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95화
다른 부인이라면 이럴 때 ‘왕비 전하는 지금도 아름다우세요.’ 같은 뻔히 보이는 아부로 상황을 수습했을 것이다.
하지만 루비카는 이런 문제에 순발력이 없었다. 눈에 띄게 당황하는 루비카의 모습에 왕비의 기분은 오히려 사르륵 풀렸다.
뻔한 아부는 당장 듣기에 기분은 좋아도 상대에 대한 신뢰를 깎아먹기 쉽다. 왕비로 살면서 듣기 좋은 말은 질리게 들었다.
게다가 언제나 속내를 숨기고 상황을 주무르는 걸 즐기는 국왕을 남편으로 둬서 그런지 사람을 속이지 못하는 루비카가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그래서 에드가가 사랑에 빠진 건지도 모른다. 본심을 숨기고 아부나 해대는 사람에게 시달리는 건 그녀보다 에드가가 더 심하다.
“그, 음. 제니에게 말해 보겠습니다. 아마 무척 기뻐할 거예요.”
목적이 마담 베리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화장에 대한 상담이라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왕비 전하의 화장이라니 제니의 입장에서는 영광이 따로 없었다. 앞으로 그녀의 삶에 큰 도움이 될 만한 경력이었다.
“그래, 그럼 준비가 되는 대로 언제든지 데리고 오게. 사례는 섭섭지 않게 해 주지.”
제니를 데리고 오겠다는 대답에 기분이 좋아진 듯 왕비가 활짝 웃었다. 그동안 루비카를 매일 왕성으로 불러 무슨 크림을 쓰는지, 오늘 화장은 직접한 건지 하녀가 해 준건지 등등 알쏭달쏭한 대화를 했던 이유가 제니 때문이었다. 앞으로 이렇게 귀찮을 정도로 매일 부르는 일이 줄어들지도 모른다.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 왕비 전하가 더 편해.’
수도에 와서 한동안은 멋진 건물과 사람들을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수도 저택은 영지에 비해 크기가 작은 대신 구석구석 세심히 꾸며져 있어서 볼 것이 많았다.
차 모임에 초대되어 다른 귀족의 저택을 구경할 수 있었던 것도 큰 즐거움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응당 사교계가 그렇듯이 크게는 왕당파냐 귀족파냐에 따라, 작게는 각 가문별로 감정의 골이 있어서 말 한마디에도 조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물론 누가 루비카를 깎아내리려 하면 가브리엘이나 탕트 백작 부인이 냉큼 말을 받아 면박을 줬지만 솔직히 피곤했다. 이제는 귀찮았던 친척들마저 그리울 정도였다.
“내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군. 이러다가 에드가에게 한 소리 듣겠어.”
원하는 대답을 들어 기분이 좋아진 왕비는 평소보다 일찍 루비카를 놓아주었다. 내관이 안내하겠다는 건 정중히 거절했다.
워낙 자주 방문해 이제 왕성의 대략적인 길은 다 파악했다. 누굴 보면 고개를 숙여야 하는지, 어떤 사람을 보면 길을 피해야 하는지도 다 외워 딱히 도움이 필요 없었다.
“엘리제, 우리도 내년에는 저 꽃을 심을까?”
“장미랑 잘 어울릴 것 같네요. 각하의 집무실에서도 볼 수 있게 정원 가운데 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무엇보다 내관이 있으면 이렇게 엘리제와 함께 주변을 찬찬히 둘러볼 여유가 없다. 내관은 언제나 가장 빠른 길로 그녀를 안내하고 바삐 돌아갔다. 그녀가 건물의 부조나 석상에 대해서 질문을 하면 귀찮아하는 내색을 숨기지 않았다.
“저 그림 속 여인이 입고 있는 옷은 언제 적 거야?”
“세리토스 왕국이 생기기 전의 고대 시대 옷이에요.”
가슴에서 부드럽게 떨어지는 하얀 옷의 풍성한 라인을 한참 구경하며 복도를 걸어가던 중 코너에 몸을 찰싹 붙어 쭈그려 앉은 소녀가 보였다. 분명 궁정 하녀 옷을 입긴 했으나 불타는 머리색과 뒷모습이 낯익었다.
“가브리엘?”
설마 하는 마음으로 이름을 부르자 소녀가 화들짝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짐작이 맞았다.
