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녀‚ 환생 3권
목차
13장
14장
15장
16장
17장
18장
13장
장어산은 위왕부에 들어간 첫날, 몹시 억울했다. 왜냐하면 측비는 정문으로 들어갈 수 없고, 소문을 낼 수도 없고, 오직 가마를 이용해 후문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분노했다. 만일 자신의 출신만 아니었다면 정비로 들어올 수 있었을 텐데. 비록 측비지만 위여풍의 마음을 사로잡아 총애만 얻는다며 자연히 좋아지겠지라고 생각하며 분노를 억눌렀다.
한편으로는 조금 위로가 되는 것도 있었다. 장부에서의 정처는 별 볼 일 없었다. 부군의 총애를 얻지 못하여 결국에는 자기 어머니의 계략에 걸려 한순간에 황천길로 가지 않았나. 물론 그 정처의 딸은 호락호락하지 않았지만. 게다가 그녀는 현청왕부의 왕비로 정해지기까지 했다. 장어산은 손수건을 꽉 비틀어 짰다. 그년의 용모와 재능이 자신의 반절에도 못 미치는데 그렇게 좋은 운을 타고난 게 못마땅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위왕부에 들어가니 위여풍은 7황자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7황자는 곁눈질로 그를 보며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지금 너의 미첩이 들어오는데 그녀와 함께 있지 않고 여기에서 술을 마시다니 무슨 일인가?”
위여풍의 앞에는 빈 술 단지가 적지 않게 놓여 있었고, 그는 이미 취기가 올라 있었다. 7황자의 말을 듣고도 입가에 냉소만 드리웠다.
“그저 천한 첩일 뿐입니다.”
7황자는 술 단지를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너는 아직 그 장 4소저가 마음에 걸리나 보구나. 아니지, 이제는 응당 현청왕비라 불러야지.”
“흥.”
위여풍은 코웃음을 치곤 손을 뻗어 술잔을 가득 채우고 고개를 젖혀 술을 한 번에 마셔버렸다.
7황자가 좀 가까이 다가갔다.
“너는 사랑하는 여인이 장차 다른 사람의 처가 되는 것을 곱게 두고만 볼 수 있느냐?”
위여풍의 표정은 음침했다.
“저에게 방법이 없습니다.”
“본전이 네게 조그만 힘을 보태줄 수 있을 듯하다.”
7황자가 고개를 들자 위여풍의 두 눈이 순간 밝아지며 간절한 표정을 띄웠다.
“7전하, 무슨 방법이 있으십니까?”
“며칠 뒤가 바로 모비의 생신이다. 만약 네가 진심으로 장 4소저를 놓을 수 없다면 그녀와 엎질러진 물을 만들어 보는 건 어떠냐? 그때 가서는 돌이킬 수 없으니 누구도 방법이 없을 것이다.”
위여풍은 놀라서 술이 확 깼다.
“절대 불가합니다. 궁중에서 어찌 일을 저지르느냐는 둘째 치고라도 그녀는 지금 이미 현청왕비입니다. 제가 만약 그녀와 부정한 관계를 가지면 황상께서 쉽게 용서하실 리 없습니다.”
7황자가 느릿느릿 손안의 술잔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본황자가 나서서 너를 위해 증언을 하면 되지. 그녀가 너를 유혹했다고 증명하지. 어떠냐?”
그는 여전히 믿을 수 없어하는 위여풍을 보고 말을 이었다.
“너는 그냥 술에 취했다고 말하면 된다. 잘못을 전부 그녀에게 떠미는 것이지. 그때 가서는 현청왕도 불결한 왕비를 두었다고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게다. 그리고 장 4소저가 벌을 받을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너와 살을 섞었으니 평판 안 좋은 여자를 누가 원하겠느냐. 그때 네가 그녀를 취해서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
위여풍은 망설이기 시작했다. 부운석을 천하의 웃음거리로 만들 수 있다는 그 이유가 그의 마음을 온통 흔들어 놓았다. 부운석은 자신에게 속했어야 하는 그녀를 탈취해 간 자다. 그녀도 되찾고 부운석에게 타격도 줄 수 있다니 좋은 일이긴 했다.
하지만 생각에 생각을 이은 위여풍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전하, 만약 장한안이 부정하고 불결하다 하여 황상께서 책망하시며 만일 죽음이라도…….”
“그 자리에서 그녀를 때려죽인들 또 어떠하냐?”
7황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설령 그녀가 죽더라도 현청왕에게 시집가는 것보다는 낫지. 설마 너는 그녀가 현청왕비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냐? 나중에 너희 둘이 만났을 때, 네가 그녀에게 예를 올려야 하는데도?”
한안이 이로 인해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위여풍은 조금 망설였다. 그녀가 죽는 것만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또한 두 눈 뻔히 뜨고 그녀가 부운석에게 시집가는 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7황자가 말하는 것처럼 얻지 못할 바에야 파멸시키는 것이 낫다.
7황자는 느긋하고 침착하게 그를 보았다. 눈빛에 악독함이 스쳤다.
“모질지 않으면 대장부가 아니요, 큰일을 이룰 자는 남녀 간의 정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
위여풍은 이를 악물었다.
“전하께 폐를 끼치겠습니다.”
7황자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와 나는 공동의 적을 두고 있잖느냐. 우린 한배를 탄 사람들이지. 본전이 너를 위해 근심 하나를 해결해 줄 테니 너는 이후 보답하면 된다.”
7황자는 웃으며 말을 말했다.
“그런데 너의 측비가 지금 후원의 방 안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다. 남자란 모름지기 시야를 넓혀야지. 일단 한 번 가 보거라. 대미인 아니냐.”
7황자의 말에 위여풍의 취기가 솟구치며 절로 마음이 끓어올랐다.
“그럼 저는 바로 가서 보겠습니다. 하하, 전하께서는 천천히 드십시오.”
7황자는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위여풍이 비틀비틀 걸으며 바깥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본 뒤에야 7황자는 비로소 손짓으로 젊은 사내종을 불렀다.
“가서 모비께 소식을 전해라. 손을 쓰셔도 된다고.”
한편 위여풍은 곤드레만드레 취하여 후원에 도착해서는 문을 걷어차 열었다. 평소 배운 예의범절을 전부 던져 버린 발길질 한 번이 지극히 후련했다. 한층 취기가 올라 법이고 하늘이고 없다 생각하며 모든 여종을 전부 물러가게 하고 침실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혼례복을 입은 신부가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자태는 정숙하고 예뻤고 혼례복의 색은 선명하고 아름다웠다. 머리 쪽에는 원앙이 물에서 노니는 도안이 수 놓여 있었다. 원앙을 보니 그저 아니꼬웠다. 그래서 큰 걸음으로 걸어가서 거칠고 우악스럽게 신부의 머리쓰개를 열어젖혔다. 신부는 놀라 외마디 소리를 질렀지만 곧이어 수줍어하며 고개를 숙였다.
위여풍은 손을 뻗어 신부의 아래턱을 붙잡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녀의 눈썹은 초승달 같고, 눈은 가을날의 맑고 투명한 물결 같으며, 붉은 입술은 부드럽고 피부는 희고 매끄러웠다. 평소에는 온통 한안에게 주의가 쏠려 있어서 발견하지 못했는데 자신의 측비는 엄청난 미인이었다. 그는 평소 겸손한 군자를 자처했고 미색을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러나 취기가 오를 대로 오르고 여인이 유순하게 앞에 있으니 뒤틀린 마음이 생겨났다. 위여풍은 몸을 돌려 바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장어산은 오늘 위여풍에게 비위를 맞추기 위해 정성 들여 단장을 했다. 위여풍이 가까스로 방에 들어오긴 했지만 술에 취한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내색할 순 없었다. 겉보기는 군자 같은 그가 거칠고 우악스러울 줄은 예상치도 못한 그녀는 저절로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냈다. 하지만 자신의 고통스러운 신음소리가 위여풍을 자극할 줄은 짐작도 못 했다. 그의 동작이 더욱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위여풍은 손을 휘둘러 장어산의 새 혼례복을 둘로 찢었다.
위여풍은 정신이 모호한 가운데 고개를 숙이고 눈앞의 아름다운 여인을 다시 쳐다보았다. 어산의 피부는 매끈하여 그야말로 옥 같았다.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만졌다. 이 여인은 뛰어난 미녀였다. 하지만 그 농염하고 아리따운 얼굴은 점점 다른 얼굴로 바뀌어 갔다. 그 얼굴은 아름답고 농염하다기에는 부족했지만 청순하고 유순했고, 눈빛은 사나우면서도 고집스러웠다. 그녀의 눈빛은 그를 경멸하듯이 보았고 그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것 같았다. 여인의 눈빛이 위여풍을 오만하게 경시하자 그는 정복욕이 불타올라 성난 야수처럼 달려들어 잔인하게 상대방을 찢어버렸다. 눈은 흉폭한 빛을 드러냈고 표정은 무시무시했다.
장어산이 부드럽게 위여풍을 바라보는 그 순간, 그가 자신을 보는 눈빛이 돌변하는 것을 보았다. 동작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거칠고 우악스러워 그야말로 자기를 물어뜯어 배 속에 삼키려 하는 것 같았다. 불안감에 움츠러들자 그가 덤벼들었다. 그는 몸 아래로 그녀를 세게 끌어당겨서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장어산은 아프면서도 이것이 위여풍의 자신에 대한 총애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도 기를 다해 그와 맞추었다. 위여풍은 미친 듯 날뛰는 중에 탐닉하는 눈빛을 드러내며 장어산을 향해 중얼거렸다.
“안아…….”
청천벽력 같았다. 장어산은 멍해졌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위여풍은 그녀의 귓가에 대고 또 한 번 외쳤다.
“안아, 안아……. 너는 어째서 세자비가 되지 않고…… 현청왕비가 되려는 것이냐. 안아. 너는 지금까지 나를 똑바로 보려 한 적이 없구나.”
어산에게 있어 위여풍의 행위는 메스껍고 굴욕적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녀는 위여풍의 아래에 누워서 그가 거리낌 없이 자신의 몸을 함부로 다루도록 내버려 두었다. 지금까지 이런 굴욕을 느껴 본 적은 없었다.
장한안이란 이름이 장어산에게는 악몽과도 같았다. 장어산은 늘 매우 쉽게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신분을 제외하면 장한안은 그 무엇도 자신과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현청왕비이면서도 자신의 남자를 점령하려 하고 있었다. 이 분노를 어찌 가만히 삼킬 수 있을까.
예전에는 장한안의 적녀 지위만을 빼앗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무것도 마음에 두지 않는 듯한 장한안의 모습을 보는 것이 눈에 거슬렸던 건지도. 그러나 싸움을 시작하고서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한 번도 장한안을 이겨본 적이 없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녀는 두 팔을 뻗어 위여풍을 단단히 껴안고 몸을 뱀처럼 휘감으며 매력적인 눈을 실같이 가늘게 떴다.
“좀 부드럽게…….”
이 남자는 그녀의 유일한 밑천이었다. 그를 잡아야 이 부중에서 한 자리라도 차지할 수 있으며 그래야 장한안에게 영원히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이었다.
방 안에서 사지가 뒤엉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봄빛이 부드럽고 아름다운 위왕부 안의 화원, 7황자는 마지막 술을 다 마신 후 소매를 떨치고 돌아갔다.
*
한편, 한안은 부귀루에 도착했다. 그곳엔 여전히 지난번의 그 늙은 점주가 부귀루를 지키고 있었다.
“번거롭겠지만 당신의 주인을 만나야겠네.”
그 점주가 고개를 들어 보니 또 그녀였다. 그녀에게 어쩌면 좋은 물건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지만 자신의 주인은 아무 이유 없이 방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불쾌하게 말했다.
“낭자께서 물건이 있으시면 늙은이가 살펴봐도 무방합니다. 늙은이가 보고도 알 수 없으면 그때 주인님을 오시도록 청해도 늦지 않습니다.”
지난번 한안이 왔을 때는 빙그레 웃는 얼굴에 태도도 지극히 온화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한기가 어려 있었다.
“미안하네. 물건을 전당 잡히러 온 게 아니야. 자네 주인에게 보아주셨으면 하고 청할 물건이 있네. 이 물건은 자네가 볼 수 없어.”
늙은 점주는 나름대로 귀인들에게 명성을 얻고 있었다. 주인을 제외하고 남에게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늙은 점주의 얼굴빛이 순간 변했다.
“낭자께서 설마 말썽을 부리러 오신 것은 아니겠지요?”
한안은 그와 더 말하기 귀찮았다. 자신의 머리 위 남색 옥 비녀를 뽑아서 탁자 위에 놓았다. 그녀의 말투가 날카로웠다.
“나는 자네 주인을 만나야겠네!”
한안이 그 비녀를 뽑은 것은 얼만큼은 요행을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비녀를 자세히 살펴본 적이 있는데 이 비녀는 평범한 물건이 아닌 듯 보였다. 비녀는 밤에도 찬란한 밝은 빛을 발산하고 담담한 향기를 뿜었다. 높은 지위에 있는 부운석이 직접 자신에게 준 물건이니 어쩌면 중요한 증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용해 본 것이다.
늙은 점주는 비녀를 한 번 보고는 그 자리에서 멍해졌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이건…….”
“이제 보니 왕비시군요.”
한안의 몸 뒤에서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안이 머리를 돌리자 화려한 옷에 금 장신구를 단 강옥루가 접선을 흔들며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그녀를 향해 인사를 올렸다.
“또 뵙습니다, 왕비.”
