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16)

“사소한 수고이니 2소저는 마음에 둘 필요 없소.”

그러나 위여풍의 눈빛은 저절로 한안을 향했다.

한안은 요리를 흥미진진하게 맛보며 만사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녀는 장어산과 위여풍이 자기 앞에서 미인과 영웅 연극을 공연하는 것을 보고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장사양과 위 왕이 술잔을 기울이며 즐겁게 담소하는 것을 보고 있을 기분도 아니었다. 장금과 만 이낭은 몸이 불편하다고 참석하지 않았고 미 이낭도 몸을 보양한다고 작은 곁방에서 단독으로 음식을 만들게 하며 부용원에 남아 있었다. 이 탁자에는 그녀의 눈에 거슬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장어산은 위여풍의 시선이 한안에게 쏠려 있는 것을 알아챘다. 그녀는 잊지 않았다. 자신이 산적에게 납치된 것은 전부 장한안의 탓이었다. 비록 그들은 그녀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지만 경성 안팎이 모두 그녀가 산적에게 납치된 사실을 알고 있으니 명성은 이미 훼손되었다. 높은 가문에 시집가고자 했던 소망을 이룰 수 없게 된 것이다. 어머니는 당분간 참으라고 하였다. 그녀는 장한안에게 자신이 겪은 것의 열 배를 겪게 할 작정이었다. 장한안이 살아도 죽는 것보다 못하게 할 것이다.

위여풍이 한안을 바라보자 장어산은 질투심이 치밀어 올랐다. 어산은 산적의 손에서 자신을 구해낸 온화하고 품위 있는 이 남자에게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후에 그가 위친왕 세자라는 것을 알고는 더더욱 마음이 기울었다. 그녀는 자신의 용모에 자신이 있었다. 남자라면 누구나 미색을 탐하는 동물이 아닌가. 어쩌면 위여풍의 사랑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겼다. 하지만 그가 장한안만 돌아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한안은 어산의 적녀 지위를 빼앗았고, 그녀가 산적에게 묶여가도록 했고, 지금 또 그녀가 마음에 둔 사람을 뺏으려 했다. 장어산은 맹세했다. 반드시 장한안에게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게 해서 자신에게 달려와 애걸하게 만들겠다고.

점심식사가 끝나고 장사양은 위 왕과 서재에 머물러 일을 의논했고, 장어산에게 위여풍과 함께 부중을 돌아보게 했다. 한안은 조금 피곤했다. 낮잠을 잠깐 잘 생각으로 긴 회랑을 걸어갈 때, 몸 뒤에서 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장 4소저.”

몸을 돌려서 다가온 사람을 마주하고 절을 했다.

“위 세자.”

“2소저가 구조되어 4소저는 마치 실망한 듯하오만?”

위여풍은 한안의 얼굴 위 표정 하나하나를 세심히 관찰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방은 전혀 화내지 않고 그저 웃고만 있었다.

“한안이 실망한 것은 위 세자께서 하룻밤이나 지난 후에야 2소저를 구하러 간 것이지요.”

위여풍은 그 웃음이 비웃음을 머금고 있음을 알아보았다.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당신은 자신이 하는 일이 빈틈없이 완벽하다고 생각하오?”

한안은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게 대답했다.

“저는 스스로를 너무 높게 보지 않습니다.”

그는 한안이 자신을 돌덩이를 대하는 듯 대하는 걸 보고 온화하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당신은 나를 싫어하시오?”

한안은 이상하다는 듯 그를 한 번 보았다. 위여풍이 어떤 생각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시 세상을 살게 되면서 그녀는 수많은 일들을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 위여풍은 더 이상 그녀의 상상 속 완벽하고 흠결 없이 겸손한 군자가 아니었다. 가까이 갈수록 한층 더 명확히 보였다. 그는 결코 자신의 상상만큼 그렇게 훌륭하지 않았다. 심지어 염치가 없었다.

“세자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소녀는 세자와 몇 번 본 것에 불과할 뿐인데 어찌 좋아한다 할 수 있겠습니까? 세자께서 이 때문에 시시콜콜하게 따지는 것은 더욱 불필요한 일이지요. 소녀와 세자는 그저 인사를 나눈 적 있는 사이일 뿐인 걸요.”

한안은 더 이상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녀와 위여풍은 태자 진영과 7황자 진영으로 나뉘어 서게 될 것이었다. 그때 가면 적이 될 텐데 무슨 친분이 남아 있으랴.

위여풍은 이 말을 듣고 안색이 변했다. 한안을 오래도록 응시하다가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아마도 잘못 생각한 것 같소. 인사나 나눈 적 있는 사이? 4소저는 이후 나의 세자비가 될 것이오.”

한안은 하마터면 큰 소리로 반박할 뻔했지만 마음을 안정시키고 천천히 말했다.

“세자께서 정말 농담을 좋아하시네요. 이런 말은 말하기 전에 세 번 숙고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한안의 명성을 훼손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녀의 말은 이치에 합당한 말이었다. 하지만 위여풍은 자신과 어떠한 관계도 바라지 않는 그녀의 모습이 더욱 눈에 거슬렸다.

“4소저는 오늘 일을 보고 아직 이해하지 못한 거요? 부친께서는 이미 나를 당신과 정혼시킬 의향이시오. 당신이 성년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바로 할 거요. 장 대인도 이미 이 일에 동의했소.”

한안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장사양의 몰염치함이 극도로 증오스러웠다. 위가와 친분을 맺기 위해 자기 딸을 팔아넘기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니. 어찌 되었든 간에 그녀는 다시는 위여풍에게 시집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세자께서는 어째서 저를 처로 맞이하고 싶으신 건가요?”

한안이 가볍게 물었다.

위여풍은 조금 불편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당신과 나는 사회적 지위와 형편이 걸맞으니 당신을 처로 맞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오.”

“경성 안에 고관 귀인의 소저들이 적지 않습니다. 제가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형편이 걸맞은 유일한 소저는 결코 아니죠. 안 그런가요?”

그녀는 입술을 오므리며 웃었다.

“세자께서 아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한안의 마음속에 세자께서는 있지 않습니다.”

위여풍은 무언가에 찔린 것 같았다. 불편한 감각이 온몸에 퍼지면서 자신의 물건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긴 것 같았다. 그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변했다.

“당신 마음속에 누군가 있소?”

한안은 아연실색해서 바로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위여풍은 그제야 얼굴빛이 조금 느슨해졌다.

“그렇다면 당신은 또 어째서 나에게 시집오길 원하지 않는 거요?”

한안은 담담하게 말했다.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제 마음속에 세자께서 없으시다고요. 또 말씀드리자면 비록 지금 마음속에 누군가 있지는 않지만, 나중에는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위여풍 당신은 아닐 것입니다!”

“당신……!”

위여풍은 준수한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화가 났다. 단정한 이목구비가 일그러졌다. 위여풍은 한안의 앞에서는 한결같은 가면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언제나 저도 모르게 냉정을 잃곤 했다.

한안은 계속해서 말했다.

“위 세자께서 단지 장가의 딸을 처로 맞이하고 싶으신 거라면 어산 언니가 있지요. 지금 당신께서 그녀를 구했으니 더욱 감격해 마지않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부친께서는 주 이낭을 정실로 세우고 싶어 하시니 이후 어산 언니가 진짜 적녀가 된다면 신분이 위 세자와도 잘 어울릴 테지요.”

위여풍은 한안의 말을 듣고도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도리어 경멸스럽게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패류잔화(敗柳殘花: 나이 들어 미모가 퇴색한 미녀를 의미하나 부정한 여자의 뜻으로도 쓰임)일 뿐. 깨끗한 명성을 잃은 몸인데 어찌 세자비가 될 자격이 있겠소!”

한안은 멍해졌다. 문득 처량한 슬픔이 느껴졌다. 생각해 보니 전생의 위여풍도 이런 생각을 품었겠구나 싶었다. 과거 산적에게 납치된 것이 그녀였기 때문에 혼인식 날 밤에 죽는 것을 눈을 뻔히 뜨고 지켜보았던 것이다. 지금 산적에게 납치된 것은 장어산으로 바뀌었고 그래서 위여풍은 한안를 처로 맞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세상일이 뒤바뀌었으니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몰랐다.

한안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세자께서 스스로 처리하실 일이지요. 어쨌든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저는 세자비가 될 수 없습니다.”

한안은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서 바로 떠나려 했다.

위여풍이 그녀의 손목을 꽉 움켜쥐면서 이를 악물고 말했다.

“부모의 명이고 중매인의 말이 있소. 장 대인이 이미 동의했는데 당신이 반항할 수 있겠소?”

한안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오른손을 뒤집어 은침으로 위여풍의 손등을 찔렀다. 위여풍은 손 위의 통증을 느끼자마자 무의식적으로 손을 풀었다. 한안은 몇 걸음 뒤에 서서 담담하게 그를 보았다.

“세자께서 이 말을 들어본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네요. 부서진 옥이 될지언정 온전한 기와가 되지는 않겠다는 말이 있지요.”

그녀는 무척이나 가볍게 말했다.

“제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강요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어쨌든 세자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잖아요. 소녀가 악랄한 사람이라는 것을요. 만약 억지로 강요한다면 소녀가 또 무슨 악랄한 일을 저지를지 모르겠네요.”

그녀의 말 속에 담긴 위협은 그를 섬뜩하게 했다. 위여풍이 정신을 차렸을 때, 한안은 이미 멀리 가버린 후였다. 막 그 방향으로 뒤쫓아 가려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위 세자, 어찌 여기 계시나요? 한참 찾았는데도 못 찾았지 뭐예요. 무척 걱정했답니다.”

장어산이었다. 여종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위여풍은 순간 종전의 자상하고 우아한 모습을 회복하고 옅게 웃으며 장어산에게 향했다. 그러나 눈동자 속에는 성가셔하는 기색이 있어 장어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한안은 회랑을 돌아서 청추원으로 돌아갔다. 줄곧 곁에서 따르던 급람이 걱정스레 말했다.

“소저…….”

방금 전 위여풍의 말은 그들의 귀에도 들렸다. 한안이 명확하게 거절하긴 했지만 위여풍의 성격으로 봤을 때 그리 곱게 물러설 리 없었다. 이 시대, 여자의 혼사는 결코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었다. 만약 장사양이 동의했다면 한안은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위여풍에게 시집가는 것만은 결단코 원치 않았다. 최근 몇 차례 위여풍과 마주치면서 위여풍이 자신이 생각하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한층 더 명백히 알게 되었다. 전생에 자신이 어째서 그에게 푹 빠져 있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한안은 앉으나 서나 불안했다. 주홍 쪽에서 전해들은 소식에 따르면 산적의 일은 대리사 조 대인이 위 왕에게 전권을 넘겼다 한다. 한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위 왕이 처리하면 분명 장사양에게 선심을 쓰려 할 것이고 주씨는 장사양이 이 일을 덮어버리도록 방법을 찾아낼 것이었다.

그래도 최소한 주씨의 가면을 한 겹 벗도록은 만들었다. 장어산이 산적에게 납치된 사실은 이미 경성에 널리 퍼졌고 순결을 잃었다는 소문을 얻음으로써 주씨는 스스로 제 발등을 찍은 격이었다. 망강루에서의 일로 귀인들은 모두 한안이 장사양의 첩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중에 장부와 대적하는 위치에 서면 한안은 여론의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었다.

“맞다.”

한안은 돌연 무언가를 떠올렸다.

“어사 대인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주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적절히 처리했습니다, 소저.”

*

어서방(御書房: 임금이 쓴 글씨 및 서적을 보관하는 방) 내.

퍽 소리와 함께, 밝은 노란색의 상소 하나가 바닥에 내던져졌다. 황상은 노기등등하여 손에 든 붓을 휘둘렀다.

“터무니없다! 터무니없어!”

책상 앞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한 사람은 파란 하늘빛 공단 관복을 입었고 허리춤에 간단하고 단정한 옥대를 둘렀다. 다른 한 사람은 장포를 입고 머리에 금관을 썼으니 바로 부운석과 7황자였다.

“상소 하나 하나가 전부 어사가 장사양을 탄핵하는 것이다! 조정 관리가 되어 첩을 총애하여 처를 괄시해 죽게 하고, 소첩이 적녀를 괴롭히는 것을 방임하다니! 정말이지 그를 잘못 봤군! 짐은 장사양의 관직을 박탈하겠다!”

7황자는 당황하여 웃으며 말했다.

“부황, 화를 가라앉히십시오. 몸에 해롭습니다. 장사양이라면 그 3품 장 대인입니까?”

황상은 그를 한 번 흘끗 보고 말이 없었다.

7황자는 황상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장 대인은 평소에 사람됨이 온화하며 강직하여 아첨하지 않는데 어찌 첩을 총애하여 처를 괄시할 수 있겠습니까? 혹 무슨 오해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황상은 탁자를 내리쳤다.

“설마 이 어사들이 죄다 눈이 멀었다는 말이냐?”

7황자는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소자 감히 의심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그러나 멀쩡히 있다가 돌연 이렇게 많은 어사들이 함께 장 대인을 탄핵하니 소자는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것뿐이옵니다. 만약 오해로 대신을 벌한다면 아마도 다른 대신들의 마음까지 얼어붙게 될 것입니다.”

황상은 차가운 눈으로 7황자를 보다가 돌연 하하 큰 소리로 웃으며 자애롭게 말했다.

“네 말도 일리가 있다.”

말머리를 돌렸다.

“운석, 너는 이 일에 대해 무슨 의견이 있느냐?”

부운석은 담담히 말했다.

“어제 섣달그믐 밤, 벗들과 불꽃놀이를 감상하러 망강루에 갔다가 우연히 재미난 일을 목격했습니다.”

황상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어떤 일이냐, 말해보라.”

7황자의 몸이 굳어졌다. 그러나 부운석 여전히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장 대인 일가도 망강루에 있었습니다. 그때 장부의 여종이 와서 알리기를 장 2소저가 산적에게 납치되었다 했지요.”

“그런 일이 있었어?”

황상의 얼굴빛이 굳어졌다.

부운석은 계속해서 말했다.

“장 대인의 첩실, 바로 장 2소저의 생모가 장 4소저가 모해했다고 의심을 품었고, 사람들 앞에서 장 4소저에게 해명을 요구하며 장부 적자의 뺨을 내리쳤습니다. 장 4소저는 강요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대리사 조 대인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 대인이 그녀를 위해 책임지고 처리해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지요.”

황상은 분노해 마지않았다.

“장사양이 미쳐서 망령이 든 게로구나! 나의 대종에 이런 관원이 있어선 안 된다. 자기 소첩이 자기 적자를 때리는 것을 용납하다니. 그 같은 관리는 갈수록 방자하게 날뛰게 될 것이다! 예의 예 자를 어떻게 쓰는지도 잊어버린 게지!”

부운석은 서두르지도 여유 부리지도 않고 말했다.

“대리사 조 대인이 그 자리에 있었으니 황상께서 만약 그 과정을 알아보고 싶으시다면 그를 불러 대질하시면 됩니다.”

부운석은 말을 마치고 의미심장하게 7황자를 한 번 보았다.

“7황자, 어떻게 생각하느냐?”

7황자의 낯빛은 딱딱하게 굳었으나 억지로 웃음을 끌어냈다.

“왕숙의 말씀이 맞습니다. 듣고 보니 장사양이 너무 무정하네요. 자신의 친딸을 그렇게 대하다니요. 그러나…….”

그는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장 대인이 조정을 위하여 적지 않은 일을 했습니다. 그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황상은 눈살을 찌푸렸다.

“여봐라. 성지를 작성하라. 장사양을 정5품으로 강등하고 그에게 벌로 1년 치 녹봉을 삭감한다.”

7황자의 입가가 굳었다. 몇 단계나 한꺼번에 강등되었으니 이번 징벌은 가볍지 않았다.

