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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197화 (197/212)

# 197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97화

“이유?”

“탐정에게 크리스토퍼의 행동을 분석해 달라고 의뢰했었어요. 그는 유령 디자이너를 만나는 날 궁정에서 조력자를 먼저 만나고 행동하는 것 같다는 결과서를 받았어요. 그리고 오늘이 유령 디자이너를 만나는 날이에요.”

가브리엘의 대답과 동시에 마차가 멈췄다. 아르곳 거리에 도착한 것이다. 타티아나는 마차 창문을 아주 조금 열어 바깥 상황을 확인했다.

이미 은신처의 위치를 아는 존은 크리스토퍼의 의심을 사지 않도록 조금 떨어진 반대편 거리에 마차를 세웠다.

“역시 유령 디자이너의 작업실로 가네. 마주치지 않도록 조금 기다린 후에 내리자.”

가브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타티아나는 재빨리 딱딱한 가죽으로 만든 구두를 벗고 부드러운 천으로 만든 신발로 갈아 신었다.

“저희가 내린 뒤에 부인은 마차를 타고 공작가로 돌아가세요.”

“무슨 소리니? 아무리 봐도 위험한 상황인데 너흴 두고 떠나라고?”

“하지만…… 그럼 마차 안에서 기다리세요. 구두를 신은 채라면 미행이 들킬 확률이 높아요.”

타티아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 루비카는 구두를 벗어 던졌다. 천으로 만든 신발까진 필요 없다. 양말이면 충분하다.

이미 가시밭길을 맨발로 걸어봤다. 물론 그때에 비해 발바닥은 훨씬 말랑하고 굳은살도 없지만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너희보다 잘할 자신 있어. 그렇지, 가브리엘?”

“음, 네.”

갑작스럽게 지목당해 당황한 가브리엘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우리 조사원보다 실력이 뛰어나셨어. 미행의 천재가 있다면 아마 공작 부인이려나.”

“뭐라고?”

“아무튼 함께 가면 도움이 되면 됐지 절대 방해는 안 될 거야.”

“하지만 공작가에서 걱정하실 텐데…….”

사실 타티아나가 루비카를 돌려보내려 한 이유는 옷차림의 불편함보다 클레이모어 공작 때문이었다. 그가 부인을 끔찍이 사랑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수도에 없다.

그녀와 관련되어 잘못된 언행을 한 사람들이 모두 어떤 결말을 맞이했는지 잘 알고 있기에 타티아나는 망설였다.

“괜찮아. 에드가도 사정을 알면 잘했다고 할 거야.”

루비카는 호언장담했지만 부인 앞에서는 그리 말하고 뒤로는 길길이 날뛰는 게 공작이었다.

“그냥 각하께 부인이 저희를 무척…… 아낀다고만 말해 주세요.”

“내가 너흴 좋아하는 걸 그이도 잘 알아.”

공작은 부인이 좋아하는 사람을 지독히도 질투하면서 차마 건드리지 못한다.

그가 엄벌을 내리는 경우는 아예 부인이 그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치워 버리는 게 가능할 때뿐이다.

사람 좋은 연기를 하지 말고 사람이 좋아지면 되련만 공작의 성격에 그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타티아나, 일단 어서 내리자.”

“그래.”

시간은 충분히 지났다. 혹 크리스토퍼를 놓칠까 급히 건물로 들어가려는 타티아나의 팔을 루비카가 잡았다.

“문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 있어.”

“네?”

“저기랑, 저기.”

루비카가 가리킨 사람은 언뜻 보기엔 평범해 보였으나 허리춤에 찬 칼과 주변을 살피는 모양새가 범상치 않았다.

그간 은신처 앞을 관찰했을 때 저런 사람이 있었던 적이 없어 부주의하게 들어갈 뻔했다.

“대체 어떻게 알아채신 거예요?”

타티아나의 질문에 루비카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습관은 놀라웠다. 안전하기 짝이 없는 생활을 하느라 다 잊은 줄 알았는데 위기의 순간 불쑥 튀어나오다니.

“일단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할 것 같아.”

“네. 존, 들었지?”

“걱정 마세요.”

이런 일에 익숙한 듯 존이 마부석에서 내렸다. 마차의 말 한 마리를 풀어 안장도 없이 타더니 루비카가 지목한 사람 중 가장 덩치가 큰 사람에게 그대로 돌진했다.

“미쳤어? 눈을 어디에 달고 다니냐, 이 사람아!”

“말이 오면 그 쪽이 피해야지!”

