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16)

한안은 그녀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진 귀비 말이 네가 낯선 남자와 간통하는 것을 그녀가 보았다는구나.”

태후의 입가가 은밀한 미소로 휘어졌다. 그 미소는 자신만만하고 음침했다. 춥지도 않은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떨게 만들었다.

한안은 즉각 큰 소리로 외쳤다.

“억울합니다. 신녀는 지금까지 외간 남자와 불결한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황상, 고명한 판단을 하여 주십시오!”

황상은 입을 열지 않았다. 태후가 웃었다.

“너의 뜻은 진 귀비가 억울한 누명을 씌웠다는 것이냐?”

한안은 연거푸 고개를 저었다.

“감히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남과 간통했다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신녀는 지금까지 그런 짓을 한 적이 없습니다.”

황상이 그녀를 보았다.

“현청왕비, 대종 율령에 따라 여자가 간통죄를 저지르면 옷을 벌거벗기고 거리에서 조리돌림을 하며 심각한 자는 법정에서 때려죽인다.”

황상은 말을 잠시 멈추었다.

“너는 죄를 인정하느냐?”

한안의 표정에 냉소가 일었다.

“지금까지 그런 짓을 한 적이 없다고 말씀드렸는데, 어찌 죄를 인정하라 말씀하시는지요?”

강한 것에는 강하게 대응했고, 사리를 따지지도 않는 무지막지한 상대에게는 표정을 가장하는 것조차 귀찮아진 한안이었다. 자신의 태도가 너무 온순했기 때문인지 태후들은 자신을 함부로 능욕해도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는 줄로 여겼다. 정말 엄청나게 우스운 일 아닌가.

그녀는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게 높은 자리 위의 천자를 직시했다.

“세상만사에는 반드시 원인과 결과가 있는 법이지요. 만약 태후 마마와 황상께서 신녀가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여기신다면 증거를 내놓으시길 청합니다. 진 귀비는 간통한 일이 명확해도 그저 감옥에 갇혀 있을 뿐인데, 왜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신녀에게는 죄를 인정하라 요구하십니까?”

그녀의 맑고 투명한 눈동자 속에 조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진 귀비의 신분이 신녀보다 높은 이유로 받는 대우가 다른 것이라면 그럼 신녀는 할 말이 없습니다.”

“너…….”

황상은 말문이 막혔다. 그는 천자로서 일할 때 공평하고 바르게 세세한 것까지도 살펴서 놓치지 않는다고 자부해 왔다. 가장 싫어하는 것이 자신의 신하가 세도를 믿고 남을 괴롭히는 것이었다. 지금 한안의 말은 황상을 그런 무리에 집어넣는 꼴이었으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태후가 손을 휘저었다.

“황상의 일처리는 공정하고 청렴결백하다.”

그녀의 위엄에 찬 기색이 정면으로 쏟아졌다.

“하찮은 5품 관원의 딸이 이렇게 황상을 추궁하다니. 천자의 위엄을 안중에나 둔 적이 있느냐?”

한안은 희미하게 웃었다.

“태후 마마께서는 아마도 잊으셨나 봅니다. 신녀는 그저 일개 5품 관원의 딸이 아닙니다. 신녀는 현청왕비입니다.”

그녀의 입가가 살짝 치켜 올라갔고 목소리는 경쾌하고 발랄했다.

“아니면 태후 마마께서는 현청왕비의 이름이 5품 관원의 딸과 같다고 여기시는 것인지요?”

황상은 살짝 눈을 가늘게 떴다. 눈앞의 이 단순해 보이는 어린 아가씨가 그 오만하고 차가운 황동생 부운석과 똑같음을 알아차렸다. 태후 같은 백전노장을 상대로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거나 물러서는 부분이 없었다. 그녀의 말은 구구절절이 깊은 뜻이 있었다. 기교 있게 말하지도 않고 심지어 에둘러 말하지도 않았다. 바로 이렇게 상대에게 종횡무진 돌진하여 박살을 내려 했다.

살기가 가득했다.

표정을 알아볼 수 없는 황상은 물론이고, 여전히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는 태후, 그리고 웃는 눈이 휘어져 있는 한안까지 누구도 말이 없었다. 금란전 안은 사람의 뼛속까지 뚫고 들어갈 정도로 한기로 가득했다.

한참 후, 태후가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바람이 없다면 물결이 일 리가 없지. 현청왕비가 자신이 간통한 적이 없다 하니 자신의 순결을 증명할 물건을 내놓을 수 있겠지.”

한안 역시 미소로 태후를 상대했다.

“태후의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수궁사.”

태후는 찻잔을 바라보던 시선을 한안에게 두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수궁사. 네가 만약 순결하다면 당연히 수궁사가 남아 있겠지.”

수궁사는 여자의 정조를 검증하는 약물이었다. 수궁사를 순결한 여자의 몸에 바르면 사라지지 않지만, 일단 남자와 교합하면 자취도 없이 사라진다고 한다. 이런 특성을 사용하여 처녀의 정조를 시험해 왔다. 대종의 여아들은 태어나면서 바로 수궁사를 찍어야 했고 출가하여 지아비를 따르게 되면 그제야 수궁사가 사라졌다.

태후가 수궁사를 검사하자 하는 것은 결과가 어찌 되었든 간에 공공연하게 언급한 것만으로도 한안에게는 막대한 치욕인 셈이었다. 검사 자체야말로 그녀의 정결함을 믿지 않는 것이고, 그녀의 품행을 믿지 않는 것이었다. 성격이 강직한 여자라면 아마 죽음으로써 대응했을 것이다.

한안이 꼼짝도 하지 않자 태후 입가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태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현청왕비, 감히 할 수 있겠느냐?”

이제 보니 이럴 작정이었구나. 한안은 속으로 웃었다. 진 귀비가 자신에게 쓴 춘약은 희귀한 품종이었던 모양이다. 한안 스스로도 약성이 맹렬하다고 느꼈다. 태후는 한안이 해독된 것으로 보아 분명 남자와 교합하였을 거라 여긴 것이다. 수궁사가 없으면 무슨 말로도 설명하기가 어려워졌다. 만약 검사를 받아 처녀가 아니라고 밝혀지면,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간통했다는 죄명이었다. 부운석이 한안과 관계를 가진 것이 자신이라고 말한다 해도, 부운석도 치욕적인 비웃음을 당할 뿐이다. 대종에서 혼례 전 두 사람이 관계를 가지는 것은 간통과 같았기 때문이다. 신분이 낮은 시정잡배와 기방 여자들이나 저지르는 짓이라 취급했다.

태후의 수법이 정말 악랄하구나. 부운석이 인정하면 그를 진창에 빠뜨리는 게 되고, 만약 그 사람이 부운석이 아니라고 말하면 자신은 정조를 잃은 여자가 되어 영원히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아야 한다. 진퇴양난의 국면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까?

태후는 찻잔을 손에 들고 감상하고 있었고, 황상은 아무런 감정 없이 한안을 보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작정을 하고 왔다. 태후와 황상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태후는 그녀를 없애버리고 싶어서 지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진 귀비의 입을 빌려 악랄하게 자신을 물어뜯으려 했다. 자신이 놀라고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모습을 보려 했던 건가? 하지만 실망만 하게 될 텐데?

한안의 눈빛이 아주 잠깐 반짝였다. 그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마마, 신녀를 믿지 못하십니까. 신녀는 그런 짓을 한 적이 없습니다. 어째서 검사를 받아야…….”

태후 얼굴 위의 웃음기가 더욱 깊어졌다.

“어찌 너를 믿지 못하겠느냐? 애가가 너를 몹시 믿고 있으니 네가 순결을 증명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잖느냐. 황상, 말씀해 보세요, 맞지요?”

황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너는 바로 가서 수궁사가 있는지 없는지 검사를 받아라. 만약 없다면 짐은 너를 군주를 기만한 죄로 벌할 것이고 만약 있다면 죄가 없을 것이다.”

한안은 끊임없이 고개를 저었다.

“검사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신녀는 깨끗합니다. 이리 하시는 것은 신녀를 모욕하시는 것입니다. 태후 마마, 이러실 수 없습니다.”

태후는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현청왕비가 나이가 너무 어려 애가의 고심을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현청왕비를 데려가서 검사해라.”

“네.”

곁의 노 궁녀 하나가 앞으로 걸어와서 한안을 세차게 끌어당겼다. 노 궁녀의 힘은 아주 세서 한 번 끌어당겼을 뿐인데 바닥에 꿇어앉아 있던 한안이 비틀거리며 당겨졌다. 한안은 미친 듯이 고개를 저으며 공포에 떨 듯 외쳤다.

“안 돼, 나 안 가, 아!”

몸집이 큰 궁녀 몇 명이 더 다가와 한안을 반쯤 끌고 반쯤 잡아당기며 병풍 뒤로 끌고 갔다.

황상은 한안이 궁녀들에게 끌려가는 것을 보고 표정이 복잡해졌다. 부운석이 황상과 태후가 그의 어린 왕비를 이렇게 대한 것을 알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진 귀비의 일은 확실히 수상쩍었고 태후는 지금까지 자신을 속인 적이 없었다. 태후가 이렇게 한안에게 의심을 품고 있는 이상, 현청왕비는 의심해볼 만했다.

병풍 뒤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상은 참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궁녀들이 너무 심하게 대하는군요.”

아무리 그래도 연약한 몸에 어리광을 부리며 자란 어린 아가씨였다. 아직 급계도 하지 않았으니 지금까지 이런 일을 당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만약 정말 억울한 누명을 쓴 것이라면 일생일대의 치욕일 것이다.

“황상은 마음이 너무 여리오.”

태후는 차분하고 느긋하게 말했다.

“게다가 애가가 보기에 현청왕비는 담이 아주 크니 이 정도의 육체적 고통쯤은 안중에도 두지 않을 것이오.”

황상은 태후의 말 속에 숨은 뜻이 있음을 알아들었다. 줄곧 부처처럼 자비롭던 모후가 조금 생소하게 느껴졌다.

병풍 뒤의 한안은 몸집이 큰 궁녀들에게 눌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한 궁녀가 그녀의 겉옷을 벗겼다. 한안은 몸부림치며 소리쳤다.

“나를 놓아줘. 건드리지 마!”

노 궁녀는 태후를 오랫동안 따른 터라 상전 무서운 줄 모르는 늙은이였다. 한안이 비협조적인 것을 보고는 비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피부가 곱고 부드러우니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늙은 노비가 나이가 많아 눈이 흐릿하거든요. 왕비에게 부상이라도 입히면…….”

한안은 표독하게 말을 뱉었다.

“이 간교한 노비가 감히 본왕비를 위협하는구나. 어서 나를 놓아라. 왕야께서 아신다면 너희 목이 떨어지게 하실 것이다!”

노 궁녀는 웃으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왕야께서 왕비가 정조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아시면 다시는 왕비를 원할 리 없겠지. 왕비가 남과 간통한 일이 드러난 이상, 영준하고 품위 있는 왕야께서 구태여 너 같은 천한 년을 보실 필요가 있겠어?”

그녀의 말소리는 작고 낮아 바깥에 있는 황상의 귀에까지 들릴 리 없었다. 그러나 한안은 그녀가 부운석에 대해 말할 때 얼굴 위의 표정을 보았다.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늙은 여자가 설마 부운석을 애모해서 자신을 학대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러나 연극은 여전히 계속되어야 했다. 한안은 분노하며 말했다.

“난 안 했어!”

노 궁녀는 이미 그녀의 마지막 옷을 벗기며 웃었다.

“네년이 구태여 속일 필요는…….”

노 궁녀는 마지막 속옷을 빼내고는 순간 멍해졌다.

설백의 곱고 부드러운 팔 위, 뚜렷한 새빨간 점 하나. 방금 막 새로 피어난 홍매화처럼 요염하고 단정하며 아름다운 점은 처녀의 행실을 나타내고 있었다.

정적이 내려앉은 가운데, 한안은 ‘흑’ 하고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바로 그때, 병풍 뒤로 한 사람이 난입했다. 주위의 궁녀들이 모두 놀라서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여기저기를 돌며 뛰어온 듯한 남자는 살을 엘 듯 차가운 한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한안을 끌어안아 일으키고는 자신의 피풍의로 배두렁이만 남은 그녀를 빈틈없이 꼭꼭 싸맸다. 그의 표정은 얼음처럼 차가워 누구든 그를 보고는 몸서리를 칠 수밖에 없었다. 수려한 이목구비에는 옅은 살기가 모여 있었다. 부운석이 고개를 숙이고 한안과 마주한 찰나, 눈빛이 무한히 따뜻하고 부드럽게 바뀌었다.

“괜찮다.”

한안은 그의 옷 앞자락을 꽉 움켜쥐고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을 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따뜻한 품 안에 있으니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안전한 느낌이 들었다.

부운석은 그녀를 끌어안고 큰 걸음으로 병풍 밖으로 나갔다. 황상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부운석이 문을 박차고 들어와 두말 않고 바로 병풍 뒤로 들어가서는 어린 왕비를 끌어안고 나왔다. 부운석이 일의 순서를 따지려는 것이면 어찌하면 좋을까.

태후는 부운석 품 안의 한안을 보고 있었다. 부운석의 피풍의 안에 웅크리고서 머리만 내놓은 한안은 두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한 것이 억울하고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궁녀들이 걸어 나왔다.

“결과가 어떠하냐?”

태후의 눈빛이 은밀해졌다.

노 궁녀도 정신이 없었다. 분명 태후께서 현청왕비 몸에 붉은 점은 없을 거라고 말하지 않았나? 그러나 붉은 점은 분명히 있었다. 현청왕비에게 무례를 범했으니 왕야가 죄를 물으면 자신은 머리를 보존할 수 있을까. 시름에 잠긴 노 궁녀는 바로 말을 하지 못했다.

“짐이 네게 묻겠다. 결과는 어떠하냐?”

황상은 부운석의 얼굴빛이 갈수록 나빠지는 것을 곁눈으로 보고 참지 못하고 급히 물었다. 그도 결과가 몹시 신경 쓰였다. 노 궁녀가 어렵사리 입을 여는 게 보였다.

“왕비는…… 여전히 처녀의 몸입니다.”

태후가 들고 있던 잔이 바닥에 떨어지며 물방울이 튀어 옷자락에 뿌려졌다. 그녀는 그런 것에 신경 쓸 새 없이 그저 죽일 듯 한안을 응시했다.

한안은 큰 소리로 울며 외쳤다.

“제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어요. 태후 마마와 황상께서 저를 믿지 않으신다면 차라리 저를 죽이시는 편이 나았어요. 장씨 세가에 치욕을 주고 왕야께도 치욕을 주었으니……, 흐흑.”

어린아이 같은 표현이었다. 그러나 황상은 그 말에도 간담이 서늘했다. 부운석이 추궁하지 않는다면 그런대로 다행일 테지만, 그가 추궁하려 한다면 한안의 말은 불에 기름을 들이붓는 것과 같았다. 아마도 부운석은 순순히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부운석은 담담하게 황상과 태후를 보고는 차갑게 말했다.

“왕비가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황상과 모후의 의심을 받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태후는 한안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바로 대답했다.

“운석, 애가가 이리 한 것은 너를 위해서였다. 너의 왕비가 결백하지 못하다면 너도 체면을 잃을 것이고…….”

한안은 부운석의 품속에서 발버둥을 쳤다.

“어찌하여 감옥에 있는 사람의 말만 들으려 하십니까? 이런 더러운 누명을 한안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제 위신을 모두 잃었으니, 왕야, 저를 내치십시오.”

그녀의 즉흥 연기는 물이 올랐다. 황상의 검푸른 얼굴빛을 보니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후의 얼굴빛으로 말하자면 더욱 근사했다. 틀림없으리라 여겼던 일이 갑자기 불확실해졌으니 과연 무슨 기분일까.

부운석이 한안을 감싸고 위로하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모습에 황상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황상을 마주하는 부운석의 눈에는 따뜻함과 부드러움은 하나도 남김없이 완전히 사라졌고 오직 엄숙한 살기뿐이었다.

“모후께서 눈이 예리하시어 세세한 것도 놓치지 않으시는군요. 소자도 진 귀비의 일이 의심스럽습니다. 이 사안은 소자가 심리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중형을 가하면 진 귀비가 반드시 다른 이야기를 내놓으리라 믿습니다. 예를 들면 귀비의 생일 당일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 말이지요.”

