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녀‚ 환생 2권
목차
7장
8장
9장
10장
11장
12장
7장
평온한 날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바로 섣달그믐 전날 밤이 되었다.
작년만 해도 모친이 아직 계셨는데 올해 세상은 여전한데 사람은 없었다. 장부는 안주인이 세상을 떠났는데도 조금의 영향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주씨가 들어오면서 유달리 떠들썩하게 바뀌었다.
등을 걸고 오색 비단을 드리운 공동원과 달리 청추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유일한 춘련 한 부는 한안 자신이 붉은 종이를 찾아 쓴 것이었다.
- 봄비는 가늘게 만물을 수놓고, 붉은 매화가 점점이 강산을 적시네.
봄기운이 완연하구나.
봄기운을 의미하는 춘의(春意)에는 정욕이라는 뜻도 있었다. 급람은 글귀가 저속하다고 싫어했지만 주홍은 도리어 좋아했다. 한안은 웃기만 할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이전에 어머니께서 세상에 계실 때, 매번 쓰던 춘련은 뜻이 높고 깊으면서도 아련함을 품고 있었다. 한안은 어머니의 마음속 괴로움을 알고 있었다. 지금은 어머니 대신 그녀가 사면초가 처지였지만 심경은 달랐다. 내포한 뜻이 높고 심원하다느니 재주 있는 이름이 멀리 퍼진다느니 하는 것들은 모두 사람을 기만하는 것이었다. 차라리 속된 사람이 되어 즐겁게 좋은 날을 보내는 것이야말로 진짜 좋은 것이었다.
그러나 아마 즐거운 날을 보내는 것도 더는 어려우리라. 많은 사람들이 한안의 자리를 주시하고 있었고 한명은 장사양의 총애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미래가 밝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자신이 미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이용하여 이익을 최대화해야 했다.
장사양이 시종을 시켜 한안에게 주옥으로 오라는 말을 전달했다. 한안이 주홍을 데리고 주옥에 도착하자 주씨와 장어산도 그곳에 있었다. 장사양은 그녀가 들어온 것을 보고 가라앉은 소리로 말했다.
“한안, 내일 어산이 절에 가서 향을 올리고 복을 기원하려고 한다. 네가 함께 가거라.”
완전히 똑같은 말. 그녀가 산적에게 납치된 그 순간으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한안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동요가 일었다. 내일이 바로 그녀의 전환점이다. 피할 수 있을지 복이 될지 화가 될지 모두 그녀에게 달려 있다.
한안은 고개를 들었다. 주씨가 진지하고 간절하게 그녀를 보고 있었다. 한안이 즉시 답변하지 않는 것을 보고 계속해서 말했다.
“소첩과 노야는 내일 부중의 연말 연회를 준비해야 해서 따라갈 수 없습니다. 어산이 혼자 가는 것은 노야께서도 마음을 놓지 못하시네요. 4소저께서 만약 함께 갈 수 있다면 서로 돌볼 수 있을 겁니다.”
한안은 마음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전생의 그녀가 어찌 대답했더라? 장사양이 이 제안을 언급하자마자 그녀는 즉각 승낙했고 심지어 장어산과 준비해야 할 것을 상의했었다.
“이제 보니 제가 정말 대단했네요. 어산 언니가 부를 나가는데 시위가 따라가지 않고 제가 따라가야 안심이라니 말이죠.”
주씨는 자신이 말을 잘못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반박할 길이 없었다. 부득이 구원을 청하는 눈빛을 장사양에게 던졌다.
장사양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어산은 너의 언니다. 자매지간에 어찌 서로 보살피지 않을 수 있느냐? 더 말할 거 없다. 내일 아침에 어산과 함께 출발해라!”
한안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장어산은 상황을 보더니 웃으며 주씨와 시선을 한 번 마주치고는 장사양 곁으로 달려가 아양을 떨기 시작했다. 최근 어산은 장사양에게 한층 더 친근하게 애교를 떨며, 장사양의 사랑과 적지 않은 상을 얻었다.
한안이 입을 열었다.
“그럼,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장사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봐라.”
그의 말투는 여전히 차갑고 딱딱했다.
주씨 눈 속의 만족감을 보며 한안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사마귀가 매미를 잡으면 그 뒤에서 참새가 노리고 있는 법이다. 하지만 그 새 또한 새총이 자신을 겨냥하고 있음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한안을 얕잡아 본 것은 주씨가 범한 최초의 잘못이다.
현청왕부, 서재 안.
현청왕은 책상 앞에 비스듬히 기대고 있었다. 은사로 테두리를 두른 아주 연한 청색의 장포를 입고 겉에는 눈처럼 하얀 여우 모피 옷을 느슨하게 걸치고 있었다. 옷은 고귀하고 위엄이 있었지만 옷 주인의 품격과 재능에 미치지 못했다. 옷 안쪽으로 옥처럼 희고 깨끗한 쇄골이 드러났다. 우아하고 맑으며 차갑고 준수한 얼굴은 평소의 얼음과 서리 같은 차가움을 벗고 부드럽고 친근하며 화려한 아름다움만 남아 있었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크게 놀랄 일이었다.
그 옆에 부귀해 보이는 남자가 찻잔을 두드렸다. 바로 경성 제일 갑부 강옥루였다.
“요 며칠 7황자가 조용하네. 아마 내일은 반드시 움직임이 있을 거야.”
“상관없어.”
부운석은 책을 뒤적거리며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네 조카는 정말 너와 성격이 완전 달라. 온종일 어떡하면 너를 꺾을 수 있나만 생각하고 있을 걸? 그저께 강도(江都)에서의 일은 7황자가 트집 잡은 거 아니야? 하지만 네가 절묘하게 설명해서 거꾸로 황상께서 7황자에게 불쾌해 하셨지. 7황자는 사소한 일까지도 세세하게 따지는 성격이니까. 아마도 요 며칠 준비를 하고 있을 거야.”
강옥루는 그의 반응을 짐작한 듯이 불평 반 탄식 반을 섞어 말했다.
부운석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겁나는구나?”
강옥루가 살짝 웃었다.
“현청왕이 여기 있는데 겁날 게 뭐 있어. 도둑맞는 건 겁 안 나는데 도둑이 마음에 두고 있을까 봐 겁나네. 7황자는 지치지도 않나 봐.”
강옥루는 어깨를 으쓱했다.
“7황자는 내가 어째서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나 하고 원망하는 것뿐이야. 그 외엔 어린애의 수작이니. 괜찮아.”
“좋아. 내일 조정 신하 몇몇이 풍제사로 가서 청풍 도장에게 설법을 들을 건데……. 너도 같이 가자.”
부운석이 답이 없자 강옥루는 채근하듯 말을 이었다.
“청풍 도장 못 뵌 지 오래됐잖아.”
부운석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강옥루는 부운석이 두루마리를 보는 데 정신이 팔린 것을 보고 그의 주의를 돌리려고 말했다.
“그나저나 또 1년이 지났어. 너는 또 한 살 먹었고. 아마도 황형께서는 네가 비를 들여야 한다고 재촉하실 게 틀림없어.”
부운석은 성년식 후, 지금까지 여인과 얽힌 적이 없었다. 그가 열여덟 살이 된 후, 해마다 황제가 혼사를 다그쳐 물었다. 일국의 군주가 신하의 종신대사에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애를 태우는 것은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그러나 매번 부운석은 교묘하게 혼사 이야기를 피했다. 바로 그 때문에 부운석이 동성애라는 명성은 해를 거듭할수록 더 심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설령 이렇다 해도 그는 여전히 경성 안 규방 여자들의 꿈속의 남자였다.
부운석은 강옥루의 말을 듣고도 내색 없이 얼음처럼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너와 무슨 상관인데?”
강옥루는 난처하게 코를 문질렀다.
“그렇게 인정 없게 굴지 마. 너 한평생 홀아비로 살 건 아니지? 차라리 내일 풍제사에서 혼인 연분 하나 부탁해 봐.”
부운석은 서적을 내려놓고 강옥루를 직시했다. 눈빛에 귀찮음이 담겨 있었다. 부운석은 입 안에서 세 글자를 토해냈다.
“시시해.”
강옥루는 몸을 돌리고 투덜거렸다.
“너를 탓할 일이 아니지. 본인이 지나치게 잘 생겼으니 평범한 여자는 눈에 차지 않겠지. 현청왕비는 얼마나 경국지색일지 모르겠구나.”
부운석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늘씬한 손가락을 술잔의 위에 걸쳤는데 우아한 것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는 생각에 잠긴 듯했다.
방 밖을 지키고 있던 비밀 호위 목풍이 목암을 향해 눈짓을 했다. ‘왕비’라는 말을 듣자마자 목풍은 참지 못하고 귀가 솔깃했다. 목암은 묵묵히 그를 한 번 보고는 여전히 나무 말뚝처럼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으면서 오늘 햇빛이 좋다고 느꼈다. 아마도 곧 섣달그믐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미래의 일을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
이튿날 아침, 한안은 일찍 일어났다. 오늘은 섣달그믐날이다. 급람은 대야에 더운물을 담아 와서 그녀가 얼굴을 씻도록 했고 그녀가 양치하고 옷을 갈아입는 것을 도왔다.
한안은 오늘은 쪽을 지지 않고 두 갈래로 길게 땋아 내리게 했다. 새까만 장발을 곱게 빗어 정돈하고 앞머리 옆에 윤기 나고 투명한 자수정 머리핀을 꽂았다. 귓가에는 진주 팔보 귀고리를 걸고 목덜미에는 작고 정교하며 사랑스러운 붉은 향낭을 놓았다. 평소의 단장과 현저한 차이가 있었지만, 화려하거나 부귀해 보이지는 않았다. 한안은 담녹색 비단 피오(皮襖: 모피로 안을 댄 중국식 윗옷)를 찾았다. 종전에는 색이 지나치게 화려하다고 싫어했던 것이었지만 다 입고서 보니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유모가 웃으며 말했다.
“소저 정말 고우시네요. 하지만 이렇게는 좀 초라해 보일 수 있어요. 그 진홍색 새 옷으로 바꿔 입으시는 게 어떨지…….”
한안은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어. 나와 어산 언니는 사찰에 복을 기원하러 가는 거야. 너무 화려하게 입으면 도리어 좋지 않아.”
유모는 대답하지 않았다. 급람과 주홍도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두 사람도 똑같이 담녹색의 짧은 저고리와 긴 치마를 입어 한안과 같이 서니 얼핏 보면 누가 누구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유모는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을 딱 벌렸다. 한안은 웃으며 상자에서 새빨간 담비 두봉(斗篷: 모자 달린 피풍의)을 꺼내 몸 위에 걸쳤다. 이 두봉은 지극히 정교했고 한안의 몸에 딱 알맞았다. 모피 또한 매우 매끈하고 부드러우며 화려하여 매우 희소한 진품이라 할 만했다. 두봉을 걸치니 한안의 담녹색 피오가 빈틈없이 감추어져 더 이상 급람이나 주홍과 같아 보이지 않았다.
마차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한안이 다가갔을 때, 주씨가 한창 장어산에게 무언가 말하고 있다가 한안의 단장을 보고 놀라 말을 멈추었다. 한안의 모습이 평소와 아주 달랐던 것이다. 평소의 사랑스러운 어린아이 같은 옷을 포기하자 한안은 마치 하룻밤 사이에 적지 않게 자란 듯했다. 한안은 붉은 색 두봉을 입고 두 갈래 땋은 머리를 가슴 앞으로 드리우고 있었다. 장식은 간단했으나 붉은 입술과 눈보다 흰 피부가 뚜렷하게 드러났다. 새까맣고 또렷한 눈은 반달처럼 구부러져 사랑스럽고 온순한 것이, 자연스럽게 사람을 설레게 했다. 장사양도 보고 놀랄 정도였다.
지금까지 모두 아름다운 건 장어산이고 한안은 그저 단정한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지금 보니 한안과 장어산이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였다.
장어산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한안의 담비 두봉을 응시했다. 눈빛에 탐욕스러운 빛이 가득했다. 한안의 두봉은 무척 고급스러워 보였다. 만약 자기가 몸에 걸친다면 분명 더 잘 어울릴 터였다. 장어산은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반드시 저 두봉을 가져와야겠다고.
주씨는 한안이 오늘 평소와 완전히 다르게 단장한 것을 보고 어째서인지 알지 못할 불안감이 들었지만 웃으며 말했다.
“4소저께서 오늘 이처럼 단장하시니 소첩은 거의 알아보지 못할 뻔했습니다.”
한안이 웃었다.
“섣달그믐은 새로운 한 해이니 단장을 바꾸어 보는 것도 행운을 부르는 것이죠. 더구나 저도 한 살을 더 먹었으니 더는 어린아이처럼 입어선 안 되겠죠.”
주씨는 한안에게 무언가 다른 꿍꿍이가 있을 거라 생각하며 믿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지레 겁을 먹은 것인가 하고 생각하며 의심스럽게 한안을 한 번 보았다. 한안이 조금도 개의치 않고 옆의 마차를 훑어보는 것을 보고 마음이 조금 느긋해졌다.
“이리 되었으니 어서 마차에 타거라. 길이 아주 멀어 일찍 가야 일찍 올 수 있다.”
한안은 고개를 갸웃하고 장사양을 보며 두 대의 마차를 가리켰다.
“아버지, 한안과 어산 언니가 한 마차에 같이 타는 게 아닌가요?”
주씨는 장사양을 한 번 보고 부드러운 소리로 말했다.
“4소저께서 지난번 궁중 연회에 갈 때 말씀하셨지요. 다른 사람과 마차 한 대에 같이 타는 게 익숙하지 않으시다고요. 게다가 4소저께서도 여종을 데리고 가시니 마차 한 대에는 모두 앉을 수 없을 겁니다. 두 대라야 더 넓게 갈 수 있죠.”
주씨가 때마침 지난번 궁중 연회 때의 마차 일을 언급한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 듣기에는 장한안이 사리분별을 못하고 거들먹거리며 여종과 함께 마차를 탈지언정 이낭과는 함께 앉기를 원치않는 안하무인인 데다 서녀를 괴롭히기까지 한다고 느껴지게 했다.
장사양은 그 말을 듣더니 얼굴빛이 가라앉아 한안에게 냉랭하게 말했다.
“너는 혼자 마차를 타고 가는 것을 좋아하는 게 아니었더냐? 지금 또 무슨 억지를 부리는 것이냐!”
하지만 장어산을 향해 돌아서서는 비할 데 없이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
“어산이는 조심해야 한다. 길이 아주 멀다. 돌아오면 아버지와 함께 성 안의 불꽃놀이 저녁 연회를 감상하자꾸나.”
장어산이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 하시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어머니 몸이 건강하시도록 부처님께서 보우해주시기를 부탁드릴 거예요.”
한안은 그들의 대화가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마차에 올라갔다.
마차 안에 들어가자 급람이 다가와 한안의 귓가에 속삭였다.
“소저, 부중에서 많은 시위가 같이 이동합니다.”
한안은 휘장을 들어 밖을 보았다. 마차마다 주위에 모두 경장 차림 시위 여섯 명이 있었다. 한안은 참지 못하고 냉랭하게 웃으며 휘장을 내려놓고 부드러운 좌석에 기대앉았다.
이 시위들은 아마 전부 주씨에게 매수되었을 것이다. 전생에 그녀는 무공이 출중한 열두 명 시위가 어떻게 지방 도적 떼 몇 명조차 대처할 수 없었던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 도적 떼의 무공도 별거 아니었다. 손발 놀림이 모두 마구잡이였다. 이 시위들은 그녀를 구하려고 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일을 진행하는 데 있어 만에 하나 실수도 없도록 확실히 하기 위해서 그녀를 감시하려고 동행하는 것이었다.
주홍은 한안을 위해 두봉의 매듭을 풀어주었다. 마차 안은 난로를 피워 바깥에 비해 따뜻했다. 입고 있던 두봉도 무겁고 두꺼워서 금세 더워져 한안의 뺨이 발그레했다.
급람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소저, 지금 알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어째서 저희들에게 이렇게 입도록 하셨는지 말입니다.”
어젯밤, 한안은 급람과 주홍 두 사람에게 알렸다. 오늘 그녀를 따라 산에 복을 기원하러 올라갈 때, 반드시 담녹색의 짧은 저고리를 입어야 한다고. 두 사람은 비록 이해하지 못했지만 시킨 대로 했다.
한안은 마차의 차창을 한 번 흘끗 보고 급람의 손을 잡았다. 급람의 손바닥을 위로 놓고 손가락을 뻗어 위에다 몇 글자를 썼다.
급람과 주홍은 진지하게 보다가 무슨 글자가 쓰였는지 이해하고는 저도 모르게 일제히 놀라 숨을 들이켰다.
그 글자는 이러했다.
- 주씨가 내 순결을 망치려 해.
주홍이 갑자기 고개를 들어 근심어린 시선으로 한안을 보았다. 한안은 계속해서 썼다.
- 산적과 결탁하여 나를 납치하려 해.
두 여종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입을 딱 벌렸다. 그녀들은 부중에 있으면서 적지 않은 일을 겪었지만 이렇게 음험하고 악독한 방법을 쓰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당황하기도 했지만 어찌해야 할지를 알 수 없었다. 주홍이 먼저 반응을 보였다. 그녀는 한안을 보며 입을 벌려 소리 없이 입모양을 만들었다.
“어……떻……게……해……요?”
한안은 위로하듯 그녀들에게 웃어 보이고 손가락에 힘을 주어 한 글자 한 글자씩 글자를 썼다.
