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대담해지네. 주씨는 어쨌든 부중의 주인이야. 다른 사람이 알았다가는 고초를 면하기 어려울 테니 입조심 하는 게 좋아!”
주홍은 고개를 숙이고 난로 안에 숯불을 뒤적거리면서 말했다.
“노비의 주인은 오직 소저뿐입니다.”
한안은 빙그레 웃으며 더 말하지 않았다.
한안은 급람에게 두 갈래로 쪽을 지어 머리를 빗기게 했다. 그녀는 몸이 작고 발육상태가 다른 집 소저들보다 늦어 이렇게 단장하자 피부가 하얗고 부드러운 어린아이 같았다. 그 천진난만한 귀여움이 한안에게 어울렸다.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단순한 어린 소저로 여겨 자연스레 허다한 말썽을 줄이기 위함이었다. 만약 궁중 연회에서 주씨를 난처하게 만들려 한다면 아직 어리다는 핑계를 대기에도 딱 좋았다.
급람은 한안의 말에 따라 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달갑지 않았다. 그래서 쪽머리 옆에 독특한 모양의 작은 화관을 둘렀다. 머리 모양이 좀 더 정교하고 섬세해졌다. 묵직한 머리 장식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궁중 연회는 예의와 격식을 잃어서는 안 되기에 장신구함 안에서 나비 날개 모양의 머리 장식을 꺼내 양쪽에 꽂았다. 피부색이 좀 더 맑고 곱게 부각 되었다.
머리가 어느 정도 해결되니 의상을 선택해야 했다. 한안은 이목을 끌지 않으면서도 예의와 격식을 잃지 않을 옷을 선택하고자 했다. 결국 옅은 벌꿀빛 솜저고리, 금은색 수가 놓인 장밋빛 홑저고리, 추향색 무늬가 있는 비단으로 만든 치마를 골랐다. 빛깔은 맑고 고우면서도 활기찼지만 경박하거나 눈에 띄게 화려하지도 않았다. 그 위에 금빛 구슬 목걸이와 진주 목걸이를 곁들이니 충분히 남에게 호감을 살법한 모습이었다.
급람이 자기 얼굴에 법석을 떨게 놔두고 얼마나 오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주홍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저, 됐습니다.”
한안은 그제야 눈을 뜨고 거울 속의 자신을 보았다.
거울 속의 어린 소저는 눈처럼 하얬다. 흑단처럼 까맣고 부드러운 긴 머리카락은 두 갈래로 쪽이 지어져 있고 가지런한 앞머리 아래 둥글고 큰 눈은 새까맣고 또렷했다. 코는 추위 때문에 홍조를 띠고 있었으며 입술은 빨갛고 이는 새하얘서 작고 예쁘장하며 귀여웠다.
유모가 막 문을 밀고 들어오더니 한안의 아름다움에 놀란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우리 소저 미인이시네요. 단순하기는 하지만 용모를 타고나셨으니 사람들이 볼수록 좋아할 거예요.”
한안의 옷에 대해서는 아무런 트집도 잡지 않았다.
의복의 상호관계를 이해한 것이다. 한안은 입술을 뾰족이 내밀고 불만스럽게 말했다.
“아무리 봐도 몇 년 전 그대로네.”
유모가 웃었다.
“빨리 자라지 않아 싫으시겠지만 걱정 마십시오. 장래 우리 소저께서 분명 부인과 똑같이 미인이 되시리라 확신합니다. 어산 소저보다 몇백 배는 더 아름다우실 거예요!”
사람을 구슬리는 말이긴 하지만 한안은 즐거웠다. 그러다 문득 주씨 모녀를 떠올렸다.
“우리 가서 주 이낭을 보세. 아마도 지금 둘은 한창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정신이 하나도 없을 거야.”
급람이 키득거리며 웃으며 가죽 피풍의를 한안에게 걸쳐주었다.
한안이 공동원에 다다라 방 밖에 도착했을 때, 주씨와 장어산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건 안 돼. 너무 초라해서 체면이 안 서. 그 홍보석을 박아 넣은 진주 비녀를 꺼내와.”
방 밖의 어린 하녀가 막 통보하려 하는데 한안이 손을 흔들어 그녀에게 물러가라는 표시를 했다. 한안은 빙그레 웃으며 방 안으로 한 발 들어서며 달콤하고 천진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 이낭!”
주씨는 한창 장어산을 위해 직접 화장을 해주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한안의 목소리가 들리자 깜짝 놀라 몸을 돌렸다. 한안은 평소에 비해 더 맑고 고왔다. 장어산도 거울 속으로 한안을 보았다. 붉은 입술과 아리따운 얼굴을 본 그녀의 눈 속에 질투가 스쳤다. 그러나 한안의 옷을 훑어보고는 득의 만만해 했다.
주씨가 웃으며 말했다.
“4소저, 오늘은 정말 일찍 건너오셨네요.”
한안은 그저 웃으며 주씨를 응시했다. 주씨는 자금색 전수(箭袖: 북방 민족의 복식 중 어깨에서 소매 끝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형태)에 금사로 짠 비단 상의를 입고 있었고 머리와 가슴에는 진주와 비취 등 보석이 가득했다. 주씨가 미인이긴 하지만 금빛이 너무 반짝반짝 빛나 눈이 부신 느낌뿐이었다. 한안의 입가에 조소의 빛이 돌았다. 주씨는 스스로를 머저리로 만들고 있었다. 때가 되면 좋은 구경거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온유하고 천진하게 웃었다.
“주 이낭의 의상은 정말 예쁘네요. 그런데 궁중 연회에서 이렇게 입는 것은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것이 아닐까요?”
주씨는 자신의 차림이 지극히 만족스러웠던 터라 한안의 말이 아니꼬웠다. 한안의 화려하지도 귀하지도 않은 옷을 보고는 한안이 질투하여 고의로 말한다고 생각하여 억지로 마음을 다독이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궁중 야연이에요. 평범하게 입으면 장가의 체면을 잃게 될 거예요.”
한안은 그녀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장가의 체면이라. 일개 천첩인 그녀가 장가의 체면을 대표할 수 있는 것인가? 우습게도 정말 본인이 장가의 안주인이라도 된 줄 아는 모양이었다.
급람이 막 입을 열려는데 한안이 가볍게 그녀의 소매를 잡아당기고 웃으며 말했다.
“이낭은 무얼 입어도 예뻐요.”
이미 경고는 했다. 이제 주씨가 망신을 당하는 것을 더할 나위 없이 즐길 것이다. 나중에 장사양이 추궁해도 자신의 잘못은 아니다.
“4소저가 보기에 내 의상은 어떤가요?”
교태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안은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기억 속 장어산은 아름다운 편은 아니었으나 혼인식이 있던 밤, 그때만큼은 매우 깊은 인상을 남겼다. 혼례복을 입은 장어산이 직접 그녀에게 독주를 먹였으니 말이다.
그 악몽은 영원히 잊을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평소 장어산은 소박하고 단순하게 입었다. 청순하긴 했지만 용모를 부각시키지 않았기에 한안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어산은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서 있었다. 한안의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으며 마음속 물결이 세차게 휘몰아쳤다. 한안은 눈을 감았다 떴다. 이내 마음이 고요해져 깊고 넓으며 맑고 투명하게 흐르는 샘물이 되었다.
“어산 언니, 정말 아름다워요.”
장어산이 옅게 웃었다.
“4소저, 과찬이에요.”
말투는 겸손했지만 제 외모에 대한 자신감이 얼굴에 자연스럽게 나타났다.
장어산은 주씨처럼 사치스럽지 않았고 한안처럼 귀엽게 입지도 않았다. 장어산은 한안보다 겨우 한 살 더 많았지만 성장은 훨씬 빨랐다. 버들가지같이 유연하고 날씬한 허리에 분홍색 연한 빛깔의 치마를 가슴에서 복사뼈까지 길게 늘어뜨려 입었다. 가슴에는 분홍색 모란무늬가 들어가 있었는데 꽃잎이 겹겹이 겹쳐 그녀의 앞가슴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검은 머리는 구름 모양으로 쪽을 짓고 비녀를 비스듬히 꽂았다. 진주 귀고리가 가볍게 흔들려 맑고 깨끗하며 투명하게 빛나는 피부를 더욱 두드러지게 했다.
장어산은 봄꽃같이 아리따웠고 가을 달처럼 어여뻤다. 나이는 아직 어리지만 일거수일투족에 운치가 흘러넘치고 사내를 끄는 매력이 있었다.
한안조차도 감탄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4소저도 오늘 아주 곱게 단장했네요.”
한안은 머리를 갸웃하며 말했다.
“어디 어산 언니 미모의 반절이나 쫓아갈 수 있을까요.”
주씨는 자신의 딸을 보며 만족해했다.
오늘 궁중 연회는 야연이지만 부인과 여자들은 일찍 입궁해야 했다. 오후에 황후가 궁중 화원에서 여러 부인들을 동반하여 함께 매화를 감상하기 때문이었다.
주씨는 상자 안에서 푸른빛의 번쩍이는 피풍의를 뒤져 찾았다. 주씨는 한안이 자신의 손을 응시하는 것을 보고서 웃었다.
“이것은 작금(雀金: 외투 종류의 하나)으로 아사국에서 공작 깃털을 뽑아서 짠 거예요. 노야께서 소첩에게 주셨답니다. 다만 소첩의 나이가 많아 이렇게 산뜻하고 화려한 것은 어울리지 않아서요. 그래서 어산에게 입게 했어요.”
주씨는 피풍의를 어산의 몸 위에 걸쳐주었다.
한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여러 해 전의 일을 떠올렸다.
한안이 여덟 살 때, 장사양은 부탁한 일을 처리해 준 대가로 동료에게 다수의 예물을 받았다. 대부분 바다 상인이 가지고 돌아온 조금은 신기한 완구였다. 그 안에 바로 이 작금이 있었다. 이 피풍의는 보온 방한이 아주 잘 되고 겉모양 또한 정교하고 아름다워 어머니가 가지고 싶어 하셨다. 하지만 장사양은 다른 상위 관원에게 피풍의를 뇌물로 바쳐 버렸다. 당시 어머니는 몹시 낙담하셨지만 피풍의가 대단히 귀중하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지금 그 귀중한 피풍의가 장어산의 몸에 걸쳐 있었다. 피풍의를 장사양이 주씨에게 주었다는 것은 주씨에 대한 총애가 상당하다는 의미였다. 한안은 망연자실했다.
장어산은 한안의 표정이 이상한 것을 발견하고는 뽐내며 말했다.
“어머니, 이게 무슨 말 할 거리나 되나요. 그저 작금일 뿐인데요.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지요. 어산이 좋아하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주시겠다고 말이에요.”
한안이 부러워하며 말했다.
“아버지께서 어산 언니에게 정말 잘 해주시네요!”
주씨는 짐짓 겸손한 척하며 말했다.
“노야께서는 4소저에게도 지극히 잘 해주시죠.”
주씨는 웃으며 한안이 걸친 토끼 가죽 피풍의를 한 번 보았다.
한안은 작은 손을 허리 뒤에 두르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럼 당연하죠! 나는 아버지의 적녀인 걸요!”
그녀는 ‘적녀’라는 글자를 강조했다. 아니나 다를까 주씨 모녀의 얼굴빛이 변하는 것이 보였다. 신분은 주씨 모녀의 약점 중 하나였다. 한안은 일부러 그들의 약점을 건드렸다.
주씨는 억지로 웃었다.
“우리, 어서 입궐해요.”
마차 한 대가 이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안이 손짓하여 곁에 있는 하인에게 분부했다.
“다른 마차를 대령하거라.”
주씨는 막 마차에 오르려다가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어찌하여 또 마차를 대령하게 하십니까?”
곧 젊은 사내종을 시켜 마차를 찾으러 가던 하인을 가로막았다.
“우리와 함께 마차를 타고 가면 되지 않아요?”
장어산이 물었다.
한안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세 사람이 마차 한 대에 앉으면 너무 비좁아요. 익숙하지 않은 걸요.”
주씨는 눈살을 찌푸렸다.
“4소저, 이해하기 어렵군요.”
한안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예전에 야연에 갈 때는 나와 어머니 두 사람뿐이었으니 당연히 비좁다고 느끼지 못했지요. 하지만 지금은 이낭과 어산 언니까지 함께 마차를 타면 좁아 참기 힘들 거예요.”
세 사람이라서 참을 수 없다는 것인지, 아니면 주씨 모녀를 참을 수 없다는 것인지. 한안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주위의 하인들이 그들의 모습을 보고 소저와 새로 들어온 이낭, 둘은 물과 불처럼 같이 할 수 없어 보였다.
주씨는 거의 화가 폭발 직전이었다.
한안은 분위기가 싸늘해진 것을 보고 하인들을 향해 말했다.
“내가 당당한 장씨 집안의 적녀인데 마차 한 대를 더 준비하는 것도 남의 눈치를 보며 해야 하다니 이 일이 새어나가면 무슨 소리를 들을 것 같으냐.”
한안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초청장에 내 이름은 이미 올라가 있거늘, 만약 궁중 연회에서 무슨 착오라도 생겨 황상께서 노하기로 한다면 너희들 중 누가 책임질 것이냐?”
그녀의 말은 엄중했다. 하인들은 깜짝 놀라 서둘러 연기처럼 빠져나가 마차를 찾으러 갔다. 주씨는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 한안은 살짝 웃으며 살뜰하게 말했다.
“이낭, 어서 어산 언니와 마차에 올라요. 이낭은 관심이 없어 보이지만 바깥에 바람이 세서 얇게 입은 어산 언니가 병이라도 얻을까 걱정되어요.”
장어산의 몸이 굳어졌다. 주씨는 사납게 한안을 한 번 노려본 뒤, 이를 악물고 어산을 끌어당겨 마차에 올랐다.
장어산이 모친의 좋지 않은 낯빛을 응시하며 말했다.
“어머니, 한안이 우리와 함께 타고 가길 원하지 않는 건 좋은 일이에요. 나야말로 저 천한 년을 보고 싶지 않아요!”
“입 다물어!”
주씨가 표독스럽게 말했다. 놀란 장어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 마차 귀퉁이에 웅크리고 앉았다.
이내 마차 한 대가 다가오자 한안은 기뻐서 펄쩍 뛰며 달려 올라가 큰 소리로 불렀다.
“급람, 주홍, 어서 올라와!”
목소리가 맑고 또렷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분명하게 들렸다. 하인들은 놀라고 의아한 표정을 드러냈다. 4소저는 하녀 둘과 함께 마차를 탈지언정, 주 이낭 모녀와 함께 차를 타는 것을 원치 않음을 모두에게 드러냈다.
한안은 자신이 원한 효과가 달성된 것을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옆 마차에 탄 주씨의 두 눈에는 분노가 차올랐다.
하인이 찾아온 마차는 나름 괜찮았다. 넓을 뿐만 아니라 따뜻했다. 안에는 부드럽고 연한 야생 담비 모피가 깔려 있었다. 한안은 작은 손난로를 품고 옆에 놓인 군것질거리를 집어 들었다.
급람이 호호 웃으며 말했다.
“주 이낭은 아마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일 거예요.”
반면 주홍은 조금 걱정했다.
“이렇게 공공연히 그녀들과 척을 지었으니, 소저께서는 좀 더 조심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한안은 개의치 않고 손을 흔들었다.
“일부러 화가 나게 만든 거야. 가장 좋은 건 화가 나서 궁중 규율을 다 잊어버리는 거지. 궁중 연회에 오는 부인들의 눈은 정말 매섭거든.”
과거 한안은 궁중 연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모친을 잃은 비통함에 침잠해 있는 중이었기 때문에 사교 모임에 응할 마음이 없었다. 게다가 주씨가 궁중 연회의 부인들이 얼마나 가혹한지 규율은 얼마나 많은지 강조하며 조금만 부주의해도 장부에 화를 불러들일거라 하니 궁중연회는 처음인 한안은 두려움에 갈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결국 병을 핑계로 부중에서 휴식을 취했다.
한안은 눈을 내리깔았다. 지금 떠올려 보니 장어산은 연회에서 돌아오면 연회가 얼마나 무료한지, 연회에 참석한 부인들이 얼마나 상대하기 어려운지, 자기가 얼마나 많은 억울함을 당했는지 불평했다. 그 탓에 과거에 한안은 연회란 갈 곳이 못 된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어산 말만 믿고 어리석게 행동한 탓에 스스로 경성 안 귀부인들의 시선을 밀어낸 것이었다.
다행히 하늘이 그녀를 가련히 여겨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셨다. 이 일생, 그녀는 주씨의 계획을 부수어 놓을 것이고 높은 곳에 서서 그녀들을 굽어볼 것이다.
다른 마차 안, 주씨는 증오에 차서 손수건을 꽉 비틀어 쥐었다.
“천한 년!”
주씨는 출신이 높지 않은 서녀였다. 후에 어찌어찌 해서 장사양을 알게 되고 장어산이 생겼다. 장어산이 자신의 전철을 밟아 평생 서녀로 살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때부터 그녀는 결심했다. 반드시 장어산을 장가의 적녀가 되게 하겠노라고.
