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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205화 (205/212)

# 205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205화

지진이라도 난 듯 주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루비카는 블랑코가 황급히 눈보라를 막아 버팀목이 되어 준 덕분에 간신히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물론 에드가에게 버팀목이 되어주는 권속 따윈 없었다.

“에드가, 괜찮아?”

루비카는 대지의 흔들림이 멈추자마자 눈밭에 넘어져 구른 에드가를 쫓아가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

굴러가면서 돌부리에 치였는지 에드가는 인상을 쓰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이 외려 루비카의 속을 더 상하게 했다.

“내 손 꼭 잡아.”

일이 생기면 권속들이 자신은 구해 줘도 에드가는 나 몰라라 할 가능성이 크다. 루비카는 에드가의 손을 꼭 잡고 찬찬히 주변을 둘러봤다.

대지의 끝에서 거대한 유리관이 솟아났다. 절벽 아래에서부터 올라온 것일까? 땅이 지진이라도 난 듯 크게 흔들린 게 저것 때문인 것 같았다.

유리관 안에는 크기가 거의 블랑코만 한 거대한 다이아몬드가 달빛을 받아 영롱히 빛났다. 마영석에서 흘러나오는 빛과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다운 빛에 루비카는 할 말을 잃고 유리관을 바라보았다.

얼음 계곡과 오로라, 드넓은 대지에 쌓인 눈 그리고 달빛이 만들어 낸 위대한 광경에 눈물이 날 정도였다. 인간이 너무나도 작고 하찮게 느껴졌다.

자연은 고작 물을 원료로 저처럼 아름다운 광경을 만들어 내는데 인간은 그에 한참 못 미치는 건축물을 세운 뒤 거기에 얼마나 많은 금과 은을 썼는지 자랑해 대기 바빴다.

“안쪽에 지지대는 어떻게 숨겨 둔 거지? 낚시 끈 같은 게 견뎌 낼 무게가 아닌데…….”

루비카가 유리관 속의 거대한 다이아몬드와 달빛이 만들어 낸 아름다움에 취해 있을 때 에드가는 전혀 다른 관점의 호기심을 드러냈다.

“지지대? 그런 건 없다.”

“저 속에 그냥 떠 있는 상태라고? 음, 진공 상태는 아닌 것 같고, 안쪽에 액체류를 채워 넣은 건가? 무슨 종류로 어떤 방법을 쓴 건가?”

쏟아지는 질문에 블랑코가 눈을 끔뻑였다.

“그냥 얼어 있는 상태인데…….”

“얼어 있다고?”

물이 가득 든 상태 그대로 언 것일까? 날씨를 보아 불가능한 일은 아닌 듯싶었다. 다만 정말 얼린 것이라면 어떻게 저리 기포 하나 없이 깨끗한 상태로 얼릴 수 있는지 궁금했다.

“그럼…….”

“그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계속 질문을 퍼부으려는 에드가를 스노우가 제지하고 나섰다. 에드가의 질문에 대답하려던 블랑코가 황급히 입을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분명 대장은 블랑코라 들었는데 왜 상황을 스노우가 주도하는 건가? 에드가는 일단 의심을 거두고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관찰하기로 했다.

“시간이 별로 없어. 해가 뜨면 다칠 수 있어.”

스노우는 반지를 다시 꺼내 저 멀리 있는 유리관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눈이 종아리까지 쌓였지만, 스노우와 샤샤가 앞서 나간 덕에 길이 생겼다. 루비카는 에드가와 함께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앗!”

하지만 자꾸 밤하늘의 오로라가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이처럼 아름다운 광경을 볼까 한눈을 팔다 보니 그만 톡 튀어나온 얼음을 보지 못했다. 넘어지려는 루비카를 블랑코가 잡았다.

“고마워요.”

블랑코는 바로 손을 놓지 않고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안절부절못하는 반대편 손이 루비카에게 무슨 할 말이 있는 듯싶어 에드가는 일부러 모른 척 손을 놓고 먼저 걸어갔다.

“저는 당신을 존경합니다. 부인 덕에 꿈을 이뤘거든요.”

보폭을 맞추어 걸어가던 차 블랑코가 불쑥 말을 꺼냈다. 말은 그리하는데 표정은 음울하기 짝이 없다.

“존경이라니요. 저는 그저 예쁜 걸 좋아해서……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만들었을 뿐인걸요.”

