할아버지, 그냥 어떤지만 말씀해 주세요.”
“다른 문파보다는 당연히 훨씬 낫다. 하지만 해독은 우리의 특기가 아니야. 당문의 사람이 가장 정통한 것은 독을 정제하고 쓰는 것이지. 저들이 정제한 독약마다 다 스스로 해독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독성과 약성은 본래 상생상극(相生相剋: 서로 조화를 이루고 서로 충돌함)하니 독을 정제하는 사람은 보통 해독할 수 있다.”
한안의 눈이 환해졌다. 비록 당생의 말은 그들의 의술이 정밀하고 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1년 내내 독을 사용하는 사람들이라 식견이 넓고 각종 독약의 독성을 깊이 안다는 것을 뜻했다. 오 태의는 어쩌면 부운석이 살아날 기회가 아직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녀는 즉각 무릎을 꿇고 당생에게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외할아버지, 제게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당생은 한안의 갑작스러운 동작에 놀라 펄쩍 뛰었고 어찌할 바를 몰라 즉각 한안을 부축해 일으키며 물었다.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이냐? 무슨 일인지 이 할애비에게 말해라. 내가 반드시 너를 도와 처리해주마.”
“그럼 할아버지께 현청왕을 구해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한안은 잠시 멈추었다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는 일종의 보기 드문 한독에 중독되어 곧 죽을지도 모릅니다.”
“현청왕?”
당생은 멍해졌다. 한안과 현청왕의 일은 그도 들은 적이 있었다. 현청왕은 강호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걸출하고 수려한 젊은 사람으로 본인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인물이었다. 만약 이전이었다면 당생은 손녀사위에 대단히 만족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안아, 너 설마 지금 아직까지 그에게 연연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알다시피 그는 너를 버리고 서융 공주를 처로 들이려 했다. 이런 남자를 네가 걱정할 필요가 있느냐? 만약 남편이 필요하다면 이 할애비가 너를 데리고 당가보로 돌아가서 거기의 좋은 남자를 많이 얻어주마. 한안 네가 또 총명하고 예쁘게 생겼으니 남편감을 찾지 못할까 걱정할 것 없고…….”
노인이 장황하게 한 무더기의 말을 늘어놓는 것을 듣고 한안은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외할아버지, 오해세요. 그는 고의로 그런 게 아니에요. 그 속의 사정은 나중에 제가 천천히 할아버지께 말씀드릴 수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긴급해요. 만약 지금 당장 그를 구하지 않으면 아마 목숨을 잃을 거예요.”
한안은 이를 악물었다.
“외할아버지께서 만약 승낙하지 않으신다면 저는 일어나지 않겠습니다.”
당생은 자신이 지금 막 알게 된 손녀가 이렇게 바닥에 무릎 꿇고서 일어나지 않는 것을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설령 마음속으로 부운석의 일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한안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볼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말했다.
“내가 네게 승낙하지 않는 게 아니야. 다만 해독 같은 일은 당문도 모두 다 파악하고 있는 게 아니라 치료 못 할 수도 있다.”
한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를 꼭 완치해 달라고 부탁하는 게 결코 아니에요. 그저 희망이 있으면 시도해 보는 걸로도 좋아요.”
그녀는 당생을 보았다.
“외할아버지, 저는 남에게 부탁해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할아버지께 간곡히 부탁드릴게요. 그를 구해주세요.”
당생은 한안의 굳건한 모습을 보고 아주 오래전을 떠올렸다. 소교도 이렇게 자신의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자신에게 그녀와 동후왕이 함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부탁했다. 당시의 강호와 조정은 지금과 같이 복잡한 이해관계가 마구 뒤얽혀 있었기에 그들이 함께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본래 괄괄하고 활발하던 소교가 처음으로 그렇게 슬프게 자신에게 허락해 달라고 부탁을 했을 때, 그는 마음이 아팠고 분노했으며 슬펐다. 그러나 무슨 방법이 있을까. 딸이 그 남자를 사랑하는데 부친이 되어서 헤어지라고 강요할 수 있을까. 하물며 소교의 성격은 당생도 잘 알았다. 그녀는 가치 있게 죽을지언정 너절하게 살지는 않았다. 만약 자신이 저지하면 세상이 놀랄 만한 짓을 저지를지도 몰랐다. 그는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동후왕은 확실히 소교에게 잘했다. 재능이 넘치고 전도가 유망한 젊은 사람이 이렇게 한마음으로 강호 여자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사랑이 모든 것은 아니었다. 동후왕은 소교를 잘 돌보지 못했다. 동후왕은 온 집안이 멸문당했고 그에 자신의 무고한 딸을 연루시켰다. 당가보 사람들 모두 당생이 하룻밤 사이에 열 살이 늙어버린 것을 목격했다. 그는 여러 해 강호를 주름잡았지만 자신의 딸은 지키지 못했다.
