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90화
“그럼 그분은 어디 계신 거죠?”
그레이스의 질문에 제니가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지금 하고 있는 일은 꽤 위험하다.
처음에는 제니도 루비카를 말렸다. 공작 부인이 뭐가 아쉬워서 일개 의상실의 디자이너 행세를 하는가. 정적들이 알면 악어 떼처럼 루비카에게 달려들 것이다.
결국 루비카를 돕기로 결정했지만 제니는 과연 자신이 하는 일이 옳은지 확신할 수 없었다.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잖아.”
가브리엘이 투덜거렸다. 과연 그레이스를 믿어도 될까? 입이 무거운 편이지만 주변의 주목을 받으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가끔 가브리엘도 루비카가 자신에게 해 준 조언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타티아나와 작은 새의 소식지를 운영하지 않았으면 진작에 마담 베리의 정체에 대해서 떠들고 다녔을 거다.
“안 되겠다. 화장은 나중에 하고 눈부터 가리자.”
“눈을 가릴 거라고?”
겁에 질린 눈으로 그레이스가 소리쳤다. 약속한 대로 어디에 누굴 만나러 가는지 유모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혹 무슨 일이 생기면 자신이 공작가에 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 갈래.”
“그레이스!”
가브리엘이 황급히 그레이스의 팔을 잡았다. 어설프게 그레이스를 보냈다간 공작가가 온갖 추문에 시달릴 수 있다. 거기에 타티아나까지 휘말리게 된다면…… 끔찍하다.
“날 봐. 몇 개월 전의 나랑 지금 내가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
그레이스가 고개를 저었다. 변신한 가브리엘을 보았을 때 누구보다 놀란 게 그녀였다. 이상한 화장 아래에 숨겨져 있던 가브리엘의 얼굴이 그토록 예쁠지는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가브리엘을 보고 화장이 꼭 사람을 아름답게 만들어 주지만은 않는다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를 따라 옅은 화장을 할 자신도 생기지 않았다.
“어, 참. 그럼…… 널 변신시킨 것도 마담 베리인 거야?”
그럼 누구겠냐는 듯 가브리엘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이스는 새삼 경이로운 눈으로 가브리엘을 살펴보았다.
가브리엘이 마담 베리가 몰래 운영하는 비밀 의상실에 다녀온 후 변했다는 소문을 듣긴 했지만 반신반의했다. 그녀가 아는 가브리엘이라면 소문이 돌기 전에 두발 벗고 나서서 떠들어 댈 사람이었으니까.
“그럼, 음. 마담 베리가 공작 부인을 예쁘게 만들어 줬다는 것도 사실이야?”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가브리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작 부인이 카나 의상실을 후원하는 것도 마담 베리 때문이라고 들었어. 마담 베리 덕에 공작 각하가 자신에게 반하게 만들었다는데?”
“그, 음. 매우 색다른 의견이구나.”
가브리엘은 그레이스의 시선을 피해 발끈한 표정으로 한마디하려는 엘리제를 저지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
마담 베리가 바로 공작 부인 본인이니 영 잘못된 말도 아니다. 가브리엘의 임기웅변이 통했는지 그레이스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아, 그래서 여기로 날 부른 거구나. 마담 베리의 후원자가 공작 부인이니까…….”
가브리엘은 그레이스의 오해가 영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마담 베리의 후원자가 공작 부인이라고 알려지면 오히려 공작 부인이 마담 베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줄어든다.
카나 의상실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루비카가 마담 베리를 후원하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또 이렇게 그레이스를 클레이모어 공작가에서 만나는 것도 말이 된다.
“그러니까 이제 좀 믿고 눈 감아.”
“싫어.”
하지만 묘한 데서 그레이스는 고집이 있었다. 하긴 이 험한 세상에 경계를 늦추지 않는 건 바람직한 자세이니 탓할 이유가 없다.
특히 귀족 소녀란 위험에 노출되기는 쉬운데 치사할 정도로 명예도 따졌다. 공작가가 아니라 카나 의상실로 불렀으면 그레이스는 아예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네가 눈 감고 있는 동안 내가 계속 손잡고 있을게.”
