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85화
이럴 땐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가브리엘이었다면 함께 웃어 버렸겠지.
백작가의 영애라면 나쁘지 않는 전략이었으나 루비카는 공작 부인이었다. 그녀는 미소를 잃지 않는 대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그녀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오히려 상대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제일 두렵고 까다로운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다.
“내가 실수했네요.”
“워낙 공작 부인에 대한 소문이 무성하다 보니 기대감이 커서 그러신 것 같네요. 부인께서 너그러이 이해해 주세요.”
괜찮다는 대답을 하기도 전에 낮에 마주쳤던 부인이 나서며 눈웃음을 쳤다. 이래서는 괜찮다고 말해도 이쪽은 옹졸한 사람이 된다. 예상대로 공주는 자신이 무안하지 않게 나서 준 부인에게 고마운 표정을 지었다.
‘……내게 크게 악의는 없는 것 같은데.’
아직 나이가 어려서 주변의 부추김에 쉽게 휩쓸리는 걸까? 공주의 마음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악의를 가진 사람이 이 무리에 있는 이상 길게 대화를 나눠 봐야 좋을 게 없다.
“저도 잠시 당황했을 뿐입니다. 그럼…….”
“그런데 소문의 리본 드레스는 어째서 입고 오지 않으신 건가요?”
안타깝게도 작별 인사는 공주의 질문에 가로막혔다. 아무래도 그녀를 쉽게 보내줄 눈치는 아니었다. 저택에서 기다리고 있을 에드가를 생각하면 애가 탔지만, 하필 붙잡은 사람이 공주라 어쩔 수 없다.
‘이걸 노리고 공주를 앞세운 거겠지.’
분명 낮에 마주쳤던 사람들이 그녀가 나올 시간에 맞춰 산책이나 놀이 등 갖은 핑계를 대며 공주를 꼬드겨 여기서 마주치게 만든 것 같았다.
공주의 반응이나 순수한 표정을 보았을 때 사심은 없어 보였다. 다만 한창 사랑받고 클 때라 루비카가 지금 그녀 때문에 얼마나 당혹스러운지를 짐작도 하지 못하리라.
“리본 드레스는 마담 카나가 차 모임용으로 소개한 드레스일 뿐인걸요.”
“그런가요?”
샬롯 공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에게 왕성은 나고 자란 편안한 곳으로 그녀가 언제 어떤 옷을 입든 제약이 없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이곳으로 올 때 격식을 갖춰야 한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아도 받아들이기 힘겨웠다.
“부인이 차 모임을 소개하셨다지요? 여기서도 인기가 많아요. 저도 한번 참석하고 싶은데 아바마마께서 허락지 않으시네요.”
“찻값이 올라도 너무 올라서 그렇지요.”
“공주님까지 참석하시면 차 모임의 유행을 막을 길이 없지 않습니까? 국왕 전하께서는 백성을 생각하시는 마음에 그러신 겁니다.”
공주의 투정에 다들 안됐다고 달래며 국왕 전하가 얼마나 대단하고 너그러운지 추켜올렸다. 아첨꾼의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목격하자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적극적인 입발림 덕에 공주가 기분이 좋아졌는지 싱긋 웃었다.
“그래요. 나도 아바마마처럼 백성을 생각해야지요.”
공주는 자신도 모르게 찻값을 올리는 원인으로 지목되는 차 모임을 시작한 루비카를 비난하는 이들의 목소리에 동조하게 됐다. 그게 공작 부인과 대립각을 세우는 일이라는 것까지는 미처 깨닫지 못하는 눈치였다.
‘왕가의 자식도 참 힘들겠어.’
눈치가 조금만 부족해도 금방 아첨꾼의 먹이가 되고 만다. 이런 사람들 틈에서 자식이 자라는 광경을 지켜봐야 하는 기분은 어떨까?
“걱정하지 마세요, 공주님. 곧 찻값은 안정될 거고 공주님은 차 모임을 열 기회를 가지실 거예요.”
어쨌든 은근슬쩍 공작가를 비난하는데 가만히 입 다물고 있을 수 없었다.
“찻값이 안정될 거라고요?”
“네. 국왕 전하와 좋은 방법을 찾아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화색이 된 공주와 달리 주변 귀족의 표정이 불시에 어두워졌다.
부인을 꽁꽁 감추고 보여주지 않는 클레이모어 공작 때문에 국왕이 뿔이 단단히 났다는 건 수도 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루비카가 왕비를 만나러 간 기회를 살려 국왕이 그녀를 만나게 된 건 놀랍지 않았다.