“하지만 그 옷들은…… 입는 사람을 생각하지 않으면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단순히 예쁜 게 아니라 좀 더 편하게, 입기 쉽게 만들려 고심한 흔적이 보였습니다.”

블랑코의 말에 루비카는 솔직히 기분이 좋아졌다. 실제로 그녀는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좀 더 편히 팔을 들어 올릴 수 있을지, 옷을 덜 무겁게 만들 수 있을지.

예뻐 보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쨌든 인형이 아닌 사람이 입는 옷이다. 입는 사람의 편의를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 노력을 블랑코가 알아봐 기뻤다.

“부인은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거나 도움이 되는 데 기쁨을 느끼시지요?”

“이타적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그런 것 같아요.”

“사랑할 때도 그리 희생하십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루비카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블랑코의 눈빛이 한없이 진지했다.

사랑할 때도 그러냐고? 루비카는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에드가에 대한 것뿐만이 아니라 아르망과 지낸 순간들도 떠올랐다. 어쨌든 그녀는 둘 다-사실은 같은 사람이지만- 사랑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건 분명 기쁜 일이지요.”

당연하지만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보다 에드가에게 도움이 되는 게 더 기뻤다.

그의 책상에서 그녀가 잃어버린 줄 알았던 손수건을 찾았을 때가 생각났다. 부끄러움에 에드가는 땀을 뻘뻘 흘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혹여나 닳을까 쓰지도 못했다는 말에 그녀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앞으로 많이 만들어 둘 테니까 그러지 말고 사용해.

그 뒤로 그의 이름을 수놓은 손수건을 스무 개 가까이 만들었다. 처음에는 어떻게 이걸 쓰냐고 했던 에드가도 나중에는 그녀가 만든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거나 손을 닦았다.

그럴 때마다 이상하게 가슴이 뜨뜻해졌다. 그가 그녀가 만든 따스한 차를 마시고 미소 지을 때나 그녀가 만든 셔츠를 입을 때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하지만 희생을 했냐면…… 그렇지 않아요. 솔직히 이기적이었어요.”

루비카는 바로 앞에서 걸어가는 에드가의 등을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그도 충분히 들을 수 있을 만한 거리였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온 뒤부터 그녀는 이전에는 멀리했던 거짓말의 신의 신도가 되었다고 말해도 좋을 만큼 상황에 따라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의 귀나 남들의 귀에 듣기 좋은 말이 아닌 솔직한 자신의 마음을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 한 번도 자신을 놓은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를 위해서 많은 걸 할 수 있지만 나를 버리면서까지 하지 못했어요.”

에드가를 위해 많은 걸 할 수 있다. 스무 개나 되는 손수건에 이니셜을 수놓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저주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 서재 앞에서 하녀나 손님을 따돌리기 위해서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하지만 그건 희생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가 곤란할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험단을 파견하지 말아 달라고 청했다.

또한 공작 부인으로 있으면서도 옷을 만들고 싶다는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정체를 숨기면서까지 활동하기 시작했다.

다른 귀부인이었다면 남편의 입장과 사회적 체면을 생각해 하지 말았을 행동이다.

그녀는 씁쓸히 웃었다. 아르망을 사랑할 때도 결국은 자신이 이기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소중히 간직한 반지를 보고 따로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고 짐작했다.

그래서 죽음의 순간까지 그에게 마음을 고백하는 걸 미뤄 뒀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매달릴 정도의 용기는 없었다.

그러기엔 자신이 너무 소중했다. 어쩌면 자신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자신을 가장 사랑한 게 아닌가 싶었다.

“다행이군요.”

뜻밖에도 블랑코의 얼굴에서 어두운 안개가 걷혔다. 그는 조금 안심한 표정이었다.

“착한 사람 중에는 가끔 자신이 불행해지면서까지 상대방을 위하는 사람이 있지요. 하지만 사랑 때문에 자신을 희생하지 마세요. 희생해야지만 가능한 사랑은 가짜입니다.”

그리고 그가 말을 더하려는 순간 스노우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블랑코!”

블랑코는 긴장을 숨기고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왜?”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좀 와.”

다행히 과도하게 힌트를 주려고 한 걸 들키지 않은 모양이다. 블랑코는 한숨을 쉬고 루비카에게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서둘러야겠군요.”

