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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210화 (210/212)

# 210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210화

루비카의 숨이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다. 설마 자신이 하는 말을 못 들은 걸까? 에드가는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더듬으며 속삭였다.

“내 말…… 들었습니까?”

하지만 그녀는 현재 피를 많이 흘려 대꾸할 힘도 없을 것이다. 대신 아주 미세하게나마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에드가는 그 미소를 자신의 말을 들었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저주를 받아서 낮에 못 걷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하면 그녀석도 당신 말을 한 번은 들으려 할 겁니다.”

포탄이 떨어지는 소리 때문에 귀가 먹먹했다. 하지만 주변의 아비규환 따위 그와는 상관없다. 그는 그저 손끝으로 그녀의 미소를 더듬었다.

“당신에게 그동안 쭉 말하지 못했던 게 있습니다. 저는 사실…….”

무슨 말부터 하는 게 좋을까? 그녀에게 하지 못한 이야기는 셀 수 없이 많다. 그의 정체는 물론 점점 커져만 갔던 그녀에 대한 마음도.

하지만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손에 닿는 피부에서 온기가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다급히 코끝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니 닿는 게 아무것도 없다. 숨이 끊어진 것일까?

“루비카? 루비카!”

애타게 이름을 불러 봐도 소용없다. 그녀는 죽은 것이다. 그에게 세상의 다양한 기쁨과 즐거움을 알려 줬던 사람의 생명이 다했다.

각오는 했다만 막상 닥치니 현실을 받아들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루비카…….”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도 잊은 채 그는 그녀의 이름을 되뇌었다. 그 또한 살려면 이 자리를 떠나 도망치는 게 좋다.

하지만 이 잔혹한 곳에 숨진 그녀를 두고 떠나면 어찌 될까? 폭탄이 그녀 위에 떨어지면 온몸이 산산조각 나겠지.

이미 그녀는 싸늘히 식어 주검이 되었지만 그는 도저히 두고 떠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숨을 쉬든 쉬지 않든 그에게 그녀는 지켜 주고 싶은 존재였다.

“윽!”

결국 엄청난 충격이 그의 등을 강타했다. 화약 냄새와 비릿한 피 냄새가 동시에 코를 찔렀다. 등이 피로 흠뻑 젖다 못해 흘러내렸다.

이제 죽음은 그녀에 이어 그의 목숨까지 앗아 가려 했다. 에드가는 그 죽음이 반가웠다. 이 폭격이 지나간 후 살아남아 있다면 외려 절망스러울 것이다.

이렇게 사랑하는 여인을 품에 안고 죽는다면 제법 행복한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

“루비카.”

마지막으로 그녀의 입술 곡선을 쓰다듬었다. 미소 지은 채 죽었다. 그녀는 항상 세상이 아무리 혼란해도 미소를 잃지 않고 작은 행복을 찾아내 그에게 알려 주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에드가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입 맞췄다.

살아 있는 동안은 엄두도 내지 못했던 행동이다. 자신에게 그런 욕망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로 그는 때때로 그녀의 입술을 상상했다.

‘……차가워.’

체온이 높은 편이었던 그녀는 한겨울에 손을 잡아도 따뜻했다. 그러나 간신히 닿은 그 입술에는 일말의 따뜻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래전에 생명이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그제야 그는 그녀가 정말 죽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녀를 만난 뒤 그는 아이처럼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며 우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지금 흘린 눈물처럼 회환 서린 적은 없었다.

자신의 죽음보다 그녀가 죽는다는 사실이 더 서글펐다. 언젠가 이런 결말을 맞이하게 되리라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막상 닥치니 현실을 인정하기 어려웠다.

그나마 위안은 그녀의 목에 건 푸른 반지였다. 이 반지가 제발…… 시간을 되돌려 그녀에게 새로운 생을 안겨 주었으면 좋겠다.

‘바보 멍청이 같은 나지만 당신에게 자초지종을 들으면 섣불리 스텔라를 개발하려 들지 않을 거야.’