강옥루는 말을 마치고 점주를 향해 손짓을 했다. 그는 뜻을 알아듣고 물러나 나갔다.
한안은 그와 자질구레한 말을 나누는 대신 바로 손수건을 그에게 보였다.
“강 공자, 이 물건을 알아보시겠습니까?”
강옥루는 손수건을 받아 펼쳐 잡고, 자세히 손수건 위의 내용을 살펴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것은 촉금(蜀錦: 촉지방의 특산품인 채색비단)입니다.”
촉금? 한안은 의아해졌다.
“이건 보통의 촉금처럼 보이지만 조금 달라요.”
“맞습니다.”
강옥루는 무슨 생각에 잠긴 듯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이것은 당문 안의 약수에 오랜 시간 담가두었던 특수한 촉금입니다. 천광금이라 칭하지요.”
한안이 다른 규방 여아들보다 견식이 많기는 하지만 강옥루의 말을 전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당문이니 천광금이니 하는 말을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강옥루의 견식이 풍부하고 넓은 것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오늘 그를 찾은 것은 정말 잘한 일인 듯했다.
강옥루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앉으라는 표시를 하고는 직접 차를 따라주었다. 그런 다음에야 접선을 흔들며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천 지방의 당문이 독을 쓴다는 명성은 천하가 다 알았다. 당문은 한 가족으로 구성된 강호 문파로서 무림의 명성을 얻은 암기(暗器) 가문이었다. 암기와 독약으로 촉 지방에서 위풍당당하게 자리를 잡고 강호를 거닌 지 수백 년이 되었다. 당문 사람은 각종 암기와 독약 이용에 능숙하였다. 촉 지방 당문가는 강호에서 왕래가 극히 드물었다. 게다가 당문의 작은 성은 사방이 기계장치로 겹겹이 싸여 있고 암기가 널려 있어 몰래 들어가기란 불가능했다. 그래서 당문은 명성은 높았지만, 신비로운 베일에 싸여 있었다.
당문의 일 처리는 은밀하고 행동은 종잡을 수 없어 정파 같기도 하고 사파 같기도 하여, 짐작할 수 없다는 느낌을 주었다. 무림의 정도(正道)나 민족의 대의 같은 것은 당문 사람들에게 모두 무의미했다. 그들은 오직 자기들만의 세계 속에서 생활했다. 명문정파와 친교 맺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사마외도(邪魔外道)와 한패가 되는 것도 경멸했다.
그러나 강호의 무림 인사들은 당문의 천하에 둘도 없는 암기와 독약이 두려워하면서도 조금이라도 그들의 방식을 알아내고 싶어 했다. 그래서 무림 인사들 대다수는 당문을 강호의 사파로 여기고 공경하되 멀리했다. 당문 제자도 세상 사람들의 평가를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고 여전히 홀로 자유롭게 행동했다.
당문 사람은 각종 암기의 설계, 발명과 이용에 능숙했고 독을 다루는 데 정통했다. 당문의 시조는 <독경>을 세상에 전하며 “세상의 모든 독을 통솔하고 그로써 백성의 재난을 해결하라.”는 유훈을 남겼다. 당문의 장문은 반드시 당씨 성을 가진 직계 자손이 맡기로 규정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손수건은 바로 당문에서 약수에 오랫동안 담가 두는 과정을 거친 후 제작한 촉금으로, 천광금이라 칭했다. 언젠가 오만한 당문 여자가 자기 몸에 닿는 물품은 유일무이한 것이어야 한다 하면서 천광금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천광금은 촉금에 비해 견고하고 질기며 색도 더 진하고 윤이 났다. 그리하여 그 이후 당문 여자들이 천광금을 사용하면서 그것은 당문 사람이라는 일종의 표식이 되었다.
한안은 의아해서 물었다.
“그럼 수건 위의 전갈이 무슨 의미인지 아시나요?”
강옥루는 웃었다.
“소인도 거기까지는 모릅니다. 당문 사람 일종의 표식이라고 여길 뿐이지요. 전갈은 독을 가지고 있고 당문은 독을 사용하는 데 능숙하니까요.”
“그렇게 보자면 이 수건의 주인은 당문 사람이겠네요.”
한안은 강옥루를 보았다.
“강 공자는 강호를 거닐면서 성이 ‘교’인 당문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
강옥루는 하하 큰 소리로 웃었다.
“당문 사람은 성이 모두 ‘당’입니다. ‘교’란 성은 없습니다.”
한안이 변함없이 그를 응시하고 있는 것을 보고 강옥루는 저도 모르게 코를 문질렀다.
“제가 당신을 속이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성이 교인 당문 사람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한안은 고개를 숙였다. 일이 갈수록 복잡해지는 것 같았다. 강호의 일에까지 관련되어 있다니. 아벽이 모친의 측근 여종이고 모친과 동후왕 사이에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있다면 이 손수건은 모친과 동후왕 사이의 실마리가 된다. 하지만 이 손수건은 사천 당문 사람의 물품이다. 설마, 사천까지 가야 하나? 그건 당연히 불가능했다. 장사양이 허락할 리 없다는 것은 둘째 치고, 산이 높고 물이 긴데, 어떻게 가능할까? 생각하고 생각하니 더더욱 이 일을 풀 실마리가 없다고 느껴져 저도 모르게 길게 탄식했다.
“왜 그러느냐?”
익숙한 맑고 차가운 음성이 귓가에 들려왔다. 한안은 환청이 들린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개를 젖히니 부운석이 문 입구에 서서 담담하게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강옥루의 웃는 얼굴이 굳어졌다.
“운석, 현청왕비가 스스로 나를 찾아온 거야. 내가 너를 속이고 일부러 그녀를 만난 게 아니야.”
강옥루는 스르르 알아서 일어서더니 주먹 쥔 손을 자기 입가에 대고 가볍게 기침을 두어 번 했다.
“먼저 가 볼 테니까 천천히 얘기 나누시죠.”
한안은 이마를 짚었다. 이곳은 강옥루의 가게다. 그런데 어찌 자신과 부운석이 이곳의 주인 같고, 강옥루가 오히려 손님 같을까. 그러나 강옥루가 말하는 것을 들으니 그와 부운석은 친밀한 관계인 것 같았다. 한안은 바로 고개를 들고 말했다.
“왕야와 강 공자의 관계가 좋은 것 같네요.”
부운석이 말했다.
“그는 일찍이 나를 돕고 있지.”
한안은 조금 불편해졌다.
“그냥 물어본 거예요.”
부운석은 그녀가 어째서 여기에 나타났는지 묻지 않았다. 다만 그녀 곁에 걸어와 물었다.
“나가서 좀 걸을까?”
한안의 눈이 커다래졌다.
“걸어요?”
부운석은 몸을 돌려 불렀다.
“목풍, 목암.”
몸 뒤에서 칼을 든 시위 두 명이 나타났다.
“속하, 여기 있습니다.”
부운석은 한안의 손을 끌어다 잡았다.
“너의 여종들은 저들 둘에게 맡기고 가자.”
한안은 불시에 그에게 손을 잡혀 조금 멍해졌다. 얼음처럼 서늘하고 늘씬한 그의 손이 자신의 작은 손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있었다. 얼음처럼 차갑긴 했지만 어렴풋이 온기가 있는 것 같았다.
부운석은 그녀의 손을 잡아 루 밖으로 걸어갔다. 아래의 마구간 가장 안쪽에 한 필의 흑마가 묶여 있었다. 말의 털빛은 반지르르 윤이 났고 한 쌍의 눈은 거만했다. 부운석을 보더니 흥분하여 투레질을 하며 자신의 머리를 부운석의 몸 위에 비벼댔다. 한안은 신기했다. 손을 뻗어 말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하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말이 고개를 쳐들어 한안의 손길을 피하고는 긴 울음소리를 내었다. 한안은 깜짝 놀랐다.
“전진.”
부운석이 한 번 부르자 말은 얌전하게 고개를 숙이고 앞발굽으로 발길질을 하더니 조용해졌다. 부운석은 한안의 손을 잡고 그녀가 천천히 말의 갈기를 아래로 쓰다듬도록 가르쳤다. 흑마는 편안해졌는지 몸 전체가 느슨해지면서 한안을 마주하고도 그리 경계하지 않았다.
“얘를 전진이라고 불러요?”
한안이 웃으며 물었다.
“듣기 좋은 이름이네요.”
부운석은 묶어 놓은 말고삐를 풀면서 말했다.
“전쟁터에서 주운 것인데 지금 이렇게 크게 자랐지. 좋은 말이다.”
전진은 마치 부운석이 자신을 칭찬하고 있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듯, 코끝에서 나지막하게 막힌 듯한 소리를 내더니 한층 더 온순하고 사랑스러워졌다.
“그런데.”
한안이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보았다.
“당신은 저를 여기에 왜 데려온 거죠?”
부운석은 몸을 날려 가볍게 말 위에 걸터앉더니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안이 반응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둘러싸고 끌어올려 말 위에서 끌어안았다.
부운석은 어째서 늘 아무런 기척도 없이 자신을 놀라게 하는 거지!
한안은 그의 가슴을 치며 놀라서 물었다.
“당신은 어째서 늘 멋대로죠?”
부운석은 웃기 시작했다. 그는 본래 표정 없는 커다란 얼음덩이 같은 사람이라 가까이 다가갈 수 없게끔 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가슴을 열고 크게 웃으니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풍치 있고 멋스러우며 시원스러웠다. 마치 다른 사람으로 바뀐 것 같았다.
“당신…… 이봐요!”
부운석은 한안이 말을 마치기를 기다리지 않고 채찍을 휘둘렀다. 말이 나는 듯이 달려나갔다. 한안의 몸이 뒤로 젖히면서 등이 부운석의 가슴에 닿았다. 순간 놀라서 얼굴이 새빨개졌고, 말을 하는 것도 잊어버렸다.
이렇게 수려한 남자의 품에 안겨서 함께 말을 달리는 것은 전생의 한안이라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생의 그녀는 부중의 담장 안에 속박되어 있었고 그 속박에서 걸어 나온 적도 바깥세상을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이번 생에서 그녀는 어렵게 얻은 기회를 헛되이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자신을 다치게 한 모든 것들에게 있는 힘을 다해 복수할 것이다. 그리하면 살아가는 것이 한층 더 좋아지지 않을까.
심장이 급속하게 뛰면서 급속한 쾌감이 온몸에 전해져 왔다. 요 며칠 아벽의 일이 가져온 울적함이 한순간 날아가 버렸다.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큰 소리로 웃었다.
부운석은 그녀의 웃음소리를 듣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둥근 만두 머리가 자신의 가슴 앞에 기대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 가을 물처럼 맑은 한 쌍의 눈동자는 휘어서 가늘어져 있었다. 평소와 달리 눈동자에는 뼛속까지 파고들 듯한 차가움과 메마름, 조소가 담겨 있지 않았다. 그 웃음은 진심으로 만족스러워서 나온 것이었다. 입가에는 둥근 보조개가 파이고 나비 날개처럼 긴 속눈썹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얌전하고 온순하며 유약한 어린아이나, 그녀의 내면은 비할 데 없이 넓고 강했다. 그녀는 맹렬하고 잔인하며 흉악하여, 일을 하는 데 있어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진정한 모습은 지금 이 모습이 아닐까. 그녀는 제멋대로 큰 소리로 웃으며 아귀다툼에 둘러싸일 필요 없이 건강하고 쾌활하게 살아야 했다.
단순히 한안을 돌보기 위해 왕비로 받아들이려던 마음이 조금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의 눈빛이 자신도 예상치 못하게 온화해졌다. 말의 걸음이 느려졌다. 그는 입을 다물었다가 한참 후에 한 마디를 토해냈다.
“어리석긴.”
한안은 불만스레 고개를 돌리고 부운석을 한 번 노려보며 언짢게 말했다.
“당신이야말로 어리석어요.”
부운석은 유쾌하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은 한참 달려 성동의 한 산 위에서 멈추었다.
푸른 숲과 맑은 물, 그윽하고 고요한 환경에 한안이 참지 못하고 찬탄하며 말했다.
“여기는 풍경이 아름답군요.”
부운석은 그녀를 보았다.
“너는 이곳에 와 본 적이 없느냐?”
이곳에 와 본 적? 한안은 고개를 저었다.
“와 본 적이 있는 것 같긴 한데 기억이 선명하진 않아요.”
전생의 그녀는 규범을 잘 지켜서 다섯 살 이후로는 부에서 나간 적이 드물었다. 부중에서 평화롭고 안정되게 여계와 여덕을 익혔다. 게다가 산적의 그 일이 일어난 후로는 종일 흐리멍덩하게 지냈기에 예전 기억이란 어머니와 한명에 대해서만 남아 있었다. 이번 생에서 지난 과거지사는 모두 허상과 같아서 지난 일을 기억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부운석은 표정이 바뀌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음.” 한마디를 했을 뿐이지만, 한안은 그의 표정에 변화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한안은 계곡물 앞에 앉아 옆의 수초 한 잎을 따서는 물놀이를 했다.
부운석은 계곡물 앞으로 걸어갔다. 자연스레 계곡으로 눈길이 닿았다. 7년 전엔 채색 물고기가 득실거리던 맑은 계곡이었지만, 이젠 물고기는 종적이 없고 거울처럼 고요한 계곡물만이 있을 뿐이었다. 사방의 정경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 것 같은데 사람만 변하였다.
“내가 돌아왔다.”
그가 말했다.
한안이 이상해하며 물었다.
“네? 무슨 의미죠?”