부운석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황상, 경성 수비를 한층 엄히 하라고 분부하셔야 될 듯합니다. 어제 망강루에 자객이 출현하여, 허다한 귀인들을 살해하였습니다. 소신도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황상은 놀랐다.

“이 일은 짐이 이미 알고 있다만, 너도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몰랐구나. 부상을 입은 것이냐?”

부운석은 고개를 저었다.

“소신은 괜찮습니다. 다만 황상께서 이 일을 철저히 조사하여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결국 경성 백성의 안위가 걸린 중대한 일이니까요.”

황상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7황자, 이 일은 네게 조사를 맡기마. 반드시 단서를 조사해 내거라. 짐은 경성에 이런 난적이 있는 것을 용인할 수 없다.”

7황자는 고개를 숙였다.

몇 마디 말을 하고, 부운석과 7황자는 어서방에서 물러나왔다.

궁문에 도달한 후, 7황자가 부운석을 보며 말했다.

“장 대인이 한꺼번에 몇 단계나 강등되었으니 이후 벼슬길은 아마도 순탄치 못하고 험난할 것입니다.”

부운석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지?”

7황자가 좀 가까이 접근했다.

“왕숙께서는 즐거우시지 않으십니까? 장 4소저를 위하여 분풀이를 하셨잖습니까. 그나저나 왕숙과 장 4소저의 관계가 얕지 않네요. 들리는 바에 따르면 어젯밤 장 대인이 떠난 후 장 4소저는 망강루에 남았다고 하던데요. 누군가 그녀의 여종을 봤답니다. 왕숙, 아무래도 장 4소저에게 마음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부운석은 몸을 돌려 웃는 듯 마는 듯 7황자를 보았다.

“이 일에 대해 이상할 정도로 열심이구나.”

7황자는 자기 허리춤의 옥패를 만지작거리면서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지요. 하지만 애석하게도 왕숙은 아마 기회가 없을 겁니다. 장사양이 이미 장 4소저를 위 세자에게 세자비로 시집보내기로 승낙했답니다. 내년 성년 이후 바로 혼사를 치른다 하네요.”

7황자는 얼굴 가득 찬탄의 빛을 띠었다.

“위 세자와 장 4소저라면,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형편이 걸맞는 셈이죠. 하하.”

부운석의 손동작이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끌어올리며 말했다.

“아주 기대되는구나.”

부운석이 멀리 간 후, 7황자를 따르던 젊은 사내종이 말했다.

“전하, 지금 장 대인이 관직이 강등되면 저희는…….”

7황자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부운석은 생각보다 상대하기 성가시구나. 장사양이 어떻게 갑자기 어사에게 탄핵을 받았을까?”

그 젊은 사내종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오늘 새벽에, 어사들이 문을 나서는 길에 우연히 잡담을 하는 백성들을 만나, 이 일에 대해 알고서는 바로 상소를 썼다 합니다.”

7황자는 고개를 숙이고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웃는 얼굴을 드러냈다.

“장사양의 딸을 잘 조사해야겠다. 사람을 시켜 그녀를 미행케 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말거라.”

그 젊은 사내종은 명을 받고 떠나갔다.

부운석은 표정은 냉담했으나 7황자의 말이 아직 귓전에서 맴돌고 있었다. 위여풍이 장한안을 세자비로 맞으려 한다고? 머릿속에 그녀의 맑고 투명한 눈이 떠올랐다. 장한안의 위여풍에 대한 적의는 그와 같은 외인조차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분명 장한안은 원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장사양이 정말로 사돈 관계 맺기를 승낙했다면 그녀도 전혀 방법이 없다. 하지만 그 어린 아가씨가 순순히 위여풍에게 시집가진 않을 것 같았다.

부운석은 조금 넋을 놓았다. 처음에는 기억 속 어린 계집애가 예상을 뛰어넘는 모습으로 장성했다는 데에 그저 흥미를 느꼈을 뿐이다. 그녀를 도운 것은 그저 그때의 은정을 갚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혼사 같은 이런 일은 자기가 관여할 범위가 결코 아닌 듯했다.

9장

장사양의 관직을 강등한다는 성지가 장부에 전달되었을 때, 장사양은 마침 주씨와 침상에 뒤엉켜 있었다.

미 이낭은 회임을 했으니 그를 모실 수 없었고 만 이낭은 장사양을 자발적으로 모실 리 없으니 오직 주씨만이 남아 그 기회를 낚아챘다. 정성을 들여 단장을 하고 장사양을 보러 가니 마른 장작이 거센 불길을 만난 듯 정욕이 타올라 즉시 그녀와 백주대낮에 불처럼 뜨겁게 뒤엉켰다.

성지를 가져온 공공이 성지 낭독을 마친 뒤에도 장사양은 여전히 멍하니 그 자리에 엎드려 있었다.

“장 대인, 성지를 받으십시오.”

궁중 태감이 조금 불쾌해 하자 장사양은 그제야 두 손을 떨면서 성지를 받았다. 눈 속의 흉악한 기색에 주씨는 참지 못하고 몸서리를 쳤다.

“노야…….”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장사양이 발로 주씨의 배를 걷어찼다. 주씨는 배를 부여잡고 고통스럽게 땅에 쓰러졌다. 장사양은 그 자리에 있는 다른 사람을 신경도 쓰지 않고 그녀를 마구 두들겨 팼다.

“천한 년! 모두 네 탓이다! 내 벼슬길을 막았어. 이 몸의 관직이 강등됐다. 모두 네가 대단한 일을 했기 때문이야! 천한 년, 재수 없는 년!”

주씨는 그에게 맞아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캄캄했다. 고통스럽게 몸을 웅크리고 배를 부여잡은 채 애원했다.

장어산이 달려가 주씨를 보호하며 땅 위에 무릎을 꿇고 울며 애원했다.

“아버지, 이렇게 어머니를 때리지 마세요. 아버지, 때리지 말…….”

그녀는 말을 다 마치지 못했다. 말을 하자마자 장사양이 납치사건을 떠올렸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의 원흉이 바로 그녀라는 것을. 만약 장어산이 산적에게 납치되지 않았다면 주씨가 대중이 모인 공개적인 장소에서 한안을 괴롭힐 리 없었을 것이고, 또 어사들이 황상에게 탄핵하여 아뢸 일도 없었을 것이며, 더욱이 관직이 강등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니 분노의 불길이 가슴속에서 타올라 장어산도 발로 찼다.

“꺼져라! 너도 천한 년과 마찬가지다. 왜 산적 손에 죽지 않은 게야.”

미 이낭은 옆에서 남의 불행을 즐기는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동시에 조금 뒤늦은 공포를 느꼈다. 장사양의 사람됨은 이처럼 잔인하고 악독했다. 일각 전에 주씨와 함께 다정스레 굴어 놓고 지금은 그녀를 때려죽이지 못해 한스러워하다니. 실로 무정했다. 자기도 주씨 같은 말로를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온몸이 떨렸다.

한안은 탄식했다. 그녀는 장사양에 대해 더할 나위 없이 잘 알았다. 설령 제 아무리 주씨를 총애한다 해도 그의 벼슬길에 영향을 준다면 그는 즉시 안면을 바꾸고 모른 체할 사람이었다. 지금 장사양은 주씨 때문에 관직이 강등되었으니 반드시 격노할 것이며 이 책임을 전부 주씨에게 덮어씌울 것이다. 아마 주씨는 오랜 기간, 장사양의 환심을 얻을 수 없을 것이었다.

장금, 만 이낭과 장한명은 차가운 눈으로 눈앞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아무것도 못 느끼는 듯했다. 성지를 가져온 공공은 이런 광경을 처음 본 터라 장사양을 더욱 경멸하게 되었다. 자기가 첩을 총애해 처를 괄시해 놓고 모든 잘못을 여인에게 떠넘기고 자기 딸의 앞에서도 첩실을 독하게 두들겨 패니 실로 남자라고 할 수 없었다.

한안이 느릿한 걸음으로 앞으로 나와 공공의 수중에 은자 한 주머니를 넣어주었다.

“수고스럽게도 공공께서 걸음 하여 주셨는데 부중의 일이 복잡하여 공공께 차를 드시라고 권하지도 못하겠습니다.”

한안의 행동거지는 단정하고 장중하며 예의가 발랐다. 마치 새로 핀 어린 동백같이 깨끗하고 수려했다. 대갓집 적출 규수로서 이처럼 기개가 있으니 첩실이 질시하고 괴롭히려는 것도 당연하다 생각했다. 공공은 은 주머니를 손대중해보고 웃으며 말했다.

“장 4소저께서는 여인의 고결한 품행을 지니셨군요. 공무 중인지라 바로 황상께 돌아가 명을 집행한 결과를 보고해야 합니다. 이만 물러납지요.”

공공이 간 후에도, 장사양은 여전히 주씨 모녀 두 사람을 마구 두들겨 팼다. 주씨는 잔인하게 걷어차여 땅 위에 엎드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장어산을 몸 아래 보호하고 있었다. 장사양의 주먹질과 발길질이 전부 그녀의 몸 위로 떨어졌고 처음에는 목 놓아 울며 용서를 구했으나 나중에는 목소리가 점점 낮고 약해졌다.

“아버지…….”

장어산이 숨넘어갈 듯 울었다.

“어머니를 때리지 마세요. 어머니가 피를 흘리세요. 피가 너무 많이…….”

한안은 눈을 들어 주씨 모녀를 보았다. 그제야 주씨의 몸 아래로 피 웅덩이가 넓게 퍼져나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선홍색 피는 밝은 햇빛 아래 비할 데 없이 눈을 따갑게 하며 주씨와 장어산의 치마 앞자락을 선홍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아버지, 그만 때리세요. 이낭이 피를 흘리는 것 같아요.”

한안이 기세가 심상치 않음을 보고 서둘러 앞으로 나와 장사양을 저지했다.

장사양은 여전히 화가 나 주씨를 한 번 더 발길질했다. 잠시 후 그는 자신의 신발에 적지 않은 핏자국이 묻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제야 대청 가운데 핏빛이 만연한 것을 보고 당황하여 서둘러 말했다.

“어서 가서 의원을 불러라.”

장어산은 이미 숨을 헐떡이며 울고 있었다. 미 이낭은 회임 중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피비린내 나는 장면을 보는 것이 온당치 않다 하여 바로 부용원으로 돌아갔다. 장한명은 한안에게 내쫓겨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장금은 가서 의원을 불러오도록 하인에게 청했다.

주씨를 침상에 눕혔으나 혼수상태였으며 몸 아래 이불은 피로 흠뻑 젖었다.

장사양도 뒤늦게나마 두려워졌다. 그러나 관직이 강등된 것이 떠오르자 주씨에 대한 미안함이 한 점도 남지 않고 깨끗이 사라졌다.

한안은 침상 가에 서 있었다. 주씨의 피가 몸 아래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알아차리고 순간 멈칫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이기에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부인했다.

의원이 이내 바로 왔다. 침상 머리맡에 앉아 주씨를 오래 진맥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장어산이 다급히 말했다.

“어머니께서 어떠신가?”

그 의원은 장사양을 보았다. 장사양도 물어보는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는 것을 보자 의원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부인은 유산을 했습니다.”

청천벽력 같았다. 장사양과 장어산은 모두 그 자리에서 넋이 나갔다. 한안의 눈빛이 굳어졌다. 추측이 맞은 것인가? 하지만…….

장사양이 서둘러 말했다.

“얼마나 된 건가?”

의원이 주씨를 보았다.

“대강 막 1개월인 듯합니다. 그래서 맥의 상태도 아직 그다지 분명하지 않은 것입죠.”

장사양은 비틀거렸다.

“어찌 유산이 돼…….”

장샤양은 조금 전 주씨를 마구 두들겨 팬 것을 기억해 내니 더욱 믿을 수가 없었다.

한안은 의심스러웠다. 주씨는 확실히 임신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1년 후의 일이었다. 주씨는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장한명은 이미 세상을 뜬 뒤였다. 그래서 장사양은 그 아들을 적자로 삼았다.

그런데 주씨는 어떻게 지금 회임을 할 수 있었을까. 게다가 아직 세상에 나오지도 않은 이 아들이 요절을 했으니 환생 후 그녀가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것이 설마 다른 사람의 운명도 바꾸게 되는 것인가?

주씨는 서서히 정신이 돌아왔다가 장사양의 말이 어렴풋이 귓속에 들리자 가늘게 물었다.

“누가, 누가 유산했다고요?”

모든 사람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당황했다. 문득 몸 아래쪽에 에일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동시에 뱃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장어산이 달려들어 울며 외쳤다.

“어머니…….”

믿을 수 없는 생각 하나가 그녀의 뇌리에 나타났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며 장어산의 손을 꽉 쥐었다.

“어산아, 어미에게 말해봐라. 누가 유산했다고?”

장어산은 두려워하며 그녀를 보았다.

“어머니, 의원 말이…… 어머니가 유산했다고…….”

주씨는 비수가 날라들어 그녀의 심장 깊은 곳을 헤집는 것 같았다. 그녀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이 아이는 그녀가 오래도록 바라던 아들이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그녀는 오직 장어산, 딸 하나뿐이었다. 만약 아들이 있었다면 장부의 정실 자리는 반드시 그녀의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피 웅덩이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눈 속에 뼈에 사무치는 원한이 묻어 나왔다. 그녀의 눈빛이 장사양과 한안의 몸 위를 쓸고 지나갔다. 이 남자는 그녀의 복중 아이를 말살했다. 저 조그만 천한 년은 그녀를 이 지경까지 몰고 갔다. 복수하지 않는다면 주씨가 아닐 것이다!

한안은 주씨의 원한을 보고 탄식했다. 주씨는 이로 확실히 장사양을 죽일 듯 증오하게 되었다. 그녀가 앞으로 이간질할 필요는 없어졌다. 그러나 주씨는 한안을 눈엣가시로 여길 것이며 수단은 이전에 비해 백 배는 더 악독해질 것이었다. 지금 그녀는 침상에 누워 있으니 잠시 경거망동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네는 몸이 잘려도 여전히 꿈틀거리는 법. 일단 그녀의 몸이 좋아지면 반드시 본래의 복수를 돌려주려 할 것이다.

그녀는 주씨가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주씨 배후의 힘은 확실히 꺼려졌다. 예를 들면 장 태사 같은.

전생을 기억해 보면 섣달그믐이 지난 후 오래지 않아 장 태사의 총애를 받는 주씨의 친언니 대 주씨가 자기 아들을 데리고 장부에 손님으로 왔다.

그 조카 몇이 오고 오래지 않아 장한명에게 청루의 그 일이 발생했었다.

좋다. 새로운 빚과 묵은 빚, 모두 깨끗이 청산해야겠지.

*

경성 안은 짙은 새해의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집집마다 기쁨이 넘쳤고 도처에 등롱을 달고 오색 끈으로 장식했다. 사람들은 골목골목을 누볐고 어디서나 화기애애한 정경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금년의 장부는 적막하고 쓸쓸했다.

급람은 바구니 안의 견사를 돌돌 감으면서 말했다.

“소저께서는 어째서 또 수놓기를 하시나요? 엄동설한입니다. 손이 얼어 상하니 그만하시지요.”

눈처럼 흰 수틀 위에 큰 기러기 한 마리가 절반 정도 수 놓여 있었다. 금빛 견사로 수를 놓으니 화려하고 부귀한 봉황 같았지만, 결국 구천을 돌며 날 수는 없었다.

한안은 가위를 가져다 여분의 실밥을 잘라내고 웃으며 말했다.

“시간을 보내는 것뿐이야. 게다가 오래도록 손을 대지 않으면, 손이 둔해질까 두렵구나.”

유모는 마음이 몹시 아파 난로를 한안 곁으로 좀 가까이 두었다.

“아가씨 너무 수고하지는 마세요. 주씨의 언니가 오늘 부에 들어온답니다. 정말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것이네요. 장부를 뭘로 아는 겐지, 원.”

한안은 손을 저었다.

