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벽이 그녀를 응시하는 것을 보고 한안은 온화하게 웃었다.
“어머니가 만약 세상에 계셨다면 자네의 이런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주 많이 아프셨을 거야.”
아벽의 손이 떨렸다.
“아는가? 진상을 알고 있으면 많은 일을 대비할 수 있다는 것을.”
한안은 몸을 똑바로 펴고 높은 곳에서 군림하는 시선으로 아낙네를 바라보았다.
“자네의 자수는 아주 훌륭하네. 어머니께서 이런 자수를 좋아하셨기에 자네를 함께 데리고 계셨겠지.”
아벽은 실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칭찬에 멍하니 한안을 보았다. 이 어린 아가씨의 마음의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 맑고 투명한 눈빛은 그녀를 마치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만들었다. 그녀는……. 부인과 조금도 닮지 않았다. 부인은 완곡하면서도 결연했지만 다른 사람을 볼 때 온유했다. 그러나 눈앞의 어린 아가씨는 사람을 보는 눈빛이 마치 물건을 보는 것 같았고 그 눈빛에는 기만을 허용하지 않는 통찰력이 있었다.
한안은 문 입구까지 걸어가서 떠나려는 자세를 취하더니 머리를 돌려서 여전히 바닥 위에 꿇어 앉아 있는 아벽에게 말했다.
“숨기는 것이 바로 배반이라네, 아벽. 시간이 오래되어, 허다한 일들을 자네가 모두 명확히 기억할 수 없는 거겠지. 자네에게 기억을 돌이킬 시간을 주겠네. 며칠 지나서 내가 다시 올 거야. 그때 가서는 자네가 다른 말을 해줄 수 있기를 바라네.”
그녀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지만 말투는 뼛속을 파고들 듯이 날카로웠다.
“나는 자네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알아. 만약 자네가 솔직할 수 있다면 내가 보증하지. 자네는 영원히 이 상갓집 개같이 의지할 곳 없는 생활을 할 필요가 없을 게야.”
한안이 장부로 돌아와 막 문을 들어서니, 주씨 두 자매가 중앙의 대청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돌아온 것을 보고 대주씨가 웃으며 인사말을 했다.
“축하한다, 안아.”
한안은 담담하게 그녀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와 다름없는 움직임이건만 오늘은 이상하게 몹시 느렸다. 높이 쳐든 고개와 오만한 눈빛이 주씨가 보기에 몹시 거슬렸다.
“소저, 천천히 가십시오. 만약 다치시기라도 하면 왕야께서 노비들이 소저를 잘 보살피지 않았다고 책망하실 겁니다.”
급람이 서둘러 건너와 그녀를 부축하고는 입속으로 말을 멈추지 않았다.
“무슨 입을 그렇게 놀리는 게야. 소저께서는 미래의 왕비신데 네가 더 입을 놀릴 필요가 있니?”
주홍도 입을 열었다.
이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 주씨의 낯빛은 보기 흉해 죽을 지경이 되었다. 그때 장어산이 장사양에게 꼭 기대어 걸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한안은 바로 부친을 향해 살짝 웃었다.
“부친, 어산 언니.”
장사양은 한안을 보자마자 화가 솟구쳤다. 아침의 일로 그는 신하들 앞에서 체면이 깎이게 되었다. 축하할 일이긴 하지만 누구나 다 알다시피 그는 이 딸을 좋아하지 않았다. 만약 이 딸이 기어코 현청왕에게 시집을 간다면 현청왕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듯하니 나중에 딸을 대할 때 예를 행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한층 더 화가 났다.
장어산은 통탄할 정도로 한스러웠다. 위 세자 덕분에 자기가 마침내 활개를 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장한안은 자신을 원하는 사람도 없이 그저 질투심만 많은 여인네가 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는데 현청왕이 그녀를 왕비로 삼겠다고 했다고? 현청왕부가 대종에서 얼마나 존귀하고 웅대하며 아름다운지는 둘째 치고 현청왕만 놓고 보더라도 많은 규방 소녀들의 꿈속 정인이었다. 그러나 장한안은 재주도, 미모도 없고 심지어 총애받지도 못하는 여자인데 어떻게 이런 행운이 있을 수 있는 거지?
장어산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왕야와 넷째 동생의 일을 들었어. 여기에서 넷째 동생에게 축하인사를 미리 할게. 하지만 현청 왕비가 될 이상, 넷째 동생은 이렇게 공개적으로 얼굴을 내놓고 다니지 않는 게 좋아. 만약 왕야의 체면에 먹칠을 하게 되면 아마 바깥에는 장부의 잘못이라는 소문이 돌 거야.”
장사양은 순간 분노하여 말했다.
“여아가 되어 가지고 부중에 머물러 있지 않고, 어디를 그렇게 싸돌아다니는 게냐? 지체 높은 왕부에서 혼사가 들어왔다고 하여 법이고 하늘이고 다 없는 듯 무시할 수 있다고 여기지 말거라!”
이렇게 각박한 말이라니. 다른 사람이라면 누가 자기의 친딸을 이렇게 대할 수 있을까. 한안은 고개를 숙였다. 입가가 비웃음으로 휘어 올라갔다. 어쩌면 자기 몸 안에 그의 피가 흐르지 않기 때문일까?
한안이 대답했다.
“부친께서 모르시는 게 있습니다. 현청왕께서 혼담을 꺼낸 것은 장부의 입장에서도 체면이 서는 일입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한안은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로 내놓을 만한 머리 장식 하나도 없었습니다.”
수수하게 입는 한안과 사치스럽고 화려한 장어산과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 장사양의 얼굴빛이 거북해지는 것을 보고 한안은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나가서 약간의 옷과 머리 장신구를 몇 개 샀습니다. 나중에 현청왕께서 책망하시지 않도록 말이지요. 그런 일로 책을 잡히는 것이야말로 장부의 체면을 깎는 일이 될 테니까요.”
아직 시집가지 않은 왕비가 초라하게 입는다고 소문이 나면 현청왕이 분노할 것이고 그것은 정말로 장부 체면에 불리한 일이었다. 장사양은 그제야 가볍게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그렇다면 바로 가서 장신구를 좀 더 구하거라.”
장어산은 샘이 나는지 입을 열었다.
“넷째 동생은 구태여 그렇게 말할 필요 있어? 왕비가 되면 자연히 능라주단 같은 것을 끝없이 누릴 텐데. 왜 구태여 직접 더 사들여?”
한안도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네요. 그러고보니 이(李) 소저도 머지않아 위왕부에 시집갈 테니 세자도 대단히 기쁘겠네요. 아마 세자비가 시집온 후에는 온 마음으로 세자비를 대하느라 어산 언니를 돌볼 겨를이 없을 테니 어산 언니도 정성 들여 준비를 잘 해야겠어요. 주홍!”
그녀는 고개를 돌려 분부했다.
“내가 방금 전에 산 장신구를 전부 어산 언니에게 주렴. 어산 언니가 사용할 수 있게.”
급람은 마음속으로 몰래 웃었다. 어쩐지 소저께서 방금 전에 부로 돌아오는 길에 조잡하고 상스러운 싸구려 머리 장신구를 이것저것 사더라니. 당시 그녀는 소저의 안목이 갑자기 이처럼 좋지 않게 바뀌었나 의혹이 들었었다. 지금 보니 2소저가 트집을 잡을 것을 미리 짐작한 것 같았다.
장어산은 한안의 말에 화가 나 피를 토할 지경이었다. 한안의 말은 장어산은 측비가 되는 것이며 그 머리 위에는 세자비가 있으니 감히 대적하지 말라는 뜻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세자비라는 신분 그 자체가 자신보다 한 급 더 존귀한 것은 둘째 치고 우상 천금이라는 명분만 놓고 보더라도 일개 5품 관원의 서녀는 건드릴 수가 없었다. 울적하고 짜증이 나 견디기 어려웠다. 한안의 그 침착하고 느긋한 모습을 본 장어산은 이가 부서져라 악물고는 증오에 차서 말했다.
“그럼 고마워, 넷째 동생.”
한안은 웃음을 머금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주씨는 이 두 자매가 말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을 들으며 한안의 태도에 분노했다. 그러나 무슨 말을 더 할 수가 없었다. 한안의 신분이 고귀해져서 더 이상 마음대로 건드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주씨는 눈빛을 번뜩이고 웃으며 중재에 나섰다.
“자매 사이에 당연히 서로 도와야지. 나중에 한안이 현청왕부에 들어가고 어아가 위왕부에 들어가면 자주 왕래해야지.”
장어산은 경멸조로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한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마음 놓으세요. 제가 반드시 어산 언니를 잘 돌볼게요.”
주씨들과 일전을 마친 한안은 청추원에 돌아와 침상 위에 앉았다. 온몸이 욱신거리고 아팠다. 한안은 눈살을 찌푸리고 한 손으로 자기의 이마를 눌렀다.
급람이 차를 받쳐 들고 와 그녀에게 주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참지 못한 듯 물었다.
“소저, 오늘 그……. 아벽…….”
한안은 손의 동작을 잠시 멈칫하고는 물었다.
“왜?”
급람은 주홍을 한 번 보고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소저께저는 그녀를 믿지 않으세요?”
한안이 반문했다.
“너는 내가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급람은 조금 망설였다. 한안은 어서 말하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금랍은 지체 없이 말을 올렸다.
“노비 생각에 아벽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소저의 마지막 그 말씀은 그녀가 오늘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죠. 노비는 잘 모르겠습니다.”
한안은 웃으며 옆에서 말이 없는 주홍에게 말했다.
“주홍, 너도 발견한 거 없니?”
주홍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결국 한안을 보며 한 단어를 토해냈다.
“노야…….”
“맞아.”
한안은 칭찬하며 인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다.”
“소저…….”
급람은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는 눈으로 한안을 보았다.
“아벽은 모든 책임을 노야에게 미뤘다.”
한안이 말했다.
“하지만 그녀도 잊은 게지. 노야는 당시에 그저 보잘것없는 관리일 뿐이었다는 걸. 무슨 그리 큰 권리가 있어 한 무리의 사람들을 다 처분할 수 있었겠니. 설령 부중의 하인이라 해도 죽겠다고 서명한 게 아닌 한, 사람을 죽이든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람을 쫓아내든 모두 관부의 추적 조사를 받아야 하지.”
급람은 멍해졌다가 문득 깨달았다. 아벽은 모든 것을 다 노야가 했다고 하였다. 한안의 말을 듣고 나서야 그녀의 말에 조금 문제가 있다고 느껴졌다.
“그녀는 다른 사람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어. 이건 아주 이상하지. 동후왕의 일은 어쨌든 간에 한두 사람이 감출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설령 이 일이 은폐되었다 해도 아벽은 한 사람도 언급하지 않았어. 마치 어머니와 노야 사이의 일이기만 한 것처럼. 이건 너무 수상해.”
한안은 찻잔을 손에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녀의 가장 큰 허점은 바로 그녀 자신이야.”
이번에는 주홍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한안을 보며 물었다.
“무슨 뜻인가요?”
“그녀는 출중한 자수 솜씨를 가지고 있어.”
한안은 웃으며 말했다.
“바구니 안에서 그녀의 수품을 보았지. 비록 감추려 했지만, 여전히 자수 솜씨는 훌륭했어. 그런 솜씨를 가지고 대갓집에 가서 수낭(繡娘)이 되면 지금처럼 곤궁하게 살지는 않았을 거야.”
“소저의 뜻은…….”
급람은 마치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녀는 숨어 있는 거지. 자신을 감추고. 다른 사람이 그녀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한안은 고개를 숙이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래서 성북의 작은 촌락에서 일부러 솜씨를 졸렬하게 보이게 해서 바느질로 먹고사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거야.”
“기왕 그렇다면 경성을 떠나는 게 더 좋은 거 아닌가요?”
주홍이 한안을 보고 말했다.
한안은 희미하게 웃었다.
“맞아. 그것도 허점인 부분이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의 종적을 감추려는 사람이라면, 먼 곳으로 달아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아벽은 경성 안의 장부와 왕부에서 혀를 뽑히고 부에서 쫓겨났다면 상식에 따라 이 땅에서 멀리 떨어져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녀는 성 안에 머물렀고 머문 후에 자신을 숨겼다. 이것은 한 가지 가능성을 가리켰다. 바로 그녀는 근본적으로 떠날 방법이 없는 것이었다.
“어떤 경우라야 가능할까. 경성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한안은 일부러 두 여종에게 물었다. 한안은 그녀들을 민첩하고 하나를 들여다보면 전부를 볼 수 있는 총명과 지혜가 있는 여종으로 키우고 싶었다.
“그것은, 줄곧 그녀를 감시하고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죠!”
급람은 흥분하여 한안을 바라보았다. 한안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주홍이 의심스럽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여러 해 동안 그녀가 여전히 성과 이름을 감추고 있다는 건 그녀를 감시하는 그 사람을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다는 말이 되겠죠. 하지만 시간이 이미 이렇게 오래 지났는데……. 그게 말이 되나요?”
한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것이 바로 내가 염려하는 부분이야.”
급람과 주홍은 서로 시선을 한 번 마주쳤다. 한안은 천천히 말했다.
“이렇게 여러 해가 지났는데 아벽은 여전히 그녀를 감시하는 그 세력에 대해 이렇게 두려워하고 있어. 심지어 우리들에게도 솔직히 말하려 하지 않았어.”
그녀는 눈을 내리깔았다.
“아직도 그 세력이 무척이나 두려운 거지.”
한안의 말을 들은 두 여종은 깜짝 놀랐다.
배후에서 모든 것을 감시하는 세력이 무서울수록 그녀들이 지난 일을 조사하는 것은 어려워진다.
한안은 할 말이 있었지만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경성 안에서 여러 해 동안 밀정을 안배해 놓을 수 있고, 평범한 여종 하나가 성을 나가는 일조차 할 수 없게 할 수 있으며, 아무 기색도 없이 동후왕을 처리하고 심지어 이 일이 밝혀지지 않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자는 바로 황족이었다.
그것은 한안이 가장 보고 싶지 않은 답안이었다.