물론 일이 그녀의 뜻대로 전개되지는 않았다. 그 천한 년이 남긴 딸은 공공연하게 자신과 대립했다.
주씨는 연회에 갈 기회가 거의 없던 터라 궁중 연회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게다가 경성 내 명문 부인들은 더욱 알지 못했기에 한안에게서 유용한 소식을 좀 얻어내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주씨가 물으면 한안은 대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만에 하나 대답하지 않으면 여인의 품행에 어긋나게 되는 것이다. 하인들이 보는 앞에서 한안이 스스로의 체면을 욕되게 하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같은 마차에 타지 않겠다는 것을 구실로 이렇게 가뿐하고 교묘하게 피해 가다니.
주씨는 생각할수록 열이 받았다. 그녀의 눈 속에 흉악하고 비틀린 빛이 스쳤다. 그러던 중 옆에 앉아 있는 장어산을 흘끗 보았다.
어산은 갈수록 아름다워져 어떤 남자라도 그녀를 본다면 마음이 동할 법 했다. 이번에 궁중 연회에 각 가문의 공자들도 참석할 테니 조건 좋은 공자들이 어산을 본다면…….
안 돼. 어산은 아직 서녀의 신분이었다. 그 명가 공자들이 설령 어산에게 반하게 된다 해도 신분에 의거하여 어산은 그저 첩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반드시 어산이 적녀가 되어야 한다. 주씨의 목소리가 갑자기 부드러워졌다.
“어산, 어미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
*
마침내 마차가 멈추었다. 한안은 급람, 주홍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높디높은 궁의 기세가 웅장했다.
황궁은 기세가 장대했고 존귀함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안이 보기에는 정교하고 화려하고 귀한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새장 같았다. 사방으로 네모반듯한 새장. 그 새장은 사람의 일생을 가뒀다.
장어산도 주씨를 따라 마차에서 내렸다. 높고 큰 궁의 담 앞에 서 있으니 더욱 유약하고 가냘팠다. 그녀는 하늘하늘 활짝 핀 분홍색 모란 같았다.
“어머니, 여기가 바로 황궁이군요. 정말 멋져요!”
장어산이 조금도 더 기다릴 수 없다는 표정을 훤히 드러냈다.
“우리, 어서 들어가요.”
주씨는 그녀를 노려보았다.
“어산, 내가 너에게 어찌 말했는지 잊었느냐?”
장어산은 서둘러 감정이 드러난 얼굴을 거두고 얌전하게 웃었다.
“그저 조금 흥분했을 뿐이에요.”
한안은 주씨 모녀를 보며 속으로 몰래 웃었다. 장어산은 나이가 어려 감정을 자제할 줄을 몰랐지만 주씨는 달랐다. 확실히 장어산보다 고단수였다.
생각하다 보니, 한안은 주씨 모녀 곁을 따라 걷고 있었다.
“어산 언니 말이 맞아요. 우리, 서둘러 들어가요.”
주씨는 한안의 말투가 온화한 것이 의아스러웠지만 보는 눈이 많으니 친절하고 다정하게 말했다.
“좋아요.”
그러더니 손을 뻗어 장어산만 끌어당겼다.
한안은 가타부타 말없이 급람과 주홍에게 따라오게 하고는 길을 안내하는 궁녀를 따라 계속 안으로 걸어갔다.
황궁은 평범하지 않았다. 돌난간은 정교하고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었고 정원 숲은 색다르고 아담했다. 밝은 황색의 유리 기와에 짙은 붉은 색의 기둥. 부귀하고 단정하며 장중했고 당당했으며 성대했다. 방금 눈이 내려 길 위의 쌓인 눈은 아직 녹지 않았다.
장어산과 주씨는 있는 힘을 다해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마음속 동요를 감출 수가 없었다. 특히 장어산은 이때까지 장부야말로 제일 부귀하다 여겼고 한안의 자리를 빼앗아 차지할 생각에만 연연했었다. 하지만 황궁을 둘러보니 장가도 황가에 비하자면 그저 조족지혈에 불과했다. 그녀는 돌연 목표가 생겼다. 이렇게 영화롭고 부귀한 궁에 들어가 더 존귀한 사람이 되고 말 것이라고.
한안은 장어산 눈 속에 서린 탐욕을 보았다. 한안의 입가에 조소의 기색이 나타났다. 일단 탐욕이 일면,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더더욱 어려워지기만 할 터였다.
과연 장어산은 어떤 수단을 써서 이 모든 것을 탈취하려 할까.
길 안내를 하는 궁녀는 그녀들 사이의 이상한 기류를 느낀 듯했지만, 말을 더 보태지 않고 긴 회랑을 돌아 거대한 궁중 정원으로 들어갔다. 한안이 고개를 들어보니 상부에 ‘채봉전’이라는 세 글자가 쓰여 있었다.
“장 부인이 오셨습니다.”
궁녀가 막 통보를 마치자 시끄럽던 대전이 바로 조용해졌다. 한안은 눈을 들자마자 정면의 예리한 눈과 마주쳤다.
한안은 손을 꽉 쥐고 얼굴에 따뜻한 미소를 띠며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가 예를 올렸다.
“신녀(臣女) 장한안, 황태후께 문안을 올리옵니다.”
황태후는 금사로 수를 놓은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화차 한 잔을 받쳐 들고 있었다. 비록 반백 살이 넘었지만 눈은 예리했고 온몸에서 위엄 있는 황가의 기운을 발산하고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까닭 없이 압박과 위협을 느끼게 했다. 한안은 한쪽 무릎을 꿇어 예를 올렸다. 황태후는 한참이나 말이 없더니 오래도록 침묵한 뒤에야 비로소 말했다.
“일어나거라. 이리 와서 내가 좀 보게 해다오.”
이상했다. 한안은 황태후와 아무런 접촉도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볼 문제였으나 일어나지 않는 것은 예가 아닌지라, 바로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한안은 황태후 곁으로 걸어가서 달콤하게 웃었다.
황태후의 눈이 한안의 얼굴 위를 흘끗 보았다. 거기에는 천진하고 사악함이 없으며 활발하고 명랑한 소녀의 얼굴이 있었다. 황태후의 눈빛이 바뀌더니 상냥한 말투로 말했다.
“좋은 아이로구나.”
그녀는 손목의 옥팔찌를 벗어 한안의 손에 쥐여주었다.
“곱게 자랐구나.”
한안은 팔찌를 받는 순간 오만가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즉각 황공함을 담아 사양하며 말했다.
“태후, 이것은 너무 귀중한 것입니다. 신녀에게는 과분합니다.”
태후가 웃었다.
“일단 받아 두거라. 너를 어여삐 보아서 상을 주는 것이다.”
한안은 좀 더 송구해 하며 팔찌를 받았다.
주씨와 장어산은 좌불안석이 되었다. 태후가 갑자기 장한안을 눈여겨보며 특별히 예뻐할 줄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특히 장어산은 죽일 듯이 한안 손안의 옥팔찌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저 작고 천한 년이 뭐가 잘나서 태후의 호감을 얻은 것이지?
주씨도 장어산을 이끌고 앞으로 걸어가 예를 올렸다.
“신첩이 태후께 문안을 올립니다.”
장어산은 방금 전에 태후가 한안에게 옥팔찌를 주는 것을 보고 태후의 환심을 사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녀는 바로 교태를 부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신녀가 태후께 문안을 올립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본래도 듣기 좋았지만, 환심을 얻기 위해 좀 더 부드럽게 내니 부드러운 미풍이 귀를 스치고 지나 평온한 호수면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는 듯 했다.
대전에 있던 여자들이 일제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좀 전에 한안이 태후의 하사품을 받은 것도 신기한 일이었지만 장부의 다른 소저의 꿀 같은 목소리도 그녀들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다. 일순간, 대전의 모든 눈빛이 장어산에게로 쏟아졌다.
한안은 속으로 탄식했다. 장어산의 이런 목소리를 공자들이 듣는다면 확실히 아무 문제 없이 귀여워하고 총애할 것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좌중은 전부 여자였다. 이 고관대작의 귀한 여인들은 현명함과 선량함 그리고 정숙한 덕을 가장 중요시했다. 장어산의 교태 어린 목소리는 여인의 덕을 지키지 않는 것이며 동시에 풍속을 문란케 하는 것이었다.
장어산은 순식간에 자신에게 이목이 쏠리자 아무것도 모른 채 기뻐하고 있었다. 태후가 주씨를 보며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네가 장 대인이 새로 얻은 후실인가?”
주씨는 태후가 이렇게 물을 줄 생각지도 못한 터라 한순간 두 입술을 꽉 다물었다. 본래 그녀가 궁중 연회에 출석한 것은 모두가 그녀를 장부의 새 여주인으로 여기게 하기 위함이었으나 태후가 이렇게 물으니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이낭임을 인정한다면 궁중 연회가 또 무슨 의미가 있으랴!
결국,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신첩은 후실이 아닙니다. 그저……시첩입니다.”
주위의 부인들이 주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주씨 모녀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경멸이 담겨 있었다. 첩실과 서출이었구나. 어쩐지. 첩실이 기른 딸이 경박하게 입은 것 좀 봐. 어디서 불여우 짓거리를 배웠는지 모르겠네. 과연 정실 적녀와 비교가 안 되는구나. 확실히 적녀는 희고 아름다운 살결에 처신이 침착하고 여유가 있는 게 아주 품격이 높아 보이네.
태후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구나. 일어나라.”
그리고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주씨는 일순간 얼굴이 온통 시뻘게져서 장어산을 잡아끌고 구석에 가서 앉았다.
장어산은 왜 그런지는 알지 못했지만, 주위 사람들의 눈빛이 이상하다는 것은 민감하게 알아차렸다. 거기에 태후가 그녀에게는 상을 줄 의사가 없는 것까지 알고 나니 불쾌함과 분노를 참을 수 없어 이 모든 탓을 한안에게로 돌리려 했다. 한안에게 몇 마디 말하려고 할 때, 한안이 노란 옷을 입은 소녀의 앞에 앉아 손을 잡으며 웃음 가득한 얼굴로 말하는 것이 보였다.
채봉전은 태후의 거처로 평소에도 궁중 비빈들을 접대하는 데 사용되었고 초대받은 부인들은 채봉전 이곳저곳에 모여 화기애애하게 담소했다. 방금 전의 사소한 풍파는 다 지나가고 평정을 회복한 듯했다.
“한안, 우리 정말 오랫동안 못 만났어.”
노란 옷의 소녀는 한안의 손을 놓지 않으며, 얼굴 위에 기쁨이 가득했다.
한안은 앞의 소녀를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등선은 한안의 규중 친구였다. 납치사건 이후, 온종일 부중에만 머물던 한안에게 등선만이 찾아와 함께 어울리기를 원했다. 두 사람의 정은 얕지 않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중에 등선의 부친이 잘못을 범하여 황상의 진노를 샀고 7품으로 강등되었다. 등선은 한림원의 한 관료에게 시집을 갔고 시집간 지 1년이 못 되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안은 그 소식을 처음 듣고는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었다. 후에 듣기를 그 한림 관료에게 사람으로서 수치를 모르는 취미가 있었다고 한다. 등선은 그 사람에게 강제로 학대를 당하여 죽었다고 했다.
등 상서에게는 오직 딸 하나뿐이었다. 등선이 죽은 후 한이 맺혀 오래지 않아 명을 달리했고 1년이 지난 후 등 부인도 따라갔다. 영광이 끝이 없던 상서부는 그냥 그렇게 몰락하였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한안의 심장이 조여들었다. 한안은 등선의 손을 움켜쥐었다.
“나도 네가 그리웠어!”
등선은 놀라 서둘러 말했다.
“어째서 눈이 빨개? 너를 보러 가고 싶었는데 애석하게도 외숙께서 집 안에 머물고 계셔. 듣자 하니 저 사람이 너의 계모라며. 혹시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니야?”
한안은 삶을 되풀이하기 전 연기처럼 스러져간 사람이 지금 멀쩡하게 눈앞에 서 있음에 흥분하여 예의를 지키는 것마저도 잊었다. 등선의 작은 얼굴에 걱정스러움이 서린 것을 보고는 마음이 따뜻해져서 웃으며 말했다.
“일개 첩실인 그녀가 어떻게 감히 나를 괴롭힐 수 있겠어? 난 괜찮아. 언니를 보니 너무 기뻐.”
등선은 한안의 말에 잠시 멍해졌다. 얼마 전, 장가에서 초상을 치를 때 한안을 보았다. 한안은 그녀의 손을 잡고 흐느껴 울었고 눈 속은 온통 절망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생기발랄했다. 둘 사이가 워낙 친밀하여 등선은 한안에게 일어난 변화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한안은 좀 더 성장한 듯했고 적지 않게 침착했다. 조금 전 태후를 마주할 때만해도 여전히 천진하고 사랑스러웠으나 등선은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한안이 겉보기처럼 그렇게 온순하지만은 않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온순함 아래에는 무언가가 감추어져 있었다. 지금 한안이 주씨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으니 이미 모든 것을 계산해 놓은 듯한 자신감이 담겨 있었다. 그런 한안이 생소해 등선은 순간 넋이 나갔다.
한안은 등선이 넋이 나간 것을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왜 아무 말도 않고 나를 봐? 설마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정신을 차린 등선은 자신이 공연한 생각을 한다고 여겼다. 설령 한안이 정말 변했다 해도 이런 변화라면 지극히 좋은 것이다. 생기라곤 전혀 없던 한안보다 생기발랄한 한안이 더 좋았다. 그래서 진지하게 말했다.
“네가 슬픔을 떨쳐내지 못할까 봐 걱정했어. 그런데 지금은 그 어둠 속에서 나왔으니 정말 잘됐다고 생각해.”
“시간은 어쨌든 천천히 흘러가는 법이니까.”
한안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상심하는 것은 나를 해치려는 사람들만 기쁘게 하고 진정으로 나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을 근심하게 만드는 거야. 구태여 친한 이들을 아프게 하고 원수들을 즐겁게 할 필요가 있겠어?”
등선은 멍해졌다.
“너를 해치려는 사람들?”
말소리가 미처 떨어지기도 전에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넷째 동생은 어째서 이 소저와 말하는 데만 정신을 쏟고, 언니는 신경도 안 쓰지?”
한안을 향한 태후의 태도와 교태로웠던 장어산의 행동으로 인해 모든 부인과 소저들은 그녀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와중 장어산의 낮지 않은 목소리는 몇몇 부인들의 눈빛을 끌어당겼다.
한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로 스스로 말썽을 사서 하는구나.
장어산은 한안의 표정을 보지 못한 것처럼 친밀하고 다정스럽게 그녀의 팔짱을 끼었다.
“한안, 평소 부중에서는 네가 걷고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온종일 방 안에서 수를 놓고 글씨만 쓰니 너를 몇 번 볼 수도 없었어. 하지만 이번에 함께 밖에 나왔으니 우리 같이 이야기 나누자.”
등선은 한안의 의붓언니를 가늠해 보았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인가? 평소 한안과 몇 번 보지도 못했다는 말은 한안이 거만하게 굴기를 좋아해서 서출인 언니를 괴롭힌다는 말이지 않은가? 이렇게 많은 부인, 소저들 앞에서 한안이 함께 지내기 쉽지 않으며 서출 언니를 학대한다는 누명을 씌우려는 게 아니고 뭐일까.
과연 옆의 몇몇 부인들이 한안을 향해 보는 눈빛이 순간 변했다.
한안은 내색 없이 침착하게 이 모든 것을 지켜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사가 바로 이렇다. 사람들은 어쨌든 소문거리를 붙잡아 듣기를 좋아했다. 장어산이 서녀이긴 하나 적녀인 자기가 그녀를 괴롭힌다면 대갓집 규수의 품격을 잃는 것이고 심지어 악독하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 부인들은 평소에 다른 가문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수집할 정도로 소문거리를 즐겼다.
등선이 조급하여 한안을 도와 몇 마디 하려 하자 한안이 그녀의 손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한안은 장어산의 득의만만한 눈빛을 마주하며 살짝 웃었다.
“어산 언니, 모친께서 세상을 뜨신 후 몸이 줄곧 좋지 않았어요. 방 안에 있었던 것도 병이 다른 사람에게 옮을까 걱정해서였어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요 며칠 내내 어산 언니가 와서 이야기 나눠주기를 간절히 바랐어요. 하지만 어산 언니가 막 부에 들어와서 너무 바쁘니까 내 쪽은 돌아볼 틈이 없다고 생각했죠.”
장어산의 아름다운 얼굴이 순간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한안이 방에 틀어박혀 사람을 안 만난 게 아니라 병을 앓고 몸져누워서 병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리고 서녀 언니는 적녀인 여동생이 병을 앓고 있는데 문병도 가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여러 부인들이 경멸하는 눈빛으로 장어산을 훑어보았다.
등선은 한숨을 돌렸다.
“나는 아니……, 네 병은 일찌감치 나았잖아.”
한안은 고개를 수그려 눈동자 속의 감정을 감추고 마치 괴롭힘을 당하는 듯 말했다.
“어산 언니, 내 병은 부중의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일이에요. 어머니가 막 세상을 뜨셔서 마음이 견딜 수 없이 슬퍼서 좋아지지 못했어요.”
