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녀‚ 환생 1권
목차
1장
2장
3장
4장
5장
6장
1장
박달나무 탁자 위의 청동 두루미 입에서 향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붉은 초가 혼인을 축하하기 위해 드리워둔 창문의 휘장을 불그스름하게 비추며 흔들렸다. 휘장에 화려한 금사로 수 놓인 원앙 모습을 보아하니 분명 대단히 부귀한 가문임이 틀림없었다.
붉은 초는 뜨겁게 타오르며 방 안을 환히 밝혔다.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침상에 앉아 있었다. 금빛 도는 붉은색 너울이 머리를 가리고 있었다. 여자는 옥같이 섬세한 손을 꽉 쥐고는 가볍게 입을 열었다.
“급람, 지금 몇 시지?”
물빛 짧은 적삼을 입은 여종이 웃으며 앞으로 나왔다.
“술시(저녁 7시-9시)예요. 조급해하지 마세요. 세자 전하께서 분명 곧 당도하실 거예요.”
여종은 말을 마치고 입을 가리며 웃었다.
“못된 것, 소저께서 네가 놀릴 수 있는 분이야? 정말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복숭앗빛 짧은 저고리를 입은 또 다른 여종이 새초롬한 얼굴로 나무랐다. 그러나 그녀의 눈 속에도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말을 삼가거라.”
유모가 문 바깥을 살피며 말했다.
“왕부에 들어가면, 일을 할 때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돼. 입을 잘못 놀려 소저를 연루시켜서는 안 될 것이야. 아니지, 이제는 마땅히 세자비 전하라 불러야지.”
“유모도 참.”
장한안은 여종들의 놀림에 부끄러워 유모를 만류하면서도 조금 전 보았던 세자의 영준한 뒷모습이 떠올라 고운 얼굴에 꽃을 피우듯 붉은 홍조를 떠올렸다.
위친왕 세자 위여풍.
그를 떠올릴 때면 마음속에 달콤함이 가득해졌다. 그녀가 처음 그를 만난 건 용비의 연회에서였다. 평소 장한안은 문밖출입이 거의 없었는데 때마침 참석한 연회에서 장어산이 남자 손님 중 한 명을 가리키며 알려준 것이 바로 위여풍이었다.
“저 사람이 위친왕이야.”
위친왕 위여풍은 눈처럼 흰 옷을 입고 있었다. 단출한 옷차림이었음에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귀함과 위엄을 보였다. 그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주변을 돌아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장한안은 그때 그 미소를 잊을 수 없었다.
그날 이후 장어산은 그녀에게 위여풍의 소식을 종종 가져다주었다. 장어산은 같은 부에 있는 딸로 성격이 좋아 자주 외부의 부인들이나 소저들과 함께 어울리곤 했다. 그때면 많든 적든 경성 안에 있는 뛰어난 준걸들의 소식을 한안에게 가져다 주었다. 덕분에 한안은 위친왕 일가가 선황을 따르며 나라의 기초를 다져 혁혁한 공훈을 세우고 두 왕조를 거쳐 원로를 배출했음을 알게 되었고 위친왕 세자 위여풍은 어린 나이에도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성격도 모나지 않고 세심하다는 점도 알 수 있었다.
한안이 성년이 되던 해, 계모인 주씨가 뜻밖에도 그녀를 위해 좋은 혼처를 찾아왔다. 상대는 바로 위친왕 일가였다. 장씨 세가는 조부 세대부터 무를 버리고 문을 따르기 시작했고, 여전히 조정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혼사가 진행되기만 한다면 조정에서의 입지도 넓어질 터였다. 한안은 조정일에 대해선 잘 몰랐지만 상대가 위여풍이라는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좋아 눈에 띄게 기뻐했다.
“어산이가 먼저 위가가 좋은 혼처라 알려주었단다. 시집도 안 간 소저가 어찌 이렇게 부끄러운 줄 모르고 좋아할까?”
말은 비록 이렇게 했지만 주씨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리고 장어산이 옆에서 거들었다.
“저는 동생이 좋은 지아비를 얻어 시집갔으면 했던 것뿐인걸요?”
장한안은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지만 마음속은 훈훈했다. 마침내 기다리던 이 날이 왔다. 지아비가 바로 눈앞에 있고 좋은 시절이 눈앞에 펼쳐질 터였다. 친어머니께서 살아 계셨다면 분명 기뻐하셨겠지.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을까. 삐걱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한안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너울 아래로 보이는 것은 기다리고 있던 새신랑의 비단 장화가 아니라 정교하게 수가 놓인 여인의 꽃신이었다. 그녀는 순간 당황했다.
“2소저가 어쩐 일이세요?”
급람의 의아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2소저? 장어산?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두려움이 그녀를 휘감으며 전날 밤에 꾼 악몽이 떠올랐다. 꿈속에서 위여풍과 혼인하는 여자는 자매인 어산이었다. 한안이 미친 듯이 달려갔지만 어산은 냉담하면서도 비웃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잠에서 깬 후 한안은 억지로 자신을 진정시켰다. 너무나 황당무계한 꿈이었으니까.
“넷째 동생.”
여자의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상시 활발했던 목소리와 다르게 차가운 기운을 한껏 담고 있는 목소리였다.
“세자 전하께서 나를 시켜 술을 보내셨단다.”
한안은 더는 참지 못하고 너울을 들쳐 올렸다. 급람과 주홍의 경악한 외침은 신경 쓸 여력도 없이 멍하니 눈앞의 사람을 응시했다.
장어산은 봉황 장식이 수놓인 화려한 예복 차림에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짙은 붉은색 혼례복은 장한안의 것보다 더 정교해 보였다. 그녀는 정숙하고 아름다워 보였으며 입가에는 살풋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한안도 장어산이 아름답다는 것은 일찍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장어산은 장한안 앞에서 줄곧 소박한 차림이었다. 그랬던 그녀가 생각지도 못한 화려한 색채의 옷을 입으니 사람이 달라진 것 같았다. 더구나 그녀의 미간에 어린 표정은 생소하기까지 했다.
장어산은 그녀를 응시하며 가볍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골짜기에서 나온 꾀꼬리처럼 간드러져 듣기 좋았다.
“내가 이 혼례복을 입으니까 어때? 예뻐 보여?”
장한안은 입술을 달싹였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산은 또 입을 가리고 생긋 웃었다.
“나 좀 봐. 할 일을 잊어버렸네.”
장어산은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렸다. 어산 뒤에 따라온 두 여종이 즉시 백옥 쟁반을 바쳐 올렸다. 쟁반 중앙에 작은 주전자와 두 개의 작은 술잔이 놓여 있었다.
“이건 뭐예요?”
“세자 전하께서 내리신 술.”
어산은 술주전자를 집어 술을 한잔 따라 그녀에게 주었다.
“빨리 마시렴. 나와 세자 전하가 화촉을 밝혀야 하는데 지체되었으니 벌을 받아야지.”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한안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주홍과 급람이 그녀를 부축하려 했으나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 우람한 여종 몇 명이 들어서서는 그녀들을 바닥에 짓누르고 있었다.
여종 하나가 한안의 팔을 비틀자 그녀의 작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언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물을 얻기란 쉽지만 사랑하는 낭군을 얻기는 어렵지. 동생, 이 시 구절 기억해?”
어산은 여유롭게 술잔을 손에 들고 감상했다.“그때 연꽃을 감상했던 연회에서 세자 전하가 내가 쓴 이 시 구절을 칭찬하셨지.”
그건 내가 지은 시잖아.
한안은 입을 열어 소리치고 싶었지만 몸 뒤의 여종이 이미 입을 막은 상태였다.
“내가 잊고 있었네. 그때 그 자리에 없었지. 평소 동생은 부 안에서 수를 놓고 글씨 쓰는 것을 좋아했으니 당연히 이 일을 모르겠지.”
어산은 계속해서 말했다.
“세자 전하께서 어여삐 여기시는 것은 이 몸이야. 내 신분이 서녀이기에 세자비가 될 수 없었던 것뿐이지. 동생은 아마 모를 거야. 내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를 말이야. 혼인을 올리는 밤, 내 동생 한안은 중병을 앓다가 낫지 못했고 언니인 내가 희생해서 대신 시집가는 거지. 이것 참, 얼마나 눈물겨운 이야기야. 그렇지?”
어산은 사람이 변한 것 같았다. 저 사람은 한안이 알지 못하는 낯선 사람이었다. 미색이 눈부시게 사람들을 압도했지만 평소의 천진난만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한안은 입이 막혀 말을 할 수가 없었지만 마음속은 거칠고 사나운 파도가 일었다. 어산은 미쳤다. 부친이 알면 어떻게 할까. 세자가 알면 어떻게 할까. 세상 사람들이 모두 위친왕부로 장한안이 시집가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장어산으로 변할 수 있단 말이지?
“동생, 세자 전하를 걱정할 필요는 없어. 신혼 밤에 피를 보는 것은 불길하지만 이 몸이 이미 다른 신방을 준비해 뒀거든. 세자 전하께서는 동생이 열두 살이던 그해, 도적에게 납치되어 순결을 잃은 것을 알고 계시니까 신경 쓰실 리 없지. 전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몸이 기쁘기만 하면 좋다고 하셨어.”
한안은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열두 살! 그해의 악몽이 또다시 눈앞에 떠올랐다. 게다가 그때의 일이 그에게 알려졌다니…….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는 분명 자신을 순결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며 지극히 혐오할 것이다. 한안의 눈꼬리를 타고 맑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장어산은 그녀가 절망하고 낭패한 모습을 즐겁게 지켜보며 한층 더 유쾌하게 웃었다.
“부친도 걱정할 필요 없어. 부친은 차라리 딸 하나를 잃을지언정 이 혼사를 놓치고 싶어 하실 리 없거든. 더구나 부친은 줄곧 널 좋아하지 않으셨지.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내 모친이 왕 씨를 없애버리도록 내버려 두실 수 있겠어?”
어머니! 내 어머니가 살해되신 거라고?
장어산은 사악한 목소리로 깔깔 웃었다.
“동생은 아직 모르는 모양이네. 하지만 탓할 것도 없지. 장한안은 지금까지 그저 집 안에서 수나 놓고 거문고나 튕기며 일 년 내내 두문불출한걸. 다른 집 부인들은 우리 집안에 이런 사람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지.”
그녀는 술잔을 들고 가까이 다가왔다.
“얼굴조차 분명히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대혼의 밤에 죽은들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한안은 창백한 얼굴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녀의 행복 가득하다 여겼던 일생이 사실은 누군가의 거대한 음모였다니.
옆에서 유모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귀를 뚫고 들어왔다. 한안은 그제야 장어산이 들어온 후부터 유모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설마?
그녀의 마음속에 한기가 몰아쳤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장어산을 노려보았다. 장어산은 한안의 여종인 급람과 주홍의 곁으로 걸어갔다.
“내가 이 두 여종의 충심을 떠봤는데,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어. 오늘 밤에 경비 서는 호위들은 참 좋을 거야. 그들에게 이 아이들을 상으로 줄 테니 말이야.”
그녀는 음산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일 아침 일찍이면 너희 주인과 종들이 서로 저세상에서 만날 수 있을 거야.”
급람과 주홍은 한안의 친어머니가 남겨준 여종이었다. 어려서부터 그녀와 함께 정을 나눈 자매와도 같았다. 그들이 나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되다니.
장어산은 이내 몸을 쪼그리고 앉아 한안의 아래턱을 잡고 그녀의 목구멍에 잔인하게 술을 쏟아부었다. 치명적인 독주. 한안의 목구멍으로 달콤한 독주가 흘러 들어가자 입가에 선혈이 줄줄 흘러내렸다.
내 잘못이야! 사람을 잘못 보고 원수를 은인으로 여기다니! 계모와 장어산을 진심으로 대하다니 내가 순진하고 멍청했어! 만약 내가 세상사에 무관심하지 않았더라면! 만약 내가 위여풍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 모든 것은 지금과 다르지 않을까?
그럴 리 없어. 이 세상에서 가장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사람 마음이라고 설령 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해도 주씨 모녀가 날 가만두었을 리 없지.
한안은 바닥에 쓰러졌다. 가을날 청명한 하늘처럼 맑은 눈동자에는 피눈물이 가득했다.
장어산, 내 귀신이 되어서라도 너를 가만두지 않겠어.
봉황 장식이 수 놓인 화려한 예복을 입은 아리따운 신부는 미소를 지으며 악랄하게 한 마디를 뱉었다.
“착한 동생, 황천길에 도착하면 언니가 어떻게 세자비가 되는지 잘 봐주렴.”
눈앞의 모든 것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가슴속부터 뼛속까지 시렸다. 의식이 점점 사라질 즈음 한안은 제가 기다리던 사내가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그녀의 부군이었다.
*
푹신하고 부드러운 모피가 깔린 큰 침상, 비 갠 후 그윽하게 깔린 안개처럼 얇고 성긴 명주 휘장이 있는 듯 없는 듯 드리워져 있었다. 침상 가운데 깊이 잠든 소녀는 손가락을 살짝 움직이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한안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찢어질 듯한 두통을 느꼈다. 두 눈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뻑뻑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장어산이 준 독주를 먹고 이미 황천으로 향했어야 할 터인데 어떻게 침상에서 깨어날 수 있는 거지?
힘들게 몸을 일으켜 살펴보니 방 안에는 짙은 약 향기가 가득했다. 여기는 분명 자신의 규방이었다. 그런데 어쩌면 이리도 낯설어 보이는 걸까. 마치 그녀를 세상과 격리시켜 놓은 것처럼 낯설었다. 손을 뻗어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4소저.”
놀라고도 기쁜 듯한 외침 소리에 한안은 눈을 들었다. 유모가 금박 무늬를 넣은 사기그릇을 받쳐 들고 있었다. 유모는 몸을 낮추어 그릇을 옆의 작은 탁자 위에 놓고, 서둘러 앞으로 걸어와서 물었다.
“소저 깨셨군요. 어디 불편한 데 있으세요?”
한안은 멍하니 그녀를 보았다. 장어산이 유모를 처리한 게 아니었나? 대혼 날 밤의 그 장면이 눈앞에 떠오르자 코가 시큰하고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유모는 한안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한안을 품 안에 바짝 끌어안았다.
“우리 가여운 소저, 부인께서 세상을 떠나시자마자 노야께서 그 천한 것들을 문 안에 들이셨으니 소저께서도 마음이 괜찮지 않으시겠지요. 어쩌면 부인께서도 화를 내시다가 병까지 얻으셨는지 몰라요.”
“소저께 무슨 일 있는 걸까요?”
낭랑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울렸다. 한안은 퍼뜩 몸을 똑바로 했다. 급람과 주홍이 간식이 든 단지를 들고 걱정스레 두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소저 어디 불편하세요? 다시 가서 의원을 청해 올까요?”
그녀를 위해 죽은 여종들이 멀쩡하게 눈앞에 서 있었다. 한안은 지금의 기분을 말로 이루어 표현하기 어려웠다.
“급람, 주홍…….”
한안은 울먹이며 그들의 이름을 입안에서 되뇌었다. 한안은 아예 유모의 품속에 파묻혀 통곡하기 시작했다.
급람과 주홍은 깜짝 놀랐다. 그들이 모시는 소저가 왜 이러는 것인지 알 수 없어 유모를 바라보았다. 유모는 한안의 친모가 세상을 떠나고 부친이 따로 처를 얻어서 비통해 하는 것이라 여겨 그녀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위로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다. 한안은 점점 평정을 되찾았지만 마음속의 의혹이 갈수록 깊어졌다. 유모의 나이가 원래도 적진 않았지만 양쪽 귀밑머리의 백발이 많이 줄어들어 있었다. 급람과 주홍도 그녀가 마지막으로 봤던 모습과는 조금은 달라 보였다.
