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16)

한안은 놀란 눈빛을 거두어들이고 그를 보았다.

“전하, 이것은 무슨 뜻인가요?”

“이것은 본궁이 네게 상을 내리는 것이다.”

태자가 즐거워하자 한안이 웃었다.

“용서해 주십시오. 신첩은 받을 수 없습니다.”

태자는 못 알아들은 것처럼 그녀를 보았다.

“너 뭐라고 했느냐?”

뒤이어 태자의 얼굴빛이 보기 흉하게 변했다.

“장한안, 내 호의를 무시하지 마라!”

정말 귀엽지 않군. 황상이 좋아하지 않을 만도 하구나.

한안은 여전히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태자의 뜻은 한안이 잘 압니다. 하지만 어제 태자를 구한 것은 어떤 사람이라도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전 이 일을 이용해서 무언가를 얻어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태자께서 평안 무사하신 것만으로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한안은 이 물건들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일단 받으면 바로 구설에 오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자신은 거센 바람과 풍랑 위에 있어 각종 창끝이 그녀를 가리키고 있었다. 만약 태자와 친교를 맺은 관계라는 것이 전해지면 앞으로 수많은 이들이 그녀를 견제할 것이며 바깥의 풍문이 어떤가에 상관없이 황상은 우선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무언가 일을 도모하기에는 자신을 구석에 숨겨야 더 했다.

태자가 그녀를 보았다. 무언가 깨달은 것 같았지만 심기가 언짢아 보였다. 지금까지 자신이 내린 상을 받지 않는 사람은 만나본 적이 없는 것이리라. 장한안은 어제 그의 목숨을 구했고 태자는 한안이 동굴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그를 한 번 뒤돌아보았던 것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그는 이 여인을 혐오하지 않게 되었다. 그는 줄곧 모후가 가장 강인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다. 모후는 여러 해 동안, 후궁 안에서 많은 억울함을 겪으면서도 얼굴 가득 웃음을 띠려 했고 관대하고 넓은 도량으로 결국 현명한 황후가 되었다. 이번에 태자는 그런 사람을 두 번째로 만났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네가 이것들을 받지 않으면 본궁은 모후께 드릴 말씀이 없다.”

한안은 곧 이해했다. 황상이 태자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황후는 진심으로 자신의 아이를 아꼈다. 어제 자신이 태자의 목숨을 구했으니 모친으로서 황후는 당연히 그녀에게 감격했을 것이고 고마움의 뜻으로 선물을 보냈을 것이다. 태자의 능력으로 이런 상들을 내주려면 쉽지 않겠지만 황후의 뜻이라면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다.

한안은 웃었다.

“전하께서는 걱정하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전하를 구한 것은 그저 작은 수고일 뿐인 걸요. 만약 정말 한안에게 상을 내리고 싶으시다면 나중에 한안이 도움을 청할 일이 있을 때, 황후께서 황상께 몇 마디 좋은 말씀을 해주시기를 청합니다.”

태자는 한안이 이런 요구를 꺼낼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터라 일순간 경계심이 일었다. 황궁에 있으면서 가장 금기시하는 것이 남에게 이용당하는 것이다. 노리는 것이 재물이라면 그런대로 괜찮으나 더 많은 것을 요구할까 두려운 것이다. 한안의 말에는 숨은 뜻이 있는 것 같았고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한두 가지는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고개를 들어 한안의 빙그레 웃는 모습을 보니 그녀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태자는 하는 수 없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어색하게 물었다.

“부상은 좀 어떠냐?”

사실 한안은 태자의 생각처럼 그렇게 복잡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환생한 후,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궁중의 일에 말려들었다. 전생에서 자신의 죽음은 모두 주씨 모녀 탓이었건만, 이번 생은 살아보니 주씨 모녀 외에도 조심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혼탁한 물을 건너려 한다면 모름지기 만전의 대비를 해야 했다. 비록 부운석이 자신을 지켜주리라 믿었지만, 자신이 먼저 최대한 말썽거리를 줄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방법이기도 했다. 지금 황후에게 이 약속을 얻어낸다면 자신에게는 작은 대비책이 또 하나 늘어나게 될 것이다.

태자의 질문에 한안은 바로 웃었다.

“괜찮습니다. 전하께서는 걱정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누가 너를 걱정했다고?”

태자는 바로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는 부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본궁은 그저 네가 곤경에서 구해준 공로가 있음을 아는 것뿐이다…….”

한안은 어린 태자가 마음에 들었다. 기껏해야 응석받이 어린애일 뿐이었다. 게다가 황상이 상당히 엄격하게 단속하고 가르친 덕분에 어제 같은 상황에서도 억지로라도 침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평소에도 이런 일을 적지 않게 겪지 않았을까. 그녀는 어린 태자에게 연민이 들었다. 태자의 상황은 사실 장한명과 비슷했다. 부친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궁중의 아귀다툼은 장부보다 더 흉험했다. 7황자는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니 어린 동생을 상대로 악랄하게 손을 쓸 것이다.

태자는 고개를 들자마자 한안의 연민 어린 눈빛과 딱 마주쳤다. 마음속이 떨렸다. 모후 외에 지금까지 이렇게 관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본 사람은 없었다. 왕숙이 자신에게 잘해주기는 하나 성격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자신이 좋아하지도 않는 이 여인은 어째서 저렇게 따뜻하고 부드러우며 자애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것일까. 그는 갑자기 울고 싶어졌지만, 태자는 나약해서는 안 된다고 배워 그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숙여 자신의 감정을 감추었다.

한안은 자신의 눈빛에 태자의 감정이 북받쳤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저 그가 고개를 숙인 것을 보고 이상하여 물었다.

“전하,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있으십니까?”

태자는 고개를 쳐들고 고민스러운 눈으로 한안을 보다가 다짐한 듯 말했다.

“네가 본궁의 목숨을 구했으니 본궁이 네게 약속하겠다. 만약 어느 날 왕숙이 너를 원하지 않으시면 본궁이 너를 태자비로 삼겠다.”

누구도 안하무인의 어린 태자가 이런 말을 할 거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하겠지. 한안 뿐만 아니라 급람과 주홍조차도 멍해졌다. 한안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어린 태자가 시집가고 장가드는 게 뭔지 알기나 하는 건가? 이런 말을 입 밖에 내다니. 한안은 자신에게 그렇게 큰 매력이 있다고 생각지 않았다. 태자의 말에 놀라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한안이 자신을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는 것을 보고 어린 태자는 조급해졌다.

“앞으로 3년이면 본궁이 비를 맞을 수 있다. 흠흠, 구명지은이라…….”

구명지은(救命知恩)은 이렇게 보답하는 게 아니다. 한안은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어린 태자의 말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문 입구에서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본왕의 왕비는 금생에 오직 본왕의 사람일 수밖에 없다. 태자가 비를 맞고 싶다면 본왕이 직접 황상께 보고해서 황상께서 잘 선택해 주십사 하마.”

한안이 눈을 들어 바라보니 부운석은 조복도 아직 갈아입지 않은 상태였다. 조정에서 물러나자마자 바로 서둘러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표정은 살을 엘 듯 차가웠고 어린 태자를 보는 눈빛에 불만이 담겨 있었다. 태자는 몸이 굳어졌다. 왕숙은 얼굴도 차갑고 마음도 차가웠다. 자신에게 잘 대해주기는 하지만 일단 그를 노하게 하면 결과는 대단히 공포스러웠다. 이 여자는 왕숙의 보살핌을 받고 있으니 구명지은 따위는 용납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태자는 서둘러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본궁…… 본궁은 아직 일이 남아서요. 먼저 가보겠습니다.”

태자는 말을 마치고 달아나듯 방을 떠났다. 여기 남아 있다가 왕숙의 눈빛에 동사하고 싶지 않았다.

한안이 다급히 소리쳤다.

“전하, 이 상자들이요!”

그러나 애석하게도 태자는 흔적조차 없었다. 하긴, 상자니 하는 것을 돌볼 틈이 있었으랴.

한안은 바닥 위에 놓인 커다란 상자 세 개를 바라보며 고뇌에 찬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이건 어떻게 처리하면 좋지?”

부운석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손바닥이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편안해졌다. 한안은 눈을 커다랗게 뜬 채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가 쓰다듬도록 내버려 두었다. 스스로가 얌전하게 말 잘 듣는 작은 동물이 된 느낌이었다.

어제 자신의 행동은 경솔했다. 부운석은 분명 화가 났을 것이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자신 때문에 화가 났을 거라는 것을 알게 되니 기분이 좀 가라앉았다.

“몸은 괜찮으냐?”

그의 목소리는 그윽하고 온후하며 맑고 차가웠다. 심상치 않은 기색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한안은 자신감이 사라져 갔고 좌불안석이 되었다.

“그게…… 왕야, 어제 제가…….”

그녀는 먼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려 했다.

부운석이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고는 어찌할 수 없다는 듯 속삭였다.

“바보.”

“네?”

그가 이렇게 말할 줄은 짐작도 못 했다. 한안은 한순간 멍해져서 고개를 들고 그를 보았다.

부운석은 한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던 손을 내려놓고 담담하게 그녀를 보았다.

“너무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르는구나. 목숨도 돌보지 않고. 만약 죽었으면 어찌할 뻔했느냐?”

그의 말은 가벼웠다. 하지만 슬픈 기색도 있었다. 콧날이 저도 모르게 시큰해졌다. 어제 부운석을 본 그 순간이 떠올랐다. 그는 지옥에서 목숨을 취하러 온 아수라 같았다. 그녀를 위해 흰옷을 피로 물들이며.

미안스러워진 한안은 부운석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며 조심스럽게 잘못을 인정했다.

“앞으로는 안 그럴게요.”

한안의 아래턱이 위로 들렸다. 부운석의 얼음처럼 차가운 손가락이 한안의 아래턱을 잡고 있었다. 한안은 고개가 들려 그와 똑바로 마주 보게 되었다. 심오하고 심연 같은 눈빛은 따뜻하고 부드러우며, 유혹의 기색을 전하고 있었다. 한안은 그의 몸에서 풍기는 담담하고 맑으며 차가운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서로의 숨결이 닿자 한안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의 입술에서 나지막한 탄식이 새어 나왔다. 뒤이어 고개를 숙이더니 그의 입술이 한안의 입술에 닿았다. 잠자리가 수면을 가볍게 찍고 날아오르는 것 같은 입맞춤이었다. 정욕 같은 것은 하나도 담고 있지 않은. 그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제의 긴장과 불안이 깨끗이 사라져버리는 것 같았다.

그는 한안을 놓아주었다. 눈빛이 물처럼 평온하고 담담했다. 한안은 가슴이 시큰했다. 이렇게 부드러운 부운석이라면 더더욱 떨어질 수가 없을 것 아닌가. 한안은 두 팔을 뻗어 부운석의 허리를 끌어안고 머리를 그의 품속에 묻었다.

부운석은 순간 당황했다. 한안이 먼저 그에게 친근하게 대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보이니 고슴도치가 마침내 몸의 가시를 거두어들인 것 같아 매우 사랑스러웠다. 그는 한안이 마음대로 품속에 뛰어들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녀는 아직 어리니 자신이 조급해해서는 안 된다고 거듭 생각했었다. 다행히 지금 보아하니 성과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부운석은 그녀에게 너무도 잘해줬다. 부운석은 그녀를 보호해주었는데 그녀는 그를 도운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한안은 자신이 둘도 없는 재능을 지닌 절색의 미녀라고 자만하지는 않았다. 부운석이 그녀를 현청왕비로 맞이하겠다고 했을 때, 부운석이 분명 노리는 바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설령 부운석이 노리는 바가 있다 해도 이것은 그가 손해 보는 장사였다. 자신에게는 태후와 7황자, 또 장어산과 주씨 자매가 있으니 오히려 부운석에게 적지 않은 말썽을 보태준 꼴이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어제 일은 무슨 성과가 있나요?”

생존자를 잡아서 심문했다면 무언가 알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생존자가 없다.”

한안은 당황해서 부운석을 보았다.

“당신이 죽였어요?”

어렴풋이 부운석이 자객 몇을 죽인 것 같은 기억이었다. 물론 명확하지는 않았다. 부운석은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고 하던데 정말로 그들을 전부 죽인 모양이었다.

부운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터에서 잡힌 자객은 모두 혀를 물고 자진했다.”

눈빛이 조금 깊어졌다.

한안의 질문에 정면으로 대답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 제터에 있지 않고 태자를 추살했던 자객들은 전부 살해됐다는 건가? 한안은 고개를 들어 빙그레 웃는 얼굴로 바꾸고는 위로하듯 부운석에게 말했다.

“왕야, 걱정하실 필요 없으세요. 저도 자객 두 명을 죽이지 않았던가요? 그들이 보낸 자객은 너무 능력이 모자란다 말하지 않을 수 없네요. 저조차 처리할 수 있을 정도니 말이에요.”

부운석은 조금 우스웠다. 한안이 그가 배후를 잡지 못해 낙담할까 말을 하는 것은 알겠지만 그는 일말의 자책감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한안이 죽여 버린 둘을 떠올렸다.

“시체를 조사하게 했는데 네가 죽인 것이 아니었다.”

“네?”

한안은 멍해졌다. 아닌데? 분명 죽음으로 막겠다는 각오로 대도를 휘둘렀다. 시정이 자신에게 가르쳐 준 방법을 써서 가까스로 두 사람을 죽였는데?

부운석은 그녀를 한 번 보았다.

“시체를 보니 관절 위 혈 자리에 부상이 있었다. 자객은 너의 칼에 베이기 전에 부상을 입은 것이다.”

한안은 가만히 회상해 보았다. 확실히 갑작스레 두 자객의 동작이 느려져서 자신이 간신히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염두에 두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의문점이 많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사람들은 당연히 정예 중 정예였을 터이다. 설령 자신이 시정에게 몇 수 익혔다 해도 일 년 내내 칼 위의 피를 핥는 사람들을 상대로 해서는 하루살이가 큰 나무를 흔드는 것같이 주제를 모르는 짓이었을 것이다. 어찌 두 명이나 죽일 수 있었을까? 이제 보니 비밀리에 도운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럼, 자객에게 부상을 입힌 것은 누구지?

“당신의 말씀에 따르면 다른 사람이 제 목숨을 구해준 거군요. 하지만 그가 저를 구하고 싶었다면 어째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까요?”

한안은 이상해하며 물었다. 그 사람이 만약 자신의 목숨을 구했다면 곧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나서질 않았으니 그건 왜일까. 한안은 부운석을 보았다.

“저를 구하러 오셨을 때, 무언가 본 게 있으신가요?”

부운석은 고개를 저었다.

한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사람은 부운석이 자신을 보지 못하게 피했다는 말이다. 그 사람은 어쩌면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상황이고 더 나아가서는 자신과 부운석이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자신과 부운석이 아는 사람, 또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면 도대체 누구지? 그 사람은 아마도 이 일과 연관이 되어 있을 것이다. 어쨌든 다행스러웠다. 어찌 되었든 간에 자신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부운석이 오지 않았다 해도 암암리에 도와주던 그 사람이 자신이 헛되이 죽도록 내버려 두었을 리 없었다. 어쩌면 그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비밀리에 그녀를 도운 사람이 누구인지 단서는 없었다.

한안이 부운석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바깥에서 소리가 들렸다. 장사양이 직접 한안을 부로 데려가려고 왔다는 것이다.

한안은 장사양이 이런 행동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부운석이 막 거절하려고 하는데 한안이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젊은 사내종에게 말했다.