“주 이낭이 막 아이를 유산했으니 친자매로서 병문안 한 번이라도 오는 게 정상이지. 그녀들 자매의 정이 깊다니 장부는 당연히 떠들썩하게 맞이해야 할 거야.”

유모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병문안만 온다면 그만인데 자기 아들까지 데려온다지요. 이건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죠. 제가 보기에 그녀는 장부에 오래 머물 심산이에요.”

한안은 듣고 우스웠다.

“어째 말하고 보니 돈 뜯으러 오는 친척 같네? 오래 머문다면 머물라지. 젓가락 몇 개 늘어나는 것에 불과한 일인걸.”

유모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

“아가씨……, 노비는 걱정됩니다. 그녀는 주씨를 위해 분풀이를 하러 오는 것이니 아가씨께 시비를 걸 겁니다.”

한안은 수중의 수틀을 내려놓고 말했다.

“아직도 그녀가 무서워? 장부는 태사부가 아니야. 이 문을 들어오면 수월하게 나갈 생각은 말아야 할 거야. 하지만 그녀가 우리에게 흉계를 꾸미려 하니 만전의 준비를 기해야겠어.”

“그…….”

유모는 조금 망설이며 한안을 보았다가 그녀의 얼굴이 침착하고 자신감에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 조금은 안심했다. 몇 차례 주씨가 연달아 실패한 것을 그녀라고 알아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눈앞의 소저는 홀로 일을 맡아 처리할 수 있었고 아무에게도 더 이상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았다. 부인께서 세상에 계셨다면, 분명 대단히 기뻐하며 안심하셨을 것이다.

주홍이 부용고(芙蓉糕: 찹쌀로 만든 과자) 한 접시를 받쳐 들고 들어왔다.

“소저, 주……부인이 오셨습니다.”

장 태사의 첫 번째 부인은 세상을 떠난 지 여러 해 되었다. 지금 대주씨가 세력이 강하여 정실과 같은 실속은 다 가지고 있었다.

한안은 접시 안에서 모양이 가장 예쁜 것 하나를 집어 입 안에 넣었다. 맑고 향긋한 맛이 그녀의 눈이 휘어지게 했다.

“다 먹은 후에 우리 가서 보자꾸나.”

객청 안.

장사양은 주인 자리에 앉아 만면에 웃는 얼굴을 한 채 온유하고 나긋나긋한 여자를 마주하여 보고 있었다.

여자는 가슴까지 오는 길이의 분홍색 반비(半臂: 소매 없는 짧은 겉옷)와 긴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었고 자태는 얌전하고 고왔다. 머리 위에는 분홍색 장미꽃 한 송이를 꽂았고 긴 머리는 하나로 묶어 가슴 앞에 드리웠다. 이목구비가 정교한 것이 청아하고 수려하며 단정하고 장중했다. 그러나 얌전한 기색을 품은 눈꼬리가 살짝 위로 치켜 올라가 있어 유혹적인 추파를 보내고 있었다.

“제부.”

목소리가 감미롭고 아름다우며 매혹적이어서 듣는 사람의 마음을 참을 수 없이 근질거리게 했다. 게다가 곱고 가냘프기까지 한 그녀가 바로 대주씨였다.

설령 여색을 좋아하지 않는 장사양이라 해도 이 같은 절색을 보니 마음이 흔들렸다. 그의 후원 안에서 만 이낭을 제외하고 미 이낭은 불같이 열정적이었고 주씨는 온유하고 살뜰했다. 지금까지 이렇게 매혹적인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주씨가 비록 온유하고 자기에게 아첨하고 비위를 맞출 줄 알기는 하지만 오래 보고 있으면 재미없고 심지어 지루했다. 그러나 눈앞의 사람은 대갓집 소저 같은 고귀한 기질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일거수일투족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매력과 부드러움이 있었다. 이미 부인이 되었다지만 소녀와 다를 바 없어 침상에서도 부드러울까 하는 상상을 참을 수 없게 했다.

옆의 주씨는 장사양 눈 속의 욕망을 보고 불쾌감이 스쳤다. 그녀는 가볍게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

“언니…….”

대주씨는 그제야 몸을 일으켜 세우고 느긋하게 걸어와 주씨의 손을 잡았다.

“동생, 어찌 이리도 조심하지 않을 수가 있어.”

대외적으로, 장부는 주씨 복중 아이가 떨어진 것이 눈 오는 날 길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유산되었다고 알렸다.

주씨는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나오지도 못한 아이를 떠올리자 정말로 비참해졌다.

“모두 내가 조심하지 않은 탓이에요.”

대주씨는 역시 슬픈 표정으로 눈 속에 눈물이 반짝였다. 그 모습이 그녀의 예쁘고 귀여운 용모와 어울려 사람 마음을 설레게 했다. 장사양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대주씨를 응시했다. 가까이 가서 보니 한층 더 이 사람은 흔히 얻기 어려운 미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 태사가 총애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장 태사는 무슨 복이 있어 그렇게 나잇살을 먹고도 이 같은 미인을 가진 걸까. 정력이 끝도 없이 소모될 게 겁나지도 않나. 만약 자신이었다면…… 하고 장사양은 머릿속으로 참을 수 없는 상상이 끝없이 뻗어갔다.

주씨의 눈빛이 대주씨의 몸 뒤를 넘어갔다.

“거기, 위아지? 눈 깜박할 사이에 이렇게 컸구나.”

그 소년은 앞으로 걸어와 히히 웃으며 주씨를 향해 읍을 했다.

“조카가 이모를 뵙습니다.”

주씨는 장위가 진심으로 마음에 들었다.

“착하구나. 위아는 한층 더 예의발라졌어. 보기에도 훌륭한걸. 만약 내 아이가 아직 있었다면…….”

대주씨는 그녀가 슬픈 일을 떠올리는 것을 보고 서둘러 말했다.

“동생, 그 일은 더 생각지 말아. 우선 몸을 잘 보양하고 아이는 이후에 또 가질 수 있어. 화로 몸을 상하게 하지 말거라.”

주씨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여종이 약을 다 달이자 주씨는 하인의 부축을 받아 공동원으로 돌아갔다. 장위도 옆에서 따라갔다. 대주씨와 장사양은 뒤에서 천천히 걸어갔다.

장사양은 이 미인이 마음에 들었으나 장 태사의 권세가 있으니 도리를 지켜야 했다. 부중 화원을 지나갈 때, 대주씨가 먼저 입을 열어 물었다.

“듣자 하니 황상께서 제부의 관직을 강등하셨다는데 그런 일이 있나요?”

장사양은 한창 마음속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었는데 불시에 이런 질문을 받자 냉수 한 통을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쓴 것 같았다. 그는 조금 기가 꺾여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지요.”

대주씨는 걸음을 멈추고 절절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제부가 첩을 총애하여 처를 괄시했다고 말들 하던데 란아는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란아는 대주씨의 처녀 때 이름이었다. 그녀가 드러내놓고 말을 하니 도리어 장사양이 멍해졌다.

“게다가 내 동생이 조금 제멋대로 하는 때가 간혹 있지만 그렇게 악독한 사람은 아니에요. 어찌 부중 4소저를 괴롭힐 수가 있겠어요. 아마도 무슨 오해가 있을 거예요.”

장사양은 원래 한안에게 불만이 있던 터라 바로 대답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대주씨는 그를 향해 미소를 드러냈다.

“제부께서 이렇게 생각하시니 란아는 마음이 놓이네요. 이번에 란아가 장부에 온 것은 동생을 위로하고 4소저와 동생의 엉킨 매듭을 풀어주기 위해서예요.”

장사양은 그녀의 웃음소리에 사로잡혀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소이자의 말대로요.”

장사양이 대주씨를 소이자라고 부르자 사방의 공기가 바로 미묘해졌다. 대주씨가 주씨의 언니이므로 존중의 뜻을 담아 ‘처형’이라는 뜻의 ‘대이자’를 써야 하는데, 아랫사람에게 애칭으로 붙이는 ‘소’자를 붙여 ‘소이자’라 불렀기 때문이다. 대주씨는 가냘프게 한 걸음 물러났고 얼굴 위에 홍조가 재빨리 떠올랐다.

“제부는 과연 좋은 남자시군요…….”

사방에 사람이 없었다. 장사양은 눈앞의 미인이 한 번 찡그리고 한 번 웃음 짓는 것에 혼을 다 빼앗길 지경이었다. 주씨와 달콤하게 사이가 좋던 때라 해도 지금처럼 마음이 참기 어려울 정도로 동하는 지경까지는 아니었다. 장사양은 기세를 틈타 대주씨의 작은 손을 더듬어 어루만졌다.

“란아도 좋은 여인이오.”

대주씨는 놀라 서둘러 몸부림치며 허둥지둥 달아났다.

장사양은 대주씨를 잡았던 그 손을 코에 대고 힘껏 냄새를 맡았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얼굴에는 즐기는 기색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공동원의 주씨는 침상 위에 반쯤 기대고 누워 다 마신 약그릇을 여종에게 건네주었다. 고개를 들어 대주씨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냉소를 금치 못했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꼬여냈어?”

“남자 간수를 못하는 건 네가 능력이 없어서지. 모든 여자가 다 너처럼 무능한 건 아니란다, 동생.”

대주씨는 그녀 옆에 앉아 자신의 손톱을 만지작거리면서 살짝 웃으며 말했다.

설령 주씨가 지금 장사양에 대해 이미 감정이 없다 해도 이 말을 듣자 화가 치밀었다.

“모든 여자가 다 언니처럼 방탕한 건 아니지!”

“동생이 날 비난할 필요가 있어? 설마 네가 어떻게 부에 들어왔는지 잊었니? 순결했던 건 아니었을 걸?”

그녀는 주씨의 초췌한 얼굴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멍청해. 내가 만약 너라면 나와 기 싸움 따위를 하고 있지는 않을 거야. 너를 해친 사람들에게 어떻게든 본때를 보여 주었겠지.”

주씨는 차갑게 코웃음을 치고 말을 하지 않았다. 대주씨와는 친자매이지만 두 사람의 감정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어려서부터 클 때까지 대주씨는 주씨보다 더 민첩하고 교활하게 굴었지만 성격은 더 부드러운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 때문에 대주씨를 애모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 같은 자매라 해도 대주씨는 태사부에서 생기 있고 왕성하게 지냈고 자신은 장사양에게 모질게 구타당하고 유산까지 했다. 친자매 간도 경쟁이 있는 법이다. 그녀에 비하면 주씨는 박복하다 할 수 있으니 어찌 분하지 않으랴?

대주씨는 그녀의 생각을 꿰뚫어 본 듯 웃으며 말했다.

“그 4소저가 너를 이 지경으로 몰아넣었으니 만만하진 않겠구나. 그녀를 제거하는 게 나를 질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지. 결국 너와 나는 친자매야. 내가 너를 해칠 리는 없잖아.”

주씨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고 있었다. 지금 그녀를 도울 수 있는 것은 오직 대주씨뿐이었다. 대주씨의 수완은 주씨도 따라갈 수가 없었다. 당초 친정에 있을 때 두 자매는 똑같이 서녀였다. 그러나 언니는 정실부인을 싸워서 무너뜨렸고 친정을 쥐락펴락했다.

“그럼 언니 말은…….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거야?”

주씨가 망설이다 물었다.

“언니에게 경고하지 않았다고 나를 탓하지는 마. 그 조그만 천한 년은 그야말로 요괴야. 나는 지금까지 그년처럼 그런 나이에 이처럼 무서운 수완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어.”

“그러니까 네가 멍청하다는 거야.”

대주씨는 나른하게 말했다.

“불과 열셋밖에 안 된 어린 계집이야. 내년에 성년이 되면 바로 혼삿말이 나올 텐데 네가 그년과 혼사에 대해 얘기하면 분풀이를 할 수 있지 않겠어?”

입가에 냉소가 흘러나왔다.

“여자의 혼사는 아무래도 일생과 관계된 일이지.”

주씨가 화를 내며 씩씩거렸다.

“그년의 혼사는 내가 임의로 정할 수가 없어. 노야가 이미 위 왕과 정했다고. 내년 성년이 되기를 기다려봤자 그년은 위 왕부에 들어가 세자비가 될 거야. 어디서 그런 운이 생겼는지 모르겠어. 위 왕부에 기어오를 수 있다니.”

“위 왕부?”

대주씨가 눈살을 찌푸리고 잠깐 생각했다.

“만약 그년이 위 왕부에 시집가서 세자의 환심을 얻으면 나중에 너를 처리할 거야. 지금 그년이 아무것도 아닌데도 바로 너를 이 지경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데 만약 세자비가 되면 어찌하겠어?”

주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또 무슨 수가 있을 수 있겠어.”

“그 계집이 위 세자에게 시집가게 할 수 없으니 그럼 그전에 그년을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야 해.”

주씨의 눈이 밝아졌다.

“언니 말은…….”

대주씨는 우아하게 싱긋 웃었다.

“우리 위아가 지금 막 열다섯이지. 어쩌면 하나쯤 필요할지도 몰라. 소첩이.”

주씨는 상대방의 의도를 깨달았다. 일순간 유산한 고통도 잊어버리고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떻게 계획을 짜면 좋을까?”

대주씨는 자기 가슴 앞의 긴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동생과 어산이 고생 좀 해야겠어.”

저녁밥을 먹을 때가 되어서야 한안은 비로소 대주씨를 만났다.

장사양은 하인에게 분부하여 가장 좋은 차를 올려 미인을 대접했다. 식탁 위의 요리는 아름답고 진귀한 것이 가득했다. 한안은 슬쩍 곁눈질하여 장사양이 대주씨를 보는 눈빛이 불처럼 뜨겁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래서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 예를 올렸다.

“안아가 주 부인을 뵙습니다.”

대주씨는 한안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녀는 만두 모양 머리를 하고 복숭앗빛 붉은색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있었다. 대주씨는 그런 한안의 천진하고 귀여운 모습에 조금 의심이 들었다. 주씨의 입을 통해 들은 한안은 수완이 좋았고 위아는 장한안이 악랄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보기에는 그저 보통의 어린 여자아이였다. 그러니 오히려 눈앞의 어린 아가씨를 얕잡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한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안아지? 이렇게 예쁘고 생기 있으며 참한 것을 보니 대갓집 소저로서 손색이 없구나.”

한안은 웃으며 말이 없었다.

장사양은 하인에게 분부하여 요리를 나누어주게 했다. 모두가 밥을 먹기 시작했다.

장금과 만 이낭은 평소대로 참석하지 않았고 장한명은 선생님이 시킨 공부를 해야 해서 자기 방에 남아 있었다. 미 이낭은 부용원에서 마음을 안정시키고 태아를 기르는 데만 전념하고 있었다. 탁자에는 한안과 주씨, 대주씨 몇 사람뿐이었다.

대주씨가 웃으며 말했다.

“제부, 소첩이 부탁드릴 일이 하나 있어요.”

미인이 부탁할 게 있다니, 장사양은 서둘러 말했다.

“얼마든지 말해도 괜찮소.”

음식을 집던 한안의 손이 살짝 멈칫했지만 내색 없이 그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소첩이 장부에서 연회를 열고 싶습니다. 동생이 지금 막 유산을 했고 어산이 또 변고를 당했지요. 소첩이 생각하기를, 만약 연회를 열 수 있으면 액운도 씻어내고 동생의 병도 많이 좋아질 수 있을 거예요.”

장사양이 막 대답하려는데 한안이 말하는 것이 들렸다.

“주 부인이 이낭을 위해 이렇게까지 생각해주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그러나…….”

그녀는 걱정스레 입을 열었다.

“지금 부친께서 막 첩을 총애하고 처를 괄시했다는 명목으로 어사에게 탄핵을 당하셨습니다. 만약 또 이낭 때문에 연회를 개최했다가 사심 있는 이들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그녀는 웃었다.

“비록 우리는 부친께서 첩을 총애하여 처를 괄시하는 일을 하신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소문은 호랑이보다 사납습니다. 지금 연회를 연다면 부친께서는 아무래도 사람들의 비난의 표적이 되실 것입니다.”