부운석은 그녀를 보았다.
“오늘 어째서 강옥루를 찾아갔느냐?”
한안은 강옥루가 이 일을 그에게 이야기하게 하느니 차라리 자신이 말하는 것이 낫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어디서 그 손수건을 얻었는지는 생략하고 그저 고인의 물건이라고만 돌려 말했다.
“당신은 사천 당문에 ‘교’라는 성을 가진 사람이 있는지 조사할 방법이 있을까요?”
“그건 어렵지 않다.”
부운석은 걸어와 그녀의 옆에 앉았다.
“앞으로 며칠, 너는 외출하지 말아라.”
한안은 그를 보았다.
“어째서요?”
“서융인이 경성에 잠입했다.”
부운석의 표정은 아주 엄숙했다.
“큰 움직임이 있을 것이다. 경성 안의 밤낮이 모두 안전하지 않아. 외출하면 아마도 위험할 것이다.”
한안은 그를 응시했다.
“장부에 있는 몇 사람은 당신이 안배한 건가요?”
한안은 요 며칠 누군가 자신의 모든 행동을 감시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특별한 거동은 없어 자연히 부운석을 떠올렸다. 설마 그가 파견한 사람은 아니겠지? 막상 부운석이 직접 인정을 하자 그녀는 한순간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더듬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리 예를 차릴 필요 없다, 왕비.”
그는 ‘왕비’라는 두 글자를 유달리 느릿하게 발음했다. 마치 무언가를 일깨우려는 것 같았다. 한안은 고개를 돌려 아름답고 범상치 않은 그 얼굴을 응시했다.
“어째서 제게 이렇게 잘해 주세요?”
줄곧 마음속에 숨겨온 질문이었다. 그러나 감히 물을 수는 없었다. 무언가 걱정스러웠다. 어쩌면 겁이 났을지도 모른다. 자신과 그의 혼사는 이미 결정되었고 이 사람은 장차 자신의 부군이 될 것이었다. 부부라면 모름지기 솔직하고 성실하게 대해야 하지 않을까.
부운석이 그녀의 머리를 톡 쳤다. 작은 동물을 위로하는 모양이었다.
“바보.”
그리고 또 아무 말도 없었다. 이 사람에게 어리석다느니 바보라느니 하는 말을 들어도 한안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안도 다시 캐묻지 않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때로는 진상을 알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좋을 일일지도 모른다.
*
숲속 맞은편에 붉은빛을 띤 검은색 옷을 입은 키 큰 남자가 하나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오라버니.”
남자의 뒤에서 노란 옷을 입은 여자가 걸어왔다. 여자는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촉촉하고 맑은 눈은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로 아름다웠고 자태는 정숙하고 고왔다. 피부가 조금 검기는 했지만 이목구비가 정교하고 화려했다. 그녀의 노란 치마는 얇은 비단으로 만든 것이었는데도 이 겨울철에 방한이 잘 되는 것 같았다. 맨살이 드러난 피부 위에는 작은 뱀 한 마리가 휘감겨 있었다. 여자의 온몸이 사람을 유혹하는 광택을 강렬하게 내뿜고 있었다.
“오라버니, 우리 언제 손을 쓰나요?”
여자의 음성도 감미롭고 아름다웠다. 마치 마력이 있는 것 같이 보통 사람이라면 유혹을 참지 못하고 그녀를 돌아보았을 것이다.
“이림나, 아주 여러 차례 이야기했지. 경거망동하면 안 된다고.”
남자가 몸을 돌렸다. 그의 푸른색 눈동자는 고독한 늑대를 연상시켰다. 세상에 자신에게 견줄 만한 이는 없다고 여기는 거만함과 야심이 얼굴 위에 무심히 드러났다. 바로 탁칠이었다.
여자는 탁칠의 곁으로 달려와 그의 팔에 팔짱을 끼며 어리광을 부리듯이 비벼댔다.
“이림나는 그저 빨리 그를 보고 싶을 뿐이에요. 오라버니가 말했죠. 대종에 오기만 하면 바로 그를 볼 수 있다고요.”
“그는 적국의 사람이다. 이림나, 너는 이 점을 기억해 두는 것이 좋을 거야.”
탁칠의 말투에는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여자도 그의 말 속에 담긴 뜻을 알아듣고 서둘러 대답했다.
“오라버니, 얌전히 굴게요. 하지만 우리가 이기면 오라버니는 림나에게 약속해 주셔야 해요. 그를 죽이지 않고 서융으로 데리고 가서 저의 부군으로 삼아주겠다고.”
탁칠은 차갑게 웃는 듯했다.
“부운석이 열네 살이던 그 해, 일 만 장병으로 나의 십만 정예병을 쳐부수었지. 됨됨이가 침착하고 신중해서 깊이를 알 수 없으니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야. 그를 사로잡는 건 그리 쉽지 않을 거야.”
여자는 입을 뾰족하게 내밀고 불퉁하게 말했다.
“오라버니가 패하실 리 없어요. 림나는 오직 그만을 좋아해요. 그에게 시집갈 거예요.”
그녀는 7년 전 전쟁터에서 보았던 수려한 소년을 떠올렸다. 얼음처럼 차갑고 냉담한 표정 천군만마 앞에서도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얼굴. 그녀는 어려서부터 서융에서 자랐는데 그녀의 주변에는 불처럼 열정적이고 자신에게 아첨하는 자가 많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려 하지도 않는 이 적국의 장군을 좋아했다. 그는 그녀 마음속에서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남자였다. 여러 해 보지 못했지만 그녀는 한시도 그를 잊은 적이 없었다. 탁칠은 이번에 일 처리가 순조롭게 되면 부운석을 포로로 잡아 그를 림나의 부마로 삼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림나, 너무 깊게 빠져들지 마라. 그는 왕비가 있는 사람이야.”
여자가 몽롱하게 생각에 빠진 것을 보고는 탁칠은 날카롭게 그녀의 망상을 끊었다.
이림나가 언짢은 기색으로 말했다.
“총애 받지 못하는 소저라던데요. 듣자 하니 아직 급계도 하지 않은 어린아이라던데.”
그녀의 눈에 멸시가 스쳤다.
“그가 그런 어린아이를 좋아할 리 없어요. 대종의 여자는 물로 만들어졌잖아요. 움직이지도 않고 그저 눈물만 떨구지. 그 같은 사람은 힘차고 용맹한 매처럼 대담하고 호방한, 우리 서융의 여인들과 함께 있어야 해요. 그래야 수준이 맞죠.”
그녀는 팔 위에 휘감겨 있는 뱀을 어루만졌다.
“그런 온실의 꽃은 눈에 차지도 않을 거예요.”
“그녀는 온실의 꽃이 아니야.”
나이에 맞지 않은 표정을 하던 작은 얼굴을 떠올리며 탁칠의 입가가 웃음으로 휘어졌다.
“그녀는 독사야.”
“독사?”
이림나는 그의 말속 뜻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럼 내가 독희에게 그녀를 물어 죽이게 하죠.”
탁칠이 막 말을 하려는데 멀리서 말이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말 위에는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탁칠은 서둘러 이림나를 잡아당겨서 몸을 관목 덤불 뒤에 숨겼다.
그 말은 관목 덤불 근처에 도착하여 멈추었고, 말 위에 두 사람이 내렸다. 여자는 아직 어린아이인 듯했다. 아이는 남자의 손을 잡고 천천히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꼬마?”
탁칠은 살짝 멍해졌다가 바로 웃었다.
“재미있네.”
“오라버니?”
이림나가 몸을 일으키려는 그를 잡아당겼다.
“뭐하는 거예요?”
“림나, 네 부마가 왔다.”
그가 말했다.
한안과 부운석은 눈앞의 두 사람을 보고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검은색 옷의 남자는 대단히 친숙하게 한안에게 인사를 했다.
“꼬마, 또 만났네!”
지난밤 장부에 난입했던 자객, 탁칠이었다.
한안은 그를 보지 않았다. 시선이 그의 곁에 있는 소녀에게 저절로 끌려갔다. 한안은 두 생을 살면서 지금까지 이처럼 아름다운 여자는 만난 적이 없었다. 그녀는 인간계에서 노닐고 있는 정령 같았다. 사람의 마음을 취하게 하는 매력이 온몸에 드러났다. 여자는 한안 옆의 부운석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보석 같은 눈동자 속에는 조금의 숨김도 없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한안은 불쾌해졌다.
한안이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을 보고 탁칠이 억울해하며 말했다.
“그 밤에는 전심전력을 다해서 내 생명을 구해 놓고는 왜 이제는 사람을 보고도 상대하지도 않지?”
탁칠의 말이 끝나자마자 한안은 부운석 몸에서 한기가 늘어난 것을 느꼈다. 부드러운 얼굴빛도 어두워졌다. 부운석은 냉담하게 맞은편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부운석!”
그러나 그의 곁에 있는 노란 옷의 소녀가 그의 이름을 외쳤다. 교태가 넘치는 목소리가 사람의 마음을 흔들었다.
“마침내 당신을 만났군요!”
소녀는 말을 하고 바로 몇 걸음 다가왔다.
한안은 놀래서 물어보는 시선으로 부운석을 보았다.
“당신 친구?”
그러면 탁칠과 부운석도 아는 사이?
부운석은 냉랭하게 말했다.
“아니.”
이림나는 부운석의 말을 듣고 발걸음을 멈칫했다. 부운석과 한안의 마주 잡은 두 손을 보고는 불쾌해져 한안을 향해 물었다.
“넌 누구야?”
한안은 아름답고 농염하며 예사롭지 않은 이 소녀가 부운석을 애모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부운석은 그녀와 친구가 아니라고 말할 만큼 태도가 분명해 보였다. 그래서 한안은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가벼이 말했다.
“현청왕비.”
처음으로 한안이 부운석의 앞에서 자신이 현청왕비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부운석은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한안을 보았다. 한안이 아래턱을 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마치 자신을 자랑스레 뽐내는 백조 같았다. 표정은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얌전했지만 눈빛은 심히 오만했다. 용모는 저 아름다운 소녀와 비교가 되지 않겠지만 진중한 기세는 상대방을 압도적으로 내리눌렀다. 입가가 저도 모르게 휘어졌다.
이림나는 부운석이 무의식중에 드러낸 애정의 기색이 눈에 거슬렸는지 아니면 한안이 말한 ‘현청왕비’ 라는 단어가 그녀를 격노하게 한 건지 손을 휘둘러 팔에 휘감겨 있는 현란한 색채의 작은 뱀을 번개처럼 한안을 향해 던졌다. 탁칠의 표정이 싸늘해졌지만 이림나를 말리기에는 너무 늦었다. 부운석이 한안을 자신의 몸 뒤로 끌어당겼다. 어떻게 손을 썼는지 명확히 본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짧은 한순간, 한안을 향해 던져진 그 작은 뱀은 이미 부운석의 손에 들려 있었다.
“독희!”
이림나가 깜짝 놀라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부운석의 보호를 받은 한안이 증오스러웠다. 화가 났지만 부운석을 보며 애교스럽게 말했다.
“독희를 놓아주세요.”
그때 한안이 거리낌 없이 주머니 속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내어 생각도 하지 않고 그 뱀의 몸 위에 뿌렸다. 부운석도 놀라 쳐다보았다. 작은 뱀은 몇 번 경련을 일으키더니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너 뭐 한 거야?”
이림나의 눈이 온통 새빨개졌다. 그녀가 애지중지하는 독희가 저 여자 손에 죽었다. 그야말로 천 번 만 번 죽어도 마땅한 죄라 할 수 있었다.
부운석이 손을 풀자 죽은 뱀은 바로 땅에 떨어졌다.
한안이 웃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아가씨는 중원사람 같지 않은데……. 그래서 몰랐나 봐요? 우리 중원사람들은 독사나 독충, 독개미를 보면 유황을 써서 쫓아내는 것이 습관이에요. 공교롭게도 오늘 내가 유황을 가지고 있었네요.”
탁칠은 흥미진진하게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진작 떠올렸어야 했다. 이 아이가 절대 남에게 얌전히 당할 리 없다는 것을. 이림나가 경솔하게 일을 저질러서 한안에게 쓴맛을 본 건 어찌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림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껏 자신의 마음에 둔 부운석이 어떤 여자와도 관련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저 여자는 스스로를 그의 왕비라 칭하고 부운석 또한 저 여자를 감싸니 그녀는 너무 당혹스러웠다. 부운석의 총애를 받고 있으며 독희를 죽인 한안은 그녀의 원수가 되었다. 이림나는 교태 넘치는 소리로 소리쳤다.
“나는 네가 목숨으로 대가를 치르게 하겠어!”
이림나는 말을 마치고 바로 몸을 날려 허리춤에서 휘어진 모양의 칼을 뽑아 한안을 향해 다가갔다.
순간 부운석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죽을 길인지 살 길인지를 모르는구나.”
부운석은 일장(一掌)을 날렸다. 그 일장은 일곱 층의 힘이 실려 있었다. 이림나는 속으로 큰일 났다고 외쳤다. 그러나 피하려 해도 피할 수가 없었다. 결정적인 순간 탁칠이 앞으로 나와 일장을 막았다. 탁칠의 무공이 뛰어나기는 했지만 일장을 막으며 연거푸 몇 걸음이나 물러나야 했다.
그는 지면을 단단히 밟고 선 다음에야 부운석을 보았다.
“왕야, 몇 년 동안 무공이 한층 더 진보하셨습니다.”
부운석이 차갑게 대답했다.
“아직도 살아 있었구나.”