“운석, 이런 일을 네가 언제 해본 적이 있느냐. 형부에 맡기면 그만이란다.”

태후의 목소리는 자애로웠지만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모후는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부운석이 담담하게 말했다.

“소자는 군영에서 여러 해 지냈습니다. 적의 포로가 솔직한 말을 실토하게 하는 방법이 108가지나 있습니다.”

부운석이 수단을 쓴다면 아마 사람이 살 수도 죽을 수도 없게 할 거라는 것을 한안은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 진 귀비는 응석받이로 자라 잔혹한 형벌을 견딜 수 없을 게 확실했다. 있는 그대로 자백하게 되면 태후와의 관계를 벗기 어려울 것이다. 부운석의 압박에 태후의 얼굴빛이 변했다.

“운석, 이 일에 네가 끼어들면 안 된다.”

태후의 말투는 좀 더 강경해졌다. 부운석이 그녀의 약점을 낚아챌 기회를 주지 않겠다는 것이 명확했다.

황상은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를 알아차리고 일순간 난처했다. 한쪽은 자신과 물보다 진한 피를 나눈 친형제이고, 한쪽은 길러준 은혜가 있는 태후였다. 어느 쪽도 상처를 입히고 싶지 않았다. 황상은 평정을 되찾고 간신히 말했다.

“운석, 짐이 네게 약속하마. 이 일은 반드시 네게 해명을 할 것이다. 오늘 일은 짐이 정당치 않았구나. 네게 잘못을 사죄하겠다.”

한안은 부운석의 품속에 웅크리고 있어서 다른 사람들은 그녀의 표정을 명확히 볼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생각했다. 존귀한 황상이 부운석에게 이처럼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잘못을 사과하는 것을 보니 바깥에 떠도는 소문이 거짓이 아닌 모양이었다. 황상이 부운석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진짜였다. 그러나 태후와 부운석의 관계는 대단히 미묘했고 이상했다.

부운석이 담담하게 말했다.

“미천한 신하는 그 사죄를 감히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장부가 되어 자기 처조차 보호할 수 없다니 천하의 본보기라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황상께 청하오니 신의 관직을 삭탈해 주십시오. 신은 다른 이들을 대면할 면목이 없습니다.”

미적지근하게 황상의 말을 도로 밀어내는 부운석을 보며 한안은 웃고 싶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부운석에게 갈채를 보냈다. 공공연하게 황상의 사과를 거부하다니. 황상의 눈빛이 한안에게로 떨어졌다. 한안은 당황한 체하며 얼굴을 부운석의 품속에 파묻었다. 가소롭군. 내가 중재해 줄 것이라 생각했나? 황상도 장한안을 너무 얕잡아 본 것이리라.

황상은 부운석의 관직을 무를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상황이 난처하니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경솔한 태후에게 화가 나고, 한안의 눈치 없음을 원망했다. 일은 그녀 때문에 일어났는데, 중재하는 말 몇 마디도 할 줄 모른다니. 황상은 한숨을 내쉬었다.

“짐에게 말해 보아라. 어찌해야 네 화가 풀리겠느냐?”

부운석은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황상께서 왕비에게 상방보검(尙方寶劍)을 내려주시기를 청합니다. 이 검을 보는 것은 황상을 뵙는 것과 같으니 누구도 감히 그녀를 어쩌지 못하겠지요.”

한안은 멍해졌다. 부운석이 이런 요구를 꺼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녀를 생각하는 그의 마음 씀씀이가 보여 한안은 마음속에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확실히 상방보검만 있다면 태후가 사납게 굴고 싶어도 일정 부분 참아야 할 터였다. 적어도 사람들의 앞에서는 대놓고 그녀를 괴롭힐 수 없겠지. 하지만 상방보검은 공을 세운 신하나 지대한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나 하사하는 것으로 최고의 영광을 상징했다. 한안은 한 일이 아무것도 없었고 신분 또한 낮았다. 아무 이유 없이 좋은 물건을 얻을 수는 없었다. 한안은 조금 머뭇거렸다.

“무엄하다!”

태후가 노하여 호통을 쳤다.

“운석, 분별없이 구는구나. 현청왕비는 나라에 보탬이 된 공이 전혀 없는데 어찌 상방보검을 얻을 수 있단 말이냐! 네가 황가의 존엄을 어린애 장난으로 여기고 있는 게냐?”

태후는 표독스럽게 한안을 노려보았다.

한안은 태후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한안의 입가가 보일 듯 말 듯 미소로 휘어졌다. 한안의 머리 위로 부운석이 말하는 것이 들렸다.

“소자가 감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만약 황상이 승낙하지 않으신다면 소자도 방법이 없습니다. 바깥이 지나치게 흉흉하니 소자는 그저 관직에서 물러나 집에서 왕비나 보호해야겠습니다.”

그는 아무런 감정 없이 태후를 한 번 보았다.

“왕비의 나이가 어려서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하기 쉽습니다. 바로 오늘 황상과 태후 마마 앞에서 이런 일을 당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녀가 무슨 일을 당했다는 것이냐?”

태후는 노여움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녀는 황상이 정말로 상방보검을 부운석에게 줄까 걱정이 되었다. 절대 피해야 할 일이었다.

“애가는 그저 그녀가 처녀의 몸인지 아닌지를 검사하려 했을 뿐이다.”태후도 모르게 어투가 차갑고 딱딱해져 있었다.

한안이 볼 때 지금이 기회였다. 그녀는 마른기침을 한 번 했다. 손 위 비단 천에 어렴풋이 붉은 혈흔이 묻어났다. 그리고는 머리를 뒤로하고 바로 혼절하여 부운석의 품속에 쓰러졌다. 부운석은 얼음처럼 차가운 말 한마디를 던졌다.

“물러나겠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몸을 돌려서 큰 걸음으로 떠나려 했다.

황상은 부운석이 지금까지 자신의 말을 철회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 가면 영원히 다시 못 볼 듯한 마음에 서둘러 그를 불렀다.

“게 섯거라!”

부운석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황상이 다시 외쳤다.

“상방보검이야 주면 그뿐이다. 관직을 물러나서는 안 된다!”

부운석의 발걸음이 그제야 살며시 멈추었다.

“감사합니다.”

그는 예를 올리고 대전을 나섰다.

한안은 그야말로 웃음이 터져 나오려 했다. 이렇게 대놓고 황상을 협박하다니.

“왕야, 정말 고명하십니다. 하하하!”

한안을 안고 마차에 오른 부운석은 그녀를 옆에 앉혔다. 붉은 배두렁이 하나만 입고 있던 한안은 거북한 마음에 서둘러 몸을 팔로 가렸다. 부운석은 피풍의를 그녀에게 입혀주었다.

“제멋대로 굴긴!”

한안은 그를 응시했다.

“제가 언제 제멋대로 굴었어요!”

오늘의 일은 정말 아슬아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태후가 이렇게 공공연히 나설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동시에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자신과 부운석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춘독이 풀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태후의 행동을 보면 그 춘독은 보통 사람이 풀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은데. 누가 제 독을 푼 거죠?”

부운석은 그녀의 가슴 앞에 있는 끈을 꼭 묶어 주었다.

“어의.”

아, 어의라면 의술이 출중해도 이상할 게 없지.

“어째서 나를 기다리지 않고 궁에 들어갔느냐?”

한안은 당황했다.

“설마 성지를 거역해야 했다는 건가요? 그래도 사람을 시켜서 당신에게 알리게 했어요. 당신이 들으면 궁에 올 게 확실했고 그러면 황상도 당신 앞에서 저를 어쩌실 리는 없으니까요.”

“만약 내가 궁에 들어가지 않으면 어쩌려고?”

부운석의 손가락이 살짝 멈칫했다.

한안은 이상하다는 듯 그를 보았다.

“궁에 들어오지 않는다고요? 그럴 리가요. 당신이 저를 내팽개쳐 둘리 없잖아요.”

말을 마치고 한안도 스스로가 놀라웠다. 어느 틈에 부운석을 이렇게 신뢰하게 되었나. 그가 있기만 하면 자신은 괜찮을 거라고, 그가 자신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기만 하면 즉시 자신을 구하러 올 거라고 믿는 지경에 이르렀다.

“왜 피를 토했지?”

한안은 그가 말을 하는지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부운석이 그녀가 쥐고 있던 손수건을 빼냈다. 손수건 윗면에 혈흔이 조금 있었다. 한안은 웃었다.

“이것은 제가 이전에 얻은……. 괜찮아요.”

부운석이 불만스럽다는 듯 입술을 약간 오므리며 말했다.

“위험한 곳은 가지 말거라.”

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채봉전 안.

찻잔이 깨지는 소리가 울렸다.

태후는 연탑 위에 비스듬히 기대어 탁자 위의 향로를 보고 있었다. 눈동자는 향안의 불빛처럼 어렴풋이 불타올랐다. 오늘 노 궁녀는 황상의 명으로 곤장 50대를 맞고 완세원(浣洗院: 세탁실)으로 쫓겨났다. 황상의 뜻이라고 말하였으나 부운석의 화풀이를 위함이었다. 그 노 궁녀는 태후를 십여 년 따랐는데 바로 이렇게 꺾이다니. 대단하다, 대단해. 장한안!

그녀의 흠을 잡기는커녕 자신의 심복을 잃었다. 장한안의 연극에 황상까지 속아 넘어가다니! 태후의 눈빛이 음침하고 싸늘해졌다. 자신과 장한안은 뼛속까지 상극일 것이다.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 남기지 말아야 해. 어영부영 살려두었다가는 더 큰 원수가 될 것이다.

이전에는 그저 한안이 현청왕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혼을 좀 내주려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녀의 목숨을 원했다. 부운석은 태후 자신을 경계하고 있었고 거기에 장한안까지 더해졌으니 이리 새끼가 두 마리로다. 두 마리 모두 살려두면 안 될 것이다.

생각을 끝낸 태후는 비로소 말했다.

“귀비를 보러가자꾸나.”

진 귀비는 감옥에 갇힌 불과 하루 만에 딴 사람이 된 듯했다. 옷은 흐트러졌고 용모는 초췌해졌으며 온몸에서 악취를 뿜고 있었다. 황상은 진씨 세가 누구도 그녀를 보러 와서는 안 된다고 명을 내렸다. 그녀는 이곳에서 더럽고 추악한 일들을 맛보았다.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치욕적인 순간이었다.

태후를 본 그녀는 자신에게 희망이 있다고 여기며 옥문 앞으로 돌진해 왔다.

“태후, 구해주세요!”

태후는 그녀의 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애가가 왜 너를 구해주어야 하지?”

물에 빠진 사람이 마지막 구명줄을 잡은 것처럼 진 귀비는 아무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미친 듯이 태후를 향해 거듭 머리를 조아리며 이마를 바닥을 내리쳤다.

“태후, 저를 구해주세요. 저는 장한안 그 천한 년의 모해를 받은 것입니다. 태후께서는 반드시 저를 구할 방법이 있을 거예요. 반드시 있을 거예요, 그렇죠?”

태후는 그저 조용히 그녀가 발광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눈앞의 돌바닥 위에 옅은 피의 흔적이 나타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애가가 온 것은 그저 너에게 알려주기 위함이다. 황상이 명을 내렸다. 부부의 은덕을 생각하여 너를 용서하여 죽이지는 않겠다고. 다만 냉궁에 들어가면 영원히 궁문 밖으로 한 걸음도 나올 수 없다.”

정말 부부의 은덕을 생각한 것일까? 태후의 입가에 냉소가 떠올랐다. 진 시랑은 몇 년간 조정에 적지 않은 세력을 키웠고, 그 토대는 그리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이었다. 황상의 결정은 현 조정 상황을 고려한 것이었다.

진 귀비는 멍해져서 고개를 흔들었다.

“못 믿겠어요. 냉궁에 들어가서 더 이상 나올 수 없다니. 태후, 태후께서 장한안이 지위와 명예를 잃고 처절하게 타락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으셨어요? 저를 내보내 주세요, 태후!”

“애가는 너를 몹시 구해주고 싶다.”

태후가 그녀를 보았다. 눈빛이 차분했다.

“너는 애가를 위해 적지 않은 일을 처리해 주었으니. 다만…… 네가 운이 없구나.”

진 귀비는 망연해졌다. 감히 믿을 수 없어 고개를 저었다. 태후의 말이 죽음을 보고도 구해주지 않겠다는 것임을 알고 덜덜 떨며 말했다.

“제가 당신이 한 일들을 말할 것이 두렵지 않으세요?”

태후는 가볍게 웃었다.

“얼마든지 말하려무나. 믿어줄 사람이 있다면 말이지. 애가가 온 것은 그저 너를 마지막으로 한번 보아두기 위해서란다. 황천길에 도착해서 사람을 잘못 찾지는 말거라.”

진 귀비는 눈을 크게 뜨고 태후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미친 듯이 큰 소리로 외쳤다.

“나를 내보내 줘! 내가 아니야! 태후, 장한안, 너희가 나를 이 지경으로 해쳤어. 내가 귀신이 되어서라도 너희를 놓아주지 않을 거야!”

태후는 감옥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길을 안내하는 궁녀가 서둘러 등롱을 들었다. 그녀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속을 떠봤는데, 진 귀비는 그 일을 모르는 것 같았다. 잘된 일이었다.

진 귀비는 바닥에 쓰러지듯 앉았다. 온몸이 온통 진흙과 혈흔이었다. 이번에는 그 호색한 옥졸조차 오지 않았다. 진 귀비는 자기에게 이런 날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가장 낮고 천한 사람이 되어서 아무것도 가진 게 없고 상황을 만회할 기회조차 없었다. 황상이 자신을 냉궁에 넣으려 한다는 것을 생각하니 온몸이 끊임없이 덜덜 떨렸다. 황상의 총애가 육궁에서 으뜸인 지가 이미 여러 해였다. 계책을 세워 모든 것을 빼앗고 한 걸음 한 걸음 지금 이 자리까지 기어올랐다. 그러나 일개 5품 관리 딸인 장한안 때문에 이 지경까지 엉망이 되었다. 그녀는 부운석을 증오하고, 장한안을 증오했으며, 태후는 더더욱 증오했다. 태후가 모든 것을 부추겼고 자신을 제일 앞으로 밀어냈으며 쇠사슬에 묶여 감옥에 들어가도록 만들었으면서도 그녀를 구하지 않았다. 마차를 버려 장수를 구한다더니 자신은 버려진 마차였던 것이다.

진 귀비는 멍하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머릿속이 온통 텅 비었다.

“모비!”

목소리 하나가 그녀의 생각을 잡아 끌어냈다.

진 귀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7황자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얼굴은 음산한 감옥 안에서 유달리 밝고 환했다. 진 귀비는 순간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소칠!”

7황자는 음식을 건네는 작은 구멍을 통해 음식 바구니를 진 귀비에게 건넸다.

“모비, 고생하셨죠!”

진 귀비는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소칠, 너 어떻게 들어온 것이냐?”

“죄송해요, 모비. 제가 모비를 해쳤어요.”당초 한안을 모해하자고 한 것은 7황자가 꺼낸 일이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실수 때문에 진 귀비가 보복을 당해 이 처지가 된 것이다.

진 귀비는 고개를 저었다.

“너와 상관없는 일이다. 장한안과 부운석, 그리고 태후가 저지른 일이지.”

그녀의 눈빛에는 증오와 불쾌함이 가득했다.

“소칠, 반드시 모비를 위해 복수해다오!”

“소칠 알겠습니다.”

7황자는 진 귀비를 보았다.

“모비, 배가 몹시 고프시겠지요. 옥졸들은 본래 사람을 괴롭힐 줄만 압니다. 소칠이 가져온 음식을 맛보십시오. 모두 모비께서 즐겨 드시던 것들입니다.”

정교한 음식 바구니를 열자 맛난 음식 냄새가 코를 찔렀다. 다양하고 정교한 간식과 요리가 아름답게 눈을 가득 채웠다. 진 귀비는 온종일 여기에서 처참한 생활을 했다. 그 조잡한 감옥 밥을 먹지 않았기에 하루 밤낮을 쌀 한 톨 넘기지 못한 상태였다. 평소 음식에 비해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었지만, 감옥 음식에 비하면 성찬이었다. 진 귀비는 서둘러 게걸스럽게 먹었다.

