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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200화 (200/212)

# 200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200화

하지만 걱정과 달리 공작가에 도착하자 루비카는 홀로 에드가의 집무실로 올라갔고 가브리엘은 응접실에 남았다.

공작을 바로 만나지 않은 건 다행이었으나 혼자 기다리자니 마음이 더욱 불안했다.

가브리엘은 엘리제가 따라 준 찻잔을 받으며 창문 너머 하늘을 확인했다. 곧 하늘이 붉게 물들 것 같았다.

“음, 시간이 많이 늦은 것 같은데 부모님이 걱정하겠어요. 오늘은 죄송하지만 돌아간다고 각하께 전해 주실래요?”

“아가씨, 백작가에 이미 기별을 넣었습니다. 백작 각하께서 많이 늦으면 주무시고 오셔도 된다고 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는 줄 모르는 백작가는 분명 공작가의 연락에 기뻐하며 허락했겠지. 게다가 공작의 청이었으니 아버지의 입은 귀에 걸린 듯 찢어졌을 거다.

‘그리고 내가 친 사고를 알게 되면 앞으로 한 달간…… 아니, 일 년은 디저트 금지겠네.’

외출 금지보다 더 무섭다. 가브리엘은 차와 함께 나온 다과를 노려보았다. 지금은 불안에 떨 때가 아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다시 케이크를 먹게 될지 모른다.

가브리엘은 염치를 내려놓고 바삐 포크를 놀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다 비워진 접시를 보고 엘리제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배가 많이 고팠구나. 다과를 더 달라고 할까?”

가브리엘이 엘리제의 권유를 거부할 리 없다.

“같이 주방에 가도 될까?”

심지어 한술 더 떴다. 하녀는 다과 접시에 적당히 쿠키와 샌드위치, 케이크를 함께 가져왔다.

클레이모어 공작가에서 만드는 케이크는 왕궁의 것보다 맛있다. 가브리엘은 접시의 공간을 쿠키와 샌드위치로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그럼 어서 가자!”

에드가가 자신을 부르기 전에 최대한 빨리 케이크를 많이 먹어야 한다. 가브리엘은 비장한 표정으로 엘리제의 팔짱을 끼고 주방으로 향했다.

“이거랑 이거, 이거.”

“땅콩 없어?”

그리고 정신없이 접시에 담을 케이크를 고르는데 주방 입구에서 웬 남자가 들어왔다. 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가브리엘은 놀라서 접시를 놓칠 뻔했다.

“어?”

아까 건물 창문에서 본 남자다. 머리카락과 눈 색이 황금빛이 아닌 갈색이란 것만 빼면 똑같다. 아까 본 건 환상이 아니란 말인가?

하지만 어떻게 3층에서 떨어진 사람이 여기에 있는 거지? 두려운 마음과 호기심이 소용돌이쳤다.

남자는 혼란스러워하는 가브리엘을 성큼성큼 지나쳐 접시에 땅콩을 가득 담았다. 엘리제를 비롯해 주방 하녀들은 익숙한 듯 그의 행동에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저어, 여기요.”

언제나 그렇듯 가브리엘은 호기심 앞에 약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먼저 말을 걸기로 했다.

남자는 무심히 가브리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깜짝 놀란 듯 땅콩이 가득 담긴 접시를 그만 쏟고 말았다. 절대 가브리엘을 모르는 자가 보일 수 있는 반응이 아니었다.

“우리 아까 봤었죠?”

하지만 남자는 말을 걸자마자 대답은커녕 몸을 휙 돌리더니 황급히 주방을 벗어나는 게 아닌가.

“에고, 아까운 땅콩을 다 쏟으셨네.”

“새들이라도 먹게 주웁시다.”

황급히 쫓아가려 했지만 쏟은 땅콩을 줍는 하녀들 때문에 길이 막혀 여의치 않아졌다.

뒤늦게 주방을 나왔지만 이미 그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난 뒤였다. 허깨비를 보고 놀란 건 자신인데 왜 그는 그보다 더한 반응을 보이는 걸까.

