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16)

탁칠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한안을 보는 눈빛이 곧 그녀를 덮쳐 목 졸라 죽여버릴 듯했다.

한안이 옅게 웃었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잘못인가요? 황자께서 제아무리 존귀하다 한들 사람의 감정을 통제할 수는 없죠. 안 그런가요? 그렇지 않으면 공주께서 어찌 왕부로 시집오려고 별의별 궁리를 다 했겠어요. 황자께서는 동생의 일을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으실 테니 저를 이해할 수 없다는 말씀 같은 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테니까요.”

그녀의 입술이 비웃음으로 치켜 올라가 있었다. 탁칠은 한안이 화가 나면 말투에 비웃음이 실리고 경쾌하게 바뀐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의 말이 구름처럼 옅고 바람처럼 가벼울수록 말 속의 예리한 날이 사람의 심장을 찔렀다. 짧은 몇 마디 말이 탁칠을 괴롭혔다. 아직 여인이라고 할 수도 없는 이 여자는 늘 이렇게 수월하게 그를 격노하게 했다.

“그가 이림나를 아내로 맞이한다 해도 너는 그를 증오하지 않는다고? 여전히 그를 사랑한다고?”

그가 이를 악물며 물었다.

“사랑이 없다면 증오가 어디서 올까요?”

한안이 말했다.

“사랑과 증오는 상충하는 게 아니에요, 아닌가요? 설령 내가 정말 그를 증오한다 해도 그건 내가 그를 사랑하기 때문일 거예요. 만약 증오에 대해 말한다고 한다면 나는 다른 사람의 것을 노리는 사람을 더 증오해요. 다른 사람의 것이 제아무리 좋다 해도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으면 그것이 바로 도둑이죠.”

한안은 다른 사람의 남편을 노리는 이림나를 감정의 도둑이라 말하면서 대종을 노리고 전쟁을 일으키는 서융인의 됨됨이 또한 멸시할 만하다고 암시하고 있었다.

“너…….”

탁칠의 얼굴빛이 변했다. 한안은 이림나에 대해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서융 전체를 가지고 말하고 있었다. 게다가 반박할 여지도 없게 하니 이 꼬마가 실로 입심이 좋구나 감탄만 할 뿐이었다. 자신이 그녀와의 말싸움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방법은 없어 보였다.

“그러면 또 어떠냐. 너의 비녀는 이미 호수 속에 빠졌다. 어쩔 셈이지?”

한안은 냉랭하게 그를 보았다.

“저는 황자께서 언제 떠나시나 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황자께서 떠나시면 바로 물 아래로 내려가 건져낼 것입니다.”

비녀가 호숫물에 빠졌고 호수의 물이 깊지 않으니 어쩌면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너 미쳤어?”

탁칠이 놀라 그녀를 보았다.

탁칠이 대종 사람은 아니지만, 대종의 여자가 삼종사덕(三從四德 삼종: 어려서는 아버지를, 결혼해서는 남편을, 남편 사후에는 아들을 따름/사덕: 여자로서 갖추어야 할 마음씨, 말씨, 맵시, 솜씨)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대갓집 소저인 한안이 비녀를 위해서라고는 하나 자발적으로 호수에 들어간다고? 호수 물은 아직 차가운데 만일 변고라도 생기면…….

“당신은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 아닌가요?”

한안의 인내심이 서서히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그녀는 참을성 없이 그를 보았다.

“언제 떠나시려구요?”

탁칠은 화가 나지 않고 오히려 웃고 싶었다. 한안이 비녀에 쏟는 관심은 그의 상상을 초월했다. 한안이 스스로 호수에서 비녀를 찾겠다는 말을 듣고는 한안의 과감성에 찬사를 외쳤다. 대종의 다른 여자들은 모두 쾌활하지 않고 우유부단했다. 그래서 한안의 시원스러운 성격은 서융 여자와 비교할 만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질투를 느꼈다. 한안이 노력을 쏟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다른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만약 내가 가지 않으면? 너의 비녀를 찾을 수 없는 거 아닌가?”

탁칠이 웃었다. 그는 한안이 비녀를 찾지 못하게 하겠다고 결심을 굳혔다. 한안이 위험을 무릅쓰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부운석과 관련이 있는 물건을 찾도록 두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이 여기에 있으면 한안은 결코 물 아래로 내려갈 리 없었다. 자기가 있어도 상관하지 않고 한안이 물에 들어간다고 하면 그건 또 그것대로 괜찮았다. 자신은 그녀의 몸을 보게 될 테니까. 그러나 탁칠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한안이 자기가 여기에 있는 이상, 호수에 들어갈 리가 없다는 것을. 그녀는 자신과 조금이라도 연관되는 일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피할 것이다.

한안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황자께서 이곳의 풍경을 감상하고 싶으시다면 당연히 그러실 수 있습니다. 저도 뭐, 기다릴 수 있습니다. 황자께서 언젠가는 떠나실 터이니 가시기를 기다렸다가 물에 들어가면 됩니다.”

“너 왜 이렇게까지 고집부리는 것이냐?”

탁칠은 그녀가 이렇게까지 말하리라고는 예상도 못 한 터라 말투가 변하고 말았다.

한안이 웃었다.

“그럴 가치가 있으니까요.”

시간이 1분 1초 지나가고 있다. 비녀가 움직일 리는 없지만 물살은 움직이고 있었다. 물살이 비녀를 밀어내어 비녀를 호수 중심까지 밀어낼 수도 있었다. 탁칠은 생각에 잠긴 듯한 눈으로 한안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두려움 혹은 긴장감을 볼 수 있기를 희망했지만 그는 실망할 수 밖에 없었다. 한안은 평온한 표정으로 그저 조용히 호수 아래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평온함이 그녀를 고집스러워 보이게 했다.

이 여인은 정말 특별하군.

탁칠은 크게 하하 웃으며 일어나 큰 걸음으로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순간 한안은 놀라서 그를 붙잡았다.

“뭐 하려는 거예요?”

탁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본황자가 오늘 기분이 좋으니 너의 비녀를 찾아주마.”

탁칠은 말을 마치자마자 몸을 곧게 펴 차가운 호수 물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한안은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곧 호수 수면은 거울처럼 잔잔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탁칠, 그 자체도 제멋대로인 데다 오만방자한 여동생까지 있어 호감 같은 게 있진 않았지만 호수 수면 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한안은 당황하고 말았다. 서융 황자는 신분만 따져봤을 때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서융이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그의 현재 위치는 대종의 적이 아니었다. 화친할 여동생이 있으니 표면상으로는 대종에 우호적인 사람이었다. 양국이 교전 중이라도 사신은 죽이지 않는 법이다.

“탁칠!”

한안은 호숫가를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탁칠!”

호수 수면은 여전히 잔잔했다. 한안은 조급해졌다. ‘탁칠이 물에 들어갈 때 보니 수영에 익숙한 듯했으니 물에 빠질 리는 없겠지.’ 그래도 침착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이 둘만 있었고 급람과 주홍도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탁칠, 나를 놀라게 하는 거면 다시는 당신을 상대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황자라 해도 상관없어요.”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탁칠의 그림자를 볼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수면에는 여전히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아무리 물에 익숙한 사람이라도 물 아래에서 이렇게 오래 머무르는 건 위험한 거 아닐까. 한안은 다시 초조하게 외쳤다.

“탁칠!”

결국 이를 악물고 물에 내려가 살펴볼 준비를 하는데 돌연 사람의 형체가 물을 뿌리며 나타났다. 탁칠이 물기 가득한 얼굴로 씨익 웃었다.

“너, 나를 걱정한 거 맞지!”

한안은 황당했다.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기가 무섭게 분노를 터뜨렸다.

“당신, 나를 속였군요!”

탁칠은 머리를 휘저어 머리카락의 물방울을 깨끗하게 털어냈다. 그리고는 천천히 한안을 향해 헤엄쳐 오며 말없이 빙그레 웃었다. 그의 눈빛은 한안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가 가장자리로 헤엄쳐 올 때까지 기다린 한안은 그가 올라오도록 손을 내밀면서 냉랭하게 말했다.

“유치하네요.”

탁칠은 한안의 책망을 즐기는 것 같더니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미안해. 비녀는 못 찾았어.”

“못 찾았으면 못 찾은 거죠. 당신과 무관한 일이니 상관 말아요.”

그러나 표정에는 아쉬움이 뚜렷하게 보였다. 탁칠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등 뒤에 두었던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바닥 위에는 선명하게 아름다운 물고기 꼬리 비녀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한안은 보자마자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탁칠의 손에서 비녀를 받아들었다. 탁칠은 그녀의 기뻐하는 표정에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입술을 치켜 올리며 웃었다.

“내가 비녀를 찾아주었는데 너는 어떻게 내게 감사할 거지?”

한안은 탁칠이 고마웠다. 그는 이림나처럼 혐오스럽지도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 생각을 가다듬으며 정색하고 말했다.

“이 비녀는 당신 때문에 호수 속에 빠진 거니까 당신이 건져 주는 게 맞는 거죠. 내가 따지지 않고 그냥 넘어가 주는데 어떻게 당신이 나에게 감사를 바랄 수 있죠?”

탁칠은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을 딱 벌린 채 한안을 보았다. 한안은 지금까지 늘 그의 앞에서 냉정하게 자제심을 발휘한 모습을 보여줬었다. 이렇게 시치미를 떼는 표정은 처음이었다. 그 표정이 전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사랑스러워서 웃음이 났다.

한참 웃던 그의 얼굴빛이 순간 바뀌면서 하얗게 창백해졌다.

한안은 그의 표정 변화를 알아차렸다. 그리고 물이 뚝뚝 떨어 질만큼 젖은 탁칠의 옷 아래가 서서히 붉게 변하고 있었다. 저건 분명 피의 흔적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부상을 당한 건 아니겠지? 방금 전 물에 들어가서 비녀를 건지면서 상처가 났다고? 너무 억지 아냐?

“당신, 무슨 일이에요?”

한안이 물었다. 오늘 이렇게 많은 상황과 맞닥뜨리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한안의 초조한 표정을 보고 탁칠은 기쁜 듯 느릿하게 말했다.

“너, 나를 걱정하는 거 맞지?”

그의 말투도 달라져 있었다. 소리를 억지로 짜내는 듯해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을 지탱하며, 고통을 억지로 참고 있는 듯했다. 탁칠의 상처는 허리에 있었고 그 상처는 꽤나 깊은 듯했다. 피가 갈수록 많이 흘러나와 호수 물마저 붉은색으로 물들였다.

“당신,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나한테 좀 부드럽게 대해주면 안 돼?”

탁칠이 웃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다니. 한안은 조금은 그에게 감탄했다.

“부상을 입었는데, 방금 전 물에 들어갔을 때 상처가 벌어졌어.”

“부상을 입었다면서 뭐 하러 무리를 한 거예요?”

한안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건 자업자득인 것이다. 정말 머리를 아프게 만드는 남자였다.

탁칠은 그녀를 보고 살짝 웃었다.

“겁내지 마. 나 괜찮아.”

비록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는 거의 한안의 몸에 기대어 있었다. 한안은 그의 떨림과 무기력함을 감지할 수 있었다. 탁칠은 형언하기 어려운 고통을 참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잊지 않고 한안을 위로했다. 한안의 마음이 부드러워졌다.

“이제 어쩌죠?”

한안은 그를 부축했다.

“상처를 서둘러 의원에게 보이지 않으면 고질병을 얻게 될 거예요.”

한안은 병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게 되는 것이 질병이 시작될 때 제때 치료하지 않아서라는 것을 전생의 경험에서 알고 있었다. 그는 이미 많은 피를 흘렸으니 더 지체하면 의원이 와도 치료할 수 없을 것이며 그러면 큰 문제가 발생할 것이었다.

탁칠은 잠시 침묵했다.

“나를 객잔에 데려다줄 수 있을까?”

“뭐라고요?”

“나를 객잔에 데려다줘.”

탁칠이 말했다.

“나 혼자 돌아갈 방법이 없어. 네가 나를 도와줄 거면 마차 한 대를 찾아주고 의원을 불러줘.”

한안은 기가 막혔다.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아니지 않나. 사실상 한안은 탁칠과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였다. 하지만 이 사람은 매번 나타날 때마다 자신에게 말썽을 안겨 주었다. 그러니 탁칠에게 변고가 생겼다고 해도 자신이 당연하게 그를 도울 필요는 없지 않을까.

“농담이 심하시네요. 당신의 부하들은요? 당당한 서융 황자가 설마 시중들 부하 하나 찾을 수 없다는 건가요?”

탁칠은 담담하게 웃었다. 그 웃는 얼굴에서는 잘난 척하던 황자의 표정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조롱과 비애를 띠고 있었다.

“너는 대종에 있는 서융 사람이 대종 백성들 앞에 떳떳이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봐? 그리고 서융 황자가 어째서 서융에 있지 않고 대종에 있다고 생각해? 부하 한 명이 늘수록, 그 부하 한 명이 내 신분을 알수록, 그만큼 나는 더 위험해지는 거야.”

그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한안은 순간 이해했다. 이전에 탁칠이 서융인에게 추살 당했을 거라고 추측했던 것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측은해졌다. 서융의 현 황제는 탁칠이 아니었다. 황제쪽 사람들은 만에 하나라도 실수하지 않도록, 확실히 하기 위해 탁칠을 추살 할 가능성이 있었다. 대종에서도 7황자와 태자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살벌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으니 서융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황가에 있다는 것은 본래 제 몸 하나 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바깥사람들이 보는 것은 하늘을 찌를 듯한 부귀이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이 부귀가 얼마나 사람을 찌르는 것인지 분명히 알 것이다.

한안의 표정을 본 그는 힘겹게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너에게는 내가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내 신분을 밝혔지.”

한안은 그의 말에 한층 더 난처해졌다. 오늘의 일은 자신에게 원인이 있었다. 만약 자신이 비녀를 뽑지 않았다면 탁칠이 물속으로 뛰어들었을 리 없고 상처도 벌어졌을 리 없다. 이 남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해친 적이 없는데……. 단순히 이림나 때문에 그를 싫어하는 건 너무 지나친 게 아닐까.

