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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194화 (194/212)

# 194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94화

“허허, 앞잡이라니 섭섭합니다.”

당장 미노스의 멱살을 잡고 내쫓아 버리고 싶었지만 여기는 집이 아니었다. 블랑코는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고개를 팽 돌리고 점원에게 말을 걸었다.

“다른 색상은 더 없나?”

점원은 매출의 절반 이상을 담당하고 있는 블랑코의 편의를 항상 최우선으로 쳤다. 점원과 이야기하며 미노스를 무시할 계획이었다.

“여기 하늘색이 옷이 더 있습니다. 헉, 미노스 님!”

하지만 미노스를 발견하는 순간 점원의 관심사는 순식간에 옮겨갔다. 아무리 블랑코가 많은 옷을 사도 그에게는 저렇게까지 안절부절못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미리 연락을 해 주셨으면 마중을 나갔을 텐데요. 자, 이쪽으로 일단 앉으시지요.”

의자까지 권했다. 그건 블랑코도 여태껏 받아보지 못한 대접이었다. 물론 물건을 사는 데 시간제한이 있는지라 앉을 시간이 없었지만 거절하는 것과 아예 권하지 않는 것은 천지차이가 있었다. 어쩐지 배가 슬슬 아파 왔다.

“음.”

미노스는 고민하는 척 곁눈질로 블랑코를 봤다. 등을 돌리고 있었지만 이쪽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슬슬 낚싯대를 드리울 때가 됐다.

“그럴 필요 없네. 음, 그래. 장사는 잘되고 있는가?”

“무척 잘되고 있습니다.”

“잘되다니, 수도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는 판매고인데.”

칭찬을 들을 줄 알았던 점원은 깜짝 놀랐다. 비록 제일 큰 사이즈의 옷만 불티나게 팔리고 있지만 이런 시골에서 이 정도의 수익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미노스 님, 수도에 비할 바는 못 되도 충분히 높은 판매고라고 생각합니다.”

“그쪽의 실력에 대해서 불만이 있는 게 아니야. 오히려 아깝다고 생각해. 더 클 수 있는 사람이 이런 시골에 있으면 쓰나. 어떤가? 슬슬 외국에도 옷을 팔 생각인데 여기는 정리하고 항구로 한번 가 보는 건? 손님도 훨씬 많을 거…….”

“안 돼!”

블랑코의 비명에 가까운 외침과 함께 미노스는 천장을 향해 날아올랐다. 땅으로 수직 낙하할 때쯤 블랑코의 손이 잽싸게 그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점원이 말릴 새도 없이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고맙게도 땅에 패대기까지는 치지 않았군!’

하지만 인적이 드문 숲에 도착하자마자 블랑코는 미노스를 땅으로 던져 버렸다. 의상실에서는 차마 보는 눈이 많아 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요 조그마한 고블린이 감히 어디서 의상실을 정리하라 마라야!”

“아야야.”

충격으로 변신이 풀린 미노스가 무릎을 만지며 일어났다. 블랑코도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지 오래였다. 위압적인 그의 앞에서 미노스는 위축되지 않고 어깨를 당당히 폈다.

“그 의상실을 여는 데 제 자금이 조금이나마 들어갔습니다만.”

“보나마나 돈 냄새를 맡았나 보군. 내 지갑을 털 속셈이었겠지? 이 돈만 밝히는 고블린아.”

영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미노스는 부정하기로 했다.

“이 산골에 의상실을 내는 것보다 항구에 내는 게 백배 이득이라니까요. 예쁜 옷을 사랑하는 블랑코 님을 위해서 마담 베리에게 특별히 부탁했건만 섭섭합니다.”

“부타악? 네가 뭔데 마담 베리처럼 대단한 사람에게 부탁을 해! 그리고 그분이 어째서 너 같은 고블린의 부탁을 들어줘!”

“그야 친구니까요.”

“친구?”

“네.”

갑작스런 침묵이 찾아왔다. 블랑코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클레이모어에 붙은 배신자가 그가 존경해 마지않는 마담 베리의 친구라니 머릿속이 엉킨 실타래처럼 엉망이 되었다.

“그분의 정체는 작은 새의 소식지도 밝혀내지 못했는데.”

“하지만 전 알아요.”

