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203화
“그럼!”
이오스는 앞뒤 생각하지 않고 일단 긍정했다. 에드가가 보았다면 거짓말하지 말라고 멱살을 잡을 만큼 뻔뻔스러운 대답이었으나 루비카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참, 이오스. 이것 좀 봐 줄래?”
“뭐? 뭘?”
또 무슨 위험한 음모를 꾸미려는 걸까? 잔뜩 긴장한 이오스에게 루비카가 내민 것은 다양한 머리 장식을 그린 스케치였다.
“아까 모자는 뿔이 없는 블랑코에게 선물하면 될 것 같고, 스노우랑 샤샤에게는 어떤 게 어울릴 것 같아?”
만나지 못한 권속들을 위한 머리 장식을 만드는 데 미노스는 고블린답게 미감이 엉망진창이라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오스는 예쁜 꽃에 집착하는 만큼 좋은 의견을 들려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스케치북을 받아든 이오스가 얼굴을 있는 대로 일그러뜨렸다. 설마 그들에게 어울릴 만한 게 하나도 없는 건가? 미노스의 묘사를 모두 믿은 게 실수였을지도 모른다.
“……괴멸시킬 작정 아니었어?”
“괴멸이라니?”
지금 의뭉스럽게 떠보는 건가? 아니면 처음부터 넉넉히 선물할 생각이면서 자신을 골탕 먹인 건가? 추리를 하자니 점점 머리가 아파 왔다. 골치 아픈 문제에는 대답보다 회피를 추구하는 것이 이오스의 특징이었다.
“나무에 거름을 줄 때 계란 껍질도 같이 주라고 말하는 걸 깜빡했네.”
“이오스, 잠깐!”
하지만 오늘만큼은 루비카가 그를 그냥 보내지 않았다. 엄격한 표정에 어쩐지 매번 이렇게 도망치면 안 된다고 혼이라도 날 것 같았다.
“가기 전에 고르고 가.”
루비카는 태평스럽게 디자인화를 이오스에게 내밀었다. 이오스는 잠깐 김이라도 샌 듯 휘청거렸다. 긴장했던 게 바보 같다.
“그냥 대충 만들며 안 돼?”
“어떻게 그래. 그분들은 이런 걸 처음으로 써 보잖아. 평생 기억에 남을 텐데 좋은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어.”
이렇게까지 말하면 아무리 이오스라도 내분을 일으킬 속셈으로 만든 물건이 아님을 안다. 자신에게 아무 대가없이 공짜로 장미를 주고, 리본을 주는 걸 보면 아무래도 루비카는 님프의 특징 중 하나인 ‘냉정함’이 결여된 것 같다. 어쩌면 그녀는…….
‘멍청한 님프 취급받으려나?’
그래서 님프의 섬을 떠나 인간과 결혼한 건지도 모른다. 갑자기 이오스는 방금까지 무서웠던 루비카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하필이면 왜 아주 짧은 찰나의 삶을 사는 존재를 반려로 정한 걸까? 찰나가 끝나면 영원의 삶을 사는 존재는 그 아픔을 감당할 수 있을까? 이오스는 짧은 순간이나마 루비카가 행복하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종족을 따지지 않고 그 사람에게 어울릴 만한 옷을 만드는 것이다. 실제로 지금 이오스가 입고 있는 옷도 루비카가 골라 준 것이다. 그녀는 직접 만들어 주고 싶었지만 에드가가 펄쩍 뛰어서 불가능했다.
“샤샤는 머리에 뿔이 세 개나 있어서 모자는 안 어울릴 거야.”
이오스는 마음을 고쳐먹고 자리에 앉아 진지하게 디자인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는 그렇게 이틀을 공작가에 붙어 있었다. 이 일이 누구보다 달갑지 않은 건 바로 에드가였다.
* * *
결국 자그마치 이 주일이나 지나고서야 공작 내외는 이베르의 권역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그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다. 일단 ‘작은 새의 소식’지에 크리스토퍼와 자콥 남작의 일이 실렸다.
“그럼 내가 살인자에게 옷을 지었던 거야?”
“하녀 하나만 두고 치수를 쟀던 일도 있었는데…… 그때 내가 부른 가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줄자로 내 목을 졸랐을 수도 있겠네요.”