한안은 주위에 아무도 없이 홀로 서 있는 고독함,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외로움을 알고 있었다. 전생의 자신이 바로 그러했으니까. 고난 속에서 발버둥 치고 있는데 가족은 있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해치려는 사람이 바로 자신과 가장 가까운 가족이었으니까.

탁칠을 보니, 마치 또 다른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자신은 탁칠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인가? 이 사람의 입장에서는 신뢰라는 것은 너무나 진귀했다. 만약 그 신뢰가 남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어찌 될까. 자신은 한 번의 생을 더 얻었지만 탁칠은 인생을 다시 한번 살 기회가 없을 텐데…….

그녀는 일어서서 복잡한 시선으로 탁칠을 오래도록 응시하다가 마침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탁칠의 눈빛이 순간 밝아졌다. 그는 한안을 향해 웃었다. 그 웃는 얼굴은 단순하고도 명랑했으며 상대방이 자신을 도와주는 것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다. 탁칠은 어린아이 같아 보였다. 한안의 심장이 저도 모르게 부드러워졌다. 한안은 그를 부축하며 일어섰다.

“급람과 주홍은요?”

“저쪽에. 내가 그녀들의 혈도를 눌러놨어.”

한안은 그를 한 번 노려보았고 탁칠은 그녀의 눈빛을 피했다.

탁칠은 급람과 주홍을 찾아 혈도를 풀었다. 급람이 한안의 곁으로 달려왔다.

“소저, 괜찮으세요? 이 사람이 소저를 해치지 않았나요?”

한안은 고개를 저었다.

“가서 마차를 찾아와. 그를 데려다줘야 해.”

“네?”

주홍은 의아해하며 한안과 탁칠을 보았다. 그제야 창백한 얼굴색의 탁칠이 한안에게 거의 기대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부상을 입은 것 같았다.

조금 전 주홍과 급람이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에게 혈도를 찍혔다. 주홍은 자신들이 움직이지 못하는 사이, 한안이 악당을 만날까 두려웠다. 한안이 무사한 것을 보고 안도의 숨을 내쉬긴 했지만 탁칠의 출현은 의심스럽기 그지없었다. 분명 자신과 급람의 혈도를 누른 것은 이 사람이었다. 이 사람과 소저는 무슨 관계이고 어째서 소저가 그의 부상에 긴장하는 것 같을까?

주홍과 급람은 탁칠을 몇 차례 만난 적이 있었기에 둘의 관계가 좋은 벗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처음에는 한안을 위협하기까지 했으니까.

한안은 그녀들에게 설명할 시간이 없다고 판단하고 바로 지시했다.

“그는 부상을 입었어. 그래서 그를 내버려 두고 갈 수 없어. 급람, 넌 가서 마차를 찾아와.”

급람은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마차를 구하러 떠났다. 주홍은 한안 곁에서 의심스레 탁칠을 훑어보았다. 탁칠은 갈수록 힘들어했다. 처음에는 한안과 몇 마디를 나누더니 나중에는 기척이 아예 없었다.

마차가 온 후, 한안은 탁칠을 부축하여 마차에 올리고 자신도 들어가 앉아서 탁칠이 말한 객잔으로 서둘러 가게 했다.

탁칠은 마차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한안은 이 남자의 조용한 일면을 처음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흘끗 쳐다보니 그가 살짝 눈썹을 찡그리고 있었다. 꿈속도 그렇게 즐겁지 않은 모양이다. 한안은 부운석을 떠올렸다. 그도 가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곤 하는데, 그에게 무믄 성가신 일이 있었을까.

이내 마차는 객잔 입구에 멈춰 섰다. 한안은 탁칠을 부축해서 객잔의 방으로 들어갔다. 주홍은 곧 의원을 찾으러 갔다. 다행히 그녀들은 외출하기 전에 면사를 쓰고 있어서 그녀들의 모습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의원이 이내 도착해서는 탁칠을 진맥하고 약 처방을 써주었다. 알고 보니 탁칠은 허리에 중상을 입은 것 외에 독에 중독된 흔적도 있었다. 이미 해독한 상태이기는 하나 말끔하게 해독된 것이 아니라 남은 독이 체내에 있었다. 그런데 오늘 물에 들어가는 바람에 상태가 더욱 악화된 것이었다.

의원을 보낸 후, 급람과 주홍은 탁칠에게 줄 약을 달이러 가고 한안만이 방 안에 탁칠과 함께 남았다. 탁칠은 혼미한 상태였다. 한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은 평범해서 권세가의 방처럼 화려해 보이지 않았다. 물건들도 평민들이 쓸 만한 것들로 거의 보잘것없었다. 누가 이 방에 머물고 있는 이가 서융의 황자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한바탕 소동을 겪어 목이 말랐던 한안은 일어나서 차를 따라 마시려 했다. 하지만 한 걸음을 떼자마자 누군가가 손을 끌어당겼다. 한안은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탁칠이 한 손으로 자신을 꽉 잡고는 웅얼웅얼 말하는 것이 보였다.

“가지 말아요.”

한안은 눈살을 찌푸리고 바로 그의 손을 떨쳐내려 했다. 그러나 탁칠의 손아귀 힘은 강했다. 성년 남자의 힘을 유약한 소녀가 이기려 하니 한안이 상대하기 힘든 것도 당연했다. 한안이 손을 떼려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탁칠이 다시 한번 웅얼거렸다.

“부친…….”

그가 부른 것은 ‘부친’이었다. ‘부황’이 아니라. 한안은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자신의 손을 잡고 눈을 꽉 감은 탁칠의 두 뺨이 새빨갰다. 그는 기세등등하게 사람을 압박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대신 도움 받을 데 없는 어린아이처럼 변해 있었다. 얼굴 가득 누군가에게 의존하려는 빛이 가득했다. 한안은 생각에 잠겼다.

이 사람은 자신이 생각했던 그런 악한은 아닌 듯했다. 적어도 맨 처음 만났을 때를 제외하고 그가 나서서 자신을 해치지는 않았다. 심지어 그는 자신 때문에 부상을 입기도 했다. 이 사람이 도대체 무슨 목적이 있어서 계속해서 자신의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것인지 아직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가 자신의 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한안이 그의 사정을 봐주어야 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었다. 어쨌든 그의 여동생은 이림나니까. 그리고 이림나는 남의 것을 강제로 취했으니 자신의 적이 분명했다. 만약 황자가 이림나를 보호하려 한다면 그녀도 그에게 예의를 갖출 필요가 없었다.

한안은 손목에 힘을 주어 매섭게 자신의 손을 잡아 뺐다. 탁칠은 갑자기 쥐고 있던 것을 놓치자, 혼미한 중에도 허전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눈을 뜨지는 않았지만 낙담한 모습이었다.

한안은 그를 동정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탁자 근처에 앉았다. 오늘 모든 일이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날이 이미 어두워졌고 자신은 탁칠을 내던져놓은 채 아랑곳하지 않고 떠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 사람이나 찾아 탁칠을 돌보게 한다 해도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었다.

탁칠이 보통 사람이라면 그런대로 괜찮다 할 것이나, 탁칠은 서융의 황자였다. 그의 신분을 아는 사람이 한 사람 늘어나면 탁칠은 한 사람분만큼 더 위험해졌다. 마찬가지로 탁칠의 신분을 아는 사람은 나중에 살인멸구 될 수도 있었다. 한안은 자기 때문에 무고한 사람이 생명을 잃게 할 수는 없었다.

규방 여자가 낯선 남자와 하룻밤을 함께 보냈다면 비록 상대방이 중상을 입었고 두 사람 사이가 아주 깨끗하다고 한들 누가 믿을까? 설령 한안이 현재 상황을 만회해서 현청왕비의 지위에 머물 수 있게 된다 해도 이 소문이 퍼지면 그대로 끝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일은 그들 두 사람 외에 급람과 주홍만 아는 사실이고 그 두 사람은 이 일을 소문 낼 리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 외에 현청왕비가 이 하룻밤을 누구와 보냈는지 알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부운석이 만약 자신이 밤새도록 돌아오지 않은 것을 알게 된다면……. 그는 자신을 걱정할까?

만에 하나, 오늘밤 일을 알아차린 사람이 없다하더라도 이렇게 조용히 넘어가는 것이 정말 그렇게 쉬울까?

바깥의 급람과 주홍은 약을 달이고 있었다. 급람은 아궁이 위에서 뜨거운 김이 새어나오는 약탕기를 지켜보면서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참지 못하고 말했다.

“주홍, 너 말해 봐. 소저께서 왜 이리 하시는 걸까?”

급람은 오늘의 일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안과 탁칠은 친구 사이가 아니지 않은가. 오늘 탁칠이 아무 까닭 없이 부상을 입은 것도 이상했다. 급람은 한안이 탁칠에게 부상을 입혔다고는 믿지 않았다.

만약 평소의 한안이라면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이런 상황에서 멀리 떨어질 수 있는 한 떨어져서 탁칠과 손톱만큼의 관련도 맺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한안의 행동은 그녀들의 예상을 넘어섰다. 의원을 찾아 탁칠의 부상을 치료했을 뿐만 아니라 친히 남아 그를 돌보고 있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녀는 놀라고 당황하여 주홍을 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주홍, 소저께서…… 그를 좋아하시는 것은 아니겠지?”

주홍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허튼소리 하지 마.”

함부로 말해도 되는 사안이 아니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속셈이 있는 사람들이 듣기라도 한다면 한안에게 큰 말썽이 생길 것이 분명했다. 비록 지금 한안이 겉보기에는 버림받은 것처럼 보이더라도 사리에 밝은 사람들은 이 일의 잘못이 한안에게 있지 않으며 서융 공주가 자신의 세력을 믿고 남을 괴롭히는 것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현청왕이 사리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고 있음도 알 것이고.

그러나 만약 급람이 말한 것처럼 한안이 탁칠을 좋아한다는 내용의 소문이 속셈 있는 자들의 귀에 들어가 트집이 잡힌다면 한안이 당당했던 상황은 바로 달라질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남자에게는 관대하지만, 여자에 대해서는 극단적으로 가혹한 법이니까.

그런 까닭에 부운석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와 서융 공주를 왕비로 맞이하기 위해 총애하던 장한안을 푸대접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인 것이다. 모두가 기껏해야 현청왕의 풍류와 수려한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면서 그 순간 잠깐 한안을 동정하겠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누가 한안을 기억이나 할 수 있을까? 심지어 대종 왕야와 서융 공주의 애정에 대한 이야기가 미화되어 아름다운 전설처럼 이어질 가능성마저 있었다. 이런 상황에 한안이 탁칠을 사랑한다고 알려지면 어떤 말들을 할까?

세상은 장씨 세가 여자가 여인의 도를 지키지 않았다고 말할 것이다. 깨끗하지 않고 부정하고 불결하다고. 성품이 문란한 것은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니 한안은 이후에 어디를 갈 수 있을까. 어디서든 그녀를 욕하는 사람이 있어 남에게 비방을 들으며 한평생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하겠지. 모두가 부운석이 서융 공주를 선택한 것은 현명한 생각이었고 한안이 내쫓긴 것은 당연하다 말할 것이다.

그리고 황상은 한안이 황가의 체면을 손상시켰다고 여기고 어쩌면 그녀를 처벌하라는 명을 내릴지도 모른다. 실로 만인이 지탄하는 죄인이 되는 것이다.

주홍이 이렇게 말하자, 급람도 자신이 입을 헤프게 놀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급람의 표정이 굳어지며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 일에 대해 생각할수록 ‘제 생각이 맞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적이긴 하지만 탁칠 공자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의 용모는 수려했고 무예도 높았다. 게다가 그는 서융 황자여서 나중에 서융의 황제가 될 가능성도 있었다. 이전에는 서융과 대종은 적이었지만 서융이 화친 공주를 내놓았으니 한동안은 불화가 표면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급람은 다른 느낌도 받고 있었다. 탁칠의 기개와 자태로 보아 곧 두각을 드러내어 장래에 아마 천하를 정복할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었다. 만약 그렇게 되어서 한안과 함께 한다면 서융은 남이 얕볼 수 없는 세력이 될 것이다.

급람은 생각을 거듭하는 동안, 자신의 생각을 확고히 굳히고는 심지어 소저가 탁칠을 좋아한다고 믿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서 부운석이 한안을 대하는 태도가 돌변하면서 소저를 따르는 자신과 같은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얼어붙게 했다.

한안이 어려서부터 얼마나 많은 억울함을 겪어 왔는지 그녀와 주홍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부운석만은 한안을 아끼고 위해 줄 사람이라 여겼는데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한안의 급계례에 부운석이 이렇게 큰 선물을 보내올 줄을. 주홍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급람은 부운석의 냉담하고 무정함에 분노했다. 그런 상황에 한안의 곁에 대단한 남자가 나타났으니 급람은 한안이 오히려 탁칠과 미래를 도모해서 부운석에게 멋진 타격을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급람의 성격은 호쾌하고 괄괄해서 일 처리나 사고방식도 대담한 편이었다. 그래서 여자가 반드시 한 남자를 위해 자신의 몸을 옥같이 지켜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더구나 남자에게 괴롭힘을 당하더라도 손해를 입을 것을 우려해 묵묵히 이를 악물고 삼켜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녀는 행복은 자기 손안에 움켜쥐는 것이라고 여겼다. 더 좋은 선택이 있는데 선택하지 않는 것은 바보인 것이다.

주홍은 급람이 마음속으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고는 바로 말했다.

“약이 다 달여졌어. 어서 가져가자.”

급람과 주홍은 약을 들고 들어가서 탁칠에게 먹였다. 주홍은 탁자 옆에서 차를 마시는 한안에게 다가가 말했다.

“소저, 지금 날이 많이 늦었습니다.”

현청왕부로 돌아갈지 묻는 것이었다.

한안은 고개를 저었다.

“저 사람이 지금 이 모양이니, 가기 어렵겠다. 어쨌든 나 때문에 부상 당한 것이니 여기에서 하룻밤 머물러야겠어.”