- 이대도강 (李代桃僵 오얏나무가 복숭아나무를 대신해서 말라죽는다는 뜻으로 작은 손해를 보는 대신 큰 승리를 거두는 전략을 의미함)
풍제사는 경성의 유명한 절이었다. 그러나 분향하러 오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풍제사가 유명한 절이 된 이유가 청풍 도장이 있기 때문이었다. 청풍 도장은 재능 있는 사람이었지만 손님을 만나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풍제사의 산길은 다니기 좋지 않았고 신도들이 청풍 도장의 명성을 흠모하여 와도 만날 수 없으니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해졌다.
분향하러 오는 사람은 적었지만 풍제사는 황폐하게 버려진 사찰이 아니었다. 심지어 공양하는 과일은 신선하고 희소한 것이었다. 아마 풍제사 배후에 있는 누군가에게 거액의 불전을 얻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풍제사에 대한 한안의 인상은 몹시 좋지 않았다. 심지어 극도로 증오했다. 그녀가 삶을 되풀이 하기 전 이곳에서 산적에게 납치되었기 때문인데 엉뚱한 데다 분풀이를 하는 셈이었다. 다시 절 문 앞에 서서 기억 속과 다를 바 없는 건물을 보고 있노라니 한안의 마음속에 만감이 교차했다. 이 길을 그녀는 마치 천 년 만 년 걷고 있는 것 같았다.
장어산은 이미 하인에게 물건을 옮기도록 분부했다. 물건들은 사찰에 헌납할 약간의 양식과 솜이불이었다. 스님들이 평소에 가장 부족한 것이 바로 이런 기본 물품들이었고 다른 것들은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한 중년 비구니가 와서 한안과 장어산 두 사람을 사찰 대당으로 안내하여 들어갔다. 중앙에 금불상이 있는 것이 보였다. 한안은 마음속으로 조소했다. 이런 깊은 산속 고찰에 금부처를 세워놓았으니 정말로 재물을 믿고 마음대로 구는 꼴이었다.
장어산은 방석 위에 꿇어앉았고, 한안도 꿇어앉아 중앙에 있는 부처 눈을 직시했다. 그녀는 부처를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하늘을 믿고 땅을 믿고 부처를 믿었는데도 살해당했기 때문이었다. 삶을 되풀이하기 전 한안은 욕심도 없었고 세상과 다투지도 않았다. 하지만 남이 꾸민 음모에 부부 인연을 훼손당했고 목숨을 잃었다. 부처는 고난에 처한 사람을 구제해 주는 존재가 아닌가? 그렇다면 어째서 그녀가 고해 속에서 몸부림칠 때, 그녀를 구하는 부처는 없었던 것인가. 어쩌면……. 부처는 그녀가 악인에게 능욕 당하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아 이렇게 새롭게 시작한 기회를 준 것일까?
한안은 허리를 굽혀 깊이 절을 했다. 머리가 방석에 닿았을 때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부처님, 부처님. 만일 정말로 있으시다면 제 손으로 원수를 베어 죽일 수 있도록 보우해 주십시오. 그 악인들이 죄 갚음을 하게 하시고 한명과 제 주변의 사람들이 평안 무사하게 지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설령 제 목숨과 맞바꾼다 하더라도 그럴 수 있기를 기꺼이 원합니다.’
공손하게 세 번 소리 내어 바닥에 이마를 조아렸다. 장어산은 이미 애교 부리며 수줍어하는 얼굴로 한옆에서 부부 인연을 점치는 제비를 뽑아 길흉을 보고 있었다. 한안은 그녀를 한 번 흘끗 보았다. 한안은 어산이 스스로 만족할 만한 제비를 뽑기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처음 길 안내를 했던 비구니가 와서 절에서 식사를 하고 가기를 청했다.
장부에서 이번에 사찰에 많은 물자를 가지고 왔기에 그들이 인색하게 굴까 봐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바깥에 있던 시위와 여종 몇을 함께 들어오라고 불렀다. 스님들은 일손이 부족했기에 여종들이 가서 도왔다.
절의 잿밥은 지극히 간단했다. 맑은 죽과 간단한 반찬뿐이었지만 한안은 색다른 맛을 느꼈다. 그러나 장어산은 삼키기 어려워했다. 한안이 자연스럽게 먹는 것을 보고 경멸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장어산은 억지로 젓가락을 움직여 몇 입 먹고 바로 내려놓았다.
한안은 잿밥을 먹은 후 스님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자신의 마차에 올라서 부드러운 이불에 기대 졸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마차가 돌연 멈추었다. 마차 전체가 앞으로 기울었다. 한안은 이불을 거의 던져버리다시피 하고 일어났다. 맹렬히 뜬 두 눈은 비할 데 없이 맑았으니 졸음기는 싹 다 달아나버렸다.
한안은 휘장을 들어 올리고 의아해하며 시위들에게 물었다.
“마차가 어째서 멈춘 것이냐?”
시위 하나가 안정적인 걸음으로 앞으로 나와 한안을 향해 포권을 했다.
“소저께 답합니다. 마차를 끌던 말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한안은 서둘러 휘장을 걷고 뛰어내려 왔다. 마차가 큰 소나무 앞에 멈춰 있는 것이 보였다. 마차를 끄는 말 두 필이 땅 위에 쓰러져 있었다. 말의 몸은 극렬하게 요동쳤고 눈은 당장이라도 감길 듯했다. 시위 한 명이 채찍으로 잔인하게 후려쳤다. 채찍에 맞은 말은 순식간에 두 다리를 뻗대고 콧김을 묵직하게 내뿜는 것이 완전히 일어날 수 없는 모양새였다.
“이 말이 어째서 갑자기 아픈 거지?”
장어산도 마차에서 뛰어내려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한안은 난감해하며 그녀를 보고 또 시위를 보았다.
“어떻게 해? 마차가 여기서 서버렸으니. 만약 사람을 시켜 서둘러 마차가 오게 한다 해도 아마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려야 할 거야.”
시위는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주씨가 초저녁 전에 사하탄까지 서둘러 도착해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다. 그런데 마차가 갑자기 탈이 났으니 아마도 제때 도착할 수 없으리라. 한안이 장어산을 보고 말했다.
“어산 언니, 한안이 언니 마차에 들어가면 어떨까요? 시간을 지체해서 불꽃놀이 저녁 연회를 놓치지 않도록 말이에요.”
장어산은 거절하고 싶었으나 불꽃놀이 저녁 연회 여덟 글자에 넘어가 버렸다. 불꽃놀이 저녁 연회에서는 평소에 볼 수 없었던 고관과 귀인, 명문 공자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이런 기회를 공연히 놓치고 싶지 않았다.
시위는 한안의 말을 듣고 눈이 환해져서 따라 말했다.
“그렇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두 분 소저께서 마차 한 대에 함께 타시고 제가 사람을 찾아 이 마차를 지키면 되겠습니다.”
장어산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한안은 친밀하고 다정스럽게 말했다.
“언니에게 폐를 끼치게 됐네요.”
그러자 장어산이 말했다.
“넷째 동생이 마차에 오르는 건 되지만 두 노비는 안 돼. 너희들은 밖에서 따라와.”
한안이 웃으며 말했다.
“급람, 주홍, 너희들은 밖에서 마차를 따라오렴.”
급람과 주홍이 서둘러 대답했다. 한안이 이렇게 시원스레 동의할 줄 생각지도 못했기에 장어산은 오히려 불쾌했다.
한안은 얼굴 가득 웃음기를 담뿍 머금고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았다면 그녀의 눈 속에 서린 차가움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바깥의 산길은 울퉁불퉁 험난했다. 두 여종에게 남자 시위들처럼 걷게 한 것은 너무한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길이 험해 마차가 빨리 달릴 수 없어, 급람과 주홍의 부담은 다소 덜어졌다는 것이었다.
한안은 어산의 눈빛이 지나치게 뜨거워 자신의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만약 장어산이 자기의 철천지원수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장어산이 자신을 걱정하는 거라 여겼을 것이다.
장어산은 한안의 담비 두봉을 열광적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두봉은 더 비할 데 없이 진귀하게 느껴졌다. 불같이 새빨간 색은 그녀가 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화려하고 고귀한 풍모는 한시도 지체 없이 자기 소유로 만들고 싶었다.
한안은 고개를 돌려 그녀가 두봉을 살펴보는 것을 보고 물었다.
“어산 언니, 한안의 두봉을 보고 있는 거예요?”
장어산은 멍해졌다가 일부러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너, 이 두봉을 어디서 얻었어?”
한안은 두봉을 어루만지고 웃으며 말했다.
“조부께서 주신 거예요.”
조부께서 세상에 계실 때 한안을 몹시 아끼고 사랑하셨다.
장어산은 말을 듣더니 질투하면서도 한스러워했다. 그녀는 장사양이 부 밖에 거둔 외실의 딸이었다. 지금까지 한안이 말한 조부가 어떤 모습인지 본 적이 없었다. 분명 씀씀이가 극히 후했으리라. 자기가 장부 안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더라면 분명 더 많은 좋은 물건들을 얻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두봉은 조부께서 사냥하실 때 첫 번째로 잡으신 거예요. 사냥터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냥감이었다고 해요. 나중에 조부께서는 당시 경성에서 가장 훌륭한 재단사를 찾아 이 두봉을 만들게 하셨어요. 이 담비 두봉은 햇빛 아래에서도 빛이 나니 몹시 진귀한 것이죠.”
장어산은 참지 못하고 군침을 삼켰다. 한안의 말은 그녀의 마음속에 거대한 파도가 일게 했다. 죽일 듯이 한안의 새빨간 두봉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그것을 빼앗아 올 수 없는 것에 한스러워했다.
한안이 빙그레 웃는 모습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웃어라, 웃어. 조금 있다가는 웃음이 나오지도 않을 테니.’
어머니의 계획이 무엇인지 자세히 알지 못했지만 어머니가 말하기를 이번에 장한안을 완전히 망쳐놓는다고 했었다.
마차 안의 작은 탁자 위에는 끓인 찻물이 있었다. 한안은 자신이 손을 움직여 한 잔을 따랐는데 몹시 뜨거운 찻물이 가득 차서 이내 흘러 넘쳤다. 여종 운아가 이를 보고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였으나 미처 입 밖으로 말을 내기도 전에 한안이 손을 털어 찻잔 속의 뜨거운 찻물을 장어산의 몸에 뿌렸다.
“앗!”
장어산이 즉각 비명을 질렀고 한 손을 높이 들어 한안을 한 대 치려고 했다. 한안은 어머나! 하는 소리와 함께 놀라고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며 소리쳤다.
“언니 피풍의가…….”
장어산은 멍해져서 서둘러 머리를 숙여 보았다. 오늘 그녀는 흰색 토끼털 피풍의를 입었는데 그 눈처럼 흰 피풍의 위에 찻물 자국투성이로 얼룩덜룩한 것이 몹시 보기 흉했다.
장어산은 화를 억제할 수 없어 한안에게 크게 고함을 질렀다.
“내 옷을 망쳐놓다니! 오늘 밤 불꽃놀이 저녁 연회를 어쩌면 좋아? 분명 일부러 그랬지!”
한안은 고개를 숙이고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모습을 보였다.
“고의가 아니었어요. 불꽃놀이 저녁 연회는…… 어산 언니가 옷을 갈아입으면 돼요……. 그 옷은 내가 배상할게요.”
장어산은 끝까지 트집을 잡았다.
“무슨 옷을 갈아입으라고! 이 피풍의는 그저께 부친께서 사람을 찾아서 새로 지어주신 옷이야. 네가 뭘 가지고 배상해? 말하기는 쉽지. 설마 나더러 헌 옷을 입고 불꽃놀이 저녁 연회에 가야 한다는 거야?”
한안이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두봉 아랫단을 꽉 붙잡고 있는 것을 보고 장어산의 눈이 환해졌다.
“아니면, 네 두봉을 내게 주는 게 어때? 내키지는 않지만 입어줄 수 있어. 너는 은자 조금만 더 배상하면 돼.”
한안은 마음속이 차가워졌다. 장어산은 정말이지 주판알을 잘 굴리는구나. 이 두봉은 대단히 희귀한 것인데도 장어산은 은자까지 배상하라고 요구했다. 욕심이 정말로 많기도 하지. 이렇게 생각하며 한안은 연거푸 손을 내저었다.
“안 돼요. 이것은 조부께서 주신 거예요…….”
장어산은 한안의 사정 따위 전혀 상관없었다. 그저 이 사람들 앞에서 한안이 찻물을 자신의 몸 위에 뿌린 것은 도리에 어긋난 것이니 양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기회를 이용해 저 두봉을 받아내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한 장어산은 몸을 기울여 한안의 옷을 잡아당기면서 멈추지 않고 말을 쏟아냈다.
“빚을 졌으면 갚아야 하는 것이 지당한 일이지. 자매니까 나도 네가 은자를 갚는 것은 원치 않아. 이 옷이 새것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입어볼게. 내 피풍의를 네가 더럽혔으니까! 부친께서 네가 고의로 내 피풍의를 더럽힌 것을 아시면 너를 어떻게 벌하실까!”
한안은 장어산이 옷을 끌어당기지 못하게 하려고 그녀의 손을 떼어내고 있다가 장사양의 이름을 듣고는 움직임이 굳어졌다. 억울하고 원망에 찬 눈으로 장어산을 응시했다. 장어산은 한안의 몸에서 두봉을 벗겨내 그대로 제 몸 위에 둘렀다. 어산은 운아에게 물었다.
“예뻐?”
운아는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느꼈지만 공손히 대답했다.
“예쁘십니다.”
장어산은 득의양양해서 분노하고 있는 한안을 보고는 가볍게 말했다.
“사실 넷째 동생에게 이 옷이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어. 오히려 나한테 잘 어울릴 거라 생각했지.”
그러고는 자신의 토끼털 피풍의를 한안에게 내던졌다.
“넷째 동생은 우선 이거라도 입고 있든가.”
한안은 그녀를 보고 말했다.
“고마워요, 어산 언니. 하지만 다른 사람이 남긴 물건을 줍는 습관은 없어서요. 그런 사람은 거지죠.”
장어산은 한안의 말 속 비꼼을 알아듣고 차갑게 웃었다.
“넷째 동생이 내 옷을 입고 싶지 않다면 그만둬. 운아, 피풍의를 잘 챙겨둬라.”
그러고는 한안의 윗옷을 보고 비꼬며 말했다.
“넷째 동생이 이 추위에 얼어 죽지 않아야 할 텐데.”
한안이 평온하게 대답했다.
“어산 언니에게 걱정을 끼치지는 않을 거예요.”
한안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담녹색 옷을 보았다. 입가가 웃음기로 휘어졌다.
장어산은 소유욕이 강해서 이렇게 옷 하나도 자신의 눈에 들면 반드시 얻어내야 했다. 만약 장어산이 먼저 바꾸자고 제의하지 않았다 해도 한안은 방법을 찾아 두봉을 그녀에게 주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한안이 예상한 것보다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마차 안에서의 말다툼은 자연히 마차 밖의 시위들 귀에도 전해졌다. 그러나 그들은 알아듣지 못한 척했다. 대열의 가장 뒤에서 걷고 있던 급람과 주홍은 호흡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울퉁불퉁 험난한 산길을 걷는 것은 성인 남자에게도 조금 버거운 일이니 여자는 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급람은 성격이 활발하여 종종 주위의 시위들과 말을 하여 울적함을 풀었기에 노정은 그런대로 그리 멀지 않은 듯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걸었는지 알 수 없었다. 급람이 잠시 멈추고 시위 한 명의 소매를 잡아당기더니 웃는 얼굴을 드러냈다.
“오라버니, 지금 몇 시쯤 됐어요?”
급람이 말을 마치고 이마 위의 땀을 닦는데 비할 데 없이 귀여웠다.
시위도 여자를 아끼고 위하는 사람이라 급람의 청순한 생김새를 보고는 표정이 부드러워져 위로하듯 말했다.
“괜찮아. 이제 곧 사하탄이야. 사하탄을 지나서 반 시진만 가면 성에 도착할 수 있어.”
급람은 시위에게 감사하다고 말한 다음, 주홍과 시선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의 마음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쳤다.
*
마차 안. 한안은 너무 서두르지도 않고 너무 여유부리지도 않으며 간식을 먹었다. 시간을 셈해 보니 곧 도착할 듯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장어산은 마차 가장자리에서 새로 얻은 은팔찌를 손에 들고 감상하고 있었다. 한안에게 과시하고 있다는 것이 명백한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한안은 눈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자신이 입은 담녹색 옷도 화려한 색이건만 장어산이 빼앗아 입은 붉은 두봉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다.
주씨는 만에 하나의 실수도 없도록 분명 자신의 계획을 장어산에게 알리지 않았을 것이다. 장어산은 신중함이 부족했으니 주씨의 걱정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한안이 어산을 이용할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한 대의 마차에 같이 탄 두 명의 소저. 그 도적 떼들이 어느 쪽이 2소저이고, 어느 쪽이 4소저인지 구분할 수 있을까?
한안은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그 웃음을 미처 거두어들이지도 못했는데 마차 밖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달가닥 달가닥 하는 말굽 소리와 함께 마차가 요동쳤다. 시위들이 칼을 뽑는 소리가 심하게 울려 퍼졌고 혼란스러운 와중에 굵고 우렁찬 목소리가 울렸다.
“사람을 두고 가라!”
마침내 도적 떼들이 왔다. 한안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정말이지 그들이 오지 않을까 두려웠다. 그랬다면 이 연극이 또 어떻게 되었겠는가?
장어산이 냅다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일이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한안은 마차의 휘장을 걷어 올리고 뛰어내렸다. 그리고 놀라고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 큰 소리로 외쳤다.
“어서 소저를 보호해라!”
한안의 외침은 즉각 모든 사람의 주의를 끌었다. 마차 밖은 이미 혼란스러웠고 예상 외로 시위들은 전부 땅에 쓰러져 어지러이 나뒹굴고 있었다. 무슨 엄습에 당하기라도 한 듯, 전신이 무력한 모습이었다. 무공이 가장 높은 시위장만이 도적 떼의 행동을 막으려는 듯 아직 발버둥 치고 있었다.
