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안은 바로 떠나려했으나 혁련욱 옆에 서 있던 사람이 담담하게 말하는 것이 들렸다.
“네 성은 무엇이냐?”
한안은 참담했다. 무언가 두려워하면 그게 스스로 오는 법이라도 있던가. 저 피하느니만 못한 현청왕은 궁중 연회에 가만히 있지 않고 무슨 구경거리를 보려고 여기까지 온 것인가. 또……. 그녀가 태자, 바로 그의 조카를 협박하는 것을 들었을 것이다. 전해 들은 말로는 이 현청왕이 둘도 없을 정도로 용맹스럽다던데 자기 조카를 위한 화풀이로 한 대 내리쳐 죽이는 것은 아닐지?
세상에 또 누가 그녀보다 가련할까?
급람은 자기 집 소저가 줄곧 말도 없이 표정이 흔들리며 서 있는 것을 보고 서둘러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당겨 주의를 환기시켰다. 앞의 두 공자가 어떤 신분인지는 모르지만 대단히 눈부시게 아름다운 사람이나, 흰옷의 사람이나, 둘 다 여자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건 확실했다.
한안은 정신을 차리고 건성으로 말했다.
“규방 여자의 이름은 외간 남자에게 누설할 수 없습니다. 두 분 공자께서 별일이 없으시다면 소녀가 먼저 갈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안 돼.”
혁련욱이 바로 입을 열어 거절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이 아이를 아주 오래 찾았다. 이제까지 감히 그를 농락한 사람은 없었다. 오늘 우연히 마주쳤으니 어떻게든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때 현청왕이 말했다.
“좋다.”
한안은 믿을 수가 없어 고개를 들었다. 그녀를 놓아주겠다는 건가?
등불 아래 보이는 수려하고 냉담한 얼굴은 무표정했고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한안은 물러가겠노라는 말조차 미처 하지 않고 급람을 잡고 줄행랑을 쳤다.
한안이 토끼보다 빠르게 사라져가는 뒷모습을 보며 혁련욱이 투덜댔다.
“운석! 너 어째서 그녀를 놓아준 거야. 내가 얼마나 오래 찾았는데…….”
“그녀는 궁중 연회에 온 사람이야.”
부운석은 그의 투정을 잘랐다.
“목암.”
몸 뒤에서 돌연 흑의 남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속하, 여기 있습니다!”
“태자를 따라가라. 그가 무슨 실수 하지 않게 해.”
“네!”
신영이 번뜩하더니 조금 전의 자리가 텅 비었다.
“너의 비밀 호위 정말 괜찮다. 언제 나한테 한 번 빌려 주지?”
혁련욱이 다른 흑의 남자를 보며 놀리듯 말했다.
목풍은 몸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돌렸다. 그는 결코 여자보다 더 예쁘고 수다스러운 주인을 따르고 싶지 않았다. 만약 혁련욱의 비밀 호위가 되면 머지않아 귀에 못이 박힐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지금 주인은 말이 너무 적으니 두 사람을 합쳐놓으면 딱 좋겠다.
아무튼 목풍은 조금 전의 일이 신기했다. 주인이 뜻밖에 먼저 나서서 그 낭자의 성이 무엇인지 물으시다니. 주인은 지금까지 직무 이외의 일에 말을 낭비하신 적이 없으셨다. 궁중 연회 도중에 자리를 떠난 태자가 무슨 실수를 저지를 것을 방지하기 위해 따라왔다가 이런 장면을 목격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목풍은 혀를 내둘렀다. 그 어린 아가씨는 정말로 사람을 놀라게 했다. 장위에게 한 대를 되갚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태자까지 협박했다. 어린 아가씨가 한 행동에는 미인계, 심리전, 이간계 등등 성 장군이 자기 집 주인에게 말한 적이 있는 계책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정말로 대단했다. 주인께서 그 아가씨에게 마음이 있으신 게 아닐까? 주인께서 낭자의 성이 무엇이냐고 물으신 것이 집을 찾아가 혼담을 꺼내고 싶으시다는 뜻은 아닌지? 낭자의 생김새는 정말 좋았다. 몇 년만 지나면 미인으로 성장할 것이 확실했다. 또한 영리하고 정과 의리가 있었다. 그녀가 동생을 지키기 위하여 태자에게 죄를 짓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유일한 결점이라면……, 목풍은 눈살을 찌푸렸다.
“나이가 좀 너무 어리잖아.”
열한두 살, 자기 집 주인은 벌써 스물한 살이었다.
“너 무슨 말 했어?”
혁련욱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목풍은 그제야 자신이 조심하지 않고 심중에 생각하던 바를 입 밖으로 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서둘러 고개를 흔들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표시를 했다.
혁련욱은 의심스레 그를 한 번 보고 부운석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녀가 궁중 연회에 온 사람이라는 걸 알았지?”
부운석은 자기 집 속하가 자신의 종신대사를 위해 애를 태우고 있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그저 두 글자를 내뱉었다.
“느낌.”
혁련욱은 눈을 흘겼고, 목풍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렸다.
주인께서 느낌이라 말씀하셨다. 바로 그 낭자에게 느낌이 있으시다는 것이다! 정말 잘 됐다. 주인께 마침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기셨다. 그는 이 좋은 소식을 목암에게 알려야 했다. 그도 주인을 위해 기뻐하리라.
한안이 급람을 데리고 연회석으로 돌아왔을 때, 장한명은 이미 한발 앞서 도착해 있었다. 주홍은 한안과 급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을 보았다. 한안은 등선 옆에 앉았다. 등선이 관심을 기울이며 말했다.
“왜 그렇게 오래 걸렸어? 나는 또 일이 생긴 건가 하고 걱정했어.”
맞은편에 앉은 장어산이 가볍게 웃으며 한마디 하는 것이 들렸다.
“이 궁중 안이 무척 넓고 풍경 또한 좋으니 동생이 구경하는 데 한눈팔렸다 해도 용서할 만하죠.”
이가기가 차갑게 웃었다.
“누군가와 밀회하러 간 건지도 모르죠.”
한안은 그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듣자 하니 마음속에 부처가 있는 사람은 누구를 보든 다 부처로 보인다죠.”
이가기는 처음에는 멍해졌다가 바로 얼굴이 파래졌다. 이가기가 평소 누군가와 사통하고 있기에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보인다는 것을 암시했기 때문이다.
“한안, 어찌 이 소저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어?”
장어산은 이가기의 얼굴빛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한안에게 즉각 따져 물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말투에 남아 있는 남의 불행을 보고 즐기는 마음을 숨기지는 못했다.
등선이 돌연 입을 열었다.
“장 소저는 어째서 이렇게 말하죠? 우리가 모두 보고 있었는데 한안이 이 소저 한 사람에게 말한 게 아니지 않나요? 장 소저는 어째서 한안이 말한 사람이 이 소저라고 생각하는 거죠?”
장어산은 말문이 막혔다. 자기가 너무 성급했다. 이가기는 장어산을 노려보며 화를 그녀에게 쏟아부었다. 그러나 상대방은 명문대가의 적녀이니 장어산은 그저 묵묵히 감수하며 애써 웃는 얼굴을 내놓을 수 밖에 없었다.
한안은 이런 일에 말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이가기와 그녀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현 단계에서 둘의 사이가 좋아지기는 불가능했다. 지금 한안이 걱정하는 것은 조금 전의 일이었다. 바로 홧김에 장위를 때리고 태자를 위협한 일. 사실상 장한명과 관계되기만 하면 그녀는 마음이 어지러워지고 이성을 잃었다. 장한명이 그녀의 제일 큰 약점이었다.
만약 태자가 그녀에게 원한을 갖는다면……. 한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계자 자리다툼이 장래에 어떤 형세로 전개될지 알 수 없지만 태자에게 죄를 짓는 것은 어찌 됐든 좋은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두 사람.
한안은 시선을 남자 자리 쪽으로 던졌다. 현청왕은 이미 혁련욱과 돌아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대담한 성격의 혁련욱이 이전의 일로 무슨 행동을 하는 건 아닐지 걱정스러웠다. 그때만 해도 다시 혁련욱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한안의 시선이 혁련욱 옆의 흰옷 남자에게 향했다. 그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눈빛은 맑고 차가웠으며 주위 사람들을 전혀 보지 않았고 또한 다른 것을 상대하지도 않았다. 홀로 앉아 있는 그는 마치 속세에 버려진 벌 받은 신선같아서 사람들이 참지 못하고 힐끔힐끔 그를 바라보았다.
조정 대다수는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는 물 안에서 노니니 적든 많든 탁한 기운에 오염되었다. 한안이 전생에 위여풍을 좋아한 것은 바로 위여풍이 다른 청년 관료에 비해 정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정직함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현청왕의 몸에는 바른 기운도 탁한 기운도 전혀 없었다. 그는 근본적으로 사람다운 분위기가 없었다. 그야말로 신선처럼 세상만사 모든 만물이 그의 안중에 들어갈 수 없으리라. 이렇게 깨끗하고 화려하며 고귀하고 우아한 사람이 조정의 중신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 사람이 손을 한 번 움직여 찻잔을 내려놓았다. 한안은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몰래 엿보는 행동이 상대방에게 들킬까 두려웠다.
한안은 맑고 냉담하면서 사람을 꿰뚫어 볼 듯한 현청왕의 눈빛을 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현청왕이 태자보다 더 사람을 애먹일 거라는 걸 직감했다.
*
연회가 어느 정도 지나고, 돌연 아름답고 나긋한 목소리 하나가 대청까지 들려왔다.
“소녀, 부황을 뵙습니다.”
대청 뒤에서 열네댓 살의 자줏빛 소녀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머리에는 진주를 박아 넣은 팔보자금관을 쓰고 금가루가 뿌려진 자줏빛 주름치마와 금사로 수 놓인 괘자를 걸쳤으며 허리에는 홍보석이 박힌 허리띠를 휘감고 있었다. 눈은 칠흑 같고 눈썹은 먹으로 그린 그림 같았다. 느긋하게 웃으며 이야기하는 모습이 아리따우면서도 우아했다.
한안은 소녀가 낯익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녀와 한 번 얼굴이 스친 인연이 있는 운예 군주였다. 그녀가 이곳에 나타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황상도 예상 못 한 듯했지만 가장 총애하는 딸이었기에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보고만 있었다.
운예 군주는 고개를 갸웃하며 웃었다.
“소녀가 춤 하나를 배웠기에 오늘 궁중 야연에서 부황께 바치려 합니다. 하늘이 대종을 보우하사 대종 강산이 영원히 이처럼 왕성하게 번영하기를 바라옵니다.”
여러 사람이 떠들썩하게 큰 소리로 떠들었다. 운예 공주는 황실 사람으로서 대단히 존귀함에도 신하들의 가솔 앞에서 춤을 추겠다고 했다. 이것은 스스로 신분을 깎아내리는 것이니 기루 여자들과 무엇이 다를까. 황상의 얼굴빛이 즉시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운예의 말 또한 틀린 것이 없었다. 대종 강산을 위하여 춤을 바치겠다고 하니 황상은 어찌 반박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만약 허락한다면 황실 체면이 또 뭐가 되겠는가?
한안은 운예 군주를 쳐다보며 탄복했다. 운예 군주는 보이기에도 대담해 보이더니 황상의 체면을 고려하지도 않고 일을 저질렀다. 사람들은 운예 군주의 이런 자유로움을 오히려 흠모하게 될 것이다.
황상의 노기가 뚜렷이 보이자 연회석상의 모든 사람이 조용해졌다. 감히 범의 눈앞에서 이빨을 뽑는 위험한 짓을 하려는 사람은 없었고 황상의 노화가 자신의 몸에 미치지 않기만을 바랐다.
이때 맑고 밝은 남자 목소리가 침묵을 잘라냈다.
“부황, 소자는 황매(皇妹)의 생각이 나쁘지 않다 여겨집니다.”
황후를 제외하고 황상의 비빈들은 모두 함께 앉아 있었다.
말을 한 사람은 준수한 젊은 남자였다. 의복과 장신구로 미루어 보아 황족 사람인 듯했다. 한안은 어떤 황자일지 궁금했다. 황상이 그 남자를 응시하며 기쁨인지 분노인지 분간할 수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생각인 것이냐?”
한안은 멍해졌다. 이 사람이 7황자?
7황자는 황상에게 공손하게 예를 올린 후 말했다.
“소자는 이번에 성 장군이 적을 누르고 대승을 거둔 것이 천하의 큰 기쁨이라 여기옵니다. 동생 운예가 이런 생각을 가진 것은 좋은 일이지요. 다만 홀로 즐기는 것은 모두가 즐기는 것만 못합니다. 듣기로는 우리 대종의 소녀들이 저마다 재색을 겸비하였다지요. 여기 모인 소저들 또한 그러할 것입니다. 소저들이 모두 흥을 다하여 약간의 공연을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동생을 하찮게 하지도 않고 또 뉘 집 여아가 가장 재주가 좋은지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안은 조금 복잡한 시선으로 7황자를 보았다. 그의 말 한마디로 운예 군주가 스스로 신분을 깎아내린 공연이 소저들의 성의를 다한 공연으로 탈바꿈하였다. 여러 대신의 귀한 딸을 끌어들였으니 자연히 자기 집 딸도 스스로 신분을 깎아내렸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이는 소저들의 환심을 사면서 또한 운예의 환심을 샀다. 양쪽에 죄를 짓지 않으면서 황상의 뜻도 거스르지 않았으니 정말 약삭빠른 사람이었다.
이런 약삭빠른 남자가 자신과 대적하는 위치에 서 있을 것인데 과연 그녀는 국면을 만회할 기회가 있을까?
황후가 가까스로 미소를 유지하였고, 황상은 만족스럽게 말했다.
“일리 있는 말이다. 운예, 짐은 네가 춤을 바치는 것을 허락하겠다. 여러 경들 집안의 천금도 재주를 아끼지 말아라. 짐의 안목을 넓혀주길 바라노라.”
황상이 말을 꺼내놓자 여러 대신들은 설령 제아무리 불만이 있어도 감히 드러내지 못했다. 한안은 주위를 한 번 돌아보았다. 부인, 소저들은 모두 기뻐하고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왜 그런가 생각했더니 의문이 풀렸다. 이렇게 많은 명문 공자들의 앞에서 재능과 기예를 겨룸으로써 좋은 명성을 쌓을 수도 있고, 심지어 좋은 가문에 시집갈 가능성도 있었다. 운명을 바꾸고 싶어 하는 서녀들의 입장에서는 절호의 기회였고 지위가 고귀한 대갓집 규수의 입장에서는 자기 능력을 검증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장어산은 이미 흥분하여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고 계속해서 남자를 곁눈질했다. 그녀의 시선은 현청왕과 혁련욱에게로 끊임없이 머물러 있었다. 한안은 차갑게 웃었다. 그 두 사람이 어떤 신분인가. 아마 첩이 되는 것조차도 그 자격이 충분한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었다.
이가기가 표적을 노리는 매처럼 한안을 향해 도발했다.
“장 소저가 이처럼 느긋한 것은 특별한 재주와 기예가 있어서겠죠?”
한안은 그야말로 기가 막혔다. 그녀는 일개 3품 대신의 딸로 이목을 끌 순번도 못 된다. 재주와 기예 같은 건 드러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한안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아무런 재주나 기예가 없어요. 이 소저의 놀라운 재주와 미모에 비교할 수가 없지요.”
이가기는 경멸 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한 번 보고는 고의로 놀란 척 말했다.
“장 소저는 너무 겸손한 거 아닌가요? 당신이 온종일 부중에 머물면서 수를 놓고 거문고를 연주하는 것을 누가 모를까요. 이처럼 열심인데 기예가 분명 출중할 거예요.”
한안이 미처 말하기 전에 장어산이 입을 열었다.
“그래, 한안. 모두 네가 거문고 연주를 잘하는 걸 알고 있어. 네 거문고 소리는 나비를 불러들일 수 있을 정도지. 이따가 잘 연주해 보렴.”
장어산의 말을 들은 이가기는 질투 어린 시선으로 한안을 보면서 언짢은 말투로 말했다.
“장 소저가 겸손한 거였군요. 그런데 실력을 왜 숨기는지 모르겠군요. 조금 이따가 우리들을 놀래키려 하는 모양이네요.”