하지만 가브리엘의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녀의 처지를 눈치챈 주방장이 센스 좋게 커다란 그릇에 아이스크림을 가득 담아 왔기 때문이다.

달콤한 아이스크림 앞에 가브리엘은 그만 모든 것을 잊고 말았다.

* * *

아직 해가 지지 않아 집무실에 먼저 올라간 루비카는 편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 있는 이오스를 보자마자 그의 빠른 판단력을 칭찬했다.

“하하하하.”

방금까지 급박한 상황에 도와주기는커녕 두 손 놓고 구경하다 튀었다는 사실 때문에 에드가에게 혼이 났다가 역으로 루비카에게 좋은 판단이었다고 칭찬을 들은 이오스가 어깨를 쭉 폈다.

뻐기듯이 웃는 비단뱀의 작태에 에드가는 주먹을 한 대 날리고 싶었다. 이마에 힘줄이 솟은 에드가의 모습에 이오스가 입을 삐죽였다.

“팔씨름에서 진 주제에.”

“졌다니? 분명 네 손등이 거의 책상에 닿을락 말락 한 걸 내가 봤다.”

“흥, 그 직후에 내가 네 팔을 넘어뜨렸거든!”

“그건…… 내가 의식을 잃은 후였잖아. 그걸 승패로 치는 건 반칙이다.”

“어쭈, 지금 핑계 대는 거야?”

에드가와 이오스의 끝도 없는 말싸움이 시작되었다. 언제나 그렇듯 이오스의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고 에드가는 진심으로 화난 표정이었다.

“의식을…… 잃었다니?”

둘의 대화에 루비카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걱정스러워하는 얼굴에 에드가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뒤늦게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이오스는 눈치도 없이 냅다 그녀에게 고자질을 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숨도 멎었었어!”

“숨도 멎었었다고?”

“그래, 내가 얠 살리기 위해 어떤 결심까지 했는지 알면 나한테 고작 팔씨름 가지고 반칙 소리 운운할 수 없을걸?”

“어떤 결심까지 했는데?”

에드가의 질문에 이오스가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리고 아까부터 조용히 소파에 앉아 있던 미노스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흠, 흠.”

“아, 아까부터 땅콩이 먹고 싶었는데 좀 가지러 갈게.”

미노스가 헛기침을 하자마자 이오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곤란한 일이 있을 때 괜히 화를 내는 건 봐도 이렇게 도망치려 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여기 있습니다.”

하지만 이오스의 행동은 금방 집사에 의해 저지당했다. 칼은 땅콩이 가득 담긴 접시를 내밀었다.

“어? 이건 다 깐 거잖아?”

“드시기 편하게 준비했습니다.”

땅콩 부스러기 때문에 에드가가 고통받는다는 걸 눈치챈 칼의 센스 있는 준비였다. 하지만 칼의 센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오스는 접시를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난 안 깐 게 좋아!”

그러고는 휑하니 주방으로 가 버렸다. 이오스가 방을 나가자마자 루비카가 잽싸게 미노스에게 질문했다.

“대체 뭘 했길래 저렇게 과민 반응 하는 거야?”

“아마도 인공호흡이었겠지만 제가 도착했을 때는 꼭 잠든 각하에게 몰래 키스하려는 것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지요. 그걸 저한테 들킨 게 부끄러우신 것 같습니다.”

미노스의 설명에 에드가가 구역질 나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깬 게 저놈의 인공호흡 때문이었나?”

“아니요. 제 약 때문입니다.”

“……설마 입술이 닿았나?”

“제가 1초만 늦었어도 닿았을 겁니다.”

에드가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만약 입술이 닿기라도 했으면 오늘은 잠들 때까지 양치질만 하다 보낼 것 같았다.

“어쨌든 고맙군. 큰 신세를 졌어.”

“그나저나 갑자기 쓰러지다 못해 숨까지 멈췄다니, 뭘 하다 그리된 거야?”

“글쎄, 이오스와 팔씨름을 하던 중에 갑자기 심장에 충격이 오더니…… 그리됐어.”

