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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189화 (189/212)

# 189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89화

자신에게도 그의 피가 절반은 흐르고 있었다. 클레이모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평이 ‘이기적’이었다.

그도 어린 시절부터 이기적이고 차갑다는 평을 얼마나 많이 들어왔던가. 혹 자신도 어머니의 사랑만 취하고 그녀를 배신한 아버지처럼 되는 건 아닐까?

심지어 그의 선조는 정확한 사연은 알 수 없으나 세리토스 왕국에 영광을 가져다준 마석을 취할 수 있게 해 준 이베르를 잠에서 깨지 못하게 만들었다. 지금은 괜찮다만 자신도 아버지처럼 그녀를…….

“에드가.”

혼란스러워하는 그의 뺨을 그녀가 쓰다듬었다. 언제나 깊은 바다처럼 푸르고 잔잔해 보였던 눈동자에 폭풍우가 휘몰아쳤다.

구태여 말로 하지 않아도 그가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지 전해져 왔다. 그녀는 자신이 다친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당신은 그 사람이 아니야.”

태산 같은 그가 모래처럼 부서지려 한다. 그녀는 잠긴 목소리로 겨우 그리 속삭일 수 있었다. 비록 목소리는 떨렸지만 눈동자는 그가 꽉 잡을 수 있을 정도로 흔들림이 없었다.

“하지만…….”

“내 아버지와 삼촌은 같은 핏줄을 타고 났지만 전혀 달라. 그 사람이 당신의 아버지라고 해서 당신이 그와 똑같아질 리 없어. 약속해. 당신은 달라.”

“어떻게 확신하지?”

“왜냐면 지금도 당신은 내게 배신당할까 두려워하지 않고, 당신이 아버지처럼 변할까 두려워하고 있잖아.”

“그래, 무서워. 내가 변할까 두려워.”

“세상에 뭐든 영원한 건 없어. 그러니까 노력하는 게 중요한 거야. 노력하는 이상 당신은 그 사람처럼 되지 않을 거야.”

단호한 그녀의 말에 에드가도 차차 안정을 찾았다. 방금까지 먹구름처럼 그의 심장을 엄습했던 불안과 두려움이 서서히 걷혔다. 그녀와 함께라면 평생 괜찮은 사람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이래서는 이베르의 권속과 이야기를 나누는 건 불가능에 가깝겠군.”

그저 몇 년 동안 깊어진 감정의 골이 아니다. 자그마치 몇백 년이다. 에드가는 상황을 희망적으로 보지 않기로 했다. 미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그렇지요.”

“뭔가 알아냈구나, 미노스.”

그러나 루비카는 에드가와 달랐다. 그녀는 어떤 순간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왔다. 이보다 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살아남지 않았던가.

비참한 환경 곳곳에서 비인간적인 일이 자행되었기에 선행은 더욱 빛났다. 기적은 먼 곳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매일 깨달았던 나날이었다.

“알아냈다고 해야 할까요?”

미노스가 바지 주머니에서 꾸깃꾸깃 접힌 종이를 꺼내 루비카에게 내밀었다.

미노스의 말을 척하면 척 알아들은 에드가가 아니라 왜 자신에게 이걸 내민 걸까? 의아한 마음을 감추고 루비카는 종이를 활짝 펼쳐 보았다.

“이건…….”

놀랍게도 종이는 가브리엘이 발행하는 ‘작은 새의 소식’지의 한 귀퉁이였다.

“드래곤은 아름다운 것에 사족을 못 쓰는 족속들이지요. 권속들도 편차가 있긴 하지만 제 주인을 닮아 대체로 비슷합니다.”

그리고 루비카가 아름다운 것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의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미노스는 이미 알고 있다.

세사르가 개발하고자 한 장미를 알아본 안목과 이오스의 마음을 빼앗은 장미까지. 미노스는 루비카가 이 일의 해법은 찾아내리라 믿었다.

“이오스 님은 특히 식물을 각별히 사랑합니다. 이베르 님은 잠든 지 워낙 오래된 데다 이오스 님처럼 감정을 드러내는 분이 아니라 단서를 찾기가 힘들었지요. 그러다 발견한 겁니다.”

“옷과 관련된 내용이네.”

“네, 그리고 그들이 왜 굳이 자칼 은행을 이용하는지 한번 주목해 봤지요.”

인간의 돈을 취급하는 은행을 이용하는 이유는 인간의 돈을 쓰기 위함일 수밖에 없다.