한안은 담담하게 장어산을 보고는 한참 후에야 비로소 말했다.
“언니 말이 이상하네요. 나는 3년 전 모친께서 병상에 누우신 후로 거문고를 만진 적이 없어요. 언니는 정말 나에게 관심이 많군요. 부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3년 전 일까지 하나하나 분명하게 알아보았다니 말이에요.”
장어산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한안의 말은 장어산이 법도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부에 들어온 서녀가 적녀 동생의 사사로운 일을 캐내는 것은 아마도 분수를 지키지 않은 일이었다.
한안은 장어산이 벙어리처럼 말을 못 하는 모습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게다가 어디 내 공연 차례가 오겠어요. 뛰는 이 위에 나는 이가 있으니 잘난 체하면 안 되죠. 오히려 추태를 보이게 되면 장가의 체면이 말이 아닐 거예요.”
한안은 경고의 눈빛으로 장어산을 보았다. 만약 장어산이 이 기회를 빌려 자신의 미모를 드러내 보이려 하다가 누군가에게 이용당한다면 장가 전체가 연루되어 끝장이 날 것이다. 비록 장가에 손톱만큼도 특별한 감정이 없지만 그녀가 장가를 벗어나기 전에 가문이 손해를 입으면 그녀와 장한명 모두에게 변고가 생길 것이었다.
장어산은 미모를 타고났지만 동시에 헛된 영화를 부러워하니 황궁에서 이용당하기 쉬웠다. 한안은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장어산은 한안의 말에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했다. 마음속으로 한안을 갈기갈기 찢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한안을 응시하는 눈빛에 음험하고 악독한 빛이 스쳤다. 장어산은 무언가를 생각한 끝에 몸을 숙여 이가기의 귓가에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한안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그녀들을 흘끗 보았다. 발가락으로도 이 두 사람이 또 무슨 못된 궁리를 꾸미고 있을 거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한안은 오히려 아주 호기심이 일었다. 그녀는 느긋이 미소지으며 그녀들을 쳐다보았다.
등선이 그녀의 팔을 건드렸다.
“저기 봐!”
운예 군주가 이미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한안이 이가기와 장어산 두 사람을 신경쓰느라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군주 뒤의 시녀는 거문고를 타기 시작했다. 유쾌한 춤이었다. 운예 군주는 걸음을 리듬감 있게 디디며, 하얀 손으로 영고(鈴鼓: 방울 달린 북)를 가볍게 두드리면서 돌고 뛰어올랐다.
한안은 운예 군주가 추는 춤이 전장축첩무(戰場祝捷舞: 전장에서 대승한 것을 경축하는 춤)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오래전 선황의 모친이 이 춤을 스스로 창안하여 춘 적이 있었는데 그때 태상황이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겼다고 한다. 운예는 황실에서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축첩무를 췄다. 황상과 황후는 말할 것도 없고 자리에 가득한 문부백관들마저 찬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한안은 경쾌하게 춤을 추는 운예 군주를 응시했다. 춤을 추느라 살짝 붉은 빛이 떠오른 용모는 눈부시게 아리땁고 사랑스러웠다. 이런 소녀가 황실 사람이라는 것을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그녀는 때때로 허리를 굽혀 리듬을 밟았고 때때로 영고를 돌렸다. 운예 군주의 모든 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즐겁도록 했다. 금빛 찬란한 치맛단이 눈부시게 빛났고 몸 위의 진주와 비취, 법랑이 부딪쳐 맑은소리를 냈다.
한안은 운예 군주가 춤을 추는 사이에 그녀의 눈빛이 고의인 듯 아닌 듯 남자 쪽을 스쳐가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가 보는 방향에 앉아 있는 남자는 바로 성뢰였다.
운예 군주의 마음에 있는 사람이 성 대장군인가?
한안은 몰래 성뢰를 살펴보았다. 그는 운예 군주를 별로 마음에 두지 않는 듯 즐거운 기색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아무 감정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다시 운예 군주를 살펴보았다. 애교를 부리며 수줍어하는 표정을 보니 사내는 마음이 없는데 여인은 뜻이 있는 상황이 명백했다.
한안이 운예와 성뢰 두 사람에 대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그녀의 동작을 눈에 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혁련욱이 연회석을 사이에 두고 한안을 바짝 응시하고 있었다.
“정말 궁중 연회에 온 사람이었네. 그런데 어느 집 소저인지 모르겠구나.”
부운석은 혁련욱의 눈빛을 따라 돌아보고는 냉담하게 말했다.
“보아하니 바로 혼담을 꺼내러 가겠구나.”
혁련욱은 깜짝 놀라 서둘러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좀 봐주라. 저 계집애는 네 조카인 태자도 감히 협박했다고. 만약 처로 들이면 후원이 발칵 뒤집힐 거 아냐. 게다가…….”
그는 불쾌하게 한안 쪽을 한 번 흘끗 보았다.
“젖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어린애에 불과하다고. 혼담을 꺼내니 마니 무슨 소리야.”
젖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어린애? 부운석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무슨 우스운 말을 들은 것 같았다. 저 어린 아가씨는 분명 성년 여자도 말로 이길 수 있을 것이다.
혁련욱은 부운석이 눈도 깜박이지 않고 여자 쪽을 응시하는 것을 보고 놀리듯 말했다.
“설마 너야말로 저 어린애가 마음에 든 건 아니겠지? 헤헤, 말하고 보니 너희 둘 아주 잘 어울린다. 하나는 얼음덩어리 같은 성격이고, 하나는 뱃속에 전부 못된 물이 들어찼고. 만약 성사되면, 누가 누구를 이겨먹을지 모르겠는걸?”
혁련욱은 생각할수록 자신의 말에 일리가 있다 느껴졌다.
“저 소저 집안이 어떤지 모르겠네. 만약 가문까지 걸맞으면 아무튼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겠어.”
부운석은 아무런 내색 없이 듣고만 있다가 혁련욱의 헛소리가 그치자 담담하게 말했다.
“네가 다시 좌상에 의해 며칠 사당에 갇혀 있고 싶다면 얼마든지 얘기해.”
혁련욱은 순간 입을 다물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이마 위로 큰 땀방울 하나가 생겨났다. 농담이겠지. 또다시 자기 집 노인네로 인해 사당에 갇힌다면 이번엔 죽고 말 것이다.
한안은 흥미진진하게 운예 군주의 춤을 구경했다. 축첩무를 볼 수 있는 것은 이득이라 할 만했다.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던 주홍은 이가기와 장어산이 눈짓을 하며 한안을 향해 음산한 웃음을 드러내는 것을 알아차렸다.
운예 군주의 춤은 경쾌했다. 춤 동작에 그녀의 아름다움과 영민함이 모두 드러나 남자들은 찬탄을 보내며 그녀에게 매료되고 말았다. 이처럼 힘껏 성의를 다한 것은 진심으로 그 사람을 기쁘게 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곡이 끝나자 장내에 찬탄 소리가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황상도 용안에 큰 기쁨을 담고 하하 크게 웃으며 말했다.
“운예, 춤이 무척 좋구나. 짐이 즐겁게 보았다. 네가 이렇게 마음을 썼으니 금과 옥으로 만든 장신구를 각 하나씩 하사하노라.”
운예 군주는 느긋하게 앞으로 나가 절을 올렸다.
“부황께서 하사하심에 소녀, 감사드립니다.”
운예는 자리로 돌아가면서 몰래 성뢰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옆 사람과 이야기하며 술을 마시는 것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운예의 얼굴에 실망이 스쳤다.
바로 이때, 장어산이 차를 받쳐 들고 한안과 등선 옆으로 다가와 가볍게 말했다.
“같은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어산이 아직 등 소저와 이야기를 제대로 나눠보지도 못했네요. 실로 부끄럽고 미안하게 생각해요. 등 소저에게 차 한 잔을 올리니 어산을 탓하지 말아 주길 바랍니다.”
등선은 조금 놀랐지만 한안이 제지하기 전에 찻잔을 받아들었다. 한안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등선은 평소 등 상서에게 총애를 받기에 사람의 마음이 경우에 따라 음험하고 악독하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이렇게 조심성 없이 차를 받아들었으니 아마도 장어산의 계략에 빠지게 될 터였다.
장어산이 당연히 아무 생각 없이 등선에게 차를 주었을 리 없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대갓집 소저들 앞에서 등선도 거절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한안은 장어산과 공공연하게 대적할 수 있었고 좌중의 소저들은 그녀와 아무런 친분이 없으니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등선은 장어산과 오늘 처음 만났고 자신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인식을 남기게 할 순 없었다.
그 순간에 한안의 마음속에 천 가지 생각들이 스쳐갔다. 눈을 홱 들어 이가기의 질투와 증오에 찬 눈빛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가 다시 몸을 돌려 등선을 보았다. 장어산의 찻잔이 기울어지고 있었다. 등선은 크게 놀랐지만 이미 피하기에는 늦었다. 찻잔의 찻물이 등선의 몸 위로 흩뿌려지기 직전이었다. 한안은 등선을 밀어냈다. 찻잔에 가득했던 뜨거운 찻물이 즉시 한안의 손에 끼얹어졌고 심지어 소맷부리의 옷감을 적셨다.
“한안!”
등선이 황망히 외쳤다. 고통으로 한안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뿌려진 찻물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났고 한안의 손등이 이미 새빨개졌다.
장어산이 입술을 깨물며 놀라 두려운 목소리로 말했다.
“한안, 괜찮아? 내, 내가 조심하지 못했어. 의원을 찾아서 살펴보게 해야 하지 않을까?”
어산의 말투에는 온통 걱정과 공포로 가득했다. 부드럽고 연약한 모습이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녀야말로 찻물이 데인 사람이라 여겼을 것이다.
등선이 장어산에게 비난하며 말했다.
“당신, 어떻게 된 일이에요? 한안이 손에 온통 화상을 입었어요!”
장어산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등선을 보고 또 한안을 보더니 순간 눈물을 떨구었다.
“나, 나는 정말 고의가 아니었어요. 한안, 너도 설마 내게 화를 내는 거야? 만약 네가 화를 가라앉힐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해도 좋아.”
한안은 차갑게 웃었다. 장어산이 이 모습을 누구에게 보이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장한안이 부중에서 세도를 부리며 서녀 언니를 업신여기고 모욕하니 서녀 언니가 작은 실수에도 놀라서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걸 암시하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동정을 얻겠다고? 정말 어리석구나. 한안은 장어산을 경멸했다. 하지만 황상의 앞이니 이런 작은 일로 어떤 큰 화도 일으켜서는 안 된다. 더구나 등선이 연루되어서는 안 된다.
“어산 언니, 심하네요. 평소에 한안이 화나는 일이 많기는 하지만 언니에게 그렇게 수고를 끼칠 정도는 아니에요.”
한안의 무미건조한 말투에 장어산은 얼굴이 파래졌다가 하얘지고 또 하얘졌다가 파래졌다. 증오심이 불탔지만 이를 악물고 웃음을 짜내었다.
“한안이 괜찮다면 됐어.”
장어산은 건성으로나마 한안을 대하는 것이 싫어졌다. 의원을 부르자고 제안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아 이내 이가기의 곁으로 돌아갔다.
한안은 차가운 눈으로 이가기의 득의만만한 눈빛을 보며 바로 이것이 그녀들이 계획한 것이라는 걸 알았다. 다만 장어산이 등선을 이용할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설령 이것이 올가미인 것을 알았고 똑같은 일이 다시 벌어진다 해도 그녀는 여전히 등선을 보호할 것이다. 등선은 그녀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열두 살로 되돌아온 그녀는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모두 보호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엔 슬피 애통해하며 외로이 세상을 뜨지 않을 것이다. 한안은 심지어 다행스럽게 여기기 시작했다. 자신이 찻물을 막지 않았다면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은 등선이었을 것이다.
손등 위가 화끈하고 얼얼하게 아팠다. 등선은 의원을 부르고 싶어 했으나 한안은 고개를 저었다. 궁중 연회 중에 사소한 일을 두루 알리는 것은 적당치 않았다. 등선은 여전히 걱정했지만 오히려 한안이 위로하며 달랬다.
등선이 안정하고 나서야 한안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에는 등선이 충동적으로 행동할까 봐 두려웠다. 다행히도 별일 없었던 셈이다. 다만……. 한안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오른손을 보았다. 커다란 붉은 흔적. 부드럽고 여린 피부가 심하게 데어버려 다른 물건이 닿기만 하면 몹시 아팠다. 장어산의 술수는 악랄했다. 펄펄 끓는 뜨거운 차를 뿌리다니 아파서 비명을 지르지 않았던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었다. 전생에 겪은 고초 덕에 그녀는 인내심을 기를 수 있었다.
이쪽의 소란은 주위의 소저들을 제외하고는 알아차린 사람이 없었다.
황상은 운예 군주의 축첩무 감상을 마치고 흥취가 무르익은 듯 큰 목소리로 말했다.
“부끄러워할 것 없다. 재주와 기예가 있거든 주저 말고 나서라. 재능이 돋보인다면 짐이 후한 상을 내리리라!”
이가기는 황상의 말을 듣더니 등을 꼿꼿이 세우고 목을 높이 치켜들면서 손에 든 잔을 들어 살짝 마셨다. 냉정하게 평하자면 그녀 또한 미인이었다. 이처럼 조용히 있으니 내막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고결하고 도도한 소저라고 여길 것이다.
도도한 미인은 사람의 마음을 쉽게 끌어당겼고 끌려온 남자들은 서로 다투어 쫓고 쫓겼다. 그런 점에서 이가기는 그저 유약한 척하는 장어산보다 한 수 위였다.
장어산도 기대감을 품고 황상을 응시하고 있었다. 각 집안 소저들은 나서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하지만 자진해서 나설 만큼의 담력이 있지는 않았다. 하물며 자발적으로 공연하는 것은 신분을 낮춘다고 생각하여 조용히 추이만 지켜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목소리 하나가 울려 퍼졌다.
“소자가 듣기로 이 승상 집의 적녀가 경성 안 재녀라 사람들이 그 영롱한 재주를 다투어 칭찬한다고 합니다. 오늘 이 낭자의 재학을 볼 수 있는 복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목소리의 주인을 돌아보았다. 자리에 앉아 있는 7황자는 공손하며 예의가 있었고 황가 자제들처럼 거만스레 남을 능멸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이가기가 경성 안 재녀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황상도 몇 년 동안 듣던 얘기였다. 황상은 7황자를 한 번 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이 낭자는 바로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재능을 한 번 드러내 보이라.”
이가기가 나긋나긋한 동작으로 몸을 일으켜 대청 중앙까지 가서 날렵하게 절을 올렸다.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사람을 감동시켰다.
“재녀라니 송구할 따름이옵니다. 다만 오늘 궁중 연회는 큰 경사이니 여러 대인들과 황상의 흥취를 돋우기 위하여 신녀가 바로 부끄러운 솜씨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이가기의 말은 겸손하면서도 어느 정도 재녀의 기개를 드러냈다. 여종이 고아한 흑색 거문고를 가져왔다. 이가기는 거문고를 탈 생각인가?
한안은 냉랭하게 지켜보며 조소를 보냈다. 이가기가 정말 만반의 준비를 했구나. 눈빛이 자신의 온통 새빨간 손등 위에 떨어졌다. 손을 다치게 한 건 만에 하나 있을 수 있는 실수가 없도록 확실히 처리한 것이리라.
자신은 재주를 다툴 마음도 없었으니 이가기는 정말로 쓸데없는 짓을 한 것이다.
아리따운 여자가 거문고에 의지하여 앉았다. 향을 태워 손을 정갈히 하는 행동거지 하나하나에서 대갓집 규수의 품격과 예의를 잃지 않았다. 한안은 웃음을 머금고 지켜보았다. 이가기라는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대갓집 소저다운 기개는 뜻밖이었다. 이 승상이 딸에게 요구하는 바가 가혹하다더니 근거 없는 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연회석상의 모든 사람이 행동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며 눈도 깜박하지 않고 중앙의 낭자를 응시했다. 이가기의 표정은 도도했다. 하얀 손이 가볍게 움직이니 손가락 끝에서 듣기 좋은 음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가 타는 곡은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듣기 좋았다. 곡은 얌전한 한 여자가 무한한 재능으로 달을 향하여 거문고를 연주하는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었다. 이가기의 옷소매가 나부끼고 하얀 손이 나는 듯 경쾌하여 곡의 예술적 경지를 한층 더 잘 드러냈다.