한안의 눈에 조소가 스쳤다. 이 사람은 정말 직무에 충성을 다하는구나. 지금까지도 연기하는 것을 잊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충심은 도대체 누구에게 보여주려는 것일까?
시위들은 모두 땅 위에 쓰러져 있고 그 주위를 흑의의 우람한 사내 십여 명이 둘러싸고 있었다. 모두 산적 분장을 하고 있었다. 우두머리 한 명이 큰 말에 올라타고서 끊임없이 서성대고 있었지만 사람들을 약탈하지는 않았다.
한안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납치할 대상인 그녀를 찾고 있는 것이라는 걸.
마차 안의 장어산은 잠깐 놀랐다가 돌연 정신을 되찾았다. 주씨가 출발 전날 밤에 그녀에게 신신당부했었다. 무슨 일이 발생하든 간에 놀라 허둥대지 말 것이며 그녀의 계획은 장한안을 망쳐놓을 것이라고. 장어산은 결코 멍청하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주씨의 말을 깨달았다. 혹시 주씨의 계획이 산적 무리에게 한안이 납치되게 하는 것일까? 그렇게 되면 한안은 순결을 지킬 수 없게 되고 장사양의 위신이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때 자기가 영리하고 사리 밝음을 드러낸다면 적녀 자리는 그야말로 따놓은 당상이 될 것이었다. 한안이 장차 장정들에게 입게 될 모욕을 생각하자 장어산은 지극히 통쾌해졌다. 아예 마차 휘장을 걷어 올리고 한안이 남에게 능욕당하는 참상을 보려 했다.
그녀가 막 마차 휘장을 걷어 올리자 줄곧 숨어 있던 급람과 주홍이 일제히 그녀를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소저!”
장어산이 아직 상황을 명백히 파악하기도 전에, 두 사람이 일제히 그녀를 향해 돌진해 왔다. 그리고 한안도 깜짝 놀란 모습으로 큰 소리로 외쳤다.
“급람, 어서 소저를 보호해!”
큰 말 위의 사내는 대단히 곤혹스러웠다. 그들은 돈을 받고 일을 처리하는데 납치해야 할 소저에 대해 말하기를 만두 모양으로 머리를 빗고 두 번째 마차에 타고 있을 거라 했다. 그런데 도착한 마차는 한 대뿐이고 마차 안이나 밖의 사람들 중 만두 모양 머리를 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게다가 마차 밖에서 호위하던 시위들이 돌연 쓰러져 정신을 잃고 깨어나지 않으니 더욱 영문을 알 수 없어 무슨 착오가 생긴 건 아닌지 몹시 두려웠다. 사내는 두 여종이 외치는 소리와 ‘급람’이라는 한마디를 듣고 마차 안의 붉은 두봉을 입은 여자가 자기가 납치해야 할 사람이라고 단정했다. 장부 4소저의 두 여종 중 하나는 급람이라는 이름이고, 하나는 주홍이라는 이름이라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장어산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흑의 사내 하나가 마차 앞으로 돌진하여 한 손으로 장어산의 팔을 낚아채 끌어냈다. 장어산은 나는 너희들이 잡아야 할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려 했는데 입속이 바로 찢어진 천 뭉치로 틀어 막혔다. 급람과 주홍 모두 죽기 살기로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소저, 소저!”를 외치는 한안도 급람, 주홍과 함께였다. 담녹색의 짧은 저고리는 판에 박은 듯 똑같아서 한안도 그저 여종이라고 산적들은 여겼다.
좀 이상하기는 했다. 여종 네 명을 제외하고 소저는 오직 한 명뿐이었다. 이전에 상대방이 분명히 말하기를 소저 두 명이 있을 거라고 했는데 보아하니 뭔가 바뀐 모양이었다.
운아는 그 자리에 멍청하니 있었다. 어째서 자기 소저가 납치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입을 벌려 크게 소리치려 했으나 놀라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장어산을 납치한 흑의 사내는 산적 두령 앞으로 달려가 장어산을 말 위에 던졌다. 큰 말 위에 있는 흑의 사내는 명령을 내렸다.
“철수!”
장어산은 줄곧 마음속으로 크게 외치고 있었다.
‘나는 장한안이 아니야!’
그러나 입이 틀어 막혀 있어서 절망적인 흐느낌 소리밖에 낼 수밖에 없었다. 말은 기세 좋게 달려 장어산을 데리고 한안에게서 갈수록 멀어졌다. 장어산은 죽일 듯이 한안을 노려보았다. 한안이 땅에 쓰러져 낭패한 모습으로 처량하게 그녀를 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 입가에 분명 한 가닥 웃음기가 걸려 있었다.
말은 점점 모든 사람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한안은 천천히 일어섰다. 운아가 마차에서 달려 나와 땅에 푹 쓰러졌다. 한안은 운아에게 말했다.
“안 보이느냐? 여기 시위들이 모두 중독되어 움직일 수 없어. 너의 주인이 납치되었는데 서둘러 관에 가서 알리지 않고 뭐 하는 거야?”
어산의 시녀 운아는 넋이 나가 있다가 천천히 정신이 돌아왔다. 한안이 아닌 장어산이 납치되었다. 만약 주씨가 알면 자신은 분명 목숨을 잃을 것이다. 한안의 이 말을 듣고 최후의 구명줄을 잡는 심정으로 일어서서 바로 달려가려 했다. 한안이 다시 친절히 일깨웠다.
“관부는 평소에 처리해야할 공무가 많이 있어서 관아에서 니 얘길 들어주지 않을 거야. 지금 상황은 위급하니 관아 밖에 있는 북을 쳐서 반드시 지부의 주의를 끌어야 해. 그래야 어산 언니를 빨리 구할 수 있을 게야.”
운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달려갔다. 한안은 그제야 손을 털고 몸을 일으켰다. 급람과 주홍도 걸어왔다. 장어산이 납치될 때, 그 불같이 새빨간 두봉을 떨어뜨렸다. 한안은 두봉을 주워들어 위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 걸치고 끈을 잘 묶었다. 그제야 비로소 유일하게 깨어 있는 시위장에게 다가갔다.
풍제사에서 잿밥을 지을 때, 주홍은 돕는 척 기회를 틈타 시위들의 밥과 반찬에 약간의 재료를 첨가했다. 단독으로 복용하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다른 향료와 섞이면 즉각 의식불명에 이를 수 있는 재료였다.
장어산이 급람과 주홍을 마차 밖으로 내쫓는 것은 한안이 예상했던 일이었다. 마차에 다섯 명을 태울 수는 없는데 장어산이 자기 여종을 마차에서 내리게 할 리는 없기 때문이었다. 급람과 주홍은 필연적으로 마차 밖에서 시위들과 함께 걸어야 했다.
급람이 마차 밖에서 시위들과 잡담할 때, 소매 속에 숨겨둔 향료를 시위들의 칼집에 떨어뜨렸다. 시위들의 몸 자체는 무사했으나 만약 산적과 만나 상대를 향해 칼을 뽑을 땐 향이 퍼져 먼저 먹어둔 식사와 섞여 사람을 의식불명에 이르게 만들었다. 시위장은 지나치게 경계하며 행동하였기에 급람은 발각될까 두려워 감히 대놓고 행동하지 못해 향료를 많이 뿌리지 못했다. 그랬기 때문에 시위장은 전신이 무력해지기는 했지만 지각과 의식은 맑게 유지하고 있을 수 있었다.
한안은 시위장의 곁에 쪼그리고 앉았다. 시위장은 중년 남자로 장어산이 납치되는 그 순간 문득 깨달았다. 도중에 마차에 돌연 이상이 생긴 것, 한안이 장어산과 옷을 바꾼 것, 시위들이 돌연 의식불명이 된 것, 아울러 급람, 주홍이 장어산을 소저라고 부른 것 등.
이 어린 아가씨가 처음부터 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함정에 빠트린 것이다. 아마도 그녀는 진작 오늘의 계획을 알고서 상대의 계교를 역이용하여 장어산의 납치를 설계한 것이리라. 주씨가 제 발등을 찍은 셈이었다.
그는 놀라서 눈을 가늘게 뜨고 가까이 있는 어린 아가씨를 보았다. 한안의 눈과 눈썹이 휘어지며 그를 보고 친절하게 말했다.
“오라버니, 괜찮아요?”
그는 이를 악물고 힘들게 대답했다.
“소저, 훌륭한 계략이십니다.”
훌륭한 계략이다! 이렇게 흔들림 없이 침착하다니. 심지어 납치 상황이 종료된 지금도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돌연 간담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안은 그의 말을 조금도 개의치 않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마음 놓아요. 운아가 관에 알리러 갔으니 관부에서 분명 일의 자초지종을 조사할 테지만 당신들은 결백한 사람들이니까요.”
그녀는 ‘결백’이라는 두 글자를 아주 무겁게 강조했다. 그리고 더 이상 시위장을 보지 않고 몸을 돌려서 급람과 주홍에게 말했다.
“너희 둘 중 누가 마차를 몰 수 있니? 어산 언니가 납치되었으니 어서 가서 소식을 알려야 돼.”
그 말을 마치자마자 한안의 등 뒤에서 돌연 차가운 코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한안은 몸을 돌렸다. 눈앞에 출현한 사람은 뜻밖에 부운석, 혁련욱, 위여풍과 낯선 소년 한 명이었다.
차가운 코웃음 소리는 바로 위여풍이 낸 것이었다. 한안을 보는 눈 속에 경멸을 가득 담은 위여풍이 입을 열어 말했다.
“장 4소저의 마음 씀씀이가 이리 악랄할 줄이야. 자기 언니조차 가만두지 않는군.”
한안은 네 사람을 쭉 돌아보았다. 고귀하고 위엄 있는 사람, 화려한 미모를 지닌 사람, 옥처럼 온화하고 부드러운 사람, 그 낯선 소년조차 모두 준수하고 풋풋했다. 모든 규방 소저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 분명했다.
더욱이 나쁜 짓을 저지르는 것을 발각 당했다. 한안의 눈빛이 위여풍에게 멈추었다. 위여풍의 경멸 어린 표정이 한안의 눈을 아프게 찔렀다. 전생이나 금생이나 그녀는 영원히 이 사람의 눈에 들 수 없는 것 같았다. 어쩌면 하늘이 정하신 것인지도 모른다. 장어산은 정말 좋은 복을 타고났구나. 전생에 자신이 산적에게 납치당했을 때는 누군가 와서 편을 들어준 일이 없었던 것을 생각하니 얼굴 위에 조소가 떠올랐다.
위여풍 무리는 조정의 몇 사람과 함께 풍제사에 가서 청풍 도장의 설법을 들었다. 돌아갈 때 이곳을 지나치다가 방금 전의 장면을 본 것이다. 한안의 일거수일투족이 그들의 눈 속에 담겼다. 더구나 그녀와 두 여종이 함께 장어산을 소저라고 불러서 산적이 장어산을 바라보았을 때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대충 이해했다.
대부호 집안의 서녀와 적녀 간 다툼에 대해서는 늘 들어왔던 일이라 다른 사람의 경우였다면 그도 그리 큰 감흥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한안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을 때, 그의 마음속에 순간 실망감이 솟았다.
한안이 궁중 연회에서 펼친 재능은 모두가 다 볼 수 있었다. 글로서 그 사람을 알아볼 수 있다 했으니 한안은 품격이 고결한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마음이 독하고 수단이 악랄하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언니를 팔아넘기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방금 전의 말을 내뱉은 것이다.
위여풍은 말을 마친 후, 자신의 말투가 좀 심했다고 생각했다. 한안은 결국 열두 살 어린 아가씨일 뿐인데 젊은 남자에게 이런 말을 들었으니 아마도 창피스러울 것이다. 조금 후회하며 그녀를 보는데 마주한 어린 아가씨의 입가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웃음기가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낭랑하고 부드러웠다. 마치 나지막한 종소리가 담담하게 모든 사람의 귓전을 두드리는 듯했다.
“위 세자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자격이 있나요? 소녀의 행동이 염치없다 하시면서 자신은 정의로운 군자라 자처하시는데 방금 전 구경거리를 보실 때 어째서 손을 내밀어 도와주지 않으셨나요?”
눈앞에서 위여풍의 얼굴이 순간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보며 한안은 계속해서 말했다.
“자기 자신을 제일 위하는 동시에 두각을 드러내는 영웅이 되고 싶어 하다니 세상 어디에 그렇게 수월한 일이 있을까요?”
그녀는 마차 곁으로 걸어가서 고개를 돌려 우아하게 싱긋 웃었다.
“악랄한 것이 아무래도 위선보다는 마음 편할 것 같네요.”
위여풍이 수수방관한 일을 가차 없이 꼬집은 것이었다. 피식하는 소리와 함께 낯선 소년이 한안의 말에 재밌어 했다. 그는 남의 불행을 즐기는 시선으로 얼굴빛이 딱딱하게 굳어진 위여풍을 보았다.
혁련욱은 표정이 조금 복잡했다. 이 어린 아가씨는 매번 만날 때마다 달라지는 것 같았다. 지난번 황궁 연회에서는 총명하고 똑똑하며 재간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오늘은 자기 언니에게 매정한 것을 보니 뜻밖이었다. 게다가 위여풍에게 말할 때에는 조금도 예의가 없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상대의 비판을 받아들이기는커녕 도리어 상대를 비난했다. 심지어 경성의 뛰어난 인재인 위여풍의 입을 틀어막아 말문을 막히게 하니 정말로 보면 볼수록 이상한 사람이었다.
한안이 막 마차에 뛰어오르려는데 맑고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상처는 다 나았느냐?”
부운석의 음성이었다. 부운석의 늘씬한 신영이 몇 걸음 밖에 서서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고개를 숙이고 가벼운 소리로 말했다.
“왕야께서 약을 선사해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한안은 이제 괜찮습니다.”
위여풍의 얼굴빛이 더욱 보기 흉해졌다.
한안은 몇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의 언니가 방금 뜻밖의 일을 당하였으니 지금 서둘러 가서 관에 알릴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물러나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바로 마차에 들어갔다. 주홍과 급람은 바깥에 앉아 마차를 몰고 이내 떠나갔다.
제 자리에 남겨진 사람들은 똑같이 침묵하며 말이 없었다. 잠시 후, 그 준수한 소년이 입을 열어 물었다.
“저 사람은 뉘 집 소저입니까? 정말 재미있네요.”
혁련욱이 대답했다.
“장부 4소저야.”
“장 대인의 딸?”
그 소년은 경악했으나 이내 표정을 평온하게 되찾았다.
“장 대인의 딸이 뜻밖에도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네요.”
말을 나누는 사람들은 있는 듯 없는 듯 위여풍을 무시했다. 사람들 앞에서 비웃음을 당한 위여풍의 얼굴빛이 붉으락푸르락했다. 한결같이 온화하던 모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눈 속에는 음험하고 악독한 빛이 스쳤다.
한편 한안과 급람 등 세 사람이 탄 마차는 사하탄에 다다랐다. 급람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어머나, 소저, 이 마차가 말을 듣지 않으니 어쩌죠? 제가 조종할 수가 없습니다.”
말을 하자마자 바로 말고삐가 떨리더니 마차가 갑자기 방향을 돌려 성 동쪽을 향하여 달려갔다.
주홍의 침착한 목소리가 마차 휘장을 사이에 두고 전해져 왔다.
“아마 산적 떼에 놀란 모양이야. 우리 함께 힘을 써 보자. 불꽃놀이 저녁 연회 전에 성 남쪽의 망강루에 서둘러 가야 해. 노야와 이낭들이 모두 거기에서 소저를 기다리고 계셔.”
그들은 말에게 채찍을 휘둘러 마차는 성동을 향해 달려갔다.
한안은 마차 안에서 이 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말을 들으며 마음속으로 몰래 웃었다. 급람과 주홍이 어릴 때 그녀와 함께 경마장에 간 적이 있었다. 그때는 조부께서 아직 세상에 계실 때라 그녀에게 기마술을 가르치셨고 두 여종도 따라서 배웠다. 대단히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지금 상황에 대처할 정도의 여유는 있었다. 한안은 웃으며 침착하게 분부했다.
“어쩌니? 너희들은 어서 방법을 생각해 보려무나. 어산 언니를 구하는 게 늦어지면 우리들 모두 벌을 받게 될 거야.”
그녀는 걱정 어린 어조로 말했지만 표정은 느긋하고 여유가 넘쳤다. 작은 탁자 위의 쓰러진 단지를 잘 세워 놓고 안에서 소금 절임 매실을 꺼내어 먹었다.
한안을 따라가라는 명을 받은 목풍은 그야말로 놀랄 노자였다. 두 여종이 진지하게 거짓말을 하고 한안이 덩달아 호흡을 맞추는 것을 보면서 놀랍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미래의 왕비는…… 정말로 교활하구나 싶었다.
주홍은 평소 세심하고 신중했다. 마침 석양이 서쪽으로 질 때라 노을빛이 땅에 가득했다. 마차의 뒤쪽으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는데 돌연 그림자 안에 한 덩어리가 많아진 것을 보게 되었다. 손을 홱 뻗어 급람을 치고는 눈짓을 했다.
목풍은 매우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한안의 마차를 따라왔지만 몸을 가릴 수 있는 나무가 근처에 많지 않았다. 결국 경공을 펼쳐서 마차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앞선 마차가 돌연 한 오솔길로 접어들더니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서둘러 몸을 날려 따라가서 오솔길에 돌아들었지만 눈앞은 텅 비어 아무것도 없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목풍은 좋지 않다고 몰래 중얼거리며 서둘러 앞을 추격했다.