“가서 부친에게 말씀드려라. 짐을 챙겨서 곧 부친을 따라 부로 돌아가겠노라고.”

사내종이 떠난 후, 부운석은 한안을 보았다. 눈빛에 살짝 의혹이 어렸다.

“왜 부로 돌아가는 것이냐?”

주씨 모녀들이 한안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며 더구나 현청왕부에 비해 편안하지 않은 곳인데, 한안이 자발적으로 장사양을 따라 돌아간다고 한 점은 의외였다.

“왕야, 걱정하지 마세요.”

한안이 살짝 웃었다.

“현청왕비라는 이름을 안고 있으니 그들이 감히 대놓고 드러내놓고 제멋대로 할 수는 없을 거예요.”

한안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고 입꼬리가 살짝 치켜 올라갔다. 표정에 득의만만한 기운이 가득했다. 이 세상에서 남을 이용하겠다는 말을 하면서 이렇게 의기양양하게 거들먹거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즉각 실소가 터져 나왔다.

“암계를 쓰려 한다 해도 저는 겁나지 않습니다.”

부운석이 한안의 수완을 알고 있으니 그의 앞에서 꾸며댈 필요가 없었다. 또 달리 생각해 보면 이렇게 총명하며 지혜로운 여자가 계책을 논하게 되면 주씨 자매는 어떤 수로도 그녀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한안은 자신이 이번에 부로 돌아가는 것은 시기가 무르익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부운석에게 알리지 않았다. 주씨 자매는 여러 차례 실수하여 분명 마음이 혼란스러울 것이다. 한안이 아무 탈 없이 무사한 것을 눈으로 직접 보면 분명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듯이 음험한 계략을 내어 자신을 처리하려 할 것이 뻔했다.

불행히도 한안의 이번 생을 시작할 때부터 복수의 칼날을 품었으니 주씨 자매에 대해서 그대로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주씨 자매가 이번 기회를 이용하여 그녀를 해치려 한다면 그녀도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반격할 것이다. 그리고 자객의 일 이후 주씨 자매는 태후에게 이미 버린 패가 되었을 테니 자신이 그녀들을 어찌한다 해도 태후는 그녀들을 보호할 마음이 있을 리 없었다.

즉, 주씨 자매는 고립무원 상태였다. 모든 퇴로마저 끊겼으니 적을 일망타진하는 것이 수월했다.

그녀는 조용히 생각하느라 자신의 표정이 전부 부운석의 눈 속에 거두어진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깊고 그윽한 눈빛에 깊은 우려가 스쳤다.

위왕부 내.

7황자의 표정은 음침했다. 그가 마주하고 있는 위여풍의 태도는 조금 흥분되어 있었다.

“7전하, 어찌하면 좋습니까?”

7황자는 냉랭하게 입술을 끌어당겼다.

“그것들이 달아나다니. 흥, 황동생이 뜻밖에 귀인의 도움을 얻었군.”

그는 위여풍의 눈빛을 흘끗 보고 차가운 코웃음을 쳤다.

“너는 장한안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냐?”

위여풍이 깜짝 놀랐다.

“감히 그럴 리 있겠습니까.”

한안이 자객의 손에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다는 것을 안 후, 위여풍은 넋이 나가 있었다. 이미 마음을 접었으니 한안에 대해 증오하여 분노 외에 다른 감정이 없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가 위험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걱정되는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이번에 태자를 제거하지 못하고 오히려 황상에게 의심이 생기게 만들었군. 당분간 피해 있을 필요가 있겠다. 왕숙만 이롭게 했구나.”7황자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피해 계실 겁니까?”

7황자가 고개를 흔들었다.

“며칠 간 본전은 출궁하여 산에 올라가 죽은 백성을 위해 복을 기원하려 한다.”

위여풍의 눈이 환해졌다.

“그럼…….”

“계획대로 일을 실행해라.”

한안이 장부에 돌아갔을 때, 주씨 자매와 만 이낭이 전부 나와서 맞이했다. 미 이낭은 임신 중이라 부용원에서 나오지 않았다. 한안의 신분이 예전과 비할 바가 아니라는 것을 장부의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었다. 현청왕이 어린 왕비를 몹시 사랑하니 누가 감히 그녀를 제멋대로 건드릴 수 있을까. 주씨는 이가 부서져라 악물며 한안에게 웃는 얼굴을 쥐어짜냈다.

“4소저, 돌아오셨군요.”

대주씨가 온화하게 웃었다.

“어제 놀라고 다치셨다죠?”

한안은 마음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자신이 부상 당한 것은 두 자매가 이뤄낸 쾌거인데 이렇게 위로하는 모습을 연출해낼 수 있다니. 정말 사람의 견문을 넓혀주는구나. 한안은 고개를 숙이고 입가의 조소를 감추며 가벼운 소리로 말했다.

“왕야의 보살핌 덕에 한안의 몸에는 별 문제가 없어요.”

한안은 말을 하며 손수건을 꽉 비틀어 짰다. 남들이 보기에 어린 여자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이었다. 급람이 기회를 틈타 말했다.

“왕야께서 소저께 아주 잘해 주십니다. 어제는 친히 소저의 병상 옆에서 하룻밤을 꼬박 지키셨고 궁중에서 황상의 진료를 담당하는 오 태의를 오도록 청하기도 했습니다.”

주홍도 이어서 말했다.

“맞습니다. 의식주 등이며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전부 자상하게 보살펴 주셨습니다. 우리 소저께서 복이 있으셔서 왕야께서 몹시 아끼시는 것이지요.”

한안은 얼굴을 더욱 낮게 파묻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부끄러운 소리 말거라.”

그러나 그 모습은 분명 인정하는 모양새였다.

가장 뒤에 서 있던 장한명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부운석이 한안을 몹시 아낀다면 좋은 일이다. 그는 누나에게 면목이 없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한안이 즐겁고 편안하게 지내는 것이었다. 부운석이 앞으로도 이처럼 한다면 그녀를 괴롭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급람과 주홍의 말은 당연히 주씨 자매가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 만 이낭과 장금은 이 말을 듣고도 전혀 이렇다 할 감흥이 없어 여전히 기복 없이 담담했다. 장사양의 표정은 복잡했다. 자신의 딸이 현청왕야의 보살핌을 받으면 자신의 벼슬길에 확실히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이 딸은 한안이었다. 한안이 차츰차츰 높아져가는 것을 눈으로 지켜보며 자신은 통제할 힘이 없다는 느낌을 감당하는 것은 정말 괴로웠다. 그런데다가 지금 장부는 모두 위왕의 사람이니 한안은 자신과 대립하는 쪽에 설 것이었다.

주씨는 한안에 대한 원한이 뼛속에 사무쳤다. 이 작고 천한 년이 어떻게 현청왕의 호감을 얻을 수 있었을까. 그녀의 자태와 용모는 장어산에 비할 바가 못 되고 금기서화의 실력도 뛰어나다고 볼 수 없었다. 그런데도 어산은 그저 위 세자의 측비, 더구나 총애받지 못하는 측비일 뿐이었다. 비록 대외적으로는 총애를 받는다 소문이 났지만 어산이 말해주기를 위왕 세자는 조금도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한안이 곧 현청왕비가 되어 만인의 존경을 받을 것을 보고만 있자니 분노가 차올랐다.

장한안은 마치 그녀를 이겨 먹기 위해 태어난 것 같지 않은가. 자기가 장부에 들어온 뒤, 한안은 장사양이 주씨를 정방으로 올리려는 생각을 저지시켰고, 어산이 대가를 치르게 했으며, 계책을 역이용하여 심지어 더 좋은 혼처를 잡았다. 심지어 지금까지 실수한 적이 없던 대주씨가 한안 때문에 손해를 입게 만들었다. 주씨의 눈빛이 비장해졌다. 애초 자신이 왕씨를 해쳐서 죽일 때, 왕씨는 분명 고지식한 위인이었다. 남자의 비위를 맞출 줄 모를 뿐만 아니라 대저택 안 여인의 생존법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의 딸은 사람의 속마음을 통찰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어찌 이런 요물이 태어났을까!

한안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주씨의 표정을 전부 눈에 담고 있었다. 웃는 얼굴이 한층 더 찬란해졌다. 문득 대주씨가 전혀 깨닫지 못한 듯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되었으니 이 또한 4소저의 복이지요.”

한안은 고개를 갸웃한 채 웃으며 대주씨를 훑어보았다. 한안의 눈빛에 의혹이 있는 것을 보고 대주씨가 부자연스럽게 웃었다.

“4소저가 그런 눈빛으로 소첩을 보시니 부적절한 것이 있는지요?”

한안은 살짝 웃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저 한안은 생각했답니다. 태사께서도 부인에게 지극히 잘해주시는데, 부인이 온종일 장부에 머무니 분명 태사께서 몹시 그리워하시지 않을까 하구요. 한안이 부중에 없는 며칠 동안, 아마도 태사께서 사람을 보내어 부인을 부로 돌아오라 청하였을 거라고 말이죠.”

대주씨는 매번 장부로 달려왔다. 자매라 해도 너무 잦았다. 장사양과 대주씨가 부정한 관계를 가진 후로, 장사양은 그녀더러 매일 와서 날마다 쉬어가기를 간절히 바랐다. 바람을 피우는 부인네가 종일 간부(奸夫)의 부중으로 달려오는 것이야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장 태사가 대주씨를 몹시 총애하면서도 지금까지 사람을 보내어 대주씨더러 부로 돌아오라 재촉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대주씨의 얼굴빛이 굳어졌다. 그러다 곧 부끄럽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태사께서는 소첩과 동생의 자매 정이 깊다는 것을 아시고 매우 자상히 보살피신답니다. 사람을 보내어 소첩을 부에 돌아오라 청하신 적도 없답니다. 소첩이 동생과 더 많이 함께 있어 줄 수 있도록 말이죠.”

한안이 ‘아’ 하는 소리를 내고, 웃는 듯 마는 듯 그녀를 보았다.

“태사께서 부인에 대한 총애가 과연 거짓이 아니군요. 이렇게까지 마음을 써주시다니 말이에요. 하지만 설령 태사께서 자주 말을 꺼내지 않으신다 해도, 사촌 오라버니와 사촌 동생들은 분명 날마다 부인을 그리워하고 있을 거예요. 태사께서 사촌 오라버니와 사촌 동생들을 불편하게 하면서까지 부인이 장부에 머물러 이낭을 위로하게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정말 마음 씀씀이가 대단하신걸요.”

한안은 ‘마음 씀씀이’라는 말을 분명하게 강조하고 보니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들렸다. 일개 첩이 아들과 남편을 내버려두고 다른 사람의 부중에 머무는데 남편과 아들이 오라고 한 번도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도 비정상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사양이 비록 대주씨를 좋아하지만 결국 관료사회에서 여러 해 힘들게 굴렀던지라 한안 말 속의 의아한 점을 즉각 알아들었다. 설령 자신이 대주씨에게 연연하기는 하지만 만약 그녀가 장 태사와 함께 자신에게서 무언가를 강탈할 계략을 꾸미고 있다면 그냥 남겨둘 수 없는 일이었다. 대주씨를 보는 눈빛이 순간 친숙한 눈빛에서 의심의 눈빛으로 바뀌었다. 대주씨는 한안의 한마디에 장사양이 자신에게 의심을 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한안과 장사양이 증오스러웠다. 그러나 반박할 수가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억울하다는 눈빛으로 장사양을 보았다. 장사양은 의심을 품긴 했으나 미인이 억울해하는 것을 보고 또 마음이 여려져 바로 손을 휘둘렀다.

“더 말할 필요 없다. 각자 처소로 돌아가라.”

한안은 가볍게 웃었다. 그녀들이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게 하려면, 한안을 제거하지 않으면 큰일이라고 그녀들이 느끼게 하려면 이 정도면 됐다. 주씨 자매는 조급해져 한시라도 빨리 자신을 쓰러뜨리려 할 것이고 다급히 굴면 사고가 일어나기 가장 쉬운 법이다.

한안이 장부에 돌아온 것은 빚을 받아내기 위해서였다.

장금은 생각에 잠긴 듯 한안을 한 번 보고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한명은 입술을 움직거렸지만 한안의 눈빛이 그에게 전혀 닿지 않자 바로 입안의 말을 삼켰다. 주씨는 원한에 차서 한안을 노려보고 대주씨를 부축하여 떠났다.

한안은 천천히 청추원으로 갔다. 어쨌든 장사양과 대주씨 사이에 가시 하나를 박아 놓았다. 이 가시는 언젠가는 장사양의 목에 걸릴 것이고 그때 가서 대주씨가 어떻게 할지 지켜봐야겠다.

청추원의 사람들은 한안이 돌아온 것을 보고 기뻐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현청왕이 한안을 대하는 태도에서 그가 그녀를 몹시 아낀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인의 지위가 상승하면 모시는 사람들도 따라서 기반이 적지 않게 단단해졌다. 짧다면 짧은 1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안은 지위를 갖추었고 평소에 한안 모녀를 괴롭혔던 사람들은 감히 쉽사리 그녀들을 비웃을 수 없었다.

한안은 처소로 돌아가 먼저 유모를 찾았다. 유모는 그녀가 무사한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를 포근히 껴안고 오래도록 이야기했다. 한안이 웃으며 물었다.

“부중에 이 며칠 큰일이 있었는가?”

알고 보니 한안이 부중에 없는 며칠, 모두가 다 평화로웠다. 미 이낭은 태아를 기르는 것에 전념했고 주씨는 요양하며 공동원의 문을 나서는 일이 드물었다. 오히려 대주씨와 장사양의 관계가 공공연해졌다. 하인들은 감히 왈가왈부 하지 못했다. 장사양의 성질이 한층 더 음침해졌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지 말한 유모는 조금 이상하다는 듯 이야기했다.

“그 미 이낭과 주씨 모두 호락호락한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노야와 대주씨가 이렇게 친밀해졌는데, 주씨야 자기 언니라 말하기를 꺼린다 해도 미 이낭이 어찌 그냥 넘어가는 걸까요?”

한안은 희미하게 웃었다. 미 이낭은 지금 제 몸도 보전하기 어려웠다. 이제 배가 하루하루 커져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이가 곧 태어날 것 같지만, 한안은 미 이낭이 노야의 씨를 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미 이낭은 한창 이 일을 어떻게 속일지 방법을 생각하고 있을 터인데 대주씨를 걱정할 틈이 있을까.

미 이낭이 밖에서 아이를 들여와 기를 생각은 아닐 거라고 보았는데……. 설마 그 길로 가려는 것은 아니겠지? 생각을 거듭한 한안은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유모, 주 이낭이 요 며칠 미 이낭과 말을 나눈 적이 있는가?”

유모는 잠시 진지하게 생각했다.

“아가씨의 이 말씀에 생각난 것이 있습니다. 며칠 전, 주 이낭이 부용원에 몇 차례 갔습니다. 하인들이 모두 말하기를 주 이낭이 자신이 정방으로 올라갈 희망이 없음을 보고 미 이낭의 비위를 맞추러 왔다 하였지요. 미 이낭도 주 이낭이 무슨 수작을 부릴 수 없을 거라 보았는지 뜻밖에 그녀에게 상냥하게 대했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두 사람은 또 소원했지요.”

유모는 여기까지 말하고 한안을 보았다. 그녀가 생각에 잠긴 모습인 것을 보고 물었다.

“무슨 의심스러운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한안은 고개를 저었다.

