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씨는 장사양이 반박하지 않는 것을 보고 이내 주먹을 움켜쥐었다. 한안은 그 모습을 눈 속에 담아 넣고 장사양이 앉은 후 따라서 앉았다.
주씨는 시집오자마자 정방이 되고 싶었겠지만, 천하 어디에 그렇게 수월한 일이 있으랴. 한안은 기어코 주씨의 야망을 막아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장사양이 주씨를 애지중지하는 정도로 보아 단순한 첩이 되는 것은 불가능했다. 차라리 그의 뜻을 거스르지 않게 이낭으로 올리는 것이 낫다. 그래야 장사양이 한안을 싫어하는 것을 누그러뜨릴 수 있고 주씨를 미 이낭과 같은 위치에 놓아두어 잠시 누가 누구를 이길지 지켜볼 양이었다.
유모가 주방에 분부하여 공기와 젓가락을 놓게 했고 만 이낭은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었다. 장금은 곁눈질도 하지 않으며 행동거지가 규준에 맞고 반듯했다. 장어산은 아마도 이전에는 이런 훌륭한 아침밥을 받아본 적이 없는지 눈빛이 조금 달랐다.
미 이낭이 느긋하게 일어나며 버들가지 같은 허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목소리는 더욱 사람의 혼을 빼앗아 갈 듯했다.
“노야, 소첩이 노야를 위해 음식을 집어드리겠습니다.”
미 이낭은 오늘 몸에 딱 맞는 진녹색 대섶(가슴 중앙에서 단추를 채우는 모양의 상의)과 긴 치마를 입었다. 애도 기간인 까닭에 수 놓인 것 없이 눈처럼 하얀 작은 꽃이 조금 그려져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단순해도 그녀의 용모는 전혀 손색이 없었다. 도리어 그녀의 아리따운 용모에 세속적인 느낌이 덜어지면서 청아함과 수려함이 더해졌다. 검은 머리카락은 자연스럽게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드리워 몇 가닥 조금 말아 올린 머리카락이 희고 깨끗한 귓가를 드러냈다. 미 이낭이 고개를 숙여 음식을 집을 때마다 섬세한 목덜미가 드러났다. 소박한 색의 옷이 오히려 피부를 부각시켜서 희고 매끄러운 옥 같은 미인의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장사양은 돌덩이 같은 사람이긴 했지만, 미 이낭의 모습에 마음이 혼란스러운지 눈빛이 삽시간에 그윽해졌다.
미 이낭은 장사양의 눈빛을 받아 그에게 달콤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유순하고 친밀하게 말을 꺼냈다.
“노야, 이 부용소는 요리사가 새로 만든 과자예요. 맛 좀 보시어요.”
미 이낭은 여태껏 도도한 모습만을 보여왔는데 그녀에게도 이처럼 순하고 귀여우며 온화하고 부드러운 면이 있을 줄이야. 장사양은 미 이낭의 모습을 보며 돌연 신선함을 느꼈다. 주씨 모녀는 한옆에 내버려 두더니 상대도 하지 않았다.
한안은 새우만두를 젓가락으로 집어 한 입 깨물었다. 맞은편 주씨의 보기 흉한 얼굴빛을 보니, 갑자기 오늘의 아침밥이 특히 맛있게 느껴졌다.
이 두 사람이 바로 싸울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한안이 불을 붙일 필요도 없이 말이다. 도요새와 조개가 서로 싸우면 누가 최후에 이득을 얻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침 식사가 끝나고, 장사양은 바로 마차를 타고 조정을 향해 출발했다. 미 이낭은 장사양이 떠나는 걸 보더니 주씨를 향해 코웃음 치고는 방을 나갔다. 한안도 입을 살짝 닦고 따라서 일어났다. 주씨가 장어산을 향해 눈짓을 했다. 그러자 장어산이 즉시 일어나 한안에게 비위를 맞추며 물었다.
“안아 동생은 할 일 있어?”
한안은 주씨를 재빨리 한 번 보았다. 그녀가 웃으며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조금 생각하다가 바로 말했다.
“없어요.”
장어산은 바로 건너와서 한안의 팔을 끌어당겼다.
“할 일이 없으면 함께 화원에 가서 거닐지 않을래?”
유모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주씨 모녀를 한 번 보았다. 막 부에 들어왔을 뿐인데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장어산이야말로 장가의 적녀인 줄로 여길 것이었다.
한안은 화내지 않고 웃으며 어산의 손을 토닥였다.
“언니는 부에 처음 들어온 거잖아요. 아마도 이 부중의 경치를 지금까지 본 적이 없을 거예요. 내가 언니에게 여기저기 다니면서 안내해 줄게요. 갈림길에서 잘못 가지 않도록 말이죠. 들어가지 말아야 할 곳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요.”
무심히 눈을 드니 둘 사이에서 주도권을 놓친 장어산의 작은 얼굴이 파래졌다 하얘졌다 하는 것이 보였다. 장어산이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그럼 동생에게 폐를 끼칠게.”
“이 부중에서 부친을 제외하고 모두가 나를 4소저라고 불러요. 언니와 주 이낭도 그렇게 부르도록 해요. 다른 호칭은 듣기에 매우 익숙하지 않네요.”
“너!”
한안이 이렇게 말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지 장어산은 한안을 손가락질하며 소리 질렀다.
“내가 뭐요?”
한안이 놀랍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언니는 어째서 내게 손가락질을 하는 거죠? 다른 사람을 손가락질하는 것은 대갓집 규수의 몸가짐이 아니에요.”
“어산!”
주씨가 돌연 입을 열었다. 침착하고 신중한 눈빛이 한안의 몸 위에 고정되었다. 주씨가 느릿하게 말했다.
“4소저의 말씀이 맞다. 대갓집 규수는 이렇게 다른 사람을 손가락질해서는 안 된다. 아무래도 사람을 구해서 네게 규범을 가르쳐야겠구나.”
한안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대갓집 규수? 장어산은 서녀인데 대갓집 규수라 불릴 자격이 있을까? 보아하니 둘은 처음부터 더 높이 기어오를 심산이 있었던 것이다. 둘은 적녀의 자리를 빼앗을 모의를 했을 것이다. 정말이지 흉악하고 악랄한 심성의 모녀였다.
장어산의 억울한 눈이 새빨개졌다. 장어산은 주씨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하고 억지로 잇새로 몇 글자를 짜냈다.
“방금은 4소저와 농담을 한 거예요. 우리, 어서 가죠.”
“셋째 언니도 함께 가요.”
한안은 고개를 돌려 옆에 서 있던 장금에게 말했다. 장금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갈팡질팡하는 모습이기에 한안은 바로 옆의 만 이낭에게 말했다.
“만 이낭, 내가 오랫동안 셋째 언니와 말을 하지 못했어요. 오늘 셋째 언니를 나에게 하루만 빌려주면 어때요?”
만 이낭은 순간 당황해하다 이내 웃으면서 답했다.
“4소저께서는 너무 예를 차리시네요. 금아, 오늘 4소저를 모시고 잘 놀다 오렴.”
장금은 그제야 앞으로 걸어 나왔다. 하지만 눈썹과 눈 사이에 여전히 망설임이 있었다. 한안은 서둘러 그녀의 손을 잡고 앞을 향해 걸어갔다. 장어산을 뒤에 떨어뜨려 두고.
“어머니…….”
장어산이 주씨를 보다가 앞서가는 한안과 장금을 보고는 화를 내며 발을 굴렀다.
주씨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서 따라가거라.”
장어산이 내키지 않아 하다 마지못해서 떠난 후, 주씨는 고개를 숙이고 옆에 앉아 있는 만 이낭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언니는 제 처소에 가서 담소나 할까요?”
만 이낭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하지. 오늘 현기증이 좀 나는군. 돌아가서 쉬고 싶네. 행아, 와서 나를 부축하거라.”
옆에 서 있던 몸종이 재빨리 앞으로 나와 그녀를 부축했다. 만 이낭은 주씨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 먼저 물러남세.”
만 이낭은 주씨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방을 나섰다.
주씨의 얼굴색이 변했다. 만 이낭의 뒷모습이 멀리 사라지기를 기다렸다가 주씨는 사납게 바닥에 침을 뱉었다.
“뭐 저런 게 다 있어! 총애도 잃은 천한 년 주제에 감히 나한테 곁눈질을 하다니!”
옆에 있던 늙은 하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늙은 노비가 보기에 만 이낭은 호의를 모르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부인께서 담소를 나누자고 초대하는 것은 그녀를 배려하는 것인데 이렇게도 안목이 없다니 정말 아둔하네요.”
“됐다.”
주씨는 귀찮아하며 대꾸했다.
“내가 보니 이 부중에는 좋은 벗이 하나도 없어. 먼저 처소로 돌아가세. 앞으로의 일들을 상의해 봐야겠어.”
한안은 만향각 앞의 화단 안까지 걸어갔다. 붉은 매화가 필락 말락 하여 감탄을 자아낼 만한 풍경을 더 보태고 있었다. 공기 중에는 은은한 향기가 떠돌았다.
가장 중간에 있는 돌 탁자 위에는 바둑판이 놓여 있었다. 한안은 장금을 이끌며 말했다.
“듣기로 셋째 언니의 바둑 솜씨가 일품이라 하였어요. 나와 대국 하지 않을래요?”
장금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어찌 그런 과찬을. 그저 흉내 내는 것뿐이니 4소저는 그런 말 마세요.”
한안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즉시 웃음을 터뜨렸다.
“뭘 그렇게 겸손해해요. 자, 둬요.”
그 옆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는 장어산은 홀로 울적해졌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한안은 줄곧 그녀에게 매우 냉담했다. 비록 겉으로는 세 사람이 함께 뜰을 거닐고 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한안은 장금의 손을 이끌며 말을 했고 자신은 신경도 쓰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때로 자신이 대화에 끼어들면 설렁설렁 말문을 막아버리거나 아니면 그냥 넘어가 버렸다. 마치 있는 힘껏 자신과의 거리를 유지하려는 것 같았다.
장어산은 한안이 자신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음을 민감하게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그녀는 줄곧 모친의 말에 따라 한안의 비위를 맞추고 친근하게 대했다. 그러나 한안은 사사건건 후부 적녀라는 지위를 내세웠다. 그야말로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만약 한안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은 바로 자신의 것이 되지 않을까. 아니다, 이 모든 것은 본래 바로 자신의 것이다! 무슨 근거로 장한안이 점유하고 있지? 모친이 말했다, 자신이 분명…….
장어산은 생각할수록 언짢아졌다. 그녀의 수려한 얼굴은 이내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하고 일그러졌다.
옆에서 바둑을 두고 있던 한안은 어산의 표정을 한눈에 눈치챘지만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흰 돌 하나를 집어 바둑판 위에 놓았다.
장어산 옆에서 시중드는 여종 운아가 몹시 분개해서 말했다.
“소저, 저 두 분이 어떻게 소저께 이렇게 대할 수 있어요?”
장어산은 여종의 말에 깜짝 놀라 냉정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녀들이 바둑을 두는 데 집중하며 자신에게 반푼어치의 주의도 기울이지 않는 것을 보고는 또 한 번 화가 났다. 장어산은 어려서부터 각 방면에서 대단히 뛰어났고 어디를 가더라도 모든 사람이 주목하는 대상이었다. 그런데 이 부중에 들어온 후부터는 아름다운 옷을 입을 수도 없고 자신의 재주도 감추어야 했으며 심지어 눈앞의 아이에게 고개를 숙이고 비위를 맞추어야 했다.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장어산은 아예 몸을 돌려 운아에게 말했다.
“저 둘은 남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재미있게 놀고 있으니 여기서 바보처럼 기다리고 싶지 않아. 그녀들은 상관 말고 나 혼자 거닐어야겠어.”
장어산은 말을 마치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제멋대로 화단 안으로 걸어갔다.
운아도 서둘러 뒤따라 갔지만 한안은 고개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한안 옆에서 시중들던 주홍이 찻주전자를 급람에게 넘기고 장어산과 운아를 뒤쫓았다.
한안은 몸과 마음 전체가 대국 속에 침잠한 것 같았다. 한참 동안 바둑돌을 잡고 있던 오른손이 머뭇머뭇 바둑돌을 한 곳에 놓자마자 뒤이어 흑돌 하나가 들이닥쳤다.
“내가 졌어요.”
한안이 탄식하며 괴로운 얼굴로 말했다.
“모두 다섯 국이에요. 어째서 나만 계속 지는 거죠?”
장금이 웃었다.
“너무 서둘렀어요. 놓기 전에 생각을 하기는 하지만, 단지 눈앞의 몇 보만 고려하네요. 나는 첫 번째 돌을 놓을 때부터 미리 포석을 깔아놓았어요. 이후에 소저가 두는 모든 돌에 바로 대응하는 바둑을 두었고요.”
한안은 멈칫 놀라 눈을 들어 장금을 바라보았다. 맞은편의 소녀는 바둑돌을 집으며 무심히 말을 이었다.
“인생도 바둑과 같아요. 놓고 나면 후회할 수가 없죠. 그래서 매번 바둑을 둘 때마다 진심으로 대응하려 해요. 요행은 있을 수 없죠.”
“셋째 언니가 정말 고수네요.”
한안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패한 것에 진심으로 승복할게요.”
장금은 고개를 저었다. 한안과 바둑을 좀 둔 덕분인지 모르는 사이에 거리가 많이 가까워져 있었다. 말 속에도 명랑한 기색이 감돌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이낭이 제가 돌아와 함께 계화꽃 떡 만들기를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한안은 웃었다.
“만 이낭은 정말로 언니를 어린애 취급하네요.”
그러더니 다시 또 담담하게 말했다.
“사실 나는 언니가 부러워요…….”
적어도 친어머니가 아직 살아계시니까. 한안은 뒷말을 입안에 삼켰다.
장금은 한안을 빤히 쳐다보았다. 눈앞의 소녀는 두 개의 둥근 쪽을 지어 머리를 빗었다. 그렇지만 애티를 벗지 못한 얼굴의 눈과 눈썹 사이에는 나이에 맞지 않는 성숙함과 상심이 어려 있었다. 장금은 마음이 여려져서 한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 괜찮아질 거예요.”
장금의 친근한 행동에 한안은 다소 놀라긴 했지만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그러길 바라요.”
장금이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어산 소저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네요?”
‘어산 소저’라는 호칭에는 장금의 마음속 생각이 자연스럽게 드러나 있었다. 어산을 한 집안의 형제자매로 생각하고 있었다면 소저라는 호칭을 그렇게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장어산은 그저 외실의 딸에 불과하며 인정받지 못한 신분이라는 의미였다. 한안은 웃었다.