이제야 어렵사리 되찾은 이 손녀가 어미의 전철을 밟으려 하고 있었다. 조정의 남자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려 하다니……. 그러나 한안의 눈 속에서 당생은 이미 알아보았다. 현청왕에 대한 한안의 정이 아주 깊다는 것을. 그가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그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설마 우리 당가가 뭐 하나에 푹 빠지면 정신 못 차리는 아이가 태어나기 쉬운 집안인 것은 아니겠지?”
당생은 깊이 한숨을 토하며 말했다.
“내가 바로 한 번 시도해 보마. 너는 일어나거라.”
한안은 마음속으로 기뻐 서둘러 말했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당생은 한안의 행동으로 인해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녀가 눈과 눈썹을 휘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여 여태껏 찌푸리고 있던 인상을 폈다. 조손 두 사람은 서로 시선을 마주하며 웃었고 요 몇 년 동안의 일상을 말하기 시작했다.
한편 현청왕부 안.
오 태의가 부운석을 보았다.
“네 몸이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고 있다고.”
병상의 사람은 한층 더 수척해 보였다. 하지만 차가운 눈동자에는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도 안다.”
이 사람은 지금까지 놀라 허둥대는 때라고는 없었다. 자신의 부고를 대할 때도 그랬다. 어쩌면 그가 다른 감정을 드러내게 하는 것은 오직 그 아이뿐인지도 모른다. 오 태의는 고개를 저었다.
“너 아무것도 하지 않을 셈인가?”
“이것도 이미 좋아.”
부운석이 말했다. 그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태어난 후로 요근래가 가장 평온한 날들이었다. 큰 원한은 이미 갚았고 근심은 끝났다. 더 이상 다른 염원은 없었다. 이 세상에 또 놓지 못할 것이 있을까? 황상의 강산은 이미 안정되었고 미래의 수십 년은 무슨 문제가 있을 리 없었다. 서융인은 원기가 크게 상해서 십여 년 내에는 경거망동 못 할 것이다. 조당의 정세도 이미 안정되어 백성들의 생활도 파란이 없었다. 그 사람만…… 제외하면. 그는 살짝 눈을 감았다. 무언가 조금 유감스러운 듯했다.
“부운석.”
귓가에 울리는 낭랑한 부름에 한순간 그는 자신이 환각을 만들어낸 거라 여겼다. 환각 속의 아이는 자신이 머릿속으로 그녀를 떠올린 그 순간 바로 나타났다. 그러나 그는 이내 그것이 진짜라는 것을 알았다. 한안이 막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눈과 눈썹은 휘어져 있었고 머리는 여전히 두 개의 둥근 만두 모양이었다. 분명 맑은 눈과 하얀 치아를 한 소녀의 모습이었지만, 부운석에게는 아주 오래전을 떠올리게 했다. 홍매화 나무 아래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던 그 어린 아가씨가 자신의 피풍의에 숨어들어 놀란 작은 짐승처럼 자신에게 의지하던 정경.
한창 생각하고 있는데 한안이 들어와 그의 앞에 도착했고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멍하니 뭐 하고 있어요?”
오 태의는 한안이 들어올 때 이미 조용히 물러났다. 한안은 자연스럽게 부운석의 곁에 앉았다. 요새 부운석과는 함께 지내는 것이 한층 더 평온하고 태연해졌다. 어쩌면 그의 병세를 알고 유한한 날들 속에서 함께 지내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기회인지 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더 이상 무의미하고 거리감 있는 대화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일상적인 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소하고 잡다했지만 따뜻했다.
