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207화
‘하지만 이걸 빼면 당신은 삶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잖아.’
대답하고 싶었지만 입술이 꽁꽁 얼었다. 볼도, 눈썹도 마찬가지였다. 얼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었다. 어떤 의사 표현도 할 수 없는데 그녀의 마음이라도 읽은 듯 그가 속삭였다.
“나를 지옥에서 살게 할 셈이야?”
화가 난 음성이었지만 진득하니 슬픔이 배어 있었다. 그가 자신의 희생을 바라지 않는 건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되었다.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고작해야 1년 정도밖에 못 살아.’
그저 그가 살아가길 바랐다. 1년이란 시간은 너무 짧다. 죽음을 목전에 둔 그를 두고 그 1년을 행복하게 보낼 자신도 없었다.
아주 짧은 1년이 지나고 홀로 남은 자신의 삶은 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시간은 공평하게 흐르면서도 어떨 때는 순식간에 흐르듯 하고 어떨 때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느리게 흐른다.
그녀는 그를 잃은 상실감을 안고 긴 삶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그를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게 낫다.
“1년을 살아도 행복하게 살고 싶어. 나를 정말 사랑한다면 나 때문에 죽으면 안 돼.”
뒤늦게 루비카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깨달았다. 자신이 죽은 뒤에 그가 겪게 될 상실감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했다.
죽음까지 각오한 사랑은 과연 숭고한 것일까? 하지만 고작해야 1년이 되지 않을 짧은 행복을 위해 이런 선택을 하는 게 맞는 것일까?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어디에도 정답은 없었다.
온몸이 얼음처럼 굳어 버렸음에도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그가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기도 전에 눈물이 꽁꽁 얼어 버렸다.
눈물조차 제대로 닦아 줄 수 없는 현실이 그를 아프게 했다. 왜 이렇게 된 걸까? 왜 그녀는 자신 때문에 목숨을 버릴 결심까지 하게 된 걸까?
처음에는 자신을 버리고 죽으려 한 그녀에게 화가 났지만, 이제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미안해.”
처음부터 자신이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녀는 자신을 만나 이런 운명에 휩쓸리지 않고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더욱 슬프고 비참하게 하는 건 이 와중에도 그녀를 만나지 못하는 건 싫다고 생각하는 자신이었다. 그녀를 내버려 두지 않는 건 자신의 아집일까?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를 되살려 과거로 보낸 자신의 이기심을 비웃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의 선택은 그와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한 사람의 행복을 위해 다른 한 사람이 희생하는 것이 과연 사랑일까? 그가 원한 것은 그저 함께 행복해지는 것이다.
“나 같은 놈을 좋아해서 당신이 고생이야.”
주먹 쥔 그녀의 손을 호호 불었다. 손가락이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 자신은 얼마나 이기적인 선택을 하려는 걸까?
그는 녹은 손가락을 하나씩 펴 주었다. 싫다면 다시 주먹을 쥐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어떤 말도 몸짓도 하지 못하는 상태였으나 그거면 충분했다.
비록 함께 행복해지기 힘든 상황이었으나 적어도 마지막까지 서로 노력하겠다는 각오가 전해졌다.
그는 왼손 약지에 낀 반지를 조심스럽게 빼기 시작했다. 평생 사랑하는 여인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는 일만 할 줄 알았다. 이렇게 반지를 빼는 날이 올 줄 몰랐다.
“하아.”
반지가 빠지자 천천히 몸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손가락에서 시작된 따뜻함이 점점 퍼져 나가 가슴까지 차올랐다. 루비카는 간신히 옅은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 숨이 반지에 닿는 순간 푸른 돌이 눈 녹듯이 녹아내렸다.
“어?”
당황해서 떨어지는 액체를 잡으려 했으나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이베르의 눈물이 대지에 닿는 순간 절벽 아래의 마영석이 일제히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빛은 유리관 속의 거대한 다이아몬드를 향해 보였다.
“됐어! 심장이 녹기 시작했어!”