“유모, 자네는 바로 가서 주 이낭과 미 이낭의 동정에 주의를 기울이게. 일단 그녀들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자네는 바로 여종 둘을 찾아서 뒤쫓아 가게 하게.”

유모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유모가 가고 난 후, 한안은 급람과 주홍을 보았다.

“너희 둘은 이 일을 어떻게 보느냐?”

급람은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했다.

“미 이낭은 주 이낭과 본래 사이가 안 좋았는데 이제 서로 상냥해진다는 것은 어쨌든 불가능합니다. 더구나 미 이낭은 사람 됨됨이가 원래 쌀쌀맞은데 회임까지 하였으니 주 이낭을 안중에 둘 리가 없습니다.”

주홍 역시 말했다.

“소저, 두 사람은 모두 소저와 이해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지금은…… 아직 일을 처리할 때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안은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내가 미 이낭 그녀를 과소평가했구나. 사람의 마음은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인데. 됐다, 바로 그녀까지 함께 손을 봐주면 된다.”

한안은 웃었다.

그녀의 둥글고 작은 얼굴은 조금 야위어 그저 손바닥만 했다. 두 눈은 차가운 냉기만을 띠고 있었다.

급람과 주홍은 시선을 한 번 마주쳤다. 그 눈빛에 동시에 기쁨이 스쳤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기 집 소저가 현청왕과 함께 있는 날이 늘어난 후로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는, 오만한 귀족적 기질에 물든 것 같았다.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 과감함이 늘었고 더구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대담한 기색이 있었다. 하인으로서 한안의 변화가 기뻤다. 자기 집 소저는 이미 충분히 오래 참았으니 그 사람들에게 자기 집 소저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보여주어야 했다.

오후, 주 이낭은 두 여종에게 둘러싸여 부용원에 도착했다.

부용원의 장식은 종전에 비해 더욱 정교하고 치밀해졌으며 화려한 물품들이 많아졌다. 미 이낭이 회임한 후로 노야의 하사품이 끊임없이 이어졌던 것이다. 미 이낭은 연탑 위에 비스듬히 기대어 여종이 건네준 화차를 기력 없이 마시고 있었다. 이 화차는 노야가 특별히 분부한 것으로 유명하고 귀한 약재를 허다하게 보탠 것이었다. 마실수록 답답해져서 그녀는 자기 배를 내려다보았다. 그 안에는 둥근 베개를 채워 넣어 보기에는 정말로 회임한 것과 똑같았다.

미 이낭은 참지 못하고 주먹을 뻗어 매섭게 배를 몇 번 쳤다. 당연히 배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매번 노야가 올 때마다 미 이낭은 전전긍긍했고 노야에게 꼬리가 밟힐까 봐 몹시 두려웠다. 지금은 다행히도 장사양은 대주씨에게 홀려서 그녀가 한숨을 돌릴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초조하고 불안하여 매번 발각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여종 교몽이 놀라 펄쩍 뛰며 서둘러 그녀의 동작을 제지했다.

“이낭, 절대 안 됩니다.”

미 이낭은 분노하여 그녀를 보았다.

“뭐가 겁나. 결국 없는데…….”

자신의 배 속에 아무것도 없는데도 임신했다는 명목 때문에 오랫동안 노야와 사랑을 나눈 적이 없었다. 노야와 대주씨의 추잡한 사건은 여전히 그녀의 귀에 들려왔다. 그녀가 장사양을 속일 수 있는 시간을 대주씨가 벌어주는 것은 다행스러웠지만 노야가 날마다 그 여자를 품는 것을 생각하니 이가 갈릴 정도로 증오스러웠다. 어렵사리 주씨가 무너지기를 기다렸는데 또 아무 이유 없이 대주씨가 출현했다. 그들 주씨 일족은 정말 이런 불여우를 쉽게도 내놓는구나.

교몽이 고개를 저었다.

“이낭, 만약 다른 사람들이 보면…….”

목소리가 떨어지자마자 바깥에서 여종이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 이낭이 왔다.

미 이낭은 서둘러 옷을 정리하고는 유약하게 탑에 기대며 피곤한 모습을 지어냈다. 임신한 사람들은 가장 잠이 많은 법이니까. 그러나 마음속에 의혹이 일었다. 주씨가 뭐 하러 온 걸까? 며칠 전 주씨가 와서 비위를 맞추며 자세를 낮추고 고의인 듯 아닌 듯 한안이 총애를 얻은 일을 말했는데 도대체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한안의 신분이 높아지면 장한명의 지위도 높아지게 될 거라는 말을 들었을 때, 바로 불안이 일었다. 바로 그 불안 때문에 그녀는 한동안 매일 주씨와 이야기를 나누어 주씨의 입안에서 한안의 근황을 유도해 내었다.

그녀는 대주씨가 수완이 뛰어나 장부 내에 눈과 귀가 적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은 회임한 까닭에 부용원에서 나가는 것조차 힘든 데 말이다.

주씨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흑흑 울면서 걸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에요?”

미 이낭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주씨는 말하지 않고 탑 앞의 작은 의자 위에 앉았다. 주씨의 여종이 화가 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우리 이낭께서 이러시는 것은 4소저 때문에 속이 상하셔서입니다.”

한안? 미 이낭의 눈알이 한 바퀴 굴렀다. 한안이 어제 부에 돌아온 일은 그녀도 하인에게 들었다. 듣자 하니 지금 장사양이 한안의 면전에서 감히 함부로 하지 못한다지. 그런데 주씨가 한안 때문에 속이 상해서 운다고? 미 이낭은 믿지 않았다. 주씨가 이 일을 빌미로 무슨 짓인가를 하려 한다면 그제야 믿을 것이다.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주 언니 무슨 일이 있나요? 괜찮으면 미아에게 알려줘요. 미아가 알아야 언니를 위해 함께 걱정해줄 수 있죠.”

그녀는 걱정을 담뿍 담은 말을 하고 있었지만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그것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일종의 비웃음이었다. 확실히 주 이낭의 장부 내 지위는 지금 미 이낭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주씨가 부중에 막 들어왔을 때, 노야의 총애만 믿고 자신을 도발했지만 이젠 자신에게 공경하는 것을 보고 미 이낭은 표현할 수 없는 후련함을 느꼈다.

주씨도 당연히 그녀의 말 속 조롱을 알아들었고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는 억울함을 겪은 양 눈물이 그득했다.

“동생, 4소저가 이번에 돌아왔으니 부중에 자네와 나 두 사람의 자리는 없을 거야.”

미 이낭의 차를 받쳐 든 손이 살짝 멈칫했지만, 얼굴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이죠?”

주 이낭은 눈물을 닦았다.

“어제 4소저가 부로 돌아왔어. 노야와 함께 그녀를 맞이했지. 하지만 4소저가 이 첩을 보고 바로 냉소하고 비꼴 줄은 생각도 못 했어. 차마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바로 몇 마디 돌려줬는데 그녀가 바로 위협을 가했어.”

몇 번 더 눈물을 흘린 주 이낭은 계속해서 말했다.

“노야가 보시고 또 아무 말씀도 없으셨어. 동생, 자네가 말해봐. 장부 안에서 결정권은 이제 4소저에게 있는 게 아니겠어?”

미 이낭은 바삐 움직이는 마음과 달리 서두르지 않고 여유 있게 자신의 손가락을 살펴보았다. 그 새하얗고 호리호리한 손가락 끝은 선홍빛으로 물들여 화사해 보였다. 주씨의 말은 그녀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다. 주씨의 속셈이나 들어볼까. 미 이낭은 웃으며 주씨를 보았다.

“4소저는 지금 현청왕비이니 당연히 좀 더 고귀해졌지요. 그런데 언니의 말뜻은 무언가 하고 싶다는 건가요?”

주씨는 미 이낭이 서두르지도 않고 여유 부리는 모습을 보고 마음속이 싸늘해졌다. 이 천한 년이 지금 총명한 척하는구나. 다행히 대주씨가 가르쳐준 것이 있었다. 주씨는 빙그레 웃었다.

“이 첩 혼자서는 당연히 아무것도 할 수 없지. 만약 동생 자네가 힘을 보태면…… 분명 그 4소저도 우리를 공경하게 될 거야.”

미 이낭은 얼굴 위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주 언니는 무슨 근거로 제가 언니를 도울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네요.”

주씨는 이제 조급하지 않았다. 손수건을 가지고 천천히 얼굴 위의 눈물을 닦고는 살짝 웃었다.

“4소저는 사소한 일까지도 세세하게 따지는 사람이지. 내가 부에 들어올 때 그녀는 날 미워했어. 나중에 어산과 많은 마찰을 일으킨 데다 하루아침에 득세했으니 이 첩에 대해 보복하려 하겠지. 미 이낭에게 묻겠네. 자네는 4소저에게 죄를 지은 일이 없는가?”

미 이낭은 당황했다. 예전에 한안 모자 세 사람을 업신여기고 모욕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때의 자신은 젊고 아름다웠으며 노야가 자신을 몹시 총애했다. 만 이낭은 두려워 할 가치도 없었지만, 왕씨는 정처의 명분이 있어 눈에 거슬렸다. 그래서 미 이낭은 천방백계로 그들을 괴롭혔다. 오늘 모욕하고 내일 또 모해하고. 장한명과 한안은 자신 때문에 사당에서 무릎 꿇는 벌을 자주 받았고 왕씨와 노야의 사이는 한층 더 삭막해졌다.

한안은 제 사람을 매우 아껴 여종에게조차 손가락 하나 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자신은 그녀의 모친과 남동생을 해쳤으니 한안이 그대로 넘어갈 리 없었다. 한안이 주씨를 응징하는 데 이렇게 가차 없으니 그럼 자신은 더 심하지 않을까.

미 이낭의 표정에 조금 틈이 생긴 것을 보고, 주씨는 기회를 틈타 신속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 4소저는 이미 현청왕비라네. 하지만 아직 시집가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방자하니 나중에는 법도 하늘도 없이 굴지 않겠는가. 그때 가서는 노야조차도 그녀를 어찌하실 수 없어. 자네가 말해 보게. 이 부중 어디에 우리 자매가 몸을 의탁할 곳이 있겠나?”

미 이낭은 미간을 찌푸렸다. 주씨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처음 주씨와 자신이 대적할 때는 한안이 자신 쪽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때의 주씨는 아직 강력한 힘이 있는 강적이었고 지금의 주씨는 단 한 번의 공격도 견딜 수 없을 정도이니 안중에 둘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한안은 갈수록 자신의 지배력을 넘어서고 있었다. 만약 언젠가 한안이 자신을 적으로 본다면 자신에게 살길이 남아 있을까? 아마도 자신은 주씨보다도 못할 것이다. 주씨는 적어도 딸이 하나 있었다. 자신은 노야를 위해 아들이든 딸이든 하나도 낳아주지 못했다. 장사양을 오래 따랐기에 미 이낭은 그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장사양이 그녀를 총애했고 지금도 그녀를 대하는 데 별 차이가 없지만 일단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는 절대 자신을 터럭만큼도 지켜줄 리 없었다.

미 이낭은 생각할수록 두려웠고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주씨는 오히려 마음이 느긋해졌다.

“동생, 언니가 자네에게 말하지 않았나. 4소저의 기세는 점점 높아질 테고 현청왕 또한 권세가 하늘을 찌르겠지. 노야께서 현청왕의 압력에 몰리셔서 소소야를 대하는 것도 부족함이 없어질 테지. 지금 자네 배 속의 이 애가 만일 소야라면 총애를 나눠 가져가야 하지 않겠나.”

미 이낭이 멍해진 것을 보고 그녀는 웃었다.

“우리 여인들이야 다른 말할 것 없이 의지할 아들을 원하는 게 아닌가? 이 첩의 아이는 이미 없어졌지. 동생…… 잘 생각해 보는 게 좋아.”

미 이낭은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주씨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자신의 일생을 확실히 의지할 데가 있어야 한다. 자신이 진짜로 임신하지 않았다 해도, 장한명이 빨리 자라 장부의 주인이 되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일단 이 남매가 장부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면, 자신이 좋은 날을 보낼 수 있을까.

주씨는 웃으며 옷을 툭툭 치고 일어섰다.

“동생 몸조심하게. 이 첩은 먼저 가보겠네. 동생 쉬는 데 그만 방해하지.”

주씨는 말을 하고 바로 몸을 돌렸다.

“거기 서요.”

미 이낭이 입을 열었다.

주씨는 마침 문 입구를 지나가다가, 미 이낭의 말을 듣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천천히 몸을 돌려 미 이낭을 보았다.

“왜 그러나?”

“무슨 방법 있어요?”

미 이낭의 얼굴빛은 좋지 않다는 말로도 형용할 수 없었고, 주씨를 보는 눈빛도 방금 전의 오만한 시선 같지 않았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자신의 미래에 대해 깊은 걱정을 품은 눈빛이었다.

주씨는 방 안의 하인을 나가게 하고 문을 꼭 닫았다. 측근 여종만 남기고 그제야 의자에 앉아 스스로 차를 한 잔 따랐다.

“동생, 사실 일은 아주 간단해…….”

주씨가 간 후, 교몽은 미 이낭의 다리를 주무르며 말했다.

“이낭, 정말 그녀와 손을 잡을 생각이세요?”

미 이낭은 차갑게 웃었다. 주씨의 방법은 물론 괜찮았다. 적어도 장한안에게 타격을 주는 것은 가능했다. 하지만 주씨에게 거저 이득을 보게 한다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되지. 그녀는 배를 내려다보며 한 손으로 가볍고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화살 한 대로 독수리 두 마리를 잡는 일, 나도 한번 해보고 싶네.”

한안은 눈을 감고, 급람이 알아온 것을 들었다. 주씨는 부용원에 가서 모든 사람을 따돌린 후, 방 안에 남아서 밀담을 나누었다고 한다. 급람이 조급하게 말했다.

“소저, 소저께서 부에 돌아오자마자 주 이낭이 이런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소저께 불리한 일일 겁니다.”

한안이 낮게 읊조렸다.

“그녀들이 밀담을 나눌 때, 주 이낭과 미 이낭 외에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니?”

급람이 대답했다.

“미 이낭의 대리인이랄 수 있는 여종, 교몽이 있었습니다.”

한안이 눈썹을 모으는 것을 보고 급람이 서둘러 말했다.

“교몽은 미 이낭의 혼수 여종으로 들리는 말에 의하면 미 이낭의 심복이라 합니다. 이 아이에게는 어떤 수단과 방법도 통하지 않고 대단히 충성스럽대요.”

급람은 장부 하인들과 모두 친숙하여 소식에 정통했다.

“하지만 교몽, 이 사람은 정말 왕래하기가 쉽지 않아요. 부용원 안의 여종들도 모두 그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미 이낭이 그녀를 총애하니 감히 그녀를 괴롭히지는 못하죠.”

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교몽은 미 이낭에게 지극히 충성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교몽이 미 이낭을 배반하게 할 수 있을까? 한안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급람에게 물었다.

“교몽 집안에 누가 있는지 알아?”

급람은 멍해졌다가 바로 대답했다.

“교몽의 집안에는 늙은 부친과 오라비가 있습니다. 그녀의 오라비는 경성 안에서 찻잎을 파는데 사는 게 괜찮은 편입니다.”

한안은 깊이 생각하고 분부했다.

“급람, 네가 중요한 일 하나 처리해줘야겠어.”

“무슨 일인데요?”

한안은 몸을 기울여 급람의 귓가에 대고 몇 마디를 했다. 급람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자리를 떴다. 주홍은 옆에서 조용히 시중을 들고 있었다. 요 며칠 비록 주홍의 몸 상태가 많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한안은 주홍이 조금이라도 험하거나 힘든 일을 하기를 원치 않았다.