“상관할 거 없어요. 그녀가 돌아다니기를 원한다면 돌아다니는 거죠. 그녀를 가로막으면 도리어 우리를 탓할 거예요.”
장금은 더 말하지 않고 하녀를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장금이 간 후에도 한안은 그 자리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잠깐 생각에 잠겨 혼잣말을 했다.
“예전엔 미처 몰랐었네. 셋째 언니가 이렇게 총명하고 지혜롭다니.”
급람이 겉옷을 한안에게 걸쳐주었다.
“소저께서 어렸을 때 3소저 뒤를 따라다니는 것을 좋아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다만 자라신 후에는 부용원과 왕래가 줄었지요.”
아마 그것에도 또 무슨 속사정이 있을 것이다. 한안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어렸을 때의 기억이 뚜렷하지 않고 모호하기만 했다. 하지만 오늘 알게 된 장금의 지혜와 그녀가 평소에 보여주는 평범하고 나약한 서녀의 모습은 실로 차이가 너무 컸다.
어째서 그녀는 자신의 앞에서 본 모습을 감추지 않은 걸까? 한안은 한 손으로 아래턱을 괴고 마음속으로 헤아려 보았다. 장금이 바둑을 두면서 그녀에게 했던 말은 무엇을 암시하고 있는 걸까?
아직 생각에 빠져 있는데 주홍이 밖에서 걸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 있어?”
한안이 물었다.
주홍이 고개를 저었다.
“어산 소저는 화단 안을 걷다가 바로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한안의 눈이 환해졌다.
“하지만 뭐?”
“하지만 주 이낭을 모시는 유모가 임 총관과 함께 말하고 있는 것을 보았어요. 아주 오랜 시간 이야기하고 있던데요. 이 유모가 임 총관에게 금비녀를 주는 것도 보았어요. 제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감히 가까이 가지는 못했어요.”
급람이 놀라 말했다.
“이 유모는 부에 지금 막 들어왔는데 어떻게 임 총관과 친하지?”
한안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임 총관은 부중에서 몇십 년동안 일한 노인이었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크고 작은 일들을 임 총관에게 돕게 하셨다. 주씨는 선한 의도를 가지고 들어온 것이 아니니 함께 데리고 온 사람들도 자연히 선한 의도가 있을 리 없었다. 금비녀는 보통의 물건이 아닌데 주씨의 끄나풀인 이 유모가 임 총관에게 주었다고 하니 필히 주씨의 지시로 처리한 일에 대한 사례일 것이다.
하지만 이상한 점은 급람이 말한 것처럼 주씨는 이제 막 부에 들어왔는데 어떻게 이리 빨리 임 총관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을까 하는 점이다. 설령 임 총관이 줏대 없는 위인이라 해도 정실에 오를 자가 둘이라면 신중하게 며칠은 관망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임 총관은 주씨가 부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그녀의 끄나풀인 이 유모와 알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부에 들어와서 매수당했던 것일까?
만약 부에 들어오기 전부터라면 어머니의 일도 바로 여기에서부터 조사할 수 있을 것이다.
*
황실의 금란전 위, 밝은 황색의 인영이 높은 자리에 단정하게 앉아 있고 문무백관은 고개를 숙이고 서 있으나 중요한 일을 아뢰는 이는 전혀 없었다. 현종제는 오늘 유난히 기분이 좋았다. 아마도 서북 변경에서 들려온 대승의 기쁜 소식 때문인지도 모른다. 얼굴의 반 정도나 웃음기를 띠고 있었다.
“짐은 변경 관문에서 대승을 거두었다고 들었네. 몹시 기쁘고 안심이 되는군. 하여 시일이 좀 지나고 나서 궁중에서 연회를 베풀 생각인데. 경들은 다른 의견이 있는가?”
아래의 모든 사람들이 다 연거푸 호응했다. 그동안 오래도록 이렇게 기뻐할 만한 일이 없었다. 서북의 전쟁은 선황제 때부터 대종의 울화병이었다. 이번에 만주족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니 당연히 축하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운석.”
황제가 아래의 사람들 중 한 사람을 보며 말했다.
“성 장군은 아무래도 네 손으로 양성한 사람이니 만약 공과 상을 논한다면 너의 공적을 첫째로 기록해야 할 것이야!”
재상의 우측에 서 있는 청년은 흰 이무기가 수 놓인 진홍색 관복을 입고 테두리에 어두운 금색의 문양이 들어간 유약이 칠해진 관단화(官鍛靴: 관리들이 신던 검은 장화)를 신고 있었다. 허리춤의 백옥 하나 외에는 과다한 장식은 없었다. 수려한 얼굴 위에는 아무 표정도 없었고 칠흑 같은 눈동자는 물처럼 담담했다. 동시에 그에게는 타고난 스산한 위엄과 고귀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남자는 몸을 굽히고 머리를 숙였다.
“제가 감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말투에는 조금의 놀람이나 두려움도 없었다. 이처럼 오만한 태도에도 황제는 화를 내지 않았다.
“사양하지 말아라. 짐은 네게 중한 상을 한 번 내릴 생각이었다. 네가 이제 나이가 찬 것을 감안하여 처를 얻을 수 있도록 미인을 상으로 내리려 하는데, 어떠하냐?”
청년은 두 손을 맞잡고 절을 올리며 담담히 말했다.
“폐하, 저는 처를 들일 뜻이 전혀 없나이다.”
황제는 하하 크게 웃었다. 청년이 난처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거운 듯했다. 금란전의 나머지 신하들은 낯빛이 제각기 달랐다.
위왕 위정은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리다가 장사양의 달갑지 않아 하는 눈빛과 딱 마주쳤다. 두 사람은 눈짓을 나누고 아무런 내색 없이 고개를 숙였다.
현청왕 부운석과 성상은 한 어머니의 배에서 태어난 친형제였고 두 사람의 관계는 지극히 좋았다. 가장 무정한 것이 제왕가라 하지만 이 두 형제 사이에서는 절대 쓰일 수 없는 말이었다.
부운석은 올해 스물하나, 젊고 유망했다. 만주족이 중원을 공격하여 들어올 때, 나이가 겨우 열넷이던 현청왕은 자발적으로 종군을 자청했다. 황제의 반대를 뿌리치고 문무백관 앞에서 군령장(軍令狀: 군령을 반드시 완수하겠다고 보증하는 언약서)까지 썼다. 그 한 번의 전투로 현청왕은 명성을 얻었다.
만주족 군대는 서북쪽으로 후퇴하여 수세를 취했으나 이후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성 장군은 당시 부장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고 두 사람은 이때 생사를 같이하는 우정을 쌓았다.
하지만 부운석이 뜨겁게 주목받는 인물이 된 이유는, 무관의 권세를 이끌거나 혹은 전공을 세웠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가 모든 경성 소녀들이 마음속에 품은 사람이 된 것은 부운석, 그가 지극히 준수하고 빼어난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문무를 겸비한 청년이 고결하고 권세마저 높으니 자연히 주변에서는 그를 탐하며 달려드는 것이다. 하지만 부운석은 남녀 간의 정에 관심이 없었고 성격이 차가웠다. 그래서 스물한 살임에도 사귀는 여인 하나 없었다. 일부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그가 남색가라는 말이 거리를 떠돈다고 했다.
위왕과 현청왕은 적대 관계였다. 둘이 처한 미묘한 위치 때문에 그랬고 성 장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성 장군의 고모가 위왕에게 시집가고 오래지 않아 난산으로 죽은 일이 있었다. 이후 성가와 위가, 양가는 서로 미워하기 시작했다.
경성 안에 있는 대저택 문 안의 일은 복잡하기 마련이었다. 직접적인 원인이 무엇인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저택의 부인이 죽은 후 사돈댁이 원수가 되었으니 눈치가 있는 사람들은 그중에 필히 적지 않은 곡절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성 장군과 부운석의 관계는 스승이면서 또 벗이었으니 부운석은 자연히 성 장군 쪽에 서게 되었고 위왕과의 적대적인 위치는 거의 확정된 바나 다름없었다.
황제가 성 장군을 칭찬하고 부운석을 추켜세우니 위왕은 전혀 달갑지 않았다. 그리고 장사양은 본래 위왕 파이었기에 공동의 적에 대해 적개심을 불태우는 것은 당연했다.
높은 자리 위의 제왕이 웃음을 띠니 신료들은 마음속 생각을 표정에 드러내지 않고 조심스레 감정을 눈 속에 거두어들이고 있었다.
황상은 다시 몇 마디 말을 하고 비로소 손을 흔들었다. 옆의 공공이 몸을 구부리고 말했다.
“퇴청하시오.”
“왕야, 축하드립니다.”
부운석의 곁을 지나면서 장사양이 그를 향해 축하의 말을 건넸다.
부운석은 그를 한 번 보더니 담담히 말했다.
“대종의 복일 따름이네. 함께 축하할 일이지.”
그는 바로 몸을 돌려 가버렸다.
무시를 당했다 생각한 장사양은 화가 났을 뿐만 아니라 또 창피하기도 하였다. 원한에 차 상대방의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 것이, 감히 이렇게 건방지다니! 정말로 자기가 하늘이라도 된 줄 아나!”
위왕이 건너와 장사양의 어깨를 치고 웃으며 말했다.
“왕야가 큰 공을 세웠으니 황상께서 중한 상을 내리시는 것도 당연하지.”
장사양은 서둘러 고개를 돌려 비위를 맞추며 말했다.
“큰 공을 논하자면 누가 대인께 비길 수 있겠습니까? 두 왕조의 원로시니 현청왕도 어느 정도는 대인의 눈치를 보아야 하지요.”
위왕은 하하 하고 웃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부운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위왕의 눈빛이 조금 깊어졌을 뿐이었다.
*
공동원, 뒷방 침상 위에 젊은 부인이 앉아 있었다. 가슴을 덮는 얇은 연녹색 덧옷을 입고 아래에는 은색 바탕에 비취색 나비가 흩뿌려진 항아리 모양의 치마를 입고 있었다. 새까만 머리는 구름 모양으로 쪽을 지었고 모란 모양의 떨잠과 비녀를 비스듬히 꽂았다. 옥 같은 얼굴에 공들인 단장을 거치자 훨씬 더 한없이 농염하였다.
장어산은 주씨의 품속에서 증오에 차 말했다.
“어머니, 그 천한 것이 계속 우리를 괴롭혀요. 오늘 백방으로 저를 모욕했다구요. 총애도 못 받는 이낭이 낳은 서녀만도 못한 것처럼 취급해요. 계속 이렇게 참아야만 해요?”
주씨는 눈부시도록 아리따운 딸의 얼굴 위에 떠오른 억울한 표정을 바라보았다. 주씨의 눈동자에 한가득 아픔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어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잘못 생각했다. 장한안이 왕씨처럼 쓸모없으리라 여겼는데 이렇게 영악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구나.”
주씨는 차갑게 웃었다. 가늘고 길게 그려진 버들 눈썹이 서슬 퍼렇게 치켜 올라갔다.
“너는 걱정할 것 없다. 그 왕씨도 어미가 싸워 이겼는데 어린 천것 하나를 두려워할 수 있겠느냐. 그래 봐야 열두 살이다. 제아무리 영악하다 해도 하늘을 뒤집을 수 있겠느냐?”
옆의 이 유모가 듣고 이어서 말했다.
“부인과 소저께서는 안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4소저는 총애를 받지 못합니다. 노야께서 싫어하시니 이 부중에서 지위가 보잘것없습니다. 노야께서 어디 우리 소저만큼 아끼시겠습니까.”
주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장어산의 이마를 가볍게 건드렸다.
“너는 노야 앞에서 순하고 귀엽게 굴거라. 오늘처럼 그렇게 조급해하지 말고. 내가 평소에 너를 어찌 가르쳤더냐? 노야의 환심을 얻어야 우리 모녀 두 사람이 부중에서 잘 지낼 수 있단다.”
주씨는 말을 잠시 멈추고 생각하는 듯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보기에 장한안은 총애를 받지 못하고, 부용원에 있는 둘 중 하나는 아들이 없고, 하나는 딸도 두문불출하니 걱정할 것 없지.”
이 유모는 주씨를 보며 망설이다가 말했다.
“어쨌든 장가의 적자이니…….”
말을 미처 마치기도 전에 주씨가 차갑게 웃으며 잘라버렸다.
“적자? 노야는 그를 적자로 여기지도 않으시네. 이 일은 자네가 상관할 필요 없어. 무슨 중요한 일도 아니고. 부용원의 그 망할 년만큼도 중요하지 않아. 하지만 기왕 부에 들어왔으니 잠시 그 작은 소야에게 가 보세. 채명, 소야에게 줄 선물을 꺼내와.”
장어산은 놀래서 물었다.
“어머니, 그 선물은 귀중한 건데 그냥 이렇게 그에게 주다니요.”
주씨가 딸을 한 번 흘겨보았다.
“이 못난 것아, 언제쯤 영리해질 수 있겠니? 훗날을 위해서인데 귀중한 게 무슨 대수야? 그 소야는 반드시 좋아할 것이다.”
장어산은 무언가 또 말하고 싶었지만, 주씨의 표정을 보고는 말을 더듬으며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뜰 안의 푸른 대나무는 여전히 새파랗고도 높이 치솟아 있었다. 그래서인지 청추원은 겨울임에도 비췻빛 풍경으로 물들어 스산함 없이 생기가 가득했다.
한안은 뜰 안의 그네 위에 앉아 있었다. 밧줄을 만지작거리다가 서둘러 다가오는 급람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뭔가 알아냈어?”
급람이 몹시 분개하며 말했다.
“주씨 모녀가 너무나 사악하네요. 제가 방금 나가 봤더니 부중의 하인들이 죄다 주씨 모녀에게 줄을 대려고 공동원으로 달려갔어요. 그쪽에서 무슨 좋은 걸 약속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소저야말로 부중의 정당한 주인이신데 말이에요.”
한안은 웃었다. 급람의 말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주씨 모녀는 막 부에 들어왔어. 자연히 하인들에게 뇌물을 쥐여주겠지. 그들에게 상관할 필요 없어. 오히려 이때, 이 부중에서 누가 진심이고 누가 다른 속셈을 품고 있는지 좀 살펴봐.”
한안은 무언가 생각난 듯 얼굴빛이 또 바뀌었다.
