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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191화 (191/212)

# 191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91화

“코르셋을 안 조여도 되나요?”

예상대로 옷을 갈아입히기 전 그레이스가 불안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그레이스, 이미 숨쉬기 힘들 정도로 조였잖아. 네가 입을 옷은 허리를 꽉 조일 필요 없어.”

“가브리엘, 네가 잘 입고 다니는 드레스랑 비슷한 스타일이니? 그건…… 그건 좀 내가 입기에는…….”

“알아, 지나치게 파격적이라는 거? 분명 너희 어머니는 나처럼 발랑 까진 애나 입고 다닐 드레스라고 말했겠지.”

남성복의 재킷을 연상시키는 가브리엘의 짧은 오버 드레스는 호불호가 갈렸다. 물론 가브리엘 나이 또래 아이들은 무척이나 멋지다고 좋아했으나 많은 부모는 지나치게 겉멋이 든 차림새라고 우려를 표했다.

어떤 사람은 가브리엘과 비슷한 차림새를 하는 순간 얌전한 딸이 당장에 가출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브리엘은 그 드레스를 입고 당당히 승마를 했고, 그 모습은 꽤 많은 동경을 사 그녀는 사교계 데뷔 전부터 인기인이었다.

하지만 그레이스에게 그런 대범한 차림은 무리이다.

“나는 그게 너랑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음, 부정하지 않는 걸 보아 역시 그렇게 말씀하셨군. 괜찮아. 그리고 내가 입는 옷과는 전혀 다르니까 걱정하지 마. 마담 베리는 절대 같은 옷을 권유하지 않거든. 그러니까 옷 입히게 팔 좀 들어 봐.”

설득됐는지 그레이스가 머뭇머뭇 팔을 들었다. 루비카는 이 고슴도치처럼 가시 많은 아가씨가 놀라지 않게 엘리제와 함께 조심조심 옷을 입혔다.

옷 자체는 사실 가브리엘 때처럼 그렇게 혁신적이진 않았다. 아, 그레이스의 목가적인 느낌을 살리기 위해 페티코트 없이 스커트의 풍성함만으로도 입을 수 있게 만들었으니 충분히 혁신적이려나.

짧게 말아 올린 머리 스타일과 깊게 파인 상의는 그레이스의 우아한 목을 돋보이기에 충분했다.

다만 깊게 파인 상의는 그레이스가 부담스러워할까 걱정스러웠다. 게다가 아직 그녀의 매력을 돋보이게 할 결정적인 뭔가가 부족하다.

지금도 제법 세련됐지만 루비카는 사람들이 그녀를 보자마자 감탄을 쏟아내기를 원했다.

“그레이스, 얘. 너 지금 정말 근사해졌어.”

루비카와 달리 가브리엘은 이미 그레이스가 놀랄 정도로 변신했다고 판단했다.

보수적인 그레이스의 평소 스타일에 비해 네크라인이 조금 파이긴 했으나 이 정도쯤은 다들 하고 다닌다. 문제 삼는 사람은 신전 사제 정도이려나?

만약 그레이스가 싫다고 해도 자신이 잘 설득하면 된다고 가브리엘은 조금 안일하게 생각했다.

“이제 바로 화장을 하면 되나요?”

가브리엘과 같은 의견이었는지 제니가 분통을 들었다. 언제든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는 표현이었다.

그러나 루비카는 대답하지 않고 그레이스를 다시 한번 찬찬히 살폈다. 역시 파인 상의가 걱정스러웠다.

긴 목을 돋보이기 위한 선택이었으나 그녀가 견딜 만한 노출이 아니었다. 싫다는 사람에게 이게 네게 가장 잘 어울리니 그래야 한다고 억지로 강요해서는 크리스토퍼와 다를 게 뭐가 있는가.

‘그래, 역시 그게 어울리겠어.’

재미삼아 얇은 목면으로 만든 피슈를 꺼냈다. 추운 날에 쓰기에는 부적절할 정도로 비침이 있는 얇은 천이었으나 이럴 때는 안성맞춤이다.

루비카는 피슈를 잘 접어 네크라인 주위에 둘렀다. 하얀 천은 가슴의 노출을 막을 뿐 아니라 그레이스의 예쁜 목선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뿐만 아니라 어깨 라인을 동그스름하게 만들어 그레이스 특유의 부드러운 분위기를 더욱 극대화했다. 그녀가 찾던 결정적인 한 방이 바로 피슈였다. 그 색다른 스타일링에 가브리엘이 바로 반응했다.

