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188화 (188/212)

# 188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88화

“바로 들어오라고 해.”

누구보다 기다렸던 고블린이다. 에드가는 급히 책상 위의 펜과 서류를 치웠다.

하녀를 부를 수 없는지라 루비카는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소파를 정리했다. 오직 미노스만 느긋이 땅콩을 집어 삼켰다.

“그동안 평안하셨는지요?”

말썽쟁이 드래곤 때문에 평안하지 못했다고 대꾸하려던 에드가는 미노스의 몰골을 보고 참았다. 어찌나 고생을 했는지 얼굴의 주름이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소파에 앉자마자 칼이 차를 내왔는데 찻잔을 들 힘도 남아 있지 않은 듯 손을 덜덜 떨었다. 보다 못한 루비카가 일단 스프를 내오라고 칼에게 말할 정도였다.

“그래, 뭔가 알아왔나?”

에드가는 미노스가 스프를 다 먹길 기다린 다음 질문했다. 미노스는 이마의 땀을 닦고 한참 뜸을 들였다.

혹시 방법을 찾아내지 못한 걸까?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아, 그러고 보니 물 줄 시간이 다 됐네.”

무거운 이야기를 싫어하는 이오스가 갑자기 일어서니 창문으로 나가 버렸다. 루비카는 이오스가 떠나자 미노스가 어쩐지 안도하는 게 걸렸다. 운을 떼려는데 미노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각하의 저주를 풀 단서를 찾기 위해 이베르 님의 권속을 만났지만 ‘클레이모어’라는 이름을 꺼내자마자 문전 박대를 당해 버렸지요.”

“그건 이오스에게 들었네.”

이베르의 권역에서 돌아온 뒤 거의 일주일 가까이 이오스는 루비카에게 자신이 얼마나 부당한 대우를 당했는지 하소연했다. 에드가는 이제 이오스의 하소연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울 지경에 다다랐다.

말하지 않아도 그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는 듯 미노스는 빙그레 웃었다.

“하여튼 이대로 접근하면 안 되겠다 싶어 일단 왜 그렇게 ‘클레이모어’를 질색하는지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이유는…… 알 것 같군.”

에드가는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이야기의 서두도 꺼내기 전이었다.

“짐작 가는 바가 있습니까?

“마영석.”

미노스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똑똑하긴 똑똑하다.

“올해는 아니지만 작년까지 그걸 가져오기 위해 매번 많은 모험단을 보냈어. 우리 측 사람도 꽤 죽었지만 그쪽 권속들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을 거야.”

“그럼 왜 이베르의 권속들이 마영석을 지키고자 했는지 짐작하십니까?”

“글쎄.”

단 한 번도 그 이유를 궁금해했던 적이 없다. 그저 배타적인 드래곤의 권속답게 자신들의 권역을 지키려한다고 짐작했을 뿐이다.

에드가는 잠시 머리를 굴려 그가 아는 왕국과 공작가의 역사를 떠올려 봤지만 어디에도 단서는 없었다.

그럴 만도 하다. 미노스도 술에 취한 스노우가 진실을 털어놓기 전까지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미노스는 잠시 차로 목을 축인 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드래곤이 잠에서 깨기 위해서는 ‘마영석’이 필요합니다.”

“뭐라고?”

“그것도 엄청 많이요.”

왜 이베르의 권속이 클레이모어라며 치를 떠는지, 마영석을 캐 가려는 모험가에게 그토록 공격적으로 굴었는지 알겠다. 긴 설명이 필요 없었다.

“그래서 그 드래곤이 잠에서 깨지 않고 있는 거군. 정확히는 못 깨는 건가.”

“네, 세리토스 왕국을 건국하기 전 기간까지 포함하면 거의 오백 년 가까이 되지요.”

“그런…….”

루비카는 말문이 막혀 그저 빈 찻잔만 바라봤다. 잔을 채울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베르의 눈물로 만들어진 반지가 그들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낙담이 그녀를 채웠다. 그가 걷지 못하는 건 상관없다. 밤에만 걸을 수 있든 낮에만 걸을 수 있든, 아니 낮밤 상관없이 걸을 수 없어도 그건 그녀의 사랑에 걸림돌도 되지 않는다.