그녀의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관직은 장사양의 급소였다. 대주씨의 부탁에 장사양은 즐거이 승낙하려 했다. 그러나 한안의 말을 들으니 관직이 또 위협당할 가능성이 있었다. 장사양의 온몸에 순식간에 식은땀이 흘렀다. 혀끝까지 나온 ‘좋다.’ 라는 말은 아무래도 할 수 없었다.

주씨는 장사양의 반응을 보고 속으로 비웃었다. 장어산은 한안을 분노하고 증오하며 벼르고 있었다. 매번 한안은 그녀와 맞섰다. 한안은 바로 주씨 모녀의 철천지원수였다.

대주씨는 의미심장하게 한안을 보며 말했다.

“안아는 어린 나이에도 조정의 일에 대해 대단히 잘 아는구나.”

한안은 고개를 수그렸다.

“일이 부친의 관직에 관한 것이니 당연히 아주 매우 조심해야지요.”

대주씨는 웃으며 장사양을 향했다.

“제부는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연회의 명분이 동생을 위한 것이 아니기만 하면 되니까요. 제부는 신년 명절을 구실로 해서 대인들을 연회에 참석하도록 초청하실 수 있지요. 성상께서는 신하들이 패거리 짓는 것을 싫어하시니 제부는 일부 관원과 부인들을 더 초청하세요. 다른 분들은 소첩이 감히 말씀드릴 수 없지만, 태사께서는 반드시 연회에 참석하실 거예요. 어쩌면 장 대인께서 관직이 강등되신 일이 앞으로의 전환점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그 말에 장사양은 즉각 흥분했다.

“만약 전환점이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 조금 있다가 내가 바로 사람을 시켜 초청장을 쓰도록 하겠소. 이틀 후가 좋겠소!”

대주씨는 살짝 웃었다.

“제부를 번거롭게 하여, 소첩이 실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이후 기회가 된다면, 반드시 태사 앞에서 제부에 대해 좋은 말 몇 마디를 올리도록 할게요.”

말을 마치고 또 입을 가리고 웃었다.

“모두 한 가족이니까요.”

장사양은 그녀를 단단히 응시했다.

“란……, 처형은 정말 장부의 구세주요!”

또 아첨과 아부가 난무했다. 한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대주씨가 무슨 음모를 꾸미든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대주씨의 말 속에 고의인 듯 아닌 듯 한 가지 정보가 드러났다.

‘대주씨는 장 태사 부중에서 지극히 지위가 높군. 심지어 관료계의 결정에 있어서 그를 좌지우지할 수 있을 정도로.’

만약 대주씨의 지위가 높다면 쓰러뜨리려는 데 말썽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대주씨가 쓰러지지 않는다면 주씨에게 유력한 조력자가 생기는 꼴이 되니 그때 가서 처리하려면 더욱 힘이 들게 된다.

어떻게 해야 대주씨가 장 태사의 마음속 자리를 약화시킬 수 있을까?

식탁 앞에서 한안은 줄곧 이 문제를 심사숙고했다.

식사를 마치고 약간의 말을 나눈 다음, 청추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안은 뜻밖에 장위와 마주쳤다.

지난번 한안이 장위를 한 대 친 후로, 장위는 그녀를 조금 두려워했다. 나중에 이 일을 대주씨에게 알리고 나서야 한안이 그저 그를 겁준 것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장위는 한안에 대해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감히 이렇게 그를 농락한 것은 한안이 처음이었다.

장위는 한안의 가는 길을 가로막았다.

“이제 보니 사촌누이였군.”

저녁식사 때 식탁에 장위는 없었다. 한안은 웃으며 말했다.

“사촌 오라버니.”

장위는 한안이 이전에 비해 키가 좀 크고 미모가 좀 피어난 것 같았다. 경국지색의 절색은 아니지만 수려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 밤 그녀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손을 휘두른 것을 떠올리자 정복욕이 끓어올라 손을 비비며 앞으로 다가갔다.

“사촌 누이는 갈수록 예뻐지네.”

한안은 몸을 옆으로 비켰고 급람이 그녀를 몸 뒤로 보호했다. 한안은 웃었다.

“사촌 오라버니도 갈수록 짓궂어지네요. 장부의 땅을 밟고 서서 아직도 자신을 태사부의 소소야로 여기다니 말이에요.”

그녀는 어여쁘게 웃었다.

“믿거나 말거나 지금 내가 당신을 한 대 때린다 해도 나는 여전히 당신이 말을 못 하게 만들 수 있어요.”

장위는 한안이 유창하고 민첩하게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있던 터라 뒤늦게 겁을 먹었다. 그는 한안의 꾀를 알 수 없어 감히 더 이상 다가가지 못했다.

한안은 소매 속에 매화자를 움켜쥐고 있었다. 요 며칠 동안 맹렬히 연습하여 조금 성과가 있었다. 장위 같은 이런 종이호랑이 따위는 여유만만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장위의 망설이는 얼굴을 보며 한안은 웃으며 말했다.

“주 이낭이 침상에서 휴식하고 있으니 사촌 오라버니는 가서 관심을 보여도 좋겠지요. 이낭은 항상 당신에 대해 언급하곤 했어요.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이낭이 한안과 충돌하자 이낭은 이런 변고를 당했죠. 어쩌면 한안은 부처께서 보우해 주시는지도 몰라요. 지금 한안이 만약 또 사촌 오라버니와 충돌하면…….”

한안은 고개를 젓고 매우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를 냈다.

“부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네요.”

장위는 빈둥대는 부잣집 망나니 자제로 배운 것도 없고 재주도 없으며 또 아무 능력도 없었다. 그런 그에게 한안의 말은 철저히 겁먹게 했다.

“오늘은 날이 늦었으니 나는 바로 가보겠다.”

한안은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날이 어두워서 미끄러우니 사촌 오라버니 조심해요. 넘어져요.”

깔깔거리며 몸 뒤에서 웃기 시작했다.

급람은 조금 화가 났다.

“저 사촌 소야는 호색한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한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본래 그랬어. 가자.”

장위는 공동원으로 돌아가 대주씨를 보자 이 일을 낱낱이 고했다. 대주씨는 말을 들은 후 잠깐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총명해. 하지만 너무 좀 안하무인이구나.”

“그러게 말이에요.”

장위가 분개했다.

“지난번에 나를 한 대 때린 거, 이 빚을 반드시 갚아줄 거예요. 총애도 받지 못하는 딸일 뿐인데 이모부도 그년을 위해 나서서 처리해줄 리 없어요.”

대주씨는 자기의 큰아들 이마에 손가락을 뻗어 찍으며 물었다.

“너는 그년을 어떻게 처벌하고 싶으냐?”

“그게…….”

장위는 조금 말문이 막혔다. 한안을 어떻게 처리해야 분이 풀릴지 알 수 없었다.

“장 4소저가 너의 시첩이 되게 하면 어떠냐?”

대주씨가 돌연 입을 열었다.

장위는 깜짝 놀랐다.

“그게 어떻게 가능해요? 그년은 장부의 적녀…….”

자기가 비록 총애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 서자였다. 그녀를 정처로 맞아들인다면 어쩌면 가능할지 모르지만 시첩으로 삼는다는 것은 분명 농담일 것이다.

대주씨의 웃음이 더욱 깊어졌다.

“넌 그저 말만 해 보아라. 원해, 아니면 원하지 않아?”

장위의 뇌리에 저도 모르게 한안의 그 수려한 작은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적지 않은 여자들을 가지고 놀았다. 그러나 한안처럼 대담하고 독특한 여인은 한 명도 없었다. 비록 용모는 최고가 아니지만, 시첩을 삼으면 나중에 자기가 마음대로 괴롭힐 수 있었다. 그년을 때리고 욕해도 된다고 생각하다 보니 참지 못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 두 눈이 빛을 발하며 말했다.

“어머니, 방법이 있어요?”

대주씨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에게 순결을 잃기만 하면 바로 공주라도 첩이 되어야 한단다.”

*

장부는 연회를 준비하면서 시끌벅적했다.

급람이 한안의 곁으로 다가와 조잘조잘 끊임없이 말했다.

“오는 사람은 혁련가, 등 상서 집안, 장 태사, 7황자, 우상…….”

한안은 웃었다.

“모두 거물들이네.”

장사양은 진짜 과감했다. 그러나 7황자는……. 한안은 조금 불안했다.

주홍이 옆에서 말했다.

“등 아가씨가 곧 도착하실 겁니다. 소저 옷을 갈아입으실까요?”

한안은 그러고 싶지 않았으나 생각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슴가죽으로 안을 댄 비취색 겹옷을 꺼내줘.”

급람은 한안을 위해 만두 모양 머리를 빗겨주면서 울적하게 말했다.

“하루 종일 만두 모양, 소저는 정말로 만두 모양을 좋아하시네요. 하지만 소인은 이제 다른 만두 모양을 궁리해낼 수가 없다고요.”

한안은 우스워하며 말했다.

“누가 너더러 그런 거 궁리하라고 했어?”

급람은 승복하지 않았다.

“소저께서 아름답게 단장하셔야 소저를 아껴주시는 서방님께 시집가셔서 좋은 날들을 보내시죠.”

한안은 웃었지만 속으로는 조금은 실의에 빠졌다. 금생에 그녀가 또 남자를 믿고 사랑할 수 있을까? 살아남는 것만도 이처럼 어려운데, 있을지도 모를 사랑 같은 건 생각하지 말아야 했다.

급람이 한안을 위해 단장을 끝냈을 때, 멀리서 등선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안!”

등선이 신바람 나서 달려와 한안에게 물었다.

“마침내 널 만났네. 지난번 궁중 연회 후 너와 얘기할 기회가 없었어. 듣자 하니 며칠 전 섣달그믐에 망강루에서 네가 부중 첩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던데……. 화나 죽겠어. 근데 그 첩실이 유산을 할 줄은 생각도 못 했어. 아마 하늘에서 그녀를 벌하신 거야! 그런데 그거 진짜야? 넌 괜찮지?”

한안은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마음이 따뜻해져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난 괜찮아.”

“괜찮다니 마음 놓인다. 그래도 넌 괴롭힘을 너무 잘 당해.”

등선은 가슴을 쓸어내렸다가 좌우를 둘러보고는 말을 이었다.

“오늘 너의 부친이 부중에서 연회에 여러 조정 관리를 초청했어. 내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7황자전하도 오신대. 헛소문이지?”

한안은 유감스레 고개를 저었다.

“나도 자세히 몰라. 가면서 얘기하자.”

화원에 도착하자 여자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몇몇 부인들은 한안이 아는 사람들이었고 몇은 낯선 사람들이었다. 장사양이 이번에 초청한 조정 관리는 품계가 다양했다. 한안의 얼굴빛이 차가워졌다. 만약 장사양의 뜻이 아니라면 바로 대주씨와 주씨의 부추김일 텐데 무엇을 증명하고 싶은 것 일까?

한안은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저것 자체가 바로 증명인 것이지.

대주씨는 그녀가 온 것을 보고 서둘러 한안을 불렀다.

“안아가 왔구나.”

표정이 엄숙한 것이 대주씨야말로 장부의 여주인인 것 같았다. 한안의 예상 밖으로 이가기도 있었다. 장어산의 옆에 앉아 한안이 오는 것을 보고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주씨는 대주씨의 옆에 앉아 있었다. 대주씨 덕분에 부인들 몇은 열정적으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주씨가 자기를 얼마나 포장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부인들이 자신을 보는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주씨도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4소저께서 이렇게 늦게 오시다니요. 때맞추어 말을 전했어야 하는데 어떤 여종이 게으름을 피우고 시간을 지체한 건가요?”

한안은 웃는 듯 마는 듯 그녀를 보고 말했다.

“이낭이 오해한 거예요. 공연히 여종을 나무라지 마세요. 부친 명령으로 주방에 가서 미 이낭에게 보양 음식을 만들어 주었어요. 미 이낭은 장부의 후손을 회임하고 있으니 음식을 주의해야 하거든요.”

아니나 다를까 한안의 말이 끝나자 주씨의 얼굴이 하얘졌다. 대주씨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확실히 잘 보양해야죠. 회임한 여인의 몸은 특별히 귀중하죠.”

“귀중한 것은 몸이 아니라 복중의 아이죠.”

의기양양한 목소리가 몸 뒤에서 들려 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금사 비단 피풍의를 걸친 미 이낭이 여종의 부축을 받아 느긋하게 오고 있었다.

한안은 마음속으로 웃었다. 미 이낭이 잘 맞춰 나왔구나. 적어도 주씨가 짜증이 나도록 할 수 있을 테니까.

말할 것도 없이 주씨는 미 이낭의 불룩 나온 큰 배를 보고 분노에 휩싸였다. 미 이낭은 대주씨를 꼼꼼히 관찰했다. 최근 부중에 도는 말이 장 태사의 애첩과 장사양의 관계가 미묘하다 했다. 그녀는 장사양을 여러 해 따랐는데 최근 장사양이 자신에 대해 확실히 냉담하다 느꼈다. 그러던 중 자기의 눈으로 대주씨를 보고 나니 그 소문이 근거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여인이 가장 여인을 잘 아는 법 아닌가. 대주씨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자연스러운 유혹과 꼬드김이 있었다. 그런 알랑거림이야말로 미 이낭이 더할 나위 없이 잘 아는 것이었다. 대단한 주씨로고. 자기 아들을 잃더니 자기 언니더러 장사양을 유혹하게 해? 정말 일가족이 다 천한 년들이다!

대주씨는 미 이낭 눈 속의 경고를 보고 웃었다.

“복중의 아이는 확실히 귀중하죠. 우리 안아를 보니 바로 알겠어요.”

이 말은 그녀가 회임한 아이가 딸이라는 말인가? 미 이낭은 차갑게 웃었다.

“그래요. 애석하게도 주 이낭 복중의 소소야는…….”

매우 안타까워하는 말투였다. 그러나 주씨는 아프고 고통스러워 거의 일어날 뻔했다.

대주씨는 슬퍼하는 빛을 띄웠다.

“하늘이 불쌍히 여기실 거예요. 이런 언짢은 이야기는 그만하죠. 오늘은 장부의 연회이니 다른 이야기나 마음껏 나누도록 해요.”

한안도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안아는 등선과 좀 조용히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인들께서 이야기를 나누시는데 폐를 끼치지 않도록 물러나겠습니다.”

대주씨가 온유하게 말했다.

“가보렴. 어린 아가씨는 좀 활발해야 귀엽지.”

자신이 남으면 저들의 혐오만 일으킬 것이다. 일찍 떠나는 편이 나았다. 주씨에 관해서는 미 이낭이 있으니 꽤 마음이 놓였다.

적의 적은 바로 친구다. 지금 미 이낭과 그녀는 통합 전선을 구축했다. 일단 미 이낭 복중 ‘아이’가 장부에서의 지위와 관계가 있으니 미 이낭은 반드시 있는 힘을 다해 주씨 두 자매를 공격할 것이다.

등선은 신이 나서 한안과 청추원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식사시간이 되어서야 연회 장소로 나왔다.

여자 부인과 소저들이 한 곳에 모여 있어서 한안은 남자 쪽 상황은 알지 못했다. 소저들은 모두 장어산과 이야기를 하면서 산적과 맞닥뜨린 일을 동정해 마지않았다. 주씨 모녀에게서 무슨 말을 들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안을 보는 표정이 좀 이상했다. 더구나 이가기는 한안을 그야말로 잡아먹을 듯했다. 어째서인지 모르겠다. 이가기는 매번 그녀를 보며 이를 부득부득 갈 정도니 말이다.

그러나 한안은 전부 마음에 두지 않았다. 설령 장어산이 더러운 물을 그녀의 몸에 뿌리려 해도 증거를 내놓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가 흠뻑 젖을 뿐일 것이다. 전생에 그녀가 산적 일을 당한 후, 그녀를 동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안은 참을 수 없어 웃고 싶어졌다. 소저들과 부인들은 정말로 장어산에게 관심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장 태사의 애첩 대주씨를 두려워하는 것일까.