주홍은 미간을 찌푸리고 반대의 뜻을 비쳤다.

“하지만 그는 남자입니다.”

“남자면 또 어때? 저 모양새인데 설마 무슨 일이 있겠니?”

한안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다른 쪽에서 머물 수 있게, 가서 방을 찾아볼까요?”

주홍은 단호하게 의견을 고수하기로 했다.

“그럴 필요 없어. 그의 신분은 특수해. 경성 안에 그의 종적을 찾는 사람들이 틀림없이 있을 거야. 우리가 함께 들어오는 걸 사람들이 이미 봤는데 다시 다른 방을 찾는다면 의심을 받을 수 있어. 원래 만일이라는 것이 두려운 법이야. 그가 남에게 신분이 발각될 가능성이 더 커질 수 있어.”

“하지만…….”

주홍은 아직 무언가 더 말하고 싶었다.

“하물며.”

한안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

“지금 그의 모습을 봐. 어떻게 그를 혼자 두고 떠날 수 있겠어? 오늘만 그에게 은혜를 갚는다고 생각하고 나중에 그를 다시 만나도 낯선 사람으로 여기면 그뿐이야.”

“소저의 말씀이 맞습니다.”

급람이 덩달아 말을 보탰다.

“우리 스스로 떳떳하니 남의 말에 신경 쓰지 말아요. 아무 일도 없는데 두려울 게 뭐예요.”

급람의 마음은 이미 탁칠을 향해 있었다. 탁칠이 부운석보다 훨씬 더 좋았다. 위험인물이긴 하지만 적어도 한안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았으니까.

주홍은 뭐라고 충고할 수가 없었다. 한안이 한번 결정을 내리면 고집스러워진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한숨을 내쉬며 더는 말하지 않았다.

한안은 창가로 걸어가 앉아서 문양이 조각된 나무 창문을 열고 버드나무 꼭대기에 걸린 초승달을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어째서 남겠다고 한 걸까? 한안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사실 주홍의 말이 구구절절 일리가 있었다. 지금 서둘러 돌아가면 늦진 않을 것이고 밤새 돌아가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지도 모른다. 탁칠 혼자 두는 게 마음에 걸린다면 급람이나 주홍 중 한 명을 남겨서 그를 돌보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남는 것을 선택했다. 사실 그저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어쩌면 한안이 이렇게 한 이유는 사실 그녀가 현청왕부에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따뜻함만을 주던 그곳에는 이제 풀리지 않는 답답함만이 남아 있었다. 제아무리 아무렇지 않은 척 가장하고 있지만 자신만은 마음속의 괴로움을 알고 있었다.

오늘밤, 부운석도 저 초승달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그녀를 걱정하며 그리워하고 있을까?

*

이튿날 한안이 깨어났을 때, 탁칠은 사라진 상태였다. 급람과 주홍은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자신과 마찬가지로 창에 기대어 잠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는 남자의 겉옷이 덮여 있었다. 분명 탁칠이 떠날 때 자신에게 걸쳐준 것이리라.

한안은 급람과 주홍을 불러 깨웠다. 두 사람도 놀라면서 잠에서 깼다. 탁칠이 이렇게 가버릴 줄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잠시 멍해 있던 주홍이 물었다.

“소저, 우리 이제 현청왕부로 돌아가야겠지요?”

한안은 잠깐 망설이다가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집은 장부에 있지 않았다. 현청왕부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어디로 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어젯밤 돌아가지 않았으니 속셈 있는 사람들에게 트집이 잡히면 무척이나 큰 말썽에 휘말릴 것이다. 해명을 하긴 해야 할 텐데. 그런데 만약 부운석이 묻지 않고 그냥 넘어간다면 어찌할까. 아니, 따져 묻는다면 어찌할까. 일단 닥치는 대로 하나씩 하나씩 하자.

급람이 서둘러 뒤를 쫓으며 탁자 위에 둔 탁칠의 겉옷을 집어 들었다.

“소저, 이건 어쩌죠?”

한안은 잠시 생각했다.

“그냥 거기에 두자.”

다른 남자의 몸에 있던 물건을 자신이 지니는 것은 어쨌든 적절하지 못하다. 어젯밤 자신이 남아서 탁칠을 돌본 것으로 그에게 은혜를 갚은 것이었다. 하지만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 보통의 낯선 행인으로 여기면 된다. 여기까지 생각하며 한안은 면사를 썼다.

“가자.”

마차가 현청왕부 문 입구에서 멈추었고 한안과 주홍, 급람은 정문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는 급람이 인사를 하기만 하면 아무 일 없이 정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문을 지키는 그 사람이 크게 외쳤다.

“누구쇼?”

급람은 평소 부중의 하인들과 가깝게 지냈다. 그녀는 평소에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처세술이 좋아서 사람들과 금세 한 편이 되곤 했다. 이 문을 지키는 시위도 그녀와 관계가 좋았는데 갑자기 이렇게 고함을 치자 급람이 놀라 허둥댔다.

“너 뭐하는 거야.”

급람은 시위 앞으로 두어 걸음 가까이 걸어갔다.

“어?”

그 사람은 평소 왕부를 지키던 시위가 아니라 낯선 얼굴이었다. 급람은 의아했다.

“어떻게 당신이 여기에 있어요?”

“당신은 무슨 일이오?”

바뀐 시위는 성가시다는 듯 급람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방자하게 물었다.

“부중에 일이 생겨서 내가 대신 지키러 왔소.”

화를 내려고 준비하고 있던 급람은 화를 내려던 것조차 잊어버린 채 서둘러 물었다.

“부중에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

그 시위는 그녀를 다시 한번 흘끗 보았다.

“장가 소저가 사라졌소.”

한안과 주홍 모두 크게 놀랐다. 한안이 부를 나온 일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부운석이 지금 그녀를 대하는 태도로 보면 이 일을 이렇게 대대적으로 알릴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더 중요한 것은 여자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이 대규모로 퍼지면 여자 본인의 명예에도 지대한 상처가 된다는 것이다. 전생에 한안이 산적에게 납치되었을 때가 그랬다. 당시 경성 안의 모든 사람이 장가 4소저가 납치된 일을 알았고 그녀가 순결을 잃었다는 소식을 떠들어댔다. 지금 또 그런 상황이 되풀이된다고?

한안은 몸이 떨리는 것을 억누를 수 없었다. 주홍도 한안과 같은 생각을 하겠지만 그녀들은 이전 생의 기억이 없으니 이 일에 대해 받은 충격의 크기가 한안에 미치지 못했다. 대신 별안간 한안이 긴장하는 모습을 보며 한안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시위는 말을 이었다.

“장가 소저가 어떤 생각을 한 건지 모르겠소. 종일 왕부에 얌전히 머물러 있지를 않고 나가서 뭔 사고를 낸 건지…….”

급람이 듣자마자 화를 냈다.

“누가 나가서 사고를 냈다고! 터무니없는 말 하지 말아요!”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그 시위는 급람이 계속 문 앞에서 얼쩡거리는 게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녀가 부중의 여종이라 여겼지만 잘 생각해 보니 왕부의 어떤 여종이 이렇게 방자할까 싶었다. 이렇게나 드세게 구는 것이 설마 왕부에 섞여 들어가고 싶은 것은 아니겠지.

“수상쩍게 여기서 얼쩡거리지 말고, 어서 꺼지시오.”

“당신, 누구더러 수상쩍다는 거예요!”

급람은 그야말로 화가 나 미치려 했다. 요 며칠 왕부에서 억울함을 겪었지만 한안을 봐서 참고 있던 것이 터져 나오려 했다. 급람은 시위의 코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큰소리를 쳤다.

“당신, 사람 깔보지 말아요!”

너무 당당한 급람의 자세에 시위는 잠시 아닌가 싶었다가, 다시 그녀의 차림새를 샅샅이 살펴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인의 차림새가 분명한 것이다.

“아이고, 무서워라. 당신이 누군지 말이나 해보시지?”

“당신…….”

비아냥대는 시위의 태도에 급람은 화가 나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왕부가 어떻게 이런 사람에게 대문을 지키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부중이 갈수록 난장판이 되는구나 싶었다. 서융 공주가 온 후부터 모든 것이 다 변했다.

“급람.”한안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시위는 말끝마다 급람을 무시했다. 전형적으로 사람을 깔보는 행태였다. 급람이 일개 노비이기는 하지만 한안에게는 자매와 같았다. 한안은 몇 걸음 앞으로 걸어가, 그 시위의 앞에서 멈추어 섰다.

“당신 도대체 누구쇼?”

그 시위는 여전히 급람에게 함부로 지껄여댔다. 급람은 한안의 눈빛을 보더니 오만하게 머리를 치켜들었다.

“당신에게 알려주죠. 나는 왕비의 여종이에요. 사람을 깔보지 말아요.”

시위는 재미난 농담이라도 들은 듯, 하하 큰 소리로 웃었다.

“못된 것, 자기가 상대하는 게 누군지 보지도 않고 거짓말을 해? 왕비의 여종을 내가 본 적은 없지만, 너보다 훨씬 아름답다고. 왕비께서 선녀처럼 생기셨으니, 그 여종도 당연히 선녀처럼 생겼겠지. 어디 너 같을라고?”

급람은 ‘왕비께서 선녀처럼 생겼다’는 말에 순간 기뻐다가, 불현듯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이 시위는 ‘장가 소저’라고 말하지 않았나? 그런데 어떻게 바로 ‘왕비’로 바뀐 거지? 그 둘이 다른 사람을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설마 저 사람이 말하는 왕비는 서융 공주인가?

“당신이 말한 왕비가 혹시 서융 공주예요?”

시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설마 왕부에 또 다른 왕비가 있나?”

급람은 차갑게 웃었다. 하는 말마다 서융 공주를 떠받드는 꼴을 보니, 이 시위는 바람 부는 대로 돛 다는 것처럼 상황에 따라 태도를 바꾸는 유형일 것이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황상의 성지가 아직 내려오지 않았으니, 우리 집 소저야말로 진정한 현청왕비세요.”

급람도 자신이 어째서 이렇게 말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사실 그녀는 한안이 강탈당한 현청왕비라는 이름이 싫었다. 부운석이 이림나를 데리고 돌아온 바로 그 순간부터. 소저가 현청왕비라는 이름을 가지고 저 천한 이림나와 다툴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하지만 시위가 현청왕부의 왕비는 한안이 아니라고 말하자, 급람은 비할 데 없이 슬프고 언짢았다. 그녀는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 알았다. 남의 물건을 노렸던 도둑이 여주인으로 나타나게 되면 누구든 분노하게 될 터이다. 급람은 한안에게 조금이나마 정의를 되찾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시위는 급람의 말을 다 듣고도 경멸의 표정을 드러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게야? 장가 소저는 버림받은 여인에 불과할 뿐인데. 게다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짝’ 하는 소리와 함께, 급람은 시위의 얼굴에 따귀를 한 대 올려붙였다. 급람의 얼굴은 화를 억제하지 못하는 바람에 발갛게 익어 있었다. 자기네들끼리 수군거리는 것은 참았다. 그러나 소저가 바로 앞에 있는데 저렇게 말하다니. 그동안 그녀와 주홍이 온갖 방법을 동원해 왕부의 사람들이 한안에 대해 떠들어대는 것을 소저가 알지 못하게 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이 모든 것이 헛수고가 되는 게 아닌가? 소저는 지금 마음에 얼마나 큰 상처를 입으셨을까.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시위는 갑자기 따귀를 맞고는 잠시 정신이 나갔다. 하지만 바로 정신을 차리고는 급람에게 굶주린 호랑이처럼 달려들려 했다. 주홍도 놀라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해 허둥대는 그 순간, 돌연 목소리가 들렸다.

“손을 멈춰라!”

목소리는 맑고 투명했으며 평온했으나 스산한 냉담함을 품고 있었다. 냉기는 깊이 감추어져 있어 가볍게 무시할 수 있을 듯했지만, 목소리를 따라 귀에 날려 들어가서는 온몸에 한기를 퍼뜨렸다.

시위는 저도 모르게 손을 멈추고 앞을 바라보았다. 면사를 쓴 여자가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평범한 차림새였지만 그 고귀한 기질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용모는 뚜렷이 보이지 않았지만 여자는 거기에 조용히 서서 맑고 투명하며, 깊고 그윽한 두 눈으로 담담히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는 몸서리를 쳤다. 이 여자의 눈빛은 어떻게 이리도 왕야와 비슷할까? 잠깐 머뭇거리던 그는 끝내 물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왕부에는 매일 너무도 많은 사람이 왕래하기에 그도 모든 사람을 다 알아볼 수는 없었다. 이 여자는 얼굴 생김새를 가리고 있지만 타고난 고귀한 기질이 남의 홀대를 허용하지 않을 듯했다. 설마 귀인은 아니겠지?

그는 교활하고 약삭빠른 사람이었다. 만약 오늘 죄를 지어서는 안 되는 사람에게 죄를 지었다면, 그럼 그 죄과는 크리라. 그는 자신의 충동적인 행동이 후회스러웠다. 서융 공주를 향한 충심을 조금이나마 표하려 했을 뿐인데 공주 때문에 다른 귀인에게 죄를 지었으니 수지가 맞지 않았다.

면사 아래에 가려진 한안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내가 누구냐고?”

그녀는 천천히 다시 한번 물었다. 시위에게 묻는 것 같기도 했지만, 자신에게 묻는 것도 같았다. 그녀는 손을 들어 얼굴 위의 면사를 깔끔하게 떼어냈다.

“나는 바로 네가 말한 그 버림받은 여인, 장한안이다.”

그녀의 눈빛은 깊고 싸늘했으며 사람을 압도하고 있었다. 시위는 저도 모르게 그 기세에 놀라 한 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그녀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고는 나름 안도하며 말했다.

“이제 보니 장 소저셨군요. 실례를 했습니다.”

말은 비록 이렇게 했지만 미안한 기색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경박했다.