탁칠은 하하 큰 소리로 웃었다.
“저야 당연히 아직 살아 있죠. 이번에도 제가 또 그 말씀을 드리죠. 왕야께서는 천하를 다스릴 수 있을 만큼 능력이 뛰어나시니 서융에 가시면…….”
“불가능하다.”
부운석은 그가 말을 마칠 기회도 주지 않았다. 이림나가 외쳐댔다.
“부운석, 당신 정말 저 여자를 좋아해요?”
부운석의 맑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본왕의 왕비다.”
한안의 마음속에 어렴풋한 실망이 일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았다. 이림나는 원한에 차서 한안을 가리켰다.
“이 여자가 어디가 좋아요? 이런 여자를 당신의 왕비로 삼다니! 그녀의 어디가 나보다 나아서!”
한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현청왕비가 된 후로부터 남에게 들은 말 중 가장 많은 것이 바로 자신이 운이 좋다는 것이었다. 그저 5품 관원의 딸로 경국지색도 아니었고 세상을 놀라게 할 재주도 없으니 평범도 이런 평범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현청왕의 유일한 왕비가 된 것이다.
그러고보니 전생에 자신이 위여풍의 세자비가 되었을 때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모르겠다. 그때 그녀의 명성은 지금보다 형편없이 나빴다. 그러나 부를 나간 적이 없으니 바깥에서 어떤 말이 돌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보니 정신이 딴 데 팔렸었나 보다. 자신의 손바닥에 따뜻함이 느껴졌다. 부운석이 자신의 손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본왕이 보기에 그녀의 모든 것이 다 너보다 낫다.”
“부운석!”
지금까지 남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없던 이림나는 참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녀는 부운석이 어째서 저 여인은 온 힘으로 아끼고 보호하면서 자신에게는 이렇게 잔인한지 알 수 없었다.
한안은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부운석의 흰옷은 눈보다 하얬고 자태는 맑고 차가웠다. 그러나 자신을 보호하는 움직임은 실로 따뜻했다.
“왕야와 왕비께서는 정말로 부부 정이 깊으시군요.”
탁칠이 웃으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눈빛이 한안의 몸 위에 떨어졌다.
“만약 이미 왕비께서…….”
그 경박한 말투에 그가 말을 마치지도 않았지만 부운석은 마음에 불쾌감이 일어났다.
“감히 본왕의 왕비를 건드리는 사람은 없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만약 건드린다면 용서 없이 죽일 것이다.”
이림나는 탁칠의 손을 잡아끌었다.
“오라버니, 우리 가요. 저들이 저렇게 오만방자하니 저들을 패하게 해서 굴복시켜요. 그런 다음 다시 천천히 처벌해도 늦지 않아요.”
탁칠은 사악하게 웃었다.
“그 말이 맞다.”
그는 한안을 향해 눈을 깜박였다.
“왕비, 이전에 말한 그 말 잊지 마세요. 만약 소인이 몸과 마음을 바쳐 보은하기를 바라신다면 소인은 반드시 그리 하겠습니다.”
부운석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이림나도 부운석을 향해 외쳤다.
“본공주는 말한 것을 꼭 실행에 옮겨요. 부운석, 당신은 반드시 나의 부마가 될 거예요!”
두 사람은 말을 마친 후 경공을 펼쳐서 한안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부운석은 냉랭하게 그들이 멀리 간 방향을 바라보기만 할 뿐 뒤쫓지 않았다. 순간, 곁의 한안이 지나치게 조용한 것을 깨닫고 의아해하며 고개를 숙여 그녀를 보았다.
한안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마음속에 거칠고 사나운 파도가 용솟음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녀가…… 공주예요?”
부운석이 대답했다.
“서융 공주, 이림나.”
한안의 손바닥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전생에 부운석은 서융 공주와 혼인했다. 당시 부운석은 중병에 걸렸고 오직 그 공주만이 그를 구할 방법이 있었다. 그 당시 이림나가 마침 사신으로 대종에 와 있다가 액막이 명분으로 현청왕부에 시집을 가게 되었다. 황상은 어려서부터 자신의 친동생을 몹시 아꼈고 당시엔 아무런 방법이 없었으니 이림나에게 그를 구할 방법이 있는 것을 알고는 그리 많은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혼인하고 반 년 후, 부운석의 병은 천천히 좋아졌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이 서융 공주가 복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전생의 한안은 서융 공주를 본 적이 없었다. 방금 전 그녀의 신분에 대해 의심을 품긴 했지만, 부운석을 애모하는 소녀라고만 여겼다. 그러나 서융 공주의 마지막 한마디는 한안의 호흡을 빼앗아 갈 정도로 강력한 충격을 주었다.
서융의 공주가 금생에도 나타나다니.
그녀가 부주의했다. 이번 생에서 생각보다 평탄한 길을 걷다 보니 미래에 당면하게 될 위기의 가능성을 잊고 있었다. 자신이 현청왕비가 되면서 서융 공주가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니.
부운석은 한안이 서융 공주의 이름을 들은 순간부터 한마디 말도 없이 표정이 시시각각 불안정하게 바뀌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진중한 한안의 마음속이 공황 상태라는 것을 부운석도 느낄 수 있었다. 부운석은 침묵하다가 손을 뻗어 한안의 머리를 톡 쳤다.
“두려워하지 마라.”
한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서융 공주는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전생의 흐름대로라면 부운석은 오래지 않아 중병에 걸릴 것이다. 자신과 그의 혼사는 아마 순조롭지 않을 것이다. 그는 도대체…… 무슨 병을 얻었던 걸까? 풍채와 재능이 당대에 비길 자가 없는 사람이 나날이 여위고 파리해져 갈 것을 생각하니 한안은 마음속에 이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분명히 말할 수 없었다. 만약 그가 정말 불행하게 중병에 걸리고 오직 서융 공주만이 그를 구할 수 있다면 아마도 황상은 친히 혼인을 하사하는 명령을 내릴 것이다.
그녀는? 자신은 정말로 부운석을 남에게 순순히 양보하고 다른 사람이 그의 왕비가 되는 것을 봐도 괜찮을까?
한안의 눈빛이 실의에 빠져 멍해졌다.
어쩌면 그녀의 심정의 변화를 알아차린 것인지 부운석이 말을 끌고 왔다. 오는 길에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한안은 등 뒤의 따뜻한 가슴에 기대었다. 부운석이 내쉬는 열기가 따뜻하게 귓가에 뿜어져 왔다.
“왕야께서는 늘 조심하세요.”
부운석은 그녀가 어째서 이렇게 말하는지 알 수 없어 잠시 침묵하다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주변의 그 누구도 믿으시면 안 됩니다. 음식은 무엇이든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지 마세요.”
부운석의 중병이 서융 공주로 인해 걸린 것이라서 서융 공주만 해결할 수 있었던 건 아닐까. 만약 그가 중병에 걸리는 난국을 피해야 한다면 모든 가능성을 피해야 한다. 가장 쉽게 독물에 노출이 되는 건 음식이었다. 조금 더 조심한다면 그 일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을까?
음모와 교활한 책략은 피할 방법이 있다. 미리 계책을 세워서 이길 수도 있고, 상대의 계략을 역이용할 수도 있으며, 결국엔 그대로 적에게 돌려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생로병사는 인간이 운명적으로 맞이하게 되는 재앙이라 피할 수도 알 수도 없었다.
부운석은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물었다.
“무슨 일이냐?”
한안의 태도는 지나치게 부자연스러워서 그로 하여금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이림나를 처음 본 것이 확실했다. 그러나 그녀가 이림나가 서융 공주라는 것을 안 바로 그 순간 지었던 경악한 표정은 무언가가 일어난 것만 같았다. 그녀가…… 이림나를 알고 있나?
규중에 있는 대갓집 소저가 서융 공주를 어찌 알까. 양국이 높은 산과 먼 길을 사이에 두고 있다는 것은 둘째 치고라도 자신 또한 전쟁터에서 이림나를 한 번 본 것이 전부였다. 한안은 지금까지 경성을 나간 적이 없으며 이림나도 지금까지 대종에 온 적이 없었다. 서융 공주의 명호를 아는 사람도 몇 없었다. 그러나 한안의 표정이 그에게 알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림나를 알고 있다고.
부운석은 조금 더 깊이 그녀의 모든 것을 알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한안은 평범한 경성 여아들과 다른 점이 전혀 없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사람을 놀라게 하는 신중함과 침착함, 나이에 걸맞지 않은 눈빛이었다. 그녀에게 가까이 갈수록 그녀의 신비로움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떤 때는 심지어 그녀가 무심코 드러낸 눈빛에서 세상 풍파를 다 겪은 사람이 과거지사가 재현되는 것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이림나는 한안을 몰랐다. 그러나 한안은 이림나를 알고 있었다. 부운석은 한안이 무의미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하는 모든 일들은 강한 목적성을 띠고 있었다. 종종 영문을 알 수 없이 내딛는 한 걸음이 다음 걸음을 위해 앞길을 닦아 놓는 것이곤 했다. 그럼 그녀와 이림나 사이에 도대체 어떤 비밀이 있는 것인가.
한안은 그의 의뭉스러운 눈빛을 알아차리고 표정을 숨기며 웃었다.
“서융 사람이 대종에 잠입했으니 당신도 왕야 신분으로서 위험에 처할 것이니 매사에 조심하는 게 좋겠다는 의미죠.”
“그 사람은 서융의 황자다.”
부운석이 말했다.
한안은 다시 멍해졌다.
“탁칠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말을 마치고 자신이 실언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사람의 이름을 불렀으니 부운석은 자신과 그 사람이 이미 아는 사이라는 것을 알았을 터였다. 한안은 해명하듯 허둥지둥 말을 이었다.
“그가 바로 그 밤에 장부에 난입한 자객이에요.”
“앞으로 그를 멀리해라.”
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융 사람이 어째서 대종에 잠입했죠?”
어째서 신분이 고귀한 황자와 공주가 대종에 잠입한 것일까. 그들의 의도에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서융이 지금 내란 중이다.”
부운석의 표정은 냉혹했다.
“대종으로 도망 온 거지. 추살을 피할 뿐만 아니라 양국 사이의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서.”한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서융의 주인은 도이목이라는 이름의 남자였다. 설마 탁칠과 제위 다툼 중인 건가? 도이목의 명령으로 탁칠이 추살을 당하는 것일까? 살수들도 대종에 들어온 이상 확실히 신중하게 행동할 것이다. 황자와 공주가 여기로 달아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한안은 그날 밤 탁칠의 몸에 있던 상흔을 떠올리자 조금은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날 분명히 관부에서 말하기를 황상을 암살하려는 사람이 있다 했다.
남에게 추살 당하는 처지에 자신의 행적을 숨기려는 사람이 황상 암살 시도를 해서 자신을 노출할 정도로 어리석을 리 없다. 그러니 황상을 암살하려던 자는 탁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일 것이다. 아마 암살자는 모든 죄를 탁칠에게 떠넘기고, 관부에 일이 커지도록 조장하는 작용을 했을 것이다.
만약 탁칠이 잡힌다면 최대 수혜자는 바로 도이목이다. 그러나 도이목은 멀리 서융에 있으니 도이목을 돕는 자는 대종에 있다는 뜻이 된다.
대종에서 도이목을 돕는 자는 서융과 결탁하고 관부를 충분히 지휘할 수 있는 이이니 아마 신분이 높은 자이리라.
한안도 여러 일들이 이리저리 뒤엉켜 말끔히 정리가 안 되었지만 지금 당장은 거기에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만약 서융의 사람이 조정 내의 사람과 결탁했다면, 대종은 매우 위험했다. 엎어진 둥지 밑에 완전한 알은 없다고 나라의 위기 앞에서 자신의 원한은 아무 의미 없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한안은 자신이 생각한 바를 전부 부운석에게 알렸다.
부운석은 그녀의 말을 다 듣고 조금 복잡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가 나이를 뛰어넘는 지혜와 신중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진작 알고는 있었지만, 조정의 일에 대해서도 이렇게 명철하게 파악하고 한눈에 문제점을 파악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 그녀는 누에고치에서 명주실을 뽑아내듯 모든 실마리를 찾아낸 것이다. 관원이 된 지 오래된 자도 알아차릴 수 있는 사안이 아닌데 말이다.
왕비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부운석은 한안을 알게 된 이후 처음으로 그녀의 정체가 의심스러웠다. 보통의 규방 여아는 많이 알아야 전반적인 정세를 아는 정도였다. 이런 일을 분석하여 조리 정연하게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한안이 7년 전의 그 어린아이라는 것을 알고 난 후, 그는 사람을 시켜 장부를 조사했다. 덕분에 그녀가 아버지로부터 총애 받지 못하고 오랫동안 부중 하인과 희첩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고 억눌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평소 세상사에 관심 없이 부중에서 얌전히 수를 놓고 글자를 깨우치던 어린 아가씨가 이렇게 날카롭게 조정의 일을 분석하다니.
부운석은 한안을 보며 생각에 잠긴 듯이 말했다.
“맞다. 며칠 동안 나도 이 일을 추적하여 조사하고 있었다. 서융 사람이 온 이유가 좋지 않으니 너도 일단 조심하거라.”
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안은 이림나를 떠올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 말투가 조금은 이상했다.
“당신도 스스로를 잘 보호하세요. 그 공주가 당신을 애모하는 것 같던데 만약 그녀에게 납치되어 정말 부마가 되기라도 한다면…….”
“질투하는 것이냐?”