황족과 겨루는 것은 호랑이와 함께 호랑이 가죽을 벗기는 것에 대해 논의하는 것과 같았다. 근본적인 이해관계가 상충하므로 협상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아벽이 이렇게까지 두려워하니 그 세력은 대단히 흉악하고 악독하며 잔인할 것이다. 만약 그들에게 자신이 그 일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는 것이 발견되면 아마도…….
그런데 그 세력은 자신이 어쩌면 동후왕의 딸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았던 걸까, 몰랐던 걸까?
한안은 동후왕과 관련된 모든 것을 알고 싶어졌다. 불바다 속에서 사라져간 그 전설적인 왕부, 자신의 부친일 가능성이 있는, 그 특별한 남자.
“누님!”
문 밖에서 한 마디 외침이 들려왔다. 장한명이 매우 급히 달려 들어오고 있었다. 한안을 보고 앉아서 차를 마실 겨를도 없이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물었다.
“현청왕께서 누님을 왕비로 맞으려 한다고 들었습니다. 이 일이 정말입니까?”
한안은 동생을 끌어다 앉히고 말했다.
“정말이란다.”
장한명은 괴로워하며 말했다.
“제가 지금에서야 알았습니다. 실로 누님께 면목이 없습니다. 누님은 그 현청왕을 만난 적이 없으시죠? 그를…… 좋아하실 수 있겠어요?”
한안은 멍해졌다가 웃었다.
“좋아하고 말고를 말해 무엇하니? 황상께서 혼사를 하사하셨는데.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할 권리가 있겠어?”
장한명은 흥분하여 그녀의 손을 움켜쥐었다.
“만약 좋아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시집가서는 안 되죠.”
그는 한안을 보며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저는 오직 누님 한 분뿐이에요. 만약 누님께서 행복하지 못하다면…….”
한안은 마음속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를 위로했다.
“내가 왜 좋은 날을 보낼 수 없겠니. 현청왕이 나를 왕비로 맞이하는 것이니, 앞으로 비할 데 없이 존귀해질 거란다. 더 이상은 누구도 감히 우리들을 업신여길 수 없을 거야.”
한안은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
“그 사람도 아주 좋아. 젊은 나이에 큰 성취를 이루었고 용모가 수려하며 신분이 존귀하고 문무를 겸비했지.”
한안은 다른 사람에게 부운석을 칭찬하는 것은 처음이라 좀 어색했다. 하지만 말하면 말할수록 자신이 없어졌다. 이 사람의 조건은 정말 대단히 우수했다. 이렇게 우수한 사람이 자신의 부군이 되다니.
장한명은 한안이 말을 하다가 다른 생각에 빠진 것을 보고는 입술을 삐죽이며 서둘러 그녀를 불렀다.
“누님이 누군가를 이처럼 칭찬하시는 것은 처음이네요. 하지만 그래도 누님이 이렇게 말하시는 것을 들으니 저는 마음이 놓입니다.”
그가 어른스러운 척하는 말을 듣고 한안은 저도 모르게 우스웠다.
“내 얘기는 그만하고 네 얘기를 해보렴. 요 며칠 무관에서 무예 배우는 건 어때?”
며칠 동안 장한명은 순창무관에서 양기를 따라 무예를 배웠다. 한안은 양기가 장한명을 제자로 받아들일지 걱정했는데 다행히 양기는 장한명이 무도 수련의 좋은 싹이라 말하면서 기쁘게 제자로 받아들였다. 장한명은 매일 국자감을 마치고 순창무관에 가서 무공을 한 시진 배울 수 있었다. 장사양을 속여야 했기 때문에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배우는 시간이 짧은 터라 장한명은 매번 배움의 기회를 잡으면 열심히 초식을 기억하고 부중에 돌아와서 몰래 복습했다.
장한명은 갑자기 수심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
“사부께서 저를 지극히 엄격하게 대하십니다.”
장한명은 소매를 걷어 한안에게 몸의 멍을 보여주었다.
“매일 몸이 아파요.”
한안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갖은 고생을 견뎌내야만 비로소 큰 사람이 될 수 있단다. 너는 대장군이 되려던 게 아니냐. 이 정도 고초를 견딜 수 없다면 이후 일을 이룰 수 있겠어?”
장한명은 즉각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야 당연하죠. 대장부가 이 정도 아픔을 두려워할 수 있겠어요?”
이어서 한안을 보았다.
“듣자 하니 왕야께서 장군을 하신 적이 있으시다면서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반드시 그에게 몇 수 가르침을 청하겠습니다.”
그 말의 오만함에 한안은 참지 못하고 그를 한 번 노려봐 주었다. 부운석이 일개 꼬맹이에게 도전을 받게 된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모르겠다.
“맞다. 누님, 장위가 최근 저와 친한 척 굽니다. 게다가 종종 저와 함께 술을 마시러 가자고 말하곤 합니다.”
한안은 놀랐다. 한안은 장위와 장한명 사이의 일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청루의 일이 일어나리란 것은 알고 있었다. 장한명이 전생에 송사에 휘말려 터무니없이 감옥에 갇히는 화를 입고 결국 중병을 얻어, 낫지 못한 것은 모두 누군가 공들인 설계한 일이었다. 장위가 바로 이때 모든 것을 시작했던 것이다.
좋다. 이번 생에서는 명아를 해치려는 것들이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었다.
“너는 일단 그를 상대하지 말거라. 만약 그가 집요하게 너를 끌고 가려 하면 배운 무공으로 대담하게 그를 때려줘도 된다. 일이 생겨 부친께서 질책하시면 모든 것은 내가 책임지마.”
장한명은 진지하게 한안의 말을 귀담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부운석이 한안을 아내로 맞으려 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주씨 자매는 어느 정도 분수를 지키려 하는 게 보였다. 장어산도 이따금 한안을 우연히 만나면 비꼬는 말 몇 마디를 했을 뿐이었다. 미 이낭은 대량의 선물을 보내어 환심을 사려 했다.
한안도 지금 당장 그녀와 안면몰수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두 사람은 여전히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덕분에 며칠간 시정 사부에게 가는 것은 한층 더 빈번해졌다.
12장
날이 아직 밝지 않은 새벽에 한안은 주홍만을 데리고 뒷산에 올라가 시정에게 작별을 고하고 바로 또 서둘러 부로 왔다. 겨울이라 하늘빛은 어두웠고 장부는 고요하여 소리조차 없었다. 이따금 개가 몇 번 짖을 뿐 조용했다.
한안과 주홍은 후원 가운데의 개구멍을 기어 나왔다. 막 몸 위의 먼지를 털고 있는데 짙은 피비린내가 맡아졌다. 그 피비린내는 코끝에서 나는 것 같았다. 한안은 무의식적으로 주홍을 잡아당겼다. 그때 뒤에서 힘 있는 팔이 한안을 붙들었다. 그리고 얼음처럼 차가운 칼끝이 한안의 목에 닿았다.
주홍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멍해졌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 소리를 지르려다가 한안이 눈짓을 하는 것을 보고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경계 어린 눈빛으로 한안을 붙잡은 사람을 주시했다.
지금 주위에는 아무도 없고 여종들도 모두 깊이 잠들어 있었다. 자신들이 외출했다가 막 돌아오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 게다가 이 사람이 무슨 신분인지 모르니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자신들은 목숨을 잃게 될 것이었다.
한안은 바로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당신은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들어서신 것 같습니다. 소녀를 놓아주십시오. 소녀가 길을 안내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한안의 목에 댄 칼을 더 가까이 대었다. 목소리가 쉬어 있어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였다.
“허튼소리 그만해라!”
한안은 이 사람에게 가까워질수록 피비린내가 한층 더 진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를 붙든 몸도 조금 경직되어 있었다. 자세히 관찰하니 한안의 목에 대고 있는 칼을 든 손도 조금 떨리고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 눈치챈 한안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
“당신은 이미 부상을 입었으니 치료하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 몸에 좋지 않을 겁니다.”
괴한은 한안의 대담한 말에 한참을 침묵하다가 말했다.
“너는 나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구나.”
“나와 당신 사이에는 아무 원한도 없으니까 당신이 나를 죽일 리 없지요. 다만 당신의 행동은 무엇을 하려는 건지 이해가 안 되네요.”
한안은 웃었다.
그 사람은 숨을 헐떡였다.
“일단 나를 데리고 자리를 옮겨라.”
이 사람이 설마 추살 당하는 입장이라 줄곧 여기까지 도망친 건 아니겠지? 만약 이렇게 그를 구했다가 나중에 얼마나 더 큰 말썽에 휘말리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만약 그를 구하지 않으면……. 한안은 주홍을 보았다. 지금은 그를 구하고 싶지 않아도 구해야 했다.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쉰 한안은 조용히 말했다.
“나를 놓아줘요. 소리 지르지 않을게요. 일단 따라와요.”
그 사람은 잠깐 망설이다가 경고하듯 한안의 귓가에 대고 협박했다.
“잔꾀 부릴 생각 마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바로 너와 이 아이를 한 번에 죽여버릴 것이다.”
한안이 얌전하게 꼼짝도 안 하는 것을 본 남자는 그제야 손을 풀었다. 한안은 주홍을 끌어당기고 따라오라는 표시를 했다.
“소저…… 그를 어디로 데려가는 건가요?”
주홍이 걱정스레 물었다. 상대방은 상대하기 쉬운 유형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청추원에는 빈방이 없었다. 한안은 눈썹을 찌푸렸다.
“방법이 없어. 우선 그를 내 방으로 데리고 가자.”
그 사람은 한안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한안은 침실의 문을 잘 닫고 주홍이 불을 켰다. 그제야 한안을 붙들었던 그 사람이 어떤 모습인지 분명하게 보였다.
그 사람은 나이가 젊고 키가 큰 남자로 준수하고 건장하게 생겼다. 그는 붉은빛의 검은색 장포를 입고 대단히 오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야생 늑대 같은 푸른색 눈은 한안을 사냥감처럼 보고 있었다. 한안은 남자의 얼굴 윤곽이 깊고 이목구비가 중원 사람과 비교해서 선명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민족 남자 같았다. 게다가 그가 온몸에서 내뿜고 있는 기개는 보통 사람 같지가 않았다.
남자의 검은색 장포의 앞가슴 부분이 커다랗게 젖어 있었다. 그에게서 발산되어 나오는 짙은 피비린내는 저 젖은 부위에서 나는 듯했다.
이 사람은 부상을 당한 상태였음에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위험을 느끼게 했다. 궁지에 내몰린 고독한 이리라고 할까. 아무리 안 좋은 상황이라 해도 반격할 힘이 남아 있을 것이다.
한안이 남자를 가늠해 보고 있을 때, 상대방도 그녀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는 처음엔 한안을 보통의 여종이라 여겼다가 한안이 데려간 방에 들어가고 나서야 비로소 그녀가 부중의 소저라는 걸 알아차렸다. 어느 대갓집 소저가 야밤 삼경에 몰래 나갔다가 이른 새벽에서야 돌아오는가. 혹시 정인과 밀회하러 간 건 아닐까? 한안을 보는 그의 눈빛이 경박한 여자를 보는 듯했다.
방 안에 서 있는 어린 아가씨는 불과 열두세 살의 모습으로 보였다. 둥근 만두 모양으로 머리를 빗고 결이 거친 천으로 된 짧은 마고자를 입고 있었다. 얼굴은 깨끗하고 맑았지만 특별히 아름다움을 갖추었다고 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편안하고 온화함을 느끼게 했다. 어두운 곳에 있어서 한안의 모습을 명확하게 볼 수는 없었지만 침착했던 것을 생각하면 나이가 지긋할 것이라 여겼다. 허나 아직 급계도 안 한 어린 꼬맹이를 보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하여 순간 당혹스러웠다.
한안은 그가 멍해 있는 모습을 보고 주홍에게 일러 그를 바깥방으로 데려가게 한 뒤 옷을 갈아입고 바깥방으로 나갔다. 나가자마자 그 사람에게 약 한 무더기를 던졌다.
“나는 당신이 무슨 부상을 당했는지 몰라요. 지금 집 안의 약이 전부 여기 있으니 알아서 골라요.”
그는 한안이 자신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그녀의 침착함에 찬탄했다. 그러나 여전히 일부러 구겨진 얼굴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잔꾀를 부리면 목숨이 없을 줄 알아.”
한안은 그를 향해 웃으며 손짓을 했다.
“편할 대로 하세요.”
한안이 남자의 위협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것을 보고는 남자는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한안은 무슨 생각에 잠긴 듯 그를 보았다.
“당신은 중원 사람이 아닌 것 같네요?”
남자는 그녀를 한 번 흘끗 보았다.
“많은 것을 안다고 좋은 것은 아니지.”
한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당신의 목숨을 구했으니 적어도 당신 이름 정도는 알게 해줘야죠.”
“내 목숨을 구했다고?”
남자는 화내지 않고 도리어 웃었다.
“탁칠이라 불러라.”
당연히 가명일 것이었다. 그런 직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탁 공자는 언제 떠날 생각인가요?”
탁칠은 그녀의 말을 듣고 푸른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안전해지면.”
“누가 당신을 추살하려는 거죠?”
탁칠의 얼굴빛이 순간 보기 흉하게 변하더니 한안을 보는 눈빛에 경고를 담고 있었다.
“궁금한 게 너무 많구나.”
한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탁 공자가 떠난 후, 내가 무슨 말썽에 휘말릴 일은 없겠죠?”
그녀가 묻는 말은 구구절절이 다 핵심을 찔렀다. 탁칠은 표정이 복잡해져서 눈앞의 어린 아가씨를 한 번 보았다. 그녀와 상대하는 것은 성인과 상대하는 것 같았다. 고려하고 심사숙고해서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어린 아가씨는 아직 자신의 칼끝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최고의 검을 감추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정말 흥미롭군.
탁칠은 고양이가 사냥감을 바라보는 것처럼 입가를 고혹적으로 구부렸다.
“말썽이 클 수 있지…….”
“그렇다면.”
한안이 웃으며 말했다.
“내게 말썽을 가져다주는 사람이라면 지금까지 그랬듯 있는 힘을 다해 깨끗이 제거해야겠죠.”
“네가 어떻게 나를 깨끗이 제거하려고?”
탁칠은 흥미진진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안은 빙그레 웃었다. 그녀의 눈빛이 탁칠이 막 약을 바른 가슴 위를 향했다.
탁칠의 얼굴빛이 변했다.