한안도 화내지 않고 옅게 웃었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시위는 순간 당황했다. 한안이 자신의 이름을 물을 줄은 생각지 못한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덩달아 웃으며 말했다.

“장 소저께서 노비의 이름을 물어서 무엇 하시려고요? 노비는……. 그저 거친 사람일 뿐이라 아마 소저의 눈에 들 수 없을 겁니다.”

한안은 그를 보고, 담담하게 웃었다.

“누가 너에게 내 눈에 들라 말했더냐? 너의 이름을 기억해 두려는 것은, 그것은 …….”

그녀의 웃음이 찬란해질수록 조롱의 기색도 더 짙어져 갔다. 팔척장신의 사내를 보고 있지만 장난감을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네 이름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내가 어떻게 너를 혼내줄까?”

무엇을 적나라한 위협이라 부를까. 이것이 바로 적나라한 위협이 아닐까. 추호의 망설임도 없는 선언, 멸시, 가슴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오만함. 그 모든 것이 이 여자의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시위는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두어 걸음 물러났다. 장가 소저는 사람들에게 온화하고 정답게 대하며 늘 빙그레 웃는다고 말들 하지 않았나? 그런데 오늘 보니 유약한 모습은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업신여기기 쉬운 유형이 아니었다.

그녀는 일찍이 모친이 죽고 총애받지 못하는 적녀 신분으로 자라서 그녀의 부친조차 그녀를 꺼린다 했다. 장부 안에서 그녀와 대립했던 이낭들 모두의 결말은 처참했다. 이 여자가 운이 지나치게 좋은 게 아니라면 분명 머리가 좋은 것이리라. 지금 그녀의 행동거지는 온화해 보이지만 비할 데 없이 맹렬했다. 시위는 불현듯 어떤 느낌이 들었다. 서융 공주는 장한안의 적수가 되지 못할 것이라는 느낌. 장한안이 정말 이림나와 한 번 겨루려 한다면 공주는 반드시 비참하게 죽으리라.

한안은 그의 표정이 불안한 것을 보더니 손뼉을 치며 담담하게 말했다.

“네가 이제는 길을 내어줄 수 있겠지.”

시위는 한안의 말을 듣자마자 서둘러 몸을 옆으로 돌려 한안이 지나가게 했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여전히 마음이 달갑지 않았다. 시위는 서융 공주 측근이 되려고 이미 마음을 먹었으니 이림나의 적수인 한안이 아무 일 없이 지나가게 둘 수 없었다. 비록 한안의 방금 전 말에 심장이 놀라고 살이 떨리긴 했지만 한안은 어차피 왕부를 떠날 것이니……. 그는 속삭이는 목소리에 남의 불행을 즐기는 웃음을 실어 말했다.

“장 소저께서는 아시려나 모르겠습니다. 어젯밤 객잔에서 당신과 낯선 남자가 한 방에서 하룻밤 내내 묵은 것을 본 사람이 있답니다.”

한안이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눈빛이 칼날처럼 그를 훑었다. 시위는 순간 움츠러들었지만 8척의 건장한 사내가 무기도 없는 빈손의 어린아이를 무서워하랴 싶어 바로 언짢은 시선으로 한안과 눈을 마주했다. 한안은 그를 노려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어디서 들은 것이냐?”

“거리 골목골목에 다 퍼졌습니다.”

시위는 한안의 저런 모습은 한안이 켕긴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 여겼다. 동시에 그녀를 경멸했다. 현청왕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바로 다른 남자와 부정한 관계를 가지다니 이 여자에게는 정말 여인의 정절이란 게 없구나 싶었다. 왕야께서 그녀를 아내로 맞지 않으시는 게 다행이지. 어떤 남자가 아직 시집도 안 온 아내가 바람피우는 것을 너그럽게 넘어갈까. 한마디라도 더 하고 싶던 시위는 비꼬듯 말을 붙였다.

“왕야께서도 이 일을 아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을 시켜 찾게 했겠습니까?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소저 스스로 돌아오셨네요.”

그의 이 말에는 비웃음 기가 담뿍 들어있어서 한안이 규범을 지키지 않고 깨끗하지 못함을 질책하고 있었다.

한안은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한순간 머리가 좀 혼란스러웠다. 부운석이 벌써 이 일을 알고 있다고? 이 일이 어떻게 이렇게 빨리 전해질 수 있지? 이 시위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제 자신은 탁칠과 함께 있을 때, 면사로 얼굴을 가렸고 더구나 매우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행동해 다른 사람이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일찍 마차를 타고 돌아왔는데 어떻게도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사람에게 이 일이 알려질 수 있을까. 누군가 고의로 퍼뜨린 게 아니고서야.

하지만 어제 어떤 사람도 자신을 미행하지 않았다. 만약 있었다면 이미 발견되었을 것이다. 탁칠의 무공으로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설마 탁칠이 한 짓인가? 그가 고의로 누설한 걸까? 하지만 그렇게 해서 그에게 무슨 좋은 일이 있지?

무슨 일인지 명확히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부운석이 명령을 내려 자신을 찾게 했다니 이것은 일을 떠들썩하게 벌여 모든 사람이 그녀가 낯선 남자와 하룻밤을 함께 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제 경성 사람들이 그녀를 어떻게 볼까.

한안의 분노와 놀람은 이미 천천히 사라졌다. 남은 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 넘쳐나는 슬픔과 처량함이었다. 설마 이번 생에도 자신은 사람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해 부운석을 잘못 본 것일까. 부운석도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불구덩이로 밀어 넣을 수 있는 사람에 불과한 것일까. 그래서 경성 사람들이 한안을 경박하고 지조 없는 악녀로 여기게 하여 부운석 자신은 어떠한 나쁜 평가도 받지 않으려고 한 것일까. 왜 이리 비참할까.

시위는 한안의 얼굴빛이 갈수록 좋지 않게 변하는 것을 보고 자신감이 그득해져서 더욱 못하는 소리가 없어졌다.

“장 소저는 너무 다급했던 게 아닙니까? 정말 누군가를 만나고 싶었거든 왕부를 떠난 후에나 할 것이지. 알다시피 당초에 장 소저가 왕부에 남겠다고 말을 꺼냈잖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하는 걸 보면 설마 지금 떠나려고요?”

급람과 주홍도 옆에서 같이 놀라고 있었다. 주홍은 어젯밤 한안에게 부로 돌아가야 한다고 고집하지 못한 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자신이 좀 더 고집했다면 오늘 같은 상황은 없었을 것이고 한안이 다른 사람에게 흠이 잡히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문 지키는 시위 따위가 이 일을 가지고 그녀를 비웃고 그녀를 무시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니. 한안은 분명 상심했으리라.

급람의 화난 눈이 붉어졌다. 상스러운 시위가 얄미워 죽을 지경이었다. 시위는 이림나의 앞잡이가 되어 비위를 맞추고 싶어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의 말을 들을수록 귀에 거슬려 바로 소매를 걷어붙였다.

“입 닥쳐!”

급람은 말을 하자마자 달려들어 싸우려 했다.

“손을 멈춰라!”

몸 뒤에서 목소리 하나가 들려 왔다. 시위의 손이 멈칫하더니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목 시위.”

한안은 그의 눈빛을 따라 돌아보았다. 목풍이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목풍은 빠르게 걸어오면서 시위와 급람을 보더니 알겠다는 표정을 드러냈다. 목풍은 얼음처럼 차갑게 시위에게 말했다.

“너는 우선 물러가고 다른 사람을 오라 해라.”

“목 시위.”

시위는 반박하고 싶었지만 목풍의 지위가 그보다 훨씬 높은 데다가 왕야 측근의 사람인지라 제아무리 불만이라 해도 감히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급람을 한 번 표독하게 노려보고는 씩씩거리며 갔다.

“우와, 목 시위구나.”

급람은 목풍을 곁눈질로 흘겨보았다. 부운석 주변의 모든 사람이 혐오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녀의 기준엔 누구든 소저를 괴롭히기만 하면 양심 없는 아주 나쁜 놈이었다. 그녀는 거짓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떻게 이리 귀하신 분을 번거롭게 해드릴 수 있겠어요? 우리가 감당할 수 있겠어요?”

목풍은 예전의 열정적이고 활발한 모습과는 분위기가 달라진 급람을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러지 마. 나는…….”

그러나 급람을 납득시킬 수 있는 말은 찾지 못했다. 목풍은 구조를 바라는 눈빛을 한안에게 던지며 한안이 중재해주기를 희망했지만, 곧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한안은 그저 그 자리에 조용히 서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감정 변화가 없었다. 그를 투과하여 다른 사람을 보는 듯도 했고 혹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한안에게서 보기 드문 표정이었다. 적어도 이전에 목풍과 목암 앞에서는 빙그레 웃었고 설령 곤란한 상황이라 해도 이렇게 얼음처럼 차갑게 사람을 대하는 것은 몹시 드물었다. 자신들과 전혀 관계없다는 표정이었다. 목풍은 괴로웠다. 한안의 심정을 상상할 수 있었지만,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저 하인일 뿐이니까.

급람이 그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일부러 그의 팔에 한 번 부딪쳤다.

“위선자!”

“번거롭겠지만 목 시위가 왕야께 통보해 주시게.”

한안이 냉랭하게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우리들은 왕부를 떠나겠네. 그럼 이만.”

목풍은 깜짝 놀랐다.

“이건…….”

주홍은 한안의 결정이 의외였지만 급람은 기뻤다. 여기에서 요 며칠간 한안이 겪은 억울함이 장부에서 겪었던 냉대보다 더 심했던 것이다.

“그럼 소저, 저희가 가서 짐을 챙길까요?”

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풍은 조금 망설이며 급람을 한번 보고는 말했다.

“소저께서 직접 왕야께 가셔서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왕야께서도…… 어쩌면 소저께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실지도 모릅니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한안은 냉랭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속에 아무 느낌도 없었다. 그저 춥고 추웠다. 그녀는 줄곧 자신을 타일러 왔다. 원수를 갚고 난 뒤에도 여전히 이 세상에서 살아가자. 부운석을 위해서라도 늘 웃어야 한다. 내 사람을 뜨겁게 사랑하고 쉽사리 미워하지 말자.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너무도 힘든 일이니까. 그러나 그녀는 생각지도 못했다. 한 사람의 마음이 차갑게 식으면 미움조차도 사치라는 것을. 미워하지 않는 것은 또한 사랑하지도 않는 것이다.

“소저, 그래도 왕야를 한 번 뵈러 가시지요.”

목풍이 고집스레 말했다. 그도 몹시 유감이었다. 어쩌면 한안을 도울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한안과 부운석이 다시 사이가 좋아질 수 있다면 그럼 모든 것이 순리적으로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목풍에게 따로 탁월한 식견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런 천진한 방법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자신이 부운석과 정상적으로 말할 수 있다면 구태여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을까. 부운석이 말하려 했다면 벌써 말했을 것이다. 그들 사이의 문제는 한마디 말로 이야기하기에는 부족했다.

목풍의 말은 한안을 일깨웠다. 부운석은 비록 한안에게 많은 일을 알려주지 않았지만 한안은 그에게 분명하게 말을 해야 맞을 것이다. 부운석이 이림나를 처로 맞으려는 뜻이 굳건하면 그를 포기할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한안도 철저하게 그를 단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이미 체념에 가까워져 있었다.

“가자.”

그녀는 목풍에게 말했다. 목풍은 서둘러 앞에서 길을 안내했다. 급람과 주홍은 물건을 챙기러 돌아갔다. 목풍의 표정은 어색했다. 어쩌면 한안을 위로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스로 적절하지 못한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매우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말했다.

“장 소저, 어젯밤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아가씨께서 정말로 낯선 남자와…….”

목풍은 뒤의 말을 꺼내지 않고 한안의 표정을 관찰했다. 한안은 차갑게 웃었다.

“자네도 듣지 않았을까? 온 경성이 다 안다는데. 내가 낯선 남자와 하룻밤을 머물렀다고.”

“분명 사실이 아닐 겁니다. 소저께서는 그런 분이 아니시지요.”

목풍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는 한안이 세속에 물들지 않고 자신의 정조를 지키는 사람이라 믿었다. 당초 왕야께서 아내로 맞겠다 하셨을 때 한안은 즉각 승낙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 왕야보다 더 좋은 사람은 없는데도 말이다. 왕야에게도 그렇게 거리를 유지했는데 하물며 다른 남자는 오죽하랴. 게다가, ‘일생일세 첩을 받아들일 수도 통방을 거둘 수도 없다.’는 말을 꺼낼 정도로 충성과 절개를 요구하는 사람이니, 자신 스스로도 분명 한결같을 것이다.

“자네는 자네가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가?”

한안이 입술을 끌어올리며 웃는데, 표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냉담했다.

“자네 주인조차 나를 이해할 수 없는데, 자네가 또 무얼 알까. 어젯밤의 일은 사실이네.”

목풍은 굳어져서는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한안을 보았다. 한안은 목풍을 그대로 지나쳐 앞을 향해 걸어갔다.

두 사람이 앞뒤로 해서 서재에 도착했다. 목풍이 막 통보하려 들어가려는데, 바깥에서 문을 지키는 시위가 가로막았다. 목풍은 눈살을 찌푸리고 말했다.

“왕야께 통보할 일이 있다.”

그 시위는 아무 악의도 없었다. 다만 목풍의 직위가 그보다 높지만, 평소에는 늘 히히 하하 웃는 터라 화가 잔뜩 났으리라 짐작하지 못했을 뿐. 목풍의 얼굴빛은 좋지 않았고 말투도 꾸짖듯 사나웠다. 시위는 난처해하며 말했다.

“왕야께서 지시하시기를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게다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낭랑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제 보니 장 소저셨네요.”

한안은 고개를 돌려 보았다. 화려한 차림새의 예쁜 여종이었다. 입꼬리는 멈추지 않고 위로 들려 올라갔고, 말투는 오만방자했다.

“안에서는 우리 공주께서 왕야와 말씀 중이세요. 소저가 기다릴 수 없으면 먼저 돌아가 봐도 돼요.”