부인들은 모두 한안이 방금 어머니를 잃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직 앳된 기가 남아 있는 한안의 얼굴을 보며 저절로 가련히 여기는 마음이 일었다. 이 아이는 효심이 지극하구나. 나이가 어린데 어머니를 잃었으니 참 가련하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장어산에 대해서는 혐오하는 마음이 생겼다. 서녀에 불과하면서 높이 기어오르고 싶어 하여 집안에 분란을 일으키는구나!
주씨는 장어산 쪽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서둘러 다가와 장어산을 불렀다. 한안은 장어산의 그 얼굴을 더 볼 필요가 없어 즐거웠다.
등선은 장어산이 간 후 몰래 한안에게 귓속말을 했다.
“내가 보기에 저 언니는 쉽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너를 헐뜯으려 하잖아.”
한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함부로 설치고 다니는 비열한 소인일 뿐이야.”
등선은 바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며칠 못 보았더니 네 말솜씨가 이렇게 유창해졌네. 누가 가르침을 준 건지 모르겠구나.”
한안은 웃기만 할 뿐이었다.
눈을 들어 밖을 보니 궁중 복식의 미인 하나가 걸어 들어 왔다. 뒤로는 몇 명의 궁녀가 뒤따르고 있었다. 미인은 자리의 모든 사람들에게 맑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부인 여러분, 마마께서 매화 정원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태후마마와 부인, 소저들께서 함께 매화를 감상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궁중 야연은 밤에 진행될 예정이었고 지금은 대낮이었다. 그래서 황후는 매화 감상을 하며 시간을 보내도록 부인, 소저들을 매화 정원으로 초대했다.
한안은 등선의 손을 잡고 부인들의 뒤를 따라갔다. 잘 아는 부인들은 자연히 이야깃거리가 한 무더기 있었고 잘 모르는 사람은 웃으며 몇 마디 하다 보면 바로 친해졌다.
이런 연회에서 부인들이 친분을 맺는 것은 목적이 따로 있었다. 이 집에 출가할 나이가 된 딸이 있고 저 부에 혼인하여 가정을 이룰 나잇대의 아들이 있으면 서로가 상대방의 가세와 배경을 알아보고 좋은 인연을 이루려는 것이다.
남자들의 정치는 잔을 밀고 계책을 교환하는 술 탁자 위에 있었고 여자들의 정치는 집안 자질구레한 일의 소문들 사이에 있었다. 그리고 혼인은 여인의 최대 정치였다.
한안은 곁눈질로 주씨 모녀 둘을 흘끗 보았다. 장어산이 화려한 의상을 입은 소녀 곁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얼굴에 온통 아첨하는 빛이 가득했다. 아마 소녀가 입은 옷이 평범하지 않고 미간에 오만한 빛이 드러나는 걸 보니 명문대가의 소저일 게 분명했다.
장어산은 한안의 눈빛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입가에 도전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한안은 고개를 살짝 젓고는 그녀를 다시 보지 않았다. 그저 장어산이 정말로 어리석다고 느꼈다. 부귀한 집안의 소녀 하나에게 아첨하면서 득의만만할 게 뭐 있을까.
아첨 기술은 분명 그녀의 모친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리라. 한안은 부인들과 다정하게 말하는 주씨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과연 처세술이 좋구나. 이렇게 빨리 그녀에 대한 부인들의 불만을 없애다니. 심지어 부인들은 주씨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한안에게는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어떤 방법으로 저지해야 하나?
등선은 한안이 멍해진 것을 보고 그녀를 살짝 밀었다.
“뭘 멍하니 있어. 이 매화를 봐. 얼마나 예쁘니!”
한안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등선의 시선을 따라갔다. 가지 위에 핀 매화의 향기가 한안을 엄습해 왔다. 한안이 숨을 들이마시자 몸과 마음이 다 향긋해지는 기분이었다.
황가의 정원은 몇십 리에 달할 정도로 광활했는데 전부 눈처럼 흰 매화로 가득했다. 바람이 불어오자 매화가 바로 바람에 날려 땅에 떨어져 눈인지 매화인지 알 수 없는 것이 마치 선경처럼 아름답고 절묘했다.
부인들도 아름다운 경치에 빨려들었다. 황후는 정원 숲 작은 탁자에 정교하고 섬세한 간식과 과일 차를 준비해 놓았다. 여기에서 매화를 감상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확실히 즐거운 일이었다.
한안은 등선을 따라 등 부인의 옆에 앉았다. 등 부인은 상냥한 용모의 부인이었다. 그녀는 친절했고 한안을 귀여워했다. 급람과 주홍, 다른 여종들은 매화 정원 저쪽에서 신선한 설탕절임 과일을 차리는 것을 거들고 있었다. 장어산은 그 화려한 복장의 소녀 옆에 앉아 있으면서 이쪽을 재빨리 훑어보았다. 추측할 필요도 없이 시빗거리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찌할 방법이 없겠구나. 처음부터 장어산이 좋은 마음을 품고 온 것은 아닐 테다. 하물며 한안이 한마디 한 게 있으니 반드시 복수하는 그녀의 성정으로 보았을 때 어쨌든 원한을 대갚음하려고 할 것이다.
잠깐 이야기를 나누던 장어산이 돌연 일어서서 한안의 곁으로 걸어왔다.
“한안, 정방(淨房: 뒷간)에 좀 가고 싶은데 나와 함께 가주렴.”
한안은 장어산이 무슨 나쁜 속셈을 품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본능적으로 거절했다.
“궁녀에게 함께 가자고 해요. 나도 길을 몰라요.”
장어산은 포기하지 않고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그녀를 보았다.
“나……나는 아직 무서워. 우리는 자매인데 동생이 나를 귀찮아할 리는 없겠지?”
이렇게 말을 하는데도 다시 거절하는 것은 그녀가 장어산을 자매로 여기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자리의 부인들이 모두 보고 있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등선도 어렴풋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일어서며 말했다.
“나도 함께 갈게.”
한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어. 내가 함께 가면 돼. 곧 돌아올게.”
이 일은 등선과 무관하니 그녀를 끌어들이지 말아야 한다. 결국 궁 안에서 벌어질 일이다. 장어산도 공공연하게 무슨 짓을 하지는 못할 것이니 잘 방비하면 그만이다. 어산 곁에 있던 화려한 옷을 입은 소녀가 한안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도대체 무슨 신분인 걸까?
길을 안내하는 궁녀가 앞서 걷고 한안과 장어산은 그 뒤를 따랐다. 장어산은 줄곧 미소를 띠고 있었다. 장어산이 어찌할 생각인지 알 수 없는 한안은 몰래 소매 속에 넣어둔 나무 비녀 하나를 꽉 움켜쥐었다.
이 나무 비녀는 그녀가 열 살 생일 때, 장한명이 직접 깎아서 선물해 준 것이었다. 윗면의 꽃 모양이 조잡하고 거칠었지만 만든 사람이 열심히 애쓴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쓰기가 아까워 빈 갑 안에 넣어 보관해 두었다. 열두 살로 되돌아온 그녀는 물품을 정리하면서 나무 비녀가 처음처럼 밝게 빛나는 것을 발견했다. 분명 장한명은 좋은 목재를 찾아 비녀를 만들었을 터였다.
모든 물건은 효용을 극대화해야 한다. 그녀는 작은 칼을 찾아 비녀의 한쪽 끝을 날카롭게 갈아 호신용 도구로 만들었다. 큰일에 부딪혔을 때 이 비녀가 그리 큰 소용은 없겠지만 가지고 있으면 마음을 편안하게 해줬다.
지금 장어산은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으니 한안도 신중하고 조심해야 했다. 하지만 이곳은 황궁이었고 장어산은 궁중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니 무작정 어리석은 짓을 할 리는 없었다. 자신을 처리하려 하면 궁중 누군가가 어산을 도와주어야 한다. 한안은 그 화려한 복장의 소녀를 떠올렸다. 지위가 높아 보였는데 설마 궁중 사람인가?
장어산이 무슨 말을 했기에 그 소녀가 장어산과 함께 하는 거지?
한안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궁중의 작은 길은 이리저리 뒤얽히고 복잡했다. 한안이 다리가 좀 시큰하다고 느낄 때쯤, 비로소 궁녀가 걸음을 멈추었다.
“장 소저, 도착했습니다.”
장어산은 바로 한안을 잡아끌고 들어갔다. 황가의 정방은 붉은 기와에 붉은 담이었고 기세가 평범하지 않았다. 한안은 스스로를 나무랐다. 때가 어느 때인데 궁중의 정방과 자기 집 정방 중 어느 것이 좋은지 비교나 하다니.
정방은 모두 세 칸이 있었다. 한안과 장어산은 각자 한 칸에 들어갔다. 한안은 처음부터 줄곧 경계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반드시 장어산이 무슨 짓을 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줄곧 정방 문을 바짝 응시하면서 장어산이 갑자기 문을 부수고 들어올 것을 방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나저제나 하고 초조하게 기다렸지만 장어산은 움직임이 없었다. 한안은 문밖을 나가 그녀를 불렀다.
“어산 언니?”
그녀에게 회답한 것은 살을 엘 듯 매서운 바람 소리뿐이었다.
한안은 마음속이 서늘해졌다. 문득 무언가를 떠올리고 빠른 걸음으로 궁녀가 서 있던 자리를 항해 걸어갔다. 그러나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 자리에 한참 서 있다가 한안은 비로소 가볍게 웃었다. 줄곧 장어산이 그녀를 해칠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런 방식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날 여기에 버린 건가?
한안은 처음 궁에 들어왔으니 당연히 길을 몰랐다. 그녀는 돌연 깨달았다. 그 궁녀가 조금 전 그녀들을 데리고 샛길로 걸어 들어왔고 도중에 단 한 번도 사람을 마주친 적이 없었다는 것을.
궁중의 일부에는 황실의 비밀과 관련이 있어서 금지(禁地)로 삼았다. 한안은 이곳이 금지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자신이 여기에서 기다리는 동안 장어산은 돌아가서 그녀를 잃어버렸으니 사람을 보내어 찾으라고 말할 것이다. 금지에 있다가 발견되면 이유가 있다 해도 질책당할 것이 뻔했다. 게다가 황상이 책망이라도 하면 일개 규방 여자의 입장에서는 치명적인 일이 될 것이다. 장어산의 심보가 이렇게 악독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나 금지 밖으로 나가고 싶어도 한안은 길을 알지 못했다. 이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섣불리 걸음을 잘못 옮기면 또 다른 금지일지도 몰랐다.
한안은 후회했다. 급람과 주홍을 불러서 뒤따르게 했어야 했다. 애석하게도 그녀들은 그때 다른 곳에서 시중을 들었고 그녀와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한안은 고개를 한 번 저은 다음 이를 악물고 큰 숲이 있는 동쪽을 향해 걸어갔다.
사실 이치를 따지자면, 탁 트여 시원하게 열려 있는 땅으로 가는 것이 맞았다. 그러나 한안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만약 금지라면 숲속의 수목이 울창할 것이니 숲이 그녀를 위한 차단막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건물 쪽으로는 절대 갈 수 없다.
걸으면서 주위를 살피던 한안은 정말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데 놀랐다.
일이 이상해지면 반드시 변고가 생긴다고 궁중에 태감이나 궁녀의 시중이 없는 곳은 반드시 까닭이 있었다. 한안은 정방을 벗어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정방 쪽은 넓은 공터라 숨으려 해도 숨을 데가 없어서 만약 누군가 찾으러 오면 한눈에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한안은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언제쯤 매화 정원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
얼마나 오래 걸었는지 알 수 없었다. 숲은 여전히 끝이 없는 것 같았다. 한안이 초조해하고 있을 때, 공기 중에 짙은 향기가 전해져 왔다. 한안은 향기를 맡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드넓은 홍매화가 펼쳐져 있었다.
황후의 하얀 매화 정원이 단순히 아름다운 경치라고 한다면 이쪽 홍매화 정원은 선경이었다.
큼직큼직한 송이의 매화가 곱고 생생하게 피어나 눈부신 붉은 색이 화려한 멋을 더했다. 매화는 본디 냉담한 정취를 풍기는 법인데 홍매화는 열렬하고 또 눈부셨다. 도도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가지 끝에 오연하게 솟아 있었다. 엄동설한을 두려워하지 않고 가지 끝에 싸늘한 봄추위를 전했다. 순간 한안은 봄 같다고 느꼈다.
십 리에 이르는 홍매화에 땅을 뒤덮은 대설은 화려하면서 소박했고 번화하면서 냉담했다. 매화는 피는 것도 급작스럽고, 지는 것 또한 급작스러운 꽃이었다. 아름다운 홍색이 한안의 눈을 붉게 물들였다. 인생은 너무나도 짧고 꽃다운 청춘은 영원히 간직하기 어렵다. 매화는 그녀의 전생과 같이 가장 아름다운 시절, 가장 아름다운 날에 죽었다.
그녀는 홍매화가 자신처럼 느껴졌다. 그녀도 이렇게 활짝 피었던 그날 죽었다. 그녀의 아름다움, 그녀의 좋은 점을 그 사람은 보지 못했다.
매화는 겨울철에 피어서 반드시 사나운 눈보라 세례를 받아야 했다. 그녀의 인생 또한 영원히 ‘평안’ 두 글자와 닿을 수 없었다. 그녀의 일생은 늘 바람이 불고 비가 들이치며 가엾게 여기는 이 하나 없었다. 누가 그녀를 알고 좋아하며 바라봐 줄 것인가. 누가 그녀를 이해하고 자상하게 돌보아 줄 것인가? 그녀는 자랑스럽지만 슬프게 살아남았다.
한안의 속눈썹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그녀는 홀리기라도 한 듯 앞을 향해 몇 걸음 걸어갔다. 그러나 돌연 멀지 않은 곳에서 그녀를 노려보는 듯한 눈빛이 느껴졌다. 가슴속이 서늘하여 머리가 곧장 맑게 개었다. 눈을 들어 그쪽을 보니 멀리 궁의 담장 부근, 홍매화 아래 서 있는 훤칠한 인영이 보였다. 흰 눈과 하나가 된 듯 그는 그저 그렇게 담담히 바라보고 있었다.
한안이 상대방을 바라보자 하늘에서 돌연 눈이 날리기 시작했다.
눈꽃이 나풀나풀 한안의 머리와 어깨에 떨어졌다. 한순간 그 사람의 얼굴이 희미해졌다. 한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상대방은 그녀를 발견했다. 그녀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때 큰 눈이 어지럽게 날리며 그 사이사이 홍매화가 점점이 눈에 들어왔다.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낯선 사람만 아니라면 실로 한 폭의 절경이라고 할 만했다.
애석하게도 그 절경을 감상할 기분이 아니었다. 당혹스러움이 지나고 나자 한안은 천천히 냉정해졌다. 저 사람이 여기에 나타났으니 저 사람 자신이 금지 안의 사람이거나 아니면 그의 신분이 금지라는 이름을 두려워할 필요 없을 정도로 높은 것일 것이다.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상대방은 분명 이미 그녀를 발견했다. 그러나 움직이지도 내색도 않고 있으니 그녀를 놓아주겠다는 뜻인가?
한안은 잠시 망설이다가 저 사람이 도대체 누구든 상관하지 않기로 마음을 굳혔다. 지금은 줄행랑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막 발을 들고 떠나려 하는데 앞에서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안은 바로 긴장했다. 어떻게 또 사람이 있을 수 있지?
여기는 광활한 홍매화 숲이다. 매화나무는 빽빽하고 무성하게 자랐다. 그러나 그것이 한안의 신영을 충분히 가려줄 수 있다는 뜻은 결코 아니었다. 하물며 눈 덮인 흰 대지에서 한안은 확실히 두드러지게 눈에 띄었다.
한안은 고개를 들어 저쪽 길고 긴 궁 담장을 흘끗 보았다. 담장 모퉁이에 간신히 몸을 숨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퉁이에 여전히 그 사람이 서 있었다.
저 사람은 다가오는 사람들과 한 패일까? 만약 한 패라면 자신이 무슨 선택을 하든 같은 결과일 것이다. 만약 한 패가 아니라면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발걸음 소리가 좀 더 가까워졌다. 남자 한 명, 여자 한 명이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뒤따랐다. 오는 것은 두 사람이었고 저쪽은 오직 한 사람이다. 한안은 이를 악물고 바로 궁의 담장 쪽으로 갔다.
궁의 담장 쪽에 서 있던 인영에게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는 한안에게 뿐만 아니라 다가오는 사람 누구에게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여전히 곧게 매화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남자에게 가까이 걸어갈수록 한안은 더 긴장되었다. 한안은 고개를 숙이고 앞으로 걸어가다가 자신에게서 한 걸음 떨어진 눈 덮인 땅 위에 금으로 테두리를 두른 먹빛의 화려하고 귀한 관화를 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맹렬하게 한기를 발산하자 터무니없이 긴장했다. 한안은 그 기세에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러나 상황은 그녀가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을 허용치 않았다. 앞쪽에서 남녀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즐거워하는 것도 같고 고통스러워하는 것도 같았으며 여인의 낮은 헐떡임과 남자의 참기 힘든 포효가 뒤섞여 있었다. 한안은 무슨 상황인지 바로 이해하고 몇 초간 멍해졌다. 작은 얼굴이 화르륵 붉어졌다.
