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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183화 (183/212)

# 183

공작 부인의 비밀 의상실 183화

루비카는 앤이 미리 골라 준 궁정에서 입기 적당한 드레스를 입고 머리 장식도 최소화했다.

마음 같아서는 정성들여 만든 장식으로 꾸민 가장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싶었으나 어쩔 수 없다.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왕비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궁성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차분한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이 그녀를 맞이했다.

내관이 아닌 왕비의 측근 시녀였다. 보통 초대 손님과는 다른 대우에 루비카는 절로 긴장했다.

“왕성에는 처음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급하지 않으니 천천히 궁궐을 안내하며 오라고 전하께서 분부하셨습니다.”

친절한 미소에 어깨에 잔뜩 들어간 힘이 조금 풀렸다. 기분파라는 말을 들었지만 왕비는 제법 친절하고 배려심이 깊은 것 같았다.

시녀는 왕비 궁에 가는 동안 궁궐 구석구석을 설명했다. 루비카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둘러보고 싶은 걸 참고 또 참았다.

“공작 부인께서 선물하신 장미로 꾸민 정원이랍니다.”

“정원이 정말 아름답네.”

작지만 알찬 정원은 선물한 보람이 느껴질 정도였다. 걸음을 멈추고 구경하는데 한 무리의 귀부인이 다가왔다.

미리 왕족 이외에는 누구와 마주쳐도 먼저 자리를 비키지 말라는 언질을 받았기에 제자리에 버티고 있자 그들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가만히 있기도 뭐해 고개를 숙여 답하자 그게 신호인지 시녀가 귀부인들을 루비카에게 소개했다.

“클레이모어 공작 부인이십니다.”

“가슴에 그런 리본 장식을 하는 건 클레이모어 쪽 사람들뿐이라 ‘혹시?’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공작 부인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상냥한 말투였으나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오늘 루비카는 리본 드레스를 입지 않았다. 그건 어디까지나 차 모임용으로 소개된 드레스다.

오늘은 통상적으로 입는 궁정 출입용 드레스를 입었다. 보석과 자수로 꾸며진 스토마커의 마무리 부분에 아주 작은 리본을 썼을 뿐이다.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셔서…… 다음에 이야기를 나누지요.”

미묘한 기운에 더 이야기를 나눠 봤자 좋을 일이 없겠단 판단이 들어 말을 끊었다. 다행히 상대편도 수긍했는지 옅은 미소를 띠며 뒤로 물러났다.

‘내게 반감이 있어.’

그럴 만했다. 지금까지 좋은 사람만 만난 게 천운이었다. 세상을 살며 어찌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만 만나겠는가.

하지만 어째서 그런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고자 리본을 트집잡았는지는 신경 쓰였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하는 사이 왕비궁에 도착했다.

“전하께 부인께서 도착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세요.”

넓은 창 너머로 정원이 바로 보이는 우아한 방에 앉아 잠깐 기다리니 곧 고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서너 명의 시녀와 함께 나타난 왕비는 기분파라는 소문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제법 온화한 인상이었다.

다만 다이아몬드 머리 장식으로 휘황찬란하게 꾸민 회색 머리는 그녀에게 넌지시 왕비가 내세우길 좋아한다는 걸 알려 주었다.

“전하, 처음 뵙습니다.”

“어머나, 몸도 안 좋은데 일어날 필요 없어요. 앉아요.”

다행히 왕비의 미간은 활짝 펴진 상태였다. 루비카는 그녀가 권하는 대로 일단 자리에 앉았다.

“오는 길에 전하의 배려로 궁을 구경할 수 있었어요. 정원이 무척 예뻐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답니다.”

“호호호, 다 그대가 선물해 준 장미 덕이지.”

기분이 좋은 듯 왕비가 소리 높여 웃었다. 자연스레 말을 낮추는 게 아무래도 왕비의 스타일 같았다.

“많이 걷기 힘들 테니 내궁보다 여기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을 것 같네.”

“감사합니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작은 테이블에 다과상이 준비됐다. 이미 루비카의 취향에 대한 파악이 끝난 듯 커피 대신 차가 준비되었다. 시녀가 찻주전자에 뜨거운 물을 따랐을 때였다.

“마침 일이 끝나 왔는데, 이거 손님이 있었군.”