강탈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이베르의 권속들은 유순하고 도덕적인 편이었다. 물론 세리토스 왕국에는 흉악한 존재로 알려졌지만 그들의 입장에서는 주인의 권역에 침입한 무뢰배들에게 그에 따른 합당한 대응을 했을 뿐이다.

“의상실은 따로 이용하지 않지만 천을 제법 사는 것 같더군요.”

“설마 예쁜 드레스 같은 걸…… 좋아하는 건가?”

간간히 보고받거나 사체로 마주했던 이베르의 권속들이 입고 다녔던 옷을 떠올리며 에드가는 충격에 빠졌다. 완전 넝마에 가까운 옷이었다.

돌이켜보니 천이 조금 좋은 재질이긴 했으나 예쁜 옷을 좋아할 거라니,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네, 그저 솜씨가 없었을 뿐.”

말을 꺼내 놓고도 민망한지 미노스는 볼을 긁적였다. 그도 스노우의 방 안에 몰래 숨겨진 잡지와 팸플릿을 발견했을 때 설마 싶었다. 곧이어 바늘과 실을 찾았을 때의 기분이란…….

한편으로 그들의 옷이 왜 그 모양인지 이해는 갔다. 손이 크고 두꺼워 도저히 깔끔하게 만들 수 없었겠지. 그런데 참고했던 건 인간 귀족들이나 입을 법한 화려한 드레스니 결과물이 엉망일 수밖에 없다.

“그럼, 옷으로 그들을 유인해야 하는 건가?”

“네. 현재로서 그 방법이 최선일 것 같습니다. 드래곤은 예쁜 것 앞에서는 원수도 쉽게 용서하는 성향이 있거든요.”

미노스는 못 말린다는 투로 말했으나 루비카는 드래곤의 심정을 조금 알 것 같았다. 솔직히 그녀 자신도 아름다운 사람 앞에서는 조금, 아니 많이 관대해지는 측면이 있었다. 잠시 자신이 사실 드래곤과 관련된 존재가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녀는 미노스가 어렵사리 구해 온 종이를 찬찬히 읽었다. 하필이면 그녀가 어떻게 하면 스토마커를 새롭게 재탄생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 쓴 부분이었다.

“미노스, 왜 그들은 의상실을 이용하지 않고 천만 사는 거지?”

“이베르 님이 잠에 든 관계로 변신을 오래 유지하기 힘들어서 그렇습니다.”

잠깐 살펴본 뒤 재빨리 천만 사고 나올 수 있는 포목점과 의상실은 달랐다.

일단 옷을 만드는 데는 품이 많이 든다. 특히 드레스의 경우는 실력 좋은 사람이 여러 명 달려들어도 일주일에 한 벌 만들까 말까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옷을 쌓아 두고 파는 의상실은 없다. 대부분 샘플이 될 만한 드레스를 보여 주고 손님의 치수를 꼼꼼히 잰 다음에 만든다. 거기에 사용되는 천이나 장식을 바꾸는 상담까지 하면 시간이 많이 들 수밖에 없다.

미노스는 생각에 빠진 루비카를 흥미로운 눈초리로 바라봤다.

“미노스, 자칼 은행 앞으로 비밀 계좌를 만들어 줄 수 있을까?”

“비밀 계좌요?”

뜻밖의 말에 미노스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래, 이왕이면 내 이름을 숨기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이름을 숨기는 건 나쁘지 않군요. 클레이모어라고 하면 아예 접근조차 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포목점을 열 생각입니까? 요즘 고블린과 인간 사이도 좋아지고 있으니 저희가 점원으로 나서도 괜찮겠군요.”

“포목점이 아니야.”

“그럼?”

“의상실을 열 거야.”

고블린이 운영하는 의상실을 만들겠다는 건가? 하지만 고블린도 절대 미의식이 좋다고 할 수 없는데……

무엇보다 인간으로 따지면 어린애 수준의 키라 치수 재는 것부터 문제가 많다.

설마 이베르의 권속을 상대하는 전문 의상실을 열려는 걸까? 물론 이것도 불가능하다.

보통 의상실은 디자이너가 직접 고객의 집에 방문하는 걸 선호한다. 이베르의 권역에 가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인간 디자이너는 도망치고 말 것이다.

“마담 카나의 담력이 높은 편인가요?”

“담력?”

뒤늦게 미노스의 말을 이해한 루비카가 배를 잡고 웃었다. 의도한 바와 다른 반응에 미노스는 그저 어리둥절했다.