블랑코의 외침과 함께 그저 커다란 다이아몬드인 줄 알았던 유리관 속 물체가 요동쳤다. 주변의 눈이 녹아내리고 유리관에 금이 갔다.
마영석의 빛을 흡수한 이베르의 심장은 그보다 더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시위는 대낮처럼 밝아졌다. 그리고 그 빛이 에드가에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에드가!”
루비카는 황급히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그를 붙잡았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았으나 눈동자에 초점이 사라졌다.
“안 돼, 안 돼.”
뭔가 잘못되었다. 역시 반지를 빼면 안 되었던 건가? 역시 자신이 그냥 죽어 버리는 게 나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저 바란 것은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다. 그게 그렇게 큰 욕심이었던가. 그러나 잔혹하게도 세상은 그녀에게 ‘행복’처럼 이루기 힘든 소원이 없다고 속삭였다.
“깨어나, 제발.”
루비카는 눈물을 쏟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다행히 손이 여전히 따스하고 맥이 뛰고 있다는 게 그녀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 * *
강렬한 빛에 눈이 멀었다. 그 뒤 그는 쭉 어둠 속에 있었다. 오직 밤만 존재하는 세상 속에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이 사라진 공간을 더듬어 그는 나아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그도 몰랐다. 그저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얼마나 걸었는지 모른다. 몇 번이나 넘어졌는지 이제는 셀 수 없다. 모래밭은 걷고, 풀밭을 걷고, 작은 돌로 이루어진 울퉁불퉁한 도로를 걸었다.
-휴의 수도원으로 가세요.
누가 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각인처럼 머리에 남았다. 하지만 방향도 알 수 없는 그가 휴의 수도원을 찾아가는 건 기적에 가까웠다.
결국 그는 배고픔에 지쳐 쓰러졌다. 발바닥은 화끈화끈 달아올랐고 무릎에는 감각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쓰러진 곳이 풀밭이라는 사실이었다.
‘이대로 죽는 건가.’
그럼 오히려 고맙다. 그만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었다. 그의 삶 절반은 마음의 고통으로 가득 찼고 나머지 절반은 육체의 고통으로 가득 찼다. 행복 따윈 바라지 않으니 그저 안식이 찾아오길 바랐다.
“어?”
그때 한 여인의 짧은 감탄사가 들렸다. 길에 쓰러진 자신을 보고 놀란 눈치였다.
“여보세요.”
그냥 지나칠 줄 알았던 여인이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자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려는 듯 손목의 맥을 짚었다.
‘이제 주머니를 털겠지.’
예전에는 사람의 호의가 당연한 줄 알았으나 어둠의 세상에 들어선 후부터 그는 모든 것에는 대가가 있음을 철저히 깨달았다. 눈 먼 자신은 아무런 이용가치도 없는 존재일 뿐이다. 오히려 주머니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을 발로 걷어차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괜찮아요?”
그는 그녀의 관심이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어째서 안식을 방해하는지 울컥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그녀의 손을 쳐낼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일사병인가?”
그녀의 중얼거림에 지금이 낮임을 깨달았다. 이마가 후끈후끈 뜨거운 게 열이 난 게 아니라 태양에서 쏟아진 빛 때문이었다.
곧이어 입에 쇠로 된 물체가 닿았다. 고문이라도 하려는가 싶어 깜짝 놀라 몸서리쳤으나 자신을 붙잡은 가느다란 팔이 워낙 단단해 반항할 수 없었다.
“물이에요. 마셔요.”
그 말에 꾹 닫은 입술을 열었다. 조금 짭짤하지만 차가운 물이 입안으로 쏟아졌다. 시원함에 가슴이 뚫릴 것 같았다. 안식을 찾던 마음은 어디로 가고 그는 어느새 물통에 매달리다시피 했다.
“저어, 눈이 안 보이시나요?”
