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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208화 (208/212)

# 208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208화

세상의 때가 하나도 묻지 않은 밝은 목소리였다. 목소리만 들어서는 채 스무 살도 되지 않았을 것 같은데 맥을 짚거나 그를 요령 있게 부축하는 행동에서 나이가 느껴졌다.

“아, 저기 두더지 길이 있어서 잘못하면 발이 빠져요. 조심해요.”

갑작스럽게 나타난 그녀는 수도원까지 씩씩하게 그를 부축하면서 주변 풍경을 묘사했다. 덕분에 오랜만에 짙은 어둠 속에서 살기 전의 기분을 느꼈다. 묘하게 친근한 목소리는 단 몇십 분만에 마음의 빗장을 풀게 만들었다.

“과일을 따러 간다더니 사람을 주워왔습니까?”

수도원에 도착하자마자 불만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다. 역시 쓸모없는 자신을 반기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할 리 없다. 쫓아내는 게 당연하다.

“수사님, 멀뚱멀뚱 보지 말고 도와주세요.”

하지만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듯 그녀는 핀잔에도 당당히 말했다. 말은 그리하면서도 수사는 바로 곁에 와 남자를 부축했다.

“일사병에 걸린 것 같아요. 물을 제가 가진 걸 드리긴 했지만 조금밖에 안 돼요.”

“일단 실내에서 좀 쉬게 한 다음에 식사를 들게 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통풍이 잘되는 실내에 이불을 깔아 그를 뉘었다. 루비카가 일어나 떠나려는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소매를 꽉 잡았다. 다섯 살짜리 아이나 할 법한 유치한 행동이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슬그머니 손을 빼는데 오히려 그녀가 그의 두 손을 꽉 잡았다.

“수도원에는 무슨 볼일 때문에 오려던 건가요?”

어색한 침묵이 내려오지 않게 먼저 말을 거는 게 배려가 몸에 밴 사람이다. 하지만 마땅한 대답이 생각나지 않았다. 누군가가 휴의 수도원에 가라고 했지만 이유를 알려 주진 않았다.

“아, 억지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돼요.”

루비카는 그의 침묵을 다른 식으로 해석했다. 인간과 마물 그리고 드래곤까지 얽힌 전쟁에서 휴의 사원은 유일하게 안전한 곳이다.

다양한 종족의 결혼을 주관하고 가리지 않고 후원금을 받기 때문에 식량도 넉넉한 편이다. 당장 굶어 죽을 것 같은 자들이 도움을 청하기 위해 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녀가 오늘 구한 남자는 무슨 일을 겪었는지 상처투성이에 많이 위축되었으나 제법 고집도 세고 자존심도 있어 보였다. 그런 사람이 자신에게 의지하는 것을 보니 많이 힘들었나 보다. 루비카는 내내 쾌활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녀의 밝음에 그는 차차 안정을 찾고 귀를 열어 주변의 정보를 수집했다.

‘아픈 사람이 더 있어.’

몇 명의 발소리와 신음 소리가 들렸다. 걸을 때마다 느껴지는 울림을 보았을 때 제법 큰 공간이었다. 놀랍게도 이 수도원은 가난하고 다친 사람을 도와주는 곳 같았다.

‘사랑의 신을 섬기는 곳이란 건가…….’

세상에 정의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런 곳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어쨌든 자신을 해칠 것 같지 않아 안심스러웠다.

자연스레 루비카를 잡는 그의 손이 느슨해졌다. 그가 마음의 안정을 찾았단 사실을 눈치챈 루비카는 남성 수사에게 목욕을 부탁했다.

비록 차가운 물이었으나 거의 몇 년 만에 몸을 씻게 되자 그는 기뻐서 눈물이 났다. 예전에는 당연하게 여겼던 기쁨을 너무 오랜만에 맛봤다.

“이런, 여분 옷이 없군요. 죄송하지만 한동안은 입던 옷을 입으셔야겠습니다.”