그들 중에는 국왕에게 찻값과 관련되어 차 모임을 자제하라는 등의 경고를 듣고 시무룩해진 그녀를 보기를 은근슬쩍 바란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녀는 국왕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문제를 의논하고 해결점을 찾았단다. 이는 그들의 머리에 경종을 울리고도 남았다.
“곧 궁정에 클레이모어 스타일로 입은 사람이 넘쳐 나겠군요.”
공주의 바로 오른쪽에 있던 귀부인이 입을 부채로 가리고 아주 뾰족하게 말했다.
“보석 대신 싸구려 천으로 만든 장식을 달면 되니 검소하고 소박한 것을 사랑하는 왕국의 정신에 딱 맞는군요.”
갑작스러운 비난에 루비카는 머리가 멍해졌다.
‘싸구려라고?’
물론 싼 천으로 만들 수 있지만 드레스용을 사용된 건 모두 고급 천이다. 붙이고 떼기 힘든 자수나 보석으로 꾸며 사실상 일회용인 스토마커와 달리 그녀가 카나와 머리를 맞대고 개발한 리본은 얼마든지 다양하게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사람들에게 그런 설명이 통하기나 할까? 그들은 그저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아 트집을 잡는 것뿐이다.
“리본 드레스를 입으라고 강요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네. 다른 사람이 입은 게 보기 싫으면 궁정 출입을 자제하고 저택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으면 되네.”
직설적인 반격에 상대는 당황했다.
“그러면 되겠네.”
거기에 공주가 느긋이 맞장구를 쳤다. 공주가 완전히 그들의 편은 아닌 눈치였다.
“왕국의 정신에는 맞지만 그리된다면 저는 무척 슬플 것 같습니다. 여성을 아름답게 빛나게 해 주는 드레스는 돈을 따지지 않고 화려하게 만들어야 하다는 게 제 신념이거든요.”
공주의 바로 옆에 있는 남자 하나가 소리 높여 말했다. 귀족은 아닌 듯 금은장식으로 꾸미진 않았지만 무척 세련된 검은 재킷을 입고, 우아한 긴 은발 머리를 가진 자였다.
“저런, 크리스토퍼.”
위로하는 여인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루비카는 정신을 번쩍 차렸다. 저자가 왜 여기에 있는 걸까? 리본에 대한 비난은 저자의 입에서 시작된 걸까?
눈이 마주치자 크리스토퍼가 고개를 숙였다. 군더더기 없는 우아한 동작이었다.
“크리스토퍼라고 합니다. 언젠가 부인의 드레스를 만들고 싶군요.”
“나는 카나가 있으니 됐네.”
차가운 대꾸에도 크리스토퍼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수많은 고위 귀족을 단골로 보유한 그에게 이 정도의 거절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루비카 또한 지금은 도도하게 굴어도 결국은 자신의 옷을 구하기 위해 안달날 거라 믿었다. 사교계에서 소외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약간의 허영심, 그리고 자존심만 건드리면 된다.
“아, 그렇지요. 저는 클레이모어 영지 출신이 아니라 자격이 없군요. 소문대로 현숙하시군요.”
“공작 각하가 이렇게 영지를 챙기는 현명한 여성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면 제게 관심을 보일 때 교태나 부리지 말고, 각하의 가문을 걱정하는 티나 낼 걸 그랬어요.”
넌지시 자신도 에드가와 잘될 기회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한 부인의 말에 샬롯 공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드가는 당신한테 관심을 보인 적이 없는데?”
말을 꺼낸 여인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공주님, 무도회에서 함께 춤을 춘 적도 있어요.”
“그건 아바마마가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한 거지.”
태평스러운 공주의 말에 솔직히 루비카는 좀 통쾌했다. 공주는 생김새는 국왕과 닮았으나 성격을 전혀 딴판으로 보였다.
“흠, 어쨌든 저도 지금 남편을 만나 자유롭게 사니 잘됐네요. 공작 부인은 참 힘든 자리 같아요. 전 남편이 영지 내에서 옷을 주문하라고 하고, 가슴에 보석 대신 천으로 만든 장식을 달라고 하면 속상해서 울었을 거예요.”
에드가가 들었으면 억울해서 땅을 쳤을 소리였다. 루비카는 너무 많고 귀찮아서 되는 대로 창고에 처박아 뒀던 그가 선물한 보석과 물건을 떠올렸다.
‘옥부채를 들고 왔어야 했나.’