그의 신영이 사라진 후, 모퉁이 그늘 속에서 급람과 주홍이 약속이나 한 듯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한안은 생각 끝에 말했다.
“다른 길로 가자. 좀 돌아서 가겠지만 지금도 시간이 부족하지는 않으니까.”
급람과 주홍은 고개를 끄덕여 동감을 표했다. 한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도대체 누가 그녀들을 따라온 걸까. 적인지 아군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조심하는 편이 좋다.
마차는 마침내 성에 들어섰다. 성동의 소로를 이리저리 돌고 또 돌아 시간이 얼추 비슷해진 후에 한안은 비로소 성남을 향해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가는 길에 사람들의 주의를 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한안은 되도록 농가가 있는 소로를 선택했다. 가는 길에 주홍은 한안의 갈증을 풀게 하려고 주루에 찻물을 사러 들어갔고 마차는 바로 옆의 점포 앞에 세웠다.
한안은 마차 좌석에 기대어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고 있었는데 귓가에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7전하…….”
한안은 순간 놀라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녀는 서둘러 몰래 휘장을 끌어당겨 틈새로 밖을 내다보았다.
부귀한 젊은 사내종 하나와 곱고 아름다운 여자 하나가 함께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한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여자의 모습이 낯익다고 느껴졌지만 누구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들은 마차에 가까이 서 있었는데 마차 안에서 오래도록 움직임이 없는 것을 보고 사람이 없다 여긴 듯했다.
한안이 조금 전에 그들이 7전하 어쩌고 하는 소리를 들었으니 7황자와 관계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들은 것이 명확하지가 않았다. 더 자세히 들으려 했지만 두 사람은 이미 말을 마치고 주루 안으로 가버렸다.
한안은 정신을 집중했다. 7황자가 무엇을 하려는 걸까. 지금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불안했다. 급람과 주홍이 찻물을 가지고 주루 안에서 나왔고 마차는 바로 출발했다.
8장
성남은 오늘 유달리 북적였다. 1년에 한 번 있는 불꽃놀이 저녁 연회가 바로 오늘 밤이기 때문이었다. 규방 여아들, 젊은 남자들이 모두 오늘 밤 북적대는 곳으로 구경을 다니며 불꽃놀이를 감상하고 꽃등회를 돌아다니니 확실히 인간 세상의 아름다운 일이라 할 만했다. 고관 귀인들은 망강루에 와서 최적의 각도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좋은 자리를 예약했다.
성남에 가까워질수록 급람과 주홍의 마차는 이리저리 부딪치고 비틀거리며 달려 대단히 눈길을 끌었다. 두 여종은 모두 놀라고 허둥대는 모습이었고 옷은 어수선한 것이 마치 길바닥을 뒹군 것 같았다.
한안은 마차 안에서 가볍게 웃으며 팔을 휘둘렀다. 작은 탁자 위의 단지와 찻잔이 순간 바닥으로 떨어졌다. 찻물과 음식이 한 데 뒤섞여서 정말로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다음 자신의 두봉을 벗어 잘 개서, 마차의 뒷좌석 위에 놓았다. 이 모든 것을 마치자 그녀는 옷깃을 가다듬고 단정하게 몸을 세워 앉았다.
망강루의 2층에는 이미 적지 않은 고관 귀인들이 앉아 있었다. 장사양은 이틀 전 창가 자리를 예약했다. 좀 비쌌지만 이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한안과 장어산이 늦도록 나타나지 않자 그는 참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아이들이 어째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지?”
주씨는 마침 정5품의 관리의 부인 한 명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장사양의 말을 듣고 안심시키며 말했다.
“아마도 길에서 무슨 일이 있어 지체되나 봅니다. 두 분 소저의 나이가 어리니 노는 데 열중하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그렇게 많은 시위를 데리고 갔으니 별일은 없을 것입니다.”
장사양은 주씨의 이 말을 들은 후 마음속이 조금 느긋해졌다. 미 이낭이 눈을 흘기고 웃으며 말했다.
“노야의 말씀은 두 분 소저를 걱정하시는 거예요. 만약 우리 장부 적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때는 어쩌면 좋죠?”
적녀라는 단어에 주씨의 표정이 굳어졌다. 장사양은 불편한 표정으로 미 이낭을 한 번 보았다. 그 옆의 장금과 만 이낭은 표정이 냉담하여 이 모든 것에 마음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장한명은 국자감에 같이 다니는 좋은 벗과 함께 서 있었으나 조금 불안했다. 제 누이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을 보고 얼굴에 근심이 나타났다.
주씨도 내심 초조했다. 예상대로라면 장어산은 이맘때쯤 돌아왔어야 했다. 어찌 늦도록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것일까. 설마 무슨 일이 생겼나? 여기에 생각이 이르자 그녀의 심장이 곧장 쿵쿵 뛰기 시작했다. 그럴 리가 없어. 모든 것이 다 적절하게 안배되었다. 한안이 날개가 돋치지 않고서야 시위 열두 명에 산적들까지 보탰는데, 달아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바로 그때, 젊은 사내종 하나가 달려 들어와 큰 소리로 말했다.
“노야, 큰일 났습니다!”
만강루의 2층은 여러 부인과 소저들이 왕래하기 편하도록 각 방은 유리병풍으로 반쯤 가려져 있었다. 사내종의 외침에 대청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이쪽을 바라보았다.
장사양은 노하여 사내종을 한 번 노려보고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기에 이처럼 허둥대?”
젊은 사내종은 이마의 땀을 훔치며 비로소 더듬거리며 말했다.
“2, 2소저의 마차가 돌아왔습니다!”
한안과 장어산은 두 대의 마차에 나누어 탔다. 장어산의 마차가 돌아왔다는데 한안의 마차는 언급되지도 않았다. 장한명이 손을 떨며 즉시 일어서 사내종의 옷깃을 움켜잡았다.
“내 누님의 마차는?”
“장한명!”
장사양은 한명이 충동적으로 구는 모습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구나 제 말을 끊고 먼저 말하다니 그야말로 손윗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태도였다.
주씨는 속으로 그 소식이 미친 듯이 기뻤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걱정스러워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냐?”
그녀의 말투는 황급하고 불안했으며 살짝 컸다. 객청 안의 나머지 귀인들이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들을 쳐다보았다. 남의 좋은 구경거리를 감상하는 모습들이었다.
젊은 사내종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급람과 주홍이 바로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난입해 들어왔다. 두 눈이 새빨간 것이 방금 한바탕 통곡한 것 같았다. 장사양을 보더니 두 사람은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흐느끼며 말했다.
“모두 노비의 잘못입니다. 저희가 소저를 보호하지 못했습니다. 소저께서…… 강도들에게 납치되셨습니다!”
이 말이 나오자 온 방 가득 큰 소리로 술렁거렸다. 출가 안 한 여아가 강도들에게 납치되었다니 그것은 순결을 잃은 것이다! 장사양을 향한 눈빛들이 조금씩 달라졌다.
장금은 순간 놀랐지만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그 창백한 얼굴에 조금의 표정도 없는 것이 생기 없는 나무인형 같았다. 미 이낭은 경악했다. 한안은 장어산과 복을 기원하러 산에 올라갔는데 어찌 변고가 일어난 걸까?
장사양의 얼굴빛이 흉하게 변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가 사랑하는 딸에 대한 마음이 절실해서 가슴이 미어져 저렇구나 생각하겠지만 오직 한안만은 사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장사양은 처음엔 그들을 걱정했으나 장어산이 무사하다는 것을 알고는 마음이 놓였다. 다만 한안의 부주의함 때문에 이 많은 경성 귀인들 앞에서 체면을 잃게 되었으니 내일이면 경성 안에 무슨 말이 퍼져나갈지 모른다는 것에 분노가 끓었다.
급람과 주홍은 장사양이 자신들을 대하면서 은근히 성가셔하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이런 사람이 4소저의 부친이라니, 어쩌면 그리도 냉혈한인지!
주씨는 일이 자기 계획대로 전개된 것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한안이 내일 경성의 웃음거리가 되어 다시는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하게 될 것을 생각하니 즐거워 마지않았다. 그러면서 의심스러웠다. 어째서 시위들이 보이지 않는 걸까? 그녀는 처연한 표정으로 슬프고 처량하게 입을 열었다.
“4소저, 그 빙설같이 깨끗하고 총명한 사람이…… 어찌 그럴 수가 있어?”
맑은 눈물이 주씨의 얼굴에서 미끄러졌다. 과연 미인이 눈물을 떨구니 더할 나위 없는 자태였다. 객청 가운데 몇몇 사람들은 감탄하고 또 탄식했다. 저 이낭은 직접 낳은 것도 아닌 딸에게 정말 잘해주는구나. 지난번 궁중 연회에 대해 몇몇 사람이 말하기를 장사양의 이낭이 적녀와 적대하고 있다고 하던데 지금 보니 완전히 심사 고약한 사람의 농간이었던 모양이다.
미 이낭이 조소하며 막 몇 마디 하려는데 익숙한 맑고 밝은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이낭이 근심해 주시니 너무나 감사하네요. 하지만 이낭이 잘못 알았어요. 강도들에게 납치된 것은 제가 아니라 어산 언니예요.”
주씨는 믿을 수가 없어 고개를 홱 들었다. 한안은 담녹색 옷을 입고 두 갈래 길게 땋은 머리를 얌전히 가슴 앞에 드리운 채 늘씬하게 우뚝 서 있었는데 그 모습은 온유하며 곱고 아름다웠다. 한안은 아주 멀쩡하게 주씨 앞에 서 있었다.
“아니, 이건 불가능해…….”
주씨가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한안이 여기 있는 건 불가능하다. 분명 자기의 환상이다. 고개를 들어 보니 한안의 눈은 빨간 채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고 표정 역시 매우 비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입술에 있는 듯 없는 듯한 웃음기가 걸려 있으니 분명 비웃음이었다.
불가능해. 이건 불가능해. 만약 한안이 여기에 있다면 그럼 어산은 어디에 있는 거지? 왜 어산이 보이지 않는 거야? 방금 전 한안이 무슨 말을 한 거야? 납치된 건 어산이라고 말했나? 그게 무슨 뜻이야?
주씨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한안의 입이 무어라 말하는 것이 보였다. 주위의 고관 귀인들은 모두 의아해했고 장사양도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미 이낭만이 상황을 이해했다는 미소를 드러냈다. 주씨는 납치된 것이 한안이라 여기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납치된 것이 장어산이라 하니 이제 도리어 웃음거리가 된 것이었다. 미 이낭은 마음속으로 표독스럽게 욕을 했다.
‘천한 년, 당해도 싸지!’
주씨가 막 캐물으려는데 밖에서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여종 하나가 달려 들어왔다. 어산의 측근 여종 운아였다. 운아는 땅 위에 무릎을 꿇고 계속해서 머리를 부딪치며 울면서 말했다.
“이낭, 소저께서 납치되셨습니다. 노비가 방금 전에 관에 알렸어요. 이낭…….”
주씨의 몸이 흔들렸다.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캄캄하다가 홀연 고개를 돌리고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는 한안을 보고는 흉악하게 달려갔다.
“너야! 네가 어산이를 해쳤어! 분명 너야. 네가 모해한…….”
장한명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몸을 곧게 세우고 한안을 몸 뒤에 보호하였다.
“이낭은 아무 근거 없이 누님을 모욕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모해라니요. 방금 전 여종들의 말을 이낭은 듣지 못한 겁니까? 당신의 딸은 산적이 납치한 것입니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주씨의 손바닥이 장한명의 얼굴을 때렸다.
“너희들은 한패야. 총애도 못 받는 사생아 주제에. 어디서 설치는 거야? 장부 안에서 네가 나설 자리는 없어!”
객청 안 사람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을 딱 벌렸다.
그저 산적이 대갓집 소저를 납치한 것뿐인데 이낭이 돌연 적녀가 모해했다고 지목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게다가 한발 더 나아가 이낭이 적자를 한 대 치고는 사생아라는 말까지 했다. 객청 안 사람들은 재밌는 구경거리를 보는 심경이었다. 대부호 집안의 추문은 안줏거리였으니 말이다.
장사양은 주씨가 장한명을 때리는 것을 보고도 아무런 질책도 없었다. 도리어 장한명이 주씨를 추궁한 것이 불만스러웠다. 미 이낭도 놀라고 의아한 기색을 드러냈다. 부중에 오래 있으면서 장한명을 안중에 두지는 않았지만 이낭이 적자를 구타하는 것은 그녀가 담이 여러 개 있어도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하극상이었다.
장한명은 입술을 깨물고 말없이 쳐다보았다. 주씨의 눈빛은 한층 더 음침해져 있었다. 장한명의 뒤에 서 있는 한안은 작은 몸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단호하게 앞을 막아서자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느껴졌다.
한안은 객청 가운데 사람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사람들의 표정이 한눈에 다 들어왔다. 그녀는 한명을 가볍게 밀어내고 주씨를 직시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낭은 한안이 언니를 모해했다고 여기는군요. 증거를 내놓기를 청합니다.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의 평판을 훼손하는 것은 관부에 가져가도 쉽게 용서받을 수 없는 거예요.”
한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계속해서 말했다.
“이낭이 어산 언니가 한안에게 모해를 받았다고 생각한다면……. 감히 묻지요. 어제 누가 한안과 어산 언니에게 함께 산에 올라가라고 요구했죠?”
한안은 잠시 주씨의 말을 기다렸으나 묵묵부답이었다.
“이낭이죠. 이낭은 한안이 선견지명 능력이라도 있어서 이낭이 한안과 어산 언니를 함께 산사에 올라가라 요구할 것을 미리 알고 하루 만에 산적을 수배해서 어산 언니를 납치했다고 생각하나요?”
한안은 고개를 숙였다.
“한안은 규방 여아여서 평소에 집을 떠나지도 않는데 어찌 살인을 밥 먹듯 하는 산적이 내 명령을 따르게 할 수 있다는 건지 정말로 모르겠네요. 더구나 이낭처럼 아주 작은 것도 똑똑히 알아내는 수단도 없는데 말이에요. 이낭은 일의 경과를 다 듣지도 않고 바로 모해라고 단정할 수 있잖아요.”
주씨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대청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보는 눈빛이 조금 확연해졌다. 처음에는 한안이 납치된 일로 상심하여 눈물을 흘리는 듯하더니 어산이 납치되었음을 알자마자 장부 적자의 뺨을 때렸을 뿐만 아니라 연약하고 가냘픈 어린 아가씨를 의심했다. 보아하니 소문은 거짓이 아니었다. 주씨는 확실히 장부의 적자, 적녀를 미워하는구나. 방금 전의 눈물은 그저 연기였을 것이다.
주씨의 눈이 환해졌다.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물었다.
“좋습니다. 그럼 4소저께서 소첩에게 알려주시지요. 만약 모해가 아니라면 시위들은 다 어디 있습니까? 4소저는 어째서 어산의 마차를 타고 돌아온 거죠? 또 어째서 옷을 바꾸었나요?”
그러더니 몸을 돌려 장사양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노야께서 소첩을 위하여 책임지고 결정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소첩에게는 어산 하나뿐입니다. 그 아이는 소첩의 심장이나 다름없습니다. 만약 어산에게 무슨 변고가 있다면 소첩도 살 수 없습니다.”
장사양도 의심해 마지않았다.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아 한안을 노려보았다. 그는 이미 주씨의 말을 믿고 있었다. 장사양이 주씨를 부축하고 위로하여 말했다.
“내 반드시 누구의 짓인지 밝혀내지.”
말투가 갑자기 음침해졌다.
“한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아버지를 기만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안은 슬픈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부친께 답합니다. 장부의 시위는 사하탄에 도착했을 때, 전부 의식불명이 되었습니다. 한안도 어떻게 된 일인지 모릅니다. 한안이 제아무리 큰 능력이 있다 한들 결코 무공이 강한 남자 열둘을 제압할 수는 없습니다. 도중에 한안의 마차가 망가져서 어산 언니의 동의를 구해 그녀와 함께 마차에 탔습니다. 옷에 대해서는…….”
한안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한안이 마차에서 조심치 못하여 찻물을 엎어서 어산 언니의 피풍의를 더럽혔지요. 어산 언니가 한안에게 제 두봉으로 배상하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이 점은 운아가 당시에 마차에 있었으니 충분히 증언을 해줄 수 있을 거예요.”
객청 안 사람들은 한안에 대해 바로 동정심이 생겨났다. 어머니를 잃고 부중에서 꼼짝도 할 수 없는데 부친도 딸을 아끼지 않는구나. 일개 서출 언니가 옷 좀 더럽혀졌다고 적녀에게 물건을 독촉하여 받아낼 수 있다니 누구라도 한안의 말 속 억울함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자 모두는 주씨 모녀를 더 혐오하게 되었다.
“터, 터무니없는 말로 억지를 부리는 거야!”
주씨는 당연히 한안의 말을 믿지 않았다. 지금 사람들이 다 한안 쪽으로 기울었기에 허둥거렸다. 한안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무슨 말을 하든 이낭은 한안을 믿지 않을 것이니, 그럼…….”
그녀는 고개를 돌려 천천히 관복을 입은 한 중년 남자의 앞으로 걸어가서 무릎을 꿇고 무겁게 큰 소리를 내며 이마를 바닥에 부딪쳤다. 남자가 경악하여 막 저지하려는데 한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이분께서 대리사(大理寺: 최고법원에 해당하는 기관)에 계시는 조 대인이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조 대인께서는 광명정대하시고 공정하여 치우침이 없으시다지요. 저는 자신을 위해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대인께서 이 일 또한 저의 결백을 철저히 조사하여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장사양과 주씨의 얼굴빛이 똑같이 굳어졌다.
고개를 숙인 한안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걸쳐졌다.
