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16)

탁칠은 한안의 표정에는 신경 쓰지 않고 신나서 말했다.

“당문에는 성이 교인 사람이 없어. 대신 당문의 현임 문주의 여아를 모두가 소교라고 불렀대.”

“소교?”

한안은 비단 손수건 위 낙관의 ‘교’ 자를 떠올렸다. 현임 문주의 여아를 소교라 불렀다라. 그게 자신의 어머니와 또 무슨 관계가 있는 거지.

“당신 그 소교를 만났어요?”

탁칠은 고개를 저었다.

“그 소교는 십몇 년 전에 병으로 죽었어.”

죽었다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죽었다면 이 단서는 끊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진실에는 영원히 다다를 수 없는 것일까? 소교는 분명 무언가 알고 있을 터인데. 아벽이 그렇게 오랫동안 비단 손수건을 가지고 있던 것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아벽은 어머니의 측근 여종이었으니…….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탁칠이 한안을 흘깃 쳐다보았다.

“하지만 내가 재미있는 일 하나를 발견했지.”

한안이 고개를 홱 들었다.

“무슨 일?”

“당가 마을 안의 사람들은 소교에 대해 입을 다물고 말을 안 해. 내가 사람을 시켜 오랫동안 알아봐서 겨우 알아냈어. 여기에서 가장 오래 일한 늙은 하인들에게 들었는데 이 소교가 동후왕의 아내와 똑같이 생겼다는 거야.”

“동후왕?”

이게 어떻게 동후왕과 이어지는 거지? 자신의 어머니가 젊을 때 연모하던 사람이 동후왕 아니었나? 한안은 자신이 어렴풋이 일의 실마리 하나를 잡았다고 느꼈다. 그러나 명확하게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어 여전히 모호했다.

한안을 응시하는 탁칠의 눈빛은 흥미진진했다.

“너, 내가 말한 게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거 알 거야.”

그는 무슨 재미있는 일을 발견하기라도 한 듯이 그가 생각하는 쪽으로 한안을 이끌었다.

한안은 불현듯 깨달았다.

“완전히 똑같다고?”

그녀의 반응은 빨랐다.

“근본적으로 한 사람이라는 거지.”

탁칠이 자신의 추측을 자신 있게 말했다. 그녀도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이른바 완전히 똑같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위장이고 두 사람이 한 사람인 건지도 모른다.

많은 경우, 충분한 증거와 단서 없이도 직감으로 간단명료하게 결론이 나기도 한다. 더구나 그녀는 한 번 죽었던 사람이기에 이런 일에 좀 더 예리했다.

탁칠은 옅게 웃었다.

“너 어떻게 생각해?”

한안은 그를 보았다. 탁칠의 푸른 눈동자는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을 띠고 있었다. 사냥감을 발견한 듯한 긴장감이 푸른 눈동자를 통해 쏟아져 나왔다. 한안은 아무런 까닭 없이 위험을 느꼈다. 그녀는 입술을 들어 올리고 웃었다.

“이건 확실히 단언하기 어렵네요. 강호 사람들에게는 기괴한 점이 다들 있죠. 완전히 똑같이 생긴 게 흔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건 아니지 않아요? 어쩌면 다른 사람이 잘못 본 건지도 모르고. 이야기에는 증거가 있는 게 가장 좋죠.”

탁칠은 서두르지도 여유 부리지도 않고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넌 이미 내가 한 말을 믿고 있어. 그렇지 않으면 네가 이렇게 나에게 반박할 리 없지.”

한안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탁칠의 말을 믿었기에 그가 자신의 추측을 말했을 때, 긴장한 것이었다. 탁칠이 의외로 이 일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한안의 예상을 초월했다. 무슨 일이 있다 해도 탁칠은 배제를 해야 했다. 한안의 입장에서 이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았다. 탁칠은 서융 사람이니 강호의 일과 연루되어도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동후왕과 연루되어 있고 그것은 바로 황실과 관계가 있다는 말이었다.

탁칠은 한안의 표정을 눈 속에 담고는 물었다.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이 일은 내가 계속 조사할 거야. 오로지 너를 위해서야.”

한안이 거절하려는 것을 보고, 그가 또 말했다.

“나는 네가 이 일을 명확하게 조사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아. 또 너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날 믿어.”

한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당신을 안 믿어요. 이 일은 더 이상 조사하지 말아요. 그냥 이렇게 끝내요.”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어떤 일이든 모두 한도라는 게 있으니까. 탁칠은 지금 자신에게 악의 없이 선의를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한안이 그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그가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탁칠은 한안을 보았다.

“그럼 나는 먼저 가볼게.”

탁칠은 말을 마치고 바로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기다려요.”

한안이 일어섰다.

탁칠이 고개를 돌렸다.

“또 무슨 일 있어?”

한안은 창밖을 보았다. 바깥에는 비가 억수같이 내리고 있었고 천둥소리가 우르릉 울리는 것이 듣기만 해도 무서웠다. 이런 날씨에 나가는 것은 위험하겠지.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일을 겪을 수 있었다.

“바깥에 비가 와요.”

탁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지금 나가지 말고 여기 남아 있어요.”

탁칠이 멍해졌다. 한안이 이런 말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 같았다. 탁칠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보며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 남으라고?”

한안은 얼굴을 돌렸다.

“벼락에 맞아서 죽고 싶은 건가요? 하긴 그렇게 나쁜 짓을 많이 했으니. 보기에도 좋은 사람 같지 않고. 벼락이 용서하지 않을 거야.”

탁칠은 그녀의 뒷말은 듣지 못했다. 기쁨과 감동으로 정신이 없는 와중에 복잡미묘한 감정이 차올랐다. 그는 한안이 소리를 내어 자기를 붙잡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많이 보지는 못했지만 한안은 매끄러운 뱀 같아서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고 잠깐이라도 주의하지 않으면 손가락 사이로 달아난다는 것을 발견했다. 더욱이 남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일도 드물었다. 그녀에게서 무조건적인 신임을 얻은 것은 그녀의 두 여종뿐인 것 같았다.

때로 탁칠은 급람과 주홍이 부러웠다. 한안이 급람과 주홍에 대해 갖고 있는 감정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한안이 일단 상대방을 신뢰하면 진심으로 상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짧게 몇 차례 만난 것만으로 한안의 신임을 얻어 보겠다는 것은 지나친 바람일 것이었다. 게다가 이 꼬마의 고집이 만만치 않기도 했다. 자신이 이런 행동을 다른 여자들에게 했다면 목숨 걸고 달려들 여자가 한두 명이 아닐 것이었다. 한안은 그런 생각 따위는 전혀 해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도적 대하듯 했다.

그런데 이렇게 타인을 쉽게 신임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먼저 나서서 자신을 붙잡은 데다가 말로 적지 않은 걱정까지 해주다니. 탁칠은 감격했다.

“나와 네가 한 방에 함께 머무는 건데 괜찮을까. 너희 대종의 표현을 빌리자면 내가 너의 순결을 차지한 건데?”

그가 엄숙하게 말했다.

한안은 거의 숨이 막힐 뻔해서 낯선 사람을 보듯 탁칠을 보았다.

“당신 비를 많이 맞아서 머리가 망가진 거죠? 내가 어떻게 당신과 한 방에 머물겠어요? 당신은 장한명의 방으로 가요. 그 애 쪽에 빈방이 하나 있어요. 주홍, 네가 모시고 가라.”

탁칠의 표정이 순간 무너져 내렸다.

“장한명 쪽이구나.”

낙담하긴 했지만 그래도 기뻤다. 한안과 같은 지붕 아래에 있다니. 지금까지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탁칠이 성인군자라서가 아니었다. 한안은 법도를 중시했고 자신의 깨끗한 명성을 중요하게 여겼다. 어쩌면 대종 여자의 공통점일지도 몰랐다.

“아직 안 가고 뭐 해요.”

한안은 몸을 돌리고 그를 노려봤다. 탁칠은 히히 웃으며 주홍을 따라 나갔다.

두 사람이 나간 후, 한안은 무거운 걱정을 안고 창 앞에 앉았다. 창밖의 비가 많이 내려 사람을 집어삼킬 듯했다. 그러나 한안이 불안한 것은 저 뇌우 때문이 아니었다.

소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어째서 동후왕의 아내와 완전히 똑같이 생겼는지. 만약 그들이 동일인이라면 그럼 동후왕과 소꿉친구라는 어머니는 어째서 소교의 비단 손수건을 가지고 있었는지.

한안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으로서는 연관 관계를 알 방법이 없었다. 급람이 옆에서 말했다.

“소저, 우선 쉬시는 게 어떨까요?”

이렇게 내리는 비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 좀 쉬는 편이 낫겠지.

급람은 서융 황자가 정말 소저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구태여 소식이나 전해주자고 이렇게 큰비를 무릅쓸 필요가 있었을까? 왕야는 와 보지도 않는데?

장부의 빙 둘러싼 담의 다른 한쪽.

번개가 담장 아래 서 있는 백의를 입은 이의 그림자를 또렷하게 비추었다. 백의를 입은 사람은 우산을 들지 않았으나 옷자락에는 빗물이 한 방울도 묻지 않았다. 조용히 서 있는 모습이 초탈한 선인 같아서 천지가 놀랄 소음 속에서도 침착했다.

이내 담장 위에서 다른 신영 하나가 출현했다. 검은 신영은 빠르게 뛰어나와 백의인을 향해 몸을 숙이고 포권을 했다.

“왕야, 장 소저는 잘 계십니다. 그 사람은……. 가지 않았습니다.”

백의인의 몸이 살짝 흔들렸다. 거의 사람이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의 흔들림이었으나 그 순간 그의 옷자락 위에 생긴 물 얼룩 하나가 유달리 뚜렷하게 보였다. 그의 마음은 어지러웠다.

“알았다.”

한참 후, 그가 대답했다.

검은 신영이 바로 조금 옆으로 물러섰다. 백의인은 앞으로 몇 걸음을 걷다가 한 손으로 담장의 벽돌을 쓰다듬었다. 그 손은 옥처럼 늘씬했고 비할 데 없이 창백했다. 얼핏 보기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섬세했으며 싸늘했다. 그는 고개를 살짝 뒤로 젖혀 맑고 싸늘한 눈을 드러냈다. 눈빛이 살을 엘 듯 차가웠지만, 또 온화하고 부드러웠다.

“가자.”

서늘한 목소리가 빗소리 속으로 사라졌다.

한안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한 사람이 줄곧 묵묵히 자신을 지켜보았다.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익숙했다. 옅은 웃음이 따뜻하고 부드러웠으며, 싸늘하고, 냉담했다. 하지만 그 사람의 눈을 분명하게 볼 수 없었다. 마침내 그 사람이 걸어 들어 왔을 때, 그녀는 그 사람에게 힘껏 달려갔다. 부운석이었다.

그 순간, 그녀는 눈을 떴다.

그제야 자신이 꿈을 꾸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방 안에 그의 서늘한 숨결이 모든 곳에 스며들어 자신을 향해 덮쳐 오는 듯했다.

*

큰비는 나흘째에 마침내 그쳤다.

백성들은 아우성이었고 농사짓는 이들은 수해 때문에 곡식 한 톨도 거두지를 못했다. 올해는 흉년이었다. 많은 집이 휩쓸려 무너졌고 강이 넘쳐 범람하면서 안 그래도 가난한 이들에게 새로운 재난이 덮쳐 버렸다. 고난은 무궁무진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생활을 이어갔다.

순창무관은 오늘 유달리 조용했다. 큰비 때문에 고관 자제들이 안전을 위해 문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한미한 가문의 자제들은 나름대로 무너진 집을 수복해야 했기에 무관에 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무관은 쓸쓸하고 적막한 분위기에 쌓여 있었다.

양기는 문 앞에 서 있었다. 비는 그치고 해가 떠서 얼핏 보기에는 이상한 점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화단 안의 꽃들은 제대로 서 있는 줄기가 하나도 없이 전부 옆으로 어지러이 쓰러져 있었다. 도처마다 물웅덩이였다. 큰비는 지나갔고 태양이 나왔지만, 타격을 받아 쓰러진 것들은 돌아올 수 없었다.

“대인.”

소이자가 옆에서 말했다.

“장 소저 말이 과연 맞았네요.”

소이자는 마음속으로 한안에 대해 탄복해 마지않았다. 그야말로 선견지명이 아닌가. 이전에 한안과 양기가 내기할 때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치부해 버렸다. 이 세상에서 누가 미래의 일을 예지할 수 있을까. 그때는 날씨도 쾌적하고 따뜻했으니 누구도 비가 올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꼬박 삼일 밤낮을 내려 재난을 가져다주는 비가 말이다.

양기는 입술을 움직였다.

“그렇구나. 그녀의 말이 맞았구나.”

반평생 비바람을 주름잡아 온 노인은 처음으로 곤혹스러움을 느끼며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는 직감을 믿지 않았다. 오직 자신을 믿었다. 그러나 한안의 말은 그가 믿지 않는 것을 허용했다. 하늘은 정말로 큰 비를 내렸고 대종은 수해가 한창이었다. 한안의 말과 한 자도 다르지 않았다.

정말 그녀가 말한 것처럼 그녀의 직감이 그렇게 정확하다면 서융인이 큰 음모를 모의 중이라는 것도 정말일까?

양기가 깊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동자가 다가와 장부 4소저가 뵙기를 청한다고 알렸다.

양기는 입술을 움직거렸다. 빨라도 너무 빨랐다. 자신은 이제야 이 일에 대해 생각했는데 한안은 이미 자신을 방문하러 온 것이다. 내기는 졌다. 그럼 전쟁터의 일을 한안에게 들려주어야 하나?

문을 들어서는 한안의 눈에 생각에 잠긴 양기의 표정이 들어왔다. 한안은 옅게 웃으면서 인사를 했다.

“양 노선배.”

양기는 고개를 돌렸다. 평온한 그의 눈빛을 보니 한안이 올 것을 알고 있던 것 같았다.

“왔구나.”

한안은 웃었다.

“약속을 이행하러 왔습니다. 양 노선배도 보셨지요. 하늘에서 비가 내렸습니다.”

“천상의 일을 네가 어떻게 안 것이냐?”

양기는 그녀를 응시했지만 표정을 간파할 수는 없었다.

“설마 네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은 아니겠지?”

이 세상 사람 중 누가 미래의 일을 예지할 수 있을까. 그런데 한안은 미래를 예지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몸에는 형언할 수 없는 신비감이 있었다. 그녀의 고귀한 기질이 어디서 오는지는 알 수 없지만 풍모와 재능이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 같았다. 보기에는 평범하고 남의 이목을 끌 것이 없는 것 같지만, 그러면서도 은근하며 신비로운 기품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총애받지 못하는 장가 여아에서 모든 사람이 흠모하는 현청왕비가 되었다가 다시 버려진 여인이 되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굴곡 없이 평안했다. 일찍이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한안은 깜짝 놀라 자신이 환생한 비밀이 남에게 발각되었나 싶었다. 그러나 이내 평정을 되찾고 고개를 저었다.

“양 노선배께서 생각이 많으셨네요. 당연히 이 세상의 사람이지요. 미래를 예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도 그저 직감이 발달한 것에 불과할 뿐이에요. 어쩌면 하늘에서 보살펴주시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노선배께서는 저를 믿으시기보다 하늘의 뜻을 믿으시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한안은 침착하게 화제를 하늘에 끌어다 붙였다. 자신이 환생했다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진다면 얼마나 많은 문제가 발생할지 알 수 없었다. 한 점 의혹도 있어서는 안 되었다.

양기는 진지하게 한안을 훑어보았다. 그녀가 작은 얼굴을 치켜들고 자신을 보고 있었다. 웃는 얼굴은 순수하고 선량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네가 정말 하늘의 뜻을 받은 건지도 모르겠구나.”

양기는 알고 있었다. 한안은 다른 사람이 그녀를 괴물처럼 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미래를 예지할 수 있다는 것이 한 사람에게 있어 반드시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것도. 더구나 이런 재난이 발생한 후라면 그녀가 불길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하늘의 보살핌이라고 말한다면 다르다. 사람들은 이 여인이 복을 타고나 신선이 마음에 들어 하여 특별히 그녀에게 일러준 건지도 모른다고 말할 수 있었다. 같은 일이라도 견해만 바꾸면 얻을 수 있는 결과는 달랐다.

“노선배, 과찬이십니다. 그럼 노선배께서는 이제 제가 말한 모든 말을 믿으십니까?”

