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6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206화
거대한 막대기로 때린 듯 머리가 아파 왔다. 왜 중간중간 블랑코가 그녀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에드가를 무시하는 척 그녀만 어깨에 태워 데려온 것도 일종의 계획이었다.
루비카는 아직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에드가를 한번 바라보았다. 눈을 발로 차는 게 욕설이라도 하고 있는 듯싶었다.
만약 그가 옆에 있었다면 뒤돌아볼 것도 없이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겠지. 하지만 적어도 이야기 정도는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
“어째서 내 목숨이 필요한지 설명해 줘요.”
설명 끝날 즈음 그가 도착할 것 같았다. 잠시 블랑코가 유리관 속 영롱히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바라보았다. 무슨 기억 때문인지 블랑코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님프는 전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 힘을 사용할 때 대부분 조건이 걸려 있습니다.”
그의 저주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어째서 갑자기 님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걸까?
“조건이라는 건 무슨 소리인가요?”
어쨌든 블랑코가 이유 없이 말을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힘을 사용하기 위해서 조건이 필요하다면 에드가의 저주에는 어떤 조건이 필요했던 걸까?
이오스는 특별한 마법을 쓰기 위해서 종종 땅속에 특이한 광물이나 식물을 심어 대지의 힘을 극한으로 끌어모았다.
만약 님프도 그와 비슷하다면 힘을 유지하는 광물이나 식물을 찾아내어 없애면 그만이다.
“물의 님프를 예로 들자면 폭풍이 오는 날이나 가뭄이 들었을 때 같은 조건을 겁니다. 그럼 폭풍이나 가뭄이 끝나는 날 그들의 건 마법이 풀립니다. 반대도 가능합니다.”
“아, 그럼 에드가의 어머니는 태양의 님프였군요! 햇살을 조건으로 걸었잖아요.”
“그분의 말은 마법 그 자체입니다. 태양의 님프였다면 저주는 태양이 폭발할 때에나 사라지겠지요.”
그 소리는 세상이 멸망할 때나 그의 저주가 풀릴 거란 소리나 다름없다. 루비카는 추측이 틀려 시무룩해진 기분을 떨쳐 내듯 고개를 흔들었다. 블랑코의 설명이 맞는다면 태양의 님프가 아닌 게 다행이다.
“그럼 그분은 어떤 님프인가요?”
“아마도…… 사랑의 님프였을 겁니다.”
“사랑의 님프요? 휴의 님프였다는 소리인가요?”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아르망을 만난 것은 사랑의 신인 휴의 수도원에서였다. 블랑코의 한마디에 우연인 줄 알았던 일들이 필연처럼 느껴졌다.
파란만장하고 고되었던 삶이 외롭지 않았던 것은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고개 숙여 자신을 살펴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어째서 그렇게 생각한 거지요?”
“이베르 님의 심장이 꽁꽁 얼어붙은 건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지나치게 오래 잠든 이베르 님을 깨우기 위해 내려온 님프가 사랑의 님프인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게 아닐까요?”
“그럼, 저주를 끝내기 위한 조건도 사랑일 거라는 소리인가요?”
블랑코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루비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사랑의 님프였다면 조건은 ‘사랑’이다. 그렇다면 이상한 점이 있다.
“그의 사랑은 이루어졌어요.”
비록 원래의 삶에서는 서로의 마음이 통하지 않았지만, 시간을 거슬러 그녀는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 또한 그녀를 사랑했다. 조건이 사랑이라면 그의 저주는 진작에 깨졌어야 했다.
“그저 사랑이 이루어졌다고 저주가 끝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랑의 님프가 건 마법이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그 조건은 까다롭기 마련입니다. 이를테면…….”
“블랑코!”
스노우가 들고 있던 반지를 블랑코에게 던지며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대지의 기운이 수상해. 미노스 놈이 뭔갈 한 것 같아. 빨리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 샤샤, 너는 나랑 같이 저 녀석을 방해하러 가자.”
아무래도 미노스가 드디어 이오스를 찾아내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 같다. 시간이 이렇게까지 걸린 걸 보아 이오스는 약속한 장소가 아닌 다른 곳에서 버터차를 마시며 느긋하니 목욕이라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부인,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그의 뒷말이 뭔지 루비카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내 목숨이 필요하다고 했죠? 사랑의 님프가 내건 조건은 그를 위해서 목숨까지도 내놓을 수 있는 사랑이었나 보군요. 그래서 출발할 때부터 당신 표정이 어두웠나요?”
