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202화
하지만 미노스의 한마디로 에드가는 이오스를 이용해 하루 만에 이베르의 권역에 가는 계획은 전격 취소했다.
“블랑코가 부인을 꼭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루비카를? 안 돼, 위험해.”
“블랑코를 비롯한 이베르의 권속들이 방법을 알려 주기로 결심한 이유의 팔 할이 공작 부인 때문입니다. 다들 부인을 만나는 걸 얼마나 고대하고 있는지…….”
그래도 에드가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마물도 아니고 자그마치 드래곤의 권속이었다.
특히 ‘블랑코’는 에드가도 이름을 알 정도로 악명이 높았다. 얼마나 많은 모험가가 블랑코가 휘두르는 도끼에 죽었는지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 에드가의 입장에서는 걱정 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함께 가고 싶어.”
“루비카……. 그들은 클레이모어를 혐오해.”
“내게 호의가 있다잖아. 그리고 그렇게 클레이모어를 싫어한다면 더더욱 당신을 혼자 보낼 수 없어. 그게 더 위험해.”
이미 루비카는 결심을 마친 눈빛이었다. 이럴 때는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없다. 에드가는 머리로는 그녀의 판단이 옳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저 차라리 제가 위험하고 말지 그녀를 춥고 위험한 북동쪽으로 데려가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마석 마차를 준비시켜야겠군.”
아무리 빠른 마석마차를 타고 가도 이베르의 권역에 다다르는 데는 일주일가량 걸린다. 이오스의 이동 속도로는 하루면 충분하지만 문제는 그 과정에서 고통스러울 정도로 흙을 들이마셔야 한다. 게다가 이오스는 한 번에 한 명이 한계였다.
“각하, 위험합니다. 권속들과의 싸움에 대응할 수 있는 모험가들을 모아 호위대를 꾸려 가는 게 좋다고 생각됩니다.”
“그럼 시간이 너무 걸려. 게다가 어쨌든 그쪽은 나를 도와주는 입장이야. 그런데 무장한 호위대와 함께 온다? 이건 먼저 싸우자고 시비를 거는 거나 다름없어.”
“저도 그 의견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러다 이베르의 권속들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면 어쩝니까? 어느 정도의 대비책은 필요합니다.”
마석마차가 아무리 커도 대규모의 군대를 수용할 정도의 크기는 아니었다. 걱정을 떨치지 못하는 칼의 모습에 루비카가 의견을 냈다.
“이오스를 데려가면 어떨까? 비록 권속을 헤치지는 못해도 급할 때 도망을 치거나 최소한의 방어는 할 수 있잖아.”
“오, 그렇군요!”
적절한 대안을 찾았다고 기뻐하는 칼과 달리 에드가는 오히려 기분 나빠했다.
“급할 때 도망? 그놈은 고작해야 한 명 정도밖에 못 데리고 나가.”
“하지만…… 멀리 갈 필요까진 없고 권역만 벗어나면 안전한 거 아냐? 그 정도면 이오스에게는 몇 초면 충분하잖아.”
“그 녀석은 도마뱀 수준으로 멍청해서 도움이 안 될 거야.”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말까지는 아무리 루비카라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재빨리 말을 바꿨다.
“물론 그렇지만 요즘은 많이 나아졌잖아. 화내는 버릇도 많이 줄었고, 무엇보다 이오스는 어지간한 군단보다 힘이 세잖아.”
그녀가 이오스가 얼마나 뛰어난지 납득시키기 위해 칭찬하면 칭찬할수록 에드가의 얼굴에 먹구름이 꼈다.
‘더 이상 칭찬하시면 위험한데…….’
가운데에서 칼과 미노스는 좌불안석이 되어 에드가의 눈치를 보았다. 아무래도 루비카는 에드가의 기분이 왜 점점 더 나빠지는지 모른 채 이오스와 그 사이를 좋게 만들려 노력하는 눈치였다.
“일단 당사자인 이오스 님 의사를 한번 물어보는 게 어떨까요?”
과감히 미노스가 중간에 끼어들어 의견을 제시했다. 그제야 에드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이오스를 칭찬하는 루비카의 모습에 기분이 나빴을 뿐 이오스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통감하고 있었다.