손을 내민 모양새가 아무래도 타라는 뜻 같았다. 안쪽에 털을 잔뜩 덧댄 신발을 신었건만 벌써 발가락이 얼얼하니 감각이 없긴 했다.

가시밭길을 걷는 건 아무렇지 않았지만, 얼음길을 걷는 건 그녀도 면역이 없었다. 루비카는 큰 고민 없이 블랑코의 손 위에 올라갔다. 그러자 블랑코는 그녀를 어깨 위에 올리더니 빠르게 뛰어가기 시작했다.

“어이, 이봐!”

“그쪽은 알아서 걸어오든지 기어오든지.”

이번에도 에드가는 나 몰라라였다. 루비카가 그도 태워 줄 것을 간청했으나 블랑코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내 어깨에 클레이모어가 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저…… 저도 클레이모어예요.”

“저희에게 부인은 클레이모어 공작 부인이 아닌 마담 베리입니다!”

역시 권속의 보폭은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이 컸다. 어느새 에드가는 눈 속의 티스푼처럼 작아졌다.

에드가와 그만큼이나 떨어지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비록 권속들은 그녀에게 깍듯이 존댓말을 쓰고 에드가에 비하면 한없이 친절이 굴었으나 무언가 속내를 숨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도착했습니다.”

어느새 유리관이 우뚝 선 대지의 끝에 다다랐다. 절벽 아래에서 마영석이 만들어 내는 휘황찬란한 빛이 흘러나왔지만 두려워 감히 쳐다볼 수 없었다.

“저 혐오스러운 녀석을 살릴 방법을 알려드리지요.”

아직 눈 속을 한참 걸어오고 있는 에드가를 가리키며 스노우가 말했다.

“저기, 있잖아요.”

아무리 자신에게 친절하다고 해도 남편에게 계속 푸대접을 하니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클레이모어를 미워하는 건 이해해요. 하지만 그의 피는 절반은 당신들의 주인인 이베르를 구하기 위해 내려왔던 님프의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요.”

난데없는 지적에 블랑코와 샤샤는 뜨끔한 표정을 지었지만 스노우는 눈을 부라렸다. 그는 술김에 마음이 풀어져 주인에 대한 비밀을 털어놓았던 미노스가 클레이모어의 편이었다는 사실에 깊은 분노를 느꼈다.

“어쨌든 저놈도 공작이 되어서 우리의 마영석을 빼앗았습니다! 이전 공작 놈과 다를 바 없지요.”

“그건…… 그렇긴 하지만 올해부터는 아니에요. 모험단을 보내지 않기로 나와 약속했어요. 당신도 옷을 사기 위해 상점가를 들락거렸으면 눈치챘을 텐데요? 작년 이맘때쯤이면 마을은 모험단으로 북적거렸겠죠. 하지만 그렇지 않았잖아요. 심지어 여름쯤이면 권역에 침범했을 수색대를 본 적 있나요?”

루비카의 반문에 스노우가 잠시 침묵했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사실 여태 수색대를 발견하지 못해 혹 놓친 건 아닌지 권속들은 걱정에 시달렸다.

대체 어떤 기구를 발명했길래 한 명도 찾지 못했나. 클레이모어가 투명 망토라도 발명한 것 아니냐고 수군거렸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요. 원한다면 영지에 연락해서 국왕 전하가 내린 칙령을 보여 드리지요. 앞으로도 마영석을 빼앗지 않을 거예요. 저희도 굳이 사람의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그걸 원하지 않아요.”

루비카의 대꾸에 스노우가 한숨을 쉬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일찍 그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게 사실이라면 심한 말을 한 것에 대해서는 취소하겠습니다.”

“그럼 부탁이니 그이도 여기까지 태워 주세요. 어쨌든 그의 저주를 풀기 위해 모인 거잖아요.”

이 눈 속을 헤치고 걷는 건 위험한 일이다. 루비카는 블랑코를 바라보며 간절히 부탁했다. 만약 자신만 태워 줄 알았으면 블랑코의 손에 타지 않았을 것이다.

“부인, 저주를 푸는 데 당사자인 클레이모어…… 공작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블랑코는 ‘놈’이라고 부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루비카는 블랑코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워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부인의 남편이 인간으로서 평범하게 살아가길 바랍니까?”

“……네, 그걸 위해 여기까지 온 걸요.”

“그럼 부인의 목숨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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