“다른 처소는 내가 아직 상관하지 않아도 되지만 청추원은 잘 지켜봐야 해. 주홍, 급람, 너희는 평소에도 주의를 기울여서 주씨가 우리 처소 안의 동정을 살피고 싶다 해도 자신이 그럴 능력이 없다는 것만 알게 하면 돼.”
급람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소저, 우리 그냥 아무것도 안 해요?”
“뭘 해?”
한안이 웃으며 그녀를 한 번 보더니 가뿐하게 기지개를 켰다.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 우리는 포석만 잘 깔아놓으면 돼.”
주홍은 눈살을 찌푸렸다. 잠시 후, 미간이 풀어지며 한안의 말을 이해한다는 눈빛이 스쳤다. 다행히도 한안의 여종은 영특했다.
전생의 교훈 덕에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분명하게 보고 듣는 것이야말로 사람을 잡아먹는 대저택 안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급람과 주홍은 그녀가 처소 안에 둔 눈과 귀였다.
한안은 손을 뻗어 매실 절임 하나를 건져 내어 입 안에 머금었다. 신맛이 아직 입 안에 퍼지기도 전에 급람이 말을 이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도 들었어요. 주씨가 함 하나를 받쳐 들고 송림원으로 갔다고 합니다.”
한안은 순간 놀라 입 안에 통증이 느껴졌다. 뜻밖의 사실에 다급하여 자기 혀를 깨문 것이다.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그네에서 뛰어내렸다. 그녀의 눈 속에 냉기가 스쳤다.
“주씨 모녀가 명이 쪽에 무얼 하러 가!”
주홍도 따라서 멍해졌다. 급람이 곰곰이 생각하듯 말했다.
“분명 좋은 마음을 품지는 않았을 거예요. 소야께서는 지금 부중에서 반쯤은 주인이세요. 어쩌면 소야께 아첨하고 비위를 맞추고 싶은 게 아닐까요?”
“명이가 부중에서 반쯤은 주인이라고? 진짜 그렇게 생각해?”
한안이 물었지만 급람은 대꾸도 못하고 그저 한안이 계속해서 말하는 것을 듣고만 있었다.
“이 부중의 하인들이 언제 명이를 주인이라 여긴 적이 있니? 게다가 아버지께서 싫어하시니 명이가 적자인들 무슨 소용이겠어? 주씨가 명이에게 아첨한다고 하는 건 믿을 수가 없어.”
한안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안 되겠어. 내가 가서 봐야겠어.”
한안은 주먹을 꽉 움켜쥐더니 자리를 박차고 문을 나가려 했다.
명이는 한안의 유일한 가족이며 또한 어머니의 심장 속 보배였다. 다시 과거로 돌아온 한안의 이번 생 가장 큰 소원은 바로 명이를 잘 보살펴서 그가 성인이 될 때까지 무사하게 클 수 있도록 보호하는 것이었다. 다른 일에 대해서는 태연하게 일 처리를 할 수 있지만 명이한테만은 절대 그럴 수 없었다. 그 음흉한 속셈을 품은 주씨 모녀가 명이에게 접근하는 것을 지켜보자니 도저히 냉정할 수가 없었다.
주홍이 고개를 숙이고 한안의 곁으로 서둘러 다가갔다.
“소저, 섣불리 이야기를 꺼내 상대방이 경계하게 하지는 마세요.”
한안은 멈칫했다. 주홍이 그녀의 손을 잡고 달랬다.
“제가 지금 바로 가서 알아볼게요. 아직은 훤히 밝은 대낮이니 주씨 모녀가 부중 하인들의 눈앞에서 소야를 모해 할 리는 없습니다. 만약 불의의 변고가 있다면 제가 전심전력으로 소야를 보호하겠습니다.”
급람도 따라서 말했다.
“소야께서는 총명하시니 소저께서는 조급해 마세요.”
한안은 눈앞의 두 하녀를 보며 천천히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은 확실히 움직이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만약 이렇게 빨리 송림원에 서둘러 간다면 아마도 주씨는 즉각 주변에 한안이 심어둔 자가 있음을 알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 그쪽의 소식을 알아보는 것이 꽤나 어려울 테니까. 주홍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주씨는 백주대낮에 명이에게 손을 쓸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지금의 명이는 주씨에게 추호의 위협도 안 되는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자신이 경솔했다.
주홍이 한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저, 저를 믿으세요.”
잠시 있다가, 한안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갔다가 빨리 돌아오도록 해.”
장사양이 부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해가 서쪽으로 지고 있었다. 석양빛이 저택의 주위를 뒤덮었다.
마차에서 내리자 장부 입구에 연뿌리 색의 짧은 저고리를 입은 하녀 둘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한 사람은 문양이 조각된 손난로를 품고 있었고 한 사람은 비단 등롱을 들고 있었다. 두 하녀는 장사양이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더니 즉시 맞이하러 다가왔다.
장사양은 손 가는 대로 하녀 손안의 손난로를 넘겨받았다. 따스한 열기가 장사양으로 하여금 안락한 감탄 소리를 끌어냈다. 눈을 들어 다른 하녀를 보니 좀 낯설다 느껴져서 바로 물었다.
“너희는 어느 처소의 하녀들이냐?”
등불을 든 하녀가 즉각 몸을 굽혀 절을 하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노야께 답합니다. 저희들은 공동원의 하녀입니다. 주인께서 말씀하기를 날이 차고 길이 어두우니 나가서 노야를 기다리라 하였습니다.”
장사양은 눈을 가늘게 뜨고 둘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 주인이 참 세심하구나.”
그리고는 바로 젊은 사내종에게 분부했다.
“미 이낭 쪽에 가서 통보해라. 이 어르신이 오늘은 건너가지 않는다고.”
하녀들은 그 말을 듣고 기뻤으나 감히 얼굴에 드러내지는 못했다. 다만 속으로 주 이낭이 좋은 수단을 썼다고만 생각했다. 사소한 일이지만 노야를 공동원에 머무르게 했으니 말이다. 오늘밤 부용원의 미 이낭은 잔을 내던질 정도로 화가 날 것이다.
장사양은 두 하녀를 따라 공동원으로 걸어 들어갔다. 처소 안은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동쪽 곁채의 한 방, 창문 위로 환한 불빛이 비쳐 나왔다. 정숙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빛을 받아 창호지 위에 또렷한 그림자를 그려냈다. 고개를 숙이고 수를 놓고 있었는데 진지하고 온화하며 부드러운 모습이었다.
장사양은 손을 저어 두 하녀를 물러가게 하고 문을 밀어 안으로 들어갔다. 창가의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한 듯 여전히 수틀 위에 수놓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
장사양도 소리 내지 않고 그녀의 뒤에 서서 조용히 보고 있었다. 주씨는 소박한 하얀 중의를 입고 겉에는 자홍색의 덧옷을 걸치고 있었다. 얇은 의복이 그녀의 흠 잡을 데 없는 몸매를 완전히 드러냈다. 가느다란 허리와 긴 다리, 새까만 머리카락은 비녀를 사용해 틀어 올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몸 위에 풀어 헤쳐져 입술을 더욱 붉게, 치아는 더욱 희게 부각시켰다. 난로 열기 덕분에 두 볼은 물에 잠긴 복숭아 꽃잎같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표정에는 사랑스러움과 매력이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진홍색 바탕의 수틀을 받쳐 든 희고 부드러운 손가락이 비단 천 위를 날아다녔다.
장사양은 가슴 속이 간질간질했다. 그 옥 같은 손가락을 보고 있노라니 나른하고 힘이 빠졌다. 입이 마르고 열이 올랐다. 주씨가 단정하게 앉아 자신의 인기척도 모르고 자수에만 집중하자 침을 꿀꺽 삼키고 몸 뒤에서 와락 품 안에 바짝 껴안았다.
“어머나!”
주씨가 깜짝 놀라며 수틀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노야…….”
입술이 마침 공교롭게도 장사양의 코끝에 닿았다. 장사양은 피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오늘 조당에서 있었던 불쾌함과 눈앞의 아름다운 풍경이 한데 뒤섞이면서 아랫도리가 꼿꼿이 솟아올랐다. 그는 즉각 주씨를 끌어안고 그녀의 놀란 외침에도 아랑곳없이 침상에 끌어들여 눌렀다.
한 차례 정사 후, 장사양은 길게 안도의 숨을 내쉬며 주씨의 몸 위에 쓰러졌다. 한 손으로는 여인의 벌거벗은 등을 쓰다듬고 또 다른 한 손은 여인의 깊숙한 곳을 다시 주물러댔다.
주씨는 아름답고 연약한 교성을 내더니 손을 잡아 그를 밀어냈다.
“노야께서 오늘은 어찌 이처럼 함부로 구시는지요. 만약 하인들이 보기라도 했다면…….”
장사양은 웃었다.
“네가 오늘 너무 매력적이어서 그랬다. 나를 바짝 동하게 하니 이 몸이 더 열정적일 수밖에. 누가 감히 들어오겠느냐.”
문득 장사양은 무언가 떠올리고는 돌연 얼굴빛이 무거워졌다.
“이 방 안에 어찌 시중드는 하인 하나 없느냐?”
“소첩의 두 여종은 노야를 맞으러 갔고 이 유모는 어산을 달래서 잠자도록 하라고 분부를 내렸습니다.”
주씨가 놀라 말했다.
“부에 들어왔으면서 어찌 일마다 네가 데려온 여종을 부리느냐. 여종 몇은 부릴 수 있으니 내일 총관에게 여종 몇을 데려오라 시키고 몇 명 고르거라.”
장사양이 화가 나 말하자 주씨는 마음속으로는 기뻐했으나 짐짓 머뭇거렸다.
“4소저가 말하기를 부중의 이낭은 모두 이렇게 사람을 배치했다고 하더군요. 소첩은 남의 뒷말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요.”
“이 부중의 주인이 내가 아니면 누구더냐?”
장사양은 얼굴 가득 노기를 띠었다.
“내가 그 애 아버지다! 이 부중 어디에 그 애가 나설 자리가 있어!”
주씨는 다시 두려워하는 듯한 표정을 드러냈다.
“하지만 4소저가 우리를 좋아하지 않는 듯한 걸요. 어산도 언급한 적이 있고요. 노야, 제가 보기에 4소저가 고집이 센 것 같아요. 당신께서 평소에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온순한 것 같지 않습니다.”
주씨의 말은 표면적으로는 원망이었지만 실은 경고였다. 장사양에게 이 딸이 표리부동하며 아마도 평소에 온순하고 효성스러운 것은 가장일 것이라고 암시하는 것이었다. 자기가 부에 들어오고 이틀간 장한안의 태도를 보니 어리다고 얕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하는 행동거지를 보아하니 열두 살의 어린 소저가 쓸 수 있는 수단 같지 않아 보였다.
장사양도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한안은 어려서부터 왕씨를 잘 따랐으나 아버지인 그와는 도통 혈육 간의 정이 없었다. 심지어는 매우 두려워했다. 다행히 왕씨가 그녀를 잘 가르쳐 그의 태도가 어떻든 간에 그의 앞에서는 온순하고 순종적이었다.
그러나 왕씨가 죽은 후로, 그는 오래도록 한안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주씨가 들어올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한안이 변한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아버지를 두려워하던 아이가 지금은 드러날 듯 말 듯 날카롭게 맞서기까지 했다. 자신을 향한 눈빛에는 존중과 순종이 더 이상 없었고 오히려 분명하게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들어 있었다. 그 눈빛은 장사양을 항상 켕기게 했다.
모르는 사이에 딸에게 생소함을 느끼면서 무엇으로도 통제할 방법이 없는 것 같자 지배욕이 강한 장사양은 한안의 모습에 더욱 분노를 느꼈다.
“4소저는 어머니를 잃었으니 소첩에 대해 배척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 아이의 부친이시지요. 어찌 딸이 되어서 부친의 체면을 깎아내릴 수 있답니까? 전날 하인들 앞에서 그렇게 말한 것은 노야의 체면을 깎아내린 것이 아닌가요?”
주씨는 편안하게 장사양의 앞가슴에 기대며 말했다. 장사양은 한안이 그날 주씨에게 화려한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는 말로 교훈을 주었던 것이 떠올랐다. 한안이 언제 이처럼 영리한 입을 가지게 되었을까.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
주씨는 목적이 달성된 것을 보고 서둘러 웃으며 말했다.
“소첩이 오늘 5소야를 보고 왔습니다.”
장사양은 그녀가 돌연 이런 말을 할 줄은 짐작도 못하여 입에서 나오는 대로 물었다.
“어땠느냐?”
주씨가 갑자기 그의 품속에 파고들었다. 목소리에는 응어리진 한과 깊은 정이 담겨 있었다.
“사양, 저는 정말이지 당신께 아들을 낳아드리고 싶어요.”
장사양은 이 말을 듣자마자 주씨가 장한명에게서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미루어 단정했다. 그는 한안 남매에게 대한 불쾌감이 일었다. 품속의 여인이 부드럽고 간절하게 바라는 것을 들으면서 대장부의 자존심이 가득 충족되었다.
공동원에서는 불이 뜨겁게 타올랐지만 부용원 안의 어떤 사람은 오늘 밤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퍽’!
그릇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났고 투명하게 빛나는 제비집 탕은 바닥에 온통 흩어졌다. 여종 하나가 몹시 아까워하며 바닥의 난장판을 바라보았다. 주인이 특별히 주방에 분부하여 꼬박 세 시진이나 푹 끓인 제비집 죽이었는데. 이렇게 내동댕이쳐져 못 먹게 되다니.
침상 위의 미 이낭은 여종을 노려보았다.
“사람이 없는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
다시 또 이를 악물었다.
“노야가 오늘밤 정말 공동원에서 주무시느냐?”
어린 여종은 쭈뼛쭈뼛하며 말했다.
“노비에게 말을 전한 사람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미 이낭은 장사양이 주씨 모녀를 극진히 친밀하게 대하는 것을 보고는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자식이 없으니 이 부중에 한 자리를 차지하려면 의지할 것은 노야의 총애뿐이었다. 주씨는 장어산이라도 있으니 그녀보다 밑천이 하나 더 많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주씨가 자신의 미모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색은 꽤 돋보였다. 게다가 그 부드러운 기질은 자신이 흉내 낼 수도 없는 것이었다. 장사양은 자신처럼 도도한 미인에게 익숙해져 있었는데 부중에 온화한 성정의 사람이 왔으니 얼마든지 흥미가 생길 수 있었다. 남자는 모두 새로운 유희에 연연하지 않는가. 지금 총애를 잃으면 다시 역전시키고 싶다 해도 어려울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 밤 특별히 화장과 단장을 하고 장사양을 잘 모셔 그의 마음을 단단히 잡아매려 했다. 그런데 뜻밖에 젊은 사내종이 와서는 오늘밤 장사양이 공동원에서 주무신다고 알렸다. 그녀가 공들여 단장하고 주방에 탕을 만들라고 분부까지 했는데 모든 게 헛수고였다. 이러니 어찌 질투하지 않고 증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불여우 같은 년!”
