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녀‚ 환생 4권
목차
19장
20장
21장
22장
23장
24장
외전
19장
시간이 조용하게 흘러갔다. 머지않아 부중을 수색하던 하인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저희가 이것을 찾았습니다.”
우두머리 시위가 수중의 물건을 들어 올렸다. 그것은 붉은 천 꾸러미로 불룩한 모양이었으나 무엇인지는 명확하지가 않았다. 주씨는 기뻤지만 표정을 차분하게 다듬었다.
“어서 도사께 보시게 해라. 이것이 바로 사악한 물체의 본체인가요?”
그 시위가 무언가 말하려 하는 것을 한안이 저지했다. 정허 도사는 천 꾸러미를 들어 올려 살펴보고 확신에 차 말했다.
“확신합니다. 사악한 기운은 바로 홍포 안의 물건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도사는 정말 신묘하게 알아맞히네요. 천을 아직 풀어보지도 않았는데 안에 도대체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다니 말이에요. 정말 감탄했어요.”
한안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정허 도장은 가볍게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
“빈도는 요사스러운 물체를 적지 않게 보았고 또 적지 않게 제압했지요. 소저는 모르시겠지만 이 요사스러운 물체는 사악한 기운을 방출하고 있습니다. 빈도는 가까이 있기만 해도 느낄 수 있지요.”
한안은 피식 웃었다.
“정말이에요? 그러면 열어서 한 번 보죠.”
주씨는 아직까지도 당당한 한안의 모습을 보며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잠시 후면 한안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하지 못하게 될 거라 생각하니 어느 정도 마음이 후련해졌다. 주씨는 정허 도사에게 열어 보라고 재촉했다.
“도사, 안에 도대체 무엇이 있는지 한 번 보시지요?”
정허 도사는 손을 뻗어 천을 풀었다. 천 꾸러미 안의 물건을 집으려던 도사의 손은 갑자기 멈칫했다. 한안은 옅게 웃었다.
“어째서 움직이지 않는 거죠?”
“이, 이건…….”
정허 도사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천 꾸러미 안의 물건을 보며 말을 하지 못했다. 그의 태도는 즉각 주위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주씨도 도사의 반응을 예상 못 하였기에 다급하게 물었다.
“도사, 왜 그러는 거예요?”
한안이 도사에게 다가가 천 꾸러미 안의 물건을 손으로 들어 올렸다. 그것은 붉디붉은 물건이었다. 대주씨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한안은 붉은 물건을 탁 소리와 함께 펼쳤다. 바람결에 나부끼는 붉은색 옷감 위에는 원앙이 물에서 노니는 도안이 수 놓여 있고, 금색의 비단 끈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위에는 ‘란’ 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정교하고 섬세하며 부드러운 것이 부귀한 집안의 용품임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배두렁이였다.
한안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이제 보니 당신이 말한 이 요사스러운 물체는 배두렁이였네요.”
주위에서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이 연달아 웃기 시작했다. 정허 도사는 이미 나무로 깎아 만든 닭처럼 얼이 빠져버렸고 구조를 바라는 눈빛으로 주씨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런 상황이 있을 거라고 결코 생각지 못했다. 그저 돈을 받고 와서 연극에 참여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 연극은 어째서 제 생각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을까.
장사양의 얼굴빛이 검푸르러졌다. 그 외에도 얼굴빛이 좋지 않은 사람이 있었으니……. 장 태사와 대주씨였다. 대주씨의 얼굴빛은 창백했다. 저 배두렁이는 그녀가 입는 배두렁이였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배두렁이가 어떻게 다른 사람의 손에 가 있는 걸까? 장 태사의 음산하고 무시무시한 눈빛을 느끼며 대주씨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한안이 이상하다는 시선으로 배두렁이를 들어 보였다.
“저는 어째 이 배두렁이가 좀 눈에 익은 듯 보이네요. 지난번 주 이낭 쪽에서 차를 마실 때, 밖에서 이 배두렁이를 말리고 있었던 것 같아요. 배두렁이 위의 자수가 예쁜 것이, 여종들이 말하기를…… 주 부인의 배두렁이라고 했었어요.”
한안이 옅게 웃었다.
“누가 이렇게 장난이 심한 거죠? 주 부인의 배두렁이를 가져오다니?”
대주씨는 특별 사면을 받은 것 같았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녀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누군가의 악질적인 장난이에요.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죠?”
이때, 한안이 조금 전에 말을 가로막았던 시위가 입을 열었다.
“이 천 꾸러미는 장 노야의 방 안에서 발견된 것입니다.”
모두가 조용해지며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한안이 웃으며 말했다.
“정말 이상하네요. 주 부인의 배두렁이가 어째서 제 부친의 방 안에 있을 수 있죠?”
모든 사람이 대주씨와 장사양의 표정이 순간 이상하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다른 사람의 처첩을 함부로 손대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었다. 대주씨가 아름답고 요염하며 매력적이긴 하지만 장 태사의 총첩이었다. 듣자 하니 얼마 전부터 대주씨가 늘 장부에 드나든다고 했다. 처음에는 대주씨가 자기 여동생을 방문하러 온 것이며 그저 자매의 정이 깊다고 여겼는데 지금 보니 좀 의미심장했다. 제부와의 사통을 편리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장 태사는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그렇다. 대주씨가 늘 장부에 드나드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아니, 일부러 그가 안배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목적은 그저 물건을 손에 넣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천한 년이 많은 사람 앞에서 간통하다 발각되어 소리소문없이 자신을 오쟁이 진 남자로 만들었다. 어째서 대주씨의 배두렁이가 장사양의 방 안에 있었을까. 내일 아침이면 경성 안 모든 사람이 장 태사가 여자 하나조차 단속 못 한다고 떠들 것이다. 장 태사가 대주씨를 보는 눈빛은 비할 데 없이 차가웠다. 장 태사는 소매를 떨치며 자리를 박차고 가버렸다.
“노야, 노야…….”
대주씨는 당황하여 장 태사를 바로 따라 나갔다. 그녀가 장부에 들어온 목적은 장 태사의 임무로 어떤 물건을 찾기 위해서였다. 장 태사는 그 물건을 손에 넣을 수 있기만 하면 자신을 정방 부인으로 올리겠다고 말했다. 여러 해 동안 장 태사의 총첩이 되어 지긋지긋할 정도로 총애를 받았지만 사람의 욕망은 무궁무진한 것이었다. 그녀는 자기의 아들도 생각해야 했다. 만약 자신이 정실이 되면 자기의 아들들은 적자가 될 수 있었다. 적자와 서자의 관계는 분명 달랐다. 그 때문에 장부에 들어오자마자 그 물건을 손에 넣으려고 눈에 불을 켰다. 그녀가 장사양을 유혹한 것은 맞지만 그건 좀 더 유리한 조건을 차지하려던 것이었을 뿐 감정이 생긴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 배두렁이는 분명 누군가 고의로 한 짓이다.
장 태사는 대주씨를 한 발로 걷어차고 고개도 돌리지 않고 떠나갔다. 사람들은 모두 관망하는 태도였고 말이 없었다. 한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주 부인, 조급해 말아요. 도사가 그 배두렁이가 요사스러운 물건이라고 말했으니 주 부인을 위해 악귀를 쫓아달라고 하세요.”
정허 도사는 이미 낌새가 이상하다는 것을 간파하고는 안절부절못하며 땀을 닦았다.
“소저, 이건…….”
장사양은 갑작스레 일어난 변고에 얼이 빠져 있었다. 땅 위에 쓰러진 대주씨에 대해서도 안쓰러운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뒤늦은 두려움에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이전에 관직이 강등된 것도 첩을 총애하고 처를 괄시했다는 죄명 때문이었는데 남의 처첩과 음란하였다는 죄가 더해지면 만회할 기회가 다시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게다가 장 태사는 조정에서 세력이 두터웠다. 그에게 죄를 짓고도 자신이 여전히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장사양 자신도 대주씨의 배두렁이가 어디서 온 것인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장사양은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이것은 모함입니다. 나와 란……, 주 부인은 결백합니다!”
“부친께서는 조급해하지 마세요. 당장 급하게 처리할 일은 정허 도사가 우리를 위해 사악한 기운을 쫓아내는 것이지, 이 배두렁이가 어째서 부친의 방에 있었는지가 아니에요. 도사가 저 배두렁이가 요사한 물건이라고 말했으니 그것은 반드시 요사한 물건일 거예요.”
“너…….”
주씨는 낌새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대주씨가 얄밉기는 했지만 둘은 한 줄에 매달린 메뚜기였다. 대주씨가 곤경에 빠지자 주씨는 조급해졌다. 그녀는 표독하게 한안을 노려보며 말했다.
“분명 모해 한 사람이 있어요.”
한안이 모해 했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한안은 당황하지도 서두르지도 않고 웃었다.
“주 이낭의 말 때문에 갑자기 생각이 났네요. 조금 전 도사가 한안이 부친과 상극이고 지아비와 상극이라고 말하지 않았나요? 그건 주 이낭의 생년월일시예요, 내가 부주의한 탓에 생년월일시를 잘못 잡았지 뭐예요. 아이 참.”
그녀는 급람을 노려보는 척하며 말했다.
“며칠 전 향불을 피울 때 그 김에 이낭을 위해서도 한 대 피웠죠. 그래서 급람에게 이낭의 생년월일시를 알아오게 했는데 부주의해서 이낭의 생년월일시와 한안의 생년월일시를 잘못 놓았지 뭐예요.”
급람이 즉각 무릎을 꿇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다시는 감히 이러지 않겠습니다.”
“뭣이?”
주씨는 뛰어오를 듯 놀랐다.
“이 도사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인 것뿐입니다. 저는 절대 부친과 지아비와 상극인 사람이 아니에요. 저자의 거짓말을 듣지 마세요!”
한안은 어머나 하고 외마디 소리를 내고 웃는 듯 마는 듯 주씨를 보았다.
“이낭과 주 부인이 말하지 않았나요? 정허 도사가 덕망이 높고 능력이 높다고요. 그래 놓고 어째서 지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인다고 하는 거죠? 이낭의 말은 자기 뺨을 자기가 치는 게 아니겠어요? 정말 이해할 수가 없네요.”
그녀는 배두렁이가 나온 후부터, 한마디 말도 않고 음침한 얼굴을 하고 있는 7황자에게로 돌아서서 날렵하게 절을 했다.
“7전하께서 조금 전에 하인들을 시켜 정허 도사를 오게 하셨으니 도사의 명성을 인정하신 게 아닌가요? 7전하께서 도사를 오게 하셨으니까요. 이낭의 말은 7전하의 의도를 의심하는 게 아니겠어요?”
“너, 온통 허튼소리만 지껄이는구나!”
주씨는 몹시 화가 났다. 그녀는 7황자 탓을 할 수도 없지만 한안의 말에 반박할 것도 없었다.
7황자는 죽일 듯이 한안을 노려보았다. 오늘 일은 바라는 대로 성사되지 않을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처음에는 그저 강 건너 불구경하는 심정이었다. 한안만 제거할 수 있다면 즐거운 마음으로 볼 생각이었다. 지나치게 총명한 이 여자가 몇 차례나 고의인 듯 아닌 듯 자신의 계획을 망쳐놓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 장한안이 자신을 물귀신처럼 끌고 들어가려 하니 아무리 생각해도 완전히 빠져나가기는 어려울 듯싶었다.
“이낭이 이렇게 말하니 놀랍고 두려워서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모르겠네요.”
한안의 눈빛이 위왕 쪽으로 향했다. 먼저 아무렇지 않은 듯 장어산을 흘끗 보았다. 장어산은 한안에게 참패당했다는 것을 이미 깨닫고 얼굴빛이 처참하게 변해 있었다. 주씨를 돕고 싶었지만 경거망동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위왕부의 사람이니 잘못하면 위왕부에 말썽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한안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내통자들은 한 명도 달아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안은 매우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웃었다.
“다른 사람들이 제가 현청왕부를 믿고 남을 괴롭힌다고 말할까 봐 두렵네요. 그러니 오늘 일은 위 세자가 판정을 내리게 하면 어떨까요?”
위여풍은 당황했다. 한안이 이 난제를 자신에게 던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한안이 그저 웃는 듯 마는 듯 그를 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눈빛 속 조롱의 기색이 매우 짙었다.
이 문제는 대답하기가 쉽지 않았다. 만약 도사의 말에 문제없다고 하면 주씨 자매가 요사스러운 것이라고 간접적으로 승인하는 게 된다. 장어산은 자신의 측비이니 주씨 자매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장어산 명성에도 영향이 안 갈 리 없었다. 경성 사람들이 요녀를 첩으로 들인 자신은 또 어떻게 대할 것인가? 위여풍은 자신의 체면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고 외부 사람들의 평가에 늘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명성을 손상시킬 만한 일이라면 결코 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허 도사에게 의혹을 제기한다면 7황자를 물 밑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정허 도사는 7황자가 청해서 온 사람이니까. 위여풍은 7황자에게 죄를 지을 수는 없었다. 그는 한안을 향해 공수를 했다.
“장 소저, 이 일은 장부의 집안일입니다. 본세자는 결정할 자격이 없습니다. 장 소저께서 직접 중재하시기를 청합니다.”
한안은 화를 내지 않고 웃으며 장사양을 향해 돌아섰다.
“부친께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한안이 ‘부친’이라고 부르긴 하였으나 이는 얼음처럼 차갑고 아무런 감정도 들어 있지 않은 그저 공식화된 호칭일 뿐이었다. 장사양은 그 말이 귀에 거슬렸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 그런 데까지 신경 쓸 수는 없었다. 장사양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대주씨와의 간통을 인정해서는 절대 안 된다 생각했다.
그 역시 오늘 일이 어떻게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 알 수 없었다. 먼저 미 이낭이 유산을 함으로 불러온 도사는 한안이 악귀를 불러들여서라고 말했다. 하지만 도사가 상극이라 말했던 생년월일시는 주씨의 것이었고 요사스럽다고 찾아낸 물건은 대주씨와 자신이 간통한 증거였다.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하나하나가 다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지금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자기와 대주씨가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물고 늘어지는 것뿐이었다.
“나와 대주씨는 어떤 관계도 없다.”
장사양이 강조했다.
“분명 누군가가 모해한 것이야.”
“누군가의 모해군요.”
한안이 곤혹스러운 듯 말했다.
“주 부인도 누군가의 모해라고 말하고, 주 이낭도 누군가의 모해라고 말하고, 부친조차 누군가의 모해라고 말씀하시네요. 하하.”
그녀는 고개를 돌려 경직되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정허 도사에게 말했다.
“그럼 도사, 당신이 말해 볼래요?”
정허 도사는 놀라서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꽃샘추위가 여전히 매서운 이른 봄인데도 그는 땀이 비 오듯 하여 그의 잿빛 도포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한안을 보는 도사의 눈빛은 음란함과 사악함이 아닌 경외심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이 간단한 연극이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자신에게 불리한 쪽으로 변해버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사전에 자신에게 돈을 준 사람은 이 집 소저가 이렇게 상대하기 어려운 인물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도사도 들었죠? 위 세자께서 방금 말씀하셨어요. 이 일은 우리 장부의 집안일이라고.”
한안은 유감스럽다는 듯 손을 펼치며 말했다.
“도사 당신이 정확히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그럼 나도 누구 말이 진짜인지 알 수가 없어요. 모해가 있는지 없는지도 말이죠. 그러니 이 일을 왕야께 고하여 왕야께서 결단을 내려주시게 해야죠. 하지만.”
그녀가 옅게 웃었다.
“왕야께서는 이런 자잘한 일에 관여하신 적이 드무니 관부에서 대신 처리하게 하실 가능성이 높아요. 당신도 관아의 관리들이 흉악하다는 것을 알 거예요. 그들이 감옥에서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을 다룰 때 어떤 무시무시한 고문을 할지……. 모르겠네요.”
그녀의 말은 서두르지도 느긋하지도 않으며 익살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있는 듯 없는 듯한 그 냉기가 사람들을 흠칫하게 했다. 감옥 안에서 발생할지도 모를 일이 정허 도사의 등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정허 도사는 한평생 사기를 치며 살아왔지만 뒷덜미가 잡힌 것은 이번이 처음인 터라 감옥 맛을 본 적은 없었다. 그는 소심하고 겁이 많아 감옥 얘기가 나오자마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겁에 질렸다. 도사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한안을 향해 끊임없이 머리를 박았다.
