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87화
아무리 가브리엘이 재치 있게 펜대를 굴려도 천으로 만들어진 리본의 값어치와 보석의 값어치를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사교계의 모든 사람이 값비싼 보석으로 드레스를 꾸밀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렇기에 비싼 보석만이 아름다움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일침은 많은 독자들에게 통쾌함을 주었다.
약간의 솜씨와 센스만 있다면 누구든 예쁜 드레스를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건 큰 위로였다.
특히 잡지의 가장 열성적인 구독자인 젊은 아가씨는 많은 드레스를 필요로 했다.
젊은 남성은 매번 똑같은 제복을 입어도 그것이 신분과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이라 남들의 눈총을 받을 일이 없었지만 아가씨는 달랐다.
게다가 올해는 ‘차 모임’을 필두로 여러 모임이 유행했다. 얼마 전까지 왕실은 차 모임에 부정적이었으나 곧 왕비 전하가 주최하는 차 모임이 열릴 거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사교계 시즌만 준비하면 됐던 작년과 달랐다.
새 드레스가 필요하다. 그것도 예전보다 몇 배로.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창 드레스가 필요한 소녀들은 경제권이 없다. 매번 부모를 졸라 대는 것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거기에 ‘작은 새의 소식’지는 훌륭한 대책을 내놓았다. 스커트와 오버드레스, 스토마커를 새롭게 조합하고 리본을 바꿔 달면 충분히 새 드레스를 장만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게다가 리본은 클레이모어 공작가에서 발명한 기계 덕분에 영애들의 용돈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다.
물론 보석이 훨씬 더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보석으로 꾸민 옷 한 벌과 리본으로 꾸민 옷 다섯 벌 중 아가씨들이 무얼 선택하겠는가.
다섯 벌의 새 드레스는 적어도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는 모임에 다섯 번은 참가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거기에 리본을 교체하고 조합을 바꾸면 그 기회는 무한정 늘어난다.
“요즘 젊은 아가씨들은 드레스에 리본을 다는구나.”
“보석이나 자수는 나이 든 사람이나 하는 것이지요.”
어느새 리본은 젊음의 상징이 되었다. 또래의 유행은 나이가 어릴수록 막강한 파급력을 가진다.
한때 가슴을 파격적으로 노출하는 드레스가 유행했을 때 그게 얼마나 사람을 천박하고 싸구려로 보이게 하는 줄 아냐고 아무리 부모들이 설교를 해도 몇몇의 얌전한 아가씨를 제외하고 다들 콧방귀를 끼며 입었다.
하지만 리본 드레스는 드레스 값 때문에 허리가 휠 뻔했던 부모의 입장에서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모두 가브리엘의 계산대로였다. 그리고 이제 다음 단계였다.
[디자이너에게 중요한 덕목은 각각의 사람이 가지는 고유한 개성과 아름다움에 어울리는 옷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세간에는 옷에 몸을 맞추라는 무례한 말을 하는 디자이너가 있다고 들었다. 무례한 디자이너 때문에 자신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사람을 도와줄 계획이다. 만약 마담 베리가 당신을 찾아간다 해도 크게 놀라지 않길 바란다.]
옷에 몸을 맞추라는 말을 크리스토퍼가 공공연히 하고 다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교계의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믿는 부류였다.
엄격하게 드레스를 관리했고 또 그 기준에 고객이 맞출 것을 요구했다. 이미 예쁜 사람에게는 더 예뻐지기 위해, 시간이 앗아 갈 젊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과거의 가브리엘처럼 그의 기준에 미달한 자에게는 옷에 몸을 맞추겠다는 약속을 받아 내야만 드레스를 지어 주곤 했었다.
“사심이 없다고는 말 못해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세상에 내게 해도 해도 너무한 막말을 해댄 거 있죠.”
지나치게 시비를 건 게 아닌가 걱정하는 루비카를 가브리엘이 설득했다. 물론 자신이 조금, 아니 많이 무모한 짓을 저질렀다는 건 안다.
“부인의 정체는 절대 들통나지 않게 할게요.”
“만약 크리스토퍼가 카나에게 해코지라도 하면…….”
“그걸 못하게끔 한 거지요. 이제 마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다들 크리스토퍼가 한 일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루비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 무엇보다 저는 저처럼 고통 받았던 사람을 도와주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크리스토퍼의 아성을 무너뜨릴 필요가 있어요.”
