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씨가 오지 않은 것은 어쩌면 남들의 구설에 오르내리는 것이 두려워서인지도 몰랐다. 주씨가 격분하여 이를 부득부득 갈며 증오하고 있을 모습을 떠올리니 한안은 저도 모르게 살짝 즐거워졌다.
등선이 의아해하며 말했다.
“네 주변에 시빗거리가 정말 많다. 하나가 가면 또 하나가 오니, 원.”
등선은 무언가 떠올리고는 웃었다.
“하지만 이젠 다행이야. 현청왕비가 되었잖아.”
그녀는 부러움이 가득한 얼굴로 한안을 보았다.
“이전에는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그 사람이 너의 부군이 될 줄이야. 게다가 금생금세 오직 너 하나만 있을 거라니 정말 부러워 죽겠어.”
한안은 과자를 깨물고 그녀에게 농담을 했다.
“내가 보기에 언니가 시집가고 싶은 것 같은데? 이렇게 부운석을 좋아하니 그를 언니에게 주면 어떨까? 언니가 현청왕비가 되는 거야.”
등선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녀를 살짝 밀쳤다.
“별 터무니없는 소리를 다 하네. 나는 결코 그를 좋아하지 않아. 얼음처럼 차가운 사람이잖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성…….”
등선은 스스로 실언한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서둘러 남은 말을 삼켜버리고 허둥거리며 한안을 보았다.
한안은 일부러 소리를 길게 끌었다.
“서엉…… 장군이지?”
등선은 다급해져서 서둘러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쪽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한안을 한 번 때렸다.
“터무니없는 말 하지 마.”
한안은 정말로 즐거웠다.
“말 안 하면 되지 뭐. 아무튼, 언니가 정말 좋아한다면 대담하게 자기 마음을 털어놔. 그도 언니를 좋아한다면 바로 이루어지겠지.”
한안은 전생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감정을 마음속에 묻어두고 숨기며 그저 멀리서 그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 사람의 진정한 모습이 꼭 세상 사람들의 눈 속에 비치는 그 모습과 같다고 할 수는 없었다. 후회하고 싶지 않다면 감정이 깊어지기 전에 모든 것을 분명하게 알아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등선은 아래턱을 괴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마음을 몰라…….”
근심에 빠진 소녀의 모습을 보니 마음은 이미 움직인 것이리라. 한안은 어떻게 그녀를 위로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한숨을 내쉬며 더는 말하지 않았다.
연회가 절반쯤 진행되었을 때, 한 궁녀가 돌연 모두에게 조용히 하라는 의사 표시를 했다. 한안이 막 술잔을 내려놓는데 태후의 말이 들렸다.
“현청왕비.”
한안은 놀랐지만 이내 일어서고 웃으며 말했다.
“태후 마마, 무슨 분부가 있으십니까?”
“애가 쪽으로 오너라.”
그녀가 말했다.
한안은 마음속으로 비록 망설였으나 내색하기는 쉽지 않은지라 웃으며 태후의 앞으로 걸어갔다. 태후가 무언가를 손짓하는 것이 보였다. 분홍색 궁의를 입은 궁녀 하나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손에는 쟁반을 하나 받쳐 들고 있었다.
한안이 흘끗 보니 은쟁반 가운데에 벽옥으로 만든 작은 술 주전자 하나, 부드러운 손수건 하나, 매우 둥글고 작은 술잔 하나가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가슴 속에서 쾅 하고 천둥이 쳤다. 전생, 혼인의 날, 방 안에 가득하던 선명한 붉은 색, 그 한 잔의 독주가 장을 통과하여 배 속으로 내려가던 기억이 갑자기 눈앞에 떠올랐다.
태후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운석은 애가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아들이야. 네가 그의 왕비가 되었으니 애가가 특별히 네게 맑은 술 한 잔을 하사하겠노라.”
궁녀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와 매우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잔을 잡아 올렸고 다른 한 궁녀가 술을 잔에 가득 따라서 한안 앞에 건넸다.
한안의 입가 미소는 굳어져 있었다. 자기 앞의 술잔을 투과하여 자신의 처참한 죽음이 보이는 것 같았다. 태후의 의도가 좋지 않음은 의심할 바 없는 일이었다. 이 술은 그저 평범한 술이 아니었다. 그녀는 마실 수 없었다.
태후는 그녀가 오래도록 궁녀 손의 술을 받지 않는 것을 보고 표정이 순간 의미심장하게 변했다.
“장 낭자, 어찌 애가의 술을 받지 않는 것이냐?”
이 술을 어떻게 받아야 할까? 한안은 자신의 이중적인 모습을 발견했다. 태후의 숨 막히는 압박에 어쩔 줄 몰라하는 한 모습과 조용히 모든 것을 지켜보며 냉정하게 마음을 억제하는 한 모습.
진 귀비가 경고하며 말했다.
“장 낭자가 이 술을 받지 않으면 모후께 불경하는 것이야. 모후께서 드물게 너를 아끼시는데 호의를 몰라보아서는 안 되지 않느냐.”
매서운 말이었다.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순간 딱딱하게 변했다. 내내 덤벙거리던 등선조차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한안이 어째서 태후가 하사한 술을 받지 않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진 귀비의 기세등등한 말투는 어이가 없었다. 한안이 걱정스러웠다. 옆에서 장어산이 웃는 얼굴을 하는 것을 보니 눈에 거슬렸다.
황후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
“동생은 구태여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가 있는가. 장 낭자는 나이가 어리니 좀 겁을 먹은 게지.”
그녀는 한안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지난번 이 어린 아가씨가 비위를 잘 맞춰주어 즐거웠던 것이다. 오늘 태후와 진 귀비가 한안을 겨누고 있는 것을 진즉에 알아챘다. 하지만 후궁 우환거리는 이미 충분히 많기에 이 구정물을 건너고 싶지는 않았다. 태후와 진 귀비는 지나치게 공공연한 짓거리를 하고 있었다.
황상은 자신의 동생 부운석을 가장 아끼고 사랑했다. 그리고 부운석이 금란전의 사람들 앞에서 한안을 처로 맞이하겠다 한 것은 분명 이 어린 아가씨를 마음에 둔 것이다. 지금 만약 이 어린 아가씨가 궁중에서 무슨 변고라도 당하면 후궁의 주인인 황후 자신이 그 일에 휘말려 드는 것을 면하기 어려웠다. 황후는 온화하게 말했다.
“장 낭자는 아무래도 겁을 먹은 것이지? 어서 그 술을 조금만 마시거라. 태후의 정성을 그르치지 말고.”
한안은 이 술을 결코 받아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이 술에 대한 공포심을 참아냈다. 주위의 사람들을 한 바퀴 둘러보고 슬픈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여기에는 그녀를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급람과 주홍은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그녀들도 한안이 그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태후와 진 귀비가 자신들의 잘못을 잡고 한안에게 벌을 내릴 것이다.
한안은 손을 내밀어 그 술잔을 받았다. 맑고 차가운 술을 보고 있으니 마음속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태후와 진 귀비는 분명 무슨 수를 숨기고 있었지만 감히 궁중 귀부인과 황후의 면전에서 대담하게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입이 많으니 자신이 이 자리에서 죽는다면 큰 사달을 초래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이 술 속에 도대체 무엇을 첨가한 걸까?
그녀는 고개를 숙여 보았다. 이 술 속에 더한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여기에서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는 없다는 것이 나중에도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술 속의 물건 때문에 지금 당장 발작하지 않고 나중에 발작한다고 해도 태후를 탓할 수는 없었다. 태후와 그녀 사이에 아무 원한이 없는데 누가 믿을 수 있을 것인가? 이 술은 아마 나중에 그녀를 사지로 몰아넣을 것이 분명했다.
안 마실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황후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니까. 만약 마신다면 살 길을 도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근본적으로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만두자, 그만둬. 어쨌든 이번 생. 그녀가 다시 생을 살러 온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지 않았나. 피로써 피를 씻게 하려 했을 뿐이다. 만약 자신이 죽는다면…… 만약 자신이 죽는다면……. 그녀는 고개를 들고 태후와 진 귀비를 향해 우아하게 생긋 웃었다.
“태후 마마께서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한안은 그저 태후 마마께서 한안을 이처럼 돌보아 주시니 반드시 큰 선물로 답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말은 진지하고 성실했다. 그러나 눈빛은 맑고 얼음처럼 차가운 샘물 같아 듣는 이의 마음 밑바닥까지 스며들어 한기를 느끼게 했다.
“그때 가서 태후 마마께서는 내버리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말 속에 있는 듯 없는 듯한 위협과 암시가 듣는 이들의 마음을 놀라게 했다. 태후는 자애롭게 웃었다.
“네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니 애가는 기쁘고 안심이 되는구나.”
말을 마치고 한안을 향해 어서 그 잔의 술을 마시라는 표시를 했다.
한안은 그제야 고개를 숙이고 잔의 술을 자기 입에 넣었다. 얼음처럼 싸늘한 술이 입안으로 들어가며 얼얼하게 목구멍을 데우며 지나갔다. 한안은 씁쓸하고 괴로웠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자기 뜻대로 삶을 살지 못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 좋지 않은 의도를 품은 독약임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존귀한 하사품이라 여기면서 웃음을 머금고 마셔야 했다.
술을 마시고 나자 혀끝에 술의 쓴맛이 남아 있었다. 한안은 빙그레 웃으며 술잔을 쟁반에 돌려놓고 부드러운 수건을 집어 입을 닦은 뒤, 그제야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태후는 만족하여 고개를 끄덕였고 진 귀비와 시선을 마주치며 웃었다. 황후는 어렴풋이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알 수가 없어 자신이 너무 마음을 많이 쓴 거라 여기고 더는 생각하지 않았다.
등선은 한안이 앉는 것을 보고 즉시 말했다.
“방금 전에 정말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 네 모습을 보고 나는 네가 태후께서 내리신 술을 마시지 않을 작정이라 생각했어.”
한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태후가 내린 술을 마시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눈을 빤히 뜨고 지켜보는 가운데 어떻게 안 마시랴. 모두에게 태후가 자신에게 독을 쓴다는 의심을 품었다고 알릴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렇게 되면 함부로 황가를 모독한 죄로 참수형에 처해질 것이다. 한안은 머리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 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장어산은 한안의 모습을 보고 입을 가리고 키득키득 웃었다.
“넷째 동생은 정말 복이 많네. 태후께서 이처럼 아끼시니 말이야. 방금 전 정말 언니는 놀라 죽을 뻔했단다. 넷째 동생이 마마의 뜻을 거역할 셈인 줄 알았거든. 하하.”
그녀는 깊은 뜻이 있는 듯한 말투로 말하며 한안을 보았다.
“태후 마마께서 내리신 술의 맛이 어떤지 모르겠네?”
한안은 웃으며 말했다.
“어산 언니는 태후 마마께서 내리신 술의 맛을 알고 싶어요?”
장어산은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한안은 기다리지 않고 이어서 말했다.
“마음 놓아요. 어산 언니도 분명 그 맛을 볼 기회가 많을 테니까요.”
장어산은 얼굴빛이 몇 번이나 변했다. 증오의 눈빛으로 한안을 보고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잘난 척하지 마. 네가 울 일이 있을 테니까!”
한안은 이렇다 할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한안의 몸 뒤에 선 급람과 주홍은 한안의 행동에서 이상한 점이 있는지 하나라도 놓치지 않을 양 지켜보고 있었다. 방금 전 직접 눈으로 한안이 그 술을 마시는 것을 보았다. 말리고 싶었지만 어찌할 방법이 없었으니 이제 한 걸음 걷고 한 걸음 살피듯 하나하나 주의해야 했다. 만약 한안에게 변고라도 생기면 세상에 더 이상 미련을 둘 생각이 없었다.
등선은 작은 소동이 끝났다 생각하고 그녀와 웃으며 말하기 시작했다. 연회는 끝 무렵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어서 궁중에서 불꽃놀이를 하여 흥겨운 분위기를 더했다. 부인들과 소저들은 채봉전을 나서서 길을 안내하는 궁녀를 따라 어화원에 도착해서 현란한 색채의 불꽃을 감상했다.
한안에게는 불꽃놀이를 볼 마음 같은 게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연회의 끝 무렵에 가까워질수록 자신의 몸에 변화가 일어난 것을 알아차렸다. 그 변화는 지극히 미세하여 처음에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몸속에 기이한 화기가 일어난 것 같아 어떻게 해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의 몸이 갈수록 뜨거워짐에 따라 머리도 흐릿하고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몽롱했다가 정신이 맑게 깨었다가 때로 흐리멍덩해졌다가를 반복했다. 한안은 자신이 이미 정상이 아니라고 느꼈다. 막 함께 불꽃놀이를 보러 가려던 등선이 한안의 두 볼이 새빨간 것을 보고 이상해하며 말했다.
“네 얼굴이 어찌 이리 붉은 거야?”
한안은 고개를 흔들었다. 심장이 기이하게 두근거리는 것을 참고 웃으며 말했다.
“조금 너무 더운가 봐.”
등선도 더 의심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우리, 어서 불꽃놀이 보러 가자.”
등선은 한안의 손을 잡아끌고 전각의 문을 나섰다.
전각의 문을 나서자마자 차가운 바람이 한안의 얼굴 위로 불어왔다. 덕분에 영문 모를 조급증이 얼마간 잠잠해지고 머리도 안정이 되었다. 한안은 그제야 자신의 몸 상태를 연결지어 보고 문득 깨달았다. 견딜 수 없이 더운 열기와 답답함, 그녀의 이 증상은 춘독에 중독된 것이었다.
한안의 머릿속이 쾅 하고 폭발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자신이 이런 독에 중독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누가 이렇게 악독한 수법을 아직 급계도 하지 않은 소저의 몸에 쓴단 말인가! 사람의 심보가 제아무리 악독하다 해도 이런 일을 하다니.
진 귀비와 태후는 앞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장어산은 한안이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것을 보고 궁금한 듯 앞으로 나와 말했다.
“넷째 동생, 이게 무슨 일이야? 온 얼굴이 땀투성이네.”
황후가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려 한안을 한 번 보았다. 황후는 한안의 표정이 이상한 것을 보고 물었다.
“왜 그러느냐? 어의를 부를까?”
“황후!”
그러나 태후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진 귀비의 생일인데 태의를 찾다니. 재수 없는 짓이 아니오!”
태후는 말을 마치고 불쾌한 표정으로 황후를 한 번 보았다.
황후는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모후의 가르침이 맞습니다.”
황후는 더이상 한안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한안은 이를 악물었다.
