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98화
에드가가 저런 목소리를 낸다는 건 거의 한계치에 다다랐다는 뜻이다. 만약 여기서까지 심통 맞게 군다면 에드가는 더 이상 이오스가 서재에서 머무는 걸 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레이스를 냉큼 주워 가져다 주려니 드래곤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팔씨름에서 네가 이기면 가져오지.”
이오스는 에드가가 앉은 책상에 오른팔을 올리며 말했다. 나름 움직이지 못하는 그를 배려해서 팔씨름이란 종목을 선택한 건데 에드가는 어이가 없는 듯 피식 웃었다.
“내가 매일 탱자탱자 노는 드래곤이랑 달리 이래 봬도 꽤 바쁘거든?”
“며칠째 천 쪼가리나 보고 있는 거 다 알아. 뭐, 이길 자신이 없어서 그런 거면 패배자에 대한 승자의 배려로 가지고 오지.”
이오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에드가는 책상 위의 자료를 한쪽으로 치워 버리고 팔목 단추를 풀었다. 그의 기분을 대변이라도 하듯 팔목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흥, 그래 봤자 샌님.’
비록 다른 인간들과 달리 이오스의 피부에 팔이 닿았다고 해서 에드가가 딱히 아파한 적은 없지만 서재 책상에 앉아 있는 게 그의 일이었다. 무거운 물건을 드는 꼴을 못 봤다.
이오스는 당연히 자신이 에드가에게 이길 거라 믿었다.
“헉!”
그런데 예상과 달리 손을 잡자마자 느껴지는 엄청난 악력에 이오스는 신음을 내질렀다. 그에 반해 에드가는 꽤 여유로워 보였다.
이오스는 힘으로 누군가에게 져 본 적이 없다. 손가락 하나 들 힘 정도만 써도 대부분 그에게 무릎을 꿇었다. 순간적으로 큰 힘을 쓰기 위해서 근육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어이, 지금 왼손으로 뭘 하려는 거지?”
수상한 움직임을 포착한 에드가가 눈에 불을 켜고 물었다. 이오스의 이마에 땀 한 방울이 흐르는 걸 보아 찔리는 게 있는 모양새였다.
비겁하게 몰래 마법을 써서 이길 생각이었나. 순간적으로 분노가 치밀었다. 이 버릇없는 도마뱀에게 정의가 뭔지 알려 줘야겠단 의무감에 불탄 에드가는 가진 힘을 모두 오른쪽 팔에 쏟아붓기로 했다.
“아야야야.”
이오스의 손등이 책상에 닿기 직전까지 기울어졌다. 이오스가 그만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려는 순간 에드가의 팔의 힘이 갑자기 사라졌다.
갑자기 큰 힘을 끌어올려 한계에 부딪친 걸까? 어쨌든 승부의 세계는 냉정하다. 이오스는 사정 봐주지 않고 에드가의 팔을 넘어뜨렸다.
방금까지 상황을 주도하던 에드가가 맞을까 싶을 정도로 손쉽게 그의 팔이 넘어졌다.
“이겼…… 다?”
승리에 도취되기도 전에 이오스는 책상에 쓰러진 에드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깨를 살살 흔들어 봐도 반응이 없다.
“지금 진 게 쪽팔려서 연기하는 거야?”
옆에 있던 펜촉으로 손등을 쿡쿡 찔러 보았지만 미동이 없다. 설마 하는 마음에 쓰러진 에드가의 코끝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는데 숨을 쉬는 기색이 아니었다. 덜컥 겁이 났다.
“야, 안 돼!”
누가 봐도 그가 작정하고 에드가를 괴롭히다 일어난 불상사라고 여길 상황이다.
만약 에드가에게 큰일이 일어나면 루비카의 얼굴을 어떻게 볼 것인가. 님프는 자신의 반려를 끔찍이 생각하는 편이니 조심하라고 미노스가 신신당부했다.
이오스는 황급히 에드가를 소파로 옮긴 뒤 목 쪽 단추를 풀고 얼굴을 찰싹찰싹 때렸다.
“야, 정신 차려! 야!”
하지만 그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더라. 인공호흡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이오스는 에드가의 붉은 입술을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미노스에게 하는 방법이나 요령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정말 하기 싫지만 지금 그를 살리려면 그 방법뿐이다. 이오스는 결심을 굳히고 에드가의 턱을 잡았다.
