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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209화 (209/212)

# 209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209화

레페나는 그의 욕설에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녀도 자신에게 이런 계시를 내린 신이 원망스러웠다. 그에게 잘못이 없다는 걸 알지만 어찌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차라리 신이 그와 함께 세상을 구하라고 한다면 그녀도 기뻤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 또한 신의 시험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원래 이곳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일정 기간 이상 머무를 수 없습니다. 무한정 사람을 데리고 베풀 수 없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원하신다면 계속 계셔도 됩니다.”

레페나는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사무적으로 말했다. 차가운 목소리에 오히려 에드가의 흥분이 가라앉았다. 슬금슬금 현실적인 문제가 다가왔다.

그나마 자신을 받아 준 이 수도원을 벗어나면 살 수 있을까? 자신 없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적 있었으나 막상 죽음을 선택하려니 쉽지 않았다.

“일단 감사합니다. 이곳에 남아 있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제 정체가 들통나는 것도, 특별 취급도 원하지 않습니다.”

도망친 곳에서 그를 찾을 수 있다. 되도록 눈에 띄지 않는 게 좋다. 레페나의 입장에서도 나쁠 것이 없었다.

“그럼 평범한 신도로 대하겠습니다. 이곳에 남기로 하셨으면 일을 하셔야 합니다. 아마 고될 겁니다.”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일을 하는 게 공짜로 먹여 주고 재워 주는 것보다 낫다. 적어도 부채감에 시달리지 않을 것이다.

의욕에 찬 대답에 레페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과연 고된 일을 할 수 있을까? 공작쯤 되면 옷의 단추도 다른 사람이 채워 주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모습은 과거 귀족이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남루하고 상처투성이다.

“원장님에게 말씀드리지요. 혹 암산이나 주판 같은 건 하실 수 있습니까?”

레페나의 질문에 에드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다섯 살 이후로 자신이 이런 질문을 받는 날이 오게 될 줄 몰랐다.

“문제를 내십시오.”

그는 눈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레페나의 어려운 수식을 단번에 풀었다. 그 뛰어난 솜씨에 그녀는 혀를 내둘렀다.

수학을 할 줄 안다는 건 뛰어난 능력이었다. 그의 과거를 생각해 보면 수도원에 적응만 잘한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원장님께서 좋아하시겠군요. 앞으로 지낼 곳을 마련하겠습니다. 독방은 불가능합니다.”

“괜찮습니다.”

“그 외 필요한 건 없습니까?”

잠깐 침묵이 흘렀다. 아니라고 대답하지 않는 걸 보아 원하는 게 있는 듯싶었다.

“일단 구할 수 있는 건 최대한 구해 주겠습니다.”

“……목걸이를 만들 만한 줄을 줄 수 있습니까?”

“줄이요?”

에드가는 탈출할 때 간신히 가지고 나오는데 성공한 반지를 꺼냈다.

“이걸 가슴에 달고 다닐 만한 걸 원합니다.”

“여기 있습니다.”

레페나가 준 것은 흔히 쓰는 가죽이 아닌 금속 줄이었다. 처음에는 거절할까 고민했으나 튼튼한 게 낫겠다 싶어 줄에 반지를 끼워 목에 걸었다.

가슴 위에 반지의 촉감이 느껴졌다. 그가 지고 있는 죄의 무게에 비해서 한없이 가벼웠다. 하지만 죽음의 순간 이 반지를 사용하면 그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 그날의 비극을 막을 수 없어도 다른 비극은 막을 수 있다.

‘왕국은 멸망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 생각을 하면 자신이 없어졌다. 과연 자신은 결단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나라를 대륙 전체의 평화를 위해 희생할 수 있을까? 아마 국왕 전하를 비롯한 왕국의 많은 사람이 자신을 원망할 것이다.

‘이래도 원망받고, 저래도 원망받나.’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에드가는 레페나에게 인사하고 방을 나섰다.

“이야기는 잘 끝났나요?”

이번에도 루비카가 그를 안내했다.

“이곳에 원하는 만큼 머물러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어머! 잘됐네요.”