그의 긴 눈썹이 치켜 올라가며 웃는 듯 마는 듯 한안을 보았다. 입가의 그 웃음은 대단히 유쾌한 듯했다.
한안은 분노했다.
“무슨 허튼소리예요.”그는 바로 낮은 소리로 웃었다. 한안은 그의 장난에 울적함이 조금은 흩어졌다.
한편, 장부.미 이낭은 장사양에게 기대어 있었다. 그녀의 배는 이미 불룩하게 나와 있었다. 그러나 피부는 다른 임신한 여인들처럼 늘어지거나 어둡지 않았다. 심지어 종전보다 더 생기가 돌았다. 그러나 장사양은 배 속의 아이를 조심하여 그녀와 잠자리를 하지 않았고 그 탓에 그녀와 잠자리를 즐긴 지도 한참이나 되었다.
미 이낭이 부드럽게 말했다.
“노야, 지금 몸이 한층 더 불었습니다. 당신께서 예전에 말씀하신 적이 있으시지요. 만약 미아가 당신을 위해 아이를 낳아준다면 미아를 부중의 여주인으로 만들어 주시겠다고요. 그런데 아직까지 아무런 언급이 없으시네요. 미아는 줄곧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데 노야께서 거짓말을 하신 것은 아니시겠지요?”
장사양은 조금 망설였다. 지금 미 이낭은 틀림없이 자신의 자손을 임신한 상태다. 만약 남자아이라면 분명 경사였다. 그러나 미 이낭의 신분이 마음에 걸렸다. 만약 그녀를 정방으로 올린다면 오랑캐 여인을 정방으로 올렸다고 남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것이었다.
미 이낭은 그의 안색을 보고는 애교스럽게 골을 내며 말했다.
“노야, 당신이 정말로 소첩을 속이신 겁니까? 아야, 소첩 배 속의 아이가 다 들었어요. 아파요…….”
장사양은 미 이낭 배 속의 아이를 보배로 여기고 있었기에 당황하여 바로 의원을 부르게 했다. 그는 그녀가 원하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나를 위해 아들을 낳아주기만 한다면 노야는 말한 대로 행할 것이다. 네가 바로 이 부중의 정처가 되는 게야!”
공교롭게도 마침 막 방으로 들어오려던 주씨가 그 말을 들었다. 그녀는 얼굴에 원한과 분노의 빛을 띄우고는 이를 악물며 몸을 돌려 버렸다.
주씨는 장사양이 미 이낭을 정처로 세우겠다고 약속하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 질투와 원망에 가득 차 공동원으로 돌아왔다. 대주씨는 뜰 안에서 선잠을 자고 있다가 주씨의 소리를 듣고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야?”
주씨는 한쪽에 앉았다. 생각할수록 분노가 치밀었다.
“노야가 그 천한 년을 정처로 세우겠대!”
대주씨는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가 가리키는 것이 누구인지 알고 웃으며 말했다.
“알고 나니 겁나?”
주씨는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
“나도 그를 위해 아이를 임신한 적이 있었지.”
주씨의 눈 속에 언짢은 빛이 가득해졌다.
“그러나 내 아이를 그의 손에 잃었어. 그는 미안해하는 기색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천한 년을 정처로 세우려고 해!”
대주씨는 곱고 아름답게 그녀를 보고 부드럽기 그지없는 말투로 말했다.
“남자는 하루하루가 달라. 이미 말한 적이 있잖아. 하지만 그 오랑캐는 그리 걱정할 필요 없어. 그년의 신분이 너무 낮잖아. 장사양이 만약 그년을 정처로 세우려 했으면 진작 세웠지. 구태여 지금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었겠니.”
주씨는 조급히 말했다.
“그러나 지금은 종전과 달라. 그년은 임신했다고. 만약 아들이라도 낳으면…….”
대주씨의 눈에 음험하고 악독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아들이면 또 어때? 그년이 낳지 못하게 하면 그만이지.”
“언니 말뜻은……?”
주씨의 마음이 움직였다.
“장한안이 지금 기고만장해있지. 그년의 손을 빌려서 그 오랑캐 배 속의 종자를 없애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
주씨는 망설였다.
“하지만 그년은 지금 왕비야. 정말로 추궁하려 해도 노야 역시 그년을 어떻게 할 수 없어.”
대주씨가 웃었다.
“그년을 어떻게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오랑캐 배 속의 아이는 없어지지. 그리되면 자연히 너의 지위에 위협이 될 수도 없는 거지.”
그녀는 손을 펼쳐서 손톱을 붉게 칠한 자신의 손가락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장한안은 부중 이낭 배 속의 아이를 모해했다는 게 알려지게 될 거야. 이 꼬리표를 달기만 하면 앞으로 편히 지낼 생각을 말아야 하겠지.”
이 시대는 좋은 명성이 미모나 재능보다 더 중요했다. 미모의 대부호 집 소저라도 일단 명성이 훼손되기만 하면 좋은 집에 시집가는 게 극히 어려워졌다. 한안이 현청왕비의 신분이라 해도, 이낭을 모해한 일이 전해지면 심보가 악랄한 여자가 되는 것이다. 남이 말하는 대로 그대로 따라 말하는 사람들의 말이 황상과 태후의 귀에 전해지면 어떻게 될까. 현청왕의 혼사에 대해 백방으로 트집을 잡던 그들은 한안의 행실에 더더욱 불만이 생길 것이다. 심지어 부운석으로 하여금 아직 시집오지도 않은 한안을 휴처하게 할 가능성도 있었다.
“이 일은 우리가 손을 써서는 안 돼.”
대주씨의 가늘고 긴 눈에 밝은 빛이 번뜩였다.
“현청왕비가 하게 해야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해?”
주씨는 이미 완전히 대주씨를 신뢰하여 그녀의 말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대주씨는 몸을 일으키고 주위의 여종에게 전부 물러가라 분부했다.
“내게 생각이 하나 있어.”
장사양은 서재에서 상소를 쓰고 있었다. 관직이 5품 관원으로 강등되고부터 이런 자질구레한 일은 모두 자신이 직접 해야 해서 언짢았다. 최근 일마다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한안은 적수인 현청왕부에 시집가면서 위왕 세자를 노하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어산이 측비로 위왕부에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그는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간식을 가져온 여종이 몸을 틀며 그의 주변에서 알짱거렸다. 장사양의 눈빛이 그녀의 예쁘장하고 운치 있는 몸매 위에 떨어졌다.
미 이낭이 회임하고부터 그녀와 더는 잠자리를 함께 하지 못했다. 만 이낭은 냉대한 지 오래였고, 주씨는 유산하고 나서부터는 그녀를 보기만 해도 넌더리가 나서 이 넓은 장부에 자신의 침상을 데워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는 허리를 굽혀 간식을 꺼내는 여종을 당겨 자신의 품속에 끌어안았다.
그 여종은 희고 깨끗하고 어려 보였지만 사내를 끄는 매력은 적었다. 장사양은 입을 맞출 생각이었으나 그녀의 어색한 움직임을 보고는 평소에 사랑스럽고 교태가 넘치며 사람을 동하게 하던 미 이낭이 떠올라 모든 게 단조롭고 무미건조해져서 바로 그녀를 놓아주었다.
“가 봐라.”
며칠 이내에 총관을 불러 생김새가 예쁘고 좋은 느낌을 주는 여종을 몇 사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종전에는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 보아하니 자기 부중에 희첩이 좀 적은 것 같았다.
그 여종은 장사양에게서 놓여나고 어찌할 줄을 몰라 했다. 노야의 행동은 분명 자기를 마음에 들어 한 것이리라. 만약 노야의 비위를 잘 맞추어서 통방이라도 된다면 좋은 일이라 생각했는데 장사양이 이렇게 그녀를 밀쳐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장사양은 그녀가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보고 화가 일어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아직 멍하니 뭐 하는 게야? 꺼져라.”
여종의 눈에는 순식간에 눈물이 가득 찼다. 얼굴이 붉어지더니 그대로 서재를 물러나 나갔다. 장사양은 짜증이 나서 붓을 매섭게 내동댕이쳤다.
바로 그때, 문이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밀렸다. 장사양은 보지도 않고 탁자 위의 간식 접시를 던졌다.
“꺼지라는 말 못 들었느냐?”
접시가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조금 당황한 기색의 교태 넘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부…….”
장사양은 고개를 홱 들었다. 문 입구에 서 있는 것은 뜻밖에도 대주씨였다.
대주씨가 오늘 입은 옷은 얇은 비단으로 된 밝은 분홍색의 긴 치마로 그녀의 희고 깨끗한 피부를 아름답고 부드럽게 부각시켰다. 입술은 연지를 찍지 않아도 붉었고, 눈썹은 먹으로 그리지 않아도 비취같이 검푸르렀으며, 눈은 물기 어린 살구 같았다. 머리 위에는 진주 봉황 비녀를 꽂아 아름다운 빛을 사방으로 발산하고 있었다. 예전보다 더욱 공을 들인 옷차림이었다. 본래도 눈부시도록 아름답고 정교한 미인이었으나 이처럼 단장하니 더욱 선녀 같았다.
방금 전의 그 뻣뻣한 노비와는 달랐다. 대주씨는 비록 아이를 낳았지만 여전히 비할 데 없이 아리땁고 요염해 보였다. 게다가 소녀에게는 없는 유혹적인 자태가 흘러넘쳤다. 장사양은 대주씨에게 마음이 뺏긴 상태인 데다가 금욕한 지 여러 날이라 그녀에게 거의 달려들 뻔했다.
그래도 그는 충동을 참아내고 은근하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당신이 무슨 일이오?”
대주씨는 온순하게 웃었다. 눈과 눈썹 사이에 감출 수 없는 친절과 다정한 기색이 담겨 있었다.
“듣자 하니 제부께서 최근에 심기가 좋지 않으시다기에 제가 제부를 보러 왔어요.”
“란아, 당신이 아직 내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구려.”
미인의 관심과 배려에 장사양은 몹시 기분이 좋았다.
대주씨는 고개를 숙이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제부를 걱정하고 있지요.”
지금 서재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장사양은 그녀의 소녀 같은 모습을 보고 마음이 동하여 앞으로 다가갔다.
“란아, 나는 진심으로 당신을 좋아하오.”
그의 말의 반은 진심이었고 반은 거짓이었다. 장사양은 유순한 여자를 좋아했다. 주씨에게 반한 것도 그녀가 살뜰하게 보살피는 성격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대주씨에 비하면 주씨는 언급할 가치도 없었다. 대주씨는 애교덩어리였다. 찡그리는 눈빛, 웃는 입술 사이사이에 아양을 부리는 기색이 넘쳐났다. 장사양은 지금까지 이처럼 그의 마음을 동하게 하는 여자를 만난 적이 없었다. 설령 그녀가 장 태사의 총첩이라 해도 간절히 갖고 싶었다.
그는 대주씨를 끌어안았다.
“란아…….”
대주씨는 미약하게 발버둥만 칠 뿐 전혀 반항할 뜻이 없어 보였다. 장사양은 기뻐하며 그녀를 끌어안고 서재 뒤의 큰 침상으로 갔다.
운우지락을 나눈 후, 대주씨는 부드럽게 장사양의 품속에 기댔다.
“제부…….”
장사양은 그녀의 호칭을 바로잡지 않았다. 그 호칭은 금기시되는 둘의 관계를 부추기는 느낌이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미인에게서 발산되는 향을 맡으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러오?”
“란아가 부탁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를 바라보는 대주씨의 아름다운 눈은 가련하게 무언가 바라는 눈빛이었다.
장사양은 흥분하여 그야말로 그녀가 요구만 하면 반드시 들어 주마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기만 하면 반드시 당신을 도와 처리하지.”
대주씨가 웃으며 말했다.
“노야, 미 이낭을 정처로 세우지 마시어요.”
장사양은 그녀가 이런 부탁을 언급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터라 순간 당황했다. 대주씨가 서둘러 옥 같은 팔로 그의 목을 둘러싸고는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제 동생이 평소 좀 완고하지만 여전히 제부를 살뜰히 보살피고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에요. 만약 노야께서 미 이낭을 정처로 세우신다면 동생이 상심할 거예요. 란아는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동생이 종일 눈물바람 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으니 노야께서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장사양은 그녀의 말을 듣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란아, 타인을 위해 이 정도로 고민을 하다니 정말 착한 여인이군. 당신은 내 심장과 같은 사람이오. 당신의 요구를 반드시 지킬 것이오. 내 당신에게 약속하리다. 미 이낭을 정처로 세우지 않을 것이오.”
대주씨는 웃는 얼굴을 드러내더니 잠시 표정이 또 암담해졌다. 장사양은 그녀의 표정 변화를 알아차리고 서둘러 물었다.
“란아, 또 무슨 마음 상하는 일이 있소?”
“지금 제부께서 저와 이런 관계가 되었잖아요.”
대주씨가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란아는 제부를 애모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다른 이의 첩실이지요. 시집가지 않았을 때 만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워요. 지금 제부와 하룻밤의 은정을 나누었지만 내일이 지난 후에는 제부께서는 바로 이 일을 잊어주시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겠지요.”
장사양은 다급해졌다.
“어찌 그럴 수 있겠소? 란아, 나는 오직 당신만 원한다오.”
대주씨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하지만 당신과 나 두 사람의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일 수 없어요. 정정당당하게 사람들 앞에 드러낼 방법이 없는 걸요. 저는 그리워하는 것조차 못할 텐데 어떻게 이 정을 감당할 수 있겠어요?”
“란아.”