7황자는 그녀가 밥을 먹는 모습을 보고 눈물이 솟구쳤다.

“모비, 죄송합니다…….”

진 귀비는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소칠이 나를 생각해 주는구나. 소칠이야말로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해주는 사람이지…….”

7황자는 눈물을 떨구며 훌쩍이느라 말을 하지 못했다. 평소에도 효자라 칭송받는 이의 모습은 누가 봐도 가련하다 여길 만했다.

진 귀비는 바구니 안의 요리를 깨끗이 먹어 치웠다. 또한 함께 있던 감주도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다 마셨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돌려 7황자를 쳐다보았다. 그는 철책 난간을 사이에 두고 눈물이 가득한 얼굴로 진 귀비를 보며 끊임없이 죄송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진 귀비는 마음이 아파 옥문을 사이에 두고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소칠, 내게 미안하다는 말을 할 필요 없단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야. 모비가 너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야. 울지 마라.”

7황자는 고개를 들었다. 표정이 기괴하게 변했다.

“그럼, 모비는 소칠을 위해서 기꺼이 죽을 수도 있으세요?”

진 귀비는 멍해졌다.

“뭐라고?”

“모비, 죄송합니다. 소칠이 모비의 음식에 독을 넣었습니다.”

진 귀비는 멍해졌고 자신이 잘못 들은 거라 여겼다. 입술이 덜덜 떨렸다.

“너 뭐라 말했느냐?”

7황자의 표정은 여전히 슬펐다. 그러나 눈빛은 뱀처럼 음험하고 악독했으며, 아무런 감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모비가 먹은 음식에, 제가 독을 넣었다고 말했습니다.”

진 귀비가 말을 하려는 순간 배 속에 통증이 느껴졌다. 참을 수 없을 정도 강한 통증이 엄습해 와 호흡이 가빠지면서 그녀는 바닥에 쓰러졌다. 진 귀비는 한 손으로 배를 누르며 절망적이며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7황자를 보았다.

“어째서…….”

“모비, 모비는 왕숙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왕숙도 자신의 왕비의 화를 풀어주기 위해 당신을 죽일 방법을 찾을 겁니다. 모비가 그의 손에 가치 없이 죽느니 차라리 여기에서 죽는 것이 낫습니다.”

그의 입가가 기괴한 미소로 휘어졌다.

“모비가 옥중에서 독을 먹고 자진하는 유일한 이유는 바로 저, 소칠을 이 사건과 연루시키고 싶지 않아서가 되는 거죠.”

7황자는 손을 뻗어 철제 난간 사이로 진 귀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모비의 마음을 황상은 반드시 아실 겁니다. 소칠을 책망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소칠에게 배로 잘해주시겠지요.”

확실히 진 귀비가 살아있으면 7황자가 연루되어, 황상의 눈엣가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진 귀비가 스스로 옥중에서 자진하면 황상은 아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건 모친에 대해 감탄할 것이다. 황상은 7황자에게 정이 있으니 그를 책망할 리 없거니와 모친을 잃는 아픔을 겪었으니 한층 더 배려할 것이다.

진 귀비는 고통스레 입을 벌렸다. 자신이 여러 해 계략을 세우고 그렇게 많은 사람의 목숨을 모해한 것은 7황자의 앞날에 장애가 되는 것들을 깨끗이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생각지도 못했다. 자기가 7황자의 걸림돌이 되리라는 것을. 더욱 생각지 못했던 것은 7황자가 추호의 정도 남기지 않고 자신을 한 발로 걷어차 버릴 거라는 점이었다. 7황자는 친아들이건만, 그녀를 독살하는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짐승 같은 놈.”

가까스로 말을 던진 진 귀비는 고통스럽게 땅 위를 굴렀다. 이렇게 큰 감옥에 옥졸이 한 명도 없었다. 분명 7황자가 일을 치르기 전에 만반의 준비를 했을 테니 그녀가 오늘 여기에서 죽어도 와 볼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몸의 고통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마음에 입은 타격이야말로 사람을 철저하게 파괴시켰다. 그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총애하던 아들이 어떻게 자신에게 이렇게 대할 수 있는지. 7황자는 그녀가 땅 위에서 발버둥 치는 것을 보고 표정이 복잡해졌다.

“모비, 당신께서 살아 계시면 소칠이 황상이 되어서 부정하고 불결한 모친 때문에 얼마나 위신이 떨어지는 일이겠습니까.”

진 귀비는 낮은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웃으면서 피를 토해냈다. 그녀는 이미 통증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너무나 처량했다. 부정하고 불결해? 조금이라도 일어설 힘이 있다면 7황자를 한 대라도 후려갈겼을 것이다. 7황자는 자신의 생신연을 이용하여 한안을 모해하게 했다. 자기가 지금 이런 처지가 된 것은 그를 위한 게 아니었던가? 그런데 결국 무엇을 얻었는가. 독주 한 잔과 부정하고 불결하다는 말을 얻었을 뿐이다. 피가 울컥울컥 뿜어져 나와 그녀의 얼굴 전부를 얼룩지게 했다. 7황자는 그녀가 이리저리 나뒹굴며 경련하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모든 힘이 다하여 두 다리가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뿌옇고 음산한 달빛이 철창을 통과하여 땅 위의 시체를 비추었다. 아름답고 요염하며 자태가 두드러졌던 옥 같던 미인은 온데간데없었다. 입가에서 스며 나온 핏줄기가 기괴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모비, 귀신이 되신다면 부운석이 당신을 해쳤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7황자는 가벼운 소리로 말하고 몸을 돌려 감옥을 떠났다.

한안은 진 귀비가 자진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몇 초간 멍해 있다가 급람에게 물었다.

“너 누구에게 들은 거야?”

급람이 혀를 날름했다.

“뜰을 지나가다가 왕야의 두 시위가 그 얘기를 하며 왕야께 언제 궁에 들어가실지 여쭙는 것을 들었어요.”

한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진 귀비가 독을 먹고 자진했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 높은 지위에 오래 있었던 사람은 하루아침에 추락하면 어떻게든 만회할 생각을 할 것이었다. 더구나 진 귀비의 성격은 안하무인이니 감옥에 갇혔더라도 구조될 방법을 생각하고 있어야 맞았다. 설마 남에게 살해된 것일까? 한안은 우선 부운석을 떠올렸다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부운석의 일처리는 깔끔하고 명쾌했다. 만약 정말 진 귀비의 목숨을 앗으려 했다면 독 같은 수법을 썼을 리 없었다. 더구나 자진을 날조했을 리도 없었다. 부운석이 아니라면 누굴까? 설마 태후인가? 한안은 뜰 안에 있는 작은 의자에 앉았다. 태후와 진 귀비는 한패였다. 분명 진 귀비는 태후의 많은 비밀을 알고 있을 것이고 태후는 진 귀비를 죽여 입을 다물게 하고 싶어 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한창 바람과 풍랑이 드센데 이렇게 경거망동하게 일을 처리한다고? 한안은 어렴풋이 진 귀비의 죽음이 결코 그리 간단하지 않다고 느꼈다. 보이지 않는 사람 하나가 모든 것을 조종하고 있는 것 같았다. 생각을 거듭해도 초조하고 불안하기만 했다. 눈썹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급람이 그녀의 기분 변화를 알아차리고 서둘러 말했다.

“소저, 며칠 있으면 바로 봄 제사예요.”

봄 제사. 한안은 멍해졌다. 봄 제사는 매년 연초에 거행하는 제신 의식으로 황상이 제사 지내는 곳에 친림(親臨)하고 대사가 천하의 번성을 함축적으로 담은 설법을 했다. 그리고 의식을 마친 후에는 떠들썩한 공연이 연이어졌다. 하지만 한안은 봄 제사의 떠들썩한 장면을 보지 못하고 몇 해를 넘긴 상태였다.

우선 전생에 산적에게 납치된 일이 일어난 후 종일 집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봄 제사 때 그녀에게 같이 가자고 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상황에 급람의 입에서 익숙하고도 낯선 단어를 듣자 감개무량하면서도 묘한 기분이었다. 한안은 웃으며 급람에게 말했다.

“봄 제사 보러 가고 싶니?”

급람은 간절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가고 싶어요.”

“그럼 우리 가보자.”

세상을 다시 살 기회를 얻었으니 미처 누리지 못했던 것을 누려 보면 좋지 않을까. 급람이 환하게 웃더니 ‘아이고’ 하는 소리와 함께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주홍은 못 가네요…….”

주홍은 지난번 일로 줄곧 병상에 누워 있었다. 매번 괜찮다고 고집하긴 하지만 한안이 보기에 아직 가슴 쪽에 욱신거리는 통증을 느끼는 것 같았다. 온 마음을 다해 자신을 생각해 주는 주홍과 급람에게 말썽만 일으켰다. 급람은 한안의 기분이 가라앉은 것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서둘러 말했다.

“괜찮아요, 소저. 그 돌덩이 시위가 함께 있어 주면 주홍도 그다지 무료하지 않을 거예요.”

돌덩이 시위?

“목암?”

언제 주홍과 목암이 이렇게 친해졌지? 평소 목암을 보면 사람의 정을 가까이하지 않을 것 같은 유형이었는데. 급람이 입을 가리고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 돌덩이가 주홍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아요. 온종일 주홍 옆을 뛰어다니고……,”

한안의 입꼬리도 따라서 치켜 올라갔다.

“둘이 잘 어울리네.”

급람이 서둘러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게다가 그 돌덩이가 성질이 좀 차갑기는 하지만 잘생기고 용맹스럽잖아요. 주홍이 그와 잘 된다면 손해는 아니죠!”

한안은 웃었다.

“아가씨가 돼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네. 급람은 남자의 용모를 제일 먼저 보는구나. 내가 보기에 목풍도 생김새가 나쁘지 않고 성격도 활발하니, 웬만하면 너와 그도…….”

“안 돼요, 안 돼요.”

급람이 연거푸 손을 흔들었다.

“그 인간은 종일 입에서 좋은 말 한마디 안 나오는걸요. 언제나 놀려대기만 하고. 그와 함께 있고 싶지 않아요.”

급람은 말을 마치고 화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한안은 모든 게 기쁘기만 했다. 이제 주홍과 급람도 모두 컸고, 2년만 지나면 출가할 나이가 된다. 이 세상에서 둘을 제외하면 다른 사람은 쉽게 믿을 수 없을 텐데. 만약 둘을 시집보내고 나면, 그 누군들 둘만큼 날 위해 줄까? 그렇다고 둘을 곁에 남게 두는 것은 너무 이기적인 일일 것이다.

“소저.”

한안이 정신을 딴 데 팔고 있는 것을 보고 급람이 초조하게 불렀다.

“소저?”

한안은 그녀에게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괜찮아.”

*

한편 황궁.

황상은 진 귀비를 안장하라는 명을 전달했다. 그나마 진 귀비가 황상을 위해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그걸 안배한 처사였다. 그러나 부정하고 불결한 사람이기에 황릉에는 묻힐 수 없었다. 진 시랑 일가는 애간장이 끊어질 듯 곡을 했지만, 그중에서 진심으로 비통해한 이는 오직 진 부인뿐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진씨 세가가 좋은 뒷배 하나를 잃은 것을 감당할 수 없어 서글퍼했을 뿐이다. 진 귀비 덕분에 진씨 세가의 위상이 점차 높아졌는데 의지하고 있던 진 귀비가 요절하고 말았으니 진씨 세가의 세력이 내리막길을 달릴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7황자는 상복을 입고 진 시랑 부부 앞에 꿇어앉아 큰절을 몇 번 했다.

“외조부, 외조모, 지금 어머니께서 이미 계시지 않으니 소칠이 모비 대신 두 분께 효경하겠습니다. 모비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진 부인은 고개를 들고 딸을 쏙 빼닮은 외손자를 보았다. 그의 눈이 붉고 얼굴에 슬픔이 가득한 모습을 보자 가슴 한가운데가 시큰해져서 7황자를 품에 바짝 끌어안았다.

“가엾은 외손주.”

조문하던 빈객들도 흐느껴 울며 탄식했다. 그중 한 사람이 위로하듯 7황자의 어깨를 토닥였다.

“사람이 죽으면 되살아날 수 없으니 7전하께서는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고개를 든 7황자는 위여풍과 시선이 마주쳤다. 위여풍의 얼굴에는 적절한 슬픔과 동정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대청으로 걸어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위여풍의 옆에는 소박한 차림새이나 온몸에 감출 수 없는 부귀한 기운이 흐르는 여자가 따르고 있었다. 교태 넘치고 아름다운 얼굴에는 오만한 기색이 가득하였는데 바로 장어산이었다. 장어산이 위여풍의 가장 총애 받는 측비가 된 일은 이미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사람들은 장어산이 위왕부에서 지위가 높으며 위여풍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 있다고 말했다.

“어째서 현청왕부에서 조문 온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는 거죠?”

그녀는 당황한 듯 말했다.

주위가 돌연 조용해졌다. 궁중에서는 진 귀비가 간통한 일은 남의 모해를 받은 것이고 모해를 한 사람은 바로 부운석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진 귀비가 자진하여 죽었으니 부운석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부운석이 이 자리에 온다면 자신이 간접적으로 살해한 사람을 조문하러 온 것이 된다. 하지만 오지 않는다면 뭔가 켕기는 것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된다. 오든 안 오든 눈총을 받을 일인데 위여풍의 측비가 공교롭게 부운석을 언급한 것이었다. 위여풍이 자상한 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왕비와 왕야께 사정이 있어서 서둘러 오실 수 없는 거겠지.”

사람들의 추측이 더욱 무성해졌다. 같은 조정의 관리라고 해도 7황자의 일인 데다가 현청왕은 7황자의 왕숙이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조문을 와야 하는 것 아닌가. 사정이 있어 늦게 올 수 있다는 말에 사람들은 진 귀비와 현청왕비가 불화가 있다고 전해 들은 것을 떠올렸다. 설마 정말로 현청왕이 켕기는 것이 있어서 오지 못하는 것은 아니겠지?

“현청왕 도착했습니다.”

마침 공교롭게도 바깥에서 젊은 사내종이 통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은 서둘러 문 쪽을 돌아보았다. 현청왕이 큰 걸음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표정은 살을 엘 듯 차가웠고 담담한 한기를 발산했다. 그에 대해 왈가왈부하던 목소리들이 바로 사그라들었다.

현청왕이 올 줄은 예상치 못하고 있던 위여풍은 정신을 가다듬고서 앞으로 걸어가 웃으며 말했다.

“왕야께서는 조문하러 오시면서 어찌 왕비는 데려오지 않으셨습니까?”

한안이 보이지 않으니 위여풍의 마음은 실망스러운 건지 홀가분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한안이 부운석 곁에 서 있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애정과 증오 사이에서 위여풍은 자신도 어떤 감정인지 명확히 알 수가 없었다. 오직 부운석이 불쾌할 뿐이었다.

장어산은 교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맞다, 어찌 넷째 동생이 오는 건 보이지 않지요? 소첩은 넷째 동생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그저께 장부에 돌아가 보니 동생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더군요.”

한안이 오랫동안 장부에 머물지 않았다는 걸 돌려 말한 것이었다. 한안이 장부에 없다면 현청왕부에 있었겠지. 설령 혼약이 있다 해도 아직 출가하지 않은 여자가 남자의 집에 들어가 머무는 것은 온당하지 않았다. 조문 온 사람들이 즉각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장어산은 얌전하게 웃고 있었지만, 눈빛이 칼끝처럼 날카로웠다.

부운석도 담담하게 웃었다.

“왕비가 그저께 궁중에서 풍한에 걸렸더군. 본왕이 걱정되어 특별히 현청왕부에 머물라 했지.”

그는 말을 마치고 의미심장하게 위여풍을 한 번 보았다.

“오늘 조문하는 자리는 액운이 끼기가 쉬우니 아픈 사람은 데리고 오지 않는 게 좋지.”