“소저, 살려주십시오. 소저, 살려주십시오. 그저 남에게 돈을 받고 대신 일 처리를 해준 것뿐입니다. 배후의 주모자는 제가 아닙니다.”
마침내 털어놓았군. 한안은 속으로 자신에게 박수를 보냈다. 반나절 바쁘게 일한 덕분에 드디어 그물을 거둘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을 불러 청하는 것은 쉽지만 내보내는 것은 어려운 법이다. 정허 도사는 주씨 자매가 청해서 왔겠지만 다시 내보내는 것은 어려우리라. 주씨 자매는 자신들이 준비한 도끼가 제 발등을 찍는 것을 기다리고 있어야 할 것이었다.
7황자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한안을 보는 눈빛은 그야말로 난폭했다. 그는 이 여인이 어째서 늘 운이 좋은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녀는 계획 전부를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남에게 잘못을 덮어씌울 수 있었던 것인지도. 생각이 이에 이르자 한안을 보는 눈빛은 무서움과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총명한 적수 하나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정말 두려운 것은 이 총명한 적수가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7황자는 한안을 보았던 매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마다 그녀는 말썽에 휘말렸는데도, 그녀가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을 본 적은 없었다. 오히려 전체 국면을 틀어쥘 듯 침착했다. 실제로도 그녀는 모든 싸움을 훌륭하게 해치웠다. 마치 일어날 모든 일을 사전에 알고 있는 것처럼. 한두 번은 우연이라 말할 수 있지만 수차례가 되면 그건 우연이라 할 수 없었다. 이는 사람을 몹시 두렵게 만들었다.
장어산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모친과 이모가 한안의 반격에 반박할 힘이 없어 열세에 처한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어째서! 어째서 이년은 늘 어려운 문제들을 수월하게 풀어버리는 거야! 저년은 정말 자신의 천적이구나! 이런 상황에서도 모든 상황을 뒤집을 수 있다니! 어째서!
장어산의 증오를 느끼면서도 한안은 그저 옅게 웃을 뿐이었다. 주씨와 대주씨는 이미 바닥에 엎드려 흐느끼고 있었다. 그녀들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갑작스럽게 폭로되었다. 게다가 간통이니 부친과 지아비와 상극이라느니 하는 것들 하나하나가 심각한 것이었다. 자기 일이 되면 객관적인 판단이 어려운 법. 그런 까닭에 대주씨도 대응할 방법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한안은 계속해서 물었다.
“도사, 당신이 한 말을 못 알아듣겠네요. 당신 말뜻은 누군가 당신을 매수해서 이 말들을 하게 했다는 건가요? 그럼 당신이 모해하려던 사람은 도대체 누구죠?”
정허 도사는 정신없이 머리를 바닥에 부딪쳤다.
“저는 은자를 받았습니다. 그 사람은 저에게 장 소저를 모함하고 장 소저가 악귀를 불러들여서 부중 이낭이 유산되게 했다고 말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어머.”
한안은 놀라고 당황한 듯 소리쳤다.
“이렇게 악독한 사람이 누구죠? 이런 방법을 생각해내서 나를 해치려 하다니. 이런 사람은 정말 지옥에 떨어져서 날마다 뜨거운 불길에 몸이 타들어 가는 고초를 겪으며 영원히 헤어날 수 없어야 마땅해요.”
주씨 자매의 눈가가 동시에 실룩거렸다. 주씨들은 이를 득득 갈면서 한안을 증오했다. 그러나 증오의 말을 입 밖에 낼 수는 없어 마음만 답답할 뿐이었다.
한안이 물었다.
“도사, 그럼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아나요?”
정허 도사는 난처해졌다. 왜냐하면 그 사람과 직접 만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어린 여종 하나가 와서 일을 의논했기 때문에 배후의 주모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는 도대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한안은 그를 이렇게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천천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사, 당신은 주 이낭과 주 부인이 청해서 온 사람이죠. 주 이낭과 주 부인은 사전에 이 일에 대해 알고 있었나요?”
정허 도사는 멍하게 있다가 깜짝 놀라 높은 소리로 말했다.
“맞습니다. 저는 바로 이 두 부인의 사주를 받아 소저를 모함하러 온 것입니다.”
정허 도사는 주판을 잘 튕겼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감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된 일인지 바로 알 것이다. 이 일은 대저택 안에서 벌어진 이낭 다툼의 결과이며 장가 소저가 두 부인의 기분을 거스른 것이라는 걸. 비록 자기를 사주한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지만 장 소저가 이렇게까지 암시하는데 알아듣지 못한다면 바보가 아니겠는가?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배후 주모자가 누구냐 하는 것이 아니라 장 소저가 희망하는 배후 주모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었다. 정허 도사는 여러 해 동안 사람의 말투와 안색을 살펴 심중을 헤아려 왔다. 도사는 한안의 비위를 맞추며 즉각 대답했다.
“그때 여종이 말하기를 바로 두 분의 성이 주씨라 했습니다.”
“터무니없는 소리! 터무니없는 소리다!”
주씨는 분노하며 다급하게 외쳤다.
“분명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거예요. 노야, 이 도사를 믿으시면 안 됩니다!”
“주 이낭!”
한안이 큰소리로 말하자, 주씨는 놀라 펄쩍 뛰며 감히 소리를 내지 못했다. 한안은 맑고 투명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정허 도사가 덕망이 높다고 말한 것은 당신이었어요. 그런데 정허 도사가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이는 사기꾼이라고 말하는 것도 당신이네요. 지금 당신이 이렇게 흥분하는 것은 혹시 무언가를 덮어 숨기려는 게 아닌가요?”
주씨가 말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한안은 가슴에 손을 얹고 두어 걸음 물러났다. 비탄에 잠긴 모습이었다.
“그럼 하나 물어볼게요. 내가 무엇을 잘못하였기에 이낭은 나를 이렇게 대하는 건가요? 정허 도사는 나를 모함하라고 당신이 불러들인 사기꾼이에요. 부친과 상극이고 지아비와 상극인 사주에, 악귀를 불러들이고 이낭이 유산하도록 해친 일들 하나하나가 나에게 씌워졌다면 그 명성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이낭은 어찌하여 이처럼 악독한 거죠?”
한안은 말을 마치며 얼굴을 가리고 낮은 소리로 흑흑 흐느꼈다.
급람이 앞으로 한 걸음 나왔다.
“소저, 지금 소저께서는 현청왕비나 마찬가지인데 사람들이 지나치게 구네요. 왕야께서 아시면 분명 절대 용서하지 않으실 거예요. 시위 중에 소이, 이리 나와 주세요.”
군중 속에서 부운석이 한안에게 붙여준 시위 중 우두머리가 앞으로 나와 섰다.
“여기 있습니다.”
“우리 소저께서 억울한 일을 당하셨으니 왕야께서 판정을 내려주실 수 있도록 이 일을 왕야께 신속히 보고 드리세요.”
급람은 조금도 우물쭈물하지 않고 당차게 말했다.
한안은 얼굴을 손바닥에 파묻고 낮게 흐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손에 가린 입가는 높이 치켜 올라가 있었다. 급람의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급람은 최근 갈수록 연기력이 늘고 있었다. 게다가 시기적절하게 말을 꺼내기까지 했으니 돌아가서 후하게 상을 주어야겠다.
그 시위는 대답과 동시에 현청왕부로 갔고 나머지 몇 사람은 얼굴빛이 하얘졌다.
농담이겠지.
현청왕이 자신의 어린 아내를 몹시 총애하는 것을 누구나 알았다. 한안이 잘못했다고 해도 그냥 넘어갈 판인데 한안이 괴롭힘을 당했다. 현청왕이 알게 되면 연루된 사람들이 좋은 결과를 얻을 리 없었다.
한안의 눈빛이 미 이낭의 꽉 닫힌 방문을 훑어보며 입가에 냉소를 끌어냈다. 오늘은 한 사람도 달아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좋은 연극을 연출해 준 미 이낭도 놓아 줄 수 없지.
“부친, 미 이낭은…… 왜 갑자기 유산했을까요? 왕야께서 궁중의 오 태의가 신통한 의술을 지녔다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미 이낭은 이번 풍파로 분명 몸이 많이 상했겠죠?”
그녀는 장사양을 응시했다.
“오 태의를 청해서 검사를 한 번 받아보는 게 좋겠어요.”
한순간, 모든 사람의 눈빛이 한안에게 향했다. 한안이 갑자기 이런 요구를 꺼낼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장사양은 고개를 홱 들어 매섭게 한안을 노려보았다. 한안은 방금 전에 의원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태의를 오게 하자는 말을 꺼낸 것은 장부의 의원에게 의심을 품는 것과 같았다. 이는 사람들 앞에서 장부의 체면을 깎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장사양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한안은 그를 상대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지위와 명예 좀 잃는 게 뭐라고. 모친은 자신이 신임하던 사람에게 기만당했다. 모친이 당한 것과 똑같이, 장사양이 배반의 맛을 톡톡히 보게 해줄 것이다. 자신이 총애하던 사람에게 기만당하는 느낌을 장사양은 응당 맛보아야 하리라.
대주씨는 한안의 말을 듣고 의심을 품고 미 이낭을 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녀는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한안은 미 이낭의 유산을 의심하고 있었다. 사실 한안만 미 이낭을 의심스러워하는 게 아니었다. 그녀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미 이낭과 세운 계획은 이런 전개가 아니었다. 미 이낭은 그저 몸이 불편하다는 말만 하면 됐다. 정말로 뱃속의 핏덩이를 가지고 장난을 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미 이낭은 유산 했다. 설령 한안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라고 해도 미 이낭이 복중 아이 목숨을 희생시킬 리는 없다. 하물며 이 아이가 미 이낭 입장에서 어떤 의미인지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하게 알고 있을 텐데? 이 아이만 있다면 장사양은 미 이낭에게 부인의 자리를 줄지 몰랐다. 그러면 뱃속 아이는 장부의 적자가 될 수도 있었다. 이런 좋은 기회를 미 이낭이 쉽게 버렸다고? 대주씨는 이전부터 미 이낭의 태도가 다소 미심쩍었다.
한안의 의심은 대주씨의 의심을 증명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현재 두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하나는 미 이낭의 유산이 거짓이며, 뱃속의 핏덩이는 평안 무사하다는 것. 오늘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는 이 연극을 스스로 연출하고 스스로 연기했다. 하지만 정말로 유산하지 않았다면 뱃속 아이를 나중에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명하려는 것일까? 이렇게 생각해 보자면 다른 하나의 가능성이 남았다. 그것은 바로 미 이낭이 처음부터 아이를 임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 이낭은 정말 아이를 임신하지 않았나?
“장 소저.”
7황자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오 태의는 궁중 사무가 많지. 지금 그를 오게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이 드는군.”
한안은 고개를 돌려 7황자를 보며 웃었다.
“7전하께서는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7전하께서 장부를 위해 하인을 시켜 정허 도사를 청하신 만큼 한안도 장부의 사람으로서 당연히 더욱 진력을 다해야 마땅하지요. 하물며 왕야께서 이미 말씀하셨답니다. 저에게 일이 있으면 아무 때든 오 태의를 찾아 도움을 청해도 된다고 말이죠.”
한안은 오늘 한 사람도 놓치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을 했다. 물은 충분히 탁해졌으니 혼탁한 물을 휘저어 파도를 만들면 된다. 이 기회를 헛되이 낭비하지 않을 터이다.
시위 중 하나가 대답과 동시에 오 태의를 장부로 청하러 갔다. 장사양 쪽 사람들은 한안의 수법에 분노했지만 나서서 한안의 수법을 저지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한안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평온한 표정 아래 감추어진 살벌하고 과단성 있는 기운이었다.
목암은 조용히 지켜보면서 문득 깨달았다. 이 왕비가 갈수록 자신의 주인과 조금씩 조금씩 흡사해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부부는 한마음이라는 것일까?
한참을 기다리자 오 태의가 하인의 안내를 받으며 도착했다. 정허 도사는 제압당해 있었고 대주씨와 주씨는 모두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하늘과 땅이 뒤집어지는 변화가 일어날 순간이었다. 장사양은 한안이 하는 짓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렇다고 오 태의에게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오 태의는 의술이 고명하여 황궁 안에서 상당히 평판이 높았기에 많은 고관과 귀인들이 오 태의에게 알랑거리며 비위를 맞추려 했다. 하지만 오 태의는 괴팍한 성격이라서 자신의 기분에 따라 일을 했기 때문에 어떤 수단과 방법도 통하지 않았다. 오태의가 한안의 청에 장부로 온 것을 보고 사람들은 놀람과 동시에 확신했다. 현청왕이 아직 시집 안 온 어린 아내를 총애한다던 소문이 과연 거짓이 아니었구나. 오 태의조차 현청왕비의 체면을 세워주려 하는구나 하고.
사실 부운석이 한안에게 마음대로 오 태의에게 도움을 청해도 된다고 언급했을 때, 한안은 좀 불안했었다. 부운석은 오 태의와의 관계가 얕지 않으니 그녀가 신경 쓸 필요 없다는 뜻으로 말했지만, 그녀는 보통사람이 아닌 오 태의에게 함부로 폐를 끼치는 것은 옳지 않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 태의가 올지 안 올지 자신이 없었다. 오 태의가 도착한 것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오 태의가 들어오자마자 장사양이 서둘러 비위를 맞추는 얼굴을 하고 마중을 나갔다.
“오 태의.”
오 태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보지도 않았다. 눈빛으로 위왕과 7황자를 쓸고 지나가며 하하 웃었다.
“오늘 정말 떠들썩하군요. 노부는 현청왕비의 부탁을 받았는데 여기에서 위왕 대인과 7전하를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가 말은 이렇게 하지만 말투는 대단히 방자했다. 애초에 7황자와 위왕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 모습이었다. 장사양은 깜짝 놀라 ‘헉’ 하고 숨을 들이키며 마음속으로 몰래 ‘오 태의가 과연 대단하구나’ 했다.
7황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태의가 농담을 다 하는구려.”
7황자는 화도 내지 않았다.
위왕도 건성으로 하하 웃을 뿐이었다. 그러나 눈빛은 음험했다. 오 태의는 황상이 아끼는 사람이지만 부운석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과는 왕래하지 않았다. 게다가 언행이 괴팍하고 성격도 과격하여 곁을 쉽게 주지 않았다. 그런 오 태의가 여기에 온 것은 분명 한안을 밀어주기 위해 온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위왕은 눈을 가늘게 떴다. 오늘 일은 장한안이 계획한 것 같았다.
“오 태의. 조금만 더 일찍 오셨더라면 장 태사를 보실 수 있었을 거예요. 장 태사는 먼저 태사부로 돌아가셨어요.”
한안이 웃으며 말했다.
오 태의는 몸을 돌려 한안을 보며 말했다.
“어? 이렇게 일찍? 어째서 돌아갔답니까?”
그의 말투는 조금 전의 괴팍한 어조와 완전히 달랐다. 그야말로 친절하고 호감이 가는 말투라고 할 수 있었다. 주위의 사람들이 놀란 얼굴을 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한안 자신조차도 온몸이 오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그건요, 태의께서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시는 편이 좋을 거예요.”
그녀는 상냥하고 부드럽게 웃었지만 눈빛 속에는 교활함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 속에는 남의 불행을 즐기는 빛도 담겨 있었다. 그 기색을 포착한 오 태의는 잠시 몸이 작고 여린 소녀를 진지하게 살펴보았다.
이번에 오 태의는 한안을 두 번째로 만나는 것이었다. 처음 한안을 만났을 때는 부운석이 한안을 위해 춘독을 해독하던 그때였다. 그러나 그때는 한안의 정신이 혼미한 상태라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살펴볼 수가 없었다. 다만 부운석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를 보고 기가 찼을 뿐. 그는 부운석을 여러 해 알아왔다. 사람다운 데라고는 거의 없는, 얼음처럼 차가운 사람이 한 여자 때문에 놀라 허둥대며 제정신이 아닌 걸 보고 놀랬다. 그때부터 소문 속의 현청왕비에 대해 호기심이 일었다.
오 태의는 현청왕비가 뵙기를 청한다는 말을 듣고 즉각 서둘러 왔다. 부운석이 어린 왕비를 도와주라고 당부한 적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장한안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기 때문이었다. 가까운 곳에서 보니 그저 어린 여자아이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용모와 자태를 다시 보니 아직 다듬지 못한 아름다운 옥으로 그 안에 고귀함과 광채를 숨기고 있었다.