이가기가 재녀라는 명성을 거저 얻은 것 아닌 것이 분명했다. 그녀의 손놀림은 능숙했다. 소리가 떠다니는 구름처럼,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러웠다. 열정적이고 경쾌했던 운예 공주의 춤 뒤로 깊고 넓은 푸른 샘물이 고요하고 부드럽게 사람들의 마음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것 같았다. 이가기를 보는 사람들의 눈빛은 모두 찬탄으로 바뀌었다.
등선은 몰래 한안의 팔을 건드렸다.
“이가기가 정말 능력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네. 하지만 한안, 네가 나가면 분명 그녀에 비해 모자라지는 않을 거야.”
한안이 거문고, 바둑, 서예, 그림 중에서 가장 잘하는 것이 바로 거문고였다. 그녀의 모친 본인이 거문고의 고수였고, 어렸을 때 한안은 어머니가 거문고를 타서 나비를 불러들이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워 한안은 그때부터 거문고 타는 데 흥미를 보였다. 모친처럼 아름답게 연주하기 위해 어려서 맹렬히 연습하여 솜씨를 닦았다.
등선이 또 말했다.
“하지만 네가 지금 손에 화상을 입었으니 아마도 거문고 현은 건드려서도 안 되겠지. 정말 애석하네. 그렇지만 않았어도 오늘 밤 네가 나가서 재주를 크게 펼쳐 보일 수 있었을 텐데.”
한안은 고개를 저었다.
“내 거문고 기예는 이가기만 못해.”.
한안이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다. 비록 한안 자신의 거문고 재주가 출중하기는 하지만 어머니가 병석에 누운 후부터 3년이나 거문고를 만져본 적이 없었다. 나중에 어머니가 세상을 뜨시고는 자신이 가장 아끼던 초미금을 태웠다. 물건을 보고 어머니를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거문고는 3일만 연습하지 않아도 손이 굳었다. 근데 이렇게 오랫동안 소원하였으니 아마 한안이 나선다 해도 이가기 실력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었다.
등선은 입을 삐죽거렸다.
“너 정말 너무 겸손한 거야.”
한안은 웃기만 할 뿐이었다. 맞은편 장어산의 득의양양한 모습을 보며 무슨 상황인지 대략 이해가 갔다. 분명 장어산은 한안의 거문고 기예가 범상치 않다는 사실을 이가기에게 알렸을 것이다. 그래서 찻물을 뿌리는 장면을 연출한 것이고. 장어산은 한안이 이목을 끌게 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안 본인은 그럴 생각이 없었으니 장어산은 그저 쓸데없는 짓을 한 것밖에 되지 않았다.
다만 이상한 점은 있었다. 이 승상부의 이가기가 왜 이런 저질스러운 수법을 쓸까. 이가기의 오만함을 봤을 때 시원스레 도전하고 그 후에 정정당당하게 겨룰 거라 생각했는데. 이가기가 한안의 실력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경성 제일 재녀로서 이가기는 자신만만할 것이었다.
한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녀에게 다음 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가기는 사람들의 흠모하는 눈빛에 흠뻑 빠져 있었다. 마음속은 득의만만하였으나 얼굴은 여전히 차분했다. 이가기가 마음속에 담아둔 그 사람이 그녀의 이 같은 재주와 미모를 보았는지 모르겠구나.
등선은 이가기가 거문고를 연주하는 것을 보고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그저 간간이 성뢰 쪽을 바라보았다. 성뢰도 그녀의 눈빛을 알아차렸다. 성뢰와 등선의 눈빛이 딱 마주쳤다. 등선은 깜짝 놀라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심장이 계속 쿵쿵거렸으며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한안은 두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에 담아 보았다. 성뢰는 등선 쪽만 주의하느라 운예 군주의 눈빛 역시 바짝 따라붙는 것을 알지 못했다.
두 금지옥엽이 성 대장군의 매력에 빠져버렸다. 한안은 마음속으로 따져보았다. 자고로 미인은 영웅을 사랑한다. 성뢰는 젊어서 바로 대장군에 봉해졌고 온종일 부귀영화를 누리는 대갓집 공자들에 비해 강건함과 남자다운 기개가 있었다.
등선과 운예 공주의 눈빛에는 차이가 없었다. 이전에는 등선과 성뢰의 가문이 잘 어울린다 생각했다. 그러나 만약 운예 군주가 정말로 성뢰에게 마음이 있다면 황상에게 혼인을 하사하는 명을 내려달라고 요청할 것이고 그렇다면 등선에게는 기회가 없었다.
자신의 아끼는 벗이 막 사랑에 눈을 떴지만 어떻게 포기시켜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긴 아픔보다는 짧은 아픔이 낫다. 일찌감치 잘라내지 않으면 이후 괴로움만 더 커져 갈 뿐이었다.
한안은 정신을 차렸다. 자신이 어떻게 된 건가. 어떻게 여기에서 등선의 애정사에 애를 태우고 있을까. 사람 일은 아직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인데 자신이 너무 열심히 고민하는 건 아닌가.
이가기의 곡이 마무리에 들어섰다. 손가락 끝이 거문고 현 위에서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가볍게 모으고 느리게 문지르는 사이에 음률은 구슬이 옥쟁반에 떨어진 것 같았고 자잘한 선율이 맑고 은은하게 퍼졌다. 마침내 풍부하고 달콤한 끝소리가 떨어지자 모든 것이 우뚝 멈추었다. 완벽한 재주였다.
대청의 반응은 느렸다. 돌연 7황자의 박장대소가 들렸다.
“경성 제일의 재녀라는 별칭이 손색없습니다. 이처럼 절묘한 거문고 소리는 정말로 백문이 불여일견이군요!”
황자가 입을 열자 나머지 대신들도 분주히 뒤따랐다. 일순간 찬탄 소리가 여기저기서 끊임없이 일어났다. 황상도 웃음기가 가득했다.
한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7황자가 누차 말을 꺼내서 이가기를 돕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아마 이 승상도 7황자 일파에 속한 게 틀림없었다. 자신의 적들은 이미 한통속이 되어있었다. 앞으로 아마도 쉽지 않을 것이다.
“과연 영롱한 재주로고. 이 경이 여식을 훌륭하게 가르쳤군! 짐은 바로 진주 한 줄과, 모란 무늬의 비단 네 필을 하사하겠다.”
이가기는 아름다운 자태로 절을 했다.
“감사하옵니다, 황제 폐하.”
내일 경성에는 그녀가 궁중 연회에서 두각을 드러낸 일이 두루 퍼질 것이다. 이가기의 표정은 더욱 득의만만해졌다.
한안은 대청 가운데의 이가기를 보고 눈을 돌려 바로 자기를 응시하고 있는 장어산을 흘끗 보았다. 한안은 장어산이 자기를 보는 눈빛에서 남의 불행을 보고 기뻐하는 기색이 있음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한안은 또다른 함정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5장
“황상, 무리한 청이 하나 있습니다.”
대청 가운데에서 이가기가 돌연 입을 열었다. 모든 사람이 조용해졌다.
황상은 큰 손을 휘둘렀다.
“얼마든지 말해도 괜찮다.”
한안의 마음속에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장 대인의 4소저가 미모와 재주를 겸비하였다 들었습니다. 특히 거문고를 훌륭히 탄다고 합니다. 좀처럼 보기 어려우니 오늘 4소저에게 한 곡 연주를 청하고 싶습니다. 신녀는 귀를 씻고 공손히 듣겠습니다.”
한안은 멈칫했다. 이가기가 연회석상의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그녀에게 도발적인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이가기의 말이 떨어지자 대청 가운데는 바로 잠시 침묵에 빠졌다. 이어서 모든 사람의 눈빛이 바로 여자 자리를 향해 쏠렸다. 모두가 경성 안 재녀가 칭찬하는 낭자를 보고 싶어 했다.
한안은 필요한 부인 연회 모임을 제외하고는 어려서부터 문밖출입의 기회가 극히 적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장가 4소저에 대한 인상이 그다지 남아 있지 않았다.
장어산은 득의만만한 얼굴로 한안을 보고 있었다. 게다가 한안은 손에 화상을 입었으니 거문고를 다루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녀가 거절한다면 천자의 체면에 먹칠을 하는 것이니 황상은 많든 적든 간에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장어산이 대신 하겠다고 나서서 장부의 체면을 만회하겠다는 명목으로 재주를 부리겠지.
한안은 내색 없이 장어산의 표정을 눈 속에 담았다. 멀리 황태후도 마침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표정은 헤아릴 수가 없었다.
황상이 칭찬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누가 장부 4소저인가?”
한안은 그제야 일어났다. 뭇 시선이 빤히 쳐다보는 가운데 서두르지도 여유 부리지도 않으면서 황제의 자리 앞에 걸어 나와 깊이 절했다.
“장한안, 폐하께 문안 올립니다.”
그녀의 몸은 여리고 작았다. 그러나 행동거지는 완벽했다. 대략 열두세 살의 모습이나 품격은 평소 궁정 예의를 배운 과년한 여인에 밀리지 않았다.
황상의 안중에 흡족한 기색이 돌았다. 황후가 한안을 알아보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본궁이 어느 집 여아가 이처럼 총명하고 빼어나게 자랐을까 싶었는데. 이제 보니 장부의 4낭자였네요.”
황후가 남을 칭찬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이 낭자가 방금 전 네가 거문고 기예가 출중하다 말하였다. 네가 잠시 한 곡을 연주하여 짐과 모든 이들이 너와 이 낭자 중 누가 한 수 위인지 평할 수 있게 하라.”
황상의 말은 곧 명령이었다. 한안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썹을 찌푸리고는 고개를 들어 황상을 향해 대범하게 웃음을 피웠다.
“소녀는 황상의 말씀을 받자올 수 없사옵니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 숨을 헉하고 들이켰다. 이어서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깔렸다.
이가기는 남의 불행이 즐거워 웃음소리를 낼 뻔했다. 다만 사람들의 앞이라 지극히 조심하였을 뿐이었다. 표정은 여전히 파문 없이 도도했다.
장어산은 통쾌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주씨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번에야말로 한안이 끝장난 셈이라 생각했다. 천자에게 죄를 지었으니 장부에서도 그녀는 편히 지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좋은 구경거리나 감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등선은 한안에 대한 걱정으로 손수건을 꽉 비틀어 짰다. 순간 참지 못하고 일어나서 한안이 손에 화상을 입은 사실을 말하려는데 가볍고 부드러운 두 손이 어깨를 누르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한안의 여종 주홍이었다. 주홍과 급람의 얼굴에도 걱정이 어려 있었지만 여전히 침착을 유지하며 좌석 아래 서 있었다.
장위는 크게 기뻐했다. 저 천한 년이 자기를 한 대 때렸으니 황상에게 처벌받아도 싸다 싶었다. 궁중 친족들 자리에 앉아 있던 어린 태자는 얼마간 호기심을 가지고 한안을 보고 있었다. 부황을 뜻을 거역하다니 하늘 높은 줄을 모르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속셈이 있는 것인가?
장사양의 얼굴도 붉으락푸르락했다. 탁자 아래에 주먹을 꽉 쥔 손을 감추고 대청 가운데 있는 한안을 노려보았다. 원래도 맘에 들진 않았지만 장가를 황상의 분노에 연루시키려고 하는 걸 보니 화가 치밀어올랐다. 애초에 왕씨가 한안을 낳았을 때 모녀 둘 다 죽게 하여 오늘날 이런 시비가 생기지 않게 했어야 했다.
장한명은 입술을 꽉 다물고 있었다. 등을 바짝 긴장하며 눈도 깜박이지 않고 누나를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지만 누나가 이유 없이 황상의 말을 거역할 리가 없었다. 만약 황상이 누나를 추궁하여 처벌하려 하면 한안을 대신하여 자신이 벌을 받겠다 다짐했다.
한안은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고 여러 사람의 표정을 마음속에 담아두며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이어서 들린 황상의 질문에서는 그가 노여워하는지 아닌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음? 어째서 할 수 없느냐?”
한안은 바로 살짝 웃고 고개를 갸웃하며 천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낭자가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한안의 거문고 기예는 사부의 가르침이 전혀 없었기에 실로 자질이 남다를 게 없습니다. 그러니 감히 부끄러운 솜씨를 내놓을 수가 없습니다. 성상께서는 세세한 것도 놓치지 않고 예리하시니 만약 한안이 여기에서 연주를 하게 된다면, 그런 졸렬한 거문고 솜씨는 듣고 바로 아실 것입니다.”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부끄러워하는 듯했다.
“이렇게 많은 대인들과 부인들이 모두 계시니 실로 창피하옵니다.”
그녀의 생김새는 사랑스러웠고 맑고 깨끗하며 영롱했다. 작은 소리로 말하는 태도에서는 어린아이다운 천진함이 드러났다. 각각의 속셈을 품고 애늙은이처럼 행동하는 소저들 사이에서 한안은 완전 무해한 어린아이 같았다. 과장됨이 전혀 없는 자연스러움은 사람들의 마음을 따스하게 만들었다.
황상의 얼굴빛도 얼마간 온화해졌다.
“이제 보니 그러했구나.”
이가기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보탰다.
“어쩌면 경성 안 사람들이 잘못 전한 것일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장 낭자는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솜씨가 뛰어나다 하니, 거문고 솜씨가 좋지 않다 해도 다른 재주와 기예가 있을 겁니다. 한 번 보여줄 수 있겠죠?”
사람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한안이 또 어찌할 수 있겠는가. 하지 않으면 자신이 장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내놓을 만한 재주나 기예가 하나도 없다면 오늘 이후로 경성 귀인들과 어울릴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어쩌면 좋은 기회였다. 승리의 왕관을 차지하기 위한 첫걸음이 여기 한 번의 행동에 있다고 하겠다. 궁중 연회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일 따위에 조금도 흥미가 없었지만 이가기가 기세등등하게 사람을 핍박하니 제 발등 찍는다는 게 무엇인지 알려주리라.
혁련욱이 흥미진진하게 말했다.
“아까 그 소녀가 장부의 4소저였구나. 보통 소저들과는 달리 이리 대담하다니. 재밌군.”
부운석은 이렇다 할 말이 없이 그저 담담하게 아름답고 어린 소녀를 흘끗 보았다. 소녀라기에도 조금 과분했고 보기에 따라서는 그림 속에나 있는 피부가 하얗고 부드러운 어린아이 같았다. 부운석의 얼굴 위에 빙그레 웃는 빛이 떠올랐다.
혁련욱은 그의 표정 변화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분명 크게 놀랐을 것이다. 전설 속의 얼음 왕야가 솜털 보송한 어린 아가씨를 미소 지으며 보다니?
“나는 어째 이 소저가 고의로 어린 애를 난처하게 한다는 생각이 든다?”
혁련욱이 입을 열었다. 혁련욱은 이런 아귀다툼에 대해서 민감할 정도로 직감이 발달돼 있었다.
부운석은 눈썹을 치켜 올리고 말이 없었다. 난처하게 한다고? 누가 누구를 난처하게 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일 텐데?
이가기의 말을 들은 한안은 달콤한 웃음을 들어 올렸다.
“한안은 어려서부터 굼떠서 재주나 기예라 할 만한 게 없습니다. 하지만 궁중 연회에 즐거운 분위기를 더하기 위해 소녀가 보잘것없는 재주나마 공연을 바치어 모두의 흥을 돋울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이가기와 장어산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한안을 응시했다. 한안에게 무슨 수가 남아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녀는 손에 화상을 입어 지금 거문고를 연주할 방법이 없었다. 설령 춤을 추려 해도 운예 군주가 이미 추었으니 한안이 설령 제아무리 잘 춘다 해도, 황상의 마음이 한안에게 기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안은 장어산의 의심을 품은 눈빛을 마주하며 살짝 웃었다. 자신이 재주와 기예를 선보일 방법이 없으면 장어산이 대신하려 했겠지? 우스운 소리. 남의 것을 뺏어 제 것처럼 하는 일은 금생에서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모두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들이 한층 더 복잡해졌다. 그중 몇몇은 한안을 찔러대듯 쳐다보고 있었다.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 눈빛 중 하나는 황태후의 것이었다. 그 외에 7황자의 눈빛도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짐이 네게 묻노라. 네가 보여주려는 것이 무엇이냐?”