하지만 이런 사람들을 상대로 경쟁해 봤자 멍청한 짓에 기름을 붓는 격밖에 되지 않는다. 대충 걱정해 줘서 고맙다는 소리나 하고 자리를 뜨려 할 때였다.
“루비카.”
음산한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에드가가 지척에 있었다.
날선 대화에 집중하느라 기척을 느끼지 못한 건 상대편도 마찬가지였는지 깜짝 놀랐다.
평소에도 공작은 얼음으로 조각한 듯 냉기를 풀풀 풍겼으나 지금에 비하면 그건 따뜻한 봄볕의 기운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였다.
에드가는 루비카의 곁에 와 그들 하나하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 서슬에 샬롯 공주마저 겁먹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공작은 어머니나 아버지보다 더 무섭고 어려운 사람이었다. 자신이 뭘 했는지 몰라도 단단히 실수했다고 생각했을 때 루비카가 부드럽게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공작을 편히 대하는 그녀의 태도에 다들 놀랐다.
“에드가, 기다리지 그랬어.”
방금 대화를 그가 들었을지 그녀는 못내 신경 쓰였다.
“해가 졌는데도 소식이 없어서 도마뱀 같은 놈이 당신을 귀찮게 하나 했더니…….”
휙, 그가 공주의 바로 눈앞에서 하루살이를 잡았다.
“날파리가 있었군.”
그리고 씩 웃는데 살기등등하다. 가만있었다간 큰일이 날 기세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직 어린 공주 앞에서 사고를 치고 싶진 않았던 루비카는 그의 팔을 잡았다.
“그만 돌아가자. 공주님, 죄송하지만 먼저 가겠습니다.”
“응? 응.”
엉겁결에 공주가 대답했다. 그녀는 계속 그들을 노려보는 에드가의 팔을 붙잡고 황급히 왕성을 나와야만 했다.
“감히 날 뭘로 보고…….”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그가 이를 갈았다. 아무래도 마지막으로 그녀를 깔보기 위해 한 말을 똑똑히 들은 것 같았다. 저러다 상대편의 저택에 쳐들어가는 건 아닐지 걱정스러웠다.
일단 화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녀는 화제를 전환했다.
“미노스에게 연락 없었어?”
“아, 만났어.”
“그래?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왔구나. 아직 있지?”
루비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사실상 저주를 풀 유일한 단서인 반지에 대한 정보를 쥐고 있는 미노스다. 그에게 이것저것 물어볼 것이 많았다. 하지만 에드가는 고개를 저었다.
“뭐라고? 갔어?”
아까 괜히 공주에게 붙잡혀 시간을 낭비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그냥 무시하고 갈걸 ‘크리스토퍼’라는 이름을 듣자 자신도 모르게 발끈했다.
“이베르의 권속을 만나 보겠다고 북쪽으로 떠났어.”
“북쪽으로?”
“반지를 보여주고 한번 이야기를 해 보겠대.”
사실 이오스도 함께 갔었지만 어쩐지 그 드래곤 이야기를 루비카 앞에서 하고 싶지 않다. 그녀가 이오스에 대한 칭찬을 조금이라도 하면 위가 뒤집어질 듯 아팠다.
“나나 당신이 가면 인간이라고 만나 주지 않을 테니 본인이 가는 게 나을 거라고 했어.”
“……그래.”
현재 할 수 있는 최선은 미노스의 소식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한 줄기 희망이 내려온 것 같아 그녀는 안심했다.
* * *
이베르의 권역 입구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미노스는 루비카와 마찬가지로 제법 희망에 차 있었다. 이베르의 권속 중 대장격인 블랑코는 그의 오랜 고객 중 하나였다.
미노스가 문을 두드리자 블랑코는 무척 반가워하며 따뜻한 차까지 내주었다. 이오스를 보고는 어느새 이만큼 자라신 거냐고 퍽 감동스러워하기까지 했다.
“클레이모어?”
딱 그 이름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공작가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블랑코는 험악한 표정을 짓더니 항아리의 물로 귀를 씻었다.
“내 앞에서 클레이모어의 ‘클’자도 꺼내지 마!”
그리고 둘을 가차 없이 집 밖으로 쫓아냈다. 바깥에는 차가운 눈이 허벅지까지 쌓여 있었다. 이오스는 머리부터 떨어져 눈에 폭 박힌 미노스의 발을 붙잡아 올리며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일이지?”
언제나 이베르의 권역에 오면 따뜻한 환대만 받았는데 이런 취급은 처음이다. 얼떨떨해서 화도 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