문제는 이대로라면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이런 부인, 가장 힘을 내셔야 할 분이 벌써 실망하면 안 되지요.”

루비카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잔뜩 지쳐 주름이 지긴 했으나 미노스의 얼굴이 영 어두운 것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기 전 미노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속단도 하지 마세요.”

“미노스, 그냥 솔직하게 다 이야기해 줘.”

“제가 애타는 사람을 상대로 너무 뜸을 들였군요. 사실 그동안 제 나름대로 추운 북쪽에서 밥도 제대로 못 먹고 고생하며 알아낸 정보다 보니…….”

보다 못한 에드가가 끼어 들었다.

“들어간 경비는 부르는 대로 값을 치르지. 아, 앞으로 차 무역과 관련된 투자금이나 수익은 모두 자칼 은행과 거래하도록 하지. 그 이외에 필요한 게 있나?”

“각하, 제가 이렇게 몸을 불살라 알아온 것은 오직 두 분에 대한 우정 때문입니다.”

말은 그리했지만 미노스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두 손을 비볐다. 벌써 얼굴 주름이 한 다섯 개는 사라진 것 같았다. 그는 어쨌든 황금을 보면 정신을 못 차리는 고블린이다.

“알고 있네. 나도 우정이네.”

“하하하, 음.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요. 어쨌든 이베르 님은 클레이모어와 인연이 깊은 드래곤입니다. 아니, 세리토스 왕국 전체가 그녀와 관련되어 있다고 해야 할까요?”

저주나 반지가 아니라 왜 왕국에 대한 이야기부터 꺼내는 걸까? 이야기가 길어질 낌새를 느낀 루비카는 차를 새로 우렸다. 이번에는 갈색의 홍차와 달리 맑은 수색을 띤 녹차였다.

“왕국 전체가 관련되었다니?”

“각하, 마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아십니까?”

에드가는 고개를 저었다. 수많은 과학자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몇 번이나 도전했으나 안타깝게도 마석이 어떻게 생성되는지 아직 밝혀진 바가 없었다. 심지어 마석의 성분조차 아직 완벽히 분석하지 못했다.

“드래곤이 긴 잠을 자면 주변을 둘러싼 암석이 드래곤의 기운을 받아 변화합니다. 그게 마석입니다. 드래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물질인 거지요.”

미노스의 설명에 루비카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세리스 산맥에서 나던 마석은 지금 고갈될 위기라고 들었는데…… 그럼, 마영석이 문제가 아니라 이베르가 자체가 위험한 상태인 거 아니야?”

“아닙니다. 세리스 산맥 서쪽에서 난 것은 이베르와 상관없습니다. 일단 세리토스 왕국은 이베르의 권역 바깥입니다.”

“그럼 그동안 왕국에서 캔 마석은……?”

“다른 드래곤의 것이었나 보군.”

질문에 답한 건 미노스가 아니라 에드가였다.

“그리고 우리 왕국이 드래곤의 권역 내가 아닌 걸 보아 그 드래곤은 이미 죽었겠군.”

미노스는 이오스와 이야기할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을 느꼈다. 그 바보는 열을 말해도 하나만 알아 들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 하나를 말하면 열을 집어낸다.

미노스는 자신도 모르게 활짝 웃었다. 왜 공작이 아무리 오만하고 재수 없게 굴어도 주변에 사람이 끊이지 않는지 알 것 같았다. 바보와의 대화에 지친 자에게 그는 단비였다.

“네, 오백 년 전 이베르는 막 잠에서 깬 자신의 동족 세리스를 죽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상처를 입는 바람에 회복하기 위해 잠에 빠져들었지요.”

“그럼…….”

그는 혼란스러워하는 루비카를 모른 채하고 테이블 모서리를 톡톡 쳤다.

“역대 클레이모어가 마영석을 수집한 궁극적인 목적은 무기 테스트가 아니었군. 이베르를 잠에서 깨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였어.”

“아마도, 네.”

“이런 빌어먹을…….”

그의 입에서 주어 없는 욕설이 튀어나왔다. 그녀를 앞에 두고 심한 말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자제하기 어려웠다. 욕설의 대상은 복합적이었다. 자신, 세상, 이 상황.

“그럼 어디 기록이라도 해 놓던가.”

