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이요?”
주씨가 놀라고 기뻐하며 말했다. 이런 사달을 겪었으니 장어산이 시집가기는 어려울 거라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장위가 위여풍으로 바뀌었고 그가 어아를 측비로 맞이하기를 원하다니 뜻하지 않게 복이 굴러 들어왔다. 어찌 승낙하지 않을 수 있을까. 주씨는 상대방이 후회하여 번복할까 봐 두려워 즉각 말했다.
“소첩이 바로 가서 예물을 준비하겠습니다.”
“잠깐.”
위여풍이 그녀의 동작을 저지하고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
“먼저 결정해야 할 것은 장 4소저와 본 세자의 혼사를 정하는 것이오.”
위여풍이 원하는 것은 장한안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떠올린 것이 자매가 함께, 한 지아비를 섬긴다는 생각이었다. 비록 이번에 한안의 순결을 망가뜨리는 대신 장어산을 취하게 되어 여전히 달갑지 않았지만 한안을 가질 수만 있다면야. 한안의 말은 위여풍의 자존심에 큰 타격을 주었고 냉담하게 자신을 무시하는 그녀의 태도는 너무나도 괘씸했다. 한안이 주씨를 싫어하는 것을 생각하니 장어산을 측실로 맞이할 수 있다면 한안의 입장에서는 더없이 큰 굴욕일 것이다. 물론 이는 한안이 자신을 무시한 데 대한 징벌도 되는 셈이었다.
주씨는 불만스러웠지만 감히 겉으로 드러낼 수 없어 몇 마디 예의를 차릴 수밖에 없었다. 다음 달 초 8일, 장어산은 위왕부의 문을 들어가 위 세자의 측비가 된다. 하지만 그 전에 장한안과 위여풍의 혼사가 먼저 결정될 것이다.
위여풍이 가고 난 후, 장위도 돌아왔다. 장위는 그저 자기가 맞아서 기절했다고만 말했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지 못했다. 장사양은 기쁨에 겨워하며 일을 하러 갔다. 주씨 두 자매와 장어산은 공동원으로 돌아갔다. 주씨가 장어산에게 오늘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장어산이 사실대로 말했다. 대주씨는 표정이 바로 변했다.
“내가 그년을 얕보았구나.”
이전에는 장한안이 그저 잔꾀가 있는 수준에 불과할 거라 여겼는데, 지금 보니 절대로 그냥 두어서는 안 될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년은 이제 세자비가 돼요.”
장어산이 억울해하며 말했다.
“위왕부에 들어가면 나는 또 그년보다 한 수 아래가 돼요. 정말이지 분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요.”
주씨가 어산의 손을 토닥이면서 위로하여 말했다.
“내가 너를 위해 방법을 생각해 보마. 우선 혼사를 결정해 놓는 것뿐이야. 그년이 급계할 때까지 아직 1년이나 남았는데, 이 1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는 거지. 걱정하지 마.”
대주씨도 웃으며 말했다.
“위왕부에 들어간다 해도 괜찮아. 위왕부에 먼저 들어가면 더 좋지. 나중에 들어간 그년은 주변에 도와줄 사람이 없을 테니 말이다. 너는 일단 지략을 좀 늘려. 그년도 그저 어린 계집일 뿐인데, 겁먹을 게 뭐 있어.”
장어산은 그제야 조금 안심했다. 주씨는 무언가 떠올리고 대주씨를 보며 물었다.
“언니, 장 태사께서 왜 언니를 부에 데려가지 않으신 거지?”
예상 밖에도 이번에 장 태사는 혼자 돌아갔다. 대주씨는 장 태사가 가장 총애하는 희첩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를 계속해서 장부에 머물게 하다니, 실로 기이했다.
대주씨의 얼굴에 알 수 없는 표정이 번뜩 스치고 지나가더니 웃으며 말했다.
“노야께서 너와 함께 오래 있도록 배려해주신 거야. 네가 함께 있어 줄 사람이 필요한 때이니, 급히 부로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어.”
그녀는 바깥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하물며 네 현재 모습을 보렴. 어떻게 그 4소저와 싸울 수 있겠니? 내가 여기 남아야 너를 도울 수 있지.”
주씨는 복중에 요절한 아이를 떠올렸다. 상심에 빠지면서 대주씨에 대해 품었던 의심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장어산은 몇 마디 위로를 하고 며칠 전에 구매한 혼례 머리장식을 조급히 꺼내러 갔다. 그녀의 행동 어디에도 슬픔 한 점을 찾을 수 없는 것이 오늘 간통 현장을 적발 당한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청추원 내.
“네 말은 그녀가 여기저기 물건을 들추고 있다고?”
한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급람은 사방에 사람이 없는지 살피고 조심스럽게 한안의 귓가에 접근했다.
“공동원의 여종이 몇 차례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대주씨가 주 이낭의 함들을 뒤져보고 있다 합니다.”
한안은 아래턱을 어루만졌다. 대주씨가 왜 주씨의 함을 뒤져보는 걸까?
급람이 계속해서 말했다.
“사람 겉모습은 알아보기 쉬우나 속마음은 알아보기 어렵다지요. 그 주 부인이 쓸 돈이 부족해 보이지는 않던데 손버릇이 나빠 자기 동생 물건을 도둑질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지 뭐예요.”
한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은 아닐 거야.”
물건을 훔친다고? 아마 물건을 찾는 것이겠지.
지금까지 줄곧 단서가 없던 의혹이 마침내 해답을 얻은 것 같았다. 대주씨가 갑자기 방문해서는 오래도록 돌아가지 않은 것에 딱 맞는 해답이 있었다. 만약 그녀가 장부에 머무는 것이 무슨 물건을 찾으려 한 것이었다면 그럼 그 물건은 대관절 무엇일까? 장 태사도 이 일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러니 그녀가 장부에 남도록 내버려 두었겠지. 어쩌면 장 태사가 시킨 일일지도 모른다.
장 태사는 7황자 편에 선 사람인 것 같았다.
급람은 한안의 말을 듣고 계속해서 말했다.
“듣자 하니 주 부인과 노야 사이가 아직도 애매하다 합니다. 흥, 정말 부끄러운 줄도 몰라요. 자기도 남의 소첩이면서 또 남의 남자를 넘볼 생각을 하다니.”
한안은 자기 생각을 더욱 확고히 굳혔다. 대주씨는 어쩌면 아직 자기가 원하는 물건을 찾지 못한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장사양에게 접근하기 시작한 건 아닐까?
“소저…….”
그녀가 정신을 딴 데 파는 것을 보고 급람이 서둘러 말했다.
“소저?”
한안은 웃었다. 그러나 눈매는 가라앉았다.
자신과 장위의 일을 꾸민 것을 생각해 보면, 흉계를 꾸민 장본인은 대주씨이다. 그래, 새로 얻은 이번 생을 낭비하지 않으려면 답례를 톡톡히 하는 게 좋겠지?
“급람, 너 가서 노야 신변의 여종과 하인들에게 뇌물을 좀 주고 그들에게 주 부인과 노야의 일거수일투족에 주의를 기울이라 해라.”
급람은 깜짝 놀랐다.
“소저, 설마 이 일로 노야와 말다툼하실 건 아니시죠? 노비의 소견으로 봤을 때, 주 부인은 장 태사 부중의 첩실이니 정정당당하게 장부의 대문으로 시집올 수 없어요. 그냥 눈 감고 넘기면 안 될까요? 노야를 불쾌하게만 만들 거예요.”
“내가 부친과 말다툼할 거라고 누가 그러든?”
한안은 침착하고 느긋하게 탁자 위의 책장을 넘겼다.
“그저 좋은 일을 서둘러 성사시키려는 것뿐이야.”
급람은 또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급히 집 밖에서 들어오는 주홍으로 인해 차마 할 수 없었다. 주홍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문을 닫고 다시 창문까지 잘 잠갔다. 평소와 달리 허둥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급람과 한안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주홍은 다시 창밖을 살펴보고는 빠른 걸음으로 한안의 곁으로 걸어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소저, 일이 생겼습니다!”
한안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천천히 말해도 괜찮아.”
주홍은 숨을 돌렸다.
“위 왕과 노야께서 대청에서 상의 중이십니다. 이미 2소저를 세자의 측비로 시집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다음 달에 바로 시집간다 합니다.”
급람이 놀라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 그녀가 측비 지위를 차지할 수 있어?”
한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네가 말한 일이 생겼다는 것은 대체 무엇이냐?”
주홍이 입술을 깨물고 근심스레 한안을 보았다.
“세자께서 요구하시길 측비를 부에 들이기 전에 소저와의 혼사를 결정해 달라고요. 내년에 소저께서 급계하시면 바로 세자와 성혼한답니다!”
위여풍과 성혼?
한안 손 위의 책이 탁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표정은 흔들림 없었다.
급람도 멍해졌다. 그녀들은 한안이 위여풍을 공경하되 가까이하지 않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어째서 한안이 경성의 소녀들이 너나없이 마음에 두고 달려드는 사람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를 취하다 못해, 혐오하기까지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중에 위 세자를 가까이 하게 되자 그가 어떤 인물인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위여풍은 소문 속의 내용과 달랐다. 몇 차례 위여풍과 한안이 대화할 때 두 여종은 현장에 함께 있었고 그녀들은 그가 좋은 배필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한안이 위여풍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 것은 둘째로 친다 하자. 하지만 이 혼사만 단독으로 두고 말한다 해도 장어산이 위왕부에 들어가기 위해서 완수해야 할 거래 같지 않은가.
한안은 웃었다.
“나는 괜찮아. 너희는 먼저 나가서 일 보렴.”
급람과 주홍은 여전히 조금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한안의 얼굴이 침착한 것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방을 물러났다.
한안은 방 안에 앉아서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러나 마음속은 바다가 뒤집히는 것처럼 평온하지 않았다.
삶을 다시 되풀이해도 위여풍과의 관계를 피할 수 없는 걸까?
무책임하게 어디론가 사라져버릴까. 그러나 황제의 땅이 아닌 곳이 없으니, 그녀가 정말로 달아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요행히 달아난다 해도 일평생 전전긍긍 살아야 했다. 그럼 남겨진 동생 한명은 어떻게 해야 하나? 차마 그에게 함께 도망가자고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를 부중에 홀로 남겨두고 심중에 악귀를 품은 무리들을 상대하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천 번 만 번 따지고 생각했지만, 위여풍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짐작할 수 없었다. 주씨 두 자매는 온갖 방법을 다 생각하여 반드시 이 혼사를 완성할 것이다. 한안 자신은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설마 그냥 이렇게 앉아서 죽기만 기다려야 하나?
아니야!
품속에서 돌연 매화자가 빠져나왔다. 한안은 매화자를 손안에 꽉 쥐고는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 사람이 귓가에 대고 했던 낮은 말이 떠올랐다.
‘만약 힘든 일이 있거든, 바로 현청왕부에 와서 본왕을 찾으면 된다.’
만약 힘든 일이 있거든, 힘든 일이 있거든…….
한안은 그의 말이 생각나 벌떡 일어섰다. 설마 그는 이런 일이 일어날 걸 예상했던 건가?
한안은 다시 나무 의자에 앉으며 오래도록 깊이 생각했다. 그리고 탁자 위의 편지지를 끌어당겨 붓을 들고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달이 뜨도록, 한안은 줄곧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급람과 주홍은 바깥에서 방을 지키면서도 근심을 숨기지 못했다. 달빛이 깊이 가라앉을 때가 되어서야 내실의 문이 열렸다. 한안이 문 입구에 서서 빙그레 웃으며 그녀들을 보았다.
“나 배고파.”
주홍은 서둘러 소주방에 가서 밥과 반찬을 준비했다. 한안은 급람의 곁으로 걸어가 서신 한 통을 그녀의 소매 속에 찔러 넣었다.
“소저…….”
급람의 표정이 변했다.
한안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이 편지를 몰래 현청왕부에 보내라.”
급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안은 그녀가 밤 풍경 속으로 사라지는 신영을 보며, 눈빛이 무겁게 변했다.
해야 할 일은 다 했다. 이제 어떤 결과든 오직 부운석에게 달려 있다.
현청왕부.
성뢰는 무척 따분해하며 병서를 뒤적였다.
“경성으로 돌아온 지 오래됐는데, 황상께서는 내가 전쟁터에 가길 허락하지 않으시네. 서융 쪽에 소소한 움직임이 끊임없는데 여기서 이렇게 재미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어야 하다니.”
부운석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문서 한 장 한 장이 높디높은 무더기를 이루며 쌓여 있었다.
“너 여기에 얼마나 오래 있을 셈이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성뢰가 즉각 몸을 곧게 펴고 앉았다.
“이봐, 나를 내쫓으려는 건 아니겠지? 장군부가 어떤 곳인지 너도 알잖아. 나는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아.”
부운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온종일 현청왕부에 머물러 있었잖아. 바깥에서 쑥덕거릴 게 겁나지 않으냐?”
성뢰는 잠시 생각하더니 사악하게 웃었다.
“뭐가 겁나. 네가 남색가라는 명성이 있으니 기껏해야 나하고 네가 사통했다는 소문이나 돌겠지. 이 몸이 마침 너를 도와 근심을 덜어주는 게 아니냐? 너의 황형님께서 너를 장가들이는 일에 마음 쓰지 않으시도록 말이야.”
성뢰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돌연 무언가 떠올랐는지 연거푸 손을 내저었다.
“안 되지. 황상께서 만약 너와 나 사이에 뭔가 있다는 걸 아시면 내게 반드시 중벌을 내리실 테니 절대 안 돼.”
부운석은 한 번 비웃더니 또 말이 없었다. 바로 그때, 문밖에서 젊은 사내종이 와서 알렸다.
“왕야, 밖에 한 낭자가 소인에게 서신을 주었습니다. 말하기를 왕야께 가져다드리는 것이라 합니다.”
부운석은 고개를 숙여 잠깐 생각한 다음, 그 젊은 사내종의 손에서 서신을 받아 열었다.
젊은 사내종이 간 후 성뢰가 가까이 다가왔다.
“너, 왕비를 얻지 않을 거라고 말하더니 지금까지 내가 몰라봤네. 말해 봐, 뉘 집 낭자의 연서야?”
부운석은 싸늘하게 그를 한 번 보고는 편지지를 펼쳤다. 반질반질 윤이 나고 깨끗한 편지지 위에는 한 줄 문장이 용이 날고 봉황이 춤추는 듯 자연스럽고 생동감 있게 쓰여 있었다.
- 내 낭군이 아닌 당신에게 신묘한 계책이 있습니까?
그 필적은 기운이 웅장하고 막힘이 없으며 힘이 있었다. 부운석은 궁중 연회에서 한안의 필적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의 필적은 풍치가 있고 멋스러웠으며 맑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지금은 호방하고 웅건하며 힘이 넘치는 것이 대장부의 필체 같았다. 편지지 위에 이 한 문장 외에 낙관조차 없었다. 만약 그가 상황을 잘 알고 있지 않았다면, 이 위에 쓰인 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말이지 그녀답게 한결같이 교활한 일 처리 방식에 딱 들어맞았다. 다른 사람의 수중에 떨어진다 해도 이 편지의 내용에서는 어떤 정보도 얻어낼 수 없을 것이었다.
“그 위에 뭐라 써 있는 거야?”
성뢰는 몹시 근질거렸다. 편지의 내용을 보고 싶었지만 부운석의 차가운 눈이 꺼려졌다.
“아무것도 아니다.”
부운석은 편지를 다시 접어 봉투 안에 집어넣고는, 생각 끝에 옆의 목함 안에 넣었다. 입가에서 저도 모르게 옅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성뢰는 그 모습을 보고는 크게 놀랐다.