본인이 신으로 섬기기까지 한 사람이 미워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죽겠다고 하면 기뻐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내내 표정이 어두웠던 블랑코가 자신은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밝히는 순간 왜 표정이 밝아졌는지 이제야 알았다. 블랑코는 에드가가 죽든 말든 그녀가 살 거라는 사실이 기뻤던 거다.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이 반지를 끼는 순간, 부인의 생명을 원동력으로 장치가 작동할 겁니다. 마영석의 빛이 저분 안에 숨어 있는 님프의 힘을 모두 소멸하게 만들 겁니다. 그리되면 완벽한 인간이 되어 살아갈 수 있습니다.”
블랑코는 루비카의 비난 서린 목소리에도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하며 반지를 내밀었다. 뭐가 그리 아까웠는지 서랍장에 숨겨 두고 껴 볼 생각은 단 한 번도 못 한 채 몰래 꺼내 바라만 보고 도로 집어넣었던 반지다.
“만약 반지를 끼지 않으면 그는 얼마나 살 수 있나요?”
“더 이상 저주를 억누를 수 없을 정도로 님프의 힘이 세지기 시작했으니 길어야 일 년일 겁니다.”
……일 년. 고작해야 서른도 되지 않아 단명할 삶이라는 건가. 루비카는 눈 속을 헤치며 샤샤와 스노우의 방해에도 꿋꿋이 이쪽으로 오고 있는 그를 바라봤다.
‘……젊다.’
바람에 휘날리는 검은 머리카락마저 그의 젊음을 대변하는 듯 생생하게 빛났다. 한창때다. 아직 살아야 할 날도, 알아야 할 기쁨도 많은 시기다.
생명에 경중은 없다지만 에드가와 루비카 중 누가 더 세상에 도움이 될 인재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은 당연히 에드가라고 답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은 나도 젊지만, 자주 하던 말이 있지. 살 만큼 살았잖아.’
양손에 주름이 자글자글해질 때까지 살았다. 삶이 고된 만큼 다양한 기쁨과 슬픔을 알았다. 죽을 때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하지 못한 것 이외는 한이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한은 그가 다시 준 삶의 기회 덕분에 풀 수 있었다.
“내가 사랑 때문에 죽음을 선택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나요?”
그녀의 질문에 블랑코는 대답하지 않았다. 루비카는 그녀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주었으나 이제는 죽음을 선사하려는 반지를 고요히 바라보았다.
망설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죽음 앞에 그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반지를 가슴 위에 올렸다. 무슨 생각으로 그리하였는지 지금도 알 수 없지만 그의 마음은 훤히 뚫린 도로처럼 선명했다.
‘당신이 행복하게, 고통 없이 살았으면 좋겠어.’
루비카는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고 주먹을 쥐었다. 꼭 맞춘 것처럼 반지가 손가락에 딱 맞았다. 이베르의 눈물로 만들었다더니 반지를 끼는 순간 가슴에 시린 통증이 느껴졌다.
“안 돼!”
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느낀 에드가가 소리를 질렀다. 순식간에 땅에서 솟아오른 얼음이 그녀의 주위를 둥글게 감쌌다.
“아니, 저게 뭐지?”
동시에 차가운 눈 사이로 이오스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눈 속에 얼굴만 나온 게 꽤 우스운 모양새였다. 필요 없을 때는 기가 막히게 등장하더니 정작 필요할 때는 언제나 한 템포 늦다. 에드가는 자신을 붙잡으려는 스노우를 발로 뻥 차 버렸다.
“세상에, 저 녀석이 날아가네?”
“거기서 땅콩 까먹는 듯 구경하지 말고 당장 튀어나와.”
자기 몸의 몇 배나 되는 권속을 날려 버린 에드가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차갑게 명령했다. 하긴 땀을 흘려도 다 얼어 버려 눈이 될 날씨였다. 이오스는 눈 속에서 벌떡 일어나 바로 에드가의 앞에 섰다.
“가자.”
에드가는 이오스에게 어디에서 뭘 하다 이제 왔냐고 따져 물을 정신도 없었다.
짤막한 말에 평소라면 감히 누구에게 명령이냐며 화를 냈을 이오스가 오늘은 군말 없이 에드가의 손을 잡고 대지에 뛰어들었다.