마침 어화원을 지나고 있었다. 칠흑 같은 밤의 장막 가운데 불꽃이 한 송이 한 송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불꽃은 비할 데 없이 아름답고 화려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사로잡혀서 하늘 위를 바라보며 보기 드문 미경을 감상했다. 그러나 한안만은 입술을 꽉 깨물어 신음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온 신경을 쓰고 있었다. 체내의 조급증은 갈수록 강렬해졌다. 태후가 자신에게 춘독을 넣은 독주를 내릴 줄이야.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여인이 이렇게 더러운 수법을 쓸 줄이야.
그녀는 자신이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만약 여기에 계속 머물다가는 정신이 온전치 못할 때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한안은 밤의 어둠을 틈타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을 때, 몰래 어화원의 거대한 용수나무 뒤에 남았다. 급람과 주홍은 한안의 모습을 보고 서둘러 따라갔다. 한안은 우물쭈물하지 않고 군중들의 시선에서 달아나 사람이 없는 곳까지 와서야 비로소 걸음을 멈추었다.
급람과 주홍은 한안이 어째서 이렇게 하는지 알지 못했다. 등불 아래에서 한안을 보자 그제야 비로소 놀라 멍해졌다. 잠깐 사이에 한안의 온 얼굴은 땀으로 가득해 이마 위의 머리카락까지 흠뻑 적셨다. 한안의 얼굴은 새빨갰고 눈빛은 몽롱한 것이 쉬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소저.”
급람이 놀라 외쳤다. 아마도 한안이 무슨 독에 중독된 모양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한안은 고개를 저었다. 신체의 감각이 한층 더 자신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힘들게 말했다.
“가서……… 물을 찾아 와. 나 춘독에 중독되었어.”
“춘독!”
주홍조차도 크게 놀랐다.
“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
한안은 손을 저었다.
“시간 없어.”
주홍이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물을 찾아도 아마 늦을 것입니다. 지난번에 노비가 어화원 깊은 곳 가장 동쪽에서 연못 하나를 본 것 같습니다. 소저 그쪽으로 가시는 것이…….”
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그러나 몇 걸음 가지 못해서 한안은 자신의 전신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신체 내의 기이한 갈망을 멈출 방법이 없었다. 저도 모르게 헐떡임이 새어 나왔다. 한안의 머릿속은 헝클어진 실타래 같았다. 수치스러울 뿐만 아니라 무능하고 무력했다. 바로 이때, 머리 위로 싸늘한 바람이 일더니 몸집이 크고 건장한 남자 둘이 자기를 향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한안은 놀랐다. 그중의 한 남자는 이미 한안의 손을 낚아챘다. 동작이 거칠고 우악스러운 것이 그녀를 어딘가로 데려가려는 것 같았다. 한안은 크게 놀랐지만 무슨 일인지 바로 이해했다. 그들이 이러는 것은 자신을 데려가려는 것이다. 남자의 피부에 손이 닿자마자, 한안은 그의 몸에 기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한안은 기를 쓰고 자신을 진정시켰다.
급람이 맹렬하게 달려들어 그 남자의 손을 세게 물었다. 주홍은 다른 한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급람에게 손을 깨물린 남자는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예상치 못한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바로 손을 놓았다. 덕분에 한안은 있는 힘을 다해 벗어났다.
급람이 고개를 돌리고 한안을 바라보았다. 눈에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소저, 어서 달아나세요.”
한안은 급람이 죽기 살기로 그 남자의 손을 물고 놓지 않는 것을 보았다. 그 남자는 잔인하게 급람의 머리를 내려쳤다. 급람은 몸이 요동쳤지만 여전히 문 것을 풀지 않았다. 주홍도 똑같았다. 한안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급람과 주홍을 버릴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만약 이 사람들에게 끌려가면 무슨 일이 일어나든 급람과 주홍이 연루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소저, 저희는 그저 여종일 뿐입니다. 그들이 저희에게 어찌할 리 없어요. 소저, 어서 달아나세요.”
주홍은 남자들의 손에 머리채가 잡혔음에도 차분하게 한안에게 말했다.
이 두 여종은 전생에서부터 금생에 이르기까지 한안을 따르는 충심 깊은 아이들이었다. 한안은 그녀들을 여종이 아니라 그녀에게 따뜻함을 준 사람, 이 세상에서 즐겁게 잘 살아가야 할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다. 지금 그녀들이 자신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것을 보며 한안의 마음은 칼로 저미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한안은 급람과 주홍이 자신을 위해 시간을 벌어주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소매 속의 매화자를 뽑아내어 자신의 손바닥을 모질게 찔렀다. 선혈이 줄줄 흐르고 뒤이어 뼛속까지 파고드는 통증이 머리로 솟구쳐 올라 혼미하던 머리가 잠시 좀 맑아졌다. 그녀는 일어서서 두 남자에게 뒤엉켜 있는 급람과 주홍을 한 번 보고 매섭게 말했다.
“죽지 마라!”
비틀비틀 달리기 시작하면서 몸 뒤의 참상을 보지 않았다. 그녀들의 비명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지만 억누른 신음소리와 잡아끌리고 땅에 내던져지는 묵직한 울림이 한안의 심장을 무겁게 강타했다. 이번 생에서 지금처럼 이렇게 무력한 적이 없었다. 주홍과 급람은 생사불명이었고 자신은 남에게 쫓기고 있었다. 그러나 결코 그 두 남자에게 잡혀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태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비로소 알게 된 셈이었다. 만약 자신이 추악한 일을 당하면 부운석도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저 자신이 부운석에게 시집가게 하고 싶지 않은 거라면 태후가 적을 손해 입히자고 자신이 더 큰 손해를 보는 수법을 쓸 필요가 없었다. 설마 태후와 부운석 사이에 묵은 원한이 있는 것인가?
그러나 자세히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춘독이 지금에서야 천천히 퍼지는 것을 보면 어쩌면 그동안 시정을 따라 몸을 단련한 결실이 조금은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억지로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더라도 결국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정신이 혼미한 터라 한안은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달빛이 물처럼 아름답게 흐른다고만 느꼈다. 이곳은 한층 더 조용했고 사람 그림자 하나 없었다.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한기가 엄습했다. 몸은 갈급히 들뜨고 불안정했지만, 머리는 차가운 바람을 맞아 잠시 정신이 돌아왔다. 한안은 몸을 흠칫 떨고 혀끝을 물어 정신이 혼미해지지 않게 했다.
분주히 달리고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멈춰 서니 체내의 화기가 신속하게 솟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몸이 나른하고 무력해졌으며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 기이한 공허감이 또 빠르게 엄습해 왔다. 그녀는 두 생을 살았고 남녀 간의 일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체내의 춘독을 상대로 하여서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런 상황을 맞닥뜨린 적은 없었다. 차분하고 침착한 그녀였지만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가슴속에 가득한 갈망을 풀어낼 길이 없었다. 갈망은 시간이 갈수록 맹렬해졌다. 그녀는 전신이 달아올라 옷을 전부 다 벗어버리고 사내를 끌어안고 싶었다. 한안은 스스로에게 경악했다. 춘약의 영향을 받으면 이처럼 방탕해지는 것일까.
자신이 정조를 잃게 되면 경성 부인들이 떠들어대는 화젯거리가 되겠지. 그게 죽음보다 만 배는 더 그녀를 고통스럽게 할 것이다. 한안은 재차 앞을 향해 몇 걸음 달렸다. 어렴풋한 달빛 아래 빛에 반짝이는 물결이 있는 것 같았다. 마음속으로 아마 연못이 여기 있는 모양이라 생각했다. 한안은 헤엄을 칠 수 있었고 화기를 가라앉혀야 한다는 생각에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맹렬하게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물속에 뛰어들자마자 그녀는 자신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그 맑고 투명한 샘물은 온천이었기 때문이다.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는 깊은 궁의 안쪽에는 뜻밖에도 온천이 있었다.
한안의 머리는 이미 다른 생각을 분별해낼 수 없었다. 몸이 물속으로 가라앉으며 모든 피부가 온수에 감싸여 하염없이 덜덜 떨고만 있었다. 보통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온수는 좋은 것이었다. 그러나 춘독에 중독된 한안에게는 불 위에 기름을 붓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화기를 내려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몸에 순간 불이 붙은 것 같았다. 한안은 저절로 신음소리를 뱉어냈다.
그때, 촤악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늘씬한 신영이 물결을 가르고 나왔다. 달빛 아래, 혼미하게 눈을 반쯤 뜨고 있던 한안은 그 사람의 생김새를 명확히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모습이 얼마간 익숙한 것처럼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뒷모습일 뿐이지만 어둠이 그 풍채를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다.
자석 같은 끌림이 있으면서도 나지막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얼음처럼 냉담했다.
“누구냐?”
한안은 놀랐다.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그 사람이 몸을 돌리는 것이 보였다. 온천의 김이 피어오르는 가운데, 비단 같은 달빛이 마침내 그의 용모를 또렷하게 비추었다.
부운석이었다.
백옥 같은 몸은 늘씬하고 힘이 넘쳐 고혹미를 발산하고 있었다. 가늘고 길며 눈꼬리가 위로 살짝 치켜 올라간 눈은 자욱한 수증기 속에서 한층 더 요염했다. 붉고 아름다운 얇은 입술은 꽉 다물어져 있었고 폭포수 같은 검은 머리는 물에 젖어 비단처럼 등 뒤에 흘러내려 있었다. 평소에 엄격하고 차갑던 그 사람이 겉옷을 벗고 달빛 아래 온천에 반쯤 기대어 있으니 대단히 유혹적이었다.
한안이 다잡고 있던 신경이 한순간 풀어진 것 같았다. 한안은 저도 모르게 부운석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저 그에게 단단히 안기고 싶었다. 마음속 갈망이 모든 것을 초월했다.
부운석은 눈살을 찌푸리며 한안을 응시했다. 그녀가 어떻게 여기에 나타날 수 있었는지 의아했다. 그러나 한안의 표정은 몽롱하고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녀는 제멋대로 자신을 향해 헤엄쳐 오고 있었다.
그녀는 부운석의 피부에 제 살이 닿자마자, 몹시 뜨거운 여름날에 얼음처럼 차가운 샘물을 만지는 것 같았다. 한안은 타는 듯한 갈증이 순간 적지 않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부운석의 몸은 너무도 편안했다. 몸의 쾌락이 이성을 눌러버렸다. 한안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바로 두 팔을 뻗어 부운석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몸에 제멋대로 몸을 비벼댔다.
이 온천은 황상이 특별히 부운석을 위해 건축한 것으로 다른 사람은 마음대로 들어올 수 없었고 여기에 함부로 들어온 사람은 머리가 떨어졌다. 황상을 제외하고, 이곳에 온천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부운석이 온천에서 목욕을 하는 가운데 사람이 난입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놀란 그는 난입한 자에 대해 살의까지 일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얼굴을 분명히 보았을 때는 모든 동작이 자연스럽게 멈추어졌다. 들어온 사람이 한안일 줄은 예상치 못했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한안의 얼굴빛이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한안이 자신을 끌어안고 제멋대로 몸을 비벼댔다.
부운석은 올해 스물 하고도 한 살. 한안은 아직 급계도 하지 않았으니 그에게 한안은 그저 어린 여자아이 같을 뿐이었다. 게다가 그는 본래부터 냉정하고 자제심이 강해 한안에게 이렇게 끌어안겼어도 심사가 어지러워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한안이 어째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 걱정스러웠다. 한안은 행실이 얌전했다. 담력이 상당히 크지만 남녀 간의 일에는 줄곧 본분을 신중하게 지켰고 규범을 벗어나는 일을 한 적이 없었다.
한안은 그러나 참을 수가 없었다. 그를 끌어안은 것으로는 아직 성에 차지 않았다. 아예 자신의 얼굴을 그의 얼굴에 바싹 붙이고 부운석의 품속에서 몸을 움츠렸다.
부운석은 멍해져서 한 손으로 한안을 부축했다. 자신에게 바싹 붙은 얼굴이 이상하게 뜨겁다는 것을 느꼈다. 한 손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휘감아 그녀의 얼굴이 자신을 직면하게 했다. 그제야 한안의 모습이 분명하게 보였다.
눈이 휘어지며 웃지만 냉담하고 싸늘하며 야박하던 어린 아가씨의 눈빛이 침착하고 신중하던 모습을 잃고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달빛 아래 뚜렷이 드러났다.
그녀의 옷은 전부 물에 젖었고 팽팽히 몸에 달라붙어 예쁜 몸매가 드러났다. 가느다란 허리와 긴 다리는 새로 피어난 연꽃처럼 아름다웠고 풋풋한 유혹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부운석의 시선이 고정된 것은…… 멈추지 않고 피가 흐르는 손바닥이었다.
그녀가 부상을 입었나? 무언가 변고가 있었던 것 같았다. 부운석은 더욱 걱정스러워졌다.
“장한안.”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불러 보았다.
그러나 한안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저 그의 품속으로 달려들어 그의 몸에 비벼대고만 있었다. 마치 사람에게 달라붙는 작은 동물 같았다. 평상시의 예리함을 거두고 털이 보송보송한 것이 귀여우면서도 가련했다. 그는 지금까지 한안이 이처럼 친밀하고 다정하게 자신을 대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한안은 그간 그를 대하면서 신중하게 본분을 지켰고 예의범절을 준수했다. 기껏해야 자신을 향해 화를 내는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 비할 데 없이 예쁘고 귀엽게 구는 것이 마치 그에게 애교를 부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한안의 모습은 다른 사람의 계략에 빠진 것이 분명했다.
그는 잠깐 깊이 생각하고 한안을 자기 몸에서 끌어내며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다시 불렀다.
“장한안.”
어쩌면 그의 말투가 너무도 엄숙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안이 혼미한 눈을 떴다. 의식도 조금 맑아졌는지 이를 악물고 불분명하게 말했다.
“어서 가서 급람과 주홍을 구해주세요…….”
말을 마치고 다시 몸을 비비 꼬는데, 대단히 괴로운 듯한 모습이었다. 부운석은 그냥 이대로 나가서 궁중을 수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가는 큰일이 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한안의 목덜미를 가볍게 한 대 쳤다. 한안의 몸이 축 늘어지며 부운석의 품에서 혼절했다. 부운석은 그녀를 자신의 품속에 끌어안았다. 그리고 눈처럼 흰 모피 외투로 한안을 빈틈없이 둘러쌌다. 한안은 그의 가슴에 기대고 있었는데 그녀의 뜨거운 체온이 그의 준수한 얼굴을 가라앉게 만들었다.
온천에서 나와 몇 걸음 걸어가자 바깥에서 지키고 있던 목풍과 목암이 그제야 몸을 드러냈다. 부운석이 품 안에 사람을 안고 있는 것을 보자마자 둘은 동시에 크게 놀랐다. 부운석이 목욕할 때, 그들은 멀리서 숨어 있었기 때문에 한안이 이곳에 온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한안은 부운석의 품속에 웅크린 채 눈처럼 흰 모피 외투에 빈틈없이 감싸여 있어 두 사람은 한안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목풍의 마음속에 의아심이 들었다.