“독을 썼느냐?”
“말씀해 보시죠?”
한안은 무해한 아이처럼 웃었다.
바로 그때, 바깥에서 한바탕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한안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주홍이 서둘러 달려 들어왔다.
“소저, 상황이 안 좋습니다. 바깥에 아주 많은 관차(官差)들이 왔어요. 사람을 찾고 있는 것 같은데요.”
정말 잘됐네. 한안은 탁칠을 노려보았다. 이 사람이 말썽을 불러들였구나. 관차를 건드리다니 이 사람은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일까?
그녀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어 탁칠을 내실로 밀어 넣고 “쉿!” 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눈빛이 순식간에 엄숙해졌다.
“죽고 싶지 않으면 소리 내지 말아요.”
남자는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이런 위협을 받아본 적은 없었다. 더구나 상대방은 아직 급계도 안 한 어린 여자아이였다. 남자의 늑대 같은 눈동자가 그윽하게 깊어졌다. 수려한 오관은 이 순간이 유달리 즐거운 듯 빙글거렸다.
좋은데? 이 꼬맹이는 뜻밖의 수확이군. 할 수만 있다면 함께 데리고 돌아가야겠는데.
뜰의 등불이 온통 밝혀지고 주씨 두 자매는 옷을 걸치고 뜰 가운데로 걸어왔다. 장어산도 깨어 함께 나왔다. 관병들이 장부를 겹겹이 둘러싸고 횃불을 들고서 비추는 것을 보고 무서워하며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장사양도 의혹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관병의 우두머리인 듯한 자가 장사양을 향해 예를 올렸다.
“폐를 끼쳤습니다, 장 대인. 저희는 자객을 수색하라는 명을 받들고 여기 왔습니다.”
“자객?”
장사양이 크게 놀랐다.
“어디서 온 자객?”
“오늘밤 황상이 계신 곳에 자객이 들었습니다. 저희는 계속 자객을 추적하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자객이 귀부로 들어가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아 이리 폐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미 이낭은 큰 배를 쑥 내민 채 놀라 펄쩍 뛰고는 무서워하며 장사양에게 기댔다.
“노야, 자객이 있다 하니 너무 놀랐습니다. 그럼 바로 관야들에게 수색하게 하시지요. 우리 부중에 숨어 있다면 위험한 거 아니겠어요.”
황상과 관계되었다니 장사양으로서도 감히 거절할 수 없었다. 게다가 자객이 자신의 부중에 있다는 것 자체가 무서워서 부랴부랴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이 많으시오.”
관병 우두머리가 이어서 말했다.
“그 자객이 동남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동남쪽?”
주씨가 놀라서 관병이 말을 마치기를 기다리지 않고 외쳤다.
“거기는 4소저가 머무는 곳이 아니에요?”
“그럼 우리가 서둘러 가서 좀 봐야겠습니다. 안아는 현청왕비가 되어야 하는 사람인데 만약 변고라도 있으면…….”
대주씨가 걱정스레 말했다. 말 속에 남들이 쉽게 알아차릴 수 없는 기쁨이 슬쩍 스쳐 지나갔다.
장어산도 눈치를 채고 서둘러 말했다.
“넷째 동생이 평소에 가장 유약했어요. 아버지, 우리 어서 청추원에 가요.”
미 이낭은 주씨 모녀들이 말하는 것을 보며 알 만하다는 웃음을 드러냈다. 그 자객이 만약 한안의 청추원에 없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만약 있다면……. 한안은 자객을 은닉했다는 죄명을 뒤집어써서 천고의 죄인이 될 것이었다. 만약 자객을 은닉하지 않았다 해도 자객에 붙들렸거나 혹은 자객과 함께 한 방에 같이 있었다는 소식이 새어나간다면 명성이 훼손될 터이니 아마 현청왕부의 대문을 넘기는 힘들어질 것이었다.
과연 주씨 자매의 계산이 확실히 빠르군.
미 이낭도 웃으며 말했다.
“소첩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노야, 청추원에 가서 보시지요.”
장사양은 옆에서 주먹을 움켜쥐고 말이 없는 장한명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이들 중 장한명만이 진심으로 한안의 상황을 걱정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일행은 기세 드높게 청추원에 도착했다. 닭 울음소리가 막 지나가고 하늘빛이 조금 희미하게 밝아지고 있었다. 그 환한 불빛은 청추원을 심상치 않게 또렷이 비추었다. 관병들은 신속하게 청추원을 에워쌌다. 막 일어난 늙은 유모가 보고는 놀라 펄쩍 뛰더니 서둘러 한안에게 달려갔다.
청추원은 고요하고 적막하여 이상한 모습은 전혀 없었다. 이전과 다를 바가 전혀 없었다. 급람이 옷을 챙겨 입고 내실에 들어갔고, 잠시 후 안에서 여자가 막 잠자리에서 일어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그 목소리는 가냘팠으며 나른했다. 마치 막 잠자리에서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몽롱한 목소리 같았다. 관병 우두머리가 큰 소리로 말했다.
“폐를 끼쳤습니다, 장 소저. 속하는 명을 받들어 자객을 수색하러 왔습니다. 장 소저께서 편의를 봐주시기를 바랍니다.”
안에서 한안의 의혹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객? 나는 자객을 전혀 보지 못했는데요?”
주씨가 웃으며 말했다.
“4소저, 관야도 소저가 위험할까 걱정하는 거예요. 관병에게 협조하는 것이 좋겠네요.”
한안의 목소리는 조금 허둥댔다.
“그럼 옷을 갈아입게 해 주세요…….”
방 안에서 바로 부스럭 부스럭 하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한안은 문을 열지 않았다.
“4소저?”
관병 우두머리는 한안이 늦도록 문을 열지 않으니 바로 의심이 일었다.
주씨는 속으로 기뻐하며 한안이 자객에게 붙들렸다고 미루어 단정했다. 물론 그 자객이 무섭기는 했지만 그것보다는 한안이 위험한 게 더 기뻤다. 여아가 규방에서 자객에게 붙들렸으니 이 소식이 새어나가면 현청왕도 계속해서 한안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때 가서도 한안이 지금처럼 제멋대로 거들먹거릴지 두고 볼 심산이었다.
대주씨의 눈이 환해졌다. 그녀는 주씨와 시선을 한 번 마주치고는 안을 향해 외쳤다.
“안아, 안아? 어째서 소리가 없니? 무슨 일이 있는 거니?”
장어산이 속삭이는 듯한 소리로 초조하게 외쳤다.
“넷째 동생, 놀라게 하지 마. 모두 여기 있어.”
장사양은 더 긴장했다. 자기 딸이 걱정스럽다기보다는 자객이 자기 부중 안에 있다는 사실이 공포스러웠다. 그는 바로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조금 있다가 부상을 입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장한명도 초조했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그저 안쪽 옷 허리 가운데의 연검을 더듬으며 결심을 굳혔다. 만약 한안이 정말 붙들렸다면 목숨을 거는 한이 있더라도 자객의 수중에서 구해내야겠다고.
바깥에서 사람들이 이렇게 외쳐대는데도 안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관병들은 기다리다 지쳐 참을성을 잃고 있었다. 주씨가 눈치껏 상황을 보고는 바로 말했다.
“관야분들, 4소저가 남에게 붙들렸을까 봐 걱정입니다. 그냥 지금 바로 들어가지요.”
관병들은 늦도록 반응이 없는 것에 대해 이미 의심을 품고 있었다. 거기에 주씨까지 부추기니 두말없이 바로 문을 부수고 들어가려 했다.
“멈추세요!”
장한명이 관병들의 앞을 막아섰다.
“내 누님이 지금 아직 규중에 있습니다. 당신들이 이렇게 무모하게 난입해 들어가서 누님의 명성이 훼손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장한명은 화가 치밀어 주씨 두 자매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녀들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한안이 지금 자객에게 붙들려 있거나 옷이 단정치 않으면…… 이렇게 많은 관병 남자들에게 보였다가는 수습할 방법이 없었다.
대주씨가 손을 흔들었다.
“소소야, 그렇게 말하지 말거라. 관야도 안아를 위해 그러는 거야. 만약 안아가 지금 괴한에게 잡혀 있다면 이렇게 어영부영 있다가는 안아가 틀림없이 위험해져. 게다가.”
그녀는 얼굴 가득 온유하고 자애로운 표정으로 장한명을 보았다.
“안아는 이미 현청왕부의 왕비인데 누가 감히 그녀의 명성을 나쁘게 할 수 있겠니?”
대주씨의 목소리가 커서 그 자리의 관병들도 모두 대주씨의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오랜 세월 세력을 믿고 남을 괴롭히는 데 이력이 난 이들이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눈빛들이 저절로 음란하게 바뀌었다. 만약 그 여자의 옷이 조금이라도 허술하다면 현청왕비의 미색을 볼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흔히 볼 수 없는 눈요깃감이었다. 관병들은 당장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한 발로 대문을 걷어차 열었다. 장한명은 아무도 제지하지 못한 채 대문이 걷어차여 열리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몇 명의 관병이 문 입구를 막고 관병장이 시위 두 명을 거느리고 앞장서서 걸어 들어갔다.
대주씨는 온통 걱정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서 “안아!”를 소리 내어 부르며 따라 들어갔다. 장한명은 마음속으로 한안을 걱정하며 망설임 없이 따라갔다. 장어산과 주씨는 조금 무서웠지만 한안이 남에게 욕보이는 장면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나름 기뻐하며 따라 들어갔다. 장사양과 미 이낭, 만 이낭 모녀는 들어가지 않고 문 바깥에 서 있었다. 장사양은 위험을 무릅쓸 만큼 간이 크지 않았고, 미 이낭은 팔짱 끼고 구경하는 심정이었다.
만 이낭은 손 위의 염주를 헤아리며 아무 말도 없었다. 장금은 잠깐 걱정하는 표정이었지만 고개를 숙여 표정을 지웠다.
내실에는 옅은 피비린내가 자욱했다. 향료를 써서 냄새를 가린 것 같지만 여전히 피비린내를 맡을 수 있었다.
주씨는 피비린내를 맡으며 한안과 자객 사이에 어떻게든 사건이 있다고 믿었다. 주씨는 날카롭게 소리쳤다.
“4소저, 괜찮아요?”
그러나 날이 아직 밝지 않았고 등도 켜지 않아 방 안은 온통 칠흑같이 어두운 모습이었다. 아무것도 명확하게 보이지 않았다. 장어산은 서둘러 여종에게 등을 켜게 시켰다. 밝은 빛이 나타나는 순간, 방 안의 모든 것이 사람들의 눈앞에 펼쳐졌다.
얼음처럼 싸늘한 바닥 위에 한안이 하얀색 짧은 저고리를 입고 겉에는 월백색 홑옷을 걸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종이처럼 창백한 얼굴로 침상 옆에 주저앉아 있었는데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있었다.
“어머나!”
장어산이 놀라 외마디 소리를 쳤다.
“넷째 동생,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한안은 장어산의 목소리를 듣고 비로소 정신을 차린 듯했다. 한안은 기운 없이 장어산을 한 번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급람이 서둘러 한안을 부축하여 침상에 앉게 했다.
관병은 방 안을 한 차례 수색했지만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주씨는 달갑지 않지만 걱정스러운 듯 한안을 보며 말했다.
“4소저, 방 안에 다른 사람이 들어온 적이 있나요?”
장한안은 주씨를 한 번 노려보았다. 한안이 방 안에 다른 사람을 숨겼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이 얘기가 밖으로 퍼지면 얼마나 많은 얘기가 돌지 뻔했다.
한안은 고개를 저었다.
대주씨는 침상 다리 쪽의 혈흔을 가리키며 큰 소리로 말했다.
“여기 어떻게 피가 있지?”
한안의 이상한 행동에 의심을 품으면서도 자객의 종적을 발견하지 못해 낙담하고 있던 관병들은 대주씨의 말에 즉각 몰려들었다. 침상 다리 밑에는 과연 흘린 지 얼마 안 된 혈흔이 남아 있었다. 심지어 마르지도 않은 상태였다. 한안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장 4소저께서는 해명을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한안은 다시 기운이 없는 듯한 모습으로 손을 내저으며 더 이상 말하려 하지 않았다.
장어산은 무언가 깨달은 것처럼 말했다.
“설마 넷째 동생이 방금 전 그 사람과 격렬하게 싸웠는데 지금 그 사람이 달아났……?”
한 여자와 자객이 야밤에 격렬하게 싸웠다는 것은 어떻게 돌려 말해도 사람들의 끝없는 상상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장한명은 화를 누를 수 없었다.
“입 다물어요!”
그는 한안의 곁으로 걸어가서 위로하고 싶었으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정말로 장어산의 말대로일까 봐 두려웠다. 그렇게 되면 더욱 한안을 괴롭히는 것이 아닐까?
서로 양보 없이 대치하고 있을 때 주홍이 약 한 그릇을 받쳐 들고 매우 급히 들어왔다.
“간신히 다 달였습니다.”
“이게 무슨 약이냐?”
장한명은 지금까지 한안이 약을 먹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에 의혹이 일어 물었다.
주홍이 대답했다.
“소야께 답합니다. 소저께서 평소에 몸이 허약하셔서 의원이 기를 보하고 피를 맑게 하는 처방을 내렸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신 후 바로 드시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금세 어지러워하십니다. 오늘은 관야들이 급히 오는 바람에 제가 미처 약을 달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소저께서는 병증이 일어나셨는지 전신이 무력해지고 대답할 힘조차 없어 바닥에 주저앉으시기까지 했지요.”
이 말은 한안이 무엇 때문에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지를 또 늦도록 문을 열려 하지 않았는지를 분명하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오늘 아침 한안은 약을 먹지 못했기 때문에 쓰러졌고, 그래서 주씨의 질문에 대답할 힘도 없었다는 의미였다.
주씨는 여전히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한안을 보며 물었다.
“그럼 여기의 혈흔은 또 어디서 온 거죠? 아무 이유 없이 혈흔이 나타날 리 없잖아요?”
주씨의 기세등등한 말에 관병들도 의심스러워하는 눈빛을 보이는 가운데 한안은 급람이 먹여주는 약을 다 마셨다. 한안의 얼굴빛이 얼마간 불그스름하게 윤기가 돌았다. 한안은 비로소 힘이 나는 듯 대답했다.