다시 주위 사람들을 보니 어떤 사람은 음침한 모습이었고 어떤 사람은 낭패한 모습이었다. 보아하니 이 여자아이만이 분쟁에서 아무것도 손해 입은 것 없이 무사했다. 그 외에 주위 사람들은 모두 화를 당한 게 분명했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일개 어린 여자아이가 7황자의 사람들에게 손해를 입힐 수 있다니. 그런데…… 오 태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 여자아이의 모습이 어째 볼수록 좀 익숙한 것 같았다.
“오 태의.”
한안이 옅게 웃었다.
“가셔서 미 이낭이 지금 어떤지 좀 봐주시겠어요? 우리 모두 몹시 걱정이 되어서요.”
오 태의는 생각을 거두고 의미심장하게 한안을 한 번 본 다음, 의료상자를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장사양은 서둘러 따라 들어갔다. 모두가 방 밖에 가까이 모여서 방 안에 주의를 기울였다.
미 이낭의 방문이 열리자 진한 피비린내가 물씬 덮쳐 왔다. 오 태의가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방 안에서 닭 피로 장난질을 쳤어?”
그는 말을 마치고 혐오스럽다는 듯 코를 문질렀다.
“냄새가 너무 지독해.”
닭 피? 방 안과 밖의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특히 장사양의 얼굴빛은 순간 보기 흉하게 변했다. 만약 미 이낭의 유산이 거짓이라면 장사양은 어떻게 화를 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교몽은 마침 미 이낭의 침상 앞에서 미 이낭을 시중들고 있었다.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서둘러 옆으로 물러났다. 얼굴에 눈물 흔적이 가득하고 표정이 놀라고 당황한 것이 확실히 자기 주인이 유산한 것을 본 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애통해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본다면 그녀의 큰 눈에는 감정이 없고 동작 또한 몹시 침착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었다.
오 태의는 이런 행위가 불만스러운 것 같았다. 미 이낭은 침상에 누워 입속으로 무어라 중얼중얼 혼잣말을 했다. 한안이 호호 웃으며 말했다.
“미 이낭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우리가 당신을 위해 궁중에서 가장 유명한 태의, 오 태의를 청했답니다. 오 태의가 당신을 위해 진맥을 할 테니 괜찮을 거예요.”
침상 위의 몸이 살짝 굳어졌다. 미 이낭은 외마디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흔들었다.
“저리 가, 저리 가! 너희 이 악귀들! 나를 해치려고! 저리 가!”
가위에 눌린 모양새였다. 어린 여종 하나가 매우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말했다.
“혹시 귀신 들린 것은 아니겠죠? 나가시는 게 어떨까요?”
오 태의는 차갑게 웃었다.
“나가라면 나가지. 설마 노부를 가지고 노는 게냐?”
그의 말투는 금방이라도 분노가 폭발할 것 같았다. 그 말을 한 여종은 놀라 즉각 입을 다물었다. 장사양이 서둘러 수습에 나섰다.
“오 태의, 화내지 마십시오. 하인이 철이 없었습니다. 여봐라, 이 사리 분별 못 하는 여종을 끌어내다 곤장 50대를 쳐라.”
한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미 이낭을 붙잡아라. 오 태의가 진맥을 하실 수 있게.”
말을 마치자마자 힘센 하인 몇이 와서 발버둥 치는 미 이낭을 붙잡았다. 오 태의의 손이 미 이낭의 손목 위에 닿고 잠시 후, 오 태의가 큰 소리로 말했다.
“농간을 부려 사람들을 속였구나. 이 여인은 처음부터 임신한 적이 없는 몸이오. 유산은 무슨!”
‘임신한 적이 없는’ 이 세 마디가 나오자마자 가장 먼저 멍해진 것은 장사양이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오 태의를 응시했다.
“오 태의, 무슨 뜻입니까?”
오 태의는 그보다 더 화가 나 있었다.
“무슨 뜻? 당신들이 노부를 가지고 놀아놓고 내게 다시 묻는 것은 무슨 뜻이오?”
그는 한안을 한 번 응시했다가 무언가 알아차린 것처럼 말을 좀 더 명확히 했다.
“이 부인네는 애초에 회임한 적이 없는데 어찌 유산이 가능하겠소?”
“네가 나를 속였어?”
장사양이 미 이낭을 노려보았다. 장사양은 한 글자 한 글자를 이와 이 사이에서 쥐어 짜내고 있었다.
“노야,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반박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 미 이낭은 서둘러 침상에서 기어 일어났다. 얼굴빛이 종이처럼 창백한 미 이낭은 거듭해서 용서를 구했다.
“노야, 소첩을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절대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주씨 자매는 시선을 한 번 마주치고는 말이 없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에는 미 이낭이 상식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은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음모가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가 오 태의의 말을 듣고 나서야 모든 게 이해가 갔다. 미 이낭이 임신을 가장했다면 이 기회를 이용하고 싶었을 것이다. 유산은 가장 그럴듯한 이유였고 한안을 쓰러뜨릴 수도 있을 테니까. 이전에는 한안과 미 이낭이 한편이었다지만 한안이 득세하니 미 이낭은 한안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씨 두 자매는 한안을 보며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마음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일이 이렇게 됐다는 것은 한 가지 사실을 명백히 암시했다. 그녀들이 패했다는 것 말이다. 공들여 잘 짜놓은 연극에서 궁지에 빠진 것은 도리어 그녀들 자신이었다. 그녀들은 이 소녀에게 패했다. 거들떠볼 가치도 없고, 사람들 뒤에 숨기만 하던 이 여자아이에게 말이다. 미 이낭의 일은 두 자매도 몰랐던 일이었다. 그러나 한안의 태도를 보면 그녀는 이미 알고 있던 게 분명했다. 남의 계교를 역이용해서 최후의 결정적인 시기에 상황을 전환 시킬 작은 것 하나를 던진 것이다.
이런 적수가 있다는 것은, 너무도 두려운 일이었다.
지금 마음속이 불안한 것은 주씨 자매만이 아니었다. 미 이낭도 마찬가지였다. 미 이낭은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유산을 빌미로 모든 잘못을 한안에게 덮어씌우고 싶었다. 그녀와 주씨 자매가 상의한 내용은 정허 도사가 와서 한안의 방에서 요사스러운 물건을 찾아내 더러운 물을 전부 한안에게 끼얹는 것이었다. 한안은 입이 백 개라도 변명할 말이 없을 것이며 자신이 불길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을 것이었다. 주씨는 미 이낭에게 태기가 상한 것처럼 가장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미 이낭은 가짜 임신이 들통날까 두려워 유산을 꾸며냈다. 미리 의원과 산파에게 뇌물을 먹여 놓았는데 갑자기 오 태의가 튀어나와 그녀의 계획을 폭로할 줄이야.
미 이낭은 마음속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지 못했다. 그녀는 장사양이 누군가 그를 배반하는 것을 가장 증오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늘 모든 것이 가짜라는 것을 알았으니 그는 자신에게 화풀이를 할 것이다. 장사양은 인간성이 매우 잔인했다. 그와 함께 여러 해 살아온 미 이낭은 자신에게 좋은 결과가 있을 리 없다는 것을 알았다. 미 이낭은 마음속이 속속들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장사양의 심정은 거칠고 사나운 파도 같았다. 오늘의 일은 전부 예상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미 이낭은 유산을 하여 적자가 없어졌고 또 대주씨와의 간통 증거가 잡혔다. 게다가 오 태의는 미 이낭이 회임을 가장했다고 하니. 그는 깊디깊은 치욕을 느꼈다. 그는 한 발로 미 이낭을 걷어찼다.
“천한 년! 말해! 왜 나를 속인 것이냐? 내가 너에게 그렇게 잘해줬는데!”
그는 화가 나서 이성을 잃고 미 이낭을 차고 또 찼다. 되풀이해서 말하는 것은 ‘천한 년’ 몇 글자였다. 미 이낭은 귀퉁이로 피해 몸을 웅크리고서 계속해서 용서를 빌며 울부짖었다.
“노야, 제가 잘못했어요. 노야, 다시는 감히 그러지 않겠습니다. 노야, 노야…….”
미 이낭은 마음이 아프고 그가 원망스러웠다. 장사양을 여러 해 따르면서 그가 이렇게 화가 난 것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야말로 살인이라도 하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남자의 마음을 잘 안다고 자만했다. 그러나 장사양에게서는 평소 그녀를 대하던 따뜻하고 달콤한 정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남자의 눈빛이 그녀를 공포스럽게 했다.
줄곧 한마디 말도 없던 한안이 나섰다.
“부친, 성급하게 그러지 마시고 잠시 진정하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맑고 시원한 이슬 같아서 바싹 마르고 더운 환경 아래 놓인 사람들에게 순간 맑고 깨끗한 느낌을 주었다.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차분해졌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의 목소리에는 냉기가 담겨 있어 이제 충분히 구경했으니 묵은 빚을 결산하겠다고 하는 것 같았다.
미 이낭이 고개를 홱 돌려 한안을 보았다.
한안은 서두르지도 여유 부리지도 않았다.
“부친께서는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으세요? 오 태의께서는 미 이낭이 회임한 적이 없다고 말씀하셨으니 이는 당연히 거짓일 리 없지요. 하지만 정허 도사가 말하기를 미 이낭 뱃속의 아이가 유산한 것은 제가 악귀를 불러들인 거라고 했지요.”
그녀는 웃었다.
“또 정허 도사는 주 이낭의 생년월일시를 보고 주 이낭이 부친과 상극이고 지아비와도 상극인 사주라고 말했어요. 부친, 정허 도사의 말은 도대체 거짓일까요 아니면 진짜일까요?”
주위 사람들은 멍해졌다. 한안이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정허 도사가 이미 인정했지요. 주 이낭과 주 부인의 사주를 받아서 한안을 모해하러 왔다고요. 하지만 지금 보아하니 미 이낭도 여기에 뜻을 함께한 것 같네요. 현청왕의 처를 해칠 음모를 꾸미는 것은 무슨 죄에 해당할까요?”
한안이 현청왕비의 이름을 구실로 삼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현청왕이 한안을 총애하는 것을 온 경성 사람이 다 알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만약 주씨 자매와 미 이낭이 합심하여 한안을 해치려고 했던 일이 현청왕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얼마나 큰 풍랑을 불러일으킬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주위 사람들의 얼굴에 그녀들을 기피하는 기색이 늘어났다. 그녀들과 연관되어 현청왕이 자기한테까지 죄를 물을까 두려웠다.
대답하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한안이 또 웃었다.
“하지만 정허 도사는 7전하께서 청해 왔지요. 7전하, 혹시 당신께서도 이 일을 알고 계셨던 건 아닌가요?”
7황자는 멍해졌다가 즉각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터무니없는 소리! 본전은 이 일에 대해 한 점도 아는 것이 없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한안을 보았다. 장한안은 무서운 적수다. 자신까지 더러운 물속으로 끌어들이려 하다니! 애석하게도 자신은 한안의 계획을 전혀 알지 못했다. 지금 사건 밖으로 자신을 빼내려 해도 방법이 없었다. 한안, 정말 간덩이가 크구나!
한안은 7황자가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몸을 돌리고 위왕에게 말했다.
“오늘 장부에서 일어난 이 큰일에 황실 귀족까지 연루되어 있으니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관부에 해결을 청해야겠어요. 위왕 대인은 직접 목격하신 증인이시니 번거로우시겠지만 대인께서 증인이 되어주시기를 청합니다. 오늘 장부에서 발생한 모든 것에 대해, 여러분 모두 증인이 되어주시기를 청합니다!”
한안은 말을 마치고 다른 사람이 대답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준엄한 목소리로 불렀다.
“목암!”
“속하, 여기 있습니다!”
목암이 재빨리 나왔다. 모든 것을 목도한 그는 한안의 모든 것에 탄복했다. 이전에 보았던 것이 한안의 총명한 지혜와 교활함이었다면 오늘은 필적할 상대가 없는 전략가의 모습이었다. 그는 그녀가 이렇게 하는 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멍청한 사람이 현청왕비가 된다면 몇 번이나 죽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왕야의 사람은 과단성과 용기가 있어야 했다. 바로 한안처럼.
오늘 한안은 그에게 좋은 구경을 시켜주었다. 모든 사람이 미 이낭의 방 앞에 있을 때, 목암은 한안이 분부한 대로 청추원에서 주씨들이 숨겨둔 붉은 천 꾸러미를 찾아내어 안의 물건을 버리고, 대주씨의 배두렁이로 바꿔 넣은 다음 장사양의 방 안에 숨겼다. 보아하니 자신도 이 연극에 적지 않은 여흥 거리를 덧붙인 모양이었다.
관부에 맡기면 장부에 발생한 모든 것을 대중 앞에 공개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대주씨와 장사양의 간통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러나 목암은 이미 날듯이 장부를 빠르게 떠나버렸다.
모든 사람의 눈빛이 집중된 곳은 흐느껴 울고 있는 미 이낭도, 낭패한 대주씨도, 바닥에 퍼질러 앉아 있는 주씨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한안만 바라보았다. 그녀는 조용하게 눈앞의 모든 것을 지켜보며 조리 있고 정연하게 하인들이 해야 할 일을 분부하고 있었다. 모두가 저도 모르게 이 소녀가 장부의 주인이라는 착각을 하고 말았다. 그녀는 장부에 터무니없는 일이 연달아 닥쳤음에도 미간 한 번 찌푸리지 않고 도리어 그 오랜 시간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 웃는 얼굴은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것 같으면서도 눈빛에는 웃음기가 없어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었다.
장어산은 자신의 팔을 꽉 눌렀다. 그녀는 화가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한안이 위왕을 증인으로 삼았다. 증인으로. 무엇을 증명할 것인가. 자신의 혈육이 장한안을 모해했다는 증인이 되라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경거망동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모든 분노를 뱃속으로 삼킬 뿐이었다.
미 이낭은 한안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한안이 모든 것을 계획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계획도, 회임을 가장한 일까지도 모두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이 계획을 아는 사람은 측근 여종 말고는 없었는데. 한안은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미 이낭이 조금만 더 총명하고 더 세심했다면 줄곧 자기를 따르며 계책을 꾸며주던 교몽이 오늘 일에서는 아무런 방안도 내놓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장사양에게 구타당할 때 그저 고개를 숙이고 옆에 서서 아무 말 하지 않았던 것 또한 말이다.
그날 장부에서의 일로 대주씨는 장 태사에게 간통죄로 부에서 쫓겨났고, 포락지형(炮烙之刑: 달군 쇠로 지지는 형벌)을 받아 얼굴에 커다랗게 음란할 ‘음’자가 찍혀 저잣거리 가운데를 걸으며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대주씨 한평생 남에게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이 있을까. 결국 대주씨는 실성하여 남과 싸우면서 밀고 당기고 하는 중에 못에 빠졌다. 아무도 그녀를 구하지 않으니 어이없게 그렇게 죽고 말았다.
주씨도 상황이 좋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미 이낭과 결탁하여 한안을 모해하려 한 죄목으로 함께 감옥에 갇혔다. 감옥에 갇힌 것은 사실상 한평생을 감옥에서 산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한안은 관부의 엄벌이라기보다는 부운석의 솜씨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부운석이 관부에 무언가 지시한 것이었다. 주씨 자매가 평소 귀인들과 자주 왕래했으나 그녀들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7황자로 말하자면 뜻밖의 수확이었다. 황상은 7황자가 산 위에서 백성을 위해 복을 기원하지 않고 몰래 장부에 갔을뿐더러 정허 도사 같은 사기꾼을 가까이하니 가르침이 많이 필요하다고 질책하며 그에게 금족령을 내렸다.
황상이 7황자에게 금족령을 내리자 7황자에게 기울었던 조정의 대신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황상의 결정은 7황자가 그다지 성총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비추어졌고 대신들은 태자야말로 진정으로 잡아야 하는 줄이 아닐까 여기기 시작했다.
7황자에게 금족령이 떨어진 후, 위여풍은 그와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위왕도 행동을 자제하기 시작했다. 멍청한 사람만이 바람과 풍랑이 드센 곳에서 위를 향해 뛰어드는 법이니까.
한안은 완승을 거둔 셈이었다. 그녀에게 위협이 되는 모든 적수는 앞으로 오랫동안 그녀를 괴롭힐 방법이 없었다.