‘왕야께서 어찌 온천욕을 하러 가셔서는 사람을 데리고 오셨지? 보아하니 여자인 것 같은데, 이러신다는 것은 왕비를 좋아하지 않으신다는 건가?’
목풍은 아직 시집오지 않은 왕비를 위해 슬피 탄식했다.
그러나 부운석이 차갑게 가라앉은 소리로 말했다.
“가서 오늘 궁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조사해라.”
그는 짙은 살기를 발산했다. 눈처럼 흰 모피 외투는 그의 냉담함과 엄숙함을 두드러지게 했고 발산된 한기는 곁에 가까이 있는 목풍과 목암 두 사람을 거의 얼음덩이로 얼려버릴 듯했다. 목풍과 목암은 부운석을 따른 지 여러 해라 그가 분노했음을 알았다. 그러나 부운석은 본래 냉정하고 자제력이 강해 어떤 일이든 모두 무관심한 사람인데 무슨 큰일이 일어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목풍과 목암은 감히 지체할 수 없어 바로 대답했다.
“네!”
“잠깐.”
부운석이 품속의 사람을 한 번 보았다.
“왕비의 여종이 위험에 처했다. 사람을 보내 조사하게 하고 너희는 여종들을 구출해라.”
목풍과 목암은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왕비의 여종? 설마 왕비께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설마 주인 품 안의 저 낭자가 바로 왕비?
부운석은 목암에게 옥패 하나를 던졌다.
“만약 저지하는 사람이 있거든 본왕의 명령이라 말해라.”
부운석은 말을 마치고 두 사람을 더 거들떠보지도 않고 큰 걸음으로 떠났다.
“주인께서 화가 나셨어. 또 누군가 운수 사납겠군.”
목암은 그 신중하고 냉담한 어린 여종을 떠올렸다.
“가자.”
부운석은 한안을 데리고 현청왕부로 돌아갔다. 즉각 사람을 보내 어의를 청해 오게 하고 이어서 모든 하인을 내쫓고 한안을 자기 방으로 안고 갔다.
여종이 뜨거운 물을 떠왔다. 부운석은 침상 곁에 앉았다. 혼수혈을 눌린 한안은 잠들어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고 얼굴은 비정상적으로 빨갰다. 부운석은 비단 수건을 적셔 그녀의 이마 위 땀방울을 닦아 주었다.
부운석은 마음속이 싸늘해졌다. 춘독의 독성이 이처럼 강하다니! 그가 한창 깊이 생각하고 있을 때, 한안이 그의 소매를 잡아당겨 그의 몸을 자기 몸 위로 끌어당겼다. 부운석은 너무 갑작스러워 미처 방어하지 못하고 그녀에게 끌어 당겨져 비틀거렸다. 손을 뻗어 한안을 밀쳐낼 수 있었지만 조심치 않아 그녀를 상처 입힐까 걱정스러웠다. 어쩔 수 없이 그 기세대로 한안에게 끌려가 그녀의 위에서 두 손을 받치고 냉랭하게 그녀를 응시했다.
한안의 목소리는 고통스러운 같기도 하고 또 즐거운 것 같기도 했다.
“운석.”
그 목소리는 끝소리가 길게 늘어져서 교태가 넘쳐났다. 정욕을 띤 목소리는 이전의 맑고 투명한 목소리와 분명 달랐다. 부운석은 한순간 멍해졌다. 한안은 지금까지 그의 이름을 부른 적이 없었다. 그저 예의 바르게 왕야라고만 불렀다. 이따금 화가 나면 당신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마음속이 간질간질한 것도 같고 저릿저릿한 것이 작은 짐승이 발톱을 세워 부드럽게 긁어 사람의 마음을 녹였다. 잠시 부주의한 사이에 그녀의 손이 자신의 가슴을 어지러이 더듬더니 그의 옷을 당겨서 벌리려 했다.
부운석은 골치가 아팠다. 이 어린 아가씨가 이처럼 성가시게 굴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녀가 총명하고 내성적이라 자신을 성가시게 할 리 없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제멋대로 굴 줄이야. 자신도 속수무책이라 한 손으로 그녀의 동작을 제지할 뿐이었다. 그녀를 한 대 쳐서 기절시키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었다. 방금 전 혼수혈을 누른 것은 이미 효과가 사라진 후였다. 만약 춘독이 널리 퍼지게 되면 한안의 몸이 상하게 될 것이니 더 이상 무언가를 하는 것은 금물이었다.
“흐윽.”
한안이 낮은 소리로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장시간의 갈망이 충족되지 않아 몸이 죽을 지경으로 괴로웠다. 그녀는 어렴풋이 누군가 자신의 움직임을 막았음을 알았다. 그녀는 이미 지각과 의식이 전무하다시피 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할 수 없었다. 오직 단순히 감정에 따라 행동했다. 그러니 억울하고 속상해서 낮은 소리로 흐느껴 울기 시작한 것이다.
부운석은 우는 그녀를 통해서 7년 전의 그 엉망진창으로 울던 못생긴 아이를 볼 수 있었다. 그의 마음속이 저도 모르게 부드러워져 손을 뻗어서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그도 모르게 한안을 가엾게 여기는 빛이 가득했다.
애석하게도 한안은 전혀 아무것도 모른 채 더욱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부운석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운석은 여종에게 그녀의 옷을 갈아입히게 했지만 격렬한 몸부림에 옷이 전부 활짝 풀어져 붉은색 배두렁이(肚兜: 가슴과 배만 겨우 가린 마름모형 윗옷)를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눈처럼 하얀 피부와 혼란스러운 자세가 어우러져 뜻밖에 색다른 모습을 자아냈다. 한안의 머리카락은 어지러이 흩어져 부운석의 베개 위에 펼쳐져 있었고 자그마한 얼굴 전체는 앳된 기색 대신 유혹과 매력이 넘쳐났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의 몸을 남자에게 힘껏 비벼대고 있었다.
부운석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한안을 보았다. 그가 보살은 아니지만 한안은 그에게 보호가 필요한 아이와 같았다. 적어도 지금은 한안에 대해 저속한 마음을 먹을 수 없었다.
한창 정신을 딴 데 팔고 있을 때,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꼬맹이, 여자 복도 좋지!”
부운석은 한안에게 가슴 앞섶이 잡아당겨져 거의 한안의 몸 위에 엎드려 있다시피 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확실히 선정적인 장면으로 보일 만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보자마자 담담하게 말했다.
“왔는가.”
온 사람은 관복을 입은 중년 남자로 대략 마흔 살 안팎으로 보였다. 염소수염을 기른 얼굴 위에 음흉하게 놀리는 웃음기를 걸고 있었다.
“이리 늦은 밤에 나를 부른 건 네가 여인을 어찌 총애하는지 보여주기 위함은 아니겠지?”
“그녀는 본왕의 왕비다.”
부운석은 아무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말했지만, 말투에 이미 경고의 뜻이 담겨 있었다.
그 중년 남자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왕비시군. 어허, 어찌 이리도 조급하게 굴었는가. 아직 시집도 안 온…….”
남은 말은 부운석의 살인적인 눈빛을 보고 멋쩍게 목구멍으로 삼켰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부운석은 한안의 손을 떼어내고 몸을 단정히 하고 앉았다.
“그녀는 춘독에 중독되었다.”
“풋.”
중년 남자는 즉시 뛰어왔다.
“내가 어의인데 어찌 나보다 더 어의 같으십니다.”
부운석은 고개도 들지 않고 부드럽고 다정하게 한안의 옷자락을 잘 여며 주었다.
“본왕의 성질을 자네도 알 것이다, 오 태의.”
중년 남자는 바로 침을 꿀꺽 삼키고 입술을 삐죽거렸다.
“내가 좀 보지, 뭐.”
말을 하고 앞으로 걸어오려다가 부운석이 얇은 이불을 끌어다가 한안을 빈틈없이 가리는 것이 보였다. 한안의 모습을 오 태의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오 태의도 당연히 알았다. 이렇게 분명한 동작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바보가 틀림없다. 그는 상자를 들고 억지웃음을 몇 번 웃은 다음 앞으로 걸어왔다.
“내가 좀 살펴보지. 헤헤, 왕비가 또 상당히 괜찮게 생기…….”
부운석은 그를 매섭게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
“필요 없는 말은 하지 마라.”
오 태의는 코를 문질렀다.
“칭찬하는 것도 안 된다니.”
그는 바로 손을 뻗어 한안의 맥을 짚었다. 잠시 후, 그의 히죽거리며 웃던 얼굴에 의혹이 나타났다. 손을 뻗어 한안의 이마를 만져보더니 돌연 일어서 몇 걸음 뒤로 물러나서는 부운석을 향해 깊이 절을 했다.
“왕야, 용서하여 주십시오. 소관이 무능하여 힘이 미치지 못합니다.”
부운석은 냉랭하게 그를 보며 말이 없었다.
“이 독은 기방 여자들에게 사용되는 것으로 연화미라고 부릅니다. 가치는 천금에 달하고 독성이 지극히 맹렬하지요. 독을 당한 사람은 기세가 왕성해지는데, 반드시 남과 교합해야 몸 안의 불길을 잡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로, 바로 목숨을 잃게 될 것입니다.”
오 태의는 식은땀을 닦았다. 부운석의 표정은 알아볼 수 없었다.
“소관도 실로 방법이 없습니다. 왕비는 어쨌든 당신의 처이니 아예 지금…….”
부운석은 침상 위의 한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금년에 겨우 열세 살. 아직 급계도 하지 않았고 자신은 이미 스물한 살이다. 그의 눈에 한안은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그저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어린아이와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자신조차도 심리적 관문을 넘을 수 없었다. 하물며 한안의 성질을 그는 알고 있었다. 보기에는 얌전하고 온순해 보이지만 실은 목숨을 걸 정도로 완고했다. 만약 자신이 그녀와 관계를 가진다면 이튿날 그녀가 정신이 맑아졌을 때 어떤 소란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그는 한안이 안전감이 극도로 결핍된 사람임을 알아보았다. 자신은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의 신임을 얻어가고 있었다. 만약 오 태의 말을 따른다면 공든 탑은 무너지고야 말 것이다. 자신은 한안에게 신임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는 오 태의를 보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구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는가?”
오 태의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본왕의 피는?”
냉담한 한마디 말은 나지막한 탄식 같았다. 부운석은 눈을 내리깔았다. 길고 긴 속눈썹이 등불 빛에 불분명한 색채로 물들었다. 평범한 인간 같지 않은 수려한 용모가 명멸했다. 그는 치명적으로 맑고 차가웠다. 그러나 눈빛은 지극히 부드럽고 다정하게 침상 위의 한안을 바라보며 또 한 번 물었다.
“그럼, 본왕의 피는 어떠한가?”
“왕야!”
오 태의가 갑자기 홱 일어섰다.
“그것은 절대……!”
“그저 음양이 섞이는 게 필요한 것이 아닌가? 그녀는 몸속의 불길이 왕성하니 본왕의 피가 해결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오 태의는 초조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 또한 알고 있었다. 눈앞의 이 사람 역시 고집스러운 성격이라 그가 결심한 일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모험하지 말게, 운석.”
그의 말투가 걱정스럽게 변했다. 진심으로 아이를 걱정하는 어른 같았다.
“괜찮네.”
부운석이 그의 말을 잘랐다.
오 태의는 입술을 움직거렸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네. 피로써 그녀를 구할 수 있어.”
날카로운 칼날이 손등을 베어 갈랐고 피가 손가락 끝을 따라 푸른빛 자기 그릇 안에 흘러 들어갔다. 한 방울, 두 방울, 세 방울, 피는 점점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큰 그릇에 피가 가득 채워졌지는 반면, 부운석의 얼굴빛은 창백하게 변했다.
오 태의는 그를 위해 상처를 잘 싸매주고 한숨을 내쉬었다.
“구태여 이럴 것까지는…….”
부운석은 그를 상대하지 않고 그릇을 받쳐 들었다.
“자네는 가도 좋다.”
체면을 봐주지도 않는 축객령에도 오 태의는 화내지 않고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부운석을 한 번 보고는 상자를 들고 떠났다.
부운석은 한안의 옆에 앉았다. 한안도 지쳐서 아무런 힘이 없는 듯 그저 얼굴만 한층 더 새빨개진 상태였다. 가련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릇 안에 담긴 비릿한 내음과 그의 온기를 지닌 핏물을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한안의 뒤통수를 받쳐 그녀를 자기 몸 앞에 가둔 뒤, 천천히 고개를 아래로 기울여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붙였다.
그의 입술을 따라 피가 다른 사람의 입속으로 건너갔다. 한안은 점점 조용해지더니 더 이상 몸부림치지 않았다. 어쩌면 그 피가 정말 효과가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부운석의 품속에 안긴 어린아이는 점점 더 얌전해졌다. 부운석은 한 모금을 머금고 한 모금을 먹이며, 입술에 입술을 마주했다.
마지막 한 모금을 다 먹이고 부운석이 그녀의 입술을 떠나려 할 때, 혀끝이 다른 혀에 감겼다. 그는 살짝 멍해졌다. 한안이 그의 목을 끌어안고서 입술을 단단히 바싹 붙여왔다.
효과가 남은 것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부운석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아직 서툴렀지만 작은 혀는 따뜻하고 촉촉했으며 혀의 주위를 건드리다가 깊게 들어왔다. 부운석은 별안간 멍해져서 한안을 저지하는 것도 잊고 그녀가 자신의 몸 위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었다. 따뜻하게 서로 뒤얽히는 중에 혀끝에 통증이 일었다. 한안이 처음으로 입을 맞추는 것이라 서툴러 그의 혀끝을 깨물어 버린 것이었다.
옅은 비린내가 입안에 가득하여 헤어날 수 없는 또 다른 묘미가 되었다. 부운석은 눈을 가늘게 뜨고 눈앞의 소녀를 담담하게 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발견한 진귀한 어린 짐승 같았다. 어린 짐승은 자신을 굳게 의지하는 듯했다.
눈동자 속이 저도 모르게 따뜻한 색채로 물들었다.
“바보.”
자석 같은 끌림이 있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방 안을 미묘한 색채로 가득 채웠다.
“입은 이렇게 맞추는 것이 아니다.”
그는 말을 마치고 바로 고개를 기울여 가볍게 그녀의 입술을 물었다.
이른 아침의 햇빛이 창문을 통과하여 방 안을 비추었다. 햇빛에 한안이 눈을 떠 보니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다. 한안은 자신이 낯선 큰 침상 위에 누워 있으며, 옷이 어제와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어제 일이 머릿속에 조금이나마 남아 있었다. 자신은 궁중에서 태후가 내린 술을 마셨고, 그런 후에 바로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춘독에 중독된 것이었다. 급람과 주홍을 데리고 도망쳤는데, 그다음은?