대주씨는 한안을 위해 정성스럽게 음식을 집어주었다. 한안은 사람들 앞에서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매화로 빚은 술을 몇 모금 마시자 머리가 어지러웠다.

처음에는 눈치 챈 사람이 없었지만 나중에 결국 한안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름답고 연약하지만 무력한 모습에 얼굴빛 또한 그다지 좋지 않아 보였다. 대주씨가 친절하게 물었다.

“안아 왜 그러니? 몸이 불편하니?”

한안은 고개를 저었고 가까스로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곧바로 한안의 손이 미끄러지며 들고 있던 술잔이 퍽 하고 땅에 떨어져 깨졌다.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한안이 난처해하며 말했다.

“저, 머리가 조금 어지러워요.”

그녀의 몸이 살짝 기울어지자 주홍이 서둘러 앞으로 나와 그녀를 부축했다. 술을 많이 마셔서 취기가 오른 듯했다. 대주씨는 멍해졌다가 웃으며 말했다.

“얘도 참, 매화주는 사람을 취하게 하지 않는데 주량이 적구나. 한 잔에 바로 취했어.”

그러더니 여종에게 분부했다.

“소저를 부축해서 방으로 돌아가 쉬시게 해라.”

한안은 고개를 저었다.

“주홍이 부축해서 가면 돼요.”

대주씨가 웃으며 말했다.

“너의 여종은 손발이 둔해 보이는걸. 아마도 사람을 돌볼 줄 모를 거야. 동령이 너를 데리고 가게 하는 게 좋아.”

한안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익숙하지 않은…….”

“제가 넷째 동생을 데리고 가면 어떨까요?”

장어산이 친절하고 자상한 얼굴을 하고 나섰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거절하기란 힘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고의로 서출 언니를 모욕하는 게 된다. 한안은 얼굴에 달갑지 않은 기색을 띠고 고개를 끄덕였다.

장어산은 한안의 팔을 부축하고 대청을 걸어나갔다. 주홍이 막 따라나오려 하는데, 대주씨가 명령했다.

“너는 주방에 가서 달콤한 간식을 들고 오너라.”

주홍은 어쩔 수 없이 명을 받고 주방으로 갔다.

한안은 장어산에게 부축을 받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부축이라기보다 장어산이 그녀의 몸 전체를 끌고 간다고 해야 할까. 한안은 나른하게 장어산의 몸 위에 기대어 그녀가 자신을 끌고 가게 내버려두면서 투덜거렸다.

“여기는…… 청추원 가는 길이 아닌데…….”

장어산이 차갑게 말했다.

“넷째 동생 취했네. 여기 청추원 가는 길이야.”

그녀의 말투는 말할 수 없이 음침했다.

한안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장어산에게 얼마나 이끌려갔는지 모르겠다. 잡초가 무성한 후원을 돌아서 화원을 관통하여 한안은 한 방으로 끌려갔다.

그 방 중앙에 커다란 침상 하나가 놓여 있었다. 장어산은 한안을 끌고 가 침상 위에 던졌다. 침상 위에 던져진 한안은 분명치 않게 한 마디 중얼거렸지만, 눈은 뜨지 않았다.

두꺼운 휘장을 치자 대낮인데도 마치 밤처럼 어두웠다. 장어산은 불을 켜지 않았다. 즉시 떠나지도 않았다. 그리고 깊이 잠든 한안의 곁에 가 서서 가볍게 몇 마디 불렀다.

“넷째 동생?”

한안은 그러나 의식이 전혀 없었다.

장어산은 가볍게 웃고 아예 한안의 옆에 앉아 느릿느릿 입을 열어 말했다.

“넷째 동생, 오늘 내가 너에게 큰 선물 하나를 줄 거야. 네게 좋은 혼처 하나를 주는 거지. 오늘이 지나면 너는 나의 사촌 새언니가 되는 거야.”

그녀는 후 하고 입을 가리고 괴로운 척 말했다.

“나 좀 봐, 허튼소리를 했네. 깜빡 잊고 있었지 뭐야. 넷째 동생은 첩이 되는 거니까 사촌 새언니라고 부를 수는 없겠네. 하지만 어쨌든 친밀한 관계가 더 친밀해지는 셈이지, 맞지?”

그녀의 목소리는 가볍고 부드러웠다. 한 손을 한안의 얼굴 위에 두고 뾰족한 손톱이 한안의 얼굴 위에서 왔다 갔다 했다.

“사실 넷째 동생의 자색으로 사촌 오라버니에게 시집가 첩이 되는 것은 아주 성공한 거지. 사촌 오라버니는 태사부에서 총애를 받고 있으니 만약 넷째 동생이 시집가서 총애를 얻으면 먹고 입는 게 부족하지는 않겠지. 다만.”

그녀는 하하 웃었다.

“이모는 널 안 좋아해. 사촌 오라버니도 널 안 좋아하고. 네가 만약 총애를 얻고 싶다 해도 어려울 거야. 하지만 얌전히 시집가는 수밖에 없지. 안 그래?”

장어산은 화제를 바꾸었다.

“설마, 너 아직도 세자 전하를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장어산의 말투가 음침하게 가라앉았다.

“정신 나간 망상 하지 마. 너는 곧 패류잔화가 될 텐데 너를 한 번이라도 더 쳐다보시겠어? 너 같은 년이 그분께 어울릴 수 있겠어?”

그녀는 손을 거두고 웃으며 말했다.

“세자 전하께서 넷째 동생이 다른 사람과 침상에서 간통하는 정경을 보시고도 너를 세자비로 맞이하겠다고 고집하실지 모르겠네?”

그녀는 몸을 일으켜 한안의 얼굴을 토닥이며 말했다.

“넷째 동생 여기에서 사촌 오라버니 잘 모셔.”

장어산이 말을 마치고 막 몸을 돌리는데 등에 날카롭고 차디찬 물건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익숙한 목소리가 웃음기를 띠고 들려왔다. 지옥에서 목숨을 빼앗으려 드는 악귀 같아서 맑고 투명한 목소리는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어머? 어떻게 모셔야 잘 모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장어산은 귀신을 보는 것 같았다. 한안이 아직도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크게 소리를 지르려 하는데 등 뒤의 차디차고 날카로운 물건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한안은 그녀의 귀에 가까이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어산 언니의 선물은 너무 큰걸요.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어야겠어요.”

한안은 말을 마치고 소매를 휘둘렀다. 장어산은 기이한 향이 덮쳐오는 것을 느끼고는 눈앞이 캄캄해지며 순간 의식을 잃었다.

한안은 장어산을 침상 위로 끌고 가 잘 놓았다. 신과 버선, 겉옷을 벗기고 다시 본래대로 두꺼운 휘장을 빈틈없이 쳤다. 이 모든 것을 마치고서야 천천히 방을 걸어 나왔다.

여기는 화원 중심에 세워진 건물로 평소에 부중의 누군가 꽃을 감상하다 찻물 같은 것을 엎지르면 이 작은 방에서 옷을 갈아입을 수 있었다. 한안은 자기의 추측이 사실로 증명되자 오히려 홀가분했다.

대주씨의 계략은 한안이 장위와 한 방에 같이 있게 두고 연회 후 각 부인들이 뜰에 와 꽃을 감상할 때 이유를 붙여 이 방에 들어가게 해서는 간통 현장을 잡도록 설계한 것이었다. 장한안의 명성은 망가지고 음탕하다는 오명만이 남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고 나면 장위가 그녀를 맞아들이는 것 외에 한안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전생의 한안은 대주씨를 무서워했다. 그녀는 언제나 얼굴 가득 웃는 표정이었고 사람을 대할 때 부드럽고 온화했다. 매번 장한명과 장위의 다툼이 일어났을 때도 대주씨는 먼저 장위를 탓하며 나무랐지만 결국 벌을 받는 것은 언제나 장한명이었다. 그녀가 늘 가볍게 설렁설렁 말하고 지나가는 듯 했지만 결국엔 타인에게 책임을 떠밀었다. 장 태사는 미녀들을 무수히 보았으니 대주씨가 오늘날 이 지위를 얻어내는 데 있어서 의지했던 것은 어쩌면 미색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와 대주씨의 전쟁이 그 서막을 열었다.

장어산은 자신이 원했던 결과를 스스로 겪게 될 것이다. 깨끗한 명성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니, 주씨가 알면 무슨 반응을 보일지 모르겠다.

한안은 발을 들어 청추원으로 걸어갔다. 바로 그때 등 뒤에서 차가운 바람이 전해져 왔다. 시정 사부를 따르면서 감각이 많이 민감해진 한안은 민첩하게 피하고 그 사람과 얼굴을 마주했다.

한 명의 흑의인.

흑의인은 얼굴을 가리고 있어 두 눈만 노출되어 있었다. 한안은 머리가 차가워졌다. 큰 소리로 자객이 있다고 도움을 구하려 하였으나 술에 취했어야 할 그녀가 이곳에 있는 것을 어찌 해명해야 할까 싶었다. 아울러 장어산이 무슨 까닭으로 화원의 방 안 큰 침상 위에 누워 있는지도 말이다. 만일 대주씨가 뒤집어씌우기라도 한다면……. 생각을 굴리고 있는데 흑의인이 곧장 한안을 덮쳐왔다.

보통의 자객이라면, 부중에서 사람에게 발견되었을 때 온갖 방법을 짜내어 피나거나 떠나지, 그녀 같은 어린 아이에게 달라붙진 않을 것이다. 자객이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빈손인 걸 보니 살인하려는 것 같지는 않고 그저 제압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대주씨의 사람인가?

그러나 상황은 그녀가 많은 생각을 하도록 두지 않았다. 한안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다. 장어산을 처리하려고 소매 속에 감추어둔 미약은 이미 전부 써버렸고 매화자 한 자루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흑의인의 무공이 자기와 같은 수준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설령 그녀가 매화자를 꺼낸다 해도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무모한 짓이었다.

흑의인은 한안이 두 번이나 피하는 것을 보고 의아해하면서 더욱 사정을 봐주지 않고 공격해 왔다. 한안은 어쩔 수 없이 매화자를 꺼냈다. 그러나 매화자는 흑의인의 옷자락에도 닿지 못했다. 사마귀가 매미를 잡았으나 참새가 뒤에서 노리고 있더라 하더니, 그녀가 그 사마귀가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앞서 따져보고 만 번 계산해 보았어도, 이렇게 도중에 흑의인이 튀어나올 것까지는 내다볼 수는 없었다.

전광석화처럼 흑의인이 한안을 향해 다가왔다. 한안은 피할 방도가 없는 것을 보고 주먹을 움켜쥐고 구조 요청을 하려고 했다.

일촉즉발의 순간, 한안의 몸 뒤에서 가벼운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푸른 나뭇잎 두 장이었다. 나뭇잎은 곧장 흑의인의 양 무릎에 꽂혔고 흑의인은 두 다리에 힘이 풀렸다. 가볍디가벼운 나뭇잎이 무한한 힘을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섬뜩해졌다. 1초 뒤, 누군가가 차가운 두 손가락으로 흑의인의 경동맥을 찾아 힘주어 누르자 삽시간에 흑의인이 의식을 잃었다.

한안은 그 자리에 멍하니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푸른 옷의 남자가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보고,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어떻게 된 일이냐?”

뜻밖에도 부운석이었다.

한안은 고개를 저어 자신도 잘 모른다는 표시를 했다. 부운석이 흑의인의 몸을 더듬었다. 마치 무언가를 발견한 듯 고개를 숙이고 잠깐 깊이 생각하더니 그녀 쪽으로 걸어왔다.

“저 사람…….”

한안은 흑의인이 쓰러진 곳을 보았다. 저런 사람이 부중에 남아 있는 것은 부적절했다. 부운석이 손짓을 하니 시위 하나가 나타나 흑의인을 들고 사라졌다. 한안은 놀라고 의아했으나 부운석의 침착한 모습을 보고서, 이 일은 그가 잘 처리하리라 믿기로 했다.

한안은 이곳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생각하고 청추원으로 통하는 작은 길로 걸어갔다. 이 길은 평소 거의 오는 사람이 없어, 버려진 장소나 마찬가지였다. 한안은 부운석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이렇게 걷다 보니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자기가 부운석과 밀회를 나누는 것 같았다. 허튼 생각을 하다 보니 길을 살피지 않아 앞장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부운석의 가슴에 머리를 부딪쳤다.

“아야, 당신 뭐 하는…….”

한안은 머리를 문지르며 원망스레 부운석을 보았다. 그가 왜 갑자기 멈췄는지 알 수 없었다. 고개를 드니 부운석이 자신을 단단히 응시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한안은 영문을 알 수 없이 위축되는 바람에 뒷말을 바로 목구멍으로 삼켰다.

부운석을 마주할 때면 언제나 조금 겁이 났다. 한 번 죽고 과거로 돌아온 후, 한안의 담력은 많이 커져 태후를 만났을 때나 혹은 다른 사람에 의해 곤경에 처했을 때도, 부운석 앞에 있을 때처럼 마음이 무거워진 적은 없었다. 이 사람의 앞에서 자신은 그저 열세 살 어린 아가씨일 뿐이고, 무슨 복수 같은 것은 입에 올리지도 말아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또한 손윗사람이 사리 분별 못 하는 어린아이를 바라보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잠깐 침묵한 뒤, 한안은 이 거북한 상황에서 벗어나기로 마음먹었다. 할 말은 없었지만 말할 거리를 찾아 입을 열었다.

“왕야께서는 어찌 여기에 계시는 건가요?”

부운석이 말했다.

“장부의 초청장, 나도 받았다.”

장사양이 부운석에게도 초청장을 보냈다니. 장부는 7왕자와 한패였고 태자당 쪽을 눈에 거슬려 했다. 게다가 부운석은 태자당의 핵심이니 그들의 눈엣가시였다. 한안은 웃음이 나왔다. 장사양은 어쩌면 정말로 황상이 의심할까 두려워한 건지도 모른다. 바람과 파도가 가장 거센 곳에 있으니 자연히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피하려는 것이었다. 만약 부운석을 이곳으로 오게 한다면, 황상을 안심시킬 수 있을 테니까.

“매번 운수 사나운 일을 당할 때마다, 왕야를 마주치게 되는 것 같네요.”

현청왕이 역신의 환생인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매번 그녀가 모진 고난에 빠져 있을 때만 만났다.

부운석은 그녀의 말 속 숨은 뜻을 알아들었다.

“본왕이 너를 늘 구했지.”

한안은 얼굴이 빨개져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중얼거렸다.

“도대체 누가 저를 몰래 해하려 한 것인지 모르겠어요.”

“7황자의 사람이다.”

한안은 놀라 눈을 들어 부운석을 보았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담담히 말했다.

“7황자 파의 사람이 너를 감시하고 있었다.”

“저와 그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데요.”

한안은 망설이다 말했다. 그녀는 7황자를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자신이 빈틈을 보이거나 정면 충돌을 일으킨 적은 없었다.

“너는 장부의 사람이지.”

부운석이 말했다.

“게다가 위친왕부의 세자비가 될 것이고. 그와 관계가 얕은 것은 아니지.”

목소리가 잠시 멈추었다가 이어졌다.

“그런데 너로 인해 장사양의 관직이 강등되었어. 너는 이미 7황자를 격분하게 했다.”

이 부분을 잊고 있었다. 부운석이 말하는 것을 들으니 7황자는 일찍부터 그녀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녀는 위왕부와 장부의 혼인 동맹을 위한 도구였다. 얌전하게 말을 들어야 할 도구가 가만히 있지 않고, 훼방까지 놓았으니……. 7황자는 한안을 징벌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한안은 조금 두려웠다. 7황자는 배후에 황실의 힘을 둔 조정의 쟁투와 관련이 있는 귀한 사람이었고, 그녀는 총애받지 못하는 적녀 신분일 뿐이었다. 확실히 남에게 약점 잡히기 아주 쉬웠다. 자신은 괜찮지만 장한명이 위험했다. 만약 7황자가 장한명과 싸우려 한다면…….