과거의 자신은 제멋대로에 고집불통이었으나 그동안 받은 교육 덕에 적어도 남의 말을 한 번 정도는 제대로 듣고 합리적으로 판단하려 노력했다.

루비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올곧은 면이 있으니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고 자신을 설득하리라 믿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그녀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마음껏 살길 바랐다. 그녀는 주어진 삶에 만족하고 전쟁 중에 태어난 아이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가게끔 양보했지만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아름다운 꽃을 볼 때 그녀의 숨소리는 평소와 조금 달랐다. 물자가 풍부했던 시절을 회상하며 예쁜 드레스에 대해서 말할 때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그녀가 죽음을 목전에 둔 순간, 앞뒤 잴 것 없이 내린 판단이었지만 왜 자신이 아니라 그녀의 삶을 과거로 돌려보낸 것을 선택한 것일까?

사실 자신이 과거로 돌아가면 일이 좀 더 쉽게 풀릴 순 있다. 설명할 필요도 없이 스텔라 개발을 멈출 테고, 그녀를 찾아내 삼촌 내외의 학대에서 구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되면 지금의 그녀는?

루비카는 종종 과거의 자신은 삶의 다른 측면을 보지 못한 채 그저 자기 연민에만 빠져 있었다고 말했다. 과거로 돌아가 자신이 실의에 빠진 그녀를 바꿀 수 있을까?

무엇보다 그녀가 스쳐 지나온 모든 삶을 존중하고 싶다. 그녀가 만난 사람과 지나온 장소, 수도원에서 일하며 얻은 경험과 앎이 모두 연기처럼 사라지는 건 그도 원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그의 기억은…… 잊고 싶은 것투성이다. 끔찍한 고통과 절망, 비관만 있을 뿐이다. 그런 기억은 없는 게 낫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 피부는 더 이상 인간다움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워졌으나 머리카락의 촉감은 생전과 똑같았다. 이 숱 적은 머리카락이 과거로 돌아가면 어떻게 변해 있을까?

“행복해야 합니다.”

가빠지는 숨을 가다듬으며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입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모두 다 하세요.”

자신은 어디 가서 멍청하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 없을 정도로 똑똑하고 머리가 잘 돌아갔지만 어리석은 사람이다.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스텔라만 개발하지 않을 뿐 결국 사람을 죽이는 무기를 개발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라면…… 그녀라면 다른 결말을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말한 비누를 만든 덕에 얼마나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었던가.

사람의 현명함은 머릿속 지식의 양으로 가늠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녀를 만나고 깨달았다. 그녀라면 분명 제멋대로에 역시 자신의 불행밖에 볼 줄 모르는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고쳐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를 만나 사랑하고 행복해질 일은 없겠지. 과거의 자신은 스스로 생각해도 형편없는 놈이었다. 분명 루비카는 자신을 혐오할 것이다.

‘그래도 돼.’

그녀만 행복해진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자신이 어찌 되는 건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그녀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이용하길 바랐다.

에드가는 숨이 점점 옅어지는 걸 느꼈다. 이미 오래전부터 어둠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갑작스레 어둠이 그를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주마등도 스쳐 지나가지 않았다.

더 이상 품에 안은 그녀의 몸이 차갑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체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나의 딸이 낳은 아들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랑하는 이에게 네 몫의 생을 한 번 더 살 기회를 내줬다. 사랑을 위해 삶을 포기했기에 너는 인간이 아닌, 영생을 살 휴의 님프가 될 자격을 얻었다.-

일시에 주변의 시야가 밝아졌다. 그는 황급히 품 안의 그녀를 확인했다. 무게감은 느껴졌으나 보이는 게 없다. 신이 등장했건 말건 에드가는 한숨을 쉬었다.

-나와 함께 님프의 섬으로 돌아가자.-

다른 사람이었다면 신의 방문에 그저 기뻐하며 앞뒤 생각하지 않고 그러겠다고 말하겠지만 그는 달랐다. 그는 미심쩍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저 새하얘서 신의 실체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님프의 섬이라는 곳으로 가면 그녀는 어떻게 됩니까?”

