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99화
“가브리엘, 어서 다리도 묶어! 저기 천 보이지?”
“네!”
그다음은 일사천리였다. 루비카는 크리스토퍼의 팔과 다리를 다 묶은 다음에야 목을 감싼 팔을 풀었다.
그리고 방 안에 있던 재료 중 가장 튼튼한 무명천으로 크리스토퍼가 말을 하지 못하게 입을 가렸다.
생각보다 손쉽게 크리스포터를 제압했다. 루비카가 한시름 돌리려는 순간 가브리엘이 무지막지한 주먹을 크리스토퍼의 허리를 향해 날렸다.
“에잇!”
그리고 연달아 그의 허벅지나 어깨를 때리기 시작했다. 어찌나 속 시원히 때리던지 창문에 앉아 있던 이오스는 고소한 땅콩과 시원한 탄산수가 절실히 떠올랐다. 근래에 봤던 싸움 구경 중 가장 시원했다.
“가브리엘, 그만!”
“이거 놔요. 저놈은 좀 더 맞아 봐야 해요.”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르더니 방구석의 마네킹이 입고 있던 코르셋을 벗겨 크리스토퍼에게 입히고 허리를 바짝 졸랐다.
“너도 당해 봐라! 흥,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이거 끈이 왜 이렇게 많이 모자랄까? 뮤즈니 뭐니 지껄일 시간에 본인부터 살을 빼지 그랬어?”
다분히 감정적인 복수였다. 크리스토퍼가 뭐라 뭐라 외쳤지만 입이 막혀 있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꼴사납게 겉옷 위에 코르셋을 입고 허우적대는 그의 모습을 보니 가브리엘은 조금이나마 답답했던 가슴이 뚫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크리스토퍼를 발로 구석진 곳으로 밀었다.
“부인, 엄청 대단했어요! 어떻게 하신 거예요? 그, 완전 숨도 못 쉬게 목을 조르시던데!”
천진난만하게 짓는 미소가 무서울 정도였다.
“가브리엘, 고마워. 네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어.”
어쨌든 시기적절하게 가브리엘이 나타나 도와주지 않았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만에 하나 크리스토퍼가 유령 디자이너를 공격했던 칼을 자신에게도 휘둘렀다면…… 뒷일은 상상도 하기 싫을 정도였다.
이런저런 상황을 다 겪어 본 그녀는 자신보다 키가 크고 힘도 센 사람과 싸우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자, 이제 어떻게 하죠? 어?”
손을 탁탁 털며 뒤늦게 주변을 살피려는 듯 고개를 돌린 가브리엘의 눈에 창문에 걸터앉은 이오스가 들어왔다.
“어?”
바람을 따라 물결치는 황금색 머리에서는 환상적인 빛을 내며 금색 가루가 떨어졌다.
자신이 본 광경을 믿을 수가 없어 그녀는 두 눈을 비볐다. 세상에 공작 각하만큼 잘생긴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평했는데 창문 앞의 존재는 만만치 않게 아름다웠다.
“설마…….”
크리스토퍼와 싸워 이겼다는 건 착각이고 사실은 그의 칼에 찔려 죽은 걸까?
이건 환상이라고밖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다. 가브리엘은 자신의 볼을 슬쩍 꼬집어 봤다.
“아야!”
놀랍게도 볼이 아프다. 죽으면 통각이 느껴지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가 보다.
그때 창문 위의 존재가 훌쩍 일어서더니 바깥으로 뛰어내렸다.
여긴 3층이다.
반사적으로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 가브리엘은 창문으로 쫓아가 아래를 봤다.
하지만 창문 아래에는 사람이 떨어진 흔적은커녕 핏자국도 없었다.
“가브리엘, 뭐 하니?”
루비카는 능청스럽게 이오스를 못 본 척 가브리엘에게 말을 걸었다.
“부인, 방금 못 보셨어요?”
“응? 뭘?”
봤다. 똑똑히 봤다. 이오스를 보는 순간 루비카는 조금 화가 났다. 냉큼 도와줄 것이지 창문에 그냥 걸터앉아 있다니.
게다가 그 땅콩을 찾는 듯 손가락으로 허공을 더듬는 꼴이란. 사람이 위험할 때는 도와줘야 한다고 돌아가면 단단히 혼을 내줄 계획이다.
“그것보다 빨리 이 사람을 치료해야 해.”
루비카는 가브리엘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재빨리 관심을 돌렸다.
“앗, 네!”
다행히 이오스를 단순한 허깨비로 취급하기로 했는지 가브리엘이 바로 그녀의 곁으로 왔다.