장사양은 대주씨를 그대로 놓치기 아까워 간절히 말했다.
“당신만 좋다면 천하에서 가장 특별한 물건을 찾아 당신과 나 두 사람의 사랑의 징표로 삼겠소. 당신이 그것을 보면 바로 나를 생각할 수 있게 말이오.”
대주씨는 그를 보았다.
“이 말이 정말이시어요?”
“정말이오.”
장사양은 단호하게 말했다.
대주씨는 그제야 안색을 바꾸고 웃음을 보였다.
“천하에서 가장 특별한 것을 어디다 쓰겠어요. 저는 그냥…… 장부에서 가장 특별한 것이면 좋아요.”
대주씨가 웃는 것을 보고 장사양은 한시름을 놓았다.
“당신만 좋다면 뭐든 되오.”
대주씨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장부의 모든 보물을 제 앞에 가져다 두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마음대로 가장 마음에 드는 것 하나를 고를 수 있게 말이에요. 제부, 그러실 수 있으세요?”
그녀의 눈꼬리가 휘어지면서 여우처럼 사람을 홀리고 있었다. 장사양은 이미 얼이 빠져 입속으로 중얼중얼 말했다.
“기꺼이, 기꺼이 그렇게 하겠소.”
장사양은 말을 마치고 다시 한번 그녀와 뒤엉켰다.
한편, 오래지 않아 장어산이 친정을 방문하는 날이 되었다.
장사양이 불러 한안이 대청에 도착했을 때, 장어산은 위여풍의 곁에 기대어 예쁘게 웃고 있었다.
한안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장어산이 친근하고 다정스럽게 불렀다.
“넷째 동생.”
한안은 눈을 들어 장어산을 바라보았다. 장어산은 부중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밝고 더 아름다워졌다. 장어산은 머리에 묘안석(猫眼石: 고양이 눈 모양의 가느다란 빛을 내는 보석)과 산호 구슬을 가득 달고, 손에는 진주와 비취 등을 잔뜩 달아 조금만 움직이면 장신구가 짤랑짤랑 소리를 냈다. 그 기세가 아름다우면서도 웅장했다. 위여풍이 그녀에게 썩 괜찮게 대해주는 모양이었다.
한안은 웃으며 말했다.
“어산 언니, 형부.”
형부라는 말이 위여풍의 귀에 유난히 거슬리게 느껴졌다. 그의 눈빛이 한안의 몸 위에 떨어졌다. 한안의 키는 좀 자란 것 같았다. 그러나 여전히 만두 모양 머리를 빗었고 손목에는 팔찌 하나, 머리 위에는 남옥 비녀 하나만 착용한 상태였다.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도자기 인형 같았다.
그러나 웃음으로 휘어진 그녀의 눈은 비할 데 없이 진중하고 차분했으며, 입가엔 냉담한 비웃음을 품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무심코 흘러나온 오만함은 정말로 ‘왕비’라는 두 글자를 감당할 만했다. 위여풍은 저도 모르게 넋이 나가 한안을 바라보았다.
장어산은 위여풍의 이상함을 알아차리고 마음속이 싸늘해졌다. 서둘러 한 손으로 위여풍을 잡고 아양을 떠는 것처럼 그에게 말했다.
“나리, 소첩이 모시고 이낭을 보러 가겠습니다.”
주씨는 지금 병으로 침상에 누워 있어 공동원을 떠나는 일이 지극히 드물었다. 위여풍이 웃으며 대답했다.
“좋소.”
목소리가 비할 데 없이 온화했다. 장어산을 대하는 태도도 친밀한 것이 정이 깊은 듯한 모습이었다. 대주씨와 장사양은 한옆에 서서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위여풍은 한안을 다시 한번 보았다. 그녀가 조금도 개의치 않는 모습으로 자신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듯한 것을 보고 기분이 상해 코웃음을 한 번 치고는 먼저 큰 걸음으로 나갔다.
한안은 무료하게 서 있다가 자신의 청추원으로 돌아왔다.
급람이 말했다.
“세자가 이전에는 우리 소저를 아내로 들이고 싶어 애태우시더니 2소저가 시집가자마자 저러시다니. 이제는 정말 실망스럽기 짝이 없네요.”
주홍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만 말해. 소저께서 그에게 시집 못 가신 게 아니잖아? 세자가 색다른 것을 보면 마음이 쉽게 변하는 그런 사람이라면 고생하게 되는 것은 분명 2소저야.”
급람은 씩씩거리며 몹시 분개했다.
“너 방금 2소저의 얼굴빛 못 봤어? 측비가 되더니 정말로 자기가 뭐라도 된 줄 아는지 눈이 거의 하늘 위를 넘보려고 하던걸. 우리 소저께 여전히 인상이나 써대고 말이야. 우리 소저께서는 현청왕비신데도 그녀처럼 그렇게 뽐내지는 않으신다는 걸 생각지도 않나 봐. 득의 만만해 할 게 뭐 있다고?”
주홍은 화가 나기도 하고 또 우습기도 했다.
“소저와 비교해서 뭐 하게.”
“그게…….”
급람은 한안을 한 번 보았다. 한안이 나무랄 뜻이 없는 것을 보고 계속해서 말했다.
“그녀는 세자와 살을 섞은 걸 빌미로 해서 겨우 위왕부의 문을 들어갈 수 있었던 거잖아? 퉤! 창피한 줄도 모르고.”
두 여종의 말에 한안은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의혹이 생기긴 했다. 위여풍은 이전에 장어산을 지극히 싫어했는데 지금 장어산에게 마음이 있는 듯 은애하는 부부의 모습을 지어내고 있다. 위여풍이 당연히 장사양을 두려워할 리는 없다. 그럼 누구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거지?
한안은 생각을 거듭했다. 설마 나에게 보여 주는 건가?
그녀는 조금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여풍은 도대체 어쩔 생각인 거지. 만약 그가 정말 자신에게 그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 한 거라면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장어산이 위여풍을 등에 업고 자기와 대적하려는 것이라면……. 한안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제 우상 천금인 이가기가 시집가는 일을 재촉할 때가 되었군.
청추원에 돌아간 한안은 급람과 주홍을 다른 일을 하라고 내보내고 뜰 가운데 있는 길고 낮은 의자에 반쯤 기대어 나른하게 햇볕을 쬐면서 수틀에 수를 놓았다.
몸 뒤에서 돌연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한안은 잠시 멈칫했다. 햇빛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 속에 신영이 있었다. 부운석이 또 청하지도 않았는데 온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체념하고 고개를 돌려 보았다.
“어떻게 당신이 여기 있죠?”
위여풍이 냉랭하게 그녀를 보고 있었다.
“당신은 그리도 나를 보는 게 싫소?”
한안은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자신이 무얼 하든 그를 싫어하는 게 될 것이다.
“당신이 이곳에 숨어서 나를 보길 원치 않는 것은 나와 당신 언니의 일 때문에 내게 원한을 품었기 때문인 거요?”
위여풍은 한 걸음 앞으로 나와 한안의 표정에서 작은 흔적이라도 발견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한안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형부와 언니는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죠. 축하할 틈도 아직 없었는데 어찌 원한을 품겠어요.”
그녀는 위여풍의 사고방식을 갈수록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설마 저 혼자 지레짐작해서는 자신이 장어산과 그가 살을 섞은 것 때문에 그에게 원한을 품었다고 여기는 건가?
위여풍은 표정이 변하더니 한참 후에야 말했다.
“과연, 당신과 부운석은 일찌감치 사통하였던 게로군.”
한안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은 별 상관이 없었지만 부운석을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게 듣기 거북했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좀 화가 나서 냉담하게 말했다.
“세자의 말은 틀렸습니다. 한안과 왕야의 혼사는 황상께서 직접 분부를 내리신 것입니다. 세자께서 이렇게 말씀하심은 황상의 결정에 의심을 품으시는 것입니까? 그럼 한안이 세자께 미력한 힘이나마 도움을 드릴 수 있겠네요. 어사 대인께 설명하여 내일 아침 일찍 조회에서 세자를 대신하여 황상께 분명히 여쭈어보겠습니다.”
그녀는 조금의 숨 돌릴 기회도 주지 않고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위여풍은 당연히 황상에게 물어보는 것이 불가능했다. 한안의 말이 그의 말문을 막아 버렸다. 한안이 자신에게 털끝만큼도 감정이 없다는 것을 안 위여풍은 그 증오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당신이 그렇게나 부운석을 좋아했었나!”
“만약 세자께서 단지 한안과 왕야의 애정사 문제를 물어보러 오신 거라면, 다시 한번 명확히 말씀드리지요. 세자께서 또 계속해서 물어보시지 않도록 말이에요.”
한안은 그를 보며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잘 들으세요. 나와 현청 왕야는 부부 사이의 정이 두텁고 변함없는 절개를 다하며 흰머리가 될 때까지 서로를 지킬 것입니다. 나는 왕야의 대적할 이 없는 용맹과 출중한 용모, 정정당당함과 공명정대함을 애모합니다. 그는 바로 내가 평생 찾으려던 사람이에요. 나는 그 어떤 남자보다 뛰어난 그를 애모합니다.”
그 긴 고백의 말을 하면서 한안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었다. 어쨌든 부운석은 이 자리에 없으니 어떻게 말을 지어내든 상관없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 앞에서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은 처음이라 익숙지는 않았다. 그 생각에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위여풍의 눈에는 한안이 부운석을 생각하며 걷잡을 수 없이 수줍어진 것으로 보였다.
“세자, 분명히 알아들으셨습니까?”
한안은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물었다.
“알아들었다!”
위여풍은 이를 갈 듯이 한마디를 내놓았다. 마음속으로 사랑하는 여인이 자신의 앞에서 다른 남자에 대한 정을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에게 치욕, 불쾌감, 질투를 느끼게 했다. 장한안은 그의 아내여야 했다.
한안은 그제야 입꼬리를 치켜 올렸다.
“어산 언니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이제 알아들으셨다니 세자께서는 가 보시지요.”
위여풍은 자신의 자존심이 전부 사라져 버렸다고 느꼈다. 차갑게 코웃음을 치고 소매를 떨치며 가버렸다. 한안은 마음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간신히 역병 귀신을 보내 버린 셈이었는데, 바로 등 뒤에서 낮게 가라앉은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말솜씨가 괜찮은걸.”
한안은 처음에는 깜짝 놀랐으나 표정을 가다듬고 고개를 돌렸다.
“서융의 존귀하신 황자 전하, 언제 또 다른 사람의 말을 몰래 엿듣는 취미가 생기셨습니까?”
한안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은 탁칠이었다. 그는 짙은 남색 장포를 입고 있었다. 이전의 곤궁한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이곳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거칠 것 없이 들어오고 있었다. 한안은 황당했다.
탁칠은 득의만만하게 웃었다.
“그저 기분 전환하러 왔다가 마침 왕비가 왕야에 대해 고백하는 것을 들었을 뿐이야. 현청왕이 정말 부럽구나. 안아 같은 이런 미인이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하여 대하다니, 만약 나였다면…….”
“탁 공자는 정말 좋은 흥취를 지녔네요. 이처럼 위험을 무릅쓰고 장부에 온 것이 그저 수다나 떨려고 온 것이라니 말이에요.”
한안은 미적지근하게 말했다.
탁칠이 한 걸음 다가왔다.
“너를 위해서라면 나는 무엇이든 기꺼이 할 텐데 말이지.”
한안은 그를 노려보았다. 이 서융 황자는 몹시 위험한 사람이었다. 도이목의 추살을 피하기 위해 대종으로 도망 왔지만, 그것 또한 계략에 관련되어 있는 것 같았다. 어찌 되었든 그는 자신과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런 사람은 존중하되 멀리하는 것이 가장 좋았다. 지금은 경거망동해서는 안 되는 때였다.
한안은 슬며시 웃었다.
“당신이 진짜 나를 위한다면 영원히 장부에 오지 말아요.”
탁칠은 그녀를 응시했다.
“정말 무정하군.”
탁칠은 한 걸음 물러나더니 눈 깜박할 사이에 처마로 날아올라 뜰 가운데 서 있는 한안을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사실 오늘은 정말 지나가는 길이었다. 확실히 위 세자보다 너의 왕야 부군이 더 마음에 들어.”
그는 한안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 세자와는 거리를 좀 멀리해라, 꼬마.”
그가 말을 마치고 몸을 날리니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한안은 화가 나기도 하고 또 우습기도 했다. 이 사람의 태도는 영문을 알 수 없어 적인지 아군인지 명확하게 구분 지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탁칠에 대해서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한편, 진 귀비의 생신이 곧 다가왔다. 장사양도 초청장을 받았다. 장사양은 초청장을 받은 일을 관직이 오를 기회가 생긴 것으로 여겼다. 초청장에는 장사양의 두 딸이 출석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쓰여 있었다. 지금 한안은 현청왕비이고 장사양은 세자 측비였다. 장금은 만 이낭을 따라 온종일 불당에 머무르느라 여전히 보는 횟수가 거의 없었다.
한안이 부중 화원에서 산책을 하고 있을 때, 공교롭게도 장한명의 뒤에 열한두 살의 소녀가 따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소녀는 부중의 여종이 아닌 것 같았다. 한안은 기이한 마음에 바로 장한명을 불렀다.
장한명은 그녀를 보고 반갑게 외쳤다.
“누님.”
장한명이 바로 그녀의 곁으로 달려왔다. 한안의 눈빛은 그의 뒤의 어린 여종 위에 떨어졌다.