대주씨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한안은 홀로 한참 동안 멍해 있었다. 그녀는 기쁘다거나 후련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자신이 반드시 해야 할 일 하나를 완성했다는 느낌뿐이었다. 오히려 공허해졌다. 이번 생의 목표는 오직 복수였다. 적수가 하나하나 줄어들고 그녀의 근심도 갈수록 가벼워졌지만 그럴수록 자신이 어디를 향해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만약 어느 날 적수가 전부 소멸한다면 이 세상에 남아 있을 이유가 있을까?
생각에 빠져 넋을 놓은 한안은 중얼중얼 주홍에게 말했다.
“주홍,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홍은 한안이 어째서 갑자기 이렇게 묻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다만 그녀가 아는 것은 요즈음 한안이 조금도 즐거워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사람들의 음모를 폭로함으로 이제 장부에 그녀를 위협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졌는데도 소저는 하나도 즐거워하지 않았다. 1년 전 한안이 독감을 앓고 일어난 후로 주홍은 소저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명확히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녀들은 어려서부터 함께 자랐고 서로에게 숨기는 것이 없었다. 이전에는 소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조금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소저의 눈빛은 수많은 사연을 겪어낸 사람 같았다. 그러나 그 사연 속에 자신과 급람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한안은 평소에 진중하고 냉정했다. 하지만 아주 가끔 이렇게 망연함과 곤혹스러움을 무심코 드러내는 때가 있어서 길을 잃은 아이 같아 마음을 아프게 했다. 주홍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소저께서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꼭 생각할 필요는 없으세요. 소저께서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시기만 하면 좋은 것이지요. 반드시 살아갈 의의를 말해 보라고 한다면…… 소저께서는 왕야를 생각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부운석? 한안은 멍해졌다.
“왕야께서 소저께 잘해주시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죠. 왕야시라면 소저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시기에 충분하지요.”
한안은 깊은 생각에 빠져 들었다. 부운석은 확실히 그녀에게 잘해주었다. 이번에 장부에서 발생한 일은 사실 작은 일이라 할 수 없었다. 7황자와 위왕이 연루되었고 심지어 궁중의 태후도 있었다. 그러나 부운석은 지금까지 제 뜻에 참견하려 한 적이 없었다. 그는 모든 퇴로를 잘 깔아놓아 자신이 마음 놓고 대담하게 일을 진행할 수 있게 해 줄 뿐이었다. 오 태의부터 관부에 이르기까지 전부 다 그가 지시한 것이었다. 한안은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장한안, 네게 어떤 덕과 능력이 있어 부운석이 너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주는 걸까?
제게 해준 주홍의 말은 한안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갑자기 부운석이 보고 싶어졌다. 아무 말도 없이 냉담하지만 동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숨기지 않는 그의 모습이 보고 싶었다. 그렇게만 해도 충분할 것 같았다.
“큰일났어요, 소저!”
언제 부운석을 보러 갈까 망설이고 있는데 급람이 매우 급히 바깥에서 뛰어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너무 급히 뛰어 넘어질 뻔했다.
“무슨 일이야? 이렇게 급하게 굴다니. 천천히 말해.”
주홍이 말했다.
급람은 한안의 앞으로 달려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소저, 큰일 났어요. 제가 밖에서 백성들이 떠드는 걸 들었는데, 왕야께서 서융으로 출정하실 거래요.”
“뭐라고?”
한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믿을 수 없다는 듯 급람을 응시했다.
“제대로 못 들었어. 다시 한번 말해 봐.”
급람은 걱정스레 한안을 보고는 이를 악물고 다시 한번 반복했다.
“왕야께서 서융으로 출정하실 거래요. 전쟁하러 가시는 거래요.”
한안은 모르는 척하고 싶었다. 그러나 불가능했다. 부운석이 출정하려는 것을 한안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찌 이리 빨리. 자신과 성혼한 후에 출정할 거라고 말하지 않았나?
“급람, 그가 언제 출정하는지 알아?”
급람은 난감하게 한안을 보았다. 그녀가 상심할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말하지 않을 수는 없어 어쩔 수 없이 천천히 말했다.
“다음 달이래요…….”
이렇게 빨리? 한안은 손을 꽉 움켜쥐었다. 한순간,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다. 부운석이 출정하여 떠난 후 자신이 어떻게 될지는 고려해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이제 완벽하게 안전한 상황이 되었으니 부운석이 마음 놓고 떠날 수 있게 된 걸까? 그래서 한안이 장부의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있게 도와준 걸까? 부운석이 떠난 후에는 한안을 보호해 줄 사람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만나야겠어.”
한안은 느릿하지만 확고하게 한 번 더 반복했다.
“만나야겠어.”
한안이 스스로 부운석을 만나야겠다는 감정이 강렬하게 든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부운석과 잘 상의해볼 필요가 있었다. 여태껏 많은 일을 규명했듯 자신의 마음도 분명히 규명할 필요가 있었다.
“급람, 마차를 준비해.”
그녀는 일어섰다. 화장대 앞으로 걸어가 자신이 조금 전에 완성한 자수를 손에 잡았다. 윗면의 원앙은 방금 수놓기를 마쳤다. 비록 솜씨가 정교하지 않고 서툰 편이라 윗면의 원앙 한 쌍은 원앙이라기보다는 참새 같았고, 위쪽에는 한안의 이름이 수 놓여 있었다. 이 자수를 부운석에게 주려고 했는데, 그때가 이렇게 빨리 도래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
현청왕부 안.
부운석은 옥백색 장포를 입고 조용히 서탁 앞에 앉아 있었다. 손에 쥔 편지의 필적은 자유롭고 풍치 있으며 멋스러워 얼핏 보아서는 여자의 손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한안이 그에게 구조 요청을 했을 때 사람을 시켜 보낸 편지였다.
기러기가 편지를 전한다라. 그의 입가가 살짝 치켜 올라갔다. 그러나 머지않아서 자신은 정말로 기러기를 통해 한안과 편지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기러기라면 좋을 텐데. 자신이 어디를 가든 그녀가 따라와서 영원히 자신의 곁에 있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전쟁터는 칼과 창이 무한했고 무슨 일이든 발생할 수 있었다. 부운석은 자신이 간 후, 이 소녀가 어떤 위험한 처지에 빠질지 알 수 없었다. 아마 그녀의 상황은 자신보다 더 좋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은 전쟁터에 있을 것이나 전쟁터의 칼과 창은 모두 눈에 보이는 것들이다. 하지만 한안이 처한 환경은 눈에 보이지 않는 칼과 창들이 가득했으니 전쟁터보다 더 무섭다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자신이 보호하고 싶은 사람을 보호할 수 없다니. 이런 기분은 그를 괴롭게 했지만 부운석은 부운석이었다. 자신이 해야 할 사명이 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출정하기 전에 한안을 위해 장애물을 깨끗이 제거하는 것이었다. 이렇게라도 해야 비로소 안심하고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봐.”
성뢰는 자신의 벗이 보기 드물게 낙담한 순간을 보고 그의 주의를 끌며 말했다.
“네 어린 왕비와 헤어지기 아쉽다면 가지 않아도 돼. 어쨌든 황상께서도 네가 가지 않았으면 하시니까.”
사실이었다. 황상은 그가 전쟁터에 나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부운석의 성격은 자신이 결정한 일은 열 마리 소로도 되 끌어올 수 없는 것이라 황상이라도 바꿀 방법이 없었다. 부운석이 이번에 출정을 청했을 때 황상도 저지해 보려 했다.
부운석은 고개를 저었다.
“결국은 가야 해.”
“어린 왕비와 성혼한 후에 가도 되잖아.”
성뢰는 입에 붓대를 물고 어물어물 말했다.
“아내를 아직 취하지도 않고 출정하는 것은 손해 보는 게 아니겠어?”
성혼. 부운석의 냉담한 표정에 파동이 일었다. 성혼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너무 어렸고 아직 급계조차 하지 않았다. 자신이 어떻게 그녀를 취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전쟁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한안을 한평생 생과부로 수절하게 할 수는 없었다. 황형의 성격을 보면 그와 함께 순장시킬 수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기심으로 한안을 그런 지경으로 밀어 넣을 수 없었다.
성뢰가 히히 웃었다.
“그냥 이렇게 가면 후회하지 않겠어? 어린 형수가 그렇게 총명하고 사랑스러운데, 네가 1년이나 떠나 있게 되어 만일 다른 남자가 마음에 두기라도 한다면…….”
말이 끝나자마자 방 안에 찬바람이 싸하게 느껴졌다.
“마음에 둔다?”
부운석의 입가가 느릿하게 휘어졌다. 수려한 얼굴 위 표정은 대단히 온화했다. 그러나 이런 온화함이 소름 끼치는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현청왕부의 사람을 마음에 두려면 적어도 목숨이 아홉 개는 되어야 하겠지.”
그가 냉랭하게 말했다.
성뢰는 참지 못하고 몸서리를 쳤다. 정말 무섭다. 부운석의 표정은 너무도 무서웠다. 그러나 하늘도 땅도 무서워하지 않는 부운석의 안하무인 한 성격으로 볼 때, 정말로 한안을 마음에 두려면 목숨이 아홉 개 있어도 모자랄 것이었다. 이전에 군영에서 부운석이 적의 군대를 포로로 잡아 심문하던 방법은 정말로 지옥의 아수라라 해도 지나침이 없었다.
어린 형수, 본분을 알고 자신을 잘 지키는 편이 좋을 겁니다.
한안이 부운석을 만났을 때, 그는 방안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방 안의 분위기는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을 정도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문 입구의 시위가 묵묵히 한옆으로 비켜나는 것을 보니 그녀가 올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급람과 주홍은 바깥에 남았고 한안은 방 안으로 들어가 탑에 기대앉은 부운석을 보았다.
그는 금빛 테두리를 두른 현색(玄色: 살짝 붉은 빛을 띤 검은색) 옷을 입고 있어 평소의 냉담하고 고귀한 분위기와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부운석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고 살을 엘 듯 차갑게 보였다. 수려한 이목구비에서는 어떠한 표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이 어느 때보다 더 그다웠다. 지금의 이 냉담한 사람, 약간의 살기마저 띠고 있는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부운석인 것 같았다.
한안은 잠깐 망설이다가 그의 곁으로 걸어가 가볍게 불렀다.
“왕야.”
부운석은 살짝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 칠흑 같은 눈빛에는 평소 그녀를 대할 때의 온화한 모습은 더 이상 없었다. 그 오묘한 눈빛에서 한안은 아무것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부운석의 주의 깊은 시선을 받자 한안은 영문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왜 그런지는 몰랐다. 그 느낌은 너무도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부운석이 입을 열어 말할 의사가 전혀 없어 보이자, 한안은 어쩔 수 없이 목청을 가다듬고 다시 물었다.
“곧 출정하시나요?”
“그래.”
부운석의 말속에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유감도 없었고 감정도 없었다. 한안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운석의 태도는 그들이 처음 만났던 때로 돌아간 듯 거리감이 있었고, 얼음처럼 차가웠다. 만약 전생의 한안이 이렇게 영문 모를 무례한 대접을 받았다면 몹시 괴로워했을 것이지만 지금 한안에게는 그에게 품은 의혹 말고는 다른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요? 내년에 출정하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그녀의 질문에 부운석은 조용히 그녀를 보며 마음속으로 탄식했다. 이 아이가 처음으로 관심을 보인 것이 이것이라니. 상심한 표정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저 혼자서만 정을 쏟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아이의 마음속에 부운석이란 남자는 한 점의 자리도 없는 것일까? 보통 다른 여자들은 마음에 둔 사람이 출정한다는 사실을 접했을 때, 비통해하며 흐느껴 울거나 아니면 애절한 목소리로 가지 말라고 만류하곤 한다는데. 보아하니 한안은 두 가지 다 가능성이 없는 것 같았다.
“서융에 큰 움직임이 있으니 되도록 빨리 전쟁을 끝내야 하지.”
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미간이 저도 모르게 찌푸려졌다. 서융에 큰 움직임이 있다지만 대종이 이렇게 서둘러 출전할 정도까지는 아닐 것이다. 무슨 큰일이 생긴 건가? 정말 전쟁이 일어난다면 대종이 국력이 막강하다고 해도 손실이 하나도 없을 수는 없다. 한안은 태자가 자객에게 추살 당하던 것과 탁칠의 일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그 사건은 대종 조정에 내통자가 있어서 서융과 결탁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과 같았다. 이렇게 안팎으로 호응하여 힘을 합치고 있으니 전쟁이 일어나면 대종이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럼 지휘관인 부운석도 위험해지는 것이 아닐까?
한안은 몰래 그를 보았다. 그가 서두르지도 여유 부리지도 않고 차를 마시는 것을 보니 알지 못할 분노가 치밀었다. 부운석은 출정을 결정하면서 자신을 생각한 적이 있기나 할까? 지금 그의 모습을 보아하니 자신에게 설명을 해주려는 것 같지도 않았다. 한안은 냉랭하게 말했다.
“왕야, 출정이 임박하였는데 저는 왕야께 언제 시집가게 될까요?”
그녀는 ‘소첩’이라는 단어도 쓰지 않고 예의도 갖추지 않은 채 반문했다.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놀랄 만한 질문이었다. 여자는 혼사에 있어서 피동적인 위치에 있기 때문에 여자가 거리낌 없이 남자 쪽에 ‘언제 시집가게 될지’ 물을 수 없었다. 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질문이라 진중한 성격의 부운석도 차에 사레가 들릴 뻔했다.
부운석은 생각에 잠긴 듯 찻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한안의 표정을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냉담해 보였고 눈과 눈썹 사이에는 울적한 기운이 있는 듯했다. 한안은 이렇게 얼음처럼 차가운 모습으로 그를 대한 적이 없었다. 화가 난 건가?
“출정에서 돌아오면 바로 혼례를 올릴 것이야.”
한안은 화가 나서 죽을 것만 같았다. ‘출정에서 돌아오면’이라니. 이것이 부운석이 그녀에게 주는 답안인가. 전쟁터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는 이 말만 하고 입을 다물었다. 한안은 화가 치밀었으나 겉으로는 웃으며 경쾌한 말투로 말했다.
“왕야께서는 생각해 보신 적이 없으신가요? 만일 전장에서 변고가 생기면 한안은 왕야를 위해 수절하는 생과부가 되는 게 아니겠어요?”
방 안의 공기가 전부 굳어져 버린 것 같았다. 부운석은 말없이 그저 한안을 팽팽히 응시했다. 그의 눈빛은 마치 깊은 연못과 같았다. 한안은 말을 꺼내자마자 후회했다. 내가 무슨 불길한 소리를 한 거야. 어떻게 부운석의 목숨을 가지고 농담을 할 수가 있어. 전쟁터에서 가장 금기시하는 것이 이런 말이라는데. 자신의 말은 확실히 너무 지나쳤다. 악독한 저주나 다를 바 없었으니.
부운석은 자신이 이 아이를 너무 지나치게 총애해서 그녀가 지금처럼 법도 하늘도 없는 성격이 된 게 아닌가 생각했다. 아마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그 사람은 벌써 몇 차례나 죽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한안의 말에는 그저 어쩔 수 없다고 느낄 뿐이었다. 신이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것 같았다.
“왜, 본왕이 죽을까 두려우냐? 아니면 자신이 시집 못 갈까 두려운 것이야?”
부운석이 입술 끝을 올린 채 웃으며 낮은 소리로 말하자 한안은 멍해졌다. 그가 이런 말을 할 줄은 예상치도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부운석은 옅게 웃고 있는 데다가 말투는 예전처럼 그녀를 놀리는 걸 보니 그렇게 울적한 것 같지 않았다.
한안은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터무니없는 말씀이세요. 무슨 시집을 못 간다고.”
부운석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렇게 되니 한안은 그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한안의 귓가에 가벼운 소리로 말했다.
“본왕이 너의 모습을 보아하니 몹시 시집이 오고 싶은 모양이구나. 지금 바로 본왕에게 시집오고 싶은 것이냐.”
그의 목소리는 따뜻하고 부드러우나 낮게 가라앉아 있었고 한안의 귓가에 가까이 다가온 공기는 따스하면서도 지극히 미묘했다. 한안의 심장이 한순간 매우 빠르게 뛰었다. 한안은 열세 살 소녀일 뿐이니,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마주하면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감정을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기에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왕야께서는 생각이 너무 많으시네요. 전쟁터의 일은 누구도 명확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인데 왕야께서 이미 결정하신 걸 보니 잘 생각해 보신 것이겠지요.”
그녀의 기분은 처음과 조금 달라져 있었다. 분노는 천천히 진정이 되었고, 대신 다른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감히 왕야께 여쭙겠습니다. 왕야는 저와의 혼사에서 어떤 걸 얻길 바라시는 건가요?”