한안은 담담하게 그녀를 보았다. 부운석의 서재에는 평소에도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자신도 알고 있었다. 예전에 자신과 부운석의 관계가 좋을 때는 부운석이 친히 문을 지키는 시위에게 한안은 막을 필요가 없다고 지시했었다. 덕분에 한안은 이따금 서재 안에서 부운석의 친구인 성뢰 장군을 볼 수 있었고 서재가 일을 상의하는 곳이라 짐작했다. 그러나 지금, 부운석은 이림나를 서재로 들이고 자신을 막았다.

여종은 이림나의 측근 임랑이었다. 이림나와 임랑은 처음부터 한안을 눈에 거슬려했다. 이림나가 부운석을 좋아한다는 것은 서융 전체가 다 아는 일이었다. 그러던 중 공주는 한안이 머지않아 현청왕비가 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가 대단한 미인이었다면, 이림나도 어쩌면 받아들이기 쉬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평범하고 특별할 것이 없었다. 용모를 논하자면 서융에는 한안보다 아름답고 요염한 이가 널려 있어 한안이 맘에 차지 않았다. 게다가 임랑 자신도 부운석을 흠모한 지 이미 오래였다. 대종의 풍습과 서융의 풍습이 그다지 비슷하지는 않지만, 나중에 부운석이 자신을 통방으로 거두어줄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았다. 그런저런 이유로 임랑은 자연히 한안에 대해 불만이었다. 그런 까닭에 한안을 보는 표정에도 멸시가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한안의 콧대를 꺾어 놓으리라 결심을 굳혔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한안은 아무런 내색 없이 임랑을 보고 있었다. 분노의 감정조차 없었다. 임랑은 의아하면서도 화가 났다. 서융의 여자는 외향적이고 불같이 사나운 편이라 상대방과 싸울 준비도 되어 있었다. 하지만 대종 여자들은 지나치게 연약해서 말만 하면 바로 눈물을 떨궈 괴롭히기가 아주 쉬웠다. 그런데 장한안은 자신의 말을 듣고도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어째서? 높은 자리에서 떨어진 사람이 가장 유지하기 어려운 것이 평정심 아닌가? 그들은 낙담하고 분노하며 불쾌해하는 법이니까. 그러나 이 여자는 언짢은 기색도 없네?

한안도 임랑의 말을 듣긴 했지만 그 말은 그녀에게 아무 영향도 주지 못했다. 임랑의 목적은 그녀를 격노하게 하는 데 불과했고 한안은 이미 장부에서 살아남을 때 참을성을 길렀다. 미 이낭과 주씨에 비하면 임랑 따위는 한안의 안중에도 없었다. 그녀는 부운석 서재 안의 동정이 궁금할 뿐이었다.

방금 전 목풍이 통보한 데다, 임랑이 고의로 자신의 이름을 크게 불렀으니 분명 방 안 사람의 귀에도 전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방 안에서는 몸을 일으켜 문을 여는 소리가 전혀 없었다. 이림나가 안에 없다면 모를까. 이림나가 안에 있는 이상, 부운석이 문을 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답이 거의 나온 것이다. 서융 공주가 부운석을 가로막아 문을 열지 않는 것으로 자신을 괴롭히려 하는 것이다.

한안은 거의 웃음이 나오려 했다. 그녀는 냉정하게 눈앞에 꽉 닫힌 방문을 응시했다. 자신이 장부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낭과 싸우고, 생부와 싸웠던 그때처럼 지금의 일을 대하고 있음을 알아차리자 고통스러운 감정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부중 싸움의 재미 속으로 빠져들면 작으나마 자신이 있을 자리를 찾을 수 있었으니 연약해져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누가 자기 머리 위에 소변을 보려고 한다면 누가 그것을 참을 수 있을까? 당연히 그럴 수 없다.

한안은 옅게 웃었다. 좋다. 부운석이 문을 열지 못하도록 지체시키겠다? 그럼 나는 기어코 당신이 자발적으로 나오게 하겠다.

임랑은 한안이 생각에 잠겨 자신을 안중에도 두지 않은 것을 보고 순간 약이 바싹 올랐다. 그녀는 한안을 보며 말했다.

“어째서 말을 하지 않죠? 너무 예의가 없네요! 왕야께서 당신을 원하지 않고 우리 공주를 아내로 맞으려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네요.”

목풍과 문 입구의 시위 모두 주저했고 난감했다. 한안이 웃는 듯 마는 듯 목풍에게 물었다.

“목풍, 자네가 왕부에서 여러 해 있었으니 자네에게 한 가지 일을 묻겠네.”

목풍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는 한안이 이 여자를 혼내주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록 임랑이 그녀를 싫어한다 해도 어디 한안의 적수가 될 수 있으랴. 그는 공손하게 한안을 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왕부에서 하인이 주인과 말다툼을 할 수 있던가? 현청왕부에 원래 이런 규범이 있는 줄은 몰랐네.”

그녀는 차갑게 웃었다. 말투도 어느덧 차갑게 변해 있었다.

“무슨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거예요.”

임랑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나는 당신의 종이 아니에요. 내 주인은 왕비세요. 당신이 뭐라고. 감히 내 주인이 되려는 거죠?”

“하하하.”

한안은 재미난 농담을 들은 것처럼 웃었다. 목풍은 가슴속이 서늘해졌다. 한안의 뒤이은 한 마디가 여종의 머리를 가격했다.

“네가 말끝마다 네 주인은 현청왕비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럼 너도 현청왕부의 사람이지. 왕부의 하인으로서 왕비만을 주인으로 인정하다니. 네 안중에는 왕야도 아니 계시는 것이냐!”

그녀는 입술을 끌어 올렸다. 마지막 말에 이르러서는 말투가 맹렬하기 그지없었다. 문을 지키는 시위도 놀라 멍해졌다.

“나…… 나는 당연히 왕야를 주인으로 인정하죠. 당신, 터무니없는 말 하지 말아요.”

임랑은 한안이 이렇게 말할 줄 짐작도 못 하여 당황했다. 장한안이 그녀의 말 속 허점을 낚아채어 트집을 잡은 것이다. 왕부의 사람으로서 왕야를 주인으로 두지 않는다는 것은 충성심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고 두 마음을 먹었다는 의미이니 왕부에서 내쫓길 수도 있었다.

한안은 그녀를 보았다.

“그래? 네가 왕부의 하인이라니 하는 말인데 나는 지금 여기에 머물고 있으니 왕야의 손님인 셈이지. 그런데도 네가 나를 비웃었어. 천하로 시야를 넓혀 봐도 너 같은 간교한 노비가 또 있을까? 네가 입으로는 왕야께 충성을 다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하는 일마다 현청왕부를 더럽히는구나. 겉으로는 따르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암암리에 어기고 있으니 설마 이게 너희 서융의 법도인 것이냐? 아니면…….”

그녀는 입술만 올려 웃었다.

“네가 근본적으로 다른 목적이 있어서 온 것이냐? 서융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임랑을 이렇게 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안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임랑을 압박하고 있었다. 기어코 반박하고 싶어도 서융 전체의 문제로까지 끌어올리니 섣불리 아무 말이나 할 수 없었다. 만약 자신이 한 말이 누군가에게 전해지면…….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녀는 즉각 긴장했다.

“난 아니에요. 당신, 함부로 말하지 말아요. 난 그저…… 난 그저…….”

“그래, 그래. 넌 그저 한순간 나에게 무례했던 거지. 너 한 사람의 문제일 뿐, 서융과는 무관하고. 맞니?”

한안이 다 안다는 듯 물었다.

목풍은 보면서 심장이 두근거리고 살이 떨렸다. 임랑은 목숨을 구해줄 지푸라기를 낚아챈 듯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네가 잘못을 범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냐?”

한안은 몸을 곧게 세우고 물었다.

‘서융’까지 들먹이자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던 임랑은 자신이 잘못했다고 한다면 국가 간 관계까지 번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설령 자기 혼자 전부 죄를 뒤집어쓰더라도 자기는 공주의 사람이니 자신을 어찌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임랑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소저에게 무례를 범했어요.”

한안은 입술을 살짝 오므렸다.

“좋다. 네가 나에게 사과를 했으니 나도 너를 용서해 주마.”

임랑은 멍해져서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들어 한안을 보았다. 한안이 이렇게 쉽게 그녀를 놓아줄 거라 생각도 못 했다. 아마 한안은 그저 자신을 겁주고 싶었던 것뿐이리라. 한안은 공주와 맞설 자격이 없었다.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니 두려워할 가치도 없는 것 아닌가. 그녀가 우스워 보였지만 말만은 공손히 했다.

“고맙습니다.”

“그러나.”

임랑의 말이 아직 끝나기도 전에, 한안은 자신의 말을 이었다.

“법규를 무시할 수는 없지. 우리 대종에서는 잘못을 하면 반드시 징벌하여 일벌백계하지. 왕부의 가규에 따라 곤장 30대를 내리겠다.”

임랑은 멍해졌다. 자신의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뭐라고 했어요?”

“너는 이 벌이 가볍다고 여기는 것이니?”

한안은 순수하게 웃었다.

“내게 너무 감사할 필요는 없어. 네가 자발적으로 벌을 좀 더 중히 하고 싶다면 나도 반대하지는 않으마.”

한안은 말을 마치고 목풍에게 분부했다.

“가서 사람을 불러오게.”

임랑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당신 미쳤어? 나는 공주의 측근 시녀예요. 당신이 어떻게 감히 나를 때려. 당신이 어찌 감히 공주께 불경하게 행동할 수 있어? 정말 간이 크네, 간이 커!”

임랑은 말을 마치자마자 한안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한안은 슬쩍 한 걸음을 비키며 몸을 뒤로 젖혀 임랑의 손을 피했다. 순간, 전광석화처럼 매화자가 이미 임랑의 목을 누르고 있었다. 한안은 낮은 소리로 임랑의 귓가에 말했다.

“주제를 모르는구나.”

바로 또 고개를 돌려 목풍에게 냉랭하게 말했다.

“주인을 기습했으니, 일백 대. 목풍, 네가 꾸물거리면 너도 벌을 받을 것이다.”

목풍은 바로 몸을 돌렸다. 한안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한안이 그를 벌하겠다 말하면 반드시 그를 벌할 것이다. 설령 공공연한 벌이 아니라 하더라도 최후에는 자신도 반드시 ‘벌’을 받게 될 것이었다.

임랑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놀라고 수치스러워 무공도 할 수 없으면서 여전히 날카롭게 소리쳤다.

“당신이 감히! 나를 놓아줘!”

“내가 감히?”

한안은 차가운 소리로 말했다.

“네가 말끝마다 공주와 서융을 들고나오는데, 너는 자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지? 일개 하인에 불과하면서 공주와 서융을 대표할 수 있다는 거야? 네가 정말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어리석은 것은 아니겠지? 일개 부리는 여종이 서융과 공주를 대표한다고? 내가 너에게 알려줘도 괜찮겠지. 지금 서융은 전쟁에서 패한 국가에 불과해. 너의 공주도 국가를 보호하기 위해 대종에 화해를 구하며 보내진 예물에 불과하고. 그저 하나의 물건일 뿐인데 존귀함을 말할 자격이 있을까?”

방 안에서 퍽 하고 꽃병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임랑은 멍청하게 한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눈앞의 여자에게 한 마디도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가 무엇이라 말하든지 간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이 여자는 줄곧 조용해서 남이 함부로 업신여겨도 그대로 둘 것만 같았다. 영원히 화를 낼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래, 확실히 화를 내지는 않았다.

임랑은 이 대종 여자는 괴롭히기 쉬운 사람이며 어쩌면 스스로 분쟁을 접고 고이 물러나고 싶어 할 거라고 여긴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한안이 이전에 그녀들을 상대하지 않은 까닭은 근본적으로 그럴 가치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끌고 가서 때려라.”

한안이 등을 돌리고 냉랭하게 말했다.

거친 일을 할 때 부리는 하인 둘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걸어와서 임랑을 붙잡아 긴 나무의자 위에 눌렀다. 두 손으로 긴 널판을 쥔 하인이 조금 망설이며 목풍을 한 번 보았다. 이 여자가 서융 공주의 여종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서융 공주는 곧 현청왕비가 될 텐데 지금 원한을 맺게 되어 나중에 왕비가 만약 추궁이라도 한다면……. 목풍이 그를 한 번 노려보았다.

“뭘 봐. 쳐.”

하인은 바로 이를 악물고 퍽 하고 널판을 내리쳤다.

임랑은 처참한 비명을 질렀다. 지금까지 서융에서 그녀를 이렇게 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이림나의 측근 여종이었고 평소에 사람들이 그녀를 보면 아부하느라 다른 것을 돌볼 틈이 없었으니 오늘 같은 육체적 고통은 언급할 것도 없었다. 이 모든 것의 원인은 그저 자신이 한안에게 말 한마디를 잘못한 것 때문이었다. 그녀는 한안이 감히 자신을 때릴 거라고는 예상도 못했다. 그녀는 정말 공주에게 죄를 짓는 것이 두렵지 않은 것일까?

한안은 웃는 듯 마는 듯 임랑을 보고 있었다. 깊고 그윽한 눈빛이 소리 없이 그녀에게 일러주고 있었다.

네가 이제 알았겠지. 내가 하는 말은 진짜란다.

몇 대 맞자 임랑의 비명소리는 돼지 멱따는 소리처럼 처절해졌다. 이런 비명소리를 듣지 않으려 하는 것도 어려웠다. 방 안에서도 당연히 지나칠 수가 없었다. 끼익 소리와 함께 서재의 문이 열리고 이림나가 안에서 걸어 나왔다.

“장한안, 네가 대담하게도!”

이림나가 한안의 앞으로 몇 걸음 걸어와 흉흉한 기세로 말했다.

한안은 옅게 웃었다.

“공주께서 과찬하시네요. 한안의 담은 아주 작아요. 그렇지 않았다면 방금 전에 직접 문을 밀고 들어갔겠지요.”

이림나는 그녀의 말속 뜻을 알아듣고 득의양양해서 말했다.

