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96화
“좀 더 매몰차게 이야기할 걸 그랬구나.”
루비카는 능청스럽게 대꾸하고 마차에 올라탔다. 타티아나는 루비카의 갑작스러운 합류에도 놀란 기색이 없없다.
마차 문이 닫히자마자 가브리엘이 하녀복을 갈아입으며 외쳤다.
“부인이 듣기로 아르곳 거리로 가는 것 같대.”
“아르곳 거리? 역시 거기였구나. 좋아.”
타티아나가 마부석 쪽의 창문을 열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말을 모는 자는 평범한 마부가 아닌 눈치였다.
크리스토퍼의 작업실 위치까지 아는 걸 보아 샤틀레 자작가에서 발행하는 신문의 기자 같았다.
대충대충 준비한 게 아닌 것 같은 점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부인이 만든 옷은 코르셋이나 패티코트를 따로 입지 않아도 돼서 이럴 때 좋아요.”
어느새 옷을 다 갈아입은 가브리엘의 해맑은 미소에 루비카는 조금 착잡한 기분이 되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실용적이고 예쁜 옷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한 건 변장하기 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동안 가브리엘은 이런 위험한 일을 얼마나 자주 벌인 걸까.
“가브리엘.”
“네네, 걱정 마세요. 이번이 처음이니까요!”
그녀가 무슨 말을 꺼낼지 알고 있다는 듯 가브리엘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가브리엘처럼 혈기가 넘치는 아이는 말린다고 해서 듣지 않는다.
똑똑한 아이니 그 행동으로 인해 불러올 수많은 경우의 수를 계산하고 행동했겠지. 괜히 잔소리하는 것처럼 느껴질까 루비카는 더 이상 캐묻지 않기로 했다.
“두 번 다시 이러지 않기로 약속해.”
“음, 글쎄요.”
가브리엘은 말을 돌리려 했지만 루비카의 엄격한 눈빛에 결국 못 당하겠다는 듯 고개를 순순히 끄덕였다. 무모한 행동이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인지는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티아나, 크리스토퍼가 자콥 남작을 만났어. 그 사람이 조력자 같은 눈치야.”
“자콥 남작?”
타티아나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서류를 하나 꺼내서 살폈다. 알아 볼 수 없는 기호와 숫자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게 꼭 암호문 같았다.
“자콥 남작이 얽혀 있다면 이번 건은 꽤 큰일이 될 수도 있겠는데?”
“왜?”
“얼마 전에 있었던 대필 사건 기억나지?”
“설마 고위 자제들이 아카데미 졸업 논문을 위조한 일을 말하는 거니?”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루비카가 끼어 들었다. 논문 대필 사건은 한동안 수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일이다.
아론의 아카데미에서 마지막 과정까지 졸업한 자는 평생 먹고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부르는 곳이 많았다.
작위를 계승받지 못한 고위 가문의 차남이나 삼남은 아카데미 졸업이 인생을 결정 짓는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였다.
문제는 돈이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입학과 달리 졸업은 쉽지 않단 사실이었다. 아론의 아카데미는 깐깐하기 이를 데 없어 기준에 미달하는 논문은 왕자든 공주든 탈락시켰다.
돈도 신분도 통하지 않는 그곳에 얼마 전 사건이 터졌다. 대부분 아카데미의 졸업할 실력이 되지 않는 고위 자제들의 논문을 대필해 주는 일당이 적발된 것이다.
“네, 관련된 자들을 적발하긴 했지만 극히 일부예요. 저희 쪽은 중개책이 자콥 남작일 거라고 보고 있어요. 아직 확실한 정보를 입수하지 못해서 기사화하지는 못했지만요.”
타티아나의 대답에 루비카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작은 새의 소식지가 그런 것도 조사하니?”
“아니요. 아버지가 운영하는 신문사에서 알아낸 사실이에요. 참, 마부석에 있는 존은 저희 일간지 기자예요.”
마부에 대한 짐작은 맞았다. 하지만 타티아나가 샤틀레 자작가에서 운영하는 신문사의 기밀에 가까운 정보까지 알고 있는 건 의외였다.