미 이낭은 이를 악물었다.
“방금 부에 들어와 놓고 바로 꼬리를 치다니! 우리 부용원의 사람은 모두 죽은 줄 아는 게지! 일개 늙은 년에 불과한 주제에 풍파를 일으키려고!”
어린 여종이 그녀의 안색을 보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주인님, 방금 전 잠깐 나갔다가 4소저 여종 급람을 만나 그녀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미 이낭은 여종이 까닭 없이 이 말을 꺼냈을 리는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눈을 뾰족하게 세우며 물었다.
“무슨 말을 했느냐?”
“급람이 말하기를 주씨가 최근에 4소저에게 성심성의를 다한다 합니다. 오늘은 소야를 보러 가서 적지 않은 선물을 주었다는데 아마도 비위를 맞추려는 모양입니다.”
미 이낭이 가소롭다는 듯 대꾸했다.
“총애도 못 받는 4소저에게 비위를 맞춰? 흥, 주씨는 제 편 되어줄 사람을 찾으려는 게야!”
미 이낭은 차 한 모금을 마시고 고개를 들어 물었다.
“4소저 그쪽은 어떻다든?”
어린 여종이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급람 말이 4소저는 사리분별을 못하여 주씨가 잘해주는 것을 보고는 기뻐하는 것 같다 합니다.”
미 이낭은 말이 없었다. 다만 자신의 치마 가장자리의 문양을 매만지다가 곧 일어나며 말했다.
“교몽, 오늘부터 너는 4소저의 여종과 더 친하게 지내라. 그년이 4소저를 잡고 싶다 해봤자 헛꿈일 뿐!”
비록 총애를 받지 못한다 해도, 어쨌든 가문 내에서 발언권이 있었다. 만약 장사양이 주씨를 정방으로 올릴 마음이 있다면 한안이 집안 어른들에게 좋은 말을 몇 마디 해주기만 하면 일은 반쯤 성사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런 상황이 일어나게 둘 수 없었다. 방법을 생각해내서 4소저를 자기 쪽으로 끌어들여야 했다.
*
계절이 점점 추워졌다. 겨울날의 햇살은 따뜻한 느낌이 없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반대로 성 동문에서 먹을 것을 파는 소상인들의 앞에 놓인 음식물들은 사람이 맡으면 기분 좋아지는 따끈따끈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경성 안에는 ‘동쪽은 빈곤하고 서쪽은 부유하며, 남쪽은 고귀하고 북쪽은 무질서하다’는 말이 떠돌았다. 동쪽에는 빈민들이 모여 살고, 북쪽은 치안이 부족했고, 남쪽은 고관과 귀족들이 많이 살고, 서쪽은 부유한 지역이라는 의미였다. 선황이 계실 때 한 도인이 말한 것이라 하는데 사실 과장도 그런 과장이 없었다. 하지만 동쪽과 북쪽은 변두리에 가깝다 보니 큰 황무지와 산야에 임해 있기 때문에 자연히 인적이 드물었다.
남교 근처는 경성 안 귀족들이 가장 좋아하며 머무는 곳이었다. 여기는 놀 곳도 많고 다양한 놀잇거리도 많았기에 대갓집 공자라면 모두 이곳에서 즐거움을 찾곤 했다. 남교 근처의 우아한 찻집을 찾아 차를 마시고 거문고를 듣는 것도 괜찮은 소일거리 중 하나였다.
남교 아래쪽에 보이는 한 점포는 넓고 환했으며 단순하고 소박했지만, 평범하지 않고 부귀한 느낌이 있었다. 문의 상부 편액에는 금빛 찬란한 큰 글자 하나가 쓰여 있었다. 당, 전당포였다.
점포 안 장궤(掌櫃: 지배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전당포의 2층은 정교한 누대였는데 술집의 모양새였다.
2층에서 내려다보면, 아래의 북적거리는 사람들이 보일 뿐만 아니라 동쪽으로는 남교 아래의 넓고 깊은 푸른 물이 흘러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여기는 정말 좋아. 일대의 비경을 죄다 끌어모아 놓은 것 같아.”
붉은색 옷의 남자가 술잔을 쥐고 가볍게 한 모금 마셨다. 매력적인 눈에는 물빛이 넘실거렸는데 만약 여자였다면 경국지색이라 불려도 무방했을 것이다.
드리워진 휘장은 경성 안의 최신품으로 비 갠 뒤 하늘색을 닮아 있었다. 상쾌하게 흔들리는 것이 푸른 물이 하늘을 씻어 낸 것 같은 색깔과 흡사했다. 주렴 밖으로는 미모의 여자 두 명이 가볍게 비파를 튕기고 있었다. 듣기 좋은 가벼운 소리는 구슬이 옥쟁반에 떨어지는 것 같았다.
다른 한 옆에 비스듬히 앉은 남자는 온몸에서 부귀함을 내뿜고 있었다. 머리에는 붉은 융단에 자줏빛 구슬을 끼워 넣은 관을 썼고 금실로 수 놓인 괘자는 단추마다 전부 은실을 사용하여 섬세하게 만든 것을 알 수 있었다. 남자는 한 손으로 옥 젓가락을 들어 요리를 집어 입안에 넣으며 말했다.
“너 같이 이렇게 분별없이 공짜 밥을 즐기는 사람은 본 적이 없어. 이 어르신은 한가한 사람이 아니어서 매번 대접하고 있을 수 없는데 왜 매일 여기로 달려오는 거야? 혁련 가의 공자가 부귀루까지 밥을 얻어먹으러 달려온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사람들이 이가 빠질 정도로 웃을 게 두렵지도 않은가 보네.”
혁련욱이 말을 듣고 웃었다.
“두려울 게 뭐 있어. 강옥루는 천하 제일 갑부인데. 밥 한 끼에 이렇게까지 인색할 필요 있어? 게다가 밥 얻어먹으러 온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잖아.”
혁련욱은 아래턱으로 맞은편을 가리켰다.
“너, 왜 그에게는 말하지 않는 거야?”
“그는 은자를 내는 사람이지만 너는 아니잖아.”
강옥루가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아니면 너 부귀루에 들어와서 노래 같은 걸 불러보는 게 어때? 네 미색 정도면 삼 일도 안 돼서 공자들이 떼로 몰려들 거야.”
“너!”
혁련욱은 사람들이 그에게 남자가 여자 용모를 타고났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듣기 싫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낯가죽이 두꺼운 사람이니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그는 한 번 화를 낸 다음 시선을 돌렸다.
“운석, 너 방금 전부터 아래층을 줄곧 보고 있더라니. 흥미를 끌만 한 것이라도 봤어? 혹시 뉘 집 소저에게 반한 거 아냐?”
그 남자는 바로 부운석이었다. 난간에 기대 앉아 있던 그의 먹색 눈동자가 아래층의 지극히 평범한 마차 한 대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부는 마차를 전당포 앞에 세웠고 잠시 후 마차 안에서 하녀 모습의 여자 두 명이 나왔다. 남색 짧은 저고리의 하녀는 마차 앞에 서서 휘장을 들어 올려 안의 사람이 걸어 나오도록 부축했다.
그 사람은 아직 어린 소녀였고 대략 열둘이나 열셋 정도의 모습이었다. 먹물 무늬의 얇은 비단 솜저고리에 겉에는 청색 비단의 소매 없는 옷을 입고 있었는데 지극히 소박해 보였다.
두 갈래로 둥글게 머리를 올렸는데 위에서는 얼굴 생김새를 분명하게 볼 수가 없었다. 소녀는 사람 키의 반 만 한 목재함을 들고 있었다.
혁련욱이 가까이 와서 보더니 놀래서 강옥루에게 물었다.
“네 전당포에서는 보물만 받는 거 아니야?”
강옥루는 고개를 저었다.
“부귀한 것이기만 하면 거절할 이유가 없지. 보물인지 아닌지는 부차적인 문제야.”
“그럼 이상하네.”
혁련욱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저처럼 초라하게 입고서 감히 너의 전당포에 들어오다니. 설마 길을 잘못 찾아온 것은 아니겠지.”
“너는 내 부귀루가 어떤 곳이라 생각하는 거야? 사람마다 다 잘못 찾아올 수 있는 곳?”
강옥루가 연이어 말했다.
“부귀는 뚜렷이 드러나지 않아. 보물을 가진 사람일수록 감추고 숨기려 하지.”
혁련욱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곁에 있는 부운석이 드물게 흥미진진한 표정을 드러내는 것을 보고는 바로 따라서 아래쪽을 살펴보았다.
옷차림이 평범한 소녀는 바로 한안이었다. 오늘은 물건을 전당 잡히러 온 것이었다. 다만 이 물건은 보통 전당포에서는 감당할 수 없을 것이었다. 오직 부귀루, 경성 최대의 전당포만이 이 물건을 받아들일 수 있을 터였다.
전당포 주인은 희끗희끗한 수염을 기른 노인이었다. 소박한 한안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도 결코 가벼이 대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녀들을 중당(中堂: 본채의 한가운데 방.응접실로 쓰임)에서 맞이하고는 차를 올린 후 온화하게 물었다.
“낭자께서는 아무래도 물건을 전당 잡히려 하시는 것이지요?”
한안의 눈 속에 노인을 높이 평가하는 기색이 스쳤다. 경성 안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 중 사람의 말투와 안색을 살펴 심중을 헤아리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능숙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그녀는 각별히 평범하게 차려입었다. 다른 점포 안에서라면 그녀는 아마도 남에게 무시와 경시를 당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 노인은 그런 뜻을 드러내지 않을뿐더러 온화하기까지 했다. 이러하니 어찌 부귀루를 경성 제일이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장궤를 귀찮게 하게 되었소. 내게 작은 장난감이 하나 있는데 가치가 있을지 좀 봐주시오.”
한안은 급람에게 큰 목함을 열게 했다.
전당포 중당과 바깥방 사이에는 두터운 장막이 덮여 있었고 그곳을 지키는 사람도 있었다. 바로 도둑이 드는 것을 방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한안도 걱정하지 않았다. 급람이 앞으로 나아가 함의 뚜껑을 열자 안의 물건이 모든 사람의 눈앞에 드러났다.
“이것은…….”
장궤는 크게 놀랐다.
한안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웃으며 말했다.
“장궤, 값을 매겨 보시오.”
“낭자, 이것은 어인 뜻입니까?”
늙은 장궤는 낯빛을 수습했다.
“설마 노부를 놀리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장궤는 이 물건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오?”
솔직히 말하자면 그는 눈앞의 물건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가 보기에 이것은 지나치게 평범했다. 그가 부귀루에서 장사를 한 이래로 매일 본 보물이 부지기수였기에 그의 견식은 넓었고, 보는 눈은 매서웠다. 방금 전 눈앞의 어린 낭자가 비록 평범하게 입고 그 용모가 변변치는 않지만 함을 매우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받쳐 들고 있는 태도를 보고는 그 물건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뚜껑을 열고 본 것이 이런 물건이라니.
그는 다시 상자 안을 살펴보았다. 확실히 보물은 아니었다. 문득 조금 불쾌해졌다.
“저는 바로 알아봤습니다. 전당 잡을 가치가 없는 것이네요. 낭자께 만약 다른 물건이 없으시다면 바로 다른 점포에 전당 잡히러 가셔도 됩니다.”
한안이 입을 열기도 전에 주홍이 먼저 말을 꺼냈다.
“장궤, 만약 그냥 이렇게 우리 소저를 가시게 하면 아마도 당신 주인이 알고 당신을 질책하실 겁니다.”
부귀루의 주인은 눈앞의 노인이 아니라 경성 제일 갑부인 강옥루였다. 강옥루는 약관의 나이로 어렸지만 사업수완이 좋았다.
장궤는 눈앞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작은 키에 아직 앳된 기색을 지닌 통통한 작은 얼굴 위에 자신감 있는 미소가 드러났다. 소녀가 침착하게 그를 응시하고 있으니 마치 그 물건이 보물일 가능성이 매우 큰 것 같았다. 노인이 의구심이 들어 갸웃거리자 한안이 말했다.
“장궤는 마음을 편히 가지세요. 보장컨대 당신 주인이 와도 당신을 탓할 리는 없습니다.”
장궤는 그녀를 보고는 결심을 한 듯 젊은 사내종에게 말했다.
“너 가서 공자께 알리거라. 이 낭자께서 큰 거래를 하시려 한다고 말이다.”
강옥루가 서역에서 운반해 온, 가치가 순은 백 냥에 해당하는 포도주를 맛보고 있을 때.
잿빛 적삼을 입은 젊은 사내종이 주렴 바깥에 서서 말을 올렸다.
“공자, 아래층에 낭자가 오셔서 보물을 전당 잡히려 하십니다. 방 장궤가 내력을 파악할 수 없어 공자께서 내려와 살펴봐 주시기를 청합니다.”
노방의 안목은 익히 그도 알고 있는 바였다. 노방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물건을 보배라 하니 도리어 조금 재미있었다.
혁련욱이 싱글벙글 웃었다.
“방금 전에 들어간 그 어린 애 아닐까? 하하, 아마도 너를 가지고 놀려나 보다. 어디 보물 따위가 있겠어?”
부운석은 술잔을 쥔 손을 멈추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꼭 그렇지만은 않을 거야.”
강옥루는 옷을 정돈하고 일어서며 나른하게 말했다.
“어쩔 수 없지. 경성 안에서 오래도록 신선한 보물이 나오지 않았으니 이 어르신이 내려가서 무슨 보물인지 봐야겠어. 너희는 잠시 마시고 있어라. 나를 기다릴 필요는 없어.”
강옥루는 주렴을 걷어 올리고 젊은 사내종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혁련욱은 코웃음을 한 번 쳤다.
“아마 흥이 깨져서 돌아올걸.”
부운석은 무슨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아래층의 마차를 응시했다. 표정에 별다른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한편, 강옥루는 하인을 따라 중당에 걸어 들어가자마자 중간의 의자에 앉아 있는 어린 낭자를 보았다.