“급람, 내게 거울을 가져다주련?”
급람은 화장대 위의 구리거울을 가져다가 주었다. 한안은 거울 속을 살펴보았다. 창백하고 비쩍 마른 작은 얼굴, 새까맣고 또렷한 커다란 눈, 옥 같은 코와 앵두 같은 입술, 흑단처럼 검고 긴 머리카락이 비단결처럼 흘러내렸다. 거울 속의 사람은 청순하고 아름다우며 부드러웠고, 앳된 기색이 어려 있었다. 그녀면서도 그녀가 알던 본인이 아니었다.
손안의 구리거울이 쨍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 위로 떨어졌다. 주홍이 깜짝 놀라 서둘러 앞으로 나왔다.
“소저!”
한안은 잠깐 멍해 있다가 손을 휘저었다. 천지가 개벽이라도 한 것 같았다. 거울 속의 사람은 분명 3년 전의 그녀, 열두 살의 장한안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재차 자세히 살피는 눈빛으로 주위를 관찰했다. 마침내 이 위화감이 어디에서 오는지 분명해졌다. 그것은 이 방의 장식품들이 3년 전의 장식품들이기 때문이었다.
“유모, 올해가 무슨 해지?”
한참 후에야 한안이 물었다.
“대종 13년입니다.”
유모가 이상해하며 그녀를 보았다.
“소저, 그건 왜 물으세요?”
한안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대종 13년. 그녀의 친어머니가 중병을 앓다가 낫지 못하고 주씨와 장어산이 가문에 들어오던 해였다. 게다가 그녀는 그해 도적에게 납치되었다. 아무 일도 없긴 했지만 그 사건은 한안의 마음속에 영원한 부담으로 자리 잡았다. 언젠가 납치 사건이 잘못 알려져 명예가 훼손될까 봐 몹시 두려웠다. 사람들은 무릇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니까.
바로 그 사건 때문에 그녀는 이후 문밖 출입을 극도로 자제했었다. 종일 집 안에 숨어서 수를 놓고 글씨를 쓰며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지냈다. 심지어 남동생이 죄를 저질러 감옥에 갇힌 것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녀가 산적에게 납치됐을 당시, 계모인 주씨가 이틀 동안 한안을 찾아 헤맨 끝에 그녀의 행방을 알아냈고 후에 왕부에서 사람을 파견하고 나서야 그녀를 구출해 냈다고 했다. 그날 이후 한안은 계모인 주씨에게 감사의 마음을 품게 되었다. 장어산 또한 그녀를 정성껏 돌봐주었기에 한안은 점점 이 모녀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해에는 너무도 많은 일이 일어났다. 지금 돌아보면 그날이 바로 그녀 인생에서의 전환점이라 할 수 있었다. 그때는 모든 것이 순리대로 자연스러운 것 같았는데 지금 보니 유달리 의심스러운 점이 많았다.
주씨는 어떻게 모친이 병으로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바로 가문에 들어올 수 있었을까? 한안과 어산은 함께 산에 예불을 드리러 올랐는데 왜 산적은 한안만 납치했을까? 산적이 만약 재물을 노리고 그녀를 납치한 것이라면 어째서 왕부에 알리지 않았을까? 만약 재물을 노린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주씨가 한안을 찾아내기를 기다린 것일까? 그리고 겨우 열한 살에 불과한 한안의 동생 장한명이 어떻게 갑자기 기루의 기녀를 쟁탈하겠다고 싸움을 벌여서 상대방을 죽이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까?
그때의 한안은 이렇게 깊은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저 하늘에 원망만 할 뿐이었다. 당시 그녀는 부친과 주씨에게 의존하며 자기 연민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의 간계에 빠져 그녀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된 것이리라.
그러나 지금, 그녀는 다시 과거로 돌아왔다.
모든 것이 악몽 같았다. 그날 밤에 있었던 그녀의 마지막 밤은 열두 살 한안이 겪었던 납치 사건보다 더 큰 악몽이었다. 그러나 한안은 안다. 그날 그리고 그동안 그녀가 겪었던 일은 꿈이 아니다.
기왕 하늘이 그녀에게 시간을 되돌려 기회를 주었으니 다시는 목숨이 끊어지게 해서는 안 될 터였다. 이렇게 한안에게 원수를 직접 베어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니 그녀가 가져야 했던 마땅한 것들을 손에 다시 넣을 것이었다.
대종 13년, 그녀의 인생은 이때부터 바뀌기 시작했다. 이번 생에는 절대로 지난 생의 일들이 재연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장어산, 주씨, 그녀의 그 부친, 그리고 위여풍. 그녀는 인내심을 가지고 그들과 아주 천천히 싸워 볼 계획이었다.
“유모, 사람을 보내서 부친께 내가 깨어났다고 고하게.”
한안은 눈을 내리깔고 손을 소매 속에서 한데 모았다.
급람은 의아해하며 한안을 보았다. 자신의 착각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소저가 깨어난 후로 묘하게 이전과 달라졌다.
한안은 줄곧 천진난만했고 순수했다. 부인이 세상을 떠난 후로는 종일 눈물로 지새우기만 했다. 그녀의 아버지가 몇 차례 타이르다가 넌더리를 내기 시작했고 그러자 그녀는 더욱 상심했다. 마음속으로 당황하고 자신감을 잃었을 터였다.
이것 또한 인지상정이었다. 부인이 지극히 총애하던 한안은 나이가 아직 어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고 갑자기 큰 변화를 맞닥뜨려 바로 적응할 수 없었다. 급람과 주홍은 주인 소저를 돕고 싶었지만 어디서부터 도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며칠 전 한안의 아버지가 후처를 들이겠노라 말하였다. 한안은 있는 힘을 다해 말렸지만 꾸지람만 들은 후 감기에 걸려 침상에 드러눕고 말았다. 진 유모는 너무 안타까웠으나 할 수 있는 건 그 후처를 욕하는 것일 뿐. 그리고 노야가 부부의 정분을 따지지 않는 것을 욕할 수밖에 없었고 다음으로 소저의 팔자가 박복한 것을 탄식했다.
급람과 주홍도 몹시 안타까웠다. 소저가 근심을 떨치지 못하여 병이 날까 두려웠다. 무릇 근심이 심각해지다가 결국엔 치료하기 어려워져 중병이 되어 일생을 망치는 자들이 여럿 있는 법이다. 둘은 소저의 침상 가에 바싹 달라붙어 지키기를 몇 날 몇 밤.
마침내 깨어났다.
그때, 급람은 소저가 이전과 다르게 변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소저는 처음에는 영문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크게 흐느껴 울었지만 냉정을 찾은 후에는 더 이상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그 새까만 눈동자는 맑고 투명했지만 깊은 호수처럼 바닥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급람.”
한안이 돌연 그녀를 불렀다. 급람은 멍한 눈빛을 서둘러 감췄다. 이런 때에 넋을 놓고 있었던 자신에게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주홍.”
한안이 이어서 말했다.
“너희 둘은 내 측근 하녀야. 나는 당연히 너희들을 믿을 수 있지. 하지만 나를 따르면 좋지 않은 결말을 맞이할 수도 있어. 나는 너희를 속이고 싶지 않아. 현재 상황에서는 내 앞으로의 행보가 너희를 힘들게 할 수도 있어.”
그녀는 살짝 웃었다.
“너희가…… 만약 내 곁에 머물고 싶지 않다면 사람을 찾아서 너희를 부에서 내보내 줄 수 있어.”
한안은 확실히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만약 급람과 주홍이 자신을 따르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녀들을 놓아줄 것이다. 두 아이는 지난 생에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 이미 충분했다.
주홍이 바로 무릎을 꿇었다.
“저는 소저의 측근 하녀입니다. 오로지 소저 한 분만을 주인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죽어도 소저 곁에서 죽을 거예요.”
급람도 다급히 말했다.
“소저께서는 부디 저희를 내치지 말아 주세요. 현재 이런 상황에서 소저를 버린다면 그게 어디 사람이겠어요? 소저께서는 두려워 마세요. 그 주씨가 시집왔다 해도 괴롭힘을 당하지 않으시도록 보호할게요. 그러니 저희를 내보내지 말아 주세요.”
한안의 눈이 살짝 붉어졌다. 급람과 주홍 같은 이런 충심은 참으로 얻기 어려울 것이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인정과 도의를 저버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던가. 그들의 충심을 생각하니 한안은 마음에 따스함이 가득 차올랐다.
“그만 일어나도록 해.”
한안은 얼굴에 웃음기를 띠었다.
“내 말은 너희들이 만약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혼인을 시켜서 부에서 내보내 주겠다는 것이었는데 보아하니 없는 것 같구나.”
급람과 주홍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얼굴을 붉혔다.
“소저, 저희들을 놀리지 마세요.”
“너희들이 따라가는 나의 길은 흉악하고 위험해. 하지만 나는 온 힘을 다해 너희를 빈틈없이 보호할 거야.”
주홍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어린 소저의 말인데도 안심이 되었다. 천진하고 세상사에 관심 없던 소저께서 하신 말씀이 정말 맞나? 주홍은 고개를 들었다. 한안의 희고 깨끗한 작은 얼굴 위에 침착하고 평안한 웃음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 담담한 웃음 속에 심오함과 단단한 결의가 담긴 것처럼 보이는 건 자신의 착각일까.
소저는 정말 달라졌다.
“너희가 나를 따른다면 응당 나의 지시를 들어야 할 거야. 특히 급람, 너는 성급한 성격부터 바꿔야 할 거야. 왜냐하면 우리가 제일 먼저 시작해야 하는 것이 바로 참는 일이기 때문이야.”
보통 사람은 참는 걸 잘 하지 못한다. 하지만 장어산은 재능을 감추고 드러내지 않으며 때를 기다렸다. 다시 생을 반복하게 되었으니 좀 더 인내심을 갖는다면 주씨 모녀를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무릇 옛말에 인내하고 노력하면 성공한다고 하였다. 그럼 겨루어 보자, 누가 더 인내할 수 있는지.
“노야께서 오셨습니다.”
유모가 수정 발을 들어 올리며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방으로 걸어 들어왔다. 유모의 몸 뒤로 키가 큰 신영 하나가 뒤따랐다. 화려한 채색 비단에 구름무늬가 들어간 진홍색의 장포를 입은 남자가 병상 앞에 멈추어 섰다.
한안은 참지 못하고 소리 없는 냉소를 지었다. 모친이 불과 석 달 전에 안장되었는데 곧바로 새 장가를 갈 마음이 들다니. 정말이지 도리도 없고 끝도 없이 안하무인이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검은 머리카락 아래 작은 얼굴은 단정하고 가냘파서 보는 사람을 설레게 했다. 눈물을 머금은 채 웃고 있는 얼굴은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했다.
“아버지.”
한안이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장사양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적녀를 응시했다. 딸은 유약한 얼굴 위에 웃음기를 띠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기분을 맞추려 노력하는 한안의 표정이 그의 자존심을 크게 만족시켰고 그의 말투도 어느 정도 온화해졌다.
“안아, 좀 나아졌느냐?”
한안은 고개를 숙이고 가냘픈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이제 괜찮습니다. 아버지께 걱정을 끼쳐 드렸어요.”
한안은 부친이 후처를 받아들일 때 있었던 일을 기억했다. 한안은 후처를 받아들이는 일을 극도로 거부했고 결국 부친에게 훈계를 들었다. 이후에 독감에 걸려 병석에 앓아누웠지만 부친은 자신을 보러 한 번도 오지 않았다. 두 사람의 관계는 진작에 서먹해져 있었다.
“제가 병석에 있는 동안 생각해 보았는데 제가 잘못했어요. 아버지의 심기를 어지럽혀서는 안 되었는데 말이에요.”
장사양의 눈빛이 부드러워지는 것을 보며 한안은 억지로 웃음을 끌어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아버지께서 종일 고생하시니 아버지 옆에 있을 사람이 필요하겠죠.”
장사양은 순한 멍해졌다. 장한안은 줄곧 자신이 후처를 들이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던가. 어째서 돌연 생각이 바뀌었지?
“아버지, 다시 제게 화를 내지 말아 주세요.”
한안은 눈가를 닦았다. 목소리가 힘없이 떨렸다.
“저는 이미 어머니를 잃었어요. 그러니 아버지께서는 저를 미워하지 말아 주셔요. 단지 새 모친이 저를 좋아하지 않을까 두려웠을 뿐이에요…….”
말이 이어지다 울먹임이 되면서 훌쩍거리느라 말을 완전히 끝맺지 못했다. 한안이 온몸을 벌벌 떨기 시작했다. 당장에라도 기절할 듯한 모양새였다.
“소저, 상심하지 마세요. 몸을 혹사하면 어찌 좋아지시겠어요.”
유모가 서둘러 앞으로 나와 한안을 달랬다.
장사양은 한안을 살펴보았다. 생각해 보니 딸아이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제가 아는 장안은 본래부터 담이 작았다. 후처가 문안에 들어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안이 고집을 내려놓을 뜻을 보이니 오히려 앞으로의 일은 많이 수월해질 것이다. 장사양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일부러 정색을 하고 훈계하기 시작했다.
“터무니없이 구는구나. 너는 장가의 적녀요, 제후부의 귀한 딸이다. 어찌 이렇게 어린아이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느냐?”
장사양은 한안의 눈물이 더욱 심하게 떨어지는 것을 보더니 곧바로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다.
“주 이모는 사람을 상냥하게 대한단다. 어산이도 좋은 아이지. 너와 친구가 되면 분명 즐거울 거다.”
한안은 마음속으로 냉소했다. 상냥해? 좋은 아이? 전엔 확실히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죽음 직전에야 이 두 사람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으니 비애라 해야 할지 어리석다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안은 소매 속에서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 자국을 달고서 천진하게 물었다.
“두 사람이 정말 저를 싫어하지 않을까요?”
과연 어린아이같이 천진하다고 생각하며 장사양은 살짝 웃었다.
“안아는 이렇게 아버지를 못 믿느냐? 날을 잡아 두 사람을 부에 불러서 만나 보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
“두 사람이 정말 보고 싶어요. 아버지, 내일이면 될까요?”
한안은 기대감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한 손으로 아예 장사양의 팔을 껴안고 어리광을 부리듯 흔들어댔다.
장사양은 조금 의아해하며 한안을 보았다. 한안이 그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장사양은 아내에게 냉담했고 자신의 딸을 대할 때조차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한안은 부친에게 의아해하는 시선을 받자 몸이 점차 굳어졌다. 그녀는 더듬더듬 고개를 숙였다. 창백한 작은 얼굴이 몇 가닥 홍조로 물들었고 밝고 환하던 눈동자 속에 은은하게 물빛이 어렸다. 부친에게 호감을 사고 싶은데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모습이었다.
장사양은 순간 이해했다. 한안은 방금 모친을 잃었고 의지할 곳이 없으니 부친의 호감을 얻으려는 것이라고. 애써 그의 비위를 맞추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딸아이의 변화는 좋은 일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었다.
장사양은 자애롭게 한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일이 된다면 그렇게 하지. 비록 좀 바쁘기는 하겠지만 안아가 기쁘다면 된 거지.”
한안은 감사하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웃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장사양과 한안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몇 마디 집안일에 대해 한담을 나누었다. 더 이상 아무런 할 말이 없자 장사양은 한안에게 일찍 쉬라고 얘기하고 바로 일어나서 떠났다.
유모는 노야가 안채로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한안에게 다가가 입을 뗐다.
“소저,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세요. 부인이 돌아가신 지 얼마나 되었다고 주씨가 어떻게 바로 그 자리를 꿰차요? 소저께서는 너무 마음씨가 고우세요. 뱃속 시커먼 계모가 많고 많은데 소저께서는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어요.”
방금 전 한안이 장사양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환심을 사려던 것을 떠올린 유모는 코가 시큰했다.