한안의 말은 아무렇게나 나온 말이 아니었다. 부운석이 이렇게 빨리 서융으로 출정할 거라는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안 자신조차도 부운석이 자신과 혼례를 올린 후에 전쟁터에 나갈 거라 여겼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부운석은 갑자기 계획을 변경할 사람이 아니니 서융 출정은 처음부터 부운석이 계획해둔 일이라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자신의 혼사도 그 계획 중의 일부분인 걸까? 자신과의 혼사가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어느 시기냐에 따라 혼사의 효용은 다를 것이다.
부운석은 마음속으로 탄식했다. 한안은 다 좋은데 총명함과 영민함이 지나쳤다. 성뢰가 말한 적이 있었다. 여자는 백지처럼 단순하고 선량해야 좋은 거라고. 한안은 절대 백지가 아니었다. 그녀는 마음이 독하고 수단은 악랄했으며 일 처리에서는 과단성이 있고 아주 뛰어났다. 먹물이 파고든 한 폭의 그림 같이 의미심장했다. 어쩌면 부운석이 한안을 좋아해서 그런 건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총명함은 결점이 아니라 칭찬하고 높이 평가해야 하는 장점이라고 느꼈다.
“혼사는……. 전쟁과 무관하다.”
사실이었다. 부운석은 지금까지 자신과 한안의 혼사를 거래의 밑천이나 어떤 목적을 달성할 수단으로 여긴 적이 없었다. 그의 입장에서 혼사를 약속하고 한안을 아내로 맞는 것은 그녀를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어린아이는 그의 말을 조금도 믿지 않는 게 분명해 보였다. 눈빛에 분명히 이렇게 쓰여 있었다.
‘당신은 사람을 속이고 있어요. 나는 당신을 전혀 믿을 수 없어요.’
부운석은 한 손을 뻗어 한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보드랍고 폭신한 질감이 아주 편안했다. 이전에 기르던 꽃사슴 같았다.
“나는 너를 속이지 않아.”
한안은 본래 그를 믿지 않았다. 부운석은 목적성이 강했다. 그런데 혼사에 어떤 목적도 없다고? 아마 그 말을 믿는 건 바보뿐 일 것이다. 그러나 부운석이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고 강조하는 것을 듣자, 마음속이 천천히 평온해졌다. 부운석이 얼마나 오만한 사람인지 한안 자신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렇게 오만한 사람이 성가셔하지 않고 자신을 굽혀가며 참을성 있게 해명을 하고 있었다. 한안은 무슨 기분인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마음속에는 여전히 억울함이 솟아올라,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머리를 부운석의 품속에 들이밀었다.
부운석은 잠시 멍했다가 자기 품속에 기댄 작은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여리고 작으며 유약했다. 온몸이 자신의 현색 장포 안에 파묻힌 것 같았다. 둥글게 쪽 찐 머리만이 드러나 그야말로 어리광을 부리는 작은 동물 같았다. 그의 심장이 저도 모르게 부드러워져서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심정이 되었다. 왜 그들의 관계는 점점 더 웃어른과 아랫사람 같아지는 걸까. 하하……. 부운석은 결코 자신이 늙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한안은 그의 품 안에 잠깐 박혀 있다가 비집고 나와서 소매 속에서 손수건 한 장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부운석이 넘겨받아 보니 자수 솜씨가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공들인 것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위쪽에 낙관이 하나 있었다. 안.
한안이 그를 위해 수놓은 것이리라. 부운석은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한안이 어떤 성격인가. 평소 규방 여자들이 즐겨 하는 일들은 그녀가 즐겨 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러니 이 손수건은 아주 진귀한 것이라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었다.
부운석은 한쪽 팔로 한안을 껴안고 그녀의 뒤통수를 받친 다음, 그녀의 입술 위에 가볍게 입술을 남겼다. 한안은 그저 발돋움하여 그에게 맞출 수밖에 없었다. 입맞춤은 이전보다 더욱 차분했다. 한안은 그의 낮게 드리운 길고 긴 속눈썹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려라.”
부운석이 출정한 그날, 한안은 그를 배웅하러 가지 않았다. 마음으로는 그의 얼굴을 보고 그와 몇 마디 말을 나누고 싶었지만 그저 목암을 시켜 말을 전하게 했다.
‘당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릴게요.’
그녀는 자신이 부운석에게 부담이 될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이런 방식으로 자신은 잘 지낼 것이고, 자신을 위험한 지경에 빠뜨리는 일이 없을 것이며,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릴 거라고 알릴 수밖에 없었다.
다른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운석은 다 이해할 것이다.
20장
세월은 흐르는 물처럼 천천히 미끄러져 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초봄이 왔고 한안이 급계하는 날이 도래했다.
부운석은 출정하기 전 황상에게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한안이 현청왕부에서 살아야 한다는 성지를 내려주기를 청했다. 한안은 그 성지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위험도 없는 것 같지만 장사양과 함께 머문다면 무슨 변고가 일어날지 단정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7황자와 태후도 그리 쉽게 손을 떼고 지나갈 사람들이 아니었다. 만일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현청왕부에서 사는 편이 비교적 안전했다. 부운석은 떠가기 전에 어떤 사람도 한안을 성가시게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말을 남겼다. 그런 이유로 한안은 대단히 평화롭게 지냈다.
만약 유모가 일깨워주지 않았다면 자신의 급계 날도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손가락을 꼽아 헤아려 보니 부운석이 떠난 지도 반년 이상이 훌쩍 넘었다. 전쟁터의 소식은 때때로 한안의 귀에도 들려왔다. 전쟁은 치열했고 서융의 기세는 흉흉하다고 했다. 서융이 완벽한 준비를 한 탓인지 전쟁은 빨리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한안은 어렴풋이 대종과 서융이 내통하여 힘을 합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내통자를 잡아내지 않으면 적을 처리하고 싶어도 어려울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작은 여자일 뿐, 전쟁에 나갈 수 없었다. 그런 까닭에 많은 시간을 사당에 가서 부운석이 평안하도록 하늘이 보우해 주시기를 묵묵히 기원할 수밖에 없었다.
초조하면서도 또 평온한 날들이 이어졌다. 부운석이 전쟁터에서 위험하지나 않을지 초조하고 걱정스러우면서도 현청왕부의 보호를 받아 한도 끝도 없는 아귀다툼을 상대할 필요가 없으니 조용하고 평온했다. 그런 복잡한 기분 속에서 한안은 급계 날을 맞이했다.
한안은 아침 일찍 일어났다. 유모는 한안이 입을 치마를 오랫동안 고르고 골라 겨우 선택했지만 한안은 치장에 특별히 의미를 두지 않았기에 급람을 시켜 아무렇게나 머리 장신구를 고르게 했다. 오늘 급계를 주관하는 사람은 등선의 모친, 등 부인이었다. 모친이 세상에 계실 때, 등 부인과는 친밀한 관계였다. 한안은 어머니가 안 계시고 등 부인은 신분이 낮지 않으니 한안의 급계를 주관할 자격이 충분했다. 한안은 감격했지만 등 부인은 그저 웃으며 말했다.
“나도 네가 자라는 것을 지켜보았으니, 나를 네 어머니처럼 여기렴.”
평범한 말 한마디에 한안은 눈시울이 촉촉해지자 등을 돌려 남들이 자신의 추태를 보지 못하게 하고 기분을 가라앉혔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등 부인이 그녀의 머리를 빗겼다.
현청왕부 정청에는 이미 적지 않은 부인들이 앉아 있었다. 부인들과 소저들은 모두 등 부인이 손수 엄격히 골라 청첩을 보낸 사람들이었기에 신임할 만한 이들이었다. 그들에게 한안은 이미 현청왕비나 마찬가지라 관계를 잘 맺어두면 그녀들에게 이롭기만 할 뿐 해될 것은 하나도 없다고 여겼다.
등 부인은 한안의 길고 긴 머리카락을 빗질해주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길고 부드러웠으며 새까맣고 윤기가 반들반들 나서 최상급 비단 같았다. 등 부인은 감개무량함을 금할 수 없었다. 등 부인은 한안이 젖먹이 어린 아기였을 때, 왕씨의 품속에서 새까맣고 빛나는 눈동자에 호기심이 어린 눈을 한 채 자신을 살펴보던 것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시간이 정말 빠르게 지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 어린 아기가 이렇게 늘씬한 소녀로 자라다니. 게다가 현청왕도 한안에게 지극히 잘해준다 들었다. 비록 한안이 어릴 적엔 냉혈한 부친과 호시탐탐 그녀를 노리는 이낭들 때문에 많이 힘들었지만 결국엔 행운이 찾아와 한안과 뜻이 맞는 낭군을 찾았다. 왕씨가 천상에서 보고 있다면 얼마나 기쁘고 안심이 될까.
등선은 옆에서 지켜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네가 이렇게 급계를 하는구나. 후후, 왕야께서 돌아오시면 성혼할 수 있을지도 몰라.”
등선은 고개를 흔들더니 이어 말했다.
“네가 급계하는 것을 보게 되다니 정말 기뻐. 이제 우리도 다 자랐으니까 더 이상 어린아이로 볼 순 없을 거야.”
한안은 옅게 웃었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거울 속에 공들여 단장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거울 속 눈동자에는 냉담함이 흘렀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전생에서 급계할 때는 비록 어머니는 안 계셨지만 기뻐 어쩔 줄 몰랐다. 그때의 한안은 천진하게도 장어산과 주씨가 공들여서 준비해주었던 급례계로 인해 그들이 자신을 진심으로 대해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기뻤던 또 다른 이유는 급계 후 바로 위여풍에게 시집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안은 폴짝폴짝 뛰고 싶을 정도였다.
한 생을 겪고, 그때와 같은 장면이 재차 자신의 눈앞에 나타났다. 주씨와 장어산은 없었지만 한안은 기쁘지 않았다. 혹시나 그 사람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일까? 성인이 된 자신의 얼굴을 맨 먼저 그에게 보여줄 수 없다는 생각을 하니 이 상황이 유감스러웠다. 그 마음이 얼마나 크길래 그나마 남아 있던 즐거움마저 사라져 버렸을까.
등 부인은 계속해서 한안의 머리를 빗겼다. 옥 빗은 한안의 긴 머리카락을 미끄러져 내려갔다. 얼마쯤 빗었을까. 막 쪽을 틀어 올리려 할 때, 등 부인의 손이 미끄러져 옥 빗이 쨍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아름다운 옥을 조각하여 만든 빗은 두 동강으로 쪼개지고 한안의 머리 위쪽은 홱 하고 한 번에 풀어져 내려 어깨 위로 긴 머리카락을 펼쳤다.
“어머나.”
등 부인이 놀라 외치며 서둘러 허리를 굽혀서 빗을 주웠다. 그리고는 미안한 얼굴로 한안에게 말했다.
“미안하구나, 고의가 아니었어……. 어쩌지…….”
빗이 바닥에 떨어져 두 동강이 났으니 길조는 아니리라. 주위의 여종들이 모두 놀란 눈이 되었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대해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았다. 한안은 놀래지 않고 그저 웃었다.
“빗을 바꾸죠. 시간을 지체하면 안 되죠.”
급람이 서둘러 새 빗을 가지고 왔다. 등 부인과 등선은 미안한 표정으로 한안을 보았고 한안은 웃으며 그녀들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사실 한안도 불안했다. 자신의 불안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의 존재는 너무나 강렬했다.
바깥에서 젊은 사내종이 통보하는 소리가 전해져 왔다.
“왕야께서 부로 돌아오셨습니다! 대종이 대승을 거두고 돌아왔습니다!”
왕야께서 부로 돌아오셨다?
한안은 순간 놀랐다. 자신의 청각에 문제가 생긴 건가 싶어 무의식적으로 급람과 주홍을 보았다. 두 사람 모두 기쁜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보자 그제야 실감했다. 부운석이 정말 돌아왔구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황급히 그 젊은 사내종에게 물었다.
“왕야께서 지금 어디에 계시느냐?”
사내종은 늘 어른스럽던 왕비가 이처럼 흥분한 순간을 본 적이 드물어 놀라기도 했지만 이내 솔직하게 대답했다.
“정청에 계십니다.”
한안은 부운석이 몹시도 보고 싶었다. 그녀는 등 부인이 자신의 머리를 빗기고 있다는 것도 완전히 잊어버리고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고 몸을 돌려 방을 달려나갔다.
그녀는 급하게 달리느라 등 부인의 외침에 돌아볼 틈이 없었다. 한안의 거침없는 행동을 정청에 있는 사람들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할 듯하여 급람과 주홍도 불안한 마음에 한안을 따라 바삐 달렸다. 두 사람은 진심으로 기뻤다. 왕야가 대승을 하고 돌아왔으니 그럼 한안은 머지않아 부운석의 진정한 아내가 되리라. 그러면 한안은 현청왕부의 주인이니 더는 감히 그녀를 업신여길 사람은 없을 것 아닌가.
정청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도 부운석이 부로 돌아왔다는 소식에 놀라 동요했다. 그들은 그저 한안의 급계례에 참석하러 온 것인데 개선하여 돌아온 현청왕과 마주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부운석은 황상이 아끼는 사람인 데다 공까지 세웠으니 비위를 맞추어야겠다고들 생각했다.
바깥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 오더니 군장 차림의 병사 한 무리가 들어왔다. 마지막에 들어온 사람은 흰 갑옷을 걸친 부운석이었다. 느린 걸음으로 들어온 그의 기세는 살을 엘 듯 차갑고 오싹했다. 수려한 이목구비 위는 얼음과 서리를 한 겹 입혀 놓은 것 같았다. 부운석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담함과 한기는 이전보다 더 심해진 듯했다.
다시 밖에서 어지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부운석!”
맑고 낭랑한 여자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사람들은 일제히 놀라 숨을 ‘헉’ 하고 들이켰다. 왕야의 이름을 대놓고 부르다니?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니 하얀색 면사를 겹쳐놓은 치마를 입은 소녀가 조용히 서서 현청왕을 곧장 응시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대청 가운데 서 있는 소녀는 활짝 피어난 한 송이 수련 같았다. 피부색은 옥같이 희고 빛나며 투명했고 까맣고 밝은 두 눈동자는 촉촉해서 사랑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청순하고 수려한 것이 절색이라 할 수는 없지만 누구와도 구분되는 독특함과 차분함이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온 것 같았다. 긴 치맛자락에 큼직큼직한 채색 나비가 수 놓여 있었고 금빛 찬란한 면사 덧옷은 그녀를 안개 가운데에 있는 것처럼 에워싸고 있었다. 길고 긴 머리카락이 어깨 위에 풀어져 내려와 사람의 심금을 울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누군가 그녀를 알아보았다. 현청왕의 어린 왕비, 장한안이구나. 1년 전에 비해 그녀는 많이 변했다. 이전의 그녀는 다듬어진 적 없는 아름다운 옥이면서 사람을 압박하는 기세가 있고 날카로운 구석이 있었다면, 눈앞의 한안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처럼 평온하고 분별 있게 변했다. 어린 소녀의 풍모와 재능이 꽃피기 시작한 것이다.
한안은 조용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 순간, 전하고 싶은 천만 가지 말이 모두 목에 걸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새까만 눈동자 속에서 어떤 감정도 알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조용히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남자의 눈은 또렷했다. 꿈속에 나타났던 그 어느 때보다 더 또렷하게 자신의 앞에 있었다. 그러나 비할 데 없이 생소했다.
그녀는 부운석의 옆, 교묘한 웃음을 예쁘게 짓고 있는 아름답고 요염한 소녀를 보았다. 그녀는 부운석의 팔을 잡고 도발적으로 자신을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그 사람은…… 이림나였다.
어느 한 사람도 입을 열어 말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순간이었다. 서둘러 달려온 급람과 주홍도 이림나의 출현을 예상치 못하고 한순간 그 자리에서 멍해졌다.
아주 짧은 순간, 한안의 심장은 매섭게 경련을 일으켰다.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부운석이 어떤 사람인지 그녀 스스로 잘 알고 있다고 여겼다. 지금 이림나는 그의 손을 잡고 있었고 부운석은 그걸 거부하지 않고 있었다. 한안이 무딘 사람이라 해도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물며 그녀는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민감한 사람이었다. 부운석은 냉랭하게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고 그의 눈빛은 평소와 달리 생소했다. 한안은 그가 자신을 몰라보는 게 아닐까 싶었다. 부운석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사람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돌아가라.”