그녀는 ‘모든’이라는 두 글자를 사용했다. 바로 양기가 믿어야 하는 것이 빗물이 범람하여 재난을 일으켰다는 사실뿐만이 아니라 서융인이 나쁜 짓을 도모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까지라고 표명한 것이다.

“노부가 너를 한 번 믿어보는 것도 괜찮겠지.”

한참 후에 양기가 비로소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양 노선배.”

한안이 옅게 웃었다.

급람과 주홍은 시선을 한 번 마주하고 알아서 방에서 물러났다.

한참 시간이 흘러 일몰 시각이 지나고서야 한안은 방에서 나올 수 있었다.

한안의 얼굴빛은 좋지 않았다. 양기도 마찬가지였고 심지어 한안보다 더 나빴다. 한안은 양기를 향해 절을 했다.“양 노선배께서 잘못된 방향을 바로잡아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양기는 차갑게 코웃음을 한 번 쳤다.

“네가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만 않으면 된다.”

“당연하지요.”

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

“소저, 양 대인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어요?”

마차를 타고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어 급람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한안은 마차의 차 문에 기대어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양기는 이번 서융과의 전쟁에서 대종이 줄곧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사실 서융의 인력과 재력은 그리 약하지 않았다. 초원 위의 유목민족은 뼛속까지 무서울 정도의 용맹함을 지니고 있었고 전쟁에서의 살상력도 충분했다. 그러나 행군과 진을 설치하는 방면에서는 많이 약했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아마 무지막지하게 힘을 쓸 줄만 아는 놈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덕분에 부운석이 묘책을 써서 수월하게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간다고 생각될 즈음, 갑자기 대종의 병사가 점점 패퇴하기 시작했다.

이치대로 하자면 이럴 때일수록 사기가 가장 높아야 했다. 가장 수월하게 적의 방어선을 쳐부수고 있어야 할 때, 왜 점점 패퇴한 것인지. 설마 서융 쪽에 무슨 묘수가 있었던 건가.

양기는 고개를 저으며 침울한 표정을 드러냈다. 문제는 서융인 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대종의 군대 안에 있었다. 대종의 병사들이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사기가 갑자기 쇠약해졌다. 하룻밤 사이에 곡식 저장고가 누군가에 의해 타버렸다. 전쟁터에서 양식이 없다는 것은 절대적인 약세에 빠져드는 것과 같았다. 당시 하루가 하루 같지 않았다고 했다. 들리는 말에 따르면 서융 공주 이림나가 몰래 부운석에게 먹을 것을 보내주었다고 했다. 여기까지 말했을 때, 양기는 말을 멈추고 한안의 표정을 보았다. 한안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했다.

전쟁은 결국 대종이 이겼지만 도대체 어떻게 이겼는지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은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 시작했다. 빨리 끝낼 수 있었던 전쟁이 알 수 없는 원인 때문에 대종 병사의 사기가 쇠퇴함으로 줄곧 살벌하고 결단력 있던 부운석마저도 마지막 전투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기긴 이겼으나 많은 장병을 잃고 이룬 승리였다. 이런 승리는 사실 승리라고 할 수 없었다. 줄곧 무소불능하던 부운석에게 도대체 무슨 문제가 생긴 걸까? 그리고 서융인은 왜 갑자기 투항한 것인지. 그 속에 음모가 있다고 다들 수군거렸다.

한안과 양기는 아주 오래 이야기하면서 서로 의견을 교환했다. 그 과정에서 한안은 무장원이 결코 이름뿐이 아니었음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는 그저 무공만 높았던 것이 아니라 병법에도 숙달하여 전쟁에서 있었던 많은 문제점 중에서 찾은 의문점의 정곡을 찔렀다. 그리고 양기 또한 한안의 총명함과 지혜에 놀랐다. 흔히 여자가 제아무리 총명하다 해도 시나 좀 지을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한안은 그렇지 않았다. 전쟁 중의 일이든 아니면 조정 내 알력이든 간에 그녀는 양기와 논쟁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를 들으면 많은 것을 유추하고 이해하는 능력은 정말 사람을 놀라게 했다. 양기는 경탄했다. 깊은 규방에서 자란 여아가 어찌 이 같은 식견이 있을 수 있을까? 만약 남아였다면 왕으로 봉해지고 장군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었다.

물론 양기는 한안이 이런 사안에 민감하고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다고만 생각했다. 한안이 전쟁과 조당의 일에 대해 깊숙하게 알아야 하는 이유는 알지 못했다.

이것은 그녀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고 앞으로 그녀가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지를 결정하게 될 터였다. 한 걸음 잘못 내딛음으로써 모든 것이 잘못될 수 있었다.

급람은 한안이 여전히 생각에 정신이 팔린 것을 보고 서둘러 소리 내어 주의를 환기시켰다.

“소저?”

한안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는 양기가 자신에게 한 말을 대강 급람과 주홍에게 들려주었다. 그녀들도 무언가 이상하다고는 생각이 들었으나 조당의 일이니 뭔가 할 만한 게 없고 딱히 계책을 도모해 줄 수도 없었다. 똑같이 미안한 표정으로 한안을 보았다.

한안은 급람과 주홍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양기가 언급한 문제들이 그녀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지금 당장으로서는 그 문제를 어떻게 알아보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마차가 길고 좁은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평소에 지나다니는 사람이 드물기도 했지만, 날이 저물어서인지 보이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한안은 골목에 접어들자마자,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이런 느낌이 어디에서 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느낌은 점점 강해졌다. 불안한 기분이 빠르게 자라나자 한안은 과단성 있게 결정을 내리고 마부에게 분부했다.

“방향을 바꿔서 돌아가게. 다른 길로 우회해야겠어!”

그녀의 말이 빠르고 조급했는지 마부가 제대로 듣지 못하고 말고삐를 홱 당겼다. 마차가 우뚝 멈추어섰다. 마부가 물었다.

“뭐라고요?”

급람과 주홍도 이해가 안 간다는 듯 한안을 보았다. 멀쩡하게 잘 가다가 한안이 어째서 다른 길로 돌아가자고 말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평소에도 자주 다니던 길이었다. 한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양기에게 자신의 직감이 정확하다고 말한 것은 물론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이렇듯 강렬한 예감이 들 때는 자신의 예감을 믿는 것이 가장 좋으리라.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녀가 더 많은 생각을 할 틈도 없이 솩, 솩, 솩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사방에서 갑자기 복면을 한 흑의인 십여 명이 뛰어나와 마차를 겹겹이 에워쌌다.

아직 좋은 대책이 생각나지 않은 상태라 한안은 다급했다. 복면인 십여 명의 칼이 번뜩이면서 마차 안의 사람을 향해 내리찍어 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뺏으려 하는 것이 분명했다.

협박과 강탈을 당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목숨을 빼앗으려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대종에서 누가 이렇게 대담할까. 천자의 발아래, 대중이 모이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자신의 목숨을 뺏으려 하다니.

말보다도 빠르게 움직인 한안은 몸을 비틀면서 가장 앞에서 자신을 향해 달려들던 흑의인의 목을 그어 긴 혈흔을 남겼다. 하지만 상대방은 훈련된 사람이니 잠시 멈칫했을 뿐 다시 자신을 내리찍으려 했다. 급람과 주홍이 놀라 달려들어 자신들의 몸으로 칼을 막으려 했다.

사실 모두가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급람과 주홍이 자신들의 몸으로 칼을 막은들 무슨 소용일까. 첫 번째 칼, 두 번째 칼은 막을 수 있더라도 그럼 세 번째 칼, 네 번째 칼은? 급람과 주홍이 그렇게 큰 소리로 외쳤지만, 주위에 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오늘 운세는 길한 것은 적고 흉한 것만 많은 날인 모양이다. 자신을 구하러 오는 사람이 없다니. 정말 여기서 죽어야 하는 걸까. 저 칼날 아래에서 죽는 것은 달갑지 않은데.

일촉즉발의 순간, 측면에서 뚫고 나온 빛나는 장검 하나가 한안 눈앞의 칼을 걷어내는 것이 보였다. 짧디짧은 순간, 검광이 사방으로 뻗쳤다. 심지어 분명히 볼 수 있는 게 없는 수준이었다. 그저 눈앞의 흑의인 목덜미에서 선혈이 솟구쳐 오르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 자신의 몸을 뒤로 홱 잡아당겨 따뜻한 품에 안았다. 얼음처럼 서늘한 손이 자신의 눈을 덮었다. 나즈막한 탄식 소리가 한안의 귓가에 어렴풋이 들렸다. 한안은 머리를 돌려 등 뒤의 사람을 보고 싶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소저!”

위험이 제거되고 흑의인 몇이 피 웅덩이 속에 쓰러져 있는 것이 보이자 급람과 주홍이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한안을 불렀다. 한안이 말을 하려는데 몸 뒤에서 가벼운 움직임이 느껴졌다. 낯선 사람이 두어 걸음 물러나면서 한안은 그의 품속에서 떨어져 나왔다.

한안이 고개를 돌리려 하는 순간, 피 웅덩이 속에 쓰러져 있던 흑의인 하나가 튀어 올랐다. 그가 들고 있던 칼이 바로 한안을 내리찍어 왔다. 흑의인은 한안에게서 너무나 가까워서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었다. 등 뒤의 사람도 예상치 못한 듯했다. 모든 것이 갑작스러웠던 탓에 그는 장검을 칼집에서 뽑으면서 한안을 품에 안고 자신의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는 그 칼에 베이고 말았다. 칼자국이 그의 허리에 깊디깊게 새겨졌다. 다음 순간, 남자의 장검이 이미 흑의인의 가슴을 찔러 들어갔다. 남자는 눈을 크게 떠 아무 탈 없이 무사한 한안을 보고는 바로 쓰러졌다.

한안은 고개를 홱 돌렸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을 보며 초조하게 물었다.

“괜찮으세요?”

한안은 비로소 그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현색 장포를 입고 있었다. 허리춤이 크게 젖어있는 것이 의심의 여지 없이 혈흔이라고 생각되었지만 장포의 색깔 때문에 정확하게 파악해낼 수가 없었다. 남자의 얼굴은 가면으로 가려져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남자의 몸이 살짝 비틀거렸다. 아주 경미한 움직임이었지만 한안은 알 수 있었다. 한안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마주한 가면인의 목소리는 기쁜지 노여운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괜찮다.”

그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전혀 그 사람 같지가 않았다. 한안은 살짝 멈칫했다.

“귀하의 존성대명을 여쭙고자 합니다. 이렇게 큰 은덕을 소녀 어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가면인은 고개를 돌려 조용히 그녀를 한참 바라보더니 몸을 날려 바로 사라졌다. 남겨진 한안은 그 자리에 여전히 서 있었다. 급람이 달려와 다급하게 물었다.

“소저, 괜찮으세요?”

한안은 고개를 저었다. 눈빛이 땅 위에 쓰러져 있는 흑의인 몇 명의 몸 위로 떨어졌다. 한안은 앞으로 몇 걸음 걸어가 쓰러진 흑의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손을 옷 속으로 뻗었다. 무엇을 더듬어 찾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소저!”

급람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우리 서둘러 여기를 떠나는 편이 좋겠어요. 잠시 뒤에 다른 흑의인들이 오면 어떻게 해요?”

그러나 주홍은 한안의 움직임을 보더니 잠시 생각한 다음, 한안을 따라서 다른 흑의인의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한안처럼 흑의인을 옷을 더듬기 시작했다.

잠시 후, 한안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표정이 지금까지 그랬던 적이 없을 정도로 무거웠다.

“가자.”

“소저…….”

한안의 표정 변화에 두 사람은 시선을 한 번 마주하고는 바로 따라서 일어났다.

청추원에 돌아온 후, 한안은 침상에 앉았다. 급람과 주홍은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조용히 있었다. 한안이 깊이 무언가를 생각할 때는 감히 방해할 수 없었다. 깊은 생각에 빠진 한안의 모습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무엇을 발견한 것일까?

시간이 얼마나 오래 지났는지 모르겠다. 등잔 안의 기름이 거의 다 타고 나서야 한안은 비로소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셨다.

일의 실마리가 풀렸다는 의미이리라. 급람과 주홍은 궁금증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평소에 줄곧 성급하던 급람 대신 주홍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소저께서 이러시는 것을 보니 무언가 발견하신 건가요?”

한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왜 아니겠니. 내가 막 깨달았구나. 우리가 너무 큰 일에 휘말렸다는 것을.”

급람은 한안이 하는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소저……, 노비는 모르겠습니다.”

한안은 고개를 저었다.

“너희는 오늘 그 흑의인들이 어디서 온 사람들인지 아니?”

급람과 주홍은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똑같이 고개를 저었다.

“황가 사람이야.”

한안이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너희, 무슨 생각 들어?”

“설마…… 태후인가요?”

주홍이 대담하게 추측하여 말했다. 급람은 놀라 펄쩍 뛰고는 좌우를 한 번 둘러보고는 속삭였다.

“좀 작게 말해. 남들 들으면 어쩌려고?”

한안은 고개를 저었다.

“만약 태후라면 오히려 이런 말썽을 일으킬 필요가 없지. 황상이셔.”

“황상?”

급람과 주홍이 일제히 놀라 소리쳤다. 믿을 수 없다는 모습이었다. 확실히 황상과 한안 사이에는 아무런 원한도 없었다. 당초 부운석이 한안을 아내로 맞으려고 태후와 다툼이 발생했을 때라 해도 그저 자그마한 불만만 있었을 뿐이며 그 불만도 부운석이 한안을 옹호하자 이내 사라졌다. 그런데 어떻게 한안에게 이렇게 살수를 보낼 수 있을까. 설령 서융 공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라고 해도 구태여 이런 짓을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게다가 당당한 일국의 군주가 꼴사납게 서융 공주의 비위를 맞출 필요는 없었다. 제일 중요한 건 한안이 황상에게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인가.

한안은 깊디깊은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조금 전에 그녀는 흑의인의 몸에서 어전 시위의 영패를 찾아냈다. 그 영패는 가짜일 리가 없었다. 다른 사람이 죄를 황상에게 덮어씌웠을 리도 없었다. 한안에게 흑의인들의 숙달되고 정연한 동작은 전혀 낯설지 않았다. 자신이 궁에 들어갔을 때, 황상 측근의 어전 시위를 본 적이 있었는데 바로 흑의인의 칼 같은 동작과 똑같았다. 어전 시위를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황상 본인만 가능했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 한안의 심장이 반쯤 싸늘해졌다. 황상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첫 번째 가능성은, 부운석이 서융 공주를 아내로 맞으려 한다는 것. 하지만 황상은 이전에 이미 성지를 내려 자신과 부운석의 혼인을 하사했다. 그런 황상이 지금 재차 성지를 공포하여 한안을 폐하고 이림나에게 현청왕비의 신분을 주게 생겼다. 그렇게 함으로써 황상은 이랬다 저랬다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군왕의 입장에서 신뢰를 잃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자신의 오점을 없애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하고 싶어 하는 법이다.

황상이 자신의 신하와 백성들이 황상의 말에 신용이 없다고 수군거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 차라리 사람을 시켜 그녀를 죽이는 것이다. 그런 후, 장한안이 변을 당해 죽었다는 이유로 자연스럽게 부운석에게 새 왕비를 찾아줄 수 있다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일이 없는 것이다.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는 이유였다. 그러나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한안은 황상이 그런 이유로 자신에게 살수를 보냈을 리는 없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아니라면 대체 무슨 이유 때문일까?

설령 부운석을 위해서 그와 이림나의 혼사로 인해 나중에라도 변고가 발생할 모든 가능성을 끊어놓으려 하는 것이라 해도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황상은 부운석에게 뭐든 다 주는 편이었고 더구나 부운석의 감정을 중시했다. 부운석의 태도로 보았을 때 그가 자신의 목숨을 빼앗을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럼 황상은 어째서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걸까?

음흉한 마음을 품은 7황자, 호시탐탐 노리는 태후, 만인지상의 황상. 한안과 원수 관계에 있는 모든 이가 황가의 사람이다. 우연의 일치라 할지라도 너무 심한 우연이지 않나. 한안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 뛰었다. 설마 자신과 황가 사이에 설명할 수 없는 관계가 있는 걸까? 게다가 이 관계라는 게 황가에 해가 되는 것이어서 그래서 그들이 자신을 이렇게……, 싹 쓸어 없애려는 걸까?