“관야에게 정말 미안합니다. 방금 전에 일어나서 문을 열려고 침상을 내려오는데 현기증이 나서 의식을 잃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나중에 이낭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도 힘이 없어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어요.”
그녀는 그 혈흔을 보고 웃었다. 계면쩍은 듯했다.
“며칠 전 여종들이 밖에서 화미조(畫眉鳥) 한 마리를 잡아 왔어요. 그 화미조가 영리하고 사랑스러워 한안이 몹시 마음에 들어했죠.”
장어산이 황당해하며 말을 끊었다.
“넷째 동생 그런 말은 뭐하러 하는 거야? 설마 화제를 돌리려는 건 아니겠지? 지금 우리들이 의혹을 품는 건 어째서 혈흔이 있냐는 거야.”
한안은 장어산을 보았다. 장어산의 표정은 득의만만했다. 한안이 도저히 도망갈 길이 없다고 확신하는 모습이었다.
“그게 바로 내가 말하려는 거예요.”
그녀는 관병장을 보았다.
“한안이 노는 데 열중해서 그만 조심치 못하고 화미조를 놓쳤어요. 그 새가 방 안에서 이리저리 날기에 한안이 뒤쫓아 가다가 부주의하게 넘어져서 손을 다쳤어요. 그때 흘린 피예요.”
대주씨가 앞으로 걸어왔다.
“하지만 이 혈흔은 방금 흘린 것 같은데? 안아는 며칠 전 부상을 입었다고 했어. 어째서 혈흔이 아직 마르지 않았지?”
관병장도 주씨 두 자매의 말 의미를 알아들었다. 관병장이 한안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한안은 변함없이 가뿐하게 웃으며 말했다.
“맞아요. 그 상처는 확실히 좋아졌어요. 하지만 오늘 일어나며 머리가 어지러워 넘어졌죠. 그러면서 그때의 상처가 다시 터졌어요.”
관병이 말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장어산이 바로 입을 열었다.
“넷째 동생, 우리들에게 그 상처를 보여줄 수 있어?”
한안은 웃음을 머금고 입을 다물었다.
장한명은 화가 나서 장어산에게 소리쳤다.
“무슨 근거로 보여 달라 요구하는 겁니까!”
한안의 말을 못 믿고 한안에게 증거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다니. 이 지경까지 사람을 몰아붙이는 장어산이 너무나 혐오스러워 장한명은 그녀를 노려보았다.
대주씨가 웃으며 말했다.
“안아는 긴장할 필요 없어. 어아가 너를 의심해서 하는 말이 아니야. 하지만 자객 문제가 있으니 보통 일이 아니지. 소홀히 해서는 안 되거든. 게다가.”
대주씨는 말하면서 슬쩍 한안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한안의 표정은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만약 정말 상처가 있다면 노야께 사람을 시켜 의원을 데려오게 해야지. 진찰을 받아야 더 좋아지지 않겠니?”
관병장도 결국 입을 열었다.
“장 낭자께서 상처를 보여주시기를 청합니다.”
한안은 아무런 대답을 안 하고 그저 대주씨를 향해 희미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모골이 송연해질 때쯤, 비로소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이낭의 말이 이상하네요. ‘만약 상처가 있다면’이 아니라, 정말로 상처를 입었어요. 다만 한안이 상처를 입었을 때, 부친과 이낭이 알지 못했을 뿐이죠.”
그녀의 말투는 비웃음을 띠고 있었다.
“어쩌면 자객에게 감사해야겠네요.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도 한안의 상처에 신경을 안 쓰셨을 테니까요. 의원을 청하지도 못하고 그저 저절로 아물 때까지 놔둬야 했을 테니까요.”
주씨 자매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작태를 비꼬는 말이었다. 동시에 한안이 장부에서의 지위가 비천하다는 것을 언급하는 것이기도 했다. 상처를 입어도 관심 가져주는 사람이 없고 자객이 왔을 때나 되어서야 비로소 상처를 내보이기를 강요당하고 있는 꼴이라니.
“넷째 동생이 지금 무슨 말을 하든 다 괜찮아.”
장어산의 웃는 얼굴은 흉악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반드시 우리에게 상처를 보여줘야 해.”
“상처? 상처를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되는 건가요?”
한안이 웃으며 말했다.
“4소저, 이것은 장부가 잘되도록 하기 위해서인 거예요.”
주씨는 얼굴은 웃고 있었으나 거절은 용납할 수 없다는 악독함이 풍기고 있었다.
주씨들은 한안에게 상처가 없는 것이 확실하며 핑계를 대 무언가 숨기기 위함이라고 확신했다. 한안의 몸에 상처가 없기만 하면 방금 전의 말이 전부 거짓말인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 혈흔의 유래를 해명할 방법이 없다면 자객을 은닉한 게 되니 이번에는 황제도 그녀를 구할 수 없을 것이었다.
다시 없을 귀한 기회였다. 주씨는 전신에 억누를 수 없는 흥분을 느꼈다. 대주씨도 빙그레 웃으며 앞으로 다가갔다.
“4소저, 관야에게 너의 상처를 보여주렴.”
대주씨의 입가에는 모든 것을 장악했다는 자신감이 넘치는 미소가 실려 있었다.
한안은 차가운 눈으로 음흉한 속내를 품은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그녀들은 전부 자신을 사지로 내몰고 싶어 했다. 전생에서는 그녀들의 적수가 되지 못해 그녀들에게 독살당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이번 생은 달랐다. 역사가 마치 재공연 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들의 수단은 전생에 비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그 추악한 모습들을 한안은 가슴 깊이 새겼다. 한안은 언젠가 그녀들이 피로써 피를 씻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만약 한안이 안 하겠다고 말하면 어떻게 되나요?”
앞의 약그릇을 바라보는 한안의 표정은 불투명했다.
관병장은 한안과 주씨 자매 사이의 불화를 눈치채고는 조금은 즐거운 듯 구경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 자객 일은 해명만 되면 되니 그에게는 해 될 게 없었다.
“4소저.”
주씨의 목소리는 음험하고 악독한 독사 같았다.
“안 하겠다고 말해서는 안 돼요.”
“그렇다면 좋아요.”
한안은 조금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소매를 걷어 올렸다.
“자, 보세요!”
소매를 걷어 올린 팔에는 붕대가 둘둘 감겨 있었는데, 그 붕대는 가운데에서 바깥 방향으로 점점이 온통 검붉은 혈흔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주씨와 대주씨는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이 정도까지 준비가 되어 있을 줄은 짐작도 못 했다. 장어산은 웃으며 말했다.
“넷째 동생, 붕대를 풀어 보는 게 어때?”
“사람을 너무 괴롭히는군요.”
장한명은 이가 갈렸다. 한안이 부상을 입은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마음이 아프고 고통스러웠다. 주씨 모녀의 행동은 너무나 가증스러웠다. 자신들의 의심을 확인하기 위하여 한안에게 상처를 풀어 보이라 요구하다니!
주씨는 한안을 보았다. 한안의 표정에는 빈틈 하나 없어 보였다. 자신 있어 보이는 표정에 주씨는 조금 망연해졌다. 대주씨가 말을 거들었다.
“안아, 어쨌든 연고를 바꾸어야 하니 붕대를 풀어 보는 게 좋겠다.”
대주씨는 속으로 단정을 내렸다. 한안이 팔을 가리고 있는 이유는 그게 무엇이든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라고. 장어산의 말이 직설적이긴 하나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그녀는 한안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직감했다. 그녀는 분명 그 자객을 봤을 것이다. 어렵사리 한안을 쓰러뜨릴 기회를 얻었는데 지금 이 기회를 이용하지 못하면 나중에는 더욱 어려울 게 뻔했다. 한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 적수는 지나치게 무시무시했다. 지금 제거하지 않으면 나중에 반드시 큰 우환이 될 것이었다.
주씨도 바로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4소저. 설마…… 우리가 봐서는 안 될 게 있는 건가요?”
한안도 빙그레 웃었다.
“여러분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그저 여러분들이 보고 감당할 수 있을까 싶어서요.”
“너 무슨 뜻이야?”
장어산이 의심스레 물었다. 한안의 말투에 뒤늦게나마 두려움이 느껴졌다. 그러나 달리 숨겨둔 수는 없으리라 미루어 단정했다.
한안은 또 웃었다.
“아무 뜻도 없어요. 다만 보신 후에 후회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후회해도 소용없으니까요!”
주씨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4소저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네요. 하지만 상처는 반드시 봐야 합니다. 우리들은 진심으로 4소저를 걱정해 관심을 기울이는 거예요. 만약 흉터라도 생기면…….”
한안은 입꼬리를 휘며 말없이 한 손으로 주르륵 신속하게 붕대를 풀었다. 눈처럼 하얀 붕대가 핏물을 머금은 채 상처에서 억지로 뜯겨 나왔다. 장한명은 이를 악물었다. 한안은 눈썹도 찌푸리지 않고 한 손을 휘둘러 붕대를 던져 버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웃는 듯 마는 듯 주씨를 보았다.
“이낭, 만족하나요?”
그 붕대가 뜯긴 부분은 온통 피범벅이었다. 한안은 급람에게 지시했다.
“가서 데운 술 한 주전자를 가져와라.”
관병장은 평소에도 처참한 모습들을 무수히 보았다. 하지만 한안처럼 어린 여아가 자신의 상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을 보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부귀한 집안의 여아는 유약하기 마련이니까. 단지 넘어져서 피부가 조금 벗겨지기만 해도 한밤중까지 울 것이었다. 그러나 이 어린 아가씨는 직접 붕대를 상처에서 뜯어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오히려 스스로를 모질게 다루고 있었으니 간담이 서늘하기까지 했다.
급람은 이내 잘 끓인 술을 가져왔다. 한안은 술 주전자를 받아서 눈도 깜짝하지 않고 상처에 부었다. 한안은 사무치는 통증에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고 웃었다.
“이제, 관야, 주 이낭, 주 부인, 어산 언니, 똑똑히 보았나요?”
그녀는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그들의 이름을 소리 내어 말했다. 이름을 부른다기보다는 그들의 이름을 마음에 새기려는 듯했다. 나중에 보복하기라도 할 것처럼. 그들은 그녀의 말에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안의 상처에 뜨거운 술이 뿌려지자 혈흔이 벗겨지면서 손가락 길이 정도의 상처가 나타났다. 날카로운 도구에 베인 상처 같았는데, 술 때문에 피부와 살이 뒤집혀 상처는 좀 더 악화된 상태였다.
한안은 웃으며 사람들을 보았다. 자신의 상처에서 또다시 피가 흘러내리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러분, 한안이 해명하고 답해야 할 또 다른 의혹이 남아 있나요?”
관병장이 멋쩍게 웃었다.
“오해군요. 오해. 이제 보니 이곳에는 자객이 없었군요. 소저께서는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관병장은 서둘러 말을 마치고 바로 떠나려 했다. 한안이 가볍게 지나가듯 “멈춰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발걸음이 굳어져 천천히 몸을 돌렸다.
한안은 자신의 상처를 한참 동안 살펴보고 고개를 들어 그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만약 내가 양해하지 않는다면요?”
관병장은 순간 멍해지며 심장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 어린 소저는 다루기 쉬운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은 구경에만 정신이 팔려있어서 아무 일도 없으면 이 어린 아가씨가 자신을 편히 내버려 둘 리 없다는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자신이 관병장이니 열두세 살 어린 아가씨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어떻게 해도 이치에 맞지 않지만, 그러나 그는 알았다. 이 어린 아가씨는 분명히 자신을 몹시 난처하게 할 방법이 아흔아홉 가지도 넘게 있을 터였다. 자신은 사람들 속에서 여러 해를 힘들게 굴러 사람 보는 안목은 정확했다.
“그건…….”
그는 난감했다.
주씨는 자신이 보고 싶던 장면을 보지 못하자 신경이 날카로워져 큰 소리로 말했다.
“4소저는 어떻게 관야에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어요? 관야도 황상의 명을 받드는 관직인데 설마 4소저가 시비를 가리려는 건가요?”
한안이 차갑게 웃었다.
“나야 당연히 시비 같은 걸 말할 처지가 아니지요. 하지만 현청왕비라면요?”
주씨는 즉각 입을 다물었고 대주씨는 얼굴빛이 보기 흉하게 변했다.
한안의 말투는 뜻밖에 매서웠다.
“설마 관야는 자객을 수색한다는 명목으로 현청왕비가 규방에서 나오도록 압박하고 함부로 수색해도 되는 건가요? 설마 관야가 원하면 기어코 현청왕비가 상처를 드러내게 해야 되는 건가요?”
분명 관병들에게 말하는 것이지만 그 화살은 주씨들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걸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알았다. 장어산은 화가 나서 얼굴은 새하얘졌고 손에는 하도 힘을 줘서 쥐고 있던 손수건이 분쇄될 지경이었다.
한안의 목소리는 맑고 투명했지만 동시에 칼날 같은 냉기가 어려 있었다.
“나는 아직 출가하지 않았어요. 규방 여자가 자기 몸을 외인 앞에서 드러내는 것은 큰 금기죠. 이낭과 주 부인은 모두 시집간 사람이니 이 도리조차 모르지는 않을 거예요.”
그녀는 관병장을 한 번 곁눈질했다.
“나는 왕야의 미혼 처로서 이런 모욕을 당했으니 당신들이 추측해 보세요. 왕야께서 어떻게 하실까요?”
어떻게 하실 거냐고? 당연히 왕비의 몸을 본 자를 죽이시겠지! 관병장은 한안의 물음을 듣자마자 얼굴이 온통 하얘졌다. 두 다리에 힘이 풀려 바로 한안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왕비께서 용서하여 주십시오. 소인이 견식이 부족하여 윗전을 몰라뵀습니다. 왕비께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주씨와 장어산은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이 딱 벌어졌다. 평소 깔보던 한안을 관병장이 이렇듯 두려워하는 것을 보니 그제야 뒤늦은 두려움이 일기 시작했다. 조금 불안하게 한안을 한 번 보았다.
한안은 담담하게 말했다.