주씨 네가 장사양에게 너를 위해 책임지고 결정해 달라 요구하였으니 나는 바로 대리사 대인에게 나를 위해 책임지고 결정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누가 누구를 누를 수 있는지 두고 볼까?
주씨는 당연히 이 납치사건을 철저하게 조사할 수 없었다. 철저하게 조사하면 어떻게 될까. 산적은 한안이 부른 것이 아니다. 향료는 이미 흩어져 사라졌고 잿밥만 단독으로 조사해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장한안의 잘못을 꼽자면 산적이 오해하도록 이끌었다는 죄목뿐일 것이다. 만약 그것도 죄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조 대인은 한안이 어린 나이로 독한 꿍꿍이를 지닌 사람들 속에서 그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을 가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으며 일 처리가 온당하고 침착한 것을 보고 더욱 마음에 들었다. 한안에게 높은 평가를 내리고 큰 손을 휘둘렀다.
“본관이 너를 위해 책임지고 결정해주겠노라! 마음 놓아라. 이 일은 본관이 반드시 철저히 조사할 것이다!”
주씨는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다. 두렵고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조 대인은 인정사정없는 사람으로 공정하게 원칙대로 처리할 것이다. 만약 모든 것을 조사해내면 그녀는……. 설마 감옥에 떨어지는 화를 입게 될까? 그, 그럴 수는 없다. 주씨는 고개를 들고 장사양을 보았다.
“노야, 이 일은 널리 알려져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산이 어찌 시집을 갈 수…….”
장사양도 조 대인이 그의 체면을 구긴 것에 대단히 분노했다. 이 일가의 주인인 자신의 앞에서 한안이 외인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것은 자신의 뺨을 친 것이 아닌가? 말투가 바로 좀 딱딱해졌다.
“조 대인, 이것은 본관의 집안일…….”
조 대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장 대인은 어찌 그리 말씀하시오. 대인과 나, 두 사람은 같이 조정의 관원으로서 각자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해야지요. 지금 산적이 혼란을 일으켰으니 본관은 도의상 책임을 거절할 수 없소이다. 이 일은 본관이 기필코 해야 하오!”
한안은 조 대인이 공명정대한 사람이었다는 데에 감격했다. 한안은 그의 보살핌을 얻었으니 반드시 보답하리라 마음먹었다.
주씨는 이 일이 되돌릴 여지가 없음을 깨달았다. 하루아침에 산적에게 납치되어야 할 사람은 무사 무탈하고, 어산은 행방불명이며 자신은 소송에 휘말리게 생겼고, 경성 안 귀인들의 앞에서 각박하고 악독하다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좋다, 장한안. 내가 정말로 너를 얕잡아 보았구나!
이제 몸을 뺄 방법이 없어 아예 눈을 감고 막 혼절한 것으로 가장하려는데 놀란 외침이 먼저 들렸다.
“이낭!”
미 이낭이 창백한 얼굴로 장사양의 품속으로 쓰러졌다. 장사양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이러는 것이냐?”
교몽이 돌연 몸을 낮추고 무릎을 꿇었다.
“노야께 답합니다. 이낭, 이낭께서 회임하셨습니다!”
“뭣이?”
장사양은 놀라면서도 뜻밖의 일에 대단히 기뻐했다.
“네 말이 정말이냐?”
교몽이 대답했다.
“이낭도 며칠 전에야 의원을 청하여 비로소 아시고 며칠 지난 뒤에 노야께 알리려 하셨습니다. 오늘 변고가 있어 이낭께서 아마도 심중에 초조해하시어 태기가 상하신 것은 아닌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친 것 같았다. 주씨의 얼굴에 핏기가 즉시 사라졌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었다. 저 천한 년이 애를 가졌다고?
한안은 몰래 감탄했다. 미 이낭이 정말 때를 잘 맞췄다.
주씨, 내가 너에게 보낸 큰 선물을 잘 즐기길 바란다. 만약 이 정도를 고통이라 한다면 그 고통은 이제 막 시작된 것이라 말해 주마.
이제 장사양은 안중에 오직 미 이낭뿐이었다. 서둘러 사람에게 분부하여 의원을 청하러 가게 하고 그는 미 이낭을 끌어안고 즉각 부로 돌아갔다. 그의 마음속 희열은 모든 것을 넘어설 정도로 컸다. 한안에 대한 분노와 장어산에 대한 걱정조차도 연기처럼 사라졌다. 주씨는 냉랭한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장사양은 영원히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의 딸을 아낄 거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저 천한 년이 애를 가지자 바로 뒷전으로 던져버렸다.
그녀의 표정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그 순간, 한안은 명료하게 느꼈다. 주씨에게 무언가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주씨는 한안을 한 번 보고 다시 장한명을 한 번 본 뒤, 천천히 몸을 돌려서 뒤따라 떠나갔다. 한안은 알았다. 주씨는 장사양에게 원한이 생긴 것이다. 한안이 하고자 하는 일이 바로 그 세밀한 틈을 거대한 심연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었다.
한안은 비로소 장금 두 모녀를 돌아볼 여지가 생겼다. 장금 두 모녀가 지극히 소원해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반듯하고 단정하게 앉아 있지만 얼굴이 무표정한 것이 마치 나무 인형 같았다. 막 무언가 말하려는데 장금과 만 이낭이 한안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떠났다.
한안은 조금 곤혹스러웠다. 대청 가운데 장부의 사람은 모두 사라졌다. 한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비로소 몸을 돌렸다. 객청 안의 사람들을 향해 사뿐히 절을 하고 예의 바르게 말했다.
“오늘 모든 것은 한안의 잘못으로 여러분들께서 불꽃놀이의 흥취를 즐기시는 데 폐를 끼쳤습니다. 가문에 일이 있으니 한안은 먼저 가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급람.”
한안은 소매 속에서 은표를 꺼내 급람에게 건넸다.
“망강루에서 여러분께 좋은 차를 추가로 올리게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그녀가 어린 나이임에도 도리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오늘 이낭에게 그처럼 업신여김을 당하고 부친의 냉대를 받았는데도 여전히 침착하니 대갓집 규수라도 갖추기 어려운 기개가 있었다. 일부 부인들은 한안의 모습을 가늠해 보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은 청순하고 온화하며 부드러웠고 총기도 잃지 않았다. 마치 그림 속의 관음동녀(觀音童女: 관세음을 모시는 어린 여자아이) 같았다. 보자마자 복이 있는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이 여자아이는 몇 살을 더 먹으면 경성에서 드문 미인이 될 것이었다.
한안은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나왔다. 그러나 망강루 아래에는 장부의 마차는 없었다. 장한명은 곁에 서서 분노해 마지않았다.
“어찌 누님께 그처럼 대할 수 있습니까! 마차까지 남기지 않다니요. 어찌 우리를 여기에 내버려 두고 떠날 수 있죠?”
한안은 그를 제지하고 웃으며 말했다.
“부친께서 막 아들을 얻으셨어. 부중에는 아마 곧 희소식이 있을 테니, 우리를 고려할 여력이 없겠지. 너도 더 말할 필요 없다. 다시 마차를 찾으면 그만이야.”
장한명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누님, 오늘 산적 일, 저는 어째 이상하다 생각됩니다.”
한안은 웃었다.
“이상할 게 뭐 있어? 장어산의 운이 좋지 않은 거지. 주씨가 너를 때린 거, 아프니?”
장한명은 고개를 숙였다.
“안 아파요. 하지만 그녀가 누님을 모독했으니 가증스러워요.”
한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 잘못이야. 너까지 연루시켰어.”
“누님, 저는 갈수록 누님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장한명이 돌연 말했다.
한안은 장한명의 표정에서 감출 수 없는 깊은 낙담을 보고 말했다.
“너는 그저 내가 너의 누나라는 것만 알고 있으면 돼. 이 세상에서 너와 나 두 사람이 서로 굳게 의지하며 살아가면 그뿐이야.”
급람이 마차를 찾아서 돌아왔다. 마부는 나이가 들고 무던하며 착실한 사내였다. 장한명이 올라가 앉았다. 한안은 마차에 막 오르려다가 순간 놀라 당황했다.
밤 풍경을 사이에 두고 망강루의 5층에 옅은 안개가 어른거리는데 그중 늘씬한 신영 하나가 군계일학처럼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신영은 조금도 낯설지 않았다. 이렇게 먼 거리를 사이에 두고도 겨울철 눈처럼 한기와 매서운 추위를 느낄 수 있을 듯했다.
부운석, 그가 어떻게 여기에 있을 수 있지?
한안은 의아했다. 시야에 언뜻 자줏빛 옷의 여자 하나가 보였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냥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는 한안이 얼마 전에 본 적이 있었다. 바로 성동에서 젊은 사내종과 이야기하던 그 미모의 여자였다!
한안은 곧장 그쪽을 응시했다. 저 여자의 말 속에 ‘7전하’가 언급되었으니,혹시 7황자의 사람이 아닐까? 만약 7황자의 사람이 부운석의 신변에 있다면 또 무엇을 할 것인가? 부운석이 위험하다. 여러 번 되풀이 하는 것은 겁나지 않으나 무심코 신경 쓰지 않아 놓친 일이 변수가 되는 것은 두려우니 무슨 일이든 반드시 신중해야 했다.
한안은 조금 망설이다가 바로 결심을 내리고 장한명에게 말했다.
“너와 급람은 먼저 돌아가라. 주홍, 너는 나를 따라라.”
급람과 장한명은 모두 멍해졌다. 장한명이 다급히 말했다.
“누님 어디 가십니까?”
한안은 그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처리할 일이 좀 있구나. 무사할 것이니 걱정 말고. 어서 가거라.”
한안은 말을 마치고 마부에게 길을 나설 것을 재촉했다. 장한명은 더 말하고 싶었으나 한안은 이미 몸을 돌려서 가버렸다.
주홍은 아무 말도 없이 한안의 뒤를 따랐다. 한안이 또 망강루에 들어가려는 것을 보고 머뭇거렸다.
“소저…….”
한안은 엄숙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주홍, 망각루에 들어가서 좀 살펴 보거라.”
주홍은 한안이 신중한 것을 보고 따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미 한안의 모습을 본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는 후문으로 들어갔다. 가는 길에 마음속으로 여전히 생각하였다. 부운석과는 사실대로 말하자면 몇 번 본 것에 불과하며 무슨 특별한 관계라고 할 정도는 아니다. 다만……. 다만 그는 자신에게 몇 차례 도움을 주었다. 하물며 7황자와 대적하는 데 있어 그는 중요한 세력이다. 뜻밖의 변고가 생기면 그녀의 입장에서도 좋지 않았다.
*
망강루의 5층 별실에는 몇 명 남자가 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병풍 뒤에 한 여자가 공후를 뜯고 있었는데 그 소리가 듣기 좋았다. 또 다른 자줏빛 옷의 여자는 음악 소리에 따라 나는 듯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녀는 비할 데 없이 아름답게 생겼고 춤추는 자태도 날렵한 것이 속세를 벗어난 듯한 맛이 있었다. 미인을 무수히 겪은 강옥루도 찬탄하며 감상하는 표정을 드러냈다. 그 여자의 찡그림 한 번, 웃음 한 번이 남자의 모든 욕정을 자아냈다. 허리를 흔드는 사이에 눈빛에 정을 담뿍 머금고 소심한 듯 부운석을 스치고 갔다. 여느 사내였으면 그 맑고 투명하며 고운 눈매에 뼈가 반쯤 녹아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추파를 받은 주인공은 상대방을 똑바로 보지도 않았다. 눈빛은 물결 하나 없이 냉담했다. 부운석은 술잔을 감상하며 나른하게 연탑(軟塌: 좁고 길며 낮은 침대형 의자)에 기대어 있었다.
“이봐.”
혁련욱이 침묵을 깨뜨렸다.
“강옥루의 부귀루를 놔두고 무슨 망강루에 와. 여기 경치 보는 데는 부귀루보다 많이 떨어져. 운석, 너 뭐 하러 여기 왔어?”
부운석은 그의 질문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강옥루가 풋 하고 웃음소리를 내고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느긋하게 말했다.
“왕야께서 연극를 보러 오신 게 아닌가? 방금 전 그 공연은 부귀루에는 없지.”
“연극를 보러 왔다고?”
혁련욱이 의심스레 그를 한 번 보았다.
“무슨 연극?”
강옥루는 잠시 주저했다.
“장씨 집안의 4소저가 호랑이 아가리에서 벗어났는데 도리어 모해를 입었다고 자신을 위해 억울함을 깨끗이 씻어달라고 남에게 청하는 연기를 펼쳤지. 훌륭해! 훌륭해!”
강옥루는 접선을 흔들며 부운석을 흘겨보았다.
“왕야, 말해 봐. 그래 안 그래?”
부운석은 담담하게 그를 한 번 보고 입술을 움직였다.
“연극 보는 걸 좋아한다니. 극단에 들어가도 좋겠군.”
강옥루는 즉시 입을 닫았다. 혁련욱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고는 입을 열었다.
“야, 그 장 4소저는 정말 대단해. 운석, 말해 봐. 우리가 조금 전에 사하탄에서 본 그 장면. 그것도 그녀가 꾸민 계획의 일부분일까?”
부운석은 말이 없었지만 입가에 엷은 웃음기가 배어 나왔다. 방금 전 그들은 은밀한 곳에 숨어들어 2층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눈에 담았다. 한안의 행동은 그들의 예상을 벗어났지만 또 그들의 예상 안에 있기도 했다. 그 어린 아가씨는 선견지명이 있는 것처럼 거꾸로 상대방에게 덫을 놓았다. 오늘 연극에서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감정을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힘들이지 않고 여유 있게 주씨의 괴롭힘에 대처했고 대범하게 응대하여 결국은 주씨에게 큰 손해를 입혔다.
그녀는 마치 사전에 미리 준비한 대본을 가지고 공연을 펼치는 것 같았다. 무대 아래의 관객이 연극에 몰입할 때, 그녀는 구경꾼처럼 차가운 눈으로 마주 보았다.
“정말로 평범한 아가씨 같진 않아.”
혁련욱이 뒤이어 감탄했다.
“이런 계략은 다른 이들은 세울 수 없을 거야.”
그 무희는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한층 더 격렬해지는 공후 소리에 따라 춤을 추었다. 춤추는 자태도 한층 더 현란해져 갔다. 멀리서 보노라면 마치 만개한 자줏빛 모란 같았다. 무희는 춤을 추며 고의인 듯 아닌 듯 부운석을 향해 접근했다.
그녀의 춤추는 발걸음이 부운석의 몸 앞에 다다랐을 때, 바깥의 젊은 사내종이 고하였다.
“왕야, 한 낭자가 왕야를 뵙고자 합니다.”
그 무희의 팔을 뻗치는 동작이 굳어졌다. 부운석의 눈빛이 반짝였다.
“들어오라 해라.”
혁련욱이 음흉하게 놀리면서 웃으며 말했다.
“뉘 집 낭자가 우리 왕야를 찾아왔을까?”
그 낭자가 방에 들어온 후 모두가 살짝 멍해졌다. 이 낭자는 그들 세 사람이 모두 아는, 장한안의 측근 여종 주홍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너지?”
혁련욱이 가장 먼저 깜짝 놀라 외쳤다.
주홍은 눈빛이 반짝이더니 돌연 무릎을 꿇고 자줏빛 옷 무희의 다리를 끌어안고 큰 소리로 소리 내어 울었다.
“소저, 흑흑흑, 소저, 홍아가 마침내 소저를 찾았습니다. 소저께서 이 소야에게 시집가고 싶지 않으셨다면 그걸로 된 거예요. 노야께서 소저께 억지로 강요하실 리 없어요. 그런데 소저께서 어찌 이런 곳에 계실 수 있어요. 스스로 신분을 낮추시다니요. 소저, 홍아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요.”
무희도 이런 일이 있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 낯선 여종이 와서 자신의 허벅지를 끌어안고는 울면서 하소연하다니. 그녀는 예상치 못한 일에 심장이 죄어들었다. 소문에 대해 웃으며 이야기하던 세 사람이 똑같이 얼굴빛이 싸늘해졌고, 의미심장하게 무희를 보고 있었다.
자줏빛 옷의 무희는 잠시 당황하더니 즉각 대답했다.
“사람을 잘못 보았어요.”
주홍은 끝까지 귀찮게 매달려서 울면서 떠들어댔다.
“소저, 저는 소저의 괴로움을 압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가지 않으면 안 돼요. 노야께서 애태우고 계세요. 부인께서는 종일 눈물로 지새우고 계시고요…….”
주홍은 본래 신중하고 침착한 성격으로 평소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이 연기는 어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연스럽기까지 했다. 급람이 자리에 있었다면 분명 놀라서 눈알이 튀어나왔을 것이었다.
무희는 여종이 잡아당겨도 떨어지지 않자 분노하고 답답해하며 말했다.
“나는 너희 집 소저가 아니야. 도대체 무얼 하고 싶은 게냐?”
무희는 고개를 돌려 부운석을 보고는 눈 속에 눈물을 담뿍 담았다.
“왕야, 저를 구해주세요!”
부운석의 냉담한 눈빛이 그녀를 향했다. 무희는 온몸에 한기가 이는 것을 느꼈다. 분명 둘도 없을 수려한 용모이건만 살을 엘 듯 차가운 기세는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 먹빛 같은 깊은 눈동자 앞에서는 마음속 계획을 전부 감추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발을 움직여 주홍의 복부를 걷어찼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마치 가볍게 민 것처럼 보였으나 무희가 있는 힘껏 찬 탓에 주홍의 손이 풀어지면서 배를 감싸고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어렵게 눈을 들었을 때, 무희는 이미 부운석의 품속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왕야!”
그녀의 얼굴 위는 눈물자국이 점점이 두드러지게 남아 있었고 몸은 부드러웠다. 설령 그녀에게 의심을 품고 있다 해도, 남자라면 눈물을 흘리는 가련한 모습의 미인을 보고 마음이 약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운석은 그저 술잔만 응시하고 있었다.