결국 가브리엘이 타협안을 제시했다. 다 큰 여자끼리 손을 잡고 있자니 소름 돋았지만 그레이스는 납득했는지 눈을 감았다. 제니는 까다로운 아가씨의 눈에 종이를 붙여 가리고 루비카가 숨어 있던 방문을 열었다.
“들어오세요.”
눈을 꼭 감은 상태에서 가브리엘의 손을 꼭 잡은 그레이스를 보고 루비카는 짧게 ‘어머나.’라고 감탄사를 내질렀다. 물론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진 않았다. 그녀의 정체는 철저히 비밀로 부쳐져야 했다.
‘이 아이도 크리스토퍼 같은 놈이 다 망쳐 놓았네.’
가브리엘처럼 짙은 화장을 하진 않았지만 만만치 않게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허리를 꽉 조르고 있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최신 유행으로 꾸며져 있지만 그중에 그레이스와 정말 어울리는 건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루비카는 일단 그레이스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긴 머리를 빗어 뒤로 넘겼다. 동그스름한 얼굴이 콤플렉스였던 그레이스는 루비카의 행동에 기겁해 외쳤다.
“안 돼요!”
“왜?”
다행히 가브리엘의 대꾸가 루비카보다 빨랐다.
“그, 나, 나는 볼에 살도 많고, 그래서…….”
“머리카락으로 가린 것보다 이게 더 밝아 보여서 좋은데? 얼굴에 살이 많으니 가리라니 누가 그런 소리를 했어?”
“크리스토퍼가…….”
“분명 너한테 머리 영양제나 머리 인두를 더 팔아먹으려고 부린 수작일 거야.”
가브리엘의 단호한 대답에도 납득하지 못했는지 그레이스의 입가가 물결쳤다. 보다 못한 엘리제가 용기를 내어 그레이스의 남은 한쪽 손을 잡았다.
“나도…… 마담 베리가 바꿔 줬어.”
솔라나 자작 영애와 친하지는 않지만 결코 모른다고 할 수 없다. 벽에 피는 꽃은 사교계의 미인과는 다른 의미로 유명했다. 다들 자신도 그리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분을 만나기 전까지는 짧은 앞머리가 내게 어울린다는 사실을 결코 알지 못했을 거야. 그레이스, 그분을 믿고 잠시 참아 줄 수 있겠니?”
호소력 있는 목소리였다. 가브리엘은 원하는 바를 성취하기 위해서라면 가벼운 거짓말 정도는 할 수 있지만 엘리제는 달랐다. 절대 거짓말은 안 하는 진중한 사람이다. 그레이스는 겨우 진정했다.
루비카는 여전히 두려움과 맞서 싸우며 눈을 꼭 감고 있는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낯선 곳에 누가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 눈을 감고 있는 건 보통 용기가 아니다. 무엇이 그녀를 그리 만들었는지 생각하면 어쩐지 서글퍼졌다.
‘……꼭 예쁘게 해 줄게.’
하지만 거기까지 생각하는 건 그녀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그레이스 안에 숨어있는 매력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그레이스가 자신감을 가지고 행복해질 수만 있으면 족하다. 세상 그 어떤 것도 자신을 긍정할 때 나오는 에너지만큼 아름답지 못하다.
루비카는 최근 유행하는 스타일대로 심할 정도로 롤을 말아 볼을 가린 머리카락을 걷어 냈다.
그레이스의 말대로 그녀의 볼은 보름달처럼 동그랬지만 그러면 또 어떠랴.
이런 얼굴형은 괜히 머리카락으로 가리면 답답해 보이기만 할 뿐이다. 게다가 모처럼 긴 목이 드러나지 않아 아쉽다.
이렇게 근사한 목을 가졌으면서 통통한 볼 때문에 장점을 살리지 못하는 건 슬픈 일이다.
루비카는 과감하게 목을 드러내는 헤어스타일을 선택했다.
