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1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211화
“내 집무실의 테이블 첫 번째 서랍에 있는 보석함에 반지 대신 이걸 넣어 주십시오.”
그리고 조금 고민한 다음 말을 덧붙였다.
“그녀가 과거로 돌아가기 일주일 전쯤으로 부탁합니다.”
정확히 지정하지 않으면 포로로 잡혀갈 때 보석함에 쪽지를 넣어 줄 수도 있다. 에드가는 안전하게 구체적으로 요구했다.
-좋다. 그럼 사라진 반지는 어찌하느냐?-
“그녀가 가지고 돌아간 거로 해 주십시오.”
에드가는 침을 삼켰다. 그의 그물에 신이 걸려들어 얼렁뚱땅 두 가지 소원을 한 가지로 쳤으면 좋겠다.
-어차피 성물은 동시에 두 개가 존재할 수 없으니 그러도록 하지.
말이 끝나자마자 손 위의 쪽지가 사라졌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과거로 돌아간 그녀와 사랑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소원을 빌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소원을 빌어 사랑을 이루고 싶지 않았다.
마법을 걸어 그녀의 마음을 차지한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루비카는 자신의 삶과 생각이 있다. 신이 그를 위해 먼저 제의했어도 거절했을 것이다.
자신 앞으로 쪽지를 쓴 건 바른 판단이다. 지방의 하급 귀족인 루비카가 과거 공작이었던 자신을 만나는 건 힘들다. 차라리 그가 움직이는 게 낫다.
사실 쪽지에 그녀의 이름 이외에 다른 말도 쓰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과연 그래도 될까? 그녀가 자신에게 약간이나마 호의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다. 자신은 형편없는 사람이다. 지금도 그랬지만 과거에는 더욱 지독했다. 그런 건방진 놈보다 루비카에게는 착하고 순한 사람이 어울릴 것이다. 아마 과거로 돌아가면 그녀에게도 마음을 전하고 싶은 첫사랑 정도는 있겠지.
쪽지에 적힌 건 이름뿐이었으나 과거의 자신이라면 어느 정도 상황을 유추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녀를 찾아가 어찌 된 일인지 사정을 묻고 처신하리라 믿었다.
에드가는 자신이 대뜸 그녀를 찾아내 일단 청혼부터 하고 볼 줄은 몰랐다. 과거란 미화되기 마련이고 자신의 독단적인 면모 또한 추억 속에서 희석되기 마련이다.
-이제 마지막 소원이다.-
마지막 소원은 이미 정했다. 에드가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죽기 전에 그녀가 보고 싶습니다.”
그가 루비카에 대해 아는 것은 잡은 손이 얼마나 따뜻했는지, 목소리는 얼마나 쾌활했는지가 전부였다. 손을 더듬어 얼굴을 확인했지만 그저 상상 속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보고 싶었다. 그녀가 어찌 생겼는지…….
-좋다.-
신의 말을 끝으로 빛나던 세계가 서서히 무너지면서 원래의 전쟁터로 돌아왔다. 에드가는 그의 품 안에 쓰러져 있는 그녀를 보았다. 이름을 부르면 곧 눈을 뜰 것처럼 곱게 잠들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웃을 듯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행복해 보였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잔인한 삶에서 기쁨을 찾았다.
“당신은 정말…….”
숱 없이 하얗게 센 머리카락, 잔뜩 주름진 얼굴, 바짝 마른 입술, 얼굴에는 진흙과 피딱지가 잔뜩 묻어 있었다.
“아름다워요, 루비카.”
휘황찬란한 샹들리에 아래에서 번쩍거리는 유색 보석을 잔뜩 달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인보다 구겨지고 기운 옷을 입은 나이 든 그녀가 더 아름답다.
그들이 자신에게 호의를 가득 담은 미소를 보이며 다가왔을 때는 도망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사랑스러웠다. 그가 아는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에드가는 그의 눈동자에 최대한 많이 그녀의 모습을 담았다.
하지만 그녀를 볼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점점 호흡이 가빠지고 곧 안식이 그를 찾아왔다.
길고 긴 안식.
어렵사리 찾아온 죽음은 그도 만족스러울 정도의 깊은 침묵을 선사했다.
“에드가, 에드가.”
깊은 침묵의 끝에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그녀가 부르는 게 자신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진짜 이름을 말했던 적 없다.