“언제쯤에나 나이에 맞는 머리 모양으로 빗을 거지?”
부운석의 눈빛이 한안의 머리카락 위에 머물렀다. 왜 그녀는 급계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급계를 치르지 않은 아이처럼 머리 빗는 것을 고집하는 걸까? 자신이 그날 그녀의 급계례를 망쳤기 때문에 아직까지 항의하는 것인가?
한안은 피식 하고 소리 내어 웃고는 그를 보며 말했다.
“당신이 서둘러 나아지길 기다리는 거예요. 나를 아내로 맞으면 바로 부인 머리 쪽을 할 수 있으니까요.”
부운석은 살짝 당황했다. 한안의 눈빛이 돌연 단호하고 진지하게 바뀌었다.
“나를 아내로 맞이해요.”
한참 동안 말이 없던 부운석은 잠시 후 살짝 웃었다.
“나는 곧 죽는다.”
“나도 알아요.”
한안이 그를 보았다.
“당신에게 시집가지 않으면 기회도 없어요.”
그녀가 가볍게 웃었다.
“나는 아직 현청왕비가 되면 무슨 기분일지 맛보고 싶어요.”
부운석은 침묵하며 그녀를 보았다. 입가의 담담한 미소는 이미 사라졌다. 그는 지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한참 후에 그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 한숨 속에 웃음기가 살짝 담겨 있는 것 같았다.
“한독이 해독되면 성혼하자.”
한안은 그를 한 번 노려보았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사람의 생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한 사람, 또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얻기란 쉽지 않다. 생을 다시 사는 것은 본래 하늘의 은혜이기에 조심하고 신중하게 하나하나 지켜가며 살아야 했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지금은 이전과 완전히 다른 인생이라는 것이다. 전생의 그녀는 남에게 사랑받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 생은 달랐다.
전생의 부운석은 최후에 어떤 모습이었을까. 한안은 본 적이 없지만, 그가 저번 생과 달리 이번 생에서는 이림나를 아내로 맞지 않았으니 일의 전개는 전혀 다를 것이다.
한안은 몸을 일으켜서 그의 입가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한독이 해독된 후, 외할아버지 계신 곳에 한 번 뵈러 가요.”
그러나 이 약속은 두 사람 모두 도대체 실행할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2년 후.
강남, 물의 고장의 봄빛은 지극히 좋았다. 도처엔 따뜻한 바람이 불고 버드나무가 드리워져 있었으며 꾀꼬리가 아리땁게 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면 온 눈에 사람을 취하게 하는 초록빛이 가득했다.
강변의 제방 위, 수양버들의 끄트머리, 많은 유람객들은 여기에서 꽃을 감상하고 연을 날렸다.
군중 속 일남일녀가 주목을 끌었다. 두 사람은 생김새가 굉장히 뛰어났다. 남자는 눈처럼 하얀 옷을 입었고 새까만 머리카락 가운데 약간의 백발이 섞여 있었지만 그게 오히려 신비한 느낌을 주었다. 비교할 이 없이 수려한 얼굴이 머리카락과 잘 어울려 오히려 선풍도골(仙風道骨: 신선의 풍채와 도인의 골격, 남달리 뛰어나고 고아한 풍채)의 분위기가 있었다. 그의 표정은 냉담했지만 옆의 여자를 볼 때만은 얼굴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표정을 드러냈다.
그 여자는 대략 열여섯 정도로 청수하다 할 정도의 미모이나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고귀한 기품과 강호인에게서 느낄 수 있는 소탈함과 기민함 등 각종 기질이 혼합되어 있었다. 비록 외모는 절색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사람이 눈을 떼지 못하게 했다. 그 여자의 아랫배는 살짝 부풀어 올라 있었는데 한 손으로 자신의 복부를 쓰다듬는 것이 임신한 것 같았다. 이런 두 사람이 군중 속을 걸어가고 있으니 하늘이 점지해 준 이상적인 한 쌍이라 여겨졌다. 실로 아주 잘 어울리기도 했다.
이 두 사람은 바로 부운석과 한안이었다.
“강남의 풍광이 경성에 비해 훨씬 좋네요.”
한안이 말했다.
“우리 여기서 여러 날 더 놀다가 당가보에 가도 늦지 않아요.”