방 장궤는 그가 오자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공자.”
그는 손을 들었다.
“이분이 보물을 전당 잡히려는 낭자신가?”
한안은 그의 눈빛을 맞이하며 공손하게 말했다.
“공자께서는 과언을 하십니다. 보물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선한 장난감이지요.”
강옥루는 그녀의 대답에 조금 놀랐다. 그리고 그녀가 먹은 과자와 맑은 차를 다시 한번 보고는 ‘이것 봐라?’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는 성년도 치르지 않은 어린 꼬맹이에게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어린아이의 담을 보니 흥미가 돋았을 뿐이었다. 경성에서 부귀루에 오는 사람들 중에 어느 누가 조심하고 신중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 아이는 평온하고 침착한 것이 자기 집 후원에 있는 것처럼 자유로웠다. 그러니 먹고 마실 여유까지 있는 거겠지. 그러나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강옥루가 한안을 살펴보는 동안, 한안은 상대방에게 자신이 침착해 보이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부귀루 같은 이런 곳은 귀인들이 와서도 불안해서 안절부절못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겁먹었다는 것을 드러낼 수 없었다. 앞으로도 종종 들려야 할 터인데 초반부터 기세가 꺾인 모습을 보여선 안 됐다.
강옥루는 눈썹을 치켜 올리고 제멋대로 목함을 향해 걸어가 눈으로 한 번 훑어보았다. 젊은 사내종 두 명이 목함 안의 물건을 들어서 꺼냈다.
한안의 손바닥은 축축한 땀으로 젖어 들어갔지만 강옥루의 표정을 세심하게 헤아려 보았다. 소문 속 경성 제일의 갑부는 자신이 상상한 것보다 훨씬 젊었고 총명해 보였으며 용모도 준수했다. 다만 의복과 장신구는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은자가 있다는 걸 모를까 봐 몹시 두려워하는 것 마냥 휘황찬란하기 그지없어 한안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사치스러운 옷차림새는 아름다우면서도 저속하기 이를 데 없어 깨끗하고 상쾌한 용모가 아쉽다는 생각까지 들게 했다. 나름대로 그를 평가를 하고 있을 때, 강옥루가 고개를 들어 그녀의 눈빛을 마주하고 있었다. 한안은 놀라서 얼굴을 붉히며 바로 고개를 돌렸다.
강옥루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이 어린 꼬맹이가 애석하다는 얼굴로 자기를 보고 있었는데……. 한안이 거북해하며 얼굴을 돌리는 것을 보고 바로 웃으며 말했다.
“낭자의 물건은 좀 내력이 있는 듯합니다. 소생이 추측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한안은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의 입속에서 천천히 두 글자가 내뱉어지는 것을 보았다.
“호붕.”
젊은 사내종이 들어 올린 그 물건은 바로 거대한 새장이었다. 새장 안에는 손바닥 크기의 새 한 마리가 눈알을 굴리며 가운데에 엎드려 있었다.
그 새는 평범한 생김새에 보기에는 참새와 다른 점이 없었다. 유일하게 다른 것이라면 전신이 검은색이고 긴 꼬리 위에 흰 깃털 한 줄기가 있다는 것이었다.
한안은 내심 웃음이 나왔다. 과연 안목이 있구나.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이 조롱 속의 호붕은 버마(미얀마) 새였다. 새의 성질은 음흉하고 악랄해서 미모의 여인을 보면 바로 그 몸 위에 정액을 쏟아냈다. 새가 쏟아낸 액체는 ‘면령’이라 부르는데 일종의 진귀한 춘약이었다. 냄새만 맡아도 바로 반응이 나타날 수 있었고 복용하면 더한 효험이 있었다.
새가 진귀하다기보다는 그것이 생산해 내는 면령 같은 약물이 진귀하다고나 할까. 만약 한안이 삶을 되풀이하기 전, 온종일 집에서 책을 보며 고서적을 뒤적이지 않았다면 이 작은 새가 이처럼 곡절 많은 내력이 있을 줄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강옥루는 사실 놀랐다. 이 소녀는 호붕 같은 동물을 알고 있으면서도 사내인 그를 마주할 때 거침없고 거리낌이 없었다.
“강 공자가 호붕의 가치를 알고 계시니 값을 매기는 것이 가능하신지요?”
강옥루는 접선을 어루만지며 눈빛을 반짝였다.
“호붕이 비록 희귀한 물건이긴 하나 경성에서 처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참에 낭자에게 하나 묻겠습니다. 소유권을 살려두시겠습니까, 포기하시겠습니까?”
한안은 기가 막혔다. 이런 물건은 당연히 소유권을 포기하는 게 맞았다. 설마 어느 날 은자를 가지고 와서 저당물을 되찾으려 하겠는가? 그녀는 즉각 회답하여 말했다.
“포기하겠습니다.”
강옥루는 그녀가 화를 내는 것을 보고는 한층 더 흥미가 느껴졌다.
“낭자는 가치를 얼마나 생각하고 계십니까?”
“황금 1천 냥.”
한안은 눈도 한 번 깜박거리지 않고 맞은편의 사람을 응시했다. 그의 표정 속에서 단서를 찾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강옥루는 손을 한 번 휘둘렀다.
“노방, 은표를 가져오게.”
이렇게 간단하게? 한안은 크게 놀랐다. 높은 가격을 제시했으니 강옥루와 논쟁하리라 여겼는데……. 이렇게 수월하게 답을 얻어낼 줄이야. 설마 이 음란한 새가 더 높은 가격을 받을 가치가 있었던 걸까? 만약 그렇다면 손해 보는 건 아닐까. 한안은 급하게 말을 이었다.
“방금 말한 건 새의 가격만이에요. 새장은 황금 200냥이에요.”
강옥루는 웃으며 말했다.
“가져와라.”
한안은 그가 기쁘게 웃는 것을 보고는 자신이 손해 보는 거래를 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상대방이 경성 제일 갑부인 것을 떠올렸다. 만약 그가 이윤을 남기지 않는다면 수완이 있다는 평판을 들을 리 없었다. 오늘 자신이 손해를 봤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이후 또 여기에 와서 거래를 해야 하니까. 한안은 평정을 되찾은 후 말했다.
“은자 100냥도 있었으면 좋겠네요. 강 공자께 폐를 끼치네요.”
모든 것이 정리된 후, 한안은 은표를 옷 속에 넣고 급람과 주홍에게 은자를 챙기게 했다. 그리고 강옥루에게 몸을 굽혀 인사를 했다.
“오늘 일은 다른 이에게 이야기하지 말아주셨으면 해요. 소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강옥루가 그녀를 불러세웠다.
“소생이 외람되게 하나 묻겠습니다. 낭자께서는 호붕을 어디서 얻으셨습니까?”
출가 안 한 소저에게 어떻든 이런 물건이 있어서는 안 되는 거 아닌가.
한안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주었습니다.”
입꼬리가 냉소로 휘어졌다. 그렇다. 주씨가 준 것이었다.
강옥루는 눈썹을 치켜 올리고 종에게 작은 소리로 분부했다.
“가라. 마차를 따라가서 어느 집 낭자인지 조사해라.”
눈빛이 탁자 위의 새장에 닿자 강옥루는 크게 웃었다. 들고 올라가서 벗들에게 신기한 것을 보여주어야겠다.
*
막 부로 돌아오자 유모가 급히 다가왔다.
“소저, 소야께서 처소에서 소저를 기다리십니다.”
“그 애가 빨리도 왔네!”
한안의 얼굴 위에 웃음기가 퍼지며 눈빛도 온화해졌다.
청추원 뜰 안의 석탁 옆에 바르게 앉아 있던 파란 옷의 소년은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웃음을 지었다.
“누님!”
한안이 웃으며 말했다.
“뭐 하러 뜰에 앉아 있는 거야. 바람 부는 게 걱정도 안 돼? 유모, 방 안에 난롯불을 돋우게. 들어가자. 급람, 어제 나누어 놓은 차를 명이에게 올리거라.”
장한명이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누님, 여전히 저를 아껴주셔서 감사해요.”
방으로 돌아온 한안은 얇은 철판으로 만들어진 작은 난로를 장한명의 손에 넣어주었다. 한명이 따뜻한 차를 마시고 얼굴에 온기가 도는 게 보이자 그제야 비로소 물었다.
“어제 주씨가 너를 찾아왔다고?”
주씨를 언급하자 장한명의 얼굴빛이 바뀌었다. 그는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좋은 마음을 품고 온 건 아니죠. 저는 그녀들을 보면 구역질이 나요.”
“대들거나 그러지는 않았겠지?”
한안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한명은 아직 어리고 대저택에서 벌어지는 지저분한 수단에 대해서도 자세히 아는 바가 없었다. 더구나 소년다운 공명심에 어쩌면 참지 못하고 주씨와 충돌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구설에 오르게 되면 오히려 다른 사람들은 적자가 새로 들어온 이낭에 대해 가혹하게 굴었다고 여기게 될 것이고 장사양 또한 마음에 불만이 생기게 될 것이었다.
장한명은 고개를 저었다.
“누님의 말씀에 따라 그냥 냉담하게만 대했어요. 주씨 모녀는 물건만 주고 바로 갔어요.”
한안의 입가가 냉소로 일그러졌다.
“주씨가 정말 물건만 주었을 리가 있으려고.”
어젯밤 급람이 알려준 소식에 따르면 주씨 모녀가 명이를 만났다고 했다. 부에 들어와 첫인사로 주는 선물이라 하며 몇 가지 예물을 보냈다는데 예물들이 모두 진귀한 완구라 했다.
그녀는 주씨 모녀가 좋은 마음으로 선물을 주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반드시 무슨 목적이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 물건 중 하나가 바로 새장 속의 새였다.
주씨는 한명에게 이 새는 굉장히 독특한 것이어서, 미모의 여자를 좋아하여, 만약 미인을 보면 바로 돌진해서 친근함을 표시한다고 했다고 한다. 경성 안 부잣집 공자들이 평소에 새를 가지고 노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며 장한명도 아직 나이가 어리니 이런 신기한 물건에 흥미가 생길 수 있었다. 다만 한명은 이미 주씨 모녀를 혐오스러워 하는 탓에 새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예 한안에게 건네주었다. 어쨌든 여자들이란 이런 동물을 좋아하니까 말이다.
얼떨결에 새를 받은 한안은 새를 본 후 크게 놀라고 말았다. 한눈에 새의 생김새가 고서적에서 본 호붕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게다가 주씨가 한 말도 있으니 이 새가 음란한 새임을 확신했다.
정말 지독하다 싶었다. 만약 다른 소년이었다면 이처럼 신기한 새를 얻게 되었으니 정말로 사람을 시켜 시험해 보려 했을 것이다. 그럼 호붕은 미인을 보고 흥분하여 면령을 쏟아낼 것이고 그 춘약 냄새에 이성을 잃을 게 분명했다. 그 기세로 여자와 관계를 갖게 될지도 몰랐다. 그러다 보면 결국 여색에 탐닉하는 폐물이 되는 길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한명은 올해 겨우 열한 살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한명의 기력을 모두 소진시키고자 이러한 계책을 준비한 것이 분명했다.
경성의 사람 중 호붕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지극히 적었다. 무수한 보물을 보았을 듯한 방 장궤도 파악해내지 못했다. 이 부중에서는 알 만한 사람이 더더욱 없을 것이다.
주씨의 계략은 은밀하면서도 또 적절했다 할 것이다. 명이한테 무슨 변고가 생긴다 해도 그 새를 의심할 사람은 있을 리 없었다. 전생에 명이가 기녀 때문에 감옥에 갇힌 것도 어쩌면 이것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생각을 거듭하면 할수록 한안의 얼굴이 점점 더 굳어져갔다.
장한명은 한안의 어둡게 가라앉은 표정을 보고는 물었다.
“그런데 그 새가 뭐 잘못됐어요?”
한안은 이런 더러운 일을 명이에게까지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 새에는 독이 있어. 네 몸에 가까이 두면 안 돼.”
“뭐라고요? 주씨 모녀가 간덩이가 부었군요. 감히 부중에서 나를 모해 하다니요! 누님, 우리 부친께 알리러 가요!”
한명이 놀라워하며 말하자마자 바로 일어났다.
한안은 그를 붙잡았다.
“그건 아냐! 네가 지금 부친에게 바로 알리면 오히려 그 모녀가 의심을 품고 다른 행동을 하게 될 거야. 그 모녀가 너한테 끊임없이 물건들을 보내도록 놔둬. 그녀들이 조용하게 두는 편이 나아.”
장한명이 방을 휘둘러 보며 말했다.
“누님, 그 새가 지금 누님 방 안에 있어요? 누님 몸은 어쩌고요?”
한안은 웃었다.
“마음 놓아. 오늘 전당포에 가서 그 새를 새장까지 해서 한꺼번에 처리했으니까. 주씨 모녀가 선물 보내는 걸 좋아하면 보내라고 해. 우리는 그것들을 전부 은자로 바꿔서 쓰고 싶은 대로 쓰면 돼!”
장한명은 눈을 크게 떴다.
“누님, 몰래 부를 빠져나가셨어요?”
“쉿. 부 안의 사람들이 전부 듣게 하고 싶니? 아무도 모르게 처리했으니 걱정할 필요 없어.”
한안은 말을 마치고 품속에서 은표 한 장을 꺼냈다.
“이것은 오늘 전당 잡혀 받은 은표야. 네가 챙겨두렴.”
장한명은 고개를 젓고는 은표를 되돌려주었다.
“제가 평소에 무슨 은자를 쓸 일이 있다고요. 누님이 맡아두세요. 아, 맞다.”
한명은 돌연 무언가 생각이 난 듯했다.
“주씨가 또 의류랑 작은 완구들을 보내왔어요. 의류는 정교한 것이 값이 꽤 나갈 것 같았어요. 완구들도 희귀한 것들이었고요. 그것들도 가져다가 전당 잡히는 게 어때요?”
의류? 완구?
한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입가에 냉소가 어렸다.
정교한 의류와 화려하고 귀중한 완구, 명이에게 나태한 마음이 생기게 하여 배운 것도 재주도 없으면서 온종일 놀 줄만 아는 망나니 공자로 만들려는 것이 분명했다. 장사양은 자기 아들이 겉만 번지르르하고 실속은 없이 집안을 망치는 가증스러운 화근으로 여길 것이었다. 주씨의 일 처리는 대단하다 할 만했다.
“시간이 있으면 바로 챙겨 와. 의류를 제외한 완구들은 내가 가서 전당 잡을 테니. 이낭이 열심히 고심한 건데 헛되게 하지는 말아야지.”