제일 골 때리는 건 이 중요한 사실을 후손에게 전하지 않은 초대 클레이모어다. 만날 수 있다면 한 달은 자리에서 못 일어나게 흠씬 패 주고 싶었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디에도 기록하지 않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래, 그리고 고리타분한 클레이모어는 아무 의심 없이 마영석을 왕국력 473년이 되도록 수집했고. 아, 촌락 시절까지 합치면 오백 년은 거뜬히 넘어서겠군.”

“……그런데.”

따라잡기 힘든 추리의 바다에 외딴 섬처럼 동동 떠 있던 루비카가 조심스레 운을 뗐다. 그녀는 아까부터 쭉 궁금했는데 미노스와 에드가가 이를 화제로 삼지 않는 게 신기했다.

“이베르는 대체 왜 세리스를 죽인 거야?”

“거기까지는 저도 못 알아냈습니다.”

클레이모어 가문은 대체 왜 이베르가 잠에서 깨는 걸 방해했는지까지 물어보려다 루비카는 슬그머니 입을 닫았다.

“이래서는 이베르가 잠에서 깨자마자 하는 일이 클레이모어 몰살하기가 되겠군.”

자조적인 웃음이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왜 그의 삶에는 이처럼 기구한 일만 일어나는가.

간신히 그에게 온전한 믿음과 행복을 선사하는 여인을 만났건만 모든 것이 불안정하다.

이대로 포기하자니 루비카가 걸렸다. 만약 저주를 풀지 못해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진다면 그녀는 어찌 되는 걸까? 걱정스러워 눈이라도 감을 수 있을까?

“각하의 어머니는 너무 긴 시간 동안 잠에서 깨지 않는 이베르가 걱정되어 몰래 온 님프였다고 스노우가 그러더군요.”

그 사실에 도달하기까지 미노스는 얼마나 많은 술을 스노우에게 먹였던가. 미노스는 굳이 술값을 떠올리지 않았다. 어차피 그건 공작이 다 계산해 줄 테니까.

“아버지를 만난 건 마영석을 채집하지 말라고 설득하기 위해서였군.”

“아마도요.”

그리고 미노스는 그렇게 만난 두 사람이 사랑에 빠져 결혼하게 된 것 같다고 덧붙이려다 황급히 멈췄다.

에드가의 눈이 섬뜩할 정도로 이글거렸다. 푸른 불꽃이 이 저택은 물론이오, 대지도 다 녹여 버릴 것만 같았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님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

“에드가.”

루비카는 그가 걱정되어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로 달려갔다. 미노스는 지금 에드가의 모습에 두려움을 느꼈지만 루비카에게 그는 지독한 상처를 입은 가엾은 영혼에 불과했다.

그녀는 지체 없이 그를 끌어안았다. 깊은 슬픔과 분노가 피부를 타고 전해졌다.

“어머니도 마영석을 채굴하지 말라고 빌었겠지. 그때 당신처럼. 그리고 아버지는, 그 빌어먹을 자식은…….”

“에드가.”

“사랑의 증표라며 그녀의 모습을 그대로 본 딴 마영석상을 선물했지.”

그건 이베르가 어찌 되든 우리와 상관없으니 입 다물라는 일종의 시위다. 갑작스레 나타난 미지의 왕국에서 온 왕녀로 알려진 부인 때문에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워질지도 모르는 모험은 하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

지독히도 이기적인 사랑이다. 아니, 그놈이 어머니를 사랑하긴 한 걸까?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따져 묻고 싶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어머니에게 그런 쓰레기 따위 버리고 도망치라고 말하고 싶다.

아니, 도망이라니. 이 또한 무척 인간중심적인 발상이다. 고귀한 님프에게는 그런 쓰레기 따위 진작에 죽여 버리고 클레이모어 공작가를 멸망시켜 달라고 부탁하는 게 합당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으려 드는 놈을 보며 어머니는 무슨 심정이었을까? 심지어 그녀는 다 포기했는데…….”

그 대가로 배신까지 했다. 칼에게 진정한 사랑 운운하다 위기의 순간 간단히 사랑을 부정했던 모습이 떠오르자 헛구역질까지 났다. 이럴 때는 자신이 그의 핏줄이라는 사실이 원망스럽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