그들은 이번에 당가보에 가는 길이었다. 가는 길에 산수 유람을 하니 뜻밖에도 흥취가 유달리 좋았다.
“몸조심해야지.”
부운석은 눈썹을 치켜올렸고 눈빛은 한안의 아랫배에 떨어졌다.
한안은 조금 난감해했다. 겨우 3개월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 사람은 온종일 긴장했다. 자신이 무언가 조금 하기만 해도 그의 끊임없는 걱정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웃었다. 자신도 뱃속의 이 조그만 녀석을 빨리 좀 만나고 싶었다.
시간은 2년이나 지나갔다. 당생은 오 태의와 연합하여 한독을 억제하는 약을 연구 제조해냈다. 당문은 전문적으로 연구 제조를 하는 의술 문파가 아니라 이 두 사람이 연합했다 하더라도 부운석의 독성을 잠시 억제할 수 있을 뿐이었다. 부운석의 한독은 어쩌면 5년이나 10년 뒤에 재발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한안과 부운석은 성혼했다.
성혼하고 반년 후에야 두 사람은 비로소 합방했다. 반년 만에 부운석의 몸은 한층 좋아졌다. 나중에는 무슨 문제가 있는지 조금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독을 치료할 때에 까마귀 깃털처럼 새까맣던 머리카락 약간이 희끗하게 바뀌었을 뿐이었다. 당생은 이것이 독성을 억지로 빼낸 후과(后果: 나쁜 결과)라고 말했다. 다행히 한안과 부운석 모두 이런 것들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탁칠은 몇 차례 한안을 찾아 왔지만 매번 부운석에게 쫓겨났고 한안은 그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하지만 아마 대결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탁칠은 당연히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고 그 후에는 이림나를 데리고 서융으로 돌아갔다. 그들도 자신이 해야 할 큰일이 남아 있었다. 탁칠은 본래 야심이 있는 사람이니 여인 하나를 위해 대종에 남을 리 없었다. 한안은 그저 마음속으로 그에게 미안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그를 속여 그의 힘을 빌렸고 부운석이 태후가 나라를 배반한 증거를 손에 넣도록 돕게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모두 오래된 일들이었다.
그녀는 부운석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걱정할 게 뭐 있어요. 당신이 이렇게 대단하니 이 애도 모자란 아이일 리 없어요.”
부운석은 담담하게 웃으며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아끌고 군중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 세상에는 반드시 당신을 위해 준비된 사람이 있을 것이다. 설령 아무리 고초와 슬픔이 많다 해도 누군가는 당신을 사랑해 줄 것이다.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 짧으니 어찌 눈앞의 사람을 꽉 잡지 않을 수 있을까. 이후의 일은 구태여 물을 필요 없다.
봄빛은 무한하고 하늘은 매우 화창했다.
외전
부운석 몸의 한독은 대략 반년 동안 발작하지 않았다.
오 태의는 혀를 차며 기이하다 생각했고 이것은 기적이 일어난 것이라 여겼다. 사실상 확실히 그러했다. 부운석은 어릴 때 엄청난 양의 한독에 중독되었고 이 한독의 성질은 지극히 맹렬했다. 그런 까닭에 치료하려 해도 아주 어려웠다. 게다가 부운석의 목숨은 한 가닥 실에 걸려 있는 것 같아서 상황이 대단히 위급했다.
도중에 한안이 당생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으랴. 당생이 비록 의술에 능숙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독을 쓰는 데 고수여서 출중한 견식으로 오 태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결국 두 사람은 힘을 합하여 부운석의 병세를 억제해냈다.
한독이 발작하지 않자 한안은 부운석과의 혼사에 대해 상의했다. 이 일에 한안은 여자다운 머뭇거림과 수줍음이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대단히 주도적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부운석이 자신의 병세를 꺼려 한안을 연루시키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안이 이처럼 고집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운석이 혼사에 동의한 것이 오히려 모두의 예상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오히려 그것이 부운석다운 것이라 마음이 놓였다.
이날은 바로 한안이 성혼하는 날이었다.