“그럼 또 어때? 아, 나와 왕야가 서재 안에서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으니 너 같은 외인은 자연히 들어오기 불편했겠구나. 너는 현청왕부가 어떤 곳이라고 여기는 것이냐? 네가 오고 싶으면 올 수 있는 곳?”

한안은 미간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말없이 평온하고 담담한 미소만 머금고 있었다. 분명 트집을 잡을 수 없는 표정이었지만 이림나는 그 무성의한 분위기를 알아차렸다. 그녀는 버들가지 같은 눈썹을 추켜세우고 임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하인에게 말했다.

“그만해!”

그 하인은 난처해져서 한안을 보고 또 이림나를 보았다. 이림나에게 죄를 지을 수는 없지만 한안은 이전에 왕야의 마음에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비록 왕야가 이번에 돌아오면서 어째서 마음이 바뀌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남자는 남자가 안다고 왕야가 한안을 보는 표정은 분명 아직 마음이 있어 보였다. 나중에 한안이 상황을 만회할 수도 있을 텐데 자신은 어째야 할까?

한안이 웃었다.

“손을 멈추어라.”

하인은 무거운 짐을 벗은 듯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한안을 향해 감사의 미소를 드러냈다. 이림나는 그 모습에 더 화가 나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자신이야말로 현청왕부의 여주인인데 왕부의 하인들이 시시때때로 고의인 듯 아닌 듯 한안이야말로 진정한 현청왕비라고 자신에게 일깨우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한안이 여기에서 꼬박 1년을 살았고 그래서 하인들이 그녀에게 정이 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인들의 마음속에 일단 한안의 명망이 세워지면 곧 자신이 현청왕부의 주인이 된다 한들 어떻게 사람들이 자신을 믿고 따르게 할까? 모두가 한안이야말로 왕비라고 여길 것이며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다. 지금 저 하인이 한안에게 복종하는 것을 보니 그녀의 마음속에 불쾌감이 맹렬하게 자라났다. 한안을 보는 눈빛 또한 질투로 가득했다.

“장한안, 네가 무슨 근거로 내 시녀를 때려?”

이림나가 추궁했다. 임랑은 그녀의 사람이다. 한안이 자신의 면전에서 자기 사람을 때리는 것은 이림나의 얼굴을 치는 것과 같았다. 그녀는 일부러 서재 문을 열지 않으므로 한안이 망신을 당하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한안이 서재 밖에서 공개적으로 자기 시녀를 때릴 줄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자기가 서재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면 서융 공주는 연약하고 만만하다고 말들 할 게 뻔했다. 더 중요한 것은 방금 전 한안이 밖에서 한 말이 구구절절 이림나의 귀에 들려왔다는 것이다. 한안은 서융을 비웃고, 자신을 비웃었다. 그녀는 자신을 경멸했다. 이림나에게 있어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높은 곳에서 군림하는 데 익숙했으니 남에게 모욕을 당하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이 일을 트집 잡아 한안을 괴롭힐 셈이었다.

한안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공주 폐하께서 모르시는 게 있습니다. 이 시녀가 공주의 측근임에 기대어 악랄하게 행동하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더구나 제 앞에서 저를 모독했지요. 더욱이 공주의 뜻이라고 말하면서요. 서융 사람들 모두 이런 습속인지요? 저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분명 이 못된 노비가 공주를 모함하려는 거라고 말이에요. 그래서 공주를 대신해 이 못된 노비에게 교훈을 주고 있었던 거죠.”

그녀는 가뿐하게 모든 잘못을 말끔히 몽땅 그 시녀에게 떠넘겨 버렸다. 이림나는 어떻게도 할 수가 없었다. 만약 그녀가 시녀를 징벌하지 않겠다고 하면 자신이 임랑을 시켜 한안에게 말썽을 부리게 했다고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된다. 물론 임랑이 벌을 받는 것도 달갑지 않았다. 이림나는 어쩔 수 없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임랑이 그랬을 리 없어. 분명 네가 모함한 거야.”

한안은 옅게 웃었다.

“공주 폐하께서는 한안을 잘못 탓하시는 겁니다. 알다시피 방금 전 한안과 이 시녀의 대화는 서재 안의 사람들도 다 들을 수 있었죠. 왕야와 공주께서 듣지 못하셨어도 목풍 시위가 있지 않나요? 목풍, 내 말이 거짓인가?”

난데없이 지명을 당한 목풍은 속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하는 수 없이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장 소저의 말씀은 거짓이 아닙니다.”

한안은 이림나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손을 펼쳐 보였다.

“보세요.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죠. 사실이 이렇답니다.”

이림나에게는 어찌해 볼 방법이 없었다. 한안을 상대하기에는 자신이 무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력을 빼고 논하자면 그녀는 장한안을 이길 방법이 없었다. 장한안이 무섭기까지 했다. 보기에는 조용한 것이 서융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독사 같았다. 보기에는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독성이 맹렬하여 한 번 물리기만 하면 살아날 가망성이 없는 독사. 한안도 똑같았다. 일단 그녀에게 찍히면 다시는 회복할 가능성이 없는 것이다. 저도 모르게 이림나는 이미 한안에게 한 수 접어주고 있었다.

이림나가 모르는 것은 한안의 독함은 전생에서 흘린 피와 눈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녀의 계략 하나하나는 대저택에서의 아귀다툼에서 목숨을 걸고 살아남기 위한 무기였다. 모든 것을 수하가 대신해서 계책을 도모하고 서융 왕실 높은 곳에서 군림만 하던 공주에게 이런 비인간적인 생활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림나는 그저 한안의 독함만을 볼 수 있을 뿐, 연약함은 볼 수 없었다.

연약함을 누구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 한안은 담담하게 웃었다. 잘 살아가기로 결정한 후부터 그녀는 모든 연약함을 거두어들여야 했다.

이림나는 한안을 죽일 듯이 노려보다가 입술을 치켜들며 웃었다. 미모가 워낙 뛰어난 이림나였으나 평소에는 대개 고압적인 얼굴이라 미모의 일부는 그에 가려져 있었다. 그녀가 웃자 꿀빛 피부에는 광채가 떠올랐고 유리알 같은 눈알이 휘황찬란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사람을 흔드는 교태와 아름다움이었다.

“방금 전 너희들의 말을 나도 확실히 들었지. 하지만 임랑의 말도 옳아. 듣자 하니 장 소저가 어젯밤 밤새 돌아오지 않았고 낯선 남자와 함께 여관에서 하룻밤을 꼬박 머무는 게 목격됐다던데.”

마침내 딱 이 지점에 이르렀다. 한안은 마음속으로 웃었다. 서융 공주가 언제쯤에야 이 일을 자발적으로 언급할까 생각했는데 오래 참지도 못하는구나. 한안도 도대체 누가 이 소식을 퍼뜨린 것인지 알고 싶었다. 처음에는 탁칠인가 여겼지만 지금 보니 이림나일 가능성이 더 높았다. 그녀가 사람을 시켜 자신을 미행하게 한 게 아닐까? 한안은 마음속으로 멈칫했다가 이내 마음이 후련해졌다. 미행했으면 또 어때?

“이림나.”

냉랭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부운석이 언제인지 모르게 서재에서 나와 그녀들 앞에 서서 냉담한 목소리로 불렀다.

아주 오래 부운석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한안은 그를 보았다. 그는 현색 장포를 입고 있어서 얼굴빛이 그와 대비되어 좀 더 창백해 보였다. 그는 적지 않게 야윈 듯했고 눈과 눈썹, 그리고 표정은 더욱 무심해졌다. 그가 일부러 나와서 이림나의 말을 저지시킨 것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이림나는 멍해졌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부운석이 그녀의 말을 끊은 것이 대단히 불만스러운 것 같았다. 그녀는 곧 교태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내 말은 틀린 데가 없어요. 왕야 당신도 아시잖아요, 그녀가…….”

“공주 폐하.”

한안이 돌연 입을 열어 말했다.

“기왕 당신이 이 일을 아신다니 그럼 묻지요. 나와 함께 하룻밤을 머물렀던 남자가 바로 당신의 오라버니, 서융 황자인 것도 아시는지요?”

모든 사람이 멍해졌다. 목풍은 놀라 마지않았고 이림나는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돼. 너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가장 냉정한 사람은 부운석과 한안 두 사람이었다. 한안은 자신이 하는 말이 부적절하다고 생각지 않았기에 냉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림나를 보아하니 탁칠의 일을 알지 못한 것 같아 뜻밖이라 조금 이상했다.

부운석의 눈빛이 번뜩이며 묵묵히 한안을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침착한 것이 그런 일 따위 마음에 두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황형이 어떻게 너와 함께 있을 수 있어?”

이림나가 물었다.

“간단하죠. 내가 그를 구했기 때문이에요.”

한안이 냉랭하게 말했다.

“공주 폐하께서는 아주 즐겁게 살아가시는 동시에 잊지 마셔야 할 게 있습니다. 여기는 대종이고 무슨 일이든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요. 오늘 당신의 황형을 노렸던 사람이 내일은 바로 당신을 노릴 수 있어요.”

그녀는 옅게 웃었고, 표정은 태연자약했다. 마침내 마음의 결정을 내린 것 같았다.

“그리고 저는 함께 할 수 없겠네요.”

“무얼 하려는 것이냐?”

뜻밖에도 줄곧 침묵하고 있던 부운석이 입을 열어 말했다. 그의 눈빛은 살을 엘 듯 차가웠고 깊었으며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띠고 있어 보는 사람을 두렵게 만들었다.

그녀는 홀가분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돌아가겠습니다, 왕야.”

부운석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러나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그녀를 보고만 있었다. 한안은 옅게 웃었다.

“성지가 내리기를 기다렸다가 떠나려 했어요. 하지만 제가 지금, 마음이 바뀌었네요.”

이림나는 멍해졌다. 그녀는 한안이 돌아와서 말썽을 일으킬 거라 생각했다. 한안이 현청왕부를 떠나겠다는 말을 먼저 꺼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한안에게 부탁한다 해도 이룰 수 없는 일이었는데. 한안이 배려라는 걸 아는 건가?

“너 같은 외인이 왕부에 있는 것은 맞지 않지. 나와 왕야의 은애에 방해가 되니까 말이야.”

한안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고개를 반대 방향으로 돌려 떠났다. 그녀는 걸음을 조금도 서두르지 않았다. 연약한 뒷모습은 보기에 이상할 정도로 확고하고 꿋꿋했다. 옆에서 바라보는 목풍의 눈에는 한안이 영원히 그들의 인생 밖으로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는 불안하게 고개를 돌려 부운석을 한 번 보았다. 부운석은 그저 한안의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눈동자 속에 은은하게 한 줄기 슬픔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 눈 깜짝할 사이에 바로 사라졌다. 그러나 목풍의 눈에는 포착되었다. 그는 의혹에 차서 부운석을 보았다. 왕야께서 이러시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한안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이림나는 그제야 임랑의 곁으로 걸어가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정말 멍청해. 작은 일 하나 제대로 못 하고 도리어 그녀에게 약점이나 잡히다니. 보아하니 너를 내 옆에 남겨두어서는 안 되겠다.”

임랑은 멍해졌다가 서둘러 말했다.

“공주, 노비를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이후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이림나는 차갑게 코웃음을 치고는 서둘러 부운석의 곁으로 가서 그의 팔에 팔짱을 꼈다.

“그녀가 마침내 갔네요. 이제 왕부 안이 깨끗해졌어요.”

부운석은 자신의 팔을 그녀의 손에서 빼내고 담담하게 말했다.

“앞으로 제멋대로 굴지 마라.”

그의 퉁명스러운 말투에 화가 났지만, 이림나는 오히려 웃었다.

“이건 무슨 뜻이죠? 그녀가 가는 걸 보니 기분이 언짢나요? 따라가고 싶어요? 하지만 그녀는 어젯밤 내 오라버니와 꼬박 하룻밤을 머물렀어요. 그렇게 경박하고 지조 없는 여인을 아직도 원해요? 당신들 대종은 정절과 예의, 격식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닌…….”

“입 다물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부운석이 말을 잘라버렸다. 당황한 이림나가 고개를 들자 부운석의 칼날처럼 차가운 눈빛과 딱 마주쳤다.

“이 왕부는 아직 네 차지가 아니다.”

이림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두렵기도 했지만 달갑지도 않았다. 조금 전 서재에 있을 때 한안을 문밖에서 거절하고 싶었지만, 부운석이 반대했다. 만약 부운석이 아직………. 그녀는 고개를 홱 들었다.

“당신 잊지 말아요. 만약 내가 아니라면…… 당신은…….”

“목풍.”

부운석은 바로 그녀의 다음 말을 잘라버렸다.

“공주를 처소로 모셔라.”

말을 마치고 소매를 떨치고 가버렸다.

부운석은 바람처럼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겨진 것은 화가 나서 부르르 떠는 이림나와 어찌 할 바를 모르는 목풍이었다. 목풍은 이림나가 불만스러웠다. 이렇게 제멋대로 일을 벌이다니. 인간사의 고통을 겪어보지 못한 응석받이 공주가 어디 왕야에게 어울리기나 할까? 그는 여전히 장가 소저가 좋았다. 조용하게 모든 일을 잘 안배하며 일을 처리하는 데도 수완이 있는 소저. 에구, 이 사람은 장가 소저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구나.

한안이 방에 도착했을 때, 급람과 주홍은 이미 물건을 다 챙겨서 방을 나오고 있었다. 한안은 자신이 1년 동안 지낸 방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방은 그녀에게 익숙하면서도 안정감을 주었다. 이곳에서는 심보가 악독한 이낭과 음흉한 속내를 품은 부친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떠나게 될 줄은 그녀도 생각지 못했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정말 몹쓸 감정이리라. 사람에 익숙해지고, 일에 익숙해지니, 변화가 생기려 할 때 받아들이기 이리 어려우니 말이다.