“만일 부인께서 살아 계셨다면 소저의 이런 행동을 마음 아파하시겠죠.”
“유모, 그런 말 말아.”
한안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유모가 나를 위한다는 건 알아. 하지만 내가 동의하지 않는다 해도 부친은 무조건 주씨를 장부의 문안에 들어오게 할 테니까 차라리 먼저 주씨의 뜻을 순조롭게 이루어주고 그녀가 나와 부친의 관계를 훼손시키지 못하게 하는 편이 나아. 그리고 주씨를 눈 닿는 곳에 두어야 무슨 움직임이 있을 때 우리도 잘 대처할 수 있지.”
유모는 입이 벌어졌다. 그녀는 이 말이 열두 살 한안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를 잃은 아이는 일찍 철이 든다더니 소저 또한 조숙해져서 사람 마음을 아프게 했다.
“소저, 소야께서 왔습니다.”
급람이 접시를 받쳐 들고 들어왔다. 급람의 말소리가 막 떨어지자마자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님!”
문 입구에 서 있는 장한명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이렇게 한명의 소리를 들으니 한안의 눈물이 순간 또 솟아올랐다.
“명아!”
한명은 한안의 친동생이었다. 전생에서도 그들 오누이의 사이는 무척 좋았다. 장사양은 한 명뿐인 아들에게도 냉담했다. 한안은 되돌아오기 전에는 한명이 지나치게 장난기가 많고 장사양이 엄한 부친이어서라고 단순하게만 생각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의혹이 이는 곳이 허다했다. 장사양은 서출인 몇몇 딸들에게 그들 오누이보다 더 잘해주었다. 그의 냉담함은 한안과 한명. 즉, 죽은 전처의 아이들이라는 것에 한정되어 있는 듯했다.
한명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리했다. 다만 성정이 좀 지나치게 장난스러울 뿐이었다. 주씨가 가문에 들어온 후 한명은 항상 그녀들과 대적했다. 처음에는 아무 일도 없었지만 한안의 납치 사건 후에 문제가 발생했다. 한명이 주씨 모녀를 겨냥했을 때, 한안이 큰소리로 주씨 모녀의 역성을 들었던 것이다. 그 이후 한명과 한안 사이는 소원해졌다.
그때부터 한안은 성격이 바뀌어 온종일 집에 숨어서 세상사를 등한시했고 한명은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 한안은 한명이 납치 사건 이후 자신이 불결해 싫어하는 거라 여기며 괴로워했다.
그렇게 지내던 와중 한명은 관가 자제와 청루 기녀 쟁탈을 벌이게 되어 살인사건에 휘말렸고 피해자 집안이 쟁쟁한 가문이라 한명은 관부에 고발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한안이 한명의 소식을 들었을 때쯤에는 한명은 이미 감옥에서 학대를 받아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 한안은 모친이 남긴 혼수를 전부 주씨에게 주고 사람을 사서 한명을 겨우 구해냈지만 얼마 가지 않아 한명은 감옥에서 학대받았을 때 얻은 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래서 3년 후 혼인날, 한안은 친정 형제 한 명 없이 혼인식을 거행했다.
모친이 임종 전에 한명을 잘 돌봐달라고 부탁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또다시 한명을 그런 꼴이 되게 할 수는 없었다.
한안이 오래도록 반응이 없자 장한명은 그녀를 다시 한번 불렀다.
“누님 괜찮으세요?”
“난 괜찮아. 명아, 걱정하지 마.”
한안은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한명을 위로했다.
“누님이 깨어나셨다는 말을 듣고 바로 서둘러 왔습니다. 누님, 기분은 어떠세요?”
장한명이 초조하게 물어보았다. 한안은 마음속이 따뜻해졌다. 적어도 친동생인 한명이 가족으로서 진실된 관심을 가져준다는 것. 이것으로 충분했다.
“많이 좋아졌어. 오히려 나는 네가 내 처소로 달려온 게 선생의 수업을 고의적으로 피하려는 게 아닌지가 걱정이구나. 만약 아버지께서 아시면 또 네게 벌을 내리실 거야.”
한안이 웃으며 말하자 장한명이 코웃음을 쳤다.
“대장부는 천하에 원대한 포부를 품는 겁니다. 온종일 글재주나 부리는 것이 무슨 영웅호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성년이 되면 바로 전장에 나가 적을 죽일 텐데 몇 글자 아는 것으로 어찌 공훈을 세우고 업적을 쌓을 수 있겠어요.”
“이제 몇 살이나 되었다고 공훈을 세우고 업적을 쌓고 싶다는 거야.”
한안이 가벼운 소리로 말했다.
“만약 정말로 무학에 흥미가 있다면 내가 개인적으로 너를 위해 무공 선생을 찾아볼게. 어때? 하지만 비밀로 해야 해. 다른 사람이 알게 되면 나 역시 덩달아 벌을 받게 되거든.”
전생에 한안은 한명이 무예를 배우는 데 동의하지 않았다. 그녀의 부친인 장사양이 무신 관료들을 경시했기 때문이었다. 한안 또한 줄곧 규방에서 자랐기에 장사양의 영향을 받아 무장은 몹시 거칠고 저속하다고 생각해 동생인 한명이 무예보다는 학문에 뜻을 두어 장원급제를 하면 좋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한 번 죽고 보니 생각이란 게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사람의 생명은 너무도 짧은데 구태여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일을 위해 일생을 다 걸 필요가 있을까? 명이가 무학을 좋아하니 무예를 배우면 또 어떤가. 게다가 무공은 스스로 몸을 지킬 수 있게 하니 나쁠 건 없었다. 만약 명이가 무공을 습득했더라면 청루에서 남과 싸우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누님, 정말이세요?”
장한명은 순간 흥분했다.
“절대 비밀로 할게요. 누님은 말씀하신 거 책임지셔야 해요.”
한명은 정색을 하고 말을 이었다.
“만약 제가 무공을 습득하면 누님을 지켜 줄 거예요!”
눈시울이 뜨거워진 한안은 마음속의 울먹임을 혀 안으로 숨기며 조용히 대답했다.
“네가 자신을 잘 보호하는 것이 바로 누나에 대한 가장 좋은 보답이야. 다만 무공을 익히려면 계속해서 고생해야 할 텐데 도중에 포기한다고 해도 안 된다.”
“그럴 리 없어요.”
갑자기 장한명은 무언가 떠올랐는지 고개를 갸우뚱하며 질문을 던졌다.
“급람에게 듣자니 아버지가 방금 전 이곳에 왔었다고요. 무슨 얘기를 하셨어요?”
장사양과 그녀의 사이가 어그러졌다는 것은 명이도 알고 있었다. 한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저 내일 주씨를 보여주고 싶다고 하셨을 뿐이야.”
“누님, 동의하셨어요?”
장한명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 높여 물었다.
“누님, 그건 안 되죠. 우리 어머니는 오직 한 분뿐이에요.”
“쉬, 조용히 해.”
한안이 급히 한명의 말을 끊었다. 벽에도 귀가 있는 법이니까.
“넌 이해 못 해. 잘 들어. 절대로 부친 앞에서는 이 일을 꺼내면 안 돼. 그저 모르는 척해. 내일 그들을 만나거든 그저 조금 냉담하게만 대하면 돼. 너무 제멋대로 굴지 말고.”
장사양은 한명을 좋아하지 않았다. 만약 명이가 다시 소란을 피우면 더 큰 미운털이 박히게 될지도 몰랐다. 이렇게 되면 주씨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부모는 자애롭고 자식은 효도해야 한다는 것은 일종의 허상이었지만 명분을 만들기에는 상당히 좋은 말이었다.
이전에는 한안이 앓아누운 일 때문에 한명과 장사양은 한바탕 소란을 피웠고 한명은 그 벌로 곤장을 맞고 사당에 갇히기까지 했다. 이번에도 같은 일을 되풀이할 수는 없었다.
“누님, 하지만 주씨는 우리 어머니 노릇을 하고 싶어 해요.”
장한명이 억울해하며 말했다.
“모친이 막 세상을 뜨셨는데 부친이 어떻게 이럴 수…….”
한안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의 어머니는 오직 한 분이야. 명아, 나를 믿는다면 따라주렴. 나한테 생각이 있어.”
장한명은 놀라 한안을 쳐다보다가 마침내 말했다.
“저는 누님을 믿어요.”
한안은 문 입구에 있는 작디작은 신영을 보며 웃었다.
오늘의 눈물은 그녀가 흘려야 할 마지막 눈물일 것이다. 오늘 이후로 장한안은 모든 눈물을 안으로 삼키고 자신이 보호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보호할 것이다.
급람, 주홍, 유모, 그리고 장한명을.
*
초겨울이었지만 햇살은 살짝 온기를 머금고 문양이 조각된 창문을 지나 방에 비쳐 들어왔다. 중앙 정원에 있는 소박하고 고풍스러운 작은 정자는 네 귀퉁이의 처마를 치켜들고 있었다.
깊고 넓으며 맑고 투명한 연못물이 정자 주위를 휘감고 흘렀다. 붉은 매화가 거울 같은 연못 수면 위에 점점이 비쳐, 아름다운 옥 위에 보석을 박아 넣은 것 같았다.
정원 숲은 깊숙하고 고요했다. 수목은 가지치기를 해서 엇갈린 배열이 제법 정취 있어 쾌적하고 멋스러웠다. 장사양은 조정 3품 대신으로서 자신의 집이 품위 있고 정교하게 유지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작은 정원이지만 바닥에 놓인 돌 하나조차 신경 썼을 정도였다.
이 정원의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집 안주인의 마음 씀씀이가 총명하고 사리에 밝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안주인이었던 한안의 모친은 이미 없고 오직 이 그림같이 아름다운 풍경만이 남아 있었다.
한안은 작은 정자 안에 앉아 탁자 위에 눈처럼 하얀 선지를 펼쳐 놓았다. 급람이 옆에서 먹을 갈고 있었다. 한안은 붓을 잡고 먹물을 묻혔다. 아주 오래 생각한 끝에 붓을 들고 종이 위에 한 글자를 썼다.
급람은 호기심에 두어 번 보고는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정(靜) 자네요.”
눈처럼 흰 종이 위에 묵향이 서늘하게 남아 있었다. 필체는 색이 충만했고 호방하였으며 풍치 있고 멋스러웠다. 급람은 서예를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소저가 평소에 글씨를 쓰는 모습이 수려하고 단정하다고 느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쓴 것은 조금 거칠었다. 예전과 조금 다르면서도 보는 사람의 마음을 호탕하게 했다.
“소저, 어찌하여 ‘정’ 자를 쓰셨어요?”
한참 참고 있다가 급람이 기어이 참지 못하고 궁금해하며 물었다.
한안은 웃으며 말했다.
“이 글자는 네게 주는 것이다. 또한 나에게 주는 것이기도 하지.”
오늘이 바로 그 모녀가 장부에 들어오는 날이었다. 장사양은 아직 자신에게 말을 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신이 나서서 먼저 물어서는 안 된다. 고요함으로 움직임을 제어하는 것이야말로 현명한 방법이라고 한안은 생각했다.
급람의 얼굴이 붉어졌다.
“소저의 말씀은 제가 너무 말이 많다는 것이죠? 혹시 제가 시끄러워서 이 글자를 쓰신 거예요?”
“세상에서 미녀가 짝이 되어 함께 해주는 것만큼 흡족한 일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감히 우리 급람 하녀님이 말이 많다고 싫어하겠어?”
한안은 일부러 급람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그녀의 미모에 푹 빠진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소저, 또 저를 놀리시네요.”
급람은 한층 더 난감했다. 소저가 깨어난 이후 적지 않게 바뀌었다. 그중 가장 큰 변화는 담대해졌다는 것이다. 평소에도 급람이나 주홍을 놀리며 입씨름을 하곤 했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거침없지는 않았다.
행동이 바뀐 게 좋은 일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었다. 소저가 모친을 잃은 그늘에서 나올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리라. 마님이 세상을 뜨고 나서 소저가 진심으로 웃는 얼굴을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소저가 즐겁기만 하다면 자신이 몇 마디 놀림을 당한들 무슨 상관일까.
몇 마디 말을 더 붙이려던 한안은 주홍이 다가오는 것을 보더니 서둘러 일어났다.
주홍이 가까이 걸어와서 작은 자루 하나를 그녀에게 건넸다.
“은표 200냥입니다. 나머지 석영 팔찌는 은자 조각으로 바꾸었어요.”
한안은 자루 주머니를 두어 번 보고 소매 속에 잘 챙겨 넣은 뒤 주홍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안은 주홍에게 방 안의 장신구 약간을 가져다가 전당포에 가서 저당 잡히고 은자를 빌려오게 했다. 어머니가 계실 때는 한안이 사치스러운 습관이 드는 것을 피하기 위해 매월 그녀에게 용돈을 주었다. 다행히도 그녀는 평소에 몇 푼 쓰지 않아 생활은 줄곧 넉넉하게 지내온 셈이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뜨신 후, 모든 것이 다르게 변했다. 예전에는 해당각에서 어머니의 분부를 받아 매월 한안을 위해 천을 마름질하고 옷을 지어 왔다. 하지만 지금은 은자를 주는 사람이 없으니 새 옷이 오지 않은 지도 꽤 되었다. 게다가 한안을 위해 나서서 이 일을 언급하는 이도 없었다.
심지어 주방 안에서 만든 음식도 전과 같지 않았다. 한안은 본래 편식을 하는 편이었는데 덕분에 지금은 무엇이든 먹는 습관이 길러졌으니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일까.
후부의 귀한 딸이건만 지금은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는 것도 점점 힘들어졌다. 하지만 주씨 모녀가 들어왔을 때 그들을 지척에서 내탐할 심복을 두려면 상으로 줄 은자는 미리 준비해 두어야만 했다. 게다가 한명이 무예를 배우고 싶어 하니 무예 선생을 청하려면 이 또한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들 것이었다. 어머니가 그녀에게 남겨 준 혼수가 있었지만, 혼수가 들어있는 창고 문은 잠겨 있었다. 그 문은 그녀가 출가할 때 열게 되어있어 지금은 그저 장신구를 팔아 돈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은 주홍에게 맡겼다. 주홍은 한안을 따르는 하녀 중 지극히 신뢰할 만한 사람이었다. 비록 남과 친근하게 지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는 하지만 겉은 차가워도 속은 깊은 사람이었다.
반면에 급람은 좀 말이 많지만 활발하여 다른 여종들이 나이가 많든 적든 다 친하게 지냈다. 발이 넓은 그녀 덕분에 한안은 집안의 대소사나 정보를 수집하는 데 용이했다. 둘 다 한안에게 지극히 충성스러웠다.
막 은표를 챙겨 넣는 찰나, 임 총관이 건너와 장사양이 한안에게 바깥 대청으로 건너오라 했음을 전달했다. 한안은 무슨 일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분명 주씨 모녀가 도착한 것이리라. 좀 더 늦을 거라 여겼는데 이렇게 이른 새벽이라니. 정말이지 한시라도 빨리 장씨 가문에 들어오고 싶었던 모양이다. 고개를 숙인 한안의 얼굴엔 차가운 냉기가 스쳤다. 하지만 고개를 든 그녀의 얼굴은 부드럽고 상냥하며 차분했다.
“주홍, 급람, 가자꾸나.”
회랑을 통과하고 정자를 돌아서 막 바깥 대청에 발을 들이려는데 대청 안에서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한안은 웃음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장사양이 중앙의 나무 의자 위에 앉아 있었고 왼쪽에는 주씨가 앉아 있었으며 장어산은 작은 탁자를 옮겨 와 두 사람의 앞에 엎드려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장사양이 하하 크게 웃을 만큼 재미있는 이야기인 듯했다. 주씨는 장어산이 부드럽게 말하는 것을 자애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만약 상황을 알지 못하고 지금 이 장면만 보았다면 가족의 단란함에 몹시 찬탄했을 것이다.