사람들은 문득 깨달았다. 현청왕비가 오늘 오지 않은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오히려 현청왕을 보아하니 두 사람 사이는 지극히 좋은 듯했다. 왕비가 왕야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들 했지만 지금 보니 왕야가 진심으로 왕비를 아끼는 듯했다.

장어산은 원망스러워서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부운석의 말은 오히려 장어산을 곤란한 입장으로 밀어넣는 것이었다. 현청왕은 액운이 낄까 우려하여 한안이 나오지 못하게 했는데 위여풍은 자신을 데리고 왔다. 기회를 틈타 한안이 총애를 받지 못한다는 소문을 퍼뜨리려 했는데……. 오히려 위여풍이 측비를 그다지 배려하지 않는 것으로 둔갑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위여풍의 표정은 살짝 멍해졌다. 그는 한안이 그 밤에 춘독에 중독된 일을 알고 있었다. 나중에 부운석이 한안을 구한 것을 알았을 때 그의 마음은 대단히 괴로웠다. 춘독의 독성이 맹렬하므로 일단 중독되면 반드시 교합해야만 해독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안을 현청왕부에 데려갔으니 당연히 부운석이 그녀의 독을 해독했을 것이다. 두 사람이 이미 교합을 했다고 생각하니 너무 고통스러웠다. 위여풍은 부운석을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놓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나중에 태후가 한안이 처녀의 몸인지 검사하여 한안에게 해를 가하려 했다는 얘기를 정탐꾼으로부터 보고 받았다. 한안은 여전히 처녀의 몸이었다.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한안이 아직 순결한 것이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부운석에게 타격을 줄 기회를 놓친 것이 근심스러웠다.

한안이 여전히 현청왕부에 있다는 것을 듣고는 걱정이 되었다. 그녀의 지금 몸 상태는 어떤지 모르겠구나. 춘독이 풀렸다고는 하나 몸이 상했을 텐데.

7황자가 때마침 일어나 부운석에게 읍을 했다.

“왕숙.”

7황자는 부운석을 부르더니 오열하며 일어나지 않았다.

“너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부운석이 말했다.

7황자는 고개를 저었다.

“이전에 모비와 왕숙 사이에 불화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모비가 이제 가셨으니 조카는 모비를 대신하여 왕숙께 잘못을 사죄드립니다.”

효성스럽다고 소문이 자자한 7황자가 모친을 잃고도 도리를 지키려 한다는 점에 사람들은 감동했다.

부운석은 손을 뻗어 7황자를 일으키지 않았다. 심지어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차갑게 말했다.

“필요 없다. 그저 소문일 뿐이다.”

7황자는 말이 없이 옷 앞자락을 걷어 올리고 부운석에게 무릎을 꿇으려 했다.

“왕숙의 말씀은 모비를 용서하지 않겠다는 말씀이시지요. 조카가 모비를 대신하여 고두(叩頭)하겠습니다.”

당당한 황자가 왕야에게 자신을 낮추어 무릎을 꿇으려 하니 다른 사람들도 마냥 두고 볼 수만 없어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러나 현청왕의 막강한 권세가 조정과 재야에 미치니 감히 나서서 찍히고 싶은 사람도 없었다. 그때, 몹시 분노하여 치를 떠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왕야는 지위가 높고 권세가 중하지요. 그러니 다른 이를 괴롭히지는 마십시오. 7전하는 황상의 아들인데 왕야께서 굳이 핍박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보니 소리를 지른 사람은 진 부인이었다. 그녀는 노년에 딸을 잃어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의 아픔에 하룻밤 사이에 그녀의 머리카락은 모두 하얘졌다. 7황자는 진 부인을 보고 외쳤다.

“외조모…….”

그리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조모와 손자가 함께 끌어안고 통곡하니 사정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부운석이 세력을 믿고 남을 괴롭히는 것처럼 보였다. 장어산은 교태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진 귀비 마마께서 타계하시니 노인과 아이만 남아 고초를 겪는군요. 정말 안타까운 일이에요. 왕야께서는 어찌 아픈 사람을 위해 아파하지 않으시나요?”

위여풍도 고개를 흔들며 탄식했다.

“맞는 말입니다. 지금 7전하께서는 말을 하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워하십니다. 누가 그의 마음속 고초를 알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에 수군거림은 좀 더 대담해졌다. 현청왕은 도량이 좁아서 귀비 사후에도 여전히 마음에 앙심을 품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7황자가 효심이 지극하여 모비를 대신해 죄를 청했는데도 현청왕이 용서 없이 트집을 잡는다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부운석은 그저 조용히 서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불어오는 맑은 바람에 눈처럼 흰옷이 살짝 날렸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는 비로소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아픈 사람을 위해 아파한다라?”

부운석이 입을 열지 않았을 때는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그가 입을 열자 모두 입을 다물고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 사이 부운석은 바짝 기대서 있는 위여풍과 장어산을 향해 돌아서며 홀연 입꼬리를 휘었다.

무의식중에 한기를 느낀 장어산의 온몸이 뻣뻣해졌다. 부운석의 얼굴은 냉담하고 엄숙했으며, 곰곰이 되새겨 보는 듯한 웃음기는 잔인했다.

“나이가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것은 7황자 하나뿐이 아니지.”

장어산이 오들오들 떠는 모습을 보며 그는 이어서 말했다.

“위 측비는 잊었나 보군. 본왕의 왕비가 바로 1년 전에 어머니를 잃었는데? 어째서 측비는 아픈 사람을 위해 아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지?”

그의 말투는 물처럼 평범하고 담담했다. 그러나 한 마디 한 마디에는 뼛속까지 파고드는 한기가 있었다. 섣달그믐의 얼어붙은 산과 차가운 샘처럼 아무런 기척 없이 사람의 마음속에 싸늘한 기운을 뿌렸다.

장어산은 그의 물음에 말을 더듬었다.

“어, 어떻게 안 했겠어요. 저와 넷째 동생은 서로 간의 정이 돈독한…….”

“아픈 사람을 위해 같이 아파하는 측비는 본왕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왕(王) 부인이 세상을 뜨고 1년도 안 되어 바로 장부에 들어갔지.”

부운석은 그녀가 역전할 기회를 주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다.

“아픈 사람을 위해 아파하는 측비는 얼마 전에 위 세자가 장 4소저에게 준비한 혼담을 꺼내기 전에 세자와 살을 섞어서…….”

그는 위여풍을 한 번 보았다.

“4소저가 첩이 되지 않겠다는 독한 맹세를 하게끔 만들었고.”

분위기가 순간 뒤집혔다.

장어산과 위여풍이 사통한 순간을 목격한 증인이 적지 않았다. 소문이 곧바로 났으니 경성의 거의 모든 사람이 다 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거기에 주씨가 왕 부인이 죽은 지 1년도 안 되어 바로 부에 들어간 일과 연결해 보니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의미가 담기고 말았다. 권세가에서 적서 간의 다툼이 끊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적녀의 혼사를 빼앗거나 적녀에게 첩이 되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감이 있었다. 장 4소저가 그런 독한 맹세를 한 것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장어산과 위여풍을 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위여풍은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부운석이 자신의 치부를 숨기지 않고 꺼내는 것을 보면서도 반박할 길이 없으니 분노할 뿐이었다.

부운석은 담담히 웃으며 위여풍을 두들길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세자 덕분에 본왕이 안아 같은 왕비를 아내로 맞게 되었군.”

그가 부른 호칭은 더없이 친밀하고 다정스러워서 위여풍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부운석은 서로 끌어안고 울고 있는 7황자와 진 부인을 향해 말을 이었다.

“축생이 꼬리를 흔드는 것을 본왕이 저지할 수는 없지. 마찬가지로 7황자가 죄를 인정하려 한다면 본왕도 막을 방법이 없다.”

그는 뒷짐을 지고 섰다.

“진 귀비가 죄가 있는지 없는지 궁금하다면 7전하는 황상께 가서 오늘 어째서 참석하지 않으셨느냐고 물어봐도 무방하다.”

황상이 참석하지 않았다라. 진 귀비는 생전에 육궁에서 가장 총애 받던 비였는데도 말이다. 보아하니 현청왕이 진 귀비를 모해했다는 말은 터무니없는 일인 듯했다. 그렇지 않다면 황상이 어찌 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7황자는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손을 꽉 틀어쥐었다. 여전히 슬퍼하며 울었지만, 눈빛에는 음침함이 감돌았다.

부운석은 문 근처로 걸어가며 담담하게 한 마디를 내던졌다.

“선황께서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신 후로 황상과 모후를 제외하고 누구든 본왕에게 무릎을 꿇든 말든 본왕은 신경을 쓰지 않는다.”

부운석은 말을 마친 후 소매를 떨치고 가버렸다.

사람들은 그의 뒷모습이 멀리 떠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했다. 은밀한 곳에 숨어서 모든 것을 지켜본 목풍이 튀어나와 부운석에게 다가갔다.

“왕야, 정말 훌륭하십니다!”

황상께서 오셔도 그 기세가 이 정도는 아닐 것이었다. 왕비를 괴롭히려 한다면 왕야는 그가 누구든 그 가족 전체를 압박할 게 분명했다.

경성 안의 어느 객잔 안.

키가 큰 남자가 방 안 가운데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너 확실히 봤어?”

아름답고 요염한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 틀림없어요. 분명 그들이에요.”

남자의 청록색 눈동자는 사냥감을 보는 것처럼 팽팽히 가늘어져 있었다.

“좋다. 이림나, 그들의 일거일동을 단단히 감시해라. 무슨 행동을 하든 나누어서 하는 게 좋겠지.”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오라버니.”

꿀빛 팔뚝 위에 녹색의 작은 뱀 세 마리가 붉은 혀를 날름거렸다.

고요하면서도 번화해 보이는 등 뒤로 폭풍우가 몰려와 비가 쏟아지기 직전이었다.

16장

곧 봄 제사의 날이 도래했다.

한안은 며칠 전 장부로 돌아왔다. 부운석이 장사양에게 무슨 설명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부에 돌아온 후에도 장사양과 주씨는 그녀를 힘들게 하지 않았다. 청추원에는 갑자기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장한명도 찾아오지 않았다. 한안은 청추원에서 한가하게 쉬기로 했다.

그러나 주홍은 함께 돌아오지 않았다. 장부의 상황이 복잡하니 주홍의 휴양에 불리하기도 하고, 현청왕부에서 청하는 의원이 장부 쪽 의원보다 훌륭하기 때문이었다. 만약 주홍이 이 기회를 빌려 부운석의 그 비밀 호위와 무슨 일이든 만들 수 있다면, 그럼 더 좋은 일일 것이다.

한안은 미 이낭에게 한 번 가보았다. 미 이낭의 생활은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마음 편한 것은 아니었다. 대주씨가 며칠에 한 번씩 주씨를 보러 오기 때문이었는데, 그러면서 대주씨가 장사양에게 미혼탕(迷魂湯: 혼을 잃게 하는 탕약)을 들이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장사양이 미 이낭을 정방으로 삼겠다는 언급을 하려 하지 않았다.

한안이 예상한 바였다. 대주씨가 없더라도 장사양이 쉽사리 미 이낭을 밀어줄 리 없었다. 장사양은 체면을 지극히 중시하기 때문에 신분이 낮고 천한 오랑캐 여자를 자신의 부인으로 삼을 리 없었다.

그러나 한안은 여전히 의심스러웠다. 대주씨가 온종일 장부를 돌아다니는 데 목적이 명확해 보였던 것이다.

봄 제사의 날 아침, 한안은 새벽에 일어났다. 급람과 유모는 줄곧 한안이 무슨 옷을 입고 가야 할지 상의하고 있었다. 한안은 지금까지 이런 일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유모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지금 경성 안 누구나 아가씨가 왕야께서 가장 아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단장하지 않고 나가시면, 그 부귀한 사람들이 또 이러쿵저러쿵 말을 해댈 거예요.”

한안은 ‘가장 아끼시는 분’이라는 말에 닭살이 돋긴 했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완벽하게 갖추어 입고 연극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은 여러 사람이 그녀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현청왕부라는 큰 나무가 시원한 바람을 쐬며 쉴 수 있는 휴식처가 될 것인지 아니면 말썽의 시작인지 모르겠다.

급람이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를 보았다.

“소저, 오늘 봄 제사는 황상께서도 나오실 텐데 좀 화려하게 단장해야 좋죠.”

급람은 말을 마치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2소저에게 지지 마세요.”

한안은 실소했다.

“지지 말라니, 내가 어산 언니와 함께 있는 것도 아닌데.”

봄 제사 같은 의식은 일가족이 함께 서서 지켜보는 게 관례였다. 장어산은 위왕부에 시집갔으니 위여풍과 함께 머물러야 했고 자신은 현청왕비이나 어쨌든 아직 시집가지 않았으니 장사양과 함께 있을 수밖에 없었다.

급람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래도 2소저보다 더 아름다우셔야죠.”

한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 마음대로 하겠다는 모습이었다. 옷을 입고 단장을 하는 데 있어 과하지 않고 적절한 것이 좋다는 것이 한안의 생각이었다. 급람이 그녀를 꽃의 신선으로 꾸며놓는다 해도 모든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 건 불가능하니 말이다.

급람은 달갑지 않았는지 옆에서 유모와 다시 상의하기 시작했다. 한안은 창가에 앉았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지금이 폭풍전야라도 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기억에 따르면 대종 14년의 봄 제사에는 아무런 큰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만약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분명 자신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불안했다.

갑자기 한안이 들고 있던 구리거울이 ‘쩍’ 하는 소리를 냈다. 급람이 놀라 펄쩍 뛰었다. 한안이 고개를 숙여 보니 구리거울의 표면 가운데에 저절로 큰 금이 가 있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거울이 갈라지다니, 불길했다.

한안은 갈라진 구리거울을 조금 멍하니 바라보았다. 급람이 서둘러 손을 날쌔게 움직여 그녀의 손에서 거울을 빼앗았다.

“이미 깨졌으니 앞으로 평안할 것입니다.”

급람이 자신을 위로하는 것을 알아듣고 한안은 정신을 가다듬으며 웃었다.

“어서 머리를 빗자.”

지금 마음이 어지러워서는 안 된다. 병사가 오면 장군으로 막고 물이 넘치면 흙으로 막듯이 상황에 알맞은 방법으로 대처하려면 냉정을 유지하는 게 상책이었다.

급람은 한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희희낙락하며 그녀의 머리를 빗겼다. 급람의 손은 정교했다. 한안이 현청왕비가 된 후에는 여러 종류의 머리 모양을 따로 배우기까지 했다. 한안이 사람들의 앞에서 한껏 두각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급람이 얼마나 오래 만지작거리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한안의 목과 어깨가 시큰거린다고 느낄 때 쯤, 비로소 급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됐어요, 소저.”

한안은 무거운 짐을 벗은 듯 안도의 숨을 내쉬며 일어서서 기지개를 켰다. 급람은 한안이 자신의 솜씨를 몇 마디라도 칭찬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한안은 거울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급람은 조금 풀이 죽었다.

한안이 서랍 안의 함을 빼내고 안에서 매화자를 꺼내는 것이 보였다. 급람은 그것이 한안이 호신용으로 사용하는 기물이며 요즘은 더 자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직 서툴기는 하지만, 결정적일 때 쓸모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급람은 조금 의아했다. 오늘은 단순한 봄 제사에 불과한데 소저는 어째서 이 물건을 몸에 지니는 걸까? 설마 무슨 위험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녀는 경계심이 일었고 느슨한 축제 분위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한안이 장부를 나서자 장사양은 이미 말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미 이낭은 태아를 위하여 부중에 남았고 만 이낭과 장금은 몸이 불편해서 함께 동행하는 것은 주씨와 장한명뿐이었다. 한안이 온 것을 보고 주씨가 친숙하게 불렀다.

“4소저.”

불화가 표면화된 이후, 한안은 그녀와 말을 섞기가 싫었다. 한안은 주씨를 향해 웃어 보이고는 머리도 돌리지 않고 따로 준비한 마차에 바로 올랐다. 그녀는 현청왕비가 되어 좋은 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예를 들면 이런 때에 아무도 안중에 없이 굴 수 있다든가 하는 점. 평소 부운석이 그렇게 안하무인으로 구는 것을 보다가 지금 자신이 안하무인으로 굴어 보니 느낌이 썩 괜찮았다.