그 아이는 대단히 청순하게 생긴 어린아이였다. 나이는 어리지만 이목구비가 분명하고 사랑스러웠다. 자라면 분명 미인이 될 싹이었다. 그 어린아이는 부중 여종과 같은 복장이었지만, 표정이 가녀린 것이 한안을 보고 감히 고개도 들지 못했다. 아이는 장한명의 몸 뒤에 숨어 애처롭고 가련한 자세를 하고 있었다.
“이 여종은 본 적이 없는 것 같구나.”
장한명이 웃고는 가엾게 여기는 시선으로 어린아이를 한 번 보았다.
“영자라 불러요. 지난번에 국자감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악인의 수중에서 구해낸 아이예요.”
한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어떻게 악인의 수중에서 사람을 구해내?”
장한명은 그녀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을 알아차리고 서둘러 말했다.
“그 나쁜 놈이 영자를 청루에 팔아넘기려 했어요. 제가 두고 볼 수 없어서 그놈을 쫓아냈지요.”
“그런 자들은 흉악무도하기 마련이거늘, 네가 아직 나이 어린데 어떻게 쫓아낼 수 있었지?”
한안의 말투는 대단히 엄숙했다.
“저는 이미 무공이 있는 걸요!”
장한명이 웃었다.
“그놈은 저의 무공에 대항할 수 없었습니다.”
한안은 한명의 눈에 은은하게 득의만만한 빛이 있는 것을 보고 저절로 고개를 저었다. 장한명은 아직 소년의 심성을 지녀서 세상의 위험과 흉악함을 몰랐다. 그저 지금 자신이 남다른 재주를 지녔다고 자신만만한 것이다. 뛰는 사람 위에 나는 사람이 있음을 전혀 생각지도 못하다니. 상대방이 본래부터 이런 장사를 했다면 한명 같은 어린아이에게 쉽사리 겁을 먹지 않았을 것이다. 깊이 생각한 그녀는 처음부터 한마디 말도 하지 않는 어린아이를 보았다.
“영자, 네가 말해봐라. 너의 부모는 어떤 사람이냐? 또 어떻게 청루에 팔리게 되었느냐?”
영자는 서둘러 무릎을 꿇고 한안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가녀린 목소리로 말했다.
“소저의 말씀에 답합니다. 영자의 부모는 이미 죽고 숙모를 따랐는데 숙모가 얼마 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영자의 언니가 자원하여 몸을 팔아 청루에 들어가서 관을 사 숙모를 묻었습니다. 영자는 언니를 찾아갔다가 그 사람들에게 잡혔습니다.”
작은 얼굴에 눈물이 떨어지는 것이, 보는 사람의 연민이 일게 했다.
그러나 한안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계속해서 물었다.
“그럼 너의 부모는 어느 지방에서 살았느냐? 숙모는 또 어디에 묻었고?”
영자는 슬프고 분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소저는 영자를 못 믿으시는 것이지요. 영자는 차라리 죽음으로 결백을 밝히겠습니다!”
영자는 말을 마치고 일어서서 머리를 집 아래 기둥에 박으려 했다. 황당할 정도로 동작이 빨랐다. 장한명의 몸이 번뜩하더니 영자를 잡아 끌어당겨서는 큰소리로 고함을 쳤다.
“이게 무슨 짓이냐?”
한명이 비록 노하여 소리치기는 했지만 여전히 걱정하고 관심을 쏟는 말투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한안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장한명이 고개를 돌려 한안을 보고 말했다.
“누님, 영자는 불쌍한 아이입니다. 누님께서 어찌 이런 아이를 괴롭히십니까?”
한안은 슬펐다. 웃음조차 사라졌다. 냉랭하게 장한명을 보며 던지는 말투가 차디찬 얼음 같았다.
“단지 그 아이 집안이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물었어. 내가 무얼 했다는 것이야? 부중의 하인 중 집안 내력을 따지지 않은 이는 없다. 장부에 사람이 많아 일손이 어지러우니 내력이 바르지 못한 사람이 와서 무슨 짓을 저지르면 누가 그 책임을 감당하겠니?”
그녀는 평소에 한명을 대할 때 늘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있었고 화를 낼 때가 드물었다. 이처럼 차가운 얼굴로 대할 때는 거의 없었다. 장한명은 조금 실망하여 그녀를 보았다.
“저는 누님이 심성이 고운 좋은 분이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지금 누님의 행동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어린 여종조차 의심하려 하시네요. 영자는 부중의 다른 하인들과 다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럼, 너는 그 아이 때문에 나와 대적하려는 것이냐?”
한안은 장한명의 눈을 강하게 응시했다. 한명은, 그녀가 다시 세상을 살면서 처음으로 보호하려던 사람이었다. 허나 그가 낯선 아이를 위해 자신을 추궁하다니.
장한명은 화가 나 있었다. 온순하고 가련한 영자가 한안에게 이런 대우를 받을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언니와 서로 굳게 의지하며 살아가는 영자의 운명이 장한명 자신과 매우 흡사하다고 느꼈고 보는 순간 동병상련의 감정이 생겨났다. 영자를 부로 데리고 와서 건강하게 살아가도록 해주고 싶었다. 그러니 한안의 이 같은 행동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누님이야말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장한명은 영자를 끌어당겨서 자신의 몸 뒤에 단단히 보호했다. 한안에게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보내며 화가 끝까지 치밀어 소리쳤다.
“누님이 얼마나 똑똑하든, 모든 사람을 누님과 똑같이 형편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한안의 몸이 비틀거렸다. 장한명은 영자를 데리고 몸을 돌려서 떠났다. 주홍이 한안을 부축했다.
“소저…….”
부중의 소소야와 소저가 다투니 여종의 입장에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한안은 슬프고 처량하게 웃었다. 한명에 대해서는 가슴 깊이 진심으로 대했는데 동생이 그녀를 계략만 가득하면서 의심 많고 추악한 누이라고 생각할 줄은 몰랐다. 그녀가 일부러 영자를 어쩌겠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청루라는 말에 경계심이 일었던 것뿐이었다.
영자의 언니라는 이가 청루에 있다는 것도 의심스러웠다. 영자의 집안이 지극히 가난하다 하였으나 그 아이의 두 손은 희고 깨끗하며 곱고 부드러워 힘들고 거친 생활을 한 흔적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힘들고 거친 생활을 한 게 아니라면 저 아이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럼 영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녀가 영자를 압박하여 물었을 때 보인 영자의 태도는 오히려 진상을 드러나게 했다. 몇 마디 말이면 충분한 일을 급작스럽게 죽음으로 결백을 밝히려 한다고?
장한명과 한안 사이에 논쟁이 발생했을 때, 영자는 허둥대는 표정만 지었을 뿐 결코 소리를 내어 주인을 말리려 하지 않았다. 만약 보통의 하인이라면 자기 주인이 자기를 위하여 논쟁하는 것을 보고 있는 힘을 다해 말리려 했을 것이다.
지나치게 이상하지 않은가?
한안은 눈앞의 꽃가지를 멍하니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정말…… 그렇게 형편없어?”
주홍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소저, 그런 말씀 마십시오. 소야께서 나이가 어리시니 아직 사리 분별이 없으셔서 소저의 고민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지요.”
그녀는 한안의 망연자실한 표정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
“소저께서 소야를 위해 하시는 일을 노비들은 다 보았습니다. 소저께서 만약 적에게 인자하시면 반대로 자신에게는 잔인해지시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정세가 혼란하여 공동원, 부용원, 노야 모두 함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소저께서도 핍박을 받아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어요. 누가 매일 아귀다툼을 하는 생활을 원하겠습니까? 누가 음모를 꾸미기를 원하겠습니까? 또 누가 잠시라도 눈을 감아버리면 자기를 밀어버리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주홍은 평소에 신중하여 이런 말을 하는 것이 극히 드물었다. 아마도 한안의 표정을 보고 걱정스러워 그녀를 위로하고 일깨우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한안은 희미하게 웃었다.
“고마워, 주홍.”
그렇다. 누군들 천진하고 편안한 생활을 바라지 않을까. 매일 꽃을 감상하고 거문고를 타며 사람들과 교전할 필요도 없고 남의 계략을 막아낼 필요도 없는 생활. 그러나 때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일이 많았다. 그녀는 전생의 결말을 반복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설령 한명이 그녀를 미워하고 그녀를 죄가 너무 커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으로 여긴다고 해도 그것도 그저 달게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주홍, 그 영자라는 아이, 사람을 시켜서 잘 지켜보아라.”
줄곧 온순하던 장한명과의 사이를 틀어지게 할 수 있다니, 그 아이가 보통이 아님을 직감할 수 있었다.
한안은 눈을 내리깔았다. 적지 않은 문제가 생겼다. 장한명은 하루하루 커가고 있지만 그녀는 자신이 환생한 일을 그에게 알릴 생각이 없었다. 장한명이 자신과 같은 고통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기를 그가 영원히 변치 않는 초심을 지켜 정정당당하고 광명정대한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장한명은 장부에 있는 한, 그들 남매가 계략을 꾸미고 당하는 날들이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질 것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장부 안에 있는 사람들의 위선적인 껍질을 찢어 장한명이 아주 분명하게 볼 수 있게 하고 싶었다. 이런 곳에서 가장 필요 없는 것은 선량함이란 걸 그가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처음으로 한안은 자신의 결정에 대해 망설이기 시작했다.
14장
진 귀비 생신연의 날.
황제는 총애하는 진 귀비를 위해 궁중 연회를 열었다. 연회에는 많은 이들이 초청되었고, 한안과 장어산도 초청 명단에 있었다.
유모 진은 아침 일찍 일어나 한안이 입을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아가씨는 지금 신분이 다릅니다. 현청왕비 신분이시니 옛날과 같은 그런 소박하고 수수한 것은 체면을 깎는 게 될 겁니다. 화려하고 산뜻한 것을 골라야 하는데.”
한참이나 골랐는데도 불만스러웠다.
“진작 알았다면 가서 새로 옷 몇 벌을 맞추었을 텐데…….”
한안이 웃으며 말했다.
“마음대로 하나 고르면 돼. 우리들은 그저 생신을 축하하러 가는 거니까 다른 것은 상관이 없어. 예의에 어긋나는 데 없이 단정하기만 하면 그만이야.”
유모는 긍정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 말씀은 쉽죠. 하지만 왕야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실 겁니다. 지금 아가씨는 바로 왕야의 얼굴이세요. 아가씨 체면이 바로 왕야의 체면이 되는 거죠.”
한안은 소리 내어 웃을 뻔했다. 부운석의 체면이라고? 부운석의 그 수려하고 정교한 용모가 떠오르자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 사람이 중앙에 서면 아마도 다른 사람들의 얼굴은 없어지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자기에게 그의 체면을 차려줄 순번이 어디 오기나 하겠는가? 어쩌면 다른 사람들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정말로 너무 높은 가지 위에 기어오른 것일지도 몰랐다.
궁중 연회에 가기 위해 치장을 다 마친 후에야 한안은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켰다. 매번 궁중 혹은 연회에 가는 것은 사투를 벌이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횟수가 많아짐에 따라 자신도 이런 생활에 익숙해져서 일이 순조롭게 척척 진행이 되니 신기했다.
진 귀비의 생신이다. 진 귀비는 7황자의 생모로 특별히 초청장에 한안의 이름을 추가하였으니 아마도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함 안에서 매화자를 꺼내어 손으로 가늠해 보고 소매 속에 넣었다. 그러고 나서야 급람을 향해 말했다.
“가자.”
황궁에서 어쩌면 가장 웅장하고 화려한 것은 채봉전일 것이다. 백옥을 쌓아서 만든 담장, 금 벽돌이 깔린 바닥, 곳곳에 산호와 보석이 진열되어 있었고 진귀하고 기이한 보배가 무수했다. 서역산 커다란 융단 깔개가 층계를 따라 깔린 것이 부드럽고 산뜻하게 아름다웠다. 청동 학의 입에서는 진귀한 단향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한겨울인데도 탁자 위의 수정 접시에는 여전히 여름 과일이 놓여 있었다.
연회석상 위에는 온통 정교하고 맛깔나게 만들어진 간식과 술이 가득했고, 귀부인들은 삼삼오오 모여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진 귀비는 태후의 곁에 앉아 있었다. 오늘은 그녀의 생일이라 더욱 화려하게 단장하고 곱게 꾸며서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황후는 다른 한쪽에 앉아서 장군 부인과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때 낭랑한 목소리가 말했다.
“듣자 하니 오늘 현청왕비도 온다면서요. 정말 뜻밖이네요.”
부인 차림의 여자가 그 말을 듣더니 입을 가리며 웃었다.
“현청왕비가 얼마나 대단한지 우리가 볼 수 있겠네요.”
부운석은 소년 시절 걸출하게 공적을 이루었으며 수려하고 고귀한 데다가 문벌 또한 귀해서 수많은 대종 여아들의 꿈속 정인이었다. 현청왕이 혼사를 정한 소식이 알려지자 수많은 여아들이 이불을 끌어안고 하룻밤을 꼬박 울었다. 오늘 연회석상에는 환상을 품고 있었던 여자들이 적지 않게 참석했다. 그들은 왕비에 대해 질투심을 품고 있었는데 연회석에 현청왕비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저마다 목을 길게 늘여서 그 대단한 현청왕비를 어디 한번 보자며 벼르고 있었다.
“넷째 동생은 아마 좀 기다려야 올 거예요.”