“누님.”
장한명이 그녀의 손을 잡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저는 평소에는 국자감에 있고 후원에는 잘 없어요. 또 남자 몸이죠. 하지만 누님은 달라요. 매사에 조심하셔야 해요.”
말 속에 감추지 못한 관심과 걱정이 한안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모르는 사이에 명이는 이미 그녀만큼이나 키가 커 있었다. 수려한 작은 얼굴에는 이미 사내대장부다운 의연함이 어려 있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뜨신 후, 명이도 마치 하룻밤 사이에 적지 않게 자란 듯했다. 명이를 향한 마음이 더욱 부드러워졌다.
유모는 오누이를 바라보며 감격에 겨웠다. 아무래도 친 오누이니 우애가 남달랐다. 게다가 집안 곳곳에는 좋지 않은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 많으니 어찌 이 오누이가 가련하지 않을까. 다행히 소저가 사리에 밝고 영특하니 적어도 이 부중에서는 남에게 유린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시간 곁채.
장사양과 주씨는 격정을 치른 상태였다. 주씨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부드럽게 남자에게 기대어 있었다. 교태를 부리는 목소리가 남자의 마음을 도취시켰다.
“노야, 며칠이 지나고 궁중 야연에 대신들이 여자 식구들을 데리고 가야 한다던데…….”
장사양은 방금 전 욕정을 내키는 대로 풀었던 터라 얼굴 위에 흡족함이 가득했다. 장사양은 주씨의 속뜻을 바로 알아차리고는 웃었다.
“당연히 내 선녀를 데려가야지. 너는 이 어르신의 심장이고 간인데 너를 데려가지 않으면 누구를 데려갈꼬?”
“소첩은 그저 이낭의 신분입니다.”
주씨의 눈이 눈물을 함뿍 머금으면서 형언할 수 없이 사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산도 그저 서녀의 신분인데 노야를 따라갔다가 뒷말을 들을까 두렵습니다.”
“너는 나의 사람이고 어산이는 내 딸이다. 누가 감히 그런 말을 한단 말이냐! 게다가 누가 네가 이낭이라고 말할 것이냐? 내가 너를 부인으로 올리겠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조만간 내 부인이 될 것이니 기다려라!”
주씨는 기뻐 어찌 할 줄 몰라하며 남자의 벌거벗은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노야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그런 것이죠.”
장사양은 그녀의 부드러운 몸이 자신을 다시 자극하는 것을 느꼈다. 그의 손이 다시 한번 그녀의 몸을 더듬자 휘장 너머로 신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방의 바깥 침상 주변에서 청소하던 여종이 빗자루를 쥔 손을 살짝 움켜쥐더니 잠시 후 빠른 걸음으로 뜰을 걸어나갔다.
한안은 저녁밥을 먹은 후 방 안에서 글씨를 썼다. 주씨 모녀는 드물게 조용했다. 다른 일에 대해 방법을 강구하긴 해야 하나 잠시간의 평안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그때 뜰 안에서 청소하고 있던 여종이 미 이낭이 왔다고 전했다.
한안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쪽에서 먼저 스스로 찾아왔으니 도리어 힘을 덜었다.
바로 종이와 붓을 내려놓고 친절하게 말했다.
“미 이낭이 왔다고? 어서 맞이해서 들어오게 해라.”
화려하게 화장한 요염한 부인은 한안의 규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방 안의 모든 것이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했던 것이다. 한안은 장가의 적녀인데 서녀인 장금과 비슷했다.
한안은 고개를 숙이고 문 입구에 서 있었다. 옷자락을 잡고 매우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모습이었다.
“이낭이 저를 찾아오시고 무슨 일이시죠?”
미 이낭은 진지하게 한안을 훑어보았다. 그녀의 작은 얼굴은 천진하고 앳되어 보였으며 눈과 눈썹 사이에는 자신의 기분을 맞추려는 기색과 조심스러움이 어려 있었다. 문득 자기의 가치가 적지 않게 높이 올라간 듯했다. 며칠 동안 주씨 모녀 쪽에서 받은 화도 누그러졌고. 직접 한안을 보니 한층 더 마음에 들었다. 손을 뻗어 한안의 손을 토닥이며 온유하게 말했다.
“4소저, 말하는 것 좀 보세요. 당연히 이낭이 4소저를 생각해서 왔지요. 4소저가 큰 병을 막 치른 탓에 내가 걱정이 많아서 음식을 좀 가져왔어요.”
한안은 오한이 일었다. 모친이 계실 때는 미 이낭이 이렇게 상냥하고 친절한 적이 없었다. 기고만장하여 한안은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이렇게 호들갑을 떠니 한안은 입맛이 써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미 이낭은 한안이 대답이 없는 것은 나약하고 겁이 많아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안에 대해 신경 쓸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굳혔다. 다만 한안이 쥐고 휘두르기 쉬우니 관계는 잘 맺어 놓으면 좋으리라.
한안은 그녀를 향해 달콤하게 웃어 보였다.
“이낭의 관심에 감사해요. 요 며칠 내내 병을 앓았을 때 몇몇 이낭이 지극히 보살펴 줘서 너무 감동했어요.”
미 이낭은 순간 놀라 황급히 물었다.
“몇몇 이낭이라니요. 또 누가 소저를 보러 왔나요?”
교몽이 옆에서 몰래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당기자 미 이낭은 그제야 자신이 예의에 맞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는 점을 의식했다. 미 이낭은 가볍게 기침을 한 번 했다.
한안은 그녀의 실수를 알아차리지 못한 듯 여전히 온순하게 대답했다.
“만 이낭은 셋째 언니에게 한 번 와보게 했고 주 이낭과 어산 언니는 종종 와요. 좋은 선물도 가지고요.”
미 이낭은 듣자마자 향 수건을 꽉 움켜쥐었다. 이 천한 년이 벌써!
한안은 계속해서 말했다.
“어제는 주 이낭이 한명이를 살펴보러 갔어요. 좋은 완구도 주었고요. 새도 한 마리 주었어요.”
미 이낭은 새를 보냈다는 말에 어렴풋이 이상하다고는 느꼈으나 구체적으로 무엇이 이상한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선물이 무슨 의미인지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자신은 오랑캐 여인이기는 하지만 궁중에서 가르침을 받기도 했고 자주 보고 들은 바가 있어서 저택 안 여인들이 어떻게 다투는지는 훤히 알고 있었다. 추켜세워 자만에 빠지게 해서 망쳐놓는 방법이 낯설지 않았던 것이다. 미 이낭은 속내를 감추고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한안에게 물었다.
“소저는 그 주씨 모녀를 좋아하세요?”
한안은 목을 움츠리고 말했다.
“주 이낭과 어산 언니가 저에게 잘해준다는 걸 알아요. 비록 친어머니는 아니지만…….”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미 이낭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마음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지금 가장 걱정하는 것은 주씨가 한안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기선을 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안의 태도를 보건대 주씨에 대해 공경보다 두려움이 큰 것 같았다. 아이들은 어쨌든 계모를 두려워하는 법이었다. 자기가 한안과 그다지 좋은 관계를 맺지는 않았지만 한 지붕 아래서 오래 살았으니 그렇게 낯설지 않을 것이었다. 미 이낭은 바로 표정을 엄격하게 바꾸고는 말했다.
“주씨는 좋은 마음을 품고 있지 않아요. 주 이낭이 보낸 선물은 소저를 해하는 심보가 담겨 있어요.”
한안은 깜짝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어쩜 그렇게 말하나요? 주 이낭은 좋은 마음을 가졌어요. 들으면 억울해하겠어요.”
미 이낭은 한안의 이마를 손으로 톡톡 치며 최대한 친근하게 말했다.
“소저가 너무 착한 거죠. 주씨가 이렇게 하는 건 한명 소야가 노는 데 정신을 팔게 하려고 그러는 거예요. 모르는 사람은 주씨가 환심을 사려고 애쓴다고 여기겠지만 좋은 심보는 아니거든요.”
한안은 놀라 허둥대며 미 이낭을 보았다.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모습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명이는 이번 시험에서 장원을 해야 하는데요.”
“마음 놓아요. 내가 있는데 주씨 모녀가 어찌 하늘을 뒤엎을 수 있겠어요.”
미 이낭이 그녀를 위로하며 말하자 한안의 입술 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드디어 넘어왔다.
한안은 미 이낭의 손을 잡고 감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와 명이는 이낭에게 감사해요. 하지만…….”
한안은 뭔가를 망설이는 듯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며칠 후 궁중 야연에 아버지가 주 이낭을 데려가기로 결정하셨다고 들었어요.”
“뭐라고요?”
미 이낭은 말을 듣자마자 즉시 몸을 일으켰다.
“소저는 그 이야기를 누구에게 들었어요?”
한안은 고개를 저었다.
“제 여종이 뜰에서 하인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어요. 미 이낭, 아버지는 줄곧 당신을 좋아하셨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주 이낭을 데려갈 수 있죠?”
미 이낭의 심장이 칼로 에는 듯했다. 궁중 야연에 신하가 데려갈 수 있는 여자 식구는 반드시 정방 부인이어야 했다. 이번에 야연에 데리고 가는 사람이 바로 차기 정방 부인임을 드러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미 이낭은 마음이 급했다.
“4소저, 오늘은 날이 늦었네요. 소저가 쉴 수 있게 먼저 가 볼게요.”
미 이낭은 조급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한안은 유달리 천진하게 웃었다.
“주홍에게 이낭을 잘 배웅하라 할게요. 주 이낭이 저에게 흉계를 꾸민다지만 부친께서 좋다 하시면 저도 그저 인정해야지요. 하지만.”
그녀는 하하 웃었다.
“전 미 이낭이 더 좋아요. 미 이낭이 더 아름다워요!”
아이의 칭찬에 거짓은 섞이지 않은 것이라 생각한 미 이낭은 저절로 웃는 얼굴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꽉 다잡았다. 한안은 결국 열두 살 어린아이일 뿐이다. 한안을 한편으로 끌어들여서 자신이야말로 정실부인이 되어야 했다.
미 이낭이 청추원을 나서자 교몽이 매우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자기 주인의 표정을 헤아려 보았다. 노야가 주씨를 데리고 궁중에 들어가 연회에 참석하려 한다고 하니,어쨌든 미 이낭보다 주씨가 우위를 점한 것이다.
“불여우 같은 년!”
미 이낭은 그 자리에 서서 이를 악물고 말했다.
교몽이 가까이 다가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주인님, 공동원 쪽이 궁에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됩니다. 주씨 모녀가 지금도 이렇게 방자한데 나중에는 주인님을 안중에도 두지 않을 것입니다.”
“누가 그년 원하는 대로 되게 한대?”
미 이낭이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그녀의 눈에 음험하고 악독한 빛이 스쳤다.
“너는 임종에게 말을 전해라.”
교몽은 주인의 말을 바로 이해하고 칠흑 같은 밤 풍경 속으로 사라졌다.
한안은 한가로이 귤의 껍질을 벗겨 한쪽을 입에 가져가 넣었다. 살짝 신맛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
유모가 진득하니 기다리다 결국 물었다.
“소저께서 미 이낭에게 정보를 주신 건 미 이낭을 궁에 들여보내기 위함인가요?”
유모는 말을 마치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미 이낭도 단순한 사람은 아닙니다. 소저께서 이러시는 건 이리를 쫓아내고 범을 끌어들이는 것과 같아요. 어째서 그러시는 건가요?”
한안은 하품을 했다.
“미 이낭은 나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해. 지금은 나를 어찌할 리 없어. 이번에 주씨가 궁에 들어가게 해서는 안 돼. 유모는 잠시 지켜만 봐. 미 이낭이 주씨가 궁에 못 들어가게 방해를 놓을 거야. 하지만 주 이낭이 갈 수 없다고 해서 아버지께서 신분이 미천한 오랑캐 출신인 미 이낭을 궁에 데리고 가 자신의 체면을 깎을 리는 없어. 기껏해야 만 이낭을 데리고 가게 되겠지.”
유모는 무언가 말을 더 하고 싶었지만 한안은 무슨 생각이 있는 듯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구경만 잘 하면 돼.”
하지만 다음 날, 한안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면서 전체 국면이 혼란스러워지고 말았다.
*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한안은 장사양에게 문안을 갔다. 병이 이미 말끔히 나았으니 더 이상 문안을 가지 않으면 사람들의 구설에 오를 것이었다. 더구나 지금은 표면상 자애로운 부친과 효성스러운 딸의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주옥의 식당에 도착해 보니 한명은 한쪽 옆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장사양 옆에는 장어산이 기대고 있었고 그 옆으로 단장을 곱게 한 주씨가 자리를 잡았다. 장금, 만 이낭과 미 이낭은 탁자의 다른 쪽에 앉아 있었다. 한안은 마음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자리 배치는 부중의 지위를 간접적으로 표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말없이 단정하고 예의 바르게 장사양에게 안부를 물었다.
“부친께 문안 드립니다.”
주씨가 즉각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4소저, 어서 식탁에 앉으세요. 노야께서 4소저를 매우 아끼셔서 오래 기다리셨답니다.”
한안이 게으름을 피워 어른들을 기다리게 했다고 지적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한안이 4소저의 지위를 믿고 거만을 떨며 사과할 줄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한안은 의혹의 눈길로 주씨를 보며 말했다.
“아버지께서 일찍 도착하셨네요? 이상하다. 제가 시간을 보았는데요. 급람, 시간이 틀렸는데도 나에게 알릴 줄을 몰라. 벌을 받아야겠구나!”
급람이 눈치를 채고 즉각 대답했다.
“소저께 답합니다. 시간은 틀림이 없습니다.”
한안은 안도의 숨을 내쉬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제가 너무 놀랐네요. 이제 보니 아버지께서 일찍 일어나셨군요. 제가 그렇지 못해 부끄럽습니다.”
그녀의 말은 천진하고 활발하여 아이다운 순수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늘 주 이낭은 일찍 일어나 노야를 부추겨 이전에 비해 반 시진이나 이르게 시작한다고 각 방에 연락했다. 그러면서도 한안에게는 연락을 하지 않아 모두를 기다리게 한 다음 한안이 나태하고 불효하다는 누명을 씌우려 했는데 그걸 한안이 가볍게 넘긴 것이다.
그녀는 확실히 잘못이 없었다. 시간에 맞추어 문안을 왔다. 미 이낭 등 몇 명은 매섭게 주씨를 노려보았다. 주씨가 안 주인처럼 행동하는 모양새가 확실히 가증스러웠다.