주홍이 조용한 것을 보고 있자니 급람의 말이 떠올라 갑자기 장난기가 일었다. 일부러 큰 소리로 물었다.

“주홍, 네가 금년에 열여섯이지.”

주홍은 한안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예상도 못 했기에 놀랐다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출가할 때가 됐네. 좋아하는 사람은 있어?”

한안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물었다. 주홍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소저……. 소저, 노비는 시집가고 싶지 않습니다.”

본래 침착한 주홍이 이렇게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드물었다. 한안은 점점 그녀를 놀리고 싶어졌다. 부운석이 목암을 시켜 주홍을 보호하게 한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 목암은 분명 이곳 어느 구석에 숨어 있을 것이니 자신의 말을 귀담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어찌 시집을 가지 않을 수 있어?”

한안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아니면, 내가 현청왕비로 들어간 뒤에 왕야께 너를 첩실로 삼아달라고 말씀드려 볼까?”

농담일 뿐이었다. 부운석이 원하지 않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한안 자신도 자발적으로 부운석의 주변에 여인을 채워 넣고 싶지 않았다.

주홍이 갑자기 한안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흐느껴 울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소저, 만약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시다면 주홍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 주홍은…… 주홍은 차라리 죽겠습니다.”

한안의 예상을 넘어선 것이었다. 지붕 위에서 그들의 움직임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던 목암조차 그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멍해졌다. 혼수 여종이 남 주인의 첩실이 되는 것은 많은 여종이 꿈에서도 바라는 일이었다. 여종들이 주인의 침상에 오르는 것은 당연히 자신의 신분을 올리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부운석의 첩실이 되는 것은 아마도 적지 않은 명문가 소저들도 기껍게 받아들일 만한 일이었다. 부운석의 신분과 지위는 차치하고 오로지 그 본인의 풍모와 자태만으로도 여인들이 흠모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주홍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부운석의 첩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주홍이 고개를 들고 결연하게 말했다.

“가난한 집안의 처가 될지언정, 높은 가문의 첩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노비는 소저를 여러 해 따르면서 대저택 안의 일도 적지 않게 보았습니다. 이낭들의 총애 다툼으로 화를 입는 것은 자녀만이 아니지요. 노비는 이 한평생 부귀영화를 탐하지 않습니다. 오직 소저께서 일생 평안하고 즐거우신 것을 볼 수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주홍의 말은 진실하고 간절했다. 한안은 주홍이 자신의 사람임에 감사했다. 하지만 이렇게 상냥하고 착한 여인이 그저 자신의 곁을 따르며 헛되이 청춘을 흘려보내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자신만 행복한 것으로는 절대로 충분하지 않았다. 자기 사람들이 모두 다 행복해야만 그래야만 비로소 진정으로 행복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이에 이르자 한안은 바로 주홍에게 말했다.

“너는 어쨌든 시집가야 해. 설령 네가 시집가지 않더라도 나는 너를 내 곁에만 묶어둘 수는 없어. 주홍, 네가 여러 해 나를 따랐지만 너의 인생에 오직 나만 있어서는 안 돼. 너는 당연히 자신의 행복을 가져야지. 급람도 마찬가지야. 너희는 내 곁을 따를 수 있어. 하지만 시집도 가야지. 여자는……. 자신을 위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해.”

주홍과 급람은 두 생에서 한안을 따랐다. 한안은 어떻게 해서라도 그녀들을 위해 행복한 미래를 찾아주고 싶었다. 주홍은 고개를 저었다. 한안은 정색을 했다.

“넌 더 말할 필요 없어. 난 이미 결정했거든. 주홍, 만약 네가 시집간다면 너는 어떤 사람을 찾을 거야?”

주홍이 한안과 이런 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주홍은 부끄러워 작은 얼굴을 불그스레 물들이면서도 확고하게 말했다.

“만약 반드시 시집가야 한다면 부귀영화나 높은 신분을 바라지 않습니다. 오직 정직하고 올바르며 남을 자상히 돌보고 아끼기만 하면 됩니다. 첩을 받아들이지 않고 통방을 거두지 않으며 오직 저와 백년해로할 수 있으면 됩니다.”

한안이 아무런 이견도 내놓지 않는 것을 보며 그녀는 이어서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말하지요. 소저께서 왕야께 오직 당신 한 사람만 처로 삼으라는 요구를 하신 것은 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만큼 끔찍한 일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실상 저도 같은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생 부부로 살기도 쉽지 않은데 그렇게 많은 소첩을 거두었다가는 가정이 안녕치 못할 것입니다.”

목암은 지붕의 은밀한 곳에 숨어서 창문을 통해 주홍을 보고 있었다. 그녀가 뜻밖에 왕비와 같은 바람을 말했다. 왕비가 영원히 통방이며 소첩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요구를 꺼냈을 때 왕야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목암처럼 과묵한 사람도 타당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남자가 3처 4첩을 두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니까 말이다. 왕비가 질투심 가득한 말을 어떻게 대수롭지 않게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더욱 의외였던 것은 타인에게 굴복하는 법이 없던 왕야가 뜻밖에 그 요구를 승낙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어린 여종마저 같은 바람을 말한다. 왕비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이처럼 특이한 건가?

햇빛이 주홍의 불그스레한 작은 얼굴 위를 비추었다. 그녀의 피부는 촉촉하고 부드러워 온순하고 사리 분별할 줄 아는 청순한 미인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 청순한 미인은 조금 전 남편을 독점하겠다고 말했다. 목암은 고개를 숙이고 처음 주홍을 보았을 때를 떠올렸다. 당시 주홍은 그들이 왕비를 납치해 갔다고 여기고는 비녀를 뽑아 그를 찔렀다. 목암은 자신이 냉담하고 무표정한 얼굴에 무뚝뚝한 사람임을 스스로 인정했다. 다른 여종들은 감히 그와 말 한마디 나누지 못했다. 그러나 주홍은 그를 직시하며 조금도 물러나려 하지 않았다. 그는 당혹스러우면서도 주홍의 기개를 칭찬하며 높이 평가했다. 이렇게 충성스러운 여종은 의외로 흔치 않으니까.

나중에 몇 차례 만나면서 주홍이 왕비 곁을 따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왕비는 총명했고 그녀도 비슷했다. 어쩌면 왕비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어느 정도 능력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급람은 영민했고, 주홍은 진중했다.

장한명과 한안이 다툴 때는 주홍이 부상을 입어 그녀를 팔에 안았는데 몸이 정말 가벼웠다. 그렇게 진중하게 보이던 사람이 그때만큼은 유약한 어린 여종들과 똑같이 보였다.

그때 그의 마음속에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한 연민이 생겨났다.

지붕 위에서 한안이 주홍을 시집보내려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는 덜컥 긴장이 되었다. 왜 그랬는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제 보니 주홍이 좋아하는 사람은 저런 사람이었구나. 정직하고 똑바른 사람. 재산이나 신분은 아무것도 아니고. 중요한 것은 한마음 한뜻으로 그녀를 대해주는 것.

한안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주홍, 너 목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방 안의 사람과 지붕 위의 사람이 나란히 똑같이 멍해졌다.

주홍이 허둥대며 고개를 저었다.

“소저, 무슨 뜻인지요? 저는 목 시위와 아무런 관계도 아닙니다.”

주홍이 자신과의 관계를 깨끗이 선을 긋자 목암은 은근한 불쾌감이 솟아올랐다. 그도 자신이 어째서 화가 나려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몸을 날려 지붕을 떠나 버렸다.

한안은 기뻤다. 부운석 시위인 목풍은 성격이 활발했고, 목암은 부운석과 얼마간 비슷했다. 부운석의 신임을 얻고 있으니 당연히 괜찮은 사람일 것이다. 주홍과 그 사이에 연분이 쌓였을지 궁금하기만 했다.

한안은 지붕 위에 있던 목암이 훌쩍 자리를 뜬 것을 알아채고 키득거리며 웃었다. 주홍은 한안이 왜 웃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한안은 이유를 대강 얼버무리며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

객잔 안.

용모가 아름다운 노란 옷의 소녀가 작은 뱀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소녀는 자신의 옆에서 상처에 약을 바르고 있는 남자를 보았다.

“오라버니, 어째서 그녀를 구하려 하신 거예요?”

“이림나.”

탁칠은 냉랭하게 그녀를 보았다.

“지나친 참견이구나.”

이림나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한안이 거의 죽기 직전인 것을 알았을 때는 그야말로 기뻐 소리 지를 지경이었던 것은 하늘만이 알 일이었다. 한안이 죽기만 하면 부운석은 자신을 처로 맞이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탁칠이 비밀리에 한안을 도왔고 결국 부운석이 장한안을 구해냈다. 다 된 성공이 눈앞에서 엎어지는 것을 보며 이림나는 화가 나서 울음이 나올 뻔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어려워하던 오라버니 앞이라 어쩔 수 없이 입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오라버니, 그녀는 현청왕비예요.”

이림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림나는 눈살을 찌푸린 모습도 아름답고 요염하기 그지없었다. 그녀의 미모는 한안을 훨씬 압도하니 남자들이 그녀의 얼굴을 보기만 해도 광적으로 사로잡힐 것이었다. 그런데 부운석은 왜 아니냔 말이다.

탁칠은 고개를 저었다. 입가에 약탈자만이 지을 수 있는 강렬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내 것이야.”

그 유약한 소녀가 피바다 속에서 대도를 들고 두려움도 없이 홀로 서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는 그녀가 비할 데 없이 교활하면서도 유달리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차분함을 지녔다고 느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런 차분함은 오랜 세월을 겪어내고 완성된 것 같은. 안에서부터 밖으로 번져 나오는 강인함 말이다. 나중에 그녀를 좀 더 보게 되면서, 매번 그녀가 겉과 속이 같지 않음을 느꼈다. 천 가지 가면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그 가면 아래에 무엇이 있을지 추측하지 않고는 못 견디게 만들었다. 도대체 어떤 것이 진실된 그녀인가 하고.

그날 자객 앞에서 그녀의 형형한 눈빛에는 후퇴란 없었다. 절망도 없었다. 오히려 살을 엘 듯 차가운 생명력, 엄숙한 살기, 냉담함을 띠고 있었다. 그 한순간, 소녀는 초원의 오만한 매 같아 탁칠은 그녀에게 순종하고만 싶었다.

현청왕이면 또 어떻고, 현청왕비면 또 어떨까? 지금껏 그의 눈에 든 것 중에 얻지 못한 것은 없었다. 탁칠의 얼굴 위에 반드시 얻고야 말겠다는 웃음이 드러났다. 그는 한 가지 예감이 들었다. 일단 이 소녀를 얻는 것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수확이 될 것이라는.

이림나는 탁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저 탁칠의 말을 듣고는 망설이며 물었다.

“오라버니, 그녀를 좋아하세요?”

탁칠은 웃으며 말이 없었다. 이림나는 자기 추측이 맞음을 확신했다. 한안이 더더욱 마음에 안 들기 시작했다. 탁칠은 그녀와 가장 친했다. 그런데 이 잘난 것 하나 없는 여인이 자신이 마음에 둔 사람을 빼앗아 갔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오라버니와 관계가 소원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림나는 결심을 굳혔다. 다음에 한안을 보게 되면 오라버니가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하지 않고 반드시 그녀를 제거해야겠다고. 이런 여인이 세상에 하루라도 더 사는 것은 어마어마한 위협이 될 테니까.

현청왕부는 기이할 정도로 조용했다.

“네 추측이 맞아.”

성뢰가 한 손으로 아래턱을 받쳤다.

“너의 어린 왕비를 구한 것은 서융 황자야.”

부운석은 눈을 내리깔고 앉아 있었다. 백의가 땅에 닿아 있었고 눈빛은 냉담했다. 부운석은 성뢰의 말을 듣더니 느긋하게 두 손가락을 뻗어 앞에 놓인 찻잔을 두드렸다.

“그도 참 물불을 가리지 않는군.”

성뢰가 ‘피식’ 웃었다.

“어쨌든 형수의 생명의 은인이잖아. 구태여 그렇게 말할 것까지 있어? 내 보기에 그 황자는 정말로 형수를 좋아하는 모양이야.”

부운석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한안의 빙그레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한안의 광채가 다른 사람에게도 발각된 탓에 사방에 파리가 들끓고 있었다. 정말 처리하기 쉽지 않군. 그녀를 숨겨놓을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문득 깨달은 부운석은 한순간 당황했다가 참지 못하고 실소를 흘렸다.

성뢰는 자신의 좋은 벗이 눈살을 찌푸렸다가 순식간에 얼굴을 폈다가 하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장탄식을 했다. 종전에는 부운석이 그저 얼음처럼 차가워 두렵다고만 느꼈는데, 기쁨과 노여움이 종잡을 수 없이 변화무쌍한 부운석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섬뜩하게 만들었다.

“촉 지방에 사람을 보내 조사하는 일은 어떻게 됐어?”

지난번 부운석은 수하의 사람에게 파촉에 가서 당문에 관한 일을 조사하여 알아보라 분부했다. 성뢰는 의아해 마지않았다. 부운석은 본래 강호의 일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한안의 요청이라는 것을 알고는 의혹이 일었다. 일개 소녀일 뿐인데 강호 문파를 조사하여 알아보려 한다는 것이 어쨌든 좀 수상쩍었던 것이다.

수하가 알아온 정보를 떠올리며 부운석의 얼굴빛이 희미하게 바뀌었다. 그 비단 수건은 당문의 특산물이나, 비단 손수건 위의 ‘교’ 자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나중에 다시 탐문한 결과, 당문의 장문의 어린 딸이 당교라는 이름이었고 모두가 그녀를 소교라고 불렀다고 했다. 그러나 소교는 이미 20년 전에 중병이 낫지 않아 죽은 지 오래였다. 부운석의 정탐꾼은 소교의 묘까지 확인했는데 무덤은 텅 비어 있었다고 보고를 했다.

당문에서 무엇하러 이 텅 빈 무덤을 만들었을까. 부운석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정탐꾼이 보내온 보고에 따르면 당문은 조정의 사람들을 꺼려하고 증오하기까지 한다고 했다.

“조정과 관계가 있을 듯하다.”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성뢰는 멍해졌다.

“강호 문파와 조정은 줄곧 각자 본분을 지키며 서로 간섭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상관이 있다는 거냐? 형수가 네게 조사해 달라고 한 건데 그럼 형수가 조정과 관계가 있다는 거 아냐?”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성뢰의 눈빛이 돌연 달라졌다.

“말하자니 사실 이상하네. 형수는 5품 관원의 딸이니 황궁과 크게 상관이 없지. 하지만 그녀가 궁중 연회에 모습을 드러낸 후부터, 위여풍, 7황자, 태후까지 모두 그녀의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잖아. 이치를 따지자면 이해가 안 되는 일이야.”

그때의 한안은 현청왕비도 아니었고 지위도 그저 보통의 관원 딸이었다. 그러나 위여풍은 그녀를 위세자비로 맞으려 했고 태후도 위여풍과의 혼인을 지시하려 했다. 설마 부운석이 알지 못하는 무슨 관계가 있는 건가.

부운석은 눈앞의 찻잔을 보았다. 청색의 찻잎이 찻물 속에서 떴다 잠겼다 하고 있었다. 조정은 탁한 물이다. 그들이 집요하게 한안을 물속으로 끌어들이려 하니 목적이 단순하지는 않으리라.

“맞다. 운석,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어.”