장사양은 장어산에게 온갖 관심과 애정을 기울였다. 한안과 그녀의 친모는 과거 장사양에게 저런 온정을 받은 기억이 없었다. 그럼에도 적녀는 장어산이 아닌 장한안이었으니 운명은 정말 한 치 앞도 알 수 없구나 싶었다.
주씨는 한껏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러나 한안은 방금 전 주씨가 이쪽을 향해 슬쩍 눈길을 주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그녀는 틀림없이 자신을 보았을 것이다. 설령 주씨가 보지 못했다 해도 주위에 있는 많은 하인은 그녀를 똑똑히 보았을 터였다. 한안이 도착했음을 알면서도 위세를 부리고 싶은 건가?
급람이 차마 볼 수 없어 화를 내며 소리를 내어 일깨우려 하자 한안이 손을 들어 가로막았다. 그들이 즐거운 공연을 펼치는데 그녀도 즐겁게 관람해 주어야지. 어쨌든 관람하는 것이 공연하는 것보다 더 수월한 법이거든. 주씨가 그녀를 핍박할 생각인데 여기서 먼저 입을 연다면 처음 열린 기 싸움에서 진 것과 다름없었다. 한안은 기어코 먼저 입을 열지 않을 생각이었다. 누가 더 인내심이 있는지 두고 보자.
주씨는 장사양과 말을 하면서 몰래 한안을 쳐다보았다. 저년이 어떻게 저렇게 침착하지?
한안을 잠시 푸대접하면 억울해하며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어 어른들의 담화를 중단시킬 거라 생각했다. 그런 게 바로 불경이었다. 한안이 제아무리 조리에 맞게 몇 마디 억울함을 하소연한다 해도 장사양은 한안을 더욱 싫어하게 될 것이다. 설령 장한안이 입을 열지 않고 완고하게 기다린다 해도 이렇게 오랜 시간이면 한안의 기를 꺾어 놓기에 충분하리라.
그러나 애석하게도 주씨는 이내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알아챘다. 한안은 시종일관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그들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과 마주치자 피하지도 숨지도 않았고 심지어 입가에 환한 미소를 띠었다.
주씨는 멍해졌다. 한안의 두 눈동자는 밝고 환해 상대를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동시에 조금은 비꼬는 듯한 기색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주씨는 저도 모르게 마음속에 한기가 일었다. 슬며시 고개를 돌리다가 다시 쳐다보자 한안은 다시 천진무구하게 웃고 있었다.
주씨는 얼이 빠졌지만 상대방은 열두 살 어린 여자아이에 불과하니 구태여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서둘러 자신을 위로했다.
그렇게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장사양은 주씨의 눈빛을 따라가 한안을 발견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안아가 왔구나. 어찌 한마디 할 줄도 몰라.”
한안은 그제야 급람과 주홍을 데리고 앞으로 나가 나긋하고 가냘프게 예를 행했다.
“아버지, 부인과 아버지의 대화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요. 게다가 방금 전 부인이 줄곧 저를 보고 있어서 아버지께서 이미 알고 계신 거라 생각했어요.”
한안은 몇 마디 말로 자신이 예에 따라 행동했음을 알렸고 오히려 주씨가 그녀를 보고도 일깨우지 않았으며 그녀가 무슨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암시했다.
장사양은 순간 놀랐다가 즉각 그녀의 말 속에 담긴 뜻을 이해했다. 그는 느릿하게 주씨를 한 번 돌아보았다. 평소 처첩들이 어떤 술수를 부리든 그는 보고도 못 본 척했다. 그러나 자신의 눈앞에서 대놓고 술수를 부리는 것은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이기에 용납하지 않았다.
게다가 한안은 어쨌든 그의 이름을 받은 적녀였다. 이렇게 많은 하인이 지켜보고 있는데 기다리는 것을 몰랐다는 것이 어떻게 전해질 것인가. 외실이 적녀를 함부로 괴롭히도록 장사양이 방치했고 덕분에 콩가루 집안이 되었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그는 문신이었다. 문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체면과 명성이었다.
주씨는 긴장하여 서둘러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소첩은 저 아이가 한안인 줄 몰랐습니다. 그냥 어느 집의 소저가 저처럼 아름답게 자라 그림 속의 선녀 같을까 하였지요. 만약 진작에 한안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소첩이 다른 것을 제쳐두고라도 맞이했을 겁니다.”
말투가 묘했다. 주씨는 스스로를 변호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한안에게 비위를 맞추고 있었다. 한안은 희미하게 웃었다. 주씨는 이해득실을 따져보고 형세가 아니다 싶으니 바로 자신에게 아첨하는 것이었다.
한안은 고개를 숙이고 공손하게 말했다.
“소녀의 허약한 자태를 부인이 과찬하시네요.”
장사양은 한안의 순종적인 태도가 아주 만족스러웠지만 이내 또 눈썹을 찡그렸다.
“어째서 부인이라 부르는 것이냐? 주 이모라고 불러야 한다.”
“주 이모요?”
한안이 작은 얼굴을 높이 들었다. 흑백이 분명한 눈 속에 의혹이 가득했다.
“이분이 저의 어떤 이모이신가요?”
장사양의 얼굴에는 곤혹스러움이 떠올랐다. 주씨의 눈 속에 분노와 원망이 스쳐 지나갔다.
“안아, 무슨 허튼소리냐? 이 사람은 너의 모친이다.”
주씨의 입장이 곤란해졌다. 이렇게 급하게 부에 들어올 게 아니라 초상 후 애도 기간이 지나기를 기다렸다가 들어오는 게 예의였거늘 하지만 밤이 길면 꿈이 많아진다고 했던가. 걱정 때문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주씨는 빨리 부에 들어오고 싶어 했다. 그녀는 첩실의 신분이 아니라 여주인의 위치로 부에 들어오고 싶어 했다. 그러나 바깥사람들에게 두루 알릴 수 없으니 먼저 외실의 신분으로 부에 들어오고 이후에 정실로 올릴 계획이었다.
“모친이라시면서 어째서 주 이모라 불러야 하지요?”
한안이 천진하게 물었다.
“아버지, 어머니께서 부에 들어올 때 여러 이낭들이 모두 차를 올렸대요. 일족의 장로분들도 모두 오셔서 예물을 주어 축하해 주시고요. 주 이모가 부에 들어온 이상, 또 아버지의 아내인 이상, 집안의 어른분들께 이 사실을 알리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요.”
“안 된다!”
장한안이 말을 마치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장사양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는 제 발 저리기 시작했다. 이 일은 절대 집안의 어른들께 말을 꺼내서는 안 된다. 그는 지금 주씨를 바로 정실에 올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한안의 나이가 어리니 그녀를 속여 먼저 주 이모라 부르게 하고 이후에 주씨를 정실부인으로 다시 바꿔 부르게 할 생각이었다. 지금은 시기가 적절치 않았다.
주씨의 눈빛에 실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오직 한안만이 변함없이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장씨 집안의 여주인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 물론 가능한 일이긴 했다. 집안 어른들을 납득시킬 수 있다면 말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이낭들과 겨룰 준비가 잘 되어있다면 문제없을 것이다. 한안은 자기 집의 이낭들이 쉽게 다룰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막 다시 불을 붙이려는데 나긋나긋한 목소리 하나가 그녀의 말을 중단시켰다.
“이 아이가 안아 동생인가요?”
한안은 마음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드디어 왔다.
장어산은 분홍색 면주로 된 긴 치마를 입었는데 치맛단에 모란꽃이 흩어져 피어 있는 수가 놓여 있었다. 구름 모양으로 쪽을 지었고 정교하게 세공된 나비 날개 모양의 금비녀를 몇 개 꽂았다. 그녀는 본래 타고나기를 매우 아름다웠다. 아직 나이가 어려 몸매가 미성숙했지만 그것이 도리어 얌전하고 청순한 자태를 돋보이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니 위여풍이 마음을 동한 것만을 탓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재치까지 뛰어나니, 과묵하고 순박한 한안의 모습보다 더 사내의 마음을 흔들었을 것이다. 한안은 위여풍을 떠올리니 마음이 다시 아파 왔다.
장어산은 한안에게 가까이 다가가 친근하게 한안의 손을 잡고 웃으며 말했다.
“나는 동생을 보자마자 호감이 생겼어.”
한안의 눈빛이 그녀의 손 위에 떨어졌다. 손톱을 선홍색으로 칠한 손가락은 희고 빛났다. 한안도 천진하게 웃었다. 하지만 이어서 던진 한마디 말에 방 안의 모든 사람이 놀라고 말았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언니가 마음에 들지 않아요.”
한안이 곁눈질로 주씨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의 얼굴색이 변한 것이 보였다. 장어산도 그녀가 이렇게 말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는지 한순간 입을 벌리고 말았다.
“뭐라고 말했느냐?”
입을 연 것은 장사양이었다. 그는 사납게 탁자를 쳤다.
“이것이 무슨 태도냐? 평소에 네 어미가 너에게 규범을 이렇게 가르쳤더냐? 무릎을 꿇어라!”
한안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인 채 무릎을 꿇었다.
장어산의 눈 속에 몰래 기뻐하는 빛이 스쳤다가 이내 억울한 빛으로 바뀌었다. 장어산은 너그럽게 말렸다.
“괜찮아요. 동생이 아마도 제가 익숙하지 않은 것이죠. 바닥이 차가워요. 동생은 어서 일어나렴.”
한안은 마음속으로 비웃었다. 그녀의 부친은 일생 거드름을 피우며 다른 사람이 자신의 뜻을 거역하는 것을 가장 싫어했고 평소에 모친과 이낭, 하인들의 사소한 것 하나라도 자신에게 순종하게 했다. 장어산은 좋은 사람인 척하고 싶어서 장사양의 이런 성향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 행동은 스스로 제 무덤을 판 것이나 다름없었다.
장사양은 좋지 않은 표정으로 장어산을 한 번 노려보았다.“일어나긴 뭘 일어나. 여기는 네가 끼어들 데가 아니다!”
장어산은 장사양이 왜 돌연 태도를 바꾼 것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꾸짖음에 장어산의 눈 속에 물기가 비쳤다. 주씨가 서둘러 앞으로 나와 중재했다.
“어산도 안이를 아껴서 그랬을 거예요. 이 아이가 마음이 착해요.”
자신에게로 주의를 끌어당기고 싶은 거겠지? 계모의 의도가 이렇게 분명한데 예전에는 어떻게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장사양의 시선이 한안의 몸 위에 떨어지면서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어산에게 불만을 가질 게 뭐가 있느냐? 아직도 사리 분별 못 하는 소리를 하다니!”
한안은 손을 몸 뒤에 두고 자신의 손바닥을 사납게 꼬집었다. 눈 속에 순식간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아버지, 어산의 몸에서 향분 냄새가 나요.”
장사양은 멍해졌다. 주씨와 장어산은 서로 눈을 한 번 마주쳤다.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향분이 무슨 문제가 있지?
한안은 훌쩍거리며 대답했다.
“아버지, 설마 잊으셨나요? 제가 향분에 과민 반응을 보이는 것을요. 향분 냄새를 맡기만 해도 바로 온몸이 불편해져요. 언니의 향분 냄새가 진해서 아주 멀리서도 맡을 수 있을 정도예요. 그러니 마음에 들지 않을 수밖에요.”
장사양은 입장이 곤란해져서는 급히 말했다.
“네가 향분에 과민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히 알고 있지.”
안다고? 한안은 비웃으며 그를 한 번 올려다보았다. 그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이유를 꾸며댄 것이다. 장사양이 만약 정말로 알았다면 그야말로 귀신 아닌가.
“하지만.”
장사양은 가볍게 두어 번 기침을 했다.
“비록 그렇다 해도 네 언니를 이리 대하지 말아야 한다. 일어나거라.”
한안은 서둘러 일어나서 두 걸음 걸어가 장어산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웃으며 말했다.
“한안이 잘못했어요. 언니는 부디 너그럽게 이해해 주세요.”
장어산은 그녀의 웃음에 어리둥절해졌고 무의식적으로 한안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다. 한안은 어산의 손을 풀어주면서 작은 얼굴을 찡그렸다.
“언니, 내 손을 왜 쳐내는 거예요? 나를 용서하지 않을 건가요?”
장사양은 불쾌하게 장어산을 주시했다. 장어산은 몸서리를 치며 서둘러 한안을 잡았다.
“어떻게 그럴 리가. 나는 동생이 생겨 무척 기쁜걸.”
한안은 기쁘게 웃으며 말했다.
“언니는 사람이 정말 좋네요. 언니가 내게 잘해주니 언니에게 향연고 한 갑을 줄게요. 몸에 바르면 아주 향기로워요. 언니가 쓴 향분보다 더 향기로워요. 게다가 급람과 주홍이 바르는데도 나한테 과민 반응이 일어나지 않아요.”
주씨는 만족스럽게 한안과 장어산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마지막 한마디를 듣고는 안색이 삽시간에 보기 흉하게 변했다. 급람과 주홍은 그저 하녀일 뿐이다. 장어산에게 몸종이 쓰던 물건을 준다면서 그녀의 향분보다 좋다는 말까지 했다. 장어산이 일개 여종만 못하다는 말인가? 화가 난 주씨는 한안을 노려보았다.
장어산도 한안의 말에 숨겨진 뜻을 알아들었다. 그러나 장사양이 바로 앞에 있으니 반박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안이 고의적으로 자신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게 분명했지만,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박하게 웃는 것이 마치 악의가 전혀 없어 보였다.
얘는 도대체 멍청한 거야, 아니면 영리한 거야?
멍청하든 영리하든 간에 오늘 일어난 일은 그녀의 예상을 초월했다. 주씨는 눈썹을 찡그렸다. 앞으로도 자신의 생각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고 이런 변고가 더 있을까 두려웠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장사양에게 말했다.
“노야, 시간이 늦었으니 소첩이 짐을 정리하고 어산에게 처소를 적절히 배치해 줄 수 있게 허락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장어산은 이 자리에서 어서 벗어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한안의 앞에서는 재촉할 수 없었다. 실로 숨 막히게 답답했다. 장어산은 눈을 비비며 애교 있게 말했다.
“어머니, 저 몹시 피곤해요.”
한안도 그들과 기싸움을 하는 것이 조금은 싫증이 났다. 게다가 오늘은 이미 자신이 원하던 바를 이루었으니 더 머물러 봤자 아무런 재미가 없을 터였다.
장사양은 바람 따라 돛이 움직이듯 순리대로 말했다.
“좋다. 내가 따라가 주마.”
정말 극진히 보살피는구나. 한안은 감동스러울 지경이었다.
주씨가 원래 한안의 모친 자리였던 의자에서 일어나 옷 앞자락의 주름을 가볍게 털었다.
솔직히 말하면 주씨는 확실히 얼굴이 예쁘고 자태가 고운 미인이었다. 나이는 서른을 넘어섰지만 젊은 부인의 풍만한 정취는 더욱 돋보였다. 버들 같은 눈썹 아래 치켜 올라간 가늘고 긴 눈이 주변을 둘러볼 때면 요염하고 화려한 자태를 보였다. 입술은 통통했고 웃는 얼굴은 저도 모르게 사람을 홀리는 기운을 지녔다.
문득 한안은 자신의 친 모친이 생각났다. 친 모친은 단장하는 것을 즐기지 않고 소박하게 행동하며 시중인들이 더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게 했었다.
반면에 주씨는 오늘 복숭앗빛 무늬 비단의 긴 치마를 입고 허리에는 쪽빛으로 수 놓인 넓은 비단 허리띠를 한 바퀴 둘러 버들가지같이 한 줌도 되지 않을 듯한 허리를 도드라지게 드러냈다. 겉에는 같은 색깔의 가볍고 얇으며 고운 옷을 걸쳤는데 공들여 제작한 홍보석 장신구가 어우러져 부귀함이 사람을 압도했다.
