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4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204화
“그쪽이 클레이모어 공작인가?”
불쾌한 기분을 숨기지 않고 블랑코가 되물었다. 웃음을 숨기기 위해 사레들린 척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듯 스노우와 샤샤도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그렇네.”
잠시 허공에 불꽃이라도 튀는 것 같았다. 커다란 덩치의 권속 셋이 죽일 듯이 노려보는데 담담한 에드가가 신기할 정도였다. 시한폭탄 같은 분위기에 미노스가 황급히 루비카를 소개했다.
“이분은 클레이모어 공작 부인이십니다.”
미노스의 말에 권속들 사이에서 짧은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그들은 에드가의 옆에 있던 새하얗고 몽글몽글한 존재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클레이모어 공작가가 악명답게 곰을 납치해 애완동물로 키우는 줄 알았다.
“반갑습니다.”
마스크를 벗고 인사했다. 권속을 목격한 인간은 대부분은 놀라서 도망치기 바쁘다.
하지만 루비카는 겁먹기는커녕 다정한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그녀의 심미안은 편견에 가득 사로잡힌 인간과 다르다. 역시 마담 베리다. 거기에 아기 곰 같은 옷차림은 블랑코를 비롯한 권속들의 마음을 녹이기에 충분했다.
“선물을 가져 왔어요.”
지나치게 경직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고자 루비카는 미리 준비한 선물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의 의도를 눈치챈 칼이 마차에서 재빨리 상자를 가져와 건넸다.
각각의 상자에는 권속들의 이름이 수놓아져 있었다. 제 몫의 상자를 받은 블랑코와 스노우, 샤샤는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상자를 관찰했다. 그들은 기대에 부풀어 오른 모습을 숨기지 못했다.
“무슨 선물인가요?”
“한번 열어 봐요.”
루비카의 재촉에 마지못한 척 블랑코가 먼저 상자를 풀었다. 그리고 안에 든 물건을 확인했을 때 그는 믿기지 않는지 눈을 깜빡였다.
“……이건?”
“드레스를 입을 때 어울릴 만한 모자를 한번 만들어 봤어요.”
루비카의 설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스노우와 샤샤도 상자를 풀었다. 스노우의 상자에는 린넨으로 만든 보닛이, 샤샤의 상자에는 예쁜 꽃모양의 헤드드레스가 들어 있었다. 각자의 머리 모양에 따라 어울릴 만한 것을 고심해서 만든 흔적이 보였다.
셋은 망설이지 않고 루비카의 선물을 머리에 썼다.
“어때? 스노우.”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나는?”
“네 머리 뿔과 리본색이 같아서 보기 좋아.”
이오스의 조언은 유효했다. 보닛이나 헤드드레스는 언뜻 보기에는 지나치게 귀여울 정도로 프릴이나 리본이 잔뜩 달려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들과 잘 어울렸다. 이번만은 에드가도 웃음을 터트리지 않았다. 루비카의 실력이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돌아가면 의상실에 비슷한 걸 많이 만들어 놓으라고 해야겠네.”
루비카는 그리 말하면 그들이 뛸 듯이 기뻐할 줄 알았다. 하지만 방금까지 서로를 칭찬하던 그들의 표정에 묘한 안타까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웅성거리는데 인간의 말이 아니어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분명 선물은 마음에 들어 했어.’
그런데 왜? 혹 그들은 그녀를 돌려보내 줄 생각이 없는 걸까? 초대한 손님을 죽이는 일은 없다고 했건만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잠시 자기들끼리의 토론을 끝낸 후 블랑코가 심각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반지를 가져왔나?”
에드가는 그 말이 자신에게 한 거라는 걸 깨닫기까지 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세리토스 왕국을 비롯해 대륙에서 공부할 때도 언제나 남들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들어왔던 그다. 에드가보다 칼이 더 발끈했다.
“각하께 예의를 갖춰 주십시오.”
“예의?”
블랑코의 뒤에 있던 스노우가 인상을 썼다.
“지금 예의 운운했나? 제대로 우리 식 예의로 대해 주면 네 주인 놈은 지금쯤 몸이 두 동강은 났을걸?”
“그런……!”
“칼, 진정해.”