“당신에게 무슨 죄가 있겠어요? 그저 일을 공정하게 처리한 것뿐이죠. 마음 놓으세요. 오늘 발생한 모든 것은 왕야께 사실대로 고할 거예요. 왕야께서는 꼼꼼하시어 세세한 것도 놓치지 않으시니 당연히 착한 사람을 억울하게 하시지는 않을 테지요.”
관병장은 한안의 말을 듣자마자 놀라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왕야께 고한다면 어찌 살길이 있으랴.
“관야는 한안에게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어요. 오늘의 일은 오해였는걸요. 한안은 관야를 탓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오래 시간을 지체했으니 아마 그 자객은 달아났겠죠.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래도 한마디 하고 싶네요. 고의로 공무를 지체하게 한 사람은 그냥 놔두면 안 돼요. 어쩌면 자객이 달아날 시간을 얻을 수 있도록 도우려 했던 건지도 몰라요.”
관병장은 한안의 말 속에 담긴 뜻을 바로 이해했다. 조금 전에 한안과 주씨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으로 보아 주씨는 분명 한안을 말썽에 휘말리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한안이 현청왕비라고 자신을 일컫는 순간 그는 두려워 간이 떨어질 뻔했다. 그는 곧장 자신의 우둔한 머리를 욕했다. 현청왕비를 건드리다니. 자연스럽게 주씨에 대해 원망이 일었다. 주씨가 아니었다면 방 안에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바로 나갔을 것이다. 구태여 여기에 남아서 이런 말썽을 야기할 필요가 있었을까. 지금 한안을 보니 자신을 용서해줄 마음이 있는 듯했다. 관병장은 이 기회를 이용해 궁지를 벗어나자 마음먹고 서둘러 높은 소리로 말했다.
“이 사람들이 공무 처리를 교란시켰다. 마땅히 잡아가 심문해야 하리라!”
주씨는 곧바로 당황했다.
“자객과 우리들이 무슨 관계입니까? 우리들도 결백한 사람…….”
관병장은 이미 그녀에게 화가 나 있었고 더구나 한안 앞에서 생색을 내고 싶었기에 차가운 소리로 말했다.
“몇 사람이 계속해서 우리를 잘못 이끌었습니다. 4소저께서는 확실히 결백하신데도 시간이 적지 않게 지체되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당신들에게 가장 혐의가 있습니다. 여봐라, 이 사람들을 포박하여 데리고 돌아가자!”
“주 부인은 필요 없겠죠. 그녀는 우리 부중 사람이 아니니 이 일과 무관해요.”
한안이 말했다.
대주씨가 관부에 끌려가면 태사부에서 곧 알게 될 것이다. 장 태사의 명령에 감히 복종하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사람이 풀려나고 나면 바로 흐지부지될 것이니 지금은 그녀를 한 번 봐주는 것이 낫다고 한안은 판단했다. 우선은 주씨 모녀만 먼저 따끔하게 손 봐 주자. 오늘 그녀들이 감히 자신을 압박했으니, 온전히 돌아갈 생각을 말아야겠지. 내 상처는 어쨌든 수확이 있어야 되니까.
관병장이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주 부인을 제외하고 모두 데리고 돌아가자!”
대주씨는 고개를 돌려 한안을 한 번 보았다. 한안은 그녀에게 옅은 웃음을 보였다. 눈빛에 가득한 도발이 대주씨를 향해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덤벼 봐.’
주씨와 장어산은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우리와 관계없는 일입니다. 우리를 잡아가선 안 돼요. 모함입니다. 4소저가 악독한 마음으로…….”
줄곧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장사양은 그 광경을 보고 얼빠진 눈이 됐다. 잠깐 사이에 어떻게 관병들이 주씨 모녀를 잡고 가는 건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주씨는 장사양을 보자 구세주를 만난 듯 그의 소매를 잡고 늘어졌다.
“노야, 저를 구해주세요. 4소저가 우리를 잡아가게 했습니다!”
“이낭의 말은 틀렸어요.”
장사양이 뭐라 말할 틈도 없이 한안이 집 안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팔뚝 위에 선혈이 낭자했다.
“한안에게는 그런 큰 능력이 없습니다. 관차들도 그저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는 것뿐이죠. 이낭, 이 일은 매우 중대해요. 장부가 잘되도록 하기 위해서예요. 그렇죠?”
한안은 주씨의 말을 고스란히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주씨의 얼굴빛이 파래지는 것을 보며 한안은 옅게 웃었다.
미 이낭이 주씨 곁으로 걸어와 웃으며 말했다.
“이런, 4소저께 일이 생긴 거라 여겼는데 뜻밖에 주 이낭 때문일 줄은 예상치도 못했네요.”
미 이낭은 말을 마치고 애무하듯이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아이가 놀라지 않았으면 좋겠네.”
주씨가 표독스럽게 미 이낭의 배를 보았다. 미 이낭은 그녀의 무시무시한 눈빛에 한 걸음 물러났다. 장사양은 불쾌하게 주씨를 한 번 보고는 화를 누르며 관병장에게 말했다.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관병장이 차갑게 대답했다.
“주 부인에게 직접 물으십시오. 이만 물러갑니다.”
관병들은 주씨 모녀의 울부짖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강제로 그녀들을 데리고 갔다.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장사양이 대주씨를 보았다.
한안은 나른하게 허리를 폈다.
“부친, 안아 몸의 부상이 아직 좋지 않습니다. 먼저 방에 들어가 상처를 싸매려 하니 주 부인과 잘 말씀 나누십시오.”
장사양은 그제야 한안 팔 위의 상처를 알아차렸다. 그는 불편하게 가벼운 기침 소리를 한 번 내고 고개를 돌렸다.
“다 처소로 돌아가자.”
장한명은 걱정스레 한안을 보았다. 그녀가 위로의 웃음을 드러내 보이자 그제야 마음을 놓고 자리를 떠날 수 있었다.
청추원에 한 사람도 없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안은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갔다. 내실로 막 들어서자 바로 그 남자가 탁자 앞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자신을 보는 눈빛이 의미심장했다.
“꼬마, 수완이 멋지구나.”
한안이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과연 말썽이군요!
“꼬마 입이 제법 독하네.”
탁칠이 말했다. 누군가 그를 싫어하는 것은 평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느낌은 정말 별로였다.
한안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당신은 내게 목숨 하나, 상처 하나, 그리고 약 한 병을 빚졌어요.”
탁칠의 시선이 그녀의 피가 낭자한 팔뚝 위로 떨어졌다. 아까 한안이 머리 위의 비녀를 뽑아 거침없이 팔을 베어 상처를 내는 것을 보고는 놀라서 얼이 빠졌었다. 정작 한안 자신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재빨리 붕대를 찾아 감던 것이 떠올랐다. 그렇게 해서 방 안에 남아 있던 피비린내를 해명할 수 있었다.
“네가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어. 스스로에게 너무 잔인했어.”
한안은 전혀 개의치 않고 웃었다.
“당신이 없었다 해도 오늘 그녀들은 얌전히 손을 떼고 넘어가지 않았을 거예요. 얼핏 보면 내가 손해를 입었다고 볼 수 있죠. 이런 상처를 입었으니 말이에요. 하지만 그녀들도 앞으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말아야 할 거예요. 나를 모해하려 하면 본인들의 껍질이 먼저 벗겨질 테니까요.”
탁칠의 입꼬리가 사악하게 휘어졌다.
“너 정말 재미있다. 더더욱 떠나기가 아쉬운데?”
“내가 당신을 구했으니, 당신도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해요.”
“무슨 대가?”
탁칠은 일부러 그녀를 놀렸다.
“몸과 마음이라도 바칠까?”
한안은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그딴 건 필요 없고, 그저 당신이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만 않으면 돼요.”
이 사람은 과도한 말썽거리에다가 신분도 평범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그와 관계를 유지하면, 근심거리만 늘 게 분명했다.
탁칠은 조용히 그녀를 응시했다.
“그 조건만 아니면 다른 것은 내가 전부 승낙할 텐데?”
한안은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큰 소리로 웃으며 한안에게 말했다.
“나는 지금까지 남에게 빚지고 살아본 적이 없다. 만약 나중에 기회가 되면 반드시 네게 보답하도록 하지.”
남자는 말을 마치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오늘 나 때문에 네가 상처 입었네. 보아하니 흉터로 남을 것 같은데. 만약 너의 왕야 남편이 그 상처 때문에 너를 싫다 하고 너를 원하지 않는다면…….”
탁칠은 몸을 창가로 가까이 다가가며 한안을 향해 야릇하게 웃었다.
“내가 바로 너를 아내로 맞아 구명지은에 보답하겠다.”
남자는 말을 마치고 눈 깜짝할 새에 사라졌다. 방 안에 남은 것은 한안 한 사람뿐이었다.
한안은 눈썹을 찌푸리고 탁자 위에 어질러진 것을 정리하려 했다. 그때 찻잔 곁에 철패 하나가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손에 잡으니 조금 묵직했다. 위쪽에는 한안이 알아볼 수 없는 문자가 쓰여 있었다. 추측건대 방금 전 그 사람이 두고 간 것이리라. 어쩌면 대단히 귀중한 물건일지도 모른다. 한안은 침상 곁으로 걸어가 침상 다리의 우뚝 솟은 한 곳을 손으로 더듬었다. 그리고 이내 힘을 써서 들어 올리니 침상 깔판 전체가 열리면서 공간이 나타났다.
여기가 바로 방금 전 탁칠이 몸을 숨기고 있던 곳이었다. 환생 후, 한안은 청추원에 주씨가 안배한 시선이 있을까 걱정스럽기도 하고 강옥루에서 바꾼 은전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도 안전하지 못하기에 이틀 밤낮을 들여 침대 아래에 몰래 공간을 마련했다. 다행히 방금 전 그 사람은 안쪽에 있던 은전은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
한안은 밑바닥에서 작은 천 가방 하나를 꺼내 철패를 은표와 함께 넣고, 침상을 잘 되돌려 놓았다. 아침부터 시달리니 조금 피곤했다. 그러나 날은 이미 훤히 밝아 침상으로 다시 돌아가 쉴 수는 없었다. 급람에게 등나무 줄기를 엮어 짠 의자를 뜰 안에 옮기게 하고, 새벽의 태양을 맞으며 잠깐 눈을 붙였다.
선잠을 얼마나 잤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얼음처럼 서늘한 손이 자신의 머리를 토닥이는 것이 느껴졌다. 한안은 눈을 떴다. 부운석이 눈앞에 서서 높은 곳에서 자신을 굽어보고 있었다.
그는 파란색 외투 안에 어두운 문양이 수 놓인 감색 비단 장포를 입어, 이전에 비해 남자답고 용맹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표정은 조금 어두웠다.
한안은 조금 당황했다가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보았다. 급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이상해서 그에게 물어보았다.
“어떻게 들어온 거예요?”
부운석은 그저 그녀를 응시했다.
“오늘 새벽에 지난밤 장부에 자객이 들었다는 말을 들었다. 왕비를 살피러 왔지.”
‘왕비’라는 말에 한안은 갑자기 묘한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부운석의 행동이 빠른 것에 감탄했다. 방금 전에 일어난 일인데 벌써 알고 서둘러 오다니. 분명 급람은 부운석이 쫓아냈을 것이다.
“정문으로 들어오셨나요?”
태연한 모습이었지만 몰래 들어온 게 아닐까 싶어 한안이 물었다.
부운석은 그녀의 물음이 조금 우스워 표정이 가라앉았다.
“설마 본왕이 또 몰래 와야 했느냐?”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
한안은 서둘러 부인했다.
“하지만 당신이 정문으로 들어왔다면, 아마도 많은 사람이 다 봤을…….”
“보면 또 어때?”
그녀가 말을 마치기를 기다리지 않고 부운석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지금 너는 현청왕부 왕비다. 본왕이 자기 왕비를 보는 것은 당연한 도리이지.”
한안은 그의 말에 말문이 막혀 그저 그를 바라보며 침묵해야 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현청왕이 자기 왕비를 몹시 아끼고 사랑하여 왕비의 부중에 자객이 들었다는 말을 듣자마자 새벽에 바로 서둘러 온 것이라 보일 것이다. 한안의 위세를 세워주면서 그녀가 현청왕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는 것 같았다. 앞으로 그녀를 업신여기려는 사람이 있다면 현청왕을 생각해서라도 감히 경거망동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의 일처리는 늘 이렇게 주도면밀하군. 한안의 마음 한구석이 따스해졌다. 덕분에 안하무인격인 그의 말에도 그다지 화가 나지 않았다.
“뭐 하러 오셨어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부운석은 그녀의 꾹 다문 입술을 한참 보더니 백옥으로 만든 작은 병 하나를 던져주었다. 한안이 허둥지둥 받았다.
“이게 뭐예요?”
부운석이 한 걸음 가까이 걸어와 그녀의 팔을 잡아당기자 한안은 깜짝 놀랐다. 부운석은 한안의 옷소매를 들어 올리고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빛으로 흰 천에 감싸인 상처를 응시했다.
그의 표정은 알기 어려웠지만 그가 한안의 상처를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한안은 부끄러워 바로 팔을 움츠렸다.
“보기 좋은 게 아니에요. 그만 봐요.”
“움직이지 마라.”
부운석이 낮은 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장사양이 의원을 부르지도 않다니.”
장사양은 한안 팔의 상처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한안은 할 수 없이 스스로 붕대를 찾아서 아무렇게나 약 가루를 뿌리고 감았다. 그저 아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부운석의 말투는 제법 사나웠다. 한안은 다시 마음속이 따뜻해져서 오히려 그를 위로하며 말했다.
“큰 상처도 아니니 의원을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어요.”
부운석은 한안 옆의 돌의자에 앉아 가라앉은 얼굴로 한안의 붕대를 풀었다. 그리고 자기가 가져온 붕대를 꺼내 새로 싸매 주기 시작했다.
당당한 현청왕이 왕비의 상처를 위해 붕대를 감싼다고? 한안은 온당치 못하다 생각하고 팔을 거둬들이려 했다.
“제가 할게요.”
“입 다물어라.”
부운석이 붕대를 감으며 한안을 한 번 슬깃 쳐다보는데 한결같이 심오한 눈빛에는 한기가 가득했다. 한안은 감히 그의 눈빛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가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은 대강 알겠다만 그는 왜 화가 난 걸까. 상처가 난 것은 한안 자신인데.