디자인을 훔친 것도 훔친 거지만 워낙에 간악한 짓을 저지른지라 연신 화제가 되었다. 어느새 부인들은 만나기만 하면 그 이야기를 해댔다. 평소 크리스토퍼가 예민할 정도로 깔끔을 떨고 우아한 태도를 보인 만큼이나 그가 흉악한 범죄자란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그거 아세요? 크리스토퍼가 치안대에 끌려갈 때 코르셋을 입고 있었대요.”
그들의 대화 중에 슬며시 끼어들어 카나리아처럼 맑은 목소리로 새로운 정보를 퍼 나르는 인물도 있었다.
“코르셋을 입고 있었다고?”
“어머, 그러고 보니 평소에도 좀…… 변태 같은 구석이 있었던 것 같아요.”
“지나치게 가느다란 허리에 집착했지.”
“그게 다 열등감 때문이었던 걸까?”
“마담 카나를 흉보고 다녔던 것도 어쩌면…….”
안타깝게도 루비카는 이런 흥미진진한 대화에 낄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출발할 때에 맞춰 이베르의 권속들을 위한 선물을 간신히 다 완성할 수 있었다.
국왕이 도장을 찍어 주지 않는 동안 미노스는 이베르의 권속들과 몇 가지 협상에 성공했다. 먼저 만나는 장소는 권역 내가 아닌 입구로 정했다. 그리고 클레이모어 공작가에서 최소한의 인원으로 가는 대신 그들도 대장 격인 블랑코와 샤샤, 스노우만 나오기로 했다. 루비카가 준비한 장식의 수와 딱 맞아 떨어졌다.
“북동쪽은 추운 데다 습기도 높습니다. 특히 권역은 상상을 초월해요. 권역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단단히 준비해야 합니다.”
“그렇게 추워? 여태 의상실에 보낸 옷은 대부분 여름이나 가을용이었는데…….”
미노스의 조언에 루비카는 영 다른 대답을 했다. 정말 이 부인은 귀족가에 태어난 게 아까울 정도로 남을 꾸며 주는 일을 사랑했다.
“권속들은 인간과 달라요. 특히 이베르 님의 권속들은 추위에 강합니다. 지금 겨울옷을 입으면 더워 죽겠다고 할걸요. 눈이 루비카 님 키 정도쯤 쌓여야 스카프를 목에 두릅니다.”
“눈이 그 정도까지 쌓인단 말이야?”
“세리토스 왕국의 겨울도 악명 높지만 그곳은 상상 이상입니다.”
많은 곳을 떠돌아다녔지만 이베르의 권역에 간 적은 없다. 얼마나 척박하고 무서운지 미노스가 이동하는 내내 떠들어 댔지만 루비카는 어쩐지 즐거웠다. 사실상 에드가와 하는 첫 여행이었다.
“에드가, 밖에 눈이 와.”
그렇다고 바깥을 뛰어나갈 수는 없고 창문을 열어 풍경을 구경하는 게 고작이었지만 그녀는 퍽 만족스러웠다. 돌아갈 때는 찬란한 태양 아래에서 그와 함께 저 눈밭을 뛰어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괜히 희망이 벅차올랐다.
“추워.”
하지만 에드가는 들떠 있는 그녀와 달리 아주 냉정하게 창문을 닫고 그녀의 손에 장갑을 입혀 주었다.
“루비카, 목도리.”
그리고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그가 챙기는 옷의 종류가 늘어났다. 최고급 담비털로 만든 흰 망토부터 은여우로 만든 목도리, 장갑, 털모자, 마스크까지. 결국 루비카는 북극곰 같은 상태가 되었다.
“이건 너무 답답해.”
“추워. 안 돼.”
정작 에드가 본인은 펜이 미끄러진다고 장갑조차 착용하지 않으면서 그녀가 착용한 것 중 하나라도 벗는 걸 허용하지 않았다. 마차 안에 난방은 얼마나 심하게 했는지 땀까지 나올 정도였다.
“권속들을 만나러 갈 때는 그냥 망토만 입고 가면 안 될까? 그렇게까지 춥지 않은 것 같은데.”
세리토스 왕국에서는 자신의 정체를 숨길 수밖에 없었지만 이베르의 권속을 상대로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 그래도 명색이 디자이너인데 멋진 옷을 입고 등장하고 싶었다.
“안 돼. 안 그래도 밤늦게 만나는데 감기 걸릴 일 있어?”
