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86화
“저도 잘 모르겠군요.”
몸에 잔뜩 묻은 눈을 털어낸 뒤 미노스는 주머니에서 장부를 꺼냈다. 비록 블랑코에게는 문전박대를 받았지만 아직 남아 있는 고객은 많다. 미노스는 블랑코 다음가는 고객을 찾아갔다.
“클레이모어?”
하지만 이번에도 클레이모어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블랑코와 마찬가지로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니 눈이 펑펑 내리는 문밖이었다.
“저것들이 진짜!”
화가 난 이오스는 떨어지는 눈송이를 주먹으로 퍽퍽 쳤다. 서로의 권속을 해치지 않는다는 드래곤끼리의 불문율만 아니었다면 황소처럼 돌진해 진작에 문짝을 부숴 버렸을 것이다.
“음, 여기서 클레이모어는 이름을 듣기만 해도 분노를 사는 존재 같군요.”
“그 재수 없는 놈은 대체 뭘 하고 다닌 거야!”
“일단 전략을 바꿔야겠습니다.”
다음 고객의 주소가 적힌 장부를 보며 미노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상태로 갔다가는 또다시 문전박대를 당할 확률이 높다. 차가운 눈에 머리부터 꽂힌 경험은 두 번이면 족하다.
“일단 클레이모어를 대체 왜 저리 싫어하는지부터 알아봅시다.”
“그래! 알아낸 다음에 루비카에게 일러바치자.”
이오스는 미노스와 영 다른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는 에드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작 인간 주제에 자신을 건드려도 아무 이상이 없는 게 짜증 났고, 무엇보다 똑똑한 게 기분 나빴다.
이 기회에 에드가의 약점을 찾아내고 싶은 게 그의 본심이었다.
“세상에, 이오스 님. 이런 누추한 곳에 어쩐 일입니까?”
“……나중에 쫓아내지만 말아라.”
“네?”
“됐어, 일단 추우니까 나 좀 들여보내 줘.”
세 번째로 찾아간 권속, 스노우는 영문 모를 소리에 갸웃하면서도 둘을 가장 따뜻한 자리로 안내해 버터를 잔뜩 넣어 끓인 우유를 내왔다.
여기까지는 앞서와 똑같다. 이 뒤 미노스가 클레이모어 공작의 저주를 풀 단서를 찾기 위해 왔다는 말을 꺼내는 순간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이오스는 이번에는 쫓겨나도 그리 쉽게 멱살은 잡히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가드를 단단히 올렸다.
“이오스 님? 왜 그러십니까?”
“아아.”
이오스가 네가 멱살을 잡을까 그런다고 대답하기 전에 미노스가 마시던 우유를 내려놓으며 끼어들었다.
“얼마 전에 크게 싸운 일이 있어서 요즘 반사적으로 이런 행동을 자주 하십니다.”
“아니, 대체 어느 겁대가리를 상실한 놈이 이오스 님과 싸웠단 말입니까?”
“클레이모어 공작과 관련된 일이 있어서 그렇네.”
그 이름이 나오자마자 새하얀 스노우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총천연색으로 변했다. 얼굴에 푹푹 열이 나는 게 녹아 버리는 건 아닐지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다행히 이번에는 쫓겨나지 않았다.
“그 사악한 놈이 기어코 이오스 님까지 건드렸군요.”
“날 건드렸는데 이상 하나 없는 이유가 궁금했는데 사악해서였군!”
미노스는 이오스가 바보라는 사실이 오늘처럼 고마운 적이 없었다. 구멍이 뻥뻥 뚫린 빵 같다 못해 원료인 밀가루로만 이루어진 것 같은 순백의 대답에 스노우는 단단히 착각을 하고 말았다.
“그놈과 싸우느라 고생하신 분을 이렇게 대접할 수는 없지요.”
정신을 차리니 눈앞에는 이베르의 권역에서만 나는 희귀한 과일과 고기, 술이 한 상 가득 차려져 있었다.
이미 잔뜩 취한 스노우가 잠든 이오스를 붙잡고 엉엉 울었다.
“클레이모어, 그놈의 자식들만 아니었어도 우리 이베르 님은 진작에 잠에서 깨셨는데!”