한안은 자신의 생각을 두 여종에게 말해주었다. 급람과 주홍 모두 놀라 마지않았다. 그러나 놀라움보다는 무서움과 당황스러움이 더 컸다. 만약 7황자와 태후라면 한안에게는 응대할 방법이 있었다. 부운석의 힘을 빌리거나 혹은 7황자 등의 반대파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적이 일단 황상으로 바뀌면 그것은 정말 만회할 여지가 없었다. 군주가 신하의 죽음을 원한다면 신하는 죽지 않을 수 없었다. 설령 한안이 제아무리 능력이 하늘에 닿는다 해도 황상의 한마디면 그녀의 목은 바로 땅에 떨어질 수 있었다.

“소저, 우리 이제 어쩌죠?”

급람이 초조하게 물었다. 그녀가 보기에 한안에게는 아무래도 방법이 없었다. 이 세상에서 황상이 죽이려는 사람치고 죽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황상이 이번에는 어전 시위를 파견하여 한안을 살해하려 했으나 가면을 쓴 남자가 우연찮게 나타나 한안을 구해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황상이 이번에 한안을 죽이지 못했으니 다음번에는 직접 나서서 죽음을 내릴지도 몰랐다. 그렇게 된다면 희망은 아예 없는 것이다. 급람은 여기까지 생각하고 이를 악물고 말했다.

“소저, 우리 달아나죠.”

한안은 당황했다.

“달아나? 어디로 달아나?”

“하늘이든 바다 끝이든 어디든 달아나요.”

급람의 표정은 지금까지 그랬던 적이 없을 정도로 결연했다.

“황상의 사람에게 잡히지만 않으면 우리는 목숨을 남길 수는 있어요. 살아남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게 아닌가요? 소저, 설마 우리가 여기 남아서 죽음을 기다려야 하나요?”

한안은 ‘살아남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급람의 말에 놀라면서도 웃었다. 이 어린 것이 뜻밖에 자신보다 더 통찰력 있구나. 그러나 달아나는 것은 방법이 아닐 것이다. 천하가 모두 왕의 땅 아니던가. 황상이 정말 자신을 죽일 마음이 있다면 자신이 하늘이든 바다 끝이든 도망치더라도 황상의 사람들이 하늘과 바다 끝까지 추격할 것이다. 상갓집 개처럼 불안한 나날을 보내며 평생 떠돌아다니는 생활일 텐데 그렇게 된다면 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선 달아날 생각을 할 필요는 없고 네게 시킬 더 중요한 일 하나가 있어.”

한안이 급람에게 말했다. 그녀 자신의 안위조차 잠시 제쳐놓을 정도로 중요한 일일 것이다.

급람은 멍해졌다.

“무슨 일이요?”

이런 상황에 자신의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 무엇일까? 급람은 알 수 없었다.

“나는 네가 오늘 밤 현청왕부의 동정을 알아왔으면 해. 내일 새벽까지 한 가닥 소식도 놓쳐서는 안 돼.”

급람은 당혹스러웠다. 어째서 현청왕부의 소식을 알아보려는 것인지 조금 이상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한안과 현청왕부는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았다. 설마 한안은 부운석의 도움을 구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한안은 미간을 바짝 찌푸렸다. 방금 전 그 사람은 부운석일까?

*

현청왕부의 문 앞은 적막했다. 문을 지키는 시위조차 없었다. 붉은 등롱이 걸려 있었지만 기쁘고 즐거운 분위기도 없고 오히려 스산하기까지 했다.

현청왕이 풍한에 걸려 병상에 누웠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경성의 모든 사람은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정의 권세가들이 연달아 귀중한 선물을 가지고 문안을 왔지만 현청왕에 의해 문밖에서 모두 거절당했다. 황상은 어떤 사람도 현청왕부에 들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노라 명을 내렸고 현청왕이 잘 요양할 수 있도록 누구도 방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전쟁 공로를 세운 황족의 권세가 하늘을 찌르니 모두가 현청왕이 받는 대우에 그저 감탄만 해야 했다. 그리고 서융 공주가 잠시도 쉬지 않고 현청왕을 몇 날 며칠 돌보는 것에 대해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했다. 모두들 공주가 정이 많고 아름답게 생겼으며 부운석을 위해 기꺼이 수고로움을 자처하니 부운석이 좋은 복을 지녔다고 떠들어댔다.

그렇게 그저 5품 관원의 딸일 뿐인 한안은 남들에게 동정을 받은 후, 점차 잊혀졌다. 심지어 많은 사람이 이림나와 부운석이야말로 천생배필이라고 여겼다. 풍모와 재능이 당대 으뜸인 남자와 고귀한 공주야말로 서로의 배필로 어울린다며 말이다.

깊은 밤의 풍경이 사면을 에워싸는 가운데, 현청왕부의 대문이 끼익하고 열렸다. 안에서 암녹색의 장포를 입은 사람이 걸어 나와 민첩한 동작으로 바깥에서 지키고 있던 가마에 올랐다. 가마꾼들은 바로 가마를 들어 올려 밖을 향해 걸어갔다.

얼마나 오래 갔는지 모르겠다. 늦은 밤이라 행인도 드물었고 가마꾼들의 발걸음 소리만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작은 골목을 지나가고 있을 때, 희미한 등롱 빛 아래 멀리서 갑자기 어렴풋한 인영 둘이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소녀의 목소리가 울려 왔다.

“감히 여쭙습니다. 가마 안의 분은 오 태의, 오 대인이신지요?”

가마를 들고 있던 네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말이 없었다. 어찌해야 좋을지를 몰라, 걸음을 바로 멈추었다. 두 사람의 인영이 천천히 다가왔다. 여종의 차림새를 한 묘령의 소녀 둘로 한 사람은 붉은 옷을, 다른 한 사람은 남색 옷을 입고 있었다. 용모가 특별히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지만 단정했고 보통 집안 여종의 기세 같지는 않았다.

가마 안의 사람은 아무 반응이 없다가 잠시 후 물었다.

“맞다면 어쩔 것이냐?”

붉은 옷을 입은 소녀가 조용히 대답했다.

“저희 집 소저께서 오 대인을 한 번 뵀으면 하십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오 대인께서 소저의 체면을 보아 청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가마 안의 오 대인이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네 명의 가마꾼도 일제히 놀라 숨을 헉하고 삼켰다. 오 태의는 경성에서 손에 꼽히는 태의여서 조정의 관료조차 그를 공경할 정도였다. 그런데 어리디어린 여종들이 오 태의에게 말을 걸면서 당당하게 ‘소저’라고 표현하다니. 어느 집 소저가 이렇게 기세가 큰가. 오 태의를 대하면서 두려워하지도 않으니, 경성 안 어느 집 소저가 이렇게 능력이 있단 말인가. 황상이 가장 총애하는 운예 군주도 오 태의의 눈에 들지 않았는데?

마침내 한 손이 가마의 휘장을 걷어 올리더니 오 태의가 두 소녀를 흘끗 보았다.

“너희구나.”

남색 옷의 여종이 그를 향해 맑고 깨끗하게 웃었다.

“오 태의, 저희 집 소저 말씀이 종이로 불을 쌀 수는 없다 합니다. 오 태의께서 한 사람을 보호하고 싶으시다면 이렇게 숨기시는 것은 정말로 보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용맹한 매를 가두어 두면 이 매는 죽을 때까지도 자신이 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 다 일어날 가능성이 있지요. 오 태의께서 만약 저희 집 소저를 믿으신다면 대계를 함께 도모해 보시기를 청합니다.”

여종의 말은 명쾌했고 망설임도 전혀 없는 것이 잘 생각해서 준비한 말인 게 분명했다. 처음부터 오 태의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오 태의는 눈썹을 모으고 생각에 잠겼다. 급람이 빙그레 웃으며 그를 보았다. 확신에 찬 모습이었다. 어린 여종에 불과할 뿐인데 그가 거절할 리 없다는 자신감은 어디서 온 것이란 말인가. 다시 주홍을 보니 똑같았다. 얼굴에 아무 표정도 없지만 그 침착한 기백과 도량은 궁중의 나이 많은 상궁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여종이 모두 이런 모습이니 그 주인의 기백과 도량은 가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오 태의는 깊게 탄식했다. 그녀들의 주인이 전달한 말은 그의 생각을 정확히 읽었다. 이 세상에는 어떤 일이든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만약 자신이 거절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아예 없을 것이다. 기왕 이렇게까지 되었는데 시도조차 해보지 않으면 어리석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오 태의는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늘 빙그레 웃던 그 어린 아가씨에게 정말 무슨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

마침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가 바로 너희를 따라가겠다.”

급람과 주홍은 서로 시선을 한 번 마주치며 상대방의 눈 속에서 기쁨을 보았다. 급람이 웃었다.

“그럼 오 태의께 저희를 따라오시기를 청합니다.”

급람은 말을 마치고는 가마꾼의 옆에 서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가마꾼은 그저 그렇게 휘청휘청하며 계속해서 길을 나섰다. 이전과 달라진 것은 앞에 두 명의 예쁘장한 어린 여종이 늘었다는 것이었다.

*

부귀루.

한안은 고개를 숙이고 마주한 사람을 전혀 보지 않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귀하는 얼마나 오래 저를 이렇게 보고 있으려 하시는 건가요?”

마주한 사람은 준수한 얼굴에 여전히 온몸에 진주와 보석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그는 그저 옅게 웃으며 흰 면사를 두른 눈앞의 여자를 보고 있었다. 그 여자는 비록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그 분위기는 한눈에 보고 다시 잊어버리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강옥루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나는 당신이 이곳에 오면, 응당 옛 친구를 부를 거라 여겼습니다.”

한안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강옥루의 눈을 속여 넘길 수 없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장사하는 사람의 눈썰미가 매섭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알 터였다. 그러나 자신도 달리 방법이 없어 부귀루에 온 것이다. 장부 안에서 오 태의를 만날 수는 없었다. 장부 안에는 장사양의 사람이 곳곳에 있었다. 게다가 설령 자기와 오 태의의 대화가 밖에서는 들리지 않는다고 해도, 장사양이 이 일을 위왕, 심지어 7황자에게 알릴 수 있었다.

어디든 이 소식이 전해져서는 위험했다. 황상이 살수를 파견하여 자신을 추살할 수 있는 만큼, 얼마나 많은 눈이 포진하여 자신을 미행하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결구 부귀루, 이곳뿐이었다. 한안은 부귀루가 천하제일의 기루가 된 까닭은 절정고수가 이 장소를 비밀리에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손님 외에 다른 사람은 이곳에 일방적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예전에 손님 하나가 추살을 피하기 위해 부귀루에 들어왔고, 손님을 뒤쫓던 살수가 들어올 방법이 없어 화를 피하게 된 적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한안도 여기에 있으면 남이 미행할 위험은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 강옥루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녀는 옅게 웃으며 더 이상 아닌 척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다고 모든 사실을 폭로할 수는 없었다.

“저와 귀하가 무슨 친분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하겠네요. 더구나 옛 친구라고 할 수도 없지요. 관계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저 거래상의 일일 뿐이죠. 거래상의 일은 공평하게 주고받는 것이니 친분을 말하는 것은 큰 금기일 겁니다.”

그녀는 거리낌 없이 솔직하게 말하면서도 강옥루를 완곡하게 거절했다.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강옥루와 친구가 되기를 바라는가. 그런데 그중에 그와의 관계를 깔끔하게 그어버린 사람은 그동안 없었다. 한안이 처음이었다.

강옥루를 의아하게 한 것은 그녀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 어린아이는 정말 사람이 좀처럼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 데 능력이 있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웃었다.

“이렇게 모질게 정을 끊다니. 그 사람 때문에 모든 사람을 멀리하는 겁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는 어쨌든 대단히 복잡하게 얽혀 있지요. 정말 귀하의 말씀대로라면 저는 남과 교류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어떤 사람이든 다 그 사람과 관련이 있을 테니까요. 안 그런가요?”

강옥루는 순간 당황했다.

“당신 말에 일리가 있네요.”

그는 잠깐 망설였다.

“당신이 오늘 여기에 온 것은 대관절 어떤 사람을 만나기 위함입니까?”

한안은 웃었다.

“어떤 사람을 만나는가는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귀하가 나를 위해 비밀을 지켜줄 것인가 하는 거죠.”

강옥루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한안은 이어 말했다.

“저는 귀하가 장사꾼이라는 것을 알아요. 장사하는 사람은 신용을 가장 중시하죠. 부귀루는 줄곧 손님을 위해 비밀을 지켜왔으니 나는 그저 귀하가 나를 낯선 사람으로 여겨주길 바랄 뿐입니다. 곧 이곳에 올 다른 손님도 마찬가지로 나를 위해 비밀을 지켜주세요. 오늘의 일은 조금도 다른 사람들에게 언급해서는 안 됩니다.”

강옥루는 생각에 잠긴 듯 그녀를 한참 보더니, 비로소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당신을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으면 안 되겠죠. 그렇다고 당신과 나의 관계를 그렇게 말끔하게 던져버릴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내가 남과 친구가 되는 게 자주 있는 일은 아닙니다.”

한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강옥루는 한안의 표정과는 상관없이 일어서서 들고 있던 접선을 가볍게 흔들었다.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당신이 기다리는 사람이 도착했나 보네요.”

강옥루는 말을 마치고 바로 문밖으로 나갔다. 이와 동시에 바깥에서 거친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간 별고 없었느냐?”

오 태의가 도포를 걷어 올리고 걸어 들어왔다.

“오랜만입니다, 오 태의.”

한안은 살짝 고개를 숙였을 뿐 예를 행하지는 않았다. 그렇다 해도 오 태의는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한안의 위엄 있는 태도에 감히 침범할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당황했다. 다시 보니 한안의 얼굴에는 슬픔 따위는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냉담함, 과감함, 단호함이었다.

그야말로 또 하나의 부운석이었다. 오 태의는 마음속으로 깊디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두 사람이 이렇게 서로 닮아있으니 어쩌면 그들은 서로 끌리면서도 그 이유를 모르는 게 아닐까 싶었다.

“무엇을 물으려 하느냐?”

오 태의는 한쪽 옆에 앉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한안은 냉랭하게 그를 보았다.

“부운석의 몸 상태는 어떻죠? 당신의 의술에 의존할 필요가 있을 정도로 그의 병이 깊어진 건가요?”

오 태의는 깜짝 놀랐다. 한안이 이런 주제를 꺼낼 거라고는 짐작도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안의 말투는 단호했고 다 이해하고 있다는 눈빛이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설마 그녀가 이미 알고 있는 건가? 그건 불가능한데? 이 일은 그를 포함해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는 사람이 없어야 했다. 그녀는 대체 어디에서 안 거지?

한안은 오 태의의 표정을 보고도 못 본 척, 그저 잔 속에서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하는 찻잎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 태의, 당황하실 필요 없어요. 이 일을 제가 이미 꺼낸 이상, 감출 필요도 없습니다. 게다가 오 태의가 여기 오셨다는 것은 저한테 알려줄 생각이셨던 거죠, 아닌가요?”

비록 한안의 말이 구구절절 사실이기는 하나 조금 전 그가 이 안에 들어오기 직전까지는 완전히 확신하지 못했다. 그는 깊이 탄식하며 면사로 얼굴을 가린 맞은편 사람을 보았다. 면사 사이로 드러난 두 눈동자는 서늘하고 냉담하며 비웃음이 담고 있었고 슬픔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으며 그저 깊디깊은 통찰력만이 담겨 있었다.

설마 그녀는 조금도 슬프지 않은 건가? 설마 그녀는 부운석에 대해 처음부터 아무 감정도 없던 것이었나? 오 태의는 궁금했다. 그러나 당초 부운석이 서융 공주를 아내로 맞을 거라고 선포했을 때, 여기저기서 전해 듣기를 그 총애 받던 현청왕비가 넋을 잃은 모습이었다고 했다. 비록 그 안에 어느 정도 과장된 부분이 있기는 하겠지만 바람 없는 곳에 파도가 일지는 않는다고 어느 정도 까닭이 있어 전해진 소문일 것이다.

한안은 자신의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려와 아팠지만 얼굴에는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과 부운석의 운을 걸고 도박 중임을 알고 있었다. 오 태의의 반응에 승부를 걸었다. 일부러 침착한 척할 뿐, 사실은 그저 추측이었다. 오 태의에게서 진실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한 번에 그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뒤이어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아야 했다.

그녀는 옅게 웃었다.

“오 태의, 털어놓고 이야기를 해야 해결 방법도 있는 법이에요.”