수건을 꺼내 땀이 흐르는 이마를 닦아 주며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눈이 안 보이냐는 말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를 고문하거나 신문했던 치들은 종종 그가 더 이상 보지 못하는 점을 비꼬아 수치스러운 말을 입에 담았다. 처음에는 어리석은 자가 하는 어리석은 말로 치부했으나 계속 듣다 보면 마음이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여인의 목소리에는 그들 같은 악의는 없었다. 여기서 벌컥 화를 내거나 기분 나빠하면 어리석은 말에 쉬이 상처를 받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는 물통을 치우고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나, 그러셨군요.”
여인이 그의 눈가를 조심스레 매만졌다. 거부하고 싶었지만 누군가 몸을 만지면 긴장해서 움직일 수 없다. 예전이라면 저 손을 단칼에 쳐 냈을 텐데…….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자신은 변했다. 뛰는 새도 두렵지 않은 존재에서 발에 차이는 벌레에도 겁먹는 멍청이가 되었다.
“괜찮다면 우리 수도원에 가실래요? 사제님이 봐 주실 거예요. 지금은 몸을 회복하는 게 좋을 거예요.”
그리고 멍청이는 친절조차 두려워하기 마련이다. 거리의 부랑자에 불과한 자신은 하찮은 취급을 받아야 마땅했다. 그가 아는 세계에서 친절이란 목적이 있을 때만 존재했다. 혹 몸을 회복시킨 다음에 궂은일을 시킬 계획인 건가? 그러나 자신은 눈이 보이지 않는다.
“몸을 회복한 뒤 떠나고 싶으면 떠나면 돼요.”
“왜 내게 친절히 굽니까?”
“어머! 말을 하네. 다행이다. 전 혹시 말을 못하는 상태인가 걱정했어요. 그럼 어디가 아픈지 정확히 알아내기 힘들거든요.”
그녀는 수다스럽게 떠들면서 정작 그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쓰러진 그를 둘러멨다. 그동안 제대로 먹지 못해 삐쩍 말랐지만 자신은 결코 작은 덩치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일에 익숙한 듯 전혀 개의치 않았다.
“저는 루비카예요. 당신은요?”
이름을 묻는 건가? 반사적으로 ‘에드가’라고 대답할 뻔했다. 하지만 그 이름을 쓰는 건 좋지 않다. 어떻게 도망쳤던가. 그를 괴롭히거나 감시하던 사람들의 습관과 생활 패턴, 동선을 알아내어 오랫동안 준비해 간신히 탈출했다.
그 뒤 지금까지 잡히지 않은 게 기적에 가까웠다. 어쩌면 이제 필요 없어진 자신에게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지만 역시 쫓아올까 두려웠다.
“……아르망.”
고민 끝에 자신이 가진 긴 이름 중에서 제일 무난한 이름 하나를 골랐다.
“좋은 이름이네요. 아르망, 혹시 어딜 가려고 했나요?”
이름을 가르쳐 주면 그만 조용해지려나 싶었으나 귀찮을 정도로 쾌활히 말을 건다.
‘내게 따뜻이 대할 이유가 없어.’
친절을 공짜가 아니다. 자신의 목적지를 왜 알아내려는 걸까? 경계해야한다고 머릿속은 경종을 울렸다.
“……휴의 수도원.”
하지만 이토록 친절한 사람은 너무 오랜만이었다. 갖은 고문과 회유에도 꿋꿋이 버텼던 입술이 이번만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어이가 없다. 자신이 고작 이런 친절에 넘어갈 정도로 나약한 사람이었다니.
“휴의 수도원이라고요?”
그의 대답에 그녀가 발걸음을 멈췄다. 덜컥 겁이 났다. 자신의 대답에 뭔가 잘못된 것이 있는가? 휴의 신도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신이 누구였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없다. 우습게도 훨씬 더 강한 신조차도 사랑의 신과 적대하기를 꺼렸다.
사랑의 신은 온유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아픔을 줄 수 있는 존재이다. 그는 그런 종류의 아픔 따위는 모르지만 이 친절한 사람이 자신을 내치면 비슷하게 아플 것 같았다.
“잘됐네요. 지금 우리가 갈 곳이 거기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