-네 어머니의 저주가 풀렸으므로 반지는 마법을 이룰 힘을 잃게 되어 죽는다.-

역시 물어보길 잘했다. 유모가 그랬듯이 저주와 축복은 종이 한 장의 차이다. 그녀를 잃고 영생을 살 수 있는 님프가 되라고? 그건 축복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저주다.

“원하지 않습니다.”

-원하지 않는다고? 님프의 섬에 가면 일생을 편안히 살 수 있다. 인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신성을 부여받게 된다.-

“그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님프 같은 건 될 생각 없으니 루비카가 다시 살 수 있게 하십시오.”

-님프가 되면 지금의 아픔은 잊게 될 것이다. 정말 영생을 살 기회를 포기하겠다는 거냐?-

“영생을 살면 뭐 하나요. 죽지도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삶을 살라는 소리인가요?”

침묵이 흘렀다. 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감히 자신에게 대드는 인간을 가소롭다고 여길까? 하지만 그가 알 바 아니었다. 오히려 신의 등장과 제의가 가소로웠다. 아무리 신이라 해도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그는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신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데려가지 않겠다. 대신 휴의 님프가 될 시험에 합격한 대가로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

“저도 그녀와 함께 과거로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

앞뒤 생각할 것도 없이 대답이 나왔다.

-그건 안 된다.-

“그건 왜 안 됩니까?”

-그리되면 그녀에게 삶의 기회를 양보한 게 아니지 않느냐? 그 소원은 들어줄 수 없다.-

에드가는 인상을 썼다. 사랑의 신이라는 놈이 뭐 이리 가리는 것도 많고 따지는 것도 많아. 그게 아니면 원하는 소원 따윈 없다고 강짜라도 부리고 싶었다. 하지만 신의 말이 영 틀린 것도 아니었다.

“소원을 빌기에 앞서 궁금한 게 있습니다. 그녀는 죽기 전에 제가 한 말을 들었습니까?”

입가의 미소로 확인하긴 했으나 영 불안했다. 이왕 신이 기회를 준 김에 십분 활용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그는 실용적인 사람이다.

-못 들었다.-

“뭐라고요?”

-폭탄의 충격으로 귀가 다쳐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상태였다.-

울컥 가슴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것도 조절 못합니까?”

-나는 그저 사랑의 신일 뿐이다.-

에드가는 이가 아플 정도로 세게 입술을 꾹 다물었다. 할 수만 있다면 신의 면상을 때리고 싶었다. 절망에 빠졌던 루비카를 구하고 삶의 의지를 준 신만 아니었다면 당장에라도 신성모독성 발언이 쏟아져 나왔을 것이다.

‘참자, 참아.’

어쨌든 좋은 기회이다. 덕분에 그녀가 제 말을 안 들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에드가는 이 기회를 놓칠 멍청이는 아니었다.

“종이와 펜을 원합니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왼손에 종이가 오른손에 펜이 생겼다. 이로써 세 가지 소원 중 하나를 썼다. 이제 두 개가 남았다. 머리를 잘 써야 한다.

이 쪽지를 누구 앞으로 남기는 게 좋을까? 루비카에게 자신이 했던 말을 전할까 싶었으나 22살쯤의 그녀는 집안에서 하녀와 다를 바 없는 취급을 받아 자기 물건 하나 제대로 가지지 못했다고 했다. 잘못해서 배달 사고라도 나서 쪽지가 전해지지 않으면 큰일이다.

‘저 신이라는 작자는 섬세함이 떨어지니 충분히 그럴 수 있어. 신중을 기해야 해.’

지금도 과거 자신의 서재에 어떤 물건이 어떻게 배치되어 있는지 생생히 기억한다. 쪽지를 전하려면 과거의 그가 낫다. 에드가는 먼저 ‘루비카 베르너’라고 이름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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