“나는 네가 어디서 알아냈는지 모르겠구나.”

오 태의가 가벼운 소리로 말했지만 눈빛은 침중했다. 그는 모든 일을 통째로 털어놓기로 결정했다. 어린 아가씨와 겨루는 것은 할 만한 짓이 못 된다 생각했다. 그는 부운석이 자라는 것을 오랫동안 지켜본 사람이었다. 부운석이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만약 한안이 그 사실을 안다면 부운석의 곁으로 돌아가려 할지도 몰랐다. 한안도 고통스럽겠지만 부운석 혼자 겪고 있는 고통에 비교한다면……. 오 태의는 좀 더 이기적인 선택을 하기로 했다. 오 태의는 속으로 한안에게 미안하다고 속삭였다.

“그는 확실히…… 병이 중하여 치료할 수 없구나.”

머리 위에서 거대한 벼락이 하늘을 가로질러 내리꽂히는 것 같았다. 그 벼락은 곧장 한안에게 내리쳐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캄캄했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거의 전부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날카로운 통증 덕분에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숨을 들이마시며 비릿하게 올라오는 듯한 고통을 억지로 삼켰다.

오 태의는 한안의 얼굴에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는 것을 보고, 정말로 한안이 이 일을 알고 있었다고 단정했다. 이 일을 알고 있었다면 어째서 현청왕부에서 나왔을까? 이 어린 아가씨는 언제부터 부운석과 마찬가지로 남이 간파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을까? 그녀가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지 생각해낼 방법이 없었다. 오 태의가 말했다.

“네가 춘독에 중독되었던 그때를 아직 기억하느냐?”

그것은 한안이 1년 전, 궁중 연회 때 태후의 술수로 춘독이 든 술을 마신 일이었다. 나중에 다행히 부운석이 한안을 현청왕부로 데려가 오 태의의 치료를 받고서야 비로소 화를 피할 수 있었다.

“노부가 네가 말해주는 것을 잊었는데.”

오 태의가 자신의 짧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네가 중독된 연화미는 사실 해독할 수 있는 약이 없는 것이었다. 왕야가 너를 구했어.”

한안은 당황했다. 자기가 춘약에 중독되었던 그 일에 대해서는 사실 아무 기억이 없었다. 그저 자신이 아주 긴 꿈을 꾼 것 같다고만 느꼈고 깨어난 후에는 모든 것이 무사 평온했다. 오 태의의 말은 한안의 몸을 무거운 쇠망치로 한 대 내리친 것과 같았다. 그때 중독된 춘독을 해독할 수 있는 약이 없다고? 오 태의처럼 대단한 의술을 가진 이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면 그럼 부운석은 어떻게 자신을 구한 걸까?

한안의 의문을 알아채고 오 태의가 말했다.

“왕야는 자신의 피를 이용하여 너를 구한 것이다. 왕야의 피는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물체이고 네가 중독된 춘독의 성질은 열기가 승한 것이라 독으로써 독을 공격하여 독성을 푼 것이지.”

“가장 차갑다니요?”

이게 무슨 말이지. 한안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오 태의는 그녀를 한 번 보고 천천히 말했다.

“왕야는 아주 어렸을 때, 한독의 일종에 중독되었지. 이런 한독은 해독할 수 있는 약이 없구나.”

해독할 수 있는 약이 없다니? 한안의 심장이 바늘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 춘독을 해독할 약이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더 아프고 슬펐다. 가면인이 흑의인에게서 한안을 구할 때, 한안은 그 사람이 부운석이라고 이미 확정했다. 살을 엘 듯 차가운 분위기가 지나치게 익숙했다. 설령 목소리를 바꾸고 용모를 명확히 알아볼 수 없게 했다고 해도, 한눈에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부운석이 자신을 구하려 했다. 그 사실을 이미 자신은 예상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예상 밖이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부운석의 기량을 볼 때 하찮은 어전 시위가 그에게 상처를 입힐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위급 상황이라 해도 부운석이 그런 실수를 범할 리 없었다. 그럼 가능성은 오직 하나. 부운석에게 무슨 일이 발생했고, 그 때문에 어이없게 다친 것이다.

한안은 그제야 아주 예전의 일 한 가지를 떠올렸다. 전생의 처지와 이번 생의 처지가 완전히 달라져서 전생을 꿈이었다 여기며 차츰 잊고 있어서였을 것이다. 전생의 부운석은 전쟁터에서 돌아온 후, 중병을 앓았다. 그 중병은 그의 생명을 앗을 뻔했다. 당시 황상이 사방으로 좋은 의원을 구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결국 서융 공주가 자발적으로 액땜을 하러 시집을 왔고 이후에 병은 천천히 호전되는 기미를 보였다. 병이 완치가 되었는지 여부는 한안은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전에 이미 그녀는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이번 생에 변화가 너무 많았고 부운석이 전쟁터에 나간 시기도 달랐기 때문에 한안은 그가 병이 났던 일을 잊고 있었다. 많은 일을 겪으면서 한안은 환생 후 삶을 바꿀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생로병사는 운명적으로 정해지는 재난이니 그것만큼은 더 이상 바꾸는 것이 불가능한 것 같았다. 그럼 방법이 없는 걸까?

오 태의는 한안의 표정이 복잡함을 알아보았다. 기왕 이미 전부 말하기로 결정했기에 바로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는 그가 중독된 것만 알고 이 독이 도대체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는 것 같구나. 됐다. 노부가 보기에 너도 보통 여자는 아닌 듯하니 그 유래를 너에게 들려주마.”

부운석은 어린 나이에 명성을 얻었을 뿐 아니라 풍채와 재능이 빼어났으며 더욱이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황친 귀족이었다. 대다수 사람이 보기에 그는 확실히 대단히 출중한 사람이었고 그렇기에 자신들의 조상이 복을 쌓고 쌓아도 이룰 수 없는 큰 복을 타고났다고 생각했을 수 있었다. 그러나 부운석에게 닥친 운명의 장난 따위는 그들이 알 방법은 없었다.

부운석이 어렸을 때, 그의 모비인 정비가 세상을 떠났다. 정비는 생전에 황상이 가장 총애하던 비였다. 당시의 황후도 그녀와 같은 대우를 받지는 못할 정도였다. 정비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가장 어린 아들이 태어난 그 날, 정비가 난산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부운석과 지금의 황상인 당시의 대황자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황후는 부운석과 대황자에게 아주 잘 대해 주었다. 황후 자신에게 아들이 없었기에 그들 둘을 양자로 들일 정도였다. 황후는 전형적인 자애로운 어머니였다. 선황 사후, 대황자가 황위를 이었고 태후는 황상을 세심하게 보좌했다. 황상이 태후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태후가 황상의 심중에 얼마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부운석도 이전에는 황후와 아주 가까웠다. 하지만 그가 열네 살이던 그 해,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부운석은 갑자기 자발적으로 서융과의 전쟁에 종군을 자청했다. 황상은 반대했고, 태후는 여러 날을 울어 눈이 온통 붉어질 정도였다. 그러나 누구도 부운석의 결심을 바꾸지 못했다. 그는 무심하게 전장에 나갔고 나중에야 공훈을 달고 돌아왔다.

“너는 분명, 그가 왜 전장에 나가려 했는지 추측했겠지?”

오 태의는 잠깐 말을 멈추고는 한안에게 물었다.

“태후 때문인가요?”

한안은 떠보듯 물었다.

오 태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계속해서 말했다.

사실 궁중에는 또 다른 소문이 하나 있었는데, 황후가 정비를 죽였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소문일 뿐이었다. 정비가 출산하던 그 날, 황후는 오대산에서 곧 태어날 3황자를 위해 복을 기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후는 정비 모자에게 변고가 일어났다는 것을 그 이튿날에야 들었다고 했다. 게다가 황후는 대황자와 부운석에게 잘 했기 때문에 소문은 저절로 사라졌다.

선황이 그의 의술을 중시하여 그를 궁중에 들어와 머물게 했는데 젊었을 적 오 태의는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 방탕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법도 없고 하늘도 없는 성격이라 궁중에 있는 누구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쩔쩔매기만 했다. 물론 한 사람은 예외였다. 그는 바로 부운석이었다.

오 태의에게 법도 하늘도 없었다고 하지만 부운석은 그보다 더 했다. 오 태의는 자신보다 훨씬 어린 이 후배가 자신의 마음을 두렵게 하는 것을 볼 때가 많았다. 하지만 교류가 이어지면서 서로를 잘 알게 되었고 둘은 나이와는 상관없는 교분을 나누게 되었다.

부운석이 처음 발병한 그 날, 그는 바로 오 태의를 찾아왔다.

오 태의는 그때 그 장면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소년은 온몸이 얼음덩이처럼 차가웠다. 옥색이었던 피부는 이미 눈처럼 하얬다. 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냉정해서 곧 동사하게 될 사람이 그가 아닌 오 태의 자신일 것만 같았다. 청보라 빛 그의 입술이 무심하게 오 태의를 응시하며 두 마디 말을 했다.

“나를 구해줘.”

그리고 그의 머리가 바로 땅으로 고꾸라졌다.

오 태의는 그를 방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의 식견이 넓어 부운석의 수상쩍은 증상이 그가 한독에 중독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기까지 어렵지 않았다. 한독으로 발작이 일어나면 온몸이 얼음처럼 차가워지고 얼음이 뼛속까지 찌르고 헤집어 뚫고 들어가는 통증을 겪게 된다. 사람이 성장할수록 독성도 더 깊게 침투한다. 한독이 오장육부 전체를 침투할 때가 되면 감각이 전부 사라지고 얼음 인간으로 변해버리는데 가장 무서운 사실은 그 와중에도 몸은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이었다.

그 독은 일종의 만성 독이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부운석은 아주 어릴 때 이미 한독에 중독되었다는 의미였다.

“네가 그렇게 총명하고 영민하니, 독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 알겠지?”

오 태의가 여기까지 말하고, 고개를 들어 한안에게 말했다.

한안은 그를 응시했다. 오 태의의 목소리가 느릿하고 낮게 변해 있었다. 진지하게 귀 기울여 듣고 있었던 게 아니라면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었을 수도 있었다.

“태후?”

오 태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직 부운석만 중독되었다. 황상은 중독되지 않았다. 정상적인 일은 아니었다. 그때, 부운석이 발견한 사실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선황이 세상을 떠난 후, 여러 황자 중에 황상과 부운석이 가장 출중했기에 황후도 그들을 보배처럼 여기며 아꼈다. 특별히 궁중 태의에게 가장 진귀한 설련(䨮蓮)으로 보양식을 끓여 두 형제에게 주어 몸을 보하게 했다. 그러나 태후가 몰랐던 것은 두 형제가 본래부터 친근했다는 것이다. 부운석은 어릴 때 몸이 황상보다 강건하지 못하여, 황상은 자기 몫의 보양식을 부운석에게 주었는데 문제는 그 보양식에서 발생했다.

이 보양식에는 해독할 약이 없는 독약 하나가 더해졌다. 그러나 황상은 보양식을 건드리지 않아 무탈했고, 부운석은 두 명 몫의 독약을 복용하여 독성이 가중되었다. 그래서 성인이 된 후에야 비로소 반응이 나타난다고 알려진 독약의 발작증상이 그가 소년일 때 나타난 것이었다.

부운석의 몸에 내재된 독성이 일찍 발현되면서 다행스럽게도 오 태의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 태의는 여러 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부운석을 치료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부운석의 병증을 완화만 시킬 수 있을 뿐이었다. 부운석이 더 이상 보양식을 마시지 않음으로써 독약도 더는 축적되지는 않았지만 어려서 흡수한 독성은 그의 체내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황궁 금지(禁地) 안의 온천은 황상이 특별히 부운석을 위해 세운 것이었다. 황상은 부운석이 한독에 중독된 것은 알았지만, 태후가 한 짓이라는 것은 믿지 않았다. 나중에 부운석이 보양식을 찾아냈지만 그사이 매수가 된 것인지 아무런 실마리도 찾을 수 없었고 증거가 없으니 황상을 납득 시킬 수 없었다.

한독은 하루하루가 더 심해지곤 했다. 온천수는 그 속의 한기를 완화 시키고 몸을 따뜻하게 해줄 수 있어 독이 발작할 때마다 부운석은 온천에 몸을 담갔다.

한안은 자기 몸이 춘독에 중독되었던 그때를 떠올렸다. 자신은 확실히 온천 가운데에서 부운석을 발견했다. 그곳은 확실히 금지였고 태감이나 궁녀 하나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 한안은 자신이 그저 우연히 부운석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부운석은 그때 독이 발작해서 온천에서 독성을 완화 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생명이 위협받는다는 사실보다 부운석을 더 가슴 아프게 했던 것은 아마도 그 배후가 태후라는 점일 것이다. 어려서부터 존숭하던 여인, 모비를 제외하고 가장 친근한 사람이 철두철미한 살육자라니. 그녀는 수시로 자신과 형의 생명을 노리려 했고 어쩌면 모비와 동생의 죽음에도 태후가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했을 것이다. 원수를 아버지로 섬긴다는 것이 아마 이런 상황을 말하는 것이리라.

“황상과 왕야는 친형제죠.”

한안은 자신의 의문점을 물었다.

“황상께서 제아무리 태후를 믿으신다 해도 왕야께서 의문을 제기하셨으니 황상도 응당 경계하셨어야 해요. 어떻게 태후에 대해 아무 의심 없이 신임할 수가 있죠?”

황상이 태후를 대하는 태도는 보통의 모자지간을 넘어설 정도이니 그것도 실로 기이한 일이었다.

오 태의는 고개를 저었다.

“황상께서 어렸을 때, 태후가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지. 당시 황상은 호수 속에 빠졌는데 주위에 태감과 궁녀가 없었어. 태후가 스스로 뛰어들어 그를 구해냈다 하더라. 태후는 이 일 때문에 풍한에 걸렸고 비가 내릴 때마다 기침이 끊이지 않지. 그러니 황상은 줄곧 마음속에 가책을 품고 계시다는구나.”

한안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이 없었다. 태후의 그런 행위는 당연히 별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대저택 안에 있다 보면 당신을 구한 사람이라고 해서 당신을 죽이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명백했다. 심지어 한안은 황상이 호수에 빠진 것은 어쩌면 태후가 스스로 판 계략일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진정 악독한 사람은 얼굴 위에 자신의 음모를 드러내지 않는다. 친절함과 상냥함을 보여주며 사람이 스스로를 자책하게 만들고, 위해주는 척하며 신뢰를 얻는다. 그 후에 준비되지 않은 때를 노려 낭떠러지로 밀어 넣는다. 마치 전생의 주씨 모녀와 같았다.

한안은 한 번 죽음으로써 그 사실을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황상은 달랐다. 황가에서는 본래 혈육의 정에 대해 냉담했다. 모비가 세상을 일찍 뜨고 어머니의 사랑을 잃어버린 한 소년은 태후의 이런 행동에 자신의 정을 의탁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았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자신의 제2의 모비로 보는 것도 가능한 일이었다.

황상은 부운석을 믿지 않았다. 어쩌면 믿기를 원치 않았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태후가 정말로 마음에 흉심을 품었다는 것을 인정하면 자신의 환상, 모친의 꿈이 부서지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황상도 스스로를 속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자기기만이 부운석의 목숨을 해치고 참담하게 만들었다. 종일 자신의 원수와 자신의 형이 자애로운 모친과 효성스러운 아들이라는 연극을 공연하는 것을 보면서 부운석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는 그저 자신의 분노를 전쟁터에서 발산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빠르게 성장했으며 강하게 변했다. 그 원수가 더 이상 자신을 얕보지 않고 심지어 자신을 두려워하며 그의 힘 아래 굴복할 수 있을 때까지 강해져야 했다.

한안은 오 태의를 주시했다.

“이림나가 그의 병을 치료할 수 있죠, 맞나요?”

오 태의는 놀라운 마음에 한안을 보며 말했다.

“치료할 수 있는 건 아니지. 하지만 서융인은 고(蠱: 고대 전설상의 독충. 독충끼리 잡아먹게 하여 최후로 남은 독충을 ‘고’라 함)를 사용하는 데 능숙한데 공주는 자신의 고충(蠱蟲) 한 마리를 사용해 한독을 잠시 통제할 뿐이야. 한독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고. 이 고충이 일단 한독을 뒤집어쓰는 것이라 부운석은 여전히 위험한 상황이야. 그런데…….”