“네가 웃어? 그 편지에 쓰인 것이 사랑 시라는 데 내가 장담하지. 언제 혼인하는 거야?”
“쓸데없는 말.”
부운석이 엄하게 꾸짖었다. 날씬한 손가락이 찻잔 곁을 가볍게 두드렸다. 어쨌든 완전히 바보는 아니군.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할 줄은 아는 걸 보니.
강하고 고집 세며 참을성 많은 그 사람이 마침내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을 배운 것을 보면 모든 일을 스스로 이를 악물고 참으며 짊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도움을 청한 대상이 그라는 것이다. 부운석의 순간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그러나 문제는 위여풍이었다. 그의 눈과 눈썹이 점점 차가워졌다. 정말이지 너무도 분수를 모르는구나.
잠시, 그는 탁자 위에서 편지지 한 장을 꺼내어 붓을 들고 몇 자 적은 다음 잘 접어서 봉투에 집어넣었다.
성뢰가 이상해하며 물었다.
“너, 사랑 시 한 수 적어 답장하려는 건 아니지?”
부운석은 고개를 돌렸다.
“서융이 근래 들어 한층 제멋대로 굴고 있어. 이미 패한 병사이긴 하나 흉심은 죽지 않았지.”
돌연 공무를 이야기하니 성뢰의 얼굴빛도 장중해졌다.
“또다시 악전고투를 치러야 해.”
부운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내년에 너와 함께 출정할 생각이야.”
“그게 가능해?”
성뢰가 놀라 되물었다. 물론 자신도 부운석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전투를 치를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너의 황형님께서 분명 동의하지 않으실 거야. 7년 전 네가 전쟁터에 나갔다 돌아온 후에 얼음덩이 같은 성격이 됐지. 황상께서 내게 꽤나 푸념을 하셨어. 지금 네가 다시 가겠다고 했다가는 난리가 나지 않겠어?”
“동의하지 않으시면 또 어떠냐?”
부운석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얼굴엔 온통 안하무인의 기색이었다.
“하물며.”
그의 목소리는 맑고 그윽하여 듣기 좋았고 눈 속에 웃음기가 스쳤다.
“왕비를 부중에 남겨두면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실 게야.”
“네 말은……?”
성뢰가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
“처를 맞으려 한다. 어떠하냐?”
그날 밤.
한안의 잠자리는 편안하지 못했다. 꿈속에서 전생의 상황이 무대 위의 연극처럼 반복되었다. 봉황 장식이 수 놓인 예복을 입은 장어산은 자신에게 독주를 마시라고 강요하고 있었고 그 옆으로 급람과 주홍이 무력하게 반항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뒤이어 들리는 유모의 처참한 비명까지. 그리고 늘 마지막. 시선 끝엔 감색 관화가 있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전신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이마 위는 땀으로 가득했다. 마음을 안정시키고 밖을 보니 하늘이 이미 밝았다. 최근 며칠 장부의 일 때문에 시정 사부에게서 무예를 배우지 못했다. 한안은 머리카락을 단정히 하며 일어나 급람을 불렀다.
급람의 도움으로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으니 한안의 마음이 안정되었다. 창 앞으로 걸어가니 바깥에서 눈처럼 하얀 비둘기 한 마리가 푸드득 날아와 그녀의 책상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더니 머리를 기울여 한안을 보았다.
그 비둘기는 신통하게도 눈처럼 하얀 것이 아주 질 좋고 아름다운 옥 같았다. 한 쌍의 눈은 혈석처럼 붉었고 그냥 보기에도 평범한 새가 아니라 대부호 집안에서 기르는 것 같았다.
급람이 놀라고 기뻐하며 말했다.
“정말 예쁜 비둘기네요!”
주홍이 예리한 관찰력으로 비둘기 다리에 무언가 묶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물건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한안도 비둘기 다리에 묶인 작은 꾸러미를 알아차렸다. 한안은 손을 뻗었고 비둘기 또한 한안의 손을 피하지 않아 한안은 수월하게 비둘기를 잡을 수 있었다. 비둘기는 가볍게 몸부림을 한 번 쳤다. 한안은 비둘기 다리에서 작은 천 꾸러미를 풀어냈다. 급람이 약간의 옥수수알을 찾아와 비둘기에게 먹였다. 한안은 천 꾸러미를 가지고 침상 앞에 걸어가서 앉았다.
천 꾸러미 안에는 돌돌 말린 종이가 있었다. 한안은 펼쳐서 보았다. 종이에는 단 네 단어만이 쓰여 있었다.
- 따로 좋은 사위를 찾는다.
그의 글자는 그의 성격처럼 높은 곳에서 군림하는 듯한 오만함을 띠고 있었다. 사람을 한 명 한 명 상대하지 않는 가운데 중생을 굽어보는 듯했다. 그는 풍채와 재능이 무한하고 냉담하지만 맑은 아름다움을 띠고 있으며 둘도 없이 신비로웠다.
따로 좋은 사위를 찾는다?
한안은 글자를 보고 혼란스러워졌다. 부운석의 이 말은 무슨 뜻인가? 그녀가 다른 남자를 찾아서 시집가야 한다는 건가?
그녀는 아직 급계도 하지 않았고 장부에서 총애 받지 못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다. 지체 높은 가문에서는 그녀 같은 며느리를 원할 리 없었다. 또한 위여풍이 그녀와 혼인할 의사가 있다는 소식이 널리 퍼졌으니 위왕부의 압력에 눌려 누가 감히 그녀를 처로 맞으려 할까?
부운석이 그녀를 가지고 장난치는 것일 리는 없는데?
부운석이 그런 사람이 아님을 직감한 한안은 온갖 생각을 다 쥐어짜, 조정의 세도가 중 위왕부와 대등하게 맞설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 머릿속에 돌연 한 사람이 스쳐 지나가자 한안은 멍해졌다.
부운석의 뜻이……. 그 좋은 사위라는 게……. 그 자신을 가리키는 건 아니겠지?
한안은 부운석이 이전에 농담처럼 한 말이 떠올랐다.
- 만약 정말로 네가 본왕에게 시집오고 싶다면 본왕은 내일 바로 사람을 청하여 궁합을 맞추어 보겠다.
한안의 뺨이 조금 달아올랐다. 사실, 부운석은 그녀에게 안도감을 주는 사람이어서 함께 있으면 모든 문제가 순리적으로 해결될 것 같았다. 몇 차례 함께 하게 되면서 한안은 그가 두려우면서도 그와 친해지고 싶었다. 그 사람의 몸에는 흡인력이 있는지 사람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그를 찾게 만들었다.
하지만 부운석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는? 한안은 눈썹을 찌푸렸다. 오래된 벗을 돕는 것 같다고 할까? 아니면 사리 분별 못 하는 어린아이를 보살피는 것 같다고 할까? 적의가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남녀간의 애정이 드러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 그가 자신을 처로 맞으려는 것은 무슨 목적이지?
한안의 마음은 조금 혼란스러웠다. 편지를 꽉 움켜쥐었다. 위여풍에 비한다면야 차라리 부운석에게 시집가기를 원했다. 하지만 당당한 현청왕이 어째서 이 보잘것없는 5품 관원의 딸을 처로 맞이하려는 걸까? 만약 부운석이 한안 자신의 미모와 재능에 반했다고 한다면 한안은 턱이 빠지도록 웃어댈 것이었다.
그럼…… 그가 날 잘못 알아보았기 때문일까?
그녀의 마음이 순간 좀 울적해졌다.
사랑 없는 인연도, 인연이라고 칭할 수 있을까?
부용원 안.
교몽은 미 이낭이 금사연와(金絲燕窩: ‘금사연’이라는 제비의 제비집)를 마시는 것을 시중들고 있었다. 작은 그릇에 담긴 연와가 빠르게 바닥을 드러냈다. 미 이낭은 손수건을 잡고 입가를 닦으며 혐오스러운 표정을 드러냈다.
“날마다 마시니 아주 토할 것 같아!”
교몽이 웃으며 말했다.
“노야께서 이낭이 회임한 것을 아신 후부터 주방에 매일 이낭에게 보양식품을 더 첨가하라고 분부하셨어요. 다 마시지도 못할 정도예요.”
미 이낭은 초조하게 몸을 일으켰다.
“자꾸 말해 뭐해. 모두 배 속의 이 아드님을 위해서인 걸!”
그녀는 교몽을 보았다.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났으니 아직도 움직임이 없으면 아마도 노야께서 의심하실 거야.”
미 이낭은 분개하며 말을 이었다.
“주씨가 무너지고 나니까, 불여우 언니가 늘었어! 정말 후안무치하지, 온종일 눌어붙어서 뭐 하는 거야. 모르는 사람은 그년이 노야의 사람인 줄 알 거야!”
교몽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부중에 여러 하인들이 다 보았답니다. 주 부인과 노야의 관계가 애매하다고…….”
미 이낭이 들고 있던 그릇을 내던지자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노야께서 아마도 그 여우 년 때문에 정실로 올리는 일을 언급하지 않으시는 게야. 주씨가 정말 수단이 좋구나. 그년들 일가족이 다 남자를 홀릴 수 있다니! 몰염치한 년!”
교몽이 망설이다가 말했다.
“이제 2소저가 위왕부로 시집가니 공동원 사람들은 더욱 제멋대로 날뛸 겁니다.”
미 이낭이 차갑게 웃었다.
“어떻게 제멋대로 날뛸 수 있겠어? 위에 세자비가 있어 누를 게 아니냐. 내 보기에 4소저도 만만한 사람이 아니야. 정말 부에 들어가면 장어산은 그녀의 적수가 못 돼. 주씨는 좋은 혼사를 잡아 지위가 올라가게 됐다고 여기겠지만, 그때 가서 어떻게 죽는지도 모를걸.”
교몽은 고개를 끄덕였다.
“노비도 그리 생각합니다. 그러니 주 이낭은 분명 고민스럽겠지요. 4소저가 위부에 시집가길 원하지 않겠지만 4소저의 혼사가 결정되지 않으면, 2소저는 위왕부에 시집갈 수 없으니 말이에요.”
“네 말뜻은……?”
미 이낭이 교몽을 보았다.
“주씨는 지금 한창 정신없이 바쁠 때이니 실수가 생기게 마련이지요. 이낭께서 그녀의 거동에 주의를 기울이셨다가 잘못을 잡아내시면…….”
교몽은 웃으며 말을 끝맺지 않았다.
미 이낭의 눈이 환해졌다.
“네 말이 맞다. 설령 잘못할 데가 없다 해도 그년은 잘못을 저지르게 될 게야.”
한편 장사양은 장어산의 혼사를 기획하고 준비하느라 한창 바빴다. 그가 보기에 한안의 혼사는 이미 당연시되어 근본적으로 착오가 생길 리 없기에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런 덕분에 아무런 기척도 없이 누군가 바둑판 위의 돌을 전부 헝클어 놓은 것을 알지 못했다.
*
“네가 짐에게 위왕 세자와 우상 천금의 혼사를 내리라 청하는 것이냐? 어째서?”
높은 자리에 앉은 천자가 드물게 경악한 표정을 드러내었다. 깨끗하고 욕심 없는 황동생이 돌연 신하의 종신대사에 관심을 기울이니 어찌 된 일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자기 중매쟁이가 되고 싶어졌다는 말은 하지 말거라.”
부운석이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우상은 금년 들어 한층 더 제멋대로 날뛰고 있습니다. 위왕도 그렇지요. 하지만 이 두 파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니 오히려 몹시 심상치 않다고 할 것입니다. 신이 듣기로 위왕 세자가 장부 4소저를 세자비로 맞이하려 한다 합니다.”
그는 황상을 한 번 보고 일깨우듯 말했다.
“장사양은 며칠 전 막 관직이 강등되었습니다.”
황상은 생각에 잠긴 듯 그를 보며 그가 계속해서 말하기를 기다렸다.
“일이 비정상적으로 진행되면 반드시 탈이 나는 법입니다. 장사양은 5품 관원인데, 위왕이 우상과의 인연을 버리고 장사양과 인척 관계를 맺고자 하는 것은 반드시 음모가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간에, 위 왕은 이미 황상의 눈엣가시지요. 그에게 유리한 일은 반드시 달성되어서는 안 됩니다.”
황상은 길게 음, 탄성을 자아냈다.
“네 말에 일리가 있구나. 하지만 위왕과 우상이 사돈 관계가 되면 변함없이 세력이 증가할 게 아니냐. 어쩌면 그 장가 소저와 위 세자가 어려서 정혼한 것인지도 모르지. 어쩌면 장가 소저와 위왕 세자 쌍방이 서로 사랑하는 건지도 모르고?”
부운석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우상의 천금이 위 세자에게 푹 빠져 있습니다.”
“그건 또 어찌 된 게야?”
황상은 흥미진진하게 그의 표정을 관찰했다.
“말해 봐라. 위와 장 두 부가 인척이 되면 안 되는 진정한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냐?”
자신의 황동생은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매번 말하는 것이 특별히 그럴 듯한 때는 바로 사심이 있을 때였다.
“제가 장 4소저를 비로 맞이하고 싶습니다.”
부운석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황상은 거의 펄쩍 뛰어 일어날 뻔했다.
“네가 위왕부의 혼사를 강탈하길 원한다고?”
“황상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길 원한다면 그런 거겠지요.”
부운석은 눈썹을 찌푸리며 ‘강탈’이라는 글자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음을 뚜렷이 드러냈다.
황상은 세심히 생각했다. 장 4소저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었다. 지난번 궁중 연회에서 그린 그녀의 그림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어린 아가씨를 주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장사양의 딸이었다.
황상은 생각을 끝내고 부운석을 보았다.
“모후의 뜻은 장가 소저와 위 세자가 잘 어울리는 짝이라고…….”
부운석의 눈빛이 날카롭게 그를 보았다.
“그분이 어찌 아십니까?”
황상은 그의 얼굴을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오래 전에 그분께 들었다. 당시 짐도 모후께서 어째서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장 4소저를 이처럼 마음에 들어 하시는가 하고 이상히 여겼다.”
부운석이 침묵하며 말이 없는 것을 보고 황상은 말을 이었다.
“모후께서 이 혼사를 지지하시니 너의 요구는 아마도 이룰 수 없겠구나.”
부운석은 오래도록 침묵하다가 돌연 입꼬리를 치켜 올렸다. 황상은 그의 모습을 보고 위축이 되었다. 부운석이 저 표정을 지을 때면 주위의 사람들이 재수 없는 일을 당했다.
부운석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신도 황상께 한마디 알려드리러 온 것뿐입니다. 결코 황상께 무슨 일을 해주십사 청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는 웃는 듯 마는 듯 높은 자리 위의 천자를 응시했다. 그의 말투는 뭐라 표현할 수 없이 기이했다.
“어쨌든 모두 제가 원하는 대로 될 것입니다.”
그는 ‘미신’이라고 칭하는 것조차 하려 하지 않았다. 황상은 모골이 송연했다. 자신의 동생은 수려하고 우아하여 신선과 같이 보이지만 손을 쓸 때는 정말로 가차 없었다. 불길하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가 관례에 벗어난 일을 저지르는 건 아닐지 몹시 두려웠다. 솔직히 말하면 황제는 몇 년 동안 부운석의 혼사 때문에 애를 태웠다. 매번 헛수고로 끝나다가 부운석이 나타나서 먼저 스스로 왕비를 들일 마음이 있다고 말하니 기뻐서 어쩔 줄 몰라 곧장 성지로 혼사를 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어째서 그가 처로 맞이하겠다는 사람이 장한안이란 말인가? 높은 자리에 있는 천자로서 세상 천태만상을 두루 다 아노라 하며 허풍을 떨고 있긴 하지만 젖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어린 애 하나가 어찌 이렇게 많은 관심을 얻을 수 있는 것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부운석은 문 앞까지 걸어갔다가 무언가 떠올린 것처럼 되돌아왔다. 그는 나른하게 말했다.