“이오스 님?”
“으악!”
갑작스레 들린 미노스의 목소리에 이오스는 엉덩방아를 찧었다. 미노스는 복잡 미묘한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이 상황을 단단히 오해한 눈치였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잘 왔어, 미노스! 에드가가 숨을 쉬지 않아.”
“네?”
미노스가 황급히 에드가의 상태를 체크했다. 때맞춰 등장한 미노스 덕에 한숨 돌린 이오스가 옆에서 재촉했다.
“어서 빨리 인공호흡 해!”
“인공호흡을 하라고요? 저보고요?”
“그래!”
에드가가 정신을 차리면 ‘넌 방금 고블린이랑 키스했어.’라고 알려 줄 심산이었다.
물론 루비카에게도 그녀의 남편이 그녀가 없는 사이에 무슨 짓을 했는지 거짓말을 좀 보태 알려 줄 계획이다. 하지만 미노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인공호흡을 한다고 해서 깨시지 않을 겁니다.”
“뭐? 설마?”
상황이 재미없게 돌아갔다. 뒤늦게 팔씨름 같은 거 하는 게 아니었다고 후회할 때 미노스가 주머니에서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각하께서는…….”
미노스는 버릇대로 이오스에게 님프의 피와 인간의 피가 충돌을 일으키는 중이라고 상황을 설명하려다 입을 닫았다.
하마터면 진짜 님프가 루비카가 아니라 에드가라는 사실을 들킬 뻔했다. 미노스는 황급히 병뚜껑을 열어 에드가의 코끝에서 가져다 대었다.
병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향기가 났지만 이상하게 이오스에게 낯설지 않았다.
“이게 뭐지?”
“쿨럭, 쿨럭.”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에드가가 기침을 하며 눈을 떴다. 어쨌든 한시름 놓았다. 비록 이오스는 고블린이랑 키스했다고 에드가를 놀릴 기회는 날렸지만 그가 눈을 뜨지 않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각하, 정신이 드십니까?”
에드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소파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이오스와 팔씨름을 하는 중 갑자기 오른팔이 전기가 통한 듯 짜릿한 감각이 느껴지더니 심장에 엄청난 충격이 왔다.
그 뒤는 기억이 없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의 상태보다 더 궁금하고 급한 것이 있다.
“미노스, 이베르의 권속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나?”
“반쯤이요.”
“반이라면?”
그때 급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시계를 보니 칼이 차를 가지고 올 때쯤이었다.
“칼, 됐어.”
“차가 아닙니다, 각하. 마님과 관련된 일입니다.”
집사의 목소리는 제법 침착했지만 걱정이 서려 있었다. 왕비 전하를 만나러 간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에드가가 칼에게 들어오라고 허락도 하기 전에 이오스가 문을 열었다.
“루비카에게 무슨 일이 생겼어?”
“사촌 누나!”
참지 못하고 에드가가 소리 질렀다. 이오스의 등 털이 쭈뼛 서고 뒷덜미에서 차가운 기운을 느꼈다. 아직 겨울이 오지도 않았는데 오한이 들었다.
오한의 정체가 자신보다 무서운 존재를 만났기 때문이란 사실을 추리해 내기에 그의 두뇌는 무리가 있었다. 다만 본능은 빨랐다.
“알았어. 사촌 누나에게 무슨 일이 생겼어?”
“흠흠, 각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냉큼 들어와.”
칼이 헛기침을 하고 들어온 뒤 문을 닫았다. 그리고 방금 궁정에서 혼자 돌아온 엘리제가 알려 준 상황을 그대로 고했다. 에드가는 두통이 도진 듯 앞머리를 거칠게 헝클었다.
“가브리엘이 제대로 사고를 쳤군!”
그 깜찍한 아가씨가 해 대는 발상은 대체로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백작가 영애가 궁정 하녀복을 입고 잠입을 하다니.
이건 아무리 너구리 영감 같은 국왕이라도 노할 상황이다. 루비카가 지나치지 못하고 따라갈 만했다.
“여전히 궁에 있는 상태인가?”
“엘리제 님이 방금 도착했으니…… 시각을 보았을 때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칼, 네게 묻는 게 아니야.”