그러나 동시에 조금은 저속했다.
장사양은 몸을 돌려 생각에 잠겨 있던 한안에게 말했다.
“나는 주 이모를 데리고 처소에 가 볼 테니 너도 일찍 돌아가거라.”
장사양의 선명한 남색 장포가 주씨, 장어산의 복숭앗빛 분홍색과 어우러지자 화려하고 오색찬란한 분위기가 좀 더 강해졌다. 한안의 눈빛이 저절로 차가워졌다.
“아버지…….”
한안이 그를 불렀다.
장사양은 고개를 돌렸다. 한안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또 일이 하나 있는데…….”
한안은 난감한 듯 남은 반 마디 말을 삼켰다.
장사양은 기분이 어느 정도 괜찮아져 부드럽게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바로 말하거라.”
“국자감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을 들었는데 대종 율법에 의하면 상을 당하고 3개월 내에는 색이 화려한 옷을 입어서는 안 되다고 하셨어요. 작년에 한 대인이 상을 치룬 지 얼마 안 되었는데도 집안의 이낭이 붉은색 꽃을 달도록 내버려 두었다가 바로 관직에서 파면당하고 전 가족이 서북으로 유배를 갔다고 해요. 정말 안됐지 뭐예요.”
한안의 목소리는 낭랑했고 눈빛은 물처럼 맑고 투명했다.
“음……. 주 이모가 오늘 입은 옷은 제가 보기에 아주 예뻐요. 하지만 어머니가 막 세상을 떠나셨고 지금은 아직 상기이니 주 이모가 이렇게 입고 우리 집에 와서 방을 빌려 머무는 것을 만약 황제 폐하께서 아시면 저와 아버지는 바로 서북으로 가야 할 거예요.”
한안은 일부러 ‘방을 빌린다’는 말을 강조하며 파래지다가 하얘지는 주씨의 얼굴을 무심히 보았다.
“설마 주 이모 대종 율법을 모르셨나요? 열두 살인 저도 알고 있는데요.”
한안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장사양은 장어산과 주씨를 보고는 차갑게 말했다.
“안아의 말이 일리 있다. 뭐 하러 이렇게 화려하게 입었어!”
주씨는 얼이 빠졌다. 오늘은 장부에 들어오는 첫날이라 특별히 공들여서 단장을 했거늘 한안의 말이 장사양을 불쾌하게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단장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결과를 낳게 된 것이었다.
주씨의 눈빛이 장한안의 몸 위에 고정되었다. 모든 게 저 천한 것 때문이다. 오늘 일은 모두 저것이 망쳤다. 장사양의 딸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았다. 그녀는 장한안의 속내를 간파했다. 장한안은 분명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장한안은 부친인 장사양이 벼슬자리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일에는 별로 개의치 않더라도 조정에서의 입지에 영향을 주는 일이라면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하지만 이처럼 큰 위험을 부를 수 있는 상황임에도 주씨 모녀를 부에 받아들이고자 했으니 주씨가 그의 마음속에 얼마나 크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장한안은 차갑게 웃었다. 중요한 것과 필요한 것은 같지 않다. 이 이치를 주씨 모녀도 결국 언젠가는 분명히 알게 되리라.
장어산은 원한에 차서 한안을 한 번 노려보았다. 의기양양해봤자 뭐 하랴. 부친은 한안을 좋아하지 않았고 주씨는 곧 이 부의 정실 안주인이 될 것이었다.
주씨가 떠난 후, 급람과 주홍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급람이 말했다.
“소저, 주 부인은 좋은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
“함부로 말하지 마.”
한안이 입을 열기를 기다리지 않고 주홍이 급람의 말을 끊었다.
“여기 도처에 사람이 있어. 소저께 폐를 끼치지 마.”
한안이 하하 크게 웃었다.
“주홍, 긴장할 것 없어. 이렇게 얼굴을 굳히기만 하면 주름이 늘고 말 거야.”
주홍은 늘 표정 없는 얼굴을 유지했다. 한안은 콧등을 문질렀다. 정말 재미없다.
“급람, 주홍, 오늘 너희를 데리고 놀러 갈 거야.”
급람의 눈이 환해졌다.
“소저, 부를 나가시게요?”
“소저, 안 됩니다.”
주홍이 눈살을 찌푸렸다.
“만약 노야께서 아시면 큰일이에요.”
“괜찮아.”
한안은 자신 있었다.
“아버지는 지금 가족의 단란함을 누리느라 바쁘셔. 얼마 동안은 우리를 떠올리시지 않을 거야. 게다가 우리는 정문으로 나가지 않을 거야. 주홍은 은자를 잘 챙겨. 우리는 동성에 있는 무관으로 가서 한명을 위한 무술 선생님을 찾을 거야.”
주홍은 말리고 싶었지만 한안의 단호한 표정을 보고 하려던 말을 삼켰다. 다만 그녀의 미간에는 여전히 걱정이 가득했다. 반면에 급람은 바깥나들이를 간다는 생각에 기뻐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어 부랴부랴 물건을 챙기러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청추원 안의 뒷담에는 개구멍이 하나 있었다. 한안이 어렸을 때 발견한 것이었다. 어릴 때는 종종 급람, 주홍을 데리고 개구멍으로 몰래 빠져나가 놀곤 했다. 일곱 살 이후 여자가 갖추어야 할 도리를 배우면서 개구멍을 이용하는 게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어 더 이상은 이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과거로 돌아왔고 그녀의 마음은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여자가 갖추어야 할 도리라는 건 그저 사람의 삶을 속박하는 세속적 예법에 불과했다. 어째서 이런 제약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즐거움을 포기해야 하지.
한안은 주홍에게 여종의 옷을 가져오게 했다. 세 사람은 거친 천으로 된 목면 옷을 입고 개구멍을 따라 밖으로 기어 나왔다. 가장 앞에서 기어가고 있던 한안이 돌연 피식 웃자 급람이 깜짝 놀랐다.
“소저, 왜 그러세요?”
한안은 고개를 저었다.
“이런 게 사실 정말 즐거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후부의 소저 노릇은 정말 재미없어. 오히려 일반 평민만 못하지.”
급람은 고개를 저었다.
“일반 백성이라고 반드시 자유로운 것은 아니에요. 집집마다 어려움이 있는 법이지요. 소저의 생활은 많은 백성이 간절히 바라지만 얻을 수 없는 거예요.”
“일리 있네.”
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에 비해 그녀는 많이 활달해졌고 또한 목숨을 더욱 귀하게 여겼다. 이번 짧은 생애서는 반드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것이다. 물론 그 전에 모친을 위한 복수가 우선이었다.
세 사람은 개구멍을 기어 나와 몸에 묻은 진흙을 털어냈다. 한안은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고 여종으로 분장했을 뿐, 자신이 남들과는 어딘가 다른 점이 있다는 데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세 사람은 마차를 고용할 수도 없었고 평소에 외출하는 일이 지극히 적었기에 아예 거리를 구경하면서 걸어가기로 했다.
한안은 외벽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낯선 신영 하나가 줄곧 그녀들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남자는 풀 한 줄기를 입에 물고 멀어져가는 그녀들의 뒷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며 말했다.
“장부의 여종은 정말 이상하구나. 멀쩡한 대문을 놔두고 굳이 개구멍을 기는 것을 좋아하다니.”
남자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또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재미있군.”
*
거리에는 사람들이 오가고, 도로 양옆에는 잡다한 물건을 파는 행상들이 있었다. 급람은 부를 나올 기회가 아주 적었기에 두리번거리며 신이 났다.
한안도 이런 것들이 신기하긴 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눈빛으로만 신기해하고 호기심을 드러냈을 뿐이었다. 셋 중에서 가장 침착한 주홍은 무의식적으로 가장 앞에서 걸으며 한안을 보호했다.
한안은 거리를 구경하면서 생각했다. 바깥세상이 이처럼 근사한 줄 진작 알았다면 더 많이 부를 빠져나와 통쾌하게 놀았을 텐데.
후부의 귀한 딸이라는 한안의 명칭은 거의 무늬뿐이었다. 장사양은 여태까지 그녀에게 관심을 둔 적이 없었다. 모친이 세상을 떠난 후, 부중에서 그녀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덕분에 그녀가 몰래 외출하기에는 편했다.
순창 무관은 대종에서 가장 유명한 무도관이었다. 이곳을 개관한 사람은 전 왕조의 무과 장원인 양기였다. 무도관 내의 무술 선생님은 일류 중의 일류인 고수였기에 수많은 명문세가에서 자식들을 무도관에 들여보내 무예를 배우게 하기를 원했다.
순창 무관에는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다 아는 불문율이 있었는데, 바로 무도관 내에서만 무예를 배워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유명한 일화도 있는데 성상이 어린아들인 13황자를 위해 무관의 무술 선생으로 양기를 궁에 들여 무예를 전수받고자 청하였는데도 양기가 이를 거절하여 황제가 대노하여 양기에게 벌을 내리려 했지만 다수의 대신들이 극구 말려 종국에는 흐지부지 되었다는 얘기였다.
그때 한안은 양기에게 몹시 탄복했었다. 단순히 성상을 거절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 규정을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모두에게 적용했기 때문이었다. 무도관 내에서만 배움이 있어야 하는 규칙도 정말 대단했다. 학생과 무술 선생 모두 무관에 머물러 많은 사람이 눈을 뻔히 뜨고 지켜보는 가운데에서는 어떤 허튼짓을 할 수 없으니 서로에게 전심전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이렇게 생각하니 한안은 양기에 대해 얼마간 호기심이 일었다.
급람은 그새를 참지 못하고 길가에서 연지와 분을 파는 행상을 흘끔거렸다.
“사고 싶으면 사. 어째서 보는 것도 이렇게 쩨쩨한 거니? 네가 원래 이렇게 구두쇠인 줄을 몰랐구나.”
“소저!”
급람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지금이 어느 때입니까. 부중에 한창 은자가 모자라는 때이니 주머니 사정이 넉넉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사도 늦지 않습니다.”
한안은 더욱 흥미진진했다.
“연지 한 갑 정도야 소저인 내가 살 수 있지.”
손 가는 대로 소매 속에서 동전 몇 개를 더듬어 꺼냈다.
“두 갑을 사. 너와 주홍 한 사람에 한 갑씩.”
주홍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저희는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런 거 한두 개 정도로 나를 대신해서 절약하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한안은 화가 나기도 하고 또 우습기도 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월급도 같이 아끼는 게 좋겠네.”
이제는 급람도 잠자코 있었다. 한 푼의 돈이 영웅 호한을 곤란하게 한다고 했다. 은자는 지금 그녀에게 있어서 큰 문제였다.
그녀는 주위를 바라보았다. 북적거리는 군중들 속에서 상인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보였다. 어떤 방법을 써야 신속하게 은자를 벌 수 있을까?
지금 당장은 좋은 생각이 나지 않자 생각을 잠시 미뤄뒀다. 앞으로의 경제 사정은 그녀가 주요하게 고려해야 할 문젯거리였다.
서성은 상인 거리 경계에 있어 그런지 북가에 비해 더욱 번화했고 왕래하는 손님들로 매일 북적거렸다. 이로 인해 건축물은 더욱 번잡하고 정교했고 푸른 기와에 붉은 누각 등은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냈다. 시장에는 놀러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급람과 주홍은 길을 걷는 내내 한안을 감싸듯 보호했다.
골목 깊숙한 곳에 다다르니 마침내 높고 큰 건물 한 곳이 보였다. 건물 상부에 걸린 편액에는 ‘순창 무관’ 네 글자가 쓰여 있었다. 그 필치는 웅혼하고 힘이 넘쳐 주목을 끌 만했다.
급람이 앞으로 나아가 붉은 문 위의 붉은 자물쇠를 잡고 두들겼다. 이내 문이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안에서 검은 천으로 된 마고자를 입은 청수한 어린 동자가 걸어 나왔다.
한안을 비롯한 세 여자를 보더니 어린 동자는 멍해졌다.
“낭자께서 무슨 일이신지요?”
한안은 가볍게 웃었다.
“번거롭겠지만 소선생(小先生: 선생에게 배우면서 한편으로는 남을 가르치는 사람)께서는 길을 안내해 주시지요. 우리는 무예 선생님을 찾아왔습니다.”
순창 무관이 문을 연 이래로 지금까지 여자를 받은 적은 없었다. 어린 동자는 당황스러운 것을 꾹 참느라 얼굴이 빨개졌다.
“여러분은 여자입니다.”
“순창 무관에 여자는 무예를 배울 수 없다는 규정이 있나요?”
한안이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그를 보았다. 이 어린 동자는 한명보다 더 귀여웠지만 우둔했다.
어린 동자는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했다.
“아니요, 하지만…….”
“아니라면 소선생은 길을 안내해 주시지요.”
한안은 그와 계속해서 씨름하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면 귀찮아질 것이다.
어린 동자는 난처해하며 잠시 생각하다가 비로소 마지못해 말했다.
“저를 따라 들어오시지요.”
한안이 웃으며 말했다.
“소선생은 마음 놓으세요. 스승님을 뵙는 것은 우리 자매들 스스로 방도를 찾을 터이니 어쨌든 들여보내 주기만 하면 됩니다.”
어린 동자는 얼굴이 붉어졌다. 낭자의 기개는 대단했다. 그녀는 한눈에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간파했다. 사부는 성격이 괴팍하고 엄하셔서 만일 그가 낭자를 무관에 데리고 온 것을 보시면 화를 내실 것이고 자신을 어떻게 벌하실지 알 수 없었다. 동자는 결국 참지 못하고 한안을 몰래 한 번 훔쳐보다가 웃음기 가득한 눈빛과 딱 마주쳤다. 순간 얼굴이 더욱 빨개졌다. 어린 동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오로지 발걸음을 재촉하기만 했다.
급람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소저, 정말 들어가는 거예요? 이 무관 안은 전부 남자예요.”
“겁낼 것 없어.”
한안이 말했다.
“여기는 국자감과 마찬가지로 공부하는 곳에 불과한데 어디 남녀를 따지겠어. 그리고 무관 안에도 시중드는 하녀는 있을 거야. 어쩌면 무예를 배우는 여자도 있을지 모르고.”
마치 그녀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전방에서 여자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욱 오라버니, 또 지셨어요!”
한안이 순간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저쪽에서는 이미 그녀들을 발견한 듯했다. 연달아 낯선 여자 목소리가 울렸다.
“너희는 누구냐?”
한안은 고개를 들었다. 어느 틈인지는 모르겠지만 바로 앞에 아리따운 소녀 한 명이 서 있었다. 소녀는 열서너 살 정도의 모습이었고 무예 수련 때 입는 간편한 경장 차림이었다. 한안은 그녀의 의복이 귀중한 금사 비단으로 만든 것임을 알아차렸다. 주목을 끌 정도로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고급스러웠다. 이런 옷차림으로 보아 혹 황가 사람이 아닐까?
막 헤아려 보고 있는데 앞의 어린 동자가 입을 열었다.
“운예 군주.”
운예 군주, 성상이 가장 총애하는 그 운예 군주?
운예 군주는 이미 호기심에 차 물었다.
“소이, 얘들은 새로 온 하녀야?”
소이는 서둘러 손을 흔들었다.
“군주 전하, 이 낭자들은 무예 선생님을 구하러 오신 겁니다.”
“무예 선생을 구한다고? 순창 무관에 언제부터 여제자를 받았지? 나는 모르고 있었는데.”
가볍고 나지막한 남자 목소리가 돌연 울리더니, 연이어 운예 군주의 몸 뒤에서 붉은색 옷을 입은 남자 하나가 걸어 나왔다.