“황상께 말씀드리는 것을 잊었습니다……. 내년 봄이 되면 바로 서융으로 출정을 나가겠습니다. 후손을 남기고 싶었으나 필요가 없어졌네요.”
제왕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이 딱 벌어지는 것을 무시하고 부운석은 그를 쓰러뜨릴 최후의 한마디를 던지고 몸을 돌렸다.
“이 평생, 그녀가 아니면 아내를 얻지 않겠습니다.”
“서라!”
황상이 격분하여 이를 부득부득 갈며 소리쳤다.
“또 무슨 일이 남았습니까?”
부운석은 몸을 옆으로 기울인 채, 가슴 앞으로 내려온 자신의 까만 머리카락을 손에 잡고 황상의 말을 기다렸다. 그림과 같은 자태는 맑고 차가워 익힌 음식은 먹지 않는 신선인 듯했다. 그러나 누가 알 수 있을까. 저 거죽 아래 악질적인 심보가 들어있는 것을. 대명천지에 황상을 위협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부운석뿐일 것이다.
“여봐라! 성지를 작성하라!”
황상은 몹시 격분하여 부운석을 한 번 노려보았다.
“짐이 바로 혼사를 내릴 테니 너는 경성에 꼼짝 말고 잘 있어야 할 것이다! 어디도 갈 생각 하지 말고!”
황상의 이런 표정을 본 것이 얼마 만이던가? 부운석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저 자리에 앉은 후로 그는 줄곧 스스로에게 가면을 씌웠다. ‘그는 좋은 제왕이다.’ 라고 말이다. 자신의 모든 사사로운 감정을 포기한 좋은 제왕. 그에게는 오직 천하 대의와 백성만이 있을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황상이 이런 표정을 드러낸 것을 본 때는 그가 열네 살 되던 그해, 황상의 반대를 아랑곳하지 않고 갑옷을 입고 전쟁터에 나가던 그날이었다.
부운석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황형께서 이처럼 돌보아 주시니 운석은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는 ‘황형’이라 불렀다. ‘황상’이 아니라. 훨씬 친근한 호칭이었다. 황상의 표정이 얼마간 온화해졌다.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짐이 또 너를 위해 모후께 죄를 지었구나.”
“그분은 우리의 진정한 모후가 아니십니다.”
부운석이 차갑게 웃었다.
“함부로 구는구나!”
황상은 소리를 낮추어 훈계했다. 사방에 사람이 없는지 살피고 비로소 고개를 돌렸다.
“짐은 줄곧 이해할 수가 없구나.”
부운석과 황태후의 관계는 줄곧 좋지 않았다. 부운석과 황상은 황태후의 소생이 아니라 정비 소생이었다. 황태후 슬하에 아들이 없었고 정비는 일찍 죽었기에 황태후는 정비의 두 아들을 양자로 들였다. 나중에 선황께서 황상을 태자로 세웠고 황상과 부운석은 줄곧 황태후를 더욱더 공경하고 사랑했다. 황태후가 그들을 대할 때 친자식처럼 대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어째서인지 알 수 없으나 부운석과 황태후는 점점 소원해졌다. 매번 황태후를 언급할 때면 부운석은 얼굴 가득 냉담한 모습이었다. 황상은 의심이 일었으나 그에게 물어도 그저 그와 태후 간에 무슨 오해가 있다고만 말할 뿐이었다.
“천하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많습니다.”
부운석은 이전의 냉담한 모습을 회복했다.
“황상께서 시간이 있으시면 두 황자를 좀 더 많이 돌보십시오. 며칠 전 제가 태자를 만났는데 몹시 상심해 있었습니다.”황상의 표정이 변했다.
“그 애는 그릇이 못 된다. 온종일 그저 놀 줄만 알지, 조금도 진전이 없어. 정말이지 짐이 화나 죽을 지경이다. 만약 그 애가 7황자의 반만이라도 사리 분별을 한다면…….”
“그럼 천하가 재난을 입겠지요.”
부운석은 그의 말을 받았다.
“7황자는 최근 소금 상인을 관리하는 관원들과 가까이 지내고 있습니다.”
그는 차가운 눈으로 말했다.
“황상께서 사람을 파견하여 조사해 보셔도 무방합니다.”
“이것은 짐의 성지에 대해 네가 주는 사례인 셈이냐?”
황상이 웃으며 말했다.
“짐이 그 김에 같이 네게 혼사를 내려주어도 되는데.”
“필요 없습니다.”
부운석이 담담하게 말했다.
“어떤 일은, 스스로 처리하는 것이 가장 좋은 법이지요.”
위왕부.
위청은 자신의 아들을 보고 있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위여풍도 처를 얻어 아들을 볼 연령이 되었다. 위여풍은 살면서 지금처럼 조바심을 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장부의 그 어린 소녀가 여러 번 그의 냉정을 잃게 하니 위왕부의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 아니었다.
“너는 도대체 어찌할 생각이냐?”
그가 물었다.
위여풍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부친, 우리는 어쨌든 그 물건을 찾아야 합니다. 장한안이 세자비가 되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하지요.”
위청의 얼굴빛이 살짝 가라앉았다.
“너는 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가 모를 거라 생각하느냐? 흥, 네가 누구를 처로 얻든 상관없이 성이 ‘장’이기만 하면 된다. 장어산이 시집오는데 또 구태여 장한안을 원할 필요가 있느냐? 아비가 보기에 장한안은 계략이 깊은 아이라 좋지 않아 보인다.”
위여풍은 말이 없었다.
위청은 그의 얼굴빛을 보았다.
“너, 그 애를 좋아하느냐?”
위여풍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저 언짢을 뿐입니다. 그녀는 본래 제 처가 되어야 하는데 매번 저에게 냉담하게 대했습니다. 만약 그녀를 처로 맞으면 마음껏 분풀이를 할 수 있을 겁니다.”
위청은 그가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는 것을 보고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미녀는 화의 근원이다. 내 보기에 이 일이 반드시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구나.”
말이 씨가 되는 것이다.
황상의 혼인 하사가 내려온 날, 사람들은 생각지도 못한 일에 모두 놀라고 말았다.
위청이 성지를 받은 후, 위여풍은 예의를 내팽개치고 성지를 한 손으로 움켜쥐고 공공에게 물었다.
“황상께서 어찌 갑자기 혼인을 하사하시는 겁니까?”
우상의 천금이 그와 가문이 잘 어울리긴 하지만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의심이 들 만했다. 게다가 바로 한안과 자신의 혼사가 결정될 때쯤에 떨어진 성지였다. 설마 한안이 또 윗전과 통하는 능력이 있어 황상의 도움을 충분히 얻어낼 수 있었던 걸까?
공공은 그를 곁눈질로 한 번 보고 날카로운 소리로 말했다.
“황상의 용심을 제가 감히 마음대로 추측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세자의 질문은 저도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위청이 앞으로 한 걸음 나가 그에게 아주 큰 돈주머니를 쥐어 주고 웃으며 말했다.
“공공께서 수고가 많소. 그러나 본관도 의혹이 생기오. 이전에 황상께서도 내 아들의 혼사에 대해 별다른 계획이 있다는 말씀이 없으셨소.”
그 공공은 세상 물정에 밝은 사람이었다. 손 위 돈주머니를 더듬어 보고 눈알을 굴린 다음 조금 가까이 가서 몇 사람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도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만 그저 아는 것이라고는 그저께 현청왕께서 황상을 한 차례 찾아오셔서 황상과 서재에서 오래도록 말씀을 나누셨다는 것 정도입니다.”
더 이상의 설명이 없었다. 위여풍은 현청왕의 이름을 듣는 순간, 그와 한안의 관계가 얕지 않은 것을 보았던 때를 떠올렸다. 저절로 분노의 불길이 마음속에 타올랐다.
위청이 공공을 보내고 막 무언가 말하려 했을 때, 방 안에는 이미 위여풍의 신영은 보이지 않았다.
한편 위여풍은 분노하여 새로 연 주루에 화주를 마시러 갔다. 그는 겸손한 군자의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며 스스로의 모습을 고결하게 지켜온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명성을 훼손할 만한 행동을 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황상의 성지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고 이 일이 한안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생각해 보면 자기 평생 한 여인에게 이렇게 마음을 쓰는 것은 처음인데 헌신짝처럼 버려진 게 아닌가. 분노하고 또 증오했다. 장한안이 자신의 호의를 무시하는 데 화가 났고 부운석이 남의 처를 강탈해 가는 것을 증오했다. 그의 마음속에서 한안은 이미 바람피운 처가 되어 있었고 부운석은 남의 인연을 망가뜨린 간부였다.
술이 한 잔 두 잔 부어지고 그는 취기가 잔뜩 올랐다. 위여풍은 그 사람을 떠올리기만 하면 원한이 새록새록 일어났고 성지를 공포한 황상조차 원한의 대상이 되었다.
한 손이 그의 수중에서 술잔을 뺏어가자 위여풍은 분노했다.
“누구냐?”
“나다.”
낮게 가라앉은 경멸조의 목소리에 그는 몸서리를 쳤다. 취기가 순간 확 깼다. 자기 맞은편에 앉은 화려한 복장의 남자를 보고 멋쩍게 말했다.
“7전하.”
7황자는 술을 한 잔 가득 따라서 천천히 한 모금 마시고 그를 보았다.
“성지의 일은 나도 들었다. 여인 하나에 불과한데 네가 이렇게 낙담할 가치가 있느냐?”
위여풍은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가 불분명하여 알아듣기 어려웠다.
“전하께서 모르시는 게 있습니다. 이 일은……. 전부 현청왕이 조정한 것입니다.”
7황자는 그러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위여풍이 이렇게 말할 것을 짐작한 듯 웃기만 했다.
“본전(本殿: ‘전하’ 호칭이 붙는 이가 스스로를 높여 지칭하는 말)은 이미 그들 둘 사이가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간파했다. 왕숙은 본래 아무것도 눈에 들이지 않는데 그 조그만 아이에 대해서만 누차 도움의 손길을 뻗더구나. 만약 공교로운 일이라 한다면 너무 지나치게 공교롭지.”
그는 위여풍을 응시했다.
“그저 네 운이 안 좋았던 것이다. 부정한 여인한테 네가 구태여 연연할 필요가 있느냐?”
위여풍은 마음속이 복잡했다. 그도 언제부터 한안을 마음에 두기 시작했는지 잘 몰랐다. 다만 처음 한안을 보았을 때부터 그녀가 다른 사람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느꼈다. 나중에는 그녀가 자기에게 냉담하자 더욱 마음에 응어리가 맺혔다. 한안은 그런 태도로 자신을 대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그녀가 자신의 세자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깊디깊은 절망에 빠졌다. 세자비 자리는 천생 그녀를 위해 준비된 것인데 말이다. 하지만 지금 모든 것이 자신의 손아귀를 벗어나 버렸다. 그는 어찌할 도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마음이 아팠다.
7황자는 술잔을 움켜쥐었다.
“왕숙의 수완은 본래부터 고명하다. 부황께서 또 왕숙을 심히 신임하시니 그가 들고나온 요구를 부황께서 승낙하지 않으실 방법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웃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왕숙을 좋아하지 않아. 마치 이 세상의 좋은 일은 그가 다 차지하고 있는 것 같잖아. 어떻게 이렇게 운이 좋은 사람이 있을 수가 있겠느냐?”
위여풍의 얼굴빛이 움직였다. 7황자의 말 속에서 무언가를 알아들은 것 같았다. 망설이다가 고개를 들었다.
“전하…….”
7황자는 술잔을 두드렸다.
“너는 본전의 사람이다. 남에게 괴롭힘당하게 둘 수 없지. 위왕의 말을 들으니 너는 줄곧 조정의 파벌 다툼에 참가하길 원치 않는다 하더구나.”
이것은 사실이었다. 위여풍은 문인임을 자처하여 조정의 패거리 짓는 행위를 거슬려했다. 비록 위 왕이 명확히 자기가 7황자 쪽 사람임을 표시했지만 위여풍은 그저 눈 감고 모른 척할 뿐 자신의 태도를 명확히 표시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부운석은 이미 그에게 눈엣가시요, 살 속의 가시가 되었다. 부운석을 꺾고 싶다면 7황자의 힘을 빌려야 할 것이었다.
생각이 이에 이르자 그는 몸을 굽히고 무릎을 꿇었다.
“속하는 영원히 전하를 따르기를 원합니다. 감히 배반할 마음을 먹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속하’라는 말을 써서 자신의 신분을 낮추고 7황자를 높이 추켜세웠다. 동시에 자신의 충심을 표명했다. 7황자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직접 그를 바닥에서 일으켜 세웠다.
“여풍은 이렇게 조심스러울 필요 없다. 너와 나 두 사람은 한편이니 허례를 차릴 필요 없지.”
손에 힘을 주자 술잔이 소리를 내며 동시에 부서졌다.
“사실 네가 장가 4소저를 취하려 한다면 방법이 하나 있지.”
위여풍은 절망 속에 한 줄기 살길을 찾은 것 같았다. 놀라고 기뻐하며 간절하게 물었다.
“무슨 방법입니까?”
7황자는 여유만만하게 입을 열었다.
“기왕 황상께서 혼인을 하사하셨으니 이가기는 숙명적으로 너의 세자비이다. 그러니 너는 장 4소저를 정실로 취할 수 없지. 그럼 그녀를 첩으로 맞으면 된다.”
첩으로 맞는다? 위여풍은 멍해졌다가 무의식적으로 거절했다.
“안 됩니다…….”
“그녀는 지금 그저 정5품 관원의 딸이야. 너는 높디높은 친왕 세자고.”
7황자의 목소리가 살짝 가라앉았다.
“설마 아직도 서로의 위치가 어울린다고 생각하느냐?”
위여풍은 7황자의 말을 귀담아듣고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7황자도 조급해하지 않고 다른 잔에 천천히 술을 따라 마셨다. 오랜 후에야 비로소 위여풍의 잔뜩 가라앉은 대답이 들렸다.
“위왕부에 들어올 수 있는 것만으로 그녀의 복이지요.”
“좋아!”
7황자는 매우 기분이 좋았다.
“자, 자, 자, 본전과 통쾌하게 몇 잔 마시자!”
한편, 주씨도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랐다. 황상의 혼인 하사로 한안은 위왕부에 들어갈 기회가 없어졌다. 장어산도 기회가 없어진 거라면? 그러면 어쩌면 좋지?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한안이 그렇게 증오스러울 수 없었다. 한안 때문에 어산의 미래가 불투명해졌으니 실로 재수 없는 년이었다.
대주씨는 그녀에게 조급해할 필요 없다고 위로했다. 황상의 혼인 하사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것이니 위여풍의 말을 들어보고 그다음에 어찌해야 할지 정하는 편이 낫다고. 아마도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과연, 이튿날 대주씨는 한안을 세자비로 들일 수 없게 되었으니 그녀를 첩으로 들이려 한다는 위여풍의 전갈을 들었다.
측비가 아니라 첩이다!
만약 이 일이 정말로 성사된다면 장어산은 한안에 비해 품계가 높았다. 일개 서녀가 적녀보다 지위가 높아지는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통쾌한 일이겠는가! 대주씨는 머리를 굴렸다. 짐작컨대 한안의 무슨 행동이 세자에게 밉보인 것이리라.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한안을 못 잡아먹어 안달일 필요가 있을까. 한안이 첩이 되면 장어산만으로도 그녀를 백방으로 못살게 굴 수 있었다. 더구나 줄곧 그녀를 눈에 거슬려 했던 우상의 천금은 언급할 필요도 없겠지.