어렸을 때로 되돌아오기 전, 유모는 그녀에게 소책자 몇 권을 가져다주고 보도록 했다. 위 왕부는 다른 가문과 다르니 한안이 위여풍의 마음을 잡기 위해 배워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 부분에 대해 유모는 상세하게 이야기해 주다 못해 심지어는 나무인형을 찾아다가 시연을 해 보이기까지 했다.
한안은 이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이해했다. 위여풍을 떠올리자 한안의 얼굴빛은 파랄 정도로 하얘졌다.
궁중의 여자는 연회에 참석한 부인, 소저들을 제외하면 거의 모두가 황상의 여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황상은 지금 남자들과 수렵장에서 사냥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궁중에서 남녀가 야합(野合)하고 있다? 여인이 황제의 비빈이든 아니든 혹은 다른 사람이든 간에 이것은 사통의 범죄였다. 그러니 만약 한안이 발각된다면 아마 죽음을 당할 것이다. 만약 남자의 신분이 고귀하고 여인이 궁 밖의 소저라면 그들이 여기서 저지른 일을 한안이 보았으니 한안이 그 남자에게 시집가는 수 밖에 없었다.
여자의 운명은 이처럼 하릴없었다. 더욱이 명문세가 집안의 여자는 행동거지에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되었다. 장어산의 단순한 행동이 그녀를 이렇게 곤란한 지경에 밀어 넣는구나.
저쪽 남녀는 그 짓을 하면서 점점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몇 걸음만 더 오면 담장 이쪽에 숨어 있는 한안을 볼 수 있을 것이었다.
한안은 원망스럽고 또 초조했다. 곁눈질로 몸 가까이 있는 그 사람을 흘끗 보았다.
처음부터 이 사람은 어떤 당황스러운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제 자리에 서 있었다.
한안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고개도 들지 못했다. 남자가 신은 관화를 보아하니 신분이 부유하거나 아니면 고귀하여 그녀가 성가시게 할 수 있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이렇게도 초조한데 이 남자는 왜 전혀 조급해보이지 않을까?
그가 냉정할 수 있는 것은 설마 정말로 두려워하지 않아서인가?
그는 두렵지 않아도 그녀는 두려웠다.
이 사람이 높은 신분이라면 그는 걱정할 것 없이 떠날 수 있겠지만 그녀는 장가에서 총애받지 못하는 소저일 뿐이었다. 비밀리에 누군가에게 살해되거나 아니면 저 매화 숲속의 간통남에게 시집가야 했다.
이번 생도 장어산의 음모 때문에 죽어야 하는 것인가?
그녀는 원치 않았다.
어디서 용기가 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걸음 소리가 좀 더 가까워지자 그녀는 눈앞에 있는 남자의 검은 표범 가죽 피풍의를 들쳐 올리고 안으로 파고들어 갔다.
피풍의 안으로 파고들어 간 후 한안은 바로 후회했다. 남자의 몸에서 발산되어 나오는 매서운 한기가 그녀를 얼음덩이로 만들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그녀는 비로소 뒤늦은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일시적인 충동으로 이 남자가 눈앞에 닥친 국면을 해결할 방법이 있을 거라고 짐작해서 남자의 피풍의 속으로 파고든 것인데. 이 사람이 적인지 아군인지는 불분명했다. 어찌 이렇게 대담한 짓을 저질렀을까. 이 남자에게 바짝 붙어 있으니 우아한 대나무 향과 남성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찌르며 풍겨왔다. 한안의 심장이 북처럼 마구 고동쳤다.
상대방이 화가 난 것이 분명했다. 한안은 자신이 바짝 붙은 몸에서 발산되는 불쾌감을 느끼고 절망했다. 자신은 곧 내던져지리라.
그 순간 갑자기 몸이 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남자의 손이 피풍의를 사이에 두고 그녀의 등을 받쳐 그녀의 몸 전체를 단단하게 보호했다. 이어서 아주 정확하게 그녀의 목덜미를 꽉 붙잡아 훌쩍 들어 올렸다. 한안은 몸이 들려 놀라 남자의 옷을 꽉 붙들고 눈을 뜨지 못했다. 심장이 쿵쾅쿵쾅 계속 뛰었다. 그러나 잠시 후 발이 땅에 닿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몸은 그 사람의 피풍의 안에 그대로 웅크리고 있었다. 얼마간 따뜻해지긴 했지만 온통 어두컴컴했다. 방금 전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머리 꼭대기에서 맑고 차가우며 매혹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러 해 묵은 좋은 술처럼 그윽하고 깔끔하며 우아한 소리가 귓가를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아직도 나오기 아쉬운 것이냐?”
한안은 깜짝 놀랐다. 서둘러 남자의 품속에서 빠져나오니 자신이 공터 뒤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마음속으로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깨달았다. 이 남자는 경공으로 자신을 끌어안고 자리를 떠난 것이다. 어쩐지 침착하더라니. 조금 전의 일을 떠올리니 한안은 공연히 얼굴이 빨개졌다.
한안은 고개를 들자마자 바로 멍해졌다.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수려한 얼굴이었다. 눈앞의 남자는 약 스물 남짓으로 보였다. 비스듬한 눈썹은 길게 뻗었고 콧날은 곧고 매끈했다. 눈꼬리가 위로 살짝 치켜 올라간 눈은 물결이 일지 않는 먹빛이었고 깊고 묵직한 심연의 물 같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얇은 입술은 팽팽히 다물려 있었고 턱은 깎아 놓은 것처럼 매우 강렬했다. 먹처럼 검은 머리카락은 허리 절반까지 드리워져 있었고 옥비녀가 비스듬히 꽂혀 있었다. 감색 장포를 입고 겉에는 검은 표범 가죽 피풍의를 느슨하게 걸치고 있었다.
준수한 청년은 한안을 응시하며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눈빛으로 한안을 압도하고 있었다.
한안이 전생에 위여풍에게 반한 것은 생김새가 수려했기 때문이지만 눈앞의 남자와 비교해 보니 하늘과 땅 차이였다. 이 청년은 나이가 많지 않지만 온몸에 존귀함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기개가 평범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은 천성적으로 ‘존귀’ 두 글자를 감당할 수 있다는데 한안은 눈앞의 남자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느꼈다. 어쩌면 황가 사람일지도 모른다. 한안은 그를 향해 예를 올리고 달콤하게 웃으며 말했다.
“대인, 소녀가 조금 전 길을 잃어 낯선 사람 둘을 보고 마음이 급하여 대인께 무례를 범하였습니다. 대인께서는 언짢게 여기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녀의 웃는 얼굴은 천진했으며 행동은 순수하고 사랑스러웠으니 보통 사람이라면 앞의 소녀가 그저 놀기 좋아하는 어린아이로 우연히 길을 잃었다고 여길 것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한안의 상대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부운석은 눈을 내리깔았다. 검은 눈동자에 의심의 빛이 스쳤다.
그 매화 숲은 누군가 들어올 수 있는 곳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오늘 황형을 도와 일 처리를 마친 후 지나치는 길에 무심코 머물렀다가 이 어린 아가씨를 보게 되었다.
매화 숲과 대설을 사이에 두고 있어 부운석도 그 어린 아가씨의 모습을 분명하게 볼 수가 없었다. 경계심이 일었다. 누구를 막론하고 여기에 들어와 그에게 목격된 이상, 쉽게 떠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 어린 아가씨의 몸에서 끝없이 애통한 기색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부운석은 그녀의 절망과 비애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홀린 듯 가지 위의 홍매화를 바라보았고 손을 뻗어 어루만지려는 듯했으나 마치 깨지기 쉬운 물건이라도 되는 듯 허공에서 손을 멈추었다. 표정을 분명히 볼 수는 없었지만, 저 어린 아가씨가 인간 세상을 떠나려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키도 아직 작은 어린 아가씨가 어떻게 이처럼 깊디깊은 상심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소녀의 영향을 받기라도 한 듯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때 어린아이가 그의 존재를 발견했다. 부운석에게는 뜻밖에도 그녀는 그저 제 자리에 서서 그를 살펴볼 뿐이었다. 큰 소리를 지르거나 혹은 달아나지도 않았다. 더할 나위 없이 차분하고 침착했다. 설령 꾸며낸 것이라 해도 이런 신중함은 그녀의 나이대에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린아이의 탐색하는 눈빛을 느끼며 부운석은 조용히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그녀가 어찌 하려는지 보고 싶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저쪽에서 또 두 사람이 왔다.
그는 즉시 의심을 품었다. 혹시 다른 사람을 찾아온 건 아닐까?
그러나 그 소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무언가 결심을 내린 듯하더니 그의 쪽으로 냅다 걸어왔다. 고개를 숙인 어린 소녀는 놀라고 두려워하는 모습이 가득했다.
부운석은 그저 이 어린 아가씨가 대담하다고만 생각하고 있을 때, 사람을 거북하게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당연히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알았다. 그러나 성년도 되지 않은 어린 아가씨에 대해서는 특별히 우려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그는 어린 아가씨의 얼굴이 붉어진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저 소리가 무슨 뜻인지 아는 건가?
부운석은 의아했다. 명문세가의 규수처럼 입고 있는데 그 집안의 규수가 이 나이에 남녀 간의 침실 일을 안다고?
그것이 도리어 조금 흥미를 자아냈다.
저쪽의 남녀는 그들을 발견한 듯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어린 아가씨는 그도 예상치 못한 행동을 했다. 날쌔게 그의 피풍의 안으로 숨어든 것이다.
부운석은 거의 눈이 휘둥그레질 뻔했다.
그는 지금까지 낯선 사람과의 접촉을 좋아한 적이 없어 좋은 벗과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그런데 지금 낯선 소녀가 그의 품속을 더듬어 들어온 것이었다.
너무나 당돌하지 않은가. 분노를 느낀 부운석은 그녀를 잡아당겨 던져버리려 했다. 그러나 그의 몸에 기대어 불안에 떨고 있는 것이 느껴지자 그는 생각을 바꾸었다. 여기 이 말썽 많은 곳에서 데리고 나가자.
그는 선량함이 넘치는 호인이 아니다. 그저 이 꼬마 아가씨가 조금 특별하다고 느껴 손 가는 대로 구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상대방이 온순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가장하여 그에게 감사를 표하고 방금 전의 일을 그저 우연한 일로 치부하자 그는 기분이 거슬렸다.
이 소녀는 스스로가 드러내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하지만 부운석은 지금 중요하게 처리해야 할 다른 일이 있었다. 보통의 규방 소저에 비해 조금 더 영리한 이 어린 아가씨에게 시간을 낭비할 순 없었다.
한안은 눈앞에 있는 남자의 수려한 이목구비를 넋을 놓고 있다가 그 사람이 눈썹을 치켜 올리는 것을 보았다. 그의 눈동자 속 먹빛은 헤아릴 수 없이 깊었다. 그가 담담히 입을 열어 말했다.
“너의 연기는 그럴듯하지가 않구나.”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남자의 눈빛은 그녀를 불편하게 자극했다. 사람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 자신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의 눈앞에 훤히 펼쳐져 있는 것 같았다. 한안은 입술을 깨물고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말했다.
“대인께서 무슨 연극을 보고 싶으신가요? 아마도 오늘은 궁중 연회에 극단을 부르지 않았을 거예요.”
이어서 무슨 말을 할지 한안이 고민하고 있을 때, 남자는 몸을 돌리면서 냉담하게 말을 던졌다.
“아직 안 가는 것이냐?”
한안은 눈앞의 사람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쉽게 그녀를 놓아준다고? 이 사람은 방금 그녀를 구했다. 만약 그가 그녀를 해치려 했다면 이렇게 귀찮은 일을 할 필요가 없으니 분명 나쁜 사람은 아닐 것이다.
“대인께서 알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황후 마마께서 매화 감상회를 여신 매화 정원은 어느 쪽으로 가야 하나요?”
잠깐의 침묵 뒤, 남자의 맑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작은 길을 따라가면 묵호각에 청소하는 궁녀들이 있다. 그녀들을 찾아 길 안내를 받으면 된다.”
한안은 그를 향해 깊이 절을 올렸다.
“대인께서 손을 내밀어 구해주신 은혜, 감히 잊지 않겠습니다. 이후 기회가 된다면 반드시 찾아뵙고 감사를 표하도록 하겠습니다.”
한안은 말을 마치고 바로 신속히 떠나갔다.
이후에 기회가 된다면이라. 한안은 걸어가면서 생각했다. 가장 좋은 것은 항상 손에 넣을 듯 말 듯 하다 사라진다.
한안이 떠나고 오랜 후, 부운석은 몸을 돌렸다. 눈빛이 땅 위에 떨어진 물건을 향했다. 부운석은 허리를 구부려 주운 뒤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으로 한안이 사라져간 곳을 바라보았다.
남자에게 들은 대로 한안은 얼마 안 되어 바로 정교하고 아름다운 궁원을 찾았다. 바깥에서 두 명의 궁녀가 물을 뿌리고 청소를 하고 있었다. 그중 한 궁녀가 한안을 데리고 매화 정원을 찾아갔다.
급람과 주홍은 벌써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멀리서 한안을 보더니 급히 마중하러 다가왔다.
“마침내 돌아오셨네요. 모두 저희 잘못입니다. 소저를 따라가지 않다니. 이 깊은 궁의 넓은 정원에서 아무 일도 없으셨는지요?”
한안은 그녀들에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난 괜찮아.”
등선도 와서는 그녀의 손을 잡고 걱정스럽게 말했다.
“어떻게 된 일이야? 방금 전에 네 언니가 와서 말하기를, 너에게 정방 밖에서 기다리게 했는데 나와 보니 네가 종적도 보이지 않았다는 거야. 이가네 소저가 하인을 보내 널 찾으러 가게 했어.”
한안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가네 소저? 어느 소저?”
등선이 말했다.
“네 언니 옆에 앉아 있던 그 우상의 천금.”
한안은 그제야 눈빛을 좌중으로 돌렸다. 주위의 부인과 소저들은 한안이 돌아온 것에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장어산의 얼굴빛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켕기는 마음 때문인지 감히 그녀를 바로 보지 못했다.
한안은 어산 주위의 화려한 복장의 소녀를 흘끗 보았다. 이가 소저는 표독스럽게 눈을 마주쳐 왔다. 눈빛 속이 온통 분노와 불쾌감으로 가득찼다.
기괴하고 이상했다. 이 소저는 그녀가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만약 장어산을 위해 직접 나섰다 해도 이렇게까지 할 가치는 없었다. 그녀가 무언가 잊어버린 일이 있는 건가?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한안은 자신이 이가 소저와 무슨 갈등이나 불쾌한 일이 없었음을 확신했다.
“장 소저는 방금 전에 길을 잃었죠? 이 황궁은 바깥에 비길 수 없으니 함부로 다니면 사고가 생길 수 있어요. 혹시 아까도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죠?”
그녀의 물음에 주위 부인들의 눈빛이 한안에게 쏠렸다. 여 귀비와 한창 이야기하고 있던 황후조차 차를 받쳐 든 동작을 살짝 움직이며 의미심장하게 돌아보았다.
한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것은 그녀가 법도를 모르고 홀로 황궁 안을 제멋대로 다녔다는 의미였다. 황후도 그녀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으니 만약 비밀스러운 곳에 간 것이 알려지면 오늘 바로 암살당할 위험도 있었다.
주위 사람들의 호기심 넘치는 눈빛을 보며 한안은 한숨을 내쉬고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어산 언니는 궁녀 언니를 한 명만 데리고 갔어요. 궁녀 언니가 어산 언니를 데리고 정방으로 들어가서 전 혼자 밖에 있었죠. 오래 기다려도 언니가 나오지 않아서 몹시 심심했어요. 마침 금빛 날개의 참새 한 마리 날아가는 것이 보여 놀라고 신기하여 바로 쫓아가다가 생각지도 못하게…… 생각지도 못하게 길을 잃은 거예요.”
한안은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다행히도 곧 궁녀 언니를 만나서 저를 이리로 데리고 와 주었어요.”
한안은 황홀함에 빠진 듯한 표정과 어투로 말했다.
“황궁 안은 희한한 일이 정말 많네요. 서책에서만 금빛 날개의 참새를 보았는데 오늘 식견을 넓혔지 뭐예요. 마마와 폐하의 위엄이 정말로 하늘에 닿고 복이 넘치십니다. 이 상서로운 징조를 보이는 새마저 날아오니 우리 대종의 시절은 바야흐로 가장 융성한 것이지요!”
둥글고 작은 얼굴에 살짝 홍조를 띠고 있는 한안의 모습은 한층 더 사람들의 호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녀의 목소리는 낭랑하고 활기차며 아름답고 청아했다.
하지만 말 속에 담긴 뜻은 교묘했다. 장어산이 정방에 가면서 궁녀 한 명만을 데리고 갔고 이 궁녀가 정방 안으로 들어갔다 하니 한안을 찬바람 부는 바깥에 아무렇게나 내버려 둔 것이다. 생각이 좀 있는 사람이라면 무슨 일인지 간파할 수 있었다. 순간, 장어산 주위의 소저들이 그녀를 보는 눈빛에 경멸이 더 깊어졌다.