황상이 물었다.
한안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황상께서 종이와 붓, 묵 하나를 내려주시기를 청하옵니다.”
황후는 어리둥절해졌다.
“네가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려 하느냐?”
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봐라, 지필묵을 올려라!”
황상이 큰 손을 휘두르자 궁녀 몇이 바로 지필묵을 한안의 앞에 대령했다.
눈처럼 흰 선지가 펼쳐지고 묵은 맑고 그윽한 묵향을 발산했다. 한안은 한 손을 몸 뒤에 뒷짐 지고 한 손으로 붓을 잡아 먹물을 충분히 묻혔다.
대청의 사람들이 순식간에 흥분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주 분명하게 보았던 것이다. 한안이 붓을 잡고 있는 그 손은 왼손이었다!
한안은 차분하고 느긋하게 웃는 것이 더없이 평범한 일을 하고 있는 듯했다. 목소리가 아침의 꽃이슬처럼 맑고 투명했다.
“황상께 아룁니다. 소녀가 그저께 부중에서 오른손을 다쳤습니다. 상처가 아직 낫지 않아 오른손으로 붓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왼손으로 글을 쓸까 합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한안을 보던 시선은 호기심이었다고 한다면 지금부터는 바로 경악이었다.
왼손으로 글을 쓰는 것은 보통 사람도 힘든 일이었다. 하물며 한안은 열두 살의 어린 아가씨였다. 그녀의 동작을 보아하니 왼손잡이는 아닌 듯한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이가기는 한안이 이렇게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자리로 돌아온 이가기 옆에서 장어산이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뻔뻔스럽게 허풍을 떠네요. 체면이나 잃지 않으면 다행이지요.”
이가기는 한안의 자신감 넘치는 두 눈을 보며 잠시 주저했다. 한안이 정말 망신을 당할까?
장어산은 이가기의 심중을 알아본 듯 그녀를 안심시키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까지 그녀가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데 무슨 재주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어요. 아마도 시늉만 내는 것일 거예요.”
이가기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등선은 조금 걱정스러웠다. 한안의 글씨와 그림은 기껏해야 그저 보통 정도의 수준이었다. 더구나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장부의 체면을 지키기 위하여 응했는데 그때 가서 체면을 잃게 되면 아마도 천자의 분노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혁련욱은 아래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왼손으로 글씨를 쓰다니 정말 신선하네. 어린 아가씨가 갈수록 흥미로운데.”
부운석은 말이 없었다. 눈빛이 선지 앞의 꼬마에게 담담히 움직였다.
한안은 선지를 잠시 조용히 응시했다. 운예 군주의 축첩무는 유쾌하고 가벼우며 날렵했고 불처럼 열정적이었다. 이가기의 거문고 가락은 부드럽고 온화하며 듣기 좋아 역시 아가씨다운 고요함이 있었다. 하나는 동적이고 하나는 정적인 두 공연은 잘 어울려서 여자의 두 가지 개성을 완벽하게 해석해냈다. 그녀가 한 곡을 더 보태면 그 가운데의 평형점을 훼손하게 되니 사족에 불과했다. 그러니 노래와 춤은 선택할 수 없었다. 다른 길을 개척해야 한다.
아마도 한안을 아는 사람들은 그녀가 글씨를 쓸 수 있다고는 생각지도 못할 것이다.
다른 이들은 한안이 무엇을 하려는지 명확히 알지 못했다. 황상도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 마침내 한안이 새하얀 손목을 가볍게 들고 먹물을 가득 머금은 붓을 잡더니 갑자기 두 눈을 감았다.
붓은 마치 생명이 있는 것처럼 스스로 글을 거침없이 써 내려갔다. 그녀의 자세는 날렵하였고 붓이 닿는 곳마다 묵향이 코를 찔렀다. 그 와중에 어린 아가씨는 눈을 감고 아주 똑바르게 서 있었다. 눈을 들어 보고 있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꿰뚫어보고 있는 듯해서 자연스레 총명하고 지혜로운 느낌을 발산했다. 웃음기는 옅었지만 자태에는 위엄이 있었다. 이후에 그녀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듯했는데 그 속도가 빠르고 기세가 드높았다. 눈 깜박할 사이에 눈처럼 흰 선지를 먹빛으로 종횡무진했다. 사람들은 무엇을 그렸는지 명확히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저 어린 아가씨의 기개와 자태는 숙련된 수준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감은 눈 사이 코끝 아래로 묵향이 감돌았다. 한안은 손을 휘둘러 붓에 재차 먹물을 가득 묻히고 거침없이 붓을 움직였다. 그녀는 여리고 작고 사랑스러웠으나 마음대로 먹물을 훔쳐 뿌리는 뒷모습에서는 헤아릴 수 없는 풍치와 멋이 더해졌다. 자리에 있는 대신들은 모두 나이가 지긋했다. 그들은 이 어린 아가씨에게서 세간의 온갖 정과 천태만상을 여러 차례 경험하고 얻어진 온화하고 기품 있는 지혜를 엿볼 수 있었다.
순식간에 한안이 한 획을 마지막으로 그림을 마치는 것이 보였다. 한안은 붓을 놓고 눈을 뜨더니 달콤하게 미소를 지었다. 모두는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장 낭자, 잘 완성했느냐?”
황후가 물었다. 그녀는 이 어린 아가씨가 마음에 들었다.
“마마께 아룁니다. 아직 아니옵니다.”
한안은 말을 마치더니 몸을 돌려 몸 가까이에 있는 궁녀가 들고 있는 은쟁반 위의 술주전자를 들었다.
“좋은 술 한 방울을 빌리겠습니다!”
한안은 한 손으로 술잔을 잡고 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 손가락 끝에 술 한 방울을 묻혀 종이 위에 칠했다.
이 술은 완화양으로 다양한 생화를 사용하여 빚은 것이었다. 술맛은 시원하고 감미로웠으며 색은 밝고 맑으며 투명한 노란 빛이었다. 술 한 방울이 그림 위에 실리자, 먹빛과 선지의 흑백과 어울려, 옅은 노란 빛이 밝고 환하며 선명하고 화려해 보였다.
한안이 고개를 끄덕여 완성되었음을 표시하자 어린 궁녀 둘이 걸어와 선지를 붉은 비단을 깐 나무받침에 펼쳐서 황제와 황후에게 보였다. 황상의 눈빛이 일순간 멈칫하고는 오래도록 입을 열지 않았다.
사람들은 황상이 아무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을 보고는 불안하여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자기네들도 그림을 보고싶은 호기심이 일었다. 장어산과 이가기의 시선이 마주쳤다. 황상이 기뻐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한안의 그림이 몹시 엉망이어서 황상의 노기를 불러일으켰다고 추측했다. 황후의 표정도 헤아릴 수가 없었다. 모든 사람이 안절부절못하게 되었을 때가 되어서야 황상은 비로소 돌연 큰 소리로 크게 웃었다.
“여봐라, 모두에게 이 그림을 보여 주어라!”
궁녀가 서둘러 걸음을 옮겨 선지를 모든 사람의 앞에 펼쳐 드러내 보였다. 그림이 공개되자, 연회석에 가득한 사람들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선지에는 그저 먹의 흔적이 짙고 옅음으로 점점이 펼쳐 있을 뿐이었다. 먹빛은 손 가는 대로 아무렇게나 휘두른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또 정교한 것이 불가사의했다. 어떻게 보면 성루 아래, 군대와 기마가 개선하여 돌아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장병은 아래에 있고 먼 곳에 한 줄기 밝은 노란 빛이 빛나고 있으니 바로 천자의 자태였다.
한안이 그린 것은 바로 군대가 개선하여 돌아오는 성대한 정경이었고 그 높은 자리에 선 제왕이 내려다보는 그림이었다.
가장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화폭 위 그림의 내용이 아니라 공백에 쓰인 짧은 시구였다.
- 수많은 전쟁이 치러진 전쟁터에는 부서진 쇠갑옷,
성 남쪽은 이미 헤아릴 수 없이 겹겹이 포위되었네.
적진으로 돌진하여 오랑캐 장수를 쏘아죽이고,
남은 병사 천 기를 홀로 이끌고 돌아왔네.
<종군행>(이백)
그 시구는 용맹하게 적을 무찌른 대장군의 형상을 묘사해내고 있었다. 가장 풍치 있고 멋스러운 것은 필체였다. 의연하고 웅건한 필획은 초승달처럼 아름다웠고, 고풍스러우면서도 힘이 넘쳤으며 소박하면서도 출중하고 우아했다. 나무처럼 부드럽고, 맑은 바람처럼 온화했다. 만약 직접 눈으로 본 게 아니라면 저 최고 수준의 경지에 이른 진귀한 서화를 눈앞의 어린 아가씨가 그린 것이라고 어떻게 믿게 할 수 있겠는가! 경성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라 해도 이렇게 좋은 글씨를 쓸 수는 없을 것이며 이렇게 좋은 시를 지어낼 수는 없을 것이었다.
장어산과 이가기는 처음 받았던 충격이 사라지자 무한한 분노와 증오만이 남았다. 한안이 크게 이목을 끌었으니 장어산이 나설 기회가 없었다. 만약 자신이 장부의 적녀였다면, 지금 황상의 칭찬은 바로 자신의 것이었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한안을 향한 어산의 눈빛은 더욱더 질투로 충만했다.
이가기는 미친 듯이 증오스러웠다. 한안의 빙그레 웃는 저 얼굴을 볼수록 위선이 느껴졌다. 저런 재능이 있으면서 어떻게 감쪽같이 숨길 수 있었을까. 게다가 난처한 듯한 모습을 연출해서 자신이 희열감을 느끼게 한 것은 자신을 농락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이가기는 한안을 일생의 최대 적으로 삼으리라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한안은 등선을 향해 몰래 눈을 깜박여 모든 것이 괜찮다는 표시를 했다. 등선은 놀라기도 했지만 의혹이 일기도 했다. 한안이 언제 서법이 저렇게 우수해졌을까? 방금 전 그녀가 대청 가운데서 글씨를 쓸 때, 한안의 모습과 재능이 생소하면서도 눈이 부셔서 한안이 아니라는 착각마저 들었다.
사람들이 오만 가지 생각에 잠긴 동안, 한안은 대청 위에 속세를 벗어난 듯 서 있었다. 저 서화를 보니 열두 살로 되돌아오기 전의 삶이 주마등처럼 한 장 한 장 눈앞을 스쳐 갔다.
이런 최고 수준의 경지에 이른 서법이 어떤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것인지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과거 산적에게 납치되었다 풀려난 이후, 그녀는 자신을 온종일 청추원 안에 가두었다. 매일 밤마다 악몽이 끊이지 않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한안은 그때마다 등잔불을 밝히고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내며 잠시 그 악몽을 잊곤 했다.
어찌 쉽게 천재가 생길 수 있을까. 그저 익숙해진 것뿐이다. 같은 글자와 그림을 일백 번, 일천 번 연습하다 보면 제아무리 소질이 둔해도 열에 일곱은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로 인해 그녀의 서법은 평범했지만 그렇게 많은 불면의 밤을 거치고 나니 오늘 같은 출중한 그림이 나오게 된 것이다.
입가의 웃음에 씁쓸하고 떫은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세상 사람들은 눈앞의 영광만 볼 뿐 그 속의 피눈물은 모를 것이다.
부운석은 대청에 홀로 서 있는 꼬마를 관찰했다. 그녀가 자아내는 쓸쓸함과 고통이 다시 한번 그를 멍하게 만들었다. 이 어린 아가씨는 열두 살의 나이답지 않은 일 처리 방식을 보이는데 그녀의 짧은 인생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황상은 하하 크게 웃으며 연달아 세 번이나 훌륭하다, 말하였다.
“우리 대종에 이런 인재가 또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구나! 소녀의 기개가 대장부 못지않구나!”
운예 군주의 춤과 이가기의 거문고 소리에 비해 이 한 폭의 서화는 여아의 아름다움과 부드러움을 버리고 상대의 허를 찔러 기선을 잡아 모든 것을 글자로 말하여 사람들이 살피게 했다. 자연스럽고 품위가 있으면서도 뛰어난 필치를 보면 소녀의 거리낌 없는 마음의 경지를 알아볼 수 있었다. 뉘 집 여아가 전쟁터를 그림으로 그릴까. 장가의 4소저는 다른 집 소저에 비해 견식이 많다는 것이 엿보였다. 덕분에 이가기의 곡은 수준이 떨어지는 듯했다.
자리에 있는 용맹스러운 장병들이 한안에 대해 더욱 극찬했다. 이처럼 꾸밈없는 어린 아가씨가 말하는 것 또한 거리낌 없고 천진하니 호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한안은 재차 절을 하고 비로소 웃으며 말했다.
“이 그림은 바로 대종의 서북 대승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저는 성 장군이 전장에서 적을 무찔렀으니 대종의 영웅이라 생각합니다.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종에 황상 같은 명군이 계시고, 성 장군 같은 신하가 있으니 대종은 분명 크게 융성할 것입니다.”
한안이 말을 마치고 성 장군에게 웃어 보이자 성뢰는 살짝 멍해졌다. 한안의 맑고 투명한 두 눈을 마주하고 난감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소신은 다만 본분을 다하였을 뿐, 영웅이라는 두 글자는 송구하여 감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황상은 하하 큰 소리로 웃었다.
“성 장군은 겸손할 필요 없다. 짐은 이번 대승에 네가 공신임을 안다. 장 낭자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네가 있어야 우리 대종의 강산이 비로소 더욱 크게 융성할 것이다!”
분위기가 순간 떠들썩해졌다. 신하들은 황상이 크게 기뻐하는 것을 보고는 성 장군의 혁혁한 공로를 분분히 과찬하면서 하늘이 대종을 보우하신다고 허풍을 떨어댔다.
한안은 한시름을 놓았다. 비록 말로는 대갓집 소저들의 재주와 기예를 겨룬다 하지만 오늘의 궁중 연회는 결국 서북 대승을 경축하기 위한 것이니 본말이 전도되어서는 안 되는 게 맞았다. 그녀의 한마디로 연회의 무게 중심이 다시 잡혔다. 그리고 한안은 간접적으로나마 성 장군을 향해 호감을 표현했다. 성 장군은 됨됨이가 광명정대하며 또한 이후 태자 일당의 중요한 심복이 될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장 낭자, 짐은 너의 왼손이 글을 쓰는 데 극히 능숙한 것을 보았다. 서법 또한 지극히 뛰어났다. 어떤 사람에게 사사 받은 것이냐?”
황상이 돌연 물었다.
한안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답했다.
“황상께 답합니다. 소녀는 남에게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증조부가 일찍이 소녀에게 전쟁터의 일을 이야기하여 주었습니다. 그때 많이 감격하였지요. 후에 소녀의 다섯째 동생이 전쟁터에 나가 영웅이 되고 싶어 하여 이따금 소녀와 논의를 하였습니다. 소녀는 거기에 영감을 받아 평소 변방의 서화와 관계가 있는 글을 쓰며 스스로를 위안하곤 하였습니다. 오늘 보잘것없는 솜씨를 보여 뭇 대인들과 부인, 소저들의 눈을 더럽혔을까 걱정이오니 참으로 부끄럽사옵니다.”
한안의 말은 사리에 맞을 뿐 아니라 나긋하고 아름다우며 총명하고 지혜로웠다. 황상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장 노(老)대인은 일찍이 대종의 맹장으로 전장에서 늠름한 자태에 강건하고 힘이 넘쳤지. 지금 너의 다섯째 동생의 마음이 무예에 있다 하니 반드시 잘 이끌어서 이후 우리 대종 강산을 위하여 힘을 쓰게 해야 할 것이다.”
돌아볼 필요도 없이 장사양의 얼굴빛이 분명 보기 흉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문을 중시하고 무를 경시했다. 칼과 창을 잡는 그들 무사를 뼛속까지 경멸했다. 그러나 오늘의 칭찬은 무사의 영예로운 이름에 기대어서 나온 것이었다. 황상이 한안의 글솜씨 유래를 묻기에 장사양은 한안이 모든 공로를 부친의 가르침 덕으로 돌릴 거라 여겼다. 그러나 그녀의 대답 속에 뜻밖에 자신의 이름은 한 자도 언급되지 않았으니 동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의 체면은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
한안은 장한명을 위한 목적이 달성되었음을 깨달았다.