에드가라는 다른 사내를 부르는 건가? 간절한 목소리에 부러움과 질투가 불끈 솟았다. 대체 누구길래 저렇게 애절히 부르는 건가? 누군지 면상이나 보고 싶다.
그는 무거운 눈꺼풀을 움직여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웬 젊고 건강한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그가 눈을 뜨자 무척 감격스러운 표정이었다.
왜 저러는 거지? 이상하게 낯이 익다. 특히 루비카가 종종 알려 줬던 눈 색과 비슷한 적갈색 눈동자가 마음에 걸렸다.
“깨어나서 다행이야.”
목소리가 그녀와 똑같다. 그러고 보니 입가나 눈매도 비슷하다. 이게 무슨 일인가? 혹시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가? 그때 명치가 세게 아파 왔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뒤엉켰다.
“아.”
두통에 신음이 흘러나왔다. 과거의 기억을 찾은 건지, 미래의 기억을 찾은 건지 분간할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
“미친, 쓰레기 같은 놈.”
자신이 그런 놈인 줄은 몰랐다. 중간에 낀 전령의 실수로 일어난 일이었지만 미혼의 여성을 잡아 두기 위한 수단으로 결혼을 생각해 내다니 용서하기 힘들었다.
실수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결혼을 밀어붙인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세상에, 다른 사람은 다 믿어도 스스로를 믿어선 안 된다고 하더니…….
“쓰레기 같다니?”
“아, 아니.”
예상대로 늙은 아르망은 나약했다. 나이를 먹어 판단력이 흐려진 걸까? 젊은 자신을 너무 유하게 평가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꼬인 건지 화가 났다. 올바른 판단을 했다고 믿고 안식을 맞이한 아르망에게 화가 났다.
“죽는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 이번에야말로 네 녀석한테 인공호흡을 해야 하는 건지 고민했잖아.”
“끔찍한 소리 하지 마.”
이오스의 목소리가 들리자 확 짜증이 났다. 눈을 뜰 당시에는 아르망의 기억이 강했으나 안식을 맞이했던 생이라 그런지 점점 옅어지고 본디 자신의 의식이 강해졌다.
에드가는 루비카의 부축을 받고 상체를 일으켰다. 어느새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얼음 산맥이 다 녹아 사라져 드넓은 고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앞서 있었던 유리관이나 그 속에서 뛰고 있던 다이아몬드 같았던 심장은 어떻게 된 걸까?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그의 눈에 한 여인이 들어왔다. 정확히는 새하얀 얼음 석상이었다.
석상 아래에는 끌과 망치가 어지러이 떨어져 있었다. 세 권속이 차례차례 석상에 투명한 액체를 부었다. 액체에 닿은 얼음이 화학작용이라도 하는 듯 부글부글 끓더니 사람의 형상으로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새하얀 머리카락과 투명한 하늘색 눈동자를 지닌 그녀는 피부에 파충류처럼 윤기가 흘렀다. 인간과 비슷한 형상이지만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 존재였다.
“누구지?”
블랑코는 대신 대답을 하려다 석상이 천천히 입을 여는 바람에 그만두었다.
“이베르.”
대충 그렇지 않을까 짐작했기에 충격적이지 않았다. 이베르는 아주 느리게 이오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서히 뜬 눈을 깜빡이던 그녀는 기억을 회복한 듯 갑작스레 웃었다.
“네가 이만큼 큰 걸 보니 시간이 많이 흘렀구나.”
“오백 년, 그 정도 흘렀어.”
이오스가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이베르를 깨우려는 그녀의 권속들로 인해 에드가와 루비카가 목숨을 잃을 뻔했다. 예전에는 그토록 보고 싶었던 그녀가 전혀 반갑지 않을 정도로 감정이 상했다.
“그렇게 오래 잔 건가…….”
이베르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였다면 백 년 정도면 잠에서 깨야 했다. 어째서 그만큼 시간이 흘러 버린 걸까?
“저희는 이베르 님이 깨실 수 있도록 마영석을 열심히 모았습니다.”
“하지만 매년 클레이모어에서 모험단을 보낸 마영석을 모으는 걸 막았습니다.”
권속들의 호소에 이베르는 눈을 감았다. 과거의 망령이 그녀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모든 기억이 안개라도 낀 듯 흐렸다. 오백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잠을 잔 영향 같았다.
“그대는 누구인가?”
