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184화 (184/212)

# 184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84화

지나친 참견일까? 공작 부인답게 공작가의 살림에만 신경 쓰라는 답이 돌아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왕국의 경제에 큰 영향을 끼친 차 모임도 처음은 그저 예쁜 드레스를 입고 싶어 시작한 소소한 모임이었다.

에드가는 클레이모어 공작 이전에 그녀의 남편이었다.

“무기를 개발하지 말라니……. 이 나라가 망하길 바라는 가? 공작 부인답지 않는 발언이군.”

“이 나라가 망하지 않길 바라서 하는 소리예요.”

다행히 국왕은 아예 참견하지 말라는 꽉 막힌 소리는 하지 않았다. 대화의 물꼬를 틀고 일단 이야기를 시도하는 유연한 태도는 국왕이 오랫동안 나라를 다스릴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였다.

“에드가를 납치하고 스텔라를 빼돌린 나라 덕에 4년 뒤 큰 전쟁이 나요. 드래곤까지 얽힌 전쟁은 정말이지 길고 지루해 대륙의 절반 이상이 파괴당했고 세리토스 왕국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었지요.”

“그대의 도움 덕에 어쨌든 스테판은 잡지 않았는가.”

“이번에 스테판은 실패했지만 스텔라를 원하는 사람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황금 평원을 얻을 때까지만 참아 주게. 그럼 스텔라를 폐기할거네.”

“과연…… 그러실 수 있을까요?”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를 수 있을 정도의 강한 무기다. 과연 한번 이 힘을 손에 넣은 사람이 포기할 수 있을까?

그 사람이 선하냐 악하냐는 중요하지 않다. 사람은 선한 의도로 얼마든지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 스테판조차 힘없고 가난한 조국을 지키기 위해 스텔라를 훔치려 했다.

“평원을 손에 넣으면 저 멀리 동쪽까지 무역을 할 수 있는 육로가 탐이 나실 거예요. 그다음에는 남쪽의 풍요로운 과일이 탐이 나시겠죠. 또 아직 잠든 드래곤 때문에 개발하지 못한 산맥의 마석도 생각나실 거고요. 그리고 그건 모두 이 나라를 위한 거지요.”

그녀의 지적은 정당했다. 국왕은 여전히 옅은 미소를 잃지 않았지만 대답하지 못했다. 이 주제로는 그녀를 이길 수 없다. 그는 잠시 차로 목을 축인 다음 이야기의 관점을 바꾸기로 했다.

“에드가의 저주가 점점 진행되고 있지. 알고 있나?”

“네. 집사에게 들었습니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저주를 풀 방법을 아는가?”

“……아니오.”

잠시 국왕의 낯에 실망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반쯤 짐작하고 있었으나 실제로 들으니 더욱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누구보다 실망스러운 건 지금 눈앞에서 자신을 설득하고 있는 여인이겠지. 그는 곧 표정을 숨기고 웃는 낯으로 돌아갔다.

“이 나라 산업의 대부분을 클레이모어가 책임지고 있네. 그가 쓰러지면 이 왕국이 쓰러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야.”

“그래서 더욱더 무기를 만드는 데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세사르 경이 개발한 장미는 어지간한 무기보다 더 큰 수익을 내고 있다고 들었어요.”

“엄청난 수익을 내긴 했지. 하지만 그건 투기와 얽혀서 그런 거네. 시간이 지나면 거품이 가라앉고 이만큼 팔리지 않을 걸세. 그것보다 안정적으로 식량을 공급할 수 있는 황금 평원을 손에 넣는 게 더 안전하지.”

“이오스는…….”

스텔라가 필요 없을 정도로 멍청하다는 사실을 말하려다 멈추었다. 그래서 정말 이오스를 포획하기 위해 국왕이 군대라도 파견하면 곤란해진다. 어쨌든 자신을 누나라고 부르며 따르는 드래곤이 아닌가. 루비카는 최대한 공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

“사납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는 아니에요. 보세요. 이렇게 ‘차’를 제게 선물해 주었는걸요. 전쟁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안전한 방법이 있는데 왜 어려운 길로만 갈려고 하시나요.”