“어? 이베르의 권역? 음…… 거기 싫어.”
하지만 뜻밖에도 제안을 듣자마자 이오스는 거절했다. 그에게 차가운 눈이 내리는 바깥에서 오들오들 떠는 경험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것이었다. 다른 곳과 달리 마음껏 성질을 부릴 수 없는 지역이란 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오스, 권역까지 따라올 필요는 없고 근처에 있다가 혹 우리가 위험하다 싶으면 와서…….”
“위험할 일이 뭐가 있어? 누…… 아니, 사촌 누나가 있는데?”
이오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직까지 루비카를 감쪽같이 님프로 믿고 있는 이오스는 루비카가 ‘위험’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루비카라면 잠든 이베르가 깨도 당해내지 못하리라. 특히 그 겨드랑이에 상대의 머리를 끼고 흔드는 기술이란!
“무서운가 보군.”
루비카가 이오스를 설득하는 내내 조용히 옆에 있던 에드가가 입꼬리 하나를 비죽이 올리고 말했다. 아주 낮고 조용한 목소리였으나 그래서 이오스의 귀에 더 잘 들렸다.
“뭐? 지금 나보고 한 소리야?”
“그래. 엉덩이 몇 번 좀 걷어차였다고 가기 싫다니. 겁이 많군. 하긴 남에게 맞은 적은 처음이지? 이 드래곤의 힘만 믿고 날뛰는 놈아.”
“에드가!”
루비카는 참지 못하고 에드가의 어깨를 쳤다. 혼자 오겠다는 걸 이오스와 만나면 위험하다고 부득불 쫓아와서 설득하는 와중에 찬물을 끼얹었다. 대체 그는 자신의 저주를 풀 생각이 있는 걸까? 이 와중에도 에드가는 미노스를 한껏 노려보며 유치한 눈싸움을 이어 갔다.
“무서우면 오지 마. 겁쟁이는 필요 없어.”
“누가 그런 권속 따위 무서워할 줄 알고? 흥.”
결국 이오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에드가에게 손가락질 했다.
“두고 봐! 먼저 가서 기다렸는데 안 오면 그날은 사촌 누나의 남편이고 뭐고 내가 네 엉덩이를 아작 낸다.”
그리고 훌쩍 사라졌다. 에드가는 그제야 핏줄이 선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마사지를 했다.
“됐어. 이제 쫓아가면 돼.”
“설마 일부러 도발한 거야?”
“저 바보에게 일반적인 설득은 안 먹혀. 자, 이제 우리도 갈 준비를 하지.”
에드가는 무심히 자리에서 훌쩍 일어나 칼을 불러 이베르의 권역으로 가기 위한 준비를 지시했다. ‘이오스’ 이름이 나올 때마다 항상 인상을 찌푸리며 그 녀석은 바보에 도움이 안 되는 도마뱀이라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이오스를 다루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단 사실이 놀라웠다.
‘사실 사이가 좋은 거 아냐?’
아이들 중에 눈만 마주치면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면서 정작 없으면 서로를 찾는 경우가 있다. 루비카는 이후 둘 사이를 억지로 부드럽게 만들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에드가로서는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일주일가량밖에 되지 않는 여정이었으나 목적지가 이베르의 권역인 만큼 준비할 것이 많았다. 에드가가 국왕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국경을 넘어가는 것에 대한 허가서를 받을 동안 루비카는 미노스의 조언을 토대로 짐을 쌌다.
“많이 춥고 건조하다고 했지?”
“네. 아직 가을이지만 거기는 눈이 여기까지 쌓여 있습니다.”
미노스가 팔을 높이 들어 점프까지 했다. 세리토스 왕국의 겨울도 어마무시한 편이지만 이베르의 권역은 더 심한 것 같았다. 에드가가 발명한 재봉틀이 아무리 좋아도 두꺼운 모피로 옷을 만들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루비카는 하녀의 도움을 받아 수도 저택에서 겨울옷을 찾았다. 최고급 담비털 외투부터 여우목도리까지 없는 게 없었다. 그녀는 그중에서 딱 필요한 것만 골라 챙겼다.
“그 너구리 같은 영감! 아직도 도장을 안 찍어 주다니.”
