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92화
자연스럽게 응접실에서 루비카를 만난 그레이스는 그녀가 마담 베리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아예 머릿속에서 배제해 버렸다.
“드레스가 무척 잘 어울리는구나.”
루비카는 시치미를 뚝 떼고 방금까지 그녀가 꾸민 드레스와 머리스타일을 칭찬했다.
익숙하지 않은 칭찬에 그레이스가 어쩔 줄 모르다가 작은 목소리로 ‘부인도요.’라고 대꾸했다. 칭찬에 오히려 주눅 든 모습이었다.
‘겉모습이 변했다고 없던 자신감이 갑자기 생기면 오히려 더 이상하지.’
루비카는 그레이스가 자신의 변화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시간을 들여 대화했다. 슬슬 자신감이 생겼는지 그레이스의 미소가 자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어머, 어제 왕비 전하께 드려야 할 물건을 깜빡했구나.”
칼이 왕비의 편지를 전하러 왔을 때쯤 루비카는 자연스레 말을 꺼냈다. 언제부터 이렇게 거짓말이 자연스러워졌을까? 이젠 더 이상 정직의 신을 찾지도 않는다.
사교계 생활에 익숙해져 양심이 사라진 건지 양심이 사라져야만 사교계 생활에 익숙해질 수 있는 건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제가 대신 전할게요. 오늘 오후에 왕비 전하를 뵙기로 했거든요.”
짜여진 각본에 따라 가브리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 들기에는 무거울 텐데.”
“저도 도울게요.”
그레이스가 자연스레 따라나섰다. 언제나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듯 없는 듯 모임의 뒤편에만 앉아 있던 그레이스가 말이다.
루비카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어째서 조금 더 예쁘게 꾸며 줬을 뿐인데 이렇게 바뀔 수 있을까? 그녀가 그레이스 안에서 찾아낸 건 어쩌면 고작 아름다움만이 아닐 수 있었다.
“고맙구나.”
사실 루비카는 그레이스 자체를 바꾸지 않았다. 그녀는 루비카가 꾸미기 전과 똑같은 그레이스였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자신이 전혀 달라졌다고 믿었다.
그 순간 그레이스는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의 눈에 깃든 반짝임은 오직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내뿜을 수 있는 것이다.
루비카는 그 반짝임에 이끌려 그레이스를 문 앞까지 배웅했다. 할 수 있다면 왕성까지 따라가고 싶을 심정이었다.
“그만 들어가세요, 부인.”
“그래, 조심히 가렴.”
들뜬 표정으로 떠나는 그레이스의 모습에 문득 요즘 대륙 최고의 미인으로 극찬받고 있다던 후작 영애가 생각났다.
그녀는 이른바 크리스토퍼의 뮤즈였다. 왕비의 차 모임에 초대되어 가까이에서 만나 봤는데 소문대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지금 그레이스가 가진 반짝임이 없었다. 케이크를 고작 한 조각 먹었을 뿐인데도 근심에 찬 얼굴로 살이 찌지 않을까 걱정했고, 산책을 조금 했을 뿐인데 햇볕에 피부가 타지 않을까 내내 걱정했다.
듣기로는 탐스러운 머리를 유지하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 머리를 감고 한 시간 가까이 그네를 타서 말린다고 들었다.
‘그건 가짜 아름다움이야.’
멀어지는 마차를 보며 루비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잃어버린 아름다움을 되찾기로 결심했다.
사랑의 신이 아름다움의 신인 이유가 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결코 아름다워질 수 없다.
* * *
모든 것은 가브리엘과 루비카의 예상대로였다. 그레이스의 드라마틱한 변신과 피슈가 화제가 되는 순간 수도 한복판에 마담 베리의 의상실 ‘프레사’가 문을 열었다.
이미 만들어진 옷을 파는 것도 충격이었지만 의상실에 가도 디자이너의 코빼기도 볼 수 없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였다.
곧 수도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디자이너 이야기로 들끓었다.
“왜 집으로 오는 디자이너를 두고 굳이 직접 의상실로 가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콧대가 얼마나 높길래 정체를 숨기는 걸까요?”
“남들 보여 주기 곤란한 흉측한 상처가 얼굴에 있나 봐요.”
디자이너가 직접 집으로 와 오랜 시간 상담을 하고 옷을 만드는 데 익숙한 귀부인은 새로운 개념의 의상실에 반감을 드러냈다.
옷을 사려면 의상실로 오라니……. 주문이 밀렸다는 이유로 방문을 거절하는 것보다 더 모욕적이라고 느꼈다.