가장 기뻐한 이는 장어산이었다. 한안과 함께 한 남자를 나누게 된 것은 불만이었지만 한안은 첩으로 시집가게 되었고 자신은 측비로 시집가게 되었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국면이었다. 한안이 세자비가 되리라 여겼는데 하늘이 무심하지 않아 그 천한 년이 이런 결말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장부 적녀면 뭐해! 총애 받지도 못하는 것! 나에 비해 신분이 높으면 또 어때! 남의 첩이 될 텐데!”
대주씨가 그녀를 나무라듯 말했다.
“너무 일찍 기뻐하지 마라. 내가 보기에 그녀가 동의할 리 없어.”
주씨는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았다.
“그년이 동의하고 말고가 있어. 노야께서 동의하시기만 하면 그년이 제아무리 원하지 않아도 얌전히 시집가야지.”
이전에 위여풍이 한안을 세자비로 요구를 했을 때는 주씨의 마음이 찢어질 지경이었다. 한안이 세자비가 되어 어산을 발아래 밟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한안의 신분이 첩실로 바뀌었으니 하늘로 날아갈 지경이었다. 그동안의 메스꺼움이 마침내 확 풀린 것 같았다. 어서 결정을 내려서 이 혼사를 서둘러 성사시켜야 했다.
급람은 알아온 정보를 한안에게 알리고 걱정스럽게 말했다.
“소저, 그들이 이러는 것은 세력을 믿고 남을 괴롭히는 겁니다. 소저께서 첩이 되시다니요. 그야말로 사람을 너무 심하게 업신여기는 거예요.”
유모도 몹시 분노했다. 잘 알지 못했을 때는 위여풍을 좋은 사람이라 보았는데 자기 소저를 첩으로 요구한다는 말을 꺼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한안의 입장에서 너무 큰 모욕이었다. 더욱 화가 나는 것은 서녀인 장어산이 측비가 된다는 것이었다.
주홍이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해요? 지금 노야와 위 왕 둘이 논의를 하고 있는데 아마 성사될 것 같아요. 곧 사람을 청해 궁합을 보게 할 거예요.”
한안은 차갑게 웃었다.
“거동이 빠르기도 하지. 정말 나를 호구로 여기는 건가?”
그녀는 말을 마치고 일어섰다.
“가자. 우리 가서 그 몰염치한 무리를 만나야겠다.”
장사양은 웃음 가득한 얼굴로 바닥의 나무 상자를 보고 있었다. 이 두둑한 납채(納采: 신랑 집에서 신부 집에 혼인을 구하는 행위) 예물은 아마도 상당한 값어치가 나갈 것이다. 위왕부는 과연 남을 압도할 정도로 부귀했다. 주씨 두 자매도 연이어 좋은 혼사라고 칭찬했다. 위여풍은 옆에 앉아 경멸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주씨가 말했다.
“정말로 남자는 재능이 출중하고 여자는 용모가 아름다우니 완벽한 한 쌍이네요. 반드시 화목하실 겁니다.”
“어산 언니가 시집가는 모양이죠? 정말 빠르네요.”
집 밖에서 맑고 투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보니 한안이었다.
오늘 그녀는 비단으로 만든 짙은 자줏빛 긴 치마를 입고 새까만 긴 머리는 한쪽으로 드리워 윤이 나는 깨끗한 이마를 드러냈다. 귓가에는 물방울 모양 옥구슬 귀고리를 늘어뜨렸고 손목에는 태후가 이전에 하사한 팔찌를 껴서 유백색 휘광이 어른거렸다. 옅게 웃는 얼굴이었으나 기세가 사람들을 압도했다. 평소의 천진하고 사랑스러운 어린 여자아이의 모습과 달리 낯설도록 예리했다.
위여풍은 그녀를 보고 얼떨떨해졌다.
대답하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한안이 웃으며 다시 한번 이야기했다.
“어산 언니가 시집가나 보죠?”
장사양이 한 번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저건 위왕부에서 네게 보내는 납채 예물이다.”
“뭐라고요?”
한안이 놀라 물었다.
“한안은 시집갈 사람이 아닌데 어째서 납채 예물을 보내죠?”
대주씨가 웃으며 말했다.
“장 노야와 위 왕 대인께서 너와 세자의 혼사를 잘 상의하셨단다. 내년 급계까지 기다렸다가 바로 위부에 들어가 혼인할 거야.”
정상적인 여자아이라면 자신의 혼사를 듣고 부끄러워 즉시 방 안에 숨지 않을까. 그러나 한안은 웃는 듯 마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음? 그럼 감히 세자께 묻지요. 한안을 세자비로 맞으시는 건가요?”
주씨가 남의 불행을 즐기듯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틀렸어. 세자께서는 안아를 소첩으로 맞으시는 거야.”
그녀는 입을 가리고 가볍게 웃었다.
“어아가 측비가 될 테니 너를 잘 도와줄 거야. 너희 두 자매가 위왕부에서 사이좋게 지내야 해.”
한안은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위여풍을 보며 느릿느릿 말했다.
“이제 보니 그렇게 된 거군요. 어산 언니는 측비가 되고 한안은 첩실이 되고. 세자의 성의에 한안은 정말 황공하네요.”
눈을 가늘게 뜬 위 왕은 이 어린 아가씨가 이어서 할 말이 매우 듣기 좋지 않을 거라는 것을 직감했다. 지금 웃는 것이 이처럼 찬란하니 아마도 이어지는 것은 침을 날카롭게 세운 것이리라.
한안은 말머리를 돌렸다.
“하지만 매우 괴상하네요. 한안의 혼사를 이낭들이 알고 부친께서 알고 세자께서도 알고 위 왕 대인께서도 알고 어쩌면 이 부중의 하인들도 모두 알 텐데. 한안만 몰랐네요!”
그녀의 웃는 얼굴은 봄날에 막 녹아내린 얼음 샘 같았다. 보기에는 느릿느릿하고 물결이 없는 듯하지만, 밑바닥에는 암류가 용솟음치고 있었다.
“자녀의 혼사가 부모의 명과 중매인의 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 해도 지금은 사회 풍조가 개명하였는데 설마 아직도 여아는 맹목적으로 아무 말도 못 한 채 시집가야 하는 건가요? 심지어 꽃가마에 오를 때까지도 장님에게 시집가는지 절름발이에게 시집가는지도 몰라야 하는 건가요?”
“방자하구나!”
주씨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네가 어찌 세자를 장님에 절름발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그야말로 법도도 모르는 것이구나!”
“법도요?”
한안은 냉랭하게 그녀를 보았다.
“이낭이 법도를 말하려 하니 그럼 나도 말해 봐도 괜찮겠죠. 어산 언니는 서녀인데 측비가 되네요. 한안은 장부의 적녀인데 첩이 되고! 이것이 어느 집 법도인지 한안은 정말 모르겠군요!”
그녀는 위여풍을 향해 돌아섰다. 말투 속에 칼날이 숨어 있었다.
“만약 어산 언니가 세자와 먼저 살을 맞대는 친밀함을 나눴기 때문이라면, 그래서 세자께서 그녀를 측비로 받아들이는 거라면 할 말이 없어요.”
한안은 위여풍이 반박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않고 연이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만약 먼저 살을 맞대는 친밀함을 나눈 여자가 더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있는 거라면 세상의 소저들은 여자가 지켜야 할 도리를 준수할 필요가 없는 거죠. 만약 그 사람과 살을 맞대어 친밀함을 나누기만 하면 정처가 되는 것도 가능하니까요.”
그녀는 위 왕을 보며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그런데 사람마다 이런 일을 본받으면 세상 도리가 어떤 모양새로 변할지 모르겠네요. 황후 마마께서 아시면 진노하실까요, 안 하실까요? 결국 그분이 천하의 정처이시니까요!”
그녀의 말은 기세등등했고 조금도 빈틈이 없었다. 일반적인 훈계 같았지만 세세하게 따져보면 사람의 마음을 몹시 두렵게 했다. 일반적인 법도를 어지럽히는 일은 작았지만 천하의 법도를 어지럽히는 일은 컸다. 한안의 말이 어사에게 알려지기라도 하면 어사는 상소를 작성하여 황상께 올릴 것이고 아마도 그들 위왕부는 그날로 바로 끝장날 것이 분명했다.
위왕은 장한안을 보았다. 말투가 비할 데 없이 날카로웠다.
“장 소저는 위왕부로 시집오기를 원치 않느냐?”
한안은 위 왕을 보았다. 목소리는 느릿느릿 낮게 가라앉았지만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제가 무엇 때문에 시집가야 하죠?”
“좋다, 좋아.”
위 왕은 연이어 좋다는 말을 하고 위여풍을 향해 돌아섰다.
“여풍, 지금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위여풍은 한안 눈 속의 경멸을 분명하게 보았다. 그 순간 심장을 칼로 베어내는 것 같았다. 그는 눈앞의 사람을 망가뜨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는 그녀의 입을 찢고 싶었고 눈을 찔러 멀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를 입을 찢어버리고도 자신의 귀를 거슬리는 말을 나오는지 그녀의 눈을 멀게 하고도 그 속에서 업신여김이 쏘아져 나오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녀의 냉정함, 총명함 그리고 천진해 보이면서도 모든 것을 명확하게 통찰하고 있는 그 모습까지 모두 파괴하고 싶었다.
“당신이 시집가고 싶은 이가 누구요?”
위여풍이 음침하게 입을 열었다. 마음속으로 확신했다. 한안이 그를 한 번 더 보기도 원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전 조정과 재야에 미칠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가진 그 남자 때문이라고.
장사양은 초조해 죽을 지경이었다. 한안이 위 왕에게 반박하자 그는 한안을 잡아 반쯤 죽을 정도로 두들겨 패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그러나 지금은 감히 다른 행동을 할 수가 없었다. 한안은 어쩔 수 없다는 어투로 고개를 빳빳이 들고 말했다.
“기왕 세자께서 듣고 싶어 하시니, 숨기지 않고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 장한안은 이 생에 절대 남의 첩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여린 몸집과 맑은 눈 그리고 하얀 이, 분명 소녀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진중함이 사람을 놀라게 하였고 전신의 자줏빛은 더욱 그녀를 고귀하고 화려하게 하였다. 한 떨기 청순하고 아름다운 수선화에서는 사람을 압도하는 향이 솟구쳤다.
“제가 시집가려는 남자는 반드시 그의 일생에 오직 저 한 사람만 있을 겁니다. 첩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통방을 거두지 않고 일생에 오직 저 한 사람뿐이어야 합니다!”
바야흐로 좌중이 다 놀랐다.
“당신,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요……?”
위여풍은 조금 믿을 수 없었다.
“남자는 3처 4첩이 본래 흔히 있는 일이오. 당신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있는 남자가 없을 거요.”
아주 빈곤하고 비천한 사람이라면 몰라도 처를 맞이하는 것은 전생에서 쌓아온 복이었다. 더구나 첩을 들이지 말라니 설마 그녀는 비천한 농촌 부녀가 되기를 원하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만약 평생 이런 남자를 찾을 수 없다면 한안은 차라리 종신토록 시집가지 않겠습니다.”
주씨는 일어서서 날카로운 소리로 말했다.
“네가 지금 헛소리를 하는 게야? 이 세상 어디에 너의 요구를 들어줄 남자가 있어?”
한안은 몸을 돌리고 그녀를 보며 차갑게 말했다.
“이낭이 그런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고 한안이 만나지 못하리라는 뜻은 아니죠. 나는 이미 말했어요. 만약 이런 남자를 찾지 못한다면 한안은 종신토록 시집가지 않겠어요.”
한안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줄곧 하고 싶었던 말을 이제야 분명히 말한 것 같았다. 정애(情愛)는 사람을 너무 상하게 만들었다. 감정의 늪에 빠질 것 같다면 애초에 거리를 둬야 했고 피할 수 없다면 건드리게 하지 말아야 했다. 그녀는 이미 한 번 죽었다 살아났다. 어렵게 얻은 목숨을 불확실한 남자의 마음과 바꾸는 데 쓴다면 아마도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것이었다.
위여풍은 표독하게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것은 당신이 한 말이오. 분명히 잘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요.”
한안은 찬란하게 웃었다.
“오늘 세자와 위 왕 대인께 증인이 되어 달라 청하겠습니다. 내일부터 경성에 바로 오늘 일이 널리 퍼질 테니까요. 한안의 말은 천하 사람이 다 듣게 될 거예요. 아까 얘기한 대로 만약 그 조건을 지킬 수 없다면 한안의 낭군이 아닙니다!”
“당신이 비구니가 되기를 기다리지.”
위여풍이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한안의 요구는 달성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달성될 수 없다면, 한안은 평생 시집갈 수 없다. 그녀가 차라리 평생 시집가지 않을지언정, 그와 함께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니. 가슴속에 깊은 굴욕감을 느끼며 위여풍이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당신이 후회하지 않기를 바라오!”
한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위 왕도 일어서서 장사양에게 말했다.“장 4소저가 원치 않으니, 이 혼사는 그만두겠소.”
장사양은 한안이 뼈에 사무치도록 미웠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웃으면서 비위를 맞추며 말했다.
“위 왕 대인, 딸의 나이가 어려 사리 분별을 못합니다. 대인께서는 그 애를 염두에 두지 마시지요. 제가 조금 있다가 반드시 그 애를 달랠 터이니…….”
주씨에게는 오직 장어산만 중요했다. 위 왕이 혼사를 무효로 한다 하자 서둘러 물었다.
“그럼 어아의 일은요?”
위여풍은 한안을 한 번 보고 무시무시한 말투로 말했다.
“본 세자가 취하기로 했으니 다음 달 초 8일 측비는 시집오시오.”
위여풍은 말을 마친 후 잠시도 이곳에 더 머물고 싶지 않다는 듯 소매를 떨치고 갔다.
위 왕 부자가 간 후, 장사양은 냉랭하게 한안을 보았다.
“사당에 가서 꿇어라!”
오늘 한안은 위왕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장사양의 눈에는 그 죄가 너무 커서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의 벼슬길을 끊어놓은 것이었다. 이 딸이 최근 한층 더 제멋대로 날뛰니 쉽게 용서할 수가 없었다.
한안은 눈을 내리깔고 공손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대주씨가 웃으며 말했다.
“안아는 오늘 무슨 잘못을 범하지 않았어요. 그저 혼사를 원치 않았을 뿐이죠.”
대주씨 말이 듣기 싫었던 장사양은 분노 불태우며 소리쳤다.
“저 애의 혼사는 오직 나만이 결정할 수 있소! 흥, 남의 첩이 되지 않겠다니 정말로 자기가 무슨 대단한 인물인 줄 아는 모양이지. 내가 혼인할 자를 정해주면 시집가야지!”
한안은 장사양이 몸 뒤에서 포효하는 것을 듣고 입가에 냉소를 머금었다. 그녀의 인생을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미 전생에 한안의 목숨을 장사양에게 내주는 것으로 길러준 은혜는 갚았다. 이 생에서는 그가 다시 자신을 망칠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할 터였다.
한편 한안이 영원히 첩이 되지 않겠다는 맹세는 하루 사이에 경성에 두루 퍼져 나가 사람들이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하는 화젯거리가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녀의 방법이 예의와 격식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여자가 되어서 속이 너무 좁으니 악녀의 전형이라 했다. 어떤 사람은 그녀의 용기에 탄복했다. 이런 여자는 대담하고 용감하며 드물다고 두둔했다. 바깥에 어떤 풍문이 돌든 상관없이 당사자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얼음처럼 차가운 사당에서 한안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지 꼬박 하룻밤 하룻낮이 지났다. 장사양은 그녀를 잊어버린 듯했다. 밥을 주는 사람은 없었고 급람과 주홍, 유모도 종적을 보이지 않았다. 분명 주씨에게 갇혔으리라.