크리스토퍼의 후광을 무너뜨려야 후일 그가 한 일에 대해서 밝힐 때 믿어 줄 사람이 늘어날 것이다.
가브리엘은 자신이 참여한 ‘작은 새의 소식’지에 대단한 애정과 자긍심을 가지고 있지만 외부에서는 잘 봐줘야 ‘잡지’, 나쁘게 말해서는 ‘가십지’였다. 기사를 쓴다고 해서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는다.
크리스토퍼가 불법적인 일을 저질렀다 해도 단순히 의상실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재판이 벌어질 일은 극히 드물었다.
크리스토퍼가 자신이 한 일에 대한 합당한 죗값을 받기 위해서는 이를 믿을 만한 일로 여기게끔 만드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숨쉬기 곤란할 정도로 코르셋을 꽉 조이지 않아도, 몇 시간을 투자해 화장하지 않아도 충분히 예쁠 수 있다는 걸 사람들이 알아야 해요.”
결국 루비카는 가브리엘의 열정에 항복하고 말았다. 대신에 아주 주의 깊게 일을 진행하기로 약속했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가브리엘은 곧 희생양을 선정했다. 이 경우 가련한 희생물이 아니라 멋지게 변신할 기회를 잡았으니 행운아라는 표현이 어울리겠다.
이 먹잇감에 대한 접근은 가브리엘이 맡지 않았다. 가브리엘은 이제 제법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가씨로 통했으나 여전히 떠들썩하고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구석이 있어 몰래 일을 진행하기에는 부적합했다.
“그레이스.”
탕트 백작가의 차 모임에서 타티아나가 말을 걸었을 때 그레이스는 깜짝 놀랐다.
사교계에 손꼽히는 미녀인 타티아나는 먼저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일이 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그녀에게 말을 걸지 못해 안달난 사람이 천지였다. 그녀는 조용히 웃으며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얌전한 미인이었다.
“잠시 같이 정원을 산책할래?”
“으응.”
그레이스는 어리둥절해하며 타티아나를 따라나섰다. 그때 타티아나를 노리던 남작이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가브리엘이 재빨리 막았다.
“아까 말씀하신 책에 나온 구절과 관련되서 저랑 이견이 있는 것 같은데요.”
남작은 잠시 갈등했으나 가브리엘이 짓는 사랑스러운 미소에 홀려 자리에 앉았다.
“어느 부분에서 이견이 있지요?”
그는 자신의 전매특허인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으나 가브리엘은 느끼해 죽는 줄 알았다.
어쨌든 재미없는 남자와의 대화에 열을 올리는 척 하면서 힐끗 정원 쪽을 살펴보았다.
그레이스는 평정을 되찾고 타티아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눈치였다.
‘잘 진행되고 있나 보네.’
타티아나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워낙에 인기가 있는 친구인지라 처음 보는 아가씨와 오래 이야기를 나눠도 다들 흔히 있는 일로 여겼다.
게다가 은근히 설득하는 기술이 장난이 아니었다. 가브리엘도 거기에 홀랑 넘어가 타티아나와 소식지를 만들었으니까.
‘정말 무서운 건 타티아나 같은 타입이야.’
문득 타티아나가 자신과 결혼해 줄 것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는 오빠가 생각났다. 후일 실연당할 일을 상상하니 불쌍하고 눈물이 날 정도였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오빠는 타티아나에 비해서 한참 모자랐다. 또 그녀가 열심히 모은 돈으로 재미나게 놀 때 함께할 친구도 필요했다.
“탕트 영애, 저희의 이견은 오늘 하루 만에 좁아질 것 같지 않군요. 모래 제 저택에서 좀 더 점진적으로 논의를 이어 볼까요?”
남작이 예의 느끼한 미소를 지으며 제의했다. 테이블로 돌아오는 그레이스와 타티아나를 관찰하는 데 정신이 팔린 가브리엘은 하마터면 허락할 뻔했다.
“그런, 끔찍한!”
중요한 구경거리를 놓칠 뻔했다는 사실에 가브리엘은 질색해 소리를 쳤다.
“네?”
방금 전까지 사랑스럽게 미소 짓던 그녀의 변화에 누구보다 놀란 건 남작이었다. 가브리엘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 벌레가 있어서 그랬어요. 제가 벌레를 무척 싫어해서요.”
“감히 영애를 놀라게 하다니 무엄하군요. 그 벌레, 제가 반드시 찾아내서 벌주겠습니다.”