세리토스 왕국에서 클레이모어 공작가는 존경받아 마땅한 가문이나 이베르의 권속에게 그는 자신의 주인이 긴 잠을 자게 만든 원흉 중 하나일 뿐이다. 이렇게 서로 대화할 기회가 생긴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루비카가 간신히 풀어 놓은 분위기를 다시 경직되게 만들 수 없다. 에드가는 그들의 푸대접을 담담히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반지는 가져왔다.”
에드가가 내민 반지를 블랑코가 살펴봤다. 확실히 그들의 주인이 흘린 눈물을 담아 만든 반지였다. 그리운 마음과 원망스러운 마음이 동시에 치밀어 올랐다. 블랑코는 반지를 꼭 쥐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딱딱하게 말했다.
“안내하겠으니 따라 오시오.”
“따라 오라고? 여기서 알려 주는 게 아니었나?”
“저주를 풀 수 있는 장소가 따로 있으니 안내하겠다는 뜻이다.”
에드가는 잠시 대답 없이 블랑코를 노려보았다. 그의 세 배가 되는 덩치의 권속이었으나 겁먹은 기색이 하나도 없었다.
“마차를 타고 가도 되나?”
블랑코가 에드가가 타고 온 마차를 힐끗 보았다.
“그리 먼 거리는 아니니 두고 와라.”
“그쪽에게는 짧은 거리일 수 있어도 인간에게는 충분히 먼 거리일 수 있습니다. 특히 마님은 평범한 여인입니다. 마차를 타고 가야 합니다.”
“그럼 우리 썰매를 태워 주겠다.”
“그런……!”
“칼.”
에드가는 칼의 이름을 나직이 불러 진정시켰다. 그마나 싸움에 대비할 수 있도록 준비한 마차를 두고 가겠다는 말은 충분히 불안해할 만한 것이다. 하지만 이 이상 반대의 뜻을 드러내면 상대도 충분히 이상하게 여길 수 있다.
“일단 여기서 기다려.”
“각하.”
집사의 눈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의 주인이 기다리라고 말하는데 더 이상 항명할 수는 없다. 불만 많은 표정으로 간신히 칼이 명령을 받아들이자 그는 옆에 있던 미노스에게 시선을 옮겼다.
“미노스.”
“네, 각하.”
“여기까지 안내하느라 수고 많았다. 다음 장소까지 따라 올 필요 없어. 너는 도마뱀이나 찾으러 가.”
에드가가 말한 도마뱀이 이오스를 뜻함을 미노스는 바로 알아차렸다.
지금 상황이 퍽 수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미노스가 판단하기에도 판이 깨질 걸 각오하고 이오스를 데려오는 게 안전할 듯 싶었다.
“미노스, 도마뱀을 좋아하나? 다음에 오면 말린 걸 잔뜩 준비해 두지.”
샤샤가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미노스는 ‘말린 도마뱀이라니, 고블린이 아무리 땅을 파고 살아도 그런 끔찍한 건 먹지 않아! 생긴 건 이래도 우리가 좋아하는 건 깨끗한 물에 씻은 체리란 말이야!’라고 대꾸하는 대신 활짝 웃었다.
“샤샤 님, 감사합니다. 하하, 그럼 전 자리를 주선하는 걸로 역할을 다 끝냈으니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인사를 끝으로 미노스마저 돌아갔다. 이제 이 차가운 곳에 그나마 의지할 존재가 사라졌다.
“이쪽입니다.”
이베르의 권속 뒤를 따라가며 루비카는 에드가의 손을 꼭 잡았다. 어쨌든 이베르의 권속들은 권역 내에 그들을 초대했으니 손님을 죽이는 금기를 일으키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렇다고 안심할 수 있을까? 가둬 버리거나 일부러 길을 잃게 만들어 얼어 죽게 만드는 등 많은 수가 있다.
“괜찮아.”
그녀의 불안을 눈치챈 듯 에드가가 낮게 속삭였다. 루비카는 조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과거지만 시간으로 따지면 먼 미래에 그녀는 자주 눈을 잃은 에드가의 손을 잡고 길을 안내했다.
-괜찮아요. 익숙하지 않은 길을 가거나, 포탄을 피해 도망쳐야 할 때 그가 긴장으로 걷지 못하면 그리 말하고 다독였다.