안 그래도 저주 때문에 걱정스러운데 심장까지 문제를 일으킨 걸까? 루비카의 얼굴에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에드가는 그녀의 그런 표정 변화가 달갑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매일 웃는 그녀를 보고 싶은데 어째서 매번 이렇게 되는 건가?

모든 일은 다 제 뜻대로 하건만 하필이면 그의 몸이 제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앞으로 이오스 님과의 접촉은 되도록 피하십시오.”

“나도 할 수 있으면 그러고 싶어. 그런데 그 도마뱀이 자꾸 달라붙지 않나!”

에드가가 머리를 거칠게 쓸었다. 조금 감정적인 그와 달리 루비카는 그의 말에 숨은 단서를 놓치지 않았다.

“미노스, 에드가가 쓰러진 이유를 알고 있는 거지?”

“네.”

깔끔한 대답이었다. 비장한 표정을 보건데 뭔가 알아내 오긴 알아낸 눈치였다.

“집사님, 혹시 이야기 중에 이오스 님이 오시는지 망을 좀 봐 주실 수 있습니까?”

사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미노스는 아까 전부터 이오스를 어떻게 하면 방에서 내보낼지 고민하고 있었다.

옆에서 경청할 준비를 끝낸 칼은 미노스의 부탁에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자신의 일을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걱정 마십시오. 모습을 보이면 문을 세 번 두드리겠습니다.”

루비카는 두려움과 기대가 섞인 심정이 되어 미노스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침에 세수를 할 때까지만 해도 오늘 이렇게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밀어닥칠지 몰랐다.

“음, 어디서 설명해야 할까요. 꽤나 복잡한 이야기라…… 일단 차근차근 시작하자면 각하께서 갑자기 쓰러지신 건 님프의 피와 인간의 피가 충돌을 일으켜서입니다.”

“이해하기 힘들군. 지금까지 별문제 없이 살아왔는데.”

“지금까지는 님프의 피가 활성화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활성화?”

“그럼, 왜 갑자기 활성화가 된 거지?”

“이오스 님 때문입니다. 님프와 드래곤은 서로 상호 보완적인 존재입니다. 드래곤을 만난 자극이 각하 안에 있는 님프의 피를 자극해 결국 힘을 각성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알아내기 위해 미노스는 거의 죽을 뻔했었다. 삼 일가량 빛도 들어오지 않는 방에 갇혀서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그나마 고블린이라 버텼다.

이번 일에는 블랑코보다 스노우가 더욱 분노했다. 비록 술기운 때문이었지만 미노스를 믿고 이베르 님에 대해 말해 줬건만 이런 식으로 갚을 수 있냐고 길길이 날뛰었다.

그나마 멋모르고 공작과 결혼한 마담 베리의 사정을 딱하게 여겨 달라는 애원이 통했다. 그도 아니었다면 그들은 아예 미노스의 말을 듣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님프의 힘이 완전히 각성하는 순간, 각하의 몸은 견디지 못하고 죽게 될 겁니다.”

“앞으로 이오스를 만나지 않으면 되는 건가?”

이오스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눈앞이 깜깜했다. 에드가가 낮 동안 걷지 못하는 것도 인간 주제에 님프의 반려가 된 여파로 알고 있는 바보 드래곤이다.

“그건 저도 확답할 수 없습니다. 이미 받은 자극을 돌이킬 수 있을지, 아니면 이 상태가 그대로 쭉 유지되는 건지는 이베르의 권속들이 확실히 말해 주지 않았습니다.”

저주를 푸는 것만 생각했는데 이제는 또 영 다른 문제가 끼어 들었다. 골치가 아팠지만 에드가는 수학 문제를 풀 듯 차근차근 하나씩 접근하기로 했다.

“그럼…… 일단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그들은 내 저주를 풀 방법을 알고 있나?”

“네. 제게 알려 주지 않았지만 알고 있답니다.”

그리고 미노스는 조금 복잡한 표정이 되어 에드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길, 지금 각하가 살아계신 건 저주 덕분이라고 합니다.”

“저주 때문에 내가 살아 있다고?”

내내 두 다리를 발목 잡는 저주를 풀기 위한 방법을 찾아왔던 에드가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네, 원래 님프와 인간의 혼혈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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