급람은 한안이 입가를 치켜 올리는 것을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눈과 눈썹 사이에 어렴풋하게 웃음기가 있었다. 보아하니 기분이 괜찮은 것 같았다.

“소저, 봄 제사는 흥겨운 분위기인가요?”

한안이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한 해 한 해 점점 더 대단해지는걸.”

나라가 태평성세를 이루고 있으며 백성들은 안정된 생활을 누리고 즐겁게 일하고 있으니 봄 제사는 해가 갈수록 더욱 성대해졌다.

급람은 휘장을 들어 올리고 마차 밖을 한 번 보았다. 말투에 그리워하는 빛이 자못 어려 있었다.

“만약 부인께서 계셨다면 좋았을 텐데, 부인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것이 흥겨운 분위기였는데…….”

급람은 말을 마치자마자 자신이 실언했음을 깨닫고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한안의 얼굴 위 웃음이 점점 흐릿해지더니 깊디깊은 슬픔과 망연자실함이 나타났다.

만약 어머니가 세상에 계셨다면 분명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한 세상을 다시 살면서 많은 것들을 바꾸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이미 세상을 떠나신 사실은 바꿀 수 없었다. 그녀는 수많은 재난과 함정을 피했지만 또 다른 복잡한 상황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자신의 출신, 죽은 아벽, 황가의 황위 다툼, 장한명과의 관계.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 우연인 것 같지만 사실은 전부 필연이었다. 가장 두려운 것은 퇴로가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나아가는 것 외에는 어떤 방법도 없었다.

이렇게 사는 게 올바른 것일까?

마차 안은 한순간 말이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조용히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제터는 성동에 있는 큰 도장이었다. 집집마다 모든 사람이 거리로 뛰쳐나온 듯했다. 모두가 봄 제사의 떠들썩한 장면을 보기 위해서였다. 제터의 가장 동쪽에 9층 고탑이 하나 있었고, 황상과 황자, 공주, 비빈들은 고탑에 자리를 마련했다. 백성들은 떠들썩한 것을 구경하거나 용안을 보기 위해 제터에 몰려들었다. 어떤 사람은 마음에 맞는 낭군이나 혹은 미인을 찾기 위해서였다. 온갖 관원들이 모두 가족을 이끌고 오니 만약 적당한 사람이 있으면 당장 혼사에 대한 의사를 표명하는 것도 가능했다.

장씨 세가의 마차가 도착하자 백성의 눈빛이 마차에 고정되었다. 장사양은 그저 5품 관원일 뿐이니 관심을 받을 가치가 없었다. 그러나 한안은 미래의 현청왕비였다. 백성들은 이 현청왕비에 대해 일찍부터 들어 알고 있어서 풍채와 재능이 세상 둘도 없는 현청왕이 아내로 맞으려는 이가 어떤 소녀인지 보고 싶었다.

장사양이 앞장서서 마차를 내렸다. 그 다음은 장한명이었고, 그 다음이 주씨, 맨 마지막이 한안이었다.

위여풍은 조정 신하들의 중앙에 서서 먼 거리를 사이에 두고 한안을 보았다. 관복을 입은 부운석도 멀리서 한안을 본 순간, 눈빛에 놀라움이 스쳤다.

한안은 단정하고 긴 청록색의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치마에는 짙은 갈색의 견사를 사용하여 치맛자락에서 허리춤까지 곧장 뻗어 올라가는 모양새의 독특하면서 정교한 가지와 줄기를 수놓았으며 그 위에 설백색의 견사로 송이송이 활짝 핀 동백꽃을 수놓았다. 감색의 넓은 허리띠가 가느다란 허리를 단단히 조여 매어 아름다운 몸매가 뚜렷이 드러났지만 화려하고 고귀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청아한 느낌을 주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은 비취색의 비단 끈을 써서 복잡한 모양으로 말아 묶고서는 남전옥 비녀 하나만 비스듬하게 꽂았다. 새까맣게 빛나는 눈동자는 영민하며 맑고 투명했다. 한안은 세련되고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단정했다. 온몸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귀함과 완곡한 부드러움이 넘쳐났다.

평소 그녀의 차림새는 어린아이 모습이었다. 하지만 오늘 이렇게 청초한 차림을 하니 단점은 모두 사라지고 장점만 부각되어 사람 자체가 달라진 듯했다. 앳된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공주 같은 풍모에 사람들은 분분하게 곁눈질로 한안을 쳐다볼 따름이었다.

위여풍은 마음이 처참했다. 어린 아가씨가 단장을 달리하니 이렇게 매력적인 모습이라니. 속을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모습과 앳된 기색을 지워버린 그녀는 고귀해 보였다.

군중 속의 부운석은 눈을 가늘게 떴다. 어린 아가씨는 좀 자란 듯했다. 이렇게 자신을 감추지 않은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그녀인가?

한안은 눈을 휘며 멀리 있는 부운석에게 눈짓을 보냈다. 눈빛은 분명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때요? 이 정도면 당신 체면을 깎지는 않은 건가요?’

부운석이 미소를 은은하게 드러내는 것이 보였다. 이렇게 멀리 사이를 두고 떨어져 있는데도 한안은 그의 눈빛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놀란 한안은 서둘러 고개를 돌리며 다른 것에 눈길이 끌린 척했다. 급람은 입을 가리고 몰래 웃었다.

한안은 장사양을 따라 관원들이 서 있는 자리로 걸어갔다. 높은 대 위를 보니 제사용품이 가득 배열되어 있었고 탁자 위 붉은 비단에는 소와 양의 머리 등이 놓여 있었다.

둘러보니 장한명의 뒤에 여전히 영자가 따르고 있었다. 급람은 영자의 일거수일투족에 주의를 기울였다. 지난번 일이 일어난 후, 급람은 영자에 대해 경계심이 가득했다. 그러나 영자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장한명의 곁을 따르며 얌전하고 겁 많은 모습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상한 움직임은 알아볼 수 없었다.

뎅, 뎅. 뎅.

거대한 종을 세 번 치는 소리가 들렸다. 봄 제사가 시작되었다.

법사는 한 손에 목검을 쥐고 제단을 향해 중얼중얼 경문을 외웠다. 그다음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댔다. 주위에서 갑자기 귀신 가면을 쓴 사람들 몇이 뛰어나와 춤을 추었다. 손목과 발목에 홍색 방울을 달고 있어 춤은 유달리 즐겁고 경사스러워 보였다.

급람은 흥미진지하게 보고 있었다. 한안은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명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불안감이 점점 커지면서 무언가 위험이 있음을 직감했다. 그녀는 아무런 내색 없이 시선을 옮겼다.

영자는 장한명의 가까이에서 무대 위 의식을 응시하고 있었고 아무 이상도 보이지 않았다. 주씨는 장사양에게 기대고 있었다. 주씨는 아직 병이 낫지 않아 조금은 창백하고 가냘프며 연약해 보였다. 한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더 이상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멀리 황가가 머물고 있는 고탑이 한눈에 보였다. 태후도 왔을까?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의식도 이미 마무리에 접어들었다. 법사가 돌연 입을 벌려 불덩이를 술통 위에 뿜어내는 것이 보였다. 화려하게 타오르는 불꽃에 연이어 환호성이 일었다. 의식이 끝났다고 선포되자 주위의 사람들도 따라서 환호성을 질렀다

급람은 여운이 남는 듯 보였다.

“소저, 봄 제사는 정말 멋지네요.”

한안은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시선을 들어 멀리 바라보았다. 군중이 꽉 들어차 붐비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상황이니 무언가 일을 일으키려 한다면 매우 쉬울 것이었다.

보통 봄 제사 의식이 끝난 후에는 숙련된 예인들이 경축 공연을 펼쳤다. 백성들이 가장 기다리는 것도 공연이어서 신기해하면서도 떠들썩해 했다. 공연은 대풍년이 들기를 명시적으로 기원하는 것이었다. 단상 위의 공연에는 생동감이 넘쳐흘렀고 사람들은 웃으며 앞뒤로 몸을 흔들게 했다.

고탑 위의 황상도 웃는 얼굴을 드러냈다. 천하의 번성이라. 이것은 제왕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광경이었다.

공연은 한참 동안 이어졌고 별달리 이상한 점도 발견되지 않았다. 한안은 점점 마음을 놓았다. 황가의 비밀 호위들이 지키고 있을 거라는 데 생각이 닿자 자신이 공연한 걱정을 했나 싶었다. 대중이 모인 공개적인 장소에서 누가 그렇게 간덩이가 부어서 손을 쓸 수 있겠는가. 시선이 느껴진 한안은 고개를 들었다가 부운석과 눈이 마주쳤다. 그와 자신은 군중을 사이에 두고 있었지만 사실상 여전히 서로를 볼 수 있었다. 한안은 바로 웃는 얼굴을 드러내 보였다. 부운석은 입가를 휘었다. 한안은 고개를 돌려 무대 위 공연을 보였다.

이번 공연은 마침 곡예를 선보이는 중이었다. 대도를 쥔 남자 몇이 몸을 날려 여자의 등 위에 뛰어올랐고 칼끝으로 사발과 접시를 받쳤다. 사발과 접시는 끊임없이 돌았다.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그 기묘함에 탄복했다. 한안도 시선이 끌렸다. 옆에서 북을 치던 남자가 북을 묵직하게 한 번 내리쳤다. 공연이 절정에 달한 바로 그때, 곡예를 선보이던 한 남자가 돌연 몸을 뒤집어 내려오더니 대도를 여자를 향해 휘둘렀다. 핏빛이 사방으로 튀면서 ‘훅’ 하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무대 아래 사람들은 순간 숨을 멈추었다가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사람 살려, 살인이다!”

무대 위의 칼을 지닌 남자들이 몸을 뒤집어 도약하더니 군중 속으로 돌진했다. 재빠른 칼질에 일순간 핏빛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도처가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찼다.

갑자기 발생한 변고에 모두가 놀라 멍해졌다. 혼란에 빠진 군중이 방향 없이 달리기 시작하면서 자기 곁에 있는 것이 누구인지 명확히 볼 수가 없었다.

황상을 보호할 책임을 지고 있는 시위가 가장 먼저 반응했다.

“궁수들은 준비하라, 황상을 보호하라!”

수많은 활과 화살이 발사 준비를 했다. 그러나 문제가 또 있었다. 방금 전에는 칼 든 남자 몇을 확정하기가 확실히 쉬웠다. 그러나 그들은 일반 백성 차림을 하고 있었던 터라 군중과 한데 섞이면서 누가 누구인지 명확히 분간할 수가 없었다. 화살을 군중 전체에게 겨눌 수는 없었다. 잘못하면 무고하게 생명을 잃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었다.

순간 주위가 서로 밀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한안의 작은 체구로는 스스로 움직일 방법이 없었다. 군중을 따라 다른 곳으로 밀려갈 수밖에 없었다. 귓가에는 사람들의 울부짖음과 구조요청 소리가 찢어질 듯 울렸고 피비린내가 코끝을 찔렀다. 그녀는 장한명과 급람을 찾으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전부 빽빽한 군중뿐이었다.

누가 이 혼란을 조성한 걸까? 목적은 무엇일까? 한안은 알고 있었다. 이렇게 큰 사건은 주씨가 저지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대주씨일 리도 없다. 그녀들에게는 이 정도의 담력이 없기 때문이다. 설마 또 태후일가? 만약 태후라면 이렇게 해서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설령 자신을 해치기 위해서라 해도 이렇게 일을 크게 벌일 필요는 없지 않나.

한안은 익숙한 목소리 하나를 들었다.

“소야, 소야!”

그 목소리는 명확히 기억하고 있는 것이었다. 바로 영자의 목소리였다. 영자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설마 장한명에게 일이 생긴 건가? 한안은 서둘러 온 힘을 다해 목소리 쪽으로 가까이 가려 했다. 그러나 군중이 혼잡해서 가까이 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비록 장한명과 말다툼을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녀의 유일한 혈육이다. 눈을 뻔히 뜨고 그가 헛되이 목숨을 잃는 것을 볼 수는 없었다. 한안은 기를 쓰고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달렸다. 머리카락이 군중에게 이리저리 떠밀리고 잡혀서 엉클어졌다. 가까스로 무리에서 빠져나온 한안의 모습은 혼비백산한 것처럼 보였다.

장한명이 땅에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온몸은 상처투성이였고 칼을 쥔 남자가 장한명 앞에 서 있었다. 반항할 만한 기력은 전혀 없어 보였다. 남자의 대도가 장한명의 머리를 내리찍으려 하고 있었다. 한안의 심장이 쥐어 비틀렸다. 전생의 참상이 다시 눈앞에 떠올랐다.

“안 돼!”

머리가 텅 비어버린 한안은 무의식적으로 달려들어 매화자로 남자의 등 복판을 찔렀다. 그 남자의 손이 떨렸다. 한안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장한명을 잡아채 옆에 서 있는 마차 위로 밀었다. 정신을 차린 남자는 칼을 들어 올려 찍으려 했다. 행동이 생각보다 빨랐다. 한안은 마차에 오르면서 왼손을 휘둘러 매화자를 말의 엉덩이에 꽂았다.

말이 긴 울부짖음을 내더니 앞발굽을 높이 쳐들고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한안은 마차 안에서 뒤흔들리며 비틀거렸다. 남자의 동작이 제아무리 빨라도 미친 듯 날뛰는 마차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혼란한 군중 속에서 날뛰는 마차는 가장 좋은 보호막이었다. 마차가 앞으로 달려가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밟았는지는 생각지 않으려 했다. 한안은 급람을 걱정했다. 그러나 마차는 이미 통제할 수 없이 미친 듯 달리고 있었고 바깥의 상황은 알 길이 없었다.

부운석은 무의식적으로 한안의 모습을 찾았다. 그러나 군중들이 갑자기 폭발한 것처럼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는 것만 눈에 가득할 뿐이었다. 몸집이 작은 한안은 군중 속에 파묻히면 찾을 수 없을 터였다. 그는 지금까지 살면서 지금처럼 냉정을 잃어본 적이 없었다. 현청왕비를 해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았다. 만약 무슨 변고라도 일어난다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차가운 소리로 말했다.

“목풍, 목암.”

“속하, 여기 있습니다.”

비밀 호위가 제때에 그의 앞에 나타났다.

“당장 사람을 보내어 왕비를 보호하라.”

“네.”

비밀 호위는 명을 받고 갔다. 부운석은 고개를 들어 황실 가족이 머물고 있는 고탑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눈빛이 가늘어지더니 별안간 몸을 날렸다.

*

마차는 이미 군중을 뚫고 나와 성동의 뒷산을 달려 들어갔다. 이곳에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한안은 가슴이 두근거리고 살이 떨렸다. 장한명을 흔들며 깨우는 한편, 바깥의 상황을 살폈다. 나무숲은 고요하며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고요할수록 위험했다. 매화자는 아직 말의 엉덩이에 꽂혀 있었고 말은 발광하며 마차를 끌고 끊임없이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마차를 세울 방법이 없는 한안은 무척 초조하고 조급했다. 앞은 깎아 세운 듯한 절벽, 설마 자신과 장한명이 여기에서 죽는 것일까?

갈수록 경사가 급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방법을 찾을 수 없던 한안은 한 손으로 장한명을 부축하고 마차 휘장을 열어젖힌 다음, 장한명을 끌어안고 마차에서 뛰어내릴 준비를 했다.

뜻밖에 다그닥, 다그닥 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앞쪽에서 울리는 것이 들렸다. 이어서 바로 자신들이 탄 마차의 말이 두 앞발굽을 높이 들어 올리더니 가파른 벼랑 앞에서 거칠게 멈추었다. 한안과 장한명의 등이 일순간 마차 뒤에 부딪히면서 피를 토할 뻔했다. 억지로 정신을 가다듬은 한안은 그제야 마차 휘장을 걷어 올리고 무슨 일인지 내다보았다.

마차 앞쪽에 말 하나와 사람 하나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말은 부상을 입은 듯했고, 마부는 등 뒤에 화살이 꽂혀 이미 죽어 있었다. 이 사람이 말을 타고 여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힘이 쇠약해진 뒤였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마차의 말을 놀라게 한 덕분에 자신들을 구한 것이다. 한안이 다가가 조사해 보려 하는데 죽은 사람의 몸 아래에서 한 어린아이가 빠져나오는 것이 보였다. 어린아이는 온몸이 피였으나 옷은 금빛 찬란했다. 한안은 어린아이의 얼굴을 알아보고서 크게 놀랐다.