깨끗이 씻고 난 다음 원래 입었던 옷을 입자니 견디기 힘든 냄새가 났다. 이 냄새를 견디고 그녀는 손을 꼭 잡고 곁에 있어 준 건가. 그는 얼굴도 모르는 여인에게 존경심마저 들었다. 과거의 그였다면…… 아니, 지금의 자신조차 그런 일을 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루비카 자매님, 레페나 님이 부르십니다.”

“레페나 님이요?”

“네, 오늘 아침 꿈에서 중요한 사람이 수도원에 올 거라는 계시를 받으셨답니다.”

“흐음, 그분이 그런 능력이 있는지 몰랐는데……. 아르망, 안내할게요. 같이 가요.”

잠시 ‘아르망’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녀가 손을 내미는 기색에 그만 냄새나는 자신이 부끄러워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그녀는 잠시 멈칫했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잡았다.

“여기서부터 계단을 올라가야 해요.”

그녀는 아까와 똑같이 그의 눈이 되어 주었다. 점점 그는 얼굴에 열기가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다. 이 순간이 좋으면서도 못내 뛰쳐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를 벗어나 도망칠 방법이 그에게 없었다.

“레페나 님은 조금 까다롭지만 좋은 분이에요.”

뭐가 걱정스러운지 그녀는 사제실의 문을 두드리는 순간까지 그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레페나 님, 루비카입니다. 아르망 님을 데려왔어요.”

“들어와요.”

루비카의 안내를 받아 그는 사제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대충 목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레페나라는 사제는 그에게 의자에 앉을 것을 권하고 루비카에게 일이 많을 테니 그만 돌아가라고 말했다.

그녀는 그를 두고 떠나는 것이 못 미더워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일이 많은 건 사실이었다.

“일이 끝나면 곧 올게요.”

단 몇 시간 만났으나 오래전부터 알았던 것 같은 여인이 떠나고 잠시 침묵이 내렸다. 이럴 때면 눈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불공평한 것이 없다.

상대는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관찰하고 있을 텐데 그는 상대에 대한 정보를 하나도 얻을 수 없다. 자신에게 적의를 가졌는지 호의를 가졌는지 알 수 없는 게 제일 고통스러웠다.

“신의 목소리를 들은 적 있습니까?”

“……아니요.”

“사제 중에는 그걸 듣는 자가 있습니다. 천 명 중에 한 명 있을까? 믿음이 깊은 자만 경험할 수 있는 아주 큰 복이지요. 제 평생에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저는 아주 특별한 경험을 했습니다. 바로 휴 신의 목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그는 하품을 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타인의 신앙 고백은 그걸 믿지 않는 자에게는 지루하기 마련이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 저도 뭐라 설명하기 힘들군요. 어쨌든 그분이 오늘 자신의 아들이 수도원에 올 것이라 말했습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자신에게 신의 목소리를 듣는 능력이 생겼다고 자랑이라도 하려는 걸까?

역시 시원한 물과 잠자리는 공짜가 아니다. 앞으로 매일 이런 가르침을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길거리를 떠돌아다니는 것보다 이게 더 낫다. 잠자리에 대한 지불로 그는 어설프게나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분이 말하길…… 자신의 아들이 눈이 먼 상태라고 하셨습니다.”

잠시 레페나의 말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저는 아닙니다.”

얼토당토 않는 소리라고 일축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하지만 레페나는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의 이름을 ‘아르망’이라고 소개할 거라고 하셨습니다.”

“신의 목소리를 듣는 자로 명성을 얻고자 저를 이용하지 말아 주십시오.”

사실은 사기 치는 데 이용하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혼란한 세상에 신앙의 이름으로 남의 돈을 강탈하기 위해 이런저런 사기를 치는 사람이 있다 들었다.

좋은 곳이라 안심했건만 이런 쓰레기 같은 사람이 운영하는 곳인지 몰랐다. 다른 것은 몰라도 관심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를 찾아내 이용하려는 사람은 여전히 많았다.

“과거의 이름은 ‘에드가’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뒤이은 레페나의 말에 에드가는 자리를 박차려던 동작을 멈췄다. 하지만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어쩌면 입었던 옷에 이름이 써 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죄로 어머니에게 저주받은 자.”