미간에 저도 모르게 우려의 빛이 늘었다. 부운석은 그녀가 어린 나이에 눈썹이 찌푸려지는 것이 애늙은이 같아 보여 우스웠다.

“어째서 장사양의 관직을 강등되게 했느냐?”

한안은 당황했다.

“만약 너를 홀대하는 것에 대해 보복하기 위함이었다면, 이런 방법을 쓸 필요까지는 없었다. 너와 장부는 영화도 손실도 함께 누리게 되니 엎어진 둥지 밑에 어찌 성한 알이 있을 수 있을까. 장사양의 관직이 강등된다면 너의 지위에도 좋은 점이 전혀 없을 것이다.”

한안은 그가 매우 총명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일도 숨길 수 없으니 아예 시원스레 인정했다.

“저는 성이 ‘장’인 것 외에, 장부와 한 점 관계도 없습니다.”

부운석의 눈에 뜻밖이라는 빛이 스치는 것을 보고 계속해서 말했다.

“세자비가 된다는 것은 더욱 터무니없는 일이지요.”

부운석은 높은 곳에서 굽어보는 시선으로 눈앞의 어린 아가씨를 보았다. 그녀의 맑은 눈, 영롱하고 사랑스러운 모습, 장부와 위여풍에 대해 말할 때 무의식중에 드러나는 혐오와 원한이 보였다. 물론 그 속내를 잘 덮어 숨기고 있었지만.

“너는 위여풍에게 시집가길 원치 않느냐? 어째서?”

한안이 반문했다.

“왜 그에게 시집가고 싶어 해야 하죠?”

“그는 겸손한 군자이고 재능이 넘쳐나는 준걸이다.”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부운석은 살짝 얼굴을 돌렸다.

“게다가 장래에 친왕의 지위를 계승하게 되지. 네가 세자비가 되면 자연히 앞길이 한없이 밝을 것이다.”

출가 안 한 아가씨와 성년 남자가 은밀하게 숨겨진 곳에서 혼인에 대해 토론한 것이 밖으로 알려진다면 아마도 풍속을 문란케 했다는 명성을 듣게 될 것이다. 만약 전생이었다면 한안은 눈앞의 사람을 호색한이라고 욕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마음이 편하고 고요했다. 비록 부운석이 거북한 질문을 한 것에 화가 나기는 했지만 정말로 분노한 것은 아니었다. 슬그머니 부운석을 보니 진지한 얼굴로 자신의 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한안은 웃으며 말했다.

“당신 말대로라면 좋은 남자가 혼담을 꺼내기만 하면 저는 그에게 바로 시집가야겠군요. 만약 그가 보기 드문 좋은 남자라면 말이죠.”

한안은 생글거리고 웃으며 부운석의 주위를 한 바퀴 돌면서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저런, 왕야께서도 몸매가 늘씬하시고 용모가 수려하시네요. 무공이 당대에 으뜸이시고 또, 우아하고 정취도 있으시지요. 문무에 모두 뛰어나시니 군계일학이라 할 만합니다. 더구나 많지 않은 연치에 왕야의 지위까지 얻으셨지요.”

부운석의 얼굴 위에 드물게 멍한 빛이 드러나는 것을 보니 더욱 즐거웠다.

“제가 보기에 왕야야말로 바로 좋은 남자라 할 것입니다. 위여풍과 혼인하느니, 차라리 왕야께 시집가는 게 낫겠습니다!”

부운석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어린아이가 간이 더 커졌구나. 감히 나를 희롱해? 부운석은 입가를 끌어올려 웃으며 나른한 자태로 말했다.

“네가 기왕 시집오고 싶다고 하니, 내일 본왕이 바로 사람을 청하여 궁합을 맞추어 보겠다.”

그는 농담하는 것 같지 않은 모습으로 도리어 웃는 듯 마는 듯 몸을 숙여 한안을 보았다. 살을 엘 듯 차갑고 맑은 향기가 한안의 코끝을 맴돌았다. 그의 향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고혹적이고 풍치 있으며 멋스러웠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심장이 뜻밖에 한 박자를 놓쳤다. 한안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저는 농담한 거예요…….”

부운석은 그녀가 작은 사슴처럼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을 보고 장난치려던 마음을 거두어들이고서 말했다.

“여자의 혼사는 자고로 부모의 명과 중매인의 말로 결정된다. 너는 어째서 거절하는 것이냐?”

한안은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저는 시집 안 가요…….”

부운석은 생각에 잠긴 듯 그녀를 보았다.

“만약 정말 시집가고 싶지 않다면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한안은 그의 말이 거짓말일 거라 의심하지 않았다.

“무슨 방법 있어요?”

부운석이 느릿느릿 입꼬리를 치켜 올리며 두 마디 말을 내뱉었다.

“내게 부탁해라.”

한안은 자신을 놀린다 생각해 맥이 쭉 빠져 답했다.

“왕야, 살펴 가십시오. 더 나가지 않겠습니다. 소녀는 술에 취해 돌아가서 쉬어야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부운석도 가로막지 않고 그저 그녀가 청추원 방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뒷모습은 당당하고 품위가 있었다. 그는 그녀를 지그시 보며 미소지었다가 눈 깜짝할 새에 몸을 날려 자리를 떠났다. 더 이상 사람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

장부의 연회석은 여전히 몹시 시끌벅적했다.

점심 식사를 한 후, 여자들은 이야기가 한창이었고 남자들은 주흥이 한창 무르익었다. 그때 누군가 장부의 화원을 둘러보자고 제의했다.

장부의 정원 숲은 매우 훌륭했다. 경성의 대범하고 장중한 경치와는 달리 작게 흐르는 물과 정자를 중심으로 한 조촐한 담장이 있어 마치 강남에 물 많은 고장을 그대로 가져온 듯한 느낌이라 경성에서도 명승지라 불릴 만했다.

아마 그 자리에 있는 누구도 알지 못했겠지만, 이 정원 숲을 설계한 주인은 바로 장부의 요절한 안주인이었다.

대주씨는 주씨의 곁에서 걸어가며 때때로 그녀와 무언가 말을 했다. 재치 있게 웃는 아름다운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과 눈을 즐겁게 만들어 풍경보다 더 아름답다고 느끼게 했다.

미 이낭은 불룩한 배를 내밀고 가장 뒤에서 걸었다. 그녀는 복중 아이에 대해 극도로 조심하는 모습이었다.

여자들은 화원 깊은 곳까지 갔다. 이곳의 매화는 무성하게 피어 있었다. 궁중과 비교할 수는 없으나 엇갈린 배열이 제법 정취 있는 나무숲과 잘 어울려 그림 같은 아름다움을 자랑했다. 여종들은 새로 끓인 군산은침을 받쳐 올렸고, 부인들과 소저들은 자유롭게 화원 가운데의 돌의자에서 휴식했다.

한 귀부인이 대주씨의 오른쪽에 앉았고 대주씨는 그녀와 이야기하면서 차를 마셨다. 바로 그때, 대주씨의 손이 떨리더니 찻잔이 불안하게 기울어지며 찻물이 귀부인의 전신에 뿌려졌다.

“어머나, 모두 제가 덤벙댄 탓입니다.”

대주씨가 만면에 미안한 기색을 담뿍 담고 일어섰다.

“데이지는 않으셨나요? 무얼 멍하니 있는 게야? 어서 빨리 화상약을 가져오지 못할까?”

그 부인은 찻물이 전혀 뜨겁지 않았기에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대주씨는 고개를 저었다.

“어찌 괜찮겠어요? 아름다운 치마가 이렇게 젖어서 더러워진걸요.”

대주씨의 얼굴에 난감함이 가득했다.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네요.”

주씨가 입을 열었다.

“언니, 부인께서 불쾌히 여기지 않으신다면 바로 소첩의 옷을 가져다가 드리도록 하죠. 때마침 공교롭게도 어제 여의루의 재봉사가 부중에 와서 소첩에게 옷 두 벌을 지어주었답니다. 부인의 키가 소첩과 같고 살결이 희고 깨끗하시니 그 옷을 입으시면 아름다우실 거예요.”

“그럴 것 없어요…….”

그 부인은 회피하고 싶었으나 이미 대주씨가 손을 끌어당겼다.

“그렇게 하면 좋겠네요. 만약 부인께서 동의하지 않으신다면 저는 정말이지 부끄러워 어찌하면 좋을지 모를 거예요.”

대주씨는 말을 마치고 주씨를 보았다.

“동생, 여기 옷을 갈아입으러 갈 만한 곳 있니?”

주씨가 웃으며 말했다.

“있어요, 있어. 바로 몇 걸음 앞에 있어요. 정자가 있는 곳인데, 정자 옆에 작은 집이 한 채 있어요. 평소에 꽃을 구경하다가 피곤하면 잠시 쉬는 곳이죠. 다른 부인, 소저들께서도 흥미가 있으시면, 몇 걸음 앞으로 가보셔도 됩니다. 그 정자는 정교하고 사랑스럽답니다. 마침 또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긴 회랑도 있어요. 올라가 앉아서 못 안의 잉어를 보는 것도 좋지요.”

자리에 있는 부인과 소저들은 새로운 것을 좋아했다. 좌석이 있는 긴 회랑을 가진 정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신기해 마지않으며, 연달아 풍광을 감상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주씨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부인, 소저들께서는 바로 소첩을 따라 함께 가시지요.”

가장 뒤에서 걷고 있던 미 이낭은 그들의 행동에 의심이 들었다. 주씨는 유산을 한 후로부터 줄곧 분수를 잘 지키며 공동원 안에 숨어 몸을 보양해 왔다. 그런데 대주씨가 온 후로 각 방면을 챙기니,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을 데리고 평소에 잘 가지 않는 작은 집에 가는 것은 더더욱 기이했다. 미 이낭은 이상한 마음에 교몽에게 속삭였다.

“주씨가 오늘 뜻밖에도 이상하구나. 무슨 꿍꿍이 수작인지 모르겠다.”

교몽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이낭께서는 염려하실 필요 없습니다. 지금 이낭은 회임한 몸이시니 그녀도 함부로 이낭을 건드릴 수는 없을 겁니다. 오늘 설령 무슨 수작을 부리든 간에 이낭께서는 구경만 하시면 됩니다.”

미 이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이 일리 있다.”

한편 주씨가 사람들을 이끌고 몇 걸음 안 가, 한 갈래 꽃길을 돌자 눈앞에 아담하고 정교한 흑백 정자가 나타났다. 귀퉁이가 치켜 올라간 비첨(飛檐: 지붕 네 귀퉁이의 높이 들린 처마)은 확실히 고풍스러웠다. 정자는 긴 회랑과 연결되어 있었고 정자 우측에는 작은 집이 있었다. 밖에서 보기에는 다른 점이 없었다. 다만 창문에 휘장이 내려져 있어 안의 상황을 분명하게 볼 수 없었을 뿐이다. 주씨는 사람들의 얼굴에 찬탄과 호감의 뜻이 드러난 것을 보고 옷을 갈아입을 부인을 데리고 작은 집으로 걸어갔다. 고개를 돌려 사람들에게 말했다.

“부인 소저들께서는 먼저 자유롭게 구경하고 계세요. 저는 부인을 모시고 작은 집 안에서 옷을 가져올 여종을 기다릴게요. 그때 가서…….”

주씨는 말을 마치지 못하고 발걸음을 멈추더니 얼굴빛이 이상하게 변했다.

부인들은 그녀의 얼굴빛이 변한 것을 보고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녀 손에 끌려간 부인 또한 당혹스러워하며 얼굴빛이 붉어졌다가 하얘지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할수록 호기심이 일어나는 법이다. 사람들이 조용해지자,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작은 집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자세히 들으니 그 소리가 남자의 나지막이 헐떡이는 숨소리와 여자의 신음소리가 뒤섞여 나는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너무나도 열정적으로 뒤엉켜서 듣는 사람의 얼굴이 빨개지고 귀가 붉어졌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다. 누가 이렇게 몰염치한 걸까? 백주대낮에 이처럼 몰염치한 짓을 저지르다니. 부인들의 얼굴 위에 경멸의 빛이 나타났다. 동시에 안에 도대체 누가 있는지 호기심이 일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하고 있을 때, 멀리서 장사양이 남자 손님들을 데리고 걸어오고 있었다. 장사양은 여자들이 모두 침묵한 채 작은 집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놀라 물었다.

“무슨 일이 있느냐?”

주씨는 난처해하며 대답했다.

“노야…… 당신께서 직접 들어보시지요.”

장사양은 집 가까이로 다가간 순간, 집에서 흘러나오는 음탕한 소리를 알아듣고는 노여움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안에 있는 게 누구냐? 이렇게 몰염치하다니. 내가 볼 수 있게 끌어내라. 누가 이렇게 간덩이가 부었는지 봐야겠다!”

장사양의 뒤에는 다수의 관원들과 대신들이 서 있었다. 조정의 관원들이 이 방종한 일의 목격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장사양의 후원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였으니, 그의 분노가 어떨지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오늘 이 안에 있는 것이 누구든지 간에 중벌을 내리리라 결심하고 이를 악물었다. 누가 관원들 앞에서 자기 체면을 구기라고 시키기라도 했나. 만약 어사가 또 한 번 부를 엄히 다스리지 못한 죄명을 탄핵하여 올린다면 그의 벼슬길은 끝장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려 할 때, 눈이 예리한 여종이 소리를 쳤다.

“저건 4소저의 꽃장식 비녀가 아닌가요?”

사람들이 큰 소리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장사양은 갑자기 멍해져 문을 열 겨를도 없었다. 하지만 방 안에 있는 여자 신분은 드러났다. 바로 장부의 4소저 장한안. 몇몇 부인과 소저들의 얼굴에 경멸의 빛이 나타났다. 대명천지 아래 부적절한 짓거리를 저지르다니.

주씨는 경악한 모습으로 몇 걸음 물러났다.

“4소저일 리가 없어요. 4소저는 평소에 절조가 굳고 여태껏 자신의 순결을 잘 지켜 왔어요.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겠어요?”

대주씨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동생, 상심하지 마. 화는 몸을 상하게 한단다. 4소저는 평소에도 처신이 훌륭했으니 아마도 뭔가 오해가 있는 걸 거야.”

주씨 자매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사람들에게 안에 있는 사람이 한안이라고 확신을 주었다. 심지어 그들의 대화는 한안이 평소에 지극히 가식을 떠는 표리부동한 사람이라는 것까지 암시했다. 그러자 부인들이 한안의 잘못을 질책하기 시작했다. 소문에 이 소첩이 장부 적녀를 괴롭힌다더니 지금 보니 꼭 그런 것은 아닌가 보네.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도 적녀를 옹호할 수 있다니. 배포가 크네. 이러면서 말이다.

이가기는 안의 사람이 한안이라는 것을 듣고는 경멸하며 말했다.

“이미 그녀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지금 보니 부끄러움도 모르는 위인이었어!”

미 이낭은 배를 문지르며 무슨 상황인지 분명히 이해했다. 알고 보니 오늘 이 판은 4소저를 위해 차려진 것이었다. 득의양양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는 주씨 자매를 보며 잠시 망설였다. 지금 당장은 그녀가 구경거리를 보는 것처럼 방관해도 상관없긴 했지만 한안과 그녀는 현재 같은 진영이었다. 한안을 공격하는 것은 주씨의 방자함을 조장하는 게 되고 그러면 나중에 자기가 부중에서 발붙일 기반을 다지는 것이 어려워진다. 지금은 임신한 몸이라 아무 풍파도 없지만, 그녀는 자신의 배 속에 뭐가 있는지 알고 있었다.