그럼 언제 긴장했냐는 듯 그의 걸음에 두려움이 사라졌다. 루비카의 손이 인도하는 대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걷고 뛰었다. 지금은 반대가 되었다. 그 사실에 루비카의 마음은 뭉클하면서도 서글펐다. 그녀만 기억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아르망이라서가 아니라 온전히 그로서 사랑받고 싶다고 말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추억이 바람처럼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힘들고 고생스러웠던 만큼 보석 같은 추억이 많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살아갈 힘을 주었던 남자는 지금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겪지 못한 미래의 일이니 기억하는 게 더 이상해.’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더니……. 루비카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그가 두 눈을 뜨고 저주를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현실에 기뻐하기로 했다. 하지만 조금만 걸어가면 된다더니 그 조금은 칼의 말대로 어디까지나 권속들의 기준이었나 보다. 점점 차가워지는 루비카의 손에 에드가는 욕설이 치미는 걸 간신히 참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차를 그냥 끌고 올걸 그랬군.”
“마차는 바퀴가 눈에 빠져 이동할 수 없다. 스노우, 썰매는?”
“여기 있어.”
들으라는 듯 빈정거렸으나 아무래도 그들은 에드가가 무엇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지 짐작도 못하는 눈치였다. 스노우는 푹 쌓인 눈 속에서 거대한 세 개의 썰매를 찾아냈다. 블랑코는 자신의 썰매에 에드가와 루비카가 탈 수 있게끔 자리를 내어주었다.
“미노스가 도마뱀을 빨리 찾아야 할
텐데…….”
여기까지 왔는데 벌써 민가의 불빛이 보이지 않았다. 별이 가득한 밤하늘보다 새하얀 눈만 쌓인 고요한 대지가 더 넓고 무섭게 느껴질 정도였다. 블랑코 일행은 어떤 이정표도 없는 그곳을 썰매를 몰고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에만 보이는 길이 있는 듯싶었다.
“이게 짧은 거린가?”
허허벌판을 지나 몇 개의 산을 건너 얼음 계곡에 다다르자 에드가는 참지 못하고 블랑코에게 항의했다. 손목시계는 벌써 새벽 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마차와 달리 썰매는 차가운 밤바람을 막아 주지 못한다. 루비카는 북극곰처럼 무장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코를 훌쩍거렸다.
“조금만 더 가면 돼.”
“아까부터 그 소리를 했던 것 같은데?”
“이제 정말 조금만이다.”
그렇게 말하고도 낭떠러지로 이루어진 길을 아슬아슬하게 한 시간이나 더 가고서야 썰매에서 내릴 수 있었다.
“세상에, 저것 좀 봐.”
썰매에서 내린 루비카가 홀린 듯 소리쳤다. 대지의 아래에서 흘러넘친 색색의 아름다운 빛이 거대한 얼음 계곡 너머로 보이는 아름다운 오로라와 어우러졌다. 위험하지만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눈이 종아리까지 쌓였지만 추위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뒤이어 내린 에드가는 주변을 둘러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사방이 낭떠러지 같았다.
“저 빛은…… 마영석 같군.”
“바로 알아보는 건가? 하긴 그동안
우리 물건을 훔쳐간 세월이 얼만데
척하고 알아봐야지.”
“클레이모어가 방해만 하지 않았어도 진작에 저 절벽 끝을 다 채웠을 거다.”
에드가는 빈정거리는 소리에 대꾸하지 않고 주변 산세를 체크했다. 얼음계곡이 굽이친 모습이 어쩐지 드래곤을 연상시켰다. 꼭 인공적으로 만든 듯 동그란 공터 아래 마영석을 가득 채워 놓은 것도 불길하기 이를 데 없다.
‘설마…… 권역의 중심부로 온 건가?’
너무 쉽게 이들을 믿었나. 도망을 치는 게 나을까? 아님, 그들의 중심부와 마영석을 보관하는 위치를 알았으니 이를 빌미로 협박을 하는 게 나을까?
“어이, 여기야.”
한참 고민을 하고 있는 찰나 스노우가 쌓인 눈 사이에서 무언가를 찾아내었다. 그는 구조물에 쌓인 눈을 털더니 에드가에게 받은 반지를 흠에 끼웠다. 그러자 절벽 아래에서 굉음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