“태자 전하!”

태자는 죽은 시위가 보호해준 덕에 어지러운 칼날 속에서 목숨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도착해서 보니 그 시위도 죽어 있었다. 지금까지 이런 큰일을 겪어 본 적이 없어 놀라고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그렇다고 한안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또 너야?”

태자가 의심하듯 말하더니, 말투가 거만하고 무례하게 바뀌었다.

“너 아직 안 죽었어?”

태자의 말에는 무언가 의미가 담겨 있는 듯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멀리서 희미하게 말발굽 소리와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마차 바퀴는 이미 망가졌을 것이고 말도 부상을 당했으니 마차는 더 이상 쓸 수 없는 셈이었다. 그러니 먼저 숨을 곳을 찾아야 했다. 그다음 시위가 와서 구해주기를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한안은 예의니 도리니 하는 것을 고려할 틈이 없었다. 태자를 노려본 한안은 장한명을 부축하며 말을 던졌다. 자연히 말투는 곱지 않았다.

“죽고 싶으면 나와 멀리 떨어져 있어요.”

태자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입을 딱 벌렸다.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러나 추격병이 곧 도착한다는 생각에 오싹 떨렸다. 한순간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한안이 떠나가는 것을 보고 마음이 조급해졌다.

“본궁을 버리고 가면 안 된다.”

태자는 한안을 바로 따라갔다.

한안도 태자를 버릴 생각은 없었다. 어린 태자에게 큰 잘못이 없을뿐더러, 나중에 그녀가 태자가 죽음에 이르는 것을 보고도 구하지 않은 것이 발각되면 황상이 죄를 추궁할 테니, 머리가 열 개라도 모자랄 것이었다. 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부운석의 조카이니 자신이 도와주어야 하지 않겠나. 그러나 이 태자를 데리고 있는 것이 복일지 화일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매 걸음마다 잘 살피는 것이 안전했다.

사방이 모두 매우 곧게 선 나무들이라 빽빽하게 밀집해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한눈에 숲 전체가 다 들여다보였다. 광대하게 펼쳐진 울창한 숲. 평소라면 경치를 감상하기 좋은 곳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경치나 감상하고 있을 심정이 아니었다.

숨을 수 있는 곳이 없었다. 한안은 장한명을 부축하여 뛰고 또 뛰었다. 더 이상 뛰지 못해 포기하려 했을 때, 먼 곳에 작은 동굴이 있는 것이 얼핏 보였다. 낭떠러지 근처였고 굴 바깥에 들풀이 무성하게 있어 동굴 입구를 빈틈없이 가리기에 딱 알맞았다. 한안은 장한명을 끌고 굴 안으로 들어갔다. 어린 태자도 따라 들어갔다.

동굴 안은 깊었다. 그러나 큰 편은 아니어서 세 사람이 함께 붙어갈 수 있을 정도의 폭이었다.

마침내 안도의 숨을 내쉰 한안은 차분하게 일의 자초지종을 분석해 보았다. 느낌은 있었지만 일이 이렇게 크게 벌어질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황실 앞에서 백주 대낮에 살인을 하다니. 간이 크다고 해야 하나. 한안, 자신을 노리고 왔을 리는 없다. 한안은 태자를 보았다. 비단옷에 진귀한 음식만 누리던 황가의 어린 아들의 얼굴은 온통 핏자국이었다. 가까스로 침착을 유지하고 있지만 눈동자는 계속해서 흔들리고 있었다.

태자가 휘말려든 것이 설마 우연일까?

“전하, 어찌 여기에 나타나셨습니까?”

어린 태자는 처음부터 한안이 못마땅했다. 한안은 그에게 공손한 적이 없었다. 태자는 이 와중에도 거들먹거리는 자세로 물었다.

“네 신분이 무엇이냐? 감히 이렇게 본궁에게 말을 걸다니.”

한안은 화를 내지 않고 웃으며 고개를 돌려 장한명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태자는 자신이 거북한 분위기를 만들어 놓고는 오래도록 한안이 입을 열지 않자 분노했다.

“어째서 묻지 않는 것이냐?”

한안은 침착하고 느긋하게 그를 보았다.

“전하께서 말씀하고 싶으실 때, 알아서 말씀하시면 됩니다. 만약 전하께서 한안의 신분이 결격이라 느끼신다면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 곧 추격병이 도달할 텐데 전하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 주시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파악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뿐입니다.”

태자는 멍해져서 그녀를 보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현청왕비가 대단히 총명한 여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음에 들진 않지만 참지 못하고 물었다.

“무슨 일인지 정말 파악할 수 있겠어?”

한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믿고 안 믿고는 마음대로 하세요.”

태자는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마침내 결심을 굳혔다.

“좋다. 본궁이…… 네게 말해 주겠다.”

봄 제사가 한창일 때, 7황자는 백성들과 함께 즐기겠다며 백성의 옷을 입었다. 태자의 나이가 아직 어리다보니 고탑 위에서 보고만 있는 것은 당연히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그러나 황상은 태자가 변장을 하고 군중 속에 섞여서 구경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답답하고 울적해 있을 때, 7황자가 그에게 몰래 내려가면 된다고 말했다. 황상에게 발견되지만 않으면 된다면서. 태자는 기회를 틈타 정방에 가겠다고 하고는, 옷을 바꿔 입고 구경을 갈 작정을 했다.

그가 막 탑 아래로 걸어 내려왔을 때였다. 아직 백성들이 입는 삼베 외투를 걸치지도 못했는데 군중들이 요동치기 시작할 줄은 짐작도 못 했다. 그는 군중에 떠밀려 자신이 어디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바로 그때, 그에게서 가장 가까이 있던 남자 몇이 손을 날쌔게 움직여 비수를 꺼냈지만, 다행히 호위가 목숨을 걸고 태자를 보호했다. 그러나 인파가 태자와 호위를 고탑에서 멀리 쓸어내면서 잠복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그들을 향해 활을 쏘았다. 태자는 어쩔 수 없이 이 나무숲까지 달아났고 다행히도 한안을 만났다.

한안은 눈을 감았다. 7황자, 또 7황자다. 만약 오늘의 이 큰 연극이 태자를 위해 연출된 거라고 말한다면, 그럼 이렇게 큰 규모로 일을 벌인 것도 그럴 법했다고 할 수 있겠다. 태자 자리를 위해 하찮은 백성 몇쯤 희생된들 또 무슨 대수랴. 확실히 7황자의 간이 지나치게 크긴 하구나.

태자는 그녀를 보았다.

“본궁…… 본궁은 누군가 이 소란을 일부러 만들었다고 의심을 품고 있다.”

어린 것이 꽤 총명하구나. 한안은 웃었다.

“누구를 의심하십니까?”

태자가 멍해졌다가 고개를 돌리고는 입술을 깨물며 말하지 않았다.

한안이 가벼운 소리로 말했다.

“7전하를 의심하고 있지요, 맞죠?”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그 이름을 꺼내자 태자는 놀라 그녀를 보았다. 한안은 냉랭하게 웃었다.

“만약 7전하가 고탑 아래 군중 속에 있고 전하께서는 고탑 위에 계셨다면 어떤 사람도 7전하가 이번 사건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할 리 없겠죠. 전하께서 군중 속에 휩쓸렸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7전하뿐이에요. 만약 7전하가 입을 다문다면 모두 전하께서 탑 안에서 실종되었다고 여길 거예요.”

태자의 지나치게 긴장한 표정을 보고 한안은 조금 우스웠다.

“그렇게 긴장하실 필요 없어요. 너무나 분명한 일인데요. 오늘의 일, 전하께서는 어떻게 할 생각이신가요?”

태자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분노하여 말했다.

“본궁은 사실대로 부황께 말씀드릴 것이다. 부황께서 그의 이리 새끼처럼 흉악한 야심을 분명히 아실 수 있도록 말이야.”

한안은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저었다. 7황자와 어린 태자 중에서 그녀는 당연히 이 어린 태자가 좀 더 좋았다. 단지 7황자가 그녀와 원한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천하의 군주에게는 어진 마음과 덕이 있어야 하는데 7황자의 사람됨과 일 처리는 지나치게 악랄했다. 만약 그런 사람이 나라의 주인이 되기라도 하면 강산과 사직에 재앙이 될 것이 분명했다. 다만 황상이 태자와 7천하 모두를 의심하고 있을 텐데 태자가 이렇게 말하면 황상의 귀에는 어쩌면 모함하는 것으로 들릴지도 몰랐다. 만약 이렇게 되면 오히려 7황자의 뜻대로 되는 것이 분명했다.

태자는 한안이 고개를 젓는 것을 보고 물었다.

“너는 옳지 않다고 생각하느냐?”

태자는 저도 모르게 한안에게 물었다. 어쩌면 이 혐오스러운 여인의 몸에는 정말 특별한 것이 있어서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그녀를 신임하게 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한안은 그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황가의 일들이란 하나라도 많이 아는 것보다는 하나라도 적게 아는 게 낫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핏자국으로 가득한 태자의 작은 얼굴을 보고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전생이 떠올랐다. 인간은 죽음에 이르렀을 때야 일생에 달갑지 않은 것들이 많이 있음을 알게 된다. 사실 그녀의 전생과 태자는 많이 닮아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그에게 자그마한 것 하나 알려주는 것도 괜찮을 듯싶었다.

“전하께서는 총명하시니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든 진실을 말했다고 하여 다른 사람들이 믿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한안은 눈앞의 남자아이를 깊이 바라보았다. 마치 멀고 오랜 세월을 사이에 두고 전생의 천진했던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전하께서 보여주고 싶은 것을 남이 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태자는 아는 듯 모르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눈앞의 여인이 대단히 슬퍼하는 것 같았다. 마치 무슨 멀고 오래된 기억을 떠올린 것처럼. 그 느낌은 눈 깜짝할 사이도 안 되어 한안의 다음 말에 잘려나갔다.

“전하께서는 방금 전 왜 제가 아직 안 죽었느냐고 말씀하신 거죠?”

태자는 고개를 들었고 한안의 날카로운 눈빛과 마주쳤다. 그녀의 목소리는 경쾌하고 듣기 좋았다.

“잘못 말한 거라고 말하지는 마세요.”

태자는 추궁하는 것 같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돌리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어제 장 태사 부중의 여자 권속이 궁에 들어와서 태후를 뵀는데 본궁이 그 여자 말을 들었다. 현청왕비에게 좋은 선물을 하나 준비하려 한다고. 또 말하기를……, 장한명이 네 약점이라고…….”

남은 말을 더 듣지 않아도 한안은 전모를 전부 파악했다.

이 일이 대주씨와 관계가 있어? 주씨 자매가 자신에게 교훈을 주기로 결심한 거군. 한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전에 영자가 대주씨가 보낸 게 아닌가 의심을 품었던 것은 영자의 신분과 전생에 있었던 장한명의 청루 사건이 관련이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보니 영자는 정말로 대주씨의 사람이었다. 영자가 오늘 사건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영자는 그 사건에 한안을 확실히 끌어들였다. 만약 매화자와 우연하게 올라탄 마차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자신은 장한명과 함께 목숨이 황천에 가 닿았을 것이다. 주씨 자매가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하는 것은 예측이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태자가 추살 당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결국, 한 가지 가능성만 남았다.

주씨 자매가 자신과 장한명을 해치려고 자객을 사주했는데 누군가가 이 계략을 알고 혼란스러운 틈을 타 태자를 살해하려 한 것이다. 나중에 조사를 받으면 주씨 자매의 잘못만 나올 것이다. 여기의 누군가가 7황자인지 아니면 태후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일석이조라. 그러나 자신이 태자의 일에까지 연루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만약 그 사람들이 태자를 노리고 온다면 지금의 상황은 더욱 위험해질 것이다. 한안은 칼을 쥔 남자의 손등 위 무늬가 괴이한 도안이었던 것을 어렴풋하게 기억해냈다. 마치 서역의 풍속처럼. 설마 서융인가?

한안은 무언가 엉킨 실타래가 하나 더 있음을 깨달았다. 태자는 그녀와 혼수상태의 장한명을 번갈아 보며 이상하다는 말투로 말했다.

“너는 그에게 잘해주는구나.”

처음 한안을 만났을 때, 그녀는 동생을 보호하려는 듯했다. 태자는 그게 이상했다. 황가에서는 감정이 메말라 남매의 정 같은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동생 때문에 자신에게 감히 대들고 협박까지 했다. 그 사실에 화나 한안을 ‘가장 혐오하는 사람’ 중의 하나로 여겼다. 근데 그 여인이 나중에 현청왕비가 될 거라는 말은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부운석은 그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었고, 심지어 그의 마음속에서는 황상보다 지위가 더 높고 컸다. 어린 태자가 생각하기에 부운석은 수려하고 풍치가 있으며 멋스러웠고 재능과 무예도 천하제일이었으니, 당연히 천하제일의 여자가 그와 어울릴 수 있었다. 그런데 5품 관원의 딸, 더구나 겁 없이 함부로 날뛰고 법도도 지키지 않으며 여우처럼 교활한 여자가 현청왕비라니. 태자는 바로 달려가 부운석에게 물었다. 어째서 이런 여자를 찾은 거냐고.

부운석의 대답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다. 살을 엘 듯이 차갑기 이를 데 없는 그 왕숙이 희미한 웃음을 보이더니 얼음 샘이 처음으로 녹는 것처럼 따뜻하게 오직 세 마디 말을 했다.

“그녀는 아주 훌륭하다.”

부운석이 미인을 칭찬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그녀는 아주 훌륭하다’는 말 외에는 아무 부연 설명도 없지만 그 말에는 짙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 당시 태자는 이 신선 같은 왕숙이 그녀에게 홀린 거라 여겼다. 그런데 오늘 보니 좀 알 것도 같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적어도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안은 울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의 표정은 침착하고 느긋하기만 했다. 궁중에서 여러 해 지내면서 어린 태자가 가장 많이 본 여인의 표정은 바로 눈물이었다. 교태를 부리는 아름다운 눈물, 억울해하는 눈물, 원한에 찬 눈물, 가련한 눈물. 그러나 한안의 얼굴 위에 눈물이 나타난 적은 없었다. 다른 여자라면 오늘 같은 상황에 아마도 두려움에 빠져 참지 못하고 정신이 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한안은 침착하게 숨을 곳을 찾았다. 그녀와 함께 있으니 자신도 신중하게 변한 것 같았다.

그는 한안을 자세히 보았다. 한안의 머리카락은 군중 속에서 떠밀려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어서 우스꽝스러웠다. 그녀의 얼굴은 희고 깨끗했으며 아직 앳된 구석이 있어 보였다. 분명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소녀인데 어쩌면 저렇게 깊게 가라앉은 눈을 가지고 있을 수 있을까. 보석처럼 맑고 투명하지만 바닥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동굴 속에 숨어 있고 옷이 몹시 더러우며 자세가 괴상하고 어색하다 해도 그녀의 표정에는 고귀함이 무심히 흘렀다. 마치 천성적으로 타고나기를 높은 신분의 사람인 것처럼 침착하고 과단성 있으며 자부심이 넘쳤고 명확했다.

어린 태자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눈빛이 조금 멍해졌다. 이 순간에 진지하게 관찰해 본 적이 없는 이 현청왕비가 뜻밖에도 왕숙과 비슷하다는 것을 느꼈다. 위엄이 넘쳐 침범할 수 없고 모든 사람을 업신여기며, 위험한 처지에서도 아무런 감정을 내색하지 않는 점까지 모든 게 똑같았다.

한안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그를 향해 “쉿!” 하더니 동굴 입구 쪽의 소리를 들으려 했다.

그것은…… 말발굽 소리와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 소리였다. 대화의 내용은 한안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태자의 머리를 찾아가면 큰 상을 받을 수 있을 거야.”

중년 남자의 목소리 같았다.

“어디로 달아났는지 모르겠네. 분명 마차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다른 하나가 참을성 없이 대답했다.