대체 왜 여기서 하녀 복장을 하고 있는 거냐고 질문하기 전 가브리엘이 황급히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대었다. 루비카는 자신도 모르게 주변을 살펴보며 작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크리스토퍼와 샬롯 공주님을 관찰하고 있었어요.”
“하녀복을 입고?”
“네. 그냥 다니면 눈에 띄잖아요. 내관과 마주치면 인사를 해 대니 그쪽 눈에 띄기도 쉽고.”
하지만 하녀 변장을 하고 궁정에 잠입했다는 사실이 들통났다가는 백작가가 큰 화를 입을 수도 있다.
가끔 가브리엘은 상상 이상의 일을 저지른다. 귀족 영애가 몰래 가십지를 발행한다는 것부터가 보통 담력이 아니었다.
“가브리엘, 굳이 염탐을 해야 한다면 네가 하지 말고 내가 전문가를 알아 볼 테니…….”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가브리엘이 벌떡 일어났다.
“이런, 크리스토퍼가 가네요. 부인, 죄송하지만 제가 급해서요.”
그리고 몸을 숙이고 황급히 뛰어가는데 걱정스럽기 짝이 없다. 만에 하나 누군가에게 발각이라도 되면 어쩌려나 싶어 걱정스러웠다.
“엘리제, 저대로 뒀다간 큰일 날 것 같아.”
“그, 제가 보기에도 하녀가 아니라는 사실이 금방 들통날 것 같아요.”
“안 되겠다. 엘리제, 내가 쫓아갈 테니 넌 공작가로 돌아가 알려.”
“네!”
만에 하나 가브리엘의 정체가 들키는 상황이 닥치더라도 그녀가 곁에 있으면 어떻게든 감싸 책임을 면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루비카는 종종걸음으로 가브리엘을 쫓아갔다.
“헉, 부인!”
기둥 뒤에 숨어 크리스토퍼의 동향을 살피던 가브리엘이 루비카가 다가오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기껏 하녀 분장까지 했는데 왜 하필이면 루비카에게 들통난 걸까.
“돌아가세요. 여기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가브리엘, 그러다 들키면 큰일 나.”
“샬롯 공주도 못 알아봤는걸요.”
“하지만 난 알아봤잖아.”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이게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가브리엘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제발 이번 한 번만 못 본 척해 줄 수 없나요?”
그건 안 된다고 대답하려는데 가브리엘이 팽하니 돌아 다음 기둥으로 건너뛰다시피 해서 숨었다.
대체 왜 크리스토퍼의 뒤를 밟으려는 건가. 루비카는 하는 수 없이 가브리엘의 미행에 동참하게 되었다.
“아아, 이제 보니 자콥 남작이 조력자였구나.”
정원에서 크리스토퍼가 만난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가브리엘은 입을 삐죽였다.
잠입하길 잘했다. 아무리 ‘작은 새의 소식’지가 다양한 취재원을 확보하고 있더라도 왕성까지 힘을 뻗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괜한 짓을 했다 역으로 국왕의 첩자가 소식지에 들어올 수 있다. 국왕이 이런 가십지에까지 영향력을 뻗으려 드는 건 지나치게 체통 없는 짓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정치란 원래 앞에서는 명분을 내세우고 물 아래에서는 온갖 불법을 자행하는 체통 없는 짓이다.
“이래서 취재원이 겁을 냈던 거구나.”
“가브리엘, 설마 지금 위험한 거니?”
“정보만 얻고 개입은 안 할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그만 돌아가세요. 부인은 눈에 띄어서 곤란해요. 들키면 다음 기회는 없어요.”
위험하냐는 질문을 교묘히 피하는 대답이었다. 그런 소리를 들었는데 갈 수 없다. 루비카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난 널 지켜야 할 의무가 있어.”
가브리엘은 어깨를 으쓱했다. 루비카가 저리 나오면 말릴 도리가 없다. 성장 차림인 공작 부인과 함께라면 크리스토퍼에게 들키는 건 시간문제다.
하지만 포기하자니 들인 돈과 시간이 아까웠다. 이 다 낡은 궁중 하녀복을 구하기 위해 빨래터 담당에게 그녀의 한 달 치 용돈을 썼다.
“부인이 절 따라오시는 것까지는 괜찮아요. 하지만 미행을 포기할 생각은 없어요.”
“알았어.”
대답하며 루비카는 가브리엘은 벽 쪽으로 당겼다.