“그건 또 언제 생각하고 만든 거예요?”

어제 동선을 짜고 의논할 때까지만 해도 나오지 않았던 방식이다. 루비카는 그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레이스에게 어떤 옷이 어울릴지 몇 번이고 미리 상상했지만 역시 실재하는 사람을 앞에 둘 때 아이디어가 가장 잘 떠오른다.

그레이스가 있는 앞에서 루비카가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가브리엘은 질문을 멈출 수 없었다. 루비카가 본능적으로 아름다움을 쫓듯 가브리엘은 궁금증을 쫓았다.

“이것도 대량으로 만들 건가요?”

그 질문에 루비카는 고개를 저었다. 옷과 달리 삼각형의 피슈는 만드는 데 그리 큰 시간이 들지 않는다. 너무 똑같은 옷이 유행하는 것은 자칫하면 쉬 질릴 수 있다.

유행이 오래 가려면 자기만의 색다른 구석을 뽐낼 수 있는 지점이 필요하다. 루비카는 그 역할을 피슈에 부여하기로 했다.

“하긴 이 정도는 소일거리로 만들기에도 딱이네요. 목면 말고 레이스를 떠서 만드는 방법도 있고, 잘만 하면 무척 개성적이고 다양하게 나올 것 같아요.”

그저 고개만 저었을 뿐인데도 가브리엘은 루비카의 의도를 제대로 짚었다. 새삼 정말 똑똑한 아가씨다 싶었다.

“목면? 레이스? 대체 뭘 한 거야?”

결국 참지 못하고 그레이스도 질문했다. 아까부터 가브리엘이 마담 베리로 추정되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은데 자신을 앞을 볼 수 없으니 답답했다.

평소보다 시원한 옆머리도 신경 쓰였고, 가슴 부근에는 무슨 작업을 했는지 궁금해 몸이 달아올랐다. 혹 오래된 초상화에서나 봤던 촌스러운 레이스로 만든 러플로 꾸며 놓지나 않았는지 걱정스러웠다.

“흐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나중에 직접 보면 되니 조금만 참아요.”

“그래, 그레이스. 조금만 참아. 넌 이상한 데서 강단이 있다니까.”

티격태격하지만 사이좋은 모습에 루비카는 미소 지었다. 마지막으로 제니의 손길을 받은 그레이스가 어떻게 변신하는지 지켜보고 싶었다.

하지만 정체를 밝힐 수는 없는 법. 아쉬운 마음에 쉬이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루비카에게 제니가 자신 있게 말했다.

“걱정 마세요. 제가 꼭 멋지게 변신시킬 테니.”

피부에 맞는 화장품을 고르고 추천하는 제니의 실력은 루비카도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맞지 않는 화장품을 비싼 값을 감수하고 써야 하는 상황을 못 견뎌 일자리를 옮겨 다닌 것이 오히려 큰 경험이 되었다. 루비카는 믿음을 담아 제니의 손을 꼭 잡고 문을 닫았다.

“이제 내가 실력 발휘를 할 차례네요.”

이 일을 앞두고 루비카가 자신이 마담 베리라는 사실을 밝혔을 때 제니는 꽤 놀랐지만 한편으로 납득이 갔다.

나라를 위한 산업이나 수익 같은 어려운 말은 이해하기 힘들지만 신분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말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또 이미 그녀는 엘리제를 통해 두꺼운 껍질 속에 숨어 있는 아름다움을 ‘탕!’ 하고 깨트려 세상에 드러나게 하는 즐거움을 맛봤다.

이제 그레이스에게 자신이 얼마나 놀라운 바탕을 가졌는지 알려 줄 차례다.

“거울을 봐도 될까?”

눈을 가린 종이를 벗기자마자 그레이스는 거울부터 찾았다. 바뀐 헤어스타일부터 옷까지 궁금한 것투성이지만 제니는 거울을 주지 않았다.

“그레이스, 난 네가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성격인지 몰랐어.”

“조금만 참아요. 아직은 밑바탕 작업 중이에요. 화가들의 작업을 봤나요? 처음에는 어두운 밑색만 칠해요. 그때는 최종 결과물을 아무도 예측할 수 없어요. 지금 괜히 봤다간 내가 원하는 건 이런 게 아니었다고 우느라 제가 화장을 못할 수도 있어요.”

지금 당장 거울을 봐도 그레이스가 자신의 모습을 마음에 들어 할 거라 확신했지만 제니는 변신의 충격과 기쁨을 극대화하고 싶었다.