미노스는 블랑코의 눈이 흔들리는 걸 놓치지 않았다. 수많은 거래를 성사시킨 그는 상대의 욕망을 읽는 데 선수였다.

“만나게 해 드릴까요? 마담 베리.”

“마…… 마담 베리를?”

“제가 부탁하면 들어주실 건데요. 그리고 블랑코 님에게 어울릴 만한 옷도 추천해 주시겠지요. 읽어 보셨지요? 그레이스 양의 변신.”

읽다 못해 거의 외우기까지 했다. 누구의 눈길도 끌지 못했던 소녀의 드라마틱한 변신은 블랑코의 마음을 흔들고도 남았다.

‘나, 나도 그렇게 해 준다고?’

프레자에서 산 옷은 무척 예쁘긴 했지만 솔직히 블랑코에게 잘 어울리진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그건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옷이다. 드래곤의 권속에게 딱 떨어지게 맞기는 힘들었다.

“블랑코 님을 딱 한 번만 만나도 그분은 어울리는 옷을 순식간에 만들어 낼 겁니다.”

“당연하지! 그분이 어떤 분인데!”

블랑코가 씩씩거리며 호통을 쳤다. 블랑코에게 드레스를 입을 기회를 준 마담 베리는 신적인 존재나 다름없었다.

‘거참, 기분 한번 맞추기 어렵네.’

미노스는 만면에 웃음을 잃지 않고 먼저 사과했다. 그제야 분노가 가라앉은 블랑코는 한참 손을 꼼지락거리더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그런데 날 보면 기절하지 않을까? 그, 보통 인간은 우릴 무서워하는데.”

거의 마담 베리를 만나기로 결심을 굳힌 거나 다름없다. 미노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분은 편견이 없으십니다. 추함은 아름다워질 가능성을 가졌기에 더욱 아름답다고 말씀하시는 분이신데요.”

“내가 추하다는 소린가?”

“아, 아뇨. 블랑코 님은 아름다우십니다. 그리고 마담은 아름다움을 놓치는 법이 없고요.”

이번 대답은 합격이었다. 블랑코의 볼이 기대감으로 발그레해졌다. 대체 마담 베리는 그를 위해 어떤 옷을 만들어 줄까?

감이 잡히지 않지만 일단 무조건 예쁠 거란 믿음이 있었다. 어쩌면, 이건 말도 안 되지만 작은 새의 소식지가 블랑코에 대한 기사를 쓸지도 모른다. 상상만으로도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았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확신이 들었다.

“좋아, 마담을 만나고 싶어. 어떻게 하면 되지?”

세상에 본능을 이길 수 있는 존재는 별로 없다. 블랑코는 방금까지 미노스를 원수 보듯 바라봤단 사실을 간단히 잊기로 했다. 아무렴 어때! 그의 신을 만나게 해 준다는데.

* * *

루비카는 오늘도 또 왕비에게 불려갔다. 왕비는 언제나처럼 차를 권하고 클레이모어의 치적에 대해서 칭찬했다.

“옷을 대량으로 만들어서 파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야. 장미보다 더 엄청난 수익을 내고 있네.”

“네, 대신에 천 값이 무척 올랐다고 들었어요.”

“샤르망 왕국. 그놈들이 수를 쓰더군.”

왕비가 씁쓸하게 대꾸했다. 세리토스 왕국은 오랫동안 무기 산업에 신경 쓰느라 나머지 산업은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다.

놀랍도록 많은 옷을 만들어 팔 능력을 갖추었는데 재료가 모자랐다. 거기에 예로부터 질 좋은 천과 사치품을 생산하기로 유명한 샤르망 왕국이 그들을 견제하고 나서기 시작했다. 익숙지 않는 경제 싸움에 세리토스 왕국은 현재 쩔쩔매는 중이다.

“세상에 참 쉬운 일이 없네. 장인을 키우려면 오랜 세월이 걸릴 터인데 어쩌면 좋을지.”

“……꼭 장인을 키워야 할까요?”

“그럼?”

“그이가 방법을 찾고 있어요.”

“기계를 만들 생각인가 보군. 좋아,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에드가라면 충분히 할 수 있고말고.”

왕비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주름이 생겼다. 루비카는 자신이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으면 왕비가 먼저 제의했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

‘정말, 발명 맡아 놨나.’