시위가 명을 받고 떠나가자 부운석 또한 몸을 돌려서 대청을 떠났다. 그는 몸을 돌리면서 한안을 한 번도 보지 않았다. 이림나가 서둘러 따라가며 교태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나 좀 기다려줘요.”
“기다려요.”
한안의 손가락 끝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모든 사람이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문 가운데, 그녀가 소리쳤다.
“부운석.”
목소리는 비할 데 없이 평온했다. 가장 짧은 시간에 모든 것을 명확히 파악한 것처럼. 그저 낯선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불과한 것처럼.
멈춰선 부운석의 뒤에 있던 목풍이 조금 불안하게 한안을 쳐다보았다. 부운석은 몸을 돌려서 한안을 흘끗 보고는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소리 없는 질문을 던졌다.
한안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다 하늘하늘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누구죠?”
그녀가 가리킨 것은 이림나였다. 부운석이 눈썹을 추켜 올리고 대답기도 전에 이림나가 먼저 발돋움하여 부운석의 팔을 끌어안으며 높은 소리로 말했다.
“나는 서융 공주야. 곧 그의 왕비가 될 거야.”
좌중이 떠들썩해졌다.
부운석의 왕비? 그럼 한안은 무엇이란 말이야?
모든 사람이 한안을 보는 눈빛에 동정심이 담겼다. 서둘러 왔다가 이 장면을 본 등선이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큰 소리로 말했다.
“현청왕, 너무 무례하군요. 당신이 이러는 건 한안을 어떻게 하겠다는 의미인 건가요?”
등 부인이 놀라 펄쩍 뛰며 그녀가 불경스러운 말을 할까 서둘러 등선의 입을 막았다. 등선의 신분으로 부운석에게 따지듯 말하는 행동은 불경을 저지르는 것이었다.
부운석은 냉랭하게 등선을 보았다. 눈빛 속의 음산한 한기는 등선이 몸서리를 치게 만들었다. 등선은 화가 났지만 동시에 부운석의 눈빛에 겁을 먹었다.
한안이 고개를 높이 들었다.
“나는 존귀한 서융 공주가 우리 대종과 전쟁 중인 적이라고만 알고 있는데요.”
한안의 신분은 서융 공주보다 낮았다. 그러나 이림나가 느끼기에 눈앞에 있는 이 여자야말로 진정한 공주 같았다. 한안의 말투는 평온했지만 저 높은 곳에서 군림하는 기색이 완연했고,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주위에 대단한 압박감을 조성했다.
서융 공주는 말문이 막혔다. 한안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생각지 못한 듯했다. 좌중의 다른 부인들과 소저들은 서융 공주의 미모를 보고 놀라는 기색을 드러냈다가 한안의 말을 듣고는 영문 모를 적의로 얼굴을 찡그렸다. 이 사람들은 모두 대종 사람들이었다. 서융과 대종은 현재 적대적인 상황에 있었다. 한안은 서융 공주에 대한 호기심을 ‘적국’의 공주에 대한 적의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녀는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한안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한안은 공주의 분노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거꾸로 재밌는 생각에 잠긴 듯 웃었다.
“서융이 패해서 당신이 화친으로 온 것이 아니어야 할 텐데요, 공주 폐하.”
가볍게 스치듯 지나가는 말투에 담긴 조롱이 귀에 거슬렸다. 대청에 순간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퍼져나갔다. 이림나는 화가 나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하지만 한안의 말이 구구절절 이치에 맞아 반박할 방법이 없었다. 서융이 패해서 자신이 화친으로 온 것은 맞았으니까. 하지만 상대방이 부운석이라서 기쁘기만 했다. 그러나 한안의 말 덕분에 서융은 겁이 많아 금지옥엽인 공주를 보낸 나라가 되어 버렸다. 결국 예전에는 공주였을지 모르나 지금은 몰락한 처지이니 장한안보다 못하다는 말이었다.
“그럼 또 어때?”
이림나가 쌀쌀맞게 웃고는 부운석의 팔을 끼고 교태를 부리며 말했다.
“왕야께서 나를 처로 맞이하기로 승낙하셨는데. 왕야께서 나를 좋아하신다고. 화친이면 또 어때. 우리 둘이 서로 사랑하는걸.”
서융의 여자는 본래 대담하고 자유분방하다 여긴 사람들은 한안을 버림받은 여인 보는 듯 동정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그들 눈에 한안은 이미 실패자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부운석은 한안과 전혀 상관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한안의 눈앞에 지아비를 기다리는 꿈을 품고 있는 전생의 자신이 나타났다. 그러나 기다림 끝에 온 것은 지아비의 다른 여인이었다. 그 일은 전생에서 끝난 게 아닌가. 운명이란 게 이렇게 사람을 농락하다니. 부운석을 좋아하고 믿게 만들어 놓고는 다시 이 모든 것이 사기극이었다고 알리는 것인가.
시집가기도 전에 휴처를 당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한안을 두고 웃음거리로 삼을까. 아, 장어산. 장어산이 이 소식을 알면 어떻게 한안을 비웃을까. 감옥 안의 미 이낭과 주씨는 말할 수 없이 기뻐하지 않을까.
그럼 장한명은? 시집가기도 전에 휴처 당한 누나가 있으면 나중에 벼슬길에도 영향을 받을 것이고 지인들에게도 비웃음을 당하며 평생 고개 들고 다니지 못할 수도 있었다. 설마 자신 때문에 장한명, 유모, 급람과 주홍이 힘들어지는 걸까. 만약 어머니가 하늘에서 보고 계시면 자신 때문에 마음 아파하시겠지?
안 돼. 인생이 이렇게 되어서는 안 돼. 세상을 다시 살 소중한 기회였다. 이렇게 몰락할 수는 없었다. 억울함을 참고만 견디는 것은 이번 생에서 장한안이 할법한 일이 결코 아니었다.
생각을 정리한 한안은 옅게 웃으며 냉담하고 조롱기 어린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이제 보니 그랬군요. 공주께서 이런 말을 들어보셨는지 모르겠네요. 혼례로 모셔오는 것은 처이고, 사통하여 도망가는 것은 첩이다. 라구요.”
그녀는 이림나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황상께서 성지를 내리시어 나를 현청왕비로 삼으셨어요. 정당한 명분과 순리에 맞게 혼사를 정한 셈이에요. 만약 공주가 현청왕부의 반쪽 주인이 되려면 서융에 머무르면서 기다렸어야지요. 어찌 이렇게 왕야를 따라 천 리 먼 길을 달려 대종에 온 건가요?”
그녀의 웃는 얼굴이 점점 더 의미심장했다.
“왕비가 해야 할 일은 아니지요.”
이림나의 표정이 변했다. 사람들이 이림나를 바라보는 시선도 변했다. 한안은 적어도 법도를 지키는 대종 여자였다. 그러나 서융 공주가 법도를 모르는 것은 그렇다 치고 남자를 따라 대종에 바로 오다니. 수치가 뭔지 모르는 천박한 년들이나 남의 소첩이 되는 여자들이 할 만한 행동이었다. 당당한 공주라면서 이렇게 수치를 모르다니. 오랑캐 사람답군.
한안은 침착하고 느긋했다. 한안은 유창한 언변으로 상심한 기색 하나 없이 담담했다. 아무리 상처가 크다 해도 오만방자한 서융 공주를 상대로 한 걸음도 물러설 수는 없었다.
이림나는 평생 다른 사람으로부터 비웃음을 당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한안만큼 총명하지 못해 반격할 말을 찾지 못하고 주위 사람들의 이상한 눈빛만 훔쳐보고 있었다. 이림나는 독사를 내보내 한안을 물어 죽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잠깐 멈칫했다가,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득의만만하여 웃었다.
“아이고, 너한테 알려주는 것을 잊었네. 너희 대종 황제께서 이미 왕야를 대신하여 나를 부로 맞아들이겠다고 승낙하셨어. 네 휴서는 곧 도착할 거야. 대종 황제의 명령이 거짓일 리 없지.”
급람과 주홍은 나란히 멍해졌다. 이림나에게 비장의 패가 있을 줄은 결코 생각지도 못했다. 한안 자신도 생각지 못했다.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변한 걸까. 최종적으로 믿을 수 있는 곳은 황상이어야 했다. 군주는 허언을 하지 않는 법이니까. 일국의 군주가 이랬다 저랬다 한다면 조정의 위아래 대신들이 어찌 황상을 믿고 충성을 다 할 수 있을까. 하지만 황상이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현청왕비를 바꾸려 하다니 이건 너무나도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그 일이 이상하다는 것을 안다 해도 한안에게는 방법이 없었다. 오히려 이림나가 던진 말은 한안의 상황을 뒤집을 가능성이 더 이상 없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황상이 패를 던졌는데 과연 한안은 현청왕비가 될 수 있을까?
한안은 현청왕비라는 이름에 미련이 있는 게 아니었다. 남자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데 그의 아내 자리를 억지로 차지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자신을 기만하고 남을 기만하는 것일 뿐이다. 이미 전생에서 깨달은 이치였다. 어쩔 수 없이 현청왕비에서 물러난다 해도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만약 자신이 현청왕비라는 무대에서 내려온다면 7황자와 태후가 자신을 그대로 놓아줄 리 없었다. 현청왕부의 비호 없이 장한안은 몇 발자국 정도 걸을 수 있으려나.
수중의 자원을 최대한도로 이용해야 한다. 설령 그녀의 마음이 제아무리 달갑지 않고 제아무리 아프다 해도 여기에서 양보하고 물러날 수는 없었다. 서융 공주가 의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녀의 존귀한 신분, 황상의 성지, 그리고…… 부운석의 사랑. 사랑? 한안의 입가가 조롱으로 곡선을 그리며 기울어졌다.
그녀는 대청 중앙에 서 있었다. 새까맣고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춤추듯 흩날렸다. 하얀 옷에 새까맣고 긴 머리카락이 두드러지게 대비를 이루어 몸이 날아올라 떠나가 버릴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소녀의 애수 띤 표정은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한안은 재빠르게 주위의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그들의 눈빛에서 동정을 읽어내고는 모두를 향해 사뿐하게 머리를 깊이 숙이고 절을 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여러 부인께 증인이 되어주시기를 청합니다. 나중에 한안이 정말로 현청왕부와 무관하게 된다면 그것은 한안의 자발적인 의사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한안의 목소리는 애절하여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이림나를 보았다. 눈 속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서융 공주는 금지옥엽이지요. 한안은 비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합니다. 공주가 신분으로 한안을 누르려 한다면 한안은 그저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지요.”
한안은 태도를 한껏 낮추었다. 급람은 2년 전 한안의 성정이 크게 바뀐 후로 한안이 이렇게나 손해 보는 태도를 취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마음속에 분노가 일어 하마터면 부운석을 원망하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눈치를 챈 주홍이 급람을 잡아당겨서는 아무런 얘기도 하지 말라는 눈짓을 보냈다.
한안의 태도는 얼핏 보기에는 유약해 보였지만 또 자세히 보면 의미심장한 분위기가 있었다. 이는 나중에 정말로 한안이 휴처를 당한다 해도 책임이 자신에게 있지 않고 서융 공주 이림나가 신분을 이용하여 한안을 억누른 것이라는 암시를 주고 있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약자를 동정하는 데 익숙한 법이었다. 한안은 자신이 열세에 놓이게 할 수 없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저울이 자신 쪽으로 기울어 있어야 나중에 무슨 일을 하든 이로울 것이 분명했다.
이림나는 한안이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는 것을 듣고 즉각 반박했다.
“이것은 너희 황제의 뜻이야. 설혹 내 신분으로 너를 누르면 또 어때? 너는 보잘것없는 5품 관원의 딸에 불과하잖아.”
이림나의 오만방자한 태도에 사람들은 불만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한안은 비록 지금은 아니지만 이전에는 현청왕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1년 사이에 현청왕은 한안을 냉담하게 대하고 있는 걸 보자니 남자는 다 믿을 수 없구나 싶었다. 게다가 서융 공주가 자신의 지위에 기대어 남의 남편을 빼앗아 가면서도 강경한 태도를 보이니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한안은 옅게 웃었다.
“공주는 금지옥엽이니 당연히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러나 왕후장상에 어찌 씨가 따로 있을까요? 출신은 바꿀 수 없는 것이라지만 그래도 만약에 공주가 신분을 벗고도 오늘처럼 영예로울 수 있을까요?”
“너…….”
이림나는 화가 나서 얼굴색이 변했다.
“세상의 흥망성쇠가 변화무쌍하니, 나중의 일은 누구도 단언하기 어렵지요.”
한안이 조용히 그녀를 응시하더니 웃었다. 눈과 눈썹이 전부 휘어지는 것이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눈빛에는 알아볼 수 없는 냉기가 담겨 있었다. 이림나는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한안의 말 속에 있는 위협에 그녀는 가슴이 섬뜩했다. 그러나 그것도 한순간, 이림나는 이내 마음을 다잡고 한 걸음 다가섰다. 의도적으로 입가를 치켜올 리며 얼굴 가득 득의만만한 빛을 띄웠다.
“어떻게 말하든 상관없어. 이제 나야말로 현청왕비니까. 나는 너에게 즉각 여기를 떠나라고 명령하겠어.”
한안은 우스운 말을 들은 것처럼 허리를 펴지 못하고 웃어댔다. 이림나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하려는 순간에야 한안은 비로소 유유히 말했다.
“정말 우습네요. 황상의 성지가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너무 성급한 거 아닐까요? 한안이 여기에 살고 있는 것은 황상께서 성지를 내리셨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여기를 떠나려면 반드시 황상의 성지가 도착하기를 기다려야 되죠.”
그녀는 부운석을 향해 담담하게 말했다.
“안 그런가요, 왕야?”
줄곧 차가운 눈으로 모든 것을 보고 있던 부운석이 살짝 눈썹을 찌푸리고는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럼 소첩, 왕야께 감사드리겠습니다.”
한안은 사뿐히 절을 했다. 그녀는 ‘한안’이라고 말하지 않고 ‘소첩’이라고 말했다. 머지않아 버림받게 될 테지만 지금 이 순간은 단호하게 ‘소첩’을 사용하고 싶었다.
부운석이 알고 있는 바, 한안은 예의를 갖추면서 데면데면하게 굴 때 자신을 ‘소첩’이라 칭했다. 기분이 좋거나 부운석을 신임한다면 ‘한안’이라고 했을 것이다. 한안은 부운석과의 관계를 끊으려는 것 같았다. 마치 서로 손님처럼 예의를 갖추는 부부, 머지않아 마음이 떠나려는 부부처럼.
“가자.”
부운석은 냉랭하게 말을 던지고 바로 몸을 돌렸다. 이림나가 기뻐서 깡충깡충 뛰면서 서둘러 따라갔다. 대청 중앙에 한안 홀로 고독하게 남겨졌다.
일이 이 모양으로 전개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등선은 화가 나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한안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등 부인도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사실상, 어느 여자가 마른하늘에 날벼락과 같은 일을 만나고도 침착할 수 있을까.
그때 한안이 고개를 들고 사람들을 향해 우아하게 생긋 웃었다. 단장도 아직 다 마치지 못한 작은 얼굴이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수려하면서도 유순하고 부드러운 소녀였지만 눈빛에는 강인함이 있었다.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한안이 가벼운 소리로 말했다.
“오늘 급계례는 제대로 끝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께 사죄드립니다.”
그녀는 허리를 숙이며 격식을 갖추었다. 조금 전의 일로 인한 추태는 조금도 없었다. 고귀한 공주처럼 서두르지도 여유 부리지도 않는 태도였다.
사람들은 속으로 탄식했다. 그러나 자신들이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일어나서 작별을 고하고 자리를 떴다. 맨 마지막으로 등선과 등 부인을 보내고 한안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곳은 부운석이 출정하기 전, 사람들에게 특별히 분부하여 자신에게 내어준 방이었다. 풍경이 지극히 아름다워 창 앞에서 넓게 펼쳐진 매화나무와 향기로운 풀을 볼 수 있었다. 밤이 되어 달이 나뭇가지 끝에 닿을 때면 바람 속에 맑고 산뜻한 꽃향기가 풍겨오곤 했다. 한안은 매화나무에 물을 줄 때마다 부운석이 돌아왔을 때 매화나무들이 더 무성하게 자라 있기를 희망했다. 부운석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이 매화나무를 원할까?
급람은 줄곧 한안의 표정을 주의 깊게 살폈다. 한안이 스스로 감정을 눌러 참는 것을 걱정하다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를 했다.