그녀는 마음속으로 바짝 긴장했다.
‘급람과 주홍은 또 어디 있는 거지? 여기는 어디고?’
막 깊은 생각에 빠져드는 때에,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몸이 늘씬한 그는 새하얀 중의를 입었으며 검은색 긴 머리카락은 비녀로 말아 올리지 않고 느슨하게 풀어 놓아 나른하고 귀한 면모가 흘렀다.
바로 부운석이었다.
그는 서두르지도 여유 부리지도 않고 침상 곁으로 걸어왔다. 역광으로 이목구비를 분명하게 볼 수 없었지만 한안은 그를 보고 한시름을 놓았다. 어째서인지는 분명히 말할 수 없지만 그를 보자 안도감이 들며 자신에게 변고가 있었을 리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운석이 그녀의 곁에 서서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를 더듬어 보고 말했다.
“좀 나아졌느냐?”
그의 얼음처럼 서늘한 손이 이마를 만지자 한안은 편안해졌다. 그러나 물을 것이 있었다.
“급람과 주홍은요?”
“부상을 당했다. 의원을 불러 살피게 했고 지금은 쉬고 있다. 그런데 어제 어떻게 된 일이냐?”
부운석이 말했다.
한안은 잠시 멍해졌다.
“태후께서 술을 내렸어요.”
한안은 말을 마치고 눈을 들어 부운석을 보았다. 태후는 부운석의 모후다. 자신의 말이 모자간을 이간질하고 불화를 일으킬 수 있었다. 그러나 어제 태후의 언행으로 보건대 태후는 부운석에게 안 좋은 마음을 갖는 것이 분명했다. 이 모자간은 겉으로만 화목하고 속으로는 불화하는 것이 아닐까? 무언가 증명이 필요했기에 한안은 말을 마친 후 부운석의 반응을 보았다.
부운석은 화를 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놀라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응, 한마디 했을 뿐, 얼굴에 감정 하나도 내보이지 않았다. 한안은 낙담해서는 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갑자기 무언가가 떠올라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어젯밤…… 어땠어요?”
춘독에 중독된 자신은 이성을 잃었으니 부운석을 상대로 추태를 저질렀을 게 뻔했다. 한안의 머릿속에 남은 영상은 또렷하지 않은 상태였고 진짜인지 아니면 꿈인지 명확히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부운석에게 자신의 그런 표정과 태도를 보인 것을 생각하니 민망했다.
“네가 본왕의 옷을 벗겼다.”
부운석이 담담하게 말했다.
한안은 잠시 멍해졌다가 얼굴이 확 새빨개졌다.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부운석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이 사람이 이런 일에 거짓말할 이유가 없음을 잘 알았다. 그다음으로 들이닥친 감정은 수치와 분노였다. 설마 자기가 정말로 그렇게…… 그의 옷을 벗길 만큼 급했단 말이야? 한안은 그야말로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람. 자신의 간이 언제 그렇게 커진 건가. 설령 왕비 왕야로 불리는 부부이지만 아직 혼례는 치르지 않았다. 하물며 한안은 아직 부운석을 자신의 남편으로 여길 수도 없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바람처럼 가볍게 그런 말을 하자 오히려 나쁜 짓을 저지르고 현장에서 잡힌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았다. 한안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또…… 무슨 일이 있었나요?”
“본왕의 품속으로 돌진하여 덮쳤지.”
한안은 부끄럽고 난감하여 작은 얼굴이 불그레해져서 어물어물 말했다.
“그래요? 저는 기억이 안 나요…….”
부운석은 살짝 몸을 기울여 그녀를 보았다. 가느다란 먹빛 눈빛에 물결이 일렁이고 있었다. 부운석의 입술이 담담하게 말을 토해냈다.
“어젯밤 본왕이 연청지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데 네가 갑자기 맹렬하게 뛰어 들어와서 본왕을 희롱하려고 시도했지.”
한안은 얼굴을 감히 부운석의 눈을 볼 수가 없었다.
“당신도 제가 춘독에 당한 걸 아시지요…….”
하지만 그녀는 깨어난 직후 자신의 몸을 더듬어 확인했고 손을 제외하고 상처를 입은 곳은 아무 데도 없음을 발견했다. 분명 어젯밤 부운석은 그녀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은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그에게 감격하는 마음이 생겨나면서도 의혹이 일었다.
“그럼 춘독은 어떻게 풀린 건가요?”
부운석은 몸을 곧게 세우고 시선을 다른 곳으로 향했다.
“당연히 태의가 치료했지.”
그의 말은 어딘가 좀 이상했지만, 딱히 어디가 이상한지는 명확히 말할 수가 없었다. 다만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감사의 인사를 올리려다가 무심코 그의 손에 싸맨 상처를 보고 물었다.
“부상 당하셨어요?”
부운석은 몸을 돌렸다.
“작은 상처일 뿐이다.”
“저와 관계가 있는 건가요?”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한안은 아무튼 그 상처가 자신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운석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너와 무관하다.”
한안은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그의 얼굴빛이 평상시에 비해 창백한 것을 알아차렸다. 살을 엘 듯 차디차던 모습이 덜어지고 부드러움이 늘었지만 동시에 수척해져 있었다.
“얼굴빛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네요. 불편한 데가 있으면 의원을 청해서 살피게 하는 게 어떨까요?”
“필요 없다.”
부운석은 이 화제를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너는 여기서 잘 쉬고 있어라.”
한안은 멍해졌다. 자신은 현청왕부에 이미 하룻낮 하룻밤을 머물렀다. 지금쯤 온갖 구설수에 빠져 있을 터였다. 한안은 바로 몸을 일으켰다.
“적당하지 않을…….”
“이미 사람을 시켜 장부에 소식을 보냈다.”
부운석의 목소리는 쉽게 알아차릴 수 없는 차가움이 깔려 있었다.
“궁중의 일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너는 본왕의 아내이니 현청왕부가 바로 너의 집이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말이 한안의 마음에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따뜻함이 솟아오르게 했다. 줄곧 찾아 헤매던 물건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 장부는 그저 아귀다툼, 음모와 계략으로 가득 찬 곳이었고, 거기에는 그녀의 전생의 처참했던 기억이 있었다. 천하는 크고 넓은데 그녀에게는 ‘집’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수려하고 얼음처럼 차가운 남자가 말하였다. 여기가 바로 그녀의 집이라고.
그녀의 입가가 휘어졌다.
“감사합니다, 왕야.”
부운석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어젯밤에는 그렇게 부르지 않았는데?”
한안은 멍해졌다.
“네?”
그는 한쪽 입술을 도발적으로 치켜 올렸다. 한결같이 맑고 차갑던 얼굴이 순간 조금 사악하게 변했다.
“네가 어젯밤 본왕에게 강제로 입을 맞추면서 부른 것은…… 운석이었다.”
한안은 눈이 휘둥그레지고 얼굴이 온통 새빨개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갈수록 바보 기러기 같아지는군.
부운석은 흔들리는 한안의 눈빛을 보며 생각했다. 그리고는 바로 몸을 돌려 탁자 위의 빈 약그릇을 집어 들고 방문을 나섰다. 긴 회랑을 몇 걸음 걷다가 뜰 안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어젯밤 일어났던 수많은 장면이 그의 눈앞에 떠올랐다.
어젯밤 한안 몸의 독성이 제압되어 한안이 점점 조용해지며 잠에 빠져들 때, 그는 변고가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침상 곁에 앉아서 그녀를 지켰다. 어느 순간 잠이 든 한안의 이마에 점점 땀이 많이 나더니 표정이 놀라움과 두려움, 분노로 연달아 바뀌면서 끊임없이 고개를 젓는 것을 보았다. 악몽에 시달리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악몽을 달래줄 생각에 일어나 침상 곁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입술이 무언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이라 그다지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부운석은 몸을 기울여 그녀가 입속에서 반복적으로 외치는 이름 하나를 들었다.
위여풍.
부운석은 뜰 가운데의 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위여풍?’
어젯밤 그녀가 위여풍을 외칠 때의 모습은 분명 놀람과 공포, 그리고 분노였다. 외침에는 절대적인 절망과 원한이 담겨 있었다. 그녀와 위여풍은 대체 무슨 원한이 있는 걸까? 부운석은 깊은 생각에 빠졌다. 처음부터 한안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차갑고 야박하게 위여풍을 대했다.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위여풍은 평판이 좋은 이였다. 겸손한 군자며 신분도 월등하고 온유하며 자상했다. 한안 같은 어린 아가씨가 좋아할 만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더욱이 한안은 남을 차갑고 야박하게 대하는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적을 대할 때도 그녀는 언제나 빙그레 웃는 모습이었고,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더더욱 쉽사리 자신의 감정을 흘리지 않았다.
한안은 성뢰, 혁련욱, 강옥루를 대할 때도 엄격히 예의를 갖추었다. 그러나 유독 위여풍에 대해서만 그녀는 언제나 냉담했고 경계했다. 위여풍을 처음 본 것 같았던 그 궁중 연회에서도 그녀는 위여풍을 냉대했다. 당시 부운석은 멀리 거리를 두고 그녀를 보고 있었지만 한안이 눈동자 속의 분노와 원한을 온 힘을 다해 감추고자 하는 것을 그는 포착하고 말았다.
아무런 이유 없이 남에게 원한을 품었을 리는 없다. 한 가지 가능한 것은, 한안이 이미 위여풍의 사람됨을 알았다면 모를까. 그러나 그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위여풍과 한안의 첫 만남은 확실히 궁중 연회에서가 틀림없었다. 평소에 외간 남자를 만나지 않는 규방 소저가 어떻게 한 사람의 인품과 덕행을 미리 알았을까?
지난번 그녀가 이림나를 대할 때의 이상한 거동도 마찬가지였다. 한안에게는 큰 비밀이 있는 듯했다.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많은 의문점이 있었다. 그러나 조급해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현청왕비고 자신은 모든 것을 들추어낼 시간이 얼마든지 있었다.
“주인님.”
목풍이 곁에 나타났다.
“궁중 쪽은 잘 처리했습니다.”
“목암은 어디에 있느냐?”
부운석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목풍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놀리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왕비의 두 여종을 돌보고 있습니다.”
부운석은 더 말하지 않았다.
“너는 궁으로 돌아가거라.”
“네.”
목풍은 큰 소리로 말하고 연기처럼 미끄러져 멀리 달아났다. 주인이 화가 나면 정말 무섭다. 도대체 누가 왕비를 건드린 것일까? 이제 궁중에는 큰 난리가 날 것이다.
부운석은 침묵했다. 바람이 그의 눈처럼 흰 겉옷을 말아 올렸다. 늘씬한 자세는 그림 같았다. 멀리서 보면 신선이 바람을 타고 돌아오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 차갑고 엄숙한 얼굴 아래의 살기를 눈치채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의 사람을 건드렸으니 당연히 대가를 치러야겠지.’
15장
채봉전 안.
진 귀비는 태후 곁에 앉아서 이를 악물고 말했다.
“장한안이 정말 운이 좋습니다. 어제 그렇게 달아나다니요!”
“운석이 그녀를 보호하고 있어.”
태후는 안색이 사나워진 진 귀비를 한 번 흘끗 보았다.
“안색을 좀 수습해라. 실수해서는 안 된다. 표정을 드러내 사람들이 다 너의 심사를 간파하게 하다니. 쯧쯧.”
진 귀비는 원한에 차서 말했다.
“소칠(小七: 7황자)이 제게 부탁한 일이 이제 틀어졌어요. 모비가 되어서는 아들을 도울 수도 없다니…….”
말은 비록 이렇게 하였으나 낯빛은 얼마간 수습을 한 상태였다.
“네가 조바심 내 봤자다. 애가가 보기에 운석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어. 이 며칠 너는 당분간 좀 본분을 지키고 있거라.”
태후는 차를 받쳐 들고 한 모금 마시자마자 “퉤.” 하고 토해냈다.
“잔을 바꾸니, 어째 맛이 다르구나.”
진 귀비가 서둘러 말했다.
“당연한 일이죠. 신첩이 은자 천 냥을 들여 구한 ‘연화미’만 애석하게 되었습니다.”
태후는 눈꺼풀조차 들지 않고 말을 뱉었다.
“대범하지 못한 것. 은자 천 냥 정도가 눈에 차더냐!”
진 귀비는 말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걱정되었다. 자기 수중의 은전은 적지 않았고 황상도 적지 않은 상을 내렸다. 그러나 7황자의 씀씀이가 어마어마했다. 그 일천 냥 은자도 겨우겨우 만들어낸 것이었는데 7황자의 일에 도움도 되지 못하고 물거품이 되어버릴 줄이야. 태후가 말은 저렇게 하지만 지금까지 무엇을 하라며 자금을 내놓은 적이 없었다. 구두쇠였다. 마음속으로 몇 마디 욕을 한 진 귀비는 결심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은전을 손에 넣을 방법을 찾아야 했다.
“신첩이 생각이 얕았습니다. 모후께서는 신첩과 견식이 다르시지요.”
태후는 눈을 내리깔고 조금 피곤한 모습이었다.
“너는 일단 돌아가라. 애가는 조금 고단하구나.”
진 귀비는 서둘러 일어서서 물러남을 고했다. 그녀가 간 후, 태후 곁의 여관이 서둘러 그녀에게 담요를 걸쳐주었다. 그러나 태후가 두 눈을 뜨고 있는 것을 보니 피곤한 기색을 찾기 어려웠다.
“마차를 버려서라도 장수를 보존해야겠지.”
진 귀비는 침궁으로 돌아가자마자 성질을 부리기 시작했다. 탁자 위의 기물이며 주전자, 찻잔을 한 번에 바닥으로 쓸어버려 부서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주위의 궁녀들은 큰 숨도 감히 내지 못하고 귀비 마마의 화를 부를까 싶어 몸을 움츠리기 바빴다.
“장한안.”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가 달아나다니. 태후 그 늙은이, 가식 떨며 거드름 피우기나 잘하지, 은자는 내놓을 줄도 모르지. 소칠이 황제가 되기만 하면……, 그가 황제가 되기만 하면! 진 귀비의 낯빛이 점점 누그러졌다. 분노를 대신한 것은 일종의 타고난 우월감이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았다. 자신이야말로 천하의 가장 존귀한 여인이라는 듯 근엄한 눈으로 옆의 궁녀를 보았다.
“아직 멍하니 뭐 하는 게야? 차를 따르거라!”
어린 궁녀는 서둘러 다가가 진 귀비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궁에 새로 상납 된 군산은침으로 향기가 사방에 진동했다. 그녀는 새끼손가락을 치켜세운 채 잔을 잡고 한 모금 마셨다. 군산은침은 단 2단지만 상납 되었다. 한 단지는 황상 자신이 마시고 한 단지는 바로 그녀의 침궁이 챙겼다. 황후조차 챙기지 못한 것이다. 육궁의 수장이면 또 어떠랴. 황상이 가장 총애하는 이는 이 귀비인 것을.