아무리 이오스라도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이오스는 이대로 대지를 타고 들어가 가속의 힘으로 루비카를 감싼 얼음에 부딪칠 생각이었다.
얼음이 산산조각 나겠지만 블랑코는 위험해도 님프인 루비카가 위험할 일은 없을 듯싶었다.
“아으…….”
하지만 정작 산산조각 날 뻔한 건 얼음이 아니라 이오스의 머리였다. 에드가는 자신을 방해하려는 블랑코를 스노우와 마찬가지로 던져 버리고 그녀를 가둔 얼음집을 면밀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얼음 같았다.
“네 머리가 이 지경이 될 정도면 거의 다이아몬드급 강도란 소리군.”
“뭐? 이씨.”
“네 머리가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하다는 소리다.”
“그래?”
이오스는 자기 욕을 한 줄도 모르고 기뻐했다. 에드가는 스노우와 샤샤 쪽을 향해 턱짓했다.
“그럼, 단단한 머리로 방해되는 저 녀석들 좀 치워 봐.”
“쟤들은 이베르의 권속이라서 내가 함부로 할 수 없어. 이베르에게 체면이 있단 말이야.”
“……이번 일을 잘하면 사촌 누나 말고 누나라고 부르게 해 줄게.”
에드가로서는 살을 내주는 거나 다름없는 제의였다. 이런 급박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저 바보 도마뱀에게 감히 부인의 동생 같은 위치를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좋아!”
타는 속도 모르고 이오스가 좋다고 스노우를 상대하러 갔다. 붕붕 하늘 위로 잡고 돌리는 게 싸우는 건지 노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다. 에드가는 시간을 번 사이 얼음집을 손으로 짚어 가며 틈을 찾았다.
“루비카.”
간신히 찾아낸 구멍 사이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오스가 깨지 못했다면 어지간한 도구로는 파괴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일단 그녀가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었다.
“루비카!”
그의 목소리에 얼음 속에서 긴 잠에 빠져들 뻔했던 루비카는 소스라치게 놀라 깼다. 온몸이 얼어버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춥고 차가운 얼음 속에서 그의 목소리만 메아리쳤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첫 번째 죽음에서 그녀는 자신의 삶에 미련은 단 하나인 줄 알았다. 하지만 두 번째로 맞이한 죽음 앞에서 그녀는 그때 자신이 얼마나 오만했는지 깨달았다.
두 번의 삶을 살았으면 후회는 없이 죽을 줄 알았건만 아직 이루지 못한 많은 일과 꿈이 생각났다.
마음을 전하니 이루어지고 싶고, 이루어지니 함께 백년해로하며 그를 닮은 아이를 키우며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다. 자신이 이렇게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던가.
“에드가.”
꽁꽁 언 입술로 속삭이듯 그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꽝!’ 하고 충격과 함께 얼음집이 흔들렸다. 루비카는 왼손 약지에 낀 반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제라도 빼고 싶었으나 온몸이 얼어 불가능했다.
‘참 이기적이기도 하지.’
차라리 빨리 이 순간이 끝나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한번 거대한 폭발음이 들렸다. 곧이어 그의 손이 불쑥 얼음집 안에 들어왔다.
스테판이 그녀를 납치한 이후 에드가는 항상 재킷의 안쪽에 작은 총을 숨겼다. 일반적인 총과 달리 주변을 불태우는 총이다.
“부수지 못하면 녹여 버리면 되지.”
아무리 단단해도 얼음은 얼음. 강한 추위 때문에 불꽃은 곧 사그라들었지만 그가 들어가고도 남을 구멍이 생겼다.
“루비카, 지금 뭘 하려고 한 거야?”
조금 화가 난 표정이었다. 루비카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려 했으나 입술이 얼어 쉽지 않았다.
“이오스.”
그녀의 상태를 눈치챈 듯 에드가는 타깃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긴말하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이오스가 스노우의 발을 잡고 거꾸로 탈탈 털었다. 술에 취해 미노스에게 모든 걸 털어놓았던 스노우니 쉽게 입을 열 줄 알았다.
하지만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정작 모든 걸 털어놓은 건 거꾸로 잡고 털지도 않은 블랑코였다.
“루비카!”
그는 이제는 정말 화가 난 표정이 되었다.
“손 펴.”
그가 반지를 낀 채 주먹 쥔 그녀의 손을 잡고 억양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