부운석은 귀인 집안에 혼인 예물을 보내는 격식에 따라 무엇 하나 적지 않게 빙례를 준비했다. 하늘을 찌를 듯한 부귀함은 남이 상상하려 해도 상상할 수 없었다. 많은 규중 여자들은 방 안에 숨어 깨어진 자신의 마음을 바닥에 흩뿌렸다. 그리고 당생은 여러 해 좋은 손녀를 돌보지 못했다는 것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것인지 혼수를 후하게 하여 황실 친척에 비해서도 뒤처지지 않았다.
급람과 주홍 두 사람은 혼수 여종이 되어 한안을 따라야 했다. 이 두 사람은 반년 동안에 부운석의 비밀 호위 목풍과 목암과 사이가 좋아졌다. 급람은 활발하여 성격이 똑같이 활발한 목풍과 잘 어울렸고 주홍은 침착하여 진중한 목암과 잘 어울렸으니 이 또한 하늘이 점지한 이상적인 좋은 인연인 셈이었다. 한안은 속으로 언제쯤 이 두 아이들의 혼사를 순리에 따라 처리할지 계획했다.
급람과 주홍 두 사람은 한안의 뒤에 서 있었다. 어멈이 한안의 화장과 단장을 도운 후 한안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는 정말 선녀 같은 인물이세요. 왕야께서 정말 복이 많으시네요.”
한안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거울 속의 자신을 보았다. 맑은 눈과 하얀 이, 웃는 얼굴에는 수줍음이 떠 있었다. 분을 바른 얼굴은 배꽃 같았고 예쁜 머리에는 진주와 비취, 법랑이 가득하여 정말 대단한 미모의 여자 같았다. 돌연 전생의 자신도 이처럼 단장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에 비해 미모는 많이 모자랐다. 설마 사람이 세상을 다시 사는 기회를 얻으면 생김새조차도 변하는 것일까?
그녀는 잠시 멍해졌다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아마 자신이 너무 긴장한 모양이다.
급람과 주홍은 대단히 흥분한 모습이었다. 그녀들에게 가장 즐거운 것은 한안이 행복을 얻는 일이었다. 소저가 좋은 사람이니, 좋은 사람이 그녀를 아껴주는 것은 마땅했다. 소저의 명운은 고달팠지만 지금은 좋아졌으니 고진감래가 따로 없었다.
등선은 가장 안쪽에 앉아 있었다. 손에 든 첨장(添妝: 시집갈 때 지인이나 친구가 혼수품을 보태주는 일, 또는 그런 물건)을 급람에게 넘겨준 후, 한안의 옆으로 와 손을 잡았다.
“네가 왕야께 시집을 가게 되어 정말 기뻐.”
한안은 옅게 웃었다.
“언니와 성 장군은 언제 경사를 치를 거야?”
등선과 성뢰의 일을 한안은 알고 있었다. 하나는 무장의 후예이고 하나는 문신의 딸이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잘 어울렸다.
등선의 얼굴이 붉어졌지만 부인하지는 않았다. 그저 한안의 놀림에 조금 화가 났을 뿐. 하지만 그녀는 금세 웃음꽃을 피웠다.
“너는 나의 가장 좋은 친구야. 네가 우리 가문을 구했어.”
전생에서 등 상서는 어떤 사람에게 미움을 사 최후에는 집안이 망하고 사람이 죽는 결말을 맞았지만 이번 생에서는 달랐다. 자신과 부운석의 대책으로 황상은 연극을 펼쳐 어떤 사람이 충신이고 어떤 사람들이 간신인지 확실히 파악했다. 이때 냉대를 겪고 있던 등 상서가 청렴하고 고결한 문신이며 기개가 있다는 것이 훤히 드러나 새로이 황상의 신임을 얻었고 명운이 달라졌다.
등선은 비록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러나 이것이 한안과 부운석의 계획이었고, 그후 자신의 부친이 비로소 황상의 신임을 새로이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쨌든 간에 한안이 그들을 도운 것이라 판단했다.
한안은 등선에게 전생에 등 상서의 말로를 알려주지 않았다. 만약 전생이 혼란스러운 악몽이라고 한다면 그럼 이번 생은 자신이 창조한 아름다운 미래 같았다. 게다가 등선도 한림원의 남자에게 시집가지 않고 성뢰를 따르게 되었다. 성뢰는 본성이 선량하니 반드시 등선에게 잘 대해줄 것이다. 모든 것이 아주 좋았다. 그녀는 웃었다.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 거야. 그것은 나와 관계없는 일이야.”