황후는 복이 넘친다는 말에 크게 기뻐하며 얼굴에 환희의 미소를 피웠다. 황후가 그녀를 향해 손짓을 했다.
“착한 아이야, 본궁에게 오거라.”
한안은 온순하게 걸어갔다. 황후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궁금한 듯 물었다.
“네가 정말 금빛 날개 참새를 보았느냐?”
한안은 조금은 두렵고 조금은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이에요! 그런 새는 처음 보았습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그러지 않는데 길을 잃었답니다.”
그녀는 매우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황후를 보았다.
“그 참새의 깃털은 금빛 찬란했어요. 마마의 치맛단과 조금 비슷했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아름다운 목소리로 책망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엄하군요! 어찌 마마를 축생에 비교할 수가 있죠?”
한안은 고개를 들었다. 이 소저가 즉각 일어서며 매우 분노한 모습으로 그녀를 보았다.
황후가 손을 내저으며 조금 불쾌하게 말했다.
“가기, 여자아이가 어찌 그처럼 경솔하느냐? 장 소저의 말을 끊다니.”
한안은 입을 삐죽거리며 작은 얼굴에 진지함을 가득 담아 말했다.
“금빛 날개 참새는 축생이 아니에요. 제 어머니께서 일찍이 말씀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금빛 날개 참새는 집을 지키는 신의 화신이라고요. 만약 금빛 날개 참새가 있는 곳이기만 하면 그 집 사람은 복록이 아주 많고 자손이 끊임없이 길게 이어질 거라고요.”
한안이 말을 이었다.
“저는 마마께서도 복이 있으신 분이어서 몇 년간 줄곧 황상을 보좌하시어 대종의 강산이 이처럼 융성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물며 그 귀티가 흐르는 깃털 빛은 마마와 몹시도 비슷하였어요. 그렇다면 마마께서도 금빛 날개 참새의 화신이신 것이지요. 다만 그 참새는 작은 집안을 수호하고 마마께서 수호하시는 것은 큰 집안이지요!”
당연히 다른 사람이 자신을 찬미하는 것을 듣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 자리에 부인들이 황후에게 호감을 사려고 아첨을 했지만 누구도 한안처럼 교묘한 이는 없었다. 한안의 말은 황후의 고귀한 지위, 타고난 고귀한 운명, 더욱이 국가의 복을 칭송하는 것이었다. 황후는 육궁의 수장이라 몇 년간 크고 작은 사탕발림을 적지 않게 들었지만 지금처럼 유쾌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한안의 대범함에 황후는 얼굴에 웃음꽃을 활짝 피웠다. 한안의 천진한 작은 얼굴을 빤히 보는 눈 속에 호감이 더해졌다.
“어린 계집아이가 무슨 말을 하는 게냐. 강산 사직은 모두 황상의 복이시지. 여러 장군, 대신들이야말로 호국 지사들이고. 본궁은 그저 일개 아녀자라 어디 그런 능력이 있겠느냐.”
돌연 몸 뒤에서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황후는 사양할 필요 없소. 짐이 보기에 저 낭자의 말이 맞소이다. 그대는 확실히 짐의 복덩이오!”
황상이 몇몇 신료를 거느리고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분명 한안이 말한 것을 들었을 것이다.
황후는 기쁜 얼굴로 서둘러 일어나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으고 절을 올렸다.
“신첩이 황상께 문안 올립니다.”
주위의 부인, 소저들도 분분히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황상은 지극히 즐거운 모습이었다.
“모두들, 너무 예를 차릴 것 없다.”
황상은 돌아서서 다시 황후에게 말했다.
“황후, 장가 아가씨의 말을 짐이 들었소. 보아하니 올해 우리 대종이 번창할 듯하오. 마침내 복조가 날아오도록 끌어들였으니 말이오.”
황후가 살짝 웃었다.
“모두 황상께서 나라를 잘 다스리신 덕이지요.”
황상은 만족스럽게 황후를 보았다.
“내조의 공로야말로 그대의 덕 아니겠소.”
황상은 아주 오랫동안 황후를 온화하게 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황상이 방금 보여준 따뜻한 말에 황후는 기뻐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매화 감상 도중 황상을 우연히 만난 것은 작은 풍파인 셈이었다. 황상은 잠깐 머물렀다가 바로 떠났고, 매화 정원은 점점 이전의 시끌벅적함을 회복했다.
한안은 황후의 곁에 앉아 온순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방금 전의 일로 주위의 부인, 소저들이 한안을 보는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어떤 이는 심지어 친근하게 비위를 맞추려고도 했다.
한안은 처음부터 끝까지 얼굴에 웃음기를 담뿍 담고 있었다. 황후는 진심으로 자애로운 마음으로 한안을 대하였다.
장어산의 얼굴빛은 이미 흉해질 대로 흉해진 상태였다. 자신의 계략으로 한안을 손 봐 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녀가 이목을 끌 기회를 주었다. 황상이 떠날 때 한안에게 몇 마디 칭찬을 했고 황후는 한안을 곁에 앉아 있게 했다.
주씨는 여러 부인에게 말을 거느라 바빴다. 그녀는 한안이 운이 좋게 넘어가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장어산을 위해 길을 닦아 놓는 것이 더 중요했다. 궁에 들어올 기회는 결코 자주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한안은 웃음꽃을 피우며 말하는 동안 이가 소저를 관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가기는 줄곧 한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한안은 이가기의 적의를 느낄수록 더욱더 의아해질 뿐이었다.
아무 이유도 까닭도 없는 적의. 이가기는 어째서 그녀를 겨냥하고 있는 걸까?
이가기는 적의를 명백히 드러내며 한안을 온몸으로 압박하고 있었다. 한안은 과자 한 조각을 집어 들며 곁눈질로 려비 옆의 황태후를 흘끗 보았다.
황태후의 눈빛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한안은 도통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만난 그 순간부터 황태후의 태도는 뭔가 묘했다. 비단 손수건 속 옥팔찌가 마치 뜨겁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원인을 찾을 수가 없어 한안은 아예 이 일을 밀쳐두고 마음을 편히 하며 매화를 감상했다. 물론 백매화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홍매화 숲의 풍모에는 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궁중에 그렇게 뛰어난 경치가 있음에도 황후가 감상하는 곳은 이곳이니 아마 그곳은 보통 사람은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거나 무슨 비밀과 연루되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안은 그 비밀에 대해서는 조금도 흥미가 없었다. 알고 있는 비밀이 많을수록 죽는 것이 더 이르다 하였다. 하지만 홍매화 숲에서 만난 수려한 남자를 떠올리자 공연히 얼굴이 붉어졌다.
궁중에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니 분명 존귀한 사람일 것이다. 부딪치지 않는 것이 좋다. 다시 한번 그 남자의 차가움 때문에 상처 입게 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매화 감상 시간은 아주 빠르게 지나갔다. 하늘이 바로 어두워졌다. 황후는 몸을 일으켜 좌중의 사람들에게 웃으며 말했다.
“시간이 늦었네요. 궁중 연회 준비가 끝났을 것 같습니다. 좀 일찍 자리에 들어가지요.”
한안은 황후를 보았다. 그녀의 분부는 친절하고 자연스러웠다. 자태가 우아하고 존귀하여 육궁 수장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한안은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황후로부터 이런 자태를 배울 수 있게 된다면 어쩌면 나중에 유용하게 써먹을 데가 있을지 모르겠다.’
한안은 여러 부인을 따라 연회장으로 걸어갔다.
궁중 연회의 장소는 대전 앞 맑은 개울을 끼고 있었다. 양쪽 돌난간 위에는 수정유리로 만든 각양각색의 풍등이 있었고 불을 붙이니 은으로 된 꽃, 눈의 물결 같았다.
하늘은 먹을 뿌린 것처럼 별도 달도 없었다. 두터운 흰 구름이 대지를 덮었고 처마 밑의 진홍색 등롱은 붉은빛으로 둥근 테를 둘렀다. 궁녀는 모두 비취색 짧은 저고리를 입고, 은쟁반을 받쳐 들고서 공손하게 여러 부인들을 맞이했다.
대전은 남자 권속과 여자 권속의 자리가 나뉘어 있었다. 자리를 찾은 소저들은 모두 기대감에 부푼 모습이었고 흥분으로 눈빛이 반짝거렸다.
등선은 한안의 팔을 건드렸다.
“듣자 하니 오늘 성 장군이 돌아오신대. 우리도 그 용맹한 대장군의 풍채를 볼 수 있을 거야.”
한안은 그녀를 응시하며 웃었다.
“그저 눈 두 개에 입 하나일 뿐인데 뭐. 또 뭐가 다를 게 있겠어?”
등선은 놀랍다는 말투로 말했다.
“성 장군은 서북의 달로를 몰아낸 대장군이야. 아버지가 말씀하시기를, 대종이 개국한 이래 달로를 이처럼 철저하게 몰아낸 것은 성 장군이 첫 번째라고 하셨어. 게다가 겨우 스물한 살이라고.”
한안은 생각에 잠긴 듯 등선을 잠시 보았다. 그리고는 놀리듯 말했다.
“언니가 이처럼 자세히 알다니. 설마 춘심이 동한 건 아니겠지?”
등선은 곧바로 얼굴이 온통 새빨개졌다. 부끄러운 나머지 소리를 내며 한안을 살짝 밀었다.
“언제나 허튼소리만 할 줄 알지! 누가 이렇게 대담하게 굴라고 가르쳐 줬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한안은 웃으며 용서를 빌었다. 몇 마디 우스갯소리를 하고 난 후 등선이 말했다.
“이 궁중 연회에서 우리는 여러 유명 인사를 볼 수 있어. 성 장군도 그중 한 명이고. 또 다른 사람들도 있고.”
“다른 사람들?”
한안은 정말 몰라서 물었다.
장사양은 평소 그녀와 많은 말을 하지 않았고 더욱이 조정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등 상서는 달랐다. 외동딸인 등선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더라도 조정에 대해 이야기 해 주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었다.
“경성 안의 거물 중 젊은 사람이라면, 현청왕, 위 왕세자, 혁련가 소소야, 성 장군, 그리고 갑부 강옥루를 꼽을 수 있지.”
위여풍의 이름을 듣고 한안은 멈칫했다가 바로 쓴웃음을 지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위여풍은 확실히 대단한 청년 준재였다. 그러나 이 청년 준재는 전생에 그녀에게 독주를 하사했다.
등선은 한안의 표정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강옥루는 오늘 볼 수 없어. 그는 상인 출신이니 당연히 궁에 들어올 수 없지.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모두 만나볼 수 있어.”
한안은 멈칫했다. 모두 만나볼 수 있다니. 오늘 궁중 연회에서 위여풍을 보아야 한다는 것인가? 여기까지 생각하자 마음이 몹시 심란하였다.
“성 장군은 너도 아니까 내가 말할 필요 없지. 혁련가의 소소야는 들리는 말에 따르면 생김새가 경국지색이래. 여자보다 세 배 정도는 더 아름답다더라. 하지만 과장된 소문일 뿐이고 오히려 평범하지 않을까?”
한안은 등선의 말에 미소 지으며 눈부시게 아름답던 붉은 색 옷의 남자를 떠올렸다. 그 아리땁고 풍류 넘치는 얼굴은 확실히 절세미인의 네 글자를 감당할 만했다.
등선은 한안이 웃는 것을 보고 자신의 말에 흥미가 생긴 거라 여기고 더욱더 신나 하며 얘기했다.
“위 왕세자는 위여풍이라 하는데 온화한 사람이야. 용모도 모두 일품이고.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을 대할 때 부드럽고 겸손하다는 거야. 두말할 필요 없이 군자이지.”
군자? 한안은 묵묵히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어떤 표정으로 등선의 말에 맞장구를 쳐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서 인기 절정은 현청왕!”
등선의 목소리는 흠모하는 말투로 바뀌어 있었다.
“현청왕은 열네 살에 바로 갑옷을 입고 싸움터에 나갔어. 듣기로는 성 장군의 사부래. 생각해 봐. 성 장군이 그처럼 용맹한데 사부인 현청왕은 더욱 대단하지 않겠어?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적이 있어. 이 현청왕은 조정 중신인데 황상께서도 조금은 그의 눈치를 보신다는 거야. 게다가 혁련욱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풍모와 자태가 우아해서 경성 안에 그를 본 적이 있는 여아는 매료되지 않은 자가 없다는 거야. 다만 애석하게도…….”
등선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졌다.
“듣기로 남색가래!”
한안은 깜짝 놀랐다가 피식하고 웃었다.
“너 왜 웃어?”
한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언니 말대로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정말로 그렇다면 애석한 일이라고.”
등선은 입을 삐죽거렸다.
“그러게 말이야.”
이 경성 안에서 최고로 이목을 끄는 위여풍, 혁련욱, 강옥루는 다 만나본 적이 있으니 다른 두 사람에게 호기심이 일었다.
바로 그때, 문 입구에서 태감이 날카롭게 외치는 길고 긴 소리가 들렸다.
“황상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는 한안의 눈에 존귀하고 화려한 밝은 노란색의 용포가 보였다. 황상은 여러 대신을 이끌고 느릿한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황상이 도착하자 사람들이 연이어 예를 올렸다. 황상은 몸을 일으키라는 표시를 한 후, 대신들을 데리고 가서 앉았다.
두 줄의 길고 성대한 좌석에 남녀 자리가 나뉘어 있고, 중간에는 매우 윤기 나고 투명한 모란무늬의 유리 받침대가 있는 듯 없는 듯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황제와 황후는 높은 자리에 용상을 나란히 배열해 놓고 앉았다. 이어서 차례대로 정1품에서 5품 관원에 이르는 가솔들의 자리가 있었다.
떠들썩하던 분위기는 모두 사라졌다. 귀부인들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추어 이야기하며 동작 하나하나에도 신중을 기했다. 소저들은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였지만 참지 못하고 남자 권속의 자리를 힐끔거리기도 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 이번 궁중 연회처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소저들은 평소에 이렇게 많은 외간남자들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나이가 찬 소저들은 모친의 뜻을 헤아려 어쩌면 부군이 될지도 모를 사람을 몰래 추측해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안은 재미가 없었다. 눈을 드니 장한명이 멀리 떨어진 탁자에서 재빨리 그녀에게 눈을 깜박이는 것이 보였다. 마음속이 푸근해져 바로 그를 향해 웃는 얼굴을 피웠다.
다만 그 웃음이 막 뺨 위에 떠오를 때 바로 기이한 눈빛과 마주쳤다.
혁련욱은 이 꼴사나운 저녁 연회에 참석하는 게 몹시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부친의 꾸지람을 듣고 싶지도 않았고 부운석과 성뢰가 올 거라는 얘기도 들었기에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자리에 앉은 후부터 여자 자리 쪽에서 끊임없이 보내오는 각양각색의 눈빛이 그의 몸에 덤벼들었다. 이런 눈빛은 전혀 생소하지 않았다. 평소에는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온순한 규방 천금들이 지금은 굶주린 이리가 신선하고 맛 좋은 먹이를 보듯 자신을 보니 그는 불쾌할 뿐만 아니라 혐오스러웠다.
고개를 돌리던 찰나, 공교롭게도 한 어린 아가씨가 그에게 웃는 얼굴을 보내는 것을 보고는 멍해지고 말았다.
그 어린 아가씨는 사랑스럽게 웃고 있었지만 그는 염증만 느낄 뿐이었다. 또 그따위 애모이겠거니 생각하며 경멸의 눈빛을 한 번 되돌렸다.
한안은 저쪽의 그 절색의 남자가 멍해지는 것을 보긴 했으나 혁련욱이 자신을 알아보았을 리 없다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혁련욱의 눈 속에는 명명백백하게 그녀에 대한 염증을 발산하고 있었다.
한안은 처음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자기 주위의 소저들을 보고나니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혁련욱은 자신을 그를 애모하는 소저들 중 하나라 여긴 것 같았다. 하지만 방금 자신은 한명에게 웃어 보인 것이다. 자아도취가 심한 남자가 아닐 수 없었다.
혁련욱의 용모는 확실히 훌륭했다. 속세 사람 같지 않게 아름다운 남자. 타고나기를 아름다워서 요괴 같기도 하고 신선 같기도 하며 인간 세상에서 노니는 정령 같기도 했다. 보통의 여자라면 그의 미소 한 번만 보아도 아마 푹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릴 것이다. 혁련욱은 틀림없이 여자 문제라면 고수일 테고 여자와 관련된 일에 실패한 적이 없으니 저처럼 자부심이 넘치는 것이다.
다만 한안이 전생의 교훈을 겪은 후, 한 가지 이치를 깊게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을 볼 때 겉모습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겉모습이 아름답다 할지라도 내면이 추악할 수 있었고 겉모습이 추악한 사람이 알고 보면 그리 두려운 이가 아닐 수 있었다. 예전 위여풍은 온화하고 멋스러우며 둘도 없는 군자로 보였지만 자신과 갓 혼인한 아내가 죽어가는 것을 눈을 뻔히 뜨고 지켜보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이번 생에서 한안은 아름다운 겉모습을 한 이들에게 어느 정도의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혁련욱도 처음 보았을 때 그 아름다움에 놀란 것을 제외하고는 단조롭고 무미건조했다.