그녀는 사제실에 들어가기 전보다 훨씬 후련해 보이는 그의 표정에 일이 잘 풀린 것 같아 기뻤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 수도원에 머무를 수 있는 기간이 끝나면 어찌 되나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그…… 반지는 뭔가요? 레페나 님이 선물하신 건가요?”

“아니요.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군요.”

그녀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톤 낮아졌다. 자신이 뭔가 실수라도 한 걸까?

“참, 그럼 제가 수도원을 안내할게요! 여기 계신 분 중에 목수도 있으니 걸을 때 편하게 지팡이도 만들어 줄 거예요.”

하지만 루비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목소리로 그를 이끌었다. 그는 그렇게 수도원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신도는 되지 않았다. 사랑의 신이라는 존재를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계시를 내리지 않았다니 그런 게 어디 있나.

‘다른 사람을 통해서라도 말했어야지.’

만약 어떤 사제가 계시를 받았다고 나타나면 사기 치지 말라고 쫓아냈을 거지만 역시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그 원망도 오래가지 않았다. 수도원 생활은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게다가 대부분 그를 귀찮아했다. 눈이 보이지 않는 그에게 일을 가르치는 것조차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루비카가 쪼르르 와 가르쳐 주었다. 그녀는 그를 자신이 처음 발견했다는 데 일종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듯싶었다.

자연스럽게 에드가는 루비카를 쫓았다. 그녀의 쾌활한 웃음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울적했던 기분이 나아졌다. 실수를 할 때 화 한 번 내지 않는 그녀가 점점 존경스러워졌다.

그녀는 힘들지 않는 건가? 이 삶이 고통스럽지 않는 건가? 그는 아주 가끔 소리 죽여 울었다. 이런 나약한 짓을 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어느 날은 결국 그녀에게 울고 있다는 사실을 들켰다. 하필 가장 들키고 싶지 않은 상대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 주다니 설마 수도원 생활이 힘들어 이렇게 우는 거라고 오해하면 어쩌나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그녀는 울고 있는 그에게 어떤 꾸지람이나 어설픈 위로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옆에 앉아 울고 있는 내내 손을 잡아 주었다.

“당신은 행복한가요?”

눈물을 다 멈춘 그가 불쑥 그녀에게 질문했다. 왜 이런 질문을 했는지는 그도 모른다. 언제나 밝은 그녀가 신기하고 이상했다. 혹 사실은 비참한데 행복한 척 연기를 하는 건 아닌지 궁금했다.

“음, 그런 것 같아요.”

“삶이 원망스럽지 않습니까? 이렇게 전쟁이 나서…… 모든 것이 황폐해졌지 않습니까?”

“전쟁이 나지 않았으면 좋았겠지요. 하지만 원망스럽냐면…… 꼭 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루비카는 그에게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해서 들려주었다. 삼촌 내외에게 받았던 학대에 가까운 취급과 매일 무기력하게 눈물만 흘리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자신의 삶. 비록 자신에게 모질게 대한 삼촌 내외였으나 그래도 가족이었기에 죽었을 때 슬펐다.

“모든 것이 파괴되었을 때는 역시 막막하고 슬펐어요.”

전쟁은 역시 잔혹했다. 하지만 만약 전쟁이 나지 않았다면 그녀는 삼촌 내외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을까? 아마 지금 이 나이까지 베르너 저택에 매여 제대로 세상 구경 한번 하지 못하고 매일 구박받으면 살았을 것이다. 그런 삶보다 조금 배가 고프더라도 수도원에서 사는 게 낫다. 적어도 여기서는 ‘고맙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

“살아남았으니 할 수 있는 말이지만 덕분에 저는 해방됐어요. 예전의 나는 매일 삶을 원망하고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마음으로 무기력하게 살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때 죽지 않길 잘했다고, 세상에는 아주 작지만 확실한 행복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는 걸요.”

에드가는 그녀의 말에 어쩐지 마음이 먹먹해졌다.

“당신에게 전쟁은 행복의 계기가 되었다는 소리인가요?”

루비카는 어쩐지 조급하고 무척 간절해 보이는 그를 바라보았다.

“죄 받을 소리지만 그래요. 저는 전쟁이 난 후 행복해졌어요.”