“소녀, 황상께서 바라시는 바를 반드시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황제는 한안이 자신을 마주할 때 다른 소저들이 놀라서 벌벌 떠는 것과 달리 침착하고 태연하게 대답하는 것에 놀랐다. 미리 준비한 게 아니라면 너무 천진하여 공포가 어떤 것인지 완전히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 아이가 거리낌이 없는 걸 보아하니 전자는 아닌 듯 했다. 그럼 분명 마음이 순결하고 선량하며 총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일 것이다. 눈빛이 저절로 깊이 가라앉았다. 장사양이 이렇게 영롱하고 맑으며 깨끗한 딸을 길러냈다고?
“짐의 성지를 전하라. 장가 4소저는 지극히 총명하니 특별히 침향나무 지팡이 하나, 진주 한 줄, 비단 네 필, 금괴 열 정, 은괴 열 정, 진귀한 먹 두 갑, 금은 술잔 각 두 개, 금은 목걸이 두 개, 동전 100냥을 하사하노라.”
좌중의 소저, 부인들의 눈빛이 모두 질투로 붉어졌다. 한안은 오늘 정말 운이 좋았다. 태후에게는 하사품을 얻었고, 황후는 남다른 눈으로 그녀를 대했고, 게다가 황상에게는 넘칠 듯한 칭찬을 받았다. 남의 시선을 끌지 못하던 장가 4소저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한 것이다.
등선과 장한명은 몹시 기뻐했다. 특히 장한명은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느꼈다.
주씨과 장어산은 표독스럽게 한안을 노려보며 손가락 끝이 손바닥을 깊숙이 파고들 정도로 손을 움켜쥐었다. 자신들의 표정이 너무 보기 흉하지 않도록 이를 악물어야 했다.
한안은 무릎을 꿇어 감사를 표했다.
“황상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마냥 좋을 수는 없었다. 황상의 하사품이 크니 그녀를 가벼이 볼 수 없게 되겠지만 이는 타인의 시기와 질투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소저들의 질투 어린 눈빛은 한안을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이가기는 입술을 깨물었다. 마음속에 거칠고 사나운 파도가 치는 것처럼 뒤숭숭했다. 내일, 이 궁중 연회에서의 일이 시중에 전해지면 아마도 경성 최고 재녀의 명성은 바뀔 터였다.
한안은 사람들의 눈빛을 견디며 자리로 돌아왔다. 등선이 흥분하여 그녀의 손을 끌어다 잡았다.
요조숙녀는 군자의 좋은 짝이라. 이 재능이 넘치는 어린 아가씨는 이미 적지 않은 공자들의 흥미를 끌었다. 나이가 좀 어려 보이기는 하지만 몇 년 기다려도 무방했으니.
7황자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 한안을 의미심장하게 보고 있었다. 술잔을 엎어 놓자 갈색의 짧은 저고리를 입은 젊은 사내종이 즉시 앞으로 나왔다. 그는 가벼운 소리로 분부했다.
“즉시 가서 장한안의 신상을 조사해라.”
젊은 사내종이 떠난 후, 연회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목풍이 들보 위에서 뛰어내려 사내종을 뒤를 따라 밤 풍경 속으로 사라졌다.
한안은 오른쪽 손등이 더욱 아팠다. 그때 청순하고 아름다운 하녀가 다가와 고개를 수그리며 말했다.
“장 낭자, 이것은 저의 주인께서 보내신 고약입니다. 손의 상처를 치료하세요.”
“너의 주인?”
하녀는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돌렸다. 한안은 그녀의 눈빛을 따라 돌아보았고 그 순간 저절로 숨이 턱 막혔다. 가슴속이 텅 비어 버렸다.
그녀에게 미소를 보내고 있는 것은 오늘 밤 줄곧 애써서 회피하고 있었던 세자 위여풍이었다.
한안은 순간 멍해졌다가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숙이고 주먹을 꽉 쥐었다. 위여풍의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았지만 이 연고가 공적인 것이든 사적인 것이든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한안은 고개를 들고 하녀를 향해 웃었다.
“공자의 걱정해주는 마음을 받겠으나 소녀는 이미 괜찮습니다. 진귀한 것이라 소녀가 감히 받을 수 없으니 번거로우시겠지만 공자께서 거두시라 하세요.”
그 하녀는 한안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생각지도 못한 듯했다.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무언가 말하고 싶어 했으나 한안이 하녀를 아랑곳하지 않고 차를 홀짝거리기 시작하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녀는 멍하니 있다가 어쩔 수 없이 씩씩거리며 돌아갔다.
한안은 비로소 몰래 안도의 숨을 내쉬다가, 불시에 등선의 음흉한 웃음과 마주했다.
“솔직히 설명해!”
“무얼 설명해?”
등선이 눈을 깜박거렸다.
“위 왕세자가 어째서 네게 약을 보냈지? 언제 알게 된 거야?”
한안도 의심스러웠다. 이번생에서는 위여풍을 처음 만났는데 그는 왜 갑자기 약을 보낸 것일까? 무슨 뜻으로? 등선에게 고개를 저으며 한안은 솔직하게 말했다.
“나도 몰라. 오늘 그를 처음 봤어.”
등선은 그녀의 말이 거짓이 아닌 것 같자 잠시 생각하다가 바로 또 웃었다.
“그가 너에게 마음이 있는 게 아닐까? 너한테 재능이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을 빼앗긴 것인지도 모르지. 그래서 약을 보내서 관심을 보인 거 아냐?”
한안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 위 세자는 나에게 그저 낯선 사람일 뿐이야.”
한안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전생에 장어산도 확실히 말한 적이 있었다. 위여풍은 그 자신이 지극히 재능이 넘치기에 다른 사람의 재능도 아꼈다고. 그래서 한안도 마음을 다하여 부중에서 책을 읽고 글씨를 쓰며 자신이 위여풍의 눈에 들 수 있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설마 정말로 자신의 서화가 그에게 재능을 아끼는 마음을 불러일으켰을까?
등선은 이상하다는 듯 그녀를 보았다.
“위 세자 가문과 너의 가문도 걸맞고 인품, 재능, 용모도 모두 상등이야. 너 정말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 2년만 지나면 너도 성년이 되니까 혼사는 모름지기 일찌감치 준비해야 해.”
등선은 본래부터 대담하게 말을 했기에 한안은 개의치 않고 그저 탄식하며 말했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조차 모르는데 어떻게 마음이 움직일 수 있겠어. 겉모습만 본다는 건 지나치게 경솔한 짓이야. 인연은 우연히 만날 수는 있어도 억지로 얻을 수는 없는 거야.”
한안의 표정은 너무나도 단호했다. 그리고 그녀의 말 속에서 혹독한 시련을 겪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친구였건만 등선은 그녀를 꿰뚫어 볼 수가 없었다.
한안은 고개를 돌리자마자 분노에 찬 이가기의 눈빛과 딱 마주쳤다. 그 눈빛은 이전보다 한층 더 흉악했다. 이가기는 숨기지도 않고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이가기의 표정에서 무언가 실마리를 찾을 것 같았으나 명확하게 떠오른 건 없었다.
장어산이 비웃으며 말했다.
“넷째 동생은 정말로 재능이 뛰어나네. 이렇게 빨리 상처 약을 보내오는 사람도 있고 말이야.”
한안이 오늘 남자들을 홀렸다는 의미였다. 소저들이 한안을 보는 눈빛이 안 좋아졌다. 당연하다. 누가 자신이 받을 이목을 남에게 빼앗기기를 원할까? 한안은 이가기가 자신을 보는 눈빛에 더욱더 혐오와 분노, 증오에 차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가기와 위여풍, 설마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
한안은 가만히 웃었다.
“어산 언니, 과찬이네요. 오늘 연회석상의 여러 소저들이 모두 무탈한데. 유독 저 혼자 손에 상처를 입었어요. 연회석상의 모든 분이 다 마음이 선량하시니 약 좀 보내주는 것이 뭐 대단한 거라 할 수 있겠어요. 만약 제가 어산 언니에게 화상을 입혔다고 해도 마찬가지로 약을 보내주는 사람이 있을 테지요.”
그 한마디 말이 장어산의 몸을 휘감았다. 한안은 이 모든 것을 조성한 것은 바로 장어산이라는 것을 일깨웠다. 어찌 그렇게도 공교롭게 한안의 손에 화상을 입힐 수 있었을까?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어찌된 일인지 명백히 알 수 있었다. 이는 그저 적서 간의 다툼에 불과했던 것이다. 다만 사람들이 생각지 못했던 것은 한안이 왼손으로 글을 써 오히려 자신의 영예를 드높였다는 점이었다.
장어산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한안의 있는 듯 없는 듯한 조소에 그녀는 얼굴이 온통 새빨개졌다. 하지만 주씨의 눈짓을 받은 장어산은 다른 행동을 할 수 없어 속으로만 증오심을 불태웠다.
오히려 한안은 많이 편안해져 등선과 말을 나누며 차를 마셨다. 오늘 궁중 연회의 목적은 이미 달성했다. 예측하지 못한 일이 있기는 했지만 자신이 원하던 것은 얻어냈기에 유쾌해졌다.
궁중 연회가 끝난 후, 급람과 주홍은 한안을 따라갔다. 마차는 궁의 담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장사양과 장한명은 한 마차에 타고 먼저 떠났고 주씨와 장어산은 다른 한 대에 탔다. 한안과 등선이 작별한 후, 담장 아래는 거의 사람이 없었다. 막 마차에 오르려는데 몸 뒤에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장 낭자.”
그 목소리는 따뜻하고 매끄러우며 매력적이었다. 한안의 몸이 떨렸다. 마차의 휘장을 들어 올리던 손이 잠시 멈추었다가 이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위여풍은 옅은 보랏빛 비단으로 짠 넓은 소매의 장포를 입어 품위가 있으면서도 단정했다. 위여풍은 웃음을 머금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한안의 머리가 일순 멈추었다. 몰래 주먹을 꽉 움켜쥐고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고서야 비로소 천천히 웃는 얼굴을 드러냈다.
“위 왕세자를 뵙습니다.”
위여풍이 웃으며 말했다.
“장 낭자는 아무래도 내가 두렵소?”
“아닙니다.”
“그럼 어째서 나를 똑바로 보려 하지 않는 것이오?”
위여풍이 캐물었다. 처음부터 한안은 그의 얼굴이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설령 웃는 얼굴을 하고 있어도 경직되어 있는 것이 느껴졌다.
한안은 시선을 올려 그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위 세자께서 그 말씀을 하고 싶으셨던 것이라면 때를 바꾸어야겠습니다. 날이 이미 늦었으니 소녀가 위 세자와 여기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실로 부적절합니다.”
위여풍은 조금 아연실색했다.
자신은 의젓한 사람으로 지금까지 모든 여인이 그에게 달라붙어 떠나려 하지 않았지 이런 대접을 받은 적이 없었다. 오늘 이 어린 아가씨의 넘치는 재능은 자신의 흥미를 끌었다. 나중에 그녀가 상처를 입었다는 것이 거짓이 아님을 듣고 특별히 사람을 시켜 약을 보냈으나 거절당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몇 마디라도 말을 붙이고 싶었는데 그와 말할 가치가 없다 여기는 것 같았고 눈길을 주는 것조차 인색했다. 연회 중에는 달콤하게 웃던 사람이 왜 지금은 사람이 바뀐 것 같을까. 영롱하고 사랑스러운 어린 아가씨가 저렇게 싸늘하고 메마른 눈빛을 지녔다고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그대는……나를 싫어하시오?”
잠깐 주저하며 말을 꺼낸 위여풍은 말을 뱉자마자 후회했다. 어찌 이런 말을 물을 수 있단 말인가. 만약 누군가 듣던가 혹 눈앞의 이 어린 아가씨가 이용한다면 많이 성가셔질 것이었다.
그러나 한안은 그저 극도로 정중하게 대답했다.
“소녀는 위 세자와 처음 만났습니다. 어찌 아무런 이유도 없이 싫어할 수 있겠습니까?”
위여풍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싫어하지 않는다? 또한 좋아하지도 않고? 말투가 조금 차갑게 굳어졌다.
“어째서 나의 약을 받지 않은 것이오?”
한안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공로가 없으면 봉록을 받지 않는 법이지요.”
“너!”
위여풍은 화가 나 숨이 가빠졌고, 준수한 얼굴은 순간 보기 흉해졌다.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틀림이 없어 모난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기가 막히게도 사람의 마음을 틀어지게 만들었다.
돌연 한안의 몸 뒤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위 세자, 어찌 아직도 떠나지 않은 것인가?”
그 목소리는 맑고 그윽했으며 살을 엘 듯 차가웠다. 마치 향기롭고 고상한 화주(花酒)와 같아서 사람으로 하여금 조급한 상황 아래서도 은은한 서늘함을 느끼게 했다. 한안은 고개를 돌려 보았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부운석의 자태는 우아하고 늘씬했다.
위여풍은 순간 당황했다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여기에서 ‘장 4소저’를 우연히 만나 그 김에 몇 마디 나누었습니다.”
한안은 마음속으로 눈을 흘겼다. ‘죽은 척 가장한 소저’라니. 위여풍은 한안의 호칭인 ‘장 4소저’와 성조만 살짝 다르고 발음이 같은 말을 써서 자신을 비웃은 것이다. 위여풍은 고의로 그런 게 아닐까?
한안은 마음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위여풍이 현청왕의 앞에서 그녀를 지나치게 곤란하게 할 리는 없었다.
부운석이 냉랭하게 말했다.
“위 왕이 지금 자네를 사방으로 찾고 있네.”
위여풍은 한안을 흘끗 보고 현청왕을 본 다음, 옅게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됐으니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장 낭자, 왕야, 이만 작별을 고하겠습니다.”
위여풍은 큰 걸음으로 자리를 떠나면서도 심중에 의심이 일었다. 부운석과 장한안은 무슨 관계일까?
위여풍이 떠나는 것을 보자 비로소 한안의 마음이 놓였다. 위여풍을 우연히 만나는 건 어려운 전투를 치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눈앞의 신영이 우뚝 서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몰래 괴로운 비명을 질렀다. 부운석은 그녀를 곤경에서 구해주려던 것이 분명했다. 다만 어째서일까?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한안은 고개를 들다가 부운석의 심오하고 예리한 눈빛과 딱 마주쳤다. 그의 눈동자는 칠흑같이 검었고 잔잔한 것이 마치 사람의 혼백을 빨아들이는 힘이 있는 듯했다. 이런 사람 앞에서는 감추어진 마음이 다 드러나는 듯했다. 등불 아래에서 드러난 그의 빼어난 콧날 아래의 얇은 입술은 곱고 아름다웠으며 붉은 윤기가 흘렀다. 흑발은 허리춤까지 드리워져 청년이 더욱 수려하고 격조 있게 돋보이도록 했다. 한안은 한순간 조금 멍해졌다. 그는 매화 숲과 궁중 연회 때와 또 달랐다. 지금의 부운석은 그 특유의 냉랭함과 신선 같은 기운을 벗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휘감고 있었다. 그 아름다움은 착한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사악했다.
그녀의 숨김없는 눈빛에 노기가 인 부운석은 눈살을 찌푸리며 차가운 소리로 말했다.
“언제까지 보고만 있으려 하는 것이냐?”
한안은 조금 난처해졌다. 남자를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다니. 경성 제일의 절색 혁련욱을 만났다 해도 이런 추태를 저지른 적이 없었다. 한안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왕야께서 만약 별다른 일이 없으시다면 소녀는 먼저 떠나겠습니다.”
이 왕야의 앞에서는 순진한 척해도 헛수고이니 솔직하게 자신이 가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밝히는 편이 나았다.
부운석의 눈 속에 의아한 빛이 스치더니 즉시 눈썹을 치켜 올렸다.
“위여풍을 아느냐?”
한안은 즉각 대답했다.
“아닙니다.”
오래도록 부운석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한안은 이상해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뜻밖에도 자신의 곁으로 걸어와 살짝 몸을 굽히고는 한안의 손안에 작은 병 하나를 밀어 넣었다.
코끝 아래 따뜻한 향기가 눈 깜짝할 사이에 스쳐 지나갔다. 한안은 무의식중에 수중의 병을 꽉 움켜쥐었다.