한안은 바깥에 몇 명의 사람이 왔는지 알지 못했다. 발소리가 어지럽기는 하지만 나름 규칙적인 것이 훈련이 잘 되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저절로 긴장되었다. 태자도 숨을 죽였다. 그들의 발소리가 좀 더 가까워졌다. 마치 동굴로 걸어오는 것 같았다. 태자는 긴장한 탓에 실수로 장한명을 건드렸다. 장한명이 참지 못하고 신음소리를 냈다. 온통 고요한 탓에 신음소리는 크게 울려 퍼졌다. 한안의 심장이 조여들었다. 고개를 돌린 태자의 눈빛에 공포와 놀람이 가득했다. 발소리는 순간 멈추었다가 곧장 동굴 쪽을 향해 달려들었다.

발각됐다. 한안의 마음속에는 오직 이 생각뿐이었다. 만약 저 무리에게 발각되면 자신들 세 사람은 하나도 살아남을 수 없다. 그들의 목표물은 태자였다. 한안은 태자의 부장품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에게 결정권이 없었다. 발각된다면…… 발각된다면……. 그녀는 이를 악물고 몸을 돌려 손을 날쌔게 움직여서 태자의 겉옷을 벗겨 자신의 몸 위에 걸쳤다. 태자가 멍해져 미처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한안은 고개를 돌려 깊은 눈으로 그를 한 번 보았다. 그 눈빛 속에는 간절한 부탁이 들어있었다. 자신에게 장한명을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하는 건가? 그렇지만 그 눈빛 속에 더 많이 담긴 것은 단호한 결의였다. 그리고 한안은 바로 달려나갔다. 금포를 두른 그녀는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있어서 얼굴이 분명하게 보이지 않았고 체구는 태자와 비슷했다. 추격자들은 한안을 태자라 여기고 즉시 추격해 갔다.

동굴 안의 태자는 멍하니 그 자리에 웅크리고 있었다. 장한명은 혼절하여 깨어나지 않은 채로 그의 옆에 누워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어 자신의 울음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이 괴로워 죽을 것 같았다.

17장

성동의 산, 한안은 어려서 이곳을 즐겨 다녔다. 여기의 풀 하나 나무 하나가 익숙했기에 지형 상에 우세를 선점할 수 있었다. 그 사람들은 이곳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민족이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한안에게 이끌려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했다. 한안은 바위가 어지러이 겹겹이 쌓인 곳을 골라 뛰면서 시간을 끌 수 있었다.

마침 평탄한 구역이 나타났다. 칼을 든 남자들이 돌진해 들었다. 한안이 교묘하게 몸을 피했고 동시에 사내들은 자신들의 몸이 쑥 꺼지는 것을 느꼈다. 속으로 ‘큰일 났다’고 생각했으나 그들의 몸은 이미 아래로 빠지고 말았다.

그것은 늪지였다.

한안이 고개를 돌리니 몸집이 건장한 거한들이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황망히 그녀를 보았다. 이런 늪에 빠지면 건장한 남자라도 쉽게 나오진 못한다. 그들은 지금까지 이런 상황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한안이 긴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려 그 대한들은 그녀의 희고 깨끗한 아래턱이 살짝 들릴 때, 조롱과 냉기를 담은 웃음을 띠고 있는 입가만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단순히 대종의 어린 태자는 자신들이 상상한 것보다 더 교묘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뒤쪽으로 다른 한 무리가 빠르게 달려오자 한안은 즉각 앞으로 달렸지만, 이것이 그저 시간을 벌기 위한 계책일 뿐임을 알고 있었다. 바로 앞은 깎아지른 낭떠러지였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물러나려 해도 물러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리고 몸에 남은 마지막 매화자 하나를 꽉 움켜쥐었다.

그녀는 비로소 명확히 볼 수 있었다. 눈앞의 이 사람들은 중원 사람이 아니라 서융 사람이었다. 서융 사람은 어린 태자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한안이 금빛 찬란한 태자 옷을 입고 있는 것만 보고 그녀를 태자라 짐작한 것이다.

한안은 그 자리에 조용히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놀라고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도 도망치지 않았고 울부짖으며 목숨을 구걸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웃음 띤 얼굴을 들어 올렸다. 사지에 몰린 고독한 야수가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되니 추격자들도 방심할 수가 없었다. 어린 태자는 지나치게 교활했다. 방금 전 늪지에서도 이미 큰 피해를 입었다. 대종의 어린 태자가 웃는 얼굴을 드러내니 무슨 음험한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한순간 덮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했지만 감히 앞으로 나서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일 대 칠. 한안은 묵묵히 상황을 가늠했다. 어쨌든 자신 쪽은 승산이 없었다. 이 사람들은 분명 자신을 놓칠 리 없었다.

그때 추격자 중 한 명이 참지 못하고 큰소리를 지르며 한안에게 달려들었다. 한안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에게 잡혔다. 남자는 그녀의 목을 누르고 한 손으로 그녀의 팔을 잡아챘다. 한안은 피할 방법이 없었다. 한순간 그의 손에 잡혀 닭처럼 들어 올려졌다.

“대종의 태자도 이것밖에 안 된다!”

이처럼 수월하게 상대를 제압할 줄은 생각지도 못한 듯 남자는 득의양양하게 큰 소리로 웃었다. 한안은 머리를 숙이고 가냘픈 팔을 무기력하게 늘어뜨렸다.

“하하, 너희 봐봐라. 황가의 태자가 곱고 부드럽게 생겼구나. 이 작은 팔은 우리 서융의 아낙보다 더 하얗네?”

남자는 말을 마치고 손을 뻗어 한안의 이마 앞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걷어 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명확히 보자마자 바로 멍해졌다. 이어서 침을 꿀꺽 삼켰다.

“이 꼬맹이 태자가 어린 아가씨처럼 생겼구나. 이렇게 죽이기는 너무 아까운걸. 아니면 내가 먼저 좀 놀아 볼까…….”

남자는 말을 마치고 한안을 땅에 내동댕이치더니 바지 허리끈을 풀기 시작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동료가 태자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바로 안도했다. 분주히 뛰어다닌 탓에 모두들 지친 상태였다.

“혼자 즐겨선 안 돼. 조금 이따가 형제들도 좋은 맛을 보게 해줘야지.”

서융의 풍조는 괴팍해서 사내아이를 사육하는 일도 흔했다. 그들 모두 한안이 미모의 소년이라 여기고 곧 죽을 사람이니 자신들이 좀 데리고 놀면 어떤가 라고 생각하고는 삿된 마음을 먹은 것이다. 한안은 이미 반항할 힘이 조금도 없는 사냥감이었다. 남자는 완전히 마음을 놓고 쪼그리고 앉아 음탕하게 웃으며 한안의 옷을 벗기려 했다. 한안은 놀라 연거푸 뒤로 물러났다. 남자는 뒤로 물러서는 한안을 보고는 손이 근질근질해졌다. 한안은 조금 비틀거리며 뒤쪽을 향해 기어갔다. 나머지 사람들은 재미있다는 듯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남자는 크게 하하 웃으며 기꺼이 해보자 싶어 느긋하게 그녀를 쫓았다. 한안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남자는 한안을 붙잡고 흉물스럽게 웃으며 몸을 굽혀 옷을 벗기려 했다. 한안의 새까맣게 빛나는 눈동자에 한기가 스친 것은 그때였다. 뒤이어 남자의 왼쪽 눈에 통증이 느껴지며 핏빛이 맹렬하게 확 번졌다.

“악!”

처절한 비명소리에 숲속을 날던 새들이 놀라 날아올랐다. 나머지 사람들은 갑작스런 변고에 아무것도 못 하고 입만 벌렸다. 한안은 피가 떨어지는 매화자를 쥐고는 살을 엘 듯한 한기가 번뜩이는 눈빛으로 추격자들을 노려보았다.

왼쪽 눈을 가린 남자의 손가락 사이로 끊임없이 피가 흘러나왔다. 반항할 힘이 조금도 없어 보이던 소년이 갑자기 눈을 찌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한안은 남자가 정신 차릴 틈도 주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거구를 한 발로 걷어찼다. 남자는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낭떠러지 밑으로 추락했다.

그녀의 사부인 시정이 말한 적이 있었다. 살인은 무슨 방법을 쓰든 결코 상관없다고. 중요한 것은 그를 죽여 버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느냐 없느냐 라고.

그녀는 피가 묻은 매화자를 소매 속에 넣었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남자가 떨어뜨린 대도를 집어 들고 눈앞의 사람들을 냉랭하게 살펴보았다.

이 자리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몇 놈은 끌고 갈 심산이었다. 그녀의 눈빛은 무시무시했다. 옷 위와 얼굴에도 피가 튀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한층 더 두드러지게 희고 깨끗했다. 보기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붉은 빛과 순결한 흰 빛의 대비가 유달리 섬뜩했다.

그녀 홀로 낭떠러지 앞에서 대도를 쥐고 서 있었다.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날렸지만, 소녀는 움직이지도 피하지도 달아나지도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다. 그 모습은 추격자들의 목숨을 앗으러 지옥에서 온 아수라와 같았다.

아무도 경거망동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추었다. 누군가 한 명이 그녀의 진실을 알아챈 듯 했다.

“태자가 아니다. 여자다!”

나머지 사람들도 시선을 집중했다. 만약 이 사람이 여자라면 그럼 대종 태자는 아니다. 그럼 이 여자는 누구지?

“너는 누구냐?”

한 사람이 물었다.

한안은 고개를 높이 들고 크게 웃었다. 평생 지금처럼 이렇게 미친 듯이 제멋대로 웃어본 적은 없었다. 설령 이 사람들이 그녀가 태자가 아닌 것을 알게 된다 해도 그녀를 살려둘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를 잡아 태자의 행방을 추궁할 것이다. 그녀는 당연히 말할 생각이 없었다. 태자뿐만 아니라 장한명을 위해서라도. 어쨌든 달아나지 못하고 죽게 될 판국이니 이 사람들에게 예의를 갖추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바로 대종의 태자다.”

그녀의 행동은 진중하고 냉정했으며 침착하고 태연자약했다. 목숨 걸고 나쁜 짓을 해온 악당들의 눈에도 반평생을 넘게 살아오면서 본 적 없는 여자 부류였다. 여리고 작은 소녀 모습인데 일 처리는 세상사를 다 겪어 본 성인같이 교활하고 총명하며 악랄했다. 그러면서도 고귀하고 위엄이 넘치니 만만히 여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누구지?

그들은 이 소녀가 보통 신분이 아니라고 믿었다. 황가 사람일 가능성도 있었다. 어린 소녀에게 농락당하고 동료까지 잃었다는데 생각이 이르자 화가 치밀었다.

“태자가 아니라면 목숨을 내놓아라!”

추격자들은 칼을 들고 달려들었다.

동굴 속의 태자는 긴장하여 부르르 떨었다. 바깥에서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심지어 방금 전보다 사람 수가 더 많은 듯했다. 그는 혼절하여 깨어나지 않는 장한명을 돌아보았다. 자신과 그가 재앙에서 달아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다. 장한안이 목숨을 내놓고 탈출구를 마련해 주었지만 보아하니 이 탈출구는 그다지 평탄하지 않을 것 같았다. 장한안을 떠올리자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슬프고 괴로웠다. 왕숙이 알면 상심할 게 분명했다.

깊이 생각하는 사이에 발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태자는 이를 꽉 물었다. 눈빛 속에 온통 절망이었다.

손 하나가 동굴 앞의 잡초를 걷어 냈다.

하늘빛은 어두워진 듯했고 얼음처럼 차가운 바람이 동굴 입구를 사이에 두고 쏟아져 들어왔다. 태자의 온몸에 한랭한 기운이 침습했다. 얼어붙은 이가 딱딱 부딪치는 소리가 동굴 안을 울려 퍼졌다. 동시에 바람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다.”

바람이 삽시간에 따뜻해졌다.

목숨을 구해줄 지푸라기를 잡은 것처럼 태자는 간절히 졸이고 있던 마음을 탁 놓고 말았다.

“왕숙!”

부운석은 위로하듯 그의 등을 토닥였다. 눈빛이 쓰러진 장한명 몸 위에 떨어지더니 뼛속까지 스밀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어디 있느냐?”

태자는 부운석이 말하는 사람이 장한안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를 악물고 가까스로 고개를 들고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갔습니다.”

부운석은 두말하지 않고 즉시 시위 몇에게 태자를 보호하라고 분부하고 자신은 몸을 돌려 말에 올랐다.

“왕숙!”

태자가 뒤에서 불렀다. 부운석이 고개를 돌렸다. 어린 태자의 눈빛은 망설이다가 희망을 담았다.

“그녀는 아직 살아있겠죠, 그렇죠?”

부운석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마편을 휘둘렀다. 말은 급히 달려 나갔다. 부운석의 눈빛은 물처럼 담담했지만 꽉 다문 입술이 그의 마음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장한안, 살아 있어야 한다.

낭떠러지 위는 피비린내로 가득했다. 7명 중 2명이 이미 죽었다. 급계도 하지 않은 어린 소녀가 휘두르는 대도에 8척 키의 우람한 남자 둘이 찍혔다. 지금까지 이렇게 목숨을 아끼지 않는 소녀는 본 적이 없었다. 소녀라고 말하기에도 조금 과분했다. 거치적거리는 겉옷이 벗겨져 얇은 옷에 감싸인 몸을 보면 분명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그런데 어찌 저렇게 흉악하고 잔인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단 말인가.

살 떨리고 무시무시한 대치 중이지만 한안은 이미 상처가 겹겹이었다. 그녀가 체력이 다해 더 이상 버티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자 한 명이 등 뒤에서 묵직하게 일격을 가했다. 심장 전체가 흔들리는 느낌을 받으며 한안은 쓰러졌다. 피가 안개처럼 흩어졌다. 몸부림치며 일어서려 했지만 다른 사람이 한 발로 그녀의 오금을 걷어찼다. 두 다리에 힘이 풀리며 한안은 무릎을 꿇었다. 그래도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얼굴 위에 피 얼룩이 가득했다.

이 세상에서 사람 뜻대로 할 수 없는 것들 중 하나는 생명일 것이다. 한안의 입가에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히 행동하고 엄밀히 방어했는데 결국은 남의 손에 죽게 되는 결말에서 벗어나지 못했구나. 이것이 하늘이 그녀에게 정해준 운명일까? 그렇다면 구태여 다시 한번 살아갈 기회를 왜 주었을까? 그녀는 하늘이 불공평한 것을 원망하고 그녀를 해친 그 사람들을 원망했다. 시정이 가르쳐 준 몇 동작에 의지해서 죽더라도 함께 죽고야 말겠다는 기세로 두 명을 죽이긴 했다. 그녀에게는 일말의 자비심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소리 내어 웃었다.

“한 목숨으로 세 목숨을 바꾼 셈이니 이득이로구나.”

누군가 뒷머리에 묵직한 일격을 가했고 뒤이어 칼끝이 번뜩이며 곧장 그녀의 목덜미를 내리쳐 왔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달아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도 괜찮다.

맑은 바람이 짧게 일더니 사람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뜨거운 피가 흙 위에 찬란히 튀었다.

그러나 땅에 떨어진 것은 다른 사람의 머리였다.

우람한 남자의 머리와 몸은 이미 각기 분리되어 다른 곳에 떨어져 있었다. 나머지 사람들이 공격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준마가 내달리는 사이에 흰옷이 날리면서 번개처럼 빠른 움직임으로 그저 ‘솩, 솩, 솩’ 하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맑은 바람은 말이 없었고, 사방에는 죽음의 정적이 내려앉았다.

한안은 천천히 눈을 떴다. 부운석이 말 위 높은 곳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 속에는 미처 거두지 못한 살기가 담겨 있었다. 죄업에 물든 타락한 신선이 사악한 기운에 사로잡힌 것 같았다.

검에서는 아직도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한안은 웃음을 짜내었다. 어쩌면 그를 위로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바로 손을 내밀었다.

“저는 괜찮아요.”

말을 마치자마자 눈앞이 까매졌고 그녀는 의식을 잃었다.

부운석은 몸을 날려 그녀를 끌어안고 말 위로 돌아왔다. 만사를 여유롭게 처리하던 여자는 처참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그는 마음 깊은 곳에서 안도의 숨을 내쉬며 저도 모르게 그녀를 더욱 꼭 끌어안았다.