미 이낭은 어쩐지 오늘의 일이 주씨 계획대로 진행될 리 없다고 느껴졌다. 근래에 한안은 몇 차례나 기발하고 멋진 역전극을 해내지 않았는가. 그녀는 유약하고 남의 손에 휘둘리던 어린 아가씨에서 크게 달라져 있었다. 과연 오늘의 일은 정말로 주씨의 예상대로 전개될까?

아마도 분명 그렇지 않을 것이다. 생각을 거듭한 끝에 그녀는 느릿느릿 여유롭게 앞으로 걸어나가 우아하게 생긋 웃었다.

“아직 안에 누가 있는지 명확히 알아본 것도 아닌데, 주 언니는 그렇게 조급하게 4소저라고 단정 지을 필요가 있나요?”

맑고 차가운 남자 목소리가 그들의 대화를 끊었다.

“직접 본 것이라야 사실이 되는 법입니다.”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보니 놀랍게도 현청왕 부운석이었다. 본래 차가운 얼굴로 세상사에 상관하지 않는 현청왕이 오늘은 웬일로 세상사에 관심을 가질까? 더구나 다른 사람의 집안일에.

등선도 부운석을 한 번 보고는 큰 소리로 말했다.

“맞아요. 한안은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어째서 문을 열어 보지 않죠? 안의 사람이 한안이 아니라면, 일부러 한안의 명성을 망가뜨리는 것과 다름없어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지극히 걱정스러웠다. 저 꽃장식 비녀를 한안이 했던 것을 본 적이 있었다. 확실히 한안의 것이 틀림없었다. 자기 벗이 이런 짓을 할 거라고 믿지 않았지만, 만약 다른 사람의 말대로라면……. 어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7황자는 부운석과 가까운 거리에 서 있었다. 7황자는 부운석이 한안 편을 드는 것을 보고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왕숙께서 장 4소저의 일에 매우 마음을 쓰시네요.”

그는 허리춤의 옥패를 만지작거리며 부운석의 귀에 가까이 대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왕숙께서 연회 도중에 잠시 자리를 비우신 것을요. 만약 왕숙께서 지금 제 앞에 안 계셨으면, 조카는 안에서 4소저와 즐기는 저이가…… 왕숙인 줄 알았을 겁니다.”

그는 삐딱한 웃음을 띠었다. 부운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냉랭하게 그를 한 번 보았다. 7황자는 천천히 몸을 곧게 세우며 꽉 닫힌 문을 보며 말했다.

“장 대인, 어찌 문을 열지 않는 게요? 도대체 어떤 소저인지 보게 해주시오.”

장사양은 화가 났지만 감히 7황자에게 대들 수는 없었다. 그래서 대신 한 발로 문을 걷어차 열었다.

“본왕이 소싯적 네게 훈계한 적이 있지. 사마귀가 매미를 덮치면 참새가 뒤에서 노리고 있는 법이라고.”

부운석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의 냉담한 말이 한기를 띠고 7황자의 귀에 전해져 들어갔다. 그는 고개를 들고 경악하며 부운석을 바라보았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장사양이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음란하고 퇴폐적인 냄새가 퍼져 나왔다. 수치스러운 신음소리도 더욱 또렷해졌다. 소리 하나하나가 사람들의 귀를 때렸다.

위 왕의 몸이 흔들리며 몇 걸음 앞으로 걸어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는 초조해하며 앞을 향해 몇 걸음 걸었다. 주씨의 마음속에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떠올랐다. 방 안의 큰 침상 위에 두 남녀의 그림자가 뒤얽혀 있었다. 위의 남자는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었다. 그의 벌거벗은 몸에 여자들은 놀란 비명을 지르며 자기 두 눈을 가렸다. 그러나 위 왕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외쳤다.

“여풍!”

위여풍?

주씨와 대주씨의 낯빛이 순간 창백해졌다. 어떻게 장위가 위여풍으로 바뀌었지?

위여풍의 이름을 듣고는 두 눈을 가리고 있던 이가기가 무의식적으로 안으로 달려 들어가 큰소리로 고함을 쳤다.

“난 못 믿어요. 위 공자가 이런 짓을 할 리 없어요!”

이가기는 그대로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아무도 그녀를 막을 수가 없었다.

주씨와 대주씨는 두 다리에 힘이 풀렸다. 장위가 한안과 일을 치러야 하는데 왜 위 세자가 있는 거지. 만약 한안이 위왕부 사람이 된다면, 첩이라 해도 그들이 마음대로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대주씨는 또 하나의 걱정이 있었다. 위여풍이 지금 여기 있다면 그럼 장위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가기는 방으로 달려 들어가서는 경악한 장사양을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침상 위의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지금 위여풍은 평소 온화하고 부드러운 모습은 간데없고 벌거벗은 채 이마와 머리카락이 땀에 흠뻑 젖어 음탕하고 퇴폐적인 모습이었다. 살짝 뜬 두 눈 속에 숨김없는 욕망이 담겨 미친 것처럼도 보였다. 이가기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고통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분노까지 치밀었다. 그녀의 눈빛은 위여풍 몸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 향했고 그 순간 분노는 들불처럼 번졌다. 이 모든 것을 한안의 탓으로 돌리며 크게 고함쳤다.

“몰염치한 년!”

이가기는 손을 뻗어 여자를 끌어냈다. 침상 위의 여자는 그렇게 끌려 나와 사람들의 눈앞에 그대로 드러났다. 그 여자는 뜻밖에도 한안이 아니었다.

“장어산!”

이가기가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무슨 일이 생겼어요?”

맑고 투명한 한안의 목소리는 노곤함을 띠고 있었다.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보니 한안이 유모의 부축 아래,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네가 어떻게 여기 있어?”

주씨는 귀신을 본 것처럼 한안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한안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주씨를 보며 몹시 이해가 안 간다는 어투로 말했다.

“아까 마신 술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어산 언니 부축을 받아 방으로 돌아와 쉬었어요. 조금 전에 막 깨어났지만, 예의를 잃을 수 없다는 생각에 바로 유모를 불러 나왔고요. 주 이낭, 뭐가 잘못됐나요?”

대주씨가 웃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데 4소저의 꽃장식 비녀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한안은 주저하며 대답했다.

“어산 언니가 저를 부축해서 방으로 돌아갈 때, 꽃장식 비녀가 아주 예쁘다고 말하더라고요.저는 꽃장식 비녀를 자주 하지 않아서 언니에게 주었어요.”

방 안에서 이가기의 우는 듯 절규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장어산! 너였어?”

사람들은 멍해져서 한안을 보고 다시 주씨를 보았다.

이제 보니 남자와 난잡하게 뒤엉킨 여자는 장어산이었다. 어떻게 아직도 적녀를 모함할 생각을 하는 걸까. 다른 사람의 꽃장식 비녀를 가져가서 덮어씌우려 하다니, 정말 심보가 악독하군.

부운석은 뒷짐을 지고 옆에 서서 한안을 바라보았다. 한안은 애처롭고 가련하게 서서 궁금하지만 감히 묻지 못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입가에 희미한 냉소를 띠었다. 겉보기에 순진해 보이는 아가씨가 눈앞의 장면을 연출해 낸 사람이라는 것을 누가 믿을 수 있을까? 하지만…… 어떻게 저기에 위여풍이 있는 거지? 부운석의 낯빛이 무거워졌다.

장어산은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날카로운 비명 소리에 시끄러워 깨어났다. 두 눈을 뜨자마자 자기가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때 이가기가 어산의 따귀를 한 대 갈겼다.

“괘씸한 년!”

어산은 불시에 따귀를 맞아 수치스러웠지만, 한편으로 화가 났다. 그러나 이가기와 대적할 수는 없었다. 이상했다. 이가기가 왜 갑자기 자기를 싫어하는 걸까?

장사양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옆의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세자…….”

세자?

장어산은 아연실색하여 고개를 돌렸다. 놀랍게도 자기 옆에 누워 있는 사람은 위여풍이었다!

그녀도 대강 기억이 났다. 한안이 본인을 기절시킨 후 바로 의식을 잃었고 이후 혼미하게 정신을 차렸을 때엔 누군가가 자기 몸을 누르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 사람이 위여풍이라니.

그녀의 얼굴에 홍조가 뚜렷해졌다. 속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쭉 생각했다. 지금 자신은 순결을 잃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자신을 원할 리 없었다. 그러나 위왕부 사람이 될 수만 있다면……. 그럼 아무래도 하늘만큼 큰 부귀가 따르겠지! 다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본 장어산은 마음속에 달콤함이 솟아올랐다.

한안이 자기를 기절시키고 자기와 그녀를 바꿔치기 한 것이 다행스러웠다. 그렇지 않았다면 위여풍과 뒤엉킨 사람은 장한안이었을 테니까. 생각을 거듭한 끝에 그녀는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주씨와 대주씨가 바짝 뒤따라 방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주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어째서 여기 있는 것이냐?”

주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도 장어산은 그저 흐느껴 울기만 할 뿐, 주씨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이가기가 표독스럽게 장어산을 노려보았다.

“분명 너야, 네가 위 오라버니를 홀린 거야!”

한안은 방 밖에 서 있었다. 위여풍의 이름을 들었을 때는 조금 놀랐다. 주씨의 계획대로라면 침상에서 간통 현장을 잡히는 것은 장위여야 했다. 만약 장위와 자신이 침상에 있었다면 대주씨와 장 태사 때문에라도 장사양은 장위를 엄하게 처벌할 수 없어 이 일은 소소한 문제로 둔갑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자신은 장위의 첩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두 사람은 장어산과 위여풍으로 바뀌었다. 장어산은 둘째 치고 위여풍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장어산과 부적절한 짓을 저질렀으니 아마 내일 안으로 경성에 좋지 않은 소문이 돌 것이다. 그러나 장어산이 위여풍의 첩이 되는 것은 그녀의 신분으로 보았을 때, 그런대로 괜찮은 조건이었다.

일은 이미 예상을 뛰어넘었고, 장사양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위여풍을 엄하게 꾸짖을 정도의 담은 없었다. 그저 장어산에게 화를 쏟아부었다. 장어산을 붙잡아 침상에서 끌어 일으키고, 잔인하게 그녀를 한 대 갈겼다.

“사람을 망신시키다니!”

장어산은 몸에 입은 옷이 없었다. 얼굴 위의 아픔을 돌볼 틈도 없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이불을 급히 끌어당겼다. 뒤늦게나마 두려워져 주씨를 바라보며 흐느껴 울었다.

주씨는 넋이 나가 있었다. 대주씨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우리가 4소저에게 졌구나!’

한편 위여풍은 시끌벅적하고 떠들썩한 소란에 힘들게 눈을 떴다. 자기 몸이 아무것도 가리지 않은 모습인 것을 발견하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주위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를 둘러싸고 웃음거리를 구경하는 것처럼 있는 걸 보고 무의식적으로 옷을 걸치고 이곳을 나가려 했다.

장어산이 그의 소매를 잡았다.

“세자…… 안 돼요…….”

사람들은 위여풍의 얼굴빛이 이상해지는 것을 보았다. 장어산의 말투를 들으니 위여풍이 장어산을 강제로 취한 것인 듯했다.

위여풍은 멍해졌다. 방금 전 일어난 일을 기억해 내고는 섬뜩해져서 장어산을 보았다.

“어떻게 니가 여기에 있지?”

장어산은 그 말에 담긴 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많은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 필히 이 귀인들 앞에서 자신이 명분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만약 위왕부의 첩이 된다면, 순결도 잃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전화위복이라 말할 수도 있었다. 산적의 일 뒤로 높은 가문에 시집가고자 했던 소망이 물거품이 되었다는 걸 그녀는 분명히 알고 있었기에 이런 좋은 기회가 왔을 때 잘 잡아야 했다. 장어산은 부드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으신 건 아니죠?”

위여풍은 마음속에 한기가 뻗어가는 것을 느꼈다. 자기 옆에 있는 것이 장어산이라면 그럼 그녀는? 고개를 돌리자 한안이 군중 속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평온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마치 낯선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눈동자 속에는 비웃음과 차가운 야박함이 있었고 그것은 위여풍의 분노를 솟아오르게 했다.

설마 그녀가 한 짓인가?

아, 아닐 것이다. 그녀는 피해자였다. 자신의 계획을 알았을 리 없다. 그런데 장어산이 어떻게 이 침상에 나타났지? 이건…….

오늘 그는 한안을 보는 것에 내심 기대를 했다. 비록 한안이 줄곧 그와 혼인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표현했지만, 그렇게 말할수록 그는 그녀를 얻을 것이라 다짐했다. 장부에 도착하자마자 한안과 이야기하고 하려고 찾다가 우연히 두 여종이 얘기하는 소리를 들었다. 여종의 속삭임 속에 ‘4소저’가 언급되자 그는 관심을 기울이며 그들의 대화를 몰래 다 들었다.

그는 주씨와 대주씨가 한안의 순결을 망가뜨려 장위에게 첩으로 시집가게 하려는 계획을 알아챘다.

그는 이미 한안을 자신의 여인으로 여기고 있었기에 진노했을 뿐만 아니라 불쾌했다. 그래서 주씨 두 자매를 잘 훈계하고 청추원에 가서 한안에게 경고를 해주려 했다. 그러다 청추원으로 향하는 도중, 그는 생각을 바꾸었다.

한안은 줄곧 그를 좋아하지 않아 그에게 시집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그녀의 태도가 워낙 단호해서 자신만만하던 위여풍도 한안이 자신의 세자비가 될 거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장부에는 그들이 원하는 물건이 있었다. 부친도 말한 적이 있었다. 장부와 인척 관계를 맺는 것은 위왕부에 유리한 패가 된다고. 게다가 그는 한안에게 흥미까지 있었으니 더더욱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영민하고 총명하며 지혜로웠다. 어린 나이인데도 수완이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더구나 지난번에는 그에게 매우 태연자약하게 통보하지 않았던가. 위친왕부의 세자비가 되지 않을 거라고. 그는 한안이 스스로 말한 것을 반드시 실천하리라 믿었다. 이 어린 아가씨는 분명 이 혼사를 고사할 방법을 생각해낼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해야 한안이 기꺼이 자신에게 시집올 것인지를 계속해서 생각했다. 그러다가 주씨 자매의 계획을 듣고 그 계획을 이용하기로 했다.

만약 한안과 살을 섞는 게 그라면……. 한안과 그의 사통이 사람들 앞에 폭로되면, 그럼 한안은 무조건 그에게 시집올 수밖에 없었다. 시집올 때 첩으로 들어와야 하니 그녀가 억울해할 수 있겠지만, 부친에게 사정을 이야기한다면 바로 세자비 자리를 그녀에게 줄 수 있을 터였다.

그가 세자비 자리를 예물로 삼아 혼사를 정하면, 한안은 반드시 그를 위해 혼례복을 입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연회석상에서 장위의 일거수일투족에 주의를 기울여 장위가 자리를 떠나는 것을 보고는 바로 미행하였다. 작은 집 앞에 다다랐을 때, 위여풍은 장위를 때려서 기절시킨 후 장부 밖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지키게 했다. 방은 등불이 켜 있지 않아 매우 어두웠지만 어렴풋하게 침상 위에 사람이 있는 게 보였다. 그는 전신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침상 위에 있는 사람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 후의 일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정신이 들자 옆에 보이는 사람이 장어산이라는 것만 알았을 뿐.

지금 생각해 보니, 방 안에는 최음제 종류의 향이 피워져 있었던 것 같았다. 그는 한안의 머리카락 한 올도 건드릴 생각이 없었다. 그가 가장 바라는 것은 한안이 기꺼이 그에게 시집오는 것뿐이었다. 그는 문인의 풍격을 중요시하며 남의 위기를 틈타 욕심을 채우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번만 남의 계교를 역이용하여 한안의 명성을 망가뜨리려 했을 뿐인데, 오히려 그가 남의 위기를 틈타 남을 해친 꼴이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러나 지금 위여풍이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어째서 옆에 누워 있는 사람이 장어산으로 바뀐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장어산은 위여풍이 오래도록 입을 열지 않는 것을 보고, 그가 책임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래서 위여풍의 손을 잡았다. 맑은 눈물이 뺨을 타고 미끄러졌다.