입을 연 이는 장어산이었다. 그녀도 화려하고 장중한 차림새면서도 온몸으로 요염한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소녀 때의 아름다운 요염함과는 달랐다. 지금 그녀는 이미 남의 부인이 되어 성숙한 요염미를 발산하고 있었다. 행동 하나하나가 곱고 아름다우면서 사내의 눈을 끄는 묘한 매력이 넘쳤다. 적지 않은 천금 소저들이 보고 겉으로는 코웃음을 쳤으나 마음속으로 질투하기 바빴다.
장어산이 서녀지만 위왕 세자의 측비가 되었으니 높은 가문으로 시집간 셈이다. 좌중의 여자들 대부분은 한안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현청왕비가 장어산과 자매인 만큼 분명 저렇게 요염한 모습으로 알랑거려서 사람을 유혹하는 유형의 여자일 거라고 다들 생각했다. 얼굴도 본 적 없는 현청왕비에 대해 마땅치 않아 하는 마음이 생겼다.
“듣자 하니 현청왕비가 천성이 질투가 심해서 현청왕이 측비를 받아들이고 소첩을 거두는 것을 불허하였다 하더군요.”
어느 귀부인이 말했다.
“넷째 동생이 지금까지 추구한 것이 일생일세 두 사람만의 애정이랍니다. 부친께서 소첩을 받아들이는 것까지 넷째 동생은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넷째 동생의 생각은 아주 특별하답니다.”
장어산이 웃으며 말했다.
이 말은 분명 한안이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해 지조가 굳고 변함이 없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귀에 들리기로는 별것 아닌 일이 아니었다.
한 노부인이 노기충천하여 말했다.
“여자가 되어서 어찌 부모의 일에 참견할 수 있단 말입니까? 현청왕비가 듣자 하니 금년에 급계도 하지 않았다 하던데 부모의 일에 대해서도 독단적으로 행동하니 이것은 불효입니다. 여자의 생각이 특별하다고요? 제가 보기에 특별하다기보다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법도를 지키지 않는 겁니다!”
주위 사람들이 무턱대고 찬성한다는 소리를 덧붙였다. 사람이 높은 지위에 서게 되면 질투와 시기의 눈빛이 따르고 질투와 시기의 눈빛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이러쿵저러쿵하는 입방아에 오르게 되는 법이었다.
연회에는 등선도 참석해 있었다. 장어산의 말을 듣고 큰소리로 반박하고 싶었다. 장어산의 말이 지나치게 듣기 거슬렸던 것이다. 한안이 없는 틈을 타서 그녀를 비방하고 모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자신의 어머니가 소맷자락을 끌어당겨 고개를 들어 보니 등 부인이 그녀에게 경고의 눈짓을 하고 있었다. 등선은 달갑지 않았으나 감히 모친을 화나게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분노에 찬 얼굴로 사태의 원흉인 장어산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이 자리의 귀부인들 중 일부는 이미 한안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한안의 사람됨이 장어산 말처럼 그렇게 형편없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녀들은 한안을 위해 나서서 정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옆에 앉아서 수수방관하였고 심지어는 장어산의 말에 일부 찬동하기까지 했다. 한심한 일이었다.
그중 장어산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이가기였다.
맨 처음 장어산이 그녀에게 한안이 위왕 세자의 세자비가 될 것이라고 알려준 이후, 이가기는 줄곧 한안을 적대시했다. 자신이 직접 눈으로 장어산이 위여풍을 유혹한 것을 목격할 때까지 그랬다. 두 사람이 간통한 사실이 발각된 후, 이가기는 장어산을 뼛속 깊이 증오했다. 이제 한안은 현청왕비가 되었으니 다시 위여풍과 관계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장어산은 요물처럼 순식간에 신분을 바꾸어 위왕부 세자의 측비가 되었다. 머지않아 이가기 자신은 위왕부에 시집가서 위여풍의 세자비가 되어야 했다. 이가기는 기뻤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시집갈 수 있게 된 것은 기뻐할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가기가 시집가기도 전에 위여풍은 측비를 얻었고, 그 측비는 다름 아닌 장어산이었다. 장어산은 이가기 목구멍 속에 낀 가시 같았다. 그녀는 장어산이 여전히 한안을 중상모략하는 것을 보고 기가 막혀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럼 또 무슨 방법이 있겠어요? 현청왕께서 좋아하시는데요! 기꺼이 그녀를 위해 영원히 두 마음을 먹지 않을 거라 하시잖아요. 게다가 조당에서 신부 측에 예물을 보내어 혼사를 정하고 천자께서 증인이 되신걸요.”
한안을 비웃고 질책하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확실히 현청왕의 태도는 한평생 오직 한안 한 사람만 비로 둘 것이라 표명한 것이었다. 여자들이 한 사람을 질투하려면 우선 그녀가 질투할 만한 가치가 있어야 했다. 여자로서 가장 자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누구보다 우수한 남자가 온 마음을 다하여 사랑해주는 것만 한 것이 없다.
등선은 조금 이상하다는 눈으로 이가기를 보았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원래 한안과 철천지원수였던 사람이 지금 한안을 위하여 말을 할 줄이야. 정말이지 태양이 서쪽에서 뜰 일이었다.
장어산은 분노했다. 이가기의 말은 자신과 위여풍이 먼저 부부의 결실을 맺었다 해도 명분이 서지 않으며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위여풍이 원하지도 않는 그녀를 부에 맞아들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화가 났지만 감히 이가기에게 대들 수는 없었다. 다만 훗날 이가기가 부에 들어와 그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대신 자신이 그의 총애를 독차지한다면 그땐 자신이 내키는 대로 손 봐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이 옳아요. 넷째 동생은 정말 복이 많아요.”
황후는 여전히 장군 부인과 닥치는 대로 아무 이야기나 하고 있었다. 부인들이 방금 전에 한 이야기를 담아 들은 것도 같고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도 같았다. 진 귀비는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태후에게 차를 건넸고 두 사람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아래의 움직임을 눈 속에 모두 거두어 담았다. 비록 아무 말 없이 웃는 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눈동자의 깊은 뜻은 알 수가 없었다.
여러 부인과 소저들이 막 한안에 대한 이야기를 마쳤을 때, 태감이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현청왕비 오셨습니다.”
뒤이어 전 밖에서 몸 뒤에 두 여종을 거느린 한안이 걸어 들어왔다.
소녀의 키는 자랐지만 앳된 기색은 여전했다. 그러나 행동에 긴장감이나 수줍어 머뭇거린다고 할 만한 것이 추호도 없는 것이 마치 한 왕국의 공주 같았다. 한 걸음 한 걸음 침착하고 절도가 있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열세 살 소녀가 이처럼 침착하고 여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녀가 조금 더 다가오자 사람들은 더욱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한안의 용모는 청순했다. 시선을 강탈하는 장어산의 아름다움과 요염함에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맑은 샘이 사람들의 마음 사이를 편안하게 흘러가는 것같이 맑고 섬세한 용모였다. 입꼬리는 휘어졌고 웃는 눈은 구부러져 얌전하고 온순했다.
그러나 그 얌전하고 온순함 가운데 쉽게 알아차릴 수 없는 서늘함과 냉담함을 머금고 있었다. 그녀는 높은 곳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냉정하게 조소하며 바라보기만 할 뿐 그 속에 끼어 들어가지도 또 눈물을 흘리지도 않을 것처럼 보였다.
이 어린 아가씨는 용모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는 못하지만 그것과 다른 강력한 매력이 있는 듯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능은 그녀의 맑고 투명한 눈동자 속에 깊이 감추어져 있는 것 같아 사람들은 공연히 두려워졌다.
그녀의 모습은 장어산의 말, 그리고 경성 안 사람들이 제멋대로 떠들어 대던 질투가 심하고 교활하며 포악하고 불효하며 악랄한 인상과는 전혀 맞지 않았다.
한안은 허리를 숙여 웃전을 향해 예를 올렸다.
“한안이 태후 마마, 황후 마마, 진 귀비 마마께 문안 올립니다.”
태후가 손을 휘둘렀다.
“일어나거라.”
한안은 감사의 말을 했다.
한편, 진 귀비는 그녀가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그녀를 보며 말했다.
“지금 너는 현청왕비이니 행동함에 있어 모름지기 더욱 주의해야 한다.”
그러더니 장어산을 불렀다.
“어아.”
장어산이 서둘러 일어나서 대답했다.
“마마.”
진 귀비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얼굴에는 온통 온화하고 부드러운 웃음이 가득했다.
“본비는 위 세자가 젊고 유망한 것을 안다. 네가 이번에 측비가 되었다지? 본비가 보기에 너는 처신이 사리에 맞고 예를 아는 좋은 아이 같아서 몹시 마음에 드는구나.”
진 귀비는 말을 마치고 자신의 머리 위 비녀를 뽑아서 장어산의 쪽 찐 머리 위에 꽂아 주었다.
“달리 줄 건 없고 이 비녀를 네게 주마.”
장어산은 과분한 총애에 기뻐 손을 내저었다.
“마마, 이것은 쓸 수 없습니다. 신첩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네게 가져라 하면 가지는 게야.”
진 귀비는 조금 화가 난 척했다.
“본비가 너를 아껴서 네게 주는 것이다.”
장어산은 서둘러 감사의 말을 올리고 진 귀비와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웠다.
그들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한안은 여전히 진 귀비 아랫자리에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진 귀비는 그녀에게 물러가게 하지 않고 오직 장어산과 말하는 데 정신을 팔며 한안을 내버려 두었다. 명백히 일부러 하는 짓이었다. 태후도 그저 고개를 숙이고 차만 마실 뿐, 한안을 곤경에서 구해줄 의사는 없었다. 황후는 이쪽을 몇 번 보더니 마찬가지로 고개를 돌려 장군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일에 섞이고 싶지 않은 듯했다.
한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설령 황후가 곤경에서 구해줄 마음이 있다 해도 그녀를 위해 태후에게 맞설 리 없었다. 황상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바로 태후라는 것을 누가 모를까. 오늘의 일로 그녀는 태후가 진 귀비와 한패라는 것을 똑똑히 알게 된 셈이었다. 한안은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태후가 싫었다. 태후는 속을 파악할 수는 부류였다.
등선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한안이 진 귀비에게 냉대받는 것을 보며 남의 불행을 즐기는 시선으로 옆에서 보며 비웃었다. 장어산은 속으로 기뻐했다. 진 귀비와 자신은 친근해졌고 태후와도 관계를 걸쳐 놓았다. 자기가 측비면 또 어떠랴? 아마 이가기도 자신에게 3할은 양보해야 할 것이었다.
한참을 이야기하던 중 진 귀비는 무언가 생각난 듯 아래 좌석을 한 번 둘러보았다. 한안이 여전히 아주 똑바르게 서서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표정에 불쾌함도 없고 그저 그렇게 고요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한안의 콧대를 죽여 놓으려는 것이었는데 열세 살 어린 아가씨가 인내심 있게 흔들리지 않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런 대우를 받고도 소란을 피우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무심코 드러나는 억울한 빛조차 없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이 보기에 귀비가 일부러 한안에게 못되게 군 것처럼 되지 않은가. 진 귀비는 한안의 침착하고 태연자약한 모습이 눈에 거슬렸다. 그래서 손을 흔들었다.
“너는 자리로 돌아가거라.”
한안은 진 귀비에게 감사의 말을 한 뒤, 등선을 향해 작게 손을 흔들고는 살짝 웃어 보이며 등선의 옆으로 걸어가서 앉았다.
막 자리에 앉자마자 등선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고 작은 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말했다.
“어쩌다가 진 귀비에게 미움을 샀어? 너를 이렇게 못살게 굴다니.”
한안은 어깨를 으쓱하고 자신도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물론 분명히 알았다. 진 귀비가 이렇게 그녀를 대하는 이유는 아마 7황자 때문일 것이다. 지난번 부운석이 말한 적이 있었다. 자신이 만약 위왕과 장사양에게 적이 되면 바로 7황자에게 적이 되는 것이라고. 지금 자신은 몇 차례 위여풍의 일을 망쳤고 또 장사양의 관직이 강등되는 손해를 입혔다. 생각해 보면 7황자가 자신을 제거하고 싶어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7황자가 진 귀비와 태후의 손까지 빌릴 줄은 예상치 못했다. 한안은 조금 망설였다. 이렇게 보면 태후가 7황자와 한 패라는 건가?
그렇다면 상황은 좋지 않았다. 7황자가 태후의 지지를 얻으면 황상의 지지를 얻을 가능성도 아주 컸다. 만약 황상이 지지하여 7황자가 득세하게 되면 위여풍도 득세하게 된다. 지금 장사양과 위여풍은 자신을 뼛속까지 증오하니 아마 그날이 되면 자신도 좋은 결말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한안은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럼 태후는 어째서 7황자를 총애하는 걸까?
한안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연회가 시작되었다. 한안은 생각을 접고 등선과 웃으며 편안하게 이야기했다. 오늘 주씨 자매는 모두 오지 않았다. 대주씨는 무슨 이유인지 알 수가 없었고 주씨는 몸이 아직 깨끗이 낫지 않았기 때문에 궁중 연회에 참가하기가 불편했다. 그 외에도 주씨가 오지 않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지난번 장부에 자객이 들어온 일로 온 경성 안이 왁자지껄하게 떠들어댔던 것이다. 주씨 모녀가 관부의 조사를 교란시킨 일로 며칠 갇혀 있으면서 곤장 열 대의 중벌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장어산은 위여풍의 측비라 사람들이 감히 무슨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주씨는 장사양의 소첩일 뿐이니 고의로 시비를 걸어볼 마음이 생기는 것이 인지상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