미노스의 귀가 번쩍 뜨였다. 드래곤의 속성이나 버릇은 각각 달라 그 권속이 아니고서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현재 역대 최장 기록을 계속 갱신 중인 이베르의 긴 잠도 바깥에는 원인을 아는 자가 거의 없었다. 여태껏 그저 드래곤이 잠에서 깰 기분이 나지 않아 그런 줄 알았다.
“이베르 님이 눈을 뜨지 않는 이유가 클레이모어 때문인가?”
멀쩡한 정신이었다면 스노우는 절대 제 주인과 관련된 비밀을 다른 이에게 털어놓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술에 취했고, 그들을 원수와 싸우고 온 용사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게 말일세.”
곧이어 알게 된 엄청난 사실에 미노스는 머리가 지끈 아파 왔다.
‘이거 큰일이구만.’
* * *
왕성에 갔다 온 다음 날, 싱숭생숭해진 루비카의 기분을 한 번에 날려 줄 손님이 등장했다. 바로 가브리엘이었다.
제비꽃 무늬에 레이스가 가득 달린 사랑스러운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루비카를 보자마자 환히 웃었다.
“안녕하세요, 공작 부인.”
“가브리엘! 어서 오렴.”
어제 그녀에게 독니를 잔뜩 드러낸 사람을 만났기 때문일까? 동글동글 귀엽고 사심 없는 가브리엘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반가웠다.
루비카가 자리를 권하기도 전에 가브리엘을 쫑알쫑알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수도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어머니를 졸라 상경했어요. 영지는 서로 멀어서 오가기 힘들지만 수도는 마차로 몇십 분이면 올 수 있을 정도로 가깝잖아요. 앞으로 자주 와도 괜찮겠지요?”
“가브리엘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지. 매일 와도 괜찮아.”
엘리제가 차를 가져와 따르기 바쁘게 가브리엘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제 제의는 아직 보류인가요?”
‘작은 새의 소식’에 대한 질문이었다. 여느 때처럼 루비카가 바로 거절하지 않고 차에 설탕을 타는 걸 가브리엘은 놓치지 않았다.
“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해 주세요.”
“사실은…….”
루비카는 왕성에서 돌아오는 길에 마주쳤던 샬롯 공주와의 일에 대해서 말했다. 사교계의 소식을 주로 전하는 소식지를 만드는 가브리엘이라면 무슨 일인지 그녀에게 소상히 알려 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공주님은 크게 신경 쓰지 마세요. 그냥…… 주변에 자길 찬양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못 사는 타입이랄까. 그런 점은 왕비 전하랑 똑같아요. 그 사람들이 부인에게 적의를 가졌다고 해서 본인까지 그럴 타입은 아니에요. 정확히는 뼛속까지 제멋대로여서 주변 의견에 휘둘리지 않아요.”
공주의 태평스러운 얼굴을 떠올리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 외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알려 주었는데 딱히 대단한 부류는 아니었다.
애초에 공주를 앞세워 그녀를 망신주려 하는 태도는 별 볼 일 없는 자들이나 가지는 것이다. 다만 딱 하나 지나칠 수 없는 것이 ‘리본’을 싸구려 취급한 일이다.
“크리스토퍼가 거기 있었던 건 공주님의 드레스 때문일 거예요. 어쨌든 수도 최고의 디자이너잖아요. 그리고 ‘리본’을 싸구려라고 표현한 건 크리스토퍼의 영향 때문일 거예요.”
이미 가브리엘은 타티아나의 도움을 받아 크리스토퍼의 의상실에 자신의 취재원을 침투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크리스토퍼가 어디에서 누굴 만나고 어떤 말을 하고 다니는지 속속들이 알았다.
“설마 그자가 리본을 싸구려라고 말하고 다니는 거니?”
“네. 만나는 손님마다. 그리고 카나 의상실이 잘되는 걸 시기한 다른 디자이너들도 크리스토퍼의 의견에 동조하고 있대요. 리본을 찾는 사람이 늘수록 자신들의 손님이 줄잖아요.”
“큰일이네.”