그녀가 사람들 앞에서 공공연히 장사양에게 반항한 것이니 이런 징벌은 예상했던 것이었다. 다만 한층 더 장사양에게 실망했다. 자신의 친딸에게조차 이렇게 대하니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어쩌면……. 한 가지 추측에 생각이 닿자 마음이 그저 쓰디쓰게 괴로웠다.
시정 사부에게 무예를 익히면서 비록 무공에는 전혀 진전이 없었지만, 다행히 몸은 이전에 비해 튼튼해져 그녀는 지금 그저 조금 피곤할 뿐이었다. 만약 전생이었다면 아마 이미 혼절하여 깨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달빛이 천창을 뚫고 방 안으로 비쳐 들었다. 한안은 배고픔을 참기가 힘들었다. 온종일 먹은 것이 없었다. 감옥에서도 이렇게 대우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당문은 또 꽉 잠겨 있어 안에서 열고 싶어도 열 수가 없었다. 한안은 일어서서 정신을 차렸다. 사당에서 모시는 신상(神像)의 긴 탁상 앞으로 걸어가, 잠깐 망설이다가 손을 뻗어 늘어놓은 공양 과일 중에서 멀쩡한 과일 몇 개를 골라 베어 물었다. 그 과일은 사실 놓아둔 지가 좀 오래되어 말라서 쪼글쪼글하고 시들시들해서 먹어도 맛이 없었다. 한안이 막 과일 하나를 움켜쥐고 어쩔 수 없이 한입 베어 먹고 났을 때, 돌연 몸 뒤에서 웃음기가 실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이리 조급하게 먹지?”
공양 과일에 손을 대다니. 부처의 분노를 사지 않을까 걱정되어 꺼림칙해 하고 있던 한안은 등 뒤에서 전해져 오는 목소리를 듣고 거의 비명을 지를 뻔했다.
“콜록, 콜록, 콜록.”
한안은 사레가 들려 목을 감싸 쥐고 마른기침을 했다.
그 사람은 한숨을 쉬더니 소리 없이 걸어와 얼음처럼 차갑고 날씬한 손으로 한안을 부축했다. 한 손으로 가볍게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천천히.”
엄동설한. 몸 뒤의 사람이 내쉰 열기가 한안의 귓가에 뿜어졌다. 한안의 귀는 순간 빨개졌다. 한안은 몸을 비틀어 벗어나서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청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온 남자를 보며 곱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
“왕야께서 언제 특별한 취미가 생기신 건지 모르겠군요. 양상군자가 되셨네요.”
이 사당 안은 다른 출구가 없었다. 오직 머리꼭대기 위의 천창 하나만 있을 뿐이었다. 부운석은 천창 위로 들어온 것이 분명했다. 생각이 이에 이르자 한안은 머리가 아파 이마를 짚었다. 이렇게 눈부시게 흰옷을 입고 멀쩡하게 살아 있는 사람이 부에 들어왔는데 시위란 것들이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니. 이후 부중의 안전이 정말 심히 걱정되었다.
부운석은 그녀가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느라 넋을 놓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눈썹을 치켜 올렸다.
“본왕은 그저 위급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러 왔을 뿐이다.”
한안은 정신을 차리고 반사적으로 반문했다.
“무슨 도움을 주려구요?”
부운석은 마술을 부리는 것처럼 등 뒤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어 공양 탁자 앞으로 걸어가 내려놓았다. 주머니를 막 여는 순간 맛있는 향이 퍼져 나왔다.
정교한 과자였다!
한안은 멍해져서 물었다.
“저한테 주는 거예요?”
부운석은 거두어들이는 척했다.
“원하지 않으면 가져가고.”
한안은 서둘러 그의 손을 눌렀다. 손가락 끝이 서로 닿는 순간 감전된 것처럼 움츠러들었다. 한안은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하다가 홱 고개를 들고 부운석을 향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됐으니 왕야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는 바로 손을 뻗어 과자 한 조각을 낚아채 입안에 넣었다.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기도 했지만, 부운석이 준 과자는 어느 곳에서 만든 것인지 물리지 않는 달콤한 맛이 유달리 좋았다. 한안은 배가 고파 행동이 다소 거칠어졌지만 그럼에도 사랑스러웠다. 한안은 볼이 빵빵해져서 부운석에게 물었다.
“이건 어느 집 요리산가요? 솜씨가 정말 좋네요.”
부운석이 담담히 말했다.
“마음에 든다면 나중에 네게 좀 보내주마.”
황상이 거금을 들여 청해 온 어전 요리사는 하루에 작은 접시 하나 분량만 만들었다. 궁중의 황후도 아직 맛보지 못한 것을 이 아이에게 먼저 주어 시식하게 하였으니 그녀가 안목이 있어도 알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한안은 코를 문지르며 멋쩍게 말했다.
“그건 너무 송구하죠.”
부운석은 흥미로웠다. 평소 그가 보았던 한안은 열에 아홉은 다른 사람에게 계략을 쓸 때라 늘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녀가 어린 여자아이다운 일면을 드러내는 것은 지극히 보기 드물었다. 지금처럼 숨김없이 음식을 먹고 있는 모습에서는 앳된 기색이 엿보였다. 부운석은 참지 못하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안의 머리에 얼음처럼 차가운 손바닥이 닿았다. 한안은 과자를 바삐 먹으면서 재난의 원흉을 한 번 노려봐 주었다. 이 사람은 왜 어린 동물을 놀리는 것 같은 표정을 드러내는 걸까. 자기가 정말 열세 살 어린아이인 것 같아 불편했다. 부운석은 손을 거두어들이고 생각에 잠긴 듯 그녀를 보며 말했다.
“네가 위여풍에게 맹세를 했다지. 금생에 영원히 첩이 되지 않겠다고?”
한안은 목이 메어 마지막 한 입 과자를 삼키고 “네, 네.” 한 마디만 겨우 뱉었다. 동작이 점점 느려졌다. 위여풍과 주씨 자매가 과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구나. 이렇게 빨리 자신의 말을 퍼뜨리다니. 아마도 경성에 또 소문이 무성할 것이다. 앞으로 대갓집 공자가 혼담을 꺼낼 때 이 질투 많은 여자는 비켜서 돌아갈 것이다.
“어째서?”
부운석은 스스로 자리를 찾아 앉았다. 내키는 대로 앉아 편안한 자세를 취한 것이었는데 달 아래 신선이 바람을 밟고 와서 이 싸늘하고 추운 사당에 흔들리며 내려온 듯, 그림 속의 사람 같았다.
한안은 과자 하나를 더 쥐었다. 그러나 입안에 넣지 못하고 그를 보며 말했다.
“왕야도 제가 질투 많은 여자라고 생각하세요?”
부운석은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거꾸로 다시 물었다.
“만약 그런 남자가 없다면 너는 평생토록 시집가지 않을 것이냐?”
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그가 또 물었다.
“‘나는 북극성이 되어 천년 동안 바뀌지 않는데 기뻐하며 움직이는 태양 같은 마음은 아침에는 동쪽에 있고 저녁에는 또 서쪽에 있네.(여자의 마음은 지조가 굳어 변하지 않는데, 남자의 마음은 잘 변한다는 비난을 담은 시)’라고 하죠. 보통의 남자는 박정하여 정분을 저버리죠. 수십 년을 하루 같이 정분을 지키는 남자가 몇이나 있을까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흰 머리가 되어도 서로 지켜줄 수 있는 한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당연히 좋죠. 구할 수 없다면 운명인 거예요. 첩실의 다툼은 지금까지 멈춘 적이 없는 전쟁이고 저는 제 자신이 전쟁 중에 목숨을 잃기를 원하지 않을 뿐이에요. 자기 자신을 잃으면서까지 전쟁에서 이기는 건 더더욱 원하지 않고요.”
부운석은 눈앞의 어린 아가씨를 세세히 훑어보았다. 한안은 감추어진 보물 같았다. 매번 그에게 놀라움을 주었다. 그녀에게는 나이를 뛰어넘는 세상에 대한 혜안이 있었다. 그 혜안은 세간의 모든 처량하고 참담한 일을 두루 겪은 것처럼 모든 것을 담담히 꿰뚫어 보아서,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열세 살의 어린 아가씨가 첩실 다툼을 직접 겪은 것처럼 말하였다. 그녀 말 속의 내용은 둘째 치고 저 나이에 저런 결연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한참 후, 그가 말했다.
“마음에 둔 사람이 있느냐?”
한안은 당황했다. 그가 이런 질문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마음에 둔 사람이라. 자신은 전생에 위여풍에게 미칠 듯이 빠져 있었다. 그러나 금생에는 그에 대해 경멸과 냉담함뿐이었다. 마음에 둔 사람이라……. 지금 마음속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그럼…….”
부운석이 그녀를 보았다.
“본왕이 너를 아내로 맞으면 어떨까?”
거북한 침묵이 흘렀다. 한안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를 보았다. 말을 더듬으며 조리 없이 뒤죽박죽 물었다.
“왕야…… 왕야, 농담하신 거죠? 한안은 왕야께 시집가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측비를 받아들이지 않고 소첩을 취하지도 않고 통방을 거두지도 않고 현청왕부에 오직 너, 왕비 한 사람뿐일 것이다. 네가 말한 것들을 본왕은 해낼 수 있다.”
그의 목소리는 맑고 차가웠으며 흔들림이 없었다. 내놓은 조건은 유혹적이었다. 현청왕부의 부(富)는 가히 한 나라를 상대할 만했다. 게다가 하늘까지 차고 넘칠 재산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부운석 이 사람만 해도 대종의 여아들이 꿈속에서도 바라는 그 사람 아닌가.
한안이 꿈쩍도 않는 것을 보고 그가 또 말했다.
“부중의 하인은 감히 너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경성 안의 관원 소저들도 감히 너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고. 너의 이낭과 부친도 감히 너를 조소하지 못할 테지. 네가 현청왕부의 사람이기만 하면, 본왕을 제외하고 너는 어떤 사람도 두려워할 필요 없다.”
그의 표정은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고혹적이었고, 목소리에는 낮은 유혹이 담겨 있었다. 누군가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수려한 청년이 급계도 안 한 어린 아가씨를 유혹하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한안은 머리가 펑! 하고 폭발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대체 누가 경성 안에서 최고의 요물이 혁련욱이라고 말했던가. 그렇다면 그들은 부운석이 요사스럽게 구는 모습을 본 적이 없기에 그랬을 것이다. 겉보기에 냉담하고 금욕적으로 보이는 남자가 선정적으로 굴기 시작하면 그 매혹이 여자의 뼛속 깊이 새겨진다는 걸 과연 누가 알까. 자태가 부드럽고 친근하며 아름답고 화려한 것이 마치 타락한 선신 같았다. 심금을 울리고 넋을 앗아갈 듯한 매력이 그의 온몸에서 스며 나왔다.
한안은 귀신에 홀린 듯 ‘좋다’고 말할 뻔했다. 그러나 존귀한 불상에 시선이 닿자 정신이 맑아졌다. 마음속으로 묵묵히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생각하고 정색을 하며 말했다.
“왕야께 시집가고 싶어 하는 소저는 많은데 왕야께서는 어찌하여 저를 아내로 맞으려 하시는지요?”
그는 유혹적인 표정을 거두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소망을 이루어주고 싶기 때문이지.”
애매모호한 대답에 한안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한 사람의 소망을 이룬다고 하셨는데 그게 어째서 저인가요?”
“본왕은 왕비가 필요하고 네가 적합하다.”
적합은 ‘영원히’ ‘사랑’보다 간단하여 배반이 일어나기 쉽지 않다. 사랑은……. 잡을 수 없는 공허하고 허망한 것이다. 어쩌면 오늘은 사랑했다가 내일 바로 사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합은 다르다. 한 사람을 적합하다 하는 것은 시간이 경과한 후에야 비로소 인정하여 허가하는 것이었다. 단기간 내에 부적합하게 바뀔 리 없었다.
부운석의 대답에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한안은 실망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그녀가 말했다.
“어째서 제가 적합하죠?”
부운석은 드물게 웃었다.
“너는 이기적이고 담이 하늘을 품을 만큼 크지. 심계도 매우 깊고 수단도 악랄하다…….”
“저기요.”
그가 말을 마치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한안이 그의 말을 끊었다.
“제가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에요? 제 심성이 나빠 당신의 왕비가 되기에 적합하다고 말한 건가요? 그렇다면 당신의 왕비에 가장 적합한 이는 성품이나 행동이 몹시 악독한 여자가 아니겠어요?”
부운석이 그녀를 보는 눈동자에 웃음 한 자락이 스쳤다.
“가장 중요한 것은 너는 쉽게 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지.”
이 말은 평범하게 들렸지만 무한히 깊은 뜻을 품고 있었다. 한안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뜻이에요?”
그녀의 얼굴은 경계하며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마치 온몸에 가시를 곧추세운 고슴도치 같았다. 부운석은 그녀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 어린 아가씨는 그녀의 이름인 기러기(한안의 ‘안’)와 같았다. 털이 포시시하고 순진하고 귀여우며 사랑스럽지만 일단 그녀를 해치려는 사람이 있으면 잔인하게 상대방의 눈알을 쪼아 멀게 한다. 그녀는 온순한 기러기지만 이름자에 ‘한’이라는 글자를 지니고 있어 스산한 기운이 있었다. 그의 왕비로 온실 속의 작은 꽃은 필요 없었다. 이렇게 어리지만 용맹스러운 기러기면 딱 좋았다.
“너는 굳세고 강하다.”
그는 더 많은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한안은 의심이 일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반응 없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차가운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연하고 부드러운 모습만을 보였다. 한안은 멀리 떨어져 앉아 그를 보며 말했다.
“왕야, 마음에 둔 사람이 없으십니까?”
부운석은 잠깐 당황했다.
“없다.”
한안은 실망했다. 그의 대답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다. 본래 이렇게 수려하고 출중한 사람은 남녀 간의 애정사가 깊지 않나? 게다가 황가 귀족이니 당연히 부드럽고 아름다운 연애사가 몇 단락은 있어야 맞다. 그런데 부운석이 그런 게 없다고? 그가 거짓말을 하는 걸까? 거리에 소문이 도는 것도 탓할 수가 없군.
한안에게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당신이 단수(斷袖)이기 때문에 그래서 저를 아내로 맞아 천하 사람들의 입을 막으려는 건 아니겠죠?”
부운석은 황당해서 한참이나 침묵했다.
“내가 단수라고?”
심오한 눈빛이 가늘어지며 말투에 위험한 기색이 어렸다.
한안은 그가 제 발이 저린 거라고 단정했다. 부운석의 말에 대해 합리적인 해석을 찾은 것 같았다.
“천하 사람들이 다 그렇게 말해요. 틀림없이 남색가라고 말이죠. 당신이 만약 나를 아내로 맞으면 무슨 아름다운 동자나 남자 연인을 기른다 해도 저라는 엄호물이 있게 되는 거죠. 당신이 그렇게 많은 경성 소저들의 애모를 거절한 것도 당연하네요. 하지만 나를 왕비로 삼으려는 건 분명 저를 연약하고 만만하게 보신 거죠? 나중에 혼인 후 속았다는 것을 알아차려도 구원을 청할 가문도 없어 어쩔 수 없이 속으로 삭여야 할 테니까 말이죠.”