부운석은 눈동자를 들어 그를 보았다. 성뢰가 의혹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몇 사람을 파견해서 밤낮으로 장부를 관찰하게 했는데 장부를 감시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어.”

좀 이상하지 않은가. 그저 한안을 감시하는 것이라면 그런대로 그럴 수 있다 하겠지만 왜 밤낮으로 장부를 감시할까. 설마 장부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는 것인가?

부운석이 차갑게 말했다.

“분명 무언가가 있군.”

장부에 아마도 중요한 물건이 있는 것이다. 예견하고 있던 일이긴 했다. 그러나 줄곧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안은 계속해서 암살 시도를 받고 있고 장 태사의 애첩은 장부에서 이상하기만치 오래도록 머물고 있었다. 아마도 그 물건 때문이리라.

한안이 현청왕부에 오지 않고 장부에 있는 한, 그녀의 운명은 장부와 하나로 묶여 있었다. 부운석은 한안이 조금이라도 위험하게 놔둘 생각이 없었다. 누구든 간에 곧 공세를 취할 것이 분명했다. 출정하기 전에 절대적으로 안정적인 환경에 거할 수 있도록 한안을 보호해야 했다. 한안 스스로도 해결할 방법이 있겠지만 기왕에 그의 왕비가 되었지 않은가. 부운석은 자신의 사람이 조금이라도 손실을 입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성뢰는 부운석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바를 알아보고 참지 못하고 웃었다. 이 얼음 덩어리 같은 사람에게 일단 감정이 생기니 뜻밖에도 이렇게나 특별히 감싸고 도는구나. 부운석이 마음에 담은 사람을 찾은 것이 성뢰는 진심으로 기뻤다. 하지만 부운석이 찾은 왕비는 보통 사람이 아니긴 했다. 뒤엉켜 있는 각종 세력은 차치하고라도 ‘한평생 한 사람만’이라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말을 멀쩡하게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부운석이 상대할 만했다.

“태후 쪽은 분명 쉽게 손을 뗄 리 없어. 형수가 7황자의 계획을 망쳐놨으니. 분명 7황자는 지금 그녀를 뼛속까지 미워하고 있을 테지.”

성뢰가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지금 7황자는 복을 기원하러 출궁했다.”

부운석은 손을 뻗어 이마를 눌렀다. 수려한 얼굴 위 표정이 살을 엘 듯 차가웠다.

“내가 이미 비밀 호위를 보내어 그녀를 보호하고 있다. 누구든 그녀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건드리면 내 손에 잡혀 갈기갈기 찢어죽임을 당할 것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18장

장부는 근래에 비정상적으로 조용했다. 한안도 문밖출입을 하지 않았다. 장한명이 몇 차례 찾아왔지만 한안이 피곤하다는 이유로 내쫓았기에 청추원은 지극히 한산했다. 들리는 말로 주 이낭과 미 이낭이 최근 대단히 사이가 좋아졌다고 했고 대주씨는 점점 장사양과 소원해지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정말 조마조마합니다.”

급람이 불평하며 말했다. 주씨들이 미적지근하게 시간을 끄니 더 큰 음모를 준비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안은 개의치 않고 손을 흔들었다.

“괜찮아. 그들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둬.”

장사양은 지난번 자신의 말을 들은 이후, 대주씨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예상한 바였다. 남자들이란 신선한 것을 밝히는 법인 데다가 설령 장사양이 제아무리 대주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자신의 관직에 영향을 끼칠 것 같기만 하면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깔끔하게 나눠 버릴 남자였다.

“맞다. 소저, 며칠 전 노비에게 처리하라고 분부하신 일은 잘 처리했습니다.”

급람이 갑자기 말했다.

“이렇게 빨리?”

한안의 예상보다 빨랐다.

급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교몽의 오빠가 집안의 모든 은자를 다 날렸어요. 지금 빚쟁이가 교몽 집안의 집을 저당 잡으려 하고 있다네요.”

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왕 이리 되었으니 내가 바로 가서 그를 만나야겠구나.”

경성 최대의 도박장 안.

비쩍 마른 젊은 남자가 사람들에게 맞기 시작했다. 그의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었고 중상을 입은 게 분명했다. 그러나 남자는 여전히 미련이 남는지 도박장 안을 향해 말했다.

“너희가 사람을 너무 업신여기는구나!”

“가버려!”

배가 불룩하게 나온 우두머리 남자가 한 발로 그의 등을 밟았다.

“이놈아, 얼른 물건 챙겨 갖고 가라. 네 놈 집은 이미 본소야가 저당 잡았다. 하하하, 네 놈에게 3일의 시간을 주지. 은자를 내놓지 않으면 본소야가 건너가서 대대로 내려왔다는 네놈 집을 접수하겠다!”

진이는 분노하여 소리쳤다.

“내가 이겨서 되찾을 거다!”

그 사람은 우스갯소리를 들은 것처럼 고개를 뒤로 젖히고 하하하 큰 소리로 웃었다.

“이겨서 되찾아? 네가 뭘 가지고 이겨서 되찾아? 은자도 없으면서 또 노름에 돈을 걸 생각을 하다니. 듣자 하니 네놈한테 여동생이 하나 있다던데…… 어때?”

“내 누이동생을 넘볼 생각 마라!”

“허튼소리 그만하고.”

배불뚝이는 미간을 뒤틀었다.

“저놈을 내쫓아라!”

사내종들이 떼 지어 몰려와서 진이를 때리기 시작했다. 진이는 비틀거리며 낡은 집으로 돌아왔다. 낡은 집은 온통 난장판이었다. 집 안은 강도가 들었던 것처럼 사방이 엉망진창이었다. 진이는 마음속으로 놀라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 여자의 낮은 흐느낌 소리와 노인의 통곡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여동생 교몽이 고개를 숙이고 팔순의 늙은 아버지 무릎에 엎드려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교몽은 진이를 보더니 울음을 멈추고는 소리 질렀다.

“오빠 뭐 하러 돌아왔어요. 왜 도박장에서 죽지 않고!”

진이는 더듬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진이는 여동생 교몽을 어려워하고 있었다. 바로 늙은 아버지에게 구조의 눈빛을 던졌다. 진 노인은 이 아들을 가장 아끼고 사랑했다. 마음속에 화가 남아 있기는 했지만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져서 교몽에게 애처롭게 말했다.

“그만해라. 결국은 네 오빠다.”

교몽은 오히려 웃었다.

“오빠? 제게 어떻게 이런 오빠가 있을 수 있어요? 고생스럽게 모은 돈을 가져다 노름이나 하고, 집안의 재산을 깡그리 갖다 바친 것은 둘째 치고 조상 대대로 물려온 집조차 노름판에 갖다 바쳤잖아요. 아버지, 생각도 안 해보셨어요? 집 없이, 어디 가서 살까요? 설마 오빠는 아버지를 데리고 길거리를 헤매려는 걸까요?”

진이는 교몽의 말에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교몽의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본래 진이는 그런대로 조그마한 장사를 잘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친구 하나가 도박장에 가서 놀자며 자신을 불렀다. 당초 그는 그렇게 크게 도박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저 세상 물정이나 좀 알아볼까 했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운이 좋아서 매번 돈을 따고 나니 많이 딸수록 더 많이 따고 싶어졌다. 계속해서 이럭저럭 하는 가운데 도박에 중독된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자신의 좋은 운이 그동안 다 소진되었는지 최근에는 도박을 하기만 하면 패했다. 자신이 딴 돈을 전부 잃었을 뿐만 아니라 집의 밑천까지 깨끗하게 말아먹었고 이 집마저 남길 수 없게 된 것이다.

교몽은 엉엉엉 울었다.

“내가 매일 미 이낭의 시중을 들면서 고생스럽게 하인 생활을 한 게 뭘 위해서였어? 우리 집 형편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라고 그런 게 아니었어? 나만 매번 고생하고 오빠는 여기서 내 발목만 잡아끌고 있잖아. 이런 오빠 있어서 뭐해. 없어도 그만이야!”

진이는 조급해졌다.

“너 날 모른 체하면 안 돼. 우린 너와 나 남매 둘뿐이야. 네가 설령 나를 미워하더라도 아버지를 모른 체해서는 안 되잖아. 오빠가 이전에 너를 푸대접한 적 없잖아, 안 그래?”

그것은 사실이었다. 교몽은 오빠와 친했다. 진이가 도박에 빠지기 전에는 정직하고 좋은 사람이었고 여동생을 아끼고 사랑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조금 전 도박관이 노름빚 대신 교몽을 저당 잡겠다고 했을 때 그렇게 분노하지 않았을 것이다. 교몽은 마음이 흔들렸다. 그의 불행이 슬펐고 도박에 넘어가지 않으려 노력하지 않은 것에 분노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진이를 모른 척할 수 있냐 하면 그렇게 돌처럼 냉정하고 무정한 마음씨를 가질 수 없었다.

진 노인도 탄식했다.

“교몽, 무슨 방법이 없겠느냐.”

교몽의 눈물이 빠르게 흘러내렸다. 무슨 방법이 있을까. 진이가 거액의 노름빚을 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었다. 미 이낭에게 이 일을 언급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완곡하게 도와달라 말을 했다. 그러나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이 집은 겉으로 보기에는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사실 거액의 돈을 필요로 했다.

미 이낭은 교몽을 돕는 데 그렇게 많은 돈을 쓰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일개 여종인 교몽이 어디 가서 그렇게 많은 돈을 손에 넣을 수 있을까. 교몽은 깊디깊은 절망에 빠졌다. 부친은 조상이 물려준 주택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주택을 떠나면 진이와 진 노인은 돌아갈 집이 없었다. 진 노인은 나이가 많아 만일 잘못되기라도 하면, 자신은 불충 불효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진이와 진 노인 모두 희망에 찬 눈빛으로 교몽을 보고 있었다. 그녀가 이 집안에서 가장 유능하고 총명했으며 그래서 미 이낭의 측근 여종도 될 수 있었다. 교몽은 이를 악물었다.

“내가 다시 가서 방법을 한 번 생각해 볼게요.”

장부 안.

한안은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주홍이 말했다.

“소저, 교몽이 오늘 점심때 몹시 정신이 없어 보였답니다. 부용원 사람이 말하기를 미 이낭의 찻잔을 엎었다네요. 아마 지금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거예요.”

한안이 희미하게 웃었다.

“어찌할 바를 모른다고? 마침 잘됐네. 그 애가 마음을 정하게 해야겠구나. 가자. 바깥에 햇볕이 딱 좋으니 바람이나 쐬러 가자꾸나.”

한안은 말을 마치고 일어섰다. 주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부의 화원 안, 교몽은 한창 고개를 숙이고 눈앞의 동백꽃을 헤집고 있었다. 여종들의 비웃음이 어렴풋이 전해져 왔다. 남의 어려움에 이때다 싶어 입을 놀리는 것들이었다. 오늘 그녀는 미 이낭의 찻잔을 엎었고 미 이낭에게 한바탕 호되게 질책을 들었다. 그녀는 미 이낭이 최근 대단히 울적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 또한 마찬가지. 빚쟁이가 돈을 갚으라며 몰아붙이고 있었다. 내일 바로 집을 가져가는 날인데 자신은 그렇게 거액의 돈을 손에 넣을 수 없었다. 교몽은 평소에 미 이낭이 자신을 총애하기에 다른 여종들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고 그래서 부용원에서 말을 편하게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교몽은 생각을 거듭할수록 미 이낭이 미웠다. 확실히 그녀는 자신의 주인이었다. 그래서 자신은 그녀를 위해 여러 해 계책을 꾸며서 부중에서 입지를 확고히 하고 장사양의 총애를 빼앗도록 도왔다. 이 정도면 은자를 줄 법도 하지 않은가. 미 이낭이 기꺼이 도울 생각만 있다면 은자 따위는 확실히 문제도 아닐 거라고 믿었다.

교몽은 손 위의 동백 꽃잎을 마구 구기며 저도 모르게 넋을 놓았다.

“동백꽃이 훌륭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너에게 유린당하니 참담한 결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겠구나.”

몸 뒤에서 맑고 투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몽은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한안이 자신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미 이낭과 한안의 관계가 다소 완화되긴 했지만 교몽은 주씨가 들어온 후 줄곧 연약하고 만만하던 4소저가 갑자기 다른 사람처럼 변한 것을 알고 있었다. 미 이낭은 몰라도 교몽은 간파할 수 있었다. 4소저는 늘 얼굴 가득 웃음기를 머금고 있지만 이런 사람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사람인 법이다. 주씨와 장어산, 심지어 위여풍까지 4소저와 맞서서는 매번 4소저가 열세에 있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4소저가 역전승을 이루었다. 설령 미 이낭과 4소저가 동맹을 맺었다 해도 교몽은 꺼림칙했다. 4소저의 속을 헤아릴 수 없었던 탓이었다. 만약 둘 사이에 공동의 적이 있다면 그런대로 괜찮겠지만 만약 그런 게 없다면 미 이낭은 토사구팽당할 게 뻔해 보였다.

한안은 어린 여종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변화무쌍하게 바뀌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조급하게 서두를 것 없었다. 급람이 말하기를 교몽은 미 이낭이 가장 의지하는 사람이라 하였다. 교몽은 생각이 교묘했고 여종 중에서도 보기 드물게 계략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런 적수를 상대로 전략을 잘못 세우면 오히려 말썽이 될 수 있다. 가장 직접적인 방법으로 그녀의 약점을 찾는 게 정답이었다.

미 이낭은 여종을 위해 은자를 내놓을 인간이 아니었다. 교몽이야 자신이 미 이낭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일부분이라 여기고 있겠지만 미 이낭은 뼛속까지 신분 관념이 박혀 있으니 교몽을 자신의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여길 리 없었다. 그저 주인과 하인의 관계일 뿐이다. 교몽을 위해 이러한 희생을 치를 리 없었다.

그녀가 사람에게 환심을 살 때 가장 쉬운 방법은 상대방이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절망할 때였다. 교몽은 부중에 친구도 없었고 미 이낭이 먼저 손을 내밀어 도울 리도 없었다. 이렇게 주인에게서 마음이 떠난 상태가 가장 매수되기 쉬운 때였다.

교몽은 한안이 온화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보자 안절부절못하여 서둘러 말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순간 정신이 나가서 동백꽃을 잊고 있었습니다.”

한안은 한결같이 온화하게 말했다.

“정신이 나가? 무슨 일 때문에 정신이 나갔는지 알려주겠니? 어쩌면 내가 너를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이 말이 말하는 바는 뚜렷했다. 교몽은 놀라 의아해하며 한안을 보았다. 어떻게 그럴 리가…….

한안이 담담하게 말했다.

“빚 때문인가?”

교몽은 몸을 떨다가 휙 고개를 들었다.

“4소저께서 하신 일인가요?”

한참 후에야 교몽은 어렵사리 물었다.

교몽은 바보가 아니었다. 잠깐 사이에 진이가 남의 계략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한안의 출현이 너무도 지나치게 공교로웠으니 두 사건 사이의 관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안은 희미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뻗어 그녀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누가 한 짓인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오직 나만이 너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이지.”

교몽은 눈앞의 4소저를 응시했다. 원망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거짓이었다. 그러나 원한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안을 마주하고 있을 때 피어오르는 두려움이었다. 장부 안의 하인들은 모두 4소저가 자비로운 마음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가장 마음이 선량하다고. 그러니 누가 알았을까. 4소저가 이처럼 계략을 꾸민다는 것을. 사람을 꼬드겨서 가산을 탕진하게 하다니. 4소저가 정말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절대 그렇지 않다.