그런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 아무도 리본 드레스를 입지 않을 것이다. 옷이라는 것은 단지 실용성을 위해 입는 게 아니었다. 특히 귀부인이 입는 드레스는 수많은 이데올로기가 얽히고 얽힌 복잡한 것이다. 그저 예쁘다는 이유만으로는 선택받지 못한다. 세사르의 장미만 봐도 그렇다. 단순히 예쁨만을 따져서는 장미만큼이나 예쁜 꽃도 많다. 하지만 그렇게 막대한 부를 불러온 것은 그 꽃이 가지는 상징성과 희소성 때문이다. 루비카는 그걸 알기에 차 모임을 기획했고 성공시켰다.
“싸구려 옷이라고 낙인찍히면 아무도 입지 않으려 들 거야.”
하지만 다양한 고객을 만나 소문을 퍼트릴 수 있는 크리스토퍼나 다른 디자이너와 달리 루비카는 수도에서 아직 큰 인맥을 만들지 못했다.
이럴 때 준남작가 출신이라는 건 큰 걸림돌이 되었다. 샬롯 공주처럼 태생부터 고귀했다면 그런 소문이 돌든 말든 입는 순간 그 옷은 귀한 것이 되지만 루비카의 경우는 역시 준남작가 출신이라 어쩔 수 없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거기에 크리스토퍼가 좀 이상한 소리도 흘리고 다니나 봐요.”
“이상한 소리?”
“마담 베리에 대한 거요.”
자신의 비밀스런 가명이 나오자 루비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담 베리는 왜?”
“리본처럼 중요한 디자인은 다 마담 베리의 아이디어였잖아요. 마담 카나가 순진한 사람을 꼬셔서 아이디어만 야금야금 먹고 제대로 돈도 주지 않고 속이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말하고 다니나 봐요.”
“그런! 카나는 절대 속이지 않아. 오히려 너무 정확하게 챙겨 줘서 곤란할 정도라고!”
“네?”
뒤늦게 루비카는 자신의 정체를 홧김에 밝힐 뻔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수습했다.
“아니, 카나는 내 영지의 디자이너잖니. 리본과 관련되서 나도 투자를 했잖아. 그 배당금도 꼬박꼬박 챙길 정도로 돈 문제에 깔끔한 디자이너다보니…… 내가 조금 흥분했어.”
“……네.”
가브리엘이 께름칙한 얼굴로 쿠키를 잘라 먹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루비카는 다 식은 차를 마시며 잠시 흥분을 가라앉혔다.
‘아무리 말도 안 되는 소문이라도 그냥 내버려 두면 믿는 사람이 늘어나.’
그녀 자신도 그러지 않았나. 에드가와 관련된 말도 안 되는 소문.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철석같이 믿었다.
“가브리엘.”
드디어 공작 부인이 자신이 내민 미끼를 물었다. 가브리엘은 쿠키를 자르는 걸 멈추고 차분히 대답했다.
“네.”
“소문을 잠재우려면 무슨 방법이 좋을까?”
“소문에는 소문이 최고지요.”
“하지만 나는 그 방면에는 어두워.”
기다렸다는 듯 가브리엘은 만면 가득 웃음을 띠었다.
“뭐가 걱정이세요? 여기 그 방면에 전문가가 있잖아요.”
말하고 난 다음 ‘천재’라고 칭할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며칠이 되지 않아 수도에 많은 소녀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작은 새의 소식’ 특별편이 발간되었다.
매번 나올 때마다 놀라운 소식과 색다른 유행을 소개하는 잡지는 언제나 판매고가 높았는데 이번은 특히 기록적이었다.
다들 이름만 들었지 얼굴은 본 적 없는 한 디자이너를 섭외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바로 마담 베리였다.
“세상에, 마담 베리를 대체 어떻게 만난 거지?”
“무슨 이야기를 했대?”
놀랍게도 잡지에는 단순한 인터뷰만 실려 있지 않았다. 마담 베리는 낡은 스토마커를 리본으로 꾸며 새롭게 탄생시키는 방법에 대해서 자세히 안내했다.
그림까지 곁들여 있어서 바느질을 조금만 해도 누구든지 따라할 수 있을 정도였다.
[값비싼 보석으로 치장했다고 해서 그 드레스가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디자이너 중에는 비싼 보석을 달았다고 자신의 옷이 최고인 줄 아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디자이너가 아니라 보석상에 불과하다.]
그녀는 크리스토퍼에게 제대로 선전포고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