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2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212화
“그래서 네게 선택할 기회를 주겠다. 함께 님프가 되어 신의 세계에서 영생을 누릴 것이냐, 아니면 인간으로 살아갈 것이냐.”
“당연히 님프지!”
선뜻 대답한 건 이오스였다. 아무리 바보라도 이쯤 되면 진짜 님프가 에드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간 속은 건 억울했으나 루비카가 결국 님프가 되면 속은 건 속은 게 아니다. 자신이 이상한 결론에 도달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이오스는 이 제의를 반겼다.
“당신은 뭘 원해?”
시끄러운 드래곤의 의사 따윈 알 바 아니다. 에드가는 담담히 루비카에게 물었다. 엄청난 제의에도 그녀는 선뜻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근심스러워 보였다.
“걸리는 게 있으면 뭐든 말해.”
과연 신에게 이런 걸 물어도 괜찮을까? 그녀의 망설임을 읽은 이베르도 조용히 미소지었다. 결국 루비카는 용기를 내어 질문했다.
“님프들은…… 예쁜 옷을 입는 걸 좋아하나요?”
“예쁜 옷?”
잠시 이베르에 깃든 휴의 신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하지만 루비카의 표정은 심각했다.
“님프에게 옷은 중요치 않다.”
휴의 님프에게 옷은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다. 루비카는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이베르의 권속을 꾀기 위한 목적으로 의상실을 열었으나 그녀는 그 일이 진심으로 좋았다. 좀 더 편하고 예쁜 옷을 만들기 위해 골머리를 앓는 과정마저도 즐거울 정도였다.
사랑의 신이자 아름다움의 신은 루비카의 열정을 알고 있다.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그 본질을 탐구하는 여인은 휴 신도 탐이 났다. 루비카가 님프로 태어나지 않은 게 아쉬울 정도였다.
“님프는 아름다움 그 자체다. 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가 되어 젊음을 그대로 간직한 채 영생을 사는 것이다.”
다른 인간이었다면 귀가 솔깃했을 제안이다. 하지만 루비카는 정작 자신이 가장 아름다운 존재가 되는 데 관심 없다. 그녀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기쁨을 느꼈다. 그래서 오히려 완벽한 아름다움은 지루했다.
아름다움 그 자체라는 말은 그 속에 무언가를 더할 여지가 거의 없다는 소리다. 그녀에게 있어 가장 기쁘고 짜릿한 순간은 결정적으로 부족한 아름다움을 찾아내어 만개하는 과정을 보는 것이다.
“님프가 되고 싶지 않구나.”
에드가가 그녀의 망설임을 읽었다. 그녀의 생각이 손바닥에 훤히 보였다. 타인의 눈에는 루비카가 무척 이상해 보일 수 있으나 그에겐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간혹 종잡을 수 없는 면모를 보이지만 변치 않는 핵심이 있다.
“하지만…… 나 때문에 영생을 포기할 필요 없어. 당신이 님프가 되고 싶다면 그럴게.”
“루비카.”
에드가가 진지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을 만나고 나는 한 계절만 피고 지는 장미가 변하지 않고 영롱히 빛나는 보석보다 더한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
세사르가 새로운 장미를 개발하자고 처음 찾아왔을 때 그는 덧없이 사라질 아름다움에 투자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 장미가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켰던가. 광산에서 나는 보석처럼 영원하지 않는 유한한 생명체였기에 더 많은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영원한 젊음도 포기해야 하는데?”
“나는 당신과 함께 나이 먹고 싶어. 그리고 당신이 할머니가 되는 모습이 보고 싶어. 정말 예뻤거든.”
“무슨 소리야. 못 봤잖아.”
“죽기 전에 신에게 부탁해서 봤어.”
죽기 직전의 모습이 어땠더라? 결코 좋은 상태라고 말할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지막에 힘을 끌어모아 얼굴에 흙이라도 좀 털어 낼걸. 부끄러움과 민망함에 루비카의 뺨이 발그레해졌다.
“지금도 예쁘지만 그때도 예뻤어. 아니면 뭐야? 설마 내가 아저씨가 되고 할아버지가 되면 안 좋아할 거야?”
“그런…… 전혀 그렇지 않아.”
루비카가 깜짝 놀라 열성적으로 부정했다. 그 모습이 못내 사랑스러워 에드가는 그녀를 꽉 끌어안고 싶었다.
“인간으로 남겠습니다.”
확실하게 입장을 정하자 이오스가 황당하다는 듯 외쳤다.
“뭐 이런 바보들이 다 있지? 그게 말이 돼? 인간보다 훨씬 강하고, 오래 사는데!”
그는 은근슬쩍 에드가는 미노스 대신으로 삼아도 좋을 정도로 똑똑하다고 마음속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도 안 할 결정을 한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특히 인간 누나라니……. 드래곤의 자존심이 상하는 대목이다.