“이게 무엇인가요?”
눈빛이 순간 경계심을 띠었다.
“화상약이다. 흉터를 남기고 싶지 않다면 상관 말고 써라.”
부운석은 몸을 똑바로 세우고 딱 자신의 가슴 앞까지 닿는 한안을 굽어보았다.
자신은 대청 가운데에서 오른손에 상처를 입었다고 말했지, 화상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사람은 전부 훤히 내다보고 알기라도 한 것처럼 화상약을 주는 걸까?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부운석의 맑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로가 없으면 봉록을 받지 않는다고 했나. 만약 네가 줄곧 이러한 생각을 품고 있는다면 아마 한평생 포상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그녀가 한평생 공로가 없을 거라는 말인가? 한안은 조금 화가 나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이 사람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어쩜 이렇게 말을 거슬리게 하는 건지. 말마다 비꼬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안을 도와 곤경에서 구해주는 것이 고의로 트집을 잡는 것 같진 않았다.
한안이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부운석은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한안은 별수 없이 약병을 꽉 움켜쥐고 마차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부로 돌아가는 길에 줄곧 그에 대해 생각했다. 상식에 비추어 보자면 부운석은 자신에 대해 경계하는게 마땅했다. 나아가서 목숨을 앗아갈 방법을 생각할 수도 있었다. 오늘 궁중 연회에서 부운석은 장한안이 보통의 규방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목격했다. 설령 태자의 일 같은 건 대인의 넓은 도량으로 따지지 않는다 해도 매화원에서의 일, 황가의 비밀을 노리려 한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 대하여 이렇게 관대해서는 안 되지 않나?
부운석의 태도는 실로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부에 돌아오니 이미 깊은 밤이었다. 장사양은 곧장 공동원으로 갔고 청추원 안에는 유모가 등불을 밝히고 지키고 있었다. 유모는 그녀가 돌아온 것을 보더니 서둘러 한안의 피풍의를 받고, 급람과 주홍에게 가서 더운물을 가져오라 분부했다.
유모는 한안의 상처를 보고 마음 아파하며, 장황하게 장어산을 욕했다. 유모가 정신없이 약을 찾아야 한다고 하자 한안이 말했다.
“유모, 조급하게 굴 것 없어. 여기 약이 있어.”
한안은 소매 속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냈다.
약은 담녹색이었다. 바르니 손 위에서 담담하고 맑은 향이 났고 옅은 냉기가 서늘했다. 약을 잘 발라서인지 통증은 그리 느껴지지 않았다. 보아하니 이 약은 좋은 것이었다. 현청왕의 씀씀이가 인색하지는 않구나.
한안은 침상에 누워 현청왕에 대한 회귀 전 기억을 자세하게 회상했다. 그는 어린 나이에 큰 성취를 이뤄 권력이 막강했다. 그 권력은 조정과 재야에 미치며 민심을 얻었고 백성들 사이에서는 명성이 상당히 좋았다. 그리고 후에 7황자와 태자의 후계자 다툼이 격렬해질 때는 그 속에 적지 않게 연루되기도 했다. 2년 후에는 큰 병을 얻어 신부까지 사서 액땜을 했는데 그때 그 신부는……. 서융의 공주였다.
존귀한 공주가 액막이 신부가 되다니 실로 불가사의했다. 백성들이 흥미진진하게 떠들어댔기에 한안도 분개하며 들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 비정상적인 일이었다. 아마도 남모르는 비밀이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액막이 신부가 시집온 후, 신기하게도 현청왕의 몸은 점점 좋아졌다.
전생에 대혼 전, 7황자와 태자의 후계자 다툼이 최고점에 달했다. 그 당시 장사양은 집에 돌아오는 때가 극히 적었고 무슨 중대한 일이 있는 듯했다.
이번 생에서 위 왕 일파와 멀리해야 한다면 태자 쪽이 바로 절호의 비호 세력이었다. 그렇다면 태자 옹호자인 현청왕에게 한두 가지 일깨워줄 방법을 강구해야 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장가의 적녀 신분으로서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대할지는 알 수 없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한안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현청왕이 아니라 자신의 부중 지위였다. 장부 내의 주씨 모녀가 제일 큰 말썽거리였다. 그리고 오늘밤 그런 일을 겪었으니 주씨 모녀는 더 이상 그녀를 편안히 두지 않으리라. 장부에만 머무르던 예전에도 주씨에게 음해를 당했는데, 이번엔 연회에서 이목을 끌었으니 곧 그들이 사고를 일으킬 것이다.
내일, 또 격전을 치러야 할 것이다.
6장
이튿날 아침, 한안은 장사양에게 문안을 갔다. 장사양 옆에는 이미 주씨 모녀가 앉아 있었다. 장어산은 장사양과 한창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한안의 기억 속에 장사양이 이렇게 온화하고 정겨운 얼굴로 자신을 대하는 것을 본 적은 거의 없었다. 눈빛이 차가워진 한안은 앞으로 나가 예를 올렸다.
“부친께 문안을 올립니다.”
장사양은 한안이 들어온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불만스럽게 말했다.
“어찌 이렇게 늦었느냐? 어산은 반 시진 전에 왔다. 장부의 적녀가 돼서 이렇게 게을러서야 되겠느냐?”
한안이 대답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주씨가 이어서 말했다.
“4소저는 어제 궁중 연회에서 장부의 체면을 세웠으니 실로 고생했습니다. 좀 늦어도 잘못은 아니지요. 노야께서는 딸에게 너무 뭐라 하지 마세요.”
궁중 연회가 언급되자, 장사양은 한안이 황상 앞에서 했던 그 말을 떠올렸다. 장사양의 딸로서 자신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은 그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장사양은 더욱 냉혹해졌다.
“흥, 큰일도 아닌 것을 자기가 잘났다고 여기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한안이 훈계를 받는 것을 강 건너 불 보듯 하고 있던 장어산의 눈이 기쁨으로 반짝였다. 한안은 단정하게 서서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친의 가르침이시니 이후 문안은 반드시 반 시진을 앞당기도록 하겠습니다. 어산 언니와 같이요.”
부중 문안 시간과는 다르게 장어산과 맞추겠다는 의미였다. 적녀가 일개 첩실 소생의 딸과 시간을 맞춰야 한다니. 주씨의 얼굴빛이 변하면서 환히 웃으며 말했다.
“4소저의 일편 효심을 노야께서도 자연히 아시지요.”
한안은 그저 웃으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주씨가 장사양에게 부드러운 소리로 말했다.
“노야, 소첩이 부탁드릴 일이 하나 있습니다.”
장사양이 말했다.
“무슨 일이냐?”
주씨는 한안을 한 번 흘끗 보았다.
“어제 4소저의 서화가 매우 좋았지요. 어산이 제게 4소저에게 부탁해달라고 간청을 하였습니다. 4소저가 그녀에게 서화를 가르치게 해달라고요.”
장사양이 큰 손을 휘저었다.
“그게 무슨 어려운 일이라고. 한안, 너는 온종일 하는 일이 없으니 바로 네 언니를 가르쳐라.”
장어산이 진심으로 소망한다는 눈빛을 보냈다. 장사양의 명령을 들은 한안은 웃으며 말했다.
“보잘것없는 재주인데 감히 어떻게 부끄러운 솜씨를 내놓을 수 있겠어요. 어산 언니도 실력이 뛰어나니 한안이 감히 잘난 체할 수 없어요. 경성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연 부인을 청하여 어산 언니를 가르치게 하는 게 어떨까요? 연 부인은 경성 안에서 재능을 따를 자가 없어요. 거문고, 서예, 그림, 바둑 어느 하나 정통하지 않은 게 없으니 한안보다 훨씬 나을 거예요. 주 이낭과 어산 언니는 어떻게 생각해요?”
장어산은 본래 자기가 한안보다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한안의 솜씨는 배우고 싶어서 억지로 동의했었다. 허나 그녀의 말을 들어보니 연 부인을 청하면 한안보다 더 훌륭해질 것이니 앞뒤 생각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그렇게 되면 좋지…….”
그러면서 주씨의 눈치를 보며 또 움츠러들었다. 주씨는 한안의 거절이 불만이었지만 연 부인의 명성을 알기에 마음이 움직였다. 한안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연 부인은 확실히 재능과 기예가 모두 탁월했다. 장어산이 한두 가지만이라도 배울 수 있다면 반드시 한안을 능가할 것이며 높은 가문에 시집가는 데에도 유리한 밑천이 될 터였다.
주씨가 바로 웃으며 말했다.
“어산이 종일 4소저를 귀찮게 한다면 소첩 또한 마음이 불편할 거예요. 그러니 연 부인을 청하는 것이 어떨까요? 청할 수 있을지 어떨지 알 수 없어서…….”
장사양이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그것이 뭐 어려운 일이라고. 내가 바로 하인을 보내어 청하게 하겠다.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목적이 달성된 것을 보며 한안은 웃었다.
“아버지, 저는 오늘 등선 언니와 약속이 있어요. 먼저 물러나겠습니다.”
장사양은 한안이 여기에 서 있는것도 눈에 거슬려 귀찮은 듯 말했다.
“어서 가봐라.”
한안은 예를 올리고 단정하게 돌아서 물러나왔다.
청추원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급람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소저, 어째서 주 이낭에게 좋은 의견을 내주셨어요? 그러다 그쪽이 소저를 능가하면 어찌하려구요?”
한안이 입을 열기를 기다리지 않고 주홍이 바로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쪽이 어찌 소저와 비교나 할 수 있겠어?”
한안은 웃었다. 사방에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가볍게 말했다.
“너희들 그 연 부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니?”
급람은 멍해졌다가 놀라운 듯 한안을 보았다.
“설마…….”
“함께 지내기 좋은 사람은 아니란다.”
한안은 가볍게 얘기하고 넘어갔다.
“어산 언니가 평소에 한가하니 할 일을 좀 찾아주는 게 좋지.”
급람이 참지 못하고 칭찬하며 말했다.
“소저 정말 총명하세요.”
연 부인에 대해 알게 된 것도 전생의 주씨 덕이었다. 전생에 한안은 위여풍에게 시집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알고 난 뒤부터 자신이 어딘가 좀 잘못하는 게 있을까 봐 몹시 두려웠다. 그래서 교습하러 와 줄 부인 한 명을 청해 달라고 부탁했다. 주씨는 당시 정말로 그녀를 위해 사람을 물색했고, 그게 바로 연 부인이었다.
연 부인이 재능이 넘친다는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세상에서 재능과 인품이 결코 동일한 것은 아니다. 연 부인은 젊었을 때 궁에 들어가 수녀(秀女: 황제의 후궁을 들이기 위해 뽑는 여자)가 될 뻔했다가 용모가 평범해서 무산된 적이 있었다. 그 때문에 연 부인은 미녀를 싫어했다. 더구나 주씨가 특별히 ‘당부’하여, 전생에 한안은 연 부인에게 크고 작은 학대를 받았다. 장어산은 아름다우니 연 부인이 그녀에게 적지 않은 괴로움을 안길 것이고, 장어산 또한 스스로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 연 부인과 충돌할 게 뻔했다. 장어산이 재주를 기르기 위하여 참고 양보할지 아니면 모욕을 받고 지지 않으려 들지 모르겠으나 그것도 그녀가 관심 둘 바는 아니었다.
“소저, 우리가 등 상서부에 가는 건가요?”
주홍이 물어왔다.
한안은 고개를 저었다.
“가서 볼품없는 마차를 꺼내 와라. 순창 무관으로 가자.”
급람은 의아해하면서도 곧 마차를 찾아왔다. 한안은 평범한 청색 비단 조끼로 갈아입고, 겉에는 은홍색의 허리까지 오는 솜저고리를 걸쳤다. 아래에는 하얀색 주름이 잡힌 치마를 입으니 얼핏 보면 여종 같았다.
허리까지 오는 솜저고리는 많이 짧아진 상태였다.
“소저, 언제 여의루에 가서 옷 몇 벌을 맞추어야겠습니다. 이건 짧아졌어요…….”
주홍이 말했다.
한안은 그제야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쉬웠다. 이 옷들은 어머니가 세상에 계실 때 지어주신 것이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 후, 자신의 의복과 음식 및 일상생활은 급람, 주홍과 유모를 제외하면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저절로 쓴웃음이 났다.
“필요 없어. 이 정도면 괜찮아.”
주홍이 조금 주저했다.
“소저께서 평소에 하인들에게 상으로 주시는 은자면 몇 벌 짓기에 충분합니다.”
한안은 고개를 저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좀 입기로서니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하인들에게 하루라도 상을 주지 않으면 무슨 간교한 술수를 부릴지도 몰라. 게다가 나는 은자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는 아련하게 미소 지었다.
“그만두자. 이런 말은 할 것 없다. 우리 가자꾸나.”
주홍은 면사를 찾아다가 한안에게 세심하게 씌웠다. 한안은 작은 상자에서 은표 한 장을 꺼내어 소매 속에 넣었다. 순창 무관은 최근에 여자 무관을 신설했다. 경성의 여인네들이 연이어 몰려와서 한순간에 북적거리게 되었다는 것을 이미 들은 바 있었다. 이자를 받아내러 가기에 딱 좋은 때였다.
*
마차는 힘차게 달렸다. 한안은 마차 바깥으로 소상인들의 왁자지껄한 소리를 들으며 급람이 알아온 순창 무관의 여자관과 관련된 일들을 떠올렸다.
여자관과 남자관은 달랐다. 여자라는 신분의 특수성 때문에 스스로 사범을 선택할 수 있었다. 게다가 관내에서 무예를 익힐 필요 없이 사범이 부중에서 교습도 할 수 있었다.
양기가 이 방법을 내놓자 경성 안 모든 사람이 처음엔 의아해하며 관망만 하다가 나중엔 자기네도 해보고 싶어 안달을 냈다. 특히 어려서부터 화사한 옷차림 대신 무인 차림을 좋아했던 장군 가문의 여인들에게는 호응이 더욱 컸다. 사범 한 분을 부중에 오도록 청하여 무예 교습을 받는 것은 대단히 괜찮은 일이었다. 여자관의 명성과 위세는 금세 솟구쳐 올라 남자관에 비해 더하면 더했지 모자라지 않을 수준까지 올랐다.
한안은 한숨을 돌렸다. 그동안 줄곧 걱정해온 일이 마침내 해결되었다. 전생에서는 2년 후에야 여자 무관이 생겼다. 창립자는 양기가 아니라 진 귀비의 친정인 진 시랑이었다. 그때도 여자 무관은 매우 흥성하고 번창했다. 하지만 양기는 난치병에 걸려 순창 무관은 점점 쇠락했다. 진 시랑은 여자 무관에 의지하여 경성 귀인들을 구슬렸고 그리하여 7황자 일파의 세력은 더욱 거대해졌다.
애초에 한안이 양기에게 이 의견을 말한 것은 7황자 일파가 득세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제안을 하면서도 양기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이젠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마차가 무관 앞에 도착하자, 한안은 급람과 주홍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문을 열고 맞이하는 어린 동자는 지난번의 그 귀엽고 청수한 소이였다. 그는 한눈에 바로 급람과 주홍을 알아보았다. 한안이 지난번 그 소녀인 것을 알고는 얼굴이 빨개졌다.
“낭자, 저를 따라오시지요.”
한안은 어린 동자를 따라 작은 길을 굽이굽이 돌아서, 마침내 지난번 양기를 만난 그 대청에 도착했다. 막 대청에 들어서려는데, 양기가 중앙의 황리목 의자에 앉아 차를 맛보는 것이 보였다. 한안을 본 양기가 무심하게 말했다.
“왔느냐.”
한안은 예를 올리고 중앙에 서서 말했다.
“노 선배님이 보아하니 여자 무관이 괜찮게 진행되는 듯합니다.”
양기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한 번 보았다. 말투에서 기쁨이나 노여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자를 청구하러 왔느냐?”
“네.”
한안은 명쾌하게 답하자 양기는 그녀를 몇 번 더 보더니 한참 후에 탄식했다.
“너는 아무튼 대담하구나. 여자아이 같지가 않아.”
한안은 살짝 웃었다.
“노 선배님,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네요.”
양기는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의 눈 속에 여전히 담담한 기색만이 있는 것을 보고 조금은 실망했다.