급람은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한안을 보았다. 그녀는 한안이 왕부를 떠나면서 조금이라도 아쉬움과 슬픔을 드러낼 거라 여겼다. 급람이 인생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바로 한안이 슬픈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소저의 슬픔은 급람 자신이 상심했을 때보다 더 슬펐다. 그러나 한안은 그저 담담하게 방 안의 모든 것을 둘러보았다. 추억하는 듯했다. 아쉬움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주홍은 마음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소저는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내려놓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가치 없다고 느끼는 일에 많은 감정을 낭비하지 않았다. 현청왕부가 아무리 좋다 해도 상황이 바뀌었으니 다시는 소저에게 따뜻한 곳이 될 수 없었다. 그러니 버린들 또 무슨 상관일까. 다른 사람이 베푸는 행복은 필요 없다. 행복은 본래 자기가 쟁취해야 하는 것이니.

한안은 생각 끝에 소매 속에서 물고기 꼬리 비녀를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비녀의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마땅하리라.

“소저, 우리가 이렇게 돌아가면, 노야께서…….”

급람은 걱정이 되었다. 지금 바깥에 도는 한안에 대한 소문은 듣기 많이 거북했다. 모두 한안을 부정하고 불결한 버림받은 여인으로 알고 있었다. 아마 길을 걸어갈 때 사람마다 욕을 할지도 몰랐다. 장사양은 체면이 가장 중요한 사람인데 한안이 그의 체면을 구기게 했으니 한안을 죽일 듯 증오하지 않을까?

게다가 미 이낭과 주씨 자매 모두 한안과 관련되어 처참한 말로를 맞았으니 어쨌든 장사양이 한안 편을 들 리는 없었다. 오히려 장사양은 한안에게 호된 타격을 줄 기회라 여길지도 몰랐다. 바깥사람들은 모르겠지만 급람과 주홍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장사양은 한안을 딸로 대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타고난 원수 대하듯 했다. 한안이 장부로 돌아가면 현청왕부에 있는 것에 비해 편안하리라 할 수는 없었다.

“뭐가 두려워?”

한안은 급람의 걱정하는 모습에 웃음을 자아냈다.

“저 서융 공주조차 두렵지 않은데, 아직도 그가 두려워? 그의 관직은 당당한 공주에 비할 바도 못 되는데?”

“하지만 소저.”

급람은 조금 헷갈렸다.

“이전에 소저께서 서융은 패전국에 불과하고 공주는 패전국이 바치는 예물일 뿐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어요? 그런데 어째서 지금 말씀은 공주가 금처럼 귀하다고 하는 것 같을까요?”

급람은 한안의 말에 의심을 품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한안이 임랑에게 한 말을 급람은 진짜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는 이림나와 임랑이 대종의 국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속아 넘어간 것에 불과했다. 게다가 서융이 패전국인 것은 맞으니 그녀들의 심정을 이용해서 한안의 말을 진짜로 믿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현재의 서융에 대해 논하자면 대종도 만만히 여길 수 없다고 여길지 몰랐다. 꼬박 1년을 양보 없이 대치하며 전쟁을 끌었으니 서융의 국력도 대종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친이 이루어질 수 있던 까닭은 두 국가의 힘이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었다. 만약 대종이 정말 실력이 있어 서융을 완전히 이길 수 있었다면 화친 조건을 받아들일 리 없었다. 그런 까닭에 황상이 이림나를 패전국의 예물 취급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오히려 이림나를 대접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건 내가 그녀를 겁준 거야. 공주가 그보다 훨씬 더 영예롭지.”

한안은 웃었다. 한안은 지금 장사양을 ‘부친’으로조차 부르지 않았다. 장사양이 자신에게 부친의 책임을 다한 적이 없으니 자신도 그를 부친이라 부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이유는 이미 무의식적으로 장사양이 자신의 생부가 아닐 거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벽이 죽으면서 고의인 듯 아닌 듯 흘린 그 정보들은 수상쩍은 점이 많았다. 한안은 1년 전 부운석에게 건넸던 비단 손수건을 떠올렸다. 당시 부운석은 비단 손수건이 당문 사람의 소유물이라는 것을 조사해낸 후, 더는 알아낸 것이 없었다. 그 후 부운석이 전쟁에 나가면서 이 일도 점점 흐릿하게 잊혀졌다. 부운석이 돌아오긴 했지만 지금 관계로 볼 때, 한안을 도와 계속해서 이 일을 조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 한안이 직접 조사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조사해야 할까?

“소저.”

주홍이 한안의 생각을 끊었다.

“우리 가지요.”

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따리를 들고 앞장서서 문을 넘었다. 이상한 것은 조금도 슬픔이나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많은 일이 엮여 있어서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힘들었다. 그러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 것은 절대 그녀의 성격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규명할 수 없고 흐리멍덩한 결말이라면, 아마 하늘만이 알겠지.

현청왕부의 대문을 걸어 나올 때, 누군가 뒤에서 묵묵히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렸지만 아무도 없었다. 급람과 주홍이 의혹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한안은 웃었다.

“가자.”

어쩌면 자신의 환각일지도 모른다. 환각 속에 한 사람이 묵묵히 자신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는지도. 또 어쩌면 미련의 눈빛이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

황궁 안.

천자는 명당(明堂: 국왕이 의식을 행하던 궁정) 높이 앉아 있었다. 금룡을 수놓은 노란 옷이 바닥에 길게 끌렸다. 1년 전에 비하면 그의 얼굴에는 풍상을 겪은 흔적이 적지 않게 늘어 있었다. 눈썹 사이에 무겁게 가라앉은 기색이 가득한 것이, 골치 아픈 일, 해결 방법이 없는 일을 만난 것 같았다.

대전 위에 은색 갑옷의 장군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성뢰는 머리를 파묻고 한마디도 하지 않고 무릎을 꿇고 있었다. 윗전이 움직이지 않으니 그도 감히 일어나지 못하고 그저 묵묵히 꿇어앉아 있을 뿐이었다. 얼마나 오래 꿇어앉아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윗전의 느릿한 목소리가 들렸다.

“성 장군.”

“여기 있습니다!”

성뢰가 공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황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짐이 듣기로 장한안이 자발적으로 현청왕부에서 나갔다 한다.”

성뢰의 몸이 떨렸다. 이렇게 빨리? 하지만 한안이 어떻게 자발적으로 그럴 수가…….

“그녀가 뜻밖에 자기 처지를 정확히 아는 능력이 있구나.”

천자의 말투에는 기쁨도 노여움도 드러나지 않았다.

“짐은 그녀가 시간을 끌다가 성지를 내리고서야 떠날 거라 생각했다.”

성뢰는 대답이 없었다. 사실상, 지금 그가 무슨 말을 해도 천자에게는 다 틀린 말일 터이니 그저 묵묵히 경청하기만 했다. 그러나 황상은 그를 놓아줄 뜻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너는 짐이 장한안을 어떻게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모르겠습니다!”

천자의 마음은 본래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앞의 이 사람은 부운석의 형제이니 어리석을 리가 없었다.

“모른다?”

황상이 차가운 소리로 말했다.

“현청왕이 설마 말한 적이 없더냐? 그는 짐이 장한안을 어떻게 처리할 거라 생각하느냐?”

“왕야께선 언급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 말은 사실이었다. 부운석은 이 일을 자신에게 전혀 알리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성뢰도 그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이 국면에 부운석도 분명 마음이 편할 리 없을 것이다.

황상은 그를 한 번 보고 말투를 무겁게 끌어 내렸다.

“짐은 너와 현청왕이 가깝게 지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후 너는 그의 거동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가 만약 무슨 일이든 있거든 바로 짐에게 고하라.”

이 말은 성뢰가 황상의 밀정이 되어야 한다는 암시였다. 성뢰는 거절하지 않았지만 대답하지도 않았다. 그러다 돌연 입을 열어 말했다.

“황상, 한 가지 생각이 있사온데 아뢰는 것이 맞는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황상은 냉랭하게 그를 보았다.

“말하는 것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그럼 말하지 말아야지.”

성뢰가 침묵한 것을 보고 그는 초조하게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말하라!”

성뢰가 공손하게 대답하고 말을 이었다.

“황상의 이번 일은 왕야를 생각하신 것일 테지요. 하지만 왕야를 여러 해 따르는 동안 보아온 성격으로 볼 때, 왕야는 남에게 좌지우지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설령 지금은 그가 어떤 일을 하도록 통제할 수 있겠지만 이 세상에서 그를 영원히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나중에 그를 통제할 수 없을 때가 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두 사람은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성뢰의 말을 듣고 황상의 얼굴빛이 순간 가라앉았다.

“그가 짐을 의심하고 있느냐?”

“감히 그리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황상이 바로 차갑게 말했다.

“이것은 네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 가보거라.”

성뢰가 이를 악물었다.

“네.”

성뢰는 몸을 굽힌 다음 물러나 나갔다. 황상은 명당 위에 높이 앉아 표정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성뢰의 말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부운석은 패기가 하늘보다 높으니 이 세상에 무엇이 그를 꼼짝달싹 못 하게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자신도 어쩔 수가 없었다. 설령 이 일이 없어도 부운석과 장한안은 함께 할 수 없었다. 부운석은 장한안을 좋아했다. 그가 여자를 좋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리라. 황실 사람은 본래 정이 많아서는 안 된다. 미칠 듯이 푹 빠지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라 할 수 없었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에 슬프면서도 망연자실한 빛이 드러났다. 생살여탈권을 손에 쥔 천자도 드물게 연약한 감정을 드러낼 때가 있었다. 모비, 제가 이렇게 하는 것이 도대체 옳은 걸까요, 아니면 그른 걸까요?

21장

장부 안.

청추원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그러나 방안은 온통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 하인들이 청소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그녀, 장한안을 내버린 것인지도 몰랐다. 청추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장부의 하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놀리고 비웃는 표정이 가득 해 급람과 주홍은 몹시 불쾌했다.

다행히 장사양은 오늘 부중에 없었다. 동료의 집에 손님으로 간 것 같았다. 흔하지 않은 일이라 신기하기만 했다. 장사양의 벼슬길은 이미 1년 전에 가망이 없다는 선고를 받은 것과 같은데 아직 그를 초청하는 동료가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한안은 생각에 잠겼다. 이 동료라는 게 실로 너무 공교로웠다. 자기가 막 장부에 돌아왔는데 동료가 장사양을 초청하다니. 어쩌면…….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너무 오래도록 편안하게 살아서 자기 신변에 호시탐탐 노리는 사람들이 아직 많다는 것을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후를 꼬박 들여서 청추원을 정리했는데도 장사양은 돌아오지 않았다. 날이 저물어 저녁이 되었다. 한안은 주방에 몇 가지 간단한 반찬을 만들게 하여 편안히 먹고 뜰 안의 등나무 의자로 옮겨가 차를 마셨다.

사실 차를 마시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잠이 오지 않았다. 바깥은 싸늘한 바람이 불어 머리를 맑게 해주었다. 그녀에게는 해야 할 많은 일이 있었다. 이틀 뒤면 양기와 내기한 날이었다. 하늘에서 폭우가 내릴 것이고 수해가 한창일 것이다. 양기가 그녀의 말을 믿는다면 그의 입에서 많은 정보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황상이 명을 내려 이림나를 부운석과 화친하게 하려는 일은……. 지금 생각하니 의문점이 상당히 많았다. 천자가 신뢰를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 말을 바꾸게 만든 게 무엇일까? 한안의 뇌리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바로 태후.

그럼 자신과 탁칠의 일을 퍼뜨린 것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7황자일까?

한창 생각하고 있을 때, 등 뒤에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다음 순간 눈앞에 익숙한 인영이 출현했다. 탁칠이 하하 웃으며 그녀를 보고 있었다.

“꼬마, 너 어째서 돌아왔지?”

한안은 냉랭하게 말했다.

“당신 동생에게 자리를 비워 주기 위해서죠.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그녀가 어떻게 현청왕비가 되겠어요?”

탁칠은 이미 한안의 비꼬는 말투에 익숙해진 듯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했다.

“어제의 일은 고마워.”

탁칠은 자신이 깨어났을 때를 떠올렸다. 한안은 탁자 위에 엎드려 잠을 자고 있었다. 사실 정신을 잃기 전에는 한안이 몸을 돌려 바로 가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한안이 목적성이 아주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짧은 시간 안에 자신에게 돌아올 이해득실을 명확하게 계산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자신을 구한 것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한안에게 아무런 이익도 없었다. 그녀에게는 자신을 구하지 않는 게 이득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데려다주었다.

탁칠의 인생에 부상이란 흔했다. 전쟁터에서, 전쟁터 밖에서, 적이 준 것, 친구가 준 것. 그때마다 이를 악물고 억지로 버티어 넘길 뿐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몸 위에 칼자국을 알아차릴 리 없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늘 사람의 겉모습만 보니까. 그러나 제아무리 빛나는 겉모습이라 해도 가릴 수 없는 상흔이 있었다.

한안이 자신을 지키고 있을 때, 탁칠은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아주 오래전에 가져본 적이 있던 낯선 느낌. 그러나 부친이 돌아가신 후로 다시는 그런 느낌을 가져보지 못했다. 이렇게 여리고 작은 꼬마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들다니.

그것은 탁칠이 몹시 그리워하던 것이었고 그는 그것을 다시는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어제의 일을 온 경성이 다 알던데. 당신이 한 짓인가요?”

한안은 그와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나 아니야.”

탁칠의 대답은 아주 명쾌했다.

한안은 그의 표정을 주의 깊게 살폈다. 그는 거짓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 한안은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이상하게도 그 일이 당일 바로 퍼졌단 말이지.”

탁칠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래서 네가 왕부에서 나온 거야?”

“완전히 그것 때문은 아니에요.”

한안은 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많은 원인이 있었죠. 하지만 이 일은 확실히 당신 때문이죠. 나는 이미 두 번이나 구해줬어요. 당신은 내게 빚이 두 개나 있어요.”

“아니, 하나야.”

한안의 눈빛을 마주하며 탁칠이 웃었다.

“나는 이미 빚 하나를 갚았어.”

“언제요?”

한안이 물었다.

“지난번 봄 제사 때. 네가 사람에게 쫓겨 벼랑 가에 다다랐을 때, 도운 게 나야. 어때? 이걸로 빚 하나는 갚은 셈이지?”