등선이 또 무슨 말을 하려는데 바깥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길시가 되었습니다. 신부께서는 가마에 오르십시오.”
가마에 오를 시간이 되었다. 어멈이 바로 한안에게 붉은 머릿수건을 씌우고 그녀를 이끌어 문가로 걸어갔다.
신부는 자기 친정 형제의 등에 업혀 희교(喜轎: 신부가 타는 가마)에 오른다. 거기에 장한명이 한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의 진상이 다 밝혀진 후에야 비로소 한안은 장한명이 자신의 친동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왕씨는 생을 마칠 때까지 동후왕을 위해 정절을 지켰다. 장한명은 그저 그녀 친구의 아이였을 뿐이다. 친구는 출가도 전에 외간 남자의 아이를 낳았고 왕씨에게 와서 도움을 간청했다. 왕씨는 마음이 여렸고 장사양은 상관하지 않았기에 그 아이를 자신의 양자로 거두었다. 추후에 그 친구는 경성을 떠났고 아무도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한명을 왕씨가 낳은 아이라고 말했다.
한안과 장한명은 혈연관계가 아니었다. 그러나 왕씨가 있을 때 겪은 혈육의 정은 가장하려 해도 가장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비록 한안이 자신의 출신을 장한명에게 알리지는 않았지만 장한명은 추측해낼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피차 이미 알고 있었다.
한안은 장한명의 등에 업혔다. 자신이 보호해야 했던 소년은 이제 한 몫을 홀로 감당할 수 있는 사내 대장부가 되었다. 한안은 친숙한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가 만약 누님을 괴롭히면 바로 제게 말해주세요. 제가 누님을 대신해서 복수할게요.”
한안은 마음속이 따뜻해졌다. 그 목소리는 계속해서 말했다.
“누님은 영원히 저의 누님입니다.”
장한명은 자신의 목덜미 위에 무슨 뜨거운 것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한안은 가볍게 ‘응’ 하고 한마디 하고 더는 말하지 않았다.
동생 등에 업혀 가마에 오른 뒤 휘장이 내려졌다. 거대한 말 위에 앉은 남자는 붉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가 백색 옷을 입는 것은 익숙히 보아왔지만 짙은 붉은색의 옷을 입은 건 처음이었다. 혼례복은 부운석의 냉담함과 무심함을 벗게 했고 정교한 이목구비를 더욱 부드럽고 친근감 있게 하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풍치와 멋스러움, 화려한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그는 조용히 말 위에 앉아 자신의 어린 아내가 가마에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한안이 가마에 타자 징을 치고 북을 두드리는 시끌벅적한 십 리 혼례길이 시작되었다.
집 집마다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백성들은 모두 앞으로 나와 떠들썩한 광경을 구경했다. 말 위의 사람과 혼례의 웅장한 장면은 진정한 공주라 해도 아마 이러한 대우를 받기는 힘들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백성들은 알지 못했다. 이 가마 안에 앉은 이가 본래 진정한 공주라는 것을. 봉황의 명운이 전생과 이번 생에서 이렇게나 달랐다. 이것은 생존방식이 달라지면 명운도 그에 따라 달라진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급람은 사람들이 보낸 첨장을 정리할 때, 기이하게 생긴 옥석함 하나를 발견했다. 그 함은 한눈에 보기에도 평범한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광채가 휘황찬란한 것이 열어 보니 윤기 나고 투명하게 빛나는 옥 팔찌가 들어 있었다. 눈처럼 희고 옥의 광채가 반짝반짝 눈이 부신 것이 대단히 진귀해 보였다. 급람은 이상했다. 이처럼 진귀한 이런 물건이라면 응당 자신의 인상에 남아 있어야 하는데 어찌 누가 준 것인지 한 점 기억도 나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그녀는 우선 챙겨두고 나중에 한안에게 묻기로 결정했다.
혼잡하게 구경하는 군중 속에, 길가 주루의 2층, 가면을 쓴 남자가 손에 술잔을 쥐고 있었다. 입가가 살짝 올라가 있었지만 웃는 모습이 좀 쓸쓸하고 괴로워 보였다.