“난 싫어. 난 님프 누나가 좋아! 인간으로 남는 거 완전 반대!”
이오스의 태도에 화가 나 한마디 하려는 에드가를 루비카가 말렸다.
“이오스, 신께서 님프가 되면 신의 세계로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지? 그 말은…… 님프가 되면 앞으로 우리는 보지 못한다는 소리야.”
아예 바닥에 드러누우려 마음먹었던 이오스는 루비카의 말에 눈을 깜빡였다. 생각지도 못했던 대목이다.
“신의 세계에 꼭 지금 가야 해? 나중에 가면 되는 거 아냐?”
이베르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가야 한다.”
“그럼 신의 세계에 쭉 있다가 가끔 놀러 오면 되겠네.”
“그건 불가능하다.”
“그런 게 어딨어!”
휴의 신은 이오스의 항의를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는지 그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 루비카를 향해 말했다.
“님프가 아니라 인간으로 살기를 선택한 그대가 행복한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축복을 내려주마.”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루비카는 눈에서 아픔을 느꼈다. 에드가가 재빨리 부축해 주지 않았다면 쓰러졌을 것이다. 다행히 고통은 아주 한순간으로 길지 않았다.
“당신, 눈 색이 붉게 변했어.”
“붉어졌다고?”
“그래. 이제 적갈색이 아니라 루비처럼 붉어.”
신의 축복 때문인가……. 루비카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리며 미소지었다. 어머니는 그녀가 태어났을 때 붉은색 눈을 가진 자신을 보고 휴의 축복을 받았다고 누구보다 기뻐했다.
아름다움에 대한 관심은 어머니로부터 비롯되어 무역상을 하는 아버지로 인해 길러졌다. 에드가에게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고 싶다.
“이해할 수 없구나.”
신이 떠난 이베르가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왜 님프가 되길 선택하지 않은 거지? 영원히 둘이서 행복해질 수 있을 텐데…….”
“글쎄요.”
자신이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루비카도 어떤 부분에서는 충동적이지 않았나 싶었다. 영생이라는 건 충분히 매력적인 유혹이다. 특히 사랑하는 이와 오래도록 신의 세계에서 산다는 건 누구나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신의 세계로 떠난다고 가정하자 안젤라와 앤의 얼굴이 떠올랐다. 제멋대로인 이오스가 무슨 사고를 치는 게 아닐지 걱정스러웠고 그 모든 일의 뒤처리를 하느라 정신없을 미노스가 안쓰러웠다.
또 몰래 초대해서 아름답게 꾸며 주기로 마음먹은 아이도 떠올랐다. 엘리제와 가브리엘, 제니와 머리를 맞대고 얼마나 열심히 계획을 짰던가.
님프가 되면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여기에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많아요. 휴 신의 책에는 다양한 사랑에 대해서 나와 있어요. 물론 에드가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요. 하지만…… 남녀 간의 사랑만이 전부가 아니에요. 부모와 자식 간, 형제간, 친구 간의 사랑도 있잖아요.”
“질투가 나는군.”
에드가가 투덜거렸다. 그녀의 사랑을 독점하고 싶다. 그런데 왜 주변에 이리도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가. 가끔 화가 날 정도였다.
“다양한 사랑이라…….”
이베르는 씁쓸히 웃었다. 하지만 덕분에 머릿속이 상쾌해졌다. 루비카의 말이 맞는다. 세상은 다양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네 말이 맞는구나.”
이베르는 그녀의 권속을 비롯해 땅에 주저앉아 볼을 부풀리고 팔짱을 끼고 있는 이오스를 둘러보며 미소 지었다. 그녀가 열정에 눈이 멀어 보지 못했던 사랑해야 할 이였다.
“나를 깨워 줘서 고맙다. 이제 그만 돌아가야 하지? 바람을 타고 바래다주겠다.”
이베르가 내민 손에 에드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미 지평선 너머 붉은 구름을 헤치고 샛노란 태양이 떴다.
“걸어가겠습니다. 마차가 있는 쪽으로 안내나 해 주십시오.”
그의 다리는 이제 더 이상 마비된 듯 아프지도 감각이 없지도 않았다. 발바닥에 대지가 그대로 느껴졌다.
“돌아가자, 루비카.”
루비카는 기꺼이 그의 손을 잡았다. 이제 그는 태양 아래서도 걸을 수 있다. 더 이상 해가 뜨는 걸 보며 고통스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남에게 걷지 못하는 광경을 들킬까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 아침이 되면 걱정 없이 그녀와 함께 식당에서 밥을 먹어도 되고, 낮이 되면 함께 정원을 산책해도 된다.
“그래요. 집으로 가요.”
그들은 처음으로 햇빛을 받으며 함께 걸었다. 늦은 밤 정원에서의 산책도 즐거웠지만 햇살 아래에서 서로의 미소를 빠짐없이 볼 수 있는 기쁨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다리의 아픔조차 아무것도 아니었다. 둘은 그렇게 먼 거리를 돌아갔다.