비록 에드가의 상태 때문에 해가 지면 만나기로 했지만 ‘밤늦게’라는 말은 어폐가 있다.
“그렇게까지 추운 건 아닌 것 같은데…….”
“미노스의 말 못 들었어? 권역에 가면 지금보다 훨씬 더 추울 거야.”
그것도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는 게 아니라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다. 하지만 더 고집을 피웠다간 그가 울 것 같아 루비카는 그냥 포기하고 곰돌이 같은 상태로 권속들을 만나기로 했다.
“이오스는 마을에 있다고 했나?”
“네. 아무래도 블랑코와 샤샤 님을 또 만나기 싫으신 모양입니다.”
“그래, 그녀석이 방해만 될 거야.”
성질머리를 이기지 못하고 참견하다 이상한 지점에서 화를 내고 문제가 복잡해지면 도망쳐 버리는 게 이오스의 특징이었다.
“별일 없겠지. 어쨌든 저들은 우리를 ‘초대’했으니까.”
“네. 아무리 권속들이라도 초대한 손님을 죽이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드래곤의 권속들은 권역 내에서 지켜야 하는 규칙은 반드시 지킵니다.”
그래도 에드가는 다소 초조한 기분이 되어 이베르의 권속들을 기다렸다. 그들은 인간으로 변신하지 않고 본연의 모습으로 오겠다고 했다. 큰 덩치를 생각하면 부담스럽기 짝이 없으나 그것까지 이쪽에서 마음대로 정할 수 없었다. 에드가는 대신 칼에게 무기를 숨겨 오라고 지시했다. 칼은 그 짧은 사이에 마차를 개조해 병기와 같은 수준으로 만들었다.
“각하, 저쪽에서 오는 것 같습니다.”
에드가는 칼이 가리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록 해가 졌지만 아직 완벽한 어둠이 찾아오지 않아 사물의 모습이 어느 정도 분간이 가능했다. 저 멀리서 오는 권속들이 입고 있는 옷은 분명…… 드레스였다. 3미터나 되는 거구들이 리본과 프릴로 꾸민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습은 어떻게 묘사해야 할지 그의 풍부한 어휘력으로도 곤란할 지경이었다.
에드가는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참으며 루비카를 흘끔 보았다. 도착하기 전 그녀는 권속들을 만났을 때 과거 전쟁터에서 마물에게 쫓겼던 기억 때문에 겁에 질리면 어쩌나 걱정했었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난 게 다행이랄까.
“세상에, 너무 잘 어울린다.”
모자와 망토, 마스크에 폭 파여 눈과 코만 겨우 바깥에 나온 모양새였지만 루비카는 웃기는커녕 무척 감동스러운 표정이었다. 과거의 기억 때문에 보자마자 겁먹고 떨면 어쩌나 싶었지만 자신이 디자인한 옷을 입고 나온 그들은 비록 3미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덩치에도 불구하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잘 어울린다고?”
“응, 에드가. 특히 저 하늘색 드레스를 입은 권속이 센스가 좋은 것 같아. 아, 머리를 그냥 풀었네. 땋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섬세한 일을 하기에 권속들의 손은 너무 큽니다.”
미노스의 대꾸에 루비카가 탄식을 흘렸다. 에드가는 잠시 자신이 잘못 보았나 싶어서 눈을 비볐다. 하지만 다시 보고 또 다시 보아도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조금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사랑스러운 드레스를 입은 우락부락한 존재들이었다.
‘이해할 수가 없군.’
가끔 루비카가 말하는 아름다움은 너무 심오해서 따라잡기가 힘들었다. 어쨌든 그는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아니었다. 6살짜리가 어찌 아카데미의 문제를 이해할 수 있을까. 에드가는 그가 모르는 종류의 아름다움이라 여기고 일단 웃음을 참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위대한 드래곤 이베르 님의 평온한 잠을 지키기 위한 모임의 대장 블랑코입니다.”
하지만 하늘색 드레스를 입은 가장 덩치가 큰 권속이 먼저 나와 인사했을 때 에드가는 다른 의미로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뭐? 무, 무슨 모임?’
그 악명 높은 권속은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 숙면의 선봉장이었다.
“각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아, 잠시 저녁에 먹은 게 사레가 들려서.”
에드가는 간신히, 그야말로 간신히 심각한 분위기에서 웃음을 터트릴 위기를 극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