“소저, 왕야께서 어떻게 그러실 수 있어요.”
말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자기 집 소저를 그렇게 자상히 보살피더니 전쟁터에서 돌아와서는 성격이 어떻게 저리 바뀔 수 있단 말이냐. 그 무슨 서융 공주인지 뭔지가 왕야에게 도술이라도 부려서 왕야가 미혹된 게 아닐까? 왕야는 일생 영원히 첩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했는데……. 맹세를 어긴 것은 아니지만, 그 맹세에서 그가 지키려는 아내는 이제 소저가 아닌 것이다. 생각할수록 화가 나서 급람이 이어서 말했다.
“그 서융인지 공주인지 뭔지도 별로던데요. 야만적이고 제멋대로고 어디 우리 소저 발끝에나 미칠 수 있을라고…….”
“급람!”
한안이 낮게 소리쳐 급람의 말을 잘랐다. 지금은 상황이 변했으니 이곳에도 남의 이목이 있을지 모르는 법이었다. 벽에도 귀가 있다고 했다. 급람의 말이 속셈 있는 다른 사람의 귀에 들어간다면 문제가 생길 것이었다. 서융 공주에 대한 불경죄로 급람을 처벌하려 한다면 한안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급람은 입을 다물었지만, 여전히 달갑지 않은 눈으로 한안을 보았다.
“소저.”
줄곧 침묵하던 주홍이 입을 열었다.
“주홍이 한 마디 여쭙고 싶은 말이 있는데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한안은 고개를 돌렸다. 주홍은 침착하고 진중한 사람이었다.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봐.”
주홍이 진지하게 한안을 응시했다.
“소저께서는 대국을 고려하여 참고 견디는 분이 아니시지요. 어째서 여기를 떠나지 않으시나요?”
“떠나?”
한안이 대답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급람이 먼저 외쳤다.
“떠나긴 어디로 떠나? 설마 장부로 돌아가려고? 소저께 이런 일이 생겼으니 경성 사람들이 다 소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거라고…….”
급람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자신의 실언을 알아차렸다. 서둘러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한안을 쳐다보았다.
“대종에서 머물 수 없으면 다른 곳으로 가면 되지. 저 높은 하늘 아래, 설마 우리 몸 의탁할 곳 하나 없겠어요? 억울하게 참고만 있는 건 정말로 가치 없는 짓이에요. 멀리 달아나 이곳의 모든 시시비비와 멀리 떨어져 이름을 숨기고 평온하게 살아가는 것만 못하죠.”
한안은 조금 놀라 주홍을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주홍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진중한 아이에게 자유를 추구하는 마음이 있었다니. 이름을 숨기고 멀리 달아난다라……. 듣기만 해도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말이 아닌가. 그러나……. 한안은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그럼 주홍, 너 한명 생각은 해봤니?”
주홍은 멍해졌다.
“우리가 떠나면 한명도 데려가야 할까? 한명이 우리를 따라 이름을 숨기고 살아간다면 한평생 출세를 할 수 없다는 의미가 되지. 주홍, 너도 알 거야. 한명은 줄곧 큰일을 하고 싶어 했어. 그 애를 여기에 남겨두고 가는 건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렇다고 그 애를 데려가면 이기적으로 그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고. 나중에 한명이 후회하면 어쩌지?”
주홍은 말이 없었다.
“세상 살기 어려운 것, 너도 알 거야. 여자 몇이 이 세상에서 생존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닐 거야.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여기 남아 있어야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는 거야.”
급람이 한안을 보았다.
“소저, 무슨 말씀이세요?”
“너희들 이상하다는 생각 안 들어?”
한안의 눈빛은 비할 데 없이 침착했다.
“부운석은 이런 사람이 아냐. 분명 무슨 일이 생겨서 나를 이렇게 대하는 거겠지. 아마 그 일은 아주 중요할 거야. 황상이 성지를 내려 서융 공주를 돕게 할 정도로.”
“서융이 화친을 가지고 대종을 협박한 게 아닐까요?”
급람이 물었다.
한안은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해. 황상은 말할 것도 없고 부운석 자신도 그렇게나 오만한 사람인데. 그는 절대 자신을 다른 사람과의 거래 조건으로 삼을 리 없어. 하물며 전쟁터에서 대종이 불리하다는 소식은 한 번도 없었잖아. 아주 만약 서융이 협박했다고 해도 대종이 협박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
“그럼 그 서융 공주가 우리 왕야께 무슨 도술을 쓴 게 아닐까요?”
주홍이 주저하며 말했다.
“서융 사람은 기이한 도술 같은 것에 특별히 뛰어나니까요.”
“분명 아닐 거야. 부운석이 내게 냉담하긴 했지만 이림나에게도 아주 냉담했거든. 도술 같은 걸 썼다면 그렇게는 안 했겠지.”
부운석이 개선하여 돌아온 사건은 그날로 경성 전체에 두루 퍼졌다. 동시에 사람들에게 흥미진진하게 회자된 것은 한안이 머지않아 버림받은 여인이 될 거라는 사실이었다. 안 좋은 소문은 늘 빠르게 퍼지는 법이었다. 게다가 퍼질수록 사실과 멀어지는 법. 사람들은 부운석이 서융의 절색 공주에게 빠져 재주와 용모가 공주에 미치지 못한 관원의 딸을 눈에 차지 않아 했다고 말들 했다.
이전에 한안이 현청왕비가 되었을 때, 한안은 부운석을 몰래 훔쳐보던 여자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었다. 한안의 신분으로 현청왕에게 기어오를 수 있다는 것도 불공평하다 여겼는데 한안이 왕야에게 영원히 첩을 들이지 말라는 맹세를 하도록 부운석을 압박까지 했다니 분노를 금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한안이 이런 말로를 맞게 되자 그녀들의 마음속에 잘됐다는 생각과 함께 불순한 마음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현청왕이 한안을 처로 맞을 필요가 없어졌으니 자신들에게 기회가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것이다. 당당한 서융 공주가 언제 어디서나 왕야의 시중을 드는 것은 불가능할테니 몇 사람은 도와야 할 것 아니겠는가.
급람은 나갔다가 바깥의 소문에 화가 나 죽을 뻔했다. 이러쿵저러쿵 찧어대는 사람들에게 몇 마디 따지고 싶었지만 한안에게 말썽을 불러올까 봐 두려워 그저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뱃속에 화를 가득 담고 답답해져서 왕부로 돌아온 급람은 왕부 하인들에게 차가운 조소와 신랄한 비꼼을 받아야 했다.
왕부의 하인들 중 일부는 이전에 한안을 시중든 적이 있고 진심으로 주인을 좋아해서 그녀를 미래의 왕비로 여겼다. 서융 공주라는 변수를 맞이하긴 했으나 이 하인들은 한안 편을 들었고 여전히 그녀에게 친절했고 배려 깊었다. 그러나 또 다른 부류의 하인들은 바람을 보고 배의 풍향을 바꾸는 유형이라 왕부 안의 하늘이 바뀌려 한다고 판단했다. 그동안 왕야에게 깊은 총애를 받던 한안은 머지않아 버림받은 여인이 되고 이림나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는 걸 알게되자 즉각 이림나에게 비위를 맞추며 고의인 듯 아닌 듯 한안을 멸시했다.
조금 전 그 여종이 급람 앞에서 다른 여종과 잡담을 하면서 한 말은 이러했다.
‘이미 내쫓겼는데 아직도 고집스럽게 다른 사람의 부중에 눌어붙어 있으려 하네.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어.’
급람은 그녀와 싸울 뻔했다. 주홍이 그녀를 잡아당기지 않았다면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모를 일이었다. 한안은 급람이 가라앉은 얼굴로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급람은 속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라 무슨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한안이 웃으며 물었다.
“왜 그러니?”
급람은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다. 화가 나긴 했지만 귀에 거슬리는 말들로 그녀를 상심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소문이 소문인 것은 사람이 있는 곳 어디든 파고들 수 있기 때문이라 급람과 주홍이 한안 앞에서 입을 다물고 있을지언정 한안은 귀머거리가 아니기에 그 말들을 들은 지 이미 오래였다.
“여종들이 귀에 거슬리는 말이라도 했어?”
한안이 웃으며 말했다. 한안이 어찌 알았을까 싶었지만 또 생각해 보면 한안처럼 총명한 이가 모르고 있는 것도 어렵다 싶었다. 결국 급람은 씩씩거리며 말했다.
“소저, 저는 정말 이해가 안 갑니다. 소저께서 그것들에게 얼마나 잘해주셨는데 이제 서융 공주가 왔다고 바로 표정을 싹 바꾸다니요. 너무도 배은망덕합니다.”
한안은 어려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는 게 익숙했다. 그래서 하인을 대할 때도 온화하고 너그럽게 대해 모두가 그녀를 좋아했다. 그러니 그 정만 보더라도 서융 공주를 등에 업고 한안을 이렇게 대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급람, 이 세상에서 네가 다른 사람에게 잘해준다고 다른 사람도 너에게 잘해주는 것은 아니야.”
한안은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무슨 선택을 하는지는 다른 사람의 사정이지. 내가 너에게 은혜를 베풀었다고 네가 반드시 나에게 보답해야 하는 것은 아니야. 은혜를 알고 보답하기를 바라는 것은 일방적인 거지.”
한안의 표정은 조금 서글펐다. 전생에 그녀는 주씨 모녀에게 진심으로 대했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과 자신의 행복을 모두 내주고도 주씨 모녀의 보은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럼 짧게 만난 하인은……. 더 말할 것도 없으리라.
“소저…….”
급람이 또 무언가 말하고 싶어 했지만 한안이 손을 저었다.
“이 얘기는 그만하자. 우리는 나갈 거야.”
“나가요?”
주홍이 물었다.
“어디로 나가요?”
“순창무관.”
한안이 눈썹을 모으며 말했다.
부운석의 행동은 너무나도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현청왕부 안에서 자신에게 그 이유를 알려줄 사람은 없었다. 한안이 아는 사람 중에 조정의 일을 탐지할 수 있고 자신에게 적의가 없으며 자신에게 아는 것을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은 순창무관의 주인, 일찍이 무장원이었던 양기뿐이었다.
양기가 이제는 조정 관리가 아니지만, 일생을 군에서 보낸 사람이니 몸이 재야에 있다 해도 전장의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대종과 서융 간에 있었던 전쟁에서의 의문점에 대해서도 무언가 알고 있을지 몰랐다. 한안에게는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일의 전후사정을 명확히 알아내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주홍, 몰래 빠져나가는 게 좋겠어. 가서 옷 두 벌만 찾아와.”
확실히 지금 ‘장한안’의 이름으로 나간다면 남에게 발견되어 순창무관까지 가기 힘들어질 것이다. ‘장한안’이 나간다는 사실을 떠벌릴 수 없는 일이니 조심해야 했다.
*
현청왕부에서 나온 순간, 한안은 세상과 격리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현청왕부의 문을 들어온 것은 부운석이 그녀를 보호하려 했기 때문이었고 지금 이 문을 나가는 것은 오래지 않아 부운석이 그녀를 내쫓으려 하기 때문이었다. 인생은 늘 변화무쌍하긴 하지만 참 덧없구나.
주홍와 급람은 조심스럽게 주위의 동정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녀들 모두 면사로 얼굴을 가렸다. 남들이 용모를 알아볼 수 없게 한 주홍은 마차 한 대를 세내었다. 세 사람을 태운 마차는 순창무관으로 달려갔다.
순창무관에 여자가 무예를 배울 수 있는 무관이 생긴 후, 종종 여자들이 찾아오곤 했기에 순창무관에 도착하기까지 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 않을 수 있었다. 게다가 면사를 착용하고 있어서 집안 규범이 매우 엄격한 소저가 행동도 조심스럽게 한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양기는 그녀의 제의를 받아들여 여자 무관을 건립했고 진 시랑 일가를 견제하여 전생의 일을 겪지 않게 되었다. 이로써 진 귀비의 인생에도 변화가 생겼다. 한안의 입장에서는 양기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자면 양기도 그 거래로 이윤과 명성을 얻었으니 두 사람의 위치는 평등해야 마땅했지만 양기는 장한명의 사부이며 웃어른이기에 한안은 그에게 좀 더 예의를 갖추어야 했다.
순창무관에 도착하자, 소이자가 낯선 여자들을 보고 의혹에 차서 물었다.
“소저께서는 무슨 일이신가요?”
한안이 옅게 웃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소사부께서는 양 노선배께 고해 주세요. 장한안이 방문하러 왔다고요.”
소이자는 한안을 알고 있었다. 현청왕비가 머지않아 버림받은 여인이 될 거라는 소식이 온 경성에 파다할 때, 왕부를 떠나 순창무관에 오다니. 현청왕비는 바깥의 저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눈빛이 두렵지도 않은가? 어째서 그녀의 눈빛은 이처럼 평온할까? 그녀에게서는 슬픔과 상심이 한 조각도 보이지 않았다. 양기는 종종 장한안을 칭찬하며 그녀가 보통 규방 여자와 다르다고 말했다. 그래도 소이자는 한안이 온화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런 환경 아래서도 저런 심리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니 감탄스러울 뿐이었다.
“소저께서는 저를 따라와 주십시오.”
그는 자신의 기분을 추스리고 공손히 한안에게 예를 올리고 나서야 비로소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양기는 방 안 탁자 근처에 앉아 홀로 바둑을 두고 있었다. 양기는 무장이라 금기서화 같은 것은 전혀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바둑은 괜찮게 두는 편이었다. 전쟁과 바둑이 같은 이치기에 바둑을 두면 심적 진정과 안녕을 키워줄 뿐만 아니라 전쟁터에서 유용한 것들을 많이 익힐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안이 들어온 것을 보고 양기가 고개를 들었다.
“지금 어떤 상황인데, 네가 아직도 노부를 찾아올 마음이 있더냐?”
그의 말은 반쯤 농담이라 하더라도 인정머리 없게 들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한안을 보는 눈빛에는 보기 드문 걱정과 관심이 담겨 있었다. 한안은 저절로 마음이 따뜻해져서 덩달아 옅게 웃었다.
“선배님을 찾아오지 않는다 해도 사정은 여전히 똑같습니다. 하지만 다른 쪽으로 방법을 찾는다면 어쩌면 출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안 그런가요?”
그녀는 양기의 질문에 정면으로 대답하지 않았지만 말 속에는 태연자약한 강인함이 있었다. 한안은 이런 상황에 방 안에만 숨어 있는 게 아니라 다른 해결 방법을 찾고 있는 것이다. 한평생 전쟁을 하며 살아온 양기는 고난을 직시할 수 있는 사람을 가장 마음에 들어 했다. 한안을 바라보는 눈빛은 더욱더 따스해지고, 말투는 느긋해졌다.
“네가 오늘 노부를 찾아온 것은 무슨 일 때문이냐?”
양기는 눈앞의 소녀가 보기에는 온화하고 사근사근해 보이지만 실은 비할 데 없이 눈치가 빠르고 총명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가 유언비어의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을 찾아온 것은 분명 자신이 그녀를 도울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도대체 그녀에게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한안이 옅게 웃었다.
“대종과 서융의 전쟁에서 모두 대종이 이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규중에 깊이 머물고 있는 터라 자연히 아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선배께서는 다르시지요. 분명 선배께서는 전쟁의 상황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오늘, 선배께서 제 의혹을 풀어주십사 하고 왔습니다.”
양기는 순간 당황했다.
“네가 전쟁 상황을 알아봐서 무엇하려고?”
그의 얼굴빛이 살짝 변했다.
“노부에게는 능력이 없어 힘이 미치지 못하니 용서하기를 바란다.”
한안의 뜻은 명백했다. 그녀는 대종과 서융 간 전쟁의 모든 세부 사항을 알려달라는 것뿐만 아니라 전쟁에서 있었던 모든 의문점에 대해 구체적으로 분석, 설명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안은 일개 여자일 뿐이고 전쟁은 국가의 대사이니 잘못하면 큰 불경을 저지르는 것이었다. 양기는 의심스러웠다. 한안은 전쟁 상황을 알아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한안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선배께서도 알고 계시지요. 한안은 곧 버림받은 여인이 될 것입니다. 제게는 방법이 없어 선배의 도움을 구하러 온 것입니다.”
양기의 눈빛에 여전히 의심이 남아 있는 것을 보고 한안은 계속해서 말했다.
“사실 제가 전쟁 중의 일을 물으려는 까닭은 저 자신만의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저는 왕야께서 이리 하시는 까닭이 전쟁과 반드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서융인의 음모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음모?”