상자 안에 가득 쌓인 차를 보며 국왕은 눈을 가늘게 떴다. 상자 안 물건의 정체와 그것이 드래곤 이오스에게 받은 것이란 설명을 들었을 때 확실히 놀랐다.

그는 이오스의 권역에 들어섰다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 대한 보고를 매년 받았다. 공생이 불가능하리라 알고 있었던 천년의 ‘적’이 사실 말이 통하는 상대라는 현실을 곧바로 받아들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2년, 딱 2년을 주겠네.”

하지만 루비카의 말은 충분히 설득력 있었다. 전쟁은 피할수록 좋다. 그는 편견에 사로잡혀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거기에 ‘차’로 인해 벌어들인 수익이 구미를 당겼다.

“2년 내에 다른 사업으로도 이 나라가 충분히 굴러갈 수 있음을 증명하게.”

일이 잘못될 경우 많은 사람이 굶어 죽게 된다. 국왕은 그 이상 기다려 줄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루비카 또한 시간을 끌며 많은 사람을 희생시키고 싶지 않았다.

“단, 실패하면 그대가 이오스를 죽이게.”

담담한 말투였으나 그 비정한 뜻에 루비카는 하마터면 찻잔을 놓칠 뻔했다. 국왕은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왜 놀라는가? 다른 산업으로 먹고살 수 없어, 마석은 고갈돼, 유일한 희망인 공작은 앞날을 알 수 없어, 남은 돌파구는 황금 평원인데, 여기 드래곤이 기꺼이 구할 정도로 가까운 사람이 있는데 이 안전한 방법을 두고 스텔라 개발과 전쟁이란 긴 수를 둘 이유가 없지 않는가.”

역시 국왕은 녹록치 않는 사람이었다. 에드가가 그를 가리켜 ‘너구리 같은 영감’이라고 툴툴거린 게 기억났다. 웃는 낯으로 상대를 요리조리 주무르는 솜씨가 그와는 딱 상극이었다.

한 나라를 다스리려면 이 정도의 비정함과 관용을 갖춰야 하는 걸까? 루비카는 오히려 자신에게 바로 이오스를 암살하라고 명령하지 않고 기회를 준 사실에 감사했다.

‘그 바보가 내 말을 잘 들어주면 좋을 텐데…….’

제일 빠르고 좋은 방법은 이오스가 황금 평원을 쓸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성격을 보았을 때 설득은 쉽지 않아 보였다. 전쟁이 나지 않게 서로 공생하자고 말하면 이오스는 감히 인간 따위가 자신을 이겨 먹으려 드느냐고 화가 나서 날뛸 타입이다.

“……네. 반드시 2년 이내에 무기 개발이 아니라 다른 걸로도 나라가 부강해질 수 있다는 걸 증명하겠어요.”

하지만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국왕은 현재로서 황금평원을 손에 넣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음은 분명히 했다.

에드가가 계속 무기 개발을 한다면 제2, 제3의 스테판이 나오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그녀는 과거가 반복되는 일만은 막고 싶었다.

“하지만 현재 개발 중인 건 마무리 짓게. 계약이 얽혀 있어 갑자기 중단하면 곤란하거든.”

“네, 기회를 주신 것만으로 감사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고.”

국왕이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한 말을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루비카는 새삼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느꼈다. 평생 가까이에서 왕을 볼 일이 없는 하급 귀족의 삶을 살았을 때도 그녀는 왕을 존경했다.

“그런데 말이게.”

이야기가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국왕이 새로운 화제를 꺼낼 눈치였다. 입맛을 다시는 모습이 대나무 숲에서 막 죽순을 캐는 데 성공한 너구리가 연상됐다.

“아까부터 계속 궁금했던 건데…….”

“하문하세요.”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 에드가는 어떻게 만났나?”

“네?”

“이번에는 그놈이 힌트 덕에 먼저 그대를 찾아갔다지만 원래는 어땠지? 그 차가운 놈이 언제 어떻게 사랑에 빠진 건지 무척 궁금해. 대신 살 기회를 준 걸 봤을 때 보통 좋아한 게 아닌 것 같은데 둘이 결혼했었나? 청혼은 어떻게 했나? 고백은 누가 먼저 했지?”