“나이가 어린데 이렇게 노련하고 진중하다니 누구에게 배운 것인지 모르겠구나. 됐다. 소이, 가서 사범들을 불러와라.”
급람과 주홍은 시선을 한 번 마주쳤다. 어린 동자는 총총히 가더니 잠시도 지나지 않아 경장 차림의 여자 사범 십여 명을 이끌고 들어왔다.
“무관에서 무예가 훌륭한 사범들이다. 어느 사람을 선택하든 너 스스로 골라라.”
양기도 빈틈이 없었다.
한안은 정신을 집중하여 보았다. 여자 사범들은 모두 뛰어나고 늠름했으며 씩씩하고 시원스러워 주먹과 발이 민첩한 모습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용맹한 기개와 당당한 풍격이 느껴져 마음속으로 저도 모르게 몇 번 찬탄했다.
어떻게 고르냐 하는 것은 정말로 난제였다.
한안은 붉은 저고리의 여자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여자는 위풍당당해 보였고 몸이 크고 높았으며 전신에 힘이 충만한 듯했다. 그녀와 시선을 마주하는 눈빛이 밝고 환했으며 거리낌이 없었다. 소이는 서둘러 앞으로 와 설명했다.
“이 사범님은 이전에 장군을 스승으로 모셔 무예가 뛰어납니다.”
한안은 침묵하며 계속 앞으로 갔다. 이 사람은 피부가 가무잡잡하고 몸이 건장했다. 소이가 말했다.
“하 선생님은 지방 영지에서 남을 호위하던 분입니다. 솜씨가 좋아서 노왕야께서 왕비께 측근 시위를 삼도록 하셨지요.”
모두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검술이 좋은 사람, 도법이 정교한 사람, 권법과 발차기 재주가 괜찮은 사람, 혹은 보기에 그야말로 남자와 다를 바 없는 사람까지. 사범들의 신분도 감히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양기가 이처럼 마음을 쓰니 여자 무관의 명성과 위세가 드높은 것도 당연하다 생각했다.
마지막 한 사람에게 이르렀을 때, 한안은 돌연 긴장이 이는 것을 느끼며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옅은 눈동자와 딱 마주쳤다.
그 사람은 전신을 검은 비단과 무명으로 된 옷으로 감싼 젊은 여자로 군중 속에 섞이면 제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평범했고 몸매는 왜소했다. 한눈에 보기에는 특별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한안이 의아하게 여긴 것은 살기가 충만한 눈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눈은 마치 깊은 물 같았다. 그런 눈은 가까이 가면 한기가 엄습했는데 한번 죽었던 사람은 이런 눈빛에 대해 특별히 민감했다. 한안은 눈앞의 이 여자 사범이 전혀 담담하지 않고 격렬할 것이며 마음 깊은 곳에서 목숨을 우습게 여기고 죽음을 예사로 여긴다는 것까지도 알아챘다.
소이는 한안이 이 사람 앞에서 오랜 시간 멈춘 것을 보고 조금 조급해졌다. 시 사범은 성격이 괴상하여 다른 사범들과 거의 왕래가 없었다. 그래서 매번 볼 때마다 두려움을 느꼈다. 소이는 한안에 대한 인상이 좋았기에 한안이 스스로 불구덩이에 뛰어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낭자 아무래도 분명하게 생각하심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한안이 흑의 여자를 보고 가볍게 물었다.
“사범님은 이전에 무엇을 하셨나요?”
젊은 여자는 냉랭하게 답했다.
“살수.”
말투에는 기복이 전혀 없었다.
한안은 잠깐 생각하더니 공손하게 그녀를 향해 예를 올렸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사범님께서 저에게 무예를 가르쳐 주십시오.”
대청 안의 모든 사람이 놀랐다. 다른 사범들도 한안이 시 사범을 선택할 줄은 생각지 못했고 소이와 두 여종도 믿을 수 없다는 듯 한안을 보았다. 한안은 왜 그녀를 선택한 것일까?
시 사범, 시정은 눈살을 찌푸렸다. 공손한 한안을 보며 이해할 수가 없어 입술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다. 양기는 의미심장하게 한안을 보고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잘 생각한 것이냐?”
“아주 깊이 생각했습니다.”
한안이 대답했다.
“이리 됐으니. 시정, 너는 바로 이 낭자에게 무예를 가르치거라.”
양기가 손을 흔들었다.
시정은 간단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좋습니다.”
사제 관계를 맺은 후, 다른 사람들은 물러나고 대청 가운데는 한안과 양기만 남았다.
“어찌하여 그녀를 골랐느냐?”
양기가 물었다.
한안이 웃으며 말했다.
“그저 인연이 있다 생각했을 뿐입니다.”
양기는 그녀가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알아듣고 더 묻지 않고 그저 말했다.
“동생은 언제 데리고 올 것이냐?”
한안은 기뻐하며 말했다.
“요 며칠 노 선배님께 염려를 끼치고 귀찮게 하여 죄송스럽습니다.”
그리고는 소매 속에서 은표 한 장을 꺼냈다.
“노 선배님께서는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양기는 그녀의 은표를 받지 않고 탄식하며 말했다.
“되었다. 노부가 여자 무관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이미 충분히 넘친다. 어찌 너의 은자를 받겠느냐. 아마도……. 너는 이미 이 상황을 알았을지도 모르겠구나.”
양기가 말하는 것이 무관의 일과 7황자 간의 이해관계라 추측되자 한안은 동요했다. 그러나 지금은 전생과 아니었다. 진 시랑이 3년 후에 여자 무관을 연다 해도 이런 효과를 달성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설마 양기가 이 사실을 간파한 것일까?
그러나 그녀는 일개 규방 여자다. 다른 사람의 눈에 조정 일에 신경 쓰고 있는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그녀는 혹시 모를 의심을 무마하고자 웃으며 말했다.
“노 선배님, 제 동생…….”
양기가 그녀를 잠깐 단단히 응시하더니 말했다.
“네가 날을 골라 데려와라. 만약 총명한 놈이라면, 노부도 권법과 발차기 무술 정도는 인색하게 굴지 않겠다.”
한안은 양기가 그녀를 대하는 태도가 점점 익숙하고 친근하게 바뀌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 김에 소매에서 부드러운 보호대를 꺼냈다.
“이것은 소녀가 몸종에게 만들게 한 무릎보호대입니다. 노 선배님께서 온종일 무예를 연마하시다 보면 관절이 상하는 것을 면키 어려우시죠. 겨울이 되면 더욱 심하고요. 소녀의 조부께서는 일찍이 무릎보호대를 사용하여 통증을 완화하셨습니다. 관절에 문제가 없더라도 다리 위에 놓아 추위를 막을 수도 있습니다. 노 선배님께서는 사양하지 말아 주십시오.”
양기는 멍해졌다. 급람이 무릎보호대를 받쳐 들고 앞으로 나왔다. 양기는 보호대를 받아들고 보았다. 토끼털로 짠 청회색의 부드러운 보호대는 바느질 땀이 세밀했다. 화려한 무늬는 없으나 귀퉁이에 작은 비휴(貔貅: 중국 고서에 나오는 맹수) 한 마리를 수놓았다.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양기는 일순간 온갖 생각들이 뒤섞였다.
양기는 평생 처를 얻지 않아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한안은 몸이 작고 사랑스러우나 얼굴 생김새에 실제 연령과 어울리지 않는 신중함과 총기, 지혜가 있는 것이 보였다. 양기는 저절로 감탄이 일었다. 이렇게 총명하고 영민하며 빼어난 아이가 자신의 딸이었다면 자부심과 긍지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네가 마음을 썼구나.”
오랜 후에, 양기가 비로소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한안은 절을 올렸다.
“여종들이 수고했을 뿐 소녀는 그저 입이나 놀린 것이니 감히 공을 탐할 수 없습니다.”
한안은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말했다.
“게다가 스승으로 모신다는 건 종신토록 부친이 되시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소녀 동생의 사부이시니 소녀는 당연히 공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양기가 하하 큰 소리로 웃었다.
“나는 아직 승낙하지 않았다.”
소이는 멍해졌다. 양 대인이 웃었다. 몇 년간 특별히 기쁠 때를 제외하고 양 대인이 함부로 말하거나 웃은 적은 없었다. 오늘 이처럼 큰 소리로 웃다니. 저절로 한안을 곁눈질했다.
한안은 그저 미소 지을 뿐이었다.
양기에게 절하여 작별한 한안은 무관 훈련원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시정을 찾아갔다. 사제 관계가 있음에도 한안은 시정을 보고 여전히 한기를 느꼈다.
시정은 평온하게 그녀를 보고 말했다.
“언제부터 시작할까?”
언제부터 교습을 시작할지를 묻는 것이었다. 한안은 조금 생각하고 얼굴빛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내일부터 하지요.”
시정은 조금 의아했다. 다른 장군 가문의 소저 몇몇을 제외하고 보통의 어린 아가씨들은 마지못해 무예를 연마하는 것이었다. 경성 안 여자들 사이에서 무관은 거의 유행이 되어서 허다한 소저들이 마음도 없이 따라 하고 있었다. 배움에 대한 마음이 얼마나 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한안이 그녀를 사부로 선택한 것도 뜻밖이었는데 지금 그녀의 상황을 보니 서두르는 감이 있었다. 어째서?
한안이 또 말했다.
“사부님, 저에게 무리한 청이 하나 있습니다.”
시정은 그녀의 호칭을 듣고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말해라.”
“저의 집안사람들은 제가 무예를 배우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사부께서 매일 새벽 5경 무렵에, 성동 뒷산 산꼭대기에서 무예 수련을 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시정은 얼굴을 돌리고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5경?”
한안은 고개를 숙였다.
“사부님의 단꿈에 폐를 끼치게 되어 참으로 송구합니다.”
“괜찮다.”
시정은 기분을 가다듬었다.
“무예를 수련하는 자는 단꿈을 꿀 권리가 없다. 그러나 너도 고생을 해야 할 것이다.”
한안은 탄식했다.
“고생을 해서라도 목숨을 남길 수 있다면 한평생 고생을 한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녀의 말을 들은 시정은 조금 더 의아해졌고, 얼굴 위에도 동요한 빛이 드러났다. 흰 면사를 쓴 어린 아가씨를 한층 더 간파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내일 보자.”
잠깐 침묵한 뒤, 시정이 한안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려서 떠났다.
한안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 사부님은 정말…… 독특하시구나.”
“정말 괴이하고 무서워 보입니다. 소저, 정말 그녀에게 무예를 배우시게요?”
급람이 물었다.
한안은 고개를 흔들었다.
“뭐가 무섭다고. 분명 사연이 있는 분이실 것이다. 너희, 잘 듣거라. 이 일은 어떤 사람도 알게 해서는 안 된다. 유모도 안 돼.”
유모는 분명 동의할 리 없었다. 특히 그녀가 선택한 사부를.
급람은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줄곧 한 마디도 않고 있던 주홍이 물었다.
“소저, 어찌하여 이리 서두르십니까?”
한안은 먼 곳을 바라보았다.
“주홍, 섣달그믐이 거의 다 되었지?”
급람이 얼른 대답했다.
“20일 정도 남았습니다. 소저, 새 옷과 장신구를 좀 장만해야 하지 않을까요?”
한안은 담담하게 웃었다.
“필요 없다니까. 그때 가면, 자연히 큰 선물이 있을 거야.”
급람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안이 설명해줄 의사가 없는 것을 보고 그러려니 했다. 주홍은 한안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한 것을 알아차렸다. 회상에 빠진 듯했다. 그러나 좋은 기억은 아닌 듯 눈동자에 고통스러운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하여 차갑고 메마른 빛이 가득 차서 세상만사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은 듯 했다. 그 보일 듯 말 듯 한 한(恨)은 주홍의 착각인 듯, 다시 보았을 때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신년을 앞둔 섣달그믐의 밤, 장한안과 장어산은 산에 올라 예불을 드리고 돌아오다가 기다리고 있던 장부의 마차를 타고 주씨 모녀와 함께 꽃등을 감상하러 가려고 했다. 그러나 산적과 맞닥뜨리면서 장한안은 불행하게도 납치되었고 장어산은 요행으로 달아났다. 주씨는 관에 알렸고 관부는 성을 봉쇄하고 이틀 밤낮 도처를 수색했다. 결국 주씨가 장부에서 데리고 온 시위가 장한안을 찾으면서 산적은 일망타진되었다.
한안은 그날의 기억을 영원히 잊어버릴 수 없었다. 외롭고 괴로우며 의지할 데 없는 이틀 밤낮 이후, 다시 만난 가족을 철석같이 의지하게 되었다. 흉계를 꾸민 사람을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고 진심으로 상대하며 그 손안에서 놀아났다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주씨가 관부에 당부한 ‘덕분’에 ‘다행히도’ 관부는 전심전력으로 수색을 했고 심지어 성까지 봉쇄하여 온 성의 위아래 모두가 장부의 4소저가 산적에게 납치된 일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 경성 안 귀부인들이 자신의 아들을 위하여 처를 고를 때 더는 장부 4소저를 떠올리지 않았다. 명성이 이미 훼손된 혼인 적령기의 여자를, 누가 원할 것인가?
한안은 눈을 내리깔았다. 수색을 통솔한 관부의 윤 지부(支部: 지방 행정관)는 직무 수행에 충심을 다하였기 때문에 장사양의 높은 평가를 얻었고 그 길로 관운이 순조로워 조정의 정5품 관리가 되었으니 일이 원만히 이루어진 셈이었다. 만약 자신이 급람에게 몰래 가서 알아보게 하여 윤 지부와 주씨가 먼 사촌 관계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아마도 다 우연의 일치라고 여기고 넘겼을 것이다.
주씨는 화살 하나로 몇 마리의 매를 한 번에 잡은 것이다. 산적의 일 하나로 주씨는 장한안의 명성을 상하게 하고, 자애로운 어머니라는 칭호를 획득했으며, 한안의 신임을 얻었고, 자기 사촌을 끌어올렸다.
그래서 한안이 이렇게 서둘러 사부를 찾은 것이었다. 이제 시간이 없었다.
신년이 가까워지자, 경성 안 곳곳이 흥에 차있었다. 집집마다 대문 입구에 붉은 등롱을 걸고 하인들은 춘련(春聯: 음력설에 문 등에 붙이던 글귀)을 붙이느라 바빴다. 부귀한 집안의 여아들은 새 옷과 장신구를 만드느라 분주했고 총관들은 음식을 구입하여 설에 가족이 함께 모여 먹는 밥을 공들여 준비했다.
장사양의 유모였던 두씨가 건너와 한안에게 추가로 구입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 묻고는 특별히 여의루의 재봉사가 오도록 하여 한안의 치수를 재고 옷을 만들었다. 한안은 아무렇지 않은 듯 몇 마디 물어봄으로써 주씨가 장사양에게 말을 요청했다는 것을 알아냈다.
한안은 바로 웃었다.
“주씨가 신경 썼구나. 부중의 딸들에게 차별 없이 대해야겠지. 번거롭겠지만 유모는 재봉사를 데리고 가서 어산 언니에게 새 옷 몇 벌을 지어주도록 하게. 부친께서도 아시면 주 이낭이 중요한 도리를 잘 아는 것을 칭찬하실 걸세.”
두씨는 부중의 노인으로 두 얼굴을 가진 기회주의자였다. 전생에 어머니가 부중에서 총애 받지 못하고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을 보고 바로 미 이낭 앞으로 가 아부하며 어머니의 화를 돋운 것을 한안도 알고 있었다. 주씨가 부에 들어오자 두씨는 장사양이 주씨를 정실로 올릴 뜻이 있음을 보고 바로 또 주씨에게 붙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자기를 주씨의 사람으로 칭하며 와서 말을 전했겠는가?
한안은 찻잔을 들어 차를 마시며 두씨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두씨는 한안이 장사양의 마음에 아무런 자리도 차지하지 못하고 있고 또 나약하며 깔보기 쉽다 여겨 그녀를 그다지 존중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안이 분부하듯 말을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한안이 자기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 태도를 보여 더욱 분노했다. 그래서 마음대로 입을 놀려 말했다.