주씨의 얼굴빛이 변했다. 거기에 장사양이 어렴풋이 성가셔 하는 것이 보이자 서둘러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기왕 다 문안을 드렸으니 바로 식사를 하죠.”
식탁에 올라온 과자가 모두의 눈길을 끌어당겼다. 과자는 작은 토끼 모양으로 눈처럼 하야면서도 은은하게 푸른빛을 띠었다. 보석 같은 붉은 눈알은 설탕에 절인 매실을 끼워 넣어 매우 보기 좋았다. 모두가 흥미를 보이자 미 이낭이 말했다.
“주방장이 새로 만든 요리예요. 안에는 계화소가 들어 있답니다. 제가 어제 주방에서 맛을 보았는데, 맛이 정말 괜찮았어요.”
이 탁자에 둘러앉은 사람은 자연히 북방인이었던 터라 남방인인 주씨 모녀를 제외하면 그렇게 단 음식을 즐기지 않았다. 그 때문에 토끼 과자는 장어산 바로 앞에 놓여 있었다.
한안은 미 이낭을 흘깃 훑어보았다. 그녀의 얼굴 위로 득의만만한 기색이 보였다. 많은 사람이 보고 있는 상황이니 모략을 꾸미지는 못할 거라며 그저 자신이 생각이 너무 많겠거니 여겼다.
장어산은 몹시 좋아했다.
“토끼가 정말 귀여워요!”
그녀는 하나를 집어 장사양의 그릇에 놓았다.
“아버지 드세요.”
장사양은 기분이 좋아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는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단다. 어산이 먹거라.”
한안은 제 부친의 태도가 혐오스러워 고개를 숙였다. 이 방 네 명의 아이 중, 장사양이 인정하는 딸은 오직 장어산 하나뿐일 것이다. 막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눈같이 흰 토끼 하나가 한안의 그릇 안에 놓였다. 고개를 들어보니 주씨가 그녀에게 유난히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소저들은 모두 예쁜 과자를 좋아하죠. 4소저도 맛보세요.”
한안은 입맛이 없었다. 닭죽을 몇 모금 먹으니 더는 먹을 수 없었다. 게다가 접시 위에 방금 주씨의 침이 묻었을 거대한 토끼를 쳐다보자 더욱 구역질이 났다. 주씨 얼굴에 토끼 과자를 내던지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장금은 침묵한 채 밥과 반찬을 먹고 있는데 그녀를 위해 반찬을 집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저절로 탄식이 나왔다. 장한명이 그녀에게 눈짓을 하고 나서야 한안은 억지로 빙그레 웃었다.
입가의 곡선이 미처 그려지기도 전에 비명 소리가 들렸다. 쿵 소리와 함께 장어산이 의자 위에서 쓰러졌다.
“아파요! 배가 너무 아파!”
한안은 멍해졌다. 장사양이 장어산을 끌어안았다.
“어산아, 왜 그러느냐? 어찌 갑자기 배가 아파?”
주씨가 장어산 옆에 무릎을 꿇었다. 눈물이 바로 흘러내렸다.
“노야, 어서 의원을 청해주세요.”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장어산을 보며 통곡했다.
“불쌍한 어산아, 방금 전까지 괜찮았는데 어찌 갑자기 배가 아플 수 있어. 혹시 무언가 잘못 먹은 게 아니냐?”
장사양은 말을 듣고 멍해졌다. 눈빛이 음침하게 가라앉아 식탁 위를 한 번 훑다가 마지막으로 탁자 위의 그 하얀 토끼 과자 위에 고정되었다.
한안도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무의식중에 미 이낭을 보았다. 미 이낭의 입이 크게 벌어져 아연실색한 모습이 보였다. 꽉 비틀어 쥔 수건이 그녀의 긴장감을 짐작게 했다.
분명 어찌할 바를 모르는 표정이었다. 만약 정말 미 이낭이 한 짓이라면 저런 표정을 짓지 않을 터였다. 한안은 고개를 홱 돌려 주씨 모녀를 보았다. 장어산은 창백한 얼굴로 눈을 꽉 닫은 채 왼손으로는 은밀하게 주씨의 옷자락을 잡아 당기고 있었다. 한안은 주씨가 여전히 얼굴에 눈물 흔적이 가득한 채로 한쪽 입가가 휘어져 올라간 것을 보고야 말았다.
미 이낭이 주씨의 계략에 빠진 것이다. 미 이낭은 총명하다 여겼는데 주씨에 비해 한 수 모자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주씨는 미 이낭의 계획을 미리 알아채고 그것을 역이용했으니 이제 미 이낭이 말썽에 휘말리게 생겼다.
“가서 과자를 만든 요리사를 불러와라!”
장사양이 벌컥 화를 냈다. 한 손으로 장어산을 위로하면서 방 안의 모든 사람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장한명의 얼굴에 실망감이 떠올랐다. 한안은 마음이 아팠다. 과거에 겪은 고초 덕분에 그녀는 부친에게 애정을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한명은 결국 열한 살 아이였다. 한명의 입장에는 부친이 바로 하늘이었다. 의혹, 상심, 실망 모든 것이 한꺼번에 한명을 덮쳤을 텐데 이를 한명이 잘 받아들일 수 있을지.
요리사가 대청에 끌려 왔다. 거칠고 기골이 장대한 두 남자에게 끌려온 요리사는 장사양을 보자마자 바로 큰 소리로 외쳤다.
“노야, 억울합니다. 소인은 밥과 반찬 안에 독을 넣지 않았습니다. 소인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장사양은 사내종에게 분부했다.
“끌어내선 말할 때까지 때려라.”
요리사는 중년의 뚱뚱한 남자였다. 장사양의 말을 듣더니 얼굴이 하얘지면서 즉각 머리를 조아리고 용서해 달라고 애원했다. 머리를 숙이자 품속에서 금빛 찬란한 물건이 떨어져 나왔다. 주씨 옆에 있던 유모가 앞으로 나와 서둘러 주웠다.
“부인용 금비녀입니다.”
이 유모는 말을 마치고 주씨한테 바로 다가갔다.
“주인님, 이 비녀는 보통 여종이 쓸 수 있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오늘 연극은 각본이 잘 짜여 있구나. 고개를 돌리니 만 이낭이 비녀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것이 보였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의원이 이내 서둘러 왔다. 주씨는 서둘러 장어산을 방 안의 부드러운 침상 위에 평평하게 눕혔다. 의원이 진맥을 하자 장사양이 서둘러 물었다.
“어산이는 어떠냐?”
중년 남자의 눈빛이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는 가슴 높이에서 두 손을 맞잡고 인사하며 말했다.
“대인 놀라지 마십시오. 소저께서는 중독되신 것입니다. 이 독은 복통을 끊임없이 일으키는데 다행히 소저께서 복용한 양이 적습니다. 약 처방을 써드리겠으니 약 두 첩만 지어다 복용하시고 며칠 쉬시면 바로 회복되실 것입니다.”
장사양은 사람을 시켜 재빨리 약을 지어오게 했다. 그리고 의원에게 탁자 위의 토끼 과자를 살펴보게 했다. 이런 일들은 의원에게 예사로운 일이라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잠깐 망설이다가 과자를 쪼개어 냄새를 맡더니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이 과자 안에 독을 넣은 것 같습니다.”
장사양은 사람을 시켜 의원에게 은자를 지불하게 하고 바로 그를 내보냈다. 의원은 떠날 즈음 주씨와 눈빛을 교환했다.
의원을 보낸 후, 장사양은 대청으로 돌아왔다. 곤장을 맞은 요리사를 끌어 올려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누가 네게 과자 안에 독을 넣으라 시켰느냐?”
요리사도 비록 하인이지만, 평소에는 존경을 받으며 잘 먹고 잘 지내니 언제 이런 큰 고초를 겪은 적이 있었겠는가. 스무 대 곤장에 요리사는 이미 사경에 이를 지경이었다. 그는 입가에 피를 흘리며 말했다.
“노야, 소인은 억울합니다. 소인은 독을 넣지 않았습니다.”
주씨가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나와 증오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독을 넣지 않았다고? 그렇다면 그 의원이 어째서 과자에 문제가 있다고 말했을까? 더구나 너의 품속에서 금비녀가 나온 것은 말할 것도 없지. 매수한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너 같은 일개 하인이 어떻게 그런 금비녀를 얻을 수 있었겠느냐?”
장사양이 요리사를 노려보았다.
“말해라. 그 비녀는 누가 네게 주었느냐?”
요리사는 크게 억울함을 호소했다.
“노야, 소인은 정말 모릅니다. 만 이낭 하녀 행아가 노비에게 금비녀를 주면서 소인이 고생한다고 상을 주는 것이라 말하였습니다.”
이 유모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비녀는 몇십 냥 은자의 가치가 있다. 너 같은 하인에게 상으로 주기에는 지나치게 비싸단 말이다. 만 이낭 탓으로 돌리지 마라!”
한안은 줄곧 한옆에 서서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고 있었다. 장금은 필사적으로 입술을 꽉 깨물고 있으며 만 이낭의 얼굴빛은 창백하여 거의 까무러치기 직전이었다.
장사양이 만 이낭을 향해 냉랭하게 말했다.
“이 비녀가 정녕 너의 것이냐?”
“노야께 답합니다. 소첩의 것이 맞습니다.”
만 이낭이 어렵사리 대답했다.
주씨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녀는 부용원 사람을 이미 매수했고 미 이낭이 일을 꾸민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예 상대의 술수를 역이용하자 하여 자기 발을 찍는 고육지책을 쓴 것이다. 그런데 이 비녀가 어떻게 만 이낭의 것이 되었을까?
그녀는 조급해졌다. 만 이낭의 성격은 무르니 기다렸다가 나중에 천천히 처리해도 늦지 않다. 당장은 미 이낭이 먼저였다. 그녀는 입을 열어 장사양을 설득했다.
“노야, 소첩이 보기에 만 언니는 심성이 자애롭습니다. 어산에게도 잘 대해주었어요. 아마 무슨 오해가 있는 듯합니다. 남의 계략이 말려 이용당하지는 말아야지요.”
한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미 이낭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썹과 눈은 긴장이 풀려 있었다. 이미 알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너의 비녀가 어찌하여 하인의 몸에서 나온 것이냐?”
장사양은 순박한 여인을 바라보면서도 노여움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비녀는 며칠 전에 소첩이 잃어버린 것입니다.”
만 이낭의 두 눈은 눈물로 젖어 있었고, 표정은 거짓 같지가 않았다.
“행아를 데려 와라!”
장사양이 차가운 얼굴로 하인에게 분부했다.
행아는 만 이낭 측근의 여종이었다. 끌려 왔을 때부터 얼굴에 핏기가 없었다. 줄곧 이를 악물고 굳게 억울함을 주장하던 요리사가 돌연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저년입니다! 그날 저년이 소인이 식사를 만드느라 애쓰는 것을 살뜰히 보살피시어 부인이 이 비녀를 상으로 내리신다고 말하였습니다. 소인은 너무 기뻤습니다. 바로……, 바로 비녀의 가격을 알아보고 싶어 부엌을 떠났을 때 부엌에 저년이 홀로 있었습니다! 분명 저년이 과자 안에 독을 넣은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 내막을 몰라 말할 수 없노라고 비할 데 없이 가련하게 굴더니 요리사가 돌연 자백을 했다.
장사양이 대노했다.
“네가 말한 것이 진짜더냐?”
요리사가 피를 한 모금 토해내고서 말했다.
“제가 감히 노야를 기만하겠습니까.”
탕.
장사양이 화를 내며 찻잔을 깨뜨렸다. 그리고 만 이낭을 보며 말했다.
“할 말 없느냐?”
만 이낭의 눈 속에 절망이 스쳤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땅 위에 엎드린 요리사를 바라보고 장사양을 바라보고는 눈을 콱 감았다.
그때 콰당 소리가 들리며 장금이 땅에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어머니는 아닙니다! 만약 어머니가 정말로 독을 넣을 마음이 있었다면 구태여 금비녀를 남겨 남의 오해를 일으킬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물며 어머니는 지금까지 누구와도 다툰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
작은 얼굴 위에 눈물 흔적이 가득했다. 그녀의 눈 속에 원한이 가득했다.
한안은 마음속으로 탄식했다. 만 이낭은 두 이낭의 이용 도구가 된 것이다. 미 이낭이 한 수를 남겨 화근을 만 이낭에게로 향하게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가장 무고한 사람이 벌을 받게 되었다.
장사양은 장금의 말에 일리가 있음을 알았다. 그는 자기 부중 사람의 품행을 그래도 분명히 아는 편이었다. 만 이낭은 총애를 받지 못하지만 여러 해 줄곧 분수를 지켰고 과오를 저지른 적이 없었다. 만 이낭이 독을 넣어 어산을 해치고 싶어 했다고 말한다 해도 절대 믿지 않을 것이었다. 다만 장금이 가주로서의 장사양의 권한에 의문을 제기한 점이 매우 불쾌했다.
“천첩에 불과할 뿐, 자기가 무슨 대단한 인물이나 되는 줄 아느냐!”
장금의 몸이 떨렸다. 굳게 두 입술을 꽉 다물고 똑바르게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이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한안은 괴로웠다. 동병상련의 감정이 저절로 일어났다. 장한명은 국자감에 나가야 한다는 이유로 떠난 후였다. 한명이 이렇게 너저분하고 난장판인 꼴을 안 보게 되어 다행이었다.
장사양은 깊이 생각했다. 오늘 일은 수상쩍은 구석이 많았다. 아마도 이번 일은 만 이낭이 아닌 다른 사람의 짓일 것이다. 이 부중에서 한안 남매는 너무 어리고 만 이낭은 성격이 온화하다. 유일하게 사달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것은 바로 미 이낭이었다. 그는 비록 화가 났지만 미 이낭에게 성을 내지는 못했다. 오랫동안 총애했던 첩이었고 미 이낭으로 부중 세력의 균형을 유지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주씨 홀로 큰 세력을 갖추게 해서는 안 된다.
장사양이 생각에 잠긴 사이, 모든 사람이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줄곧 땅에 엎드려 침묵하며 아무 소리도 내지 않던 행아가 돌연 큰 소리로 말했다.
“노야, 이 일은 만 이낭과 무관합니다. 제가 주 이낭이 총애를 독차지하는 것이 눈에 거슬려 스스로 독약을 구해 모해 했습니다. 그 비녀는 요리사를 따돌리기 위해 노비가 훔친 것입니다!”