한안은 바로 담담하게 표정을 거두어 고개를 숙이고 얌전하고 온순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혁련욱은 내내 한안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어린 아가씨는 그와 눈빛이 닿자 웃음을 거두더니 바로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그 마지막 눈빛에 어째서 비웃음이 담긴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혁련욱은 자신의 생각이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한안이 다시 고개를 들지 않는 것을 보고는 바로 마음이 놓였다.
궁중 연회의 분위기는 그다지 화기애애하지 못했다. 신하들은 있는 힘껏 즐거움을 표하고자 했지만 법도를 지켜야 하다 보니 경직되어 있었고 황제와 황후도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크게 즐거워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궁중 연회는 원래 분위기가 이런 것인지 한안은 괴이하다 여겼다.
젊은 태감 하나가 높은 소리로 통보하는 것이 보였다.
“현청왕, 성 장군 도착했습니다.”
황상의 얼굴 위에 즉시 웃음기가 떠올랐다.
“부르라!”
우뚝 솟은 신영 둘이 큰 걸음으로 걸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둘은 눈꽃을 풀풀 날리며, 대전 가운데에 이르러 몸을 굽혀 예를 올렸다.
“황상을 뵙습니다!”
맑고 시원스러운 목소리와 다르게 뒤이어 차가우며 신중하고 온후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천둥소리처럼 그녀를 내리쳐 오래도록 정신을 차릴 수 없게 했다.
“황상을 뵙습니다!”
“경들은 너무 예를 차릴 필요 없다. 일어나라.”
한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훤칠한 신영이 대전 가운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푸른 소나무처럼 빼어난 기개는 살을 엘 듯 차가우면서 화려하고 고귀했다. 어깨 위에 걸치고 있는 까만색 표범 가죽 피풍의가 익숙하고도 눈부셨다.
매화숲 속의 신비한 남자는 현청왕 부운석이었다!
한안은 그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소매 속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런 신분의 사람과 연을 맺다니 이것이 복인지 화인지 알 수가 없었다.
등선은 한안의 태도가 이상함을 알아차렸다. 한안이 현청왕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고는 한안의 귓가에 가까이 다가와 음흉하게 말했다.“아직도 내게 그런 소리 할 수 있어? 보아하니 지금 마음이 동한 사람은 너인 거 같은데. 어떻게 그를 보는 데만 정신이 팔려있니? 조심 좀 해. 너의 모습을 그 이낭에게 보여서 시비 생기게 하지 말라고.”
한안이 얼굴을 붉히며 반박하려 했다. 하지만 등선이 진심으로 자기를 위해 준다는 것과 주씨가 줄곧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에 주의를 기울이며 실수를 잡아내길 바라고 있음을 깨달았다. 조금 전 자신이 순간 넋을 놓았는데 만약 그걸 보았다면 가히 낭패였다. 한안은 즉시 고개를 숙이고 찻잔 속에서 떴다 가라앉았다 하는 녹색 찻잎만 뚫어져라 응시했다.
등선은 피식 웃으며 한안을 밀었다.
“바보, 아무 말이나 다 믿니? 네가 몇 번 보는 것 정도는 괜찮아.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소저들이 다 저쪽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어.”
한안은 고개를 들어 주위를 보았다. 과연 모든 소저들이 다 얼굴을 붉히고 현청왕을 보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가련한 성 장군은 홀대를 받고 있었다. 소녀들의 푹 빠진 눈빛은 혁련욱을 보던 것 못지않았다. 심지어 그녀들이 혁련욱을 볼 때는 이처럼 대담하지도 않았다!
한안은 저도 모르게 등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경성 안 인기 절정. 현청왕은 용모는 혁련욱에 미치지 못하고 온화함은 위여풍에 미치지 못하며 소탈함은 강옥루에 미치지 못하고 용맹함은 성뢰에 미치지 못하지만 타고난 풍모와 재능, 꾸밈이 필요 없는 자태가 있으니 만약 한 단어로만 표현해야 한다면 바로 유일무이라 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설령 그에게 천 가지 좋은 점이 있다 해도 그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은 사람을 두렵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현천왕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검은 눈동자 속에 알 수 없는 의미의 눈빛이 있는 듯 없는 듯 한안의 몸 위에 떨어졌다.
한안은 몸이 뻣뻣하게 굳어져 즉시 고개를 숙였다. 제발 현청왕이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기를 빌었다. 그저 눈앞이 캄캄할 뿐이었다.
귓가에 황상의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 장군, 적을 물리친 공이 있으며 서융에 심한 타격을 주고 우리 대종의 국위를 드높였으니 실로 큰 상을 내려야 마땅하다. 짐은 네게 황금 1만 냥, 비옥한 논밭 3천 묘, 점포 백 개, 고택 50채를 하사한다. 네가 또 무슨 상을 요구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짐에게 말하라. 짐이 네게 책임지고 주마!”
그 어마어마한 상에 모든 사람들이 입을 벌리고 놀라워했다. 성뢰는 약관의 나이에 불과했지만 대장군에 봉해져 수많은 상을 받으니 실로 다른 사람들의 질투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황상은 성 장군이 부운석과 좋은 벗이고 충심이 맑아서 사람을 비출 수 있을 정도이며 비록 나이가 좀 젊다 해도 흔히 얻기 어려운 맹장이니 훗날 비범한 인재가 되리라 믿었다. 다만 그의 나이가 아직 젊으니 관직을 더 올리는 것은 어려웠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조정의 세력은 불균형해질 것이다. 조금 전 상은 듣기에는 어마어마하게 들리지만 그저 은자 약간 수준일 뿐이었다. 무관으로서 일 년 내내 싸움터에 나가 바깥에 있으니 은자는 쓸 데가 없을 것이다. 황상은 하는 김에 성뢰가 또 다른 것을 요구할 수 있다고 다시 언급했다.
성뢰는 공손하게 몸을 굽히고 예를 올렸다. 목소리가 힘 있게 울렸다.
“황상의 두터운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감히 다른 생각은 없습니다.”
황상은 만족스럽게 웃고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알았다. 너와 운석은 바로 자리에 가서 앉거라. 저녁 연회가 바로 시작될 것이니 경들은 오늘 몇 잔 더 마셔야 할 것이오.”
두 신하는 물러나 황상 아래 첫 번째 자리에 앉았다. 성 장군의 우측은 바로 위 왕 위정이었다. 위정의 얼굴빛은 몹시 보기 흉했다. 위정은 성뢰가 희색이 만면하여 득의만만하게 자리에 앉는 모습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얼굴빛이 보기 흉한 것은 위왕을 지지하는 조신들이었고 장사양도 그중 하나였다. 그의 얼굴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성뢰는 젖비린내 나는 어린애일 뿐인데 황상의 총아가 되었으니 오늘 이후 현청왕 일파는 더욱 득세할 거라 생각했다.
장한명은 부친의 어두운 얼굴빛을 살펴보며 어느 정도 짐작은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부친에 대해 아무런 존경심도 없었다. 오히려 대장군 성뢰에게 무한한 경배와 존경을 가지고 있었다. 부친은 한명을 온종일 국자감에서 공부하게 하였지만 누가 알았으랴. 한명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사내대장부라면 마땅히 전장에서 공훈을 세우고 업적을 쌓아야 하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대영웅이라 불릴 만하다 생각했다. 한명은 또 참지 못하고 성 대장군을 보았다. 성 대장군은 공명정대하며 일 처리가 자유롭다는 것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한안은 줄곧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매화 숲 남자의 신분이 고귀할 거라 여겼고 황자 중 하나가 아닐까 추측했다. 그런데 뜻밖에 현청왕이라니. 현청왕과 황상의 형제 정이 깊은 것을 누가 모를까. 그러나 그녀는 들어가지 않아야 할 곳에 들어가고 보지 않아야 할 것을 보았다. 만약 그것이 황가의 비밀과 관련되었다면 현청왕은 당연히 황상 쪽에 설 것이고 자신은 위험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운이 좋았던 것일 수도 있었다. 그가 아닌 다른 졸장부였다면 한안이 나이 어린 아가씨라는 데에 마음이 혹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현청왕은 남색가라 하니 차라리 다행이었다. 어쨌든 그녀는 그에게 불경스러운 행동을 했다. 한안은 해결 못 할 일로 골치가 아팠다. 지금의 나이로 돌아온 후 처음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그 사람이 현청왕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차라리 발각될지언정 간 크게도 그런 짓은 하지 않았을 텐데.
한안은 걱정스러웠다. 등선이 한안의 모습을 보고는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너 정말 저분께 반한 건 아니겠지? 보는 걸로 족해. 우리 같은 사람들이 감히 넘볼 만한 분이 아니야.”
현청왕은 권력이 막강했다. 그녀 같은 일개 3품 대신의 적녀는 말할 필요가 없고 군주와 어울리기에도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한안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어찌 모를 수 있겠어. 언니, 나 놀리지 마. 내가 보기에 언니는 저 성 장군과 아주 잘 어울려. 문벌도 엇비슷하고 어쩌면…….”
등선의 얼굴이 빨개졌다.
“나 가지고 놀리는 거 그만둬.”
과거 그녀가 회귀하기 전 등선은 한림원의 관료에게 시집가 젊은 나이에 바로 요절하였다. 이번 생에는 그녀를 도와 그 운명이 바뀌게 할 수 있을까? 등선은 성 장군에게 마음이 있는 게 분명하고 두 집안은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형편이 걸맞은 편이었다. 한안은 성뢰를 살펴보았다. 일처리가 공명정대하고 우수하다 하니 분명 성격도 좋은 사람일 것이다. 이번 생에서 등 상서가 관직에서 좌천되기까지 아직 1년이 있다. 자신이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
넋을 놓고 생각에 잠겨 있다 보니 등선이 다시 그녀를 밀었다.
“뭘 멍하니 있어? 이 요리들 맛이나 보자. 궁중 요리사가 만들어낸 것이니 평범하지 않을 거야.”
한안은 그제야 생각을 거두고 젓가락을 집어 과자를 맛보았다. 입안에 진한 향이 남아 저도 모르게 눈썹과 눈을 휘었다.
“내 말 맞지?”
등선이 한안을 보고 웃으며 연밥을 재료로 만든 떡을 집어 그녀에게 주었다. 매우 윤기 나고 투명한 것이 향기가 진하며 모양이 귀여웠다. 한안은 무척 즐거웠다.
바로 곁에서 경멸하는 차가운 콧소리가 들려왔다.
“이처럼 게걸스러운 모양새라니 모르는 사람이 보면 어느 집 하인인 줄 알고 무슨 꼴인가 비웃겠네요! 과연 신분에 맞아야 교양도 있는 거네요!”
이가기가 옆에 단정히 앉아 비웃음으로 입술을 삐죽거리고 두 눈에 경멸을 담아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남녀 자리의 구분은 비교적 분명했고 부인들과 소저들도 사이를 두고 앉아 있었다. 관료들과 아이들도 나뉘어 앉아 있었다. 대다수가 평소에 친근한 사람과 함께 앉아 있었다. 한안은 모친이 병으로 누운 후부터 외부의 소저들과 접촉하지 않아 자연히 친구가 없었다. 그래서 주위에는 등선만 앉아 있었다.
근처를 둘러보니 주위의 소저들 중 이가기의 신분이 가장 높은 것 같았다. 한안이 조금 전 괴롭힘을 당할 때 그 소저들도 따라서 동참했던 것을 떠올렸다.
다른 규방 소저들도 연이어 이쪽을 돌아보며 경멸하고 무시하는 눈빛을 보냈다.
남의 어려움을 틈타 해를 가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었다. 하물며 이가기는 우상의 적녀이니 한안이 도리에 맞게 행동해도 소저들은 도리에 어긋난다고 지적할 것이었다.
장어산이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 소저,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한안은 나이가 아직 어려요. 모두와 함께 연회 자리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회가 드물었기에 아마도 너무 기뻐서 그런 걸 거예요.”
얼핏 들으면 한안을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말 같지만 실은 한안이 나이 어림을 빙자해 규범을 지키지 않으며 평소 총애를 받지 못한다는 말을 비꼰 것이었다.
이가기는 한층 더 도전적으로 한안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한안은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장어산을 바라보았다. 얼굴 위의 웃음은 줄어들지 않았고 표정에는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등선은 한안을 위해 무언가 말을 하려 했지만 한안의 흔들림 없는 모습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저 옆에 앉아 좋은 구경거리를 지켜보기로 했다.
한안은 장어산을 응시하며 웃고 또 웃었다. 장어산은 한안의 애매한 태도를 견딜 수 없어 물었다.
“한안, 왜 웃는 거야?”
한안은 아무 뜻 없다는 듯 손을 펼쳤다.
“오늘의 궁중 연회는 황상과 마마께서 여러 언니 동생들이 함께 오도록 초대하신 거예요. 이 궁중 연회의 모든 큰일 작은 일은 마마께서 분부하셔서 이루어진 거죠. 술과 요리의 배치까지 포함해서 말이죠.”
한안은 찻잔을 잡고 가볍게 한 모금 마셨다.
“마마의 배치가 세심했는지 어떤지는 모두가 알지요. 이 과자를 맛보았는데 무척 맛있어서 몇 마디 찬사를 했어요. 바로 마마와 황상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지요. 이게 무슨 잘못된 게 있나요? 제 웃음은 마음속 기쁨을 드러내는 건데 설마 울어야 하는 건 아니겠죠? 그런데 어산 언니는 제가 예의와 격식을 잃었다고 말하네요.”
한안의 웃음 짓는 얼굴에 사람들은 봄바람에 씻기는 듯 상쾌한 기분을 느꼈다.
“웃을 때 방자해서는 안 되고 먹을 때 급해서는 안 되며 앉을 때 소나무 같아야 하고 말은 온화한 자태가 있어야 한다. 바로 숙녀의 예법이죠. 어산 언니에게 물어볼게요. 제가 어긴 예법이 있나요?”
장어산은 한안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앞에서 반박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한안이 증오스러웠지만 한안의 말이 맞았다. 많은 사람이 보고 있으니, 자기도 그녀를 난처하게 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억지로 참고 잇새로 한마디를 밀어냈다.
“아니, 어긴 거 없지.”
동시에 주위의 소저들도 저절로 입을 다물었다. 태후와 황후의 칭찬 덕분에 이미 그녀들은 장가 소저를 질투하고 있었다. 거기에 장어산의 부추김, 이가기의 적대심이 이어지니, 그녀들은 한안의 기세를 눌러주려 했다. 빙그레 웃는 어린 아가씨가 상대하기 쉬운 사람이 아닐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조금 전 한안이 외운 것은 <여덕(女德)>으로, 불과 열두 살인 어린아이가 입에서 술술 내뱉으니 그녀를 얕볼 수가 없었다.
한안은 희미하게 웃었다. 전생에 부중에 머물 때, 그녀의 유일한 즐거움이 바로 책 읽기였다. 장부 내에는 수많은 서적과 고서들이 있었고 장어산을 책 읽기를 즐기지 않아 한안은 혼자서 느긋하게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조금은 넌더리가 났지만 좋은 아내가 되기 위해서 그리고 시집간 후에 위여풍의 환심을 살 수 있기를 기대하며 <여덕>을 처음부터 끝까지 외웠다.
다만 그 말로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한안은 고개를 숙여 눈동자 속의 깊은 빛을 감추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이가기를 보며 맑고 달콤한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예의에 어긋난 게 아니니 어산 언니가 잘못 본 것이지요. 제가 맛본 그 과자는 대단히 맛있었어요. 이 소저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가기는 경멸스럽다는 듯 그녀를 보았다.
“좀스럽군요. 과자 한 조각에 불과하잖아요. 우리 집에서는 그런 과자, 개도 먹어요.”
탁자 위의 분위기가 순간 얼어붙었다. 이가기는 말을 입 밖에 내고 바로 후회했다. 한안에게 타격을 주는 김에 자신의 가문을 뽐내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자리에는 다른 소저들이 있었고, 그 소저들이 개보다도 못하다고 말한 게 아니겠는가.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이 탁자에서 그녀의 신분이 가장 고귀했다. 어차피 이 소저들은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아첨하는 중이니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다.
한안은 담담하게 그녀를 한 번 보고 등선에게 위로의 눈짓을 건넸다. 이가기는 바보가 아니며 어느 정도 머리가 있다는 것을 그녀의 잠시 후회하는 표정에서 간파할 수 있었다. 다만 그녀는 적수를 잘못 잡았다. 한안은 그녀에게 큰 죄명을 씌워 줄 생각이었다.
“이제 보니 이 소저 집에서 개에게 먹이는 개밥은 황가의 과자로군요.”
탁자 주위가 온통 침묵에 잠겼다. 모든 사람들이 멍해졌다.
“당신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죠?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요! 장한안, 당신은 악독한 말로 남을 중상모략하는군요!”
이가기는 순간 흥분하여 목소리가 귀청이 찢어질 듯 날카로웠다. 부인들과 남자 자리에 앉은 이들 중 가까운 몇몇이 호기심을 품고 이쪽을 돌아보았다.