오 태의가 눈을 들고 말했다.

“그가 공주의 고충을 받아들이지 않았어.”

이림나의 고충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이림나는 현청왕부에 들어와 살고 있고, 부운석도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의 고충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무엇하러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그의 한독은 최근 갈수록 발작이 심해지고 있단다. 어제는 어디선가 중상까지 입고 들어와서 노부가 그의 상처를 치료해야 했지. 몸에 한독이 있는데 새로운 부상까지 더하니 노부의 능력이 좀 달리는구나. 네가 평소에 좋은 생각이 상당히 많았지. 금일 노부가 이리 나온 것은 너에게 해결 방법이 있거든 아끼지 말고 꺼내놓아서 왕야를 구해주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말을 잠시 멈춘 그는 한안을 지긋이 바라보다 계속해서 말했다.

“노부는 보면 알 수 있지. 네가 왕야에 대해 진심이라는 걸.”

한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태의께서는 정말 저를 과대평가하시는 겁니다. 하지만 한안은 아직 이해 안 가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왕야의 병이 중하신 일을 황상도 아십니까?”

오 태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아신다. 바로 황상께서 노부에게 왕야를 치료하라 명하셨다.”

한안은 조금 망설였다. 어제의 일의 배후에 황상이 있음은 확실했다. 부운석의 병이 더 이상 치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황상이 알았다면 부운석이 자신을 현청왕부에서 내친 것이 그의 진심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만약 자신이 황상의 손에 죽었다면 부운석은 분명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그런데도 황상은 자신에게 살수를 보냈다. 황상은 왜 형제와 반목할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자신을 제거하도록 한 것일까?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가?

그리고 부운석은 이림나의 고충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면서도 자신을 현청왕부에서 억지로 내보내다시피 했다. 그는 무엇을 하려는 걸까? 한 가지 가능성은 부운석이 자신에게 그의 상황을 알리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만약 부운석의 몸이 한독에 중독되었다는 것을 자신이 안다면 틀림없이 몹시 상심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을 상심하게 하고 싶지 않았고 또 연루시키는 것도 원치 않았기에 이런 방식을 사용하여 자신과의 혼사를 없애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신은 자유롭게 될 테니까.

하지만 부운석은 결코 이렇게 행동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성격으로 보자면 자신에게 거리낌 없이 알리고 말끔하게 손을 뗐을 것이다. 그럼 오직 한 가지 가능성만 남았다. 부운석이 자신을 밀어낸 것은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자신과의 관계를 떼어버렸다. 너무도 철저하게. 설마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의 결정은 황상의 결정과 또 관계가 있는 걸까?

한안은 자신의 머릿속에 안개가 자욱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부운석이 어제 자신을 위해 대신 칼을 맞은 것을 떠올리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롭고 아팠다. 그녀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는 지금 어때요?”

오 태의는 한안이 말하는 ‘그’가 부운석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았다. 깊이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그다지 좋지 않아. 부상도 아주 심하고, 한독의 독성도 맹렬한데 공주의 고충도 쓰지 않으니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한안의 심장이 조여들었다.

“정말 해독할 약이 없나요?”

오 태의는 쓴웃음을 지었다.

“노부는 이제 어쩔 도리가 없구나.”

한안은 눈을 내리깔고 말이 없었다. 오 태의는 창밖을 내다보더니 소매를 털고 일어났다.

“노부는 이만 돌아가겠다. 너무 늦으면 의심할 사람이 있을 거야. 지금 왕야가 한독에 중독되어 생명이 위험한 일은 다른 이들은 전혀 모른다. 만약 속셈 있는 놈이 이 일을 가지고 트집을 잡으면 망하는 거지.”

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 태의는 바로 몸을 움직여 떠났다. 그녀는 여전히 창 앞에 앉아 있었다.

급람과 주홍이 고요히 몸 뒤에 서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이렇게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겉보기에 존귀와 영광이 무한할 것 같은 현청왕이 자신들의 소저보다 편안했던 게 아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궁중 안에서 서로를 속고 속이는 작태가 더 무시무시하다 할 수 있었다.

한안은 참담하게 웃었다. 자신은 다시 한번 살아갈 기회가 있었지만 부운석은? 만약 그가 죽는다면 이 세상에서 없어져 더는 부운석을 볼 방법이 없을 것이다. 자신이 전생의 원한을 갚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이 다시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부운석은? 아마 그가 죽더라도 태후는 여전히 높은 곳에서 군림할 것이다. 하늘이 정말 이 세상을 보고 있기는 한 걸까?

한안의 손이 습관적으로 자신의 머리 쪽을 더듬다가 물고기 꼬리 비녀가 없는 것을 발견했다. 비녀는 없어지면 다른 것을 찾으면 된다. 하지만 사람은 없어지면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리라.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그녀는 일어섰다. 칠흑 같은 밤 풍경 속에 그녀의 눈동자가 유달리 투명하게 빛나 보였다.

“장부로 돌아가자.”

주홍은 의아해하며 한안을 보았다. 그녀는 한안이 이제 부운석을 보러 현청왕부로 갈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부운석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는 한독에 중독되었다는 그런 간단한 이유가 아닐 것이었다. 유일한 출구는 자신과 태후의 관계부터 조사하는 것이다. 무슨 이유인지 잘 모르겠지만 황상조차 자신에게 살수를 뻗치니 아마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탁칠을 만나야 할 시기였다.

22장

장부로 돌아왔을 때는 하늘빛은 이미 완전히 어두웠다. 바깥에 등롱을 들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유모는 그녀들이 돌아온 것을 보고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가씨 어디 가셨다 오셨어요? 이렇게 늦어서야 돌아오시다니. 신변에 지키는 시위 하나 없이 만약 변고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한안은 간신히 유모를 설득해서 서둘러 가서 쉬게 하고 자신은 청추원으로 걸어갔다. 최근 장사양은 정말 기이할 정도로 본분을 지키고 있었고, 장한명은 국자감을 이유로 통합 훈련장으로 옮겨간 상태라, 한안은 누구도 만나지 않고 움직일 수 있었다. 장사양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한안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장사양과 위왕, 7황자 간에 모종의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었다. 태후가 그 속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지는 명확하지가 않았다. 그러나 태후가 그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지는 않다는 점은 분명해 보였다.

규방의 문을 밀어 여는데 침상 머리 부분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등에 불을 붙이는 것을 보고도 피하지도 숨지도 않으니 바로 탁칠이었다. 한안이 돌아온 것을 보고 그는 비로소 입술을 치켜 올리고 웃었다.

“나는 네가 좀 더 있어야 들어올 거라고 생각했어.”

한안은 그를 노려보았다. 이 사람은 늘 장부를 자기 집 후원인 양 아무 간섭도 받지 않고 드나드니 얄밉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그가 자신을 위하여 적지 않은 번거로움을 덜어주었고 적어도 그의 솜씨라면 청추원에 낯선 사람이 오간다는 의심을 받지 않을 수 있으니 나름 안심이었다.

급람이 서둘러 문과 창을 잘 닫고 휘장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한안에게 의자를 하나 옮겨다 주었다. 탁칠은 한안의 침상 근처에 앉았다. 주홍과 급람은 한안의 몸 뒤에 섰다.

한안은 딱 잘라서 물었다.

“무얼 조사해냈죠?”

탁칠은 더 이상 평소처럼 한안에게 농담을 던지지 않았다. 그리고 매우 엄숙한 표정으로 급람과 주홍을 보았다. 급람과 주홍은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한안을 바라보았다.

“그녀들을 꺼릴 필요 없어요. 직접 말해요.”

급람과 주홍은 그녀가 가장 신임하는 사람이었다. 급람과 주홍은 그녀의 인생에 직접 관여할 수 있으며 무슨 일이 일어날지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사람 마음은 알 수 없는 거라 하지만 어떤 사람은 일생에 걸쳐 배반하지 않는다 하는데 이 둘이 그랬다.

한안이 이렇게 말한 이상, 탁칠이 더 이상 회피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았다. 그는 머리를 숙이고 잠시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한안에게 어떻게 말해야 가장 명확할지 자신의 말을 정리해 보는 것 같았다. 한안은 참을성 있게 그의 말을 기다렸다. 드디어 탁칠이 입을 열었다.

“비록 당문 사람들이 목숨 걸고 숨겨 지금까지 그 비밀을 잘 지키고 있긴 했지만 결국엔 내가 알아냈지. 당문의 현 보주의 어린 딸, 당소교는 바로 동후왕비야.”

당문의 어린 딸이 동후왕비라고? 한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조정과 강호는 본래부터 서로 공존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강호 사람들은 조정의 아귀다툼을 보고 있을 수 없고 조정 사람은 강호 문파의 세력이 일어서는 것을 꺼렸다. 이 둘의 사이는 줄곧 미묘한 관계를 유지하며 상호 침범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기만 했다. 그러니 조정 사람과 강호 사람이 부부 연을 맺는 일은 근본적으로 아주 적었다. 게다가 작은 문파면 모를까, 큰 강호 문파에서는 조정을 꺼렸기에 둘이 인척 관계를 맺는 것은 원론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동후왕과 당소교는 당시 권세가 대단한 권신의 아들과 강호 큰 문파의 금지옥엽 딸이었으니 양립할 수 없는 관계였다. 그러나 동후왕의 자유로운 성격으로 보아 강호 여자를 사랑하게 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조정 사람을 사랑한 강호 여자는 조정의 사냥개요, 무림의 변절자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결국 당가의 현 보주가 자기 딸 당소교의 일을 감춘 것은 어찌 보면 이해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벽이 갖고 있던 비단 손수건에는 ‘교’ 자가 쓰여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는 동후왕의 소꿉친구였고 당소교는 동후왕비였으니 비단 손수건은 당소교의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 당소교의 손수건이 어째서 어머니의 수중에 있었을까. 한안은 돌연 아벽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어머니의 마음은 동후왕에게 있었지만 결국 장사양에게 시집왔다. 동후왕 일가는 모두 멸문당했고 자신은 어머니가 장부에 시집온 지 오래지 않아 태어나서 모두 다 자신이 장사양의 딸이 아니라고 말했다.

한안의 심장이 쿵쿵 미친 듯이 뛰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신 나간 추측 하나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벽의 이야기를 알고 나서부터 한안은 자신이 장사양의 친딸이 아니라고 거의 확신했다. 그녀는 자신의 친 부친이 결코 장사양이 아닐 것이라고 의심을 품었다. 왜냐하면 장사양의 모든 행위에 그녀에 대한 혈육의 따뜻한 정 따위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장사양은 만 이낭에게는 그나마 정과 의리가 있었다. 냉대하긴 했지만 기분이 좋을 때는 몇 마디 묻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거의 원수로 대했다. 자신이 태어난 이후, 장사양이 자신의 어머니를 은애한다는 느낌을 전혀 가질 수 없었다. 조강지처라면 어쨌든 은애한 세월이 몇 년은 있는 법인데 청추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아벽이 어머니의 마음이 동후왕에게 있었다고 이야기했을 때, 한안은 마음속으로 이미 어렴풋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자신이 동후왕의 딸이 아닐까 하고. 어머니는 장사양에게 시집가기 전에 뱃속에 자신이 있었던 거라고.

그러나 비단 손수건이 당소교의 것임을 알게 되자 그 가정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정말 동후왕을 깊이 사랑하여 아이까지 있었다면 당소교의 비단 손수건을 굳이 갖고 있을 필요가 없으니까. 그녀들 사이에는 다툼이 있었을 것이고 대립했을 것이다.

그럼 만약 자신이 장사양의 딸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딸이 아니라면?

만약 자신이 사실은 동후왕과 당소교의 딸이라면?

장사양은 자신을 냉담하게 대했다. 그는 이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며 아이의 몸에 흐르는 것이 그의 피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동후왕 일가가 멸문당한 것도 수상쩍었다. 어쩌면 그것도 황실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동후왕의 자식을 거두어 키운다는 것은 장부에 위험한 물건을 두는 것이나 다름없으며 황실과 관계된 위험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이것이 장사양이 걱정해야 했던 문제인 것이다. 게다가 한안은 장사양의 정처가 사랑했던 남자의 아이이니 장사양은 매번 한안을 볼 때마다 당연히 꺼리는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그럼 문제의 핵심은 왕씨는 어째서 한안을 거두어 키워야 했을까?

한안은 이전에는 왕씨가 자신의 친 모친이 아닐 거라는 의심을 품어본 적이 없었다. 왕씨는 한안에게 너무나 잘해 주었다. 그녀는 한안을 위해서 저에게 억울한 일이 생겨도 참고 견뎠으며 다른 모친들과 마찬가지로 한안을 아끼고 사랑했다. 한안은 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여인이 자신의 어머니가 아니라는 의심을 품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자신이 당소교와 동후왕의 아이라는 생각이 떠오른 순간, 여러 장면이 눈앞에 갑자기 펼쳐졌다. 예를 들면 지금까지 자신과 어머니가 닮았다는 말이나 자신이 장사양과 비슷하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든가 하는 것. 어머니의 성격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하지만 자신은 겉으로는 순종적이었지만 내심은 완강하고 고집이 셌다. 또 어머니가 자신의 생일 이전이나 이후에 매번 절에 가서 향을 올렸는데 그때마다 그녀의 태도가 이상했다든지 하는 것.

자신과 어머니는 조금도 닮지 않았다. 대수롭지 않은 사소한 일로 보일 수 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곳곳에 의문점이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연결해서 살펴보니 결론은 분명해졌다.

이 순간, 눈앞이 환해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마음이 기쁜 것은 아니었다. 부친이 친부가 아니고 모친도 친모가 아니라면 자신은 도대체 누구일까. 수수께끼가 다시 시작됐다. 어쩌면 자신의 혈육은 이미 이 세상에 하나도 없는지도 모른다. 만약 자신이 정말 동후왕의 딸이라면 아무 탈 없이 이렇게 여러 해를 산 것 자체가 또 하나의 음모가 아닌지.

왜냐하면 장사양은 화근을 남겨둘 정도로 그렇게 간이 크지 않은 사람이었다. 누군가 장사양을 시켜 자신을 장부에서 키우도록 지시했을 것이다. 그 사람은 그녀의 출신을 알고 있고 또 그녀가 살아있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장사양이 목숨을 내걸고 달갑지 않은 일을 기꺼이 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황가의 사람뿐이었다. 그 외 다른 사람은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그때에는 7황자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 그럼 오직 한 사람이 남을 뿐이다. 태후.

한안은 문득 이전에 위여풍이 자신을 아내로 맞으려고 요구했던 일을 떠올렸다. 전생에서도 그랬고 위여풍이 자신을 위세자비로 맞으려고 했던 점은 지금까지 변한 적이 없었다. 설령 악연이라고 해도 너무 공교로웠다. 전생의 한안은 이번 생에 비해 평판이 너무 안 좋았다. 산적에게 납치되어 순결을 잃었다는 소문이 오르내렸고 사람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어 거의 잊힌 사람이었다. 그랬는데도 위여풍은 빙례를 보냈다. 그때 한안은 거의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기만 할 뿐 그 속에 불합리한 점이 있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하늘의 총아 위여풍은 성격이 거만한데 어찌 그녀같이 명성 없는 사람이 눈에 찼을까? 하나는 미래의 위왕이었고, 하나는 그저 관원의 총애 받지 못하는 딸이었으니 신분도 맞지 않는 셈이었다.

장어산이 전생에 자신에게 독주를 주면서 비록 자신은 죽었지만 장어산이 자신을 대신하였으니 다른 사람들에게는 장한안이 위 세자비가 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장어산이 쓴 것은 자신의 이름이었다. 혹시……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꾸민 음모였다면 그럼 위여풍이 자신을 아내로 맞은 것도 다른 사람의 지시를 거친 것일까?

한안은 이마를 짚었다. 잇따른 타격이 그녀의 머리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탁칠은 한안의 얼굴빛이 이상한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너 왜 그래?”

“아니에요. 괜찮아요.”

한안은 이를 악물었다.

“탁칠, 내가 당신에게 한 가지 일을 더 부탁할 수 있을까요?”

한안이 ‘부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자, 탁칠의 표정이 불편하게 바뀌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나를 감옥에 데려가 줄 수 있나요? 남에게 발견되지 않게요.”

감옥을 비밀리에 방문한다고? 탁칠은 파고들 듯한 시선으로 한안을 보았다. 어째서 그녀는 이 소식을 들은 후 중대한 타격을 받은 것 같을까? 한안의 신상에 무슨 일이 발생한 것인지 알고 싶었지만, 그녀가 넋을 잃은 모습을 보니 오히려 한안이 아무것도 모르는 편이 나았겠다고 생각했다.