갑작스레 들린 노인의 목소리에 시녀를 비롯한 왕비까지 일어섰다. 루비카 또한 눈치를 보며 그들을 따라 일어섰다.

‘국왕…… 전하?’

보자마자 알겠다. 땅딸하고 통통한 몸에 눈 밑이 시커먼 게 딱 너구리였다. 어쩌면 에드가가 국왕을 너구리 영감이라고 표현한 건 단지 성격뿐만 아니라 외모까지 가리킨 건지도 모른다.

“이쪽은?”

“클레이모어 공작 부인이랍니다.”

“오, 드디어 얼굴을 보는군. 나도 에드가에게 얼굴 한번 보여 달라고 그렇게 부탁을 했건만 뭐가 그리 아까운지 꽁꽁 숨기고 보여 주지 않더니, 이런 우연이 다 있군.”

우연이란 말을 강조하며 웃는데 절대 이 만남은 우연이 아니다. 국왕이 이런 식으로 나타나면 무조건 도망치라던 에드가의 말이 생각났다.

하지만 도망칠 상황이 아니다. 루비카는 애매하게 웃으며 국왕이 빨리 자리를 뜨길 바랐다.

“마침 일이 끝나셨다니 함께 이야기나 나눠요.”

“그거 좋지.”

왕비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국왕이 자리에 앉았다. 어느 틈에 주변에 있던 시녀들이 사라졌다. 루비카는 뒤늦게 자신이 국왕 부부의 덫에 걸렸다는 걸 눈치챘다. 대체 무슨 말을 꺼내려는 걸까. 손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

“저런, 긴장했군.”

“이런 자리가 처음이니 긴장할 수밖에요.”

잘 우려진 차를 찻잔에 따르며 왕비가 대꾸했다. 잔에 따른 음료를 확인한 국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커피가 아니군. 에드가는 좋아하지만 나는 이 차가 싫어.”

“하지만 클레이모어 공작 부인이 퍼뜨린 방식대로 설탕과 우유를 타면 제법 맛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건 그랬지.”

속을 알 수 없는 대화에 루비카는 좌불안석이 되었다. 일단 에드가가 알려 준 대로 최대한 말을 아끼고 이 대화의 방향이 어디로 가는지 흐름을 보기로 했다.

“요즘 차 모임이 유행을 타 이곳 수도에서까지 열리고 있다네.”

“무도회처럼 거창하지 않게 차와 쿠키만 준비할 수 있으면 누구라도 열 수 있으니까요. 친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맛있는 걸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즐거운 게 세상에 또 없지요.”

“거창하지 않게 차와 쿠키만이라니, 요즘 찻값을 생각하면…… 마리, 그런 말을 하면 사람들이 화를 낼걸세.”

왕비의 미간이 정확하게 에드가가 묘사한 대로 찡그려졌다. 하지만 국왕은 능청스럽게 그녀가 만든 밀크티를 한 모금 들며 점점 솜씨가 좋아진다고 칭찬했다.

“웬일로 일이 일찍 끝났나 했더니 그렇군요. 노림수가 있었군요.”

아무래도 루비카가 걸린 덫은 국왕 부부가 함께 만든 것이 아니라 국왕 혼자 친 것 같았다.

“하하하.”

“왜 부인들끼리 친목을 도모하려 만든 자리를 호시탐탐 정치판으로 만들려는 줄 모르겠어요. 이러니 내가 초대를 하면 다들 한사코 거절하지.”

왕비의 투정에 국왕이 윙크를 했다. 눈 근육의 움직임에 따라 만들어진 주름 하나하나가 그저 허투루 생긴 게 아니라는 예감이 들었다.

“부인 옆에 있는 파수꾼이 워낙 무서워서 말이야.”

엄살을 부리는 국왕의 말에 왕비는 콧방귀를 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인, 내 대신 저 귀찮은 영감을 좀 맡아 줘요.”

“네?”

“난 정원 산책이나 해야겠어요.”

그리고 총총 방에서 나가 버렸다. 정말 소문대로 기분파인 건지 아님 툭 까놓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라고 자리를 피해 준 건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어쨌든 부인. 아니, 루비카라고 불러도 되나?”