자신도 그에게 이런저런 부탁을 했건만 왕비가 그러니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요즘 들어 그의 안색이 좋지 않다. 반은 매일 놀러와 둘 사이는 방해하는 이오스 때문이었으나 빡빡한 일정 탓도 없지 않았다. 왜 에드가는 항상 바쁜 걸까.

“하지만 장인도 키워야 해요. 아무리 기계가 뛰어나도 사람의 손보다 섬세하지는 못해요. 천을 만들 재료에 대해서도 좀 더 연구해야 하고요.”

“그렇지, 그건 걱정 말게나.”

왕비의 미간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역시 남에게 일을 시키긴 쉬워도 자신이 하기는 귀찮기 마련이다.

계속 있다가는 괜한 소리나 들을 분위기에 루비카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대충 핑계를 대고 자리를 뜨려는데 왕비는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마담 베리를 한번 만나고 싶은데 왕성으로 불러 주게.”

“네?”

“지금 이 성공은 그녀가 아니라면 불가능하지 않았나. 만나서 치하하고 싶네.”

무심히 말하는 왕비의 태도에 루비카는 숨이 막힐 뻔했다. 왕비는 아직 마담 베리의 정체가 누구인지 모른다.

에드가는 국왕 내외는 좋은 지배자이기에 더욱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공작 부인이 자리에 맞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는 약점을 왕비가 알아 봐야 좋은 일이 없다.

“마담 베리의 정체는 저도 정확히 몰라요. 오라 가라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이번엔 왕비의 미간에 확실히 주름이 갔다.

“고작 디자이너 주제에 무엄하군.”

그 디자이너가 이 나라 살림의 삼분의 일 가까이를 책임지고 있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다. 루비카는 대신 살짝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원래 디자이너들이 조금 건방진 구석이 있잖아요.”

“그건 그래.”

딸아이가 어울려 다니는 무리를 떠올리며 왕비는 한숨을 쉬었다. 요즘 크리스토퍼의 방자한 행동은 왕비에게도 골치였다.

마담 베리가 왕국에 벌어다 주는 돈이 얼만데 평민을 상대로 옷을 만드는 천박한 디자이너라고 헐뜯고 다녔다. 마담이 아가씨들을 비밀스럽게 초대해 탈바꿈시키는 것도 자신의 옷을 더 팔아치우기 위한 수작으로 치부했다.

불러서 따끔하게 혼내자니 그의 추종자들이 문제였다. 귀족파인 레오폴드 후작 부인은 왕비가 촌스럽게 사교계의 일에, 그것도 일개 디자이너의 일에 참견한다고 여기저기 떠들고 다니겠지.

“마담 베리를 만나는 게 불가능하면 그대의 하녀라도 데려오게.”

“네? 하녀요?”

“그레이스의 화장을 바꿔 준 하녀 말일세. 이름이 제니였나?”

루비카는 잠시 숨을 참았다.

‘어제 그레이스 양을 따로 불러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더니 마담 베리에 대해서 캐물으셨구나.’

사교계에 갓 데뷔한 소녀를 구워삶아 진실을 토해 내게 하는 건 왕비에게 일도 아니었겠지. 어쩌면 아버지의 일이나 영지와 관련해 협박을 했을지도 모른다.

루비카는 가브리엘의 권유대로 그레이스에게 자신의 정체를 끝까지 숨기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제니는 왜 부르시려는 건가요?”

제니는 그레이스와 달리 제 주인에 대한 비밀을 절대 발설할 타입이 아니었다. 하지만 최대한 왕비와 만나지 않도록 방어하는 것이 그녀의 의무였다.

“음, 그게…….”

루비카의 질문에 왕비가 한참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내 화장을 부탁하고 싶네.”

“네?”

“마담 베리와 함께 그레이스를 놀랄 만큼 변신시킨 사람 중 하나가 아닌가.”

민망한 듯 왕비가 부채를 펼쳤다. 부끄러워하는 모습에 루비카는 그녀가 단지 마담 베리의 정체를 캐내기 위해 제니를 부른 게 아님을 깨달았다.

“설마 마담 베리를 부르시려 하신 이유가…….”

“내 스타일에 대해서 상담하고 싶었네. 나 같은 노인은 예뻐지고 싶으면 안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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