한안은 미소 짓고 있었지만 교몽의 눈에는 그 미소가 순수한 웃음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4소저께서는 무엇을 하려 하십니까?”

교몽이 천천히 말했다. 한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녀도 대강 한두 가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한안도 명쾌하게 대답했다.

“나는 네가 나의 내통자가 되길 원해.”

“안 됩니다.”

교몽은 그저 일개 노비이고 미 이낭에게 원망과 미움을 가지긴 했지만,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자신의 주인을 배반하길 원치 않았다. 이 때문에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한안의 요구를 거절했다.

한안은 담담하게 말했다.

“내 제안을 거절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 강요하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네가 아니라도 다른 사람이 내 내통자가 되어주겠지. 나는 그게 너든 다른 사람이든 별 차이 없어. 하지만 넌 네 오라비가 진 빚을 갚아야 하잖니. 지금 당장 널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듯하니 너에게 나의 존재는 중요하겠지. 지금 너랑 나의 입장은 천지 차이란다.”

그녀는 어떤 감정도 싣지 않고 천천히 말했다.

“너는 당연히 미 이낭에게 충성을 다할 수 있어. 그건 노비로서 너의 본분이야. 하지만 미 이낭 입장에서는 넌 그저 충성스러운 종 중 하나일 뿐이겠지. 네 주인이 너를 위해 할 수 있는 거라곤 너의 오라비가 거액의 노름빚에 머리가 타들어 가는 것 같을 때, 너의 부친이 만년에 의지할 데 없이 도처를 떠돌아다닐 때, 안부 정도 묻는 거겠지.”

교몽은 허리를 숙였다. 한안의 목소리는 고혹적인 마력을 띤 것 같았다.

“나는 상벌이 분명한 사람이야. 너를 완전히 신임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만약 나를 돕는다면 반드시 큰 상을 내릴 거야. 현청왕비가 은자 몇 푼이 아깝지는 않겠지.”

한안의 말은 지극히 교묘했다. 한안은 어떻게 해야 가장 좋은 것인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안 전체의 장단점을 원칙대로 공정하게 명확히 밝혔다. 그녀는 자신이 교몽을 신임하지 않을 거라 말했지만 오히려 그 말이 교몽이 더욱 한안을 신임하게 만들었다. 확실히 자신의 반대쪽 사람을 신임할 사람은 없지 않을까. 한안이 먼저 이 일에 관해 장단점을 표명하고 자신이 제시할 수 있는 조건을 말한 뒤, 현청왕비의 이름을 건 것은 당근과 채찍을 함께 쓴 전략이었다. 그것은 사람을 부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했다. 교몽의 표정은 바로 바뀌었다.

한안은 몸을 곧게 세우고 동백꽃만 바라보았다.

“급하게 말할 필요는 없어. 내일이 노름빚 만기일이니, 그때까지 너의 결정을 알려주면 돼.”

한안은 말을 마치고 담담하게 웃으며 몸을 돌려 떠나갔다. 한 번도 몸을 돌려 보지도 않았다.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에 오히려 교몽은 망설여졌다. 만약 한안이 집요하게 자신의 조건을 승낙하라고 요구했다면 교몽은 오히려 반항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아무 상관 없다는 표정을 지으니 정말 4소저에게 다른 방법이 있는 게 아닐까 우려가 되었다.

교몽은 자신의 추측이 맞을 거라 생각했다. 4소저의 능력이 뛰어나니 설령 자신이 아니라도 쉽게 일을 성사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교몽 자신은 4소저가 아니면 부친과 오라비가 몸 둘 곳 없이 떠돌게 되고 만다.

생각을 끝마친 교몽은, 마지막 망설임조차 눈 녹듯 사라졌다. 한안이 선택권조차 주었으니 교몽도 그녀를 실망시키지 말아야겠다 생각했다.

다음날까지 기다리지도 않고 그날 밤 급람이 한안에게 와서 고하였다. 교몽이 ‘4소저를 위해 근심을 나누어지기를 원한다.’는 말을 건네며 자신을 의탁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한안은 책을 내려놓고 이마를 짚으며 물었다.

“급람, 내가 좀 악독하게 굴었을까?”

급람은 급히 도리질을 했다.

“소저께서 악독하다니요? 소저께서는 하늘 아래 가장 좋은 분이세요.”

한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다른 사람 눈에는 아마 너무나 악독해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일 거야.”

한안의 눈에 자기혐오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신이 싫었다. 다른 사람의 가족을 이용해서 상대방을 견제할 생각을 하고, 심지어 자신의 일을 해결하기 위해 상대방을 억압했다. 예전이었다면 거들떠볼 가치도 없던 방법이었다. 교몽의 오라비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아무런 잘못도 없었다. 그런데 자신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를 도박에 중독시키는 것도 꺼리지 않았고 팔순 노인이 근심하며 두려움에 떨게 하였으며 멀쩡하던 가정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다.

주홍은 한안의 생각을 아는 것처럼 위로하며 말했다.

“이 세상에는 늘 어쩔 수 없는 일이 허다합니다. 소저께서는 너무 상심하실 필요 없으세요. 모든 것은 분명 각자의 타고난 명이 있는 거니까요.”

한안이 웃었다.

“네가 갈수록 통찰력과 언변이 느는구나.”

한안은 주홍의 말처럼 생각하기로 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누가 누구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자신의 방법은 어떻게 보면 교몽을 돕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미 이낭을 따르면서 나쁜 짓을 하다 보면 머지않은 어느 날 반드시 업보를 치르게 될 테니까. 설령 자신이 정말로 악독하다 한들 또 어떤가. 전생처럼 선량하게만 살아간다면 뼛조각 하나 남김없이 다 물어 뜯겨 잡아먹힐 뿐이리라.

한안은 그렇게 스스로를 위안했다.

*

눈 깜짝할 사이에 3월의 따뜻한 봄날이 다가왔다.

날씨는 한층 더 쾌청해졌고 미 이낭의 배는 하루하루 부풀어 올랐다. 장사양은 늦둥이 아들에 대한 애정이 유별났고 미 이낭에 대한 보살핌도 지극했다. 대주씨가 무슨 방법을 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장사양과 대주씨 사이에 생겼던 거리감은 싹 날아간 상태였다. 미 이낭의 몸이 무거워 장사양의 시중을 들 수 없고 주씨가 일부러 기회를 만들면서 대주씨와 장사양의 관계는 다시 처음처럼 화기애애해졌다.

이날은 미 이낭의 생일날이라 장사양은 기분이 매우 좋았다. 동료 몇을 초대했고 주씨와 대주씨도 친한 부인 몇을 초대했다. 미 이낭은 행동이 불편하긴 했지만 장사양이 자신을 중히 여기는 것을 보며 즐거워했다. 손님으로 온 부인과 소저들은 장사양이 일개 첩실을 애지중지하는 것을 보고 미 이낭이 곧 장부의 부인이 되겠구나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주씨도 평소와 전혀 다른 태도로 바짝 낮추고 엎드려 아첨하며 미 이낭 앞에서 겸손하게 행동했다.

미 이낭은 배 속 아이 덕분에 공개석상에 얼굴을 내놓을 수도 없던 오랑캐 여인에서 장부의 부인이 된 것이다. 미 이낭과 주씨는 담소를 나누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고 장사양은 희첩들이 화목한 모습을 보고 몹시 만족스러워했다. 장 태사도 손님 중에 끼어 있었는데 처제를 보러 왔다고 하였다. 이런 자리이니 장어산도 당연히 참석해야 했고 위여풍도 귀한 사위 자격으로 초대 명단에 끼어 있었다. 위왕과 7황자도 왔다. 한순간 장부는 지금까지 그랬던 적이 없을 만큼 떠들썩해졌다.

어떻게 보면 희한한 일이기도 했다. 장사양은 그저 5품 관원에 불과한데 손님으로 온 사람들이 하나같이 고관이었으니 말이다.

청추원 안.

급람은 한안의 머리를 빗기고 있는 중이었다. 바깥의 여종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울적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관과 귀인들은 모두 온다고들 하는데, 왕야께서는 어찌 오지 않으실까요?”

한안은 당황했다. 자신도 여러 날 동안 부운석을 보지 못했다. 심지어 그는 그녀에게 소식 하나 보내지 않았다. 조금 불만스러웠고 조금 의혹이 일었으며 또 조금 그리웠다. 흔히들 하루만 못 봐도 삼 년이나 못 본 것 같다 하던데. 한안은 자신이 아직 그렇게까지 부운석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그러나 마음속 한 부분에 웅크리고 있는 것은 분명 그리움이었다.

그녀는 며칠간 부운석과 함께 지내면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얼마간 알게 되었다. 부운석은 얼음처럼 차가워 보이지만 사실 무척 자상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요 며칠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분명 바쁜 일 때문일 것이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이라면……. 한안은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녀는 실소했다. 정말로 무슨 문제가 생긴다고 해도 부운석의 수완으로 볼 때 적절히 알아서 수습했을 테니까.

급람은 아직도 재잘재잘 쉴 새 없이 지껄이고 있었다.

“듣자 하니 2소저가 돌아와서 거만하게 우쭐댄다 합니다. 모든 여종이 위 세자가 2소저를 총애한다고 말하는데 그건 걔들이 왕야께서 소저를 아끼시는 것을 못 봐서 그런 거예요. 왕야의 신분이 위 세자보다 더 높으신데, 눈치도 없는 것들이에요.”

한안은 피식 웃었다.

“나이도 어린데 어찌 그렇게 허영을 부려? 그 애들이 자기들끼리 비교하든 말든 상대할 필요가 없구나.”

침묵하고 있던 주홍도 급람을 따라 입을 열었다.

“왕야를 위 세자와 비교하는 것은 정말이지 옥과 돌덩이를 비교하는 것과 같죠. 저것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짓입니다.”

한안은 주홍까지 그렇게 여기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순간 자신만이 부운석을 냉담하게 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사람들이 그녀가 부운석 같은 남자를 차지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그녀 혼자만 부운석을 남들에게 자랑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현청왕비라는 이름에 기대어 남을 겁주고 협박할 수 있었던 것은 솔직히 모두 부운석 덕분이지 않은가.

부운석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자원이었다. 비옥한 논밭 천 묘나 거대한 금은보다 더 쟁쟁한 자원. 한안은 희미하게 웃었다.

“너희가 이렇게 왕야를 떠받드니 왕야의 이름을 빌려다가 놀아 보지 않으면 왕비라는 신분에 미안한 일이 되겠구나.”

급람과 주홍은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들고 한안을 바라보았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한안은 치마를 툭툭 털고 몸을 일으켰다.

“가서 떠들썩한 판에 끼어들지 않으면 남들이 현청왕부 미래의 왕비가 예의와 격식을 모른다 하지 않겠느냐? 가자.”

그녀의 웃는 얼굴이 일순 어두워졌다.

“어쨌든 모두와 만나야겠지.”

장부에 있는 중앙의 대청 안.

주씨 자매는 한창 장어산과 이야기 중이었고 장사양은 위왕과 7황자, 장 태사 등의 사람들에게 아첨하며 비위를 맞추고 있었다. 남자들은 한없이 거창한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여자들은 느긋하게 담소하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여느 집처럼 떠들썩하고 화기애애한 줄 알 것이다. 평온함 아래에 툭 튀어나온 칼날이 숨겨져 있을지 누가 간파할까.

한안이 대청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모든 사람의 이야기 소리가 순식간에 낮아졌다.

어쨌든 장부의 4소저는 현청왕이 아끼는 사람이었다. 듣기로 태자의 목숨도 구했다 하니 어찌 되었든 보통의 규방 여자처럼 대할 수는 없었다.

한안은 옅은 살구색의 얇은 저고리에 금빛 찬란한 나비가 무수히 뿌려진 치마를 입었다. 긴 머리카락은 빗어 올려 물고기 꼬리 비녀 하나만 꽂았다. 손목에는 고급스러운 비취색 팔찌를 찼다. 그녀의 피부는 희고 깨끗했으며 웃음기가 가득한 얼굴에 두 눈은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져 있어, 다른 사람들이 보고 따라 웃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게 했다. 입술은 살짝 치켜 올라가 미소를 짓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 미소에는 또한 조롱의 기색도 머금고 있었다. 새까만 눈동자는 상등품 보석 같으면서도 모든 것을 통찰하는 듯한 빛을 띠고 있었다. 화려하고 부귀한 차림새가 아니라 오히려 단순하고 소박한 차림새였으나 온몸에서 풍기는 고귀한 기질은 덮어 숨길 수 없었다. 그녀가 사람들 사이에 서자 닭의 무리 가운데 서 있는 학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스스로 닭이 됐다 여긴 이들은 슬금슬금 뒤로 뒷걸음질 칠 정도였다.

한안을 쳐다보는 장어산의 눈빛에 질투와 시기가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장어산은 일부러 위여풍의 몸에 기대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넷째 동생은 어떻게 이리 늦게야 오는 거지? 나는 또 현청왕비가 되어서 자매들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것인가 생각했네.”

한안은 옅게 웃으며 반박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장어산을 응시할 뿐. 장어산은 점점 무안해졌다. 한안이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난처하게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예전에는 한안과 불화가 있더라도 체면상 그럭저럭 지냈다. 그래서 적어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장어산을 난처하게 하진 않았다. 하지만 장어산은 여러 일을 겪으며 한안의 지위가 변했다는 것을 놓치고 있었다. 이전에야 부득이하게 체면치레를 해야 했지만 지금은 굳이 양보할 필요가 없어진 데다가, 부운석의 비호도 있으니 더 이상 장어산의 사정을 봐줄 리 없었다.

분위기가 일순간 굳어졌고 장어산은 난처해졌다. 한안이 뼈에 사무치도록 증오스러워, 어쩔 수 없이 위여풍에게 구조의 눈빛을 던졌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는 정신이 나가 있는 위여풍이 보였다. 그는 한안을 바짝 응시하느라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었다.

장어산의 마음은 강이 뒤집히고 바다가 일렁이는 것처럼 괴로웠다. 위왕부에 들어간 후로 위왕은 어산의 출신이 낮다고 싫어했고 위여풍은 그저 그녀를 욕망을 배출하는 도구로 여길 뿐이었다. 장어산은 위여풍의 마음속 한 사람이 한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위여풍에 대한 최초의 설렘이 지나간 후 점점 그 사실을 명확히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예전처럼 그렇게 그에게 연연하지 않으며 그저 자신의 지위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 달라붙어야 하는 대상 정도로 여기려 했다. 그러나 위여풍은 그녀에게 그 기회조차 전혀 주지 않았다. 위여풍의 안중에 장어산은 전혀 없었다. 그러니 장어산은 수절하는 생과부나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자기 남편이 혼자서 애모하는 그 여인이 바로 자기 눈 속의 못이요, 살 속의 가시라는 것을 견뎌내야만 했다.

한안은 장어산이 가진 많은 생각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원수 보듯 하는 눈빛에서 이 언니가 좋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님은 알 수 있었다.

위여풍은 한안이 들어오고부터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보잘것없어 보이는 여자는 매번 마주칠 때마다 달라져 있었다. 그녀는 더 아름다워졌고, 더 총명하고 지혜로워졌으며, 점점 더 매력적으로 변해갔다. 온몸에서 풍기는 그녀의 고귀한 마력은 무엇으로도 덮어 숨길 방법이 없었다. 그 고귀한 기질은 뼛속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생성되어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분명 평범한 소녀인데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우아한 귀족 같아 그 사람과…… 그 사람과 그렇게나 닮아 있었다.