“와, 그 옷은 내가 다 탐이 나네요.”
그다음에 가져온 푸른 드레스에 가브리엘이 시샘 어린 눈길을 보냈다. 루비카는 대꾸 대신에 싱긋 웃었다.
이 드레스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비슷한 느낌이 나는 옷을 잔뜩 만들어 뒀다.
설마 했는데 에드가의 실력은 진짜였다. 눈부시게 빠른 속도로 바느질을 해 대는 기계에 카나가 기겁해 외쳤다.
-이것만 있으면 하루 만에 드레스를 완성할 수 있을 거예요.
-아직은 섬세한 작업은 사람 손을 거치는 게 나아. 일자로 박는 것만 할 수 있고, 구슬이나 단추를 다는 건 못해.
-그래도…… 그래도 이건 혁명이에요! 시간이 말도 안 되게 단축될 거라고요.
옷을 만드는 데 가장 많은 비용이 드는 것은 역시 인건비였다. 치마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품이 드는가.
하지만 그리 시간을 단축해서 만든 옷이 귀족의 눈을 살 길은 없다. 그들이 원하는 건 최대한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 만든 남과 다른 드레스니까.
루비카는 귀족이 아닌 형편이 좋은 평민을 대상으로 한 옷을 만들어 팔고 싶었다. 싼 가격에 옷을 팔려면 최대한 똑같은 옷을 많이 만들어야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과연 똑같은 옷을 많은 사람들이 사려 할까? 이 대목에서 루비카는 막혔다. 남들과 똑같은 옷을 입고 싶어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다들 자신이 조금이라도 특별한 존재가 되길 바라기 마련이다.
고민을 안고 참가한 차 모임에서 루비카는 해답을 찾았다. 디테일은 조금씩 달랐으나 다들 리본 드레스를 입고 왔다.
심지어 샬롯 공주마저 요즘 리본 드레스를 입는다는 소문을 들었다. 가브리엘의 칼럼 덕에 리본 드레스는 유행에 박차를 더했다.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지만 남들과 지나치게 달라지는 건 또 두려운 게 인간의 마음이었다.
‘그래, 유행을 만들자.’
루비카는 발상을 완전히 전환하기로 했다. ‘작은 새의 소식’지를 사는 사람이 귀족으로 한정되었다면 그 잡지는 그렇게까지 높은 판매고를 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수도 사교계의 소식은 모두의 관심사였다. 변두리 귀족은 물론 평민들마저도 잡지를 샀다.
어떤 신문은 나라 일보다 가십에 신경 쓰는 자가 많다고 소식지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루비카는 이 엄청난 힘을 이용하기로 했다. 일단 그레이스를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게 변신시키면 가브리엘이 칼럼을 쓴다.
큰돈을 벌 기회니 가브리엘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 할 수 있는 한 모든 표현을 동원해 그레이스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그녀가 입은 옷은 바느질 땀 수까지 세밀히 묘사하겠다고 장담했다.
그런 식으로 기사화를 하면 사교계의 호사가들은 분명 확인을 하려 들 것이다. 물론 그레이스가 정말 예뻐졌다는 평을 들을 자신은 있다. 분위기에 휩쓸려 청혼을 해 대는 얼간이가 나타나면 더욱 좋다.
그리고 난 다음에 잡지는 이 소동에 대해서 소개할 것이고 그레이스와 입었던 드레스와 똑같은 옷을 입고 싶으면 마담 베리의 의상실에 찾아가라고 지도까지 첨부해 기사화할 것이다.
물론 수도 한복판과 이베르의 권역 입구에 마련한 의상실에 찾아가도 그녀는 만날 수 없다.
대신 천의 질이나 디테일은 좀 떨어져도 그레이스가 입은 것과 똑같은 드레스가 잔뜩 쌓여 있는 광경을 목도할 것이다.
거기에 가격은 보통 귀족 영애가 입는 드레스의 십분의 일도 되지 않는다. 사지 않고도 못 배길 것이다.
즉, 그레이스는 걸어 다니는 광고판이 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