그녀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악마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부운석을 바라보았다.
“정말 심오한 계략이네요!”
한안은 이 일에 대해 너무 지나치게 예민했다. 이 때문에 말이 방자하게 나왔고 말을 하면서도 그다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부운석의 얼굴빛이 바로 어두워졌다. 그가 천천히 일어서더니 한안을 보며 다시 한번 반복했다.
“내가 단수라고?”
한안은 몸을 탁자 가장자리에 기대고는 노기등등하게 대답했다.
“설마 아니에요?”
부운석은 한안의 곁으로 걸어왔다. 한 손으로 그녀의 몸 뒤 탁자를 짚고 한안의 몸 전체를 에워쌌다. 한안은 그에 비해 많이 여리고 작았으니 지금은 그저 고개를 들고 그를 볼 수밖에 없었다.
부운석은 몸을 숙여 한안의 작은 얼굴이 불그스레하게 변하는 것을 쳐다보았다. 화가 난 것인지 아니면 흥분해서 이렇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너무도 작았다. 얼굴은 앳된 기색을 띠고 있었고 아름다운 옥 같은 코와 앵두 같은 입술은 청순하고 사랑스러웠다. 둘도 없는 미모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미모의 화룡점정은 가을 호수 같은 눈동자였다. 비할 데 없이 맑고 투명하면서도 깊이와 그윽함이 있었다. 하지만 꿰뚫어 볼 수는 없었다. 이 세상에 부운석이 명확히 꿰뚫어보지 못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는데 장한안은 바로 그중 하나였다.
한안은 탁자 위에 밀쳐진 이 자세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정말로 열서너 살의 어린 아가씨가 아니었으니 당연히 이 자세의 미묘함을 알았다. 부운석의 수려한 얼굴은 바로 자신의 위에 있었고 심오한 눈동자는 의미심장하게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닿는 모든 곳에 소름이 돋고 솜털이 곤두섰다. 기세가 약해지면서 목소리도 낮아졌다.
“다……당신 뭐 하려는 거예요?”
부운석은 웃는 듯 마는 듯 그녀를 보았고 그의 목소리는 스산했다.
“내가 단수라고, 응?”
그 ‘응’ 자는 끝소리가 올라가 화려한 활시위같이 서늘하고 또 위험했다. 동시에 쉽사리 알아차릴 수 없는 분노를 띠고 있어 싸늘하게 사람의 마음속에 꽂혀 들었다.
한안은 몸을 떨었다. 상황 파악을 하고 즉각적으로 말을 바꿨다.
“당신은…… 당신은 단수가 아니에요.”
부운석은 조금 우스웠다. 한안이 고집을 세우며 우길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그녀가 재빨리 말을 바꿨다. 정말 교활한 것이 미꾸라지 같지 않나. 이처럼 영리하니 사람이 싫어할 수가 없지.
한안은 부운석의 가슴에 갇혀 심장이 북처럼 뛰었다. 이 자세는 확실히 좀 미묘했다. 부운석처럼 이렇게 수려한 사람이 탁자 앞으로 밀면 어떤 여자든 넋이 나갈 것이다. 불안해하고 있을 때 부운석의 자석 같은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늦었다.”
놀라 고개를 드니, 그 수려한 얼굴이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서늘한 입맞춤이 살짝 젖은 듯 한기를 띠고 깃털처럼 가볍게 한안의 이마 위에 내려앉았다. 그의 입술은 차가운 고혹미를 발산했다. 한안은 이마에 작은 벌레가 기어가는 것처럼 간질간질하다 느꼈다. 갑작스레 놀라서 반항하는 것도 잊고서 몸이 굳어져 그 자리에 꼿꼿하게 서 있었다.
잠자리가 꼬리로 수면을 찍고 날아오르는 것 같은 입맞춤은 스쳐 지나가듯 끝났다. 부운석은 몸을 바로 세웠고 입가는 음미하는 듯한 미소로 휘어졌다.
“지금, 아직도 본왕이 단수라고 생각하느냐?”
작은 짐승이 자기가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은 것처럼 한안은 튀어나가 부운석과 세 걸음 정도 거리를 두고 떨어졌다. 한 손으로 자신이 방금 입맞춤 당한 곳을 박박 닦으며 격분하여 말했다.
“호색한!”
부운석, 겉으로 보기에는 냉담하고 침착하며 신중하고 만사에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더니 이렇게 경박하게 바로 입을 맞추다니. 그녀의 두 번의 생을 통틀어 남자와 이 정도의 친밀한 접촉을 한 적이 없어 자연히 두 뺨이 새빨개졌다. 한안은 노여움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녀는 부운석이 이렇게 오만한 사람인 줄은 몰랐다.
그는 이 세상의 예법을 안중에 두지 않았고, 안중에 두지 않았으니 당연히 지킬 필요도 없었다. 방금 전도 그저 놀리고픈 마음이 일었을 뿐이고. 이전에 기르던 꽃사슴을 놀리던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한안이 정말로 분노한 것처럼 보이자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큰 죄를 지은 느낌이었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부운석은 얼굴 위의 놀리는 빛을 거두었다.
“본왕이 내일 바로 황상께 혼인을 하사해 주시길 청할 것이다.”
그는 매우 태연자약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안은 놀랐다.
“터무니없는 말씀을 하시네요. 저는 지금까지 당신께 시집가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너와 나는 이미 친밀함을 나누었으니 너는 이미 본왕의 사람이다.”
부운석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한안은 이를 악물었다.
“그것은 그저 뜻밖의 사고였을 뿐이에요.”
“본왕은 책임을 질 것이다.”
부운석은 그녀의 곁으로 걸어왔다. 한안은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에게 옷깃이 잡혔다. 그 순간 부운석은 그녀의 머리 위에 무언가를 꽂았다.
한안은 손을 뻗어 더듬어 보려 했으나 그에게 팔이 잡혔다.
“움직이지 마라.”
몸부림쳐도 그의 팔에서 벗어날 수가 없으니 한안은 그저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법을 무시하고 하늘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날이 곧 밝겠구나. 나도 돌아가야 한다. 본왕이 오늘 한 말은 구구절절 모두 진심이다.”
그는 잠깐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또 본왕은 지금까지 네가 연약하고 만만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말을 마치고 낮은 소리로 웃더니 바로 몸을 날려 사라졌다. 사당 안 어디에도 부운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안은 자신의 방금 전 자신의 말을 떠올렸다.
- 분명 저를 연약하고 만만하게 보신 거예요. 나중에 시집가서 자기가 속았다는 것을 알아차려도 구원을 청할 가문도 없어 어쩔 수 없이 속으로 삭여야 할 테니까 말이죠.
부끄러워졌다. 그녀를 괴롭힌다면 그대로 돌려줄 터였다. 그녀가 쉽게 괴롭힐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할 것이다.
이마 위에는 그의 입술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았고 귓가에는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한안의 얼굴은 온통 새빨갛게 변했다. 인간의 익힌 음식 따위는 먹지 않을 듯 보이는 사람이 이처럼 가벼울 수 있을까. 그녀는 방석 위에 앉아 한 손으로 아래턱을 괴고 생각에 빠져들었다.
부운석이 그녀를 아내로 맞겠다고 한 것은, 진심일까?
밖에서 닭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하늘빛이 이미 환했다. 한안은 부운석이 가기 전에 한 그 말을 떠올렸다. 설마 자신과 있어 주려고 온 것은 아니겠지? 그가 안 왔다면 음습한 사당에서 느릿느릿 가는 긴 밤을 굶주림에 시달리며 그녀 혼자 보내야 했을 것이다.
감사의 기운이 마음속에서 일렁였다. 한안은 갑자기 무언가 떠올리고는 자기 머리 위를 더듬었다. 부운석이 꽂은 물건 뽑아서 보니 남색 옥비녀였다.
옥의 빛깔은 지극히 맑고 밝았으며 색은 화려했고 흠결 하나 없이 깨끗했다. 비녀의 머리 부분에는 투명하고 빛나는 작은 물고기 모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살아 있는 것처럼 생동감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보자마자 평범한 비녀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비할 데 없이 귀중한 것이었다.
부운석이 이 비녀를 준 것은 무슨 의미일까? 한안은 비녀를 손 안에 움켜쥐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한편 장어산은 한안이 위여풍에게 시집가지 않을 거라고 선언한 소식을 듣고 언짢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안이 시집 못 간 노처녀가 되어 사는 게 죽느니만 못한 나날을 보내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 대단히 기뻐했다.
여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온순하고 도량이 넓은 것이었다. 장한안이 자기 혼자 고결한 척 하는 것이 장어산의 눈에는 하찮게 여겨졌다. 장어산은 더욱 공들여 자신의 혼수를 정리했다. 위왕부의 측비지만 얕보이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대주씨는 질녀를 보며 매우 상심했다. 그녀는 혼수 처리를 돕다가 한가한 틈에 주씨에게 물었다.
“어떻게 이것뿐이야? 동생, 부중의 좋은 물건은 이게 다야?”
주씨가 득의만만하여 말했다.
“노야가 갖고 있는 좋은 물건은 모두 다 어아에게 주셨어. 이번에 어아가 출가하니 노야께서 창고 안의 창고지기에게 장부 책에 적고 내 마음대로 꺼내 가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어.”
대주씨가 바로 말했다.
“그렇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 하지만 어아가 출가하는 일은 평상시와 달라. 나도 가서 돕는 게 어때? 태사부에서 좋은 물건을 적지 않게 보았으니 한두 가지 고르는 데 도울 수 있을 거야. 어아가 그런 걸 가져가면 결코 남이 무시하지 못할 거야.”
주씨는 의심을 품으며 그녀를 보았다.
“언니, 어째서 어아의 혼수에 이렇게 관심이 많아?”
대주씨는 그녀를 곁눈질하고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설마 내가 너희 부중의 재물을 탐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태사께서 내게 좋은 물건을 적지 않게 주셨는데 설마하니 어아의 혼수에 눈독을 들일까?”
주씨는 자신이 실언한 것을 알았다. 대주씨의 온몸에 두른 부귀함을 다시 보았다. 입은 것이며 장식, 보이는 것이 전부 고급품이었다. 게다가 장 태사가 대주씨를 총애하는 것은 사람들이 다 알고 있었고 태사의 씀씀이도 커서 장부 안의 물건 따위는 그녀의 눈에 차지도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아무래도 여전히 의심이 남았다. 주씨는 바로 웃으며 말했다.
“언니, 별소리를 다 하네. 내가 이러는 건 그 조그만 천한 년 때문에 화가 나서 머리가 혼미해져 그러는 거야. 내가 바로 아랫것을 시켜서 창고 열쇠를 언니에게 주라고 할게. 조금 있다가 언니가 직접 가서 물건을 좀 골라 봐.”
주씨는 말을 마치고 조 유모에게 눈짓을 했다. 조 유모는 의중을 알아차리고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노비가 반드시 확실하게 처리하겠습니다.”
주씨는 그제야 화를 풀고 기뻐했다.
한안이 사당에서 풀려났을 때는 이튿날 새벽이었다. 시종은 그제서야 그녀를 기억한 듯했고, 사당문을 직접 연 건 묘하게 기대에 찬 장어산이었다. 그녀는 문을 열면 한안이 바닥에 쓰러져 의식불명이거나, 혹은 몹시 허약해진 모습을 보게 되리라 여겼다. 하지만 한안은 단정하게 방석 위에 꿇어앉아 있었다. 문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자연스럽게 웃는 얼굴을 보였는데 의기소침한 모습은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도리어 원기가 왕성하고 생기가 넘쳤다.
장어산은 멍해졌다. 한안이 실의에 빠진 모습을 보지 못해 짜증이 났다. 사당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갔다가 누군가 공양 탁자 위의 과일에 손을 댄 것을 보고 흥분하여 말했다.
“네가 공양품을 건드려? 부처님께 불경하다니!”
한안은 느긋하고 침착하게 그녀를 보았다.
“아니, 아니에요. 어젯밤 한안이 불상 앞에서 기도를 드렸는데 어쩌면 성심에 하늘이 감동하신 것인지 대략 자시쯤 갑자기 밖에서 한 백의 선인이 달을 밟고 바람을 가르며 오시는 것이 보였어요. 그러시더니 공양품을 먹으라고 한안에게 말씀하시지 뭐예요.”
장어산은 당연히 믿지 않았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너 분명 터무니없는 말로 억지 쓰는 거야. 겁 없이 함부로 날뛰는구나!”
한안은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보았다.
“어산 언니는 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 선인이 한안을 가련하게 보셔서 선계의 과자를 내려 주셨어요. 보세요. 이 바닥 위에 한안이 먹다 흘린 과자 부스러기가 있어요.”
장어산은 고개를 숙여 보았다. 정말로 바닥 위에 눈처럼 하얀 과자 부스러기가 조금 떨어져 있었다. 장어산은 솟구치는 화를 억제할 수 없었다.
“사람을 시켜서 밥과 반찬을 들여보내게 하다니.”
한안은 억울해하며 말했다.
“어산 언니의 말은 한안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는 거예요. 부중 하인이 부친의 분부를 거역할 수 있나요. 사당의 문도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으니 한안이 밖에서 무언가를 들여올 수도 없지요. 여종들이 밥을 보내고 싶어도 문을 열 수 없는데 무엇을 어떻게 들여보낼 수 있나요?”
주씨 두 자매가 고의로 그녀를 괴롭히는 중이니 여종들이 한안에게 밥과 반찬을 보내게 했을 리 없었다. 급람과 주홍조차 연금되었으니 어느 누가 감히 주씨가 보는 앞에서 이런 일을 할까? 장어산의 표정이 느슨하게 풀렸다. 한안은 주저 없이 불에 기름을 부었다.
“제가 예전에 한 번 말한 적 있죠. 어산 언니, 가장 좋은 것은 부처님께 마음을 다하는 거예요. 고개를 들면 천지신명께서 계신다고 하잖아요. 위에 계신 그분들께서 우리 일거일동을 전부 눈에 담아 보고 계세요.”
장어산은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며 긴장한 모습으로 그녀를 보았다.
“나는 네 말, 한마디도 안 믿어.”
장어산은 잠시 생각하고는 득의만만하게 말했다.
“다음 달 초 8일, 나는 위왕부에 들어가서 세자의 측비가 될 거야. 그리고 너는 일평생 비구니가 되기만 기다려야 하지.”
그녀는 한안을 흘끗 보며 멸시하는 말투로 말했다.
“네가 지금이라도 나에게 애원하면 내가 세자께 말씀 드려서 시첩이나 통방 명분으로 널 들여오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몰라. 신분이 비천하긴 하지만 어쨌든 일평생 남자가 없는 것보다는 좋잖아?”
한안은 표정을 전혀 바꾸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어산 언니가 오늘 특별히 와서 한안을 풀어주니 정말 즐겁네요. 하지만 어산 언니에게 한 마디 충고하죠.”
그녀의 입가가 부드럽게 휘어 올라갔다. 그것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가 질리게 만드는 오만함으로 부운석의 것과 닮아 있었다.
“이 세상의 여자가 모두 언니처럼 남자 없이 못 사는 건 아니에요.”
“너…….”
장어산은 화가 나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한안은 계속해서 웃었다.
“어산 언니가 어떤 남자를 찾든 몇 명의 남자를 찾든 모두 한안과는 상관없어요.”
그녀는 사당 문 입구로 걸어가다가 무언가 떠올린 듯 고개를 돌려 노기등등한 장어산을 향해 웃었다.
“언니에게 한 마디 알려주는 걸 잊었네요. 어젯밤 사당 방석 위에 꿇어앉아서 언니의 혼사를 기도했어요. 결과는……. 언니가 추측해 봐요. 부처님께서 어떤 말을 하셨는지.”