주씨는 멍해졌다.
“거짓말!”
그녀의 말은 확실히 좀 성급했다. 모든 사람이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당황해하며 여종의 쓸데없는 참견에 분노했다. 주씨는 행아의 머리를 쳐서 그녀를 때려눕혔다.
“너 이 악독한 년! 감히 이런 대역무도한 짓을 할 줄이야! 여봐라, 곤장 스무 대를 치고 청루에 팔아버려라!”
청루에 팔리고 나면 한평생이 온전히 망가지는 것과 다름없었다. 주씨의 악랄한 수단에 순간 분노가 일었다.
만 이낭이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대청 가운데 작고 야윈 여종이 구리 기둥을 향해 돌진했다. 그녀의 동작이 너무도 빨라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렸을 때는 이미 피 웅덩이 속의 인영만이 남았다.
“행아!”
만 이낭이 처참하게 소리치며 옆의 사람을 뿌리치고 비틀거리며 달려갔다. 행아는 그녀와 함께 노부인을 측근에서 모시던 몸종이었다. 두 사람의 정은 자매와 같았다. 나중에 노부인이 그녀를 노야에게 주었고 행아는 그녀의 측근 몸종이 되었다. 만 이낭의 몸종으로서 행아는 하루도 편한 날을 보낸 적이 없었다.
“주인님.”
행아가 간신히 눈을 떴다. 이마 위의 피가 얼굴에 흘러 무서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녀는 도리어 희미하게 웃었다.
“이 부중에서 오직 주인님만이 행아에게 잘 대해주셨어요. 행아는 보답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오직 이 목숨밖에는요.”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한 가지 일만 부탁드려요. 저 대신에 늙은 부모님을 돌봐주세요…….”
만 이낭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목이 메어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내가 약속할게.”
행아의 얼굴 위에 마침내 안심했다는 웃음이 드러났다.
“만아, 내생에 다시 자매가 되자. 절대 부귀한 집에서 태어나지는 말고.”
만아는 만 이낭의 여종일 때 이름이었다. 만 이낭의 눈물 젖은 눈이 몽롱했다. 봄꽃이 활짝 핀 그 해, 두 천진한 소녀가 뜰 가운데에서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우고 농담을 하던 것이 보이는 듯했다. 그녀들은 자기들이 근사한 일생을 살 거라 여겼는데 운명은 그녀들을 농락했다. 한 명은 구리기둥에 머리를 박아 참혹하게 횡사하고 또 한 명은 차가운 대저택 안, 앞이 보이지 않는 암담함 속에 남아 있었다.
만 이낭은 행아의 시체를 바닥에 반듯하게 놓고, 좌중의 사람들을 향해 처연한 웃음을 드러냈다.
아마 대청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은 행아가 자진할 줄은 짐작도 못했을 것이다. 관망하는 태도를 보이던 한안도 진정으로 분노했다. 행아의 피가 온통 땅에 흘렀고 미 이낭의 입술이 떨리기 시작했다. 주씨만이 달갑지 않다는 모습으로 무언가 더 말하려는 듯했다.
장금이 만 이낭 곁으로 몇 걸음 다가가다 돌연 몸이 기울더니 풀썩 쓰러졌다. 순간 또 어수선해졌다. 유모가 서둘러 말했다.
“노야, 소저들께서 피를 보고 놀라실 수 있습니다.”
장사양은 그제야 대청 안에 두 명의 딸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손을 흔들어 하인들에게 그녀들을 방으로 데려가라 분부했다.
한안은 떠나기 전에 만 이낭을 돌아보았다. 슬프고 괴롭기 이를 데 없는 모습에 동정심이 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유모는 한안을 처소로 데리고 간 뒤, 한안의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게 하려고 주방에 생강탕을 끓이도록 분부했다. 그리고 한안을 방 안으로 끌어다 앉히고 문과 창을 잘 닫았다.
한안은 방금 전 일을 돌이켜 생각해 보며 오늘 일에 불합리한 것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느꼈다. 주씨는 분명 미 이낭의 계략을 알고 있었고 장어산은 중독된 척했다. 의원은 아마도 미리 내통한 것일 게다. 다만 미 이낭이 어디서 만 이낭의 비녀를 손에 넣어 남에게 누명을 씌웠는지는 알 수 없었다. 행아는 주인을 보호하기 위하여 헛되이 목숨을 잃었다.
행아를 떠올리자 눈앞에 과거 그녀의 하녀란 이유로 죽었던 급람과 주홍이 떠올랐다. 한안은 무의식중에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전신이 떨리기 시작했다.
주홍은 한안이 줄곧 말이 없는 것이 걱정스러웠다. 게다가 갑자기 놀라고 두려워하는 태도를 드러내자 서둘러 앞으로 나가 한안의 두 손을 움켜쥐었다.
“소저, 어디 불편하신 데가 있으신가요?”
한안은 그제야 악몽에서 돌아와 정신을 차렸다. 주홍의 따뜻한 눈을 보니 한순간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사이 유모는 주방을 살펴보러 갔다. 방금 전 그 일을 겪고는 소저의 음식을 다른 사람의 손에 맡겨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이 확고히 굳어진 것이다. 난로를 피우던 급람도 서둘러 가까이 와서 위로했다.
“분명 방금 전 일로 놀라신 거예요. 소저, 두려워 마세요. 저희들이 여기 있어요.”
한안은 두 사람 사이에서 마음을 천천히 가라앉혔다.
“조금 있다가 나가서 알아보거라. 바깥의 일이 도대체 어떻게 처리되는지.”
급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비가 살펴보겠습니다.”
한안은 몸을 뒤로 젖히고 길게 탄식했다.
“애석하게도 행아만 저세상으로 떠났구나.”
급람과 주홍은 한 번 시선을 마주하고 나란히 타이르듯 말했다.
“소저, 근심하지 마세요. 저마다 각자의 명이 있는 법이에요. 어쩌면 행아는 염라왕이 잘 거두워 다음 생에는 부귀한 집안에서 태어날지도 몰라요.”
한안은 그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야말로 죽어서 다시 과거로 돌아와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았다. 다음 생에 희망을 거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표정이 누그러진 한안은 가벼운 소리로 말했다.
“만약 오늘 그 혐의를 받은 것이 나였다면…….”
“소저 그런 말씀 마세요.”
주홍이 놀라 펄쩍 뛰었다. 신중한 얼굴 위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저희들이 이런 일이 일어나게 둘 리 없습니다. 소저께서는 근심하지 마세요.”
한안은 고개를 저었다.
“만일 오늘 혐의를 받은 그 사람이 나였다면, 너희들은 내가 내 자신을 보호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결코 행아의 행동을 흉내 내서는 안 돼. 비록 충심으로 주인을 보호했지만, 목숨과 맞바꾸었지. 만약 너네가 그렇게 한다고 하면 너네의 행동이 나를 편하게 지내지 못하게 만드는 것임을 알아야 해.”
“그런 불길한 말씀 마셔요. 소저께는 변고가 생길 리 없어요. 저희들이 소저를 모실 거예요. 부인께서 이전에 말씀하신 적이 있으세요. 나중에 소저께서 출가하실 때도 모셔야 한다고요.”
급람이 서둘러 말했다.
한안은 피식 웃고는 그녀에게 눈을 흘겼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것. 시집도 안 간 처녀가 출가를 입에 올리다니. 사람들이 비웃을까 겁나지도 않는 모양이지.”
주홍은 한안의 활짝 갠 얼굴을 보고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안의 방금 전 표정은 그녀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유모는 이후의 소식을 알아보았다. 장사양은 행아의 말에 따라 모든 잘못을 노비에게 덮어씌웠고 만 이낭은 하인을 잘 단속하고 가르치지 못했다며 장금을 데리고 부 안의 불당으로 가 49일 간 독경하고 복을 기원하겠다고 자원했다.
나중에서야 그 요리사는 미 이낭이 뽑아서 부에 들인 사람이라는 것이 폭로되었고 장사양은 미 이낭이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고 책망하며 출입을 금지시켰다. 주씨 모녀만이 잘 먹고 잘 지냈다. 진귀한 보양식과 약재가 연이어 끊임없이 공동원에 보내졌다. 한안은 여전히 홀대를 당했다.
유모가 말을 옮기며 가증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주씨 모녀가 아픈 척 한 건지 누가 알겠어요? 이 김에 기세를 잡았네요. 정말 비열한 것들이에요. 어쨌든 소저야말로 부중의 정당한 적녀시죠.”
한안은 그저 웃어넘겼다.
“행아의 일은 어떻게 되었는가?”
행아는 이 집에서 태어난 게 아니었다. 그래서 행아의 늙은 부모는 촌락에서 남에게 바느질을 해주며 생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주씨는 젊은 사내종을 시켜 행아의 시체를 연고 없는 시신 매립지에 던지도록 했지만 한안은 사람을 시켜 관을 구해 매장토록 하고 그녀의 늙은 부모에게 은자 꾸러미를 보내 행아가 주는 것이라고 말하게 했다.
유모가 소저를 보고 말했다.
“소저도 너무 마음이 약하세요. 어쨌든 여종 하나에 불과한데 말이에요. 만약 노야께서 아시면…….”
“유모.”
한안은 진지하게 그녀를 보았다.
“행아를 위해 한 게 아니야. 만 이낭을 위해 한 거지.”
이 사건은 그녀가 만 이낭에게 빚진 것이 맞았다.
만약 그녀가 미 이낭을 부추기지 않았다면 미 이낭이 독을 넣겠다는 생각을 떠올렸을 리 없고 주씨가 계교를 역이용했을 리도 없었으며 행아의 무고하고 비참한 죽음도 없었을 것이다. 한안은 울적했다. 자신이 보호하고 싶은 사람을 위하여 무고한 한 생명을 해친 게 아닌가?
유모는 한숨을 내쉬었다.
“만 이낭도 불운한 사람이죠. 모두 주씨 때문입니다.”
유모는 분개하기 시작했다.
“시첩에 불과하면서 병을 핑계로 소저를 보러 오지도 않다니요. 이처럼 냉대하는 작태는 확실히 가증스럽습니다!”
한안은 그런 행동쯤은 그다지 마음에 두지도 않았다.
“마음 놓게. 그녀가 냉대하고 싶다 해도 아마 곧 비위를 맞추려 할 게야.”
유모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한안을 보았다. 한안은 아랑곳없이 책을 보기 시작했다.
만 이낭은 불당에서 갇혀 있고 미 이낭은 외출 금지이니 삼 일 후의 궁중 야연에는 주씨가 갈 수밖에 없지 않나?
행아의 죽음이 의외이긴 하나 결국 주씨의 뜻대로 다 갖추어져 미 이낭은 총애를 다툴 방법이 없었다. 주씨 같은 야심가가 야연에서 이목을 끌 이 기회를 어찌 놓칠 수 있으랴?
주씨는 바로 그 야연을 위해 반드시 한안의 비위를 맞추려 할 것이다. 그녀의 입에서 궁중의 소식을 조금이라도 이끌어내기를 기대하면서. 귀부인들 사이의 인맥이야말로 주씨 모녀가 갈망하는 화제이니 어떤 태도가 격에 맞는지 행동거지는 어떻게 해야 예의에 맞는지 그녀들은 간절히 알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왜 자신이 순종적으로 대답해줘야 하지?
주씨는 주제넘게 나서서 크게 이목을 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크게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3장
삼 일 후 이른 새벽.
하늘이 막 밝을 무렵, 유모는 한안을 깨웠다.
아직 날이 이른 것을 보고 한안은 미련이 남아 따뜻한 이불 속에서 꾸물거리며 웅얼거렸다
“잠깐만 더 자게 해줘. 문안드리기는 아직 일러…….”
유모가 급히 말했다.
“우리 착한 소저, 오늘 궁중 연회가 있다는 걸 잊으셨어요? 잘 준비하셔야 합니다.”
‘궁중 연회’라는 말에 한안은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그러나 눈을 비비고 이불 속에 웅크리며 투덜거렸다.
“잘 준비할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러나 유모는 끝까지 귀찮게 굴었다.
“소저, 그런 말씀 마세요. 궁중 연회는 중요하니까요. 경성 안 소저들이 모두 나가실 거예요. 소저는 반드시 좋은 명성을 남겨야 해요.”
궁중의 인맥은 확실히 그녀에게 부족한 부분이라 한안은 자신이 소홀히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이해했다. 비록 내키지는 않지만 꾸물거리는 모습으로 침상에서 기어 나왔다.
급람과 주홍은 벌써 난로를 피워 놓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오는 것을 보고 세수와 양치 시중을 든 후 바로 그녀의 손에 난로를 들려주었다. 한안은 화장 거울 앞에 앉아 졸았고 급람은 뒤에서 난처해했다.
“소저, 오늘은 어떤 머리모양을 할까요?”
“평소에 빗던 대로 빗어.”
급람이 바로 조급히 말했다.
“그게 어떻게 그래요. 궁중 연회는 소홀히 할 수 없어요. 소저, 선녀 머리를 하시는 건 어떠세요?”
한안은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나는 노래하고 춤추러 가는 게 아니야. 그렇게 정교한 머리 모양을 해서 뭐 하게? 이번 궁중 연회는 서북쪽의 대승을 경축하기 위한 거야. 내가 주제넘게 이목을 끌면 도리어 사람들이 싫어할걸.”
“하지만 소저, 주씨 모녀는 어제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다녔어요. 듣자 하니 여의루에 가서 의복과 머리 장신구를 모두 주문 제작했다 해요. 그런데 소저께서 평소처럼 단장하면 소저께서 그녀들에게 뒤처지는 게 아니겠어요?”
급람이 승복하지 않고 대꾸하자 한안이 웃으며 말했다.
“그녀들이 공들여 단장할수록 우리는 평범하고 격식에 맞게 해야 해. 그녀들은 부중에서 자기가 지위가 있음을 증명하고 싶은 거야. 사람들에게 장가의 시첩과 서녀가 적녀보다 더 화려하다는 것을 알리고 싶은 거지. 하지만 누군가 그걸 꼬집어 말해 주는 사람이 있을 거야.”
“소저, 정말 총명하시네요. 노비가 어리석었어요.”
“궁중 연회는 명문 소저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평범한 거야. 평소에 귀족 인맥을 겪어본 적이 없는 사람만이 이처럼 중시하며 좋아하는 거지.”
주홍이 돌연 입을 열었다.
한안은 평소 침묵하는 주홍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생각지도 못해 의아해하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