무희가 부운석에 거의 접근한 찰나, 소매에서 섬뜩하게 차가운 빛이 나타나더니 은빛 찬란한 비수 하나가 칼집에서 뽑혀 곧장 상대방의 심장을 향했다. 그녀의 표정은 흉악했고 사람을 해치는 악귀 같았다. 부운석은 날선 비수를 보고는 미간조차 움직이지 않은 채 술잔을 잡은 손가락에 살짝 힘을 주어 백옥 술잔을 깨부쉈다. 그 순간 술잔의 파편이 꽃잎처럼 흩어졌다. 곧이어 뼈를 파고드는 통증이 무희의 손목에서부터 온몸으로 번져나갔다. 탕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작은 옥 조각이 비수를 쳐서 떨어뜨렸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놀라 말했다.
“당신…….”
수려하고 아름답기만 한 이 남자가 이렇게 자신의 암살을 쉽게 막아내다니. 심지어 상대방은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전력을 다하여 맞서지도 않았다.
그녀가 한 걸음 움직이기도 전에 창밖에서 폭발음이 크게 들려왔다. 탁자와 의자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 부인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끊임없이 귓속으로 날아들었다. 잇달아 등골이 서늘해지면서 뜻밖에 복면을 한 흑의 사내 십여 명이 창을 깨고 들어왔다. 홱 하는 소리와 함께 허리에 찬 칼을 빼 들고서는 이유 불문하고 공격해 왔다.
부운석의 눈빛이 차가워지며 연탑에서 일어나 앉았다. 흑의를 입은 사내 한 명이 그의 등을 향해 도를 휘둘렀다가 일 초 뒤 자신의 손에 감각이 없어졌음을 알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도를 잡고 있던 자신의 오른손이 이미 잘려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좌중 어디에도 부운석의 그림자는 없었다. 하얀 매화를 수놓은 옅은 색 비단과 대단히 불길한 기운을 띤 맑고 차가운 목소리만 남이 있었다.
“뒤처리 잘 하거라.”
한안은 이웃한 방에서 거대한 화병 뒤에 숨어 감히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방금 전 그녀는 주홍에게 부운석의 방에 들어가라고 시키고 이 방 안에서 기다렸다. 이 방은 바깥방과 안방으로 나뉘어 있었다. 안방은 손님들이 술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며 바깥방은 병풍 하나를 사이에 두고서 여종이 밖에서 분부를 기다리며 머무는 곳이었다. 안방의 손님들은 시중들 여종을 두지 않았기에 한안은 다른 사람의 눈에 띄기 싫어 바깥방에 숨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방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대청 안도 혼란스러워졌다. 이젠 나가지도 못하고 들어갈 수도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사람 키 반 정도 높이의 화병 뒤에 숨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호흡은 가볍고 느렸지만 심장은 초조하기 그지없었다. 지금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주홍은 별일 없을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한안은 더욱 초조해졌다. 쓸데없는 일에 참견한 자신에게 욕을 퍼부었다. 7황자가 부운석에게 무슨 불리한 짓을 하는 걸까 걱정하지만 않았어도. 자신이 구태여 속수무책으로 여기에 달려 들어올 필요가 있었을까. 지금 자신은 꼼짝없이 갇힌 신세였고, 주홍마저 사지에 들이밀어 놓았다.
바로 이때, 안방에서 여자가 흐느껴 울며 용서를 구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갓난아기가 목 놓아 우는 소리가 뒤를 따랐다. 한안은 심장이 싸늘해졌다. 뒤이어 긴 칼이 피와 살을 찢어서 가르고 찔러 들어가는 소리가 났다. 갓난아기의 목 놓아 우는 소리와 부인의 울부짖음도 돌연 뚝 끊겼다. 한안의 심장은 천천히 가라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요한 방 안에서 가볍고 느린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한안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화병 뒤에 숨은 몸이 살짝 떨렸다. 그러나 내색 않고 자신의 허리춤에 있는 매화자(梅花刺: 짧고 작은 철제 무기)를 찾아 더듬었다.
탁, 탁, 탁.
발걸음 소리와 한안의 거리가 갈수록 가까워졌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가득했다. 한안은 호흡을 한층 더 억눌렀다.
그 발걸음 소리가 한안의 곁을 지나가서야 한안은 비로소 가볍게 안도의 숨을 쉬었다. 다행히도 화를 면했다. 그러나 호흡을 미처 고르기도 전에 몸 옆에서 한기가 생겨나며 얼음처럼 싸늘한 찬바람이 그녀를 향해 엄습해 왔다.
큰일 났다. 흑의 사내는 무공을 익힌 자이니 청력이 남을 능가할 터이니 자신이 방금 전에 경솔하게 토해낸 숨을 못 들을 리 없었다. 경솔하게 내 쉰 숨이 목숨을 잃는 재앙을 불러오다니. 오늘 죽을 때 죽더라도 이 사람과 같이 죽고 말리라. 한안은 전광석화처럼 맹렬하게 허리춤의 매화자를 뽑아내어 있는 힘을 다해 그 사람을 향해 찌르려 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싸늘하고 차가운 냉풍은 머리 꼭대기에서 멈추었다. 서늘한 손 하나가 가볍게 자신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한안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들었고 검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수려한 얼굴은 마치 신선 같았다. 그는 눈처럼 흰 여우 모피 옷을 걸치고 투명하게 빛나는 장검을 쥐고서 담담하게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바로 부운석이었다.
한안은 정신을 차리고서야 비로소 자신이 상대방을 오래도록 응시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드물게 말을 더듬었다.
“와, 왕야.”
부운석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매화자를 쳐다보았다. 한안은 얼굴을 붉히며 서둘러 손을 등 뒤로 숨기고 허둥지둥 말했다.
“왕야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가자.”
부운석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
“주홍은…….”
한안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의 표정을 관찰했다.
“목암과 있다.”
부운석은 이미 한안을 등지고 방을 걸어 나가고 있었다.
한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주홍이 걱정되었으나 부운석의 말에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 무슨 상황인거지? 자신이 구하려던 사람이 도리어 자신을 구했으니 일이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한안이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부운석은 그녀가 따라오지 않는 것을 알고는 고개를 돌려 한안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예 그녀의 옆으로 걸어가 한 손으로 그녀를 안고는 경공을 펼쳐 망강루 밖으로 날아갔다.
한안은 속으로 부운석에게 매우 심하게 욕을 퍼부었다. 부운석에게 병아리처럼 들려서 날아가다니 정말이지 환생한 후로 가장 재수 없는 일을 만난 셈이었다. 그녀의 몸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는데 정작 부운석은 부끄럽지도 않은지 자기 눈앞에 서서 팔짱을 끼고 침착한 모습이었다.
마침내, 한안이 입을 열었다.
“저기요, 저를 여기에 뭐하러 데려오신 거죠?”
시끌벅적한 번화가 곳곳에서 꽃등이 번쩍거렸다. 젊은 남녀들이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붐볐다. 북적거리고 흥청거리는 군중 가운데, 때때로 준수한 공자들과 청순한 소저들이 시선을 마주치며 웃었고 주위 사람들을 놀리며 떠들썩하게 굴었다.
“꽃등 감상.”
부운석은 나직한 목소리로 몇 글자를 뱉어낸 후, 뒷짐을 지고 한안의 옆에서 걸었다. 그의 자태와 용모가 출중하여 순식간에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한안은 난감해하며 말했다.
“저는 집에 돌아가야 해요.”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지.”
부운석은 태연자약했다. 한안의 분노는 안중에도 두지 않는 듯했다. 한안은 표정을 가다듬었다. 어째서인지 알 수 없지만 부운석을 대하고 있으면 자신의 감정을 무심코 드러내게 된다. 그녀의 입장에서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오늘 일,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죠. 그렇죠?”
오늘 부운석은 조금의 상처도 입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한가로이 자신을 구해줄 여유까지 있었다. 그가 자신을 어떻게 발견했는가 하는 것은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
부운석은 시원스레 답했다. 한안은 그를 한 번 곁눈질하고 속으로 탄식했다. 젊은 나이에 조정과 재야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가 어찌 이런 수완이 없겠는가? 오늘의 일은 설령 한안이 없었더라도 그는 여유롭게 처리했을 것이다. 관심이 지나쳐서 도리어 쓸데없는 짓을 했구나.
부운석의 냉담한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너는 어떻게 오늘의 일을 알았느냐?”
한안은 주홍의 출현에 대해 해명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예전에 그 자줏빛 옷의 무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녀와 곁에 있는 사람의 대화를 들었는데…… 긴박하다 보니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못하였습니다. 왕야께 폐가 되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그녀는 사실대로 밝히지 않았고 부운석도 추궁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한 번 흘끗 보았을 뿐이다.
“고맙다.”
한안은 묵묵히 있다가 말했다.
“송구하여 감당할 수 없습니다. 왕야께서 여러 차례 구해주셨는데, 소녀는 갚을 길이 없습니다. 오늘은 손을 드는 정도의 사소한 일에 불과하고 하물며 왕야께서 또 소녀의 생명을 구해주셨으니 왕야께 하늘같이 큰 은혜를 빚졌다 할 것입니다.”
“서로 빚진 게 없으면 싶은가?”
부운석이 반문했다. 한안은 깜짝 놀랐다. 부운석이 높은 곳에서 굽어보는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며 있는 듯 없는 듯 놀리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세상에 본래 거저 주어지는 은혜란 없는 법이지요. 남에게 은혜를 빚지면 일평생 남에게 매이는 것인데 어찌 유쾌하다 할 수 있겠어요.”
부운석의 발걸음이 멈칫하더니 생각에 잠긴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눈빛은 달라지지 않았는데 기질은 적지 않게 성장했군.”
“이전부터 저를 알고 계셨어요?”
부운석은 말없이 갑자기 허리를 구부렸다. 한안은 여리고 자가서 그의 가슴께에 닿을 정도였다. 그가 자신의 여우모피 옷을 푸는 것이 보였다. 한안이 아직도 사태 파악을 하고 있는 사이, 어깨에 따뜻함이 느껴졌다. 그의 체온이 아직 배어있는 여우모피 옷이 자신의 몸 위에 걸쳐져 있었다. 부운석은 늘씬한 손가락으로 여우모피 옷 앞부분의 끈을 만졌다. 그 백옥 같은 두 손이 붉은색 비단 끈을 휘감고 있으니 한층 더 빛나고 투명하며 매끄러워 보여 최상의 공예품 같았다. 한안의 시선이 그 두 손을 따라 위로 올라가다가 부운석의 얼굴 위에 떨어졌다.
가까이에서 보자 사람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수려하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혁련욱 같은 화려함이 아니라 온화한 부드러움이었다. 냉담하고 살을 엘 듯 차가운 사람이지만 한안을 향하여 몸을 기울이는 동작은 온유했다. 심오해 보이는 눈은 반쯤 가늘게 뜨고 있었고 그 속의 표정은 명확히 알아볼 수 없었다. 얇은 입가는 가볍게 다물려 놀리는 미소를 머금고 있는 듯했다.
그의 두 손이 민첩하게 단단한 나비매듭을 묶었다. 한안이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를 응시하는 것을 보고는 눈으로 웃었다. 한안은 잠시 멈칫하다가 난감해하며 눈을 돌렸다.
“저는 필요 없…….”
“입어라.”
한안의 입에서 나온 말에 개의치 않고 그는 이미 이전의 냉담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한안은 마음속이 복잡했다. 여우모피 옷은 지극히 따뜻했고, 그녀의 마음도 따뜻해져 얼마간 열기가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머리꼭대기에서 폭죽성이 들려왔다. 눈을 들어 보니 밤하늘 가득 찬란한 불꽃이 번쩍거렸다. 바로 섣달그믐에 있는 불꽃놀이 저녁 연회가 시작된 것이다.
그녀는 이처럼 아름답고 화려한 불꽃을 본 적이 없었다. 삶을 되풀이하기 전, 섣달그믐에 자신은 낯선 암실에 웅크리고 있었다. 눈물은 말라붙었고 목은 고통스럽게 쉬어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괴로운 신년을 보냈다. 한안은 고개를 들어 그 불꽃들을 응시했다. 전생의 감당할 수 없이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밀려들어 와 눈앞의 장면과 기억 속의 장면이 서로 교차했다.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속인지 명확하게 분간할 수가 없었다.
부운석은 한안의 곁에 서서 눈을 들어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매년 똑같은 불꽃에 딱히 그의 눈을 끌어당길 만한 것이 없어 무의식중에 곁에 어린 소저를 흘끗 보았다가 당황하고 말았다.
한안은 고개를 젖히고 하늘가의 불꽃을 보고 있었다. 밤 풍경 속의 휘황한 빛이 그녀의 눈 속에 거꾸로 비쳐 마치 봄날 시냇물 위에 떨어진 꽃 같았다. 그는 그녀가 어린 나이임에도 손을 쓸 때면 잔인하고 무정하며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드물게 한안이 나약하게 보일 때가 있었다. 그녀는 하늘가를 응시하고 있었는데 눈빛이 무언가를 갈망하는 듯했다. 눈에 눈물이 가득 차 있었지만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젖히고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있었다.
그 모습이 도리어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는 망강루의 화병 뒤에서 그녀를 발견했을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얇은 담녹색 옷을 입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눈 속에는 당황과 두려움이 있었고 뭔가 확고함도 있었다. 겁을 먹은 동물처럼 몹시 가련해 보였다. 한안은 매화자를 움켜쥐고 송곳니를 감춘 채 움직일 기회만 엿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인내를 알고 생각이 깊어 열두세 살의 소녀라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다시 한안을 보았다. 소녀의 여리고 작은 몸은 넓은 여우모피 옷에 에워싸여 한층 더 연약해 보였다. 그리고 가슴 앞에 드리워진 두 갈래 땋은 머리 덕분인지 앳된 기색이 사라져 영롱하고 온화하며 부드러워 보였다. 만약 그녀의 나이와 맞지 않는 인내와 차가운 메마름을 그냥 넘어간다면…….
“장한안.”
그가 돌연 입을 열었다.
한안은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부운석이 흥미롭게 자신을 응시하는 것이 보였다. 마음 속을 간파당한 것 같아 난감했다. 얼음 같은 현청왕이 왜 자신에게는 이리 자상하게 구는 것일까.
“장사양이 네게 잘 대해주지 않더군.”
질문이 아니라 단정이었다. 한안은 무의식중에 경계하는 표정을 드러냈다가 곧 자조하며 웃었다. 장사양이 그녀에게 잘 대해주지 않는 것은 이미 확연히 드러났는데 부운석에게 간파당한들 또 무슨 상관이랴. 아마 오늘 망강루에서의 일들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도 다 잘 알게 되었을 것이다.
“어느 부친이 자기 딸을 잘 대해주지 않겠습니까?”
부운석은 그녀의 대답에서 그녀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마치 이 일에 대해 지금까지 한 번도 마음에 담은 적이 없었던 것처럼. 한안의 모습이 머릿속에 있는 다른 한 화면과 겹쳐졌다. 기억 속의 여자아이는 눈앞의 모습으로 자라났다. 눈은 여전히 매우 맑고 투명했지만 당시의 밝은 빛을 회복하지는 못했다. 장사양이 그녀를 이렇게 변하게 한 걸까?
그는 잠깐 주저하다가 손을 뻗어 한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머리가 부운석의 손에 덮이자 한안의 몸이 굳어졌다. 부운석은 여동생을 매우 귀애하는 오라비처럼 머리를 쓰다듬고 손을 거두어들이며 담담하게 말했다.
“시간이 늦었다. 너를 부까지 바래다 주마.”
한안은 눈을 크게 떴다.
“주홍…….”
부운석은 잠깐 멈추었다가 입을 열었다.
“목풍.”
“속하, 여기 있습니다.”
돌연 흑의 시위가 튀어나와 한안을 놀라게 했다.
“사람을 데려와라.”
시위의 발끝이 스친다 싶더니 순식간에 사라져 종적도 그림자도 없었다. 한안은 세심히 그를 응시했다.
“오늘 사하탄에서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있었는데 왕야의 사람이었습니까?”
부운석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안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 천천히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럴 거 없다.”
얼마쯤 있었을까, 목풍이 목암과 있던 주홍을 데리고 왔다. 주홍은 그녀를 보자마자 달려와서 걱정스레 그녀의 몸을 훑어보았다.
“소저 아무 일 없으셨던 거죠?”
목풍은 괴이한 표정으로 목암을 응시하고 있었다. 부운석은 한안을 부에 데려다 주라고 분부했고 한안은 몸에 걸치고 있던 여우모피 옷을 벗어 그에게 돌려주었다.
“오늘의 일에 대해 왕야께 감사드립니다…….”
잠깐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만약 이후 한안이 필요하신 일이 있으시면 반드시 모든 힘을 다 기울일 것입니다.”
부운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여우모피 옷을 받았다. 한안의 마차가 멀리 간 후에야 그는 비로소 목암을 보고 말했다.
“어떻게 된 일이냐?”
목암의 오른손에는 눈처럼 흰 손수건이 묶여 있었고 윗면에 점점이 혈흔이 두드러지게 묻어 있었다. 날카로운 무기에 상처를 입은 듯했다. 목풍이 괴이하게 웃었다. 평소에 과묵하여 말수가 적은 목암이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속하가 부주의하였습니다.”
부운석은 더는 아무 말 않고 한가로이 걸어 부귀루로 향했다. 오늘 7황자와의 일을 혁련과 이야기해야 했다. 여우모피 옷에 남은 따뜻한 기운에 방금 전 그 사람이 떠올랐다. 저도 모르게 입가에 가벼운 웃음이 배어났다. 옆에서 보고 있던 목풍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입을 딱 벌렸다.