부운석의 얼굴빛은 좋지 않았지만 손길은 부드럽고 다정했다. 한안은 조금도 통증을 느낄 수 없었다. 그의 능숙한 모습을 보며 참지 못하고 말했다.
“왕야의 솜씨는 상당히 능숙하시네요.”
한참 동안 부운석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한안은 그가 화가 나 그녀를 상대하고 싶지 않을 것이라 여겼을 때쯤 부운석의 냉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군대에서는 상처를 입으면 모두 스스로 치료해야 하지.”
한안은 의혹이 일었다.
“수행하는 의원이 있지 않았어요? 어찌 왕야가 스스로 상처를 싸매신 거예요?”
부운석이 담담히 말했다.
“믿을 수 없었다.”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말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한안은 그 말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듣기로 현청왕은 열네 살에 갑옷을 입고 전쟁터에 나가기 시작했다고 했다. 열네 살 소년이 전쟁터에 있으면서 마주해야 했던 온갖 의혹을 상상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신임을 얻지 못하고, 그 또한 다른 사람을 믿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스스로 살 기회를 도모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을까. 싸늘하고 냉담한 그의 성격은 앞뒤에서 적의 공격을 받아야하는 싸움터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한안은 생각에 잠겨 들었다. 그 사이에 부운석은 상처를 깨끗이 닦고 약을 뿌린 다음, 붕대를 싸맸다. 그의 붕대 감는 솜씨는 한안보다 훨씬 나았다. 한안이 막 그에게 감사의 말을 하려는데, 부운석이 물었다.
“어째서 스스로를 상처 입힌 거지?”
한안은 당황해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오랜 기간 군중에 머물렀던 부운석임을 생각하면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그는 속일 수 없었다. 그는 단번에 이 상처가 넘어져서 생긴 것이 아니며 한안이 스스로 만든 상처라는 것을 알았다. 그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까?
“내가 네게 준 비녀는 너 스스로를 상해하라고 준 게 아니다.”
그의 깊고 그윽한 눈동자는 그야말로 한안을 빨아들이려는 것 같았다.
그것조차 간파하다니. 상황이 안 좋은걸. 한안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상황이 긴급하여…….”
“현청왕비 명호를 빌려 쓸 거였다면 어째서 처음부터 쓰지 않았느냐? 스스로를 상해하여 결백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느냐?”
부운석이 차가운 소리로 말했다.
한안의 얼굴이 빨개졌다. 자신이 현청왕비 명호를 입에 올린 것은 물론 현청왕의 명성이 효과가 좋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말은 마치 자신이 왕비의 이름에 기대어 나쁜 짓을 한 것을 꾸중하는 것만 같았다. 마음이 불편해진 한안은 고집스럽게 말했다.
“저는 아직 시집가지 않았으니 아직 정식 왕비라 할 수 없죠. 함부로 현청왕비 명호를 가져다 쓸 수 없잖아요. 사람들이 들으면 비웃을 거예요.”
부운석은 그녀의 말을 듣고 웃는 듯 마는 듯 말했다.
“본왕에게 하루빨리 성혼하라고 일깨워주는 것이냐?”
한안은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이 사람은 어떻게 다른 사람의 뜻을 이렇게 곡해할 수 있지?
“왕야께서 생각이 너무 많으시네요.”
한참 동안 두 사람은 똑같이 말이 없었다. 잠시 후 부운석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어제의 자객은 서융 사람이다.”
한안은 놀랐다.
“서융?”
어쩐지, 중원 사람의 모습이 아니더라니. 서융과 대종이 물과 불같은 사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그 사람 혼자서 황궁에 잠입해서 황상을 암살하려 한 걸까? 그 사람의 목숨을 구한 것은 잘못한 것일까. 다시 부운석을 보니 그는 이미 어젯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그리고 자신이 자객이 달아나도록 도운 것도 모두 알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의 표정이 어둡고 차가운 것을 보며 한안은 속으로 외쳤다. 설마 한안이 그 자객과 한패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한안은 아무래도 그에게 해명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저는 그 사람이 서융인인지 전혀 몰랐어요. 그는 칼을 가지고 제 목을 겨누고 있었고 만약 그를 돕지 않았다면 그는 바로 저를 다치게 했을 거예요. 그래서 간신히…….”
“그는 어디에 숨었느냐?”
그녀가 말을 마치기를 기다리지 않고 다시 부운석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한안은 그가 이런 질문을 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잠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네 방?”
부운석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말투에는 쉽게 알아차릴 수 없는 위험한 기색이 담겨 있었다.
한안은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하지만 고개를 한 번 끄덕이기도 전에 한안의 입술 위에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의 수려한 얼굴이 한안의 눈을 가득 채웠다. 한안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모습을 본 부운석은 비로소 살짝 물러났다.
“너는 본왕의 왕비다!”
그의 목소리에는 경고의 기색이 가득했다.
한안은 경악스러워 하며 그를 밀쳐냈다. 이 남자는 어떻게 무슨 말만 하면 입을 맞추는 것인가.
부운석은 표정이 잠시 온화해지더니 손안의 물건을 내려놓고 가버렸다.
부운석이 간 후, 한안은 그가 놓고 간 것이 흉터를 없애는 연고인 것을 발견했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러다가 입맞춤을 떠올리자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갑자기 번뜩 깨달음이 왔다. 어쩐지 그가 오늘 비정상적으로 기분이 좋지 않은 모습이더라니. 자신이 고의로 자객을 도왔다고 의심하는 거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라 자신이 그 자객과 한 방에 함께 있었던 것이 불쾌했던 것뿐이었다. 속이 너무 좁은 것 아냐? 하지만……. 한안은 약병을 가만히 움켜쥐었다.
“질투인 건가?”
한편 부운석은 바로 황궁으로 갔다. 태후가 호출하였기에 그도 장부에 너무 오래 머물 순 없었다.
*
채봉전.
태후는 연탑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궁장 차림의 궁녀 둘이 무릎을 꿇고 태후의 다리를 주무르고 있고 진 귀비가 옆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 바깥에 공공이 와서 아뢰었다.
“현청왕 오셨습니다.”
부운석은 대전으로 걸어 들어와 몸을 굽히고 반 무릎을 꿇으며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자, 모후를 뵙습니다.”
“일어나거라.”
태후가 그를 향해 손짓을 했다.
“운석, 오랫동안 너를 못 보았구나.”
부운석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았다.
“소자가 불효하여 모후께 걱정을 끼쳐 드렸습니다.”
말은 비록 이렇게 했지만 말투에는 털끝만큼도 걱정하는 느낌이 없었다.
진 귀비는 법도에 맞게 고개를 숙이고 옆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 그녀의 입가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으로 휘어졌다.
“운석, 네가 장가 소저를 처로 맞으려 한다 들었다.”
태후가 눈을 가늘게 뜨고 천천히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렇습니다.”
부운석은 이런 화제를 태후와 논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에 그의 대답은 즉각적이고 간결하며 명쾌했다.
“애가는 원래 장가 소저를 위왕 세자에게 내려주려 했다. 그런데 뜻밖에 너에게 선수를 빼앗겼구나.”
태후는 부운석의 표정을 관찰했다. 그러나 부운석의 얼굴에서 자신이 바라는 표정은 볼 수 없었다. 부운석이 말했다.
“황상께서 이미 우상 부중의 천금을 위 세자에게 내려주셨습니다. 분명 아름답고 원만한 인연일 것입니다.”
“하하.”
태후는 무슨 우스운 이야기라도 들은 듯 웃었다.
“그 인연은 네가 황상을 재촉해서 성사시킨 게 아니냐?”
“소자는 우상의 이 낭자가 위 세자에게 빠져 있는 것을 직접 본 적이 있습니다.”
태후는 부운석이 당차게 나오자 에둘러 말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바로 물었다.
“너는 어째서 장부 4소저를 처로 맞으려 하느냐?”
“장 소저의 재주와 명망이 널리 알려져 소자는 그녀를 흠모해 마지않습니다. 모후 생각에 이 이유는 어떠십니까?”
태후는 그를 보지 않고 오히려 진 귀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애가가 나이가 들어 흠모하니 마니 하는 것은 알아들을 수가 없소. 진 귀비, 자네가 말 좀 해보게. 그 장 4소저는 어떤 사람인가?”
진 귀비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장 4소저는 불운한 사람입니다. 작년에 막 모친을 잃었고 부친의 총애를 받지 못하며 심지어 부중 희첩의 업신여김까지 받으니 무척 가련한 여인입니다.”
분명 한안을 안타까워하는 말이긴 했지만, 한안이 부중에서 적녀의 지위를 점하고 있다 해도 사람들에게 대우받지 못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이런 아가씨를 현청왕비로 간택했으니 좀 모자라지 않겠냐는 의미였다.
태후가 듣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불운한 아이라니 운석이 잘 대해 주어야겠구나. 어려서부터 고초를 겪었다는데 시집와서도 힘들어하겠구나. 애가가 네게 측비와 소첩을 몇 명 내려주어 장가 낭자를 돕게 하면 좋겠구나.”
부운석이 담담히 대답했다.
“모후께서 모르시는 게 있습니다. 소자는 이미 조정의 문무백관 앞에서 금생에 오직 장 낭자 한 사람만 아내로 맞겠다고 맹세했습니다.”
“뭐라고?”
태후가 놀랐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예로부터 황가 자제가 정비 한 명만을 처로 맞는다는 그런 규정은 없었다. 가지를 뻗고 잎을 흩뿌려 선조의 혈맥을 보존하는 것이 너의 책임이다. 어떻게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느냐. 애가는 동의 못 한다.”
“모후.”
진 귀비가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그것은 그 장 4소저가 스스로 언급한 것입니다. 위왕 부자가 장부에 혼담을 꺼내러 갔는데 장 낭자가 그리 말했다지요. 자신이 시집갈 사람은 금생에 오직 그녀 한 사람만 아내로 맞을 수 있다고요. 그래서 위왕이 생각을 접은 것입니다.”
태후는 눈이 휘둥그레져 대노하여 말했다.
“대단히 질투 심한 계집이로고! 여인이라면 마음이 관대하고 도량이 넓어야 하며 삼종사덕을 지켜야 좋은 여자라 할 것인데 참 잘하는 짓이다! 벌써부터 이런 터무니없는 요구를 내놓다니 나중에는 더 대단할 것이다. 운석, 애가는 네가 이런 여자를 처로 맞는 것을 윤허할 수 없다. 즉각 그녀와 파혼하거라.”
“모후, 농담도 잘하십니다.”
부운석은 여전히 기복 없이 평온한 모습이었다.
“황상께서 문무백관 앞에서 윤허하신 혼사인데 어떻게 바꿀 수 있겠습니까.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는 운명이 정한 현청왕부의 왕비입니다.”
진 귀비가 입을 가리고 호호 웃었다.
“다른 사람들이 왕야를 가리켜 군자라 말들 하는 것도 당연하네요. 하지만 모후의 뜻을 따르는 것은 간단하지요. 왕야께서 휴서(休書 이혼서) 한 통만 쓰시면 즉각 그녀를 버리실 수 있으니 이 혼사는 무효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황상께서는 혼인을 하사하시는 말씀만 하셨지, 휴처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태후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운석. 즉시 휴서 한 통을 쓰거라. 이 경성 안에 좋은 낭자가 부지기수이니 애가가 너를 위해 좋은 혼사를 내려주마.”
“감히 모후께 묻겠습니다. 장 낭자가 어떤 죄를 범했기에 소자가 그녀를 버려야 합니까?”
부운석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그녀는 바로 칠거지악 중에서 질투 조항을 범했구나.”
태후의 눈빛이 음험하게 빛났다.
“현청왕이 이렇게 질투가 심한 여자를 어찌 정비로 얻을 수 있겠느냐!”
“만약 금생에 오직 그녀 한 사람만 아내로 맞아야 한다는 말이 질투가 심한 것이라 하신다면 저도 안 되겠습니다.”
부운석이 느릿느릿 말했다.
“소자도 금생에 기꺼이 그녀 한 사람만 총애하기를 원하니까요.”
진 귀비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부운석을 보는 눈빛도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그녀가 보기에 남자들은 바람피우지 않는 종자가 없었다. 일생 오직 한 여인만 바라본다고? 그것은 결코 불가능했다. 기회만 생기면 몰래 다른 여인을 찾는 것이 남자였다. 더구나 부운석은 출중하니 그에게 달려드는 대갓집 천금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런 남자가 일생 동안 한 여인만을 바라보겠다고?
“왕야, 농담하지 마십시오.”
진 귀비는 부운석이 일부러 저러는 거라고 미루어 단정했다.
“왕야의 신분으로 어찌 일생 오직 한 명의 정비만 취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그 장 낭자는 출중한 축에도 끼지 못합니다. 왕야께서 원하기만 하면 이 세상의 어떤 낭자도…….”
“본왕의 왕비는 오직 하나입니다.”
부운석은 그녀를 흘끗 한 번 보았다. 눈 속의 냉기에 진 귀비는 저도 모르게 떨었다. 그는 태후 앞에서 스스로를 ‘소자’라고도 칭하려 하지 않았다.
“이 혼사는 황상께서 이미 윤허하셨습니다. 설마 누군가가 황상보다 더 위에 있는 것입니까?”
그의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태후와 진 귀비 두 사람을 쓸고 지나갔다.
“만약 누군가 왕비의 지위를 탐낸다면 본왕이 자비 없이 죽여 버리겠습니다.”
태후의 눈이 가라앉았다. 태후는 눈앞에 서 있는 수려한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는 장신에 늘씬했고 몸의 자태가 검처럼 굳세고 우뚝했다. 냉담한 표정에는 살기와 한기가 드러났다. 그의 말은 그것으로 전부여서 거역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의 말을 거역하는 사람은 반드시 고생을 자초하게 되리라.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이 황자는 태후에게서 소원해졌고 한층 더 대하기가 어려워졌다. 태후를 마주하고도 저렇게 오만방자하는 것이 고의적인 것 같았다. 그는…… 도대체 무얼 할 생각인가?
태후는 생각하던 바를 거두고 얼굴 위에 웃음을 피웠다.
“애가도 그저 너를 아껴서 그러는 것이다. 너는 어려서부터 의견이 뚜렷했지. 다만 처를 얻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니 너는…….”