심장이 욱신거렸다. 그 사실을 아는 자는 자신과 칼 그리고 국왕 전하뿐이다. 그리고 둘은 이미 죽었다. 그를 고문했던 자들도 끝끝내 알아내지 못한 사실이다.

“클레이모어 공작.”

“얼토당토 않는 소리 마십시오.”

에드가는 끝까지 부정하고자 했다. 간신히 탈출해 세상을 떠돌면서 스텔라로 초래된 잔혹한 일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됐다. 많은 이들이 클레이모어라면 이를 갈았다. 여기서 인정하면 자칫 죽게 될지도 모른다.

“도와주라 했습니다.”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쩐지 가슴 깊은 곳에서 분노가 들끓었다.

“숨기고 아끼라 했습니다.”

“왜!”

이 수도원에서 평범하게 살려면 끝까지 아니라고 부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왜 진작 도와주지 않은 거죠?”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둠 속에 살기에 과거의 빛은 더욱 선명했다.

하필이면 사랑의 신이 자신을 그의 아들이라고 칭할 게 뭐람. 차라리 전쟁의 신이 그리 말했다면 납득이라도 할 것이다. 그의 삶에는 단 한 번도 사랑이 깃든 적이 없다.

“내게 그걸 만들면 안 된다는 말 한마디만 하면 되는데…… 빌어먹을 신은 당신에게 계시를 내리고 왜 내게는 내리지 않은 겁니까? 심지어 내가 자기 아들이라고 말하면서!”

어느새 그의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신을 만날 수 있다면 멱살을 잡고 욕이라도 하고 싶다. 이렇게 계시를 내릴 수 있는 개자식이 왜 여태 자신에게 말 한마디 해 주지 않은 건가.

“……휴 신을 믿습니까?”

“아니요.”

휴의 수도원에 도움을 받으러 왔으면서도 에드가는 간단히 부정했다. 이 세상의 다른 수많은 신을 믿어도 사랑의 신은 믿지 않는다. 세상에서 제일 의미 없고 쓸모없는 신이다. 그의 삶은 더러운 사랑으로 고통받았다. 그는 감히 사랑을 입에 올리는 모든 존재를 혐오했다.

“그럼 어쩔 수 없지요. 휴 신은 자신을 믿는 사람에게만 계시를 내릴 수 있습니다.”

명치가 지끈 아파 왔다. 사제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소리였으나 그는 세상에서 가장 황당한 소리를 들은 기분이었다.

“그럼 내가 휴 신을 믿었으면 진작에 스텔라를 개발하지 말라는 계시를 받았을 수 있다는 소립니까?”

“네.”

아마도도 아니다. ‘네’다. 그 선명한 믿음에 분노가 갈 곳을 잃었다. 믿음이란 벽에 가로막힌 기분마저 들었다.

“다른 신은 뭘 하고요?”

“글쎄요. 다른 믿는 신이 있습니까?”

없었다. 그는 믿음이라곤 질색했다. 그의 삶은 항상 의심으로 들어차 있었고, 의심은 그의 연구과 공부에 큰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세상을 파괴했다.

“하.”

허탈했다. 무슨 신이든 믿기만 했으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다는 소리인가? 자신이 여태 뭘 한 건지 어이가 없었다. 신을 믿었다면 계시를 내려줬을 거라고?

“참 쉽군요.”

“알고 보니 쉬운 겁니다. 사실은 전혀 쉽지 않지요. 세상에 믿음을 가지는 것만큼 어려운 게 어디 있습니까?”

레페나는 냉담히 대꾸했다. 말만 들었을 때는 꼭 신을 믿지 않는 자 같았다.

“그래서 휴 신은 또 뭐라고 했습니까?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있답니까?”

자신이 만든 무기를 빼돌리고 이용한 사람들에 의해 세상은 거의 무너지다시피 했다. 마석과 황금 평원을 차지하기 위한 기나긴 전쟁.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그가 초래했다.

그는 이 일에 책임을 느꼈다. 적어도 신이 이 사제에게 계시를 내렸다면 이 상황을 타개할 단서 정도는 주었으리라.

“그분은 그저 당신이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라고 했습니다.”

“개자식.”

사제의 앞이라는 것도 잊고 그는 결국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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