“그런데 말이에요. 어제 클레이모어 공작가의 마차가 프레사 앞에 한참 머무르다 갔다고 하더군요.”
“공작가 마차가? 하녀가 심부름 삼아 살 만한 게 있나요?”
“공작 부인이 직접 간 것 같던데요.”
가끔 체면이니 뭐니를 떠나서 새로운 걸 직접 보고 확인하지 않으면 몸살이 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실제로 의상실에서 루비카를 만난 부인이 시치미를 뚝 떼고 말하자 바로 반박이 들어왔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공작 부인이 그런 데는 왜 간대요? 마음만 먹으면 마담 카나도 언제든 부를 수 있는 사람인데. 아마 베리라는 여자도 공작 부인이 부르면 냉큼 갈껄요?”
“크리스토퍼가 카나를 흉보고 다니는 게, 수도의 모든 귀부인이란 귀부인이 그의 손을 거쳤는데 공작 부인은 감감무소식이란 이유도 있잖아요.”
루비카와 이야기까지 나눴는데 부정당한 부인이 발끈해 말했다.
“글쎄, 워낙 화제니 궁금해서 갔을 수도 있죠.”
지나치게 감정을 드러낸 덕에 그 자리의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마담 베리의 의상실에 갔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하지만 그저 화제라는 이유로 공작 부인이 나타났다니……. 모두가 납득하기에는 이유가 빈약했다. 다들 이유를 추측하고 나서기 시작했다.
“마담 베리의 후원인이 클레이모어 공작 부인이 아닐까요?”
“그러고 보니 처음 차 모임을 열고 리본 드레스를 소개한 사람도 공작 부인이었죠?”
“어머, 그러네요. 마담 베리가 카나 의상실과 관련 있다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고…….”
“앞으로도 종종 프레사라는 델 가시려나.”
누군가 그 말을 뱉자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다들 머릿속으로 공작 부인이 프레사에 다시 나타날 확률과 그녀와 말 한마디라도 섞었을 경우 얻게 될 이득에 대해서 계산했다.
“그러고 보니 저녁에 남편과 상의할 일이 있었다는 걸 깜빡했네요.”
“저도 보석상과 약속이 있어요.”
“음, 조카에게 선물할 숄을 완성하려면 시간이 빠듯하군요.”
갖은 핑계를 대며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들은 정확히 한 시간 후 프레사에서 재회하게 된다.
“장갑에 구멍이 나서 급한 김에 들렀네. 장갑을 바로 살 수 있는 곳은 여기뿐이니…….”
“어, 저는 피슈에 흙탕물이 튀었지 뭐예요.”
민망함에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변명을 늘어놓던 그들이 갑자기 입을 닫았다. ‘딸랑’ 하고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샬롯 공주가 시녀와 함께 들어왔기 때문이다.
큰 무도회가 아니고서야 얼굴 마주치기 힘든 공주의 등장에 의상실에 있던 손님과 점원의 손이 일제히 멈췄다.
쏟아지는 시선에 익숙한 공주는 태평스럽게 점원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옷을 볼 수 있을까?”
“네? 옷, 옷이요?”
“응. 선물을 하려고 하는데…… 뭐가 좋을까나.”
공주의 말에 점원이 급히 상점에 있는 옷 중 가장 좋은 것을 꺼냈다. 그러나 점원이 꺼낸 옷은 영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왕비의 부탁으로 왔기 때문에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 걸 살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옆에 있던 부인에게 무심히 말을 걸었다.
“지금 들고 있는 옷을 내가 좀 봐도 될까요?”
“네? 아, 여기 있습니다.”
옷을 들고 있던 부인은 공주와 평생 말 한번 붙여 볼까 말까 할 신분이었다.
그녀는 얼떨떨해 들고 있던 옷을 바로 내밀었다. 잽싸게 점원이 대신 받아 공주 앞에 펼쳐보였다.
“고마워요, 부인.”
평소 하던 대로 굴지 말고 친절하게 행동하라고 왕비는 신신당부를 하다못해 감시자로 시녀까지 붙였다.
샬롯 공주는 평소보다 고운 목소리로 대답하며 생긋 웃었다. 감사의 말을 들은 부인은 너무 놀라 제대로 대꾸도 하지 못하고 뒷걸음을 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공주는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나쁘진 않지만…… 음.”
“누구에게 선물하실 생각인가요?”
“구빈원.”
“어머, 공주님 마음씨가 참 고우시네요.”
“색이 너무 밝은 것 같은데…….”
공주가 말을 흐리더니 다른 옷이 없나 목을 길게 빼다 깜짝 놀랐다.