이가기는 모든 사람들의 눈빛을 알아차리고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한안을 향해 노려보는 눈빛은 거의 사람을 죽일 수 있을 정도였다. 주위의 소저들은 감히 한 마디도 더 꺼내지 못했다.
주홍은 한안의 옆에서 조심스럽게 옷깃을 정리해 주고 있었다. 한안도 급하지 않았다. 표정도 바뀌지 않고 웃는 얼굴로 유유히 말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 이 소저 설마 시치미를 떼는 건 아니겠죠? 나는 승상부의 아가씨는 반드시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책임질 거라고 여겨요. 이 승상은 국가의 중임을 맡고 계시잖아요.”
말을 마치고 탄식하는 것이 이 상황을 극히 안타까워하는 것 같았다.
이 승상은 요직을 담당하고 있는데, 자기 집에서 교육한 딸이 입에서 나온 말을 책임지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승상 본인의 품격을 의심하게 될 것이다. 성상은 대신들의 덕과 교양을 가장 중요하게 보았다.
이가기가 차갑게 웃었다.
“장한안, 나를 협박하지 말아요. 우리집 개가 이 과자를 먹는다고 한 것은 내 애견이라 주고 싶었기 때문이죠. 내가 내 집안에서 음식을 누구에게 주는지 당신 같은 외인이 간섭하려는 건가요?”
한안은 한 손으로 아래턱을 괴었다. 얼굴은 사악한 기색 없이 천진했다.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그랬군요. 이 소저의 집안은 부귀하고 부친께서 또 지금 조정의 우상이시라 황상께서도 어느 정도는 양보하신다지요. 당연히 궁중 황제께서 하사하신 과자를 안중에도 두지 않을 수 있겠네요. 내가 우둔하여 몰라봤어요. 미안해요.”
그녀의 어조는 따뜻하고 경쾌했지만 있는 듯 없는 듯한 한기가 담겨 있었다.
이가기는 그녀의 말이 이상하다 생각했다. 그런데 뭐가 이상한 건지 생각해낼 수가 없었다. 한안이 명쾌하게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보자 좀 더 그녀를 괴롭히고 싶었다. 그러나 조금 전 자신의 날카로운 목소리 때문에 몇몇 시선이 이곳을 향하고 있어서 꾹 참았다.
“장 소저는 너무 예를 차릴 필요 없어요. 괜찮아요.”
장한안은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은 듯 고개를 숙여 계속해서 차를 마셨지만, 마음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궁중의 야연에는 도처에 황상의 시선이 있다. 대저택도 마찬가지였다. 한안이 회귀하기 전에 한안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일각도 안되어 공동원에서 그 사실을 다 알았다. 어떤 때 한안에게 두통과 발열 증상이 있었는데 일각도 되기 전에 주씨에게서 약이 왔다. 그때는 주씨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배려해준다고 여겨 감동의 눈물을 흘렸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청추원 안팎으로 주씨가 사람을 꽂았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궁중도 마찬가지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궁중 안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궁녀나 태감 몇몇은 아마도 황상이 비밀리에 심어둔 심복일 것이다. 방금 전 그 말은 이가기나 좌중의 소저들이 들으라고 한 말이 아니라 밀정들에게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
이 승상의 권력은 심히 컸다. 이번에 황제께서 하사하신 과자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고 한 것은 바로 황상을 안중에도 두지 않겠다는 말로 들릴 수 있었다.
밀정은 당연히 이 소식을 황상에게 가져갈 것이다. 황상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황상의 일이다. 자고로 군주는 모두 의심이 많다. 더구나 지극히 존귀한 제왕 지위와 존엄에 관계된 것이라면 더욱더. 단정할 수 있는 것은 우상의 앞날이 그다지 좋을 리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를 해하려 하는 사람에게 그녀는 선량함을 베풀지 않을 생각이었다. 열 배 이상으로 되돌려 줄 것이다.
한안은 등선과 웃으며 이야기하느라,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한 남자가 잔인하고 흉악한 기색으로 쳐다보는 것을 알지 못했다.
연회석상의 요리는 확실히 괜찮았다. 한안은 이처럼 풍성한 연회 요리는 처음이었다. 다만 근심거리가 있으니 젓가락질을 할 마음이 없어 그저 모란꽃 모양의 과자 몇 조각을 집었을 뿐이었다. 주위의 소저들은 단정하고 우아하게 앉아 작은 소리로 농담을 하거나 자신이 최근에 보고 들은 것, 어떤 향낭을 수놓았는지, 어떤 아름다운 의상을 재단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담소라기보다는 자랑질이라고 해야 했다. 등선은 그리 세상 물정에 어둡지 않았고, 진심으로 배가 고팠기에 그저 먹는 데에만 신경을 썼다. 한안은 한 손으로 찻잔을 들고 내색 없이 연회석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주의를 기울였다.
황제와 황후는 높은 자리에 단정하게 앉아서 엄숙한 용모로 장중한 태도를 하고 있었다. 조정의 신하들은 두 파로 나뉜 것이 분명한 듯했다. 회귀 전 한안은 장어산이 고의인 듯 아닌 듯 넌지시 누설한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조정에 세력이 대등한 두 무리가 있는데 위 왕과 7황자를 위시한 무리와, 태자와 현청왕을 중심으로 모인 무리였다. 황상은 아직 불혹밖에 되지 않아 여전히 정력이 강성했다. 그러나 일찌감치 태자를 세워 사람들의 의아심을 자아냈다. 태자는 황후의 소생으로 금년에 열 살에 불과했다.
황후 소생의 황자가 태자로 세워지는 것은 크게 비난할 바가 아니었다. 다만 지금 황상의 총애를 받는 건 진 귀비였고 진 귀비의 소생은 7황자였다. 더구나 7황자는 최근 2년간 조정에서 여러 성과를 거둬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황상이 7황자를 대하는 태도도 친밀하고 다정스러웠다. 반대로 태자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태자는 훗날의 황위를 이을 황자이니 반드시 심사숙고하여 결정해야 했다. 7황자는 재능이 매우 뛰어난 인재여서 지지하는 대신들이 많았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황상이 태자를 바꿔 세울 뜻이 있는 건 아닌지 암암리에 추측하기도 했다. 현재 태자는 어린아이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위 왕은 7황자와 사이가 좋았다. 진 귀비와 위 왕비가 친자매였기 때문이었다. 혈연과 이익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전생에 장부는 7황자 파에 의탁했고 한안을 위여풍에게 시집보내면서 인척이 될 수 있었다. 당시 한안은 위 왕 일가가 예물을 보내어 혼사를 청하니 위여풍이 진심으로 그녀를 처로 맞고 싶어 한다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는 단지 장부의 세력을 빌리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그저 성이 ‘장’이기만 하면 그게 누구든 상관없었다.
한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위 왕은 지위가 높고 영향력이 컸다. 7황자 일파 중에 고관대신 또한 적은 수가 아닌데 어찌하여 장가를 선택했을까? 장가는 3품 관리에 불과하고 장사양은 공적이 전혀 없는데. 설마 또 다른 비밀이 있는 걸까?
열두 살로 되돌아온 후에도 조정의 형세는 여전했다. 한안은 자신의 혼인식이 있던 그해를 기억했다. 태자 파와 7황자 일파의 전쟁이 격렬해졌고 쌍방이 양보 없이 팽팽하게 대치했었다. 물론 최후의 결말은 모른다.
한안은 저쪽의 떠들썩한 남자 무리 중에서 살을 에듯 차가운 신영을 보며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현청왕의 기개를 보면 이 사람은 절대 현재의 상황에 침잠해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와 대적하면, 아마도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터였다.
난세에 여자의 목숨은 가족과 아주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있는 법이다. 한안은 장가의 딸이니 만약 7황자가 무너지면 그녀 또한 연루될 것이다. 그녀는 장사양이 권력의 방향을 바꾸도록 설득할 수 없었고 설득하고 싶지 않았다. 유일한 방법은 자신과 한명이 장가에서 떨어져 나와 그들과 더 이상 관계가 없어지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해낼 수 있을까?
황제의 뜻은 예측하기 어려웠다. 한안은 황상의 심중에 태자와 7황자가 어느 정도의 우위를 점하고 있는지 추측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 독주에 대한 복수 때문이라도 7황자 일파에 의탁할 수는 없었다.
한안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4장
연회의 분위기가 한창 달아오르고 무르익을 때였다. 부인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가득했고, 신하들은 화기애애하게 술잔을 돌렸다. 소저들과 공자들은 네가 나를 한 번 보았니, 네가 나에게 눈짓을 한 번 했니 하며 그야말로 대보름날 꽃등회에서처럼 눈짓으로 정을 주고받았다.
한안은 무료하기 짝이 없어 모든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막 장한명을 살펴보려고 하는데, 눈을 돌리자마자 장한명의 그림자가 없는 것을 발견했다. 순간 가슴이 서늘해졌다.
장한명이 장난꾸러기이긴 하나 공식 석상에서는 예를 따르고 본분을 지켰다. 스스로 몰래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안은 한참을 기다렸지만 한명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감정을 억누를 수 없어 정방에 간다고 구실을 대고 급람과 주홍을 데리고 대청을 나섰다.
장어산이 뒤에서 비웃는 것이 들렸지만 따질 겨를이 없었다. 온 마음에 그저 동생 장한명뿐이었다. 궁중은 대저택 안이 아니라 더욱 흉흉했다. 한명은 바로 그녀가 살아가는 이유였다. 그녀가 필사적으로 지키려 하는 사람이 만약 여기에서 무슨 일을 당하기라도 하면 그녀는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연회장 주위에는 호위를 제외하고 태감과 궁녀의 수는 적었다. 한안도 장한명의 행방을 직접 가서 묻기란 쉽지 않아 한명을 찾아 몇 바퀴 거닐다 보니 어화원 같은 곳에 도달해 있었다.
겨울철이라 밤바람은 찬 기운을 품고 있었고 냉기는 사람의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한안의 머리카락은 화원의 차가운 이슬에 젖었고 손가락에는 얼음 같은 한기가 스며들어 무의식중에 난로를 문지르려 했다. 하지만 난로는 몸에 없었다. 급람이 목을 길게 빼고 주위를 둘러 보며 말했다.
“소저, 조급해 하지 마세요. 여기가 칠흑같이 어둡지만 앞쪽에 등불이 있어요. 밝은 빛을 따라서 저쪽으로 가야겠어요. 조심하시고 넘어지지 마세요.”
한안은 초조하여 다리를 바삐 움직였다. 빛이 나는 곳을 향해 몇 걸음 걸어가는데 주홍이 돌연 소리쳤다.
“저쪽에서 소리가 나요!”
한안은 가슴이 꽉 죄었다. 급람과 주홍에게 발걸음을 가볍게 하라는 표시를 하고 허리를 굽힌 자세로 접근해 갔다.
궁중에서 움직일 때는 스스로를 장님이자 귀머거리로 여겨야 했다. 만약 평소였다면 한안은 이 위험을 무릅쓰고 접근하기보다는 상황을 재빨리 피하고자 했을 터였다. 그러나 한명을 떠올리자 속이 바짝 타면서 몹시 초조했다.
주홍이 앞장서서 걸어갔다. 그러더니 걸음을 멈추어 고개를 돌리고는 입 모양으로 한안에게 소리 없이 말했다.
“찾았어요.”
한안은 한명을 찾았다는 것에 기뻤다. 어깨 위의 무거운 짐이 모두 내려간 것 같았다. 막 입을 열려고 하는데 주홍이 괴이한 표정으로 그녀의 동작을 제지하는 게 보였다.
한안은 불길한 예감이 피어올라 즉시 앞을 향해 몇 걸음 걸어갔다.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볼 수 있도록 주홍을 옆으로 밀쳤다.
궁등의 어두컴컴한 빛 아래, 소년 몇이 함께 모여 있었다.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중 한 사람이 가산(假山: 정원에 만든 가짜 산) 쪽으로 밀리고 있었다. 밝고 투명한 노란색 비단의 짧은 괘자는 아무리 봐도 익숙했다.
키가 가장 큰 분홍 옷의 소년이 가산 앞에 서 있었다. 말투가 방자하고 제멋대로였다. 준수한 얼굴 위에 비틀린 사악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장한명, 네가 적자랍시고 감히 내 앞에서 함부로 굴 수 있으리라 여기지 마라. 네 누나가 적녀면 또 어떠냐. 그년이 총애를 받지 못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내가 그년이 못생긴 멍청이에 천한 년이라고 말한다 한들 네가 또 나를 어쩌겠느냐?”
가산 위에 떠밀린 소년의 두 눈은 새빨갰다. 희고 깨끗한 작은 얼굴에 다섯 개의 선명한 붉은 색 손바닥 자국이 찍혀있었다.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장한명이 사납게 앞에 있는 사람을 노려보았다. 한명은 그를 한 대 치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이 팔다리를 누르고 있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저 화를 내며 욕설을 퍼부었다.
“여럿이서 하나를 괴롭히면서 무슨 능력이 있다 할 수 있습니까! 방자하게 위세나 부리는 거지! 능력이 있다면 당신과 나 단둘이 붙어요!”
그 분홍 옷의 소년은 비웃으며 말했다.
“그 꼬락서니로 나와 단독으로 붙고 싶어 하다니. 어쩌면 너의 누나와 똑같이 등신이냐!”
한안은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아챘다. 주씨의 언니가 장 태사에게 첩으로 시집을 갔고 소년 중 몇은 그 아들이었다. 즉 주씨의 조카였다. 비록 신분은 서자이나 장 태사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장 태사가 애첩을 애지중지하다 보니 서자 또한 지극히 총애했기 때문이다. 회귀 전에도 주씨가 시집온 후, 이 몇 명의 소년이 이따금 장부에 왔고 종종 장한명에게 시비를 걸었다. 매번 장사양은 장한명을 혹독하게 혼냈고 이로 인해 장한명은 이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한명이 벌을 받은 후, 주씨 모녀는 한안을 찾아와 미안한 마음을 표시했고 한안은 난감해했다. 지금 보니 그들이 매번 시비를 건 것이었다.
저 분홍 옷을 입은 놈이 바로 주씨의 첫째 조카 장위로 승부욕이 강한 방탕아였다. 지금은 다른 형제와 결탁하여 장한명을 괴롭히고 있었다. 한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어째서 태자도 여기에 있을까?
장위가 한명을 겨냥한 것은 주씨의 의도를 알리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한명이 한안을 보호하기 위해서 굴복하지 않으면서 문제가 커진 것이었다. 한안은 코끝이 시큰해졌다.
동생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괴롭힘을 당하고 얻어맞으며 고생하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능력이 있었다면 이놈들이 어찌 감히 장한명을 괴롭힐 수 있었을까.
한안은 두 주먹을 꽉 움켜쥐고 불타는 눈으로 옆을 보았다. 태자가 오늘 어째서 여기에 나타났든 간에 장한명의 빚은 그녀가 확실히 셈해 둘 것이다.
깊이 심호흡을 한 번 하고 한안은 여유만만하게 화원 깊은 곳에서 걸어 나왔다. 청량한 음성은 황량하고 적막한 밤 속에 특히 또렷했다.
“여러분, 정말 흥취가 좋네요. 궁중 연회를 빠지고 싶다는 건 알겠지만 내 동생을 데리고 여기로 오고 싶어 하다니요. 겨울바람은 싸늘하고 감상할 꽃도 없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요?”
겨울 밤중은 한기가 가득했다. 소녀의 음성과 어조는 쾌활하고 느긋했지만 온기는 없었다. 말투는 특이한 것 없이 평범했지만 목소리는 그 자리의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장위가 고개를 들었을 때, 한안이 화단 뒤에서 느리게 걸어 나왔다. 의복이 산뜻하게 밝았고 입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가 있었다. 눈썹 사이에는 이전엔 없던 잔혹한 기운이 엿보여 그의 간을 쪼그라들게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그는 눈을 비스듬하게 하여 한안을 쏘아보았다.
“아, 이제 보니 사촌누이군.”
한안은 그의 곁까지 걸어가서 멈추었다. 급람과 주홍이 한안의 앞을 가리고 섰다.
“사촌 오라버니는 정말 흥취가 좋네요. 다섯째 동생을 잡아다 무얼 하려고요?”
장위는 한안보다 두 살이 많았으니 한안이 사촌 오라버니라고 부른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다른 소년들은 아무 말도 없이 한안을 보고 있었다. 다만 우두머리격인 장위을 의식한 세 사람이 한안을 둘러쌌을 뿐.
장위는 더 머물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듯 한안을 보고는 말했다.
“여기 와서 몇 마디 했을 뿐이야. 사촌 누이가 별다른 용건이 없다면 사촌 오라비는 먼저 갈게.”
장위는 말을 마치고 장한명의 옷깃을 틀어쥐고 있던 손을 놓고는 바로 떠나려 했다.
“잠깐만요.”
한안이 장위를 멈춰 세웠다.
장위는 한안이 자신을 불러 세울 줄은 생각도 못 한 듯 참을성 없이 물었다.
“무슨 일이야?”