탁칠이 웃으며 한안을 보았다.

그였구나. 누군가 자신을 비밀리에 도운 것을 느끼긴 했었다. 하지만 자신을 도왔으면서도 어째서 모습을 나타내려 하지 않는지 이상하게 여겼다. 지금 생각하니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당시 서융과 대종은 대립하는 상태였고, 탁칠은 적국의 사람으로 대종에 잠복하고 있으니 당연히 나타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설령 그가 정말 모습을 드러냈다고 해도 오히려 자신을 물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게 되었을 것이다. 모두들 장한안이 서융인과 한데 결탁했다고 여겼겠지.

“설령 그렇다 해도 당신은 아직 내게 빚이 하나 있어요, 아닌가요?”

탁칠의 푸른 눈동자가 반짝했다.

“너 나한테 어떤 보답을 원하는데? 내 몸과 마음을 바칠까?”

탁칠은 바보가 아니었다. 한안의 말은 분명 그가 무슨 일인가를 해주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한안이 목적이 있어서 자신을 구조했다고 생각하니 불쾌해졌다. 그러나 한안이 이 일에 심복이 아니라 그를 찾은 것을 보니 이 일은 어쨌든 그녀 자신이 나설 수 없는 일인 듯했다. 적어도 한안이 여전히 자신을 신임하는 것이니 그녀가 부운석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한안이 웃었다.

“그쪽 몸과 마음은 됐고, 당신이 나를 도와 한 사람을 조사해주길 원해요.”

“어떤 사람?”

탁칠이 한안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이 사람의 이름 자 중에 교자가 있어요. 당문과 관계가 있고요.”

탁칠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잠시 후 말했다.

“당문은 강호 중의 문파지? 네가 이 사람을 조사해서 뭐 하게?”

한안은 옅게 웃었다.

“그건 당신이 알 필요 없어요. 해줄 건가요?”

탁칠이 입술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당연히 해주지. 그런데 이 일을 처리해서 성사해내면 너는 내게 어떻게 감사할 거야?”

“당신은 정말 재밌는 사람이네요. 이 일을 성사하면 내게 빚을 갚는 것뿐이니까, 빚이 말끔히 청산되는 거죠. 어떻게 또 감사를 말할 수 있어요?”

탁칠은 한안의 표정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웃는 듯 마는 듯 말했다.

“꼬마, 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단순한 빚 하나 갚는 것뿐인 게 분명해?”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부드러워졌다.

“나에게 어떻게든 감사할 필요는 없어. 다만 우리가 서로 도왔으니 지금은 친구라고 할 수 있잖아. 친구를 위해 돕는 것은 당연한 거야. 너 친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그의 말투는 진실했다. 서융 황자라는 신분 없이, 그는 탁칠이라는 사람, 그 자체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안은 어젯밤 탁칠이 혼미한 중에 자신의 손을 잡았던 것과 그의 연약한 모습을 떠올렸다. 한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을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탁칠은 불쑥 소리 내어 웃었다.

“너는 내가 대종에서 사귄 첫 번째 친구야. 또 마지막 친구일 거고.”

한안은 눈살을 찌푸렸고 탁칠은 말을 이었다.

“나 먼저 갈게. 소식이 있든 없든 이틀 후에 또 올게.”

그러더니 한마디 더 붙였다.

“몸조심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든 상관하지 말고.”

한안은 순간 당황했다. 그는 바로 뜰에서 사라졌다. 그는 정말 장부를 자기 집 후원처럼 여기는지, 아무 간섭도 받지 않고 드나든다.

주홍이 조금 의혹에 차 말했다.

“소저, 어떻게 그 일을 그에게 맡기신 건지요? 소저 정말 그와 친구가 되시려는 건가요?”

“친구가 되면 또 어때?”

대답한 것은 급람이었다.

“그는 서융 황자야. 황자지만 드물게 거드름도 피우지도 않지. 키 크고 잘생긴 데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살뜰하게 챙기고. 지난번 봄 제사 때 그가 돕지 않았으면 우리 소저께 무슨 일이 생겼을지 모르잖아.”

한안은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급람이 탁칠을 어디까지 칭찬하는 건가 싶었다. 한안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가 그를 속인 거야.”

한안이 탁칠에게 이 일을 조사하라 요구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탁칠이 대종에 있으려면 많은 일에 제약이 있을 것이고 각종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 밀정을 안배해 놓았을 것이다. 탁칠의 사람들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탁칠이 매번 맞닥뜨리는 사건을 능숙하게 대응하는 것을 보면 밀정들의 역량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탁칠이 조사를 한다면 어쩌면 부운석이 조사한 것보다 더 효과가 좋지 않을까 싶었다.

탁칠의 연약한 모습에 잠시 마음이 아프긴 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모든 일이 ‘동정’으로 도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동정도 물론 일부분 있기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탁칠은 이용 가치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사람과 친구가 되는 것은 무릅써야 할 위험이 너무 컸다. 설령 탁칠의 말이 진심이라도 좋고 거짓이라도 그만이다. 한안에게 있어 친구란 시간으로 증명해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탁칠과 그녀가 알아온 시간은 너무 짧았다. 그래서 기껏해야 한안은 그를 그저 그다지 혐오스럽지는 않은 낯선 사람으로 여길 뿐이었다.

급람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녀는 한안과 탁칠이 함께 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한 남자에게 보복하려면 그보다 더 좋은 부군을 찾는 게 좋은 방법이 아닐까? 부운석은 대종에서 적수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서융 황자는 얼추 비슷한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적어도 소저가 상황이 안 좋을 때마다 나타나서 보호해 주었으니까. 흔히 말하지 않는가. 좋을 때 잘해주는 건 쉽지만 위급할 때 도움을 주는 것은 어렵다고.

주홍은 한숨을 내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안은 바로 또 웃으며 아무 거리낌 없이 차를 마셨다.

*

그리고 이틀이 지났다.

이틀 동안, 한안은 줄곧 청추원 안에 머물며 문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장한명이 몇 차례 왔지만 한안은 그를 만나지 않았다. 장사양은 평소와 다르게 조용했고 자발적으로 한안을 찾아오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한안도 의심을 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한안은 급람을 시켜 장사양이 부중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주의를 기울이게만 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몰입했다.

곧 하늘빛이 어둡고 무거워지더니 큰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번개가 번쩍이며 천둥이 울었다. 먹구름이 시커멓게 경성의 상공 전체를 짓눌렀다. 하늘은 밤이 된 것처럼 까맣게 어두웠다. 번개가 칠 때마다 하늘이 번쩍 밝아지고 천둥소리가 사람의 귀를 때렸다. 우르릉 거리는 것이 하늘이 무너지려는 것 같았다.

한안은 조용히 앉아 있었다. 급람이 방 안에 불을 밝히고 뒤늦은 두려움을 느끼며 말했다.

“어쩌면 비가 이렇게 많이 내릴까요. 사람을 몹시 두렵게 만드네요.”

처마 위의 물이 처마 귀퉁이를 따라 끊임없이 흘러내려 좍좍 내리꽂는 빗소리와 함께 연못에 눈처럼 흰 물보라를 일으켰다. 하도 비가 끊임없이 내려 바깥이 어떤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안은 몸이 추워 겉옷을 걸쳤다.

“3일 밤낮은 내려야 그칠 거야.”

주홍이 무슨 생각이 있는 듯 한안을 쳐다보았다.

“그럼 소저, 우리와 양 대인의 내기는 이긴 거네요?”

급람은 지금에서야 기억해낸 듯, ‘아!’ 소리를 내고 한안을 돌아보며 말했다.

“맞다. 소저, 그 내기는 우리가 이긴 셈이네요. 소저 정말 대단하세요. 하지만 이렇게 큰비가 내릴 줄 어떻게 아셨어요?”

한안은 멈칫했다가 웃으며 말했다.

“꿈에서 큰비를 보았을 뿐이야.”

급람은 그녀의 말을 믿어 의심하지 않고 신나서 말했다.

“꿈이 정말 신통하네요. 다른 일들도 꿈꿀 수 있다면 좋겠어요.”

한안은 옅게 웃었다. 전생이 정말 꿈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실제로 일어난 것들이고 그녀의 몸에 고통으로 남아 있었다. 너무 아픈 기억이었으나 하나하나가 선명했다. 나중의 일을 모두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의 운명을 바꾸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이미 알고 있는 선명한 미래를, 알 수 없는 것으로 바꿀 생각이었다.

“이 비는…… 아마 수해를 일으킬 거 같아요.”

주홍이 중얼거리며 말했다. 바깥에는 비가 내리붓고 있지만, 그녀들은 방안에 앉아 불을 밝히고 차를 마시니 따뜻하기만 했다. 그러나 돌아갈 집이 없는 백성도 있을 것이었다. 아니면 집에 바람이 들어오고 비가 새서 난장판이 된 집을 보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수도 있었다. 부귀한 관원의 집에는 수해가 별것 아니지만 빈곤한 백성들에게는 물이 머리까지 잠기는 거나 다를 바 없는 재난이었다.

한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전생에 이 비는 삼 일 밤낮을 꼬박 내렸고 무수한 백성들이 의지할 곳을 잃고 떠돌았다. 경성에 한순간 난민이 늘었지만 애석하게도 군수품을 충당하느라 국고가 텅 비어 백성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의 눈빛이 깊고 고요하게 변했다. 전생의 그때, 위여풍이 사람을 시켜 많은 물건을 보내면서 한안의 놀란 마음을 위로하는 거라 말한 적이 있었다. 머지않아 그에게 시집올 소녀를 향한 것이라면서. 당시의 한안은 미래 부군이 자신을 자상하게 보살피는 것이라 여기고, 가슴 가득 기뻐하며 감동을 받았다.

지금의 위여풍은 당연히 물건을 보내오지 않을 것이다. 한 생을 겪고 난 뒤 위여풍의 됨됨이를 간파했기에 더 이상 그에 대해 기대감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부운석은?

자신은 부운석에게 아직 기대하고 있는 걸까? 만약 부운석이 여기로 와서 내가 괜찮은지 살피려 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녀는 생각하다가 고개를 젓고는 생각이 너무 앞서간 자신을 비웃었다. 지금 부운석은 자신을 보러 올 시간이 없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느니 양기를 만나서 무슨 질문을 할 것인지 생각해두는 것이 나을 것이다.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안은 자신이 잘못 들은 거라 여겼다. 그러나 빗소리 속에서도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유달리 또렷했다. 바깥은 어두침침했고 한안은 의심이 들었다. 급람과 주홍이 서로 시선을 마주치고 무언가 물으려 하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창문이 홱 열리더니 신영 하나가 방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한안은 깜짝 놀랐으나 그 사람의 생김새를 알아보고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탁칠이었다. 탁칠은 온몸이 물 범벅이었다.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밖에서 비를 뚫고 서둘러 온 것 같았다.

“무슨 일이에요?”

그가 안으로 몇 걸음 걸어들어오자 방 안에 순간 물 얼룩이 잔뜩 늘어났다. 주홍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탁칠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더니 한안을 보며 웃었다.

“정말 따뜻하다.”

한안이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물었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당신은 왜 온 거죠?”

탁칠은 탁자 위에 놓인 한안이 마시던 찻잔을 들고서 입가에 대고 한 모금 마셨다. 주홍이 보고 눈살을 또 찌푸렸지만, 탁칠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했다.

“네가 나한테 조사하라던 일, 내가 조사해냈지.”

탁칠의 입술 근처 찻잔에 머물러 있던 한안의 시선이 놀라서 그의 눈으로 향했다.

“어떻게 된 일이죠?”

말투 속에 그녀 자신도 발견하지 못한 다급함이 담겨 있었다.

탁칠은 재미있다는 듯 그녀를 보고 잠깐 생각에 잠기듯 머리를 갸우뚱했다.

“내가 큰비를 무릅쓰고 너에게 소식을 주러 오느라 온통 흠뻑 젖었는데, 너는 내 몸에는 관심도 없네. 적어도 나한테 옷이라도 하나 줘서 걸치게 해줘야 춥지 않지.”

한안은 그를 노려보았다.

“나한테는 남자 옷이 없어요.”

그렇다고 장사양의 옷을 줄 수는 없지 않은가. 장한명의 체구는 너무 작고. 이 사람은 고의로 이렇게 말한 건가?

탁칠이 아래턱을 만지작거렸다.

“네가 나에게 하나 찾아주면 되지, 너의…….”

한안의 얼굴이 갈수록 음침해지는 것을 보며, 탁칠이 높은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피풍의를.”

한안은 짜증이 가득 담긴 눈으로 그를 오래도록 노려보다가 결국 타협하기로 했다. 한안은 옷상자 안에서 그에게 줄 여우 털 피풍의를 꺼냈다. 온몸이 젖어 보기에도 추워 보이긴 했다. 그가 자신을 위해 일한 셈이니 피풍의 하나쯤은 줄 수 있었다.

“이걸로 어쨌든 됐죠?”

탁칠은 한안이 건넨 피풍의를 받아들고 몸에 걸치지 않고 먼저 자신의 코에 갖다 대고 깊이 냄새를 들이마셨다.

“냄새 좋다.”

칼로 베어낼 듯한 한안의 시선에도 서두르지도 여유 부리지도 않고 피풍의를 자신의 몸 위에 걸친 다음, 탁칠은 옅게 웃었다.

“나한테 감사해. 그 사람, 내가 찾아냈어.”

“찾아냈다고요?”

한안은 놀라고 의아했다. 부운석이 출정하기 전까지 여러 달 동안 조사해도 특별히 쓸모 있는 소식을 알아내지 못했었다. 사람을 직접 찾는 것은 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탁칠이 단지 이틀 만에 조사해냈다고? 탁칠의 부하가 아무리 능력이 좋다 해도 너무 차이 나지 않나. 어쩌면 부운석의 수하가 실력이 많이 떨어지는 걸지도 모른다. 설마……. 한 가지 불안한 추측이 한안의 머리에 떠올랐다. 설마 부운석이 고의로 소식을 감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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