“사람을 보내 가서 황상께 고하라 해라. 오늘 밤 본궁이 직접 주방에 가서 폐하를 위해 좋은 요리를 만들려 한다고.”
귀비는 황상의 총애를 등에 업고 행실이 오만방자하고 제멋대로였으며 법도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궁녀는 서둘러 답하고 나갔다. 진 귀비는 차를 몇 모금 마시고 그제야 찻잔을 내려놓았다.
“뜨거운 물을 준비해라. 목욕을 해야겠다.”
*
현청왕부.
한안은 뜰에서 햇볕을 쬐고 있었다.
어제 그렇게 한바탕 괴로움을 겪고 나니 오늘은 온몸이 무기력하여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부운석은 여종들에게 왕비를 잘 돌보라고 분부했지만 한안은 급람과 주홍이 걱정되어 바로 방을 나섰다.
현청왕부의 하인들은 한안에게 대단히 예의가 발랐고 말끝마다 왕비 소리를 입에 붙여 한안을 불편하게 했다. 현청왕부의 사람들의 눈에 그녀는 엄연히 현청왕부를 도맡을 여주인이었다. 급람과 주홍은 모두 피부만 살짝 다쳤을 뿐이었다. 어제 그 자객들은 한안이 도망친 것을 보고 급람과 주홍은 신경도 쓰지 않고 떨쳐 버린 후에 급히 떠났다고 했다. 나중에 현청왕부의 시위가 그녀들을 찾아서 현청왕부로 온 것이었다.
“소저, 왕야께서 정말 위풍이 대단하세요.”
급람이 말했다.
“어제 그 늠름한 기세를 생각하면! 처음에 태후 쪽 사람들은 왕야의 시위들이 우리를 데려가는 것을 허락지 않았어요. 우리가 무슨 수상한 인물이라고 말하면서요. 하지만 왕야의 시위들이 바로 옥패 하나를 휘두르니 감히 왈가왈부하지 내지 못했어요.”
급람은 눈치가 빨랐다. 어젯밤 그 시위들이 궁중에서 거리낌 없이 마구 수색하고 태후의 사람을 체포했으니 태후는 크게 화가 났을 것이다. 자신과 주홍은 궁중에서 죽어야 할 운명이라 여겼다. 태후가 한안을 공격한 이상, 두 노비를 살려둘 리 없었다. 하지만 노비 두 명을 위해 태후와 대적할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왕야의 시위들이 이렇게 말했지.
“왕야의 명령을 받들어 왕비 신변의 사람은 털끝 하나도 상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곱게 돌려보내야 합니다. 현청왕부의 사람을 다른 사람이 단속하거나 가르칠 기회는 절대 오지 않을 것입니다.”
태후는 화가 나서 얼굴빛이 파래졌다. 그러나 어찌해 볼 도리가 없어 눈을 뻔히 뜨고 현청왕부의 사람이 두 사람을 데리고 가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급람이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에 대한 고마움만으로 부운석을 우러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소저 신변의 하인조차도 이처럼 아끼고 보호한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현청왕은 자기 사람을 감싸줄 줄 아는 사람이니 소저가 그를 따르면 억울한 일을 겪을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한안은 그녀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톡 찍었다.
“상처가 겨우 좋아지니 바로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구나. 너와 주홍은 다시 가서 좀 누워라.”
한안은 어젯밤 일로 여전히 마음에 공포가 남아 있었다. 만약 그 사람들이 두 사람을 처리하려만 했다면 자신이 무엇을 하려 해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이번 생에서도 자신이 아끼는 사람을 잃게 된다면 과연 한안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때였다.
“소소야?”
주홍이 옆에서 가벼운 소리로 외쳤다.
한안은 고개를 돌렸다. 장한명이 초조함이 가득한 얼굴로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장한명은 한안을 보고 외쳤다.
“누님!”
눈물이 그의 눈에서 흘러내렸다.
한안은 마음속으로 탄식했다. 혈육 사이에 소원함은 하룻밤 새 눈 녹듯 녹아내렸다. 장한명이 며칠 전 그녀와 의견이 맞지 않아 말다툼하고 마음이 상하게 했지만, 시간이 지나 이미 기억 저편으로 잊어버린 후였다. 낯선 이 때문에 오누이 간의 의가 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한안은 손을 내밀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 가벼운 소리로 물었다.
“네가 어찌 왔느냐?”
장한명은 눈물을 다시 참지 못하고 울먹였다.
“어젯밤의 일을 자형께 들었어요. 누님, 태후란 분이 너무도 가증스러워요. 누님은 만사를 조심하셔야 해요. 저, 저는 놀라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는 결국 아직 어린아이일 뿐이다. 한안은 복잡한 마음에 손을 들어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나는 괜찮아.”
장한명의 뒤로 영자가 따라온 것이 보였다. 영자는 눈을 들어 몰래 그녀를 훔쳐보고 있었다. 영자는 한안과 시선이 마주치자, 즉시 고개를 숙여 자신의 발끝을 보았다.
장한명도 한안이 영자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알아차렸다. 기척 없이 몸을 기울여 영자를 몸 뒤에 가렸다. 한안의 표정에 냉소가 드러났다. 영자란 아이, 간단하지 않구나. 장한명은 영자를 밑도 끝도 없이 신임하고 있었다. 그러니 현청왕부에 들어올 때조차 이 아이를 데려왔지. 그러나 한안은 영자 때문에 지금 당장 장한명과 또다시 말다툼하고 싶지 않았다.
장한명은 한안이 영자를 괴롭힐까 봐 몹시 두려워하며 긴장하고 있다가 한안이 화제를 딴 데로 돌리자 한시름을 놓았다. 마침 급람이 찻물을 가져와 한안을 위해 차를 따르기 시작했다. 영자도 앞으로 한 걸음 나와 장한명의 차를 받으려는 것 같았다.
“앗!” 하는 소리가 들려 한안이 고개를 돌려 보니, 영자의 옷 앞자락이 크게 얼룩져서 젖은 것이 보였다. 손에서 김이 나면서 커다랗게 새빨개져 있었다. 찻물이 튀어 화상을 입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한안이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장한명이 벌떡 일어났다.
“무슨 짓이냐?”
장한명은 큰 소리로 급람을 꾸짖었다.
“네가 어찌 이런 짓을 저질러? 이처럼 손발이 둔하니 어디다 쓰겠어? 내쫓는 게 낫겠다!”
급람은 멍해졌다. 그녀는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소소야…… 저 아니에요…….”
영자가 서둘러 말했다.
“급람 언니와 상관없는 일이에요. 제가 조심하지 않아서…….”
영자의 눈 속에 물빛이 반짝였다. 놀라고 두려워하며 무기력한 표정이었다. 영자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는데 일이 떠들썩하게 커질까 걱정인 모습이었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영자가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두려워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으로 여길 것이었다.
한안은 마음속으로 소리 없이 냉소했다. 장한명은 보지 못했지만 자신은 분명하게 보았다. 영자가 분명 급람을 꼬집었다. 급람이 손이 아파 찻물을 엎은 것이다. 졸렬한 수법이건만 어린 장한명은 속아 넘어갔다.
“한명아.”
한안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
“일이 아직 명확하지 않은데 사람을 쫓아내니 마니 하는 것이냐?”
급람도 나섰다. 급람이 남에게 모함을 받고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그녀는 큰소리로 외쳤다.
“저 아이가 저를 모함한 것이에요.”
“헛소리!”
장한명은 노여움을 억제할 수 없었다.
“영자가 아무 이유 없이 어째서 너를 모함하겠느냐? 설마 그녀가 일부러 자신에게 상처를 입혔겠느냐?”
“모함인지 아닌지는 급람의 손을 보면 알겠지.”
한안의 몸은 여전히 나른하긴 했지만,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말투는 쇳조각처럼 싸늘했다.
“맞아요! 보세요.”
급람이 서둘러 왼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등에 붉은 손톱자국이 뚜렷했다. 상처는 눈에 거슬릴 정도로 돌출되어 있었다.
“제가 아니에요. 정말 제가 아니에요…….”
영자가 급히 눈물을 떨구며 땅 위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바닥에 이마를 부딪치기 시작했다.
“소저, 정말 제가 아닙니다. 저는 저런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장한명이 영자를 부여잡으며 소리쳤다.
“분명 이 애가 수를 쓴 겁니다. 영자에게 누명을 씌우고 싶은데 방법이 없으니 자기가 자기를 상하게 한 거죠!”
한안은 생소한 남동생을 응시했다. 하룻밤 사이에 동생과 자신의 거리가 천리만리 떨어져 버린 것 같았다. 그녀는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너는 급람의 말을 못 믿겠다는 거지?”
장한명과 한안이 지난번 말다툼할 때 급람은 자리에 없었다. 더구나 영자를 본 적도 없었다. 장한명이 생소한 아이를 위해 한안과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을 보니 너무 억울했다. 급람은 자신이 아직 부상 당한 몸이라는 것도 잊고 영자에게 다가갔다.
“너는 입에 거짓말만 가득 찼구나! 내가 언제 고의로 네게 물을 뿌렸니. 도대체 무슨 속셈이냐?”
영자는 급람이 달려들자 순간 땅에 쓰러졌다. 한안이 말리기도 전에 장한명이 급람을 한 발로 걷어찼다. 아무리 어리다 한들 남자의 다리인지라 가련한 급람은 어제의 상처로 몸도 성치 않은 상태에서 장한명에게 차여서 쓰러지며 선혈을 토해냈다.
장한명의 행동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일장으로 바람을 일으키며 급람을 공격해 왔다. 줄곧 침묵하고 있던 주홍이 급람을 밀쳐내고 자기 등으로 장한명의 일장을 맞고 땅에 쓰러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한안이 저지할 틈도 없었다. 급람과 주홍이 장한명 때문에 중상을 입는 것을 본 한안의 입안에서 옅은 피비린내가 솟아올랐다.
사태가 심각하게 흘러갔지만, 장한명은 손을 거둘 생각이 없었다. 일촉즉발의 순간, 돌연 누군가 나타나 장한명과 일장을 마주했다. 예상치 못한 장한명은 남자의 일장에 맞고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한명은 간신히 발꿈치로 멈추어 서고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은 막 주홍을 부축하고 있었고 시위 복장이었다. 한안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목암이었다.
“너는 누구냐?”
장한명의 질문을 무시하고 목암은 한안에게 몸을 구부리고 주먹을 포개어 절을 올렸다.
“왕비, 속하가 늦었습니다.”
장한명의 눈빛이 변했다.
“너는 부중의 하인이냐? 어찌 감히 나를 이렇게 대해?”
“장한명.”
한안이 입을 열고, 느릿느릿 일어섰다.
장한명은 고개를 돌려 한안을 보았다. 한안은 상냥하고 친절했다. 이렇게 엄숙할 때는 드물었다. 그녀의 눈빛은 차갑게 굳어 있을 뿐 자신을 보는 눈에 분노는 없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알 수 없지만 장한명은 까닭 없이 겁이 나고 불안했다. 한안이 급람과 주홍, 두 여종을 아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급람은 간덩이가 부었고 오만방자했다.
“이제 보니 네가 오늘 여기 온 것은 날 걱정하여 온 것이 아니었구나.”
한안은 눈을 내리깔았고 말투는 기복 없이 담담했다.
“죄를 묻기 위해서 온 것이지.”
장한명은 한안이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오늘 일은 우연이 아니었다. 지난번 일 이후 영자는 어두운 곳에 숨어서 눈물을 흘렸다. 그는 의심이 들어 영자를 불러 꼬치꼬치 따져 물었다. 영자는 말하려 하지 않았다. 나중에 장한명이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그녀를 부에서 내쫓겠다고 위협하고서야 영자는 비로소 자초지종을 말했다. 알고 보니 부중의 여종들이 은밀히 모여 그녀의 험담을 했다는 것이다. 여종들은 그녀를 주인을 홀린 여우 년이라고 했고 오누이의 불화를 일으켰다고 했다. 그는 사람을 시켜 도대체 누가 헛소문을 날조했는지 조사했고 그 결과, 헛소문을 날조한 사람은 급람이었다. 한명은 급람을 바로 징벌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급람은 한안의 측근 여종이어서 쉽지 않았다. 현청왕부에 들어와서도 급람이 영자에게 교활한 수단을 부리고 누명을 씌우려고 해서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 과하게 대했다.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그는 머지않아 급람에게 이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안이 간파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장한명의 얼굴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누님, 이 여종은 누님이 안중에도 없습니다. 게다가 간덩이가 붓고 오만방자하여 제 세력을 믿고 남을 괴롭혔습니다. 지금 제가 누님을 대신하여 여종을 징벌하는 것은 그럴 만한 것입니다.”
한안은 무미건조한 얼굴빛으로 그를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찻주전자를 들어 자기 잔에 차를 따랐다.
“세력을 믿고 남을 괴롭혔다?”한안은 가볍게 웃으며 냉소적인 시선으로 장한명을 보았다.
“급람은 나의 세력을 믿은 것인데 너는 어찌 말하지 않니? 내가 사람을 괴롭힌다고?”
장한명은 한안의 말에 무한히 깊은 뜻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두려워졌다.
“누님은 누님의 여종을 보호하려 하는 것이고, 저도 제 여종을 보호하려 하는 것입니다.”
“급람은 십여 년이나 나를 따랐어.”
전생까지 셈하면, 사실 20년이었다.
“너의 여종은 너를 따른 지 얼마나 되었느냐?”
장한명은 불편해졌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안은 늘 영자를 의심했다. 그는 한안이 주씨 자매와 미 이낭을 방어하기 위해 무섭게 변했음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자기 주변의 사람까지 의심을 품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영자는 그저 고난을 겪은 사람일 뿐인데 한안은 어째서 늘 괴롭게 몰아붙이는 것일까?
장한명은 영자를 끝까지 보호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그녀를 믿어요!”
한안은 몸을 곧게 세웠다. 영자는 땅 위에 움츠리고서 끊임없이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이 정말 가련해 보였다. 한안은 희미하게 웃었다.
“너는 급람이 영자를 상처 입히고 마찬가지로 내가 영자를 의심한다고 믿으니 네 뜻을 반박할 필요가 없겠구나.”
한안은 말을 마치고 손을 휘둘러 뜨거운 찻물을 영자의 머리 위에 뿌렸다. 영자는 처참하게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즉시 얼굴을 가렸다.
장한명은 한안이 직접 손을 쓰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의 기억 속에 한안은 부드럽고 상냥하며 온화한 사람이었다. 설령 그에게 화가 났어도, 설령 아무리 분노했어도 대갓집 규수의 규범에 따라 직접 사람을 다치게 할 리 없었다. 게다가 하인을 이렇듯 벌하면 영자의 주인인 자신의 체면은 뭐가 된단 말인가?