“늙은 저는 그저 말을 전달할 뿐이니 감히 멋대로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한안은 말없이 여전히 차를 마시면서 얼굴 위에 어떠한 표정도 없었다. 두씨는 안하무인으로 굴었는데도, 한안이 미동도 없자 마음이 조금 불안해졌다. 슬그머니 한안의 모습을 보니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차를 맛보는 모습이 보였다. 장어산의 기세등등한 아름다움과는 달리 맑고 환한 윤기를 머금고 있어 필락 말락 하는 꽃봉오리 같았다. 아름다움이 드러나긴 했지만 활짝 피어나면 어떤 모습일지는 아직 알아볼 수 없었다.
한안은 한참이나 침묵하다가 비로소 천천히 말했다.
“두씨는 그렇게 말하지 말게. 이 부중에서 자네가 어찌 단순히 말을 전하는 사람일 뿐이겠는가? 두씨는 부친의 사람이니 누구에게라도 말을 할 수 있지.”
두씨는 한안의 말이 기이하다 느껴졌다. 그러나 어디가 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안의 말 속에 자신을 치켜세우는 기색이 있음을 보고 저도 모르게 우쭐대며 입을 열었다.
“4소저께서는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늙은 저는 노야의 중시함을 입어…….”
한안은 살짝 웃었다.
“그래. 이전에 어머니 앞에서 유모는 종종 어머니를 대신해서 결정을 내리지 않았나? 지금은 기꺼이 주 이낭의 전달자 노릇을 하고 있으니 주 이낭이 정말 복이 많아.”
두씨는 차가운 물을 머리 위에 뒤집어쓴 듯, 표정이 변하면서 홱 정신을 차렸다. 한안은 여전히 얼굴 가득 웃음을 흠뻑 머금고 차를 마시고 있었다.
“4소저께서 저를 난처하게 만드시네요. 저는…….”
한안은 가볍게 웃으며 급람과 주홍에게 말했다.
“유모의 담이 정말 작구나. 나는 그저 주씨의 전달자라고 말했을 뿐인데. 그 말은 유모 자신이 말한 거잖아. 그런데 내가 유모를 난처하게 만들었다고 말하니 모르는 사람이 보면 장부의 적녀인 내가 함께 지내기 까다로운 사람으로 하인이나 나무라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거야. 내가 유모의 충심을 알지 못했다면 고의로 나를 해치려 하는 거라 생각했겠어.”
말을 마치고 두씨를 한 번 보았다.
급람이 의중을 깨닫고 이어서 입을 열어 말했다.
“그렇고말고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유모가 소인배라 소저의 명성을 고의로 손상시키려 한다고 여길 거예요!”
두씨의 얼굴이 땀투성이가 되었다. 그녀는 4소저를 다루기 어려워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내리누르는 압박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문 입구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성을 손상시키다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한안은 눈을 들어 보았다. 주씨와 장어산 두 사람이 보였다. 여종을 데리고 막 방 안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가장 뒤에서 걷고 있는 것은 바로 장사양이었다.
한안은 서둘러 일어나 웃으며 마중을 갔다.
“부친, 주 이낭, 어산 언니.”
주씨는 매번 한안의 입에서 ‘주 이낭’ 세 글자를 들을 때마다 작은 벌레가 심장을 갉아먹는 것 같이 느껴져서 괴로워 죽을 지경이었다. 한안의 눈웃음에서 큰 비웃음이 느껴졌다. 그래서 주씨는 얼굴 위에 한층 온유한 웃음기를 머금었다.
“방금 전에 듣기로 무슨 명성이 어쩌니 하는 말을 하던데? 누가 4소저의 명성을 손상시키려 하나요?”
한안이 제때에 말하기도 전에 급람이 바로 옆에서 말했다.
“저 간교한 여자입니다. 자신이 노야의 유모였다고, 주 이낭의 이름을 팔아 소저를 모해하였습니다!”
“급람!”
한안이 크게 소리치고는 장사양에게 미안하다는 웃음을 지었다.
“그저 오해였을 뿐입니다. 유모는 부친의 사람인데 어찌 저를 모해하려 하겠어요? 부친께서도 동의하지 않으실 거예요, 그렇죠?”
한안은 말을 마치고 웃었다. 다만 그 웃는 얼굴에는 조금 마지못한 기색이 있어 다른 사람의 눈에는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솔직히 이야기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보였다.
장사양은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아비로서 다른 사람이 너를 괴롭히게 둘 리 없지.”
주씨는 조금 당황하여 장사양을 한 번 보았다. 비록 한안을 좋아하지 않기는 하지만 표면상으로는 너무 지나치게 홀대해서는 안 된다. 두씨가 일처리를 제대로 못하니 그녀를 제물로 쳐야 하나? 주씨는 두씨를 노려보았다.
두씨는 장사양의 세도를 믿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게 습관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 상황이 너무 원통했다. 그리고 이 원통함을 저 총애 받지 못하는 소저가 준 것임을 떠올리자 두씨는 분노했다.
“노야, 저는 정말 4소저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한안은 눈을 깜박였다.
“유모, 왜 그러지? 내가 이미 부친께 자네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씀드렸네. 오해라고 말이야. 지금 본 소저가 자네에게 사과해야 된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장가의 적녀가 일개 하인에게 사과한다면 체통이 어찌 되겠는가! 장사양은 법도를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두씨를 노려보았다. 두씨는 놀라서 서둘러 입을 닫고 소리를 내지 않았다. 4소저의 계략에 분노하면서도 한안이 언제 이처럼 대단하게 변했는지 의심이 일었다.
“유모는 예전에는 미 이낭과 아주 친밀했는데 요즘에는 미 이낭을 만나지 못했죠? 이제 섣달그믐도 가까워 오니 부친께서는 미 이낭이 처소에서 나와 왕래할 수 있게 하시는 것도 괜찮겠어요. 그러면 유모 마음도 즐거울 테고요. 그렇죠?”
이 말이 나오자, 그 자리에 있는 세 사람이 모두 몸이 굳어졌다.
주씨는 마음속으로 한안을 백 번 천 번 죽였다. 지금 미 이낭이 나온다면 자신에게 불리했다. 지난번 일 이후, 미 이낭은 그녀를 뼛속까지 증오하고 있을 테니 아마도 술수가 많아졌을 것이다.
두씨는 안절부절해 마지않았다. 한안의 말은 그녀를 미 이낭의 옆으로 돌려놓고 있었다. 주씨가 의심하는 것을 피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미 이낭이 만약 자신이 주씨에게 호감을 보이는 것을 알면 자연히 자신이 편히 지내게 할 리 없었다. 그렇게 되면 양쪽 다 지내기 어려울 것이다.
장사양은 제 딸이 의심스러웠다. 한안은 한층 더 기민하고 침착해져 매번 경계심이 일게 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언제, 한안과 미 이낭의 관계가 이렇게 좋아졌지?
한안은 일부러 기분이 안 좋은 척 눈에 거슬린다는 듯 주씨를 보았다. 장사양의 마음이 조금 풀렸다. 한안이 아마도 주씨를 싫어하니 미 이낭을 찾아 함께 주씨에게 대처하려 한 모양이 생각했다.
집안의 권력이 한쪽에 쏠려서는 안 됐다. 장사양은 미 이낭의 요염한 몸을 맛보지 못한 지 오래되었음을 깨달았다. 흐르는 물에 순리대로 배를 밀 듯 잠시 고려하는 척하고는 말했다.
“네 말도 일리가 있다. 기왕 신년도 되고 했으니 그녀의 금족을 면해주마.”
주 이낭은 한안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원망스러웠으나 내색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는 장사양이 잘 안배한 집에서 미 이낭과 왕래 없이 홀로 총애 받고 있었다. 평소 얌전한 만 이낭은 못 본 척할 수 있었지만 미 이낭은 그녀와 총애를 나누어야 했다. 그 매력적인 오랑캐 여자는 신분이 낮고 천하니 장사양이 정실로 올릴 염려는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부중의 부인이 되어 그 여자를 마음대로 혼내줄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장사양이 미적거리면서 안주인 책봉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 오랑캐 여자가 총애가 깊어 자신을 눌러버리기라도 하면 자신이 정실부인이 되고자 하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장어산이 눈에 들어오자 주씨는 슬그머니 위안을 얻었다. 자신에게는 아직 다른 승부수가 하나 있었다. 미 이낭은 아직 후사가 없다. 그리고 그녀는 어산이 있었다.
장어산도 주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장사양의 팔을 당기며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아버지, 곧 설이에요. 어산이 아버지께 드리려고 신발을 만들었어요. 조금 있다가 운아를 시켜 보내드릴게요.”
장사양은 웃었고 그 얼굴에는 온통 자애로운 빛이 가득했다.
“좋다. 어산이 과연 철이 들었구나. 아버지의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딸이라는 데 손색이 없어.”
한안은 차가운 눈으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그녀가 아직 있는 자리에서 장사양이 서녀에게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이라고 말한 것은 하인의 눈앞에서 그녀의 뺨을 때리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안은 장사양이 무분별하게 굴기를 간절히 바랐고 그럴수록 좋았다. 어사에게 적발되고 나서 황제 앞에서 장사양이 첩을 총애하고 처를 괄시했다고 탄핵 되면 장사양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장어산은 부끄럽다는 듯 웃으며 부드럽게 답했다.
“제 솜씨가 정교하지 않다고 비웃으시면 안 돼요.”
장사양은 하하 큰 소리로 웃었다.
“어찌 그럴 리가? 어산이 아버지를 위해 신발을 보냈는데 아버지가 빈손으로 돌아가게 할 수야 없지. 연말이 되면 무언가 가지고 싶은 게 있거든 바로 가서 사거라. 은자는 장방(帳房: 집안의 금전이나 화물 출납을 관리하던 곳)에서 직접 가져가면 된다.”
한안은 거의 냉소를 터뜨리기 직전이었다. 장어산이 몇 마디 사양을 하자 주씨가 웃으며 말했다.
“4소저도 함께 해요. 장신구 몇 개 고르시죠.”
마치 한안이 장어산에 기대야만 비로소 장신구를 얻을 수 있다는 말로 들렸다. 한안도 화내지 않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셋째 언니도 부르는 게 어떨까요? 모두 이낭의 딸이니 이쪽은 후하게 하고 저쪽은 박하게 하면 안 되죠.”
주씨의 웃는 얼굴이 굳어졌다. 모두 이낭의 딸이라니 한안의 말은 바로 그녀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이었다. 주씨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노야께서 보시기에는 어떠세요?”
장사양은 이미 한안의 말 속에 든 비꼼을 알아들었다. 참지 못하고 심각하게 그녀를 한 번 보고는 소매를 뿌리치며 말했다.
“네 마음대로 해라.”
말투가 이미 좋지 않았다.
장어산도 자연히 화가 났다. 그녀는 부중에서 총애 받는 소저다. 3소저인 장금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무슨 근거로 자기와 견줄 수 있을까. 온화한 모습인 한안을 보며 그 웃는 얼굴을 갈기갈기 찢어놓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한안은 즐거워하며 말했다.
“정말 너무 잘됐네요.”
분위기가 가라앉자 주씨 모녀는 자리를 떠났다. 그녀들이 뜰을 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한안의 얼굴 위 웃음이 점차 옅어졌다.
급람이 분개했다.
“노야는 정말 편파적이시네요. 주씨 모녀가 얼마나 방자하게 날뛰는지 보세요.”
한안은 고개를 흔들었다.
“방자하게 날뛰기만 할 뿐이라면 두려워할 게 못 되지. 너한테 처리하라고 한 일은 잘 처리되었느냐?”
급람이 서둘러 말했다.
“소저의 분부대로 이미 잘 처리했습니다. 다만 미 이낭이 정말 그렇게 할까요?”
한안은 웃었다.
“그녀는 분명 그리 할 것이야. 왜냐하면 그녀도 시간이 없거든.”
부용원의 미 이낭은 송이송이 활짝 핀 도홍색 도화가 수 놓인 옅은 남색의 긴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가느다란 허리에는 회색빛을 띤 연한 붉은색 넓은 허리띠를 매어 따뜻하고 부드러운 나비매듭을 지어 놓았다. 색채가 맑고 고와서 미인의 뽀얀 살결, 진하고 아름다운 오관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교몽이 기뻐하며 말했다.
“이낭, 노야께서 금족을 면하게 하겠다 허락하셨습니다. 오늘부터 마음대로 다닐 수 있어요.”
미 이낭은 기쁜 빛을 떠올리며 서둘러 캐물었다.
“노야께서 아무래도 나를 떠올리신 게지.”
목을 길게 뻗어 문밖을 두리번거렸다.
“노야께서 부용원에 오시지 않았어?”
교몽이 고개를 숙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4소저께서 노야께 용서를 청하셨어요.”
한안? 미 이낭의 동작이 굳어졌고 얼굴빛이 점점 가라앉았다. 한안이 그녀에게 호감을 보이다니 의외이긴 했다. 이치대로 말하자면 자신이 총애를 잃은 때이니 한안은 마땅히 기피해야 하는 게 아닌가? 총애를 잃은 사람에게 호감을 보이다니. 주씨가 갈수록 제멋대로 포악하게 굴고 있다면 몰라도.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미 이낭은 긴장하여 여종에게 물었다.
“그 천한 년은 아직도 노야께 달라붙어 있느냐?”
교몽이 매우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말했다.
“노야께서는 최근 며칠……모두 공동원에서 주무셨어요.”
짐작했던 일이나 직접 듣자 몹시 귀에 거슬렸다. 퍽 소리와 함께 찻잔이 바닥에 깨졌다. 미 이낭은 화가 나 얼굴빛이 하얘졌다.
“불여우 년!”
교몽은 자기 주인을 보고 입술을 깨물다가 결심이라도 한 듯 말했다.
“이낭, 이대로 나가다가 만약 공동원이 회임이라도…….”
그렇게 된다면 어디 그녀의 자리가 남아 있으랴! 미 이낭이 노하여 말했다.
“나도 당연히 알아! 그런데 지금 무슨 방법이나 있겠느냐?”
노야는 그 천한 년을 총애하고, 자신은 지난번 일 때문에 노야와의 사이에 거리가 생겼다. 지금 국면을 만회하려 해도 말처럼 그렇게 쉽지는 않았다.
교몽이 앞으로 한 걸음 나왔다.
“이낭, 이 일 또한 어렵지 않습니다. 만약 이낭이 먼저 대를 이을 아들을 회임하시면 자연히 노야의 총애를 되찾을 것입니다. 노야는 지금 공자 한 분뿐이시지요. 만약 이낭께서 노야를 위해 소공자 한 분을 낳으실 수 있다면 주씨는 자연히 따라올 수도 없을 것입니다.”
“말이야 쉽지.”
미 이낭은 무척 화가 났다.
“내가 낳을 수 있었다면 이미 낳았다. 여러 해 동안 아들을 낳지 못했는데 어찌해?”
교몽은 창밖을 내다보며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노비가 궁중에 비약이 하나 있다고 들었습니다. 복용하고 나면 바로 여자가 회임한 맥의 상태를 만들어낼 수 있답니다.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 이낭께서 그 약을 복용하시어 맥을 가장하세요. 열 달 후 밖에서 갓난아이 하나를 안아 오면 됩니다. 만약 그동안 이낭께서 정말로 회임하시면 더욱 좋지요.”
미 이낭은 교몽의 말을 다 듣고도 전혀 기쁜 표정을 드러내지 않고 그저 물었다.
“그 이야기는 어디서 들은 것이냐?”
교몽은 몸을 떨었다.
“세탁실의 소홍이 노비와 잡담할 때 말한 것입니다. 소홍은 궁중에서 일하는 언니가 있어서 이런 일들을 적지 않게 보았답니다.”
미 이낭이 답하지 않는 것을 보고 교몽이 또 가벼운 소리로 말했다.
“이낭께서 보시기…….”
“내가 좀 더 생각을 해보마.”
미 이낭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비록 이렇게 말했지만 표정은 이미 동요하고 있었다. 교몽은 더 말하지 않고 바닥에 깨진 자기 조각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급람은 은 조각 한 주머니를 가지고 소홍을 찾아갔다. 소홍은 얼굴에 놀라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급람은 은 조각을 그녀의 손 위에 놓았다.
“기억해. 이 일은 다른 사람이 알게 해서는 안 돼. 그렇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거야. 누구도 너를 구할 수 없어.”
소홍은 몸을 벌벌 떨면서도 결연하게 답했다.
“나는 아무것도 몰라.”
급람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은자를 가지고 네 아버지가 진료받으시게 해.”
<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