자기 덩치의 세 배쯤 되는 자를 앞에 두고도 존은 전혀 주눅 든 기색이 없었다. 곧 건물 입구를 지키고 있던 자들이 존에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목이 다른 곳으로 쏠린 틈을 타 루비카는 먼저 잽싸게 건물로 들어갔다. 건물 안에 망보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가브리엘과 타티아나에게 손짓했다. 곧이어 그 둘도 뛰어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어?”

“네.”

“아직 복도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조심해.”

건물 안에서는 크리스토퍼의 은신처의 위치를 아는 타티아나가 앞장섰다.

타티아나가 모퉁이에 어정쩡하게 붙거나 창문 아래를 지날 때 머리카락이 나올 것 같으면 루비카의 손이 무섭게 튀어나와 자세를 교정시켰다.

가브리엘의 말대로 그녀는 미행의 천재였다. 길만 알았다면 루비카가 앞서는 게 나을 정도였다.

“여기에요.”

타티아나가 3층 복도에서 네 번째 문을 열었다. 혹여 누가 볼까 그들은 후다닥 들어가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닫았다.

널찍한 방 안에는 삭막할 정도로 가구가 없었다. 대신 커다란 책상과 검은 상자 같은 것이 있었다.

“크리스토퍼의 은신처는 바로 옆이에요.”

“그럼 이 방은 돈을 주고 빌린 거니?”

“네.”

크리스토퍼 한 명을 추적하기 위해 의상실에 위장 취업할 취재원을 고용하고, 은신처 옆방을 빌리기까지 했다.

대체 돈을 얼마나 쓴 걸까? 루비카는 문득 그들이 걱정되었다. 분명 잡지가 잘 팔리긴 하지만 그 수익만으로 이 모든 비용이 충당되었을까?

“여기까지 알아내는 데 돈이 많이 들었을 텐데…….”

“지금까지 든 돈은 이걸 사는 것에 비하면 푼돈에 불과해요.”

가브리엘이 상자 같은 물건을 펼치며 대답했다. 은색의 물건과 다양한 버튼으로 이루어진 상자에서 그녀는 끈 같은 걸 꺼내더니 벽에 연결했다.

“이것만 있으면 옆방에서 무슨 대화를 하는지 다 알 수 있어요.”

그녀가 초록색 버튼을 누르자 장담한 대로 크리스토퍼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들렸다. 루비카는 깜짝 놀라 검은 상자를 바라보았다. 이건 거의 이오스가 부리는 마법 수준이다.

“도청 장치예요. 이거 심지어 녹음도 할 수 있어요. 여기에 그동안 모은 수익금의 절반을 썼어요.”

“정말 놀랍구나. 세상에, 이런 건 대체 누가 만드는 거니?”

“각하요.”

“샤틀레 자작이 취재 때문에 이런 걸 만들었다고?”

가브리엘이 묘한 눈으로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클레이모어 공작 각하지요. 정확히 부인의 남편이요.”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루비카는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가브리엘은 그처럼 대단한 남편을 두고 그를 평범한 사람처럼 대하는 루비카가 더 신기했다.

“자작 각하도 제법 똑똑하시지만 공작 각하에 비하면 다섯 살 정도 지능이거든요.”

“가브리엘.”

타티아나의 경고에 가브리엘이 어깨를 으쓱했다.

“타티아나, 그 정도면 준수한 거야. 우리 아빠는 인간도 아니고 그냥 문어 정도라고.”

“쉿!”

그때 도청 장치에서 들리는 크리스토퍼의 목소리가 격해졌다. 범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루비카는 황급히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대어 폭주하는 가브리엘을 말렸다. 타티아나는 재빨리 녹음 버튼을 눌렀다.

-촌스러워도 리본인지 뭔지로 잔뜩 꾸민 드레스를 만들어. 네가 디자인한 건 이제 더 이상 팔리지 않는다고!

-크리스토퍼, 난 그 디자인에 납득할 수 없어. 그 옷은 실용적이긴 하지만 환상이 없어. 드레스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워야 해. 그게 내 미학이야.

-미학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내 미학은 돈이야!

우당탕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숨 가쁜 소리와 주먹다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게 몸싸움이 난 눈치였다.

-으악!

끝내 들린 비명 소리는 크리스토퍼의 것이 아니었다. 루비카는 더 이상 도청 장치에 붙어 있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벽 너머의 얼굴 모를 디자이너가 걱정되어 견딜 수 없었다. 뛰쳐나가려는 그녀의 팔을 타티아나가 잡았다.