장어산은 이 말을 듣고 즉각 긴장했다.
“어떤 말?”
한안은 그녀의 긴장한 모습을 그런대로 감상한 뒤 느릿느릿 말했다.
“부처께서 말씀하시기를……. 천기는 누설할 수 없다.”
“장한안!”
장어산은 그녀의 놀림을 참을 수 없었다. 달려가 한안의 두 뺨을 후려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그러나 한안의 수완을 알고 있기에 감히 경거망동 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네가 계속 그렇게 자신만만할 수 있을까? 나중에 아무도 원하는 사람 없이 노처녀가 되어도 네가 여전히 이렇게 자신만만할 수 있을 거 같아?”
한안은 그녀를 등지고 나른하게 손을 흔들며 맑고 투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한안을 위해 좋은 혼처를 찾아주실 거라네요. 언니는 고생스럽게 마음 쓸 필요 없어요. 작별을 고하지요, 측비.”
한안은 측비라는 마지막 두 글자에 약간의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는데 두말할 것도 없이 비웃음이었다. 그러나 그녀 얼굴 위의 웃음기는 싸늘하고 메말라 눈까지는 도달하지도 않는 듯했다.
청추원으로 돌아오자 유모, 급람과 주홍이 모두 서둘러 맞으러 나왔다. 주씨가 소저를 제대로 돌보지 않은 책임을 물어 그녀들을 전부 연금하고 청추원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그들은 한안과 소식을 주고받을 수가 없었다.
급람과 주홍을 몇 마디 말로 위로하고 한안은 탁자 앞으로 걸어가 앉았다. 급람이 유모보다 먼저 다가와서 한안의 곁에서 말했다.
“소저께서 노비에게 알아보라 요구하신 일에 실마리가 잡혔습니다.”
한안은 당황했다가 어떤 일인지 이해하고 서둘러 급람을 이끌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침상 앞에 앉자마자 그녀에게 말하라는 표시를 했다.
“부인을 모시던 측근 여종이 소저께서 태어나실 때 부에서 쫓겨났습니다. 도둑질을 했다는 것 같았어요. 이후 혼수로 따라온 모든 여종들은 각종 구실로 내쫓겨 부를 나갔습니다. 다른 처소의 하인들과 이야기해보니 소저께서 태어나신 그 한 해 동안 청추원 하인들 전부가 교체되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유모도 새로 들어온 사람입니다.”
한안은 눈썹을 찌푸렸다. 괴이한 일이었다. 자기가 태어난 그 한 해 동안 청추원의 여종과 하인이 전부 교체되었다니 무슨 일을 이처럼 깊이 꼭꼭 숨기려 한 걸까? 마치 무슨 소문이 누설될까 두려워했던 것 같았다. 그녀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급람은 한안의 표정을 보고 말을 이었다.
“그 쫓겨난 여종들은 죽거나 고향을 등지고 떠나거나 하여 전부 종적이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노비가 부중의 늙은 유모 하나를 매수하여 부인께 도둑이라는 죄명으로 쫓겨난 여종이 지금 경성 안의 한 자수 가게에서 수놓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소저께서 만약 의향이 있으시면…….”
한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를 만나야겠다.”
급람은 조금 망설이며 그녀를 보다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소저……. 노비가 드리고 싶은 말이 있는데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본래 일처리가 명쾌했고 한안 앞에서 무슨 말이든 다했다. 그런데 드물게 이처럼 우물쭈물하니 한안은 목소리를 가볍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라.”
급람은 잠시 생각한 뒤 결심한 듯 말했다.
“노비가 사람들에게 듣기로 부인께서 당시 부에 들어오실 때 마음에 둔 사람이 노야가 아니셨다 합니다. 소문에 따르면 부인께서 부에 들어오실 때 이미 회임 중이셨고 소저께서는……. 노야의 친딸이 아니라 합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내리친 것 같았다. 이미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직접 듣자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자신이 십여 년을 ‘아버지’라고 불렀던 이가 자신의 친아버지가 아니라니. 여러 해 동안 그가 자신에게 냉담하게 대한 것이 바로 설명이 되었다. 그러나 한안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그러나 지금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하직하셨고 그녀의 가슴에 가득 찬 의문은 답을 줄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급람은 매우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그녀를 보았다.
“당시 부인께서 부에 들어오셨을 때, 하인들이 이 같은 말을 떠들어댔습니다. 그러나 함부로 지껄이던 그 사람들은 전부 노야께 잔인하게 처벌을 당하고 부에서 내쫓겼습니다.”
한안은 마음속으로 이해했다. 장사양이 사람들의 입을 막기 위해 모진 수단을 쓴 것이었다. 더 괴이한 일이었다. 만약 정말이라면 그럼 자신의 출신은 정말로 수수께끼였다.
11장
금란전.
여러 조정 신하들과 논의를 마친 뒤, 황상이 바로 물었다.
“만약 다른 일이 없으면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물러들 가게.”
그때 붉은색 수가 놓인 흰색 망포(蟒袍: 제상, 대신 등이 입던 예복으로 보통 금색 이무기가 수놓여 있음) 관복을 입은 수려한 청년이 앞으로 한 걸음 나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신이 황상께 윤허를 청할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황상은 잠시 멈칫하고는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현청왕은 무슨 일을 청하려 하느냐?”
부운석은 살짝 입가를 당겨 웃으며 옆에 서 있는 장사양을 잠시 흘깃 쳐다보았다.
“미신이 장 대인 부중의 4소저에게 혼담을 넣고 싶습니다.”
위여풍이 부운석의 말에 몸이 굳어져 증오가 담긴 눈으로 부운석을 노려보았다. 위여풍은 장사양이 입을 열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말을 꺼내어 비꼬며 말했다.
“왕야께서 모르시는 게 있습니다. 장 4소저가 말하길 그녀가 시집가는 사람은 금생에 오직 그녀 한 사람만 있을 뿐, 측비를 받아들이지 않고, 소첩을 취하지 않고, 통방을 거두지 않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왕야께서는 귀한 황족이시니 그녀에게 혼담을 넣겠다는 생각은 단념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위여풍이 보기에 부운석의 권세로 일생 오직 한안, 한 여인만 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황상이 동의할 리도 없을뿐더러 태후도 동의할 리 없다. 황가의 자제는 가지를 뻗고 잎을 퍼뜨려 선조의 혈맥을 잇는 것이 책무였다. 부운석이 장한안을 아내로 맞고 싶다는 것은 불가능할 터였다.
장사양은 긴장하여 위청을 보았다. 그는 위왕 쪽이다. 지금 부운석이 조정에 가득한 문무 대신 앞에서 혼담을 꺼냈으니 만약 성사되면 위왕과 대적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러나 현청왕도 자신이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왕야의 신분이 고귀하시니 제 못난 딸은 부족할 듯합니다.”
7황자는 아무 내색 없이 어전 앞의 모든 것을 보고 있다가 부운석이 늦도록 말이 없는 것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왕숙께서 만약 왕비를 맞고 싶으시다면 부황께서 명을 내리시도록 하여 왕숙을 위해 덕과 재능을 겸비하고 재주와 미모를 다 갖춘 좋은 여자를 골라 왕비가 되게 하시지……. 하필이면…….”
그의 말은 완전히 끝을 맺지 않았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은 말하지 않아도 다 짐작할 수 있었다.
부운석이 웃는 듯 마는 듯 황상을 보았다.
“황상께서 줄곧 미신이 비를 들이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계셨지요. 미신은 지금 가지를 뻗고 잎을 퍼뜨리기 위하여 결심을 굳혔습니다.”
황상은 즉각 그의 말 속에 담긴 뜻을 알아들었다. 부운석이 지난번에 말한 적이 있었다. 내년에 서융으로 출정할 때 그도 동행할 거라고. 이 말인즉, 만약 장한안을 처로 맞지 못한다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으니 더더욱 쉽사리 경성에 돌아올 리 없다는 말이었다. 황상은 분노하여 그를 한 번 노려보았다.
부운석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 한 사람이면 됩니다. 오늘 본왕은 성상 앞에서 맹세합니다. 금생 오직 장한안 소저 한 사람만을 아내로 맞이할 것이며, 측비를 받아들이지도, 소첩을 취하지도, 통방을 거두지도 않고 영원히 두 마음을 먹지 않겠습니다.”
위여풍은 부운석이 정말로 이렇게 할 줄은 짐작도 못 하여 얼빠진 눈으로 그를 보았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남자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어서 또 이상한 분노가 생겨났다. 한안이 자신이 시집갈 사람에게는 오직 그녀만 있어야 한다는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미 부운석이 이렇게 하리란 것을 짐작했기 때문이 아닐까? 위여풍은 순간 기만당한 것처럼 느껴졌고 가슴에 분노가 일었다.
조정의 다른 대신들은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부운석의 풍채와 재능은 당연히 군계일학이었다. 부운석은 최고의 사위 후보였다. 그러나 오직 한안만을 아내로 맞겠다고 하니 자기 집 딸들은 크게 상심할 것이 분명했다.
부운석은 장신에 선 자태가 우아했다. 늘씬한 신영은 칼집에서 아직 뽑지 않은 예리한 검 같아 곧고 견고했다. 검은색의 긴 머리카락은 투명하고 맑은 흰색 옥비녀로 감아올려 한층 그 풍치가 드러나 보였다. 긴 눈썹은 비스듬하게 날듯이 뻗어 있었으며 검은색 눈동자는 끝없이 심오했다. 얇은 입술은 가볍게 끌어올린 것이 조롱기를 머금고 있어 자신을 믿을 수 없어 하는 사람들을 조소하는 듯했다. 은홍색 수가 놓인 흰색 관복이 그의 기백과 도량을 좀 더 두드러지게 했다.
“본왕은 현청왕부 전체를 예물로 삼아 빙례(聘禮: 약혼할 때 신랑집에서 신부집에 보내는 예물)를 보내고 장가 4소저를 비로 삼겠습니다!”
맑고 담담한 부운석의 말은 살짝 차가운 한기를 띠고 있었다. 마치 큰 바위 하나를 고요한 심연에 던져 넣은 것처럼 조정에 가득한 문무 대신들이 삽시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황상은 눈을 가늘게 떴다.
“윤허하겠다!”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을 딱 벌렸다. 지금까지 이런 일은 없었다. 신하가 금란전 사람들 앞에서 혼담을 꺼내고 혼사를 윤허한 사람은 뜻밖에도 황상이었다. 현청왕이 황상과 형제의 정이 깊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었다.
부운석은 관복을 걷어 올리고 몸을 굽혀 반 무릎을 꿇었다.
“감사합니다, 황상.”
그 눈빛 속은 분명 위협이었다. 황상은 마음속으로 탄식했다.
“이렇게 되었으니 바로 혼사를 정하자. 그러나 짐이 듣기로 장 4소저는 아직 급계 전이라 하니 내년 급계 후라야 비로소 혼인을 마칠 수 있을 것이다.”
황상은 잠깐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
“짐이 보니 다음 달 초 8일이 길일이구나. 그날 정혼을 하면 되겠다.”
부운석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눈동자 속에 웃음기가 스쳐 지나갔다. 보아하니 황상도 이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시는 것은 아니로구나.
“모든 것은 황상께서 안배하신 대로 따르겠습니다.”
위여풍과 장사양은 발을 구를 정도로 화가 났다. 장사양이 화가 난 것은 자기 딸의 혼사에 자신은 손도 대지 못하고 황가 두 형제의 몇 마디에 바로 결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체면을 어디 가서 찾아야 한단 말인가?
위여풍 또한 달갑지 않았다. 황상이 그에게 우상 천금과의 혼인을 하사한 것도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지금 한안을 부운석에게 넘겼으니 이것이 힘으로 원앙을 억지로 갈라놓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위여풍의 눈에는 존귀하고 현명한 군주가 세도를 믿고 남을 괴롭히는 극악무도한 혼군으로 바뀌어 있었다.
7황자는 눈을 내리깔았다. 마치 무언가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잠시 후, 소매를 들어 올려 부운석을 향해 두 손을 맞잡고 인사했다.
“왕숙께서 좋은 비를 맞이하시게 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다른 관원들도 연이어 따라서 부운석에게 축하의 말을 하고 싶어 했다. 오직 위 왕 부자와 장사양의 얼굴 표정만 심하게 굳어 있었다.
*
한안은 방 안에서 수를 놓고 있는 중이었다. 근래에 수놓는 솜씨가 한층 더 떨어져 몇 차례나 손가락을 찔렸고 기분도 평온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했다가도 그녀의 엉망진창인 수를 보면 아마 두 말도 하지 않고 혼사를 물릴 정도였다. 생각을 거듭하다 보니 또 웃음이 났다.
‘그만두자. 자신이 그런 맹세를 했으니 이 세상에서 시집가고 싶어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수 같은 건 중요하지 않겠지.’
급람이 매우 급히 들어왔다.
“소저, 현청왕께서 조정에 가득한 문무백관 앞에서 소저를 처로 맞이하겠다고 하셨대요.”
여종이 허둥지둥 달려왔다.
“시집 안 가.”
결단성 있고 단호한 대답. 한 가닥 망설임도 없었다. 한안은 눈을 흘기고 계속해서 꽃을 수놓았다. 부운석이 설마 진심인 건 아닐 것이다. 이런 장난은 너무 도가 지나쳤다.
그러나 급람이 목을 움츠리는 것이 보였다.
“하, 하지만 황상께서 이미 윤허하셨어요.”
탕.
수틀이 밑으로 떨어졌다. 한안은 고개를 돌리고 간신히 웃었다.
“너 뭐라고 했니?”
“황상께서 현청왕의 청을 승낙하셨습니다. 말하기로 다음 달 초 8일에 바로 소저와 왕야의 혼사를 정하신답니다.”
진짜였어? 한안은 놀라 일어섰다가 다시 앉았다. 머릿속이 윙윙거리며 울리는 것이 느껴졌다.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손등을 꼬집어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확인했다.
“어떻게 가능해…….”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부운석의 움직임이 너무 빠르다. 바로 이렇게 혼사를 정하다니.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 둘은 아직 혼사를 논할 단계까지 가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황상의 윤허가 떨어지다니 한안은 얼떨떨했다. 부운석을 가장 높게 쳐줘 봐야 친구 정도일 뿐인데. 그는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
급람은 기쁘면서도 근심스러운 모습이었다.
“소저, 그 현청왕은 지난번 우리들이 궁중 연회에 있을 때 만난 적이 있지요. 꼴 보기 싫은 위 세자보다 훨씬 좋아 보이셨습니다. 게다가 위풍당당한 왕야시니 소저께서 시집가시면 더 이상 이 부중 사람들의 업신여김을 당할 필요가 없으실 거예요. 다만…….”
그녀는 조금 의심스러웠다.
“소저께서 언제부터 현청왕을 잘 알게 되신 거예요?”
급람만 의심스러운 게 아니라 한안 자신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부운석과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해 보니 그는 맨 처음에 자신을 경계한 것을 제외하면 그 다음부터는 익숙한 사이인 듯 마치 아주 오랜 옛날부터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물론 각별히 거리를 유지하여 열렬하다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매번 자신이 곤경에 처했을 때 제때에 나와서 곤경에서 구해주었다. 이런 가까운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한 태도가 습관이 된 듯했는데 별안간 부운석이 자신을 왕비로 맞이하려 한다니 무척 놀라웠다.
얼마 전 그가 그런 말을 했을 때는 의아했으나 진심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저 그가 자신을 놀리는 말이려니 여겼다. 한안이 한 맹세가 경성 온 거리에 소문이 널리 퍼졌는데 이런 때에 자신을 아내로 맞기로 결정했다고? 이 사람은 정말 파악하기 어려웠다.