*

황궁 안.

태후는 옆에서 조용히 웅크리고 있는 늙은 고양이를 바라보며 담담히 웃었다.

“어떠냐?”

옆에 있던 고고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현청왕은 곧 끝날 겁니다.”

지난번 황상이 한안을 암살하라고 파견한 어전 시위는 부운석의 손에 죽었다. 그러나 부운석도 한안을 위해 칼을 맞았다. 예전 같았으면 그리 큰 부상이 아니었겠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부운석의 몸은 이런 고초를 감당해낼 수 없었다.

“황상은 모든 잘못을 장한안에게 떠밀고 부운석은 황상을 원망할 것이니 이렇게 서로 원한을 사는 것이지.”

태후는 늙은 고양이의 부들부들한 털가죽을 쓰다듬었다.

“황가에서 혈육의 정이란, 애가가 많이 보아왔다만 늘 ‘자신의 이익’ 두 단어를 이길 수 없지.”

“그 서융 공주가……. 만약 정말 그를 치료할 수 있으면…….”

고고가 주저하며 말했다.

“걘, 골 빈 년에 불과해.”

태후가 손을 저었다.

“만약 정말 치료할 수 있다면 이미 치료했겠지. 부운석, 그 아이의 성격은 대단하지. 걔가 어려서부터 크는 걸 지켜봤거든. 부운석이 받아들일 리 없어.”

“마마, 그럼 지금 어찌해야 합니까?”

고고는 걱정스러운 듯했다.

태후는 옅게 웃었다.

“지금? 그들 전부 손 놓고 기어들어 갈 수밖에 없으니 이 일은 이제 끝난 셈이다. 대종은 이제 바뀌어야 할 것이야.”

그녀의 얼굴이 순간 흉악하게 바뀌면서 눈빛이 처참한 빛을 내뿜었다. 늙은 고양이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태후의 손등 위를 할퀴었다. 순간 한 줄기 길고 긴 붉은 자국이 나타났다.

태후는 결코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부드럽게 입속으로 ‘야옹아.’ 하고 부르며 고양이를 달랬다. 고양이는 등을 활처럼 구부리고 점차 몸을 웅크렸다. 고양이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태후에게 다시 다가가서 얼굴을 뒤로 젖혀 그녀의 손등에 비볐다. 태후의 눈짓에 옆에서 그 모습을 보면서 심장이 두근거리고 살이 떨리던 궁녀가 서둘러 나와 고양이를 안았다.

“죽여라.”

밝은 노란색 옷의 여인이 한 가닥 감정도 싣지 않고 명령했다. 방금 전 고양이를 부르던 부드러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네.”

궁녀는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몸을 부르르 떨며 서둘러 고양이를 안고 빠른 걸음으로 문을 나갔다.

태후는 손등 위의 붉은 자국을 쓰다듬었다. 입가에 냉소가 새어 나왔다. 감히 그녀에게 상처 입히는 것들은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십여 년 전에도 그랬고 십여 년 후에도 역시 마찬가지다.

*

문을 지키는 옥졸들이 한옆에서 정신없이 잠들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소리 한 점 들리지 않았다. 한안은 흑의를 입은 탁칠을 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뭐 하러 그들 전부를 기절시켰죠?”

이렇게 하면 오히려 남의 의심을 불러들이기 쉬웠다.

탁칠은 무고하다는 듯 말했다.

“그들 전부를 기절시키지 않으면 어떻게 실수가 전혀 없을 거라고 보증할 수 있겠어. 보라고, 우리 서융의 훈향(熏香) 대단하지? 저들은 세 시진(6시간)은 지나야 깨어날 거야.”

세 시진이면 날이 이미 밝는다. 아마 날이 밝기도 전에 어젯밤 누군가 감옥을 야간 방문했다는 소식이 경성 안에 퍼질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것을 신경 쓰고 있을 수가 없었다. 한안은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먼저 사람을 찾죠.”

감옥 안 모든 사람이 향을 맡고 기절하여 사람을 찾는 데 더욱 힘이 들었다. 이름을 부른다고 대답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탁칠이 앞에서 걸었고 한안은 하나하나 자세하게 살피며 뒤를 따라 걸어갔다. 탁칠이 불렀다.

“이 사람이야?”

한안은 눈살을 찌푸리곤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나가서 보았다. 머리카락이 잔뜩 헝클어진 여자가 천장을 향해 누워 있었는데 얼굴은 온통 때로 가득했다. 한안은 여자의 이목구비와 익숙한 옷을 알아보았다.

그 사람은 바로 미 이낭이었다.

미 이낭은 감옥 안에서 피폐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비록 감옥이 사람 살 데가 못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 꽤 미색이 있던 여인이 원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지경이 되어 있었다. 거리의 걸인과 다를 바 없었다. 미 이낭의 화려하고 아름답던 모습을 떠올리니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탄식이 솟구쳤다. 그러나 탄식은 탄식이고 결국 동정은 없었다.

“이 모습인데도 알아보다니, 눈이 좋네요.”

한안이 탁칠에게 말했다. 탁칠은 득의만만하게 웃었다.

“여인의 몸에 대해 익숙했을 뿐이야. 이 감옥 안에 범인이 적지 않지만, 몸의 자태가 여전히 쓸 만한 건 이 아낙뿐이었어. 응당 네가 찾는 이낭이라 생각했지.”

한안은 그를 한 번 노려보고 탁칠에게 움직이라는 표시를 했다. 탁칠은 바로 품속에서 작은 병 하나를 끄집어내고는 한 손을 철창 사이로 뻗어 미 이낭의 몸을 끌어왔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병을 미 이낭의 코끝에 대고 흔들었다. 미 이낭이 신음을 내더니 천천히 깨어났다.

미 이낭은 두 눈을 뜨고 자기 앞에 흑의인 두 명이 서 있는 것을 보자마자 두려워하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나를 죽이지 마세요. 사람 살려, 사람 살려!”

감옥 안에 있는 죄인은 대다수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 어떤 자는 조정 대신에게 죄를 지은 후 이곳에 종신토록 감금되어 죽느니만 못한 날을 보낸다. 물론 희생양이 된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의 대다수는 감옥에서 기이한 방법으로 사망하곤 했다. 기이한 사망이라고 말하느니 배후의 사람에게 살인멸구 당했다고 말하는 편이 나으리라. 미 이낭은 이런 일을 적지 않게 보았다. 갑자기 나타난 흑의인이 자신을 살인멸구할까 봐 두려웠을 것이다.

“입 닥쳐.”

탁칠이 냉랭하게 말했다.

“다시 비명을 지르면 단칼에 너를 죽일 거야.”

미 이낭은 여전히 애걸복걸하고 있었다. 어쩌면 주위에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것을 보고 이 감옥 안에서 오직 눈앞의 두 사람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거듭해서 바닥에 머리를 부딪쳤다.

“저를 죽이지 마세요. 저를 죽이지 마세요. 두 분께서는 저를 죽이지 말아 주세요.”

미 이낭은 말을 마치더니 갑자기 자신의 옷을 풀어 젖혔다. 배두렁이조차 입지 않은 그녀의 피부가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미 이낭의 피부에는 붉은 흔적과 입맞춤 자국이 얼룩덜룩하여, 얼마나 많은 유린을 당해왔는가를 암시하고 있었다. 감옥 안에서 여인은 마음대로 괴롭힐 수 있는 존재였다. 분명 미 이낭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한안은 미 이낭이 거만하게 남을 능멸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곱고 요염하여 모든 남자를 매료시키곤 했다. 그녀는 남자를 노리개로 보았다. 설령 장사양이라 해도 미 이낭이 젊었을 때는 그녀의 치마폭에 싸인 남자 중 하나였을 뿐이다. 애걸복걸하고 있는 그녀의 처참한 모습에서는 요염하던 여인의 풍취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세상사가 변화무쌍하다는 말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리라. 한안은 탄식하며 자신의 복면을 떼어냈다.

“나예요, 미 이낭.”

익숙한 목소리에 미 이낭이 멍해지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한안을 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흐리멍덩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고귀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 여자가 정말 장부에서 누구나 업신여기던 여자아이인지 식별하고 있는 듯했다. 갑작스레 그녀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하하 큰 소리로 웃었다.

“너였구나. 뜻밖에도 너였어!”

그녀의 목소리는 비통하고 분노해 있었다.

“네가 뭐 하러 왔어! 나를 보고 비웃으려고?”

방금 전 한안의 신분을 알지 못했을 때는 땅에 무릎을 꿇고 고통스럽게 애걸했고 심지어 자신의 몸을 팔아넘기려고까지 했다. 그러나 한안의 신분을 알고 나서는 극렬하게 반항하기 시작했다. 조롱과 불쾌감이 가득 담긴 눈빛을 보니 이전에 거만하게 남을 능멸하던 미 이낭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이것은 어쩌면 대저택 안 여인의 병폐인지도 모른다. 이전보다 못하게 지내더라도 자신보다 잘 지내는 적 앞에서는 허세를 부리고 싶어지는 것. 이것은 일종의 병이며 치료할 수가 없는 것이리라. 한안은 고요히 그녀를 보았다.

“미 이낭, 1년 만이네요. 늙었군요.”

상처 입은 미 이낭의 가슴이 아파 왔다. 미 이낭 같은 여인에게 미모는 가장 가치가 있는 부분이었다. 미 이낭은 자신의 미모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 더더욱 그랬다.

그녀는 얼굴을 들어 올리고 한안을 보았다. 자신에게 괴롭힘을 당해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고, 장부의 하찮은 여종이든 사내종이든 함부로 때리고 욕할 수 있었던 4소저가 지금은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설령 그녀가 지금은 그저 야행복(夜行衣) 하나를 입고 있을 뿐이라 해도 고귀한 기질은 자연스럽게 풍겨 나왔다. 그녀는 자신보다 잘 지내고 있는 게 아니라 아주 많이 잘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한안은 분명 그녀보다 못한 년인데! 그 평범하고 특별한 데 없던 작은 얼굴에는 꽃이 피어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얼굴로 변해 있었다. 피부는 희고 부드러워 마치 새로 피어난 수련 같았다. 그녀는 자신보다 나이도 아주 많이 어렸다. 그것이 미 이낭은 질투가 났다.

미 이낭이 돌연 하하 큰 소리로 웃었다.

“하지만 그럼 또 어때? 네 나이가 어리다 해도 버려진 여인이 됐는데! 현청왕이 널 버리고 서융 공주를 왕비로 맞는다더라! 장한안, 넌 아무것도 아니야!”

탁칠이 잠깐 멈칫하더니 즉각 분노하여 칼을 뽑았다. 보자 보자 하니 여인의 말이 너무 악독했던 것이다. 한안은 손을 들어 그의 움직임을 저지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미 이낭, 소식이 이렇게나 빠르네요. 옥졸과 정분을 나눌 때 옥졸이 당신에게 알려준 것은 아니겠죠?”

미 이낭은 순간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음속에 치욕이 가득 찼다. 맞다. 한안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이미 감옥 안의 창녀가 되었다. 여기서 일하는 놈이면 누구나 다 그녀를 가지고 놀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녀도 반항했지만 나중에는 익숙해졌다. 관차들은 기분이 좋을 때면 그녀에게 사소한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한안에게 이런 말을 들으니 미 이낭은 벌건 대낮에 남에게 옷이 다 벗겨진 듯한 무력감이 들었다. 입속의 말들을 순간 내놓을 수가 없었다.

탁칠은 마음속으로 한안에게 ‘대단하다’를 외쳤다. 이렇게 명쾌한 반격을 망설임 없이 던져야 한안이라 할 것이다. 지금 심사가 어지러울 텐데도 저리 냉정하게 반격하다니. 정말 무섭군. 늘 한눈에 상대방의 약점을 발견한 후, 한 발로 다른 사람의 상처를 짓밟았다. 또 그 위에 소금을 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무시무시하고 또 사랑스러웠다.

한안은 탁칠의 생각 따위 알 바 아니었다. 미 이낭은 점점 냉정을 찾았다. 그녀가 비웃으며 말했다.

“장한안, 네가 오늘 온 것은 나의 이런 낭패한 모습을 보기 위한 것은 아니겠지. 만약 너의 목적이 그것이었다면 이제 목적을 달성했겠네. 언제 갈 거지?”

“미 이낭, 뭘 그리 조급해하나요?”

한안은 몸을 쪼그리고 앉아 철책을 사이에 두고 미 이낭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녀의 눈빛은 평온하고 확고했지만, 칼날 같은 위협도 담겨 있었다.

“내가 오늘 온 것은 그저 미 이낭과 거래를 하고 싶어서예요.”

“내가 왜 너와 거래를 해야 하지?”

미 이낭이 차갑게 웃었다.

“간단해요. 당신은 자유를 필요로 하니까.”

한안이 말했다.

자유? 미 이낭은 멍해졌다. 그러더니 갑자기 한안을 향해 소리쳤다.

“나는 네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어. 자유라니. 농담하는 거야?”

그녀의 말투는 냉담하고 자조적이며 불신으로 가득차 있었지만, 눈빛에는 작은 희망의 빛이 담겨 있었다. 한안은 미 이낭의 눈빛에서 그 한 점을 포착했다. 미 이낭은 자유를 갈망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기만 하면 협의는 가능했다. 그녀는 미 이낭과 시선을 나란히 맞추고 유혹하듯 말했다.

“미 이낭이 감옥에서 1년 남짓 머물더니 여기 생활이 익숙해진 건 아니겠죠? 나는 아직 미 이낭이 바깥세상을 보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는데.”

“너의 말은 무슨 뜻이지?”

미 이낭은 웃지 않고 다급하게 물었다. 말을 입에서 내뱉자마자 그녀는 바로 후회했다. 자신은 한안 앞에서 이렇게 다급한 태도를 드러내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한안의 말은 실로 너무나 유혹적이었다. 한안의 말을 들으니 자신이 감옥에서 나갈 방법이 있는 것 같았다.

감옥에서 보내는 날은 영원하고 무한한 악몽 같았다. 수십 년을 살아오면서 하루아침에 이 지경으로 전락할 줄은 짐작도 못 한 건 당연했다. 배불리 먹지 못하는 건 당연하고 세상에서 가장 낮고 천하며 추악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무수한 낯선 사내들의 노리개가 되었고 자유도 존엄도 없었다. 더 무서운 것은 이런 날들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거라는 점이었다. 자신이 죽는 그 날까지.

“미 이낭은 설마 바깥의 햇빛을 보러 가고 싶지 않은 건가요? 종일 감옥 안에서 이렇게 어둡고 축축한 곳에 있으니 미 이낭은 꽃이 얼마나 많이 피었는지도 모르죠? 저잣거리가 얼마나 예쁜지도 모르고. 맞다.”

한안이 옅게 웃었다.

“미 이낭은 분명 오랫동안 예쁜 옷을 입어본 적도 없겠네요. 이렇게 미인인데 지금은 정말로 쯧쯧…….”

한안은 말을 잇지 않았다. 침착하고 느긋하게 웃는 얼굴을 한 채, 미 이낭을 아래위로 훑고 있었다.

미 이낭은 분노하여 한안을 노려보았다.

“사람을 너무 업신여기지 마라.”

끝없이 굶주린 사람 앞에 맛좋은 성찬을 차려놓고 손도 대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았다. 아니, 자신의 존엄을 팔아넘겨야 이 성찬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한안의 말은 미 이낭 마음속 가장 깊은 갈망을 불러일으켰다.

한안이 그녀의 욕망을 부추기는 것은 오히려 그녀의 자존심 전부를 발아래 짓밟는 것과 같았다. 미 이낭에게는 이제 깊디깊은 좌절감과 패배감만이 남았다.

“어떻게 남을 업신여긴다고 말할 수 있어요? 이 거래를 잘 마치기만 하면 방금 전에 말한 모든 것을 미 이낭은 다 얻을 수 있어요. 나는 당신을 속이는 게 아니에요. 나는 내가 말한 것은 반드시 지켜요.”

“지금 내가 감옥에 있는데 네가 어떻게 나를 구해낼 수 있지?”