7황자가 피식 웃었다.

“듣자 하니 며칠 전에 장 소저가 황동생을 구했다 하던데. 부녀자이지만 정말 사내에 뒤지지 않는군.”

얼핏 들으면 칭찬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이상하게 들릴 수 있었다. 한안은 어린 아가씨가 분수를 지키지 않고 남자들이 하는 일에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끼어들었다는 말로 해석이 가능했다. 당시에는 충심에서 그랬다고는 하지만 바꾸어 놓고 보면 아내를 고를 때 이렇게 간이 큰 여자 그리고 다루기 어려운 여자는 회피하는 법이니까.

한안도 옅게 웃음을 지었다.

“전하께서 과찬하시네요. 여자든 남자든 태자 전하께서 위험에 처하신 것을 봤으니 반드시 구해야 하지요. 사람이 개돼지와 다른 게 뭔지 아세요? 사람이 어찌 개돼지처럼 지조 없이 살아가겠습니까? 충성을 다 하는 것이야말로 사람의 기본이죠.”

아무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침착하게 7황자를 궁지에 몰아넣자 7황자의 얼굴빛이 살짝 굳어졌다. 그러나 7황자는 끝까지 아무 내색을 하지 않고 거짓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장 소저는 정말로 생각이 깊구나.”

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객의 일은 7황자도 관계가 있으니 혐의를 벗을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그의 큰일을 망쳤으니 당연히 자신을 증오할 것이고. 생각이 이에 이르자 그녀는 부러 천진한 얼굴로 말했다.

“어디 7전하만 하겠습니까. 듣자 하니 7전하께서 직접 산 위 사원에 가셔서 백성을 위해 복을 기원하셨다지요. 그나저나 7전하께서는 아직 사원에 머물고 계셔야 하는 게 아닌가요?”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맑고 달콤한 목소리는 천진했으며 사악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7황자는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산에 올라 복을 기원하겠다 한 것은 본래 계획이 실패한 후 부득이하게 짜낸 방책이었다. 그가 예민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한안은 남의 불행을 즐기며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있었다. 7황자는 남에게 말 못 할 정도로 손해를 입었지만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한안의 물음은 비할 데 없이 날카로웠다. 황상에게는 산에 올라 복을 기원하겠다고 고했는데, 사원에 있지 않고 여기에 나타났으니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조금 더 엄중하게 보자면 군주를 속인 죄라고도 할 수 있었다.

7황자는 고개를 들고 한안을 노려보았다. 한안은 숨지도 피하지도 않고 그저 웃으며 그를 보았다. 마치 자신의 조금 전 질문은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한 것처럼. 그는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 어린 아가씨는 아무에게도 해를 입히지 못할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강력한 벼락처럼 사람을 사지로 밀어 넣는 데 능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아직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돌연 외마디 비명이 들리더니, 교몽이 황망히 뛰어 들어왔다. 얼굴에 온통 놀라고 당황한 빛이 가득했다.

“노야! 노야! 이낭, 이낭이…… 유산했습니다!”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입을 딱 벌렸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던 장사양은 잠시 몸이 흔들리기까지 했다.

“뭐라 말했느냐?”

교몽이 단번에 땅에 무릎을 꿇고 끊임없이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면서 울부짖으며 말했다.

“노야, 어서 가셔서 이낭을 보십시오. 피가 너무 많이 납니다…….”

장사양은 얼굴빛이 창백해졌다. 그는 위왕들에게 손을 모아 절을 올리고 옷자락을 걷어 올리며 매우 급히 자리를 떠났다. 장사양이 미 이낭 뱃속의 아이를 애지중지하는 것은 장부의 사람들이 모두 다 알고 있는 일이었다. 미 이낭이 유산한 일이 전해지자 하인들은 모두 저마다 위기를 느끼고 자신이 연루될까 몹시 두려워했다.

주씨와 대주씨의 눈빛이 교차하면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어째서 미 이낭이 유산을 했지? 이전에 말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혹시 장사양을 속이려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교몽의 모습을 보니 거짓말인 것 같지는 않았다. 주씨의 얼굴 위로 미소가 떠올랐다. 미 이낭이 정말 유산했다면 그녀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었다. 그녀는 미 이낭이 유산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렇게 되면 부중에 그녀와 다툴 사람은 없어지는 것이다.

주씨는 ‘어머나’ 하고 외치고는 초조한 듯 말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이걸 어쩌면 좋아?”

대주씨는 한순간 의혹이 일면서 무의식적으로 한안을 쳐다보았다. 대청 중앙에 서 있던 한안은 놀라 의아해하는 모습이었고 일의 사정을 모르는 듯했다. 대주씨는 비로소 마음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대주씨는 자신이 눈길을 옮기자마자 한안의 입가에 흐른 희미한 웃음기를 차마 보지 못했다.

그 가운데에서 가장 느긋한 것은 장어산이었다. 주씨 자매가 좋은 구경거리가 있을 것이라 미리 언질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한안을 쓰러뜨릴 수 있다면 그녀는 그 성과를 즐겁게 지켜볼 것이었다. 장어산은 미 이낭의 유산 소식을 접하자마자 이는 모친과 이모의 계획 중 일부분이란 것을 알았다. 이제 곧 한안은 재수 없는 일을 당할 것이다. 앞으로 한안이 겪을 불행을 생각하니 즐겁지 않을 수 없었다. 한안은 그녀의 시선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돌려 장어산을 향해 옅게 웃음 지었다. 장어산은 잠시 당황했다가 화가 치밀어올랐다. 한안은 왜 저토록 침착할 수 있지? 어떻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있을 수 있는 거지? 설마 그녀는 자기가 뒤이어 재수 없는 일을 당할 거라는 것을 모르는 건가?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계획대로 진행되어야 했다. 대주씨가 주씨에게 눈짓을 하자 주씨는 다른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노야와 미 이낭의 몸이 걱정됩니다. 여러분께서 만약 도와주실 수 있다면 소첩과 같이 한 번 가 보셔도 좋을 듯합니다.”

여인의 유산 같은 일에 남자들은 피하는 편이 나았다. 설령 집안에 손님이 있다 해도 손님을 보내야 할 판에 손님을 이끌고 유산한 부녀자를 보러 간다고 하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위왕 등은 오늘 일이 만족스럽게 진행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 걱정 따위는 없었다. 장어산도 위여풍을 이끌고 앞장섰다.

“세자, 우리도 우선 가서 보죠.”

위여풍은 거절하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한안을 보았을 뿐이다. 오늘 일은 한안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한안을 도울 생각은 없었다. 물론 한안이 몸을 굽혀 구조를 청한다면 그건 별도로 논의해야겠지만 말이다.

한안은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주씨가 한안의 주의를 환기시키며 말했다.

“4소저, 어찌 가지 않으세요? 혹시 두려우신 건가요?”

두렵다니. 어찌 아무 이유도 없이 두렵다는 말을 할까. 이는 한안이 켕기는 게 있다는 말로 들렸다. 급람이 따지려는데 주홍이 급람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한안은 몸을 돌려 하늘을 보고는 다시 주씨를 보며 담담히 말했다.

“주 이낭은 이상한 것 같지 않아요? 이렇게 날씨가 좋은데 춥게 느껴지네요.”

한안은 순간 눈을 내리깔며 웃었다.

“이낭, 이낭이 말해 봐요. 날씨가 이런 건 누군가 주술을 썼기 때문이 아닐까요?”

주씨의 심장이 떨어졌다. 등줄기에 서늘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한안이 주씨를 향해 웃으며 가볍게 지나가듯 말했다.

“그저 농담 한 번 해봤을 뿐이에요. 그렇게 긴장할 일은 아닌데요?”

주씨는 당황했다가 급히 표정을 숨겼다.

“긴장이라뇨? 누가 긴장했다는 거죠?”

주씨는 말을 마치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뒤 한 번 쳐다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한안은 그녀가 매우 바삐 걸어가는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등 뒤에 무서운 것이라도 있는 듯 걷는 모습에 한안은 큰 소리로 웃을 뻔했다.

급람과 주홍도 억지로 웃음을 참았다.

“이낭이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네. 우리도 가서 보자꾸나.”

부용원은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웠다. 바닥에 큼직큼직한 혈흔이 보여 사람을 놀라게 했고 곳곳에 여종들이 바빠서 허둥대는 모습이 보였다. 대주씨는 여종 하나를 불러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여종이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미 이낭이 유산했습니다. 지금 의원이 진맥하고 있는 중인데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요.”

주씨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왜 유산이 된 거지? 혹시 너희들이 미 이낭을 제대로 잘 돌보지 않은 게 아니냐?”

여종은 놀라서 무릎을 꿇고 정신없이 바닥에 머리를 부딪쳤다.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미 이낭이 귀신을 보았다고, 누군가 아이를 해치려 한다고 말했어요. 처음에는 미 이낭이 악몽을 꾼 거라 여겼는데 누가…… 누가 알았겠습니까. 얼마 되지 않아 이낭이 이렇게 많은 피를 흘리게 될 줄 말이에요.”

어떻게 귀신을 볼 수 있단 말이지. 사람들의 얼굴에 의혹이 일면서 낯빛도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연말이 막 지난 터라 모두들 귀신을 두려워하고 있었기에(중국에서는 연말에 귀신이 모인다 생각하여 이를 쫓고자 폭죽을 터트린다고 함) 어린 여종의 말을 듣고 미 이낭이 어떤 귀신을 노하게 한 것일까 추측하기 바빴다. 대주씨의 낯빛이 변했다.

“네가 똑똑히 보았느냐? 함부로 말해서는 안 돼. 정말로 네가 말한 대로여야 해. 만약 조금이라도 거짓이 있다면 반드시 너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노비는 감히 조금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린 여종은 놀라서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교몽 언니도 있었습니다. 이낭께서는 교몽 언니를 찾아서 물어보세요.”

“교몽은 어디 있지?”

주씨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여봐라, 교몽을 불러와라.”

교몽이 곧 이끌려 왔다. 대주씨는 조금 전의 말을 다시 한번 반복했다. 교몽도 낯빛이 변하며 여종과 같은 말을 했다. 한순간, 모두들 귀신이 재난을 일으킨 것이라 믿게 되었다. 두려우면서도 당황스러운 기분이 빠르게 번져나갔다.

“이걸 어쩌지? 귀신을 노하게 했으니 재수 없는 일을 당할 거예요. 어쩐지 최근 모든 일이 순조롭지 않더라니. 이걸 어째.”

주씨가 말을 마치고 얼굴을 가리며 흐느꼈다.

대주씨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동생, 초조해하지 마. 귀신도 완전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야. 법력이 높은 도사를 찾아서 술법을 펼치게 하면 돼. 괜찮아. 분명 괜찮을 거야.”

한안은 웃는 듯 마는 듯 대주씨를 보며 말했다.

“온 천하를 구름처럼 떠도는 도사가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주씨가 한안을 흘깃 쳐다보며 말했다.

“듣자 하니 며칠 전 경성에 정허 도사가 왔는데 이분이 법력이 높아서 만인의 존경을 받는다고 했어요. 지금 바로 청해서 정허 도사에게 부중의 더러운 것을 깨끗이 몰아내고 가택의 안녕을 보호하도록 하는 게 어떨까요?”

장어산은 주씨 자매가 무엇을 하려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까닭에 옆에서 조용히 구경만 하고 있었다. 어쩌면 속사정을 알고 있을지 모르는 7황자 등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그야말로 좋은 방법이라 여겼다.

한안은 웃었다.

“이낭은 정말 어리석네요. 그렇게 유명한 도사가 우리 청을 받아들일까요. 실망만 하게 될 거예요.”

7황자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바로 본전의 청첩을 가지고 정허 도사를 청하여라. 본전이 현장에 있었으니 참견을 해야겠구나.”

한안은 소리 내어 웃을 뻔했다. 7황자는 정말 기회를 잘 타서 움직이는구나. 하지만 원하던 바였다. 7황자도 제 몸 보전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었다.

한안은 미소 지었다.

“한안이 다소 얕게 생각했네요. 그럼 부탁드립니다.”

7황자의 사람이 청첩을 가지고 나갔다. 사람들은 꽉 닫힌 문 안에서 장사양이 미 이낭에 관한 소식을 가지고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존귀한 정허 도사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7황자의 눈빛이 있는 듯 없는 듯 한안의 몸을 지나쳐 갔다. 그녀는 기다리는 사람의 자세였지만 태연하고 침착했다. 저렇게나 냉정하다니. 7황자의 미간이 저도 모르게 찌푸려졌다. 그러나 한안에게 냉정함 외에 다른 감정은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의 두 여종에게서도 아무런 단서가 보이지 않으니 그들이 속사정을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7황자의 의심은 오히려 더 깊어졌으나 한안의 태도만으로는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한안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늘의 일은 누군가 그녀를 위해 특별히 연출한 공연이니, 자신은 당연히 즐겁게 관람할 작정이었다. 아무런 대가를 지불할 필요 없이 좋은 구경을 할 수 있고 또 자신이 바라는 목적도 달성할 수 있으니 어찌 즐겁지 않을까. 그녀가 해야 할 일은 구경을 하면서 적절한 시기에 몇 마디 말을 하여 일이 커지도록 조장하는 것뿐이었다.

향이 반도 타지 않았을 때, 장사양이 미 이낭의 방에서 나왔다. 사람들은 연달아 앞으로 나가 물었다. 장사양은 침울한 얼굴로 대강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미 이낭 뱃속의 아이는 유산된 것이 확인되었고 산파의 말이 남아가 확실했다 한다. 장사양은 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슬펐다. 그는 대를 이을 아들을 중시하는 사람이라 미 이낭 뱃속의 아이에게 무한한 희망을 걸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원의 말로는 미 이낭이 유산한 원인을 알아낼 수가 없다 했다. 이유 없이 태아가 떨어져 나왔다는 것이었다. 처음에 장사양은 벌컥 성을 냈고 의원이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인다고 여겼다. 그러나 산파와 미 이낭 측근 여종의 말을 듣고는 장사양도 ‘이것이 하늘의 뜻이 아닐까’라고 믿게 되었다. 설마 하늘이 그에게 아이를 허락하지 않는 것인가?

미 이낭은 침상에 누워서 줄곧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내 아이를 뺏어가지 마, 이 악귀들! 가버려!”

미 이낭은 처절하게 외쳤다. 의식을 거의 잃었음에도 외치는 소리는 장사양의 심장을 쥐어짜고 살이 떨리게 만들었다.

주씨가 얼굴빛이 창백해진 장사양을 보고 앞으로 나왔다.

“노야, 걱정하지 마시어요. 듣자 하니 귀신이 해코지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7전하께서 방금 전에 경성에서 가장 명망 높은 정허 도사를 찾아서 이곳으로 오게 하라고 분부하셨어요. 정말 무슨 귀신이나 요괴가 있다면 처리할 수 있을 거예요.”

“정허 도사?”

장사양은 순간 당황했지만 7황자를 향해 예를 행했다.

“감사합니다, 전하.”7황자는 손을 저어 신경 쓸 것 없다는 표시를 했다.

잠시 후, 젊은 사내종 하나가 도사를 이끌고 급히 걸어 들어왔다. 도사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서둘러 예를 행했다.