“소야, 저를 구해주세요. 영자를 구해주세요. 소야…….”
영자의 반응도 빨랐다. 영자는 즉각 장한명의 발치로 기어와 그의 다리를 부여잡았다. 그녀의 작은 얼굴 위에 뜨거운 찻물과 찻잎이 가득했다. 희고 깨끗한 피부가 데어서 새빨갰고 머리카락은 흠뻑 젖어 고인 물이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장한명은 한안에게 크게 고함을 질렀다.
“누님이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말소리가 미처 떨어지기도 전에 짝,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놀란 장한명은 자기 뺨이 뜨겁다고 느낄 뿐이었다. 장한명의 뺨 위, 붉은 손도장이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돌아보니 한안이 휘두른 손을 담담하게 거두어들이고 한명을 낯선 사람 보듯 보고 있었다.
“두 가지 규칙이 있어. 첫째, 내 사람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
싸늘하고 차가운 목소리는 살을 엘 듯 뼛속까지 시리게 파고들었다.
그녀의 눈빛이 담담하게 혼절한 급람과 주홍, 두 사람의 몸 위로 향했다. 자신이 보호하기로 결심한 사람이었다. 설령 장한명이라 해도 그녀들을 다치게 할 수 없었다. 장한명이 상처를 입혔으니 반드시 되갚아 줄 것이다.
“둘째, 내가 한 적이 없는 일은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그녀는 장한명의 발치에 꿇어앉아 있는 영자를 보았다. 영자의 얼굴은 반쯤 가려져 있었다. 애석하게도 한안은 영자의 원한과 독기로 가득한 눈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만약 누군가 내가 하지 않은 일을 인정하게 하려 한다면, 그럼 나는 그 일을 진짜로 행할 뿐이야.”
영자의 몸이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한안은 높은 곳에서 군림하듯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안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으며 동시에 조용히 무언가 기다리고 있다고 느껴졌다. 진귀한 사냥감을 보고 있는 사냥꾼같이 서두르지도 여유 부리지도 않으며 자신이 함정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한안, 이 여자는 무얼 하려는 거지?
장한명은 한안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달갑지는 않았지만 한안이 바라보는 눈빛이 그를 두렵게 했다. 그 눈빛은 차갑고 오싹했다. 한안은 이제 그에 대해 일말의 희망도 품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문득 슬픔이 스며들었다. 한명은 자신의 가장 진귀한 물건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는 무언가 말을 하고 싶었다.
한안은 몸 위에 가볍게 장포를 걸치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꺼져라.”
한안은 지금까지 한명을 이렇게 대한 적이 없었다. 장한명은 일순간 멍해졌다. 한안은 자신을 한 대 때렸을 뿐만 아니라 꺼지라고까지 말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한안은 이미 몸을 돌린 상태였다. 장한명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고 영자를 잡아당겨서는 분개하며 떠났다.
그가 간 후에야 한안은 목암에게 말했다.
“번거롭겠지만 두 사람을 방으로 데려가서 의원을 청해 잘 살피게 해다오.”
목암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손으로 주홍의 허리를 끌어안고 급람을 등에 업고서는 망설이며 한안을 한 번 보았다. 한안이 직접 따라오지 않는 것은 조금 이상했다. 그녀는 급람과 주홍을 친자매처럼 대했고 그녀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남동생과 반목했다. 하지만 지금 조금의 관심도 없는 듯한 모습은……. 한안은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조금 피곤한 듯했다.
“가거라.”
목암은 또 한 번 한안을 보았다. 급계도 하지 않은 소녀의 몸은 유약해 보였다. 그러나 조금 전의 사건에서처럼 그녀의 행동은 과단성 있고 명쾌했다. 바위같이 침묵하는 게 일인 목암조차 한안이 영자에게 뜨거운 찻물을 끼얹을 때 대단하다며 소리를 지를 뻔했다. 이런 사람이라야 왕비에 어울린다. 오직 이런 사람이라야 비로소 왕야의 눈에 들 수 있다.
목암이 뜰 가운데에서 사라지자 한안은 비로소 돌의자에 쓰러지듯 앉았다. 가슴께가 심상치 않을 정도로 답답하다 느끼고는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덮었다.
“음…….”
목구멍의 피가 뿜어져 나왔다. 눈처럼 흰 손수건이 빨갛게 물들었다. 어렸을 때 자신과 한명, 그리고 어머니가 함께 방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때가 떠올랐다. 이미 다시 한번 더 세상을 살고 있는데 어째서 여전히 어머니는 세상을 등지셨고, 어째서 그들 오누이는 이렇게 변한 걸까?
한안은 느릿느릿 손을 거두고 피가 묻은 손수건을 움켜쥐었다. 입가가 놀랄 정도로 붉었다.
이렇게 된 이상, 물러설 방법이 없었다.
한편 장한명이 영자를 데리고 부를 나서는 순간, 눈처럼 흰 신영을 하나 보았다. 그 신영은 훤칠하고 살을 엘 듯 차가웠다. 아주 먼 거리에서도 스산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멍하니 그 사람이 몸을 돌리는 것을 보고 있으니 그림처럼 수려한 용모가 드러났다. 장한명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그 사람은 현청왕부의 주인이자, 한안의 부군, 지금의 현청왕야, 부운석이었다.
부운석은 뒷짐을 지고 서서 장한명을 보았다. 그의 눈빛이 낭패한 모습의 영자 몸 위에 떨어지며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
영자는 수려한 청년을 보자마자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이 뛰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구나가 현청왕야의 세상에 둘도 없는 풍채와 재능에 대해 말한다지만, 일반 백성 중 이처럼 그와 가까이 있을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가까운 거리에서 그를 보니 푸른 소나무처럼 빼어난 기질에 기백과 도량은 화려하고 고귀하여 천상의 황자에도 뒤지지 않을 듯했다. 그의 냉담하고 깨끗하며 화려한 모습에 여인은 홀리듯 그를 흠모하게 되는 것이다. 영자는 장한명이 입을 열기를 기다리지 않고 가녀리게 대답했다.
“소야와 왕비 사이에 조금의 오해가 발생하였습니다…….”
그녀는 장한명이 한안에게 불경했던 것을 교묘하게 숨겼다. 영자가 가련한 표정을 가득 지으니 사정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보면 왕비가 오만방자하게 날뛰었다고 여길 것이었다. 심지어 하인까지 괴롭힌 것으로 보이니 한안에 대한 인상이 좋을 리 없었다.
그러나 영자는 부운석이 한안을 어찌 여기는지 몰랐다.
만약 영자가 정말 총명했다면 한안이 일을 당하자 부운석이 그녀와 두 여종을 현청왕부에 받아들였다는 사실만으로도 부운석이 어린 왕비에게 충분히 마음을 쓰고 있음을 깨달았어야 했다. 영자의 대답은 부운석의 역린을 건드렸다.
부운석이 어떻게 손을 쓰는지 보이지도 않았는데 눈 깜박할 사이에 꽈당 소리와 함께 영자가 쓰러졌다. 부운석의 눈처럼 하얀 소매가 미미하게 움직였을 뿐이었다. 그는 장한명을 한 번 힐끗 보고 말했다.
“꺼져라.”
*
깊은 궁 화려한 전각.
여자는 금빛 수가 놓인 하늘거리는 얇은 비단으로 만든 빨간색 긴 치마를 입고 새까만 긴 머리를 선녀처럼 정교하게 매듭을 지어 빗었다. 하얀 피부에 아름다운 용모, 부드럽고 날씬한 여자는 대단히 곱고 화려했다.
여종이 향기름을 찾아오자, 진 귀비는 낭창낭창한 손가락을 뻗어 향기름을 찍어서는 손등에 발랐다. 황상은 몇 시진 뒤에야 올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막 목욕을 한 뒤라 피부가 투명하고 매끄럽게 윤이 났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정말로 그림 속의 선녀 같았다. 후궁 가운데서 황후와 태후를 제외하고는 그녀가 바로 가장 존귀한 여인이었다. 황상이 가장 총애하는 여인도 바로 그녀였다. 하지만 그녀는 제왕의 사랑을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결코 만족하지 못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그 자리’였다.
느긋하게 몸을 일으킨 그녀는 옆의 궁녀에게 말했다.
“바깥뜰로 가자.”
황상은 그녀가 홍매화 나무 아래 서 있는 모습을 가장 좋아했다. 그는 그녀가 화사한 홍매화 같다고 말하곤 했다. 오늘 그녀가 이처럼 성장을 차려입은 것은 황상의 환심을 사려는 이유였다. 태후의 말은 그녀의 마음속 깊숙한 곳을 건드렸다. 부운석의 막강한 권력이 전 조정과 재야에 미치니 분명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부운석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황상뿐이었다. 황상은 그녀를 총애하였고 이전에 장한안이 부운석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을 넌지시 드러내기도 했었다. 황상도 현청왕비에 그다지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일은 분명 수월할 것이었다.
저녁 무렵이었다. 진 귀비는 몸속 깊은 곳에서 기이한 감각이 느껴졌다. 온몸에 조급증이 일어나 몸이 점차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안에서 억제할 수 없는 갈망이 솟아올랐다. 그녀는 어린 아가씨가 아니니 당연히 이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아무런 까닭 없이 정욕이 솟구친다……? 순간 자신이 한안 때문에 특별히 준비했던 연화미가 떠올랐다. 머릿속에 위잉 하는 울림이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바로 알았다. 자신은 춘독에 중독된 것이다.
홍매화 나무줄기를 짚은 그녀는 견딜 수 없어 허리를 구부렸다. 아직 머리가 조금 맑은 상태라 명치를 누르면서 오늘 있었던 일을 되짚어보았다. 그녀는 오늘 태후전에서 돌아온 후 침궁을 나간 적이 없었다. 태후는 결코 자신에게 독을 쓸 리가 없다. 진 귀비는 바보가 아니었다. 장한안이 일을 당한 이튿날 자신이 바로 춘독에 중독되었으니 분명 부운석이 직접 손을 쓴 것이다. 부운석, 간이 크구나. 분명 그가 진 귀비 신변의 사람을 매수한 것이다. 진 귀비의 마음속에 저도 모르게 한기가 솟아올랐다. 그의 손이 후궁까지 뻗칠 수 있다니. 실로 만만히 볼 수 없는 자였다.
“초춘.”
그녀는 이를 악물고 측근 궁녀를 급히 불렀다. 춘독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잠깐도 지나지 않아서 그녀는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고 입술과 이 사이에서 저절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한 손이 그녀를 부축했다.
진 귀비는 머리가 어지럽고 나른해져 초춘의 몸에 기댔다. 그러나 기대자마자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기댄 몸이 쇠처럼 단단했다. 그녀는 놀랐다. 자신의 하얀 팔을 움켜쥔 손이 거무스레하고 굵직한 것이 보였다. 분명 남자의 손이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머릿속에 아직 남아 있는 맑은 정신은 몸 뒤의 사람을 밀쳐내라고 하고 있었다. 그러나 힘이 빠져버린 진 귀비는 훅 쓰러지면서 그대로 그 남자의 가슴에 꽉 안겼다. 낯선 남자가 친절한 얼굴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마마?”
진 귀비의 귓가에 전해 오는 숨결은 불처럼 후끈하고 뜨거워 그녀는 참지 못하고 전율하고 말았다. 머리로는 그를 밀쳐내려 했지만 진 귀비는 자신의 행동을 완전히 통제할 수가 없었다. 그저 이 남자의 몸에 억제할 수 없는 갈망이 생길 뿐이었다. 진 귀비는 신음소리를 내며 상대방의 몸을 부드럽게 더듬었다.
“마마, 이러시면 안 됩니다!”
진 귀비는 남자의 몸에 기어올랐다. 몸속에 꽉 눌러 참고 있던 것이 거의 폭발할 지경이었다. 이제 그녀의 머릿속엔 오직 욕망만이 남아 있었다. 진 귀비는 교태 어린 목소리로 남자를 유혹했다.
“나를 힘들게 하지 말아요.”
남자는 “마마, 안 됩니다.”를 외치며 그녀를 밀쳐내려 했다. 그러면서 남자의 손가락이 진 귀비의 몸을 억세게 더듬었다. 그 손길은 마치 깃털로 간지럼을 태우는 것 같았다. 꾹 눌러 참고 있던 정욕은 남자의 손길에 그야말로 불이 붙었다. 그녀는 발정 난 짐승처럼 작은 입을 곧장 남자의 입술로 가져갔다.
남자도 더 이상 욕정을 참을 수 없었다. 향기롭고 요염한 미인이 몸을 던져 안겨오니 참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마마, 죄를 짓겠습니다!”
남자는 그녀를 품 안에 바짝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열렬하게 입을 맞추었다.
한창 불처럼 뜨겁게 입을 맞추고 있을 때, 노기 충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단한 간부와 음부로군!”
한창 진 귀비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있던 남자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즉각 진 귀비를 밀쳐냈다. 남자는 목소리의 주인을 분명히 본 순간, 혼비백산하며 즉시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박았다.
“황상, 목숨을 살려주십시오!”
그러나 애석하게도 진 귀비는 그 순간에도 욕정에 불타오르고 있어 황상은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저 자기와 맹목적으로 뒤엉켜 있다가 떨어져 나간 그를 끌어당겨 달라붙기에 바빴다. 그녀는 교태 넘치는 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 황상은 무슨. 당신이 바로 제 황상이에요.”
수행하던 태감은 놀라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황상이 가장 총애하는 귀비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남자와 추악한 짓을 저질렀으니, 하늘이 뒤집히는 일이 벌어질 것이 뻔해 보였다.
황상은 대노하여 빠르게 앞으로 걸어갔다. 진 귀비의 옷과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가늘게 뜬 눈에는 교태가 뚝뚝 떨어지며 음탕한 빛이 가득 차 있었다. 자신이 와 있음에도 여전히 수치심도 없이 외간 남자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황상은 짝, 소리와 함께 매섭게 한 대 후려쳤다.
“이 천한 것을 포박하여 감옥으로 보내라!”
황상은 말을 마치고 둥글게 움츠리고 있는 남자를 날카롭게 한 번 보았다.
“끌어내다 베어라!”
“황상, 살려주십시오, 황상 살려주십시오.”
그 사람은 처참하게 외쳤다.
“소인은 무고합니다. 마마께서 소인을 유혹하셨습니다. 소인이 순간 어리석었습니다. 황상,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 사람은 멈추지 않고 땅에 머리를 박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황상은 그를 놓아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시위 몇이 바로 그를 붙잡아 침궁에서 끌어냈다. 진 귀비는 아직도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진 귀비를 끌어내던 시위는 그녀가 자신에게 엉겨 붙자 정신없이 허둥대기 바빴다.