“소자는 이미 다 큰 성인입니다.”
그가 태후의 말을 끊었다.
“모후께서는 그만 손을 떼셔도 됩니다.”
태후는 복잡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그러나 부운석은 그녀를 향해 손을 모으고 인사를 올리고 있었다.
“황상께서 일이 있으셔서 소자를 부르셨습니다. 소자는 먼저 물러가 보겠습니다.”
부운석은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서 전을 떠났다.
채봉전 안의 두 사람은 오래도록 침묵했다. 오랜 침묵 끝에 태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조금 전의 자애롭고 나른한 표정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녀의 표정은 흉악하고 괴팍하며 공포스러웠다. 그녀는 진 귀비에게 언짢게 말했다.
“보아라. 늑대를 길렀구나. 남겨둘 수 없겠다.”
진 귀비가 고개를 숙였다.
“그럼…… 화근을 뿌리째 제거해야겠지요.”
*
현청왕부로 돌아온 부운석을 보며 성뢰가 놀리듯 말했다.
“너의 어린 왕비는 잘 만났어?”
부운석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서재로 들어섰다. 성뢰가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따라 들어섰을 때, 부운석은 목암에게 분부를 내리고 있었다.
“시위 둘을 찾아 장부를 지키며 비밀리에 왕비를 보호하게 하라.”
부운석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어 지시를 내렸다.
“또 두 사람을 파견하여 궁중의 사람을 주시하게 해.”
목암이 명을 받고 떠나자 성뢰가 의심스럽게 물었다.
“방금 궁에서 돌아오는 거야?”
“태후가 가만 앉아 있지 못하더군.”
성뢰의 표정이 엄숙해졌다.
“몇 년 동안 너는 줄곧 태후를 감시했어. 도대체 이유가 뭐야?”
“곧 너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
“운석, 태후는 네가 장 낭자를 처로 맞는 걸 반대하는 거지?”
성뢰가 그를 보았다.
“나도 태후가 이전에 장 낭자를 위여풍에게 내려주고 싶어 했다는 말 들었다. 말하고 보니 이상하네. 장 낭자는 상당히 평범한 아가씨인데 어찌 태후 마음에 들었을까? 뭔가 알아낸 것이라도 있어?”
부운석은 고개를 저었다.
“누군가 입단속을 한 것 같다. 지금 태후가 저렇게 반대하니 오히려 한층 더 의심스러워.”
성뢰는 생각에 잠긴 듯 그를 보았다.
“그녀 때문에 태후와 공공연히 대적하는 게 이해타산이 맞을까?”
성뢰는 부운석이 말이 없는 것을 보고 이어 말했다.
“너와 그녀는 그저 얼굴 몇 번 본 것뿐이야. 그런데 이렇게까지 도와주다니. 게다가 아내로 맞아 왕비로 삼겠다고도 했고. 난 정말 이해가 안 돼. 올해 겨우 열세 살인 어린 여자아이일 뿐이잖아. 그녀가 제아무리 특별하다 해도 넌 한순간에 여자한테 반해서 아내로 맞겠다 하는 그런 충동적인 사람이 아니잖아.”
부운석은 냉담하고 목석같은 남자였다. 군영 안에서도 어여쁘고 자태가 아름다운 각양각색의 여인이 그를 찾아왔었다. 그중에는 아리땁고 교태스러우며 풍치를 자아내는 이도 있었고 천진난만한 이도 있었으며 고상하고 도도한 이도 있었고 구름을 범할 듯 호방한 이도 있었다. 그 아가씨들은 부운석의 명성을 듣고 알아서 돌진해 왔다. 재능이 출중하고 잘생긴 미소년이 전장에서는 영민하고 용맹스러워 당해낼 적수가 없었다. 거기에 대단히 고귀하기까지 하니 그 본인만으로도 확실히 매력이 넘쳤다. 그러나 그는 그 여인들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당시 성뢰는 그의 굳건한 신념에 오체투지 할 정도로 탄복했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몇 번 보지도 못한 아이를 위해 누차 계율을 어기고 있는 것이다. 세상사에 해탈한 신선 같았던 그가 희로애락이 가득 찬 보통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미소 짓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하고 그녀를 위해 조당에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태후와 공공연히 대적하기도 했다.
그럴 가치가 있나?
부운석은 고개를 젓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궁중 연회에서 그녀를 처음 본 게 아니야.”
부운석은 7년 전의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그는 아직 인간사의 고초를 겪지 않은 오만한 소년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일생에 영향을 끼치기에 충분한 비밀 하나를 알게 되었다. 이를 받아들일 방법이 없어 처음으로 황형과 공공연히 대립하고 종군을 자청하여 출전하기로 했다. 황형은 어쩔 도리가 없이 그의 요구를 승낙했다. 그렇다 해도 부운석 마음속에 있는 분노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어느 날 오후, 그는 궁을 떠나 경성을 방황하고 돌아다니다가 성동의 한 뒷산에 도착했다.
그곳은 한적하고 조용한 곳으로 푸른 숲에 둘러싸여 있었다. 밖은 거위 털처럼 가벼운 함박눈이 흩날리며 내렸고 초목은 모두 하얀 적설에 파묻혔다. 그는 나무 위에 앉아 있었다. 바람이 거셌지만 마음속은 여전히 격렬하게 들끓고 있었다. 바로 그때,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상관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 울음소리는 갈수록 커져 갔고 나중에는 숨이 넘어갈 정도로 울고 있었다. 이곳에는 조용히 있으려 온 것인데 누가 알았으랴. 사람의 평온을 방해하는 물건이 늘어날 줄을. 분노한 그는 고개를 내밀어서 자신이 올라앉은 나무 밑둥치에 대여섯 살의 어린 여자아이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아이는 온몸이 더러웠다. 둥근 만두 모양 머리를 하고는 쉴새 없이 눈물을 닦아내며 매우 상심한 모습으로 울고 있었다. 그는 아이의 우는 소리에 속이 들끓어 결국 참지 못하고 몸을 날려 나무를 내려갔다. 그 어린 여자아이 앞으로 걸어가서 차가운 소리로 말했다.
“입 다물어라.”
그 어린 아가씨는 깜짝 놀라서 자기 앞의 수려한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표정이 좋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이렇게 예쁜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바보처럼 멍해진 아이는 그의 소매를 잡았다.
“당신은 신선이에요?”
부운석은 자라는 동안 무수한 규방 여아들의 애모를 받아왔다. 그러나 성격이 냉담해서 남의 접촉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의 옷소매 자락을 잡아당길 만큼 간이 큰 사람도 없었다. 누가 알았으랴, 눈앞의 이 어린 아가씨가 눈물 콧물을 닦던 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신선이라고 부를 줄을. 눈처럼 새하얀 그의 옷 위에 까마귀처럼 새까만 손도장이 찍힌 것이 보였다. 어려서부터 깨끗한 것을 좋아하던 부운석은 미칠 것처럼 분노했다.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나를 만지지 마라.”
어린아이는 이해하지 못한 듯 하하 웃었다.
“당신은 정말 예뻐요.”
어느 집 말썽꾸러기이기에 이렇게 예의범절을 모르는 거야?
잠시 멈칫한 부운석은 다시 말했다.
“좀 조용히 해.”
어린 아가씨는 그를 보고 입을 삐죽거리더니 또다시 엉엉 큰 소리로 울었다.
부운석은 깜짝 놀랐다.
“왜 우는 거냐?”
어린아이가 그를 보았다.
“상심해서 울어요. 이낭과 부친이 말씀하시기를 부중에서 우는 건 안 된대요. 그래서 한 번에 내일, 모레, 글피 것까지 우는 김에 울어두는 거예요.”
부운석은 처음엔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잠시 생각을 하고서야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었다. 이 아이는 아마도 부중에서 총애받지 못하는 소저라 첩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여기에 와서 울적해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부운석은 그녀가 울며 상심하는 것을 보고 물었다.
“그럼 얼마나 울려는 것이냐?”
어린아이는 손가락을 꼽아가며 셈을 했다.
“하나, 둘, 셋…… 반달 치 눈물을 쌓아두었으니 앞으로 한 시진 정도는 걸려요.”
한 시진. 부운석은 참지 못하고 미간을 문질렀다. 여기에서 이 못생긴 애가 한 시진이나 우는 것을 듣고 있어야 하나? 어린아이는 생각에 잠긴 그를 보며 물었다.
“신선님, 당신도 울려고요?”
아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자신의 어깨를 툭툭 쳤다. 구름을 헤칠 듯 씩씩한 모습이었다.
“안아의 어깨를 빌려줄게요. 기대세요.”
부운석은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이건 또 어디에서 들은 말인지. 그녀가 정말로 가슴을 쭉 펴고 연약한 어깨를 그의 곁에 가까이 대는 것이 보였다. ‘나는 관대하다’ 하는 모습이었으나 표정은 조금 경직되어 있었다.
“너의 호의는 고맙지만 나는 울고 싶지 않아.”
“울고 싶지 않아요?”
아이가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하지만 신선님, 당신은 아주 많이 울고 싶은 것 같은 모습인데요. 두려워할 거 없어요. 눈물을 참으면 병나요. 안아는 당신을 비웃지 않을게요.”
부운석은 고개를 숙이고 작디작은 아이를 보았다. 순간 그는 오늘 들은 비밀이 떠올랐고 진짜 슬퍼지려 했다. 마치 아이에게 하는 말처럼 또는 자신에게 하는 것처럼 부운석은 중얼거렸다.
“우는 게 쓸모가 있을까?”
아이의 입장에서 보자면 확실히 수준이 높은 질문이었다. 아이는 머리를 갸웃하고 오랫동안 생각하다가 비로소 말했다.
“적어도 마음은 후련해지죠.”
부운석은 아예 그녀의 옆에 자리 잡았다.
“너는 그래서 후련해졌어?”
그 말에 아이는 잊고 있던 것이 생각난 듯 말을 했다.
“에고, 신선님과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팔려서 우는 걸 잊어버렸네요. 어머니, 급람, 주홍, 유모의 눈물까지 더 흘려야 되는데.”
아이가 말을 마치고 또 입술을 삐죽거렸다. 부운석은 그녀의 눈물이 두려워졌다. 무의식중에 손을 뻗어 그녀의 입을 막았다.
“울지 마.”
어린 아가씨는 볼에 바람을 넣은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아둔한 모습이 재미있게 느껴지기라도 한 건지 부운석은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손가락으로 잡았다.
“나는 당신과 여기서 놀고 있을 수 없어요. 시간이 부족해요. 우는 것도 다 못 마쳤는데.”
부운석은 그녀의 진지한 모습을 보았다.
“우는 대신 웃어 보는 건 어때?”
“웃어요?”
아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잠시 생각했다.
“웃음이 안 나와요.”
그는 마음이 움직였다. 이렇게 작은 아이가 웃을 수 없다니. 아주 많은 고초를 겪었으리라. 게다가 공공연히 크게 울 수도 없어 사람 없는 산속에 숨어 눈물을 떨구어야 하다니. 부운석의 말투가 부드러워졌다.
“너 왜 울었어?”
아이는 끊임없이 계속해서 말했다. 부중의 이낭이 어떻게 그녀들 모녀를 괴롭히는지, 부친이 어떻게 그녀들에게 냉담한지, 하인들이 어떻게 차갑게 경멸하는지, 말하는 내내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다. 부운석은 동병상련의 감정이 들어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세상살이가 쉽지 않다. 어린아이나 자신이나 누가 더 낫다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꼬맹이에게도 역시 말 못 할 고초와 슬픔이 있는 것이다. 그녀가 멈추지 않고 우는 것을 보며 부운석은 위로했다.
“네게 작은 물고기를 하나 잡아줄게. 네가 울지 않는다면 말이야. 어때?”
그는 아이의 눈물에 두통이 일어서 난생처음으로 상대방을 달랬다. 맑은 샘에서는 찰박이는 소리가 울렸다. 샘물은 맑고 투명했고 어렴풋이 물 아래에서 노니는 여러 가지 색의 물고기를 볼 수 있었다.
아이가 멍하니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보고 부운석은 몸을 일으켜 낚싯대 하나를 가지고 돌아왔다. 어려서부터 호강하고 응석받이로 자란 그는 난생처음으로 어린 여자아이를 위해 샘가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았다. 아이도 흥미를 느꼈는지 눈물을 그치고 얌전히 그의 옆에 앉아 물속의 부표를 응시했다.
“신선님, 그럼 신선님은 어째서 울려고 하는 거예요?”
부운석이 막 정신을 딴 데 팔고 있을 때 곁에 있던 아이가 입을 열어 물었다.
그는 멍해졌다.
“나는 지금까지 운 적이 없다.”
그녀는 부운석의 가슴을 가리켰다.
“당신은 눈으로 운 게 아니라 여기로 운 거예요.”
부운석은 멍해져서 눈앞의 어린 아가씨를 한참이나 응시하며 말이 없었다. 어린 아가씨는 그의 나약함을 알아보았다.
부운석은 담담하게 말했다.
“전혀 그렇지 않아.”
아이는 그의 냉담한 얼굴빛에 두려워하며 몸을 움츠렸다.
“여기로 우는 것은 눈으로 우는 것보다 더 힘들어요.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어요. 여기로 우는 사람은 모두 불쌍하다고.”
그는 말이 없었다. 입가에 냉소가 떠올랐다.
“신선님, 나중에 또 여기에 와서 물고기를 잡을 건가요?”
소년의 표정은 무심했다.
“나는 내일 출정해서 싸우러 갈 거야. 어쩌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몰라. 그럼 너와는 이 한 번으로 인연을 다한 셈이겠지.”
그는 자신의 생사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심지어 전쟁터에서 죽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했다. 다시 돌아오지 않아도 될 테니 말이다.
아이는 그를 보았다. 아이는 그의 말 속에 담긴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중에 다시 오지 않을 거예요?”
소년은 그녀를 한 번 흘끗 보았다.
“그래. 그러니까 이 물고기는 작별 전에 네게 기념으로 남겨주는 거야.”
그러나 결국 그 아이는 그가 물고기를 낚는 것을 보지 못했다.