도사는 산양 수염을 기른 매우 야윈 중년 남자였다. 도사가 입고 있는 잿빛 도포를 세심히 살펴보면 가장자리를 금사로 수놓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의 행동에는 신선의 풍채와 도인의 골격이 드러났다. 그러나 그 얼굴에서는 바른 기풍과 위엄을 찾을 수 없었다. 쥐를 닮은 눈과 매부리코에는 사악함과 음산함이 가득했다. 그는 대주씨와 장어산의 몸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입맛을 다시는 듯했다.

주씨가 서둘러 앞으로 나왔다.

“이 분이 바로 정허 도사님이군요. 정허 도사께 폐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정허 도사는 손을 가슴 앞에 모아 인사를 했다.

“사정은 빈도(貧道: 도사가 자신을 낮추어 일컫는 말)가 이미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조급해 마시고 안심하십시오. 이 집 안에 만약 정말 마귀나 요괴, 귀신이 해코지하고 있다면 제가 그것들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초조해 마십시오.”

장사양이 서둘러 물었다.

“도사의 말씀이 지극히 옳소. 그럼 어찌해야겠습니까?”

정허 도사는 옅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장씨 세가 분께서는 앞으로 나와서 서주시기 바랍니다.”

당연히 여종들은 포함되지 않는 말이었다. 주씨 자매, 장어산, 한안과 장사양에게만 해당 하는 말이었다. 장한명은 순창무관에서 무예를 익히고 있었고 만 이낭 모녀는 애초에 이 자리에 나오지도 않았기에 해당 사항이 없었다.

도사는 두 손을 합장하며 말했다.

“부중의 소저께서는 나와서 서주십시오.”

장어산은 의혹이 일었으나 주씨와 눈빛이 닿은 후 바로 안심하고 자연스럽게 앞으로 걸어나갔다. 이번에야말로 한안이 말썽에 휘말릴 것은 분명했기에 한안을 향해 나중을 기대하라는 표정을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허 도사는 머리도 들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출가를 기다리고 있는 규방 소저께서는 나와서 서주십시오.”

오직 한안, 한 사람만 남았다.

정허 도사는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한안의 용모를 제대로 본 순간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한안은 최근 키가 좀 더 자란 탓인지 소녀의 부드러운 아름다움이 꽃피고 있었다. 장어산의 아름다움과 요염함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청초한 면에서는 남들보다 우월했다. 게다가 가까이에서 보면 피부는 옥처럼 희고 깨끗하며, 이목구비는 정교하고 섬세하였고, 새까맣게 빛나는 눈동자는 맑고 투명해서, 시일이 지나면 대종의 손꼽히는 대미인이 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의 몸에서 자연스럽게 풍기는 고귀한 기운이었다. 공주가 와도 뒤지지 않을 고귀함이었다. 단순히 평범한 거래라고 여겼는데……. 정허 도사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이렇게 뜻밖의 수확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한안은 도사가 자신을 훑어보도록 내버려 두었다. 하지만 도사의 눈빛은 지나치게 음란하고 사악했다. 그 음란한 눈빛은 마치 그녀를 마음대로 능욕할 수 있는 여자로 여기는 듯했다. 한안은 고개를 들어 정허 도사를 향해 우아하게 생긋 웃었다.

“도장, 소녀에게 무슨 잘못된 것이 있나요?”

장사양은 이미 조급하여 한시도 참을 수가 없었다. 서둘러 따라서 물었다.

“맞소, 도장. 아무래도 무언가 발견한 것이오?”

정허 도사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한안을 보더니,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빈도가 보기에 문제는 이 소저의 신상에 있습니다.”

이 말이 나오자 주위가 순간 왁자지껄 소란스러워졌다. 주씨가 웃으며 말했다.

“도사, 무슨 뜻인가요?”

정허 도사는 한안의 주위를 맴돌았다.

“이 여인은 명운이 기이하고 독특한 데다가 출가 전의 몸이라 악신을 불러들이기 쉽습니다. 아이고…….”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애석해하는 듯했다.

“부중에 액운이 하늘을 찌를 듯 충만합니다.”

장사양이 한안을 쳐다보는 눈빛에는 혐오로 가득했다. 대주씨는 당황하지도 서두르지도 않고 물었다.

“도사의 말씀이 정말인가요? 그럼 해결 방법이 있나요?”

“그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정허 도사가 자신의 보잘것없는 수염을 문질렀다.

“그저 그녀가 저를 따라 도관에 가기만 하면 됩니다. 저에게 소저의 액운을 바꿀 방법이 있습니다. 액운을 제거하면 자연히 만사가 크게 길할 것입니다.”

장사양은 듣자마자 서둘러 말했다.

“어서 그 애를 데리고 가시오.”

버리지 못해 안달인 모습이라니. 장사양에게서는 한안을 걱정하는 낌새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지금 그의 눈에 한안은 악귀로만 보였다. 가까이하면 액운이 옮겨붙을 듯했다.

대주씨도 덩달아 따라서 말했다.

“4소저, 부중의 안녕을 위하여 도사를 따라가는 편이 낫겠어요.”

“그래요. 소저 한 사람 때문에 우리 모두의 목숨이 위험하니까요. 알다시피 미 이낭이 유산한 것도 그 악귀 때문인지 몰라요.”

주씨가 기쁨을 담아 말했다.

한안은 말이 없었다. 장어산이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교태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넷째 동생은 자비로운 마음을 지녔잖아. 평소에 귀신을 가장 무서워하기도 했고 도사를 따라간다고 어떻게 될 리 있겠어? 설마 일부러 부에 남아서 말썽을 일으키려는 거야?”

사람들이 제각기 떠들어대는 가운데, 한안이 마침내 고개를 들고 옅게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온화하고 사랑스럽게 웃었다. 기에 눌린 기색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평범한 우스갯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다니 모두 영문 모를 한기를 느꼈다.

한안의 눈빛이 사람들의 몸 위를 천천히 훑고 지나갔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웃음으로 휘어져 있는 눈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비웃음이 담겨 있어서 보는 사람의 심장을 두근거리고 살이 떨리게 했다.

한안은 손가락을 내밀어 흔들었다.

“도사의 말은 내가 악귀를 끌어들였다는 건가요?”

정허 도사의 눈에는 한안의 희고 보드라운 얼굴과 정숙하고 예쁜 몸매만 남아 있었다. 도사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사를 따라가면 불길한 기운을 없앨 수 있다는 말이죠?”

그녀의 웃는 얼굴은 한층 더 찬란해졌다.

정허 도사는 대주씨와 시선을 한 번 마주치고는 거드름을 피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렇군요.”

한안이 경쾌하게 말했다.

“내가 듣기로 덕망이 높은 사람도 사람의 사주를 살펴보아야만 운수를 점칠 수 있다 하였습니다. 하지만 도사는 능력이 출중해서 사주를 볼 필요도 없이 나를 몇 번 본 것만으로 운수를 충분히 알 수 있다고 하니 정말 좋은 재주네요.”

갑자기 한안의 말투가 엄중해지고 눈빛이 깊어졌다. 조금 전 얌전하고 온순한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 도사는 남에게 금품을 받고 대신해서 일 처리를 해주는 사람이기에 한안이 말하는 것을 듣자 일순간 겁을 먹었다.

한안은 그의 표정 변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도사는 모르는 모양인데 나는 머지않아 현청왕비가 될 거예요. 황실 귀족이신 왕야와 며칠 함께 지냈음에도 그 불길한 기운을 아직 녹여버리지 못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네요. 도사의 말에 따르면 왕야가 지닌 황가 위엄도 도사의 능력에는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군요. 아니면 내가 왕야를 오시게 할까요? 왕야께서 나와 함께 지내셨으니 아마도 불길한 기운이 옮으셨겠지요. 도사가 우리를 위해 악귀를 쫓아주는 게 어때요?”

한안은 고개를 돌렸다. 입가에 머금은 미소는 담담하였으나 정허 도사의 눈에는 비할 데 없이 무섭게 보였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요.”

도사는 가볍게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

“왕야께서는 천금의 몸이시니 자연히 사악한 기운이 침범하지 못하지요.”

이 소저가 현청왕비라고 알려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권세가 하늘을 찌를 정도인 현청왕이 나타나 자신의 내력을 알아차린다면 분명 큰 화를 당하게 될 것이다. 그는 머리를 잽싸게 굴려 웃으며 말했다.

“소저의 말씀이 지극히 일리가 있습니다. 빈도가 비록 좀 재주가 남다르기는 하나 만에 하나 실수가 없도록 소저께 생년월일시를 주시기를 청합니다.”

한안은 옅게 웃으며 소매 속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이 위에 있는 것이 내 생년월일시예요. 본래 향을 올릴 때 쓰려던 것인데 생각지도 못하게 지금 유용하게 쓰이네요. 한 번 살펴보시지요.”

정허 도사는 손수건을 받더니 미간을 찌푸리고는 한참이 지나서야 비로소 고개를 저었다.

“소저……. 이것은……. 아이고.”

장사양이 참지 못하고 조급히 물었다.

“왜 그러는 것이오?”

도사는 마치 입을 열기 어려운 듯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도사의 태도는 주위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어올렸다. 한안도 웃으며 말했다.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냥 말해도 무방합니다.”

정허 도사가 길게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소저께서는 귀인의 명운이십니다. 하지만 부친과 상극이고 지아비와 상극이라 부모와 남편에게 해를 끼쳐 죽음으로 몰아갈 팔자, 백호의 명운을 타고나셨습니다. 백호는 대흉이라 가택이 안녕하지 못합니다. 에고…….”

도사는 말을 마친 후에 연거푸 고개를 저었다.

주위 사람들은 도사의 말을 듣자마자 즉각 한안에게서 몇 걸음 떨어졌다. 마치 그녀가 역병인 것처럼. 급람과 주홍은 도사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 말이 없었다. 위여풍은 복잡한 시선으로 한안을 보았다. 그도 뒷걸음질 친 사람들 속에 있었다. 그는 다행스럽다 여겼다. 한안이 지아비와 상극이라니. 만약 자기가 그녀를 처로 맞아들였다면 지금 운수가 사나운 것은 바로 자신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부운석에게 곧 닥칠 일을 생각하니 위여풍은 흥미진진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싫어하긴 했지만 한안이 자신과 상극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어쩐지 자신의 모든 일이 순조롭지 않더라니. 이제 보니 한안의 살성(煞星)이 자신의 앞길을 방해했던 것이다. 그는 한안을 즉각 죽여 버리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정도였다.

한안은 주위 사람의 움직임을 냉랭하게 보고 있었다. 사람은 모두 이렇다. 사람들은 아무 이유도 없이 남을 헐뜯는 말을 쉽게 믿었다. 그들은 그것이 중상모략이라고 해도 직접 눈으로 보기라도 한 것처럼 믿곤 했다. 평소에 사이가 좋던 사람이라 해도 상대방이 자신이 바라는 것을 줄 수 없거나 혹은 자신의 이익에 손실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조금의 미련도 없이 한 발로 걷어차 버리는 것이다. 얼마나 이기적이고 얼마나 메말랐는가.

그녀는 돌연 웃었다.

“도사가 말한 것은 정말인가요?”

정허 도사가 막 대답을 하려는데 방 안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저리 가! 너희 이 악귀들! 저리 가!”

소리를 지른 사람은 미 이낭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날카로워 귀에 거슬렸다. 환한 낮임에도 무서운 것을 본 것처럼 사람들의 온몸에 오한이 일게 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사람들은 이 자리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것이 그녀를 해코지하고 있는지 점점 더 궁금했던 것이다.

대주씨가 정허 도사를 보며 말했다.

“도사, 저것은…….”

주씨도 따라서 앞으로 나왔다.

“도사, 악귀들을 쫓을 방법이 있습니까?”

“맞소, 맞아.”

장사양은 정허 도사를 완전히 신임하고 있었다. 그는 부중에 악귀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자 불안해졌고 부중의 악귀만 내쫓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한순간 한안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정허 도사는 눈을 감고 엄지로 다른 손가락을 짚어가며 셈을 해보다가 갑자기 눈을 떴다.

“제가 알아냈습니다. 이번 재액은 전부 사람으로 인한 것입니다. 누군가 부중에서 사악한 기운을 불러들이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이 때문에 미낭이 사악한 기운에 상하신 것입니다.”

“도사의 말뜻은 누군가 고의로 미 이낭을 해쳤다는 건가요?”

대주씨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 사람이 누구죠?”

정허 도사가 고개를 흔들었다.

“빈도도 모릅니다. 부중에 있다는 것만 압니다.”

“그렇다면 간단하죠. 수색을 해보면 되겠죠.”

주씨가 차분하게 말했다.

“아주 좋습니다. 요사스러운 그 물건은 사람의 주목을 끌 것이니 한눈에 바로 알아낼 수 있습니다.”

줄곧 수수방관하고 있던 7황자가 웃었다.

“여봐라, 장부의 방을 모두 수색해라. 한 곳이라도 놓치면 안 된다.”

7황자 수하의 시위들이 대답과 동시에 가려 하는데 한안이 손을 들었다.

“기다려라.”

7황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장 소저, 무슨 일이 있느냐?”

한안이 옅게 웃었다.

“7전하께서는 오늘 손님으로 오셨으니 수하의 사람이 충분하지 않겠지요.”

그녀가 박수를 치자 갑자기 시위 차림의 남자 하나가 나타났다.

“목암, 자네는 가서 전하의 사람들과 함께 수색을 하게. 작은 귀퉁이 하나 놓쳐서는 안 될 것이야.”

목암은 부운석의 비밀 호위로서 비밀리에 활동하는 시위 몇을 부릴 수 있다는 것을 한안은 알고 있었다.

“4소저, 이것은…….”

대주씨가 당황해서 입을 열었다. 이 사람들은 그녀의 계획 안에 없었던 것이다.

“아, 목암이요?”

한안은 대주씨를 흘깃 보고는 7황자의 음험한 눈을 마주하며 천천히 말했다.

“자객의 암살시도가 있던 후부터 제가 또 위험을 만날까 걱정이 되셨는지 왕야께서 특별히 자신의 비밀 호위를 붙여 주셨어요. 그 김에 시위 몇에게 저를 보호하라고 하셨지요.”

그녀는 온몸이 굳어진 정허 도사를 향했다.

“도사는 마음 놓아요. 이 시위들은 특수 훈련을 거친 사람들이에요. 왕야의 사람들은 세심하니 어느 곳도 놓칠 리 없어요. 다른 꿍꿍이가 있는 그런 사람들은 반드시 잡힐 거예요.”

“네, 네.”

정허 도사는 억지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목암에게 일을 맡긴 한안은 마음을 놓았다. 7황자의 수하들만 수색하게 한다면 흉계를 품은 사람으로 자신이 지목될 게 뻔했다. 그에게 자신을 망칠 기회를 줄 수 없었다. 7황자의 얼굴빛이 찌푸려졌다. 아마 그도 한안이 이런 방식을 쓰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에게 알려줄 건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당신을 신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사람을 시켜서 증인을 삼으려는 거예요.”

7황자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방자한 말이었다. 지금까지 남에게 이런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는 7황자는 분노가 차올랐다.

장어산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주씨의 눈짓을 보고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대주씨는 줄곧 한안의 표정을 관찰하고 있었다. 조용히 한 자리에 서 있는 한안의 웃는 얼굴은 평온했다. 급람과 주홍조차 비할 데 없이 차분했고 당황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마음속에 불안이 넘실거렸다. 한안이 이 일을 미리 알았을 리 없다. 자신조차도 일이 이렇게 전개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이 국면을 설계한 사람도 전체 국면을 통제할 방법이 없는데 한안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아니면 설마 그녀는 이 상황을 만회할 무슨 방법이라도 있는 걸까?

<4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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