양기가 의심스레 그녀를 보았다.
“왜 그렇게 말을 하는 거지?”
“직감입니다.”
양기는 무슨 재미난 우스갯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큰 소리로 웃었다.
“전쟁의 일은 직감에 근거하여 판단하는 게 아니다. 이건 아가씨들의 놀이가 아니야. 그렇게 경솔한 판단으로 음모가 있다 확정지으면 안 되지.”
한안은 옅게 웃었다.
“양 노선배께서는 설마 모르십니까? 제 직감이 본래부터 아주 정확했다는 걸요? 어떤 일들은 분명 선배께서도 일찍부터 들어서 알고 계실 텐데요.”
그녀는 눈빛을 반짝이며 양기를 응시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은밀하게 바뀌어 있었다.
“양 노선배께 한 가지 비밀을 알려드리죠. 저의 직감은…… 백발백중입니다.”
양기는 다시 한번 멍해져서 눈을 들어 한안을 보았다. 한안이 현청왕비가 된 이후, 경성 사람들은 한안이 어려서부터 자랄 때까지의 일을 입에 담으며 어린 왕비에 대해 떠들어댄 덕분에 양기도 자연히 한안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예를 들면 부친의 새로운 첩실이 들어와서 계속해서 한안을 노렸지만 매번 그녀가 수월하게 위기를 해결했다든가 하는 것 말이다. 처음부터 이 어린 아가씨가 보통이 아니라고는 느꼈지만, 어쩌면 운이 좋은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건 한 건 자세히 분석해 보면 그녀의 대응책이 빈틈 하나 없는 데다가 상대방의 허점을 파고들어 상대의 계책을 수월하게 뒤집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계략을 잘 쓴 거라고 말하려 해도 그렇게 만은 말할 수 없는 부분도 더러 있었고 적의 전략을 이미 알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도 꽤 있었다. 한안은 무슨 일에서든 당황하지도 서두르지도 않고 상대방이 판을 잘 짜놓았다고 생각할 때를 기다린 뒤에 적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이렇게 어린 아가씨가 어떻게 모든 사건마다 기선을 제압할 수 있었을까. 그 부분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는데 한안이 직감이라고 하자 과연 그럴듯하다고 스스로 납득이 가고 말았다. 물론 완전히 동조할 수는 없었다.
“직감이라. 그건 또 어찌 증명하겠느냐?”
한안은 그를 보고 돌연 웃었다.
“그럼 양 노선배, 내기를 해보면 어떨까요?”
“무슨 내기를?”
“3일 후의 일로 내기를 하는 겁니다. 3일 후, 경성에 큰 폭우가 내릴 거예요.”
양기는 먼저 놀랬다가 무시하듯 웃었다.
“어린 소녀가 너무 생각 없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함부로 지껄인다고 하지 않을 수 없구나. 하늘의 일을 누가 정확하게 말할 수 있겠느냐? 더구나 3일 후는 언급할 것도 없지. 혀를 너무 빨리 놀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안은 확고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제가 말했지요. 저의 직감은 본래부터 아주 정확하다고요. 그러니 양 노선배, 3일 후에 다시 뵙지요.”
양기는 그녀의 자신만만한 모습을 응시했다. 한안이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3일 후의 일을 어찌 저리 자신만만하게 말을 할까. 마음속에 동요가 있었지만, 양기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3일 후, 네가 울지 않기를 바란다.”
“3일 후에 다시 말씀하시지요.”
한안은 그를 향해 절을 올렸다.
“오늘은 먼저 물러나겠습니다.”
오늘, 바로 모든 게 순조롭게 될 리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다행히도 양기의 태도가 어느 정도 풀렸음은 확인했다. 희망이 있기만 하면 된다. 모든 것을 미리부터 다 걱정할 필요 없었다. 한안은 등을 돌렸다. 적어도 3일 후, 자신이 실망하여 돌아갈 리는 없을 것이니까.
양기는 한안의 뒷모습을 보며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부운석은 그도 알고 있었다. 심지어 잘 안다고도 말할 수 있었다. 사실 부운석이 이번에 서융 공주 이림나를 데리고 돌아온 일은 양기도 이해할 수 없었다. 부운석다운 행동이 아니었다. 부운석은 여색에 빠져 문제를 일으킬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라면 지난번 전쟁터에서 부운석이 이림나의 애정 표시를 못 본 척했을 리 없었다.
양기도 한안이 마음에 들었다. 한안은 총명하면서도 다른 여자들 같은 교만 방자한 기색이 없었다. 천진난만한 것 같으면서도 대단히 침착하고 차분했다. 그래서 부운석과 대단히 잘 어울렸다.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을까. 에휴, 양기는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이미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젊은이들의 일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만약 한안의 말대로 서융인에게 음모가 있다면 그것은 별도로 다루어야만 했다.
하지만 3일 후, 정말로 비가 내릴까?
순창무관을 나서자마자 급람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소저, 3일 후 정말 폭우가 내릴까요?”
한안이 옅게 웃었다.
“그건 확실히 단언하기가 어렵구나.”
당연히 내릴 것이다. 한안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전생에서 자신이 급계하고 나흘째 되던 날, 경성에 아주 거센 폭우가 내렸다. 심지어 수재까지 일으켜 경성 백성들이 살 터전을 잃고 떠돌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위왕부에서는 특별히 사람을 보내어 한안의 상황을 물었다. 당시 한안은 위여풍이 이렇게나 진심으로 자신을 아끼고 사랑한다고 여겨 대단히 감동했더랬다. 한안은 위여풍에 대한 믿음이 가득했다.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 나중에 그렇게 변할 줄을.
지금 생각해 보면, 위여풍이나 전생의 일은 마치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다른 사람의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이번만큼은 전생과 같이 어리석게 일생을 살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야 일의 진상을 명확히 알고 싶지는 않았다. 이번 생은 자신이 주도해 가고 싶었다. 만약 정말로 부운석을 믿는다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명확하게 아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주홍이 물었다.
“소저, 우리 지금 어디로 가야 할까요?”
한안은 잠시 생각을 했다.
“마음대로 돌아다녀 볼까.”
한안은 서글프게도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했다. 장부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현청왕부는 이림나가 차지하고 있으니 안 보는 것이 마음 편했다. 이렇게 넓디넓은 경성에서 어디로 갈 수 있을지……. 등선을 찾아가야 하나? 그녀는 등 부인의 마음 아파하는 동정 어린 눈빛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주홍은 한안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대로 위를 걷다가 사람들이 알아보면 성가셔질 게 뻔해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주홍은 뭔갈 조심스럽게 생각하더니 한안을 향해 말했다.
“소저, 만약 마음이 편치 않으시다면 성동의 산 위에 가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한안이 어렸을 때 매번 억울한 일을 당하면 성동의 뒷산 위에 올라가 속 시원하게 울었던 것이 기억났다. 다시는 울러 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성동 뒷산은 여전히 매우 조용하고 좋은 곳일 것이다. 한안의 눈이 환하게 밝아졌다.
“좋은 생각이네.”
부운석이 전쟁에 나간 이후, 시정도 자취를 감추어 자신도 더 이상 뒷산에 무예를 익히러 가지 않았다. 사실상 현청왕비로 사는 것도 그렇게 편하지는 않았던 터라 사람이 없는 조용한 곳을 거니는 것은 괜찮은 생각인 것 같았다. 조금이나마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한안과 주홍, 급람은 바로 뒷산을 향해 출발했다.
거의 1년 만이었다. 성동 뒷산의 경치는 조금도 변한 것이 없었다. 지난번 마지막으로 왔을 때는 부운석이 한안을 데리고 함께 왔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이림나를 처음 만났다. 그때는 부운석이 자신을 보호하며 이림나를 차가운 얼굴로 적대시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들의 위치가 바뀌었다. 그 속에 아마도 말 못 할 사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한안은 여전히 몹시 괴로웠다.
그녀는 호수 근처에 앉았다. 맑고 투명한 호수의 수면은 한안을 그대로 비추어 냈다. 그녀가 손을 뻗어 손짓을 하자 물 속의 한안도 손을 뻗어 손짓을 했다. 한안은 웃음을 터뜨렸다. 급람과 주홍은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녀들은 한안이 억울한 일을 당했으니 실컷 울어서 쌓인 것을 풀려 한다고 여겼다. 자존심이 높고 자부심이 강한 소저이니 당연히 남에게 낭패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그들은 일부러 한안과 떨어져 있었다.
한안은 머리 위의 비녀를 뽑았다. 그 비녀는 부운석이 그녀에게 준 물고기 꼬리 비녀였다. 비녀에는 물고기가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조각이 되어, 물에 풀어놓으면 정말로 물고기 한 마리가 될 것 같았다. 한안은 자신의 머리를 만져 보았다. 여전히 둥근 만두 모양이었다. 오늘 아침, 어제 급계례를 제대로 끝내지 못했으니 여전히 만두 모양으로 쪽을 지으라 고집했다. 자신은 무엇 때문에 이 머리 모양을 고집했을까.
전생의 부운석이 이림나를 처로 맞이한 것은 알았지만 그렇다고 이번 생에서도 똑같아질 줄은 생각지 못했다. 바꿀 방법이 없는 걸까? 그렇지만……. 한안의 기억에 따르면 전생에서는 부운석이 전쟁에서 돌아올 때 크게 중상을 입은 데 반해 이번엔 부상을 입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에서 문제가 생긴 걸까?
생각에 잠겨 한눈을 팔고 있을 때, 잔잔한 호수면 위에 수려한 얼굴 하나가 불쑥 나타나 웃음을 머금고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한안은 깜짝 놀라 얼굴을 향해 손을 내젓다가 호수 안으로 빠질 뻔했다. 수려한 얼굴이 재빨리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아챘다. 한안의 몸이 저절로 그의 쪽으로 기울면서 남자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 바람에 비녀가 호수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남자는 한안이 품 안에 파고드는 감각을 즐기며 한 손을 한안의 허리에 단단히 둘렀다.
“꼬마, 오늘은 어찌 이렇게 정열적이지? 나를 보자마자 품속에 달려들어 안기고?”
한안은 혼자 설 수 있게 되자 그의 품에서 몸부림쳐 벗어나며 매섭게 ‘흥’ 소리를 냈다. 남자를 보는 시선이 제법 매서웠다.
남자는 탁칠이었다. 그는 두 손으로 팔짱을 끼고 웃는 듯 마는 듯 한안을 보고 있었다.
“그렇게 무섭게 굴지 마. 방금은 정말 정열적이지 않았어?”
한안은 갑작스런 탁칠의 출현이 불만스러워 퉁명스럽게 말했다.
“당신은 어째서 여기에 있죠?”
탁칠이 웃으며 말했다.
“오늘 날씨가 좋아서 산 위에서 바람이나 쐴까 하고 왔는데 우연히 너를 만날 줄이야. 생각도 못 했어. 이런 게 연분인가 봐.”
이 사람의 말에는 진실이란 게 한 톨도 없구나. 한안은 이림나를 혐오해서 그런지 탁칠도 덩달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안은 일부러 눈이 휘게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일리 있는 말이네요. 하지만 존귀하신 서융 황자, 당신들 국가가 이미 전쟁에서 패했는데 당신은 어째서 아직 대종에 남아 있는 건가요? 대단히 즐거우신 모양인데 당신도 여동생과 마찬가지로 화친하러 온 것일 리는 없겠지요?”
탁칠의 얼굴빛이 달라졌다. 인정사정없는 한안의 말이 그의 상처 위에 소금을 뿌리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고 해도 말 속에 담긴 조롱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 텐데 하물며 자만심 넘치는 서융 황자는 오죽했을까. 순간, 그의 푸른색 눈동자가 늑대처럼 검푸르게 변하며 매섭게 한안을 노려보았다.
한안은 그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그런데 급람과 주홍이 보이지 않았다. 서융 황자가 따돌린걸까? 그녀는 몸을 돌려 호수 면을 바라보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부운석이 그녀에게 준 비녀가 호수 속에 떨어졌으니 어쩌면 좋을까?
한안은 탁칠을 등지고 서서 호수 속만 뚫어져라 응시했다. 탁칠은 그녀가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을 보고 입술을 치켜 올리며 웃었다. 분노의 빛이 모두 사라진 그는 천천히 한안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림나가 머지않아 현청왕비가 될 텐데. 꼬마, 너는 나를 따라가지 않을래?”
한안은 탁칠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있었다. 탁칠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 보며 의혹에 차서 물었다.
“너 뭐 보는 거야?”
한안은 고개를 돌리고 차갑게 말했다.
“당신 때문에 내 비녀가 호수 속에 빠졌어요.”
탁칠은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웃었다.
“난 또 뭐라고. 이제 보니 비녀가 하나였나 보구나. 너한테 비녀 하나 배상해주는 거야 일도 아니지. 서융에서 아름다운 옥이 많이 생산되는데…….”
“필요 없어요.”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한안은 한마디로 말을 잘라버렸다. 탁칠은 순간 당황했다. 한안은 몸을 쪼그리고 앉아 손을 뻗어서 물속을 이리저리 헤집었다.
탁칠은 흥미가 일어 그녀 곁에 따라서 쪼그리고 앉았다.
“비녀 하나에 불과하잖아. 잃어버리면 잃어버리는 거지. 너 도대체 뭘 아직도 보고 있는 거야?”
한안은 그를 상대도 하지 않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슬펐다. 그것은 부운석이 자신에게 준 비녀였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부운석이 그녀에게 준 비녀에는 중대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부운석이 준 비녀를 꽉 잡고 있으면 마치 부운석을 보는 것 같아, 어떤 일에도 대응할 수 있을 것 같은 무궁한 용기가 솟아났다. 하지만 뜬금없이 나타난 서융 공주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는 균열이 생겼다. 그런데 이 비녀마저 물 아래 가라앉아 찾을 수가 없으니 그녀와 부운석의 관계가 더 이상 만회할 여지가 없다는 의미일까?
탁칠은 한안의 비통한 표정을 보고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말했다.
“그거 그가 네게 준 것이냐?”
한안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옆으로 달려가 기다랗고 마른 나뭇가지 하나를 찾아서 물속을 휘저었다. 물 아래로 내려가 건져내고 싶었지만 탁칠이 옆에 있었다. 외간 남자 앞에서 다리를 노출할 수는 없었다. 불현듯 탁칠에게 화가 치밀었다. 이 사람은 어째서 이렇게 계속 자기 곁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걸까. 온종일 아무 할 일도 없단 말인가?
탁칠은 그녀의 동작을 보며 언짢아하며 말했다.
“꼬마, 내가 비녀를 배상해주는 건 어때? 그건 이제 필요 없잖아.”
한안은 그를 상대하지 않고 그저 고집스럽게 물속을 휘젓기만 했다. 눈은 호수의 물을 응시할 뿐, 탁칠은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탁칠의 표정이 순간 우울하게 변했다.
“그는 곧 이림나를 왕비로 맞을 거야. 네가 이렇게 마음 쓴다고 그가 뭘 하겠어? 너와 그는,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마지막 말은 거의 이를 부득부득 갈 듯 말했다. 그도 어째서인지 알 수 없었다. 한안이 부운석에 품고 있는 감정을 보고 있노라니 화가 났다. 알 수 없는 감정이 피어올랐다. 그는 늘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여 자만심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한안에게는 자신이 부운석과 비교도 안 되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차렸고 일생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감정에 휘둘렸다.
“그만하면 충분해요.”
한안이 차갑게 말을 했다. 한안에게서 들어본 적 없을 정도로 얼음처럼 차가운 말투였다. 한안은 탁칠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서 되도록 멀리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어느 것에도 연루되지 말자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이런 까닭에 탁칠이 뭐라 하든 마음대로 말하도록 내버려 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방금 부운석과 자신의 관계가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한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의 평정이 깨지고 말았다. 자신은 정말 부운석과 아무 관계도 아닌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녀는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내가 누구와 관계가 있든 말든 모두 당신과 무관합니다. 서융 황자께서는 자신의 참견이 지나치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탁칠이 늑대 같은 검푸른 눈동자로 그녀를 응시하며 싸늘하게 말했다.
“그렇게나 그를 좋아하느냐?”
한안은 서융 황자의 마음을 끊어내야겠다 마음먹었다.
“나는 그를 좋아하는 게 아닙니다.”
탁칠의 표정이 풀어지며 웃는 얼굴을 드러내려 할 때, 한안이 바로 이어서 말했다.
“나는 그를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