다른 사람이라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진심으로 믿고 의지하는 그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그의 눈가가 다시 촉촉이 젖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눈물의 의미는 아까와는 전혀 달랐다.

“고맙습니다.”

“고맙다니요.”

믿었던 호위에게 배신당한 뒤 에드가는 자신의 발명품이 세상에 불행을 초래하리라고 막연하게 짐작했다. 탈출한 뒤 맞닥뜨린 현실을 상상 이상으로 지독했다.

그는 자신이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해 왔다. 그 죄를 어찌 씻을지 생각하면 까마득해졌다. 과거에는 그를 그토록 괴롭혔던 아버지의 부정에 대한 분노도 희석될 정도였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기에는 자신이 지은 죄가 너무나 컸다.

그러나 여기, 그래서 해방될 수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잔혹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과거보다 지금이 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그 대답이 그에게 얼마나 많은 위안을 가져다주었는지 그녀는 아마 모르겠지.

“아르망.”

그의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 주며 그녀가 속삭였다.

“지금은 힘들겠지만 여기에서 지내며 사람들을 돕다 보면 당신도 분명 행복하다고 느끼는 날이 올 거예요.”

레페나가 신이 바란 것은 그저 그가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했을 때 에드가는 신이 자신을 조롱한다고 느꼈다.

“나도…… 행복해질 자격이 있을까요?”

“그럼요.”

하지만 루비카가 그리 말하자 그 말이 믿고 싶어졌다. 그는 신을 믿지 않았으나 그녀는 그에게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 뒤로도 그녀는 그가 신경 쓰였는지 종종 찾아와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젊은 남녀가 아니었기에 사람들은 꼭 붙어 다니는 그들을 그저 우정으로만 보았다.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당신을 뭘 하고 싶나요?”

“과거로요? 전 지금도 만족스러워요.”

“그런 기회가 온다면…….”

“내 힘으로 베르너 저택을 탈출하고 싶네요.”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상황은 좋게 흘러가지 않았다. 전쟁의 포화는 수도원을 비켜나가 다들 심각한 상황을 몰랐으나 북쪽의 정세는 점점 더 나빠졌다.

에드가는 매일 새롭게 들어오는 부상자를 통해서 증거를 수집했다. 이오스는 예상대로 강했다. 초반에는 스텔라에 크게 부상을 입었으나 점점 전세는 역전되었다.

이오스의 옆에 붙어 있는 꾀 많은 고블린이 문제였다. 아마눈을 비롯해 스텔라를 손에 넣은 나라들이 점점 초초해하는 게 느껴졌다.

심지어 오랫동안 잠든 이베르의 권역의 움직임이 수상하다는 소리도 들렸다. 마석을 훔치러 잠입했다 크게 다친 누군가는 이베르의 권속들이 빛나는 돌을 이용해 그들의 주인을 깨우려 한다고 알려 주었다.

‘여기도 곧 위험해지겠어.’

수도원을 벗어나 다른 안전한 곳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할 수 있다면 루비카도 함께 데려가고 싶었다. 그는 이미 그녀 없는 삶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아르망.”

그러나 그의 준비가 끝나기 전에 죽음이 찾아왔다.

“더는…… 더는 말하지 말아요.”

“난 이미 틀렸어요.”

“루비카, 안 돼.”

그녀가 죽어 간다. 자신의 죽음은 언제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지만 그녀의 죽음은 아니다. 숨을 거두려는 그녀 앞에 에드가는 자신의 감정을 깨달았다.

“루비카, 나는…… 나는…….”

뒤늦게 고백을 하려 했으나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자신에게 자격이 있을까?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을 자격이 있을까? 미움으로 가득 찬 삶을 산 자신이.

그는 황급히 목에 걸고 다녔던 푸른 반지를 그녀의 가슴 위에 올렸다. 과연 그녀에게도 반지의 힘이 통할까? 알 수 없지만 일단 시도라도 하고 싶다.

“루비카 베르너, 당신은 이제 과거로 돌아갈 거야. 돌아가면 클레이모어 공작을 찾아가. 찾아가서…… 만약 이 반지가 당신과 함께 시간을 거슬러 간다면 보여 줘. 그리고 스텔라를 개발하지 말라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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