“나는 네가 신부를 강탈할 거라 생각했는데?”
몸 뒤에서 돌연 목소리가 울렸다.
가면을 쓴 남자는 고개를 돌렸다. 이리 같은 푸른색 눈이 차가운 빛을 띠었다. 남자는 다가온 사람을 보고 냉소하며 말했다.
“그래서 네가 특별히 나를 막으러 온 건가? 당당한 성 대장군께 폐를 끼치다니 비루한 이 몸의 영광입니다.”
성뢰는 옅게 웃었다.
“신부를 강탈할 게 아니라면 축복해야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안 그래?”
배당(拜堂: 신랑신부가 천지신명, 양가 부모에게 절한 후 맞절함), 성혼, 머릿수건을 벗기는 일, 모든 것이 마치 여러 차례 예행연습을 한 것 같았다.
동방화촉, 방 안의 두 사람은 팔을 교차하여 휘감고 각자 합환주를 쥐고 상대방의 입가에 갖다 댔다. 그림자가 수려한 하얀 병풍 위로 비치며 뒤엉켜 있었다.
남자는 손안의 술을 단숨에 마셔버리고는 한참 동안 여자의 의혹에 찬 눈빛을 바라보다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본왕이 어째서 아직 정신을 잃지 않는 것인지 이상한 것이냐?”
여자는 놀라 손을 휘둘러 바로 몸부림치며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여자의 몸은 상대방의 품속에 갇혀 버렸다. 남자의 뜨거운 숨결이 풍겨 왔다.
“부운석, 당신이 날 속였어?”
신부가 격분하여 말했다.
“네가 나에게 약을 썼으니 네가 나를 속인 게 아닌가?”
부운석은 담담하고 나지막하게 웃었다.
“왕비가 이렇게 나와 합방에 들기를 원하지 않다니……. 반년 전 연청지에서 누군가가 본왕을 희롱하려고 시도했던 것을 잊은 듯하구나.”
한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은 아직 합방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당생을 찾아 그에게 미약을 써달라고 했는데 이렇게 빨리 들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부운석의 코는 개과에 속하는 것인가?
부운석은 손을 뻗어 짙은 붉은 색 혼례복을 벗었다. 눈처럼 흰 중의(中衣)가 드러났다. 부운석은 침상 앞으로 걸어가 비스듬하게 누워서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는 한안을 보며 가벼운 소리로 말했다.
“이리 오너라.”
한안은 그를 노려보았다. 침상 위에 비스듬하게 누운 남자의 검은 머리카락은 먹 같았고 옷은 아무렇게나 걸쳐져 테두리에 어두운 무늬가 수 놓인 청색 옷자락이 드러났다. 큰 손이 그녀를 끌어당기자 한안의 작은 몸은 바로 그의 따뜻한 품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뭐 하는 거예요?”
한안은 큰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녀의 작은 얼굴이 발그스레한 것이 화를 내는 것인지 아니면 수줍어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를 보는 수려한 부운석의 얼굴 위에는 음미하는 듯한 웃음기가 있었다. 그는 늘씬한 몸을 살짝 움직여 손으로 품 안에 있는 작은 머리를 쓰다듬더니 잘 틀어 올린 신부의 머리 쪽을 가볍게 풀어버렸다.
“다, 다, 당신 함부로 굴면 안 돼요.”
한안은 깜작 놀라 좌우로 몸을 비틀어 그의 품에서 몸부림쳐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의미심장한 목소리가 들려와 차갑게 사람을 흔들었다.
“왕비는 그저 본왕을 반년 기다렸을 뿐이지만 본왕은 왕비를 꼬박 일곱 해 기다렸다.”
“어?”
“부부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을 너와 나, 두 사람이 오늘 바로 해야지.”
부용장(芙蓉帳: 부용 무늬 휘장)은 따뜻했고 달빛도 좋았다. 한안은 그들이 아주 오래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부운석 또한 품속의 사람에게 비할 데 없이 처참한 전생의 한 단락이 있었음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러면 또 어떠랴. 시간은 아주 많고 그들은 부부이니 미래의 날들 속에 과거의 모든 것을 상대방을 위하여 천천히 흥미진진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