한안은 줄곧 웃으며 이쪽을 보고 있는 태자를 흘끗 보았다. 그의 치기 어린 얼굴에 남의 불행을 즐기는 표정이 엿보이는 게 장위와 태자의 관계가 좋은 것 같진 않았다. 태자는 정말로 그저 흥밋거리를 찾아온 것 같았다.
한안은 장한명의 앞으로 걸어가 손을 뻗어 그의 오른쪽 뺨을 어루만졌다. 손아래 몹시 뜨거운 촉감과 부어오른 붉은 흔적이 소리 없이 모든 것을 증명했다.
한안은 손을 거두고 웃으며 말했다.
“한명, 괜찮아?”
장한명은 한안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기에 이를 악물고 말했다.
“네.”
장위는 한 번 비웃고 몸을 돌려 바로 가려 했다. 그러나 한안이 계속해서 질문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명, 이대로 괜찮아?”
장위와 장한명은 참지 못하고 한안의 얼굴빛을 살폈다.
한안은 희미하게 웃으며 장한명을 응시했다. 붉고 윤기 흐르는 작은 입술이 살짝 치켜 올라갔고 뺨은 바람을 맞아 새빨개져 있었다. 밝고 환하며 맑은 두 눈은 놀랄 만큼 아름다운 유리 같았다. 그러나 투명하면서도 그 속의 색채를 분명히 볼 수 없는 눈빛은 보는 사람을 매혹시켰다. 장위는 사촌 누이가 뜻밖에 얼굴이 아름답고 자태가 고운 미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삽시간에 장위의 두 눈이 탐욕스러운 빛을 발산했다.
장한명은 한안의 눈을 보고 두려움을 느꼈다. 큰 소리를 내지 않고 웃으니 더욱 음산하고 무서웠다. 한안의 경고 어린 눈빛 속에 그는 침을 꼴깍 삼키고 비로소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사촌 형님이……저와 말다툼을 했어요.”
한안은 아, 하고 한마디 하더니 계속해서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너를 한 대 때렸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한안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어 눈치를 보았다. 장위조차 경계심이 일었다. 그때 한안이 몸을 돌려 웃으며 자기를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한안의 머리를 감싼 보송한 회색 모피 피풍의 위로 새하얀 눈꽃이 떨어졌다. 까만 머리카락은 귀 뒤쪽으로 드리워져 옥같이 희고 깨끗한 살결을 더욱 뚜렷하게 했다. 게다가 처음부터 내려온 적 없는 입꼬리와 웃는 눈은 휘어져 있었다. 어느 집 소저가 이와 같이 사랑스럽고 아름다울까.
장위는 한안의 모습에 푹 빠진 눈빛이 되어 한안이 그의 곁으로 걸어와 멈추는 것을 그대로 바라보았다. 한안은 그를 향해 눈을 깜박이며 달콤하게 불렀다.
“사촌 오라버니.”
한안의 몸은 여리고 작았지만 장위는 키가 컸다. 등불 그림자 아래, 한안은 살짝 발돋움을 하고 고개를 들어 미소 지었다. 땅 위에 그림자가 떨어졌는데 마치 남녀가 정을 나누는 것 같았다. 장한명은 초조하여 소리를 내고 싶었으나 한안이 장위에게 괴롭힘을 당할까 두려웠다.
장위는 열두 살 때 남녀 간의 일에 통달한 이였다. 근 2년 동안 화루, 기원을 더욱 끊임없이 돌아다닌 터라 여인은 타고나기를 유혹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유혹이 열두 살의 순박한 어린 아가씨의 몸에서 나타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움직임 하나하나가 사람의 가려운 데를 긁는 듯했고 사람이 참지 못하고 덤벼들 뻔하게 했다.
장위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불렀다.
“사촌 누이.”
한 손이 한안의 얼굴을 쓰다듬으려 했다.
한안의 눈빛이 차가워지며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손을 들어 후려쳤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장위의 얼굴 위에 다섯 개의 선명한 붉은 색 손가락 도장이 더해졌다.
한안은 품속에서 손수건 한 장을 꺼내어 역겨워하며 손을 닦았다. 그다음 너무 서두르지도 않고 너무 늦지도 않게 놀라서 멍해 있는 여러 사람들에게 천천히 웃음을 지었다.
“당신에게 갚아주는 거예요.”
장위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순간 화를 참지 못하고 한안을 움켜쥔 뒤 주먹으로 한안의 얼굴을 때리려 했다. 한안의 조용한 목소리가 그의 행동을 막았다.
“사촌 오라버니, 구족이 처벌받고 싶지 않다면 나를 놓아주세요.”
장위의 손이 멈칫하면서 얼굴빛이 음침해졌다.
“무슨 뜻이야?”
급람과 주홍이 서둘러 앞으로 나와서 그녀를 몸 뒤로 보호했다. 한안은 당황하지도 서두르지도 않고 장위를 향해 웃음을 지었다. 그가 거의 미치려 하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유유히 입을 열었다.
“사촌 오라버니가 한명과 이리 와서 꽃을 감상하는 것은 큰일이 아니지만 어째서 태자를 데려와야 했죠? 태자 전하께서는 이 시각 궁중 연회 가운데 계셔야 해요. 당신이 사사로이 태자를 데리고 자리를 떠났으니 이미 큰 잘못을 범한 거죠. 한명과 말다툼하면서 먼저 손을 써서 태자의 눈을 더럽혔으니 이것이 두 번째가 되겠네요.”
그녀는 쉬지 않고 이어 말했다.
“당신이 형제 상잔의 장면을 태자 전하 앞에 끌어다 놓았으니 이는 가르침이 되겠네요. 만약 이후에 전하께서 다른 황자들과 논쟁이 발생했을 때 이처럼 해결하시려 한다면 당신이 잘못 가르친 죄를 범한 것이니 이것이 세 번째가 되겠군요. 또한, 이 사람들은 전부 장 태사 집안의 자제들이고 태자는 혼자인데 당신이 다섯째 동생에게 폭행을 저지르면서 태자의 존재에 대해서는 특별히 마음을 쓰지 않았으니 이것으로 네 번째죠.”
그녀의 말은 빠르지도 늦지도 않았다. 한안은 근본적으로 장위가 잠깐 생각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고 추궁하며 말했다.
“황가의 궁중 연회는 작은 실수도 허용하지 않아요. 사촌 오라버니에게 한 마디만 권고할게요. 무슨 일을 하기 전에는 먼저 머리부터 쓰는 게 좋아요. 어쩌면 당신이 내게 감사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왜냐하면 황상께서 만약 물어보시면 당신은 다섯째 동생과 말다툼하다가 서로가 좋은 결말을 얻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업신여긴 것이니 법도를 지키지 않은 것이 되죠.”
장위는 입이 벌어졌다. 사촌 누이가 이렇게 말재간이 좋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녀의 말을 모두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두려운 것은 사실이었다. 장 태사가 자신을 총애하기는 하지만 만약 태사부에 위험을 끼친다면 아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낯선 사촌 누이를 보았다. 갑자기 이 어린 사촌 누이가 처음부터 끝까지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아무 이유 없이 공포를 느꼈다. 그의 어머니는 수완이 좋은 여인이어서 일개 첩실임에도 장 태사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처럼 총명한 사람도 미친 듯이 노하여 욕설을 퍼붓고 화를 낼 때는 표정이 전부 얼굴 위에 드러났다. 그러나 이 사촌 누이는 시종일관 표정을 잘 통제하여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겨우 열두 살.
한안은 머리를 갸웃하고 장위를 보았다. 그녀의 웃는 얼굴은 꿀처럼 달콤하여 천진한 어린 누이가 오빠에게 애교를 부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한 대는 사촌 오라버니에게 되돌려준 거예요. 사촌 오라버니는 다시는 한명을 성가시게 하지 말아요. 그렇지 않으면 이 사촌 누이가 한 대만 돌려주지는 않을 거예요. 최소한 두 대……겠지요?”
그녀는 아무 거리낌도 없이 상쾌하고 순수하게 웃었다. 장위는 놀라 한 걸음 물러났다. 한안의 말에서 그는 살의를 느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장위는 한안의 눈빛이 귀신과 요괴처럼 변한 것을 보았다. 그는 서둘러 형제를 불러 달아나듯 떠났다. 한안은 그들이 멀리 갈 때까지 보다가 비로소 눈을 내리깔았다. 장한명이 달려왔다.
“누님, 괜찮으세요?”
장한명은 조급함을 숨기지 않았다. 방금 전 그 장면에 그는 거의 놀라 죽을 뻔했다. 장위가 그녀를 해칠까 봐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한안이 몇 마디 말로 그를 겁박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너는 어찌하다 그와 시비가 인 것이냐?”
한안의 얼굴 위에 웃음기는 없었고 그저 엄숙함만이 남아 있었다. 장한명은 이유 없이 움츠러들었고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가…… 누님을 욕했어요.”
오래도록 한안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장한명은 불안하여 고개를 들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누님, 화내지 마세요. 앞으로는 이렇게 충동적으로 굴지 않을게요.”
그러자 한안은 한숨을 내쉬고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명아, 나중에 또 이런 일을 만난다 해도 일단 그를 상대하지 마. 따질 필요 없어.”
“누님…….”
“오늘 너는 그가 내 욕을 하는 것을 듣고 연회석상에서 그와 말다툼을 했지? 심지어 그와 바깥에서 겨루는 것을 승낙했고?”
장한명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여기 오지 않았다면 그들이 곱게 물러서지 않았을 거야. 손해를 보는 것은 너인데 내게 어찌 마음을 놓으라는 것이냐.”
한안의 목소리는 씁쓸한 괴로움을 머금고 있었다.
“지금까지 우리 남매는 서로 굳게 의지하며 살아왔어. 방금 오면서 생각했어. 만약 네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난 또 어찌 살아갈 수 있을까 하고.”
방금 전 얻어맞으면서 한 마디 소리도 내지 않던 장한명은 한안의 말을 듣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한안의 손을 움켜쥐었다.
“누님…….”
한안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네가 나를 보호하려면 우선 자신부터 보호해야지. 장가 사촌 형들이 다시 너를 찾아 말썽을 일으키려고 하면 성가시게 얽힐 필요 없이 상대하지 마. 발광한 미친개가 미친 짓을 그만두는 건 자기가 재미없다고 느낄 때야. 상관없는 사람에게 너무 많은 힘을 낭비할 필요 없어.”
장한명은 입술을 깨물었다.
“알았어요.”
“어서 돌아가.”
한안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주홍에게 너를 따라가게 할게. 내가 나올 때 혼자였는데 너와 함께 돌아가서는 안 되겠지. 네가 먼저 가면 내가 그다음에 바로 갈게.”
장한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나보다 한 살 많을 뿐인데 어떻게 누이는 모든 일마다 나를 위해 마음을 쓰는 건지…….”
한안은 주홍에게 따라가라 지시하고 그의 뒤에서 웃으며 말했다.
“1년이 아니라 일각 먼저 태어났을 뿐이라 해도 마찬가지야. 나는 네 누나니까.”
장한명은 이미 멀리 간 터라 한안의 말을 전혀 듣지 못했다. 급람이 한안을 대신해서 옷을 정리하고 막 떠나려는데 돌연 치기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동생을 위해서 많은 생각을 하는구나.”
몸을 돌리니 황색 짧은 포를 입은 소년이 비웃듯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본전을 보고도 꿇을 줄을 모르는구나!”
한안은 의아해하며 도리어 웃었다.
“태자 전하께서 농담을 하십니다. 대신과 태자 간에는 동료의 예를 행하지요. 소녀는 몸을 굽히면 됩니다. 어찌 무릎을 꿇는 예를 말씀하시는지요? 자고로 하늘에 꿇고 땅에 꿇으며 군왕에게 꿇는다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군주가 아니시며 소녀 또한 신하가 아니니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게다가 설령 태자 전하께서 웅대한 포부와 큰 뜻이 있으시고 천자의 자리를 도모하시어 설령 천하가 머지않아 전하의 것이 된다 하더라도 지금의 천자는 전하가 아니시지요!”
“너…….”
어린 소년은 말을 듣고 화가 폭발했다.
“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여서 본 태자를 모함하지 마라. 본전은 모반할 마음이 없다. 부황께서 결코 너를 믿으실 리 없다!”
태자는 한안이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고는 다시 명령했다.
“설령 군신이 아니라 해도 너는 본전을 향해 예를 올려야 한다.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 본 태자는 즉시 하인을 시켜 너의 죄를 다스릴 수 있다!”
한안은 가소로웠다. 황가의 사람은 모두 똑같구나. 남의 약점을 잡아 공격하는 데 있어 열 살 어린이라 해도 이렇게 박력이 넘칠 수 있다니.
“태자?”
한안은 웃는 듯 마는 듯 그를 보았다.
“소녀는 그저 정방에 가던 길에 화원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어찌 태자를 만날 수 있겠습니까. 태자께서는 이 시각 마땅히 궁중 연회에 참석 중이셔야 옳지요. 어찌 서자 무리들과 한데 뒤섞여서 스스로 품위를 깎아내리고 사람들이 싸우는 것을 구경만 하는 이런 양심 없는 짓을 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만약 황상께서 아신다면 어떤 난리가 날까요?”
태자는 한안의 은밀한 협박을 알아들었다. 한안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공자께서 길을 잃으셨다면 서둘러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분명 신변에 비밀 호위가 동행하고 있을 터이니, 소녀가 제 하녀를 빌려드릴 필요는 없겠지요. 조심히 가시지요, 배웅하지 않겠습니다.”
어린 태자가 10년을 살아오는 동안,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그에게 모두 비위를 맞추며 공손했다. 지금까지 그를 감히 이렇게 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태자 신분을 두려워하지 않고 심지어 감히 협박하는 말도 했다.
그가 장위와 어울린 것은 장위가 비위를 맞춰주고 아첨하여 그를 즐겁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장위가 장한명과 다투는 것을 보고도 수수방관하였다. 사실 그 또한 장한명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다. 한명의 신분은 보잘것없었고 가문에서도 총애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장한명의 누나가 나타나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장위의 따귀를 때린 것뿐만 아니라 몇 마디 말로 겁박하여 장위를 도망치게 만들었다. 그런 장면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는 장한안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장위가 떠난 후에도 몰래 남았다. 그러다가 한안과 장한명의 대화를 듣게 되었는데 조금 의아했다.
그녀와 장한명의 관계는 아주 친밀한 듯했다.
황가에서는 혈육 간의 정이 좋은 경우가 드물었다. 태자 또한 누나들 중 운예를 제외한 다른 공주들과는 정이 좋지 않았다. 지극히 냉담하거나 혹은 겉으로만 친밀한 척할 뿐 정이 좋다고 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호기심이 일었지만 그렇다고 황가의 존엄을 이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한안이 그의 부황을 핑계로 삼았으니 어린 태자는 그녀의 콧대를 눌러 주리라 생각했다. 가장 좋은 것은 그녀가 잘못을 알고 용서를 구하게 하는 것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거꾸로 협박을 당했다. 뜻밖에 이 태자가 말이다.
태자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너…… 무엄하다!”
“태자께서 돌아가지 않으시면 황상께서 알게 되실 것이니 그것이야말로 진정 무엄한 것이지요. 맞다. 태자께 훈계 한마디 드리지요. 세상에 보아도 될 만한 구경거리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구경거리를 너무 많이 즐기다 보면 발을 빼려 해도 그리 하기가 어렵지요. 말씀은 이것으로 다 드렸으니 물러나겠습니다.”
만약 오늘 이후 또 강 건너 불 보듯 수수방관하며 남의 불행을 즐기는 심보를 품으면 한안이 태자를 한데 끌어들이는 것을 개의치 않을 것임을 암시하는 말이었다. 죽더라도 같이 죽을 사람을 잡아야 할 게 아닌가?
급람은 한안을 따라 화단을 떠나면서 몰래 혀를 내둘렀다. 자기가 모시는 소저가 태자까지도 협박했다. 그야말로 대단한 배포였다. 어……. 그런데 그분은 태자시다. 만약 추궁하러 오면 어쩌지?
한안은 여종의 고민을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바로 앞에 마주한 정경이 자기 집 하녀가 고민하는 일보다 더욱 사람을 고민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불과 몇 걸음 걸어가서 곧 화단을 걸어나가려는데, 길고 늘씬한 신영 몇이 보였다. 여기에서 오랫동안 기다린 게 분명했다. 조금 전의 모든 말이 타인의 귀에 전부 들어간 것이다. 대체 이 연극을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한안은 눈살을 찌푸렸다가 홀연 활짝 웃으며 아무것도 못 본 척 지나가려 했다.
“너로구나!”
목소리 하나가 깜짝 놀라 외쳤다.
한안은 마음속으로 몰래 욕설을 중얼거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아름답고 화려한 얼굴을 마주하고 의아해하며 말했다.
“공자께서 저를 아시나요?”
혁련욱은 그 말을 듣더니 울컥하여 내뱉었다.
“잊었다 말하지 마라. 예……낭……자…….”
한 글자씩 끊어 말하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한안이 그를 농락한 일을 마음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안은 잠시 생각하다 이 일을 결코 인정할 수 없다 생각하며 웃으며 말했다.
“소녀는 성이 예가 아닙니다. 공자께서는 아마 사람을 잘못 보신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