한안은 운예의 시선을 따라 돌아보다가,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이 남자, 정말 아름답구나.
붉은색의 비단 장포를 몸 위에 느슨하게 걸쳐 입어 쇄골이 드러났지만 경박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형용할 수 없는 자유로움과 풍치, 멋스러움이 있었다. 얼굴은 더욱 절색이라 가을철 맑은 물로 눈빛을 삼고 옥으로 살결을 빚은 듯 실로 아름다운 외모였다. 남자는 얇은 입술을 가볍게 다물고 요염한 느낌의 눈을 휘며 눈빛을 맞춰왔다.
“낭자들은 뭐라고 부르지?”
그는 한안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안은 그가 자신을 쏘아보듯 응시하자 조금 불편했다. 운예 군주가 옆에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예 웃음기를 거둔 채 담담하게 말했다.
“소녀 성은 예이고 이름은 달예입니다.”
붉은색 옷 남자는 입꼬리를 끌어당겨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예 낭자?”
한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 남자의 차림을 보나 운예 군주와의 관계를 보나 추측건대 경성 어느 대갓집 공자 같았다. 이번 외출은 몰래 빠져나온 것이니 본명을 말할 순 없었다. 만약 자신의 신분이 들통나면 큰일이었다. 하물며 이런 사람은 건드리지 않는 편이 좋은 법이었다.
혁련욱은 한안에게 정신이 팔려 자신을 소개해야 한다는 것도 잊었다. 그는 기분이 언짢았다. 경성의 어느 집 딸이 자신을 보고도 넋을 잃지 않는단 말인가. 눈앞의 이 아이는 달랐다. 평범한 옷을 입고 있지만 확실히 고상해 보였다. 게다가 측근의 두 여종이 그녀를 보호하듯 서 있는 모습은 마치 그녀를 모시고 있는 것 같았다. 혹시 어느 대부호 집의 소저가 아닐까? 하지만 혼자 무관에 들어와 무술 선생을 구한다니. 이런 행동은 관례에 어긋나니 대갓집 규수가 할 만한 일이 아닌 듯한데.
한안은 운예 군주를 항해 예를 행하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녀는 급한 일이 있습니다. 군주께서는 소녀가 먼저 떠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운예 군주는 고개를 끄덕였고 소이에게 그녀들을 데리고 가라고 했다. 눈앞의 소녀는 평소에 보던 규방 소저들과 많이 달랐다. 적어도 그 소저들은 욱 오라버니를 보고 눈을 부릅뜨지는 않았다. 이 아이는 조금이라도 일찍 떠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듯했고 게다가 자리를 떠날 때는 욱 오라버니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혁련욱은 한안이 가겠다 말하고 바로 가버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게다가 자신을 무시하고 운예에게만 예를 올렸다. 그가 지금껏 여인에게 이렇게 냉대를 받은 적이 있던가. 혁련욱은 순식간에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한안이 떠난 잠시 후, 화단 뒤에서 파란 옷을 입은 남자 하나가 걸어 나왔다. 운예와 혁련욱이 그 자리에 넋을 놓고 서 있는 것을 보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느냐?”
혁련욱이 그를 보더니 즉각 뛰어 왔다.
“내가 방금 재미있는 여인을 만났어. 네가 나를 대신해서 경성 어느 집 여인인지 물어봐 줘.”
“어째서 직접 물어보지 않고?”
혁련욱의 수려한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처량하게 그를 보며 말했다.
“며칠 전에 이(李) 각로 부인이 딸을 데리고 부중에 손님으로 왔어. 내가 이가의 고명딸인 줄도 모르고 말을 잘못해서 부친이 부에서 나가지 말라는 벌을 내리셨거든. 만약 오늘 운예가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밖으로 나오지 못했겠지. 지금 일거수일투족을 모든 사람이 지키고 있는데 어떻게 직접 물어볼 수 있겠어?”
운예는 혁련욱을 보며 생각했다. 말을 잘못했다고? 아마도 또 희롱한 거겠지. 그녀의 사촌 오라비는 본래부터 예법에 구애를 받지 않았다. 자신들 앞에서야 아무 상관 없다지만 외인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 이 각로는 됨됨이가 고지식한데 딸이 희롱당했으니 틀림없이 대노했을 것이다. 어사에게 혁련 노야가 아들을 잘못 가르쳤다고 탄핵당하지 않은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었다.
“그녀가 어떻게 너의 기분을 거슬렀는데?”
부운석은 혁련욱의 모습을 보고 생각할 필요도 없이 자신의 벗이 또 무슨 안 좋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낭자는 욱 오라버니의 미색에 현혹되지 않았어요!”
운예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고 말을 마치며 혼자 피식하고 웃었다.
“요 녀석, 네가 이렇게 나를 놀리는 것을 좋아하니 다음에는 너를 데리고 나오지 않을 테야.”
혁련욱이 쌀쌀맞게 그녀를 힐끗 보자 운예 또한 그를 향해 익살맞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안 데리고 나오면 안 데리고 나오는 거지, 뭐. 나는 운 오라버니를 찾아서 놀러 가겠어요.”
혁련욱은 운예가 뭐라 하든 그저 조금 전의 여자아이만 생각하며 부운석을 보고 말했다.
“운석, 네가 반드시 이 일을 도와줘야 해. 그 애가 어느 집 아이인지만 알아다 주면 내가 집에 있는 그 귀곡 선생의 단청(丹靑: 그림)을 네게 줄게.”
“그녀에게 무슨 특징이 있지?”
“그 애가 제 이름이 예달예라고 했어.”
혁련욱의 말소리가 떨어지자마자, 맞은편 부운석이 괴이한 표정을 드러냈다.
“왜 그래? 너 뭐 생각났어?”
“예, 달, 예?”
부운석이 한 글자 한 글자 다시 반복해서 물었다.
혁련욱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운석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이 좋은 벗은 평소 보기에는 참 영민해 보이는데 어떻게 남에게 놀림당한 줄도 모르는 걸까.
예달예는 무슨. 내가 너의 어르신이라는데. (예달예의 발음이 ‘내가 너의 어르신’과 성조만 살짝 다르고 똑같다. 한안이 혁련욱에게 ‘내가 너의 어르신이다’라고 이름을 댄 꼴-역주)
한안은 소이의 뒤를 따라가다 무심코 급람의 발그레한 낯을 얼핏 보았다. 왜 그런가 싶다가 비로소 이해했다. 조금 전 붉은색 옷을 입은 남자의 절색인 용모 때문에 주홍같이 냉정한 사람도 넋이 나갔으니 그럴 법했다. 한안은 가던 길을 멈추고 소이에게 물었다.
“소 선생은 아시나요, 조금 전 그 공자가 어떤 분이신지?”
소이는 조금 전의 일 때문에 다소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여기에서 우연히 운예 일행을 맞닥뜨릴 줄은 짐작도 못 했다. 거북한 상황에 처하게 만든 것은 자신의 본의가 아니었다. 한안이 분위기를 누그러뜨릴 마음이 있다는 생각이 들자 얼른 이어서 말했다.
“그분은 좌상의 적자이십니다. 또한 무관에서 무예를 배우고 계시지요.”
좌상의 적자. 가슴속에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고 한안은 그제야 기억해냈다. 전생에 위여풍에게 시집을 가게 되면서 장사양은 그녀에게 조정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일러 주었다. 그때는 이런 일들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에 좌상에 대해서는 한 가지 인상뿐이었다.
좌상 혁련무명은 슬하에 혁련욱이라는 아들 하나만 두었다. 혁련욱은 정실 부인에게서 태어났고 경국지색이라 할 만큼 아름다운 용모에 자태가 곱고 화려했다. 그래서 빼어난 외모로 무수한 경성 여인들의 마음에 불을 지핀다고 했다. 그는 젊고 풍류를 즐길 줄 알며 행동도 대담하여 그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이분법적으로 나눠졌는데 그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관례를 벗어난 독특한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이런 사람이 생각지도 못하게 무관에 와서 무예를 배우다니. 순창 무관은 그녀의 예상보다 더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
무관이 차지하고 있는 대지는 광대했고 가는 길에 보이는 장식은 간단하고 단정했다. 흑과 백 두 가지 색을 사용한 건축물 사이사이 푸른 기와와 잿빛 담이 강경한 기질을 환히 드러내고 있었다.
문을 들어가 화단을 돌자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면서 시야가 넓어졌다. 눈빛이 닿은 곳은 공터였다. 먼 곳에서 무공을 연마하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아마 무공을 연습하는 제자들일 것이다.
한안은 곁눈질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숙이고 소이를 따라 긴 화랑으로 들어갔다. 몇 개의 모퉁이를 돈 후, 한 갈래 높디높은 계단을 걸어 올라가니 눈앞에 대전이 나타났다.
소이는 한안의 무리를 이끌고 대전으로 걸어 들어가 가운데에 있는 사람에게 공손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승님, 이 낭자가 무예 선생을 구하러 왔습니다.”
한안은 가운데 높은 자리에 단정하게 앉아 있는 사람을 보았다. 그는 환갑의 나이로 보이는 노인이었다. 수염과 머리카락이 모두 하얬지만 뺨은 붉고 윤기가 흘렀다. 그는 눈을 감고 허리를 똑바르게 세워 앉아 왼손에 쇳덩어리를 움켜쥐고 있었다. 초겨울이라 이미 한기가 살을 에듯 매섭게 추웠는데도 눈앞의 노인은 갈색 홑겹 옷만 입고 있었다. 노인임에도 신체가 강건하고 원기가 있으며 기백과 도량이 현저히 뛰어나다 할 만했다.
소이의 말을 듣고 노인은 두 눈을 홱 떴다. 그의 눈빛이 곧장 한안에게로 향했다.
한안은 살짝 고개를 숙이고 노인의 눈빛을 피하지도 숨지도 않은 채 거리낌 없이 예를 올렸다.
“양 대인을 뵙습니다.”
양기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렇게 나이를 먹도록 살아오면서, 그는 적지 않은 사람을 만났다. 그 앞에서 침착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참으로 불가사의하게도 상대방은 한눈에 보기에도 아직 성년조차 되지 않은 어린아이라는 점이었다.
한참 후에 그가 비로소 입을 열어 말했다.
“나는 조정 사람이 아니다. 대인이라는 두 글자를 이 노부가 감당할 수 없구나.”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양 노선배.”
한안은 그의 지적을 흔쾌히 따랐다.
양기의 눈 속에 의아함이 스쳤다. 여자아이는 재치마저 갖추고 있었다. 그는 손안의 쇳덩어리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무예 선생을 구하러 왔다 하였느냐?”
“그렇습니다.”
한안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누구를 위하여 구하려는 것이냐?”
양기는 한안의 목적을 바로 파악했다. 그의 사람 보는 안목은 매서웠다. 눈앞의 세 사람 중 한안이 나머지 두 사람의 주인이라고 한눈에 단정했다. 그녀들이 이렇게 분장을 한 것은 남에게 진짜 신분이 들키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며, 아마 그들의 신분은 낮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하물며 한안처럼 대범하고 침착한 기질은 한미한 가문에서는 결코 길러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갓집의 소저가 무관에 온 것은 자신을 위한 무예 선생을 구하려 함일 리 없었다.
“외람되게도 제 자신을 위한 무예 선생을 구하고 싶습니다.”
급람과 주홍의 얼굴이 멍해졌다. 양기는 이상하다 느끼며 얼굴빛을 달리한 채 물었다.
“낭자는 노부를 놀리려는 것인가? 여자가 어찌하여 무예 선생을 구한단 말이냐?”
양기는 무가 장원을 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언성을 높이지 않고도 위엄을 보였다. 더구나 엄숙한 표정을 할 때면 눈썹만 한 번 찡그려도 사람들은 심장이 떨어질 듯 놀라곤 했다. 소이가 그를 두려워하는 것도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한안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자신과 양기는 이익이 상충하는 일이 없으며 그래서 위험할 리 없다는 것을.
소이가 전당 가운데에서 줄곧 얼굴에 웃음을 담뿍 담고 있는 소저를 위해 남몰래 손에 땀을 쥐고 있는 바로 그때, 웃음기를 머금은 청량한 음성이 들려왔다.
“양 노선배의 무관은 여제자를 받지 않는 규정이 있습니까?”
양기는 멍해져서 눈을 들어보았다. 앞에 있는 소녀의 두 눈은 밝고 환했으며 조금의 두려운 기색도 없었다.
“예전에 들은 적이 있습니다. 순창 무관은 대종에서 독보적이라는 것을요. 하지만 제 생각에 순창 무관이 이렇게 장기간 번성하며 쇠퇴하지 않는 것은 바로 다른 무관이 미치지 못하는 이 무관만의 독특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순창 무관의 독특함은 바로 절대적인 공평함에 있지요.”
마치 마주하고 있는 것이 오래된 옛 친구라도 되는 양, 한안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입을 열어 계속해서 말했다.
“순창 무관에서는 한미한 가문의 제자이든 귀한 가문의 귀족이든 간에 모름지기 이곳에서 무예를 익혀야 하지요. 이것은 한미한 가문의 자제에게도 차별받지 않는 기회를 주는 것이지요. 저는 이런 규칙을 정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됨됨이가 강직하고 비굴하지 않으며 품성이 고결하다고 생각합니다.”
양기는 크게 동요했다. 그는 한미한 가문의 자제로 어렸을 때 한 고수의 가르침을 얻어 비로소 무예를 익힐 수 있었다. 그는 빈곤한 집안의 사정을 바꾸기 위해 맹렬히 연습했다. 연습 끝에 마침내 연무장에서 다른 사람과 겨룰 기회를 갖게 되었고 무장원이라는 칭호까지 빼앗을 수 있었다.
그의 출신이 비천하였기 때문에 한미한 가문의 제자들이 공부하는 어려움을 깊이 알고 있었다. 순창 무관을 여는 것은 그의 어릴 적 꿈이었다. 무예를 익히는 한미한 가문의 제자들 속에 자신의 젊을 때 그림자가 있었다. 그들을 보며 젊을 적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 일은 단지 극소수의 사람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린 이 알 수 없는 소녀의 한마디에 자신의 과거가 폭로될 줄이야.
“빈부에 공평을 기할 수 있으니 남녀 간에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설마 양 노선배도 여자의 신분은 한미한 가문이라는 신분보다 더 비천하다고 여기시나요? 그럼, 황후, 황태후께서는 스스로를 어떻게 처신하셔야 할까요?”
뜻밖에 황후, 황태후까지 끌어다가 이야기를 하다니. 황당무계하기는 하지만, 확실히 일리는 있었다. 만약 여자가 무예를 익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바로 그의 심중에 여자는 한미한 가문의 제자보다 더 비천하다고 여긴다는 것을 증명하는 꼴이 된다. 그러나 황후와 태후는 하늘 아래 가장 존귀한 여인이니 이렇게 말한다면 자신은 황가에 대 불경죄를 저지르는 것이 된다. 그는 자신이 소녀의 말을 반박할 길이 없음을 깨달았다.
한참 동안 침묵하던 양기는 돌연 하하 큰 소리로 웃었다.
“대단히 날카로운 입을 가진 이로다!”
한안은 놀라지도 않고 여전히 조금 전의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저는 그저 제 자신을 위한 무예 선생을 구하고 싶을 뿐입니다. 만약 제 생각이 잘못되었다면 선배께서는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양기는 눈앞의 어린 소저를 응시했다. 그녀는 열두 살 정도에 불과한 모습이었다. 당당하고 차분하게 제 입장을 말할 수 있으며 태도가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았고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알았다. 협박할 줄만 아는게 아니라 온순한 말과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일 줄도 알았다. 실로 지혜로웠다. 이 정도의 영특한 지혜와 침착성은 시간이 흐르게 되면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만약 이 낭자가 남자의 몸이었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도제로 들이려 했을 텐데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의 말에 일리가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노부의 이 무관은 무예를 배우는 제자들이 모두 남자이니라. 네가 만약 무예 선생을 구하려 한다면 바로 입관하여 무예를 배워야 하는데 많은 남자들과 한데 섞여 지내는 것은 실로 적절하지 않구나. 누군가 악독하게 마음을 먹고 그 사실을 폭로한다면 네 명성에 흠집이 생길 것이다.”