* * *
이베르의 권역에서 출발한 마석 마차가 도착한 곳은 수도가 아닌 클레이모어 영지 저택이었다. 국왕의 재촉이나 사교계의 초대에도 공작 내외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되자 그들은 긴 여행을 시작했다. 사치품으로 유명한 샤르망 왕국부터 사막을 건너야 갈 수 있다는 동제국까지 그들이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그들에게 쏠릴 틈이 없었다. 수백 년 동안 잠들었던 드래곤이 깨어났고, 세리토스 왕국에 마석이 떨어졌단 사실이 밝혀졌다. 나라가 멸망할지도 모른다고 왕국은 두려움에 떨었다.
“우리에게 어울릴 만한 옷을 사고 싶네. 그럼 대가로 마석을 공급해 주지.”
이베르의 권속이 한 요구에 많은 나라가 퇴짜를 맞았으나 유일하게 마담 베리만이 그들이 만족할 만한 옷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수도는 연일 마담 베리의 정체를 파헤치고자 했으나 쉽지 않았다. 마담 베리를 후원하는 클레이모어 공작 부인이 마담 베리 본인일 것이라고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덕분에 마석으로 인한 혼란이 진정되었다. 물론 여전히 걱정하는 목소리는 많았다. 이베르의 권속에게 구입한 마석의 양은 전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더 이상 전쟁 무기 산업은 불가능하다.
결국 늦든 빠르든 왕국이 멸망하는 것 아니냐는 소리가 나왔다. 특히 클레이모어 공작가를 제외한, 이를 통해 부를 쌓은 가문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
“이오스 님이 북쪽 육로를 열어 주겠답니다.”
그러나 때마침 고블린을 통해 들어온 이오스의 제의로 그들의 불만도 명분을 잃었다. 이오스는 황금 평원에 침범한 사람들에게는 철퇴를 내렸으나 충분히 무역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길을 내주었다.
왜 포악한 드래곤이 난데없이 마음을 고쳐먹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뚫린 육로를 통해 많은 물건이 오가기 시작하고 사람들의 소비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귀족은 큰돈이 오가는 무기 산업으로 전과 같은 부를 쌓을 수 없었지만 일반 백성들의 생활은 점점 나아졌다.
특히 무기 개발에만 몰두하던 클레이모어 공작가에서 내놓은 값싼 비누는 충격적이었다. 비누는 사람들의 청결뿐만 아니라 생활습관도 바꿨다. 쉬운 빨래로 옷에 대한 소비가 늘어났다. 기계로 천을 만드는 방적기의 등장은 여기에 박차를 가했다.
“부인, 신년 무도회에 드래곤 이베르가 입고 온 드레스를 보았습니까?”
“신년 무도회는 참석하지 못했어요.”
긴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루비카를 기다리고 있는 건 그동안 미뤄 뒀던 각종 모임이었다.
“어머, 아쉽군요. 정말 예쁜 드레스였는데……. 드레스를 레이스로만 만들었더라고요. 샤르망에서 만든 레이스보다 더 섬세하고 예쁘지 뭡니까?”
그 드레스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이 모임 안의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다름 아닌 그녀가 만든 드레스였으니까.
“각하도 참……. 함께 여행하는 것도 좋지만 무도회에 참석하는 즐거움을 빼앗다니요.”
“요즘 시대가 어느 때인데 그러지 마세요.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사세요.”
진지하게 걱정하는 말에 루비카는 웃음을 참고 대꾸했다. 몇 년 사이에 왕국은 많은 것이 변했다.
“맞아요. 희생만 해서는 안 되지요.”
에드가와 함께 세상을 돌아다니며 많은 것을 보고 눈에 담았다. 샤르망 왕국의 사치품은 듣던 대로 놀라웠고, 사막은 경이로울 정도로 넓고 컸다.
각각의 지역과 풍습에 따른 의복은 그녀가 상상도 못 한 방식이 많았다. 자신이 그동안 우물 안에서만 살았단 걸 깨달았다. 그녀는 새롭게 목격한 모든 것을 흡수해 옷을 만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눈길을 끄는 것은…….
‘저 아이, 꾸미면 엄청 근사해질 것 같은데?’
누구나 인정할 만한 아름다움이 아닌 미완의 아름다움이었다. 루비카는 새로운 요정의 출연에 눈을 반짝였다. 오랜만에 마담 베리의 비밀 의상실을 열 때가 왔다.
‘가브리엘에게 연락해야겠구나.’
아마 그녀라면 ‘찬성’을 외치겠지. 공작 부인이시니 위험한 일은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칼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생각하면 조금 미안했지만 그녀는 의상실을 그만둘 생각이 없다. 누가 뭐라 해도 그 일을 하면 즐겁고 기분이 좋기 때문이다. 그녀는 클레이모어 공작 부인이기 전에 옷 만드는 걸 좋아하는 루비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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