말썽꾸러기들을 어르고 달래는 건 공작가에 온 뒤로 그녀가 발휘하지 못한 특기 중 하나였다.

“그래.”

간신히 진정한 그레이스가 제니의 손길에 얼굴을 맡겼다. 엘리제와 가브리엘 이후로 사교계에는 발랄한 화장이 유행한다. 너도나도 엘리제처럼 붉은 연지를 발랐다.

하지만 제니는 그레이스에게 어울리는 건 우아한 화장이라고 판단했다.

그런 그녀의 생각과 달리 요즘 유행과 동 떨어지는 색만 선택하는 그녀 때문에 그레이스는 속이 타들어 갈 것 같았다. 당장에라도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가고 싶었다.

그럼에도 그레이스는 꾹 참았다.

‘엘리제에게 그런 붉은 입술과 화려한 옷이 어울릴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어. 또, 가브리엘에게 그런 옅은 화장이 어울릴 줄 아무도 몰랐잖아.’

벌써 두 명이나 놀랍도록 변신시킨 마담 베리다. 심지어 그레이스는 마담 베리가 산골 소녀였던 루비카를 변신시켜 클레이모어 공작과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다 믿었다.

“자, 다 됐어요.”

제니가 화장을 끝내자 엘리제가 전신 거울을 가리고 있던 천을 걷어 냈다. 곧이어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그레이스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와.”

여태 입었던 드레스들에 비하면 놀랄 정도로 소박했다. 페티코트도 입지 않았고 이래도 될까 싶을 정도로 코르셋을 조이지 않았다.

일자에 가까운 실루엣은 가브리엘이 입고 다니는 옷과는 다른 의미로 파격적이었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옷은 놀랍도록 그녀의 취향이었다.

“내가 원했던 게 이런 거였구나.”

동그란 얼굴을 드러내도 이렇게 우아하고 기품 있어 보일 줄 몰랐다. 매번 어떤 식으로 꾸며도 기품 있기는커녕 답답하고 집에서 할머니랑 뜨개질이나 할 것 같다는 차디찬 평을 들었다.

꿈꿨던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구현된 현실에 그레이스는 잠시 몸을 떨었다.

“울지 마.”

“안 울어.”

가브리엘은 한껏 놀릴 준비를 했지만 그레이스는 정말 강단 있었다. 감정을 딱 추스르고 야무지게 장갑을 찾아 손에 꼈다.

“자, 이제 뭘 하면 되지, 가브리엘?”

타티아나에게 미리 기사화가 될 거라는 언질을 받았다. 화젯거리가 되고 싶지 않으면 거절해도 된다고 말했지만 그레이스는 사실 한 번쯤 화제의 중심이 되고 싶었다. 그냥 되기 싫을 척했을 뿐이다.

“일단 공작 부인을 뵙고 나랑 같이 왕성에 그분의 심부름을 가면 돼.”

왕비가 그레이스를 칭찬하기로 약속했다. 소박하고 목가적인 게 세리토스 왕국이 추구하는 가치에 부합한다고 말하면 호사가들이 함부로 입 놀리기 어려워진다.

“그리고 여기저기 들르는 게 좋은데…….”

“친구들을 만나러 갈까?”

“아니, 목격자는 많을수록 좋아. 어때? 향수 가게 같은데 들리는 건?”

“가게 같은 델 가는 건…… 하녀나 하는 일이잖아.”

그레이스는 어떤 부분에서는 시원했지만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가브리엘은 언제 적 소리를 하냐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지금도 돈 많고 명예를 따지는 귀족들은 상인을 집으로 부르지 가게에 직접 가지 않는다.

“그거 알아? 갈색 머리의 걔가 향수 가게 옆 골목에 있는 빵집에 자주 나타난다는 거?”

하지만 젊은 친구들은 가게에 가는 걸 좋아했다. 물건을 사는 것보다 우연한 만남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설마…… 너.”

“응. 다 알아. 타티아나가 보기에는 그래도 엄청 무서운 애야. 비밀을 지키지 않으면 네가 누굴 좋아하는지 모두 알게 될걸.”

그레이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타티아나도 무섭지만 그레이스도 무섭다. 가브리엘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일단 네가 잘될 수 있게 도울게.”

사랑 앞에서 강해질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그녀는 결국 가브리엘의 유혹에 굴복했다.

“……가자, 향수 가게.”

“좋아. 일단 공작 부인께 네 모습을 보여 드리자!”

지금쯤이면 루비카가 숨어 있던 방의 반대 문을 통해 아래층에 내려가고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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