다행히, 그녀는 살아 있었다.

긴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꿈속은 군데군데 선혈이 낭자했고 수많은 사람이 칼을 들고 자신을 압박하며 다가왔다. 날카로운 작은 소리가 귀를 가득 채워 고개를 돌려 보니, 장어산과 주씨의 흉악한 얼굴이 눈앞에 가까이 와 있었다. 어머니는 침상에 누워 숨이 끊어질락 말락 했고 7황자가 큰 손을 한 번 휘두르자 장한명을 참수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한명은 땅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한안은 자신의 몸이 하늘하늘 나는 것 같았고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녀는 무언가를 잡으려 했지만 옷자락이 손끝에서 미끄러져 허공만 잡힐 뿐이었다. 그녀는 죽은 것일까? 어째서 이렇게 사람의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픈 장면이 보이는 거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두려울 정도로 절망적이었다.

죽음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랑도, 증오도, 그 무엇도 남을 리 없다. 지금까지 그녀가 있었다는 흔적 같은 것은 없는 것 같았다. 그녀는 얼굴을 가리고 크게 소리 내어 울었다.

그러다 자신이 따뜻한 품속에 감싸여 있음을 느껴졌다. 이렇게 안정을 시키는 목소리는 누구일까? 모든 두려운 것들을 몰아낼 수 있는 신기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귓가에 대고 가볍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누굴까? 한 마디 한 마디가 따뜻하고 부드러우며 흔들림 없었다.

“장한안.”

부운석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소매를 꽉 잡고 놓지 않고 있는 소녀를 보았다. 그녀가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눈물이 끊임없이 흘렀다. 지금까지 이렇게 연약한 한안은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마음속이 복잡했지만, 그녀를 잃었다가 되찾은 기쁨이 더 컸다. 태자가 한안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려주던 기억이 아직 생생했다. 오늘의 일은 누군가의 음모였다. 목적은 바로 태자이며 처리하는 김에 한안 남매를 해치려 했던 것임을 수월히 추측할 수 있었다. 한안은 태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스스로 미끼가 되어 서융인들에게 둘러싸여 위태롭고 절망적인 상황을 맞았을 것이다.

그는 심장이 경련을 일으킬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항상 침착하고 냉정한 그였으나 처음으로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느낀 순간이었다. 그녀를 잃을까 봐 두려웠다. 앳된 기색을 띤 작은 얼굴을 다시 볼 수 없게 된다면, 그녀가 정색을 하며 진지한 말투로 부드럽게 ‘왕야’라고 부르는 것을 듣지 못하게 된다면, 그의 일생에 이 수수께끼 같은 소녀가 없다면, 인생이 얼마나 무의미할까. 부운석은 세상의 모든 것을 세 부류로 나누었다. 그가 원하지 않는 것 하나, 그의 것 하나, 그리고 남은 하나는 바로 한안. 그가 원하는 것은 누군가가 알아서 간절하게 바쳐 올렸다. 원하지 않는 것은 터럭 하나도 닿게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한안을 그런 식으로 쉽게 대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씩 조금씩 그녀의 방어선을 와해시키며 그녀의 마음에 들어섰다.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

잠든 한안이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표정이 유약했다. 그는 자신이 한안을 본 그 순간을 떠올렸다. 온몸이 피투성이인 소녀가 땅에 무릎을 꿇고서 한 손에 빛나는 대도를 쥐고 버티고 있었다. 칼날보다 더 빛나는 것은 그녀의 눈이었다. 주위에 선혈이 군데군데 있어 한눈에 그 참상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의 입술은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눈빛에는 슬픔과 절망이 서려 있었다.

소녀가 이런 눈빛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이 세상의 모든 고초를 두루 겪어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오직 죽음뿐인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그런 모습에 가슴이 아파 이성을 잃고 살인을 했다. 사실 배후를 밝혀내기 위해서는 목숨은 남겨두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설령 심문하지 않더라도 배후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누구도 그녀를 털끝 하나라도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그녀를 상처 입혔으니 살려둘 수 없었다.

부운석은 한 손을 뻗어 그녀를 부드럽게 잡았다. 처음부터 그녀에게 흥미가 있었다. 나중에는 그녀가 상처받지 않도록 보호하고 싶었다. 이제는 이렇게 그녀의 일부분, 털끝 하나에도 긴장하고 있었다. 순간 그는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다. 부운석은 한안을 좋아하고 있었다. 보통 사람의 입장에서 좋아한다는 말은 별 대수로운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부운석의 입장에서 좋아한다는 감정을 갖게 된 여자는 장한안이 처음이었다.

그는 몸을 숙였다. 얼음처럼 서늘한 입술이 가볍게 한안의 이마에 닿았다. 한안의 미간이 살짝 풀어졌다. 그의 눈에 따스함이 스쳤다.

얼마 오래 잤는지 모르겠다. 한안이 깨어났을 때는 이튿날 새벽이었다. 급람이 그녀의 침상 옆에 엎드려 곤히 자고 있었다. 한안이 몸을 움직이자 곁에서 손수건을 비틀어대고 있던 주홍이 놀라고 기뻐하며 소리쳤다.

“소저!”

한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떻게 이곳에 있는 거야?”

주홍은 자신의 부상도 아직 낫지 않았는데 어찌 남을 시중들러 나올 수 있단 말인가.

급람도 깨어나서 한안이 의식을 회복한 것을 보고는 울고 웃으며 말했다.

“마침내 깨어나셨군요.”

주홍도 가까이 와 한안의 손을 움켜잡았다.

“소저, 소저께서는 앞으로 노비들을 이렇게 두렵게 하지 마세요. 만약 변고라도 일어났다면…….”

진중한 성격의 주홍의 두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누구도 몰랐다. 주홍은 부중에 편안히 머물러 있다가 앞뜰의 여종이 봄 제사에 일이 생겼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불안하다 느끼던 중에 사람들이 급람을 데리고 돌아왔고 그와 동시에 한안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두 여종은 죽을 정도로 초조했다. 비상시기라 누구도 부에서 나가서는 안 된다는 명령에 급람은 왕야의 측근 시위와 크게 말다툼까지 벌였다. 나중에 왕야가 말을 채찍질하여 돌아왔다. 전신이 피투성이인 한안을 안고서. 왕야는 부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오 태의를 부르게 하여 모든 사람들이 기겁할 정도로 놀랐다. 급람과 주홍 또한 혼비백산할 정도로 놀랐다.

지금까지 한안이 그렇게 많은 피를 흘린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몸에 온통 칼자국이었다. 한안은 왕야의 품속에서 혼절한 상태였고 영원히 잠들어 버릴 것 같았다.

태의가 서둘러 와서 한안의 상처를 잘 싸매고 요양을 잘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급람과 주홍은 죽을 것처럼 걱정이 되어 오래도록 부탁한 끝에야 한안을 돌봐도 된다고 허락을 받았다.

한안은 웃었다.

“괜찮아. 왕야는?”

어젯밤 어렴풋이 부운석이 곁에 있는 것을 느꼈다. 깨어나서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자 조금은 낙담했다.

급람의 얼굴에는 아직 눈물이 매달려 있었지만 살풋 웃으며 말했다.

“소저, 걱정 마세요. 어젯밤 왕야께서는 잠시도 떠나지 않고 소저를 지키셨어요. 물로 상처를 닦는 것조차 왕야께서 손수 하셨어요. 왕야께서는 소저를 진심으로 대하세요. 하지만 오늘 아침에 바로 조정에 나가셨어요. 황상께 어제의 자객 사건을 보고하시려는 것 같았어요.”

부운석이 잠시도 떠나지 않고 자신을 지켰다는 말을 들은 한안은 기분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부운석은 매번 자신이 위험에 처할 때마다 구해주었다. 감동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죽을 거라고 생각한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내가 죽으니 곧 현청왕비가 바뀌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그 불편한 느낌이란. 마치 자신의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제로 뺏긴 것 같았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바깥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님!”

한안은 고개를 돌렸다. 장한명이 얼굴 가득 부끄러워하는 모습으로 문 입구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문을 넘어서 들어오고 싶지만, 감히 그러지 못하며 어찌할 바 모르고 문 입구에서 주저하고 있었다. 한안은 말없이 조용하게 그를 보고 있었다.

장한명의 눈에 갑자기 눈물이 솟아 나왔다. 어제 군중이 혼란해지기 시작했을 때, 영자가 돌연 그를 끌어당겼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영자가 그를 계속해서 혼란의 중심으로 끌어당길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한명은 있는 힘을 다해 벗어나고 싶었지만, 영자가 칼을 그의 등을 바짝 대고 있었다. 장한명은 놀랐고 곧바로 분노했다. 그는 지금까지 이 아이를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영자를 편들기 위해 한안과 말다툼까지 했다. 하지만 이제 명백히 깨달았다. 영자는 목적이 있어서 온 것이었다. 영자는 그를 협박하여 계속 걸어가더니, 갑자기 한 발로 그의 등을 걷어찼다. 그 발길질은 유약한 어린아이가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분명 무술을 익힌 적이 있는 것이었다. 그때 칼을 쥔 남자가 달려들어 주먹질과 발길질을 했다. 이상한 것은 상대방은 그의 목숨을 앗으려는 것 같지가 않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옆에서 영자가 놀라고 당황하여 어찌 할 바를 모르는 듯 크게 소리쳤다.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았다. 그는 혼절했고 그 뒤 상황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깨어났을 때는 이미 장부에 도착해 있었고, 여종의 입을 통해 한안이 그와 태자를 구하기 위하여 홀로 위험을 맞닥뜨리러 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끄러움, 후회, 분노, 괴로움이 마음속에서 솟구쳤다. 그는 현청왕부에 도착해서 한안이 부상을 당했다는 것을 알고 더욱 안절부절못했다. 한안의 부상 상태가 걱정되는 한편, 그녀를 대할 면목이 없었다.

지금 한안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몸에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저렇게 미적지근한 태도는 여전히 그의 마음을 괴롭기 그지없게 했다.

한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무사하니까, 너는 돌아가 보거라.”

한안의 말투는 냉담했다. 장한명은 괴롭고 답답했지만, 감히 그녀를 화나게 할 수 없었다. 자신이 악심을 품은 낯선 이를 위해 한안의 마음에 상처 입힌 것을 알고 있었다. 한명은 마음속으로 자신을 향해 끝없이 욕을 했다.

“누님, 그럼 저는 갈게요.”

말을 마치고 한안을 한 번 보았다. 한안이 창밖의 풍경을 보고 있는 것을 보고 한안은 고개를 숙이고 떠났다.

급람과 주홍도 감히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녀들의 마음은 한안에게 기울어 있었다. 어려서부터 한안은 한명을 항상 친밀하게 대했다. 부인 사후에는 더욱 한명을 위해 계획을 짰다. 그런데 한명은 지난번에 옳고 그름을 분간하지 못하고 한안과 말다툼을 했고 이번에는 한안이 이런 화를 당하게끔 했다. 많든 적든 간에 아직 원망의 마음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장한명이 낙담한 모습을 보고 마음이 풀어진 급람이 참지 못하고 말했다.

“소소야께서 참으로 가엾게 되셨습니다.”

어려서부터 거대한 풍랑을 겪은 소소야. 멀쩡하던 모친은 중년에 세상을 떴고 부친은 아껴 주지를 않았다. 마음이 단순하고 선량한 아이가 남에게 기만당하고 자신의 누나는 마음이 떠났다.

“이건 그 애를 위해 잘된 거야.”

한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지금은 그 애를 보호할 수는 있지만 일평생 보호할 수는 없어. 그 애 스스로 똑바로 보고 이해할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야.”

장한명은 아직 세상의 음험하고 잔인함을 알지 못했다. 만약 누군가가 한명을 이용한다면 그들의 바둑돌이 되기 쉬웠다. 한명을 돌보는 데만 신경을 쓰다가 놓친 게 있었다. 일단 자신이 현청왕부로 시집가고 나면 장한명은 고립무원이 된다. 한명은 이제 스스로 강해져야만 다른 사람에게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번 일은 하나의 교훈에 지나지 않았다. 적어도 장한명은 나중에 이런 상황을 다시 겪게 되면 그 본질을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하나쯤은 늘어 있을 것이니 적어도 이번처럼 경솔하지 않을 것이다. 대저택 안은 사람을 잡아먹는 곳으로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곳이 아닌가. 두 남매가 어떤 위치에 있든 한안은 장한명이 충분히 똑바로 보고 이해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주홍은 가라앉은 한안을 보고 서둘러 화제를 바꾸었다.

시끌벅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정오에 가까워졌다. 급람과 주홍은 소주방에 가서 일을 도왔고, 한안은 방 안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의 일을 떠올리니 저도 모르게 조금 넋이 나갔다.

7황자와 태후가 대범하게 일을 벌인 것을 보니 그들의 참을성이 이미 다한 것 같았다. 하지만 황상은 어찌 수수방관할 수 있을까. 분명 격노할 것인데. 설마 그들은 들통날 것도 겁나지 않은 건가? 한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서융은 어떻게 대종과 엮인 걸까? 심지어 서융인들은 목숨을 내걸었다. 누가 서융과 관계가 있는 걸까? 태후? 7황자? 아니면 다른 사람이 있는 건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탁칠을 떠올렸다. 서융의 황실 사람으로서 이번 일에 일부분 참여했을까? 생각을 거듭할수록 눈빛이 무거워졌다.

“이봐!”

목소리 하나가 갑자기 들려왔다. 한안이 놀라 눈을 들어보니, 뜻밖에 태자였다.

오늘 어린 태자는 금빛 찬란한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옅은 붉은 색의 장포 때문에 피부가 하얗고 부드러워 보였다. 제멋대로인 거만함은 줄었고 얼마간 순진함이 돋보였다. 그는 불만스레 한안을 보았다.

“본궁이 너를 여러 차례 불렀다. 어찌 대답이 없어?”

한안은 묵묵히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모양새로 입든 간에 태자의 성질은 반 푼어치도 변하지 않은 모양이다.

“방금 전에 생각할 일이 있어서 잠시 한눈을 팔았습니다. 전하께서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비록 입으로는 이렇게 말했지만 표정과 행동이 어디 황공한 모습일까. 태자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것 같았다.

“무엄하다!”

태자는 화가 나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하지만 한안이 조금도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더니 바람 빠진 공처럼 아예 한옆의 의자에 앉았다.

“본궁이 오늘 온 것은 네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다.”

그는 가볍게 두어 번 헛기침했다.

“여봐라, 물건을 들여와라.”

바깥에서 지키고 있던 시위가 바로 쓱, 쓱, 쓱 하더니 커다란 상자 세 개를 들고 들어왔다.

한안의 예상을 넘어선 것이라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전하, 뭐 하시는 것입니까?”

태자는 시위들에게 상자를 열어서 보여주라는 표시를 했다. 첫 번째 상자는 은자로 가득했다. 한안은 머리가 아팠다. 현청왕부에는 은자가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은자야 많을수록 좋고 자신이 비상금을 만들든 장한명을 보조하든 하면 되겠지만 이 은자는 태자가 준 것이었다. 결코 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태자는 오늘 온 것이 황상의 뜻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며 성지를 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 이 물건들은 당연히 황상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태자 나이가 아직 어려서 황상이 사치해서는 안 된다고 엄히 가르친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어쩌면 이 어린 태자는 자신보다도 풍족하게 지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결코 받을 수 없는 은자였다.

그녀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지 않고 두 번째 상자가 열렸다. 상자 안에는 대단히 아름다운 남해 홍산호가 있었다. 한안은 의심이 들었다. 자신이 두 세상을 살면서 이렇게 좋은 물건은 본 적이 없었다. 색이 선명하고 우수한 것이 궁중 귀비나 황후라야 쓸 수 있는 공물일 것이었다.

세 번째 상자를 열자마자 한안은 멍해졌다. 안에는 병과 단지들로 가득한 것이 희한했다. 태자는 한안의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을 보고 득의만만해졌다.

“이것들은 궁중의 진귀한 약재로 각종 해독약, 상처와 병을 치료하는 약환이야. 본궁이 사람을 시켜서 오랫동안 도처에서 찾아 가까스로 한 상자를 만들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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