방금까지만 해도 장갑이나 손수건을 보고 있던 귀족 부인들이 어디서 찾아냈는지 갈색이나 회색 드레스를 들고 있었다.
심지어 몇 명은 그녀가 보기 편하게 팔이 아플 정도로 높이 옷을 들고 있는 게 아닌가.
‘이게 무슨 일이지?’
하지만 덕분에 옷을 고를 시간이 한참 줄어들어 편리하기 짝이 없다. 공주는 활짝 웃으며 그녀가 원하는 갈색 옷을 들고 있는 부인에게 말을 걸었다.
“그 옷을 좀 봐도 될까요?”
“네, 공주님! 기꺼이 보셔도 되지요. 저는 베리에르 남작 부인입니다.”
“베리…… 에르?”
“호호호, 공주님의 행동에 감탄했어요. 구빈원에 옷을 보내는 건 생각 못했네요. 저도 한번 보내 볼까요?”
속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뻔한 수법이었다. 하지만 샬롯 공주는 뭐든 깊게 생각하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행동을 칭찬하는 말에 바로 반응했다.
“구빈원에서도 좋아할 거예요. 곧 추운 겨울이 닥쳐오는데 지금부터 옷을 만들면 시간이 많이 들잖아요. 어마마마께서 천을 보내는 것보다 이미 만든 옷을 보내는 게 좋을 거라고 했어요.”
겨울을 생각하면 이런 드레스가 아니라 두꺼운 옷을 사는 게 옳다. 하지만 베르에르 남작 부인은 이 사실을 지적하는 대신 맞장구를 쳤다.
“그렇죠. 구빈원은 항상 옷이 부족하니까요.”
“같이 고를까요?”
공주는 심지어 베리에르 남작 부인에게 호감을 보이며 제 쇼핑에 끼워 주기까지 했다.
국왕 부부가 막내 공주에게 약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세리토스 왕국에 없다.
다들 베리에르 남작 부인의 행운을 부러워하며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웠다.
“이 옷은 지금 서른 벌 정도가 남아 있습니다.”
“음, 어쩌지. 아직 좀 더 주문해야 하는데…… 바이올렛이랑 약속 시간이 다 되어 가네.”
대충 아무 옷이나 골라도 되지만 샬롯 공주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쨌든 공주의 이름으로 보내질 옷인데 기왕이면 신경 썼다는 칭찬이 듣고 싶었다. 하지만 친구와 만나서 노는 것도 포기할 수 없다.
“그럼 나머지는 내일 와서 마저 고르는 게 어떨까요?”
감시역인 시녀의 권유에 공주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가 없었다면 권유에 응하지 않았겠지만 만들어진 옷을 고르는 건 디자인화와 천을 보고 완성된 옷의 모습을 상상하며 구매하던 것보다 스트레스가 없어서 좋았다.
“내일은 어마마마랑 같이 올까나.”
조심성 없이 내뱉은 말에 그녀가 떠난 뒤 의상실은 거의 초토화가 되다시피 했다.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아 바이에르 남작 부인의 행운에 대한 소문이 온 수도에 퍼졌다.
곧 사람들은 디자이너를 집으로 부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장점이 프레사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차 모임이나 무도회는 초대장 없이는 갈 수 없다. 하지만 의상실은 다르다. 신분고하 없이 옷을 살 돈만 있다면 누구든 갈 수 있는 장소다. 평소에 말도 붙여보지 못했을 사람과 우연을 가장해 얼마든 만날 수 있다.
다음 날, 의상실에는 손님이 쏟아졌다. 놀랍게도 손님의 절반 이상은 남성이었다.
“어머니께서 장갑이 급히 필요하다고 해서 왔네.”
“오전에 하나 사 가시지 않으셨나요?”
“그건! 하나가 필요한 줄 알았는데 사실 두 개 정도 더 필요하다더군.”
왕국 최고의 신붓감인 공주와의 우연한 만남을 누구보다 갈망한 건 신세 고치고 싶은 남자들이었다.
덕분에 의상실에서 가장 많은 매출을 내는 제품은 장갑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 우스운 상황을 가브리엘은 결단코 놓치지 않았다.
“블랑코, 이 기사 좀 읽어 봐.”
최근에 산 ‘작은 새의 소식’지를 읽다 말고 스노우가 박장대소하더니 블랑코에게 내밀었다.
한참 두꺼운 손으로 바늘에 실을 끼우고 있던 블랑코는 벌컥 화를 냈다.
“지금 바쁜 거 안 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