한안과 주홍이 탄 마차 안.
주홍은 조금 근심스러웠다.
“소저, 현청왕께서 어찌 곳곳에서 우리를 도와주는 걸까요? 소저께서 그분과 전부터 아시던 사이십니까?”
한안은 고개를 저었다. 부운석의 방금 전 그 말을 떠올렸다.
‘기질은 적지 않게 성장했군.’
그의 말을 들으면 이전부터 자신을 알았던 것 같다. 만약 부운석처럼 출중한 사람을 정말로 알았다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잊을 수 없을 터인데 기억 속에 그 사람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부운석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는 정말로 오래된 친구 같았다.
한안도 조금 혼란스러웠다. 그는 실로 치명적일 정도로 신비스러웠다. 그와 적이 되지 않기로 한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친구라 말하기에는 조금 억지스러웠다.
주홍이 말했다.
“미 이낭에게 기쁜 소식이 있으니 주씨는…… 조금 마음을 놓아도 될 것 같습니다.”
한안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 쉽지 않아. 부친이 주씨 편을 드니 미 이낭에게 아들이라는 밑천이 있다 해도 충분하지 않을 거야.”
주홍은 미심쩍었다.
“하지만 조 대인께서 이 일을 철저하게 조사하시겠다고 승낙을 하셨는데…….”
한안은 잠깐 침묵하다가 입가를 끌어당겼다.
“조 대인은 좋은 관리지. 하지만 그것이 그가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야. 주씨를 무너뜨리는 것은 하루아침에는 불가능한 일이야. 내일 너는 바로 저잣거리에 한 번 다녀오너라. 부친께서는 요 몇 년 관운이 순조로워서 아마도 황제의 성지 두 글자를 어떻게 쓰는 것인지도 잊으셨을 게다. 일깨워 드려야겠지.”
주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안은 주홍의 머리가 조금 헝클어진 것을 알아차렸다. 머리카락 위에 은비녀도 보이지 않는 것이 조금 이상하여 물었다.
“네 비녀는 어째서 보이지 않는 것이냐?”
주홍이 드물게 얼굴을 붉히며 자기가 조심치 않아 잃어버렸다고 얼버무렸다. 한안도 마음에 두지 않았다. 마차는 이내 장부의 앞에 도착했고 급람과 유모가 문 입구에서 등롱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한안이 돌아온 것을 보고 얼굴 위에 온통 희색이 번지며 서둘러 앞으로 나와 맞이했다.
한안은 그녀들에게 자신과 부운석의 일에 대해 알리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처리할 일이 있어 조금 늦게 돌아왔다고만 말했다.
한안은 여종을 시켜 장한명 쪽에 자신이 돌아왔다는 것을 알리게 했다. 급람이 앞으로 가까이 와서 자신이 알아온 소식을 고했다. 미 이낭이 부로 돌아오자 장사양은 즉각 의원을 찾아 그녀를 진맥하게 했다. 미 이낭이 아이를 가졌다는 것이 사실이 밝혀진 후, 장사양은 미 이낭의 곁을 지키며 한 걸음도 떨어지지 않았다. 주씨가 가서 장사양을 몇 차례 청했으나 장사양은 성가셔 하며 관부에 가서 해결하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한안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급람은 그녀의 행동이 주씨에 대해 묻는 것임을 알고 서둘러 말했다.
“하인들을 시켜 주 이낭을 지켜보게 했습니다. 주 이낭이 무슨 바보짓을 할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말이죠.”
한안은 칭찬하는 눈으로 그녀를 한 번 보았다.
“아주 잘했구나.”
주씨가 다른 사람과 연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주씨가 산적을 동원해 흉악한 짓을 저지르는 방법을 쓴 이상, 자신이 나섰을 리는 없고 중간에 중개인이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은 응당 부중 사람이 아닐 것이고. 지금쯤 산적이 자신이 엉뚱한 사람을 묶어온 것을 알아차렸다 해도 상대방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을 게다. 그리고 주 이낭은 모든 눈이 뻔히 지켜보는 가운데, 대담하게 중개인과 만날 리 없었다.
“아가씨.”
유모가 생강탕 한 그릇을 받쳐 들고 왔다.
“오늘 추우셨을 테니 일찍 쉬시지요.”
급람은 주씨가 한안을 모해한 일을 유모에게 말했다. 유모는 평정을 찾기는 했지만 여전히 분개하고 있었다.
“만약 아가씨께서 영민하지 않으셨다면……. 그들은 정말 뱀과 전갈같이 악독한 심보를 가졌군요!”
한안은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고 손을 내저으며 생강탕을 조금씩 홀짝였다.
“괜찮아. 내일 우리는 그저 좋은 구경거리를 지켜만 보면 돼. 주 이낭이 이렇게 전심전력으로 일을 꾸몄으니 그녀가 헛수고하게 할 수는 없지.”
평소 일처리가 매우 꼼꼼한 주홍이 멍하니 서 있는 것을 보고 급람이 주홍을 살짝 밀었다.
“멍하니 서서 뭐 하는 거야?”
주홍은 정신을 차리고 한안의 시중을 든 다음 총총히 물러났다.
등잔불을 불어서 끄자 방 안은 순식간에 칠흑같이 어두웠다. 침상에 눕자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망강루에서의 정경이 눈앞에 떠올랐다. 흑의 사내의 칼끝이 자신의 머리를 향해 내리쳐질 때, 두렵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그녀는 한 번 더 생을 살게 되면서 목숨을 귀중히 여기게 되었다. 더구나 아직은 내려놓을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기에 그렇게 죽는 것은 달갑지 않았다.
부운석이 나서서 도와준 것은 그녀의 예상 밖이었다.
어깨 위에 아직도 그의 여우모피 옷의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이 사람은 정말 기이했다. 혹시 그가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닐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이상한 감정이 일었다. 만약 사람을 잘못 본 거라는 것을 알아차리면 현청왕은 그녀를 배려하지 않을 것이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하여 몇 차례 몸을 뒤척였다. 깊은 밤이 되어서야 한안은 비로소 잠에 빠져들었다.
*
이튿날 아침, 한안은 늦게서야 일어났고 머리가 조금 몽롱했다. 세수를 하고 나오니 주홍이 밖에서 돌아와 주씨가 부용원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
한안은 그 말을 듣고 웃었다.
“우리 가서 구경하자꾸나.”
부용원에 도착하자 흰 도자기가 퍽 하고 깨지는 것이 보였다. 주씨는 온유하고 자상한 모습을 날려버리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초췌한 표정, 새빨갛게 달아오른 두 눈을 하고 목이 쉰 채 소리쳤다.
“노야를 뵈어야겠다. 비켜라!”
두 여종이 그녀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중 한 여종은 미 이낭의 여종 교몽이었다.
“이것이 어찌 된 일이냐?”
구경거리를 볼 만큼 보고 나서 한안이 물었다.
주씨가 한안을 보고는 눈빛이 음침해졌다. 그녀가 이를 악무는 것이 보였다.
“4소저.”
한안은 그녀를 보고 웃었다.
“어산 언니는 지금 행방불명인데 이낭은 어째서 이 모양인가요? 만약 돌아와서 이낭이 이처럼 초췌해진 것을 보면 아마도 언니의 마음이 아플 거예요.”
그 말은 주씨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과 같아 순식간에 주씨를 분노케 만들었다.
“입 닥쳐. 모두 너 같은 사생아 때문…….”
짝 하는 소리와 함께 한안은 따귀를 날렸다. 어제 장한명이 맞은 한 대를 다시 그녀에게 돌려준 셈이었다.
“너, 너 감히 나를 때려?”
주씨가 손으로 얼굴을 덮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한안은 빙그레 웃으며 유모 옆에 서서 서두르지도 여유 부리지도 않고 말했다.
“나는 하극상을 저지른 게 아니에요. 장부의 적녀인데 이낭이 날 가리켜 사생아라 호칭하는 건 받아들일 수가 없군요. 만약 적녀조차 사생아라면 어산 언니는 뭐라 불려야 할지 알 수가 없네요. 더구나 미 이낭 뱃속의 아이는 또 무어라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말이죠. 감히 부친을 뭘로 보고 그런 것인지 묻고 싶네요. 당신은 첩실에 불과한데 감히 조정의 명을 받은 관리를 비꼬고 있으니까요. 부친을 대신하여 교훈을 준 것뿐이에요.”
“이, 이런, 불효막심한!”
주씨는 온몸이 떨릴 정도로 화가 났다.
“이낭은 어떻게 그런 말을 하나요? 효라는 글자는 부모에게 쓰는 거예요. 당신은 첩실에 불과하잖아요. 설마 한안이 당신을 어머니의 예로 대우해 주길 원한 건가요? 법도를 어기라고 요구하지 말아요!”
그녀는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하며 입가에 웃음기를 띠었다. 그녀의 표정은 지극히 오만했다. 주씨를 힐끗 보는 눈빛은 온통 경멸에 차 있었다.
“너…….”
주씨는 한안을 상대할 방법이 전혀 없음을 깨달았다. 순간 눈물이 속눈썹을 흠뻑 적셨다. 처량하고 비참한 목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지금 어산이 산적에게 납치되어 생사도 알 수 없는데 4소저는 남의 어려움을 틈타 해를 가할 필요가 있나요? 소저와 어산은 같은 자매인데 지금…….”
말을 하다 보니 눈물이 한층 더 솟구쳐 하마터면 울다가 혼절할 뻔하였다.
한안은 차분하고 느긋하게 그녀를 보며 말했다.
“이낭이 스스로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은 그럴 만하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방 안에 있는 이는 바로 미 이낭이에요. 지금 미 이낭은 부친의 아이, 한안의 남동생을 임신하고 있으니 바로 부 전체의 큰 경사이지요. 주 이낭이 부용원에서 울고불고 하여 미 이낭 뱃속의 아이를 놀라게 하는 것은 고의라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이 말이 끝나자 부용원 안의 안방 문이 열리고 장사양이 걸어 나와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아직도 소란을 피우고 있는 게냐! 미아가 아이를 가져 잘 쉴 필요가 있다는데 어찌 아직도 여기에서 난리를 부리고 있는 것이냐?”
분명 한안의 방금 전 말이 그에게 들린 것이리라.
주씨는 원통했다. 미 이낭과 한안에 대한 증오심이 더욱 깊어졌다. 오늘 아침, 주씨는 여종 하나를 내보내어 밖에 소식을 알아보게 했다. 장어산이 산적에게 납치된 소식은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었다. 일순간 경성 안이 온통 장 2소저가 순결을 잃은 일로 들끓었다.
주씨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윤 지부에게 미리 통지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장한안이라고 명확히 설명했다. 만약 사람이 바뀌었다면 뭔가 수상한 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은폐했을 텐데, 어찌 소문이 새어나갈 수 있을까.
실은 어제 윤 지부는 관청에서 일을 하다가 바깥에서 누군가 북을 치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여종 차림의 하인이어서 주씨가 안배한 사람이라 여기고 지나가는 행인들 앞에서 큰 소리로 자기가 그 여종을 위하여 책임지고 처리하겠노라고 말했다. 그 여종이 입을 여는 순간, 장 2소저가 산적에게 납치되었다고 말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당시 왕래하던 행인이 숱하게 많았고 모든 사람들이 빤히 지켜보는 가운데서 반박할 수가 없어서 바로 부하를 데리고 가서 조사했다. 그리하여 이 일을 널리 퍼뜨린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돼버렸다.
더욱 주씨를 분노케 한 것은 시정에 떠도는 말들이 저마다 다 다르다는 것이었다. 어떤 이는 장어산이 산적에게 납치되자마자 바로 능욕을 당해서 몸이 이미 순결하지 못할 거라 했다. 하룻밤이 더 지나면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처할 거라고도 했다.
장어산을 떠올리자 주씨는 더욱 비통함이 우러나와 한안을 추궁했다.
“성 안에서 떠도는 말 중에 어산이 산적에게 납치될 때 바로 순결을 잃었다고 하더군요. 옷도 다 찢어졌다고 하고 말이죠. 4소저와 어산 두 사람만 산에 올라갔는데 4소저는 어째서 어산이를 모해하려는 건가요?”
장사양은 주씨에 대해 가졌던 불쾌감을 씻고 의심스럽게 한안을 보았다.
“안아, 어떻게 된 일이냐?”
한안은 어제의 일로 다짐한 일이 있었다. 장사양과 표면적인 평화를 더 이상 유지해 나갈 수 없음을 말이다. 주씨가 장한명을 때리는 것을 그가 용인한 순간, 한안은 철저하게 깨달았다. 거짓으로 순종하는 척하느니 차라리 간접적인 방법으로 위협하는 게 나았다. 그래서 거짓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낭은 아마도 잊은 모양이네요. 당시에 한안 외에 시위 열두 명이 있었어요. 한안은 어산 언니에 대해 추호도 악의가 없답니다. 안 그랬다면 어산 언니와 함께 복을 기원하러 산에 올라가지도 않았겠죠. 어산 언니가 실종되고 이낭이 상심하여 한순간 머리가 혼란해진 모양이니 굳이 따지지는 않겠어요. 하지만 그 시위 열두 명은 간단히 용서할 수가 없네요. 부친께서 그들을 중벌에 처해주세요. 그럼 그들의 입에서 진실을 얻어낼 수 있을 거예요.”
주씨는 크게 놀랐다. 그 시위들은 그녀가 단독으로 안배한 이들이었다. 당연히 실수할 리 없었다. 그러나 한안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모든 잘못을 시위들에게 떠밀고 있으니 장사양은 아마도 그들을 징벌할 것이다. 만일 그 시위들의 입이 가벼워 무언가 조금이라도 끌어낸다면 그녀는 끝장이었다. 게다가 지금 여우 년이 애까지 가졌으니 위험을 무릅써서는 안 된다. 그래서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소첩이 우둔하였습니다. 소첩의 상심이 너무나도 컸던 탓입니다, 소첩의 잘못이에요. 4소저와 노야께 무례히 굴었습니다. 그 시위들은 장부의 사람이니 무슨 다른 마음을 먹지 않았을 겁니다. 분명 외부 사람이 와전한 것일 거예요.”
한안은 고개를 흔들었다. 지극히 탐탁지 않다는 모습이었다.
“이낭의 말은 틀렸어요. 설령 그들이 바깥에서 함부로 무슨 말을 하지 않았다 해도 여전히 어산 언니를 잘 보호하지 못한 잘못이 있지요. 응당 그들은 직무태만으로 벌하여야 합니다. 이번에 벌하지 않으면 다른 시위들도 나태해질 거예요. 지금은 밖에서 우연히 산적과 마주친 거지만 이후 부중에 산적이 들어온다면 여기의 시위들은 하나도 가망이 없는 게 아니겠어요? 누가 와서 부친의 안전을 보호하겠어요?”
장사양도 한안의 말이 지극히 맞는 말이라 여겼다. 그리하여 즉시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서 어제 소저를 보호하던 시위들을 묶어 와서 곤장 60대를 엄히 쳐라.”
60대 곤장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었다. 주씨는 당황했다.
“노야, 노야…….”
이 사람들은 그녀가 많은 은자를 풀어서 가까스로 매수한 사람들로 자신의 심복으로 삼으려 했었다. 이제 뿌리까지 뽑히게 된 셈이니 그녀가 어찌 달가우랴!
한안은 앞으로 걸어가 친밀하고 다정하게 그녀를 부축했다.
“이낭, 당황하지 말아요. 노비들은 평소 그들을 뒷받침해주는 사람을 등에 업고 온갖 나쁜 짓을 저지르곤 하죠. 부중의 주인은 안중에도 없이 말이에요. 지금 처벌하면 그들이 사태 파악을 분명하게 할 수 있을 거예요. 어산 언니의 행방을 알 수 없으니 이낭은 우선 공동원으로 돌아가서 쉬어요.”
말을 마치고 주홍에게 분부했다.
“미 이낭에게 주려고 가져온 선물을 다오.”
주홍이 서둘러 앞으로 나와 작고 정교한 옥함을 바쳤다. 한안이 옥함을 열자 안에 있는 것은 바로 매우 윤기가 나는 투명한 옥 불상이었다. 새끼손가락 굵기에 중간에 가느다란 붉은 끈이 묶여 있었다.
한안은 옥함을 장사양에게 넘기고 빙그레 웃었다.
“오늘 부용원에 온 것은 미 이낭에게 이 옥 불상을 주기 위해서였어요. 이 옥 불상은 한안이 사찰에 부탁한 것으로 몸에 지니고 있으면 사람을 평안하게 보호할 수 있다고 합니다. 미 이낭이 안아의 작은 남동생을 회임하였으니 작은 남동생이 평안하게 태어나기를 바라며 옥 불상을 미 이낭에게 주겠어요.”
장사양은 ‘작은 남동생’이라는 말에 유쾌해졌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칭찬했다.
“네가 뜻밖에 신경을 썼구나.”
한안은 주씨를 한 번 흘끗 보았다.
“이낭이 어산 언니를 걱정한다면 불당에 가서 부처께 보우하심을 부탁하는 것이 어떨까요. 부처께서는 모든 것을 눈 안에 담아 보고 계실 것이니 나쁜 사람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예요. 부처께서 가련히 여기셔서 어산 언니가 평안 무탈하게 돌아올지도 모를 일이에요.”
주씨는 한안의 몇 마디 말이 으스스하게 느껴졌다. 마치 무언가를 암시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어쩔 수 없이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4소저의 말이 옳아요.”
한안은 적당한 시기에 물러나기로 했다. 장사양을 향해 물러남을 고하고 기분 좋게 부용원을 나왔다.
부용원을 나오자마자 그녀의 웃는 얼굴은 바로 희미해졌다. 급람은 눈치 빠르게 그녀에게 걱정이 있음을 알아보고 서둘러 물었다.