잠시 남작이 테이블 밑을 뒤지는 소동이 일어났다. 가브리엘은 적당히 장단을 맞추며 그레이스를 훔쳐보았다. 타티아나의 제의를 받고 고민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타날 거야.’
가브리엘은 그녀가 누구보다 예뻐지고 싶어 한다고 확신했다. 자신이 이른바 ‘못난이’ 출신이여서 잘 안다.
그레이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칠 정도의 바보는 아니다. 그녀가 어떻게 변할지 상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공작 부인은 또 어떤 마법을 그레이스에게 부릴까?
* * *
이오스는 큰 설득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차’를 공작가에 제공했다. 그는 싱싱한 꽃을 따서 화병에 꽂는 행위를 질색했으나 식물을 먹거나 마시는 일에는 큰 반감이 없었다.
다만 인간이 자신의 권역에 들어서는 행위에는 여전히 거부감을 보이는지라 ‘차’를 채집하고 왕국에 전달하는 중간 과정은 고블린이 맡기로 했다.
-마님의 추천에 따라 자칼 은행에 예금을 맡기길 잘했어요.
-이제는 맡기고 싶어도 아무나 안 받아 준대요.
차 무역이 있는 한 고블린이 맡은 자칼 은행의 안정성도 보장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왕국들도 차가 탐났으나 이를 지키고 있는 존재가 하필이면 포악한 드래곤이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국왕은 이오스가 공작가에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것이 ‘차 무역’과 관련되었다고 비공식적으로 답변했다. 덕분에 주변 나라는 세리토스 왕국이 포악한 드래곤을 상대로 평화 협상을 시도한다고 착각 중이었다.
‘정말 평화 협상 중이면 좋겠다.’
루비카는 열심히 일하고 있는 에드가의 책상 한 귀퉁이에 앉아 땅콩을 까먹고 있는 이오스를 보며 한숨을 쉬고 싶은 걸 참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놀러오는 이오스가 그나마 착실히 인간으로 변신 중인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어이.”
재봉 기계의 설계를 끝낸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음 기계에 대한 구상을 하고 있던 에드가는 설계도에 계속 떨어지는 땅콩 부스러기에 결국 참지 못하고 인상을 썼다.
“꼭 여기서 먹어야 하나? 아래층에 좀 더 편한 소파가 많다. 거기 가. 거기에서는 땅콩 부스러기를 1톤쯤 흘려도 아무도 뭐라 안 할 거다.”
잠시 이오스는 창가에서 뭔가를 만들고 있는 루비카를 보았다. 에드가가 여기 있는 한 그녀가 자신과 함께 아래층에 내려가 줄 것 같지 않았다.
대체 저딴 인간 놈이 뭐라고 그녀가 이리 위해 주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오스는 불만을 한껏 담아 입을 삐죽였다.
“내가 왜? 불만이면 네가 딴 데 가.”
한창 낮이라 에드가는 움직일 수 없다. 다 알면서 빈정거리는 이오스에게 에드가는 깊은 분노를 느꼈다.
“여긴 내 집이다.”
“내 알 바 아니지.”
에드가는 결국 깊은 한숨을 쉬었다.
“미노스는 언제 오나?”
함께 북쪽으로 가 놓고서는 이오스만 달랑 돌려보낸 미노스는 소식이 없다. 본격적으로 차 무역을 시작했을 때도 좀 더 조사해 볼 것이 있다며 대리인을 보냈다.
이오스가 허구한 날 오는 것은 놀아 주는 고블린이 없기 때문이다. 에드가가 미노스와의 재회를 간절히 바라는 건 단순히 저주 때문만은 아니었다.
저 쓸모없는 도마뱀 때문에 뒤늦게 타올라야 할 신혼의 단꿈이 무한정 미뤄지고 있는 실정이다.
“글쎄, 내 알 바 아니지.”
“이오스.”
보다 못한 루비카가 주의를 주자 이오스는 그제야 슬쩍 책상에서 내려왔다.
“미노스는 조사를 좀 더 한 다음에 온다고 했어.”
“그 외에 다른 말을 없었어?”
“없었어.”
하긴 저 바보에게 말을 전해 봤자 오해를 증폭시키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오죽 방해가 되었으면 먼저 내려 보냈을까? 다들 포기하고 하던 일에 집중하려는데 칼이 문을 두드렸다.
“각하, 마님, 미노스 경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