미 이낭이 물었다. 그녀는 한안을 믿지 않았다. 적수이긴 하지만 한안에 대해 꺼리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깊었다. 자신이 바로 이 침착하고 어린 아가씨 손에 꺾였기 때문이다. 어린 아가씨에게 그런 계략이 있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자신이 오늘날 처한 모든 상황은 전부 한안이 준 것이었다. 한안이 이번에 거래를 하러 왔다는 것은 자기 수중에 이용 가치가 있는 정보가 있다는 말이었다. 비록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자유와 바꿀 수만 있다면 자신이 이득이었다. 그러나 한안이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간단해요. 미 이낭이 주위를 둘러봐요. 지금 우리를 빼고는 한 사람도 없죠. 만약 내가 당신을 꺼내려 한다면 식은 죽 먹기라 할 수 있죠. 당신을 구해낸 후 당신이 영원히 경성에 한 발도 들이지 않기만 하면 안정된 날들을 보낼 수 있을 거예요. 비록 크게 부귀하지는 않겠지만 지금보다는 훨씬 좋겠죠. 미 이낭의 자색 정도면 어쩌면 노야보다 더 좋은 의지처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죠.”

미 이낭은 한안을 주시했다. 한안도 전혀 흔들림 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미 이낭은 오히려 제 발이 저렸다. 한안의 능력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확실히 지금 자신을 구해내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 밥은 없는 법이다. 한안의 조건이 이처럼 후하니 그럼 그녀가 꺼내 들 요구는 무엇일까?

“4소저는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 거지?”

미 이낭은 얼굴의 망설임을 거두어들이고 정색을 하고 물었다. 그 순간 그녀는 마음속으로 이미 결심을 굳혔다. 이 추악한 곳을 떠날 수만 있다면 어디든 희망은 있다. 한안에게 그 능력이 있는 이상, 자신은 기회를 잡아야 한다. 이후의 일은 천천히 하자. 급해 할 필요는 없다.

“내 친부는 장사양이 아니죠?”

한안이 말했다.

미 이낭은 놀랐다. 그녀는 자신의 기분을 감추어야 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여 주씨 자매에 비해 많이 모자랐다. 미 이낭의 경악한 표정이 얼굴 위에 떠올랐고 한안의 눈에 그 표정이 모두 거두어졌다. 미 이낭의 표정에 이미 그 많은 일이 증명되는 듯했다.

“너…….”

미 이낭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좀 놀랍고 두려운 얼굴로 한안을 보고 있었다.

“미 이낭은 응당 내 친부가 누구인지 알겠죠? 그리고 진정한 내 신분이 도대체 무엇인지도?”

한안은 서두르지도 여유 부리지도 않고 말했다.

탁칠도 놀랐다. 한안이 탁칠 자신이 있는데도 아무 거리낌 없이 미 이낭에게 바로 질문을 던지리라 짐작도 못했던 것이다.

한안은 이 일에 대해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탁칠이 그녀의 출신을 안들 또 어떨까 싶었다. 탁칠은 대종 조정 사람이 아니니 중간에 그리 많은 이해관계도 없으리라.

미 이낭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몰라.”

한안은 그녀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갈 기회를 전혀 주지 않고 말했다.

“그렇다면 거래도 성립되지 않겠네요. 우리 가죠.”

말을 마치고 바로 몸을 돌려서 떠나려 했다.

“기다려!”

미 이낭이 서둘러 말했다. 한안이 물었을 때 미 이낭이 잠시 주저했던 것은 이 일이 너무나 중대해서 절대 자신이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이 비밀을 여러 해 동안 계속해서 지켜온 것은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이 말썽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지금 이 비밀을 자유와 바꾸려 하니 둘 중 무엇을 골라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미 이낭은 좀 더 고려해 볼 시간을 벌고 싶었다. 한안의 마음이 조급하면 거래 조건을 더 높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녀가 이렇게 말끔히 포기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미 이낭이 예상한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미 이낭은 뭐라도 준비하기 전에 서둘러 한안을 불러 세웠다.

한안은 미 이낭을 등지고서 옅게 웃었다. 미 이낭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한안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미 이낭은 수중의 정보를 이용하여 자신을 위협하고 우세를 점하려는 것에 불과했지만 그것은 엄청난 착오였다. 한안은 자신이 이 거래에서 약세를 취할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약해지면 상대방은 바로 강해질 것이며 결국 자신이 모든 사정을 다 알아내는 데 불리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미 이낭은 지금 자신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그녀의 유일한 희망이니 미 이낭은 쉽게 놓칠 리 없었다. 미 이낭의 약점을 잡고 있는데 그녀가 어찌 걸려들지 않을 수 있을까?

탁칠은 옆에서 혀를 내두르며 보고 있었다. 한안이 만약 장사를 한다면 아마 바람이 물결을 일으키듯이 재물 운이 번창할 것이다. 그녀의 영리한 두뇌는 상대방 마음속의 약점을 서서히 위협하여 상대방이 깨닫지도 못하게 한 뒤 오히려 상대방 스스로가 큰 이익을 본다고 생각하게 만들 정도였다.

한안은 몸을 돌리고 의혹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미 이낭, 당신이 모른다고 했으니 이 거래는 시작도 할 수 없는데 당신은 나를 뭐 하러 부른 거죠? 혹시 아는 게 있는 건가요? 그럼 당신은 왜 그걸 말하지 않았죠?”

미 이낭은 자신이 더 이상 조정할 여지가 없으며 한안과 흥정을 시도하는 것은 비이성적인 일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아이는 자신의 명운을 완전히 손바닥 안에 가지고 놀고 있었다. 이는 달갑지도 않았고 미친 듯이 분노가 치밀었지만, 미래의 희망을 스스로 막을 수는 없었다.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었어. 4소저, 난 이 일에 대해 알고 있어.”

“일을 알고 있다면 거래가 되겠군요.”

한안은 철책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시간은 아직 많아요. 이 옥졸들은 세 시진은 있어야 깨어날 거예요. 미 이낭은 천천히 이야기해도 돼요.”

“내가 이야기하는 거야 할 수 있지.”

미 이냥이 한안을 응시했다.

“너는 내가 나갈 수 있다는 걸 확실히 보장해 줘야 해. 게다가 앞으로 더 잘 지낼 수도 있게 해줘야 하고.”

그녀는 아직도 마음을 놓지 못했다. 이 행복이 너무도 갑작스럽게 와서 믿을 수가 없는 것인지도 몰랐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나는 당신에게 은자 한 몫을 줄 거예요. 은자가 많지는 않지만, 당신이 몇 년 동안은 먹고 입을 걱정 없이 생활하기에 충분할 거예요.”

“4소저는 과연 호쾌하군.”

미 이낭이 웃었다. 웃음이 더해지자 미 이낭에게서는 예전의 꽃 같던 미모의 그림자를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미 이낭이 말한 것이 가치가 있어야 가능한 거예요.”

한안은 느릿하게 말했다.

“만약 당신이 내게 거짓말을 한다면 그럼 이 거래는 취소예요. 미 이낭은 분명 알고 있을 거예요.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이 남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 분별하는 거라는 걸.”

그녀는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압박을 가했다. 미 이낭의 마음속에 당황과 혼란이 일면서 거짓말을 해볼까 하는 마지막 한 가닥의 나쁜 생각마저 사라지게 했다. 미 이낭은 천천히 입을 열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말했다.

한안은 경천동지할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되었다. 그 비밀은 그녀의 일생에 관계된 것이었고 나아가 그녀의 미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한안의 모친, 왕씨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아름다운 소녀였다. 당시 경성에서 뛰어난 재주로 명성을 얻은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아름다운 혼인 적령기의 여자였다. 가세도 괜찮아서 청혼하는 사람들이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그러나 왕씨의 마음속에는 줄곧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 사람이 바로 그녀의 청매죽마 동후왕이었다.

동후왕은 성격이 안하무인이었고 상식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노(老) 동후왕도 그를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동후왕의 재주가 끝이 없고 정치적인 일에 꽤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서 선황은 그를 대단히 아꼈다. 더구나 노 동후왕과 선황이 전쟁터에서 함께 강산을 이룬 형제의 정이 있었기에 선황은 동후왕의 모든 행동에 대해 줄곧 보고도 못 본 척 하곤 했다.

동후왕은 많은 일을 사람들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했지만 그중에서 세상을 가장 놀라게 한 일은 아마도 강호 여자를 왕비로 맞은 것일 것이다. 당시의 조정과 강호는 서로 대립하고 있던 때였다. 동후왕의 가세가 워낙 우월하여 동후왕의 배필은 인품이나 신분이 출중해야 한다고 여겼다. 당시의 왕씨도 가세가 괜찮았지만 모두가 동후왕은 분명 공주를 아내로 맞을 거라고 하는 말에 왕씨는 자신의 연심을 묵묵히 마음속에만 담아 두었다. 그런데 동후왕이 생각지도 못하게 신분도 불분명한 강호의 여자를 아내로 맞이한 것이다.

강호 여자의 출신은 수수께끼였지만 동후왕은 그녀를 이렇게 불렀다.

소교.

동후왕과 소교가 성혼할 때, 노 동후왕과 선황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이 모두 반대했다. 선황은 자신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동후왕은 단호하게 거절했고 더구나 천하인 앞에서 맹세했다. 이번 생에는 오직 소교 하나만 아내로 맞이하여 첩을 받아들이지 않고 통방을 거두지 않겠다고.

여기까지 말했을 때, 미 이낭이 비웃으며 멸시하듯 말했다.

“그러나 입에 발린 번드르르한 말일 뿐이지. 남자의 맹세가 어찌 진짜일 수 있겠어?”

미 이낭은 말을 마치고 의미심장하게 한안을 보았다. 한안도 부운석에게 그런 맹세를 시킨 사람이었다. 이것 때문에 경성의 여인들이 한안을 질투하면서도 동시에 흠모했다. 그런데 지금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 보란 말이다. 현청왕부에서 내쫓기고 부운석이 다른 나라의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을 보지 않았나?

한안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으나 마음속으로 감격한 상태였다. 미 이낭이 남자를 믿지 못하는 것과 달리 한안은 감히 이런 맹세를 하는 남자라면 분명 정과 의리를 중시할 거라고 느꼈다. 세속 예법에 구애되지 않고 삼처사첩을 들이는 관습을 제쳐놓은 것을 보면 동후왕은 분명 그 소교라는 이름의 아가씨를 대단히 사랑했을 것이다.

한안이 자기가 바라던 상심하는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보고 미 이낭은 실망했다. 잠깐 멈추었던 말은 계속되었다.

동후왕과 강호 여자가 은애한다는 것을 당시 온 경성 사람이 모두 알았다. 동후왕이 세상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안하무인이긴 했지만 영준하고 멋스러운 미청년이었기에 모든 여자가 소교를 질투했다. 왕씨도 당연히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랐으므로 묵묵히 그들의 행복을 축원했다.

동후왕과 소교가 성혼하고 1년 후, 딸이 하나 태어났다. 이 아이가 아직 강보에 있을 때, 동후왕 일가는 멸문을 당했다. 당시 동후왕부의 몇백 목숨 중에 화를 피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모두 이것은 누군가의 복수라고 말했다. 동후왕의 어린 딸도 재난에서 달아날 수 없었고 비명횡사했다.

당시의 왕씨는 충격이 너무나도 커서 동후왕을 따라 목숨을 끊으려고까지 했다. 다행히 왕씨의 가족이 전심전력으로 그녀를 타일러, 그녀는 서서히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왕씨는 장사양에게 시집을 갔다.

당시의 장사양은 벼슬길에서 무언가를 이룬 것이 정말 얼마 되지 않았다. 왕씨를 따르며 구혼하던 명문 공자들에 비하면 별것도 아닌 셈이었다. 많은 사람의 예상을 넘어선 혼사였다. 초기의 장사양은 왕씨에게 정성을 다했다. 어리고 부드러운 미모의 아가씨인 데다가 벼슬길에서 자신을 도울 수 있었으니 장사양의 성격으로 볼 때 당연히 왕씨의 호감을 사려 했으리라. 오래지 않아 그녀는 딸을 하나 낳았고 그 아이가 바로 한안이었다.

한안이 태어난 후, 왕씨를 자상하게 보살피던 장사양은 갑자기 냉담하게 변했다. 막 아이를 낳은 자신의 아내에게 아무 까닭 없이 냉담해진 것은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는 것이라고 점차 소문이 퍼져갔다. 한안은 왕씨가 남과 간통하여 태어난 사생아이고 한안은 장사양의 딸이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장사양이 어찌 그렇게 한안에게 냉담하며 부친이라면 응당 있어야 하는 모습이 없겠는가, 하는 말들이 공공연하게 퍼져나갔다.

미 이낭은 말을 하다 멈추었다 하면서 줄곧 한안의 표정을 살폈다. 한안은 시종일관 평온한 표정이었다. ‘왕씨가 간통했다’는 말을 했을 때조차 냉담하고 다 안다는 듯했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 그저 미 이낭 자신이 다시 한번 말하는 것을 듣고 있는 것뿐인 듯했다. 미 이낭은 켕기는 마음에 안절부절못했다.

사실 부중 하인의 말은 단지 유언비어일 뿐이었다. 깊은 규방에 있는 부인네는 평소 자기 부군 외에는 남자의 얼굴을 볼 기회조차 몇 번 없었다. 더구나 왕씨는 평온한 것을 좋아하여 경성 태태(太太: 관리의 처에 대한 통칭)들과 모여 이야기하는 것도 자주 하지 않았고 밖으로 나갈 기회도 없었으니 남과 간통할 리 없었다.

“사실 하인들의 추측은 틀렸어. 너는 확실히 동후왕의 딸이야. 그러나 동후왕과 왕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 아니라 소교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지.”

미 이낭이 말했다.

마침내 자신이 추측하던 일을 미 이낭의 입으로 사실임이 증명되었다. 한안은 자신의 심정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상상했던 것 같은 흥분은 전혀 없고 평온하면서도 무언가 잃은 느낌이었다. 유감스러웠다. 자신에게 몹시도 자애로웠던 그 사람은 자신의 친어머니가 아니었다. 자신의 친부모는 얼굴 한 번 볼 기회도 없이 이미 하늘과 땅으로 영원히 떨어진 것이다.

미 이낭이 한창 장사양의 총애를 받던 시절, 장사양은 정분을 나누고 나서는 조심성 없이 이런저런 얘기를 하곤 했다. 예를 들면 장사양은 왕씨와 접촉한 적이 없다든가 하는 것. 그럼 왕씨는 어떻게 아무 이유도 없이 회임할 수 있었을까. 나중에 장사양은 술을 마시고 자신이 동후왕을 대신해 딸을 키우고 있다고 말했다. 왕씨는 자기 딸도 아닌데 그렇게 단단히 감쌀 정도로 멍청이고 천한 년이 오직 동후왕만 안다고. 미 이낭은 한안이 동후왕과 소교의 아이가 아닐까 대담하게 추측했고 나중에 장사양은 그 추측이 맞다고 했다.

장사양이 어머니와 접촉한 적도 없다니. 한안은 크게 놀랐다. 그럼 어머니는 반평생, 거의 생과부처럼 수절한 것이다. 한안은 쓰라린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왕씨는 분명 동후왕을 깊이 사랑한 것이다. 그 때문에 아예 자신의 일생을 희생하고 그를 대신해 아이를 정성 들여 기른 것이다. 그녀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그저 내어주기만 했다.

자신이 태어난 그 날, 어머니의 모든 측근 여종이 각종 이유를 구실로 부에서 내쫓긴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이제 보니 비밀을 지키려 그랬던 것이었다.

“말하고 보니 이상한데 네가 태어난 후부터 노야의 벼슬길이 한층 더 순탄해졌지. 네가 노야의 아이는 아니지만 어쩌면 그를 보우했던 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가 지금은 너 때문에 관직이 강등되었으니 업보를 치른 셈이네.”

미 이낭이 쓴웃음을 지으며 자조적으로 말했다.

한안은 미 이낭이 그렇게 순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장사양이 자신이 태어난 후부터 관운이 형통한 것은 보우 따위 때문이 아니었다. 한안에게는 그런 능력은 없었다. 이 일은 본래 반드시 그렇게 될 일이었던 것이다. 관운 형통. 장사양은 자신을 장부에서 기르는 것에 대한 대가로 포상을 얻었던 것이다.

한안이 물었다.

“노야는 어째서 나를 장부에서 기른 거죠?”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자신의 혈육도 아니고 심지어 자기 아내의 혈육도 아닌 아이, 한안은 그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셈이었다. 장사양이 측은지심이 들어서 자신을 장부에서 길렀을 리는 없다. 분명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랬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한안을 장부에서 기르라고 요구한 것이다.