“미노스, 지금도 바쁜 카나를 어떻게 거기에 보낼 수 있겠어. 그리고 카나는 음…… 아이들을 책임져야 할 사람이야. 절대 위험한 곳에 보내지 않을 거야.”

“그럼 다른 담력이 좋은 디자이너가 있나요?”

“난 변신을 오래 유지하지 않아도 이용할 수 있는 의상실을 만들 거야.”

“으음, 이해하기 힘들군요.”

“간단해. 이베르의 권역 근처에 의상실을 낼 거고, 변신한 그들은 이미 만들어진 옷을 살 거야.”

“이미 만들어진 옷을…… 요? 그게 가능합니까?”

이미 만든 옷을 쌓아 두고 팔다니 미노스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가능해. 그렇지, 에드가?”

루비카가 웃으며 에드가를 바라봤다. 에드가는 이오스의 땅콩 부스러기로 얼룩진 설계도를 내려다보며 치웠던 펜을 꺼냈다.

“불가능해도 가능하게 만들어야지.”

마침 그 일과 관련된 기계를 설계하던 중이었다. 얼마 전 바느질을 대신해 주는 재봉 기계의 설계를 끝냈다. 루비카는 그 기계를 이용해 무기 산업을 대체할 만한 수익을 내겠다고 했지만 사실 그는 반신반의했다.

지금은 전혀 다른 종류의 동기가 그에게 부여되었다. 우연과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라고 하지 않던가. 신비할 정도로 맞아 떨어지는 상황이 그에게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 * *

그레이스는 가브리엘의 장담대로 약속한 시각에 클레이모어 공작가의 수도 저택에 나타났다.

그녀는 검은 청동으로 만들어진 무겁고 두꺼운 공작가의 후문 앞에서 한참 망설였다.

고작해야 자작 영애밖에 되지 않는 자신을 정말 공작 부인이 만나 줄까? 타티아나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거면 어쩌지? 걱정과 불안 때문에 숨을 쉬기 힘들 정도였다.

‘이대로 돌아갈까?’

하지만 이게 어떻게 잡은 기회인가. 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누군가가 자신을 근사하게 바꿔 주는 꿈을 꾸었다. 그런 꿈을 꾸는 건 그녀뿐만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런 꿈을 꾸는지는 굳이 말로 옮기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하지만 막상 꿈을 잡을 기회가 오면 이상하게 사람은 망설이게 된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 여기기에 더 그런 걸지도 모른다.

‘……그래, 타티아나는 사람을 골탕 먹이고 그런 사람이 아냐.’

그레이스에 대한 접근을 타티아나가 맡은 건 정말 탁월한 판단이었다. 만약 가브리엘이었으면 그레이스는 처음부터 그녀가 장난을 친다고 생각하고 무시했으리라.

“약속을 지켜 주세요.”

미리 들은 암호를 대자 후문이 열렸다. 금발에 푸른 눈의 익숙한 얼굴이 나타나자 그레이스는 반가워 소리쳤다.

“엘리제!”

믿음을 더해 주는 데 손색없는 진지하기 짝이 없는 친구다. 하지만 엘리제의 뒤로 보인 정열적인 붉은 머리칼에 그녀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가브리엘.”

부풀었던 믿음을 박살 내기에 딱 알맞은 친구. 하지만 도망칠 새도 없이 가브리엘이 그녀의 팔을 재빨리 잡아 안으로 끌었다.

“꾸물거릴 시간 없어.”

그리고 그녀의 등을 좁고 작은 통로로 밀어 넣었다. 그레이스는 영문도 모르고 그들을 따라갔다.

하녀도 모르는 그 통로는 공작 부인의 방과 연결되어 있었다. 물론 그레이스는 자신이 도착한 곳이 공작 부인의 방이라는 사실도 몰랐다.

“마담 베리를 만나게 해 준다고 해서 왔는데?”

“응, 지켜보고 계셔.”

가브리엘이 짧게 대꾸하는 순간, 제니가 들어왔다. 이미 제니는 루비카의 도움을 받아 먼발치에서나마 그레이스를 확인하고 그녀에게 무엇이 어울릴 만한지 파악을 다 끝냈다.

제니는 미리 준비한 화장품을 꺼내 그녀의 얼굴에 바르기 시작했다.

“설마 당신이 마담 베리?”

그레이스의 질문에 제니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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