수행하던 태감은 황상이 대노한 모습을 보고 숨소리도 감히 내지 못했다. 이 백주대낮에 감히 황상 앞에서 간통을 하다니……. 진 귀비는 오래 사는 게 싫어진 모양이었다. 황상이 그녀를 감옥에 넣었으니, 진 귀비가 다시 총애를 얻을 가능성은 없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남자에게 더럽혀진 불결한 여자는 제아무리 미모가 뛰어나고 재능이 많다 해도 황상이 받아들일 수 있는 최저 한계선을 넘어섰다. 다만 애석하게 된 것은 7전하였다. 태감은 공손하게 고개를 수그린 채 마음속으로 계산을 했다. 지금 7황자는 황상의 심중에 차지하는 지위가 갈수록 높아져 거의 태자를 넘어설 정도였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아마 진 귀비의 일이 7전하에게도 연루되리라.
황상은 냉랭하게 뜰 안을 한 번 둘러보고 말했다.
“침궁 안의 사람들을 모두 잡아들여라!”
황상이 좀 더 냉정했더라면 이 사건에 수상쩍은 점이 많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진 귀비가 어떻게 이런 시간에 외간 남자와 사고를 칠 수 있는 것인지 하는 것 말이다. 보통 남몰래 사통한다면 은밀히 하지 않는가. 이렇게 큰 뜰에 진 귀비를 수행하는 궁녀가 보이지 않는 것이라든가, 남자가 어떻게 궁 안에 들어왔는가 하는 점이라든가 수상한 점이 많았다.
그러나 황상은 냉정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도 제왕이기 전에 한 사내였다. 평범한 집안의 남자라 해도 자신의 처가 다른 남자와 부정한 관계를 가지는 것을 목격한다는 건 충분히 치욕적인 일이었고 소문이 나면 멸시의 비웃음을 당하기 일쑤였다. 몰래 사통하며 여인의 도리를 지키지 않는 자들을 바구니에 넣어 물에 빠뜨리거나, 얼굴에 붉게 달군 인두로 ‘음’자를 낙인 찍었다.
황상은 백성을 군림하는 자였고, 신하들은 모두 그를 존경했으며, 비빈들은 모두 그를 받들고 아첨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의 후궁 중에 간통한 이가 나왔으니 어찌 달가울까. 황상은 귀비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그리하여 진 귀비의 침궁은 하룻밤 사이에 오색찬란하여 화려하던 곳에서 냉궁보다 더 스산하고 불길한 곳으로 변해버렸다. 진 귀비가 몰래 사통한 일은 그 날로 바로 황궁 전체에 널리 퍼졌다. 그녀가 자기 분수를 모르고 황상 앞에서 일을 치른 것을 비웃는 사람도 있었고, 남의 어려움을 틈타 해를 가하려는 사람도 있었으며, 토끼가 죽으면 여우가 슬퍼하듯 비슷한 처지인 사람이 불행을 당한 것을 보고 슬퍼하는 이도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소문이 분분했지만 다행히도 궁 밖까지 퍼지지는 않았다.
진 귀비는 황궁 안에서 한동안 제멋대로 횡포를 부렸다. 황후조차도 어느 정도는 양보해야 했으니, 그녀보다 품계가 낮은 비빈과 재인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평소 좋은 물건이 있으면 다 그녀에게 바쳐야 했고 늘 아첨 해야 했다. 진 귀비는 황후는 아니었지만, 여태껏 황후 못지않은 대우를 받아온 것이었다.
자녕궁 안.
황후는 화려한 복장으로 한창 귤을 까고 있었다. 하얀 손가락이 노르스름한 귤에 대비되어 더욱 희고 깨끗해 보였다.
옆에 서 있던 고고가 입을 열어 말했다.
“마마, 황상 쪽에 가보시는 것이…….”
“필요 없다.”
황후는 희미하게 웃었다.
“지금 한창 화가 머리끝까지 나 계시니 누가 가서 폐를 끼쳐서는 안 되겠지.”
“진 귀비가 그런 짓을 할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고고는 황후의 안색을 살폈다.
“이번에는 정말 하늘을 뒤집으려 해도 어려울 것입니다.”
황후는 귤 알맹이 한쪽을 입안에 넣고 웃으며 말했다.
“미모는 그대로지만 은혜가 먼저 끊어지는 법이지. 제왕가는 본래 그와 같으니라. 진 귀비 스스로 너무 지나치게 허황된 망상에 빠져 있었던 것이니, 지금 이런 결말을 맞은 것도 당연한 게야.”
“그럼요, 마마.”
고고는 천하에서 가장 존귀한 이 여인을 올려다보았다. 진 귀비가 낙마했는데 황후는 전혀 기쁨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지금 우리는 어찌해야 합니까?”
진 귀비를 돕는 말을 하는 것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게 될 것이고 후궁 안의 사람이라면 분명 이런 결정을 하게 마련이었다.
황후는 손을 내저었다.
“총명한 여인은, 말이 많지 않은 법.”
진 귀비가 남과 간통하여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은 이튿날 한안의 귀에 전해졌다. 급람이 말했다.
“소저, 하늘이 정말 무심치 않습니다. 소저께 독을 쓰더니 자업자득이에요.”
한안은 급람을 슬쩍 보며 웃었다.
“하늘이 무심치 않아?”
급람은 멋쩍게 고개를 숙이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왕야께서 소저께 정말 잘해주신다니까요.”
급람은 어제 부상을 입은 후 의원에게 치료를 받았는데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다. 오히려 주홍이 병상에 몇 개월은 누워 있어야 했다.
게다가 이번 일은 급람조차 눈치챘으니 한안이 간파해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자신이 일을 당한 이튿날 진 귀비가 간통하는 일이 벌어졌으니 명확하지는 않더라도 그 속에 부운석의 노고가 적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안이 감격하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거짓일 것이다. 자신이 춘독에 중독된 날, 그는 결코 남의 위기를 이용하지 않았다. 사실상 자신은 이미 현청왕비이고 나중에 어차피 현청왕부에 들어오게 될 테니, 부운석이 자신을 어찌했다 해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태의를 청하여 자신을 해독시켜 주었다.
그리고 이 일은 태후와 진 귀비에 관계된 것이었다. 진 귀비는 언급할 필요가 없다 해도 태후는 부운석의 모후였다. 부운석이 진 귀비에게 무슨 행동이든 취하면 그건 태후의 얼굴을 후려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부운석은 한안 자신을 위해 정말로 그렇게 했다!
한안은 환생하여 지금까지 줄곧 경계심을 품고 세상 사람들을 보았다. 급람과 주홍, 유모, 장한명을 제외한 사람들은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사람들이었고, 때에 따라서는 적이 되기도 했다. 그녀는 스스로를 점차 심장 없는 사람, 더욱이는 마음 아파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변해갈 거라 여겼다. 하지만 부운석이 자신을 존중해 주니 그녀의 지친 마음이 오랜만에 따뜻해졌다. 그것은 무조건적인 호의였고,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하기도 했다. 한안은 부운석의 호의에 대해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 한안은 한 걸음 한 걸음 깊이 빠져들고 있었지만, 되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만약 이 모든 것이 부운석이 자신을 갖기 위한 술책이라면 기꺼이 그 술책에 넘어가고 싶었다. 적어도 지금 그녀는 그에게서 떨어질 수 없었다. 부운석이 어느 날 그녀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면 아무런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무엇이든 변할 수 있었다. 부운석의 호의 또한 얼마나 유지될까? 모든 것을 미리 다 아는 것은 어쩌면 전혀 좋은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안의 마음속에 영문 모를 옅은 슬픔이 솟아올랐다.
현청왕부의 서재 안.
성뢰는 의아해하며 부운석을 보고 있었다.
“네가 진 귀비에게 손을 써? 무슨 생각이야?”
성뢰는 방 안을 한 바퀴 걸었다. 그의 말투가 초조하게 바뀌었다.
“운석,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이건 네가 한 일 같지 않아.”
부운석의 일 처리는 인정사정없기로 유명했다. 보통은 직접 손을 쓰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일단 손을 쓰면 여지를 남기지 않고 일격에 숨통을 끊어 놓았다. 성뢰는 이미 부운석이 처리하고 싶어 하는 것이 태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태후와 진 귀비는 한패이나 지금 태후를 쓰러뜨릴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번 일에 지나치게 위험을 무릅썼으니 일단 조사를 당하면 화를 초래하게 될 것이었다.
“기다릴 필요 없어.”
부운석은 책상 앞에 앉아 담담하게 책상 귀퉁이의 옥 받침대를 응시했다. 수려한 얼굴에는 스산한 표정이었다.
어제의 일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솟구친 분노 때문이었음을 오직 그만이 알고 있었다. 한안이 평소 장부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목격한 후로는 자신이 보호할 수 있는 만큼 보호하려 했다. 하지만 한안이 현청왕비가 된 후에도 괴롭히다니 오만방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부운석은 제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설령 태후라 해도 그건 안 될 일이었다.
“지금 진 귀비가 옥에 갇혔으니 분명 반격하여 물려고 들 거야.”
성뢰는 걱정이 태산 같았다.
진 귀비의 간통 사건은 수상쩍은 부분이 많으니 황상도 감정이 가라앉은 후에는 이상타 할 것이었다. 사건 속의 구불구불 복잡한 사정을 조사해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바람이 없으면 파도가 일지 않는 법. 일의 발생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으니 부운석이 황상과 제아무리 친밀하다 하더라도 황가의 존엄과 관계된 일이니 작은 일이 아니었다. 부운석이 온전히 빠져나가고 싶다 해도 아마 어려울 터였다.
부운석이 차갑게 말했다.
“명확히 조사하려 해도 할 수 없을 거야.”
아주 미쳤군! 성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아는 부운석은 무슨 일에서든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한안을 보호하기 위해 황가와 공공연하게 대적하니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진 귀비를 끌어내리겠다는 결심이 굳은 듯했다. 진 귀비는 더 이상 총애를 받는 것이 불가능했다. 부운석의 어린 왕비가 이런 결말을 만족해할지 모르겠구나.
“하지만…….”
성뢰는 잠시 망설였다.
“네가 진 귀비를 건드렸으니 진 시랑은 아마 빠르게 7황자 쪽에 붙을 거야. 너에게는 한층 불리하고.”
진 시랑은 양쪽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을 계산하느라 아직까지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진 귀비가 총애를 받는 것이 불가능하니 진가가 세를 잃는 것을 면하기 위해 진 시랑은 반드시 7황자를 꽉 붙잡을 것이다. 7황자의 세력은 조야 전반에 복잡하게 꼬여 있었다. 위로는 위왕 부자가 있고 아래로는 장사양이 있으며 귀와 눈은 황궁에 널리 퍼져 있어서 진 시랑 같은 조력자가 늘어나면 나중에 뿌리째 뽑기 쉽지 않을 것이다.
“괜찮아. 나를 처리하고 싶다면 언제든지 오라고 해. 그럴 능력이 있다면 말이지.”
부운석의 표정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무슨 일에든 대가는 지불해야 한다. 애석하게도 현청왕부의 왕비는 그들이 건드릴 사람이 아니란 점을 그는 앞으로도 확실히 할 생각이었다.
“태후가 수수방관하지 않겠지.”
성뢰가 그를 보았다.
“운석, 준비를 잘 해두는 게 좋을 거야.”
부운석은 아무 말이 없었다. 햇빛이 조각된 창문 난간을 통과하여 방 전체에 가득 찼다. 분명 따뜻한 날씨인데도 방 안에는 뼛속까지 스미는 한기가 흘렀다.
‘태후라.’
*
채봉전 안.
태후는 옆에 앉아 있는 황상을 바라보면서 웃었다.
“아직 신경 쓰고 있는 것이오?”
황상은 고개를 저었다. 진 귀비를 떠올리면 아직도 분노를 가라앉히기가 어려웠고 눈가가 붉어졌다.
“짐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녀가 이처럼 안하무인일 줄 말입니다. 이렇게 음탕하다니요! 애초에 그녀를 간택하여 궁에 들인 것이 실수였습니다. 황가의 체면에 먹칠을 했어요.”
태후는 웃으며 그의 손을 토닥였다.
“사람이 세상을 살다 보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허다하다오. 얼굴을 안다고 마음까지 아는 것은 아니지요. 애가도 진 귀비와 친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녀가 그런 사람인 줄 몰랐다오. 모두 애가의 잘못이오. 애가가 그녀를 아끼지 않았다면 황상도 그녀에게 미혹되었을 리 없었을 터인데.”
황상은 서둘러 말했다.
“모후,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이 일은 모후와 조금도 관계가 없습니다. 그 천한 것의 품행이 문란했던 것입니다. 모후가 인자하고 덕이 높다는 명성이 천하에 자자합니다. 어찌 그 천한 것과 함께 거론될 수 있겠습니까. 짐은 그저 조금 화가 난 것뿐입니다. 모후께서는 절대 자책하지 마소서.”
태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애가는 황상이 효성스럽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이 일은 애가와 관계가 아주 없다 할 수 없으니 황상은 애가를 위해 그런 말은 하지 마시오. 어찌 된 것인지 애가가 반드시 명백히 알아볼 것이오. 황상은 생각해 본 적이 있소? 진 귀비가 어찌 이렇게 대담한 짓을 했는지? 백주대낮에 외간 남자와 추악한 짓을 저지르다니 더구나 황상이 오셨을 때조차도 말이오. 황상이 도착할 것을 분명히 알고 이런 짓을 저질렀다면 고의로 맞닥뜨리게 하여 황상이 그녀를 잡게 하려 한 것이 아니겠소? 일이 비정상적으로 일어나면 반드시 문제가 있는 법이오. 황상도 깊이 생각해 보시오.”
황상은 어제 진 귀비를 옥에 가두라는 명을 내리고 침궁에 돌아간 후 냉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깊게 따지며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제왕의 존엄은 명확한 것이니 이유를 불문하고 진 귀비의 행위는 죄가 너무 컸고 따라서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나 태후의 말에 조금은 망설임이 일어났다.
“모후의 뜻은…….”
황상은 어려서부터 모후를 따랐고, 태후의 말에 늘 어느 정도는 접고 들어가곤 했다. 태후는 그를 보았다.
“어제 애가가 그 일을 전해 듣고 이상하다 했소. 서둘러 사람을 시켜 알아보게 했지. 그러다가 기이한 일 하나를 알게 됐소.”
태후는 황상을 향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 귀비의 말이 자기는 억울하다는구려. 현청왕비가 그녀를 해치려 한 거라는군요.”
황상은 울컥 대노했다.
“온통 허튼소리군요. 이게 현청왕비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이 천한 것이 분명 다른 이에게 오명을 더러운 물을 끼얹으려는 겁니다.”