양기의 말이 맞았다. 한안이 제아무리 대담하다 해도 날마다 남자 무리와 한데 머물 수는 없었다. 만약 알려진다면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장가 전체가 체면을 잃을 것이다.
양기는 결코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순창 무관 내에서 무예를 배우는 제자는 모두 남자였다. 설령 운예 군주라 해도 때때로 나들이하듯 놀러 오는 것이리라. 관내 선생은 그녀에게 가장 간단한 초식 정도만 가르칠 테니 그 정도야 장난으로 치부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정식으로 여자가 배우려 하는 것은 한안이 첫 번째였다.
“제가 어려운 일을 강제로 요구하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늘은 그저 한 가지 방법을 말씀드리려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듯이 물건은 적을수록 귀하고 무릇 일은 먼저 기선을 잡는 것이 유리하지요. 순창 무관이 누구나 차별하지 않는 것은 그래서 특별한 것입니다. 만약 차별 없는 무관이 또 하나 출현하는데 이 무관이 마침 여제자를 받는다면요?”
한안은 주의를 환기시키며 말했다.
“선배께서도 분명 알고 계실 겁니다. 남자만 한미한 가문의 출신이 아니라 여자들 또한 한미한 가문 출신이 있다는 것을요.”
양기의 눈빛이 번뜩이면서 한안을 노려보았다.
“네가 노부를 협박하고 있는 것이냐?”
“제가 감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한안은 차분하게 말했다.
“다만 가설을 세워본 것뿐입니다. 노선배께서도 알고 계시다시피 여자가 무예를 배우는 것은 단지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관내의 무예 선생 같은 명망 높은 선생은 필요하지 않지요. 그저 재주가 있는 무예 선생이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여자가 무관에 들어가게 된다면 경성 바닥은 반드시 시끄러워지겠지요.”
한안은 곁눈질로 양기를 한 번 쓸어보고, 그를 설득할 마지막 한 수를 두었다.
“여자 무관이 일단 준공되면 노선배께서는 여성 전용 무관을 유일무이하게 설립하시는 겁니다. 경성 안에서 가장 부족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 바로 부귀한 집의 여인들이지요. 제 가설을 누군가는 이해할 것입니다.”
양기는 분노하여 말했다.
“도대체 무엇을 할 생각이냐?”
주홍과 급람은 중간에서 흉신 같은 노인이 자기 집 소저를 상하게 할까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결국 서둘러 몸을 옆으로 돌려 한안을 몸 뒤에 보호하려 했다.
노인의 일갈에도 끄떡없는 한안은 양기를 응시하며 말했다.
“오늘 제가 이곳에서 무예 선생을 구하는 일은 그리 급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노선배에게 건의를 드립니다. 만약 노선배께서 여자들을 위한 무관을 짓게 된다면 노선배께 더할 나위 없이 좋을 일이 될 겁니다. 노선배의 이름 아래에 있는 무관이라면 고관과 귀인들도 다소 걱정하지 않을 테고요.”
양기의 마음이 움직였다. 사실 여러 해 전에 그도 이런 방법을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머릿속을 가볍게 스쳤다가 바로 사라졌을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남보다 한 수 위라고 생각하며 자부심이 강했다. 그는 어떤 일이든 유일무이하기를 바랬다. 만약 다른 사람이 먼저 여자 무관을 짓는다면 그는 반드시 유감스러워하게 될 것이다. 만약 자신이 제일 먼저 짓는다면 비록 위험은 있겠으나 좋은 명성을 거머쥘 수 있을 것이었다. 명예와 재물도 함께 얻을 수 있을 것이니 나쁘지 않았다.
“너의 제의는 너무도 대담하구나.”
양기는 평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좋은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너는 무엇을 얻으려 하는 것이냐?”
이 소녀는 분명히 준비를 하고 온 것이다. 천하에 공짜 밥은 없는 법이다. 이렇게 그를 위해 생각을 내놓았으니 반드시 요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한안은 기뻐하며 가벼운 소리로 말했다.
“간단합니다. 여자 무관이 준공된 후, 소녀는 무관에 들어가 무예를 배우고 싶습니다.”
양기는 무언가 이상하다 생각했다.
“그리 간단하다고?”
한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제 남동생도요. 무관에 들어온 후에는……. 번거로우시겠지만 노선배께서 직접 가르쳐 주시기를 청하고 싶습니다.”
양기는 화내지 않고 도리어 웃었다.
“황당무계하구나! 노부는 금생에 오직 한 명의 제자만 받았다. 네 형제가 무슨 자격이 있어 내 문하에 들어올 수 있겠느냐?”
한안도 자신의 바람이 황당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경성 안에 고관과 귀인이 그렇게 많지만, 양기는 그들을 가르친 적이 없었다. 한명이 무슨 특별한 점이 있어 이 무장원이 높이 평가하게 하겠는가?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어려운 일을 강제로 요구하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정에 호소할 뿐이지요. 제 남동생이 무예를 배우는 일은 남에게 얘기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노선배의 무관은 모름지기 제자가 무관에 들어와서 무예를 배워야 하지요. 하지만 제 남동생은 무관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노선배께서 사적으로 전수해 주시기를 청하고 싶습니다.”
이 말을 마치고 한안은 매우 서글퍼졌다. 순창 무관의 양기는 가장 좋은 무예 선생인데 한명은 사적으로 무예를 배울 수밖에 없다니.
예상 밖의 일이었는지 한참 동안이나 침묵이 흐른 뒤에 양기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를 데리고 와 봐라. 그가 나의 가르침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직접 보겠다.”
한안은 순간 멍해졌다가 그 의미를 깨닫고는 놀랄 듯이 기뻤다.
“노선배의 말씀은 승낙하신다는 건가요?”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설령 그가 나한테 배울 자격이 있다 해도 노부와 그가 스승과 제자로서 걸맞지 않을 수 있다. 다만 노부는 평생에 신세 지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이건 네가 방법을 제시해 준 데 대한 보답일 뿐이다.”
양기 손안의 쇳덩이가 잠시 멈추었다. 자신도 어째서 갑자기 생각이 바뀌어 눈앞의 소녀에게 승낙을 했는지 명확히 알지 못했다.
한안은 감격하고 또 흥분했다. 즉각 매우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양 노선배.”
어쩌면 일의 진행은 예상보다 순조로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안은 일이 잘 풀려 기분이 좋아졌고 얼굴에 웃음기가 드러났다.
급람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소저, 정말로 무관에 가서 무예를 배우시려는 거예요?”
한안은 콧등을 문질렀다.
“무예를 배우는 것은 몸을 지키는 거야. 조금 배워두는 것도 나쁘지 않아.”
과거 그녀는 규방에 앉아 수놓는 법이나 시 짓는 법을 배웠다. 세상 사람들이 여자의 재주나 학식으로 인정하는 것은 시를 읊고 수를 놓는 것이었다. 이런 것들을 잘하는 것이 바로 재녀였다. 이런 것들은 겉보기엔 화려해 보이지만 조금도 실용적이지 못했다. 무예를 연마하여 몸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견실한 재주일 것이다. 거문고, 바둑, 서예, 그림 같은 것보다 훨씬 더 쓸모 있을 터였다.
이미 저녁에 가까운 오후였다. 길가에 자리를 펴고 물건을 팔던 소상인들은 정리를 하고 집에 돌아가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야시장이 열렸다.
불빛이 휘황찬란한 야시장은 모친이 계실 적, 명절에 여자 식구들을 따라 놀러 나갈 기회가 있을 때나 볼 수 있었다. 모친은 비단 같은 꽃등의 아름다움을 몹시 그리워했다. 언젠가는 한안도 자신의 세월을 가둔 네모난 후부를 떠나 넓은 세상 속을 걸으면서 태평성대의 아름다운 경치를 두루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 전 순창 무관에 있을 때, 한안은 급람을 시켜 은자를 어린 동자에게 몰래 건네주게 하였다. 그리고 어린 동자에게 그 은자를 양기에게 가져다주게 하라고 분부했다. 한안이 양기를 위해 좋은 방법을 내어놓음으로 양기는 한명에게 무예를 가르치겠다고 반 승낙을 했다. 하지만 자신이 무관에 들어가서 무예를 배울 예정이니 그건 따로 계산하는 것이 맞다고 여겼다. 이건 이거고 그건 그거다. 결국 손안에 남은 것은 약간의 은전뿐이라도 한안은 칼같이 계산했다.
주홍은 약간의 과자와 빵을 조금 샀다. 급람이 과자를 수건에 넣고 잘 싸서 챙기기도 전에 돌연 말 울음소리가 귀를 뚫고 들려왔다. 뒤이어서 크고 거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옆으로 물러나라! 마차가 안 보이는 것이냐?”
한안이 급람을 다급히 잡아당겨 가까스로 똑바로 서는데 황목 마차 한 대가 몸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마차는 몇 바퀴 달려나간 후에 서서히 멈추었다. 급람과 한안이 길 옆으로 급히 피하면서 손안의 과자가 땅 위에 온통 흩어졌다. 본래 성격이 괄괄한 급람은 즉각 걸어나가 소리쳐 말했다.
“이보세요, 대로 위에서 말을 탄 채 마구잡이로 돌진하면 어떡하겠다는 거예요? 사람을 들이받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마부는 흉악하고 거칠게 생긴 사내였지만 매우 좋은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그는 급람의 추궁을 듣는 둥 마는 둥 차갑게 웃었다.
“들이받아? 어디서 나온 돼먹지 못한 거친 것이 세자께 대들어? 어디 감히 여기서 큰소리를 쳐?”
세자? 한안은 멍해졌다. 이어서 익숙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주위는 이미 구경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모인 상태였다. 한안은 심장박동이 멈춘 것 같았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 기억이 머릿속 전부를 뒤덮으면서 순간 뻣뻣하게 굳어져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손 하나가 마차의 휘장을 걷어올리자 준수한 얼굴이 드러났다. 그 눈썹과 눈은 한안이 매일 밤 떠올리며 그리워하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끝없이 괴롭고 황량하기만 했다.
위여풍, 마침내 그를 보았다. 잘못되고 빗나간 인연이니 혹시 악연이 아닐까? 한안은 고개를 숙였다. 세자는 장어산이 한안을 독살할 계획을 꾸미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한안이 사랑했던 온화한 심성의 군주는 잘생긴 거죽 아래 어떻게 그리도 끔찍한 심계를 감추고 있었을까.
급람도 마차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이 그렇게 높은 신분일 줄은 생각지도 못하여 한순간 그 자리에서 멍해졌다. 그러나 상대방이 먼저 잘못했는데 자신이 먼저 고개를 숙여 잘못을 인정하려 하니 그 또한 체면 때문에 꺼려졌다.
주홍이 그녀의 옆으로 걸어와 마차 위의 사람을 향해 두 손 모아 절을 했다.
“제 여동생이 전하의 마차인 줄을 모르고 세자 전하께 대들었습니다. 제 잘못입니다. 여동생을 대신하여 세자 전하께 잘못을 사죄드리니 부디 넓은 도량을 베풀어 못난 동생을 한 번만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위여풍은 눈썹을 찡그리고 고개를 돌리다가 한 쌍의 맑고 투명한 눈과 마주쳤다. 그 눈빛 속에는 분노와 원통함, 황량함, 또 무력함이 담겨 있었다. 깊고 깊은 절망이 그 눈빛에 한데 모여 맹렬해져서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위여풍은 순간 당황했다가 그 눈빛이 하녀 복장을 한 소녀에게서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소녀의 용모는 평범했다.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오늘 처음 보는 이가 분명했다. 생소한 이 소녀는 어째서 그에게 이런 표정을 드러내는 거지? 그의 마음속에 의혹이 일었다.
그때 마부가 세자에게 대든 급람에게 거칠고 투박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정말 돼먹지 못한 것, 세자 전하께서 아무 말씀이 없으신 건 필히 화가 나신 것이다.”
위여풍은 눈살을 찌푸렸다. 문제를 일으켜서 뭐하겠는가. 즉각 언짢게 말했다.
“됐다. 너희는 가봐라.”
다시 마차 밖을 보았을 때, 군중 속의 소녀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순간 속이 답답하고 손이 떨려 그는 휘장을 내리며 분부했다.
“가자.”
마부는 이미 그의 음성 속 불쾌한 기색을 알아챘는지 서둘러 마차를 몰았다.
주홍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급람을 꾸짖으며 말했다.
“어떻게 이렇게 화를 못 참아. 마차를 보고 마차를 탄 사람이 부유하거나 귀한 신분이란 걸 바로 알았어야지. 어쩜 이리 생각도 없이 달려들어! 만약 소저를 말려들게 했으면 어떻게 됐겠어!”
급람은 억울해서 입술을 삐죽거렸다.
“하지만 과자가 다 부서졌는걸. 그 마차가 마구잡이로 달렸는데 세자 전하라고 해서 이치를 따지지도 않고 멋대로 굴어도 돼? 분명 그들이 먼저 잘못했다고.”
주홍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과자 걱정이야? 소저는?”
한안이 군중 속에서 걸어 나왔다. 조금 전 위여풍이 그녀를 눈여겨보는 듯하여 생각할 겨를도 없이 키가 크고 몸집이 좋은 부인의 뒤에 숨었다. 이런 뜻밖의 상황에 만나게 될 줄은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은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어째서 그 사람을 한 번 본 것만으로 만감이 교차하는 걸까. 한편으로는 위여풍이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챌까 두려웠다.
주홍은 한안의 얼굴이 창백한 것을 보고 급히 말했다.
“소저, 놀라셨죠?”
그리고는 바로 자책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조금만 주의했으면 바로 피할 수 있었는데.”
급람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네 잘못일 수 있어. 분명 그 밉살맞은 마부 놈이 세자 전하를 등에 업고 사람을 괴롭힌 건데.”
한안은 마음속으로 가볍게 조소했다. 사람을 알아보려면 그 주변의 사람을 알아보면 된다고. 위여풍의 마부가 이처럼 버릇없이 날뛰니 위여풍 또한 어떤 자인지 알기 쉬웠다. 조금 전 주홍이 사과할 때, 위여풍이 괜찮다고 다친 곳은 없냐고 걱정하는 말은 들을 수 없었다. 분명 자신의 신분이 높다 생각하고 거만하게 군 것이다. 저런 사람인데 어떻게 그의 겉모습만 보고 홀릴 수 있었을까?
주위를 둘러보니 적지 않은 꽃다운 나이의 여자들이 그에게 푹 빠진 얼굴로 마차가 가 버린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에는 설렘을 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 나도 저렇게 푹 빠진 표정을 지은 적이 있었지. 상대방의 넘치는 활력과 준수한 외모, 쾌활한 성격에 빠져
자연스레 그를 사모하게 되었다. 게다가 그때는 믿어 의심치 않았던 장어산이 세자 전하가 인품이 고결하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으니 이 세상에 어쩜 이리 좋은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뿐이었다.
한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이런 기분들을 머릿속에서 떨쳐내고 싶었다.
“이 일은 그만 말하고 서둘러 부로 돌아가자. 오늘 일은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 언급하지 말도록 해.”