여태 본 국왕의 모습 중 가장 열정적이었다. 쏟아지는 질문에 루비카는 어리둥절해 대답하기 곤란할 지경이었다.

“내가 무도회 때마다 어지간히 난다 긴다 하는 영애들을 다 붙여 봤지만 미동은커녕 불쾌한 표정만 짓는 게 아주 그냥 그 요지부동 때문에 화가 날 정도였거든.”

그제야 그에게 왜 바람둥이라는 소문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는지 짐작이 갔다. 국왕이 나서서 밀어주고 자리를 마련해 주니 많은 사람들이 숙덕거릴 수밖에 없다.

“어서 대답해 보게.”

“그, 음.”

서로에게 고백도 제대로 못했다고 말하면 국왕이 실망할 게 뻔했다. 새빨개진 얼굴로 루비카는 대답을 망설였다.

“또 순진한 사람을 데리고 장난을 치려고 하나 보군요.”

그때 미간을 찌푸리며 나타난 왕비는 루비카에게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국왕이 만나고 싶었던 손님과의 즐거운 시간을 방해하는 바람에 하릴 없이 정원을 산책해야 했던 왕비는 나가기 전보다 더욱 기분이 나빴다.

거기에 소중한 손님이 한참 곤란해하고 있는 데다 국왕의 표정은 그의 평소 못된 버릇이 나올 때랑 똑같다.

“이번엔 또 뭔가요? 매번 공작에게 새로운 여자와 춤을 춰 보라고 권유하더니, 부인에게 남편이 질투하는 걸 구경하고 싶으니 젊고 잘생긴 남자랑 춤을 춰 보라고 권유할 참이었나요? 아서요. 이 왕국에 에드가보다 젊은 남자는 있어도 잘생긴 남자는 없어요. 부인 입장에서는 해산물이랑 춤을 추라는 말을 들은 기분일 거라고요.”

신랄한 왕비의 말에 루비카는 눈을 휘둥그레 떴고 국왕은 목을 움츠렸다.

“아, 그러고 보니 국무 장관과의 회의가 있었다는 걸 깜빡 잊었네.”

결국 국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줄행랑을 쳤다. 왕비는 방금까지 언제 화가 났냐는 듯 활짝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피곤할 텐데 저런 방해꾼 때문에 미안하게 됐네. 이제 사라졌으니 우리끼리 오붓하게 이야기를 나눠 봅세.”

그리 말하는 그녀의 미간은 주름하나 없이 곱게 퍼져 있었다.

* * *

결국 해가 질 때쯤이 되어서야 루비카는 왕비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의 선물이 무척 마음에 든 듯 만찬까지 들고 가라는 권유를 한사코 거절했다.

붉게 물든 하늘을 보니 저택에서 기다리고 있을 에드가가 생각나 괜히 코끝이 시큰해졌다. 아마 그가 있었다면 국왕은 그녀에게 ‘깨갱’ 소리는커녕 접근도 못했으리라.

‘하지만 기회를 얻었으니 결과적으로 잘됐어.’

왕비는 직접 배웅을 하고 싶어 했지만 만찬을 비롯한 이후의 일정이 있어서 처음 안내를 맡았던 시녀가 대신하기로 했다.

“공주님이시군요.”

한시 바삐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어 종종 걸음을 하는 와중 시녀가 나직이 말했다. 복도 너머의 무리 중에는 낮에 본 부인이 몇몇 섞여 있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지만 공주가 있다는데 지나칠 수 없는 노릇이다. 루비카는 걸음을 멈추고 먼저 고개를 숙였다.

“어머, 못 보던 분이신데?”

“클레이모어 공작 부인입니다, 샬롯 공주님.”

아직 채 성인이 되지 않은, 늦둥이로 태어나 사랑받는 금지옥엽 막내 공주의 이름이다. 루비카는 최대한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어머나.”

사람들 가운데 국왕과 꼭 닮은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루비카를 보고 놀란 듯 두 눈을 깜빡였다.

“정말 클레이모어 공작 부인?”

루비카의 예감이 적중했다. 공주를 둘러싼 사람 중 귀부인은 부채로 입을 가렸고 남자는 헛기침을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