“방금 상대편이 고개를 돌리면 충분히 보일 수 있는 위치였어.”
“네?”
그리고 크리스토퍼의 위치에 따라 잽싸게 기둥이나 벽 뒤로 몸을 숨기며 이동하는데 상대편에서는 치맛자락은커녕 머리카락 한 올도 보지 못할 정도의 완벽한 위치 선정을 뽐냈다. 공작 부인의 뜻밖의 능력에 가브리엘은 눈을 끔뻑였다.
“대체 이런 건 어디서 배우셨어요?”
“배운 게 아냐. 살다보니 터득한 거야.”
“네? 아무리 무역상 집안 출신이라 해도 언제 이런 걸…….”
“쉿!”
어느새 크리스토퍼가 왕성 입구에 다다랐다. 문지기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양새가 아무래도 마차를 부를 모양새였다. 루비카는 벽에 귀를 가져다대 그들의 말소리를 엿들었다.
“아르곳 거리에 갈 생각인가 봐. 가브리엘, 지금 네 상태로는 궁을 나갈 수 없어.”
“그건 걱정 마세요.”
가브리엘은 주머니에서 피슈를 꺼내 걸치더니 머리쓰개를 바꿨다. 그리고 가슴에 달린 왕가의 문장을 뗐다. 어차피 하녀복은 거기서 거기다. 디테일을 조금 달리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다른 귀족가의 하녀로 보였다.
“내 마차는 엘리제가 이미 타고 갔을 텐데 어쩌지?”
“문지기에게 사틀레 자작가의 마차를 부탁한다고 하면 돼요.”
어차피 목적지를 알아냈으니 조금 여유가 있다. 루비카는 크리스토퍼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후 당당히 입구로 걸어 나갔다.
“공작 부인 아니십니까? 방금 시녀님이 마차를 타고 먼저 가셨는데…….”
문지기 옆의 기사가 루비카를 알아보고 말을 걸었다. 하필이면 가브리엘의 얼굴을 아는 자였다. 가브리엘은 욕설을 참고 머리쓰개를 좀 더 깊숙이 쓰고 루비카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일이 있어서 먼저 보냈네. 사틀레 자작가에서 마차를 빌려 주기로 했으니 불러 주게.”
기사는 질문하고 싶은 게 많은 눈치였으나 클레이모어 공작 부인에게 잘못 보였다 출세길을 망치고 싶지 않았는지 쉬이 물러났다.
루비카는 자작가의 마차가 오는 동안 기사가 가브리엘의 얼굴을 볼 수 없도록 계속 말을 걸었다.
“부인, 에스코트하겠습니다.”
루비카의 행동을 자신에게 호의가 있다고 해석한 걸까? 기사가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를 받았다가는 가브리엘의 얼굴이 들킬 확률이 높다. 루비카는 정색했다.
“거절하겠네.”
“설마 각하께서 이런 일까지 질투하십니까? 하지만 에스코트를 받는 건 부인의 특권이 아닙니까?”
부인에게 마차를 타는 걸 도와주겠다고 나선 건 꽤 신사적인 행동이었다. 기사는 거절을 납득하지 못한 눈치였다.
하지만 호의를 보였다고 꼭 들어줘야 하는 걸까? 사실 균형을 좀 잡기 힘들어서 그렇지 혼자서 마차를 타는 게 영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그이가 왜 질투를 하겠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의 에스코트를 받는 것도 특권인가?”
“네?”
“다른 아가씨가 거절해도 특권 같은 소리하지 말고 그냥 알았다며 물러나게.”
충격으로 기사가 멍해져 있는 사이 가브리엘이 먼저 마차에 탔다. 루비카는 일부러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짓고 마차로 갔다. 차마 문지기는 그녀를 쫓아오지 못했다.
‘성격 나쁘다고 소문이 나려나.’
아무렴 어때. 탕트 백작 부인부터 왕비 전하, 샬롯 공주까지 성격적 결함에 대해서는 온갖 소문이 떠돌았다. 가끔은 악평이 도움이 될 때도 있다.
“부인.”
마차 문이 열리자 먼저 타고 있었던 타티아나가 손을 내밀었다. 평소의 얌전한 미소와는 다른, 이가 활짝 드러난 미소였다.
“무척 속 시원했어요. 방금 그 기사님, 에스코트를 빌미로 추근거리기로 유명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