자신의 정체를 물었던 존재에게 되물었다. 에드가는 권속들이 흉을 잔뜩 본 시점에서 클레이모어 공작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건 결코 현명하지 못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에드가.”
짤막하게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이베르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흘렀다.
“아아.”
이름을 듣자 유리관 속 심장이 목격한 기억이 돌아왔다. 서로를 믿고 기대는 연인의 모습은 그녀의 심금을 울렸다.
“두 사람의 사랑이 내 눈물을 녹이고 결국에는 심장마저 녹였구나.”
이베르의 느린 말투가 이제 보통 사람 정도쯤 되었다. 에드가는 그녀가 말을 끝맺을 때 혀를 끄는 습관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이는 그에게 반지를 주고 떠난 유모와 비슷한 습관이다. 모습은 전혀 다르지만 행동거지가 그녀를 연상시켰다.
“당신 정체가 뭐야? 대체 그 반지, 눈물은 뭐길래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반지에 담긴 눈물은 어리석은 사랑으로 소중한 이를 잃어버린 나에 대한 분노와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염원이 담긴 내 영혼의 정수란다.”
그 눈물을 흘리는 순간 그녀의 심장이 꽁꽁 얼기 시작했다. 휴의 신은 눈물을 모아 반지를 만들었다. 드래곤의 힘과 신의 손길이 깃든 반지는 성물이자 매개체가 되었다.
“에드가.”
잠이 든 상태에서 이베르는 몇 개의 꿈을 꿨다. 그중에서 가장 선명하고 가슴 아픈 꿈이 하나 존재했다.
“네 어머니가 사랑하는 이와 죽을 때까지 서로에게 충실한 사랑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면 아버지도 너도 완벽한 님프가 되었을 거야.”
님프는 이베르의 영혼을 한 여인에 담아 곁에 뒀다. 죽을 때까지 서로에게 충실한 사랑을 옆에서 지켜보면 배신과 실연으로 꽁꽁 언 그녀의 눈물이 녹아내릴 줄 알았다.
하지만 님프는 실패했다. 하필이면 휴의 님프라는 사실도 문제였다. 휴의 님프는 사랑을 주관하는 만큼 너무나도 쉽게 주변을 홀리고 상대편을 사랑에 빠지게 한다. 하지만 사랑은 시작하기는 쉬운 반면 지키고 키워 나가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에드가, 너는 불완전한 님프야. 네 힘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내 눈물을 비롯한 드래곤의 힘이 필요해. 그래서 내 권속들이 여기까지 너를 데리고 온 거야. 만약 네가 사랑을 위해 생명을 버렸다면 너는 님프가 될 자격을 얻어 영생을 얻었을 거야. 네 사랑이 너를 위해 생명을 버렸다면 너는 사랑하는 사람이 희생하게끔 한 님프로 힘과 자격을 모두 잃었겠지만 대신에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그래서 행복해질 수 있었을까? 과연 한쪽을 희생해야만 하는 사랑이 고귀한 것일까? 한때 이베르는 누군가를 위해 소중한 것을 버리고 목숨까지 내주는 것만이 진정한 사랑인 줄 알았다. 그래서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
“이 또한 아름다운 사랑이지. 하지만 휴 신이 가장 최고로 치는 사랑은 서로를 위해 희생하지 않는 사랑이란다.”
신이 그리 말했을 때 이베르는 납득할 수 없었다. 서로를 위해 희생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장난이다. 세상에 희생하지 않기를 선택하는 것처럼 쉬운 게 어디에 있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무엇이든 버릴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사랑 아닌가.
수많은 전설도 이를 노래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절개와 용기. 그리고 그 순간 내려진 신의 은혜.
하지만 그녀는 이제야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 자기만족임을 알았다. 자신의 감정에만 빠져 홀로 남는 자의 마음을 생각하지 못했다. 희생하지 않는 것 또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사랑은 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이다. 서로 노력하고 아껴 나가야 할 감정이다.
“에드가, 네가 온전한 님프였다면 진정한 사랑으로 내 눈물을 녹인 순간 루비카도 휴의 님프가 되어 함께 영생을 얻어 신의 세계에 갔을 거야. 하지만 너는 불완전한 님프지.”
이베르의 목소리가 변하기 시작했다. 에드가가 죽음의 문턱에서 만났던 휴 신의 목소리와 똑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