그저 돈이 된다는 이유로 자작가가 그녀의 소식지 발행을 지원해 주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다만 그런 위험한 일을 하는 남작까지 엮여 있다니 일이 더욱 위험해 보여 걱정이었다.
“크리스토퍼 덕택에 자콥 남작에 대한 단서도 찾을 수 있겠네.”
루비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타티아나는 꽤 기뻐 보였다.
“타티아나, 하지만 이 건은 작은 새의 소식지에서 다뤄야 해. 만약에 너희 아버지가 가로채면 내가 칼럼에서 일 년 내내 자작 각하께서 입는 옷이 얼마나 촌스러운지, 무도회가 열릴 때마다 샹들리에 불빛을 그 깨끗한 머리가 몇 번 반사했는지, 재미없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얼마나 축 처지게 만들었는지 묘사할 거야.”
“그건 걱정하지 마.”
소식지에서 크리스토퍼의 일을 기사화한 다음에 일간지에서 대필 사건과 관련된 내용을 다루면 된다. 그리되면 양쪽 다 막대한 이득을 취할 수 있다.
타티아나는 아직 왕성도 모르는 정보를 취했다는 사실에 기뻐 박수라도 치고 싶었다.
“음, 어쨌든 왜 크리스토퍼를 쫓고 있던 건지 알려 주면 좋겠는데.”
둘의 이야기를 찬찬히 듣고 있던 루비카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질문했다.
가브리엘은 뒤늦게 정작 중요한 걸 그녀에게 설명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원래 그녀는 조금 정신이 없는 편이었다.
“음, 어디서부터 설명하는 게 좋을까?”
“일단 그걸 보여 드리자.”
타티아나는 자작가 마차 안에 주요 조사 자료를 숨겨 놓았다.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그녀가 소식지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괜히 방에 두었다 청소하러 온 하녀에게 들키는 것보다 이게 더 안전하다.
그녀는 의자 아래에 숨겨져 있던 서랍을 꺼내 종이 네 장을 찾았다. 꽤 오래된 듯 누런색을 띤 것부터 새하얀 것까지 종이색은 각각 달랐다.
“부인, 이건 크리스토퍼가 의상실에서 장인들에게 준 지시서예요. 한번 살펴보실래요?”
지시서는 판매를 위해 보여 주는 디자인화와 달리 온갖 지시와 디테일에 대한 주문으로 빽빽하기 마련이다. 나름 영업 비밀이라 외부에 유출되는 일은 드물다.
대체 어떻게 구한 건지 타티아나의 능력이 놀라웠다. 어쩌면 사교계를 물밑에서 조종하는 건 왕비나 다른 귀부인이 아닌 이 어린 소녀들일지도 모른다.
“으음.”
“뭔가 이상하지요?”
지지서를 찬찬히 둘러본 루비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필체는 일정하지만…… 저 종이에서 쓴 약자와 여기에 쓰인 약자의 쓰임새가 달라.”
“프릴이나 레이스를 쓰는 습관 같은 것도 잘 봐요.”
디자인이 아무리 비슷해 보여도 디자이너 각각의 버릇이 지문처럼 남아 있기 마련이다. 특히 이런 지시서에서 그런 습관이 잘 드러난다. 루비카는 결국 참지 못하고 가브리엘에게 질문했다.
“이게 정말 모두 크리스토퍼의 의상실에서 나온 거니? 이 지시서를 쓴 사람은 전부 다른 디자이너 같은데.”
“역시 부인은 금방 알아보시네요. 크리스토퍼가 받아썼는지 필체는 똑같은 바람에 저흰 그걸 깨닫는 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사실 깨달은 것도 아니에요. 재봉공한테 물어봐서 알아낸 거예요.”
케이크 하나에 의심스러운 점을 선뜻 알려 준 재봉공을 떠올리며 가브리엘은 어깨를 으쓱했다.
똑같은 프릴이여도 의상실마다 각각 계보가 있어 전혀 다른 약자를 쓴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끝내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전부터 크리스토퍼를 보면 희한하다고 생각하긴 했어요. 매번 유행에 따라 어쩜 그렇게 카멜레온처럼 다른 드레스를 만드는지……. 전 그저 그 사람이 천재여서 그런 줄 알았다니까요.”