“소저, 무슨 변고라도 일어난 건가요?”
한안은 고개를 저었다. 조금 혼란스러웠다. 두 번째다. 주씨가 두 번째로 사생아라는 단어를 말했다. 주씨가 제아무리 대담하다 해도 근거 없이 그녀와 장한명의 출신을 함부로 바꾸어 말할 리는 없었다. 바람이 없으면 파도가 일지 않는 법이다. 장사양이 그들을 대하는 태도는 확실히 부친이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 같지가 않았다.
사건의 핵심 열쇠는 잡은 것 같았지만 좀 더 조사를 할지 말지 망설여졌다. 만약 조사해서 장한명이 적자가 아니라면 어찌해야 할까. 그러나 장사양이 기꺼이 다른 사람을 대신해 한명을 기른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자 비로소 그녀가 말했다.
“급람, 네가 가서 이 부중에 어떤 하인이 가장 오래 머물렀는지 좀 알아보아라. 만약 기회가 된다면 그들에게 접근해서 그들과 얘기 좀 나누고.”
급람은 한안의 의중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주씨를 역전해서 얻었던 기쁨은 하나도 남지 않고 사라졌고, 그저 담담한 실망과 낙담만 남았다.
현청왕부.
눈처럼 흰 선지 위의 몇 글자가 두드러지게 묵향을 띠었다. 부운석은 고개를 숙인 채 한 손에 붓을 잡고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둘 다 어떻게 된 거야?”
솔직한 성격인 성뢰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전장에서 길러진 습관 때문인지 벗이 멍하니 있는 것을 이렇게 두고 볼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이렇게 정신이 나가 있는 거야?”
부운석은 손이 멈칫했지만 담담하게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리고는 말머리를 돌렸다.
“서융 쪽은 무슨 움직임이 있어?”
성뢰는 탁자를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여전히 그대로야. 그 꼴사나운 도이목이 나라의 주인이 된 후로 며칠에 한 번씩은 늘 변경 관문의 촌락에서 소란을 피워. 칼이나 창을 맞대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약탈하면서 상대는 하지 않으려고 해. 우리 병사들이 서둘러 가면 즉각 퇴각하니 백성들 고통이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야. 우리도 방법이 전혀 없으니, 정말 골치 아파.”
“그는 영리한 자야.”
부운석이 말했다.
성뢰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너는? 지금 7황자의 세력이 정말 커. 도적 떼에게 네가 실수로 죽임을 당했다고 사람들이 믿게 하려고? 경성 안 귀인들을 죽여서 혼란을 조성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잖아. 다만…….”
성뢰가 고개를 흔들었다.
“7황자가 정말 너를 과소평가했네.”
부운석은 고개를 숙이고 편지지 위에 글자를 썼다.
“7황자가 제멋대로 구는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야.”
성뢰는 음흉하게 놀리듯 웃으며 말했다.
“듣자 하니 어제 또 미인이 영웅을 구했다던데. 내가 노형에게 한 말씀 드리지. 그 어린 아가씨는 금년에 겨우 열둘, 열셋이야. 너는 다른 사람이 늙었다고 싫어할까 두렵지 않아?”
부운석은 성뢰의 말에 개의치 않고 생각을 숨기지도 않았다. 무척이나 굳건하며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떠오르자 표정을 잠시 멈칫했을 뿐이다.
“나와 그녀는 아무 관계도 아니야.”
성뢰는 조금도 믿지 않는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그 말을 누가 믿어. 듣자 하니 오늘 모두가 다 봤다는데. 그렇지, 목암?”
목암이 응답이 없는 것을 보고 의혹이 일어 고개를 돌려 보았다가 그가 손 위의 상처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성뢰는 한눈에 상처를 싸맨 그 손수건이 여자용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놀려댈 마음에 큰 소리로 목암을 향해 말했다.
“목암도 주인을 따라서 마침내 눈이 트인 모양이구나. 하하하, 네가 너의 주인과 마찬가지로 중이 되려나 생각했는데 말이야. 이런 좋은 일이 있구나. 보아하니 현청왕부에 최근 경사가 끊이지 않는 모양이야.”
목암은 깜짝 놀랐다. 지극히 표정 없던 얼굴 위에 홍조가 피어났다. 머릿속에 그 작은 소녀가 결연한 표정으로 비녀를 잡고 자신을 찌르던 모습, 그 후에 또 가볍고 부드럽게 자신을 위해 상처를 싸매주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지금까지 어떤 여자에게도 이처럼 가까이 간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그녀의 모순된 행동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방법이 없었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그 손수건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었다.
부운석은 편지를 다 쓰고는 편지지를 접어 편지봉투에 넣어 성뢰의 품속에 던져 넣었다.
성뢰는 고개를 저으며 감개무량해 했다.
“지금 아직 봄이 되지 않았건만…….”
“꺼져라!”
벼루 하나가 날아왔다.
*
섣달그믐이 지난 후 날씨는 맑았다.
땅 위에 두껍게 쌓인 눈은 아직 녹지 않았다. 해가 산 사이로 떠올라 햇살을 사방에 두루 뿌렸고 이른 새벽 산골짜기의 공기는 맑고 산뜻했으며 쾌적했다.
험준한 낭떠러지 위에는 구름다리가 놓여 있었고, 구름다리를 지나면 뒤쪽으로 초목이 무성하게 우거진 거대한 밀림이 하나 있었다. 흑의 여자 한 명이 장검을 쥐고 관목 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몸 앞에는 몸이 여리고 작은 소녀 셋이 서 있었는데 선두에 있는 이는 바로 한안이었다.
“사부, 약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한안은 공손하게 그녀를 향해 예를 올렸다.
어제의 그 향료와 미약은 모두 그녀가 시정에게서 얻은 것이었다. 사부가 강호인과 관계가 있는 듯하여 한안은 시험 삼아 부탁을 해 보았다. 생각지도 못하게 시정은 매우 호쾌하게 승낙을 했다.
시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매화자는 사용하기 어땠느냐?”
한안은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저었다.
“제자가 우둔하여 서툴렀습니다.”
그녀는 무공의 기초가 전혀 없었다. 시정이 그녀를 위하여 가장 쉬운 매화자를 골랐지만 사용하는 것은 여전히 좀 무리였다. 비록 날마다 매화자를 몸에 지니고 다니며 연습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러서는 여전히 속수무책이었다.
시정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어진 목소리에 차가움이 엉겼다.
“네 몸은 너무 약하다. 무예를 익히기에 적합하지 않아. 그런데 또 몸을 강하게 하고 뼈를 튼튼히 하는 기술은 배우길 원하지 않지. 무학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너는 도대체 무엇을 배우려는 것이냐?”
한안은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저는 사부께 살인을 배우고 싶습니다.”
시정은 그녀가 이렇게 말할 줄은 짐작도 못하여 조금 멍해졌다. 한안은 무공을 배우기 전, 오랜 기간을 필요로 하는 무술은 철저히 거절했다. 그러나 무예는 끈기 있게 계속하는 것을 중시했다. 그녀가 이렇게 조급하게 목적을 달성하려 하는 것은 무학을 익히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은 결코 아닌 것 같았다.
“어째서?”
그녀가 물었다.
한안은 한 차례 탄식했다.
“살인은 그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저는 제 주제를 아주 명확하게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대단한 무공을 배우긴 힘들겠지요. 그저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고 싶을 뿐입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시정을 향해 웃어 보였다.
“무공을 전혀 할 줄 몰라도 살인은 할 수 있겠지요. 그렇지요?”
시정의 표정이 살짝 움직였다.
“너는 암살을 배우고 싶은 것이냐?”
“만약 사부께서 기꺼이 가르쳐 주시겠다면요.”
그녀의 표정은 공손했고 농담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럼 우선 네게 암기 쓰는 법을 가르치겠다.”
시정은 오래도록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한안은 낮은 소리로 감사의 말을 했다.
시정은 좋은 사부였다. 성격은 좀 괴이했지만 한안을 가르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한안은 그녀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기에 헤어질 때 시정에게 말했다.
“사부께서 나중에라도 한안이 필요한 데가 있으시면 언제든지 분부하여 주십시오.”
시정은 이 말을 듣고 입술을 살짝 움직였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했으나 목구멍으로 말을 삼키고 등을 돌린 채 “응” 한마디만 내뱉었다. 그 모습이 급람은 불만이었으나 한안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시정도 비밀이 있는 사람일 터였다.
부에 돌아왔을 때, 장부의 입구에 자줏빛 옷에 칼을 찬 시위들이 늘어서 있었다. 한안은 마음속으로 의혹이 일었다. 칼을 찬 시위 외에, 화려한 가마도 있었다. 귀인이 내방한 듯했다. 외출한 사이에 생각지도 못하게 많은 시위들이 늘어 있었다. 급람이 문 앞으로 걸어가 문 입구의 젊은 사내종 손에 은 조각을 넣어주고 웃으며 물었다.
“오라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그 젊은 사내종은 급람을 아는 이로 손 위의 은자를 어림하며 그들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급람의 귓가에 작은 소리로 말했다.
“위 왕의 사람이야. 2소저가 오늘 위 왕 수하의 사람에게 구해져서 돌아왔어. 지금 위 왕과 노야가 한창 대청에서 말씀 중이셔. 2소저는 정말 운이 좋아.”
급람은 웃어 보이고 한안의 곁으로 돌아가 바로 젊은 사내종의 말을 전부 고했다. 한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위 왕이 온 것은 정말 공교로웠다. 설마 주씨가 위 왕에게 구조를 요청한 걸까? 그러나 주씨한테 그런 능력이 있을 리 없었다. 다만 위 왕이 이렇게 손을 썼으니, 시정 안의 소문은 이제 함부로 날뛸 수 없게 되었다.
“들어가자.”
한안은 생각을 정하고 큰 걸음으로 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대청 안, 위 왕은 장사양과 좌석 양쪽에 앉아 있었다. 장사양의 얼굴에는 감격이 가득했다.
“어산의 일은 위 대인께서 손을 쓰시어 도와주신 덕분이니 장가는 실로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위 왕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대와 나 두 사람이 좋은 벗인 이상, 또 감사의 말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다만 내가 보기에 부중 2소저가 많이 놀란 듯하던데 반드시 잘 쉬어야 할 걸세.”
장사양은 고개를 끄덕여 동감을 표시했다. 눈을 돌리자 한안이 급람, 주홍을 데리고 걸어 들어와, 문 입구에 서서 그를 향해 예를 올리는 것이 보였다.
“한안이 부친을 뵙습니다.”
장사양이 평소에 그녀를 대하는 태도는 웃음기 없이 엄격했다. 그러나 오늘은 전에 없이 그녀에게 자애롭게 웃으며 말했다.
“안아가 돌아왔구나. 어서 위 왕과 세자께 예를 올려라.”
한안은 대청으로 들어가자마자 위여풍을 보았다. 한안은 장사양의 태도를 보니 더욱 의심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얼굴에 웃음기를 띠고 두 사람을 향해 절을 하여 예를 표했다.
“소녀, 위 왕 대인, 위 세자를 뵙습니다.”
위 왕은 하하 큰 소리로 웃었다.
“안아는 너무 예를 차릴 필요 없다. 나와 네 부친은 좋은 벗이고 너와 여풍은 같은 연배이니라. 오래 못 보았더니 안아가 이처럼 큰 아가씨로 장성하였구나.”
말을 마치고 자못 회상에 잠겨 입을 열었다.
“네가 태어난 지 한 달이 되어 축하하기 위해 만월주를 마시던 때가 기억나는구나. 내가 그때 너를 안아본 적이 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십여 년이 지났구나. 하하하, 세월이 참 속절없어.”
한안은 그가 일부러 장부와의 관계가 친근한 척 굴고 있음을 알아들었다. 심지어 본왕이라는 표현 대신 ‘나’라는 단어를 썼다. 또 이름 대신 ‘안아’라는 애칭을 씀으로써 자신과 친근한 척하는 것을 듣고 경멸감이 들었다.
위 왕은 한안이 꿈쩍도 않는 모습을 보고는 위여풍을 보았다.
“사실 이번에 산적이 납치한 귀부의 2소저는 여풍이 구한 것이오. 당시 나는 가마 안에 있어서 바깥의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는데 여풍이 마침 누군가 구조를 요청하는 소리를 들었다오. 처음에는 어느 집 소저인가 여겼는데 나중에 그 아가씨 입에서 귀부의 2소저라고 들어 알게 됐소. 정말 우연의 일치가 아니겠소.”
한안은 웃으며 천진한 표정으로 말했다.
“보아 하니 그 산적들이 언니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하루가 온전히 지났는데도 어산 언니에게 여전히 구조를 요청할 힘이 있었던 걸 보니 말입니다.”
위 왕의 얼굴에 거북한 빛이 떠오르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위여풍이 입을 열었다.
“모두 우연의 일치일 뿐이오. 실은 나도 의혹이 들었소. 2소저는 대단히 유약한데 산적에게 납치를 당하게 되었으니 납치자의 심사가 정말로 악랄하오이다.”
이 말은 그녀의 심사가 악랄하다고 말하는 것인가? 한안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속으로 가소롭다 느꼈다. 한안은 소리 내어 웃었다.
“반드시 그 산적을 잡아야겠지요. 번거로우시겠지만 세자께서 그 산적들을 관부에 보내어 잘 고문하게 해주십시오. 어산 언니를 위해 원한을 풀어주어야 합니다.”
위여풍의 비꼬는 말은 한안에게 무용지물이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한안은 빙그레 웃으며 방 가운데의 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자신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위여풍의 옥처럼 부드럽고 윤기 나는 얼굴에 불쾌감이 스쳤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안은 눈빛을 그에게 둔 적이 없었다. 그가 언제 남에게 이처럼 무시당한 적이 있던가. 더구나 어제는 사람들 앞에서 그를 비웃었다. 심지어 한안의 눈 속에서 그에 대한 혐오를 볼 수 있었다.
이것은 그의 자존심에 지대한 모욕이었다. 무시를 당할수록 그는 한안이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 특별한 어린 아가씨의 안중에는 확실히 자신이 없었다.
위 왕은 늙은 여우라 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한눈에 한안과 위여풍 사이에 숨은 기류가 흐르는 것을 간파하고 웃는 얼굴이 한층 더 깊어졌다.
“2소저의 일은 여풍이 반드시 장부에 소명을 해줄 것이오. 모두 자기 사람이니까 말이지.”
한안은 눈살을 찌푸리고 무언가 그녀가 알지 못하는 일이 있음을 확신했다. 장사양이 애매하게 웃는 것을 보고 한 가지 생각이 점점 형태를 갖추어갔다.
장사양이 말했다.
“오늘 위 왕 대인께서 특별히 어산을 바래다주러 오셨으니, 괜찮으시면 함께 오찬을 하시지요.”
생각지도 못하게 위 왕은 바로 승낙했다. 위 왕은 조정의 대신이니 장사양 같은 3품 관원의 호감을 살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오늘 보니 위 왕이 장사양의 비위를 맞추고 있음이 분명하게 드러나 보였다. 설마, 장사양 수중에 무슨 중요한 패라도 있는 걸까?
갈피를 잡을 수 없어 한안은 물러남을 고하고 청추원으로 돌아왔다.
유모는 한안의 지시를 받아 미 이낭에게 어린아이용 장난감을 건네고 온 참이었다. 듣자 하니 주씨는 미 이낭에게 꽤 많은 보양식품을 보냈다 한다. 유모가 말했다.
“주씨는 아직도 정말 과감하네요. 하지만 미 이낭은 주씨가 보낸 음식을 먹지 않을 겝니다.”
한안은 손 가는 대로 수틀을 집어서 보았다.
“병은 입으로 들어가고, 화는 입에서 나오는 법이지. 그녀가 음식을 보낸 이상 진정한 목적은 분명 음식에 있지 않을 거야.”
“그럼…… 아가씨를 모함하려는 걸까요?”
유모는 몹시 걱정스러웠다.
한안은 웃었다.
“뭘 두려워 해? 미 이낭은 정말로 아이를 가진 게 아닌걸. 당분간 호랑이 두 마리가 싸우는 걸 앉아서 보고만 있으면 돼. 나는 주씨가 다음 한 수를 어디에 놓을지 보고 싶은걸. 분명 곧 구원병이 올 거야.”
위 왕은 말했던 대로 장부에 남아서 식사를 했다. 요리가 풍성하고 정교하며 아름답다고 위 왕은 칭찬해 마지않았다. 장사양은 그를 위해 요리를 집어주고 있던 주씨를 만족스럽게 쳐다보았다.
“네가 고생했다. 앉아서 함께 식사하자.”
주씨는 장사양 곁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위 왕 대인을 위해 요리를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은 소첩의 영광입니다. 위 왕 대인께서 어산을 구해주셨으니 바로 소첩과 어산의 생명의 은인일진대 요리 한 끼가 대수겠습니까.”
위 왕은 크게 웃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여풍의 공로이네.”
주씨는 기회를 잡아 장어산을 잡아당겼다.
“아직도 위 세자께 감사드리지 않고 무얼 하느냐.”
장어산은 흰색의 소박한 치마를 입었는데 치맛자락에 홍색 명주실로 월계화만이 수 놓여 있을 뿐이었다. 평소의 아름답고 화려한 빛이 바래어 얼굴빛이 창백했다. 머리카락은 느슨하게 틀어 올려 쪽을 지어서 작은 얼굴이 더욱 뚜렷하게 두드러졌다. 어쩌면 산적이 납치한 일이 그녀에게 적지 않은 고초를 겪게 했을 것이다. 장어산의 목소리는 매우 가냘프게 변해 있었다.
“세자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물기 어린 반짝이는 눈이 위여풍을 보았다.
위여풍은 장어산의 눈빛을 마주하고 입가에 부드럽고 기품 있는 미소를 지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