“안 돼요! 부인, 우린 취재를 하기 위해 온 거예요.”

“타티아나, 지금 저 사람은 죽을지도 몰라.”

“하지만…… 상황에 개입하는 건 우리의 역할이 아니에요.”

“그게 무슨 소리니?”

루비카의 질문에 타티아나는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가브리엘은 타티아나가 직접 설명하기 민망해하는 것 같아 대신 설명했다.

“기자는 상황에 개입하지 않는 대신에 전쟁터에서도 국적에 상관없이 취재에 대한 권리를 보장받고, 보호와 편의를 제공받기로 협약되어 있어요. 타티아나는 그걸 깨기 싫은 거고요.”

“여기는 전쟁터가 아닌데?”

“그게 모든 일에 적용된다고 협의되어 있어서…….”

“부인, 제가 만드는 소식지는 가십지 소리를 듣지만 저는 언론인으로서 규칙을 지키고 싶어요.”

쓰러진 디자이너를 옮기는지 질질 끄는 소리가 도청 장치에서 흘러나왔다. 그나마 간간히 들리는 신음 소리가 그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러나 그저 아직 죽지 않았을 뿐이다. 평소에는 없었던 위장 경비까지 건물 밖에 세워 둔 걸 보아 크리스토퍼는 만약 리본 드레스를 만들도록 유령 디자이너를 설득하지 못하면 그를 죽이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자콥 남작을 만난 것도 사후 처리를 부탁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그래, 그럼 타티아나 너는 여기 가만히 있어.”

루비카가 자신의 뜻을 이해해 준 것으로 착각한 타티아나가 안도하며 팔을 놓았다. 그러기 바쁘게 루비카가 딱 잘라 말했다.

“나는 갈게. 언론인이 아니여서 그런 협약 같은 거 지킬 의무 없어.”

“부인!”

말릴 새도 없이 루비카가 뛰쳐나갔다. 소리로 파악한 바에 의하면 적어도 크리스토퍼는 칼을 가졌다. 비록 그가 삐쩍 마르긴 했으나 결코 약하지는 않았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루비카도 크게 다칠 위기였다.

“나도 가야겠어.”

“가브리엘!”

타티아나의 간절한 눈빛에 가브리엘은 잠시 망설였다. 타티아나는 신문사를 운영하는 자작가의 집안에서 자랐다는 사실에 긍지를 가졌다.

작은 새의 소식지가 단순한 가십지가 아니라 소녀들을 위한 신문이라고 처음 말한 건 타티아나였다.

평소에는 얌전하고 다른 사람의 뜻을 잘 따르는 친구가 사실은 얼마나 고집이 센지 누구보다 가브리엘이 잘 알았다. 하지만 긍지를 지키기 위해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았다.

“타티아나, 나도 그냥 가십지에 시원찮은 칼럼이나 연재하는 사람 할래!”

자신의 선택이 타티아나에게 얼마나 상처가 될지 알면서도 가브리엘은 루비카를 쫓아갔다.

* * *

몇 주 전부터 에드가의 서재는 각양각색의 직물로 가득 찼다. 책상에는 아예 레이스 짜는 법과 도안이 실린 책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에드가는 레이스 중에서도 가장 특상품이라고 알려진 샤르망제를 관찰 중이다.

벌써 세 시간째. 이오스는 무료함을 참지 못하고 시비를 걸었다.

“넌 뒤늦게 디자이너라도 될 계획이야? 아서라. 네가 백날 해 봐야 루비카 누나만큼은 못하니까.”

“사촌.”

어쩜 저렇게 밉살맞게 매번 호칭을 지적할 수 있는가. 남은 심심해 죽겠는데 놀아 주지도 않고.

이오스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에드가가 보고 있던 레이스를 빼앗아 던져 버렸다.

“너, 이!”

“뭐?”

에드가는 주먹질을 하고 싶었으나 이오스에게 악의는 없으니 잘 보살펴 달라는 루비카의 부탁을 떠올리고 간신히 참았다.

이오스는 루비카가 왕궁에 갈 때마다 따라가고 싶다고 한동안 졸랐으나 긴 설득 끝에 결국 가면 안 된다는 사실에 납득했다.

그럼 곧바로 제 권역에 돌아가 그렇게 아끼는 식물에 물이나 줄 것이지 왜 여기에 뭉개고 있는 걸까?

그것도 매번 서재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자신의 옆에 찰싹 붙어서.

“그거 도로 가져와.”

그가 주울 수 없는 위치에 떨어진 레이스를 가리키며 에드가는 딱딱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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