급람은 한안의 얼굴빛을 보았다.
“소저, 현청왕을 좋아하지 않으세요? 하지만 왕야께서는 경성 안에서 1, 2 등을 다투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한안이 그녀를 보고는 유감스레 고개를 저었다.
“좋아하고 말고를 말할 것도 없어. 황상께서 윤허하신 일이니 이제 시집가고 싶지 않아도 가야 해.”
마음속이 허전했다. 자신의 혼사가 이렇게 결정되다니. 너무도 일이 급하게 진행된 것 같았다. 전생에 위여풍에게 시집갈 때 가졌던 기대나 수줍음은 전혀 없었다.
아무래도 그 한 잔의 독주로 그녀는 아주 많은 것을 잃어버린 것 같다.
주홍이 걸어 들어왔다.
“소저, 그때 말씀하셨던 여종을 찾았습니다.”
한안이 몸을 일으켰다. 일각도 기다릴 수 없다는 모습이었다.
“지금 바로 부를 나가자.”
자신이 태어나던 그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제야 진상이 밝혀질 것이다.
유일하게 살아 있는 여종은 아벽이란 이름을 가진 한안 어머니 왕씨의 혼수 여종 중 하나였다. 아벽의 재주는 자수 솜씨였다. 왕씨는 사람을 온화하게 대하여 자신의 여종들과 화기애애하게 살았다. 그러나 아벽은 한안이 태어나던 그날 밤 부에서 쫓겨났다. 지극히 충성스러웠던 그녀는 가련하게도 세상에 나온 소저의 얼굴을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한안은 마차를 타고 가면서 말이 없었다. 마음속이 혼란스러웠기에 이성을 유지하여 스스로가 정신을 차리게끔 노력했다. 충동적이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판단력을 잃을 수 있다. 오늘 아벽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제삼자가 되어 대해야 했다. 설령 그녀가 모친의 측근 여종이었다 해도 그리고 한안이 그 속에 숨겨진 정이 남아 있음을 믿는다 해도 한안의 입장에서 아벽은 그저 낯선 사람일 뿐이었다. 친근한 사람조차 기댈 수 없는데 낯선 사람을 깊이 신임한다는 것은 치명적일 수 있었다.
성북의 도로는 자갈이 많아 울퉁불퉁했다. 빠르게 달리는 마차는 연신 흔들렸다. 약 반 시진을 달려 눈앞에 쇠락한 촌락이 나타났다. 급람은 한안을 부축하여 마차에서 내리게 했고 주홍이 앞에서 길 안내를 했다. 마부는 밖에서 기다렸다. 주홍이 도로를 따라 마지막 한 집까지 걸어가서 문을 두드렸다.
그곳에는 다 쓰러져가는 가옥이 있었다. 벽은 싸구려 흙벽돌만을 쌓아서 지었고 집 지붕은 볏으로 듬성듬성 이어 놓았다. 바깥의 울타리는 오래도록 수리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아벽은 무척 곤궁하게 살아온 것 같았다.
한참이 지나서 그 문이 비로소 천천히 열렸다. 나이 들어 보이는 아낙네가 몸을 구부리고 혼탁한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그녀들을 살펴보았다.
급람이 그 늙은 아낙네에게 웃음을 드러냈다.
“할머니, 우리는 용건이 있어서 할머니를 찾아왔어요.”
늙은 아낙네는 조금 더 경계하며 그녀들을 보았다. 아주 오래 망설이다가 문을 열고 그녀들을 들어오게 했다.
집 안은 집 밖보다 더 허름했다. 곳곳에 더러운 자국이 있었고 파손된 벽은 수리한 지가 오래되어 바람이 밖에서 들이쳐도 추위를 막을 방법이 없는 모양새였다. 탁자는 한쪽 다리가 없었고 바깥에 있는 큰 솥은 안에 엷은 먼지가 흩날리고 있는 것이 사용한 적이 매우 드문 것 같았다.
엄동설한인데도 방 안에는 불을 피우지도 않았고 침상 위에는 얇은 이불 한 채뿐이었다. 홀로 사는 노인의 모습이었다. 한안은 침상 깔개 위 바구니 안의 물건에 시선이 쏠렸다. 들어 보니 한 땀 한 땀 수가 놓인 정교하고 아름다운 자수 손수건이었다. 자수 도안은 정교하고 아름다웠고 색은 선명하고 화려했는데 동물이 모두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하여 하늘의 솜씨를 훔쳐온 것 같았다.
한안은 몸을 돌리고 그 늙은 아낙네를 보며 말했다.
“할멈, 자네는 아벽이라는 아가씨를 아는가?”
그 아낙네는 한안의 말을 듣더니 몸을 떨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얼굴빛이 창백해져 있었다.
한안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녀를 찾아왔네. 옛날 일 때문에 말이야.”
급람은 늙은 아낙네가 대답이 없는 것을 보고 한안 곁으로 걸어가 준엄하게 꾸짖었다.
“나는 당신이 아벽인 것을 알아요. 이분이 왕 부인의 따님이신 소저세요.”
아낙네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고 꼼꼼하고 자세하게 한안을 살펴보더니 무릎을 꿇었다. 한안이 손을 내밀어 부축하려 했다. 그녀의 입속에서 아아, 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나오며 수척한 두 손이 마구 흔들렸다.
한안은 멍해졌다가 서둘러 가서 그녀의 입을 보았다. 열린 입안이 텅 비어 있는데 혀가 뿌리까지 뽑혀 끊어진 것이 보였다. 그녀는 벙어리였다.
주홍과 급람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한안은 쪼그리고 앉아 그녀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아벽?”아낙네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안은 마음이 아팠다. 그녀의 어머니 왕씨도 늘 미 이낭의 괴롭힘을 받으며 몇 년 동안 편치 않게 지냈다. 그래도 장사양이 안주인과 그 아이들의 체면을 세워주어 풍족하진 않더라도 그럭저럭 살아갈 만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여느 귀부인들과 같이 용모가 변함없이 고상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예전 여종 아벽은 나이도 어머니와 얼마 차이 나지 않을 텐데 노쇠하여 마치 여든 살 이상의 노파 같았다.
그녀의 생활은 분명 극도로 힘들었으리라.
한안은 바로 말했다.
“자네가 말을 할 방법이 없으니 몸짓을 하면 되네. 만약 맞으면 고개를 끄덕이고 틀리면 고개를 젓게.”
그 아낙네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안이 말했다.
“자네의 혀, 누가 뽑은 건가?”
급람과 주홍은 모두 멍해졌다. 한안이 처음으로 묻는 질문은 분명 자신의 출신에 대한 것일 거라 여겼다. 그녀가 묻는 것이 아벽의 혀에 관한 것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아벽은 질문을 듣자마자 눈물이 솟구쳤다. 두 손을 붓 삼아 윤곽을 그렸는데 마치 높은 곳에서 군림하는 듯한 자태였다. 급람이 물었다.
“노야?”
아벽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안이 물었다.
“그가 왜 자네의 혀를 뽑았는가?”
아벽은 바로 손을 뻗어 한안의 머리 위 비녀를 가져가려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급람이 한안을 보고 말했다.
“당신이 부인의 비녀를 가져갔다고요?”
아벽이 또 즉각 고개를 끄덕였다.
한안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진정한 원인은 도대체 무엇인가?”
아벽은 갑자기 한안을 보았다. 눈동자가 놀라고 있었다.
“그저 비녀를 가져간 거면 이런 중별을 내리진 않아. 노야는 단지 자네가 무언가 함부로 말할까 봐 두려워한 거야. 내가 추측하기로 어머니는 당시에 분명 노야에게 자네를 용서해 줄 것을 부탁하셨을 것이네. 그렇지 않았다면 자네는 그저 혀만 잃는 게 아니라 아마도 목숨조차도 남길 수 없었을 거야.”
그녀의 표정은 평온했지만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노야가 살인멸구 하고 싶어 한, 진정한 원인이 도대체 뭐지? 내가 태어난 그날 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아벽은 한참이나 멍하니 있다가 돌연 한안을 향하여 바닥에 머리를 연신 조아렸다. 그녀의 몸은 극도로 노쇠했는데도 잠깐도 안 되어 바닥 위에 핏자국이 얼룩덜룩했다.
한안은 보고도 못 본 것처럼 담담히 말했다.
“자네가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무언가를 걱정하기 때문이겠지. 그러나 내 어머니는 자네와 혈육 같은 정을 나누었고 자네를 위해 용서를 구하고 목숨을 보존하게 하느라 노야에게 미움을 사는 것도 전혀 마다하지 않았네. 그런데 자네는 내 어머니를 위해 조금의 수고로운 일을 하는 것도 안 된다는 건가?”
아벽의 표정이 불안정한 것을 보고 한안이 이어 말했다.
“지금 부중 희첩의 야심이 크네. 아마 자네도 내 어머니가 나를 낳으신 후, 바로 남동생 하나를 가지신 것을 알 걸세. 그 애는 내 어머니의 심장이야. 하지만 지금 부중의 희첩이 내 어린 동생을 해치려고 해. 유감스럽게도 부친은 본래부터 내게 냉담했지만, 희첩이 내 동복동생마저 연루시키는 것도 좌시하며 상관하지 않는 모습이지. 그래서 나는 그저 알고 싶은 거야. 부친이 이렇게 나를 대하는 원인을.”
그녀는 아벽을 보았다. 비할 데 없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또박또박 느릿느릿하게 말했다.
“진정한 원인은 내가 노야의 친딸이 아니기 때문인가?”
아벽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고 몸이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한안도 급하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정신을 차린 다음 손을 뻗어 무겁게 급람에게 손짓을 했다.
왕씨는 소녀 시절, 청매죽마(靑梅竹馬: 소꿉친구)인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는 바로 대종에 명성이 자자하던 동후왕이었다.
동후왕은 왕의 작위를 지닌 세가였다. 노 동후왕은 선황과 정이 퍽 깊었다. 또한 대종의 전설적인 인물로 그는 나라를 사랑하고 백성을 아끼며 가슴에 충심과 의협심이 가득했다.
그러나 노 동후왕의 아들, 동후왕의 성격은 노 동후왕과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동후왕은 그의 부친과 달라 지극히 안하무인에 대담한 사람이었다. 군대를 인솔하여 싸움을 할 때 적진 깊숙이 들어가 야밤에 상대방 장수의 머리를 들고 성을 나온 적도 있었다. 또 천하에 적이 없다고 큰소리칠 정도로 그는 대단히 오만했다. 늘 청루나 무희가 있는 무관을 떠나기 싫어했고 야밤에 황궁의 어선방(禦膳房: 황제의 음식을 하는 곳)에 몰래 들어가 술을 훔쳐 마시기도 했다.
그때는 선황이 세상에 계실 때였고 노 동후왕과의 관계가 두터웠기 때문에 선황은 동후왕의 방종한 행동에 대해 눈 감고 모른 척 넘어가는 일이 많았다. 심지어 내심 벗의 아들을 좋아했다.
동후왕은 나중에 처를 얻었는데 그 사람은 왕씨가 아니었다. 왕씨는 어려서부터 이 소꿉친구를 매우 사랑하여 이 소식을 듣자 병을 얻어 얼마간 일어나지를 못했다.
대종에서 누군가 동후왕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들을 수 없었다. 동후왕의 집안이 멸문당한 사실로 인해 금기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청명의 비 오는 밤, 성 안의 백성들은 누군가의 처참한 비명소리와 칼과 창이 부딪치는 소리를 들었고, 감히 문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이튿날 이른 아침, 동후왕부는 온통 불바다에 잠겨 있었고, 성문 밖에 걸린 것은 죽은 동후왕 일가의 시체였다.
그때의 참혹한 장면은 많은 이들을 경악케 했다. 노인, 어린아이, 여자, 남자, 무릇 동후왕부의 권속이기만 하면 전부 은창에 가슴이 찔려 꿰뚫렸고 성문 밖에 내걸렸다.
선황제는 사람을 파견하여 추적하고 조사했지만 아주 늦도록 결과를 얻지 못했다. 누군가는 동후왕이 평소 일 처리가 세상 예법에 얽매이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하여 적지 않은 집안과 원수가 되었던 터라 이렇게 전 가족이 보복당하여 일가가 참사한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일생 임금에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한 노 동후왕이 늙어서 이 같은 종말을 맞았으니 사람들은 저절로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제는 이 일 때문에 큰 병을 앓았고 오래지 않아 승하하였다. 동시에 전국에 이 일에 대해 백성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금한다는 함구령이 내려졌다. 어쩌면 동후왕의 죽음이 너무 지나치게 처참하다 생각하여 함부로 이야기하지 못하도록 엄중하게 관리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왕씨는 동후왕이 죽고 오래지 않아 장사양에게 시집갔다.
왕씨의 마음속에 장사양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동후왕 사후에 매우 바삐 출가를 했다. 마치 기다릴 수 없기라도 한 듯했고 심지어 부모의 반대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당시 장사양은 일개 말단 관리에 불과했고 왕씨는 예쁘고 귀여운 미인에다가 가세도 유복했다. 장사양의 입장에서는 이는 하늘에서 떡이 떨어지는 것과 같은 일이라 스스로 구하려 해도 얻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성혼 후에 열렬하던 장사양은 돌변하여 왕씨를 데면데면하게 대했고 왕씨도 장사양이 안중에 있었던 적이 없는 것처럼 대했다. 두 사람이 겉으로는 친한 것 같지만 속으로는 각자 딴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왕씨가 회임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당시 장부에는 소문이 돌았는데, 왕씨가 노야와 합방을 한 적이 없으니 그 아이는 분명 노야의 씨가 아닐 것이며 왕씨가 바삐 시집을 온 이유도 배 속의 씨를 곧 감출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누가 그 아이의 부친일까?
아벽은 동후왕의 사후, 날마다 왕씨가 어릴 때 동후왕이 그녀에게 준 옥 팔찌를 들고 흐느껴울 때 표정이 비할 데 없이 슬펐다는 것만 알았다.
왕씨는 심지가 굳어서 사랑하는 사람이 참사를 당했다면 그를 따라 저승길을 함께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돌연 일개 말단 관리에게 시집을 갔고 오래지 않아 아이를 가졌다.
지극히 정상적이지 않은 일이었다.
한안은 그녀를 보았다.
“자네 말은 내가 동후왕의 딸이라는 것인가?”
지난 일을 손짓으로 말하는 아벽의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아벽은 한안이 마치 날조된 옛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표정에 아무런 동요도 없는 걸 보고는 저절로 멍해졌다.
한안은 천천히 반복했다.
“동후왕의 딸?”
아벽이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한안은 웃음이 넘치는 얼굴을 했다. 그러나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멸문 당한 동후왕부, 미혼에 먼저 임신을 한 규방 여자, 왕의 작위와 남겨진 고아, 출생의 비밀.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아벽, 몇 년 동안 자네는 아주 고생스럽게 살았지.”
아벽은 멍해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한안은 오래되고 허름한 방 안을 한 번 쭉 둘러보고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오늘날의 처지에 이르게 된 그 원인은 부친 때문이지?”
아벽은 그녀를 보며 말이 없었다.
한안은 몸을 쪼그리고 앉아 그녀의 눈빛을 직시했다.
“자네가 말한 것을 내가 믿어야 할까, 믿지 않아야 할까?”
아벽은 한안의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자 자신의 생각이 간파당하는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신속히 고개를 숙였다. 한안의 낭랑한 목소리가 아벽의 귓가에 울렸다.
“급람, 아벽에게 은자 한 주머니를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