급람과 주홍은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로 돌아와 나올 때 이용했던 개구멍으로 다시 처소에 들어섰다. 방에 들어가 미처 옷을 갈아입지도 못했는데 유모가 다급하게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유모는 한안을 보고 멍해지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소저, 어디 가셨던 거예요? 이 늙은이가 추향원을 한 바퀴나 찾아봤는데도 못 찾았지 뭐예요. 게다가 들은 바로는 오늘 부를 나간 사람은 없는데 누가 부 안에 들어온 것 같데요. 만약에 그 사람들을 찾지 못하면 늙은이가 노야께 가서 고해야겠어요.”
한안은 웃었다.
“유모,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어. 부친에게 고하면 또 무슨 사달이 날지 몰라.”
게다가 장사양이 어디 진심으로 그녀의 생사에 관심이나 기울이겠는가. 만약 주씨 모녀가 옆에서 말을 보태고 과장을 하면 순조롭게 일이 끝날 리가 없을 것이다.
유모는 그때에서야 한안의 옷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알아차렸다.
“소저 어떻게…….”
유모는 무언가 떠올린 듯하더니 크게 놀라면서 입을 가렸다.
“소저, 부를 나가셨어요?”
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자면 길어. 나 먼저 가서 옷 갈아입을게.”
한안은 옷을 갈아입고 앉아서 전후 사정을 모두 유모에게 알려주었다. 다만 중간에 위여풍과 관련된 한 단락은 생략했다. 일의 경과를 모두 듣고 나자 유모는 참지 못하고 질책하며 말했다.
“소저, 정말 무모하십니다. 이렇게 몰래 부를 나가시다니요. 만약 누군가 알고 노야께 고한다면 처벌을 면할 수 없었을 겁니다. 바깥사람들은 속사정을 알지도 못하는데, 만약 무슨 변고가 일어나서 남에게 괴롭힘이라도 당했으면 어쩔 뻔했어요?”
한안은 유모를 위로했다.
“급람과 주홍이 수행했는걸. 게다가 나는 하녀로 분장했고. 누가 나를 알아볼 수 있겠어? 유모, 걱정할 필요 없어. 이후에 만약 이런 일이 또 있다 해도 그저 마음 편히 가지고 있으면 돼. 아버지를 귀찮게 하러 갈 게 아니라면 안 가도 돼.”
유모는 입이 딱 벌어졌다.
“이후에? 소저, 또 나가시려고요?”
한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명이를 데리고 양 노선배를 한 번 뵈러 가야 해. 게다가 여자 무관에 무예를 배우러 가려면 아마도 몰래 갈 수밖에 없을 거야.”
“소저 정말 무예를 배우시게요?”
유모가 그녀를 보았다.
“규방 아녀자는 본래 피부가 곱고 부드러운데……. 소저, 구태여 사서 고생하실 필요가 있으세요?”
한안은 난로 속의 숯덩이를 헤집었다.
“지금은 지난날과 달라. 이 부 안에 우리를 보호해 줄 사람은 없어. 식견과 안목을 넓혀서
내 자신을 내가 보호해야만 해.”
유모는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마음속의 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 손을 뻗어 한안을 품속에 끌어안았다.
“소저, 정말 힘드시죠.”
한안은 유모의 품속에 파고들었다. 따뜻한 감각이 그녀를 매우 편안하게 만들었다. 한안은 저도 모르게 기지개를 켰다.
“안 힘들어.”
모친과 전생의 자신에 비하면 이것은 고생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지금은 안정적이다. 그러나 부중에 들어온 주씨 모녀는 분명 곧 일을 벌이려 할 것이다.
“급람.”
급람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 수중의 바느질거리를 내려놓고 앞으로 다가왔다.
“미 이낭 처소의 사람들과 친하지?”
모친이 세상을 뜨기 전, 매번 급람이 미 이낭 처소의 일을 듣고 왔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미 이낭 처소에 무슨 소식이 있으면 제일 먼저 듣곤 했다.
“소저께서 말씀하신 대로 제가 그쪽 여종들과 친하지요.”
급람이 웃으며 말하자 한안이 손을 흔들었다.
“그럼 너는 가서 미 이낭 처소의 여종들과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면서 그 애들에게 알려. 주씨가 부에 들어왔다고. 노야가 주씨를 매우 총애하여 그녀를 정실로 올릴 뜻이 있다고 말이야.”
급람은 어째서 그렇게 말해야 한다는 것인지는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났다. 유모는 잠깐 망설이다가 물었다.
“소저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게 만일 저 수다쟁이들 때문에 노야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유모, 마음 편히 가져.”
한안은 따뜻한 난로 위에 손을 뻗고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아버지께선 처음부터 주씨를 정실 부인으로 봉할 생각이었어. 그러니 미 이낭도 조만간 이 일을 알게 될 거야. 하지만 지금 알게 된다면 미리 준비를 하겠지. 급람도 정도를 지킬 줄은 아니까 다른 처소 사람들에게는 말할 리가 없고. 미 이낭은 이 일을 알아도 조급히 굴지 않을 거야. 아무 곳에나 말할 수가 있는 문제는 아니잖아?”
유모는 살짝 멍해졌다가 순간 이해했다. 이것이 어디 열두 살 소저가 생각해 낼 법한 방법 같은가 하고 감탄했다. 다만 이렇게 영특하고 지혜로운 것이 복인지 화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소저가 이번에 깨어나고부터 다르게 변했다고 느꼈다. 주씨가 부에 들어왔는데도 모든 것은 평화로워 보였다. 그러나 곧 세상이 바뀔까 두려웠다.
2장
이른 아침, 한안은 급람과 주홍의 시중을 받으며 단장을 했다. 한안은 한참을 고른 끝에 아랫단이 넓은 흰색 긴 치마를 가리켰다.
“그냥 저걸로 하자.”
급람이 난처해하며 말했다.
“소저, 비록 지금이 아직 애도 기간이기는 하지만 이건 너무 소박해요. 이렇게 소박한 걸 입으면 주씨가 얕잡아 볼지도 몰라요.”
한안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 연극의 주연은 우리가 아니야. 게다가 나는 그렇게 화려한 것들을 좋아하지도 않아. 그녀들이 우리를 얕잡아 보면 가장 좋지. 방심하면 큰코다치는 법이거든.”
주홍은 묵묵히 그녀를 위해 옅은 달빛 색의 짧은 상의를 찾아냈다.
“그렇다 해도 밖은 바람이 붑니다. 소저께서는 좀 더 따뜻하게 입으시는 게 좋아요.”
급람은 서둘러 그녀의 머리를 빗기기 시작했다. 한안은 이전처럼 정수리 부분에 두 갈래로 쪽을 짓도록 했다. 그 머리 모양은 한안을 더 앳돼 보이게 했다. 급람은 같은 색의 머리띠를 그녀의 머리에 둘러 주었다. 본래 발육이 조금 늦긴 했지만 이렇게 단장을 하고 거울 속의 소녀를 보니 그야말로 어린아이와 똑같았다.
“가자.”
한안은 치마 아랫단을 정리하고 유모를 불러 그녀와 함께 바깥 대청으로 갔다.
장사양은 다른 조정의 신하들에 비교하면 여색을 그다지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래서 부중에 처 하나와 첩 둘만 있었다. 첩인 이낭 둘은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는 부용원에 살고 있었다. 만 이낭은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장사양에게 준 하녀 출신이었다. 후에 딸을 낳은 뒤 이낭으로 승격되었다. 장사양은 만 이낭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딸을 낳은 후에는 만 이낭의 방에 들어가는 일이 더욱 드물었다. 다행히도 만 이낭은 제 분수를 잘 알았다.
다른 한 명 미 이낭은 단순한 유형의 사람이 아니었다.
선황이 세상을 뜬 후 서북에 기근이 발생하자 장가는 그 지방에 쌀을 가져다 기부했다. 황상은 그 일을 크게 기뻐하면서 상을 하사했다. 미 이낭이 바로 그 보물 중의 하나였다. 미 이낭의 이름엔 아름답다는 뜻과 아첨하다는 뜻이 함께 있었는데 사람도 그 이름과 같았다. 중원 사람이 아니라 오랑캐 출신이었고 매우 아리땁고 사랑스러웠으나 행동이 오만하고 방자했으며 대담했다. 미 이낭이 부에 들어오고부터 한안과 어머니는 좋은 날을 보낸 적이 없었다.
미 이낭은 색이 뛰어나 장사양의 마음을 동하게 했다. 그뿐만 아니라 오랑캐 여자는 본래부터 남자를 끌어당기는 수단이 아주 많다는 소문이 있어서 그런지 미 이낭이 부에 들어온 후부터 장사양은 더욱 본처와 만 이낭에게 냉담했으며 밤마다 미 이낭의 방을 찾았다.
물론 장사양은 첩을 총애하고 처를 멀리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겉으로는 그녀의 어머니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미 이낭은 머리가 비상하여 직접 총애를 다투지는 않았지만, 내원의 하인과 어머니 사이에 충돌을 불러일으켰다. 그녀의 모친은 천성이 나약해 그런 충돌을 어려워했고 미 이낭을 그걸 기회 삼았다. 오래지 않아 하인들은 어머니가 살림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말을 퍼트렸다.
미 이낭은 장사양의 총애에 기대어 어머니를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 처지에 몰아넣고 장사양이 이혼을 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올려 본처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전 미 이낭이 어머니와 충돌했을 때 장사양은 대노했고 미 이낭을 사당에 데리고 가 호되게 교훈을 주었다. 그 이후부터는 미 이낭도 분수를 꽤 많이 알게 되었다. 그 이후부터 미 이낭도 본처 자리를 노리기보다는 그저 장사양을 독점하는 데 전심전력을 다했다. 비록 여전히 어머니와 한안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지만 고의적으로 트집을 잡는 일은 없었다.
미 이낭은 장사양이 두려워진 것이라기보다는 본처의 자리가 허상이라는 것을 간파한 것이 아닐까 하고 한안은 생각했다. 어머니가 차지하고 있던 본처 자리는 첩만도 못했다. 후원의 세 여인 중 둘이 근본적으로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으니 미 이낭은 어쩌면 재미없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겉으로 보기에도 냉담한 장사양이 외첩을 두다니. 심지어 그 외실이 낳은 딸이 이렇게 클 줄이야.
장사양의 냉담한 성격으로 보아 아마도 이 여인은 그의 마음속에 지극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일각도 지체하지 않고 주씨를 부로 맞아들인 것이다.
한안은 예전에는 장사양이 어째서 어머니가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중에야 주씨를 부에 들이려 했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온화한 성격이라 만약 장사양이 그전에라도 주씨를 부에 맞아들이려 했다 하면 어머니는 싫어도 좋다고 끄덕이며 동의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줄곧 바깥에 숨겨두었을까? 그 속에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오묘한 이치가 있는 걸까?
주씨의 내막을 알아내기도 전에 부중에는 이미 좋은 연극이 준비되어 있었다. 미 이낭은 여러 해 동안 이렇게 강력한 적수를 만나본 적이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 적수는 본처의 자리를 얻겠노라는 큰 뜻을 품고 있었다. 다만 때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
막이 열리고, 이제 연극은 시작되었다.
한안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보고 있던 급람만 멍해졌다.
주옥(主屋: 여러 채의 건물 중 중심 건물)에 도착하자, 소주방에서 이미 음식을 다 만들어 놓은 것이 보였다. 한안은 탁자 위를 한 번 훑어보았다.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만찬이 차려져 있었다. 몇몇은 한안도 처음 보는지라 이름도 모를 반찬이 놓여 있었다.
한안은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얼마나 풍성한 아침이랴! 모친이 세상을 뜬 후부터 그녀는 온종일 눈물을 흘리면서 주옥에 가서 두 이낭과 함께 밥을 먹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소주방에서는 청추원의 식사로 맑은 죽과 간단한 반찬만 올렸다.
그래서 몰랐구나. 이제 보니 정식 만찬은 별천지였구나! 만 이낭은 천성이 까다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이런 음식 차림은 분명 미 이낭이 주방에 만들라고 분부한 것이리라.
급람이 한안이 자리에 앉도록 시중을 들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미 이낭과 만 이낭이 방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미 이낭은 한안을 보고 놀라더니 바로 입을 가리고 웃으며 말했다.
“4소저가 오셨네요. 보아하니 병이 나으셨나 봐요. 그런데 얼굴색이 어쩌면 이렇게 안 좋아 보이시죠? 무리하지 마세요.”
만 이낭은 조용히 한옆에 서 있었다. 도리어 그녀의 몸 뒤에 있던 3소저 장금이 날듯이 재빨리 한안을 한 번 보고 고개를 숙였다.
3소저와 한안은 친분이 거의 없어 낯선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장금과 만 이낭은 온종일 부용원에 머물면서 수를 놓으며 조용히 지냈기 때문이다.
한안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몸 뒤의 주홍이 기척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는 것을 느꼈다. 눈을 들어 보니 장사양이 얼굴 위에 웃음기를 담고서 주씨 모녀를 데리고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이낭의 관심에 감사해요. 사실 제 몸이 아직 좀 불편하지만, 오늘은 주 이낭이 부에 들어와 처음 식사를 하는 자리라 부친께서 소홀히 하면 안 된다고 분부하셨어요.”
미 이낭의 얼굴색이 변했다. 세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손 안의 비단 수건을 한층 더 꽉 쥐고 비틀었다. 한안의 모친, 왕씨가 죽은 후에는 정실 자리가 당연하게도 자신에게 떨어질 거라 여겼는데. 중간에 주씨가 튀어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다. 한층 더 증오스러운 것은 노야가 저 천한 년을 저렇게 각별히 대한다는 것이다.
여인의 직감이 그녀에게 고했다. 저 주씨가 장차 그녀 인생에 최대의 위협이 되리라고. 한안과 만 이낭은 근본적으로 두려워할 가치가 없었다. 하지만 저 여자들은 부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노야의 환심을 얻었다. 어젯밤 그는 부용원에서 자지도 않았다. 저 천한 년이 어디 자신과 비교가 되랴!
한안은 고개를 숙이고 괴로워 보이는 모습으로 말했다.
“아버지께서 어산 언니를 좋아하세요. 어제 제가 문안을 갔을 때, 어산 언니를 위해서 저를 호되게 나무라셨어요.”
한안은 입가를 삐죽거리며 어린아이 같은 모습으로 말했다.
“아버지는 지금까지 나와 한 번도 아침을 드신 적이 없는데.”
미 이낭은 이 말을 듣고 더욱 눈빛이 차가워졌다. 눈이 어산을 응시하는데 그 눈에는 분노와 증오가 스쳤다. 여러 해 동안 그녀가 가장 아쉬워한 것이 있다면 바로 노야를 위해 자식을 남기지 못한 것이었다. 저 천한 년이 노야의 환심을 얻은 것이 그녀가 딸을 키우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자신의 용모가 이처럼 아름다우니 만약 아들이 있다면 본처의 자리는 확실해질 것이다! 어디 저년의 차례가 오랴! 이렇게 생각하며 두 손으로 복부를 쓰다듬었다. 거기에 정말로 작은 생명이 있기라도 한 듯.
한안은 이 모든 것을 눈 속에 담으면서 고개를 숙여 입가의 미소를 감추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장사양과 주씨 모녀가 이미 방에 들어온 후였다. 한안은 서둘러 일어나 그를 향해 문안을 올렸다.
미 이낭과 만 이낭도 따라서 그를 향해 문안을 올렸다. 한안은 선 채로 웃으며 말했다.
“만 이낭, 미 이낭, 저쪽이 어제 부에 들어온 주 이낭이에요. 이쪽은 어산 언니고.”
주씨는 기가 막혔다. 자기가 어찌 이낭이 되었지?
장사양은 한안이 이렇게 말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터라 잠시 생각에 잠겼다. 주씨가 부에 들어올 때 외실의 신분으로 들어왔기에 첩이라고 할 수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즉각 정방으로 올릴 수도 없었다. 먼저 주씨를 달래 이낭이 되게 한 후에 정방으로 올려야겠다고 생각한 장사양은 한안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격식을 따질 필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