한안이 지금 알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미 이낭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가 지금까지 말한 적이 없어. 그냥 4소저가 부중에 있기만 하면 번거로운 일이 생길 리 없다고만 했지.”

한안은 이 일이 태후와 관계가 있다고 단정할 수 있었다. 자신을 장부에서 기르게 한 것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태후의 눈꺼풀 아래 놓아두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것은 일종의 감시였다. 자신에게 만약 무슨 움직임이 있다면 태후가 즉각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주변 곳곳에 내탐자가 있었다. 그러면 태후는 당초에 어째서 자신을 아예 죽여버리지 않은 걸까? 자신을 죽였다면 더 간단하지 않나? 모든 것이 처리하기 쉽게 바뀌었을 것이다.

자신을 죽이려 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감시하려 했다? 태후가 설마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나? 그렇다면 그녀는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한 걸까?

한안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모르는 사이에 시간은 이미 두 시진이나 지났다. 조금 더 있으면 날이 바로 밝을 것이다. 탁칠이 옆에서 주의를 환기시켰고, 한안은 비로소 자신이 여기에서 오래 머물렀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바로 일어서서 앉아 있느라 마비된 두 다리를 문질렀다.

미 이낭은 한안이 일어서는 것을 보고 서둘러 따라서 일어났다. 두 손으로 철책을 잡고 다급하게 물었다.

“내가 아는 것은 전부 너에게 말했으니까 지금 나를 데리고 갈 수 있겠지?”

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럴 수 있죠.”

그녀는 옅게 웃고 탁칠에게 옥문을 열라는 의사표시를 했다. 탁칠도 웃었고 미 이낭은 거의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그 환호성이 막 반도 나오지 않았을 때, 뒤에 있는 다른 검은 그림자에게 몸을 낚아 채였다.

“천한 년! 달아날 생각 말아!”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뜻밖에 주씨였다.

한안은 탁칠을 한 번 보았다. 탁칠이 손 빠르게 주씨의 혼수상태를 푼 것이다. 옥 속에 갇힌 옛 친구는 미 이낭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당연히 주씨도 있었다. 주씨는 깨어나자마자 앞에 서 있는 두 흑의인 중 하나가 미 이낭에게 밖으로 데려 가주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주씨는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다. 그녀는 옥 안에서 받은 형벌로 인해 다시는 두 다리로 설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이 악몽에서 달아날 방법이 없으니 미 이낭 혼자 달아나게 할 수 없었다. 설령 지옥에 떨어진다 해도 다른 한 사람을 희생물로 끌고 가야 했다. 그것이 인간 본성의 이기심이고, 본능이었다. 모든 사람이 남을 위해 희생하고 남을 도와 일을 이루게 해주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한안과 탁칠은 이미 복면을 끌어올려 얼굴을 가린 후였다. 주씨는 한안의 얼굴을 볼 수 없으니 흑의인들을 미 이낭이 청해서 온 조력자라고 여겼다. 그녀는 죽일 듯 미 이낭의 손을 물고 한 팔로는 그녀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리고 큰 소리로 마른 울음소리를 냈다. 영락없이 실성한 것 같았다. 미 이낭은 주씨의 팔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눈을 커다랗게 뜨고 한안을 쳐다보았다.

“당신의 친구가 그렇게 당신이 남아 있기를 희망하네요. 시간이 없으니 우리도 어찌할 힘이 없어요. 다시 봐요.”

한안이 말을 마치자마자 탁칠이 바로 한안을 안고 몸을 날려 떠나갔다.

미 이낭은 멍하니 눈앞의 텅 빈 곳을 바라보며 자신을 물어뜯고 있는 주씨를 잠시 잊었다. 그녀의 목구멍 속에서 모호한 울부짖음이 새어 나왔다. 자신은 자유를 얻을 마지막 기회를 놓친 것이다. 두 눈에 순간 핏발이 섰다. 그녀는 몸을 돌려 죽일 듯 주씨를 노려보았다. 주씨는 자신을 노려보는 미 이낭의 눈에 두려움이 일면서 몸을 떨었다. 미 이낭은 미친개처럼 달려들었고 주씨와 뒤엉켰다.

감옥 밖, 미 이낭과 주씨의 처참한 비명소리는 이미 들리지 않았다. 탁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한안을 보며 놀리듯 말했다.

“네가 이렇게 발뺌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내가 만약 그 이낭이었다면 지금 너를 삼켜버리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거야.”

한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웃었다. 미 이낭에 대해서라면 처음부터 풀려나게 해줄 생각이 없었다. 미 이낭 같은 사람은 오늘은 장사양의 비밀을 팔아넘기며 배반할 수 있지만, 내일은 바로 자신을 배반할 수 있었다. 그녀가 한안 자신의 비밀을 어떤 대가를 받고 거래하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한안은 그런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없었다. 악덕 상인이 되었다고 여기면 그뿐이었다.

한안은 바람 속에서 오랫동안 침묵하며 서 있었다. 탁칠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

“너 언제까지 서 있으려고?”

한안은 그를 보지 않은 채 물었다.

“탁칠, 당신은 왜 대종까지 온 거죠?”

탁칠은 순간 당황했다. 한안이 갑자기 이런 화제로 전환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살짝 멈칫한 탁칠은 웃으며 대답했다.

“추살을 당해서 대종까지 피해 왔지. 목숨을 건지려고.”

“당신은 결코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상갓집 개가 아니에요.”

한안이 냉랭하게 말했다.

“당신은 한 마리 이리죠. 추살 당했으면 반격해야죠. 당신이 반격할 지점은 대종이고요. 말해 봐요. 서융 그쪽에서 당신의 지위를 찬탈한 사람이 대종 조정의 사람과 결탁해서는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거죠?”

탁칠은 완전히 멍해져서 한안을 바라보기만 했다. 한안과 미 이낭의 대화를 옆에서 보면서 탁칠은 한안이 꽤 타격을 받았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그녀는 아주 짧은 시간 내에, 이전의 예리한 모습을 회복했다. 게다가 이런 일을 이렇게 무미건조하게 말하는 것을 보니 한안은 자신의 일을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미래에 발생할 모든 것을 예견할 수 있기에 머릿속에 있는 것이 현실에 나타났을 때 한 걸음 물러서 냉랭하게 지켜볼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한안은 그가 말이 없는 것을 보고는 몸을 돌려 낯선 듯 익숙한 태도로 물었다.

“당신은 부운석을 처리하려는 거죠, 그렇죠?”

탁칠에게 익숙한 한안의 모습이었다. 그가 한안을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그를 협박했을 때, 한안은 바로 이런 태도였다. 편하고 평온해 보이지만 탁칠 자신과 천 리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경계하고 방비하며 언제든 자신을 공격할 수 있는 낯선 사람. 그런 사람을 마주하고 있는 같았다. 탁칠은 이런 한안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렇게 생소한 태도는 그와 한안이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았고 영원히 그녀에게 가까이 갈 방법이 없다는 느낌이 들게 했다. 탁칠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조금 위험스레 접근하며 말했다.

“그럼 또 어때?”

“우리 거래하죠.”

한안은 그의 태도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채 담담하게 말했다.

“부운석을 건드리지 말아요. 그러면 당신이 하려는 일, 내가 협력해줄 수 있어요.”

탁칠은 화내지 않고 오히려 웃었다. 그는 한안의 이런 모습이 보기 싫었다. 부운석 때문에 긴장하고 걱정하는 모습. 부운석이 한안을 어떻게 대했는지, 눈이 있는 사람이면 모두 다 알았다. 탁칠은 한안 같은 여자가 짧은 시간 내에 자신을 사랑하리라고는 절대 생각지 않았다. 만약 한안이 정말 그런 사람이라면 탁칠도 그녀에게 각별한 애정을 보였을 리 없었다. 요 며칠, 탁칠은 한안과 자신이 갈수록 친밀해지고 있다고 느꼈고 부운석도 점차 한안의 주변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알았다. 몰래 기뻐하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이었다.

그러나 미 이낭의 한마디 말에 한안은 또 이렇게 부운석에게 빠져들었다. 도대체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탁칠은 정말로 화가 났다. 그의 인생에 그에게 아첨하는 여자만 있었지 지금까지 이처럼 냉대하는 여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는 스스로가 마음이 넓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했지만 더는 참을 수 없어 분노가 터져 나오려 했다.

그러나 그가 눈을 돌리자 보이는 것은 한안의 차갑고 침착한 눈빛이었다. 그녀는 그저 자신을 담담하게 보고 있었는데 마치 자신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한안의 마음속에 비치는 그 그림자는 추측할 필요도 없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탁칠은 아무런 이유 없이 좌절감과 패배감에 빠져버렸다. 그는 차갑게 웃었다.

“어떻게?”

한안은 그를 보았다.

“서융의 주인이 대종 조정의 사람과 결탁하려는 것은 세상을 뒤집으려는 거죠. 탁칠, 당신은 분명 알 거예요. 서융과 결탁한 사람이 7황자와 태후라는 걸.”

탁칠은 가타부타 대답이 없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한안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든 탁칠은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한안은 실로 너무도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분명 규방에서 밖으로 나오지 않는 평범한 소저인데 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정보는 누구보다 빨랐다. 귀와 눈이 총명하다는 말은 그녀를 가리키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절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여자가 정치에 대해 일종의 무서운 직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둘은 지금의 황상을 전복시키려 해요. 내 추측에 따르면 서융은 분명 그들이 내건 어떤 조건을 보상으로 받기로 하고 승낙했겠죠. 예를 들면 영토 분할 같은 거.”

태후의 야심은 이미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라고 봐야 했다. 그녀는 처음부터 황상과 부운석 두 형제를 처리하려 했다. 혈육의 정이라는 관념이 없는 7황자와 태후가 야합하고 거기에 다시 서융인과 결탁하여 황상 형제 둘을 처리하려는 것이다. 태후와 7황자 측의 병력이 충분하지 않으니 당연히 서융인의 병력을 빌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서융 병력으로 조정과 대종 전체를 진압하려 했지만, 이것은 도적을 제집으로 끌어들이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호랑이와 함께 호랑이 가죽을 어떻게 벗길지 논의하는 것과 같아서 근본적인 이해관계가 상충하여 협상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서융인은 교활한 속임수와 계약으로 유명했고 야심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일단 서융인의 병사와 군대가 대종의 경내에 발을 들이면 대종은 분명 피비린내 나는 풍우에 꺾일 것이고 백성들은 어떤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태후와 7황자는 그때 가서야 자초한 화를 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영지 분할 정도로 답례를 받는 것에 서융인이 만족할 리 없으니까. 그들은 다른 것으로 대체하려 할 것이다. 그들의 목적은 대종 전체였다.

탁칠은 계략이 있었다. 그가 하려는 것은 산 위에 앉아 두 호랑이가 싸우는 것을 지켜보다가 최후에는 어부지리를 얻으려는 것이었다. 한안은 탁칠이 분명 대종의 비밀스러운 곳에 약간의 군대를 안배해 놓았을 거라고 추측했다. 아마 그가 하려는 것은 서융인이 대종을 멸한 후에 다시 서융의 국주와 일전을 벌이는 것일 거다.

그러나 그 이전에 대종은 이미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부운석도 없을 것이다. 한안은 이 일이 발생하도록 둘 수 없었다. 서융인과 태후의 음모 전체를 안 후, 예견할 수 있는 미래는 너무도 무서웠다. 그녀는 앉아서 죽기를 기다릴 수 없었다.

“네 추측이 맞아.”

탁칠은 좀 복잡한 시선으로 한안을 보았다. 그가 생각한 것처럼 한안의 정치에 대한 직감은 비할 데 없이 공포스러운 판단력이 있었다. 그녀의 이런 판단은 자신의 목적과 계획을 돌아볼 여지를 남기지 않고 말하는 것이라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설령 자신의 심복이었다 해도 탁칠은 조금도 사정을 봐주지 않고 그를 죽여 버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위에서 군림하는 사람은 자신의 심사를 다른 사람이 추측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대가 한안이라면 탁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어쩌면 한안은 바로 자신의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아무 거리낌 없이 솔직하게 말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자신은 늘 오만하게 살아왔는데 이 힘없고 약해 보이는 여자에게는 늘 졌다.

“어떻게 나와 합작할 거지?”

한안이 말했다.

“서융 국주가 그렇게 날뛸 수 있는 까닭은 대종 태후 그녀들의 세력에 일부분 이유가 있죠. 바로 두 세력이 결맹을 했기 때문이에요. 그들이 서로 이용하니 서융 국주의 힘은 무형 중에 더 늘어난 거죠. 이것은 당신 입장에서 결코 좋은 일이 아니죠. 더욱이 서융 국주가 정말 대종을 먹어버린다면 그때 당신은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할 거예요.”

탁칠은 냉소했다.

“내가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고?”

그는 비록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말했지만 그러나 한안의 말이 사실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은 확실히 실력이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그 위치에 앉아 있는 사람은 자신이지 그가 아니었을 것이다. 만약 그 사람이 대종을 삼키고 자신이 저항할 수 없는 지경이 되도록 세력이 커질 때까지 기다린다면 정말 퇴로가 없을 것이다.

그는 고개를 들고 한안을 보았다.

“넌 방법이 있어?”

그러나 한편으로는 의심이 들었다. 한안이 비록 정치적 일에 대해 민감하다지만 진짜 칼과 창으로 싸우는 전쟁과 관련되면 아마 아무런 방법이 없을 것이다.

한안은 옅게 웃었다.

“하나하나 격파해야죠. 태후의 세력을 때려 부수면 서융 국주는 연맹이 없어지니 당신이 처리하기에 훨씬 간단할 테죠.”

탁칠은 멍해졌다. 이 방법은 그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다. 한안이 무슨 묘책을 말할 거라 여겼는데 그저 가장 평범한 방법일 뿐이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결코 그저 서융만이 아니었다. 그의 본뜻은 대종도 먹는 것이었다. 한안의 말 대로라면 자신은 대종에서 한 점 이득도 챙기지 못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너 잊어먹은 거야? 나는 결코 서융만으로 만족할 생각이 없어. 대종은 나도 원하는 거야.”

“입을 너무 크게 벌렸다가 음식물이 목구멍을 막게 되는 것을 조심해야죠. 당신, 당신이 삼킬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해요?”

한안은 그를 보며 말했다.

“대종의 태후는 결코 당신 상상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요. 그렇지 않으면 부군이 이미 죽은 황궁 안에서 자신의 혈육도 없이 지금의 자리에 안정적으로 앉아 있을 수 있었을까요? 당신은 그녀가 골이 빈 사람이라고 생각하나요?”

탁칠은 고개를 저었다.

“황궁 안에 뭐가 있든 중요하지 않아. 태후의 심계가 나의 야심보다 대단하지는 않을 거야.”

그가 말했다.

“부귀는 위험 속에서 얻어지는 거지.”

그는 과감히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이었다. 권력에 대한 무한한 갈망도 마음속에 있었다. 왜냐하면 하늘 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어야 비로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할 수 있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한 걸음이 비록 험악하다 해도 그 속의 부귀들은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이 땅을 원했다.

한안은 단호한 탁칠의 얼굴을 보며 그가 자신의 말에 결코 넘어가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녀는 오래도록 침묵하다가 비로소 말했다.

“우리는 친구 아닌가요? 당신은 당신 친구의 나라를 멸망시키고서 내가 기뻐할 거라고 생각해요?”

탁칠은 멍해졌다. 한안이 그들이 친구라고 말했을 때, 탁칠은 한순간 기뻤다. 비록 한안의 그 말이 진실한 것이 아니며, 어쩌면 불분명한 목적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좀 난처했다. 한안이 상심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잠시 멈추었다가 말했다.

“내가 너를 다치게 할 리 없잖아. 너는 나와 함께 가자. 내가 가장 좋은 궁전에서 살게 해주고 가장 화려한 생활을 하게 해줄게. 모든 사람이 너를 우러러볼 거야. 너는 장차 나와 똑같이 존귀한 사람이 되는 거야.”

이렇게 명료한 암시의 말을 한안이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그녀는 마땅히 감격해야 했다. 전생에 자신이 곤궁하고 비통하게 살았던 것에 비하면 이런 남자는 응당 그녀 인생에서 그녀를 암흑 속에서 구해내는 한 줄기 빛일 것이다. 다른 사람의 진심에 대해 한안은 좀 감격했다. 그러나 감격했다고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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