크리스토퍼의 공격을 받아 쓰러진 유령 디자이너는 상처가 제법 심해 보였다. 다행스러운 건 이 공간이 옷을 만드는 작업실이라 깨끗한 천과 가위, 지지대 등 필요한 물건이 충분하다는 사실이다.
루비카는 재료를 준비한 다음 본격적으로 지혈을 시작했다.
가브리엘은 신기한 눈초리로 루비카가 지시한 대로 천을 자르고 지지대를 대었다.
“빨리 의사에게 데려가야 할 텐데…….”
응급처지는 대충 끝냈지만 결코 안전한 상태는 아니었다. 제대로 된 치료가 무엇보다 시급했다.
하지만 입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섣불리 건물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존이 돌아오길 기다렸다가 이동하면 어떨까요?”
“빨리 올 것 같지 않는데…….”
입구를 지키던 사람들과의 덩치 차를 생각하면 존이 지금 살아 있을지도 걱정스러웠다. 아직은 벌건 대낮이었지만 날이 어두워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때까지 이 사람이 버틸지 모르겠구나.”
루비카는 거의 의식을 잃다시피 한 디자이너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 주며 말했다.
비록 돈에 눈이 멀어 가브리엘의 아래에서 유령 디자이너로 일했다만 그도 피해자라면 피해자였다.
정식으로 공부를 해서 디자이너가 되는 길은 돈이 제법 든다. 의상실에서 일하는 일반 재봉공의 삶도 결코 녹록지 않다.
만약 제대로 된 기회가 그에게도 주어졌다면 유령 디자이너 같은 선택은 하지 않았으리라.
“어쩌지…….”
한참 궁리하는 차에 복도에서 발소리가 울렸다. 가브리엘이 깜짝 놀라 목을 움츠렸다.
“아래서 망보던 자들일까요?”
“그럴 수 있겠구나.”
루비카는 아까 크리스토퍼의 머리를 때렸던 봉을 다시 잡았다. 가브리엘도 재빨리 천을 자르는 가위를 양손으로 꼭 쥐었다.
건물 바깥에 있던 건장한 사내는 크리스토퍼와 달리 순순히 이길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으나 쉽게 져 줄 생각도 없었다.
문이 열리는 순간 둘은 동시에 달려들 계획이었다.
“마님?”
그러나 문이 열리고 나타난 자는 아래층의 덩치가 아닌 칼이었다. 순간 긴장이 풀려 루비카는 손에 들린 봉을 놓쳐 버렸다. 그리고 그 봉은 정확히 칼의 이마를 가격했다.
“아얏!”
“어머, 칼, 미안해!”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세상에, 이게 무슨 일입니까?”
“어떻게 알고 왔어?”
반가운 마음에 목소리가 떨렸다. 오늘처럼 칼이 반가웠던 적이 없다.
“아, 이오스 님이 위치를 알려 주셨습니다. 각하께서 일단 먼저 가서 수습하라고 마석마차를 내어주었습니다. 아마 곧 각하의 호위대가 도착할 겁니다.”
“세상에! 이오스도 제법 머리를 굴리잖아. 내가 오해했네.”
역시 가르치면 아무리 이오스라도 발전하기 마련이라고 루비카는 감탄했다. 칼은 차마 이오스가 혼나기 싫어 일단 도망쳤다고 말했단 사실을 전할 수 없었다.
“이오…… 스? 설마 황금 드래곤을 말하는 거예요?”
다만 너무 안도하는 바람에 가브리엘이 옆에 있다는 걸 잊고 말았다. 루비카를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는 가브리엘을 눈을 피했다.
“음, 최근에 차 때문에 조금 교류하고 있잖니. 참, 칼. 이 사람이 크리스토퍼 때문에 다쳤어. 응급조치를 하긴 했지만 위험한 상태야.”
칼은 쓰러진 디자이너를 살폈다. 의식을 잃긴 했으나 당장 생명이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많이 다쳐 최소한 들것이 필요했다. 그나저나 크리스토퍼는 누가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걸까. 옷 위에 코르셋을 입고 있는 모양새가 다분히 악취미적이었다.
무슨 상황인지 이오스의 설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에드가의 성화에 먼저 출발한지라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척 궁금했다.
“일단 치안대와 의사를 함께 부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마님과 아가씨는 그 전에 여기를 빠져나가시고요.”
하지만 궁금할 때마다 주인에게 질문을 해 대면 집사 일을 할 수 없다.
“아 참, 옆방에 타티아나도 있어!”
“샤틀레 영애 말씀입니까?”