태후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황상은 우선 서두르지 말고 애가의 말을 끝까지 들으세요. 당시 애가도 듣고 이상하다 생각해서 사람을 시켜 무슨 말인지 물었답니다. 진 귀비 말이, 자신이 전날 생신연 때 어화원에서 공교롭게도 현청왕비가 한 남자와…… 추악한 짓을 하는 것을 목격했답니다. 진 귀비는 놀라 허둥대느라 그 남자가 누구인지 명확히 볼 수 없었다는구려. 하지만 현청왕비가 그녀를 발견했다지요. 현청왕비가 그걸 무마하기 위해 진 귀비에게 춘독을 써서 정신이 이상해져서 그 짓을 한 거라 하오.”
황상은 들으면 들을수록 놀라웠다.
“그 천한 것의 말은 모두 거짓입니다. 현청왕비는 운석의 처인데 어찌 남과 밀회를…….”
황상은 한안이 부운석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한안이 그런 부정하고 불결한 여자는 아닐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진 귀비의 일이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은 확실했다. 백주대낮에 남과 추악한 짓을 하는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인가? 게다가 자신이 그들과 맞닥뜨렸을 때, 진 귀비는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고 그 사람과 계속해서 그 짓을 하려고 했다. 당시에는 진 귀비의 천성이 음탕하여 정욕에 몰두한 것이라 여겼는데 지금 보니 이성을 잃은 행위 같긴 했다.
“황상, 한쪽 측면만 봐서는 안 됩니다. 황상은 천하의 주인이오. 세세한 것까지 다 놓치지 않고 살펴야 하오.”
태후의 말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황상은 여전히 망설였다.
“모후, 하지만 지금은 진 귀비 쪽의 말만 들은 것 아닙니까. 짐도 그녀의 말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판단할 수 없습니다.”
진 귀비의 말이 무언가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남에게 누명을 씌워 자신의 혐의를 벗어나려 할 수도 있었다.
“애가에게 방법이 하나 있소.”
태후가 자애롭게 웃었다.
“이 방법이면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을 거요. 현청왕비와 진 귀비 중, 도대체 누가 거짓을 말하는지.”
진 귀비는 감옥 안에서 온종일 머물렀다.
춘약의 약성이 가신 후 그녀는 점차 정신이 맑아졌다. 자신이 저지를 짓에 대해서는 기억이 전혀 없었다. 옥졸들이 그녀를 부정한 여인이라고 말했다. 황상이 그녀가 남과 간통하는 것을 잡아냈으니, 죽이지 않아도 남은 일생은 냉궁에 들어갈 운명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기를 쓰고 비명을 지르며 큰 소리로 자신은 모해를 입은 거라 외쳤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옥졸들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때, 태후의 사람이 진 귀비를 찾아왔다.
그동안 태후는 진 귀비 편이었다. 태후와 황후 사이에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지 그다지 명확하게 알지 못했지만 태후가 황후를 대하는 것은 진 귀비를 대하는 것보다 훨씬 못했다. 그러나 진 귀비도 알고 있었다. 태후가 그나마 진 귀비를 잘 대해주는 것은 진심으로 좋아해서가 아니라 단지 이용하기 위해서일 뿐이라는 것을. 진 귀비가 이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진 귀비 뒤의 진씨 세가 뿐이었다. 물론 지금까지는 이런 것들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진씨 세가의 보배였고, 황상이 가장 총애하는 여인이었다. 진씨 세가는 그녀로 인해 한 걸음 높이 올라갔다. 하지만 이제 그녀가 추락했으니 진씨 세가 전체가 연루될 것이었다. 궁중 안에 있는 여인은 한 개인만을 대표하지 않는다. 그래서 태후의 사람이 그녀에게 어찌해야 할지를 알려줬을 때, 진 귀비는 생각하지도 않고 승낙했다.
그녀는 입안이 깔깔하다 느끼고 옥졸에게 말했다.
“본궁이 목이 마르구나. 어서 가서 본궁에게 차를 올려라.”
옥졸은 육중하게 살이 찐 중년 남자였다. 그는 진 귀비의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비웃으며 말했다.
“이 보잘것없는 아낙이 웃게 하는구나. 차는 없고 오줌은 있는데?”
진 귀비는 평생 이런 모욕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순간 화를 참지 못하고 거만한 태도로 소리쳤다.
“무엄하다! 본궁은 황상께서 가장 아끼시는 여인이다. 황상께서 단칼에 네 머리를 찍어내실 게 두렵지도 않은 것이냐?”
그 옥졸은 그런 말은 처음 듣는다는 듯이 몇 걸음 걸어와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이 감옥에 갇힌 귀인들은 쌔고 쌨다. 아직도 자신이 마마인 줄 여기는 건 아니겠지? 이 어르신이 이렇게 오랫동안 이 짓을 해왔지만, 감옥에 갇혔다가 신세가 회복된 사람은 아직까지 한 명도 만나본 적이 없구나.”
이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일단 감옥에 들어온 사람은 다리를 반쯤 형장에 걸쳐 놓은 것과 같았다. 많은 황가의 친족과 세도가들이 이곳에 발을 들였지만 나간 적은 없었다. 진 귀비는 흠칫했지만, 여전히 고집스레 말했다.
“나는 모해를 받은 것이니 황상께서 반드시 본궁을 다시 받아주실 것이다.”
옥졸은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모해? 남과 간통한 것이 어떻게 모해를 당한 것일 수 있나? 들리는 말에 의하면 황상께서 직접 현장을 잡으셨다는데. 헤헤, 확실히 예쁘고 농염하게 생겼으니 괜찮기는 하겠네.”
옥졸은 말을 하며 아래턱을 문지르고 음란한 눈빛으로 진 귀비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진 귀비는 몸을 움츠렸다.
“무엄하다.”
그 옥졸이 웃었다.
“아마 이 감옥을 벗어날 수 없을 거야. 이 어르신이 반평생을 살면서 지금까지 황제의 여인과 자 본 적은 없거든. 흐흐.”
옥졸이 허리춤의 열쇠를 만지작거리는 것이 당장이라도 들어올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진 귀비는 놀라서 얼굴이 사색이 되어 연거푸 뒤로 물러났다. 감옥 안의 여자는 옥졸이나 수비하는 병사에게 능욕을 당한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일이 자기 자신에게 닥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한안과 부운석이 뼈에 사무칠 정도로 증오스러웠다.
*
현청왕부.
한안은 황상으로부터 궁에 들어오라는 성지를 받고 놀란 상태였다. 부운석은 현청왕부에 없었다. 황상의 성지는 어길 수는 없었다. 그러나 진 귀비가 감옥에 들어간 후 자신을 궁에 들라 소환한 것이니 공개적으로 질책하려는 것이라는 생각은 누구라도 들 것이었다. 황상이 아무 이유 없이 자신에게 의심을 품었을 리는 없었다. 누군가 황상이 자신 쪽을 의심하도록 유도했을 것이다. 그 사람은 태후가 아니라면 또 누가 있을까?
급람이 걱정스레 한안을 보았다.
“소저, 꼭 가야 하나요?”
황상이 궁에 들라 소환한 것이 어떻게 된 일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한안이 눈살을 찌푸린 것을 보고 급람은 걱정이 일었다. 소저는 전날 가까스로 황궁의 호랑이 입에서 빠져나왔다.
“당연히 가야지. 설마 성지를 거역할 셈이야?”
한안은 웃었다.
“마차를 준비하게 해. 왕부에서 무공을 할 줄 아는 시위 몇 사람을 부르고.”
예사롭지 않은 시기라 의외의 사태가 일어나는 것은 막고 싶었다. 다행히 이 부중의 하인들은 그녀를 극진히 대우했고 시위 몇을 동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방을 나가려는 급람을 붙잡았다.
“맞다. 왕야께서 돌아오시면 내가 황궁에 갔다는 것을 알리도록 분부해라.”
중간에 뜻밖의 일이 발생한다 해도 부운석이 제때 오기만 한다면 큰 변고는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주홍은 아직 부상을 치료하고 있는 중이라 데려갈 수 없었다. 한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황궁을 생각하자마자 바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과연 사람을 잡아먹는 곳이구나.
높은 담장과 주홍색 벽, 금빛 기와와 주렴.
그녀는 높은 자리 위에 앉아 있는 태후를 보고 자신의 예상이 맞았음을 알아차렸다.
“몸을 일으켜라. 고개를 들고 짐을 보거라.”
황상이 말했다.
한안은 몸을 세우고 황상의 말에 따라 고개를 들었다.
황상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의 제수인 셈인 소녀를 훑어보았다. 이해할 수 없었다. 냉담하고 쌀쌀맞으며 누구도 안중에 두지 않던 부운석이 어째서 이 평범하고 특별할 것 없는 어린 아가씨를 마음에 두는지 말이다. 확실히 그녀가 영리하고 재능이 있긴 했다. 하지만 영리하고 재능 있는 것을 치자면 부운석은 몇 년 전에 이미 왕비를 맞았어야 했다. 게다가 한안의 집안 배경은 지극히 평범했다. 한안이 고개를 들자 황상은 비로소 어린 아가씨의 모습을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어린 아가씨는 피부가 창백하고 허약해 보였다. 그러나 그 까맣고 빛이 나는 두 눈동자가 무한한 생기를 더해주면서 생명력 넘치는 들풀을 보는 듯했다. 이 소녀는 어린아이 같던 예전 모습에 비해 자란 것 같았다. 무슨 이유인지 이것이야말로 그녀의 본래 모습인 것 같았다. 그녀는 이목구비가 청순하고 깜찍하며 정교했다. 그렇지만 어째서인지 알 수 없게 유순해 보이는 눈빛 아래 사납고 오만한 빛을 품고 있었다. 마치 길들일 수 없는 야생마가 친근함을 가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갑자기 열세 살에 불과한 이 어린 아가씨를 꿰뚫어 볼 수 없었다.
아주 이상했다. 이전에 장사양이 자기의 적녀를 학대하고 부중 희첩이 어린 아가씨를 괴롭힌다고 들었을 때, 설마 부운석이 그녀를 동정하여 비로 맞이하기로 결정한 것인가 하고 의심을 품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보니 이 어린 아가씨는 침착하고 신중하면서도 기민하여 학대받은 이가 보이곤 하는 비천함과 억울함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담담한 미소를 머금고 있어 지금까지 좋지 않은 일이라고는 겪은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녀는 눈이 휘어지도록 웃는 것이 매우 행복해 보였다.
표정을 저처럼 꾸밀 수 있는 사람이라면 진실도 가장 깊이 숨길 수 있으렷다.
황상은 의미심장하게 한안을 노려보았다.
“장 낭자, 짐이 이번에 너를 소환한 것은 진 귀비의 생일 밤에 네가 어화원에서 아무 까닭 없이 사라진 일을 들었기 때문이다.”
한안이 얼굴에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는 것을 보고 황상도 에두르지 않고 바로 물었다.
“장 낭자는 어째서 도중에 자리를 떴는가?”
한안은 절을 올렸다.
“황상의 말씀에 답합니다. 신녀는 그 밤에 마마와 부인들과 함께 불꽃놀이를 보고 있었습니다. 도중에 정방에 가려고 일어섰습니다. 가는 길에 자객을 맞닥뜨리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자객?”
황상은 누구에게도 이런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무슨 자객?”
한안은 두려운 듯 살짝 떨며 고개를 저었다.
“당시 날이 이미 늦어 신녀도 자객의 모습을 명확히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녀의 여종들이 신녀를 구하기 위해 맞서다 부상을 입었습니다. 신녀는 놀라고 두려워 달아났는데 다행히 왕야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신녀가 기절을 한 모양입니다. 깨어보니 현청왕부였습니다.”
줄곧 입을 열지 않고 있던 태후가 돌연 물었다.
“장 낭자는 자객을 만났다고 말하면서 어찌 이 일을 황상께 고하지 않았느냐? 황상의 용체는 천금처럼 귀한데 만약 사고라도 있었다면 네가 어찌 책임을 질 것이야! 설마 일부러 그랬던 것이냐?”
한안은 깜짝 놀라 가슴에 손을 얹으며 서둘러 무릎을 꿇었다.
“신녀가 어찌 감히 폐하를 기만할 수 있겠습니까. 신녀는 혼절하기 전에 궁중에 자객이 있다는 것을 사실대로 고했습니다. 왕야도 사람을 파견하여 자객을 수색하고 동시에 저의 두 여종도 찾도록 하셨지요. 그러나 태후 마마께서 귀비 마마의 생일이니 시끄럽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막으신 것으로 압니다.”
한안의 작은 얼굴은 당황하였을 뿐만 아니라 억울해하고 있었다.
“분명 왕야께서 귀비 마마를 시끄럽게 방해할까 걱정하시어 바깥에 퍼져나가지 않은 것이겠지요.”
황상은 생각에 잠긴 듯 태후를 한 번 보았다.
“이제 보니 그랬던 것이군.”
태후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애가의 잘못이라는 얘기군.”
한안이 즉시 대답했다.
“감히 그런 뜻이 아닙니다. 태후 마마께서는 부처의 환생이신데 어찌 이 일과 관련이 있겠습니까. 모두 그 자객의 잘못이지요. 세상에 그렇게 대담한 자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감히 황궁에 잠입하여 황족을 해치려 기도하다니요. 죽은 후에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환생할 수 없을 것입니다.”
황상은 말이 없었다. 태후의 새끼손가락 끝이 살짝 떨렸지만 얼굴에는 평소와 같은 미소를 걸고 있었다.
“너도 알고 있느냐, 진 귀비가 감옥에 들어간 것을?”
한안의 작은 입술이 의아하다는 듯 벌어졌다.
“모릅니다…….”
태후는 차분하고 느긋하게 그녀를 보며 미소 지었다.
“진 귀비가 남과 간통하는 것이 발견되었다는구나. 그래서 감옥에 갇혔지.”
한안의 표정은 의아한 듯도 했고 어리둥절해 하는 기색도 있었다. 그러나 황가의 위엄을 두려워하는 듯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상은 그녀의 표정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그녀의 반응은 정상적이었고, 이 일에 대해 처음 듣는 소녀가 보일 만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이 너무도 완벽하고 조금의 허점도 없자 오히려 황상은 의심을 품었다. 한안은 곤혹스러운 표정 대신 침착한 표정을 짓는 것이 오히려 맞았다.
“진 귀비 말이 자신은 모해를 입었다는구나. 춘독에 중독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춘독을 쓴 사람이 바로 너, 현청왕비라고.”
한안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는 즉각 대답했다.
“억울합니다. 신녀는 그런 짓을 한 적이 없습니다.”
“너는 애가의 말을 끝까지 듣고 싶지 않은 것이냐? 진 귀비가 어째서 네가 그녀를 모해하려 했다고 말했는지?”
태후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