그제야 칼은 이오스에게 묻는 것임을 깨닫고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위치 추적기 취급을 당했다는 사실도 모르고 이오스는 선선히 대답했다.
“응, 저기 있는 화려한 지붕을 말하는 건가? 거기에는 없어.”
“그럼 어디?”
“저쪽.”
이오스가 가리킨 방향은 수도에 일하러 온 노동자들이 주로 사는 구역이었다. 빈민촌은 아니었지만 결코 치안이 좋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 곳에 값비싼 옷을 입은 귀족 부인이 돌아다니다 깡패라도 만난다면…… 뒷일을 상상하기도 싫을 정도였다.
“대체 거긴 왜 간 거야.”
그 질문까지는 대답할 수 없다는 듯 이오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당장에라도 말을 몰고 가고 싶었지만 그의 다리는 아직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래도 해가 져서 위험한 것보다는 낫다. 에드가는 음울한 목소리로 이오스에게 말했다.
“무슨 일인지 한번 가서 확인해 줄 수 있나?”
방금 전과 같은 사람이 낸 목소리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보통 때였다면 루비카가 걱정되어 ‘당연히 가야지!’라고 대답했을 이오스가 뒷짐을 졌다.
오늘은 다른 때보다 에드가가 특별히 재수 없었다. 팔씨름에 질 뻔했던 것도, 오한을 느끼게 만든 것도, 또 갑자기 기절해 사람 심장 떨리게 만든 것도.
“좀 더 공손하게 부탁하면.”
“부탁하네, 이오스.”
“이오스? 와, 나도 아는 ‘공손’이란 개념을 어떻게 네가 몰라?”
잠시 에드가의 이마에 힘줄이 솟았다. 이오스가 요구하는 수준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그의 자존심을 버려야 했다. 죽어도 싫지만 지금 아쉬운 것은 그였다.
“……부탁하네, 이오스 님.”
이오스는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하는 척했다. 그가 듣고 싶었던 건 ‘부탁합니다.’였다.
하지만 거기까지 요구했다가는 클레이모어 저택에 영구 출입 금지를 당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요즘 들어 에드가의 뜻을 거역하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그는 에드가가 ‘이오스 님’이라고 부른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좋아.”
그리고 창문을 열어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대지의 기운을 타고 전해지는 루비카의 냄새를 쫓아 이동했다.
그녀의 기운이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건물 옆 공터에서 솟아올랐다. 무슨 싸움이라도 났는지 건물 주위가 시끄러워 그가 땅에서 솟아 오른 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음, 이쯤이군.”
위치를 특정한 다음 이오스는 바람을 이용해 가볍게 뛰어올라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당황했다.
“어?”
온갖 자재가 가득한 공간에 웬 소년이 쓰러져 있었고 바닥에 피가 흥건했다. 소년을 자루에 담으려던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남자는 창문을 열고 나타난 이오스에게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것이 3층이 아닌가.
그때 갑자기 바깥문이 열리고 루비카가 나타났다. 그녀는 크리스토퍼가 당황한 틈을 타 재빨리 주변을 둘러본 후 옆에 있던 긴 봉을 잡았다.
“에잇!”
그리고 인정사정없이 크리스토퍼의 머리를 내리쳤다. 하지만 주로 긴 원단을 감아 두는 데 쓰이는 긴 봉으로는 큰 타격을 줄 수 없었다.
크리스토퍼가 루비카의 팔을 잡으려는 순간 뒤늦게 나타난 가브리엘이 그의 팔을 꽉 깨물었다.
“으악!”
뒤이어 루비카가 뛰어올라 크리스토퍼의 머리를 팔로 감싸 힘을 주었다. 숨쉬기가 어려워진 듯 크리스토퍼가 켁켁거렸다.
“가브리엘, 줄자! 줄자!”
“네!”
가브리엘이 냉큼 책상에 있던 줄자를 가져왔다. 혹여나 크리스토퍼가 반항할까 아예 팔을 묶기 시작했다.
두 여자의 활약에 끼어들면 방해가 될 분위기라 이오스는 그냥 얌전히 창문에 걸터앉았다.
‘와, 역시…….’
님프는 대단하다. 특히 저 머리를 옆구리에 끼고 힘을 주는 기술은 그도 배우고 싶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