하지만 준비가 다 끝났다고 훌쩍 출발하기에 에드가의 신분은 지나치게 높았다. 후작 이상은 국경 지대를 지나기 위해서는 일반 백성보다 몇 배는 더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 과정에서 국왕이 뭔가 협상을 걸고 있는 듯싶었다.
“아직도 출발을 안 했어? 너야말로 겁먹는 거 아냐?”
결국 이오스가 공작가에 다시 나타나 에드가 앞에서 거들먹거렸다.
“곧 출발할 거다.”
그리고 에드가가 낮게 중얼거린 욕설은 국왕을 향한 것인지 이오스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에드가의 표정이 워낙 어두워 더 이상 시비를 걸 수 없었다. 이오스는 할 수 없이 루비카에게 갔다.
“뭘 만들고 있어? 외투?”
“어머, 깜짝이야.”
권역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던 이오스의 등장에 루비카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며 손에 든 것을 떨어뜨렸다.
“거기서 입기에는 너무 작은데? 적어도 발목까지 오는 걸로 만들어야 해.”
“외투면 이런 얇은 천으로 안 만들지. 잘 봐.”
루비카는 아직 만들던 물건을 펼쳐보였다. 크기는 분명 짧은 재킷 정도였으나 끈과 리본, 프릴이 달린 모양새가 영 아니었다.
“설마……이거 머리에 쓰는 거야?”
“응. 이베르의 권속을 만나면 선물하려고 만들었어.”
어쨌든 ‘프레사’는 표면적으로 인간을 위한 옷을 파는 곳이었다. 사람과 달리 이베르의 권속들은 머리에 커다란 귀가 있거나 뿔이 있어 일반적인 모자를 쓰기 어려웠다. 분명 그들이 좋아하는 드레스에 세트로 딱 어울리는 모자를 한 번쯤 쓰고 싶어 할 것이다.
루비카는 국왕의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마냥 기다리기 심심해 그녀가 목격했던 마물의 모습을 떠올리며 어울릴 만한 머리 장식을 만들었다. 하지만 실제 권속을 만난 적은 없어 잘 어울릴지 걱정스러웠다.
“잘 어울릴까?”
“이거? 분명 서로 차지하려고 피 튀기며 싸워 댈걸? 와, 설마 내분을 일으켜서 괴멸시키려고 만든 거야?”
루비카는 이오스의 얼토당토 않는 말을 그저 농담을 가장한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그 정도야? 그럼 혼신의 힘을 쏟아야겠네.”
그녀는 기뻐하며 부지런히 바느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이오스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님프는 엄청 똑똑하고 냉정하다더니…….’
콧노래까지 부르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범상치 않다. 새삼 아르곳 거리에서 보았던 무시무시한 기술이 떠올랐다. 역시 님프를 적으로 두면 안 된다. 그녀의 사촌 동생이 되길 잘했다.
‘만에 하나, 내가 실수라도 해서 기분 나쁘게 만든다면?’
그럼 지금 그가 이베르의 권속과 같은 입장이 될 것이다. 문득 방금 마주친 에드가의 어두운 얼굴과 욕설이 떠올랐다. 더불어 미노스가 그에게 강조한 ‘님프는 반려를 끔찍이 챙기니 조심 또 조심해야 합니다.’라는 말까지…….
미노스는 등 뒤에서 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벌써 몇 번이나 에드가와 싸우는 모습을 그녀에게 들켰다. 언뜻 평온해 보이지만 그의 사촌 누나는 내분을 일으키고도 남을 물건을 콧노래를 부르며 만들 정도의 강심장이다.
“으아아!”
바느질을 하던 루비카는 갑작스런 이오스의 비명 소리에 깜짝 놀랐다. 살다 살다 드래곤의 비명, 그것도 이오스의 비명을 듣는 날이 올 줄 몰랐다.
“에드가랑 잘 지낼 거야!”
“응?”
“말도 잘 들을 거야. 안 싸울 거야!”
갑작스레 그리 외치더니 이오스가 그녀를 초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영문을 할 수 없지만 꼭 자신에게 대답을 요구하는 듯 눈빛이 간절했다.
“둘이…… 이미 잘 지내는 거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