그간 바친 돈 때문인지 가브리엘의 목소리에는 억울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어쨌든 이 지시서를 통해 분석한 결과 크리스토퍼의 디자인은 2년을 주기로 바뀌었요.”
“그럼…… 논문 대필처럼 일종의 디자인 대필을 해 왔다는 거야?”
“그런 셈이지요.”
무척 놀라운 일이지만 카나의 일 때문에 크리스토퍼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저 수도 사교계에서 가장 유명한 디자이너로 오랜 기간 활동하며 들키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럼, 크리스토퍼 대신 디자인을 한 사람을 찾으면 되겠구나.”
카나 말고도 다른 피해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 사람들이 나서서 증언해 준다면 그동안 크리스토퍼가 해 왔던 일을 밝힐 수 있다.
그리되면 지금도 카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추문에 대한 진실도 만천하에 밝혀질 것이다.
“그게, 음. 저희도 그러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있는 유령 디자이너는 크리스토퍼가 주는 돈에 무척 만족하고 있는 눈치여서 접근 자체를 못했어요.”
“그럼 예전에 유령 디자이너를 해 준 사람을 찾으면 되지 않을까? 이젠 크리스토퍼에게 돈을 받지 않으니 충분히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거기에 유령 디자이너는 최소한 네 명은 될 것이니 영 힘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루비카의 질문에 타티아나는 대답을 주저했다. 결국 가브리엘이 대신 나섰다.
“예전 유령 디자이너 중 두 명은 저희도 신원은 파악하지 못했어요. 나머지 두 명은…… 한 명은 소식이 끊겼고, 한 명은 죽었어요.”
“죽었다고?”
“네. 둘은 따로 의상 학교를 나오지 않고 의상실에서 일하던 재봉공이었어요. 실력이 꽤 괜찮아서 크리스토퍼가 샤르망 왕국에 유학을 보내 주겠다고 제의했나 봐요. 당연히 그건 짜고 친 거짓말이었고요. 필요가 없어졌을 때쯤 한 명은 사고로 죽었다는 편지가 가족에게 왔고, 한 명은 그냥 소식이 끊겼대요.”
점점 더 위험한 향기가 났다. 신원을 모르는 나머지 두 명도 안전한 상태가 아닐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설마 다 죽은 걸까?
등이 오싹할 정도로 무서웠지만 여기까지 오니 발 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하려면 일개 디자이너의 힘만으로는 부족해.”
“맞아요. 힘 꽤나 쓰는 조력자가 없으면 불가능하죠. 하지만 벌써 두 달 가까이나 조사원을 붙여 관찰했지만 소득이 없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뭘 놓친 건지 찬찬히 다시 살펴봤어요.”
“그러다 깨달은 거예요. 다른 건 다 우리 소관이었지만 궁정에 들어간 크리스토퍼는 어디에서 누굴 만나고,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상세히 알지 못한다는 걸요.”
물론 크리스토퍼를 자주 부르는 무리나 그들이 어떤 주문을 하는지 정도는 조사원을 통해 쉽게 알아낼 수 있다. 하지만 주문을 받은 뒤 돌아가는 길 복도에서 누구를 만나 어떤 대화를 하거나 편지를 전하는지까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제가 변장을 한 거예요! 궁정에 스파이를 심었다간 국왕 전하께 역으로 저희 정체를 들킬게 뻔하거든요. 그분이라면 벌로 제게 왕비 전하를 찬양하는 시를 지어 잡지에 기재하라고 할 거예요. 그럼 우리 소식지는 끝장이에요!”
가브리엘은 농담 같은 소리를 퍽 진지하게 했다.
“하지만 가브리엘, 만약에 오늘 자콥 남작과 대화하는 장면을 보지 못했으면 내일도 변장할 생각이었니? 네가 왕성에 잠입한 사실이 들키면 국왕 전하께서 찬양시를 짓는 수준으로 끝내지 않을 거야. 큰 벌을 면치 못한 근위대는 백작가와 척을 질 수도 있어.”
“음, 그 위험성은 인정하지만 내일까지 변장할 생각은 없었어요. 오늘 한 건 나름 이유가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