“세자, 지금 어아의 순결이 없어졌습니다., 어찌 하실 생각이시죠?”

위여풍은 혐오스러워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장어산이 처량하고 비통해하는 모습을 보고 너무나 초조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는 듯 무관심한 한안을 보며 원한이 솟구쳤다.

그녀는 이 국면을 즐겁게 보고 있는 것이다. 한안은 위여풍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녀가 직접 제 입으로 인정한 사실이었다. 지금 그는 다른 여인과 관계를 맺었으니 그녀는 분명 즐겁게 보며 일이 잘 되기를 희망할 것이다. 다른 여인이 그녀의 언니라 해도 그녀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정말 악독한 여인이었다. 위여풍은 차갑게 웃었다.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마땅히 피하지 않고 할 것이다.”

위여풍은 말을 마치고는 바로 옷을 걸치고 큰 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위 왕이 음침한 시선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위여풍은 부친을 보고도 못 본 체했다. 한안의 옆을 지나칠 때 발걸음을 살짝 멈추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4소저도 너무 일찍 기뻐하지는 마시오.”

그의 말소리는 작아서 무공이 있는 몇 사람을 제외하고, 곁의 사람은 알아듣지 못했다. 7황자의 낯빛이 보기 흉하게 변했다. 한안의 앞까지 걸어와 잔뜩 찌푸린 눈으로 한안을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보았다. 사냥감을 보는 눈빛은 한안을 불편하게 했다.

“장 4소저는 결정적일 때 늘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군.”

7황자는 그녀가 위여풍을 음해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한안은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위여풍이 여기에 나타난 것은 그녀와 무관했다. 위여풍의 진실은 정말로 알 수가 없었다.

7황자는 한안이 아무 반응도 없는 것을 보고 더욱 불쾌해하며 부운석을 향해 돌아섰다.

“왕숙의 오늘 말씀, 조카가 기억하겠습니다. 사마귀가 매미를 잡으면 참새가 뒤에서 노리고 있는 법이라고요. 그저 희망하노니 왕숙께서 계속 그 참새가 되실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7황자는 말을 마치고 바로 따르는 이들에게 소리쳤다.

“궁으로 돌아가자!”

오늘의 웃음거리는 여기까지였다. 부인과 소저들도 매우 만족스럽게 공연을 본 듯했다. 그들은 연이어 주인에게 작별을 고했다. 오직 장사양만이 난감한 표정이었다. 연회를 통해 자신의 관직이 강등된 것을 만회하리라 여겼는데 설상가상으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 원흉을 때릴 수도 없고 욕할 수도 없으니……. 위왕부의 사람을 누가 감히 건드릴까?

장사양보다 더욱 절망하고 낙담한 사람은 주씨였다. 그녀는 죽일 듯이 대주씨를 노려보았다. 그 눈빛에 대주씨조차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그녀는 주씨의 손을 토닥였다.

“경거망동하지 마. 이 일은 아직 여지가 있잖아. 이성을 잃지는 말아야지.”

그녀의 말에 주씨는 비로소 점점 냉정을 찾았다.

장어산보다 더 즐거운 사람은 없었다. 일이 도대체 어찌 된 것인지 그다지 명확하지 않았지만, 위여풍의 마지막 한마디를 똑똑히 들었다. 바로 자신에 대해 책임지겠다는 말. 장어산은 득의만만했다. 자기와 위여풍이 이미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고 생각하니 몹시도 달콤했다. 당장 위왕부로 시집가서 자기가 마음에 둔 사람을 매일 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그녀는 위여풍에게 빠져 줄곧 그녀를 노려보고 있는 이가기를 잊고 말았다.

이가기는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높은 가지에 날아올랐다고 하여 봉황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 설령 위 오라버니가 너를 원하신다 해도, 너는 첩이 될 수밖에 없어! 태후께서 분명 너를 좋아하실 리 없어. 천한 년!”

이가기는 말을 마치고 바로 떠났다.

한안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가기의 마음이 위여풍에게 있어 이제껏 자신과 대적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가기는 처음부터 그녀를 싫어하는 기색을 보였다. 설마 그 이전부터 이가기는 그녀가 세자비가 될 거라는 걸 알았던 걸까? 어떻게 알았던 걸까?

주위의 사람들이 거의 갔는데도 부운석이 아직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을 본 한안은 조금 부끄러웠다. 이 사람은 줄곧 자신의 생각을 알고 있었다. 이 일을 초래한 사람 중 한 명이 자신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셈이었다. 그에게 걸어가 몇 마디 인사치레라도 하려 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부운석이 손을 내밀었다. 손에는 매화자가 있었다. 한안이 흑의인과 싸울 때 떨어뜨린 것이었다.

부운석은 주씨 자매를 등지고 있었기에 그녀들이 보기에는 그저 현청왕이 한안에게 작별인사를 몇 마디 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한안은 부운석의 조금 낮은 목소리가 머리꼭대기에서 울리는 것을 들었다.

“만약 힘든 일이 있거든, 바로 현청왕부에 와서 본왕을 찾으면 된다.”

한안은 부운석 손에 있는 매화자를 받아 소매 속에 넣고 웃으며 말했다.

“왕야께서는 정말 의리가 있으시네요. 하지만 만약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저는 스스로 해결할 것입니다.”

부운석은 입을 다물었다. 냉혹한 얼굴 위에 부드럽고 온화한 빛이 떠오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무리하게 버티려 하지 말거라.”

한안은 머리를 기울였다. 다른 사람의 호의는 익숙하지 않았다. 이미 그는 그녀를 벌써 여러 번 도왔다.

부운석은 바로 다시금 뒷짐을 지고 떠났다. 떠나기 전 한마디가 한안의 귀를 파고들어, 그녀의 마음 밑바닥에 작은 돌을 던졌다.

“너는 그 사람이 왜 위여풍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하지?”

한안은 잠시 놀라 당황했다. 처음에는 부운석이 한 일이라 여겼다.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니, 부운석은 줄곧 자신과 같이 있었다. 게다가 이런 일을 할 사람 같지 않았다. 위여풍은 어쨌든 위왕의 세자였다. 어떻게 멋대로 장난을 칠 수 있을까.

설마 위여풍 스스로가 한 일인가? 한안은 가슴속이 싸늘해졌다. 이 경우는 생각지 못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위여풍 이 사람은 정말로 비열하다.

10장

장부 중앙의 대청.

장사양은 황리목 의자에 앉아 있었고, 그 옆으로 위왕 두 부자가 있었다. 주씨와 대주씨는 말석에 앉아 있었고, 장어산은 주씨 앞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감히 사람들의 얼굴빛을 보지 못했다.

위 왕이 비로소 입을 열어 말했다.

“장 대인, 지금 이 일을 어찌 하면 좋겠소?”

장사양은 조금 거북하게 헛기침을 했다. 상대방은 위왕부고 자신은 지금 일개 정5품 관원이니, 말할 주제가 아니었다. 장사양은 위여풍이 침묵하며 말이 없는 것을 보고 탐색하듯 물었다.

“세자께서 무슨 방법이 있으십니까?”

위여풍은 마음이 몹시 어지러웠다. 그가 원하는 것은 장한안이지 장어산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둘의 밀회 장면을 목격 당했으니, 장어산을 책임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조정 관원의 딸을 농락했다는 악명을 짊어져야 할 것이다.

“아무 방법도 없소.”

대주씨는 차를 받쳐 들고 한 모금 마신 후, 웃으며 말했다.

“이 일은 모두 우리의 예상 밖이었습니다. 모두가 좀 더 잘 지낼 수 있도록 가장 좋은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지요. 어아가 제 친조카지만, 저는 잘못을 두둔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여자에게 있어 명성은 가장 중요한 것이지요. 지금 이 일 때문에 어아의 명성이 심각해졌어요. 세자 전하도 완전히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지요.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어째서 오늘 이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장어산은 어째서 화원 안의 방 안에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인지, 어째서 위여풍도 그곳에 있었던 것인지. 어쩌면 말하지 않아도 피차가 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들추어내면 공연히 서로 간에 난처함만 늘어날 것이니, 쉬쉬하면서 서로가 모두 편히 지낼 수 있는 편을 택한 것일지도 몰랐다.

위여풍이 차갑게 웃었다.

“장 2소저는 어째서 거기에 나타난 것이오? 본 세자가 그녀를 강제로 가게 하지는 않았소. 어째 주 부인의 말은 전부 본 세자의 잘못이라 하는 것이오?”

줄곧 침묵하던 장어산이 고개를 들었다. 두 눈에 눈물이 가득했고 대단히 수치스럽고 분한 듯했다. 장어산은 위여풍의 말에 속이 상했다.

“세자께서는 어찌 이런 말씀을 하세요. 어산이 당신께 정조를 잃은 것은……. 이미 사실입니다. 설마 어산의 잘못이라는 것인가요?”

위여풍은 장어산의 억울해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속이 울적하기 그지없었다. 그저 장어산이 위선적이고 가식적이라 느껴질 뿐이었다. 불현듯 한안이 그에게 냉정한 눈빛으로 대하던 모습이 떠오르니, 위여풍은 더욱 화가 나 저절로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당신이 침상에 기어오른 것은 위왕부에 들어오기 위해서가 아니란 말이오?”

장어산이 제아무리 둔하다 해도 위여풍의 말투 속 경멸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직 위왕부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위여풍이 그녀를 이렇게 대하니, 위왕부에 들어가더라도 총애를 잃게 되지 않을까?

주씨는 가슴 아픈 눈으로 장어산을 잠시 바라보다가 위여풍의 태도에 분노를 표하며 말했다.

“위 세자께서는 지금 마땅히 어산에게 소명해 주셔야 합니다. 우리 어산이 일평생 고개도 들지 못하게 할 수는 없어요.”

장사양은 분노하여 주씨를 흘끗 보았다. 이 여인은 일을 성사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일을 망치고도 남았다. 어찌 저런 방자한 말투로 위여풍에게 말할 수 있을까. 장사양은 위 왕에게 비위를 맞추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대인, 그녀와 논쟁할 것 없습니다.”

위 왕은 개의치 않고 웃었다.

“괜찮소. 그러면 부인이 보기에 이 일은 어찌 해결해야겠소?”

대주씨는 주씨의 손등을 토닥거리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산의 신분이 있으니 다른 것은 감히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니 세자의 첩실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겠지요.”

그녀는 자애롭게 장어산을 한 번 보았다.

“어아는 좋은 아가씨입니다. 총명하고 재능이 있으며 또 지극히 효성스럽고 살뜰하지요. 지금 신변에도 분명 세자께서 모두 믿고 있는 사람들이겠지만, 우리 어아가 가면 세자께서는 좀 더 편해지실 겁니다.”

“이모…….”

대주씨가 자기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고 장어산은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두 뺨이 달아올랐다. 다만 첩실이 되라는 말에 조금 실망하기는 했지만, 위여풍의 여인이 될 수 있다 생각하니 아주 몹시 달콤했다.

위왕은 잠깐 깊이 생각하고 위여풍에게 말했다.

“여풍, 만약 첩실이라면 그런대로 무방하지 않겠느냐.”

위여풍 자신은 아직 처를 얻지 않았다. 그러나 경성 안, 대부호 집안에서 정방을 들이기 전에 소첩 몇을 취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위여풍은 장어산을 한 번 흘끗 보았다. 어쨌든 미인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첩을 얻어 집에 돌아가는 것은 재미없다 느껴졌다.

그의 눈빛이 장어산을 쓸고 또 주씨 두 자매를 스치고 지나갔다. 한안의 행동이 떠올랐다. 한안은 주 이낭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한 가지 계산이 섰다. 그는 고개를 들고 장사양에게 말했다.

“첩실이라. 나는 장 2소저를 측비로 삼을 생각이었습니다.”

측비? 이 말을 듣고 주씨와 장어산뿐만 아니라 위 왕조차도 놀라 위여풍을 보았다. 위여풍은 위왕부의 세자로서 이후 위친왕의 작위를 계승할 것이었다. 세자비는 바로 이후의 왕비이니 설령 측비라 해도 보통의 관원 딸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전에 위왕부에서 한안을 세자비로 선택한 것만으로도 장사양은 대단히 놀라고 기뻤다. 이 혼사를 통해 지위를 높일 수 있을테니 말이다. 근데 장어산이 일개 서녀 신분으로 측비가 될 수 있다니. 실로 예상을 뛰어넘는 결과였다.

장어산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측비는 첩실보다 품계가 많이 높았다. 위여풍의 마음속에 내가 있구나. 어산은 속으로 생각했다. 남자 중 누가 미색을 안 좋아할까. 자신은 아름답게 생겼고 위여풍은 보통 남자에 불과할 뿐인데 어찌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장어산은 생각의 끝에 애교가 가득한 수줍은 눈빛으로 위여풍을 바라보았다. 눈과 눈썹 사이에 감추어지지 않는 정이 가득했다.

대주씨는 조금 의구심이 들었다. 그녀는 위여풍의 태도를 아주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분명 위여풍은 장어산을 취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그에게 무슨 속셈이 있는 게 분명했다. 주씨와 장어산은 모르겠지만, 그녀는 명백히 알아볼 수 있었다. 이 위왕 세자가 자신들을 어떻게 곤경에 빠뜨릴까.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세자께서 아무래도 농담을 하신 모양이네요. 어아의 신분으로 측비가 되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위 왕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아들은 아비인 자신이 아주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장어산을 좋아하지 않는다. 만약 그저 책임을 지기 위해서 그녀를 측비로 맞이한다면 도리어 억울할 일이었다. 세상에는 많고 많은 대갓집 소저가 있었다. 그중 아무렇게나 측비를 고른다고 해도 서녀 신분의 장어산 보다는 좀 더 적합할 것이었다.

위여풍은 웃었다.

“주 부인은 본 세자의 말을 믿지 않소?”

말을 잠시 멈춘 위여풍은 사람들을 한 차례 훑어보며 말했다.

“위왕부는 이전에 장 노야에게 제의한 적이 있지. 장 4소저를 세자비로 맞이하겠다고.”

장어산의 몸이 굳어졌다. 두 손이 주먹을 움켜쥐면서 손톱이 매섭게 손바닥에 박혔다. 어째서? 어째서 위여풍은 그 천한 년을 정실로 삼으려 하는 거야? 바로 그년의 적녀 지위 때문이겠지! 분명 이 모든 것은 마땅히 자신의 것이어야 했다.

장사양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세자의 뜻은…….”

위여풍은 입술을 움직였다.

“장 2소저를 본 세자의 측비로 삼는 것은 가능하오! 하지만 본 세자는 동시에 장 4소저를 세자비로 맞이할 것이오!”

자매가 함께 한 지아비를 섬긴다? 이번에야말로 모두 위여풍의 뜻을 분명하게 알아들었다. 장어산은 분노해 마지않았다. 측비가 되는 것도 한안 덕에 이루어진다는 의미인가? 나중에 함께 위왕부에 들어가면, 자기는 또 한안에게 머리를 숙여야 한다. 생각하니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도대체 그 천한 년이 뭐가 좋길래 어째서 위여풍은 이렇게 일편단심으로 그 년을 세자비로 맞으려고 하는 거지?

주씨와 대주씨는 한 번 시선을 마주쳤다. 대주씨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어아에게 지금 이 일이 생겼으니 혼사는 모름지기 서둘러 처리하는 게 좋습니다. 반면에 안아는 아직 급계를 하지 않았으니 두 사람이 동시에 위왕부에 들어가는 것은 아마 이루기 어려울 듯합니다.”

위여풍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어렵지 않소. 내가 장 4소저와 정혼을 하기만 하면 그걸로 되니 혼사는 내년에 마쳐도 늦지 않소. 장 2소저에 대해서는…….”

그의 눈빛이 장어산을 흘끗 보았다.

“날을 택해 바로 부에 들어올 수 있게 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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