오래지 않아 초조한 표정의 여종 둘이 왔다. 여종들은 아이를 소저라고 부르면서 경계의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 아이는 두 여종에게 끌려가면서도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신선님, 나중에 다시 만나요!”
나중에? 나중이란 건 있을 수 없어. 이번에 이별하면 생사를 짐작할 수조차도 없었다. 어쩌면 살아와서 다시 만날지도 모르고, 어쩌면 영원히 서로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는 고개를 수그리고 손목에 힘을 주어 위로 낚싯대를 들어 올렸다. 남색 빛을 띤 아름다운 물고기가 수면을 뚫고 나왔다. 공중에 아름다운 빛무리가 번뜩였다.
물고기는 결국 주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웃었다. 낚싯바늘에서 물고기를 빼내서 다시 물속에 던져 넣었다. 남색의 물고기는 꼬리를 한 번 흔들어 물보라를 일으키더니 이내 물속에 잠겨 종적이 보이지 않았다.
“만약 돌아올 운명이라면 다시 너를 보러 올게.”
그는 물속을 향해 가벼운 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사라진 작은 길을 보았다. 기억 속의 그 얼굴은 오래되어 뚜렷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 그녀는 눈물 콧물 범벅이라 그에게 아무런 인상도 남기지 못했고 부운석도 그녀의 용모에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다만 눈물에 씻긴 그 한 쌍의 눈동자가 맑고 투명한 것만은 또렷이 기억했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녀의 눈 속에 비치는 것만으로도 그 눈동자를 더럽히는 것 같을 정도로 맑았던 눈동자.
이튿날, 부운석은 대군을 따라 출정했다. 소년은 큰 말 위에 앉아 고개를 들고 멀리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표정은 비할 데 없이 침착하고 신중했다.
이후 전쟁터에서 무기를 들고 싸우며 칼산과 불바다에서 소년은 짧디짧은 몇 년 동안 무섭게 성장했다. 무심하고 냉정하며 침착하고 신중하며 차분했다. 그는 이미 오만한 소년의 껍질을 벗고 수려한 청년으로 변해 있었다. 천군만마를 직면하고도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으며 풍채와 재능 면에서는 아무도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장성했다.
성뢰는 가끔 그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몇 년간, 너는 다른 사람처럼 변했어. 나조차도…… 두렵다는 생각이 들 정도야.”
부운석이 대답했다.
“울어서는 안 된다는 심정을 너는 아직 맛본 적이 없기 때문이야.”
부운석은 이따금 그 아이를 떠올렸다. 그녀는 우연히 그가 일생에서 가장 무력하고 비통한 순간에 뛰어들어 소란을 피워 그의 슬픔을 적지 않게 흩뜨려 놓았다. 그 채색 물고기, 아직도 보내지 못한 이별 기념품은 하나의 약속 같아서 그를 전장에서 한층 더 용맹하고 당해 낼 적수가 없게 만들었다. 아이와의 약속을 지키려면 죽을 수 없으니까.
그가 십만 정병을 이끌고 개선하여 돌아올 때도 그는 여전히 큰 말 위에 앉아 있었다. 성문이 활짝 열리고 백성들이 환호하는 것을 보면서도 마음속은 실의에 빠져 망연했다.
그가 더 이상 영민하고 용맹스러운 소년이 아니어서였을까.
궁중 연회의 홍매화 숲속에서 그는 의도치 않게 한 어린 아가씨를 만났다. 위급한 고비에 그에게 접근하면서도 그가 그 무엇보다 더 위험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어린 아가씨의 만두 모양 머리는 조금 눈에 익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지난날과 다름없는 그 맑고 밝은 두 눈을 드러내자 그 위로 울어서 엉망진창이 된 작은 얼굴이 나타났다.
7년이 지나 대설이 내리던 날, 그는 마침내 아이를 다시 만났다. 울기 좋아하던 못생긴 아이는 눈과 눈썹을 휜 채 입꼬리를 살짝 비틀어 눈앞의 모든 것을 차갑고 메마르게 비웃으며 보고 있었다. 맑고 투명한 두 눈은 더 이상 세상만사를 잘 알지 못했던 순수함이 아니라 삶의 수많은 풍파를 겪어낸 여유로움을 담아내고 있었다.
그의 심장이 울고 있었다. 그녀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는 은밀한 곳에 서서 조용히 그녀의 모든 행동을 지켜보았다. 어린아이는 차가운 눈으로 비방과 모함을 바라보았고 여유롭고 아름답게 웃었으며 교묘하게 수완을 발휘했다. 적과 첨예하게 대립하여서도 조금도 물러섬 없이 힘으로 물리쳤다. 그녀는 더 이상 울지 않게 된 것 같았다. 부운석은 빙그레 웃으며 모든 것을 보았다.
그는 만사가 얼굴에 드러나던 그 소년이 아니었고 그녀도 몰래 숨어서 울어야 했던 그 아이가 아니었다.
시간이 모든 것을 변하게 했지만, 변치 않은 것도 여전히 있었다.
그에게 작은 소망이 생겼다. 그녀를 자신의 날개 아래에 들여놓고 싶었다. 울 때는 제멋대로 울 수 있고 웃고 싶지 않을 때는 억지로 웃을 필요가 없도록.
부운석은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그녀에게 이별 기념품 하나를 빚진 것을. 그리하여 그녀에게 남전옥(蓝田玉: 남전 지방에서 나는 남색 옥) 물고기꼬리 비녀 하나를 돌려주고, 달빛 아래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의 왕비.”
*
삼 일 후.
한안은 아벽이 머물던 그 촌락에 다시 가기로 결정했다.
아직 일의 진상이 드러나지 않았다. 가장 좋은 방법은 아벽이 진실을 얘기하는 것이겠지만, 아벽이 만약 진상을 말할 수 없다면 어느 정도 은밀한 수단을 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마차는 성북의 울퉁불퉁한 거리 위를 달렸다. 한안은 두 손가락을 뻗어 이마를 문질렀다. 기억 속에 진 귀비의 생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전생에 있었던 진 귀비 생신 연회에 자신은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생에서는 현청왕비가 되었으니 불참하기는 아마도 어려울 것이었다. 시간은 한 걸음 한 걸음 장한명에게 일이 생긴 그날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모름지기 만사 신중해야 했다. 주씨 두 자매가 한층 더 자신을 눈엣가시처럼 보고 있고 위여풍에 7황자까지 있으니 쉽게 움직이기 힘든 상황이었다.
생각을 거듭하는 동안, 촌락 입구에 도착했다. 한안과 급람, 주홍은 마차에서 내렸다. 발이 땅에 닿자마자 피비린내를 띤 차가운 바람이 정면으로 불어 닥쳤다.
그 냄새는 너무도 짙고 무거웠다. 급람은 속이 메스꺼웠다. 하지만 급람은 한안의 표정이 긴장된 것을 보고는 큰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소저, 저와 주홍이 먼저 들어가서 보겠습니다…….”
한안은 고개를 저었다.
“함께 들어가자.”
말은 비록 이렇게 했지만 손가락은 이미 손바닥을 파고 들어갔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몇 걸음 가지 않아 촌락 입구에서 멀지 않은 땅에 광주리를 멘 남자 하나가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전신이 피범벅이었고, 몸 위에는 칼자국이 나 있었다.
급람이 달려가 잠시 망설이다가 그 사람을 한 번 밀어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소저, 죽었습니다.”
한안은 시체에 다가갔다. 그 사람은 이 촌락의 평범한 촌민인 듯했다. 허리춤을 깊게 베여 땅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의 표정은 공포에 질려 있었고 두 눈은 크게 열려 있었다. 마치 죽음 전에 자신의 급작스러운 운명을 짐작도 못 한 것 같았다.
한안은 천천히 일어나서 촌락 안으로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인간 지옥의 참상이 보였다.
도처에 피와 시체가 난무했다. 약초를 가지고 돌아오던 노인은 칼에 베여 자기 집 문 앞에 죽어 있었고 어린아이를 안은 아낙은 단칼에 목이 잘렸다. 이 촌락 안에서 재앙에서 달아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촌락의 모든 사람이 죽어버렸다. 우물 안의 물은 피에 물들어 새빨갰다. 사방이 죽음의 정적이었고 오직 사람들이 먹여 기르던 가축만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 채 고개를 숙이고 먹이를 먹고 있었다.
이 촌락의 모든 사람이 잔인하게 살육되었다.
한안은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급람은 이미 입을 가렸다.
“너무 잔인해. 누가 한 짓이지?”
주홍은 조금 걱정스러웠다.
“소저, 저는 살수들이 아직 멀리 가지 않았을까 봐 걱정됩니다. 여기는 위험해요. 어서 자리를 뜨는 것이…….”
한안은 그녀의 손을 밀어내고 가장 안쪽에 있는 집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벽의 방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한안은 들어가자마자 위를 향해 누워 있는 아벽을 보았다. 그녀는 손에 자수 한 점을 움켜쥐고 있었다. 흘러내린 피가 자수를 전부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죽기 전에 새 수품을 수놓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집 안은 누군가 무엇을 찾느라 뒤진 것같이 서랍이 죄다 열려 있었고 뒤죽박죽 난장판이었다.
급람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한안은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질펀한 피 웅덩이 속에 쓰러져 있는 아벽의 시체를 보고 그녀의 입가가 휘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마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한 웃음이었다. 아벽은 죽음 앞에서야 오랜 기간의 무거운 책임을 벗었다는 생각에 비로소 홀가분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한안은 아벽이 자수를 손에 단단히 움켜쥔 자세가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설령 죽음 직전에 수를 놓고 있었다고 해도 이렇게 자수를 단단히 움켜쥐고 손을 놓지 않을 수 있을까. 너무도 비정상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안은 마음속에 짚이는 데가 있었다. 허리를 구부려 아벽의 손 안의 물건을 끌어냈다.
가까스로 끌어내 보니 그것은 자수가 아니라 손수건이었다. 손수건은 윤이 나고 깨끗했으며 부드럽고 매끄러웠다. 보통 비단 같지가 않았다. 어떻게 오랜 세월 빈털터리로 곤궁하게 지내면서도 이렇게 정교한 손수건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을까.
몇 번 더 자세히 볼 시간이 없었다. 한안은 그 손수건을 챙기며 급람에게 말했다.
“어서 돌아가자.”
급람이 아벽의 시체를 가리켰다.
“저 사람들은…….”
한안은 잠깐 침묵했다.
“나중에 네가 사람을 찾아 관에 알리거라.”
급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촌락에 머문 시간은 지극히 짧았다. 급람은 마차 안에서 참지 못하고 한안을 보며 물었다.
“소저, 그 사람들이 어째서 촌락의 모든 사람을 몰살한 걸까요? 우리 때문은 아닌지…….”
며칠 전, 한안이 촌락을 다녀가고 오래지 않아 촌락 안의 모든 사람이 학살당했다. 두 일을 연관 짓지 않기란 어려웠다. 이 두 가지 일에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한안은 눈동자를 드리웠다.
“맞아.”
급람의 입이 벌어졌지만 한안의 표정을 보고, 신음소리를 도로 목 안으로 삼켰다. 한안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그들은 아벽이 무슨 말을 했을까 두려웠던 거야. 아벽의 걱정은 틀린 게 아니었어. 그들은 촌락 하나를 몰살해서 입막음을 한 거야.”
주홍이 진중한 얼굴에 분노와 통한의 빛을 드러냈다.
“정말 잔인해요.”
주홍은 어렸을 때 가족과 함께 외출했다가 산적에게 부모를 잃었다. 자신은 겨우 도망쳐 생명은 부지했지만 행상에게 잡혀 청루에 팔려야 했다. 그러나 다행히 마음이 자애로운 왕씨를 만나 한안의 여종으로 올 수 있었다. 이런 까닭에 주홍은 왕씨를 대단히 존경했고 한안에 대한 충심도 깊었다. 주홍은 그녀의 부모가 떠돌이 도적에게 당했기 때문인지 온 일가가 도살당한 일에 너무나도 마음이 아팠다.
“모두 내 잘못이야.”
한안의 눈빛은 몹시 슬프고 처량했다.
“만약 내가 조금 더 조심했다면……. 이 목숨들은 모두 내가 빚진 것이야.”
“소저, 자책하지 마세요. 소저 잘못이 아닙니다.”
급람이 그녀를 위로했다.
“세상에 잔인한 사람들이 많아요. 이렇게 헛되이 수십 명의 목숨을 살해하다니요.”
한안은 고개를 숙였다.
“헛된 희생이라고는 할 수 없지. 나는 확신할 수 있어. 분명 황가 사람들의 짓이야.”
오직 황가의 사람만이 이렇게 빠르고 큰 규모의 일을 치를 수 있다. 상처들은 깔끔했고 많은 사람들은 한칼에 목숨을 잃었다. 보아하니 황궁 시위의 솜씨인 것 같았다. 누가 이렇게 쉽사리 황궁 시위를 동원할 수 있을까. 누가 보잘것없는 아벽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 촌민 전부를 학살했을까. 그 수단이 너무 악랄해서 망설임의 여지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한안은 기시감이 들었다. 촌락의 일은 오래전 동후왕 일가가 멸문 당한 일과 비슷했다.
설마 동후왕부가 멸문 당한 것도 왕부 중의 한 사람 때문인가?
한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저 자기만의 추측일 뿐이다. 아벽의 실마리는 이미 끊어졌다. 한안이 태어난 그 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제 누가 알고 있을까?
황상이 한 짓일까?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그녀는 소매 속의 손수건을 끌어내어 자세히 살펴보았다.
손수건 위에는 전갈 한 마리가 수 놓여 있었다. 아주 기괴했다. 전갈의 꼬리 위에 한 송이 꽃이 걸려 있었고 옆에 한 글자가 있었다.
- 교.
교?
모친의 처녀 적 이름은 ‘교’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손수건은 분명 여자 것이었다. 여자의 손수건이라 하면 그 위에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고 오른쪽 아래쪽엔 늘 자기의 이름을 수놓았다.
이 여자는 모친이 아니었다. 형편이 빈한했던 아벽일 리도 없었다. 그럼 대체 누구란 말이지?
한안은 손수건을 어루만졌다. 기이한 느낌이 솟구쳤다. 손수건이 섬세하고 부드러운 것이 평범한 물건 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급람에게 말했다.
“부귀루에 가자.”
<3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