칼은 이번에야말로 목소리에 담긴 의아함을 숨길 수 없었다. 평소 얌전하고 정숙하기로 소문난 샤틀레 자작 영애까지 있다니 상황이 점점 더 오리무중이었다.
하지만 칼은 이번에도 궁금중을 꾹 누르고 타티아나를 챙기기 위해 옆방으로 갔다.
“세상에, 이건 대체 어떻게 구하셨습니까?”
하지만 방 한가운데 떡 들어선 도청 장치 앞에서는 그도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으음, 샀어요.”
“샀다고요? 자작가에서 구매한 겁니까?”
“……아니요. 용돈을 모아 산 거예요.”
그건 웬만한 남작령을 사고도 남을 정도의 금액이다. 칼은 잠시 침묵했다. 온갖 질문이 그의 머릿속에 휘몰아쳤다.
“어쨌든 자리를 피하셔야겠습니다.”
분명한 건 국왕 전하가 알면 큰일 날 거라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타티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남아 있을 거예요. 누군가는 책임 져야죠.”
그리고 타티아나는 도청기를 가리켰다.
“부인과 가브리엘이 뛰쳐나간 뒤로 녹음은 멈췄어요. 일단 상황에 개입한 자료를 가지고 기사를 쓸 수는 없으니까요.”
“타티아나…….”
가브리엘이 복잡한 기분이 되어 그녀를 바라봤다. 자신의 선택에 후회는 하지 않지만 타티아나에게 미안한 기분이 되었다.
“그러지 마. 이걸로 기사를 안 쓰겠다는 것뿐이니까.”
“그 말은?”
“치안대가 오면 냉큼 넘길 거야. 그리고 녹음본이 있다는 내용을 기사에 슬쩍 흘릴 속셈이야.”
타티아나가 활짝 웃었다. 조금 뻔뻔스러운 느낌도 들어 가브리엘도 그만 따라 웃고 말았다.
하지만 모든 책임을 타티아나만 지게 만드는 건 역시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도 옆에 남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친구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타티아나가 고개를 저었다.
“바보야, 그냥 가. 가브리엘, 내가 여기 있어도 아버지의 일을 도와서 취재 중이었다고 하면 국왕 전하도 이해하실 거야. 하지만 너는?”
“입을 꼭 다물면 궁정에 숨어든 건 들키지 않을 거야.”
“그분이 결국 진실을 토해 내도록 유도하는 데 천재라는 사실을 잊지 마.”
“하지만…….”
가브리엘이 불안해하자 타티아나가 괜찮다는 듯 손을 토닥거렸다.
“걱정 마. 이 일로 날 벌하려면 국왕 전하도 꽤 많은 걸 각오해야 할 테니까.”
“각오?”
“더 이상은 기업 비밀이라 말할 수 없어요.”
제법 쾌활한 목소리로 타티아나가 대답했다.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국왕과 관련된 모종의 일을 샤틀레 자작가가 알고 있는 눈치였다.
수많은 취재원을 가지고 있는 신문사의 힘이었다. 그래서 궁정의 유력인사들도 자작가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렴.”
“고맙습니다, 부인.”
마지막으로 타티아나와 인사하고 루비카와 가브리엘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정확히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도 칼은 눈에 띄는 마석마차를 앞문이 아니라 뒷문에 세워 두웠다.
그의 뛰어난 대처 능력에 루비카는 혀를 내둘렀다. 앞문으로 내려 마차를 탄다면 둘이 이 건물을 왔다 간 걸 아마 거리의 모든 사람이 알게 되리라.
“돌아가는 길에 저희 집이 있으니 중간에 내려 주시면 안 될까요?”
마차에 타자마자 가브리엘이 한 애교 있는 요청에 칼은 고개를 저었다.
“각하께서 가능한 아가씨를 데려오라고 명하셨습니다.”
아름답지만 차가운 공작의 얼굴을 떠올린 가브리엘은 울상이 되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을 알게 되면 공작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다름 아닌 그의 부인을 위험에 끌어들였다.
“부인, 저…… 중간에 내려주시면 안 될까요?”
하지만 공작 부인이 허락하면 집사도 반대하기가 힘들어질 것이다. 가브리엘은 희망을 담아 루비카에게 청했으나 웬걸, 평소에는 따뜻한 루비카가 오늘만은 냉정히 고개를 저었다.
루비카는 가브리엘의 자유분방함을 사랑했다. 하지만 이번 일은 도가 지나쳤다.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큰일이 날 뻔했다.
“이건 또 왜 이렇게 빠른 거야.”
평소에는 빨라서 좋아했던 마석마차가 오늘따라 원망스럽기 그지없다. 가브리엘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을 처음으로 이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