덕분에 에드가의 조언대로 가만히 입 다물고 있기 어려워졌다. 루비카는 당혹스러운 마음을 숨기고 “네.”라고 대답했다. 너구리를 닮은 외모를 가진 국왕은 어지간한 여우보다 꼬리가 많아 보였다.

“그쪽 때문에 내가 요즘 곤란하네. 그런 건 한번 유행을 타기 시작하면 손쓸 도리가 없거든. 물론 금지령을 내리는 방법이 있지만 그게 하필 내가 무척 아끼는 놈의 부인이 유행시킨 거라.”

“……순전히 찻값 때문에 그러신 건가요?”

국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으로 안도했다. 만약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자체가 싫다면 국왕을 어떻게 설득시키기가 어려웠으리라.

‘꽉 막힌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루비카는 원래 왕비에게 선물하려고 준비한 상자 중 하나를 꺼냈다. 대화 중 기회가 생기면 선물하려 했으나 국왕 부부의 대화에 아예 끼어들 틈이 없었다.

“이걸 봐 주십시오.”

“이건……?”

“차입니다.”

상자 안에 가득 든 물건은 익숙하면서 생경했다. 흔히 봤던 검은 찻잎과 달리 푸릇한 녹차에 국왕은 당황했다. 루비카는 원래 이런 잎이 긴 이동 끝에 변한다고 설명했다.

“그럼 이건 어디에서 났지?”

“이오스에게 받았습니다. 설명을 들으니 차는 드래곤의 권역에서만 자라는 식물 같았습니다.”

국왕의 눈이 번뜩였다. 눈 주위 피부가 까매 더욱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루비카는 그가 본격적으로 이오스의 황금 평원을 탐낸다는 걸 느꼈다.

군침이 흐를 만했다. 스텔라를 개발하면서까지 얻고자 했던 곳이 아닌가. 잔뼈 굵고 노련한 정치인을 상대로 어디까지 설득할 수 있을지 두려웠다.

“이오스를 잘 설득해서 차를 제공받으면 국내 찻값이 안정될 뿐만 아니라 주변국과의 무역에서 막대한 이득을 볼 수 있을 거예요.”

“황금 드래곤과는 대체 어쩌다 만난 거지?”

국왕이 팔짱을 끼고 질문했다.

“장미 때문에 저를 찾아왔습니다.”

“장미?”

요즘 어지간한 신무기보다 더한 수익을 올리고 있는 꽃을 생각하며 국왕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여전히 방어적인 태세를 고수했다.

“그래, 장미를 대가로 차를 받기로 했나?”

“장미는 그냥 주기로 했어요. 대신 신뢰를 얻었지요.”

포악한 드래곤을 상대로 ‘신뢰’라는 말을 내뱉는 그녀가 믿기지 않았다. 국왕은 의심스러운 마음에 질문했다.

“그대는…… 정체가 뭔가? 설마 에드가의 어머니처럼 님프인가?”

“아니요. 평범한 인간이에요.”

“그럼 대체 왜 사라진 반지 대신에 그대의 이름이 나타난 거지?”

“에드가가 설명하지 않았나요?”

국왕이 고개를 저었다. 루비카의 이름이 튀어나왔을 때 반 장난삼아 사랑 타령을 했다.

처음에는 무표정했던 에드가가 어느 순간부터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 뒤 형식적인 보고는 제때 올려도 제 아내인 루비카의 이름만 나오면 입을 꾹 닫아 버렸다.

스테판이 스파이일지도 모른다는 보고에 스텔라에 대한 연구도 중단시켰지만 쭉 의문이 들었다. 이 여인은 대체 누구일까? 분명 보통 사람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저는 지금으로부터 40년 정도 흐른 다음에 죽어요. 그때 에드가가 반지를 이용해 저를 과거, 그러니까 지금으로 보냈어요.”

“아하!”

국왕이 표정 관리하는 것도 잊은 채 주름을 잔뜩 펴고 웃었다. 역시 그의 추측이 맞았다. 세상에서 제일 냉철하고 차가운 척했던 꼬마가 불같은 사랑을 한 것이다.

“그러니 전하, 부탁이 있어요.”

“뭔가?”

“스텔라 개발을 포기하세요. 아니, 더 이상 에드가에게 무기를 생산하라고 명령하지 말아 주세요.”

이번에는 국왕의 얼굴에 주름이 잔뜩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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